▣성령강림주일

[스크랩] 성령강림절 설교자료2탄 |

공 상희 2009. 5. 6. 14:22
출처 카페 > 빛교회 최정남목사 / 미라클
원본 http://cafe.naver.com/jj007789/4354

오직 성령으로 사는 자/슥4:6,요16:13-14
2001-11-21 22:03:38   read : 288

존 번연이 지은 유명한 '천로 역정'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걸 성경 다음으로 가는 책이라고까지 극찬하기도 합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서도 이 책을 한 번쯤은 읽으신 분들이 꽤 계신 줄 압니다. 거기에 보면 그리스도인이 하늘나라를 향해서 멀리 순례 의 길을 떠납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 보았더니 방에서 누가 청소를 합니다. 그저 비로 먼지 를 열심히 쓸어내기는 하는데 먼지가 일어나서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뽀얗게 됩니다. 쓸 려고 하면 더욱 더 방이 어지러워지고 더러워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인도자에게 묻습 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저것이 율법이니라. 바르게 해보려고 애쓰고 또 애쓰고 노력 하면 할수록 더 죄가 많아지고 점점 더 어지러워지느니라." 그래서 바로 옆방을 들어가 보 니까 거기에도 먼지는 똑같이 많은데 '쫘악' 물을 뿌리고 나서 청소를 하니까 깨끗하게 됩 니다. "이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이 성령이니라. 이게 곧 은혜의 역사니라." 젞가 목회를 시작하기 전, 모 대 기업체의 의무실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생 산 라인을 구경했는데 아주 최신식 기계를 잘 장치해놨습디다. 그런데 점심시간이라 공장은 조용합니다. 담당 과장이 "한번 보시렵니까?" 하면서 전기 스위치를 딱 넣자 기계가 '우르릉 '하고 돌아갑니다. 그런데 전기가 들어가기 전에는 완전히 철근덩어리이던 것이 전기라고 하는 생명력이 들어가는 순간 살아있는 기계로 작동하는 걸 봤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 힘으 로 그 큰 기계가 돌아갑니다. 여러분, 사람이라는 인격, 지식이나, 물질이나, 재주나,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 생명력이 없으면 그건 다 하나의 물질에 불과합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하나의 물질 말입니 다. 그러나 여기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작용할 때 진정한 삶이 피어오르는 것입니다. 그래 서 인격을 변화시키고, 내적인 존재를 변화시키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사람이 되고 용기 의 사람이 됩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붙들고 당신의 세계로 인도 하시는 것을 보고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생명'! 그것을 제공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오늘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성령이십니다. 성령! 그분은 누구십니까? 그분은 자신이 뜻하는 대로 움직이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특별한 틀 안에 하나님을 모셔두기를 좋아합니다. 그러 - 1 - 나 성경에서 성령을 나타내는 대부분의 상징물은 유체(流體)로 나타난다는 사실에 유의하십 시오. 유체란 기체와 액체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서, 예를 들어 바람, 불, 기름, 물 등입니다. 그런데 그 물질들을 여러분들이 손으로 한 번 잡아보십시오. 그러면 그것들은 '나를 당신의 손 안에 가두어 둘 수 없을 것'이라고 정중히 거절할 것입니다. 곧 성령은 도덕적으로 그릇 된 일은 결코 행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외의 영역에서는 예외적이고, 임의적인 방법으 로 행하실 권리를 가지십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같이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로 표현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매일 치러지는 전투와도 같습니다. 이 전투에 지속적으로 효력을 미치 고 있는 법이 둘 있습니다. 그것을 로마서 8장에서는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 '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두 법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륙하는 비행기를 생각해 봅시다. 승객들 이 다 탑승하고 안전벨트를 매면 항공기는 활주로의 끝까지 서서히 굴러갑니다. 그때까지는 지구 인력이 항공기를 아래로 끌어당겨 붙잡고 있습니다. 이윽고 이륙할 수 있을 정도의 속 도에 이르면 항공기는 떠오르게 됩니다. 지구 인력의 법은 더 이상 그 항공기를 지배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기체 역학의 법', 곧 상위법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지구 인력의 법을 극복하고, 항공기가 더 상위법의 지배를 받게 된 요인은 곧 전진운동입니다. 항 공기가 활주로를 이탈하지 않고 그 길에서 앞을 향한 전력 질주 말입니다. 여기에 '생명의 성령의 법'에 지배받아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들이 성령의 법에 따라 부상하지 못하고 아직도 이 땅의 힘에 끌려서 앞을 향해 전력 질주하지 못하는 그 원인되는 인력이 무엇입니까? 첫째, 죄악의 인력입니다. 지극히 작은 죄가 우리의 영혼에 엄청난 타격을 주는 예를 많이 봅니다. 경건한 삶을 살려는 사람들은 작은 허물이나 죄라도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사도 바 울은 죄악의 세력이 사람의 인격 안팎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죄악이 자 신을 사로잡아 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나태함이 음란죄로 음란죄가 살인으로 이르게 하는 죄의 수렁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다윗의 기도를 들어보면 그때의 고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죄는 모든 불행의 뿌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파괴했고 자신의 평화도 파괴했습니다. 죄 는 이웃에게 적대감정을 만들어 놓았고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파괴하는 등 모든 부분에서 불행의 근원이 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참된 행복과 평화는 죄를 없애는데 있습니다. 그러 나 뛰어난 인간의 지혜는 죄의 실체는 모르면서 그 - 2 -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했고, 가난과 무지가 죄의 온상이라 생각하여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 고 교육으로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면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질문명과 도덕적 타락은 정비례하고 있습니다. 죄책감에 서 벗어나는 것으로만은 안됩니다. 죄의 결과를 용서받는다고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죄 자체를 해결하는 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 죄를 짊어지고 골고다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죄를 근본적으로 없이하신 분입니 다. 그리고 성령께 이 모든 사역을 부탁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이 은총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셔서 우리로 그 모든 죄에 서 해방을 받으며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스가랴는 이런 사실을 오랜 전에 미리 예언했던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 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둘째, 좌절감의 인력입니다. 사람에게는 그 죄로 말미암아 좌절감과 허무주의가 생기게 되었 고 그로 인해 질병과 죽음의 고통이 왔습니다. 그래서 출생은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질병의 고통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해왔지만 그럼 에도 영적인, 육적인 질병과 죽음의 고통은 계속 사람을 괴롭히고 있으며 그 근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인간의 불행인 질병을 짊어지게 하시고 죽음을 정복 하셔서 부활의 주가 되셨습니다. 질병과 죽음을 사람은 어찌할 수 없었으나 예수께서 질병 의 실체와 죽음의 베일을 벗겨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질병에서의 치유와 죽음에 서 영생을 얻게 되는 축복을 성령께서 우리의 믿음을 따라 우리에게 가져다주셔서 그 모든 좌절감에서 자유를 얻게 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은 헛되고 또 헛되다는 말을 공감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영원하지 않고 또 좌절 스럽고 헛되기에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이 세상은 나를 부르는 확실한 일터입니다. 내 가 찾아가야 할 곳과 할 일이 너무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허무주의에 빠져 좌절하지 않습니다. 나로 허무감에서 벗어나게 하 신 성령께서 나로 이 땅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이루게도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래서 스가랴는 선포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 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 3 - 셋째, 세속 사랑의 인력입니다. 이 세상은 우는 사자같이 우리의 영혼을 사냥하려는 무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스스로의 진정한 모습을 잃어버리게 하고 방탕하게 하는 유혹의 손길이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을 부채질하 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세속적인 사랑에 쉽게 물들어 갑니다. 육체를 향한 순간의 감미로운 유혹이 자신의 영혼에 얼마나 큰 타격을 주는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속 사랑은 스스로 취하기도 하고 스스로 버릴 수도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 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세속 사랑이란 쉽게 취할 수는 있어도 쉽게 버릴 수는 없다는 것과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의지력이 도대체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과연 사람의 힘과 능으로 지켜나갈 수 없는 것이 의지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시며 그 결심한 바를 지켜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다짐은 항상 실패와 좌 절로 마쳐질 때가 태반입니다. 호세아는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라 고 강력하게 권고를 했습니다. 백성들은 그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난처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 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호 6:4)." 예 레미아는 패역한 백성을 향하여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고 했습니다. 언제나 선 보다는 악에 익숙한 우리 또한 그럴 것입니다. 베드로의 다짐이 무너졌듯이 우리의 결심도 매번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성령을 받은 베드로와 제자들의 변한 모습을 보면, 우리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로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과 감정은 우리의 의지력을 받쳐주지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의지력으로 우리를 능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스가랴는 이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만군 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 으로 되느니라." 넷째, 그릇된 신앙사상의 인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고는 하는데 그의 신앙사상이 빗나간 자들을 많이 봅니다. 독선적인 신앙사상, 신비주의나 이성주의로의 몰입, 거짓 선지 자들의 거짓 예언들 등, 많은 것들이 우리를 그릇된 신앙의 함정에 빠지도록 우리를 우겨 싸서 그의 인력으로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도 추스르기 어려운데 무슨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의 힘과 능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하나 님께 감사드릴 일은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깨끗케 하심으로 영생의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주신 일입니다. 그러나 사명이 귀하고 아름 다운 것일지라도 그것을 우리 힘만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 약속하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심으로만 감당해 갈 수가 있다고 오늘 스가랴는 선언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 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여러분,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구해야 할 이유는 분명해졌습니다. 우리는 죄의 문제 나 허무와 좌절의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 갈 수 없으며 우리의 힘이나 의지력으로 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건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임재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내재와 충만을 구해야 합니 다. 하나님은 그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교회에 대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건 미국 펜사콜라의 브론스빌 교회 같이 성령의 폭발 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별로 큰 교회도 아니었습니다. 그 조그마한 교회 를 통해 하나님은 성령의 큰 역사를 일으키시고 250여 만명이나 은혜를 입게 하셨습니다. 브론스빌 교회가 그렇게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게 된 이유가 여섯 가지랍니다. ■ 브론스빌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현재 우리 교회를 포함한 많은 교회들은 프로그 램과 조직 그리고 행정에 의해서 움직이는 교회이지, 기도를 충분히 하는 교회는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막 11:17)"고 말씀하셨습니다. 브론스빌 교 회의 모든 예배는 기도로 개혁되었습니다. ■ 브론스빌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이유는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갈급함이 있었기 때문입니 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영적으로 심한 갈급함이 우리들에게 다가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 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영적 목마름과 갈급함을 보셨습니다. ■ 브론스빌 교회는 주님을 섬기는데 댓가를 지불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부흥의 전초 기지로 삼으신 이유는 주님을 섬기는 데 댓가를 지불하겠다는 - 5 - 뜨거운 열정이 성도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흥이라는 것은 아주 값비싼 댓가를 지불해 야 얻게 되는 상급입니다. 부흥을 위해서 지불해야 할 댓가는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삶과 생애 전체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 브론스빌 교회는 목회자들이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 교회의 목회자들은 하나 님의 놀라운 능력이 그들의 길을 인도해 줄 것을 믿고 철저히 신뢰합니다. 브론스빌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난 다음부터 성경에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 사람 가운데 임재하실 때 인간의 이성과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인간적 인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고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우리는 일부러 이 러한 현상들이 나타나기를 추구하거나, 권장하거나, 조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추구하고 기대하는 것은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의 심령이 변화되기 위해서라면 수용하겠다는 것입니다. ■ 브론스빌 교회는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선택해 서 계속적인 부흥의 현장으로 만드신 이유는 우리가 다 알다시피 예배현장에서 일어나는 모 든 결과에 대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 브론스빌 교회는 죄에 대해 대적코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이 시대는 죄가 무 엇이냐는 개념 자체에 대한 이해력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죄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 고 깊이 생각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죄지은 사람을 보고 죄짓는 것이 아니라 '개성'이라고 생각하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위험을 부인해버리거나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지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원래 뜨거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많이 영적으로 침체되었습니다. 문제는 다 제게 있습니다. 저부터 각성하고 부르짖으며 성령을 구 하면 됩니다. 제가 시작할 것이니 우리 모두 그렇게 합시다. 다시 뜨겁게 기도합시다. 하나 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고백하며 갈구하십시다.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무엇이든 댓 가를 치룰 결단을 하십시다. 오직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든지, 무엇을 요구하시든지 철저히 신뢰하십시다. 그리고 그 모든 영광은 그분께만 돌리시기로 고백하십시다. 죄에 대하여는 세 밀하게 대적하고 누가 나의 잘못을 지적하면 감사하며 받아들이십시다. 그러면 어찌 브론스 빌 교회만이겠습니까? 우리도 돌이키고 부르짖으면 주실 것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사는 자 로서 살기로 결단하고 진실한 무릎으로 주님께 구하면 그분은 우리를 다시 용납하시고 성령 으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하실 것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행2:37-42
2001-11-21 22:07:14   read : 217

본문 말씀을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모두가 마음이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근심하 며 베드로에게 묻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 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기쁨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기독교 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귀한 은 혜가 성령이라는 나무에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거하지 아니하면 진정한 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나무에 생명이 없으면 흉칙한 모양 만 남은 고사목이 되는 것처럼, 성도에게도 성령이 거하지 아니하면 교회에 나와 찬송을 부 르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모양은 있어도 그 성도는 생명이 없는 죽은 성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인 성령이 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며 끝까지 그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성령을 거역하고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눅12장에서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 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고 거역하는 사람은 그 죄의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 "고 하셨습니다. 입으로 예수님을 거스리는 것은 용서가 되는데 성령의 감동을 거역하면 그 사람은 교인이 못되고 그 죄도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면 다시 돌 이킬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분이 성령님이고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을 거역하면 소망이 없기 됩 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기까지 했지만 성령이 오심으로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훌륭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용서를 받지 못 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교인은 성령이 오심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시 므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성령이 오심으로써 맺어지게 되어 있고 성령이 함께 하심으 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하며 축복하며 길러 주시는 것입니다. 생명은 끊임없는 삶의 연속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와의 영적인 관계가 계속 맺어질 때 살아있는 성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신 능력을 체험하는 길은 성령이 오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께서도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고 하셨으며 예수님께서도 "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알 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가르쳐서 잘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선물로 받아야 바르고 참되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정성을 쏟아가며 참으로 잘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결 국 제자들은 다 주님을 떠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을 충만히 받지 못했으니 하나님을 따라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고 난 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성령은 나무의 생명과 같습니다. 우리 안에 주의 성령이 오셔서 성령의 움직임에 따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 는 원래의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은 지혜의 영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로는 따라갈 수도 없고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아 지혜와 지식의 인도함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사는 성도는 불행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성 령이 우리에게 충만히 임하시면 자연히 좋은 길로 걸어가게 되고 성공의 길, 행복의 길, 구 원의 길, 승리의 길로 나를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진리요. 생명이 되는 유일한 길은 무엇입니까? 주 예수를 믿는 일입니다. 성령 은 예수님을 잘 믿도록 인도하시고 시험에 들면 시험에서 속히 회복하도록 만들어 주십니 다. 예수님이 귀하다는 것은 세상의 지식으로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세상에서 내 가 잘난 것처럼 큰소리 치며 살지만 성령의 감동대로 살지 아니 하는 사람은 헛되고 어리석 고 사망의 길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은 주의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충만히 임해야 변화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내 안에 기쁨이 있어야 하고 내 안에 부활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은 선물을 주실 때 아파트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심령의 집을 내 영혼의 아름다움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의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 마 음의 의복을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잘못되는 것은 안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안이 잘못되었으므로 밖의 것을 아무리 고치고 바꿔도 되지 않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 안에 오셔야 합니다. 성도들의 마음이 평안한 것은 성령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거룩하신 성령님께서 어떻 게 우리 심령에 오시겠습니까? 먼저 거룩한 주의 보혈로 씻은 다음에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 실 때 우리는 믿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심령을 아름답게 하시고 기쁨을 주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하나 님 앞에서 우리 민족이 위대한 민족이 되는 길은 정신적으로 우리 마음을 아름답게 하고 건 강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의 성령이 오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믿음의 마음 으로 사랑이 넘치는 마음으로 만들어 주실 때 이 나라는 복되고 행복하고 소망이 넘치는 나 라가 될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마음에 주의 성령이 더욱 충만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롬8:26-28
2001-11-21 22:09:14   read : 289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롬8:26-28

역사를 3부분, ①구약시대 ②신약시대 ③교회시대로 분류합니다. 구약시대는 성부의 시대, 신약시대는 성자의 시대, 교회시대는 성령의 시대입니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잃은 슬픔과 고통에 실망과 절망으로 가득 찬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도하다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이후,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들로 살았습니다. 만약 성령께서 오셔서 성도들에게 힘을 주시지 않았다면 초대교회는 물론 오늘날 우리교회 도 없습니다. 성령의 강림은 바로 교회의 탄생을 말합니다.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성령의 능력에 의해 유지되어 왔고 부흥성장 되어 왔습니다. 성령은 성부이신 하나님, 성자이신 예수님과 함께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영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지금도 역사하고 주님 오실 때까지 쉬지 않고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어떤 일을 하십니까?

성령은 인간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요3:6)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 하십니다. 타락한 아담의 원죄를 받아 출생한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서 난 것만 가지고는 천 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죄인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 거듭나지 않아도 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힘으로도 지식으로 명예 로도 거듭날 수가 없지만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 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성령 은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우리 속에 숨어 있는 죄를 찾아내시고 죄를 죄로 느끼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회개케 하십니다. 전에는 우리가 죄에 종노릇을 하며 살았습니다. 예수 믿 고 성령 받으면 자유와 참 만족과 참 쉼을 얻습니다. 아무도 죄인이라고 정죄할 사람이 없 습니다. 하나님께서 정죄하지 않으시는데 누가 정죄하겠습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죄에 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6:13)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바르게 잘 살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여 주십니다. 성령을 의지하십시오. 꼭 붙드십 시오. 그 분께 부탁하십시오.

은혜를 사모하게 하십니다

(시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 이다" 성령은 내 영혼으로 주님을 사모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기를 목마른 사슴이 시 냇가를 찾듯이 사모합니다. 성령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사모하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84:10) "주의 궁정 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 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 있는 것 이 바로 즐거움이요, 행복임을 노래합니다. 성령께서 주의 집을 찾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성령 은 마음에 평안을 주십니다. 육적인 평안은 물질만 있으면 평안할 것 같습니다. 그것도 어느 정도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평안이 없으면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평안 이 있는 사람은 모든 역경과 고난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사람은 성령의 도 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1.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

사람은 건강할 때 보면 무엇이나 다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그러나 발가락 하나만 아 파도 꼼짝을 하기가 어렵고 감기만 좀 심해도 모든 스케줄을 취소해야 할 정도로 연약합니 다. 죄를 이겨야 하지만 죄의 유혹에 넘어갈 때가 더욱 많고 세상 따라 갈 때가 더 많습니 다. 몰라서 못할 때도 많고 알면서도 행치 못할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성령은 그의 택한 백성들의 이런 연약함을 도와주셔서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가게 하십니다.

2. 미래의 일을 모르기 때문

한 시간 뒤에 내가 어떻게 될까요? 내일은 어떻게 될까요? 물론 계획은 되어 있지만 계획 대로 됩니까? 지난주간도 수 없는 사건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누가 예측이나 했습니까? 그 분은 창세전부터 영원까지 과거 현재 미래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 러나 우리는 불과 몇 초 뒤도 모릅니다. 오직 우리는 이런 존재이니 성령의 도움이 절대적 으로 필요합니다.

3. 무엇이 행복이며 축복인지를 모릅니다

(잠16:25)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라" 사람들은 행복을 위하여 여러 가지를 추구하비낟. 그 중에 행복을 위해 돈을 벌려고 합니다. 돈이 반드시 언제나 인 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많은 사람이 돈으로 인하여 행복을 잃고 불행해지는 경우도 봅니다. 다른 어떤 요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능력은 다릅니다. 우리가 힘들고 불행할 때 돕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도 성령 께서 여러분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위탁하십시 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오신 성령을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도와주시 려고 선한 생각과 소원을 주시고 권면해 주실 때 성령께서 도와주시는 줄 알고 거절치 말고 순종하십시오. 성령을 소멸치 마십시오.(살전5:19) 성령은 거룩한 영이니 우리도 죄를 멀리 하고 거룩한 삶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을 가지고 살므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시기를 바 랍니다. 그래서 비록 약한 존재이지만 강한 자로! 미련한 존재이지만 지혜 있는 자로! 무식 한 자이지만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유식한 자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의 은혜/행2:37-41
2001-11-21 22:10:41   read : 138

처음으로 미국이나 캐나다로 여행을 해본 사람들은 도시가 너무 아름답고 깨 끗하고 주변 경치와 주택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아서 절로 감탄이 나오게 됩니다. 모든 길은 아스팔트와 잔디로 포장되어 있어 먼지가 없으며, 곳곳마다 아름다운 꽃들로 잘 가꾸어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흰 와이셔츠가 금방 더러워지지만, 그곳에서는 며칠을 입어도 와이셔츠가 더러워 지지 않습니다. 더러웠던 구두도 다니다 보면 잔디에 쓸려 새 구두처럼 닦여 있 습니다. 그러다보니 그곳 환경에 홀딱 반한 여행자들 중에 돈이 많은 사람들은 투자이민을 결행하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그동안 여러 분이 이민을 갔습 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거기에 가서 다 잘사는 것은 아닙니다.

잘사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생을 많이 합니다. 물질문명이 발 달하면 생활환경이 좋아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전보다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살게 되니 참 좋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생활환경이 좋 아진다고 해서 인간의 정신문명까지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하게 한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잘 살게 되면 될수록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고 육체 적인 향락을 추구하게 되며, 결국에 가서는 타락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대신 사신우상을 섬기게 되고 믿음에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신앙생활 은 한마디로 거룩한 생활입니다. 거룩은 헬라 원어로 구별되었다는 것을 말합니 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 믿음으로 산다는 그 자체가 거 룩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것 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수 있습니까? 믿음 생활이란 그 자체가 세상과 구별된 생 활입니다. 그런데 생활환경이 너무 좋아지다 보면 믿음에서 점점 벗어나게 됩니 다. 솔로몬의 경우를 보면, 세상적으로 너무 잘 살다보니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었 고 계속적으로 육체의 향락을 추구하며 사신우상을 섬기며 살다 보니 본인도 허 무한 삶을 살았고 후손들에게도 불행을 물려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21세기를 맞이한 지금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물질문명이 발달되어 모든 것이 편리해지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편리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얼마 나 살기 좋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1-5절에서, 말세에는 인간들 이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고,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예언했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왜 인간들이 이처럼 쾌락을 좋아하고 쾌락을 추구하며 살면 점점 더 행복해져야 하는데 그 반대로 말세는 고통 속에 사는 세상이 된다고 예언했을 까요? 그 이유는 말세에는 죄악이 관영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악한 것입니다. 좋 은 것이 아닙니다. 나쁜 것입니다. 해가 되는 것입니다. 죄 속에는 독이 들어 있 습니다. 겉에는 꿀을 바른 것 같은데 속에는 독약이 들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내 가 어떤 사람에게 죄를 범하면 그 사람에게 악을 행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 은 나 때문에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죄악이 관영하면 사람들 사이에 분노가 가득해지고 이 세상은 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죄 속에는 무서운 병균이 들어 있어서 모든 것을 병들게 합니다. 육신 만 병드는게 아니라 마음도 인격도 가정도 사회도 병들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죄 속에는 마취약이 들어 있어서 죄에 취하게 되면 제 정신이 아닙니다. 양심이 없어집니다. 또 죄 속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들어있어서 죄를 범할 때마다 많은 사람을 찌르고 상처를 줍니다. 서로 서로 상처를 주고받기 때문에 고통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죄는 사람을 원수로 만듭니다. 부부지간에 부자지간에도 원수가 됩니다. 그래서 죄가 관영하면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부인 이 제게 상담을 요청해왔습니다. 상담에 앞서 긴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내용을 보면, 결혼하여 며칠 동안은 잘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부정한 과거를

솔직하게 고백하는 남편의 모습에 감동이 되어, 아내도 자신의 과거를 진실되 게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이 이들 부부의 사이를 갈라놓는 화근이 되었습니다. 남 편은 날마다 술을 먹고 그 문제로 아내를 괴롭히며 술주정을 하고 구타를 심하게 했습니다. 이런 생활이 20년이나 계속되었고 지금은 별거 중에 있다고 합니다. 과 거의 죄가 이런 고통을 가져온 것입니다. 죄가 인간을 얼마나 불행하게 만드는 줄 압니까? 말세에는 죄악이 극도로 관영하게 되는데 특별히 음란한 세상이 됩니 다.

