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몬서 강해
창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빌레몬서 1:1-3 은혜와 평강 (감옥에서) 2003. 9. 24
"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2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빌레몬서는 바울사도가 감옥에 갇혀서 골로새에 살고 있는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빌레몬서를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옥중서신은 바울사도가 감옥에 있으면서 보낸 서신들인데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입니다. 빌레몬은 골로새에 살고 있는 부자입니다. 이 사람이 바울의 전도를 받고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집에는 많은 노예들이 있었고 그 중에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주인의 물건을 훔쳐 도망을 갔는데 이 노예로서 도망간 자도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게 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수신자는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아킵보입니다. 이들의 관계는 빌레몬이 집 주인이고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로 봅니다. 그 당시의 집안일과 노예에 대한 관리는 여주인에게 있었다고 합니다. 아킵보는 아들로 보기도 하는데 골로새서 4:17에서 아킵보에게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지키라고 하는 것을 보면 복음을 전하는 자로 보입니다. 바울사도가 이들에 대하여 호칭을 달리 부르고 있습니다. 1-2절에 보시면 빌레몬과 압비아는 동역자로 부르고 아킵보는 함께 군사 된 자라고 합니다. 이들에게 함께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2절에서 네 집에 있는 교회라고 합니다. 빌레몬의 집을 교회의 모임장소로 제공한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대부분 개인의 가정에서 모였습니다. 그러므로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약 200년까지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개인의 가정에서 모였고 200년이 지나면서 독립된 건물들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얼마든지 이렇게 모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보고자 하는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것과 그 감옥에서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에 은혜와 평강이 있도록 인사하는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비록 고생을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고생이 크면 클수록 나중에 성공은 더 크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간증들과 설교들을 들어보면 거의가 고진감래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괴로움 속에서도 주님을 위하여 참고 견디며 충성을 다하였더니 결국은 이렇게 세상에서 보란듯이 성공하였다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사업이 성공하고, 교회가 부흥이 되고, 집안이 잘되고, 자식들이 원하는 대학에 붙고 좋은 회사에 취직이 되었다는 간증들을 동서양을 넘나들며 예를 들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성경에서 주님을 위하여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혹시 하더라도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였다고 그래서 우리도 믿음으로 자기 자식이라도 바치라면 바쳐서 복을 받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이 무엇을 복으로 받았는지를 관심도 없고 그저 소 떼 양떼 많아졌다는 것에 관심이 가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에 대하여 증거 하고 있습니다. 이복이 진짜 복입니다. 땅에 있는 흔적들은 잠시 있다가 다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이 참된 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무엇인지는 신약을 가지고 구약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약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드러나며 하나님의 일하심이 무엇을 위하여 일하시는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의 욕망에 의하여 휘둘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바를 친히 이루어 내심을 인간의 반역과 불순종을 함께 드러내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성경을 받아서 그 말씀을 순종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온 세상을 이스라엘 나라를 중심으로 다스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이 구약에서 문자적으로 나타난 곳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구약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이 아직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메시야를 자기들이 죽여 놓고서는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이 오늘 예수 믿는 다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사고방식이 자기들은 구원을 받았기에 이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영광은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영광이었기에 십자가의 영광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죽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주변의 환경들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으니 이제는 내가 최선을 다하여 세상에서 성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또는 예수님을 위하여 이렇게 헌신 충성 봉사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은혜를 주셨다고 간증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어 버리면 이미 복음이 아닙니다. 율법적입니다. 조건을 갖춤으로 받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별 다른 복이나 성공을 받지 못하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 정성이 부족한가 보다 더 열심히 하자고 하면서 자기를 또다시 닥달하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말라 끝까지 복 받을 때 까지 성공할 때까지 부흥할 때까지 끈질기게 야곱처럼 매달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보란 듯이 성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크게 돌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주님을 위하여 산 사람들의 결과는 어떤 모습입니까? 