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 2
창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目 次
26. 단번에 얻은 거룩
27. 영원히 온전케 하심
28. 너희는 생각하라
29. 의인은 믿음으로
30. 믿음의 실상
31. 아벨의 믿음
32. 에녹의 믿음
33. 노아의 믿음
34. 부르심과 순종
35. 나그네
36. 믿음의 유산
37. 요셉의 해골
38. 더 나은 재물
39. 피 뿌리는 예
40. 기생 라합의 순종
41. 믿음의 사람들
42. 세상이 감당치 못함
43. 증거와 약속
44. 예수님을 바라보자
45. 생각하라
46. 고침을 받게 하라
47.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48. 성도가 이른 곳
49. 진동치 못할 나라
50. 나그네 대접
51. 영원히 동일하신 분
52. 영구한 도성
53. 끝 인사
히브리서 10:1-10 단번에 얻은 거룩 2004. 5. 12.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ㄱ)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하시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지난주 보았던 9:28절 말씀에 보시면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나타나신다는 것은 재림으로, 이 때에 죄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바라는 자들에게 나타나신다는 말씀인데 죄와 상관없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거룩함입니다. 거룩한 신부로서 거룩한 신랑을 기다리는 것이 교회의 모습인데 어떻게 거룩한 신부로 기다리는 것인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보고자 합니다.
10:10절을 먼저 봅니다. 이 뜻을 좇아, 라고 말씀하는 부분은 구약의 율법과 제사가 온전한 거룩함을 주지 못하기에 폐하시고 두 번째 것을 세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세우신 온전한 거룩함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질문을 합니다. 우리가 거룩함을 노력하여 이루는 것입니까? 얻는 것입니까? 10절 말씀에서 분명히 얻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질문을 합니다. 거룩함을 단번에 얻었습니까? 차츰 차츰 얻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리심으로 거룩함이란 단번에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되면 단번에 거룩함을 얻는 것입니다.
로마서 8:30절을 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롭게까지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거룩함이란 말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의롭다함과 영화로움 사이에 성화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미 부르신 자를 영화롭다고까지 하셨다고 완료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함도 단번에 이미 얻은 것입니다. 역시 완료형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종교적인 본능은 점진적으로 무언가 나아져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은 초보단계이고 그 이후로 점점 더 고급해지는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아가야 처음 믿는 사람보다 오래 믿은 사람이 더 나은 무엇이 나오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참으로 낯설게도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스스로 거룩함에 이를 수가 없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제사제도를 주셨는데 이로 하여금 자기들의 죄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과 제사제도를 가지고 오히려 자기들 치장을 하고 나선 것입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로마서를 통하여 확인하였습니다. 율법이 가입함으로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율법을 받은 자들은 누가 율법을 잘 지키는가를 내기하고 경쟁하면서 계급화 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키는 자는 더욱 거룩함에 이르게 되고 지키지 못하는 자는 거룩함에서 멀어지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난 이후의 인간은 무엇이 주어지더라도 그것으로 자기 자랑과 자기 치장용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기 전에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아무것도 인위적으로 자신을 가릴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린이 성경의 창세기 그림을 보면 선악과를 따 먹기 전의 그림도 중요부분은 나뭇가지나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그림을 그려 놓았습니다. 그러나 범죄 이전에는 전혀 가리지 않아도 부끄럽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범죄로 인하여 두렵고 부끄러워서 하나님 앞에서 숨고 자신을 가린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인간의 역사는 가리는 일에 동원되는 역사입니다. 모든 행위의 밑바탕에는 자신의 근원적인 부끄러움을 가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가리고 치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들이 모두 자기의 부끄러움은 숨기고 자기 멋진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위선이 나오고 위장이 나오고 거짓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러한 인간의 위장을 벗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적당히 칭찬도 하고 사람의 가능성도 높여가면서 자랑거리들을 만들어주면 좋아할 텐데 그러한 위장들을 들추어 버리기에 싫어하는 것입니다. 심한 화상을 입은 사람이 붕대를 풀고서 거울을 보게 되면 십중팔구 거울을 깨뜨려 버린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왜 돌 맞아 죽었습니까? 유대인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한 성전을 공격하였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정하고 있는 대로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스데반 집사가 구약의 성경을 인용하면서 사람의 손으로 어떻게 하나님이 거하실 집을 지을 수 있는가 하면서 선지자들을 죽이고 선지자들이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 죽인 자가 되었다고 하자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율법이 있고 제사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배척받았다는 것은 죄가 무엇인지를 다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를 받는 사람들이 복음에서 다시 율법과 제사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있기에 율법과 제사가 어떻게 모형과 그림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자꾸만 율법과 제사로 돌아가려고 할까요? 그것은 자신이 무언가 행할 수 있다는 쪽으로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행함에 가치와 의미를 두고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이 행한 것이 죄 뿐이고 오직 살리시는 것은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주님의 일방적인 공로로만 되는 것이기에 자기 자랑이 들어설 틈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싫은 것입니다. 나는 그래도 저런 사람들보다 낫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아의 확대와 존귀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이것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실상이 처절하도록 드러난 것이 구약의 계시입니다.