TV, 비디오, 컴퓨터, 인터넷을 통해 얼마나 음란물이 홍수처럼 범람하는지, 중 고등학교 학생들 중 70%의 학생들이 그런 음란한 것들을 보았다는 통계가 나왔 습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 가정에서도 부부가 함께 음란한 비디오를 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는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보고 있는 동안 음란의 영으로 두 사람이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음란의 영이 얼마나 강한 영인 지 아십니까? 경건하게 살았던 다윗을 무너뜨린 영입니다. 음란의 영으로 충만해 보세요. 남편만 밖에서 그 짓을 할까요? 천만해요. 음란한 영으로 충만한 아내도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그 가정은 파괴되고 결국 망하게 되어 있 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가 왜 멸망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악으 로 관영한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두 천사가 타 락상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두 천사가 롯의 집에 들어갔 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며, 그 낫선 두 남자를 내어놓으라며 소란을 피웁니다. 우리가 그 둘과 밤새도록 상관하겠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남자를 상관 하겠다는 것입니다. 한두 사람이 그 짓을 해도 문제인데, 사회 전체가 함께 그 짓 을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관영했습니다. 그래서 이 음란한 도시를 하나님께서 유황불로 멸망시킨 것입니다. 사사기 19장을 보면, 어 떤 레위 사람이 첩을 얻었는데, 그 첩이 행음을 하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 첩을 찾으려고 장인 집에 갔다가 마침 그 곳에 있던 첩을 발견하고 같이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라는 사람의 집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런 데 베냐민 지파 사람들도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곳에 들어온 손님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할 수없이 그들에게 첩을 내주었 는데 밤새도록 시달린 첩이 끝내 죽고 말았습니다. 그 레위 사람은 너무 분하여 이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하기 위해 시체를 12토막으로 잘라 12지파에게 우송했습 니다. 그 소포를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역사에 이런 일이 어떻게 있 을 수 있느냐?" 모두가 분개하여 총회를 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이런 못된 짓을 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로 인해 지파간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열한 지파가 베냐민 한 지파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입니다. 결국 베냐민 지파가 전멸 당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열두 지파중 한 지파가 없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살육에 참여했던 사람들 이 정신을 차리고 그 일을 중단했습니다. 그리하여 베냐민 지파의 600명의 남자 만 달랑 남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0;8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민수기 25장에 나오는 사건을 예로 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자와 간음하다가 하루 동 안에 2만3천명이 죽지 않았느냐 너희들은 저희들과 같이 간음하지 말라고 권고하 고 있습니다. 지금은 간음을 죄로 여기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서로 눈만 맞 으면 호텔로 가서 즐기면 되는 것입니다. 법적으로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상관된 사람이 고발하여 재판하지 않으면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자유합니다. 이 렇게 장사가 잘되다 보니 동네마다 러브호텔이 성업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 사 회가 소돔 고모라와 같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회개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여 그 짓을 하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 하시니까 이해해주시겠지."하고 뻔뻔스럽게 그 죄를 범하지만, 사실 이들은 그리 스도인의 생명인 거룩과 성결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이 거룩과 성결을 잃어버린다면 안 믿는 사람과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더군다나 나쁜 짓을 계속 하면서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 사람입니 다. 고린도전서 10:9절을 보면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 멸 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누구나 죄 가운데 살면 그 결과는 뻔합니다. 성경을 보 든지 인류역사를 보든지 알아볼 필요도 없고 기다려 볼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까 지는 잘 넘어갔을지 모르지만 오늘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른지 누가 압니까. 모를 일입니다.

성경은 죄에 대한 결과를 수없이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노 아시대에 인류가 전멸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밤낮 생각하는 것이나 계획하 는 것이 악하여 그대로 두면 죄만 더 짓게 되고 소망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서 홍수로 쓸어버리신 것입니다. 신명기 9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다음에 너희들이 의로워서 정직해서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으로 생 가하지 마라 가나안 민족이 죄가 관영하여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쓸어버리신 것이지 너희가 의로워서 그 땅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타락하면 가나안 족속과 같이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말세에 는 과거 어느 때보다 죄악이 더욱 관영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세 이후로 없었던 큰 환난을 준비해놓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24:21-22절을 보면 [이는 그때 부터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 으리라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 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세월이 좋게좋게 갈 것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큰 환난이 기다 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절대로 오래두고 계시지 않습니다. 너무 큰 환난이기 때문에 내버려두면 모든 전멸 당할 무서운 환난입니다. 단만 택하신 백성들을 위 해 그날들을 감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사람 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큰 환난을 하나님이 예비하셨을까요? 불 신자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예수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고, 신자답지 않은 신자들에게는 정신을 차리고 모든 죄를 회개하고 거룩하게 살 수 있도록 만 들기 위해서 마지막 때 큰 환난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죄 를 멀리 해야 합니다. 피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힘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은 혜가 아니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말세에는 모두 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의 힘도 굉장하지만 어둠의 힘도 굉장합니 다. 그러나 아무리 흑암의 세력이 강하고 어둠의 힘이 커져도 한 줄기의 빛이 나 타나면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빛과 어둠은 게임이 되지 않습 니다. 성령은 빛의 영입니다. 사단은 어둠의 영입니다. 어둠의 영이 인류를 멸망 시키기 위해 음란의 영으로 가득 차게 하고 이 세상을 죄악으로 캄캄하게 만들어 도 여러분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그 순간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빛 앞에 어둠 이 물러가듯이 성령이 임하면 어둠의 영이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 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4:4절을 보면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 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더러워지고 악해져도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받으 면 성령의 권능으로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성령의 은혜를 받 으면 마음에 평강이 넘치고, 기쁨이 충만하게 되며, 예수 믿는 것이 즐거워지고, 무엇보다도 사랑이 넘치게 되어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마음 천국, 교회천국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 는 비결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1장을 보면, 강청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여 생명 걸고 기도해 본적이 있습니까? 성령의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생명 걸고 기도해 본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좋으신 하나 님 앞에 내가 은혜를 받아 믿는 자답게 살겠다는데 왜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겠습니까? 구하면 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회에 나와 은혜로 운 말씀을 듣고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은혜를 받습니다. 베드로 가 나가서 복음을 선포할 때 그 말씀을 듣고 어찌할 줄 모르는 군중들을 향해 너 희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주시리라고 말씀했습 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지 못한 것과 신자답게 살지 못한 것을 회개 하고 부르짖으면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죄를 사해 주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신자가 되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첫째로, 나는 정말 죄가 많은 사람 입니다.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너무나도 음란하고 거짓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나 는 죄인중의 죄수입니다. 하는 고백이 있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신자입 니다. 그러나 자신도 못된 죄 짓고 살면서도 남의 죄를 들추어내어 정죄하고 비 판하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둘째로, 이 세상이 너무 타락하고 악해 지는 것을 보며 마음이 상하고 괴롭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신자입니다. 베드 로후서 2:6절 이하를 보면, 소돔과 고모라에 불법이 횡행하고 무법한 자들이 판을 치는 그들의 음란한 행실을 보고 롯은 날마다 고통스러워하고 그 심령이 상했다 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롯은 그 성이 유황불로 심판받을 때 하나님께서 두 천사를 보내어 그의 가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디모데후서 3:12-13절을 보면, 마지막 때에는 의롭게 사는 자들은 더 의롭게 살 려고 애를 쓰게 되고, 악하고 남을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해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알곡은 알곡으로, 쭉쟁이는 쭉쟁이로 확 실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참신자는 새벽이고 저녁이고 시간 시간마다 교회 에 나오고 은혜를 더 사모하고 더 거룩하게 살려고 애를 쓰게 되나, 거짓신자는 점점 더 나쁜 짓을 하게 되고 불의를 행하며 음란한 짓을 하고 모양만 그리스도 인으로 행세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는 참신자와 거짓신자로 갈라져서 그 정체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심판의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부흥 회는 큰 은혜를 받을 기회입니다. 은혜 받는 비결은 첫째로, 열심히 나아와 말씀 을 듣는 것입니다. 둘째로, 죄가 깨달아지면 철저히 회개하는 것입니다. 세째로,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성령의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성령 강림 교회의 기초/행2:1-13
2001-11-21 22:12:27   read : 159

세계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 하심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새로운 생명에 대한 희망과 영생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해 주었기에 부활절을 귀중한 축제로 지냅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가 운데 하나가 교회가 언제 누구에 의해 시작이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누 군가에 의해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목적을 같고 시작되었는가를 아는가는 교회의 본질 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탄생과 시작은 바로 오늘 성령 강림 일부터 였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1절)라고 성령강림의 이 놀라 운 역사가 오순절에 생겼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연한 날이었을까요? 성경은 그렇지 않고 여기에 의미가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역시 유대인의 절기인 유월절과 결부되어 있음을 우리는 먼저 기 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2:1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의한 후, 유월절을 기하여 예수 를 죽일 계획을 수립했고, 누가복음 22:7은 최후의 만찬이 유월절 만찬임을 지적하고 있습니 다.

최후의 만찬 때의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 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즉 예수님 자신이 자기의 십자가를 유월절과 결부시킨 말 씀입니다.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옛 유월절 은 이제 끝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원의 성취 곧 새 유월절의 어린양이 곧 예 수 자신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눅22:15-16)

바울도 이 진리를 확인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5:7에서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 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 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노예 살이,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기념일입니다. 그 옛날 애굽에서 탈출하는 마지막날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에 그 피를 묻혀 하나님의 진노에서 제외되었고, 누룩 안 든 빵을 먹고 조상이 경험했던 4백 년의 간의 고생을 기념했습니다. 이제 새 유월절이 시작되 었으니 어린양은 그리스도이며 그 피는 십자가였습니다. 묵은 누룩 즉 옛 구원의 방법인 율 법은 효력이 없으며 새 누룩 곧 그리스도가 시작한 천국이 확장되어 나갈 것입니다. 오순절은 본래 이스라엘의 추수감사절입니다.(밀 수확의 시기) 유월절 후 7주가 끝난 다음날 곧 50일째(pentecost)를 한자로 번역한 것이 五旬(오순)절입니다.

이 날에 성령강림이 있었다는 것은 역시 수확과 관련됩니다. 유월절 어린양 예수님의 피가 사람을 구원하는 영적인 수확의 표를 의미하며, 십자가 사건 이후에 활동을 개시한 성령의 역사가 뚜렷하게 이 일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날 하루에 3천 명이 어린양 예 수의 피를 믿고 새 누룩에 동참하는 놀라운 일이 수확의 증거로 나타났습니다. (행2:41)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롬8:23)라고 말합니다. 곡식이 수확되 려면 여물어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바쳐질 제물, 처음 익은 열매로서 완성시키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 첫 일이 오순절, 즉 성령강림절기에 시작된 것입니다.

이 일이 생긴 날은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들끓어 복음 전파가 더 빨라졌습니다. 평소에는 5 만 정도의 도시였으나 유월절에는 행2:9-11절에 소개되었듯이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모 두 모이기 때문에 1백만 명에 가까웠다고 추산합니다.

다락방에 있었던 성령강림의 현상은 인간의 언어로 확실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집필자인 누가도 확실한 용어를 찾지 못하고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했습니 다."라고 최선의 표현을 시도했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있었다"고 사 실에 가장 가까운 말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 가까운 표현의 언어가 첫째 「바람」이고, 둘 째 「불」이며, 셋째가 「다른 방언」이었습니다.

첫째, 교회는 신비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탄생되었습니다.

성령의 오심이 바람 같았다는 말(2절)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불가사의하고 힘이 있는 것 임을 말합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이란 누가의 표현은 폭풍을 연상케 합니다. 특히 "소리가 온 집을 진동시켰다."는 말은 태풍이나 회오리바람을 생각게 합니다. 즉 이 바 람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바람의 기원이 '하늘로부터' 였다 는 것은 이 바람을 상징하는 이 성령의 기원이 하늘임을 의미하며, 성령은 하나님에 의해 이 땅에 보내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부터 이미 이 지상에 교회를 창립하실 계획을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니고데모에게 성령의 역사를 설명할 때 바람을 예로 드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 은 다 이러하니라." (요3:8) 바람은 인간의 기대에 따라 불지 않습니다. "홀연히"(갑자기) 바 람 자체의 힘에 의해서 붑니다. 바람의 시발점은 하늘에 있고 땅에 있지 않습니다. 바람의 기원이 하늘에 있듯이, 성령의 강림으로 시작된 교회 역시 그 기원이 하나님에게 있는 이유 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임의로 바람을 만들 수 없고 그 방향을 좌지우지 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교회도 인 간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도 교회를 지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서운 토네이도가 나무 와 집을 무너뜨리듯이 성령은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사람들을 즐겁게 하듯이 성령은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유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오순절 성령강림은 불에 비교되었습니다.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 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었다."(3절) 불은 태우고 번져가고 깨끗케 하는 능력을 가졌습니 다. 구약에도 하나님의 나타남을 '타지 않는 불로'(출3:2), 하나님의 인도를 '불기둥'으로(출 13:21), '불 성곽'으로(슥2:5)표현했습니다. 신약에서도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를 "불로 세례를 줄 자"로 (마 3:11)말했습니다.

누가는 그냥 불같다고 표현하지 않고 "불의 혀 같았다"고 말함으로써, 바람이 귀를 지배하 듯 불은 혀를 지배하여 불의 혀 같은 성령의 결과로 다물었던 입이 열렸음을 증언하였습니 다. 증인은 입이 열려야 합니다. 두려움과 체면과 부끄러움으로 입이 닫혔던 자가 혀 같은 불 세례를 받으면 입을 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강림을 통해 교회를 세우신 것은 뜨거운 불과 같은 복음의 진리를 입을 열어 담대하게 증언하라고 세우신 것입니다. 모든 것들을 태우는 불의 놀라운 능력처럼, 교 회는 세상의 더러운 죄악을 태워야 하며, 성도는 그 뜨거운 불의 역사를 체험한 후 세상으 로 나가 죄악을 말씀의 능력으로 태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세 번째 모습인 「다른 방언」이었습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4절)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누가는 이 방언을 남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다른 나라 말 이었음을 밝 힌 점입니다. 듣는 자들이 놀랜 것은 갈릴리 사람들이 (무식한 어부 등 지식층이 아니었습 니다) 자기들이 사는 나라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예루 살렘 순례자들의 출신 지방 곧 제각기 다른 방언(언어)의 지방 명이 9-11절에 소개되었습니 다.

이 지명을 분석하면 바대, 메대, 엘람은 동방의 나라들이고(중동지방)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밤빌리아 까지 7개 지방은 지중해 북동부의 여러 지방 명이며, 애굽과 리비야는 지중해 동 남부(아프리카 북부)이며, 다시 지중해를 건너 로마를 언급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령 받은 초 대 그리스도인들의 목격자인데 그들 자신의 지방에 복음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아시아 지 방과 로마에만 초대 교회가 설립되었을 뿐임을 볼 때 이 기적적인 성령 강림 사건은 이 사 건으로 인해 이 나라 사람들의 나라에도 복음이 들어가게 되는 계기를 가져오게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성령의 강림으로 인한 방언의 기적은 언어로 인한 민족 간의 장벽(language barrier)도 성령의 놀라운 능력으로 모두 해소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 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 기를 원하셨기에 이런 기적을 일으키셨고, 결국 지금은 온 세계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 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되는 놀라운 기적을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인한 교회의 탄생은 어떤 문화적인 장벽이나, 언어와 관습의 벽을 뛰어 넘 어 모든 민족이 이 성령을 통해 서로 communication이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오순절 성령 강림의 본문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령이 다 락방에 모였던 어떤 특정인 몇 사람에게 오신 것이 아니라, 모인 무리 모두에게 주어졌음을 필자 누가가 되풀이해서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같이 모였더니", "저희 앉은 온 집 에 가득하며", "저희에게 보여",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등 전체를 가리키고 있습 니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영에 대한 기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지도자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그것도 일시적이었으며 직면한 위기가 지 나가면 하나님의 영도 사라지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사상을 보면 이런 일 시적이며 잠깐 있다가 떠나는 성령의 체험보다는 영구적으로 완전하게 주어지는 날을 바라 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민수기 11잘 24절 이하에 하나님의 영이 내린 기사가 있습니다. 먼저 모세에게 내리고 70인 장로들에게 임하여 예언(설교)하였습니다. 영을 받은 순간 잠깐 예언한 임시적인 것이었습니 다. 이날 엘닷과 메닷이라는 사람이 장로도 아니고 회막(성전)에도 있지 않았는데 진(숙소) 에서 영을 받아 예언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여호수아가 화가 나서 모세 에게 그들의 예언을 중지시키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때 모세는 "시기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11:29)로 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는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이며 이 성령의 결과는 완전한 인간상 임을 말하였습니다. (사11:1-5)

요엘 선지 역시 하나님의 영은 특정 지도자에게만 내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심지어는 남 녀 노인들에게도 성령이 내릴 것을 말했습니다.(욜2:28-29)

오순절 날 이런 구약의 염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날 성령은 일시적이 아니라 그들 속에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하여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성도의 교제의 끈이 되었습니다. 사 실 성령 강림후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돌아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 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그 군중들이 아닙니까?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구원 을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한번도 나눔에 대한 것을 생각지 못했던 그들이 이렇게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구원받은 후에는 모든 것을 나누었습니다. 초대 교회 안에 나타난 유무상통의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는 바로 이 성령의 역사로 인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함께 나누어 쓰는 교제의 공동체는 이 성령의 사역이었습니다.

성령 세례를 받고 거리로 나가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초대 교회 성도들의 전도의 힘도 바로 이 성령강림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위시하여 토대 교회의 지도자들이 설교할 때마다3000명씩 회개하고 돌아오는 회개운동도 바로 이 성령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이 성령의 강림은 사랑의 원동력이 되고 회개의 눈물의 샘이 되고 위로와 격려와 용기의 동 반자가 되신 것입니다.

성령 강림 후, 이 믿는 공동체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공동체를 이루어 나갔습니다. 미신과 우상의 세계로부터, 탐욕과 이기적인 세상으로부터 나와서 이웃의 필요를 이해하고,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로(Compassionate Fellowship) 바뀌었습니다.

120명의 성도들이 받은 성령의 강림은 3000명의 회개와 함께 성령의 또 다른 강림으로 이어 졌고, 교회는 이 성령의 강림으로 인해 계속적인 성장을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안 에서만 이 복음이 전파된 것이 아니었고 주위의 여러 도시의 사람들에게 계속 번져 나갔습 니다.

성령 강림은 교회의 존재 이유를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세계 모든 곳에까지 복음이 전파 될 수 있도록 교회는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으로 무장이 되어 있어서 그 사명을 끝까 지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강림은 온 세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성령강림은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성령강림은 당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 다. 성령강림은 오늘 날에도 그 당시와 똑같은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때로 삶에 지치고 힘들어서 낙심이 되십니까? 외로움과 절망으로 인해 고생하고 계십니까?

바로 성령님께서 오늘 여러분을 위해 오셨습니다. 겁에 질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던 제자들을 향하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숨을 내쉬 시며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시며 주셨던 성령이 바로 오늘 이 자리에 오신 것입 니다.

보혜사라고 번역된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는 본래 희생을 각오하고 친구의 무죄를 위해 줄곧 함께 앉아서 힘이 되어 주고 위로해 주는 변호인을 의미합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바 람 같고 불의 혀 같은 성령을 체험한 제자들이 어째서 그토록 용감해 지고 자신이 생겨서 의욕이 넘쳤습니까? 그것은 이 파라클레토스, 위로자 성령의 놀라운 힘을 체험했기 때문입 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약속의 말씀이신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는 바로 이 성령의 강림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를 이 성령 강림 자리로 초대합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겔47:1-12
2001-11-21 22:13:28   read : 222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도덕적으로 부패하 고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그 당시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유다 나라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세 번에 걸친 공격을 받아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유다 전역이 파괴되었으며 백 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에스 겔이라는 유명한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에게 예 언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예언, 비유, 상징, 표징들을 사용하여 포로가 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극적으로 전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에스겔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환상을 기록한 것입 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셨던 환상을 두 가지 면에서 살펴보겠습니 다. 하나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의 깊이의 변화와 우리의 영적 생활의 깊이를 비교하여 상 고해 보고, 다른 하나는 성전에서 흘러나와 강물이 되어 도도하게 흐른 그 물의 실체와 그 강물의 능력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점점 깊어져 간 깊이의 변화는 신앙 생활의 단계와 깊이를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에서 보니 하나님의 성전 문턱에서 물이 나와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려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맨 처음, 천사가 일천 척을 척량한 후 에스겔이 그 물을 건너가 보니 물이 발목에 찼다고 했습니다. 이는 성도의 영적 상태가 성령님께 발목이 잡힌 것을 말합니다. 성 령님께 발목이 잡힌 사람은 삶의 방향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납니다. 세상을 향해 가던 발걸 음이 교회를 향해, 지옥을 향해 가던 발걸음이 천국을 향해 가는 방향 전환을 하게 됩니다. 천사는 일천 척을 더 척량한 후 에스겔에게 물을 건너게 했습니다. 이번에는 물이 무릎까지 찼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릴 때 무릎을 꿇고 기도 드리는 장 면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물이 무릎에 찼다는 것은 기도하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기도는 성도의 의무입니다. 성경에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삼상 12:23)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고 말씀하셨습니다.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선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무릎에 힘이 없으면 힘 차게 전진할 수 없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성령님께 붙잡힌 바 되어 교회를 향하고, 천국을 향하며, 하나님께로 향하여 방향을 전환하였으면, 힘차게 전진하기 위해 무릎에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기도는 성도의 의 무일 뿐 아니라 특권입니다. 성경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 하였습 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깊은 신앙 생활을 위해서는 더 나아가야 합니다. 천사가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자 물이 에스겔의 허리에 찼습니다. 사람은 허리에 온 몸을 지탱하는 힘이 있습니다. 허리는 사람이 활동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이 러므로 물이 허리에 찼다는 것은 봉사하고 헌신하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을 위해 봉 사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은 영적 생활이 상당한 깊 이에 이른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많은 일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일 에 영원한 가치가 없다면 일을 많이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가치가 있는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영원한 가치가 있는 일은 주님의 일뿐입니다. 우리가 성도들을 위해 헌신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할 때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며 이 일은 영원한 가 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 일에 시간과 물질과 몸을 드려 헌신하는 것으로 만족해 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천사가 다시 일천 척을 재니 헤엄을 쳐야 하는 강물이 되었습니다. 헤엄을 배우려는 사람은 물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헤엄을 쳐야 하는 창일한 강물은 주님께 완전히 맡기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살든지 죽든지 오 직 주님의 영광만을 나타내기 원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 럼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그리스도로 충 만한 생활을 하는 것이 풍성하고 깊은 믿음의 생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천 척에 이른 자 의 생활입니다. 영적 생활의 깊이는 발목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헤엄을 쳐야 하는 상태 로까지 발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사천 척의 영적 상태에 이르러 철저히 주님을 신뢰 하고 주님께 내어 맡기며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은 마침내 강이 되었습니다. 이 성전과 강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강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모든 것이 치료되고 살아나며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강물이 시작된 성전은 무엇을 상징 하는 것일까요?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는데 그 안이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자와 돈 바꾸는 자로 인해 장터처럼 되어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모두 쫓아내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그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아연실색한 유대인들이 " 네가 이런 일을 하니 우리에게 무슨 표적을 보이겠느냐?"고 말하자 예수께서 "너희가 이 성 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는데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22)고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성전은 예수님 을 의미합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와 강을 이룬 물은 치료하고 번성케 하고 소생케 했습니다. 그러면 강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먼저 물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엡 5:26)라고 기록되었으며, 예수께서도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요 15: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 물은 그리스도의 영, 성령 을 상징합니다. 성경에 이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8,39)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질 때 우리의 영혼에 생수의 강이 흐르게 되어 소생하는 은혜와 복을 받게 됩니다.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 같은 성인, 군자, 현인들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유익한 좋은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이 사람들 에게 영적 생명과 번영을 주지는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만이 영적 생 명과 번영을 줍니다. 이 사실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 이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국가는 언제나 번성했습니다. 이러므로 주님의 말씀과 성령은 치료와 생명과 번영을 줍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말씀과 성령의 권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하시고 자유케 하 시며 풍성케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마 8:16) 하였고,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 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하 였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가 천국을 향하는 생활을 하도록 발목을 붙드시 고, 기도하는 생활을 하도록 무릎을 붙드시며, 봉사하고 헌신하는 생활을 하도록 허리를 붙 드시고,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생활을 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리고 말씀과 성령으로 충 만하게 하셔서 자신과 이웃이 치료되고 소생케 되며 번영케 되는 놀라운 은총을 베풀어 주 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간구하십시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 러분은 사천 척 깊이에 나아간 성도가 되시고, 항상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한 생명으로 엮으시는 성령/겔37:1-10
2001-12-08 23:52:51   read : 59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임과 동시에 환경주일이기도 합니다. 세계 환경의 날이 6월 5일인데, 2001년 주제는 "Connect with World Wide Web of life"로 우리말로는 "이 땅의 모든 생명체를 하나의 네트웍크로"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인터넷의 전 세계적인 네트웍크와 같이 "생명의 전 세계적인 네트웍크를 만들어" 하나의 생명공동체를 만들어 가자는 뜻입니다. 인터넷이 그물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전 세계가 서로 통하는 것처럼, 생명도 인간과 자연 할 것 없이 서로 그물처럼 연결되는 하나의 생명공동체를 만들어 가자는 뜻일 것입니다.