핍박과 환난과 순교의 행진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조롱당하고 매 맞고 유리하며 다녔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치고 어디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있습니까? 주를 위하여 죽었는데 무엇이 남았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이 남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남긴 것입니다. 이것이 주를 위하여 산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 1절을 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은 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성경에서 바울만큼 수고하고 애쓴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어떤 사도들 보다 더 힘을 다하여 주를 섬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감옥에 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주님을 제대로 만나고 제대로 주를 위하여 살면 이런 신세가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계속 예수를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다는 것은 우리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좋아하시는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 좋은 것이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죄를 깨닫고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부인의 길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부인하고 가지 못하기에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실패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안을 당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만물의 찌끼 같은 대접을 받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사는데도 그렇게 대접을 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안에 주어지는 신령한 복이 세상의 환난과 핍박과 죽음조차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편지를 쓰면서 무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에베소서에서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하늘의 기업을 받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엄청나고 대단한지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알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감옥이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엡1:3-23, 3:14-20 이 말씀들을 보면, 감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빌립보서는 기뻐하고 기뻐하라고 그렇게 자주 말하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예수를 위하여 감옥에 갇혔으면 억울하게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바울을 감옥에 가두어 두고서 빼내지도 못하는 것입니까? 베드로도 감옥에서 기적으로 나왔고 바울과 실라도 그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빼 내실 수 있는데도 지금 감옥에 잡혀 있으면서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하늘의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3:1-4절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몸은 감옥에 있어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감옥이 의미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각 지역의 교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어떤 인사를 하고 있습니까? 3절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감옥에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 입니까? 자기가 감옥에 있으면서 은혜와 평강을 바란다고 하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너나 은혜와 평강을 누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야곱이 노년에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먹을 양식이 없어서 내려간 자리에서 바로 왕에게 축복합니다. 기근으로 살기위하여 애굽으로 온 사람이 애굽의 왕에게, 모든 세상의 것들이 가득한 왕에게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바로가 무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나중에 모세가 바로 왕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 백성을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그때 바로 왕이 여호와가 누구 간대 그런 말을 하느냐고 합니다. 노예들의 신이라면 그 신도 별 볼일 없는 신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잘 되어야 예수님을 잘 전할 수 있다는 마귀의 속임에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말에 집단적으로 속아 넘어간 것이 유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면서 참된 하나님을 죽인 것입니다. 오늘 교회라고 모인 자들도 헛된 세상의 영광에 속을 수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광을 버리고 세상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영광을 함께 추구하는 것이라면 교회라고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바울이 누린 이러한 은혜와 평강을 누리고 있습니까? 감옥은 커녕 조금만 덥거나 추워도 불평과 불만이 나오지 않습니까? 아주 사소한 일들로 인하여 분노가 폭발하지 않습니까? 주를 위하기는 커녕 거저 내 기분과 내 만족에 미흡하면 모든 것이 싫고 짜증스럽지 않습니까?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가정도 교회도 국가도 하나님조차 나를 위하여 주면 좋지만 나를 조금이라고 불편하게 하면 은혜고 평강이고 다 날아 가버리고 분노만 가득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남의 이야기입니까? 바로 우리의 이야기 아닙니까?
바울사도의 인사말 하나를 가지고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서 얼마나 먼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먼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관없이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단지 은혜와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 바울이 믿는 예수님을 우리는 믿지 않고 엉뚱한 복음을 만들어서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를 위하여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우상 예수를 믿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바울이 믿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돌이켜 주셔서 우리에게도 이러한 은혜와 평강을 주옵소서!