이사야 66:1-4절을 봅니다. “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1)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스데반 집사가 이 말씀을 인용하여서 설교를 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 시대가 아니라 훨씬 이전에 구야의 선지자 이사야, 예레미야 시대에 이미 이런 말씀이 다 선포가 된 것입니다. 성전을 짓고 온갖 제사를 다 드린다고 하여도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께 가증한 일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택하지 않고 자기들이 기뻐하는 것을 택한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말씀을 봅니다. 10:1-4절입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입니다. 율법으로 제정된 모든 것들도 역시 참형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제사로는 온전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온전케 되어 단번에 정결케 되었다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드리는 일을 그쳤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제사가 드려진 것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되고, 또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따로 있었다는 것을 구약에서 이미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0:5-7절의 말씀은 시편 40편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시편 40편을 봅니다. 1-5절에서 자신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려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수렁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은 율법도 잘 지키고 제사도 잘 지내는 줄 알았고 그래서 자신이 의인인줄 알았기에 자신은 죄인인 줄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시편 51편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간음과 살인을 하였지만 자기 죄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 된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비유로 죄를 지적하니 그런 놈은 죽여야 마땅하다고 큰 소리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나단 선지자가 지적을 하자 다윗이 처절하게 회개합니다. 자신이 죄악 중에 잉태되었기에 죄를 먹고 마시며 살았다는 고백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위대함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은혜를 받은 자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의 지적에 대하여 나단 선지자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죄를 지적하는 자에 대하여 좋은 감정으로 대하기가 얼마나 불가능한지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자기 죄를 회개하는 것이 바로 은혜를 입은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입은 자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나 번제를 즐겨하거나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상한 심령을 원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멸시치 아니하실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시편 40편 6-7절입니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제사와 예물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한다는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 내용입니까? 그러나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가 무엇인가 하니 제사나 예물이나 번제나 속죄제가 아니라 한 인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루마리 책에 기록한 대로 내가 왔나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라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8-10절입니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드리는 번제와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한 제물이 되셔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단번에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 거룩함에 이르기가 불가능한지를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알 때만이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이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도 자신의 잘남과 자랑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만 거룩함을 얻게 하셨는지를 평생 알아가면서 주님께 감사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히브리서 10:11-25 영원히 온전케 하심 2004. 5. 19.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1)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16 ㄴ)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잠언 30:15-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5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16 곧 음부와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서너 것이 음부와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아니하는 불이라고 합니다. 이 족함을 모르는 서너 가지가 거머리나 사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욕심을 말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람이 만족을 모르는 것은 여러 가지 탐심으로 인한 세상의 물욕적인 것에 대한 것을 주로 말합니다. 나는 이 정도면 정말 만족한다는 사람이 과연 있겠습니까? 어떤 문제만 해결된다면 죽어도 좋겠다고 말을 하지만 그러나 그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닥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런 물욕적인 만족만이 아니라 문화적 욕구, 종교적 욕구의 만족도가 또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관조하면서 사는 사람들도 있고, 자기의 것을 다 내어주면서 희생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한 삶들은 세속적이지 않기에 우리는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거룩을 향한 사람들의 가장 큰 실패가 유대인들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어떤 율법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아야 하는데 오히려 율법으로 자기들의 거룩을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자기의만 가득하게된 것입니다.
로마서 10:1-5절입니다.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율법적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자기 의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남과 비교하여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게 된 소치입니다.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기에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보면 자기 의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율법적이냐 복음적이냐는 것은 자기에게서 자랑이 나오느냐 감사가 나오느냐로 점검할 수가 있습니다. 율법적이면 아무리 은혜를 말하고 복음을 말하여도 자기 자랑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래도 이만하기에 은혜를 받았고 복음을 안다고 하는 것이 자기 속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랑으로 귀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에 자기에게는 일체의 의가 없음을 알고서 주어지는 의로 인하여 감사할 뿐입니다.
14절을 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되고 그것은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이것을 부인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피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거룩함과 영원한 온전함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부인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원수들입니다. 이런 원수를 발등상 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13절).
11-13절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으로서는 매일 서서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지만 그것으로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제사란 자기들의 죄를 알아야 할 텐데 오히려 율법 지키고 제사지내는 것으로 자기들의 공로로 삼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지내는데 하나님은 뭘 하시는가 하는 원망들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제사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나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8:1-9절입니다. “1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2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3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1)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5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무엇입니까? 날마다 하나님을 찾으며 그의 길 알기를 즐거워하는 것처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처럼 의로운 판단을 구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처럼 금식하고 마음을 괴롭게 하는데 왜 하나님이 응답하지 아니하는가, 하고서 항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규례를 지키고 열심히 하나님을 찾는 것 같은데 속으로는 순전히 자기들의 기쁨과 만족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인데도 오히려 약한 자를 학대하면서 자기들의 종교적인 업적으로 복을 받고자 하는 것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죄악이 고쳐지지 않았기에 결국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갑니다.