인터넷이란 전 세계에 있는 컴퓨터가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거대한 정보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내 방에 앉아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정보를 받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정보를 인터넷에 올려놓으면 전 세계 누구든지 와서 볼 수 있고 가져갈 수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이런 인터넷을 이용하여 슈퍼컴퓨터가 하는 일을 한다고 신문에 보도가 되었습니다. `인터넷 슈퍼컴퓨터'는 분산 컴퓨팅 기술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작업을 주도하는 서버가, 일거리를 개인용 컴퓨터가 가뿐하게 처리할 수 있는 크기로 쪼개서 맡긴 뒤 결과를 받아 합치는 방법입니다. 슈퍼컴퓨터로 해야 할 일을 개인용 컴퓨터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일거리를 나누고, 처리 결과를 받을 때는 인터넷을 이용합니다. 혼자하면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릴 일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맡기면 하루에 처리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슈퍼컴퓨터는 아주 복잡한 계산을 빠른 시간에 할 수 있는 대단히 큰 컴퓨터를 말하는데, 가령 최근에 서울대학교에 들어온 IBM사의 슈퍼컴퓨터는 중앙처리장치(CPU) 144개, 메모리 144GB에 1Gbps 속도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이런 슈퍼컴퓨터의 값은 대단히 비싸고, 따라서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도 비싼 사용료를 내야만 합니다. 이런 슈퍼컴퓨터로 해야 할 일을 수 백대의 개인용 컴퓨터에 나누어 맡기면 돈 별로 안 들이고 큰 일을 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을 맡길 컴퓨터를 많이 확보하면 슈퍼컴퓨터급 이상의 성능을 구현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 일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은 관계된 기관에 회원으로 등록하고 프로그램을 받아서 자기 컴퓨터에 설치하고, 24시간 컴퓨터를 켜 놓으면 됩니다. 놀리는 컴퓨터 자원을 활용하고, 컴퓨터 사용자들에게 `나눔과 공유'를 통해 사회에 공헌하는 기쁨을 맛보게 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대학과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인터넷 슈퍼컴퓨터를 구축해 활용하는 곳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혜성의 진로 예측, 외계인 생명체 찾기, 소수 찾기, 암이나 에이즈 정복, 인간 유전자 해독, 단백질 구조 분석, 신약 개발, 주가 추이 분석, 투자위험 관리 등 용도도 다양하다고 합니다.

오늘 읽어 드린 고린도전서 12장 말씀에 보면,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7절에 보면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시는 것은 공동의 이익을 얻게 하려고 하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나누어주시는데, 그것은 그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전체 생명공동체를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늘 이 성경 말씀을 읽었으면서도 전에는 전혀 관심 있게 보지 않았던 구절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나누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은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작업을 하시는데 슈퍼컴퓨터 같은 거대한 작업 도구가 필요하신데, 그 일을 나누어서 개인용 컴퓨터 같은 믿는 사람 개개인에게 은사를 나누어 맡기시는 것입니다. 각기 다른 은사를 받은 우리는 주어진 자리에서 그 은사를 가지고 열심히 일하면 성령께서 나중에 그것을 모두 함께 모아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2장 12절 이하에서 몸과 지체의 비유를 통하여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어서 각기 다른 기능을 수행하면서 결국 하나의 몸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나 하나님의 나라도 이와 같이 여러 생명체들이 제각기 주어진 기능을 하면서 그것이 다 모여 결국 교회를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의 생명공동체

첫째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은 하나의 생명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몸에 많은 지체가 있지만 결국은 하나의 몸을 구성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은 무척 다양하지만, 그 모든 피조물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생명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개인용 컴퓨터를 슈퍼컴퓨터처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인터넷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인터넷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전 세계를 그물처럼 얽어놓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정보망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 세계에 많은 컴퓨터가 있지만 그것이 인터넷이란 하나의 그물망에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 있는 작동하는 모든 컴퓨터가 꺼져 있든 켜져 있든 결국은 하나의 망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이 컴퓨터들이 모두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작동한다면 이 세계는 놀랍게 발전하고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악한 의지를 가진 지배자가 나타나면 세계는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도 이와 같이 서로 다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가 가진 정보를 이용하면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 피조물 가운데 하나인 인간이 죄로 타락하면서 이 생명공동체를 파괴하여 하나로 연결되어 있던 세계를 산산조각을 내버렸습니다. 하나의 생명공동체로 움직일 때 하나님의 세계는 건강할 수 있지만, 그 공동체가 깨어질 때 그 생명은 시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 생명공동체를 회복하시고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가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그 속에 자리잡은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기틀을 놓으셨습니다. 그 후 성령께서 오셔서 이 깨어진 세계의 회복을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구약성경 에스겔서 37장에 나타난 에스겔 골짜기 환상 이야기에 보면, 각각 흩어져 말라버린 뼈들이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모아지고 거기에 살과 힘줄이 붙은 다음 다시 생기를 불어넣자 마침내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성령이 하시는 일이 바로 뿔뿔이 흩어져버린 메마른 생명들을 하나로 엮어 온전한 생명, 하나님과 연결된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성령께서 우리 속에 은사를 주시고, 또 우리 속에 들어있는 육적 욕망을 제거하여 하나님의 전체 생명공동체를 보게 하십니다. 바울은 성령을 통해서 모든 피조물이 하나가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자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고전 12:13

구원이란 내가 이런 큰 생명공동체에 연결된 한 지체가 됨을 뜻합니다. 전에는 나 중심의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생명공동체 중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 생명공동체가 바로 교회이고 그 교회의 머리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 생명만 중요하게 여기던 좁은 시야를 버리고 이제는 전체 생명공동체를 보면서 공동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게 됩니다. 이 생명공동체가 살아날 때 우리는 놀라운 생명의 은총을 나누게 되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우리가 인터넷에 연결되면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생명의 네트웍크에 연결되기만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의 능력과 은총과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의 시야를 넓히십시오. 나만을 위한 삶에서 이제는 이웃을 돌보고 환경을 생각하며 전체 생명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극히 작은 일이 모여

둘째로, 지체된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일은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그것이 모여서 마침내 큰 몸을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슈퍼컴퓨터에 비하면 개인용 컴퓨터는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그 개인용 컴퓨터가 하는 작은 연산들이 모이면 슈퍼컴퓨터보다 더 큰 것을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인터넷 슈퍼컴퓨터'에 있어서 개인용 컴퓨터를 가진 사람이 하는 일이란 고작 컴퓨터를 계속 켜 놓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인류의 큰 숙제들 즉 암이나 에이즈의 문제를 해결한다든지, 신약을 개발하는 일을 해 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각각 은사를 나누어주시지만, 그 은사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가 특별히 하는 일이 없습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바른 삶을 이루어 가기만 하면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보면, 오른 쪽에 구별된 사람들이 한 일이란 고작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 떠 준 일,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그릇 대접한 일, 병든 이를 돌아본 일,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준 일 등이 고작입니다. 그것 자체로만 보면 무엇이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보잘 것 없는 일 때문에 그들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을 베푼 것 이외에 특별히 한 일이 없었지만, 바로 그 관심과 사랑이 전체 생명공동체를 살리는 큰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환경운동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환경회복운동이란 기껏 해서 쓰레기 줄이고, 물을 아껴 쓰고, 세제 덜 쓰며, 자동차 좀 덜 타고 하는 정도일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중요한 것은 거기에 전체 생명공동체를 생각하는 마음과 사랑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어떤 거창한 사업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세우며, 겸손하게 그 뜻을 받들어 가라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큰 생명공동체가 있음을 알고 그 일에 협력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자신의 삶을 바르게 이루어 갈 때, 그것을 통해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이 들어 죽음에 임박하였을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흔히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음을 한탄합니다. 사실 특별한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을만한 어떤 큰 업적을 이루지 못한 채 그의 생애를 마감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업적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맞게 충실하게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 속에 자리잡았던 욕망을 빼어버리고 성령을 좇아 영적 삶을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전체 생명공동체 속에 주어진 자기의 자리를 충실하게 지키면서 정직하게 바르게 살았다면, 심판 때에 오른편에 구별된 양의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도록 마음문을 열자

끝으로, 성령의 역사에 자신을 언제나 열어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 들어와 역사 하시도록 마음문을 열어 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은사를 주실 때에 적극적으로 받아드리고 그 은사를 잘 활용함이 중요합니다. 결국 그것은 내 속에 모든 욕망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내가 이 땅을 향한 욕망에 사로 잡혀 있는 한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내게 은사를 나누어 주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마음이 닫혀 있다는 것은 전체 생명공동체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만 몰두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반대로 마음이 열렸다는 것은 자신의 삶만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그 일에 협력함을 뜻합니다.

인터넷 슈퍼컴퓨터를 이루려면, 내 컴퓨터를 24시간 켜 놓고 주관하는 쪽에서 내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 컴퓨터를 내가 쓸 때만 켠다든지, 혹은 가입을 해 놓고도 내 일을 위해서만 모든 용량을 다 사용해 버리면 인터넷 슈퍼컴퓨터에 기여하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나를 활용하실 수 있도록 나를 비울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내 일에만 몰두한다면, 성령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협력한다는 것은 모든 육적 욕망을 억제하고 성령이 하시는 일에 관심을 가지며 그 일이 어떤 것인지 살피면서 그 일에 나 자신이 쓰일 수 있도록 함이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육체의 욕망을 좇는 자와 성령의 뜻을 따르는 자가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내 욕망을 좇는 삶에서 돌이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시는 역사에 함께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이런 우리 자신의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의 삶의 목표를 거기에 맞출 때 우리는 생명공동체의 네트웍크에 연결이 될 것이고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갈가리 찢어졌던 생명공동체를 하나로 엮어 가시는 성령의 역사를 올바로 인식하면서 여러분의 마음문을 열어 성령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보내시는 생명의 바람을 받으면 마른 뼈와 같이 무기력하였던 생명체들이 다시 활기를 얻으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가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지금 생명공동체를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 모두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받은 바 은사를 잘 활용하여 하나의 생명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협력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엄청난 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일들이지만 생명공동체를 세우는 쪽으로 실천하는 것이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생명의 컴퓨터를 모두 켜십시오. 그리고 생명의 네트웍크에 모두 연결하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여러분 속에 들어오셔서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생명의 체계에 연결이 되어 놀라운 생명의 능력과 기쁨을 맛보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 우리의 해방자/눅4:16-19
2001-12-08 23:53:55   read : 94

창세기 1장에 성령께서는 창조의 영으로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무시무시한 상황 위에 성령께서 운행하셔서 놀라운 질서와 아름다움과 풍요와 생명으로 넘치는 활기찬 세계를 지으셨습니다.
구약시대 출애굽 때에도 성령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고 사사 시절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이방 나라와 민족의 종이 되었을 때도 사사라는 특정인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위대한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향땅 나사렛에 오셔서 회당에서 복음선언을 하실 때도 성령께서 임하셨기 때문에 구원과 해방의 사역을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오순절 이후 2천년 동안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하사 계속적으로 해방의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1.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심

성령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오늘도 계속하십니다. 원래 인간은 가난하게 지음 받지 않았습니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고 에덴동산 낙원에서 살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가난은 아담이 타락한 결과입니다. 아담이 반역죄로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저주가 왔고 그 결과로 오늘날 가난이 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가난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불순종과 불신앙과 반역의 죄로 말미암은 저주 때문에 온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은혜로 영육간에 축복을 가져오셨습니다. 첫째 아담이 타락함으로 가져온 저주와 가난을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저주와 가난을 대신 짊어지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가 가난함 속에 살고 있기를 원치 아니한다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또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져온 저주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보혈을 흘리심으로 청산하셨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에게 꿈과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환경적으로 가난하고 가시와 엉겅퀴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운명이 달라진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가난과 저주에서 옮기신 사실을 기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통해서 이 진리를 우리 마음속에 전달하여 우리의 영혼이 가난과 저주의 사슬에서 해방받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고 해방되면 그것이 우리의 현실 환경 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셔야만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성령님이 안계시면 인간의 이성과 감각만으로는 이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17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 마음속에 깨닫게 해 주셔야 합니다. 성령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세상 사람들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이 오셔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가난과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셨다는 사실을 마음 속으로 깨닫고 믿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님이 오신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구원 받고 성령 충만하여 복을 받습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의 복을 받고 우리 생활을 파고드는 저주와 가난에서 해방을 얻게 됩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복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이루셨다는 사실을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2.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심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인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사야 43장 7절에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친히 만드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인간은 포로와 속박 속에 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 마귀와 귀신의 포로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타락한 이후로 마귀와 그 종자인 귀신들에게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는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알다시피 더러운 귀신은 가는 곳마다 사람의 마음속에 더러운 생각, 더러운 말, 더러운 행위를 하게 합니다. 사회와 국가, 세계가 부패한 소용돌이 속에 떨어진 것은 더러운 귀신의 역사가 그 배후에 항상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법을 조정하고 사회 개혁을 해도 순식간에 부패합니다. 왜냐하면 더러운 영이 있어서 항상 부패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이 더러운 영을 쫓아 내기 전에는 우리의 환경 속에 부패를 제할 수 없습니다.

또한 악한 영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서 마음 속에 고통을 가져옵니다. 악한 영은 개인에게 고통을 가져올 뿐 아니라 이웃에게 고통을 가져옵니다. 악한 남편은 부인과 자녀들에게 고통을 줍니다. 악한 부인은 남편과 자식들에게 고통을 줍니다. 악한 자녀들은 부모의 가슴 속에 상처 투성이를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악은 사회와 국가와 세계에 분열과 고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 악한 영이 배후에 있기 때문에 오늘날 악을 아무리 제하려고 사람들이 애를 써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배후에 악한 영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귀신들이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하나님 곁을 멀리 떠나 살게 합니다. 사람들을 데리고 먼 나라로 간 세속적인 영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모르고 살게 하다가 영원히 멸망 받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온갖 탐욕을 세속적인 영이 가져옵니다. 그 탐욕으로 말미암아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달콤한 탐욕으로 유혹을 불어넣습니다. 그래서 눈을 어둡게 합니다. 결국에는 파멸로 들어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마귀는 귀신들을 통해서 무속 신앙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젊은 이들이나 정치인, 사업가들이 역술인들이 모여있는 곳을 많이 찾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인터넷 인구가 2천만명으로 추산되는데 운세 관련 서비스의 경우 여성이 남성보다 최고 6배 이상 많이 이용한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과학과 정보 사회에도 미신은 성행합니다.

지난 해에는 운세 사이트 이용자수가 3만명, 금년에는 12만명으로 급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국민 52%가 점을 본 적이 있고 사주 풀이를 믿는 사람이 40%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귀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에 불안과 공포와 초조를 이용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마귀는 지금도 미혹의 영으로 마음을 미혹케 하고 요행을 믿게 하고 사행심을 갖게 하고 열심히 충성스럽게 일할 필요가 없다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사회가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울수록 무속 신앙이 팽배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다 귀신에 이르는 것입니다.

한편 여러 가지 정신적인 장애를 귀신이 가져와서 사람들로 하여금 정상적인 삶을 못 살게 합니다. 술 취하게 만들고 도박에 빠지게 하고 방탕하게 하는 것이 귀신들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귀신들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은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될 때 미혹케 하는 귀신은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케 해서 복음이 전혀 깨달아지지 않고 들리지도 않고 복음을 어리석게 생각하도록 그렇게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결국 멸망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오시면 이 모든 귀신의 역사를 내어쫓아 버리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귀신으로부터 해방받게 하고 의롭고 참되고 거룩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귀신으로부터 해방을 얻고 자유롭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하였고 마가복음 16장 17절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사람들은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마귀와 귀신들과 친숙하게 살았습니다. 마치 한 가족처럼 느끼고 귀신이 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해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중생하고 나면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십니다. 그래서 귀신을 내어 쫓아 자유와 해방을 얻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3.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심

인간은 영원히 육체를 입고 살기 때문에 영의 눈과 육의 눈이 동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은 영의 눈을 멀게 해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타락한 인간은 영적인 세계는 전혀 모릅니다.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칠흑같고 벽에 부딪히는 것 같습니다. 전혀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대인도 로마인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줄 몰랐습니다.

로마서 10장 16절에서 17절에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우리 마음속에 비춰주고 깨닫게 해주고 우리 영혼을 살려 주시면 비로소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들을 어떻게 믿습니까?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죽은 영혼이 살아나야 아들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만이 우리 눈을 떠서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고 믿을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새롭게 만들어주고 영안을 열어 주십니다.

에베소서 1장 17절에서 18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 의 풍성이 무엇이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며 간구하면 성령께서 우리 눈에 비늘을 제하시고 우리에게 밝히 볼 수 있는 영 안을 열어 주십니다. 영안이 열려야 진리의 말씀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4.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심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압제 당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영혼도 자유롭고 마음도 자유롭고 육체의 생활도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 마귀의 압제에 들어가고 마귀의 종이 되었습니다. 마귀가 인간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습니다.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묶어 놓고 종으로 삼고 불행과 고통을 당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회적 제도의 압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볼 때 공산주의도 있고 독재주의도 있고 전제주의도 있고 자본 주의도 있지만 어느 사회나 압제가 있고 고통이 있고 괴로움이 존재합니다. 이런 것은 전부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 다가온 것입니다.
육체적인 압제에 의해서 가지가지 질병이 생깁니다. 마귀에게 눌려서 사람들이 병이 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치료는 마귀에게 눌린 자를 고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폐를 누르면 폐병도 되고 폐암도 되고 마귀가 관절을 노리면 관절염이 됩니다. 물론 사람들이 마귀에게 기회를 주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과거에 담배를 피웠기 때문에 마귀가 폐암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귀가 틈타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이러한 사회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보혈의 능력으로 개혁과 해방을 가져오십니다. 성령님은 독재주의, 공산주의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기뻐하고 도와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인간답게 인권을 사용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독재주의로 고통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마귀의 역사입니다.
또 공산주의로 인해 인권을 잃어버리고 노예 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마귀의 궤계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 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온 사회와 국가는 여러 가지 제도에서 억압적 요소를 제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일들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과 자유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육신의 질병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질병은 스트레스로 인해 많이 생깁니다. 성령님은 이 스트레스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고 치료해 주십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돌에 눌린 풀은 노랗게 되어서 잘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나 돌을 옮겨 놓으면 노란 풀이 순식간에 태양 빛을 받고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질병의 60%에서 90%는 마음, 즉 스트레스로부터 온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이 연구에 의하면 심장 수술 받은 사람 가운에 살아 남은 환자를 조사해 보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보다 3배나 많고 건강하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경쟁사회가 불러온 과도한 스트레스가 몸 속에 쌓이면 혈압이 오르고 면역 기능이 약화되고 약한 감기도 완치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이러므로 우리 마음 속에 스트레스라는 것은 우리 몸에 병을 유도하는 활짝 열린 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고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스트레스가 온다고 항상 여행이나 다니고 한가하게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스트레스에서 풀려날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님이 오셔서 그 은혜로 말미암아 마음에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채워주십니다.

5. 궁극적인 희망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은혜의 해를 전파하러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희년을 말하는 것입니다. 7년 안식년이 일곱번 계속되어 49년이 되면 대속죄일을 지내고 난 다음 50년만에 희년의 나팔을 붑니다. 희년에는 잃어버린 고향과 전토로 모두다 복귀하여 귀가하는 때입니다. 따라서 희년은 모든 사람에게 거대한 희망의 해가 되는 것입니다.

레위기 25장 10절에서 11절에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0년이 되면 50년 전 팔았던 집과 땅을 원주인에게로 돌려주고 종으로 팔렸으면 50년이 된 희년에 다 해방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희년은 자유와 해방을 얻는 위대한 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희년은 예수님의 재림과 천국으로 돌아가는 날인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위에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고통이 끝나고 주님께서 강림하시는 그날에 ‘잘 있거라 세상아! 나는 가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의 모든 고통을 벗어 버리고 해방과 자유를 누리고 영원한 천국으로 간다’는 그날이 바로 희년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희년의 소식을 증거하러 오셨는데 이 사실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희년을 통해서 영원한 천국으로 데려 가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것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고통에서 허덕이던 삶이 종결 짓고 우리가 다시 옛 에덴동산과 같은 영원한 천국의 영광으로 복귀하는 희년의 해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희년은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강림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는 날엔 우린 모든 속박에서 해방이 되고 종살이에서 풀려나고 영원한 자유와 기쁨 속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은 바로 이러한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힘입어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순절날 성령을 받고 동일한 복음 사역을 하셨습니다.

오늘날 지상에 있는 예수님의 몸은 교회요, 교회는 성령님의 도구가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해방과 치료를 주는 복음 사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사역은 바로 성령님의 사역을 온 천하에 전하고 천국 복음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천년 전 오순절 다락방에서 1백20명의 제자에게 성령이 임하신 결과 그들은 온 천하에 다니며 그리스도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나라에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오늘 성령님은 이 자리에 와 계시고 교회에 충만하시며 교회를 옷 입고 여러분을 옷 입고 오늘도 계속해서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가난한 자에게 복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는 다시 보게됨을 눌린 자가 자유케 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여러분에게 나타내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 기도 -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아버지 하나님.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우리 죽은 영혼 을 살려 주시고 마음에 깨달음을 주셔서 우리 영혼 속에 변화가 다가오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 성령으 로 말미암아 진리를 듣고 우리 마음이 먼저 자유를 얻고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축복의 샘물이 넘쳐 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유와 해방을 얻고 자유를 선포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生命의 영-성령/시104:24-35
2001-12-08 23:55:16   read : 59

저는 금년 이월에 캄보디아를 다녀왔습니다. 캄보디아 수도인 프놈펜에 머물면서 그 곳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이 성민 선교사와 함게 몇 곳의 선교지를 방문하였습니다. 프놈펜을 떠나는 바로 전날 저녁에 그곳에 있는 우리 교단 선교사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한 후 대담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그들이 선교지에서 경험하고 있는 어려움들을 주로 듣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나중에 저의 생각을 그들에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캄보디아가 불교 국가이기 때문에 매우 힘든 영적 싸움이 언제나 진행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영적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영적으로 무장하여야 하며, 어떻게 건전한 영성을 형성해 갈 수 있느냐는 문제였습니다. 그러한 문제에 대해 그들은 저에게 어떤 만족스러운 해답을 요구 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선교사로서 건전한 영성을 형성해 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선교 사역지인 캄보디아를 영적 대결의 장으로 보지 말고, 선교사 자신들이 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 그들을 사랑하고 있는 하나님, 그들을 선교지에 보내신 하나님이, 그들과 꼭같이 캄보디아와 캄보디아 국민을 사랑하시며, 그곳에서 활동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받아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 그곳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선교를 해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할 때 선교가 이루어지며, 선교사로서 갖추어야 할 영성이 형성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 우리 가운데서 역사해 가시는 하나님께서 캄보디아 사람들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알리기를 원하시고, 그들에게 복된 삶의 길을 가르쳐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서 활동하십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캄보디아 사람들에게도 생명을 주셨고, 우리에게 자연이라는 삶의 상황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서 역시 캄보디아 땅을 지으셨습니다. 우리와 캄보디아 국민은 같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고, 삼천리 금수강산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인도 지나 반도를 지으셨습니다. 그들이나 우리 모두 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으로 말미암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캄보디아 국민, 좀더 나아가서 전 세계 사람,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으로 살아 갑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생명은 없습니다.

그래서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생명의 가치에 대해 눈을 뜨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생명의 가치를 바르게 이해하고 깨닫는 순간부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무시한 정치, 경제, 종교, 학문, 사상은 매우 위험스러운 것들입니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인류를 위해 유익한 일을 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생명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존중히 여긴 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생명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먼저 생명은 일정한 어떤 목적을 향해 계속 흐름이 진행되어 갑니다. 생명은 결코 정태적인 것이 아닙니다. 계속 움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가진 피조물들에게는 불안과 동요가 있습니다. 죽은 것들에는 동요가 없습니다.