빌레몬서 1:4-10 믿음의 교제 2003. 10. 1
"4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5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7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9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가을입니다. 가을하면 열매, 수확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만 그러나 올 가을의 들판은 쓸쓸한 들판입니다. 태풍으로 인하여 열매들이 거의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농부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이란 모든 것을 주님과의 관계성에서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농부로 비유된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5:1-7절입니다. “1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3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1)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7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이스라엘 백성을 포도나무로 비유하면서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맺히기는 들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혔다고 탄식하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이 가을에 느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전체에서 아버지는 농부, 예수님은 포도나무, 성도는 그 가지라고 합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면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가지가 붙어 있지 아니하면 말라지고 버려져서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가지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가지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란 늘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그러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음으로 인하여 어떤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열매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이 어떤 환경에서 나오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받는 가운데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하고 미워한 세상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세우신 것을 알고 믿는 자는 세상의 원리와는 반대이기에 미음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이로 인하여 믿는 자는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열매란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는 구호나 마음을 굳힌 의지적 결단이 아니라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가지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나오는 것이 성령의 열매들인데 그 열매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오는지를 빌레몬서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빌레몬서를 보면서 믿음의 교제와 그로인한 열매들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인사말에서 감옥에 있는 바울사도가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은혜의 결과가 평강인데 감옥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넘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강을 누리면서 믿음의 형제들에게도 그러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음으로 인한 열매인 것입니다.
오늘은 빌레몬서를 직접 받는 빌레몬과 바울이 믿음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과연 이러한 열매들이 있는가를 점검하여야 할 것입니다. 없다면, 농부가 열매 없는 빈 들판을 바라보는 그 안타까움보다 더한 안타까움이 우리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4절입니다. 바울사도가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빌레몬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제목 속에 빌레몬이 늘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늘 하나님께 감사하고 빌레몬을 위하여 기도하는가 하면 5절에서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라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빌레몬에게 복음을 전하고 오래 있지 못하고 떠나 왔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소식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 이것은 늘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성도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노라고 하면서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무언가 이상한 것입니다. 빌레몬은 노예를 거느리고 살만큼 부자였습니다. 부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신분적 차등이 많기에 개인의 노력과 능력보다 부모로부터 재산을 많이 물려받아서 부자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재산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당대에 다 털어 먹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이 부자로 있다는 것은 재산 관리도 잘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의 재물을 가지고 연보하는 삶이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7절에서 보시면,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으로 인하여 여러 성도가 평안함을 얻고 바울사도도 빌레몬의 사랑으로 인하여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다고 합니다. 여러 성도가 평안함을 얻었다는 것은 가난한 성도들이 여러 가지 생활고에서 도움을 받아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단지 말로만 위로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들의 어려움을 해결하여 준 것입니다. 이것이 주 예수와 성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인 것입니다. 이러한 열매들이 더 풍성하게 되기를 바울이 원하고 있습니다.
6절입니다.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교제로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교제가 풍성할수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을 더욱 많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선을 알수록 믿음의 교제가 풍성하여 지는 것입니다. NIV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복(선)을 알수록 믿음의 교제가 더욱 풍성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교제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진 복을 나누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아는 사람만이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신령한 복들입니다. 이러한 복들을 알아가는 것이 믿음의 교제입니다. 이런 교제를 인하여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아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물질로도 형제를 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공동번역“믿음을 통한 우리의 교제가 힘이 되어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우리의 축복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기를 나는 빕니다.” 표준 새 번역“그대가 우리와 더불어 누리는 믿음의 사귐이 효력을 내어서, 우리가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갈 때에 우리가 받게 되는 복이 무엇인지를 그대가 충분히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개역 판 성경보다는 내용이 좀더 분명합니다. 성도의 교제란 믿음의 교제입니다. 믿음의 교제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복이 무엇인지를 더욱 풍성하게 알아가는 것입니다. 바울과 부자인 빌레몬의 교제나 바울과 노예인 오네시모의 교제가 나중에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교제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분과 지위를 초월할 수 있는 믿음의 교제가 이런 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하여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8절부터 바울사도는 빌레몬에게 자신이 편지를 쓴 목적을 본격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8절에서 ‘이러므로’라고 시작합니다. 즉 바울사도가 빌레몬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빌레몬이 복음을 받아 서로 믿음의 교제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도로서 빌레몬에게 명령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인하여 간구한다고 합니다.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이 명령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겠습니까? 간구하는 것이 효과적이겠습니까? 세상은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이 부드럽게 나가고 부탁하는 식으로 하면 만만하게 보고서 명령을 잘 듣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믿음과 사랑의 교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명령이 아니라 부탁을 하여도 그 부탁보다 더 많이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21). 이렇게 함은 어떤 일이라도 억지로 하지 아니하고 자원함으로 하게하려는 것입니다(14).