스가랴 7:1-7절입니다. “1 다리오왕 사년 구월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2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 종자를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3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여러 해 동안에 행한대로 오월간에 울며 재계하리이까 하매 4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6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 7 여호와가 이전 선지자로 외친 말을 너희가 청종할 것이 아니냐 그 때에는 예루살렘과 1)사면 읍에 백성이 거하여 형통하였고 남방과 평원에도 사람이 거하였었느니라”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와서 포로기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며 애통한 것을 계속할 것인지 하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오월의 금식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인한 것이고 칠월의 금식은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의 마지막 방백으로 세운 그달리야가 암살당한 사건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하여 바벨론 포로 70년 기간동안 얼마나 금식하며 애통하였을까요? 그런데 그 금식마저 자기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포로생활 중에 금식하며 애통하는 것이 자기들을 위한 것이라면 평소에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지내는 것도 결국 다 자기들을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상입니다. 그 어떠한 율법과 규례와 금식과 제사도 그들의 죄를 해결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이 새 언약을 예언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로 하여금 새 언약에 대하여 예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8장에서 새 언약에 대하여 말씀하고서 또다시 여기서 새 언약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15-18절입니다. 새 언약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마음과 생각에 기록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성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죄란 모든 불법이 죄입니다. 그런데 그 불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내용이란 자기의 열심이나 업적이 담겨지고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부인되어 지고 하나님의 하신 일이 담겨지고 확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려도 계속하여 그래도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고서 반문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꾸 은혜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그저 놀아도 되겠구나! 할 것인데 우리의 공로가 아니지만 할 일을 말씀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을 하여야 할까요?
19-25절입니다. ‘그러므로’ 즉 영원히 온전케 된 자들이 무엇을 하게 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육체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살아있는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처럼 이제 새로운 길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었기에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22절에서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무엇을 뿌림 받은 것입니까? 베드로전서 1:2절에 보시면 우리의 택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 피 뿌림을 받고 나니 양심의 악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악을 깨달음으로 몸을 맑은 물로 씻었기에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아가는 자들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면서 모이기를 힘쓰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게 되어있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면서 주님 오심을 기다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히 온전함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날이 가까워 옴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합니다. 누가 이 시대에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모이기를 힘쓰고 있습니까? 누가 주님오심을 위로와 격려로 삼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영원히 온전함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히브리서 10:26-31 너희는 생각하라 2004. 5. 26.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30 ㄷ)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31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29절 끝의 말씀에 ‘너희는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구약에서 율법으로 나타났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어긴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심판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내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사실을 믿고 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목표입니까? 예수님을 위하여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충성을 하였는가를 오늘 면려회 부장목사님이 말씀하셨는데 과연 지금 주님 오신다면 우리가 주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되겠습니까? 좀더 충성하자, 헌신하자는 것으로 설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습니다. 거룩하게 된 사람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두 주간에 걸쳐서 본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반응이 나옵니까? 그러면 우리가 아무것도 할 것이 없으니 그냥 놀아도 되겠네! 하는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물어봅시다. 그 동안 놀지 않고 열심히 무언가 잘하여 왔다는 수준이 어느 정도입니까? 몸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였는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과 뜻을 다하여 자신만을 사랑하여 왔는데 어떻게 타인을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대로 하지 못하기에 자기의 능력과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언약에 따라 거룩함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룩함과 온전함을 받은 사람은 그냥 놀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기에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하지 않고 그 날이 가까이 올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며 서로 격려하는 것입니다.
26절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받았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온전하게 속죄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가 아닙니다. 율법이 아닙니다. 인간의 그 어떤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진리의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하면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합니다.
모든 죄는 다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속죄가 없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18절입니다. 이것을 사하였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단번에 제사를 드리심으로 그를 믿는 자는 다시 속죄의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과연 속죄가 안 되는 범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도에 관한 말씀은 앞에서도 한번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6:4-6절입니다. “ 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5 하나님의 2)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는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가 무엇이 부족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욕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지 아니하는 것이 인간에게 달린 것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붙들고 가시는 것이지 우리가 신실하여서 주님을 붙들고 가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배도에 대한 책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영광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지 않고는 의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와 거룩과 구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심판이 기준이 무엇이겠는가를 생각 하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아 놓고서 범죄 한다는 것은 진리의 지식을 부인하는 것이며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에게는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를 받는 성도들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삶의 현실에서 예수를 믿고서 의롭다 함을 받고 거룩함을 받았다고 해서 무언가 나아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핍박은 여전하고 삶의 고난을 다 닥치는 것입니다. 오히려 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 보다 더한 고통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자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과연 바른 믿음인가 하는 회의가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지식이 정말 진리가 맞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치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소문을 듣고서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면서 질문하였듯이 의심이 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증거 된다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의 역할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현실의 삶에서 얼마든지 실족할 수 있는 상황이 닥칩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믿는데 왜 이리 어려움이 닥치는가! 내가 무언가 잘못 믿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너희는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을 근거와 기준으로 임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27절입니다. 진리의 지식을 받은 후에 하나님께서 심판을 어떻게 하실 지를 구약에서는 율법을 통하여 보이셨습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구약에서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면 새 언약시대에는 무엇이 그 심판의 기준이겠습니까?