둘째, 이 생명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서 어떤 통합적인 완성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생명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이 손상을 입거나 파괴 되면 다른 부분에 깊은 부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예를들면 인간이 자신만을 생각하고 나무와 숲을 마구 훼손하고, 물과 땅을 오염시키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오로지 자연과 관계에서만 더욱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 모든 형체를 가진 생명체들은 흙으로부터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 땅은 어머니입니다. 어린아이의 생명이 어머니의 품에서 구체적으로 형성되어 가듯이 모든 생명체들에게 땅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땅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어머니입니다. 생명체들이 죽으면 역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넷째, 이 생명에는 등급이 있습니다. 그러한 등급은 모든 피조물들의 각양 각색의 종류들로 나타나 있습니다. 어류, 곤충류, 동물, 자연(나무, 풀, 꽃, 채소)등 이중에서 최고의 등급은 인간입니다. 생명의 최고의 등급인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살아있는 것들과의 유기적 관계가 손상되거나 파괴되지 않도록 개발하고 보존해 가는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다섯째, 특히 인간은 생명의 실체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명력을 갖게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기운을 공급받지 못할 때 무기력, 무의미, 고갈에 빠지게 됩니다.

시인은 그러한 세상을 찬양합니다. 시인이 세상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은 매우 예리합니다.

"주님, 주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께서 지혜로 만드셨으니,

땅에는 주님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합니다.

저 크고 넓은 바다에는,

크고 작은 고기들이 헤아릴 수 없이 우글거립니다.

물 위로는 배들도 오가며,

주님이 지으신 리워야단도

그 속에서 놉니다.

이 모든 피조물이 주님만 바라보며,

때를 따라서 먹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먹이를 주시면,

그들은 받아 먹고

주께서 공급하여 주시면

그들은 좋은 것으로 배를 불립니다.

그러나 주께서 얼굴을 숨기시면

그들은 떨면서 두려워하고,

주께서 호흡을 거두어들이시면

그들은 죽어서 본래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주께서 주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주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주의 영광은 영원하다

주님은 친히 행하신 일로 기뻐하신다.

주님이 굽어보기만 하셔도 땅은 떨고,

주님이 산에 닿기만 하셔도

산이 연기를 뿜는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나는 주님을 노래할 것이다.

숨을 거두는 그때까지 시를 읊어서,

하나님을 노래할 것이다."

시인은 죽음으로 가득찬 세상을 보지 않고 생명으로 가득찬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러한 생명으로 가득찬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함께 하신 분이 생명의 영이신 성령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 창조의 영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공동체인 이 세상은 인간의 탐욕, 이기심으로 자꾸 훼손되고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감수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늘의 현실에서 생명들의 찬양소리 보다는 생명들의 고통의 신음소리를 더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인간에 의해 손상되고 파괴되어 가는 자연계의 생명들은 고통의 신음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들 스스로 파괴해 가는 생명 질서의 파괴로 인해 역시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해마다 늘어나는 낙태로 인한 영아살해, 공기 오염과 썩은 물로 죽어가는 수백만의 어린 생명들, 폭력, 살인, 기아, 전쟁으로 죽어가고 있는 생명들의 신음 소리는 우리의 귓전에 쉴새 없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일찍이 창세기 저자는 이러한 생명의 신음소리를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 (창 4:10)

한편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함께 겪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롬8:22)

우리는 우리의 희망없는 상황에서 매우 희망적인 새로운 사건을 신약 본문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저의 신앙의 성장과 함께 사도행전 이장을 이해 오는 데는 몇 번의 변화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지난 날 어느 한 때에는 사도행전 이장을 읽는 저의 주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방언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였습니다. 그 다음 과정으로 어떻게 성령을 충만이 받아 많은 사람들을 회심시킬수 있을 것인가? 였습니다. 그리고 늘 꺼림직하게 찌꺼기처럼 남아있던 문제는 나는 성령 세례를 받았는가? 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제가 이해한 성령은 어느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생각 하였습니다. 그들을 통해서만 성령 체험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그마한 성령 체험을 간증하는 사람이 부럽기도 한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사도행전을 읽는 저의 관심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창조활동과 그가 지향해가는 목표가 무엇인가입니다.

오순절에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인간 역사에 임하실 때 일어나는 현상이 매우 신비로우면서도 우리의 일상성에서 깊은 관련이 있는 것들입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하늘에 나타나고,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혀들이 갈래 갈래 갈라지면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성령 자체는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일어난 현상들입니다. 이것들은 성령이 생명의 영, 창조의 영임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위에 움직이고 계셨다."(창1:1)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새로운 질서가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창 2:6)고 했습니다.

역시 오순절에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혼돈의 역사에 임하시므로 새로운 인간이 태어났습니다. 그 인간은 탐욕과 이기심에서 희망되어 하나님 나라의 비젼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들은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시며, 만유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안에 계시는"(엡4:6)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새로운 생의 "원리와 패러다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성령에 의해 새로운 공동체가 태어났습니다. 그 공동체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세상의 기존 공동체와는 다른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으로 통일되어 있는 공동체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은 한 지역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땅끝까지로 넘어가고 계십니다. 이 성령은 방언의 은사를 받은 어느 한 개인, 집단의 소유물로 남아있지 않고, 한 개인, 한 공동체를 넘어서 가십니다.

성령이 지향해 가는 목표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성령의 사역은 한 개인을 넘어 전 우주입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 그 자체가 성령의 사역이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삶의 지평을 나 개인으로부터 인류로, 내 가정에서 전 세계로 현실에서 영원으로 넓혀주십니다. 독일의 각성 운동 설교자인 크리스토프 불룸하르트는, 우리는 "종교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길, 교회에서 세계에 이르는 길, 개인적인 근심에서부터 전체에 대한 희망에 이르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생명의 영이신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경험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새로 태어남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원리와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으로, 그러한 공동체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나 개인, 우리 가정, 우리 나라, 전 세계가 살 수 있는 길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에 동참해 가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안에서 새로운 희망의 사람이 됩니다. 새로운 생의 계획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희망의 계획은 우리집 울타리 안 만을 가꾸고보존하고, 우리 가족만을 잘살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해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활동안에서만 현실을 긍정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아주 작은 창조적이며, 윤리적인, 생명적인 선한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낙심 좌절, 무의미성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나 한사람의 생존을 위해 먹고 배설하는 일밖에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젼을 갖게 되고, 그 안에서 현재 창조적인 일을 해 갈 수 있습니다. 어느 철인의 말대로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수 있는 사람"은 성령 안에서 희망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라/요20:22-
2001-12-08 23:56:25   read : 118

한 어린 소년이 이미 세상을 떠난 이태리 화가의 화랑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이 열리자 그 소년은 부인께서 대가의 붓을 제게 주실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 소년은 미술가가 되고 싶은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가와 같은 화법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부인은 붓을 그의 손에 쥐어주고 그려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자기 붓으로 그린 것보다 더 잘 그릴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대가의 정신을 이어받지 않고는 위대한 대가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신앙을 갖고 싶어도 그리스도의 영 없이는 잘 믿을 수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려고 하면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9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 하였습니다.
죄송한 질문이지만 여러분 그리스도인입니까? 교회에 나오시는데 예수는 믿으십니까? 여러분 거듭났습니까? 젊은 목사 한 분이 유학 길에 올랐답니다. 하도 시원치 않으니까 물었습니다. 형제 예수 믿어요. 그가 대답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어느 신학대학 총장이라고 자랑스럽게 말 하더랍니다. 아니 신학대학 총장 아들과 예수 믿는 거와 무슨 상관이요. 그때 약간 심각하더랍니다. 당신 그리스도인이요. 아니 나는 목사예요. 질문하는 사람이 목사라는 직분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것과 상관이 없는 거 아니요. 여러분이 교회에 얼마 나왔다, 무슨 직분을 받았다는 거와 믿음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철학자 루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보통 10대에는 먹는 것 즉 과자에 의하여 움직이고, 20대는 사랑에 의하여 (연인)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30대는 쾌락에 의하여 움직이고, 40대는 야심에 의하여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50대는 탐욕에 움직이고, 60대에는 명예심에 의하여 움직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욕망의 지배를 받기에 범죄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부활하신 이후 제자들을 만나고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입니다.
왜 성령을 받으라 하였습니까?

첫째, 제자 된 삶을 살기 위해서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제일 많이 본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열한 사도입니다. 그들은 직접 훈련을 받았습니다. 절름발이가 일어나 걷고 소경이 눈을 뜨며 더 나아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도 보았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이적을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자기들은 예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라고 자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는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지시는 그 자리에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아니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들려져도 어떤 사람은 부활을 의심하고 주변의 환경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모였어도 문을 꼭 잠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제자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름 받은 것만으로는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교육받았다고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름은 제자인지 모르나 실제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제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 이 자리에 오셨다면 무엇이라 하실 것 같습니까?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받으라 하실 것입니다.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았는데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 하셔야 합니다.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분이 교회에 잘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임종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구원의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는 무어라고 말하느냐 하면 사실대로 말씀 드리면 나는 아직도 담배를 끊지 못하고 교회에 다녔습니다. 술도 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구원을 받겠습니까? 라고 반문합니다. 이것이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내가 얼마나 교회에 나왔느냐, 무엇 할 것을 하지 못했느냐, 해서는 안될 것을 하였다는 것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살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영접하지 않고 교회생활을 수 십 년 하였다면 사실 예수와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처음 오신 분이라도 주여 나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합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주인으로 모시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면, 1) 예수님을 나의 구주라고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2) 나의 잘못된 생활을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3)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4) 그분의 원대로 명령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었으면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께서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 고 하셨습니다.(요 3:6) 영으로 나지 아니하고 육신으로 만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 하였다는 것입니다. 거듭났다면 달라져야 합니다. 아니 진정으로 예수 믿으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 변화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리적인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화학적인 변화라고 합니다. 물리적인 변화란 외형만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무가 있습니다. 나무를 톱으로 켜서 책상을 만들었습니다. 나무는 같은 나무인데 모양만 달라진 것뿐입니다. 화학적인 변화는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무를 갖고 종이를 만들었습니다. 여하간 근본이 달라지는 것을 화학적 변화라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물리적인 변화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옛사람이고, 직분만 맡았고, 주일에 성경책 끼고 교회에 왔다가는 것입니다. 성령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합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성령으로 근본이 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변화되는데 무엇이 달라진 것이냐 행동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1. 생명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육의 생명이 영의 생명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은 영혼이 가는 것입니다. 육의 생명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영혼이 살아야 산것입니다.
2. 거듭남이란 주인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자신이 주인이 되어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예수가 내 삶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3. 거듭남이란 삶의 목적이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전에는 나의 유익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거듭 났다고 완벽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수가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을 하던지 목적은 다릅니다.
4. 거듭남이란 삶의 의식이 바꿔집니다.
세상 사람처럼 가치관을 갖고 있다면 아직 거듭났다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감사의식으로 살고, 평안의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거듭나게 합니다. 제자인 사람이 되려고 하려면 거듭나야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하면 거듭난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세례는 받았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자가 되려면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라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 세례 받은 분 들은 다 함께 성령 세례도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9:2절을 보면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묻는 말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랬더니 그들이 하는 말이 우리는 성령이라는 말을 들어본 일도 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 요한의 세례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믿을 때에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1:5절에서 예수께서 "성령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받는 다는 것은 중생과 다릅니다. 중생은 성령의 기본적인 역사이고, 성령 세례는 기본적인 역사에 더욱 진전되어 제2차적인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성령 세례가 무엇인가? 를 알려면 세례라는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세례는 일치입니다. 예수와 내가 하나됨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 이것은 성령으로 하나된 것을 말합니다. 성령 세례 받은 사람들은 우리 몸 안에 성령님이 주관하십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제일로 사모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 세례 받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 받았다고 갑자기 훌륭해지는 것도 아니고 인격적으로 위대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게 주님을 기쁘신 일을 생각하게 되고 쉽게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 세례 받은 이후에는 영적인 세계가 열리고 보입니다. 자기 마음도 부드러워집니다. 성령의 세계는 영적인 세계이기에 체험해야 알 수 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이 십자가를 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성령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제자 되어지기를 원하고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자다운 신자 직분자다운 직분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성령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부활의 증인되기 위해서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입니다.

성령 받는 것이 개인적인 행복을 위한 체험이 아닙니다. 물론 영적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힘있게 증인이 되어 사명을 다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절을 보세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였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능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왜 능력을 주시는가? "증인이 되라"고 주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증인입니까? 부활의 증인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건 놀라운 사건입니다. 제자들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기대가 부풀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라도 좋은 일은 자랑하게 됩니다. 어느 시골에서 어렵게 목회 하시는 목사님께 아들이 있었습니다. 대학에 한 번 낙방한 일이 있었는데 다음 해에 서울대에 원서를 냈답니다. 발표하던 날 목사님이 그 대학에 가보았습니다. 아들 이름이 합격자 명단에 들어 있습니다. 너무 좋아하시던 목사님이 나오면서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하는 말이 여보세요. 우리 아들이 서울대에 합격했어요. 다음 사람보고 또 우리 아들이 이번에 서울대에 합격했다니까요. 아니 생각해보세요. 길가는 그 사람하고 그 목사님의 아들이 대학에 합격한 것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러나 목사님은 너무 좋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부활하신 것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왜 자랑하지 아니 합니까? 증인이 되는데 억지로 이렇게 하십시오 라고 부탁합니다. 태신자를 4월말까지 세 명 이상 적어내세요. 그것 참 부담스럽군요 라고 마음에 시험까지 드는 분들이 없지 않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증인되라는 말보다는 먼저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입니다. 성령 받아야 증인이 됩니다.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성령을 받으니까 '3 쁨' 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기쁨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그렇게 기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에 대하여 기쁘고 구원받았음에 대하여 기쁘고 날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이 믿어지기에 기쁘더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예쁘더라는 것입니다. 아내도 예쁘게 보이고 자녀들도 그렇게 예쁘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도 예쁘고 교회 모든 사람들이 예쁘게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바쁘더라는 것입니다. 성령 받으니까 새벽기도 가야 하지요. 예배 시간마다 교회 빠질 수 없지요. 전도하러 나와야 하지요. 그래서 너무 바쁘더라는 것 이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 하는데 바쁘셨습니까? 충성하는데 바빠야 합니다. 전도하는데 그렇게 분주해야 합니다. 전도하면 놀라운 축복이 임합니다. 요한복음 20:21절에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이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하신 다음에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선교 명령입니다. 같은 언어와 같은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는 전도라 하고, 다른 문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선교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선교하는데 68개국에 1천 600명 정도의 선교사를 파송 하고 선교 예산이 1백 30억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연간 술 소비량은 26억 9천 2백 90만 리터로 가격으로 환산하면 2조 5천억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선교사 몇 명을 파송 하였습니까? 신자 50명이 매월 5만원을 헌금하면 선교사 한 명을 파송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업가는 단독으로 100명을 돕고 있다고 하고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 가면 얼마나 전도하였나 선교하였나를 물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있는 곳에는 복음이 증거 되고 교회가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경찰 버스를 보세요. 뭐라 써있지요. 이동파출소라고 써 있습니다. 그 버스가 있는 곳에서는 파출소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있는 곳이 바로 독립문교회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있는 곳에는 전도가 있어야 합니다. 선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역사하지 아니하면 가능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4절에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했다" 라고 바울도 말하였습니다. 성령이 역사 하면 듣는 사람들이 나도 예수를 믿어야 하겠다 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영접하게 됩니다. 이 사명을 다하라고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입니다.

셋째, 능력 있게 살아야 하기에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전날 밤에 제자들은 모두 도망하였습니다. 3년 동안 배우고 이적을 보았으나 그들은 너무나 무능한 무리들이었습니다. 자기 선생님이 붙들려 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에도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능력입니다. 힘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힘입니다. 능력입니다. 요즈음 왜곡 교과서 문제로 일본 사람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 나라가 항의하는 말을 하고 방문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조금도 움직이지 아니합니다. 이유는 우리 나라가 그들 보기에 그렇게 무서운 나라가 아닙니다. 크게 보이지도 아니하고 겁나는 나라가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약하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현실은 힘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는 세상입니다. 여러분! 능력이 있습니까? 능력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성령이 능력입니다. 일반적으로 목사님이 설교가 끝난 이후에 신자들이 인사할 때에 하는 말이 같습니다. 오늘 은혜 받았습니다 라고 하는 말입니다. 물론 교인들이 다 인사하지는 않습니다만 인사하는 분들은 대개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무디 목사님이 설교가 끝났는데 어떤 분이 이렇게 인사하더랍니다. 목사님을 위해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화가 난 무디 목사님이 묻기를 왜 그렇게 인사합니까? 그때 그 성도가 하는 말 목사님의 설교에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시도록 기도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더랍니다. 그 뒤에 무디는 그 말에 자극을 받고 성령이 충만하기를 계속 기도하였답니다. 이 말씀에 성령의 불을 내려주옵소서 라고 오랫동안 기도하였는데 그가 바로 능력의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성령은 능력입니다.
1. 믿어지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왜 무능합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자기 신념이 있습니다. 이 일은 잘된다, 나는 성공한다는 그들은 보장이 없는 신념만으로도 잘하고 있는데, 우리는 왜 무능하게 세상을 살고 있습니까? 믿음의 문제입니다. 우리 배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데 우리는 왜 자신감도 없이 밀리고 연약한 존재로 전락되어 있습니까? 믿음문제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어집니다. 기도 응답이 믿어집니다. 그대로 되어진다고 믿어집니다. 믿음이 꿈을 줍니다. 비전이 생기게 됩니다.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믿음의 능력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2. 성령은 능력입니다. 이기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항상 두 가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는 외부로부터 오는 유혹이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적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부패성, 죄성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두 가지를 다 이길 수가 있습니다. 바울과 같이 선한 싸움 다 싸워 이깁시다. 성령의 능력이 임해야 합니다. 마귀를 이길 수가 있습니다. 마귀는 지금도 찾아오고 있습니다. 성령 받아 이기고 이기는 능력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기에 봉사하는 것도 기쁘고 좋기만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게 합니다. 주의 종들을 사랑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쉼을 내쉬며 "성령을 받아라"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 받았습니까? 성령 받아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성령 받아야 신자 노릇합니다. 구실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 받아야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 받으면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성령 받기 원하십니까? 여러분도 성령 받아야 합니다. 오늘 처음 나오신 분도 성령 받을 수 있습니다. (1) 성령을 인정하시고 믿으십시오. (2) 성령 받기를 위하여 사모해야 합니다. 성경은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3) 회개해야 합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아무런 역사도 나타나지 아니합니다. 죄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알게 되었으면 고백하고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4) 간절하게 기도하십시오. 날마다 구하기를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그러다가 성령의 권능을 받아 승리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아 멘 ∼




성령이여 오시옵소서/요14:16-17,15:26-27
2001-12-08 23:57:22   read : 151

오늘은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고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셨고 그리고 하나님의 신 성령님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사함과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중생과 기쁨과 승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오시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의 사역을 우리의 몸과 영혼 안에 이루어 주셨습니다. 성령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십자가 사건은 하나의 고고학적 사건으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책 속에 쓰여져 있는 인쇄물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므로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생동하는 사건이 되었고 성령님이 오시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가슴을 적시고 녹이는 살아있는 음성이 되었습니다.
성령님은 오순절 날 한번 오심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우리에게 오시고 또 오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순절 날, 성령의 오심은 120명이나 삼천 명에게 국한 한 것이 아니고 오고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증거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며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2:38-39). 하나님은 당신의 신 성령님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은 오순절 이후 성령님이 계속해서 오신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31).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5).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행8:17). 여기 저희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아나니아가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행9:17). 반역자 사울에게도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10:44). 여기 모든 사람은 고넬료를 비롯한 가이사랴에 살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인들과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후에 성령을 독일 사람들에게도 영국 사람들에게도 미국 사람들에게도 웨일즈 사람들에게도 한국 사람들에게도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한 교회나 한 사람에게 한 번 오시고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한 교회와 한 사람에게 계속해서 오십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계속해서 오셨고 스데반에게 계속해서 오셨고 사도 바울에게 계속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오심을 신학의 틀로 제한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중생한 사람은 성령의 세례를 다시 받을 필요가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저는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성령의 세례를 10번 받아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례를 과거의 사람이 물 속에 잠기듯 죽고 새로운 사람이 물 속에서 일어나듯 살아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성령의 세례를 10번 100번이라도 받아서 과거의 내가 완전히 죽고 성령의 사람이 나에게서 새로 태어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신학의 틀로 성령의 오심을 제한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가로 막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점은 성령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 한 사람에게 계속해서 오시고 또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성령의 오심을 사모해야 합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성령의 오심을 날마다 사모했고 로이드 존스 박사도 성령의 오심을 날마다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입니다. 한번 따라서 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시는 일 세 가지만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첫째 성령은 살리는 생명의 영입니다.
성령은 살리는 영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가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신 성령은 생명의 영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역에 근거해서 우리를 살리지만, 하나님은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우리를 살립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신을 흙으로 지은 아담의 코에 불어 넣었을 때 아담이 생령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새로운 영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바람과 같이 그리고 불과 같이 120명에게 임했을 때 저들은 모두 살아났습니다. 몸과 영혼이 새롭게 살아났습니다.
살아났다는 말은 하나님을 가깝게 친밀하게 만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영혼의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방언의 기도가 터져 나왔고 뜨거운 찬양이 터져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120명이 나중에는 3천 여명이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고 하나님을 기쁘게 찬양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살아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가깝게 친밀하게 만납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가 뜨거워지고 우리의 찬양이 뜨거워집니다. 사데교회 신자들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즉 기도가 죽었고 찬양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1907년 성령께서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 임했을 때 2천여명의 신자들이 살아났습니다. 저들의 기도가 얼마나 뜨거웠던지 저들의 기도 소리에 교회당 지붕이 날아갈 버릴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나기를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기도와 찬양이 살아가기를 바립니다.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충만이 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우리들의 기도는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입니다.
살아났다는 말은 또한 사람들을 가깝게 친밀하게 만났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했을 때 사람들의 사이가 가까워졌습니다. 인사가 친절해졌고 교제가 뜨거워졌고 물건을 주고 받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서로 교제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2).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2:44-46). 성령 충만은 생명 충만이고 생명 충만은 교제 충만이고 사랑 충만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사랑의 공동체가 됩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교제가 충만하고 사랑이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우리들의 기도는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입니다.

2 둘째 성령은 가르치시고 도와 주시는 위로의 영입니다.
성령은 미련한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시고 낙심하는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미련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도 연약합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도 곧 잘 낙심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그랬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열 두 제자들은 모두 미련하고 연약하고 낙심을 잘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미련한 제자들을 가르쳐 주시고 연약한 제자들을 도와주시고 낙심하는 제자들을 위로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해야 할 것도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스데반도 주님을 증거하는 말을 너무나 잘 했습니다.
성령님은 또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여기 보혜사라는 말은 Helper 곧 도와 주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롬8:26)라고 기록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오셔서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우리가 시험에 넘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고난과 박해를 당해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도록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그래서 승리하게 해 주십니다. 성령님은 너무나 좋으신 분입니다.
성령님은 또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여기 보혜사라는 말은 Comforter 곧 위로하시는 분이라는 말도 됩니다. 낙심하는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에게 속삭이시면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성령님이 오셔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실 뿐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위로하시면 우리는 그저 좋고 기쁘고 즐겁고 평안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으로 충만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 안에 있으면 평강과 희락이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4).
우리는 모두 미련하고 연약하고 낙심을 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이 우리들에게 오셔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충만이 오셔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성령님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모두에게 오셔서 우리 모두를 가르쳐 주시고 도와 주시고 위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우리들의 기도는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입니다.