9절입니다. 사랑을 인하여 명령하지 아니하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나이 많음과 감옥에 있음을 이야기 하면서 갇힌 중에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간구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성도 안에 있는 믿음의 교제입니다.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의 열매를 보고서 얼마든지 바울이 명령할 수 있지만 오히려 사랑을 인하여 간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 어떤 능력을 행하여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관계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사회로서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며 하나의 도구입니다. 생사여탈권이 주인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형제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복음 안에서의 교제입니다. 믿음의 교제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교제가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과연 믿음과 사랑의 교제가 있습니까? 같은 은혜를 받았다면, 같은 주를 섬긴다면, 같은 성령을 받았다면 바울과 빌레몬, 바울과 오네시모, 나중에는 빌레몬과 오네시모와의 관계 속에서도 믿음과 사랑의 열매가 나올 것입니다. 주인이든 노예이든 간에 은혜를 입은 자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한 순간도 살지 못하는 자임을 아는 사람은 믿음의 교제가 되는 것입니다.
몇 가지 교제를 봅니다.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도의 가르침으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으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서로 떡을 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5: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로마 교회가 바울의 복음 전하는 일에 물질로 함께 하는 것을 교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연보한 것들도 역시 교제가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빌립보 교회가 복음 안에서 교제함을 인하여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1 성령의 교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9절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근원적인 교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심으로 주님과 교제케 하십니다. 이 신실한 하나님의 교제케 하심으로 인하여 주어진 그 놀라운 복들을 알면 알수록 더욱 믿음의 교제가 풍성하여 질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서도 이러한 믿음의 교제가 풍성하여 지기를 바랍니다.
빌레몬서 1:10-18 종에서 형제로 2003. 10. 8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13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15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고 18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어제까지 종으로 부리던 사람을 오늘 형제로 맞이할 수가 있겠습니까? 고대로 갈수록 종이나 노예란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말하는 짐승정도로 취급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반상제도가 얼마나 엄격하였습니까! 아예 신분상으로 다른 종족으로 여긴 것입니다. 요즈음은 신분상의 반상제도가 없어졌지만 그러나 아직도 족보를 따지면서 양반입네 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노예와 주인의 신분이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는 약 2천년 전의 상황에서, 어제까지의 종을 오늘 사랑하는 형제로 맞아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신분의 차별을 없애자고 수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피를 흘리는 난을 일으키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습니다. 신분의 차별만 없애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차별도 없애자는 노력도 많이 해 왔습니다. 특히 공산주의 사상은 빈익빈 부익부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사유재산제도를 없애고 재산을 공동의 소유로 하자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이론입니까? 그러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고 종주국이라는 소련이 붕괴하였습니다. 공산주의는 유물론자이기에 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출발점이 인간의 가능성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탐심을 간과한 것입니다. 이것이 공산주의 실패의 최대 원인이었습니다.