새 언약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며 근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드리심으로 거룩함을 얻고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 아들에 대하여서만 인정을 하시겠다는데 우리가 시비를 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따라 자기 아들의 피로 구속하시고 그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는 일에 대하여 미심쩍어 하고 불신하는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란 무엇을 근거로 일어나는지 29절입니다. 1.“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우리가 무엇을 밟는다는 것은 가치 없을 때 발로 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치 없이 여겼으면 발로 밟아 버리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온갖 수치와 모독과 조롱을 다 당하신 것입니다. 그냥 발로 밟아버린 정도가 아니가 더한 모독을 가하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유대인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신 것은 아들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아 영생을 얻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그런 것은 자기들이 이미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다른 것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제대로 증거 된다면 발로 밟을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세상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이 발로 밟혀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하신 일에 관심이 없고, 자기와 자기가 한 일과 할 일에 대한 관심만 있는 사람이라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은 애써 외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심판이 임하지 아니하겠습니까?
2.“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깨끗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의 피는 믿는 순간에나 필요하고 믿고 나서 나중에는 예수님의 피가 아니라 자기의 땀과 피가 중요하게 여겨지고 예수님의 피가 걸리적 거린다면 이는 예수님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3.“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고” 성령 앞에 은혜가 들어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그렇게 책망을 받은 자는 무엇이 은혜인지를 알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여야만 은혜를 제대로 알게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은혜임을 알고 믿고 나서 사는 것도 다 예수님의 은혜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는 증거가 은혜를 아는가 모르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2절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이 임하여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로 주신 것들이 무엇입니까?
그 아들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거룩함을 얻었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영원히 온전케 하셨습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다 받았고 또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장차 망할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썩지도 쇠하지도 더렵혀 지지도 아니하는 나라를 소망하게 된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다 은혜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이 은혜의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우리가 말을 해도, 무슨 봉사를 하여도 다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나오지 아니하고 법이 나오고 도덕이 나오고 육신을 묶는 법으로 교회를 움직여 나가려는 것은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가시적인 효과가 없어 보이고 일이 더딜지라도 은혜를 입은 자들은 은혜로 모든 일들을 감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그 언약의 피에 대하여, 은혜의 성령에 대하여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대하는가를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그 아들을 밟고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할 자들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바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0-31절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셔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던지실 분을 두려워하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지옥에 갑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그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들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히브리서 10:32-39 의인은 믿음으로 2004. 6. 2.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줄 앎이라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37 ㄹ)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어떤 분이 전화로 빛과 소금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하여 왔습니다. 그때 답을 한 것이 요한복음 1장과 3장의 내용이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빛이 세상이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여 빛을 미워한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윤리 도덕적으로 더 나은 상태를 말합니다. 조금 더 손해보고 조금 더 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이라면 사람들이 미워하겠습니까?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칭찬하고 존경할 것입니다. 역시 무언가 믿는 사람은 다르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참으로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오신 분이신데, 왜 세상이 그토록 예수님을 미워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정도로 싫어하였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처럼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세상을 사랑해서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미움의 이유는 예수님이 철저하게 믿음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 세상에 보이는 것을 목표로 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상은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속이고 있는데, 믿음의 사람들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 즉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가 진짜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이기에 세상이 가만 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질서를 뿌리 채 흔들어 버리는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1세기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혹독한 박해에 시달렸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재산을 빼앗기고, 조롱을 받았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으로 이러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본문의 말씀은 위로와 격려를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믿는다는 것으로 이러한 비방과 환난이 있습니까?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분명히 믿음으로 산다면 이러한 일들이 동일하게 일어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만을 믿고 살기 때문에 비방과 환난이 없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보이는 세계를 바라고 소망하고 살면 다 한 통속이기에 핍박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32절입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히브리서를 처음 받는 독자들이 빛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지요! 그때부터 고난의 큰 싸움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히브리서를 보면서 그러한 싸움들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를 보았습니다. 어떻게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 율법과 제사와 절기가 다 완성이 된 것인가 하는 싸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큰 싸움에서 잘 참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33절입니다. 그런 싸움은 비방과 환난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한 역사를 보면 참혹할 정도였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고문을 가하고 처형을 하면서 구경거리로 삼은 것입니다. 그렇게 공개적으로 구경거리를 만드는 것은 그러한 자들과 사귀지 말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러한 자들과 사귐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귈 때는 일반적으로 이해득실을 따지게 됩니다. 혹시 손해가 오는 한이 있더라도 그 사람과 사귀면 나중에 커다란 보상을 바라고 사귀는 경우입니다. 또 나아가서 그러한 보상은 없더라도 더 고상한 가치를 위하여 손해를 당하더라도 핍박 받는 자와 사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유, 인권, 민주화라는 가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며 싸워온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싸움도 결국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가치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약속의 세계를 위하여 비방과 환난과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런 자들과 사귀는 자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지만 그러나 끝까지 바울과 함께 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바라본 바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으로 비방과 환난을 당하는 자들과 함께 사귀는 자들이 무엇을 소망한 것입니까?