3 셋째 성령은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주님을 증거하게 하시는 증거의 영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증거하게 하시는 전도의 영이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
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사실 성령님이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를 도와 주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주님을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오셔서 하실 가장 중요한 일이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는 일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베드로는 힘있게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스데반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스데반은 돌에 맞으면서도 힘있게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빌립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빌립은 세계 곳곳을 찾아 다니며 힘있게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힘을 얻어서 권능을 받아서 주님을 힘있게 증거하게 됩니다. 여기 힘 즉 권능은 말의 힘뿐 아니라 삶과 인격의 힘을 말합니다. 삶과 인격의 힘이란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나타나는 삶과 인격의 힘을 말합니다. 사실 말의 힘 보다는 삶과 인격의 힘이 더 강한 힘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와 같은 힘을 얻게 됩니다. 말의 힘과 아울러 삶과 인격의 힘을 얻어 어떠한 박해나 위협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주님을 담대하게 증거하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 얻은 목적은 주님을 예배하는 일과 함께 주님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분부도 우리가 주님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성령이 오셔야 우리는 주님을 힘있게 증거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충만이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우리들의 기도는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입니다.
성령은 사모하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R.A. Torray 박사는 행1:4을 해석하면서 오늘도 우리 신자들은 성령의 세례를 사모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성령의 세례를 받으려면 1)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철저하게 신뢰해야 하고 2)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고백하고 버려야 하고 3)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해야 하고 4) 성령 받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와 같은 토레이 박사의 말을 소개하면서 토레이 박사의 해석과 주장은 바른 해석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한 평생 성령의 오심을 사모해야 합니다. 한 평생 성령의 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한 평생 성령의 세례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항상 오시기를 기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항상 충만이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죽은 자와 같은 우리들이 모두 힘있게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도와 주시고 위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기쁨과 즐거움과 평강이 충만해 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힘있게 능력있게 주님을 증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 우리들의 기도는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입니다. 한번 따라서 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성령이여 우리에게 오시옵소서" "성령이여 나에게 오시옵소서"





생명력 있는 교회/행2:37-47
2001-12-08 23:58:33   read : 117

오늘은 우리 갈보리교회 열여섯번째 생일임과 동시에 성령강림을 기념하는 뜻깊은 주일입니다. 사도행전 2장 37절이하의 말씀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여러분과 우리 갈보리교회에 임하시기를 바라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충만히 임하신 것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니밍 원수들에게 잡하시기 전날 밤에 제가들에게 여러 가지 말씀으로 위로 하시고 부탁도 하시면서 분명하게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장차 너희를 떠나지만 너희로 하여금 고아와 같이 외롭게 두지 아니할 터잉 내가 가면 반드시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이 보혜사는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상상 계실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다가 3일만에 다시 사신후 40일간을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도 영양한 제자들을 따라 불러 놓으시고 분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한 것 곧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시면서 계속해서 주신 말씀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다락방에 다 같이 모였습니다. 모일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열흥 동안 계속해서 함께 기도 했습니다. 열흘만에 오순절 아침을 당했는데 갑자기 이상한 그리고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습니다. 뿐만아니라 혀와 같은 불이 모든 사람위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상한 현상과 더불어 그 당시에 거기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성령의 충만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열한사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같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충만히 임하게 되니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다시말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탄생하게 된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순절은 주님의 교회의 생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신약시대의 교회가 이날부터 시작이 된것입니다. 이 날로서 성령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구약시대에도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가령 누가복음 1장 15절에 보면 세례요한에 대해서 증거하기를 "이는 저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자"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자벳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삼손도 성령이 함께 할 때 능력을 얻어 블레셋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사울왕도 성령이 함께 할 때 능력있는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왕도 어린 소년시절에 성령이 함께해서 온 이스라엘 군대가 두려워 떠는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물매돌 하나로 쳐 죽였습니다. 솔로몬왕도 성령이 함께 할 때 지혜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바가 있었습니다. 가령 이사야 44장 3절 말씀을 보세요. "대저 내가 갈한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음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요엘서 2장 28절에도 "그후에 내가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구약시대의 결론을 지은 세례요한도 마가복음 1장 8절에 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3-3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무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 등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가하였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동사는 문법적으로 말하면 현재분사입니다. 말하자면 시간성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은 옛날 오순절 그때만 임하시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임하신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온 우주적 이니다.
요엘 선지가 강조했던 것을 사도 베드로가 인용한바 있습니다.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라" 성령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차별하지 않고 임하는 축복인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38,39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우리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회개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가 설교한 내용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도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중에 하루 3천명이 회개하고 에수를 믿어 세례를 받게 된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계속적인 축복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명절 끝날 많은 사람이 있는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자의 받을 성령을 가르려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G.C.Ryle 감독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은 금글자로 인쇄된 부분이 있는데 바로 이 말씀이 그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수의 강이 우리 심령 속에 흐를 때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합니다. 이 얼마나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처럼 특별한 축복, 우주적인 축복, 계속적인 축복을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는 성령은 그저 예수 믿게 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보세요.
"성령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시인 할수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무슨말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내 구주로 믿는다면 믿는다는 것 자체가 성령에 의해서 믿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제다들은 자기들이 들은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라가 얼른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에 만족해 하신 에수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 말은 베드로 자신이 생각해서 한 대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이와 같은 고백을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시작할 때 신앙고백을 하는데 이것은형식으로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내 중심으로 신당을 고백하는데 의미가 있는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크게 나누면 두가지로 볼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육에 속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어로 이런 사람을 Carnel Christian 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성령을 통해서 예수를 구주로 믿기는 하지마는 아직도 육신에 속해 있어서 마음에는 기쁨도 없습니다. 사랑도 없습니다. 평화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기는 하지마는 언제나 근심과 걱정 미움과 시기 불안과 공포속에 삽니다. 어떤때는 죄를 범하고 마음아파하고 고민합니다.
다른 하나는, 영에 속해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영어로 Spiritaol Christian 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말할것도 없고 언제나 주안에 거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사랑이 충만합니다. 기쁨이 가득합니다. 언제나 평안하게 살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합니다. 그러므로 그 삶에는 성장과 발전 그리고 승리가 있습니다.
교회는 생명체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살아 있어야 합니다. 아니 교회도 죽은 교회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생명력이 없으면 죽은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사데교회가 나오는데 그 교회는 죽은 교회라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했습니다. 중세기의 교회를 보세요. 콘스탄틴 황제가 교회의 수호자며 지지자라는 것을 교회가 세상에 선포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제정 공포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외형적으로 중세기 이상 왕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야 사람축에 들었고 기독교인이 아니면 직장을 가지기도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왕성해 갔습니다. 문자그대로 기독교의 황금시대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중세교회의 내적으로 말할 수 없이 부패해졌고 무력하게 되어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어 죽은 교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왜 암흑시대입니까? 교회가 그렇게 왕성했는데 왜 어두운 시대였습니까? 교회는 많았고 전국민이 기독교인이었지마는 교회가 교회로서의 생명력이 없으니까 빚을 잃게 되고 교회가 빛을 발하지 못하니까 세상은 어두워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회의 수호자는 세상의 권력자인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권력자가 교회의 수호자가 될 때 교회는 생명을 잃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자가 교회를 옹호할 때 외형적으로는 성장하고, 번성하고, 활개를 치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의 참된 모습은 그것이 아닙니다.
세상 권력은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의 장식품으로 생각하게 쉽습니다. 교회를 이용하려 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모든 국가 행사에 교회의 성직자를 세워 복을 빌게 합니다. 아마 내년이 대선이 있는데 그 동안 안오시던 분들이 또 찾아 올것입니다. 한표라도 더 얻어보려고 할 것입니다.
성직자로써 권력을 등에 지면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는데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가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데 더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맞게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생명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다하지 못할 때 교회는 생명을 잃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이름뿐이고 실상은 죽은 교회입니다.
사데 교회는 주님께서 보실 때 너무 인위적인 것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 권력자가 전적으로 교회를 후원하게 되니까 교회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보다 무엇을 하던지 권력자의 처사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미 교회로서의 의미는 없어지고 만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의지하고 사람을 바라보게 되면 교회는 생명을 잃어 버리고 맙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동안 살수가 있습니다. 사데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의 불꽃 같은 눈으로 보실 때 '살았다하는 이름만 있었지 실상은 죽은교회'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살았다하는 이름'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겉모양은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굉장한 조직 물샐틈없는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생명이 없이 하나님의 교회가 사람노름이 되면 그것은 살았다하는 이름뿐입니다. 이것은 비극중에 비극이니다. 주님의 교회가 있다고 하지마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면 그런 교회는 사실 세상에 있으나 마나한 교회입니다. 아니, 오히려 있어서 썩은 냄새만 피은 결과가 되고 맙니다.
교회는 살아 있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교회라야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죽은 교회는 부패합니다. 더럽습니다. 냄새가 납니다.
그러면 교회의 생명력은 무엇입니까?
교회의 생명력은 성령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충만한 초대 교회는 세상 적인 표준으로 보면 아무 것도 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할 때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교회, 생명력 있는 교회는 성령이 충만할 교회입니다.
그러면 생명력 있는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1. 생명력 있는 교회는 서로 사랑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네 제자인줄 알리라"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순절에 성령 충만히 받기 전에는 서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서로가 시기하고 미워하고 다투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으시고 착잡한 심정으로 마지막 만찬을 나누려고 어느 집에 모이게 되었는데 누구하나 나서서 발을 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동료 제자들은 말할 것 없고 선생님의 발을 씻으러 하지 않고 버티고 앉아 있었습니다. 하인이나 하는 일을 나는 하지 않겠다는 자세였습니다. 여러분,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대야에 물을 떠다가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딱아 주셨겠습니까? 제자들의 분위기가 이 정도였습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누가 좀더 좋은 자리, 좀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까 하는 것 때문에 신경전이 날카롭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새 계명을 주셨지만 새 계명은 그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되니까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히 받고 나니 옛 사람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 생명이 마음속에 강같이 흐르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이해 같이 빛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변하고 나니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노력이나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아들, 보아노게 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성품이 불같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장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쳐서 멸해 버려야 속이 시원하리라고 생각하던 요한도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나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믿음의 자녀들에게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 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고 권면하게 된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기분에 안 맞으면 칼을 들어 내려치는 다혈질적인 성품의 소유자 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나니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무엇보다 열심히 사랑할찌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도 바울도 무슨 일이든지 사랑가운데서 행하라고 권면하면서 믿음도 있어야 하고 소망도 꼭 필요하지만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여러 가지 있지만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생명력 있는 초대교회는 세로가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역사를 연구한 요세푸스는 초대교회를 연구하다가 탄성을 질렀습니다. "보라, 저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했는가를"
초대교회에 권력자가 있었던 것 아닙니다. 초대교회에 재벌이 있었던것도 아닙니다. 초대교회에 대학자가 있었던것도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성도가 서로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사랑이 굶주린 무리들이 그 사랑의 품에 안기고 싶어서 모여든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초대 교회처럼 성령충만하여 서로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생명력 있는 교회는 사람들이 두려워 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을 체험하게 된 초대교회는 생명력이 약동하는 교회로 태어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강하고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교권주의의 상징이었던 예루살렘 공회에서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되어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다가 심문을 하면서 공갈도 했습니다.
사실 베드로 사도로 말하면 예수님이 재판을 받을 때 그 분위기가 너무 험해서 도저히 자기가 예수를 따르던 사람이라는 말을 하기조차 어려워 두려워한 나머지 어린 비자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사람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오순절 때 성령층만히 받고 나니까 완전히 변했습니다. 비겁하던 베드로가 강하고 담대한 주님의 사도로 변했습니다.
그 당시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 그리고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가 참여한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을 법정에 세우고 "너희가 도대체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하며 이적과 기사를 행한 것을 추궁했습니다. 그때 베드로 사도는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면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 주신 일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으니까 궁여지책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앞으로는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뭐하고 대답했어요?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디서 이런 담대함이 생겼습니까? 성령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생명력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를 대하는 세상의 태도는 두 가지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두려워하느냐? 아니면 세상이 교회를 업신여기느냐 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이 교회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을 두려워하면 세상은 교회를 업신여깁니다.
교회는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교회를 두려워하게 되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나쁜 일을 하면서 교회를 의식하게 되어야지 나쁜 일을 하면서 교회더러 축복해 달라면 안됩니다.
3. 생명력 있는 교회는 구원받는 사람이 더해갑니다.
오늘주신 말씀 47절에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요사이 논에 모른 심는 때입니다. 세네개의 모를 심으면 여름 지나는 동안에 20개 30개로 퍼져서 곡식을 맺습니다. 살아 있으면 번식합니다. 죽은 것은 썩어 버리고 맙니다.
교회에 구원받는 사람이 더해 간다는 것은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교회는 바로 여러분을 통해서 날마다 구원받은 사람이 더해 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빌립을 통해서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게 된 것처럼 예수를 모르고 사망가운데 있던 심령들이 여러분을 통해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정원의 나무를 보니까 생명력이 왕성한 나무는 기계가 무성하게 터집니다. 그런데 간신히 살아있는 나무는 가지가 퍼지지 못합니다. 내 심령의 나무는 어떤 상태입니까?





한 생명으로 엮으시는 성령 겔37: 1-10 고전12: 4-13
2002-01-29 11:21:25   read : 94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임과 동시에 환경주일이기도 합니다. 세계 환경의 날이 6월 5일인데, 2001년 주제는 "Connect with World Wide Web of life"로 우리말로는 "이 땅의 모든 생명체를 하나의 네트웍크로"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인터넷의 전 세계적인 네트웍크와 같이 "생명의 전 세계적인 네트웍크를 만들어" 하나의 생명공동체를 만들어 가자는 뜻입니다. 인터넷이 그물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전 세계가 서로 통하는 것처럼, 생명도 인간과 자연 할 것 없이 서로 그물처럼 연결되는 하나의 생명공동체를 만들어 가자는 뜻일 것입니다.





인터넷이란 전 세계에 있는 컴퓨터가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거대한 정보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내 방에 앉아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정보를 받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정보를 인터넷에 올려놓으면 전 세계 누구든지 와서 볼 수 있고 가져갈 수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이런 인터넷을 이용하여 슈퍼컴퓨터가 하는 일을 한다고 신문에 보도가 되었습니다. `인터넷 슈퍼컴퓨터'는 분산 컴퓨팅 기술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작업을 주도하는 서버가, 일거리를 개인용 컴퓨터가 가뿐하게 처리할 수 있는 크기로 쪼개서 맡긴 뒤 결과를 받아 합치는 방법입니다. 슈퍼컴퓨터로 해야 할 일을 개인용 컴퓨터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일거리를 나누고, 처리 결과를 받을 때는 인터넷을 이용합니다. 혼자하면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릴 일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맡기면 하루에 처리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슈퍼컴퓨터는 아주 복잡한 계산을 빠른 시간에 할 수 있는 대단히 큰 컴퓨터를 말하는데, 가령 최근에 서울대학교에 들어온 IBM사의 슈퍼컴퓨터는 중앙처리장치(CPU) 144개, 메모리 144GB에 1Gbps 속도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이런 슈퍼컴퓨터의 값은 대단히 비싸고, 따라서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도 비싼 사용료를 내야만 합니다. 이런 슈퍼컴퓨터로 해야 할 일을 수 백대의 개인용 컴퓨터에 나누어 맡기면 돈 별로 안 들이고 큰 일을 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을 맡길 컴퓨터를 많이 확보하면 슈퍼컴퓨터급 이상의 성능을 구현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 일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은 관계된 기관에 회원으로 등록하고 프로그램을 받아서 자기 컴퓨터에 설치하고, 24시간 컴퓨터를 켜 놓으면 됩니다. 놀리는 컴퓨터 자원을 활용하고, 컴퓨터 사용자들에게 `나눔과 공유'를 통해 사회에 공헌하는 기쁨을 맛보게 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대학과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인터넷 슈퍼컴퓨터를 구축해 활용하는 곳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혜성의 진로 예측, 외계인 생명체 찾기, 소수 찾기, 암이나 에이즈 정복, 인간 유전자 해독, 단백질 구조 분석, 신약 개발, 주가 추이 분석, 투자위험 관리 등 용도도 다양하다고 합니다.



오늘 읽어 드린 고린도전서 12장 말씀에 보면,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7절에 보면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시는 것은 공동의 이익을 얻게 하려고 하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나누어주시는데, 그것은 그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전체 생명공동체를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늘 이 성경 말씀을 읽었으면서도 전에는 전혀 관심 있게 보지 않았던 구절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나누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은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작업을 하시는데 슈퍼컴퓨터 같은 거대한 작업 도구가 필요하신데, 그 일을 나누어서 개인용 컴퓨터 같은 믿는 사람 개개인에게 은사를 나누어 맡기시는 것입니다. 각기 다른 은사를 받은 우리는 주어진 자리에서 그 은사를 가지고 열심히 일하면 성령께서 나중에 그것을 모두 함께 모아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2장 12절 이하에서 몸과 지체의 비유를 통하여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어서 각기 다른 기능을 수행하면서 결국 하나의 몸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나 하나님의 나라도 이와 같이 여러 생명체들이 제각기 주어진 기능을 하면서 그것이 다 모여 결국 교회를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의 생명공동체



첫째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은 하나의 생명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몸에 많은 지체가 있지만 결국은 하나의 몸을 구성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은 무척 다양하지만, 그 모든 피조물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생명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개인용 컴퓨터를 슈퍼컴퓨터처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인터넷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인터넷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전 세계를 그물처럼 얽어놓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정보망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 세계에 많은 컴퓨터가 있지만 그것이 인터넷이란 하나의 그물망에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 있는 작동하는 모든 컴퓨터가 꺼져 있든 켜져 있든 결국은 하나의 망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이 컴퓨터들이 모두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작동한다면 이 세계는 놀랍게 발전하고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악한 의지를 가진 지배자가 나타나면 세계는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도 이와 같이 서로 다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가 가진 정보를 이용하면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 피조물 가운데 하나인 인간이 죄로 타락하면서 이 생명공동체를 파괴하여 하나로 연결되어 있던 세계를 산산조각을 내버렸습니다. 하나의 생명공동체로 움직일 때 하나님의 세계는 건강할 수 있지만, 그 공동체가 깨어질 때 그 생명은 시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 생명공동체를 회복하시고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가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그 속에 자리잡은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기틀을 놓으셨습니다. 그 후 성령께서 오셔서 이 깨어진 세계의 회복을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구약성경 에스겔서 37장에 나타난 에스겔 골짜기 환상 이야기에 보면, 각각 흩어져 말라버린 뼈들이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모아지고 거기에 살과 힘줄이 붙은 다음 다시 생기를 불어넣자 마침내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성령이 하시는 일이 바로 뿔뿔이 흩어져버린 메마른 생명들을 하나로 엮어 온전한 생명, 하나님과 연결된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성령께서 우리 속에 은사를 주시고, 또 우리 속에 들어있는 육적 욕망을 제거하여 하나님의 전체 생명공동체를 보게 하십니다. 바울은 성령을 통해서 모든 피조물이 하나가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자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고전 12:13



구원이란 내가 이런 큰 생명공동체에 연결된 한 지체가 됨을 뜻합니다. 전에는 나 중심의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생명공동체 중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 생명공동체가 바로 교회이고 그 교회의 머리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 생명만 중요하게 여기던 좁은 시야를 버리고 이제는 전체 생명공동체를 보면서 공동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게 됩니다. 이 생명공동체가 살아날 때 우리는 놀라운 생명의 은총을 나누게 되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우리가 인터넷에 연결되면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생명의 네트웍크에 연결되기만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의 능력과 은총과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의 시야를 넓히십시오. 나만을 위한 삶에서 이제는 이웃을 돌보고 환경을 생각하며 전체 생명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극히 작은 일이 모여



둘째로, 지체된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일은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그것이 모여서 마침내 큰 몸을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슈퍼컴퓨터에 비하면 개인용 컴퓨터는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그 개인용 컴퓨터가 하는 작은 연산들이 모이면 슈퍼컴퓨터보다 더 큰 것을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인터넷 슈퍼컴퓨터'에 있어서 개인용 컴퓨터를 가진 사람이 하는 일이란 고작 컴퓨터를 계속 켜 놓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인류의 큰 숙제들 즉 암이나 에이즈의 문제를 해결한다든지, 신약을 개발하는 일을 해 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각각 은사를 나누어주시지만, 그 은사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가 특별히 하는 일이 없습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바른 삶을 이루어 가기만 하면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보면, 오른 쪽에 구별된 사람들이 한 일이란 고작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 떠 준 일,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그릇 대접한 일, 병든 이를 돌아본 일,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준 일 등이 고작입니다. 그것 자체로만 보면 무엇이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보잘 것 없는 일 때문에 그들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을 베푼 것 이외에 특별히 한 일이 없었지만, 바로 그 관심과 사랑이 전체 생명공동체를 살리는 큰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환경운동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환경회복운동이란 기껏 해서 쓰레기 줄이고, 물을 아껴 쓰고, 세제 덜 쓰며, 자동차 좀 덜 타고 하는 정도일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중요한 것은 거기에 전체 생명공동체를 생각하는 마음과 사랑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어떤 거창한 사업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세우며, 겸손하게 그 뜻을 받들어 가라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큰 생명공동체가 있음을 알고 그 일에 협력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자신의 삶을 바르게 이루어 갈 때, 그것을 통해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이 들어 죽음에 임박하였을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흔히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음을 한탄합니다. 사실 특별한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을만한 어떤 큰 업적을 이루지 못한 채 그의 생애를 마감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업적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맞게 충실하게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 속에 자리잡았던 욕망을 빼어버리고 성령을 좇아 영적 삶을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전체 생명공동체 속에 주어진 자기의 자리를 충실하게 지키면서 정직하게 바르게 살았다면, 심판 때에 오른편에 구별된 양의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도록 마음문을 열자



끝으로, 성령의 역사에 자신을 언제나 열어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 들어와 역사 하시도록 마음문을 열어 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은사를 주실 때에 적극적으로 받아드리고 그 은사를 잘 활용함이 중요합니다. 결국 그것은 내 속에 모든 욕망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내가 이 땅을 향한 욕망에 사로 잡혀 있는 한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내게 은사를 나누어 주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마음이 닫혀 있다는 것은 전체 생명공동체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만 몰두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반대로 마음이 열렸다는 것은 자신의 삶만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그 일에 협력함을 뜻합니다.



인터넷 슈퍼컴퓨터를 이루려면, 내 컴퓨터를 24시간 켜 놓고 주관하는 쪽에서 내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 컴퓨터를 내가 쓸 때만 켠다든지, 혹은 가입을 해 놓고도 내 일을 위해서만 모든 용량을 다 사용해 버리면 인터넷 슈퍼컴퓨터에 기여하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나를 활용하실 수 있도록 나를 비울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내 일에만 몰두한다면, 성령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협력한다는 것은 모든 육적 욕망을 억제하고 성령이 하시는 일에 관심을 가지며 그 일이 어떤 것인지 살피면서 그 일에 나 자신이 쓰일 수 있도록 함이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육체의 욕망을 좇는 자와 성령의 뜻을 따르는 자가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내 욕망을 좇는 삶에서 돌이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시는 역사에 함께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이런 우리 자신의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의 삶의 목표를 거기에 맞출 때 우리는 생명공동체의 네트웍크에 연결이 될 것이고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갈가리 찢어졌던 생명공동체를 하나로 엮어 가시는 성령의 역사를 올바로 인식하면서 여러분의 마음문을 열어 성령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보내시는 생명의 바람을 받으면 마른 뼈와 같이 무기력하였던 생명체들이 다시 활기를 얻으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가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지금 생명공동체를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 모두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받은 바 은사를 잘 활용하여 하나의 생명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협력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엄청난 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일들이지만 생명공동체를 세우는 쪽으로 실천하는 것이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생명의 컴퓨터를 모두 켜십시오. 그리고 생명의 네트웍크에 모두 연결하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여러분 속에 들어오셔서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생명의 체계에 연결이 되어 놀라운 생명의 능력과 기쁨을 맛보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 우리의 해방자 눅4장 16~19절
2002-01-29 11:26:56   read : 104

“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문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



창세기 1장에 성령께서는 창조의 영으로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무시무시한 상황 위에 성령께서 운행하셔서 놀라운 질서와 아름다움과 풍요와 생명으로 넘치는 활기찬 세계를 지으셨습니다.
구약시대 출애굽 때에도 성령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고 사사 시절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이방 나라와 민족의 종이 되었을 때도 사사라는 특정인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위대한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향땅 나사렛에 오셔서 회당에서 복음선언을 하실 때도 성령께서 임하셨기 때문에 구원과 해방의 사역을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오순절 이후 2천년 동안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하사 계속적으로 해방의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1.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심

성령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오늘도 계속하십니다. 원래 인간은 가난하게 지음 받지 않았습니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고 에덴동산 낙원에서 살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가난은 아담이 타락한 결과입니다. 아담이 반역죄로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저주가 왔고 그 결과로 오늘날 가난이 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가난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불순종과 불신앙과 반역의 죄로 말미암은 저주 때문에 온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은혜로 영육간에 축복을 가져오셨습니다. 첫째 아담이 타락함으로 가져온 저주와 가난을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저주와 가난을 대신 짊어지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가 가난함 속에 살고 있기를 원치 아니한다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또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져온 저주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보혈을 흘리심으로 청산하셨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에게 꿈과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환경적으로 가난하고 가시와 엉겅퀴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운명이 달라진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가난과 저주에서 옮기신 사실을 기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통해서 이 진리를 우리 마음속에 전달하여 우리의 영혼이 가난과 저주의 사슬에서 해방받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고 해방되면 그것이 우리의 현실 환경 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셔야만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성령님이 안계시면 인간의 이성과 감각만으로는 이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17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 마음속에 깨닫게 해 주셔야 합니다. 성령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세상 사람들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이 오셔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가난과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셨다는 사실을 마음 속으로 깨닫고 믿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님이 오신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구원 받고 성령 충만하여 복을 받습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의 복을 받고 우리 생활을 파고드는 저주와 가난에서 해방을 얻게 됩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복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이루셨다는 사실을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2.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심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인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사야 43장 7절에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친히 만드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인간은 포로와 속박 속에 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 마귀와 귀신의 포로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타락한 이후로 마귀와 그 종자인 귀신들에게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는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알다시피 더러운 귀신은 가는 곳마다 사람의 마음속에 더러운 생각, 더러운 말, 더러운 행위를 하게 합니다. 사회와 국가, 세계가 부패한 소용돌이 속에 떨어진 것은 더러운 귀신의 역사가 그 배후에 항상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법을 조정하고 사회 개혁을 해도 순식간에 부패합니다. 왜냐하면 더러운 영이 있어서 항상 부패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이 더러운 영을 쫓아 내기 전에는 우리의 환경 속에 부패를 제할 수 없습니다.