공산주의의 붕괴에 우리나라 불교계가 기뻐하니까 장군죽비라는 책을 쓴 휴암 스님이 한마디 하였습니다. 공산주의가 실패하였다는 것은 불교도가 기뻐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철저한 인간중심의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하다고 실패한 것이라는 겁니다. 불교도 신에게 비는 종교가 아니라 인간 중심의 구원관인데 공산주의가 실패하였다는 것은 불교도 심각하게 자기 성찰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인간이 도저히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기에 신의 자비와 은총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말도 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신분제도를 고치고 경제의 평등을 이루기 위하여 무시무시한 살육을 감행하면서까지 혁명을 이루어 내었지만 그러나 또 다른 탐욕의 지배계급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성공하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도 결국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모든 제도와 사상들이 다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힘을 다하여도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도대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어떠한 사회변혁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좋은 세상으로 만들자는 제도를 말씀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세상을 변화시켜서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구원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도 세상의 제도개혁이나 경제문제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도시문제나 실업문제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바울 사도 같은 경우는 종으로 있어도 예수님 안에서 자유자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빌레몬에게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으라는 내용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제도개혁이나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됨을 인하여 간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10-12절입니다.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이 ‘유익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기전에는 이름만 유익한 자였지 빌레몬에게 무익한 자였습니다. 무익한 정도가 아니라 해를 끼친 오네시모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빌레몬에게나 바울에게 유익한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에게 어느 정도로 유익한 자가 되었는가 하면 자신의 심복이라고 합니다.
13-14절입니다. 오네시모가 바울에게 심복이기에 빌레몬을 대신하여 갇힌 바울을 섬기게 할 수 있으나 돌려보낸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얼마든지 부탁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이기에 그 정도는 얼마든지 부탁할 수 있지만 빌레몬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빌레몬의 선할 일이 억지가 아니라 자의로 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일이란 철저하게 자원함으로 하게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음이 없는데 억지로나 체면 때문에 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오네시모가 잠시 떠난 것은 영원히 두게 함이라고 합니다. 비록 주인의 물건을 훔쳐 도망을 갔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악도 변하여 선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만난 자리에서 말한 고백이 무엇입니까? 형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네시모를 하나님의 섭리가운데서 본다면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자기를 저주하는 자를 그대로 두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고백들은 결국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는 자세입니다.
16-18절입니다. 오네시모가 종이 아니라 종에서 뛰어나 바울의 사랑받는 형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빌레몬에게도 사랑받는 형제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랑받는 형제이기에 바울의 형제로 여기는 빌레몬에게도 형제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가 종입니다. 종이라고 하여도 전에는 무익하나 이제는 유익한 자가 되었으니 바울을 동무로 여긴다면 오네시모도 형제로 받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빚이 있다면 자신에게로 회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노예를, 그것도 물건을 훔쳐 도망간 노예를 한 형제로 맞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법이나 제도로 될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으로 되는 것입니까?
이사야 11:1-9절을 봅니다.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와서 다스리게 될 때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거하며, 어린 아이가 독사 굴에 장난하여도 해 됨이나 상함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짐승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힘 있다고 약한 자를 억압하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노예와 주인의 관계가 아닙니다. 착취와 억압이 없는 세상입니다. 이것이 메시야가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이 말씀의 성취가 오네시모와 빌레몬에게서 일어난 것입니다. 사자와 어린양이, 주인과 노예가 서로 해함과 상함이 없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근원적인 뿌리는 하나님의 원수 되어 마귀의 노예로 있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하여 용납되었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15:15절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한복음 15장은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전부다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가지가 나무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가지를 지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불러서 종이라고 하지 않고 친구라고 대접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부름을 받은 자라면 지위와 신분과 상관없이 모두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종에서 형제로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안에서 높낮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누가 서로 높으냐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이것은 부르심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로서 영양분을 공급받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로마서 11:17-24절입니다.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찌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이 말씀은 유대인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스스로 자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믿지 아니함으로 꺾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접붙임을 받았다는 이방인들도 자긍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스스로 자긍하게 되고 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주님의 긍휼로 붙어 있는 자들이기에 종이나 자유자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죄의 종에서 주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 서로 높고 낮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형제로, 노예와 주인이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동무가 되고,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가 형제로 교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지가 나무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게서 모든 것을 공급받아 살아가는 동등한 가지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종에서 형제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로 된 것이기에 나의 잘남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은혜로 된 것임을 아는 믿음의 사람만이 외모로 판단하지 아니하고 형제로 맞이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진정한 형제의 교제가 있습니까? 복음 안에서 진정한 형제의 사귐이 있습니까? 여전히 자기 육체의 소욕과 취향을 따라 이합집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여 지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알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한 몸이 되어 있다는 것이 확인되어지는 모임이 되기를 바랍니다.