34-35절입니다.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으로 재산까지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먹고 살 터전마저 빼앗겼는데 그것을 기쁘게 당한 것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잠간이며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가 영원함을 알고 믿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핍박을 받을 때에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 받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였습니다. 드디어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다 받는 것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묶여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핍박 받는 것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12-19절입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1)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받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고난을 당하면 무언가 잘못 믿어서 그런 것처럼 보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손에 잡혀지고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을 성공의 척도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르게 믿는 사람에게 필수적으로 고난이 임한다고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어떤 심판이 있겠습니까? 믿음의 내용을 하나님의 약속에 두지 않고 세상의 것으로 바꿔 치기한 것입니다. 그런 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된다면 눈에 보이는 세상만 바라보고 살며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담대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다 잃어버려도 쇠하지도 않고 낡아지지도 않고 더렵혀지지도 아니하는 영원한 기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유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가 492장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목숨보다 귀한 것이 영원한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부귀나 안일함이나 명예마저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36절입니다. 이 기업이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 약속이 무엇입니까? 이 상이 무엇입니까?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예수 믿는 자의 상이란 영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영원한 상이요 기업인 것입니다. 그와 함께 하늘나라를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부 믿음의 내용입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7-38절입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하박국서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예언한 잠시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이 말씀을 따라 의인을 믿음으로 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박국 선지자 당시의 상황이 어떠하기에 이러한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까?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묻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떻게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당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주께서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과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데 어찌하여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하면서 물어 본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시편 73편에서도 나오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분이신데 어떻게 악인이 형통한가에 대하여 실족할 뻔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37-38절입니다. 잠시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현재의 문제들을 부조리한 일들을 바로 바로 해결하여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살라는 것이 대답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됩니까? 주님의 재림이 곧 있으리라는 것은 이미 1,900여년 전에 주신 말씀이지만 오늘도 이 말씀이 성도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따라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람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떤 이론과 경험과 지식과 일반론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우리가 흔들리지 아니하고 물러가지 아니하고 침륜에 빠지지 아니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잠시잠간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라는 이 말씀이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이 믿음의 약속은 신약만이 아니라 구약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이 이어지는 히브리서 11장의 내용입니다.
현대 세계의 세속적인 압력은 즉각적인 것의 중요성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결과물을 우선순위로 삼고 있습니다. 조금만 지루하면 채널을 바로 돌려버리는 세상입니다. 속도가 조금만 느리면 기계를 바꾸어 버립니다. 이런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믿음의 세계, 약속의 세계를 믿고 기다린다는 것이 세상에서 조롱받을 일입니다. 왕따를 당하고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약속의 세계를 믿는다는 교회마저 가시적인 결과물이 없으면 배척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이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들과 사귀고자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잠시잠간후면 오실 이가 오신다는 이 약속의 말씀이 우리의 신앙의 내용이 되고 있습니까? 주님이 오시면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이 다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3 믿음의 실상 2004. 6. 9.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지난주에 본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이 10장까지의 전체 결론입니다. 그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대로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증거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시고 완성이 되시므로 그를 믿음으로 단번에 의롭다 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제 11장에서는 그렇게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믿음의 영웅들을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믿은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면서 그들에게 믿음을 주신 궁극적인 분을 계시하고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인간의 위대한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11장의 서론격인 1-3절을 통하여 믿음에 대한 정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실제로 이루어진 것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아직 손에 잡히지 아니하고 눈에 보이지 아니하지만 이루어질 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믿음의 경우를 봅니다. 자식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주신다고 하시니 이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믿었는데 아직 자식은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믿음의 약속을 받은 것이 이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갖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비록 나의 손에 아무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 우리도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믿고 구하면 반드시 주신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자기의 소망이나 야망을 이루어주신다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그 약속이란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인데 이 약속을 주실 때는 어느 것 하나 아브라함의 손에 들어온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주어졌습니다. 