또한 악한 영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서 마음 속에 고통을 가져옵니다. 악한 영은 개인에게 고통을 가져올 뿐 아니라 이웃에게 고통을 가져옵니다. 악한 남편은 부인과 자녀들에게 고통을 줍니다. 악한 부인은 남편과 자식들에게 고통을 줍니다. 악한 자녀들은 부모의 가슴 속에 상처 투성이를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악은 사회와 국가와 세계에 분열과 고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 악한 영이 배후에 있기 때문에 오늘날 악을 아무리 제하려고 사람들이 애를 써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배후에 악한 영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귀신들이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하나님 곁을 멀리 떠나 살게 합니다. 사람들을 데리고 먼 나라로 간 세속적인 영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모르고 살게 하다가 영원히 멸망 받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온갖 탐욕을 세속적인 영이 가져옵니다. 그 탐욕으로 말미암아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달콤한 탐욕으로 유혹을 불어넣습니다. 그래서 눈을 어둡게 합니다. 결국에는 파멸로 들어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마귀는 귀신들을 통해서 무속 신앙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젊은 이들이나 정치인, 사업가들이 역술인들이 모여있는 곳을 많이 찾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인터넷 인구가 2천만명으로 추산되는데 운세 관련 서비스의 경우 여성이 남성보다 최고 6배 이상 많이 이용한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과학과 정보 사회에도 미신은 성행합니다.

지난 해에는 운세 사이트 이용자수가 3만명, 금년에는 12만명으로 급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국민 52%가 점을 본 적이 있고 사주 풀이를 믿는 사람이 40%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귀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에 불안과 공포와 초조를 이용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마귀는 지금도 미혹의 영으로 마음을 미혹케 하고 요행을 믿게 하고 사행심을 갖게 하고 열심히 충성스럽게 일할 필요가 없다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사회가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울수록 무속 신앙이 팽배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다 귀신에 이르는 것입니다.

한편 여러 가지 정신적인 장애를 귀신이 가져와서 사람들로 하여금 정상적인 삶을 못 살게 합니다. 술 취하게 만들고 도박에 빠지게 하고 방탕하게 하는 것이 귀신들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귀신들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은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될 때 미혹케 하는 귀신은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케 해서 복음이 전혀 깨달아지지 않고 들리지도 않고 복음을 어리석게 생각하도록 그렇게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결국 멸망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오시면 이 모든 귀신의 역사를 내어쫓아 버리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귀신으로부터 해방받게 하고 의롭고 참되고 거룩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귀신으로부터 해방을 얻고 자유롭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하였고 마가복음 16장 17절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사람들은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마귀와 귀신들과 친숙하게 살았습니다. 마치 한 가족처럼 느끼고 귀신이 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해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중생하고 나면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십니다. 그래서 귀신을 내어 쫓아 자유와 해방을 얻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3.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심

인간은 영원히 육체를 입고 살기 때문에 영의 눈과 육의 눈이 동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은 영의 눈을 멀게 해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타락한 인간은 영적인 세계는 전혀 모릅니다.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칠흑같고 벽에 부딪히는 것 같습니다. 전혀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대인도 로마인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줄 몰랐습니다.

로마서 10장 16절에서 17절에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우리 마음속에 비춰주고 깨닫게 해주고 우리 영혼을 살려 주시면 비로소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들을 어떻게 믿습니까?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죽은 영혼이 살아나야 아들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만이 우리 눈을 떠서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고 믿을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새롭게 만들어주고 영안을 열어 주십니다.

에베소서 1장 17절에서 18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 의 풍성이 무엇이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며 간구하면 성령께서 우리 눈에 비늘을 제하시고 우리에게 밝히 볼 수 있는 영 안을 열어 주십니다. 영안이 열려야 진리의 말씀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4.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심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압제 당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영혼도 자유롭고 마음도 자유롭고 육체의 생활도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 마귀의 압제에 들어가고 마귀의 종이 되었습니다. 마귀가 인간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습니다.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묶어 놓고 종으로 삼고 불행과 고통을 당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회적 제도의 압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볼 때 공산주의도 있고 독재주의도 있고 전제주의도 있고 자본 주의도 있지만 어느 사회나 압제가 있고 고통이 있고 괴로움이 존재합니다. 이런 것은 전부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 다가온 것입니다.
육체적인 압제에 의해서 가지가지 질병이 생깁니다. 마귀에게 눌려서 사람들이 병이 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치료는 마귀에게 눌린 자를 고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폐를 누르면 폐병도 되고 폐암도 되고 마귀가 관절을 노리면 관절염이 됩니다. 물론 사람들이 마귀에게 기회를 주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과거에 담배를 피웠기 때문에 마귀가 폐암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귀가 틈타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이러한 사회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보혈의 능력으로 개혁과 해방을 가져오십니다. 성령님은 독재주의, 공산주의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기뻐하고 도와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인간답게 인권을 사용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독재주의로 고통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마귀의 역사입니다.
또 공산주의로 인해 인권을 잃어버리고 노예 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마귀의 궤계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 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온 사회와 국가는 여러 가지 제도에서 억압적 요소를 제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일들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과 자유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육신의 질병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질병은 스트레스로 인해 많이 생깁니다. 성령님은 이 스트레스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고 치료해 주십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돌에 눌린 풀은 노랗게 되어서 잘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나 돌을 옮겨 놓으면 노란 풀이 순식간에 태양 빛을 받고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질병의 60%에서 90%는 마음, 즉 스트레스로부터 온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이 연구에 의하면 심장 수술 받은 사람 가운에 살아 남은 환자를 조사해 보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보다 3배나 많고 건강하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경쟁사회가 불러온 과도한 스트레스가 몸 속에 쌓이면 혈압이 오르고 면역 기능이 약화되고 약한 감기도 완치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이러므로 우리 마음 속에 스트레스라는 것은 우리 몸에 병을 유도하는 활짝 열린 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고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스트레스가 온다고 항상 여행이나 다니고 한가하게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스트레스에서 풀려날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님이 오셔서 그 은혜로 말미암아 마음에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채워주십니다.

5. 궁극적인 희망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은혜의 해를 전파하러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희년을 말하는 것입니다. 7년 안식년이 일곱번 계속되어 49년이 되면 대속죄일을 지내고 난 다음 50년만에 희년의 나팔을 붑니다. 희년에는 잃어버린 고향과 전토로 모두다 복귀하여 귀가하는 때입니다. 따라서 희년은 모든 사람에게 거대한 희망의 해가 되는 것입니다.

레위기 25장 10절에서 11절에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0년이 되면 50년 전 팔았던 집과 땅을 원주인에게로 돌려주고 종으로 팔렸으면 50년이 된 희년에 다 해방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희년은 자유와 해방을 얻는 위대한 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희년은 예수님의 재림과 천국으로 돌아가는 날인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위에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고통이 끝나고 주님께서 강림하시는 그날에 ‘잘 있거라 세상아! 나는 가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의 모든 고통을 벗어 버리고 해방과 자유를 누리고 영원한 천국으로 간다’는 그날이 바로 희년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희년의 소식을 증거하러 오셨는데 이 사실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희년을 통해서 영원한 천국으로 데려 가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것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고통에서 허덕이던 삶이 종결 짓고 우리가 다시 옛 에덴동산과 같은 영원한 천국의 영광으로 복귀하는 희년의 해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희년은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강림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는 날엔 우린 모든 속박에서 해방이 되고 종살이에서 풀려나고 영원한 자유와 기쁨 속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은 바로 이러한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힘입어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순절날 성령을 받고 동일한 복음 사역을 하셨습니다.

오늘날 지상에 있는 예수님의 몸은 교회요, 교회는 성령님의 도구가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해방과 치료를 주는 복음 사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사역은 바로 성령님의 사역을 온 천하에 전하고 천국 복음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천년 전 오순절 다락방에서 1백20명의 제자에게 성령이 임하신 결과 그들은 온 천하에 다니며 그리스도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나라에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오늘 성령님은 이 자리에 와 계시고 교회에 충만하시며 교회를 옷 입고 여러분을 옷 입고 오늘도 계속해서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가난한 자에게 복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는 다시 보게됨을 눌린 자가 자유케 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여러분에게 나타내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 기도 -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아버지 하나님.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우리 죽은 영혼 을 살려 주시고 마음에 깨달음을 주셔서 우리 영혼 속에 변화가 다가오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 성령으 로 말미암아 진리를 듣고 우리 마음이 먼저 자유를 얻고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축복의 샘물이 넘쳐 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유와 해방을 얻고 자유를 선포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生命의 靈 - 聖靈' 시104:24∼35, 행2:1∼13
2002-01-29 11:28:12   read : 82

저는 금년 이월에 캄보디아를 다녀왔습니다. 캄보디아 수도인 프놈펜에 머물면서 그 곳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이 성민 선교사와 함게 몇 곳의 선교지를 방문하였습니다. 프놈펜을 떠나는 바로 전날 저녁에 그곳에 있는 우리 교단 선교사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한 후 대담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그들이 선교지에서 경험하고 있는 어려움들을 주로 듣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나중에 저의 생각을 그들에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캄보디아가 불교 국가이기 때문에 매우 힘든 영적 싸움이 언제나 진행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영적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영적으로 무장하여야 하며, 어떻게 건전한 영성을 형성해 갈 수 있느냐는 문제였습니다. 그러한 문제에 대해 그들은 저에게 어떤 만족스러운 해답을 요구 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선교사로서 건전한 영성을 형성해 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선교 사역지인 캄보디아를 영적 대결의 장으로 보지 말고, 선교사 자신들이 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 그들을 사랑하고 있는 하나님, 그들을 선교지에 보내신 하나님이, 그들과 꼭같이 캄보디아와 캄보디아 국민을 사랑하시며, 그곳에서 활동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받아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 그곳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선교를 해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할 때 선교가 이루어지며, 선교사로서 갖추어야 할 영성이 형성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 우리 가운데서 역사해 가시는 하나님께서 캄보디아 사람들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알리기를 원하시고, 그들에게 복된 삶의 길을 가르쳐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서 활동하십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캄보디아 사람들에게도 생명을 주셨고, 우리에게 자연이라는 삶의 상황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서 역시 캄보디아 땅을 지으셨습니다. 우리와 캄보디아 국민은 같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고, 삼천리 금수강산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인도 지나 반도를 지으셨습니다. 그들이나 우리 모두 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으로 말미암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캄보디아 국민, 좀더 나아가서 전 세계 사람,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으로 살아 갑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생명은 없습니다.

그래서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생명의 가치에 대해 눈을 뜨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생명의 가치를 바르게 이해하고 깨닫는 순간부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무시한 정치, 경제, 종교, 학문, 사상은 매우 위험스러운 것들입니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인류를 위해 유익한 일을 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생명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존중히 여긴 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생명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먼저 생명은 일정한 어떤 목적을 향해 계속 흐름이 진행되어 갑니다. 생명은 결코 정태적인 것이 아닙니다. 계속 움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가진 피조물들에게는 불안과 동요가 있습니다. 죽은 것들에는 동요가 없습니다.

둘째, 이 생명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서 어떤 통합적인 완성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생명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이 손상을 입거나 파괴 되면 다른 부분에 깊은 부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예를들면 인간이 자신만을 생각하고 나무와 숲을 마구 훼손하고, 물과 땅을 오염시키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오로지 자연과 관계에서만 더욱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 모든 형체를 가진 생명체들은 흙으로부터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 땅은 어머니입니다. 어린아이의 생명이 어머니의 품에서 구체적으로 형성되어 가듯이 모든 생명체들에게 땅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땅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어머니입니다. 생명체들이 죽으면 역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넷째, 이 생명에는 등급이 있습니다. 그러한 등급은 모든 피조물들의 각양 각색의 종류들로 나타나 있습니다. 어류, 곤충류, 동물, 자연(나무, 풀, 꽃, 채소)등 이중에서 최고의 등급은 인간입니다. 생명의 최고의 등급인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살아있는 것들과의 유기적 관계가 손상되거나 파괴되지 않도록 개발하고 보존해 가는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다섯째, 특히 인간은 생명의 실체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명력을 갖게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기운을 공급받지 못할 때 무기력, 무의미, 고갈에 빠지게 됩니다.

시인은 그러한 세상을 찬양합니다. 시인이 세상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은 매우 예리합니다.

"주님, 주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께서 지혜로 만드셨으니,

땅에는 주님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합니다.

저 크고 넓은 바다에는,

크고 작은 고기들이 헤아릴 수 없이 우글거립니다.

물 위로는 배들도 오가며,

주님이 지으신 리워야단도

그 속에서 놉니다.

이 모든 피조물이 주님만 바라보며,

때를 따라서 먹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먹이를 주시면,

그들은 받아 먹고

주께서 공급하여 주시면

그들은 좋은 것으로 배를 불립니다.

그러나 주께서 얼굴을 숨기시면

그들은 떨면서 두려워하고,

주께서 호흡을 거두어들이시면

그들은 죽어서 본래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주께서 주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주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주의 영광은 영원하다

주님은 친히 행하신 일로 기뻐하신다.

주님이 굽어보기만 하셔도 땅은 떨고,

주님이 산에 닿기만 하셔도

산이 연기를 뿜는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나는 주님을 노래할 것이다.

숨을 거두는 그때까지 시를 읊어서,

하나님을 노래할 것이다."

시인은 죽음으로 가득찬 세상을 보지 않고 생명으로 가득찬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러한 생명으로 가득찬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함께 하신 분이 생명의 영이신 성령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 창조의 영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공동체인 이 세상은 인간의 탐욕, 이기심으로 자꾸 훼손되고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감수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늘의 현실에서 생명들의 찬양소리 보다는 생명들의 고통의 신음소리를 더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인간에 의해 손상되고 파괴되어 가는 자연계의 생명들은 고통의 신음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들 스스로 파괴해 가는 생명 질서의 파괴로 인해 역시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해마다 늘어나는 낙태로 인한 영아살해, 공기 오염과 썩은 물로 죽어가는 수백만의 어린 생명들, 폭력, 살인, 기아, 전쟁으로 죽어가고 있는 생명들의 신음 소리는 우리의 귓전에 쉴새 없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일찍이 창세기 저자는 이러한 생명의 신음소리를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 (창 4:10)

한편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함께 겪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롬8:22)

우리는 우리의 희망없는 상황에서 매우 희망적인 새로운 사건을 신약 본문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저의 신앙의 성장과 함께 사도행전 이장을 이해 오는 데는 몇 번의 변화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지난 날 어느 한 때에는 사도행전 이장을 읽는 저의 주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방언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였습니다. 그 다음 과정으로 어떻게 성령을 충만이 받아 많은 사람들을 회심시킬수 있을 것인가? 였습니다. 그리고 늘 꺼림직하게 찌꺼기처럼 남아있던 문제는 나는 성령 세례를 받았는가? 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제가 이해한 성령은 어느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생각 하였습니다. 그들을 통해서만 성령 체험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그마한 성령 체험을 간증하는 사람이 부럽기도 한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사도행전을 읽는 저의 관심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창조활동과 그가 지향해가는 목표가 무엇인가입니다.

오순절에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인간 역사에 임하실 때 일어나는 현상이 매우 신비로우면서도 우리의 일상성에서 깊은 관련이 있는 것들입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하늘에 나타나고,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혀들이 갈래 갈래 갈라지면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성령 자체는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일어난 현상들입니다. 이것들은 성령이 생명의 영, 창조의 영임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위에 움직이고 계셨다."(창1:1)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새로운 질서가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창 2:6)고 했습니다.

역시 오순절에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혼돈의 역사에 임하시므로 새로운 인간이 태어났습니다. 그 인간은 탐욕과 이기심에서 희망되어 하나님 나라의 비젼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들은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시며, 만유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안에 계시는"(엡4:6)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새로운 생의 "원리와 패러다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성령에 의해 새로운 공동체가 태어났습니다. 그 공동체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세상의 기존 공동체와는 다른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으로 통일되어 있는 공동체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은 한 지역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땅끝까지로 넘어가고 계십니다. 이 성령은 방언의 은사를 받은 어느 한 개인, 집단의 소유물로 남아있지 않고, 한 개인, 한 공동체를 넘어서 가십니다.

성령이 지향해 가는 목표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성령의 사역은 한 개인을 넘어 전 우주입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 그 자체가 성령의 사역이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삶의 지평을 나 개인으로부터 인류로, 내 가정에서 전 세계로 현실에서 영원으로 넓혀주십니다. 독일의 각성 운동 설교자인 크리스토프 불룸하르트는, 우리는 "종교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길, 교회에서 세계에 이르는 길, 개인적인 근심에서부터 전체에 대한 희망에 이르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생명의 영이신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경험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새로 태어남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원리와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으로, 그러한 공동체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나 개인, 우리 가정, 우리 나라, 전 세계가 살 수 있는 길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에 동참해 가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안에서 새로운 희망의 사람이 됩니다. 새로운 생의 계획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희망의 계획은 우리집 울타리 안 만을 가꾸고보존하고, 우리 가족만을 잘살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해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활동안에서만 현실을 긍정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아주 작은 창조적이며, 윤리적인, 생명적인 선한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낙심 좌절, 무의미성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나 한사람의 생존을 위해 먹고 배설하는 일밖에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젼을 갖게 되고, 그 안에서 현재 창조적인 일을 해 갈 수 있습니다. 어느 철인의 말대로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수 있는 사람"은 성령 안에서 희망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요20:22
2002-01-29 11:29:08   read : 406

한 어린 소년이 이미 세상을 떠난 이태리 화가의 화랑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이 열리자 그 소년은 부인께서 대가의 붓을 제게 주실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 소년은 미술가가 되고 싶은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가와 같은 화법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부인은 붓을 그의 손에 쥐어주고 그려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자기 붓으로 그린 것보다 더 잘 그릴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대가의 정신을 이어받지 않고는 위대한 대가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신앙을 갖고 싶어도 그리스도의 영 없이는 잘 믿을 수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려고 하면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9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 하였습니다.
죄송한 질문이지만 여러분 그리스도인입니까? 교회에 나오시는데 예수는 믿으십니까? 여러분 거듭났습니까? 젊은 목사 한 분이 유학 길에 올랐답니다. 하도 시원치 않으니까 물었습니다. 형제 예수 믿어요. 그가 대답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어느 신학대학 총장이라고 자랑스럽게 말 하더랍니다. 아니 신학대학 총장 아들과 예수 믿는 거와 무슨 상관이요. 그때 약간 심각하더랍니다. 당신 그리스도인이요. 아니 나는 목사예요. 질문하는 사람이 목사라는 직분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것과 상관이 없는 거 아니요. 여러분이 교회에 얼마 나왔다, 무슨 직분을 받았다는 거와 믿음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철학자 루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보통 10대에는 먹는 것 즉 과자에 의하여 움직이고, 20대는 사랑에 의하여 (연인)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30대는 쾌락에 의하여 움직이고, 40대는 야심에 의하여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50대는 탐욕에 움직이고, 60대에는 명예심에 의하여 움직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욕망의 지배를 받기에 범죄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부활하신 이후 제자들을 만나고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입니다.
왜 성령을 받으라 하였습니까?

첫째, 제자 된 삶을 살기 위해서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제일 많이 본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열한 사도입니다. 그들은 직접 훈련을 받았습니다. 절름발이가 일어나 걷고 소경이 눈을 뜨며 더 나아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도 보았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이적을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자기들은 예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라고 자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는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지시는 그 자리에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아니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들려져도 어떤 사람은 부활을 의심하고 주변의 환경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모였어도 문을 꼭 잠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제자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름 받은 것만으로는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교육받았다고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름은 제자인지 모르나 실제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제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 이 자리에 오셨다면 무엇이라 하실 것 같습니까?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받으라 하실 것입니다.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았는데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 하셔야 합니다.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분이 교회에 잘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임종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구원의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는 무어라고 말하느냐 하면 사실대로 말씀 드리면 나는 아직도 담배를 끊지 못하고 교회에 다녔습니다. 술도 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구원을 받겠습니까? 라고 반문합니다. 이것이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내가 얼마나 교회에 나왔느냐, 무엇 할 것을 하지 못했느냐, 해서는 안될 것을 하였다는 것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살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영접하지 않고 교회생활을 수 십 년 하였다면 사실 예수와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처음 오신 분이라도 주여 나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합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주인으로 모시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면, 1) 예수님을 나의 구주라고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2) 나의 잘못된 생활을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3)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4) 그분의 원대로 명령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었으면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께서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 고 하셨습니다.(요 3:6) 영으로 나지 아니하고 육신으로 만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 하였다는 것입니다. 거듭났다면 달라져야 합니다. 아니 진정으로 예수 믿으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 변화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리적인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화학적인 변화라고 합니다. 물리적인 변화란 외형만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무가 있습니다. 나무를 톱으로 켜서 책상을 만들었습니다. 나무는 같은 나무인데 모양만 달라진 것뿐입니다. 화학적인 변화는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무를 갖고 종이를 만들었습니다. 여하간 근본이 달라지는 것을 화학적 변화라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물리적인 변화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옛사람이고, 직분만 맡았고, 주일에 성경책 끼고 교회에 왔다가는 것입니다. 성령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합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성령으로 근본이 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변화되는데 무엇이 달라진 것이냐 행동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1. 생명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육의 생명이 영의 생명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은 영혼이 가는 것입니다. 육의 생명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영혼이 살아야 산것입니다.
2. 거듭남이란 주인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자신이 주인이 되어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예수가 내 삶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3. 거듭남이란 삶의 목적이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전에는 나의 유익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거듭 났다고 완벽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수가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을 하던지 목적은 다릅니다.
4. 거듭남이란 삶의 의식이 바꿔집니다.
세상 사람처럼 가치관을 갖고 있다면 아직 거듭났다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감사의식으로 살고, 평안의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거듭나게 합니다. 제자인 사람이 되려고 하려면 거듭나야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하면 거듭난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세례는 받았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자가 되려면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라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 세례 받은 분 들은 다 함께 성령 세례도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9:2절을 보면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묻는 말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랬더니 그들이 하는 말이 우리는 성령이라는 말을 들어본 일도 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 요한의 세례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믿을 때에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1:5절에서 예수께서 "성령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받는 다는 것은 중생과 다릅니다. 중생은 성령의 기본적인 역사이고, 성령 세례는 기본적인 역사에 더욱 진전되어 제2차적인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성령 세례가 무엇인가? 를 알려면 세례라는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세례는 일치입니다. 예수와 내가 하나됨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 이것은 성령으로 하나된 것을 말합니다. 성령 세례 받은 사람들은 우리 몸 안에 성령님이 주관하십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제일로 사모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 세례 받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 받았다고 갑자기 훌륭해지는 것도 아니고 인격적으로 위대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게 주님을 기쁘신 일을 생각하게 되고 쉽게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 세례 받은 이후에는 영적인 세계가 열리고 보입니다. 자기 마음도 부드러워집니다. 성령의 세계는 영적인 세계이기에 체험해야 알 수 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이 십자가를 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성령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제자 되어지기를 원하고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자다운 신자 직분자다운 직분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성령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부활의 증인되기 위해서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입니다.