빌레몬서 1:19-25 빚진 자 2003. 10. 15
"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20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21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22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2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할찌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교제가 어떠한지를 빌레몬서를 통하여 잘 볼 수가 있습니다. 주인과 종이 엄격하게 구분되었던 당시에 종과 주인을 형제로 연결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요 빌레몬은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진실한 형제의 교제가 나누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환경은 유교적 환경으로 장유유서가 철저한 편입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나이를 우선으로 따질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외적인 조건들도 얼마나 많이 따지는지 모릅니다. 학력, 지역, 혈연을 따집니다. 요즈음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고 개인의 능력을 따집니다. 외모도 능력이 되기에 남자들이 성형수술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이 세상은 능력이 없으면 어느 곳에서나 퇴출이 되지만 능력만 있으면 살아남고 좋은 대우를 받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그런 풍토가 조성이 되어 있습니다. 교역자나 교인이나 간에 그 사람이 어떤 외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는 가로 평가하는 시대입니다.
야고보서 2:9절에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외모로 사람을 취한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부자라고 특별대우하고 가난한 자라고 무시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이런 풍토가 없습니까? 세상이 모든 것을 물량적으로 평가를 하니 교회에서도 꿩 잡는 것이 매라는 식으로 누가 눈에 보이는 결과를 가져오는 가로 사람을 대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무리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여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보면 그런 외적인 조건을 전혀 문제로 삼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은 모두가 복음에 빚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무언가 행한 것이 있거나 무슨 조건이 있어서 복음을 받았다면 자랑할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은혜로 된 것이기에 서로의 관계가 형제의 관계로 되는 것입니다. 외적인 조건들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선 바울사도 자신을 봅니다. 바울은 유대인 중에 유대인으로서 율법에 열심이며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섬긴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원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가 바울에게 임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 어떤 조건에 의하여 된 것이 아니기에 이제는 자기가 자기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의미에서 복음에 빚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였다고 해서 자기가 무슨 기득권을 가지거나 사욕을 위한 권위를 부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빚진 자의 자세입니다. 이런 것을 사랑의 빚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3:8절입니다.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의 빚은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빚을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사랑의 빚을 갚아버리거나 갚을 수 있다면 사랑도 물량화 하여 계산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참된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제 오네시모를 봅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의 복음을 듣고서 바울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복음의 동역 자가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4:9절에서 골로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오네시모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오네시모는 골로새에서 노예로서 도망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서 주어지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오네시모는 복음에 빚진 것만이 아니라 자기 육신의 상전인 빌레몬에게 물질적인 빚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빚에 대하여 바울사도가 책임을 지겠다고 합니다.
빌레몬 1:18-19절을 봅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빚을 진 것이 있으면 자기가 갚겠다고 합니다. 바울이 지금은 감옥에 있습니다. 자비량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갚는 것입니까? 그것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연보한 것이 있습니다. 빌립보 4:10-20절의 말씀을 보시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유명한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이 말씀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연보한 내용을 이야기하는 중에 있는 말씀입니다. 마게도냐 지역을 떠날 때 바울에게 연보한 교회가 빌립보 교회이고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한두 번 보내었고 지금도 그런 교제가 있음을 감사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합니다. 즉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복음을 듣고 연보를 보낸 것이 형제의 교제인 것입니다.