이 약속을 믿기까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인도를 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밖에 없도록 하신 후에 후손을 주신다는 약속을 주시고 이것을 믿으매 그것을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이 약속의 성취는 이삭이 일차적인 바라는 바 내용물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내용은 신약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 후손이란 갈라디아서 3:16절에 의하면 수많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도 예수님의 때를 기다리다가 보고서 기뻐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실상이요 증거입니다. 이렇게 분명한 결론이 주어져 있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이 말씀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르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청년 때에 거의 모든 교회와 기도원에서 유행한 내용인데 아직도 그 영향력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기도하라’는 내용입니다. 청년 때에 결혼을 하려면 신붓감을 위하여 키, 외모, 직업, 성격, 등등의 내용을 상세히 기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기도하였더니 그런 사람을 주었다는 자기들의 간증까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분위기가 되어버린 것이 순복음 교회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몇 달 전에 기독교 텔레비전 방송에서 조목사의 미국 집회가 방송이 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을 이야기 하면서 자기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기도하고 응답을 받았는지를 간증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가난한 전도사 시절 책상과 의자와 자전거가 필요하여 간절히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응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 주시지 않는가 하고 물었더니 수많은 책상, 의자, 자전거가 있는데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리핀산 호마이카 책상, 미쯔비시산 의자, 미국산 자전거를 달라고 구체적으로 기도하였답니다. 그런데도 주시지 않자 왜 그런가 하는데 구한 것은 이미 주신 것으로 여기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선포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시간에 기도해서 응답받았다고 하자 몇 집사가 와서 보자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아이를 가졌을 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미 뱃속에 있는 것처럼 자기 마음에 이미 받았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결국에는 선교사 이사를 도와주러 갔다가 정확하게 기도한 책상과 의자 자전거가 나와서 달라고 하여 가져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예로 드는 것은, 우리가 믿음을 얼마나 많이 이런 내용으로 채우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고자 한 것입니다. 믿음의 실상이 자기가 바라고 소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꿈을 꾸고 그것을 목표로 정하고 매일 소리쳐서 외치고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여 이루어내는 것을 믿음의 내용으로 말하고 있다면 이것은 성경의 약속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간의 욕망을 종교로 포장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가 사람들에게 이미 들어 있기에 성경의 수많은 기도에 대한 구절들을 거두절미하면서 끌어들여서 자기들이 소원하는 바를 구하면 이루어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어떤 말씀이 기억나십니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면 주신다는 말씀이 기억나십니까?
마태복음 21:18-22절입니다. “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이 말씀 가운데 무엇만 취하여 기도합니까? 22절입니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단락이 18-22절인데 무화과나무의 저주 사건에서 기도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무화과나무가 왜 말라죽었습니까? 열매가 없어서 말라 죽은 것입니다. 열매 없는 나무에 대하여 저주하니 말라 죽는 것이 무엇이나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내용의 바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는 기도가 과연 나오겠습니까?
좀더 확대해서 바로 앞의 구절을 봅니다. 마태복음 21:12-17절에서 무슨 내용이 나옵니까? 하나님의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는데 무엇이 되어 버렸습니까?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는 책망입니다. 그러면 기도하는 것이 자기의 소원성취를 비는 것이 기도하는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어 버렸다면 이제 남은 것은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아 말라죽은 것처럼 파괴될 것뿐입니다. 성전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입니까? 제사장이나 성전 종사자나 거기에 오는 사람이나 다 도적의 심보로 온 것입니다.
이제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겠습니까? 이 임박한 심판의 소식을 듣고서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마태복음 21:18절 이하에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무슨 권세로 이렇게 하느냐고 따집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이 하늘로 서냐 사람에게로 서냐고 물으십니다. 아무런 대답을 못하지요. 하늘로서, 라고 하면 왜 믿지 아니하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로서, 라고 하면 백성들이 선지자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너희보다 세리와 창기가 천국에 먼저 간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리와 창기는 믿었지만 너희는 종시 믿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 성전에서 기도를 잘하는 사람들입니까? 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입니까? 세리와 창기들입니까? 정말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았던 세리와 창기가 무슨 기도를 하였겠습니까?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은 성전에서 자기의 의로움과 잘남을 기도의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다른 기도에 관한 구절을 보아도 우리가 회개할 내용들이지 우리의 소원성취의 근거가 되는 기도가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의 야망을 가지고 삽니다. 때로는 세상을 포기하고 자살하기까지 하지만 그것도 자기 야망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욕망이 바로 죄라고 해야 할 교회에서 인간의 욕망을 더욱 잘 성취할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면 교회가 아니라 이방신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말씀이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사람들의 욕심을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목표를 써 붙여서 매일 바라보고 기도하라고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세상에 썩어질 것들을 구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며 오직 선물로 주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선진들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과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로 받은 내용물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전체에서 증거할뿐 아니라 성경전체에서 증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믿음의 실상이요 믿음의 증거물입니다. 이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하여 히브리서 11장에서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증거한 바가 무엇인가 하면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성취가 되는가를 목격하고서 그 증인들로서 세워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약속의 세계를 바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본향을 향하여 순례자의 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사를 준비하면서 그동안의 살림살이들을 정리하였습니다. 가져가야 할 것, 못쓰게 되어서 버려야 할 것들을 구별하는 것만이 아니라 얼마나 많이 연락을 해야 하는지 전화, 전기, 가스, 유선, 의료보험, 동사무소,,, 마치 거미줄에 친친 감긴 곤충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더욱더 보이는 세상에 얽매어 두는 끈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질기고 많은 끈들이라도 단숨에 끊어지는 세계가 있으니 믿음의 세계입니다.