성령 받는 것이 개인적인 행복을 위한 체험이 아닙니다. 물론 영적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힘있게 증인이 되어 사명을 다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절을 보세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였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능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왜 능력을 주시는가? "증인이 되라"고 주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증인입니까? 부활의 증인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건 놀라운 사건입니다. 제자들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기대가 부풀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라도 좋은 일은 자랑하게 됩니다. 어느 시골에서 어렵게 목회 하시는 목사님께 아들이 있었습니다. 대학에 한 번 낙방한 일이 있었는데 다음 해에 서울대에 원서를 냈답니다. 발표하던 날 목사님이 그 대학에 가보았습니다. 아들 이름이 합격자 명단에 들어 있습니다. 너무 좋아하시던 목사님이 나오면서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하는 말이 여보세요. 우리 아들이 서울대에 합격했어요. 다음 사람보고 또 우리 아들이 이번에 서울대에 합격했다니까요. 아니 생각해보세요. 길가는 그 사람하고 그 목사님의 아들이 대학에 합격한 것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러나 목사님은 너무 좋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부활하신 것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왜 자랑하지 아니 합니까? 증인이 되는데 억지로 이렇게 하십시오 라고 부탁합니다. 태신자를 4월말까지 세 명 이상 적어내세요. 그것 참 부담스럽군요 라고 마음에 시험까지 드는 분들이 없지 않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증인되라는 말보다는 먼저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입니다. 성령 받아야 증인이 됩니다.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성령을 받으니까 '3 쁨' 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기쁨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그렇게 기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에 대하여 기쁘고 구원받았음에 대하여 기쁘고 날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이 믿어지기에 기쁘더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예쁘더라는 것입니다. 아내도 예쁘게 보이고 자녀들도 그렇게 예쁘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도 예쁘고 교회 모든 사람들이 예쁘게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바쁘더라는 것입니다. 성령 받으니까 새벽기도 가야 하지요. 예배 시간마다 교회 빠질 수 없지요. 전도하러 나와야 하지요. 그래서 너무 바쁘더라는 것 이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 하는데 바쁘셨습니까? 충성하는데 바빠야 합니다. 전도하는데 그렇게 분주해야 합니다. 전도하면 놀라운 축복이 임합니다. 요한복음 20:21절에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이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하신 다음에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선교 명령입니다. 같은 언어와 같은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는 전도라 하고, 다른 문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선교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선교하는데 68개국에 1천 600명 정도의 선교사를 파송 하고 선교 예산이 1백 30억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연간 술 소비량은 26억 9천 2백 90만 리터로 가격으로 환산하면 2조 5천억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선교사 몇 명을 파송 하였습니까? 신자 50명이 매월 5만원을 헌금하면 선교사 한 명을 파송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업가는 단독으로 100명을 돕고 있다고 하고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 가면 얼마나 전도하였나 선교하였나를 물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있는 곳에는 복음이 증거 되고 교회가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경찰 버스를 보세요. 뭐라 써있지요. 이동파출소라고 써 있습니다. 그 버스가 있는 곳에서는 파출소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있는 곳이 바로 독립문교회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있는 곳에는 전도가 있어야 합니다. 선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역사하지 아니하면 가능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4절에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했다" 라고 바울도 말하였습니다. 성령이 역사 하면 듣는 사람들이 나도 예수를 믿어야 하겠다 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영접하게 됩니다. 이 사명을 다하라고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입니다.

셋째, 능력 있게 살아야 하기에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전날 밤에 제자들은 모두 도망하였습니다. 3년 동안 배우고 이적을 보았으나 그들은 너무나 무능한 무리들이었습니다. 자기 선생님이 붙들려 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에도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능력입니다. 힘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힘입니다. 능력입니다. 요즈음 왜곡 교과서 문제로 일본 사람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 나라가 항의하는 말을 하고 방문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조금도 움직이지 아니합니다. 이유는 우리 나라가 그들 보기에 그렇게 무서운 나라가 아닙니다. 크게 보이지도 아니하고 겁나는 나라가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약하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현실은 힘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는 세상입니다. 여러분! 능력이 있습니까? 능력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성령이 능력입니다. 일반적으로 목사님이 설교가 끝난 이후에 신자들이 인사할 때에 하는 말이 같습니다. 오늘 은혜 받았습니다 라고 하는 말입니다. 물론 교인들이 다 인사하지는 않습니다만 인사하는 분들은 대개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무디 목사님이 설교가 끝났는데 어떤 분이 이렇게 인사하더랍니다. 목사님을 위해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화가 난 무디 목사님이 묻기를 왜 그렇게 인사합니까? 그때 그 성도가 하는 말 목사님의 설교에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시도록 기도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더랍니다. 그 뒤에 무디는 그 말에 자극을 받고 성령이 충만하기를 계속 기도하였답니다. 이 말씀에 성령의 불을 내려주옵소서 라고 오랫동안 기도하였는데 그가 바로 능력의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성령은 능력입니다.
1. 믿어지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왜 무능합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자기 신념이 있습니다. 이 일은 잘된다, 나는 성공한다는 그들은 보장이 없는 신념만으로도 잘하고 있는데, 우리는 왜 무능하게 세상을 살고 있습니까? 믿음의 문제입니다. 우리 배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데 우리는 왜 자신감도 없이 밀리고 연약한 존재로 전락되어 있습니까? 믿음문제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어집니다. 기도 응답이 믿어집니다. 그대로 되어진다고 믿어집니다. 믿음이 꿈을 줍니다. 비전이 생기게 됩니다.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믿음의 능력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2. 성령은 능력입니다. 이기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항상 두 가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는 외부로부터 오는 유혹이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적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부패성, 죄성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두 가지를 다 이길 수가 있습니다. 바울과 같이 선한 싸움 다 싸워 이깁시다. 성령의 능력이 임해야 합니다. 마귀를 이길 수가 있습니다. 마귀는 지금도 찾아오고 있습니다. 성령 받아 이기고 이기는 능력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기에 봉사하는 것도 기쁘고 좋기만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게 합니다. 주의 종들을 사랑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쉼을 내쉬며 "성령을 받아라"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 받았습니까? 성령 받아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성령 받아야 신자 노릇합니다. 구실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 받아야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 받으면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성령 받기 원하십니까? 여러분도 성령 받아야 합니다. 오늘 처음 나오신 분도 성령 받을 수 있습니다. (1) 성령을 인정하시고 믿으십시오. (2) 성령 받기를 위하여 사모해야 합니다. 성경은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3) 회개해야 합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아무런 역사도 나타나지 아니합니다. 죄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알게 되었으면 고백하고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4) 간절하게 기도하십시오. 날마다 구하기를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그러다가 성령의 권능을 받아 승리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아 멘 ∼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요14:16-17,15:26-27,행2:1-4
2002-01-29 11:30:10   read : 475

오늘은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고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셨고 그리고 하나님의 신 성령님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사함과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중생과 기쁨과 승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오시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의 사역을 우리의 몸과 영혼 안에 이루어 주셨습니다. 성령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십자가 사건은 하나의 고고학적 사건으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책 속에 쓰여져 있는 인쇄물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므로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생동하는 사건이 되었고 성령님이 오시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가슴을 적시고 녹이는 살아있는 음성이 되었습니다.
성령님은 오순절 날 한번 오심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우리에게 오시고 또 오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순절 날, 성령의 오심은 120명이나 삼천 명에게 국한 한 것이 아니고 오고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증거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며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2:38-39). 하나님은 당신의 신 성령님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은 오순절 이후 성령님이 계속해서 오신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31).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5).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행8:17). 여기 저희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아나니아가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행9:17). 반역자 사울에게도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10:44). 여기 모든 사람은 고넬료를 비롯한 가이사랴에 살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인들과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후에 성령을 독일 사람들에게도 영국 사람들에게도 미국 사람들에게도 웨일즈 사람들에게도 한국 사람들에게도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한 교회나 한 사람에게 한 번 오시고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한 교회와 한 사람에게 계속해서 오십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계속해서 오셨고 스데반에게 계속해서 오셨고 사도 바울에게 계속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오심을 신학의 틀로 제한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중생한 사람은 성령의 세례를 다시 받을 필요가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저는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성령의 세례를 10번 받아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례를 과거의 사람이 물 속에 잠기듯 죽고 새로운 사람이 물 속에서 일어나듯 살아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성령의 세례를 10번 100번이라도 받아서 과거의 내가 완전히 죽고 성령의 사람이 나에게서 새로 태어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신학의 틀로 성령의 오심을 제한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가로 막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점은 성령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 한 사람에게 계속해서 오시고 또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성령의 오심을 사모해야 합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성령의 오심을 날마다 사모했고 로이드 존스 박사도 성령의 오심을 날마다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입니다. 한번 따라서 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시는 일 세 가지만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첫째 성령은 살리는 생명의 영입니다.
성령은 살리는 영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가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신 성령은 생명의 영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역에 근거해서 우리를 살리지만, 하나님은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우리를 살립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신을 흙으로 지은 아담의 코에 불어 넣었을 때 아담이 생령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새로운 영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바람과 같이 그리고 불과 같이 120명에게 임했을 때 저들은 모두 살아났습니다. 몸과 영혼이 새롭게 살아났습니다.
살아났다는 말은 하나님을 가깝게 친밀하게 만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영혼의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방언의 기도가 터져 나왔고 뜨거운 찬양이 터져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120명이 나중에는 3천 여명이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고 하나님을 기쁘게 찬양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살아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가깝게 친밀하게 만납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가 뜨거워지고 우리의 찬양이 뜨거워집니다. 사데교회 신자들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즉 기도가 죽었고 찬양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1907년 성령께서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 임했을 때 2천여명의 신자들이 살아났습니다. 저들의 기도가 얼마나 뜨거웠던지 저들의 기도 소리에 교회당 지붕이 날아갈 버릴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나기를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기도와 찬양이 살아가기를 바립니다.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충만이 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우리들의 기도는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입니다.
살아났다는 말은 또한 사람들을 가깝게 친밀하게 만났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했을 때 사람들의 사이가 가까워졌습니다. 인사가 친절해졌고 교제가 뜨거워졌고 물건을 주고 받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서로 교제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2).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2:44-46). 성령 충만은 생명 충만이고 생명 충만은 교제 충만이고 사랑 충만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사랑의 공동체가 됩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교제가 충만하고 사랑이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우리들의 기도는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입니다.

2 둘째 성령은 가르치시고 도와 주시는 위로의 영입니다.
성령은 미련한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시고 낙심하는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미련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도 연약합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도 곧 잘 낙심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그랬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열 두 제자들은 모두 미련하고 연약하고 낙심을 잘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미련한 제자들을 가르쳐 주시고 연약한 제자들을 도와주시고 낙심하는 제자들을 위로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해야 할 것도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스데반도 주님을 증거하는 말을 너무나 잘 했습니다.
성령님은 또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여기 보혜사라는 말은 Helper 곧 도와 주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롬8:26)라고 기록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오셔서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우리가 시험에 넘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고난과 박해를 당해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도록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그래서 승리하게 해 주십니다. 성령님은 너무나 좋으신 분입니다.
성령님은 또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여기 보혜사라는 말은 Comforter 곧 위로하시는 분이라는 말도 됩니다. 낙심하는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에게 속삭이시면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성령님이 오셔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실 뿐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위로하시면 우리는 그저 좋고 기쁘고 즐겁고 평안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으로 충만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 안에 있으면 평강과 희락이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4).
우리는 모두 미련하고 연약하고 낙심을 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이 우리들에게 오셔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충만이 오셔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성령님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모두에게 오셔서 우리 모두를 가르쳐 주시고 도와 주시고 위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우리들의 기도는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입니다.

3 셋째 성령은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주님을 증거하게 하시는 증거의 영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증거하게 하시는 전도의 영이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
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사실 성령님이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를 도와 주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주님을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오셔서 하실 가장 중요한 일이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는 일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베드로는 힘있게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스데반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스데반은 돌에 맞으면서도 힘있게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빌립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빌립은 세계 곳곳을 찾아 다니며 힘있게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힘을 얻어서 권능을 받아서 주님을 힘있게 증거하게 됩니다. 여기 힘 즉 권능은 말의 힘뿐 아니라 삶과 인격의 힘을 말합니다. 삶과 인격의 힘이란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나타나는 삶과 인격의 힘을 말합니다. 사실 말의 힘 보다는 삶과 인격의 힘이 더 강한 힘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와 같은 힘을 얻게 됩니다. 말의 힘과 아울러 삶과 인격의 힘을 얻어 어떠한 박해나 위협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주님을 담대하게 증거하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 얻은 목적은 주님을 예배하는 일과 함께 주님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분부도 우리가 주님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성령이 오셔야 우리는 주님을 힘있게 증거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충만이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우리들의 기도는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입니다.
성령은 사모하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R.A. Torray 박사는 행1:4을 해석하면서 오늘도 우리 신자들은 성령의 세례를 사모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성령의 세례를 받으려면 1)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철저하게 신뢰해야 하고 2)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고백하고 버려야 하고 3)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해야 하고 4) 성령 받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와 같은 토레이 박사의 말을 소개하면서 토레이 박사의 해석과 주장은 바른 해석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한 평생 성령의 오심을 사모해야 합니다. 한 평생 성령의 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한 평생 성령의 세례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항상 오시기를 기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항상 충만이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죽은 자와 같은 우리들이 모두 힘있게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도와 주시고 위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기쁨과 즐거움과 평강이 충만해 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힘있게 능력있게 주님을 증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 우리들의 기도는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입니다. 한번 따라서 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성령이여 우리에게 오시옵소서" "성령이여 나에게 오시옵소서"





오순절의 성령 충만 행2:1-4
2002-01-29 11:31:02   read : 46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사도행전 2장 1∼4절)

설교개요


A. 성령에 대하여
1. 성령
2. 본문 배경 설명
B. 오순절의 성령 충만
1.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 약속, 기다림(행 1:4∼5)
2.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 기도(행 1:12∼14)
3.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성령 충만(행 2:1∼4)
4.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고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기사와 표적, 전도(행 2:43∼47)
C. 오순절 날 성령 충만의 역사로 초대 교회가 부흥했듯이,
성령 충만 하여 기사와 표적을 체험하고,
전도하여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자



A. 성령에 대하여

1. 성령

세계 최고의 갑부이자,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회장인 빌 게이츠는 현대 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컴퓨터 분야에서 선두주자로 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생각의 속도』라는 책까지 써서 많은 사람에게 도전을 주었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말하기를 “정보가 힘이다.”라고 했습니다. 정보가 있어야 돈도 벌고, 정보가 있어야 남보다 앞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21세기는 정보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정보가 힘이 되고, 돈이 되고,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정보를 얻어야 합니까? 정보의 내용과 핵심이 무엇이어야 하느냐가 참으로 중요할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이나 가정이나 직장, 더 나아가서 우리 한국의 장래를 위해 가장 필요한 정보가 있다면, 그것은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충만히 받아서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 한국은 얼마든지 다른 나라보다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부정부패, 정경유착은 다 없어지고, 분쟁과 싸움과 다툼은 다 정복되고, 사랑으로 하나 되어 이 나라, 이 민족이 발전하고 성장할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가정의 평안을 위해서도 성령 충만이 필요합니다. 사업이 성공하고 죄짓지 않기 위해서도 성령 충만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을 빛내고 위대한 삶을 살기 위해서도 성령 충만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의 육체는 흙으로 만들어졌으나, 성령의 임재하심을 통해서 무엇보다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성령 충만, 개인도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힘이 나타나면 우리는 가장 보람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 성령은 우리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더 이상 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강하고 담대한 존재가 됩니다. 마귀와 싸워서 이길 수 있고, 죄악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시므로 임마누엘의 축복을 받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번 주간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교회가 세워졌으며, 성령을 통해서 기독교가 전세계에 전파되었습니다. 성령강림절을 맞아 그 능력의 성령을 생각하는 한 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본문 배경 설명

본문 말씀 사도행전 2장 1∼4절은 오순절 날의 성령 강림 사건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에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유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나 마지막에는 아주 중요한 말을 남기게 마련인데, 예수님은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행 1:4, 8 참조).
그래서 제자들과 여자들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님의 형제들, 120명이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10일 동안 열심히 부르짖고 기도하기에 힘썼습니다(행 1:13∼14 참조).
그러자 10일 만인 오순절 날에 갑자기 하늘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온 집에 가득하더니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행 2:1∼4 참조).
인간으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초자연적인 사건을 통해서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유럽에서부터 시작해서 아시아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역이 완성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즉 초대교회가 세워지고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된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은 교회의 시초가 된 성령의 역사에 관한 말씀이며, 또한 성령은 이 말씀을 듣는 우리를 통해서도 기적적인 사건을 체험하고 복음사역을 시작하게끔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말씀을 통해서 모두 성령 충만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에 오래 나왔다고 해서, 혹은 직분을 맡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축복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오순절의 성령 충만’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넷째,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고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B. 오순절의 성령 충만

1.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 약속, 기다림

“사도(司徒)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洗禮)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聖靈)으로 세례(洗禮)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5)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기다리면 하나님은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데, 그 약속의 내용은 바로 가장 큰 축복, 성령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물세례만 받을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성령의 세례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다리면,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성취하여 주십니다. 다윗 왕도 시편 40편 1절에서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다리는 것도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오늘날은 수많은 사람이 기다리지 못해서 화를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참지 못해서 가정에 불화가 일어나고 깨어집니다. 도중에 낙심하여 사업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것도 축복입니다. 인내하는 자는 축복과 은총을 받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6절에도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약속이 있으면 그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는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결과들이 나와 있습니다. 오래 기다리는 자는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시 37:9).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시 40:1).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아 주십니다(잠 20:22). 복을 받습니다(사 30:18). 새 힘을 얻습니다(사 40:31). 성령을 충만히 받습니다(눅 2:25).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은 기대하고 갈망하는 사람에게 성취됩니다.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 앞에 인내하고 있습니까? 기다리고 있습니까? 감사하면서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약속을 기초로 한 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길을 가다가 거지 소년을 만났습니다. 소년은 손을 내밀고 “좀 도와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너, 어머니가 계시냐?”
“아니요.”
“그래, 그러면 나를 따라오너라.”
“선생님, 좀 도와달라니까요. 동전 하나만 주세요.”
“나를 따라오너라. 더 좋은 것을 주마.”
목사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앞장서서 갔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네가 나만 따라오면, 목욕도 해 주고 머리도 깎아 주고 새 옷도 입혀 주고 학교에도 보내주마. 훌륭하게 키워 줄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소년은 벌써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소년은 당장 동전 몇 푼이 필요한데 목사님이 따라오라고 하니까 그냥 어디론가 가버린 것입니다.
이 소년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동전 몇 푼입니까? 이 소년에게는 돈보다는 따뜻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목욕도 해 주고, 머리도 깎아 주고, 학교에 보내서 훌륭한 인간으로 만들어 줄 양부모가 필요합니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도 이 소년처럼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 돈 좀 주십시오. 이렇게 해 주십시오. 저렇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게 온전한 구원을 주리라, 내가 너를 복되게 하고, 너를 형통케 하고, 너를 통해서 놀라운 역사를 베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시고 따라오라고 하시는데도, 응답이 없다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도중에 포기하고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하시고, 풍족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영혼도 잘되고, 범사도 잘되고, 강건하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약속의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듣기는 들어도 믿지 않습니다. 믿는다 하더라도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능력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에만 왔다갔다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인내함으로 기다리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약속과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 기도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安息日)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祈禱)에 힘쓰니라”(행 1:12∼14)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라고 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두 120명이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기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 마음을 같이하여야 합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찬송도 열심히 하고, 말씀도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 몸과 마음, 물질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바로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기까지, 성령을 받기까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열흘 동안 열심히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열흘 동안 제대로 먹지도 않고 금식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철야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벽까지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열심히 부르짖고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과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그들에게 부어 주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 13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 중의 축복, 사랑 중의 사랑, 은혜 중의 은혜인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축복, 먹고 마시고 입는 것보다도 더 큰 축복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만 받으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만 하면, 성령만 체험하면,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 받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습니까? 회개해야 성령을 받습니다(행 2:38). 기도해야 성령을 받습니다(행 4:31).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성령을 받습니다(행 5:32).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충성할 때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남편이 은행에서 근무하면서 따로 사업을 했는데, 하는 일마다 번창하여 수억 대의 재산을 모으게 된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다복하고 행복한 가정이었지만, 부인은 선천성 심장병에 걸려서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해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웠습니다. 합병증까지 생겨서 몸은 더 쇠약해지고 기억상실증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도 동업하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고 재산을 몽땅 잃어버리고 빚더미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건강도, 재산도 모두 잃게 된 것입니다.
병원에서는 부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수의를 마련해 놓고 집안살림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나는 이대로 떠나는 거야. 소리 없이 떠나는 거야.’
그런데 마침 어느 교회 집사님이 와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교회에 갑시다. 죽더라도 천국에 가야지요. 그리고 혹시 하나님께서 살려 주실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 교회에 나갑시다.”
부인은 죽어 가는 마당에 고집 피울 필요가 뭐가 있는가 싶어 교회에 따라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죽으면 천국 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살려 주시면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되게 일하겠습니다.’
그때부터 새벽 기도에도 가고, 철야 기도에도 가고, 수요일, 금요일 예배에도 참석했습니다. 밤낮 할 것 없이 교회에 나가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떠날 사람이 무슨 바쁜 일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매일 교회에 가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기도했습니다.
그러기를 한 달, 두 달, 석 달이 지났습니다. 간절히 눈물로 부르짖고 기도하자 그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눈에서 눈물이 나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리고 눈에 안대를 한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 줄지어 나가는 환상도 보게 되었습니다. 부인은 그것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었던 질병과 저주임을 깨닫고, ‘하나님, 내 병을 고쳐주신 것을 믿습니다!’ 하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을 받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난 뒤, 병원에 가서 다시 진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부인을 괴롭혔던 심장병, 기억상실증이 사라지고 정상의 몸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충성하면 되겠습니까?’
이번에는 이렇게 기도를 하고 교회에 열심히 출석할 뿐만 아니라, 여선교회에 들어가서 열심히 봉사하며 충성하여 여선교회 회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주의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구원과 축복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에서 기도하는 사람, 기도원에서 기도하는 사람,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 간절히 부르짖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그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시고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셔서 질병을 깨끗이 치료하시고 건강케 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성령 충만

“오순절(五旬節)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方言)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성령을 체험하고 능력과 표적을 보고 나면 언어가 새로워집니다. 교회에 나오기 전에는 원망, 불평 등 부정적인 얘기를 많이 하다가도, 교회에 나와서 성령 충만을 받고 나면 언어가 새로워집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새로운 언어, 방언을 말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급하고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있더니, 저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성령을 충만히 받아서 방언으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용기와 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담대히 나아가서 주의 복음을 전파함으로 수천 명씩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요엘 2장 28∼29절에서 요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말하기를,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말세에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주의 복음을 전파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다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성령 받을 수 있습니다. 죄를 다 회개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5장 18절에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는 능력도 지혜도 총명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담대히 나가서 주의 복음을 전파하게 됩니다(행 4:31). 그러니까 전도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는 전도할 수 없습니다. 100명, 10명, 아니 1명도 전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으면 나가서 200명, 300명씩 전도해서 전도상을 받고 전도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전도의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 충만을 받으면 마음에 기쁨이 넘쳐납니다(롬 14:17). 소망이 넘쳐납니다(롬 15:13).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고후 3:17).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됩니다(갈 5:22∼23). 뿐만 아니라 마음도 건강하고 육체도 건강하게 됩니다(엡 3:16). 많은 이에게 사랑과 은총을 베푸는 지도자의 역할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마치 그릇과 같습니다. 그릇에 물이 담기면 그 그릇을 물그릇이라고 하고, 술이 담기면 술그릇이라고 하며, 기름이 담기면 기름그릇이라고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릇이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명칭과 용도가 달라지듯이, 우리도 무엇의 지배를 따르느냐에 따라서 운명과 생활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죄인이 됩니다. 의가 있으면 의인이 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되고, 귀신의 지배를 받으면 귀신들린 자, 정신병자가 되고, 악한 사람의 지배를 받으면 악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술에 취한 사람은 짐승같이 살지만, 성령 충만한 사람은 천사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 죄악의 포로가 되지 마시고, 술에 취하지 마시고, 악한 삶을 살지 마시고, 성령을 충만히 받아서 천사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올바른 삶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있으면 자동차가 신나게 달리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성령의 능력이 있어야 열정적인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을 주장하시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충만히 임하시고, 성령께서 우리 삶에 함께 하심으로 우리는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느 금융기관에서 부장으로 일하는 남자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예금 유치 실적이 있어야 능력을 인정받고 승진도 되는데, 그는 실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상관에게 불려갔습니다. 상관은 부장이 이럴 수가 있냐며 호통을 치더니 계속 그렇게 나가면 인사조치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부장 자리도 위태로울 뿐만 아니라, 회사에서 쫓겨날 판국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한 가지,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회사에서 퇴근하면 곧바로 교회로 직행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예금 실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예금 실적을 올려주십시오.’
하루, 일주일,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는 매일 교회에 들러서 실적을 올려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아내 친구의 소개로 군인단체예금을 유치하게 되었습니다. 회사에서는 그만 깜짝 놀랐습니다. 영업실적도 높을 뿐 아니라, 이익금도 많이 생겨서 그는 회사 내에서 기여도가 가장 높은 사원으로 상을 받고 상금으로 부부동반 해외여행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할당량의 10배 이상을 입금을 하여, 회사 내에서 신화적인 존재로 칭찬을 받고 표창까지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당장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매일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실적을 올려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 나온다고 해서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쉬지 말고 기도하며, 깨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새벽마다 기도하고, 한밤중에 철야 기도 하고,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큰 은총과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종종 보험회사에서 1등 실적을 내는 사람을 보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기적적인 결과가 나타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왜 불행합니까?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축복받지 못합니까?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실적이 없습니까?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깨어서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지, 깨어서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과 열매를 맺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도 매일 해야 합니다. 학생이 매일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것처럼, 아침이든 점심이든 저녁이든 매일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이 열심히 기도해서 성령을 받은 것처럼, 여러분도 열심히 기도해서 성령 충만 받고 응답받고 능력을 체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고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기사와 표적, 전도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奇事)와 표적(表蹟)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稱頌)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3∼47)

기도하고 성령을 받으면 기적과 표적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서로서로 도움을 주고받게 됩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며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찬송하게 됩니다. 구역이 부흥하고, 교회가 부흥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의 숫자가 날마다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눈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기록을 보면, 사도 베드로는 지나갈 때 그림자라도 덮이면 병이 나았습니다(행 5:15). 심지어 사도 바울은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습니다(행 19:12). 스데반 집사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했습니다(행 6:8). 빌립 집사도 사마리아 성에서 표적을 행하여 귀신들이 떠나가고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아서, 그 성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행 8:6).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능력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집사든, 장로든, 권사든, 구역장이든 여러분이 어떤 직분을 맡았든지 간에 열심히 기도하기만 하면, 그 기도를 통해서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사람을 통해서 전도하게 하시고, 충성하게 하시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독일의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 1483∼1546)는 “그리스도의 영은 전도의 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올바른 신앙을 가지면 전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전도하고, 남편은 직장 동료들을 전도하고 또 전도해서 많은 전도의 결실이 맺어지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많은 나라는 기독교 국가가 됩니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사람을 하나님 앞에 인도하는 전도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못 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교회든 12명이 모여서 1년에 1명씩만 전도해도 1년 후에는 24명이 되고, 2년 후에는 48명이 됩니다. 3년 후에는 96명, 4년 후에는 192명, 29년 후에는 64억, 30년 후에는 120억 명을 전도하게 됩니다. 현재 세계 인구가 61억이니까, 우리가 전도의 사명을 가지고 1명씩만 전도해도 29년 후에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다 전도하게 되는 셈입니다.
전도에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면 정치계에도 전도가 이루어지고, 경제계에도 전도가 이루어지고, 모든 공직자들에게도 전도가 이루어집니다. 우리 한국 사람이 서로 전도하고 전도를 받아서 교회에 나가고 신앙을 가지면 부정부패도 없어지고, 정경유착도 없어지고 뇌물관행도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한국이 반드시 선진 국가, 잘사는 나라, 축복받은 나라가 될 것을 믿습니다.