로마서 15:25-28절도 봅니다. “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2)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3)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연보를 기뻐서 하였습니다. 기쁘게 동정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빚진 자라고 합니다.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빚의 개념이 아니라 기쁨으로 합니다. 이것이 제대로 복음이 들어간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은 모두가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이 빚은 사랑이기에 은혜이기에 억지로 마지못해 갚은 빚이 아닙니다. 기뻐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제가 유대인과 이방인인 바울과 오네시모사이에 있고, 이제는 노예와 주인인 오네시모와 빌레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빌레몬 1:19-20절입니다. 오네시모의 물질적인 빚을 자신이 갚겠다고 합니다. 자신이 친필로 쓴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빌레몬이 바울 자신에게 빚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빚을 말하지는 않겠다고 합니다. 이 빚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말한 복음에 빚진 자입니다. 사랑의 빚인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자면 빌레몬에게 당연히 명령하여 오네시모를 자신의 심복으로 삼을 수 있지만 그러나 선한 일이 억지로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빌레몬에게 오 형제여!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바울과 오네시모와 빌레몬이 무엇으로 하나가 된 것입니까?
이 세 사람이 형제의 교제가 가능한 이유는 모두가 복음에 빚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21-35절에 형제를 몇 번 용서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갚을 능력이 없어서 탕감을 받은 것입니다. 탕감을 받았기에 갚을 의무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용서받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은혜는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도 오네시모도 빌레몬도 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였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가야 하는 빚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탕감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용서를 다 받았기에 서로 용서 받은 자로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용서를 모르면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목을 잡고 감옥에 가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자는 주님의 용서를 모독한 것입니다.
20-21절을 봅니다. 빌레몬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울을 기쁘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의 마음이 평안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순종할 뿐만 아니라 빌레몬이 더 행할 줄을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를 형제로 맞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유인이 되게 하여 바울을 섬기게 하는 정도까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옛날 노예가 재산의 손해를 입히고 도망간 자를 형제로 맞이하라고 하면서 그보다 더 행할 줄을 안다고 합니다. 얼마나 부담이 됩니까?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22절입니다. 오직 저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고 합니다. 자기가 머물 처소도 예비하라고 합니다. 빌레몬에 대한 부탁도 엄청난 부탁인데 자기 처소도 예비하여 두라고 합니다. 이러한 교제가 되는 것이 형제의 교제가 아니겠습니까? 진정으로 용서를 받은 자라면 자신이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진자라면 얼마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과연 주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를 거저 받은 사람들입니까? 갚아 낼 수 없는 빚이지만 그것이 의무나 억지로 갚아야 할 빚이 아닌 사랑의 빚이라면 목숨을 내어 놓은들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복음을 듣고 나서 여러분이 율법이나 종교적인 의무감에서 해방이 되셨습니까? 그러면 전에 의무감에서 하던 것보다 더 하고 있습니까? 덜 하고 있습니까?
아마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전혀 거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점검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재산을 모을까에 마음이 빼앗겨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씀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마음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도 이렇게 하자고 억지로 밀어붙인다고 될 일도 아닙니다. 제도적으로 공동체를 만든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수많은 공동체들이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공동체들은 모두가 나름대로의 법이 있습니다. 그들의 법을 따르지 않으면 그 공동체에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는 공동체로 모여서 사는 것도 아닙니다. 법으로 강제하지 않습니다. 노예제도를 무너뜨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형제의 교제가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빚진 자들의 모습입니다.
끝으로 23-25절에서 바울과 함께 하는 자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축복으로 이 서신서가 마무리 됩니다. 바울과 함께 하는 자들의 이름이 에바브라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를 언급합니다. 이들을 바울의 동역자라고 합니다. 지금 바울이 당하는 고난에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함께 문안을 합니다. 그 문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할 찌어다.
우리가 빌레몬서를 보면서, 우리 안에 바울과 오네시모 빌레몬과의 교제 같은 교제가 있는지를 점검해 보았습니다. 우리 안에 이런 모습이 없음을 인하여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있도록 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과연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 내가 과연 은혜를 받은 사람인지 자신을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13:5절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이 스스로 예수 믿는다고 착각하고 살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축복이 우리 안에도 성취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할찌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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