히브리서 11:3절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안다고 합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인하여 되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보이는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더욱 잘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세계만 전부로 알고 삽니다.
그러나 믿음의 선물을 받은 자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보이지 아니하는 약속의 세계를 보듯이 살았던 것처럼, 오늘도 믿음의 사람들은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아니하는 약속의 세계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그네로 살게 됩니다. 약속의 세계를 향하여 나그네로 사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 진리임을 믿고 사는 성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히브리서 11:4 아벨의 믿음 2004. 6. 16.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성경에서 최초로 믿음의 제사를 드린 사람이 아벨입니다. 그 믿음의 제사를 한번 드리고서 죽임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믿음이 나오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세력이 바로 죄입니다. 가인의 문에 죄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죄를 다스릴 수가 없었기에 아벨을 죽이게 된 것이지만 이것은 보이는 세계이고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에서는 믿음이 세상이 출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기도 하고, 믿음이 좋아지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제사를 한번 드리면 순교를 한다고 할 때 그런 기도를 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믿음이 좋아져서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는 것이지, 믿음이 좋아져서 순교해버린다면 누가 과연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이 아벨의 믿음에 대하여 추적을 해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4장에서 보면 가인은 농사짓는 자이고, 아벨은 양을 치는 자입니다. 그래서 둘 다 자기의 수확물로 제물을 삼아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고 아벨과 그 제물만 열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제사하라는 법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추측하기를 아벨은 정성으로 바치고 가인은 정성으로 바치지 않았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영화 같은 것을 보니 가인이 곡식을 제물로 드리다가 아까워서 퍼내어버리고 조금만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아벨의 제단에서는 연기가 똑바로 하늘로 올라가고 가인의 제단에서는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이지 아니하는 믿음의 세계를 보이는 증거물로 드러내고자 하는 억지가 아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차이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벨은 ‘첫 새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첫’이라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물’로 드렸기에 받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양은 땅의 소산물이 아닙니까?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까?
받으시고 받지 않으시고는 하나님의 선택에 달린 것으로 봅니다. 이미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입장에서 스스로 생명나무로 나아갈 수 없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열어주셔야만 되는 문제입니다. 인간이 어떤 정성과 제물을 바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받으셔야 한다는 의무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반발이 가인입니다. 왜 나의 제물은 받아 주지 않는가에 대한 원망으로 아벨을 죽이는 것입니다.
가인은 장자로서 모든 것에 우선권이 있었을 것입니다. 장자 선호란 본능적인 것입니다. 자기 몸의 첫 열매이기에 장자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상적인 삶에서 늘 형님 먼저였을 것인데 여기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물만 거절당한 것이 아니라 가인과 제물이 함께 거절당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분노, 안색이 변함은 이미 가인 속에 죄가 가득한 증거입니다.
창세기 4:5-10절입니다.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2)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죄가 드러나는 시점은 믿음이 드러나는 시점입니다. 가인이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하고 믿음의 제사를 드린 아벨을 죽였을 때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그 피가 호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여 버리면 끝이 난다고 보는 세상, 죽으면 그만, 이라는 세상은 보이는 것만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세계란 보이는 세계를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믿는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라고 해서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약속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24-25절입니다.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여기서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장차 나타날 영광인데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의 세계를 믿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벨이 믿음으로 드렸다는 것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하였으니 아벨이 보지 못한 세계를 보고 바란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예수님께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이 있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성경은 곧 나에 대하여 증거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나에게 오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이어서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이유가 사람이 자기 영광을 취하기에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가인도 믿을 수 없었다는 것은 자기 영광을 챙긴 것입니다. 왜 나의 제물을 받아 주지 않느냐고 안색이 변하는 것이 자기영광입니다.
오늘 우리가 동일하게 이렇게 예배에 참석합니다만 누구의 예배는 받아 주시고 누구의 예배는 받아 주시지 않는 것이 시각적으로 나타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정성을 다하여 수요일에도 왔는데 왜 받아 주지 않는 것이냐고 항의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다시는 예배하지 않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 부끄러워서라도 교회에 나오지도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의 영광을 챙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가인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아벨과 그 제물이 무엇을 무슨 증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벨과 제물이 함께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가인과 제물이 함께 다루어지듯이 그 제물이 증거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니 히브리서에서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신다고 합니다. 그 예물이란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린 것입니다. 아벨이 드린 예물을 하나님께서 믿음의 증거물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가인의 예물을 증거로 삼으시지 않으시고 아벨의 예물을 증거물을 삼으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없습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시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무어라고 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아벨의 예물을 가지고 증거로 삼으시는 내용은 율법에서 그 기름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야곱이 형을 피하여 도망가다가 루스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누웠던 돌 베게에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벧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구별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름부음이 율법에서는 제사장의 위임에 기름을 붓고 왕과 선지자에게도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 제물을 드릴 때에 기름을 따로 분리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름부음이 메시아의 뜻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기름부음의 뜻을 아벨이 먼저 알았다는 것입니까? 만약 아벨이 먼저 알아서 이런 행위를 하였다면 믿음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벨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믿음으로 드리는 제물이 무엇인지를 계시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4:24-28절입니다. “24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ㄴ)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4)종 예수를 거스려 28 하나님의 5)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리는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아벨을 가인이 죽이듯이 세상이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대적하는 것이 이 세상이 심판당해 마땅한 이유입니다.