C. 오순절 날 성령 충만의 역사로 초대 교회가 부흥했듯이,
성령 충만 하여 기사와 표적을 체험하고, 전도하여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을 통해서 사람이 새로워지고, 정직하게 되고, 성실하게 되고, 충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놀라운 역사가 이 땅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 성령 충만 받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오순절의 성령 충만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밤마다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끼는 한 남자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아보니 폐암이었습니다. 자기 딴에는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올바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폐암으로 쓰러지고 보니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나는 죽는 겁니까?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는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면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지금까지는 기도도 제대로 못하던 사람이지만,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니까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되었습니다. 방언이 터지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생겼습니다.
‘나는 폐암으로 죽지 않는다. 나는 결코 암으로 죽을 사람이 아니야.’
그래서 다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치료의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셔서 나로 하여금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그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찬송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죽더라도 기도하다 죽겠다는 심정으로 계속해서 새벽에도 기도하고, 낮에도 기도하고, 밤에도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가슴에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아프지 않았습니다. 이상해서 가까운 동네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습니다. 의사는 결과를 보더니 멀쩡한 사람이 병원에 왜 왔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갔던 병원에 가서 재촬영을 했습니다. 폐암을 선고했던 의사는 지난번에 찍었던 엑스레이 사진을 놓고 비교해 가며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눈을 뚱그렇게 떴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폐암으로 다 죽어가던 사람이 멀쩡한 사람이 되어 왔으니 그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선생님, 뭐가 잘못 됐습니까? 왜 그러십니까?”
“없어졌는데요.”
“뭐가요?”
“폐암이 없어졌어요!”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은 의사까지도 깜짝 놀라게 만듭니다. 그래서 의사가 도리어 환자였던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도 진짜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역사를 베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령을 충만히 받기만 하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들을 때가 되면 반드시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죽을 사람을 살리셔서 영광 받으시고 전도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가난한 사람을 풍족하게 만드셔서 하나님의 일꾼 삼아 주십니다. 우리가 간절히 소원하는 기도에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게으르고 불순종했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몸과 마음, 물질과 정성을 바쳐서 충성, 봉사, 헌신하면 반드시 축복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을 충만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남편도 전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식도 전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을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매일 혼자만 교회에 왔다갔다했지 열매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축복을 받고 전도를 많이 하는 남편, 아내, 부모, 형제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성령 충만 받아서 내 남편, 내 자식, 부모, 형제, 내 가족은 물론, 이웃과 친척, 주변 사람까지도 전도할 수 있도록 전도의 능력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생명력 있는 교회 행2:37~47
2002-01-29 11:31:58   read : 292

오늘은 우리 갈보리교회 열여섯번째 생일임과 동시에 성령강림을 기념하는 뜻깊은 주일입니다. 사도행전 2장 37절이하의 말씀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여러분과 우리 갈보리교회에 임하시기를 바라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충만히 임하신 것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니밍 원수들에게 잡하시기 전날 밤에 제가들에게 여러 가지 말씀으로 위로 하시고 부탁도 하시면서 분명하게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장차 너희를 떠나지만 너희로 하여금 고아와 같이 외롭게 두지 아니할 터잉 내가 가면 반드시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이 보혜사는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상상 계실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다가 3일만에 다시 사신후 40일간을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도 영양한 제자들을 따라 불러 놓으시고 분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한 것 곧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시면서 계속해서 주신 말씀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다락방에 다 같이 모였습니다. 모일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열흥 동안 계속해서 함께 기도 했습니다. 열흘만에 오순절 아침을 당했는데 갑자기 이상한 그리고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습니다. 뿐만아니라 혀와 같은 불이 모든 사람위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상한 현상과 더불어 그 당시에 거기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성령의 충만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열한사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같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충만히 임하게 되니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다시말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탄생하게 된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순절은 주님의 교회의 생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신약시대의 교회가 이날부터 시작이 된것입니다. 이 날로서 성령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구약시대에도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가령 누가복음 1장 15절에 보면 세례요한에 대해서 증거하기를 "이는 저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자"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자벳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삼손도 성령이 함께 할 때 능력을 얻어 블레셋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사울왕도 성령이 함께 할 때 능력있는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왕도 어린 소년시절에 성령이 함께해서 온 이스라엘 군대가 두려워 떠는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물매돌 하나로 쳐 죽였습니다. 솔로몬왕도 성령이 함께 할 때 지혜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바가 있었습니다. 가령 이사야 44장 3절 말씀을 보세요. "대저 내가 갈한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음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요엘서 2장 28절에도 "그후에 내가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구약시대의 결론을 지은 세례요한도 마가복음 1장 8절에 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3-3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무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 등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가하였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동사는 문법적으로 말하면 현재분사입니다. 말하자면 시간성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은 옛날 오순절 그때만 임하시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임하신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온 우주적 이니다.
요엘 선지가 강조했던 것을 사도 베드로가 인용한바 있습니다.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라" 성령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차별하지 않고 임하는 축복인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38,39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우리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회개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가 설교한 내용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도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중에 하루 3천명이 회개하고 에수를 믿어 세례를 받게 된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계속적인 축복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명절 끝날 많은 사람이 있는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자의 받을 성령을 가르려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G.C.Ryle 감독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은 금글자로 인쇄된 부분이 있는데 바로 이 말씀이 그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수의 강이 우리 심령 속에 흐를 때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합니다. 이 얼마나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처럼 특별한 축복, 우주적인 축복, 계속적인 축복을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는 성령은 그저 예수 믿게 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보세요.
"성령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시인 할수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무슨말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내 구주로 믿는다면 믿는다는 것 자체가 성령에 의해서 믿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제다들은 자기들이 들은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라가 얼른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에 만족해 하신 에수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 말은 베드로 자신이 생각해서 한 대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이와 같은 고백을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시작할 때 신앙고백을 하는데 이것은형식으로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내 중심으로 신당을 고백하는데 의미가 있는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크게 나누면 두가지로 볼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육에 속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어로 이런 사람을 Carnel Christian 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성령을 통해서 예수를 구주로 믿기는 하지마는 아직도 육신에 속해 있어서 마음에는 기쁨도 없습니다. 사랑도 없습니다. 평화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기는 하지마는 언제나 근심과 걱정 미움과 시기 불안과 공포속에 삽니다. 어떤때는 죄를 범하고 마음아파하고 고민합니다.
다른 하나는, 영에 속해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영어로 Spiritaol Christian 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말할것도 없고 언제나 주안에 거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사랑이 충만합니다. 기쁨이 가득합니다. 언제나 평안하게 살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합니다. 그러므로 그 삶에는 성장과 발전 그리고 승리가 있습니다.
교회는 생명체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살아 있어야 합니다. 아니 교회도 죽은 교회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생명력이 없으면 죽은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사데교회가 나오는데 그 교회는 죽은 교회라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했습니다. 중세기의 교회를 보세요. 콘스탄틴 황제가 교회의 수호자며 지지자라는 것을 교회가 세상에 선포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제정 공포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외형적으로 중세기 이상 왕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야 사람축에 들었고 기독교인이 아니면 직장을 가지기도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왕성해 갔습니다. 문자그대로 기독교의 황금시대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중세교회의 내적으로 말할 수 없이 부패해졌고 무력하게 되어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어 죽은 교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왜 암흑시대입니까? 교회가 그렇게 왕성했는데 왜 어두운 시대였습니까? 교회는 많았고 전국민이 기독교인이었지마는 교회가 교회로서의 생명력이 없으니까 빚을 잃게 되고 교회가 빛을 발하지 못하니까 세상은 어두워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회의 수호자는 세상의 권력자인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권력자가 교회의 수호자가 될 때 교회는 생명을 잃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자가 교회를 옹호할 때 외형적으로는 성장하고, 번성하고, 활개를 치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의 참된 모습은 그것이 아닙니다.
세상 권력은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의 장식품으로 생각하게 쉽습니다. 교회를 이용하려 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모든 국가 행사에 교회의 성직자를 세워 복을 빌게 합니다. 아마 내년이 대선이 있는데 그 동안 안오시던 분들이 또 찾아 올것입니다. 한표라도 더 얻어보려고 할 것입니다.
성직자로써 권력을 등에 지면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는데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가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데 더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맞게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생명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다하지 못할 때 교회는 생명을 잃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이름뿐이고 실상은 죽은 교회입니다.
사데 교회는 주님께서 보실 때 너무 인위적인 것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 권력자가 전적으로 교회를 후원하게 되니까 교회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보다 무엇을 하던지 권력자의 처사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미 교회로서의 의미는 없어지고 만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의지하고 사람을 바라보게 되면 교회는 생명을 잃어 버리고 맙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동안 살수가 있습니다. 사데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의 불꽃 같은 눈으로 보실 때 '살았다하는 이름만 있었지 실상은 죽은교회'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살았다하는 이름'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겉모양은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굉장한 조직 물샐틈없는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생명이 없이 하나님의 교회가 사람노름이 되면 그것은 살았다하는 이름뿐입니다. 이것은 비극중에 비극이니다. 주님의 교회가 있다고 하지마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면 그런 교회는 사실 세상에 있으나 마나한 교회입니다. 아니, 오히려 있어서 썩은 냄새만 피은 결과가 되고 맙니다.
교회는 살아 있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교회라야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죽은 교회는 부패합니다. 더럽습니다. 냄새가 납니다.
그러면 교회의 생명력은 무엇입니까?
교회의 생명력은 성령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충만한 초대 교회는 세상 적인 표준으로 보면 아무 것도 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할 때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교회, 생명력 있는 교회는 성령이 충만할 교회입니다.
그러면 생명력 있는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1. 생명력 있는 교회는 서로 사랑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네 제자인줄 알리라"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순절에 성령 충만히 받기 전에는 서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서로가 시기하고 미워하고 다투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으시고 착잡한 심정으로 마지막 만찬을 나누려고 어느 집에 모이게 되었는데 누구하나 나서서 발을 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동료 제자들은 말할 것 없고 선생님의 발을 씻으러 하지 않고 버티고 앉아 있었습니다. 하인이나 하는 일을 나는 하지 않겠다는 자세였습니다. 여러분,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대야에 물을 떠다가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딱아 주셨겠습니까? 제자들의 분위기가 이 정도였습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누가 좀더 좋은 자리, 좀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까 하는 것 때문에 신경전이 날카롭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새 계명을 주셨지만 새 계명은 그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되니까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히 받고 나니 옛 사람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 생명이 마음속에 강같이 흐르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이해 같이 빛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변하고 나니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노력이나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아들, 보아노게 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성품이 불같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장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쳐서 멸해 버려야 속이 시원하리라고 생각하던 요한도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나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믿음의 자녀들에게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 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고 권면하게 된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기분에 안 맞으면 칼을 들어 내려치는 다혈질적인 성품의 소유자 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나니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무엇보다 열심히 사랑할찌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도 바울도 무슨 일이든지 사랑가운데서 행하라고 권면하면서 믿음도 있어야 하고 소망도 꼭 필요하지만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여러 가지 있지만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생명력 있는 초대교회는 세로가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역사를 연구한 요세푸스는 초대교회를 연구하다가 탄성을 질렀습니다. "보라, 저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했는가를"
초대교회에 권력자가 있었던 것 아닙니다. 초대교회에 재벌이 있었던것도 아닙니다. 초대교회에 대학자가 있었던것도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성도가 서로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사랑이 굶주린 무리들이 그 사랑의 품에 안기고 싶어서 모여든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초대 교회처럼 성령충만하여 서로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생명력 있는 교회는 사람들이 두려워 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을 체험하게 된 초대교회는 생명력이 약동하는 교회로 태어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강하고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교권주의의 상징이었던 예루살렘 공회에서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되어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다가 심문을 하면서 공갈도 했습니다.
사실 베드로 사도로 말하면 예수님이 재판을 받을 때 그 분위기가 너무 험해서 도저히 자기가 예수를 따르던 사람이라는 말을 하기조차 어려워 두려워한 나머지 어린 비자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사람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오순절 때 성령층만히 받고 나니까 완전히 변했습니다. 비겁하던 베드로가 강하고 담대한 주님의 사도로 변했습니다.
그 당시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 그리고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가 참여한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을 법정에 세우고 "너희가 도대체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하며 이적과 기사를 행한 것을 추궁했습니다. 그때 베드로 사도는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면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 주신 일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으니까 궁여지책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앞으로는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뭐하고 대답했어요?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디서 이런 담대함이 생겼습니까? 성령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생명력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를 대하는 세상의 태도는 두 가지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두려워하느냐? 아니면 세상이 교회를 업신여기느냐 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이 교회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을 두려워하면 세상은 교회를 업신여깁니다.
교회는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교회를 두려워하게 되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나쁜 일을 하면서 교회를 의식하게 되어야지 나쁜 일을 하면서 교회더러 축복해 달라면 안됩니다.
3. 생명력 있는 교회는 구원받는 사람이 더해갑니다.
오늘주신 말씀 47절에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요사이 논에 모른 심는 때입니다. 세네개의 모를 심으면 여름 지나는 동안에 20개 30개로 퍼져서 곡식을 맺습니다. 살아 있으면 번식합니다. 죽은 것은 썩어 버리고 맙니다.
교회에 구원받는 사람이 더해 간다는 것은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교회는 바로 여러분을 통해서 날마다 구원받은 사람이 더해 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빌립을 통해서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게 된 것처럼 예수를 모르고 사망가운데 있던 심령들이 여러분을 통해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정원의 나무를 보니까 생명력이 왕성한 나무는 기계가 무성하게 터집니다. 그런데 간신히 살아있는 나무는 가지가 퍼지지 못합니다. 내 심령의 나무는 어떤 상태입니까?





지켜진 약속/행1:8
2005-01-03 10:51:36   read : 140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교회학교 교사 시절 교사대학 강의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강사 목사님께서 엉뚱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약 가운데 최고의 약이 무엇입니까?” “이 약 두 첩만 지어먹으면 육체는 물론이고 정신과 영혼까지 건강해 질 수 있는 약이 있는데 그 약이 무엇입니까? 답은 구약과 신약 두 첩이랍니다.



성경을 구약과 신약이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구약을 Old Testament, 신약을 New Testament라고 합니다. 여기서 Testament는 “언약”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으로 약속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Testament라는 말은 유언과 같은 일방적인 약속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한 마디로 말하면 약속의 책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시야를 보내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신 약속입니다. 그리고 신약은 하나님께서 새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을 통해서 펼치실 구원 역사에 관해 말씀하신 약속입니다.

이런 약속이라는 관점에서 성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의 뚜렷한 내용적 구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약속과 성취라는 구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이루어졌다.”라는 내용적 구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 약속과 성취라는 구조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에 관한 내용을 읽을 때도 이 약속과 성취라는 구조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에 관한 참 많은 약속이 있습니다. 먼저 구약의 약속 가운데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 32:15을 보면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장차 메시야가 통치하는 시대가 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겔 36:26-7을 보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때 사람들의 심령 속에 성령을 부어주셔서 새사람 되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욜 2:28-9을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사람들에게 부어 주셔서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런 약속들은 놀랍게도 한 가지 사건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바로 행 2:1-4에서 말씀하고 있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시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구약의 성령에 관한 약속은 바로 이 사건으로 성취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도 성령에 관해 중요한 약속을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이 약속의 특징은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에 바로 성령을 보내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오셔서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를 말씀하신 약속입니다. 구약의 성령에 관한 약속이 포괄적이고 개략적이라면 이 약속은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합니다. 물론 이 약속의 말씀도 그대로 지켜졌습니다.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교회력으로 오늘이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신 그 사건을 기리기 위해 지키는 절기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성령 강림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약속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성령 강림을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이 약속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약속이 지켜진 사건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약속은 오늘도 계속해서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성령은 약속대로 강림하고 계시고 약속대로 우리에게 임하셔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령에 관한 약속이 무엇이며, 이것이 어떻게 성취되었고 또 성취되고 있는 지를 살피는 일은 성령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오늘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성령에 관해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것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첫째,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행 1:5을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유언과 같은 약속입니다. 주님을 대신해서 성령이 오실텐데 그 때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 말은 주님께서 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선 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물 속에 잠기거나 물이 온 몸에 부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 심령이 성령에 잠기거나 성령이 우리 심령 위에 부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배추에 소금을 뿌린다거나 아예 소금물에 넣어두면 절여집니다. 소금이 배추 안에 스며들어가 배추를 변하게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우리 심령 속에 부어지면 성령으로 우리 심령이 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다음으로 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씻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안팎에 더러운 것들을 물로 씻어냅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 심령이 성령으로 깨끗하게 씻겨지는 것을 말합니다.

학교 다닐 때 대청소를 할 때면 늘 물청소를 했습니다. 일본말로 ‘미시나우시’라고 했던가요? 비로 쓸고 걸레로 닦을 때 씻기지 않던 것까지 물청소를 하면 깨끗이 씻겨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이 성령으로 철저하게 씻기는 것을 말합니다. 때로는 이것을 불로 태운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과거와 단절하고 성결한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제 주님을 믿음으로 주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제 주님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에 적시는 것과 불로 태우는 것은 다릅니다. 물에 젖은 것은 말리면 다시 되돌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에 탄 것은 다시 원상태로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철저하게 예수의 사람이 되어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을 말합니다.

결국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성령이 우리 심령 속에 부어져서 철저하게 우리가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처럼 철저하게 새사람이 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약속은 최초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사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문도는 성령이 강림하면서 철저하게 새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사도들의 사역 가운데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행 8:18을 보면 사마리아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행 10:44에 보면 고넬료의 집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행 19:6을 보면 에베소 교회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오순절 사건 이후에 계속해서 이 성령 세례의 약속은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됩니다. 이미 성령 세례를 받으신 분들이 참 많습니다. 아직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않으신 분들도 있습니다. 이분들에게 속히 성령이 임하셔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성령께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6-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지금까지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늘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모르는 것은 가르쳐 주시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갈 길 몰라 방황할 때 갈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저들 곁에 주님이 계셨기 때문에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들 곁을 떠나실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세상에 저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직접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주님의 인도를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저들이 스스로 알아서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보통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아주 뜻밖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주님 대신 다른 보혜사가 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특별히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사건 이후 실제로 이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후에 행 2:14을 보면 예루살렘 성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주님 대신 이제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2:42를 보면 사도들이 교회에서 가르쳤습니다. 주님 대신 이제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 볼 말씀이 있습니다. 행 4:13입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 지라” 당시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이 볼 때 사도들은 배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남 앞에서 가르치고 선포할 훈련을 받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말 기탄없이 즉 두려움 없이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보고 정말 크게 놀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들이 그럴 수 있었을까요?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 주님 대신해서 가르치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할 말을 생각나게 해 주시고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기 때문에 이런 체험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원래가 소심하고 내성적이던 저는 남 앞에서 말할 줄 모르던 사람입니다. 주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제가 주저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설교하기 위해 섰을 때 지금까지 두려워 떨어본 일이 없습니다. 그야 말로 기탄없이 말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얼마 전에 광양 대광교회에 말씀을 전하기 위해 간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출신 우리 청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예배 후에 문상 차 상가를 찾았습니다. 마침 위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인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그 때 예고 없이 그 자리에서 저보고 설교해 달라는 것입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찬송하는 동안에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갑자기 성경 본문이 떠올랐습니다. 제 마음 속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떠올랐습니다. 그 본문 그대로 그 말씀 그대로 순종하며 전했습니다. 많은 은혜가 있었다고들 했습니다.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오늘도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깨닫게 해 주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십니다.



셋째, 성령을 통해 능력을 받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성령이 임하시면 능력을 받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는 능력은 무엇일까요? 안타깝게도 예수님께서는 그 능력이 어떤 능력인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 능력의 역할만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즉 그 능력을 받으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능력은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될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능력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쉽게 떠올리는 능력은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입니다. 귀신을 내 쫓고 병자를 고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하나님의 종임을 알게 되는 그런 능력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원수들이 대적자들이 골리앗처럼 나가떨어지는 그런 능력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이 능력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려면 성령이 강림하신 뒤에 그 사람들에게 어떤 능력이 나타났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성령 강림 후에 성령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난 능력은 한 마디로 “죽는 능력”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능력”입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다 체포당했습니다. 협박을 받았습니다. 매를 맞았습니다. 옥에 갇혔습니다. 잡으면 잡히고, 가두면 갇히고, 때리면 맞았습니다. 심지어 야고보는 칼로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을 물리칠 어떤 능력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협박을 받아도 다시 일어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채찍에 맞아도 다시 일어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옥에 갇혔다가도 다시 복음을 전했습니다. 마치 오뚜기와 같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물러서지 않는 능력, 포기하지 않는 능력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능력입니다.

물론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치유의 능력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서 베드로는 바로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더 큰 고난을 당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치유의 능력은 여기서 말하는 성령의 능력의 핵심은 아닙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죽으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습니다.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고난을 막는 능력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하는 능력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대적과 싸워 간단히 물리치는 능력이 아닙니다. 대적에게 철저하게 당하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기는 능력입니다.

바로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죽었으나 사는 능력입니다. 졌으나 이기는 능력입니다. 패배했으나 승리하는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러서지 마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시기 바랍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능력을 주십니다. 그 능력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이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주님께서 다른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먼저 이 사실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내 주의 보내신 성령이 오셨네” 성령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아직 성령 세례를 받지 않으신 분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진리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바랍니다. 성령이 주시는 능력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미라클
글쓴이 : 최정남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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