마태복음 23:33-36절입니다.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무서운 책망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아벨을 누가 보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보내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첫 순교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땅위에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고 합니다. 아벨을 예수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이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히브리서에서 소개되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그 믿음의 세계를 증거한 자들을 배척하고 죽인 이 땅에서 그 피의 호소가 하늘로 향하고 있습니다. 언제 우리의 피를 신원하여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9-11절입니다.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자들이 자기들의 피를 신원하여 주시기를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피의 호소가 들리는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곧 죽음의 길입니다.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하여 달려갑니다. 교회에서도 보이는 목표를 설정하여 놓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를 향하여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믿고 사는 자들을 싫어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결과물로 나타난다는 것에 대하여 속지를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죽음으로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곧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음의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6:14절입니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새번역)
히브리서 11:5-6 에녹의 믿음 2004. 6. 23.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믿음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장 1-3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이로서 증거를 얻었는데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알고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역시 아는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이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고 유지되고 종결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하신 바를 이루시고 필하시고 끝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보여주는 계시의 역할을 아벨이 하고 에녹이 하고 노아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삶을 통하여 믿음의 내용이 무엇이며 믿음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고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믿음이 나타나는 것을 가만히 두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 아벨은 가만두지 않고 죽인 세상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이 세상에서 잘 산 것이 아니라 아예 이 세상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계시하고 있는 믿음의 세계가 실상이고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의 세상은 망할 세상이란 것입니다.
몇 년 전에 ‘트루먼 쇼’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한 남자가 살아가는 일생을 전 세계에 생중계하는데 자신은 정작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는 거대한 영화세트장에서 사는 것입니다. 어릴 때 아버지와 배를 타고 나갔다가 사고로 아버지가 죽고 나서 물에 대한 공포증을 가지고 살기에 배도 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서 대학 때에 만난 한 여인이 자기의 현실이 모두 꾸며진 가짜임을 알려줍니다. 살면서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서는 자신이 탈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다로 나가는데 파도와 폭풍우 속에서 아들아 무엇이 부족하냐고 하면서 돌이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을 물리치고 자유를 찾아간다는 내용입니다.
이 영화를 어떻게 보는가는 보는 자의 자유이지만 설교에 예화를 든 것은 우리가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양 살고 있는 것 말입니다. 만약 다른 세계로 가려고 한다면 적극적으로 막아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지금까지 속고 살았던 모든 현실-어릴 때의 성장, 학교, 직장, 가정에 대하여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세계에 눈이 뜨여졌다면 지금까지 마귀에게 속고 살았던 것에 대하여 분노가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보이는 세계에 대하여 미련과 안타까움과 시기와 경쟁 속에 살아간다면 과연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지 자문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니 지난주에 본 아벨을 경우에 믿음으로 제사 한번 지내고 죽임당한 것입니다. 믿음이 등장하는 것을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후에도 그 피의 호소가 하늘로 향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에녹입니다. 에녹은 땅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져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준 믿음의 세계에 대한 내용입니다. 한 사람은 죽었으나 말하고, 한 사람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 버린 이런 내용들이 믿음의 내용들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 시신을 찾지 못하도록 숨겨졌습니다.
엘리야도 병거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나타나서 예수님의 별세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시고 다시 온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진리로 믿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은 믿는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죽음의 한계 속에 갇혀 있는 세상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이후에 인간은 죽음이 왕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려 천년을 가까이 살아도 그의 기록은 죽었더라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런 죽음의 세상에서 하루하루 죽어가면서 살고 있는데도 모두가 죽어간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거대한 세상이라는 무대장치가 속이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선진들이 받은 증거는 무엇입니까? 죽음 이후의 세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증거하였고 그 증거물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동일한 믿음의 선물을 받았다면 당연히 이러한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믿자고 자기최면을 거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세계보다 더 확실하게 증거로 받게 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의 결과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5-6절을 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지상에서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이 믿음이며 그 믿음의 모습이 하나님과의 동행이었습니다.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였는지를 창세기에서 보겠습니다.
창세기 5:21-24절입니다. “21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3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이 육십 오세까지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씀이 없는데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고서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에녹이 육십 오세 때에 므두셀라를 낳으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과 동행을 하는데 동행한다고 해서 수도원이나 기도원에 들어가서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낳으면서 가정생활을 꾸려가는 것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세상을 정리하고 자기 단체에 들어와서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 하여야 구원을 받는다거나 휴거가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아이 낳고, 기르고, 농사짓고, 물건을 사고팔면서 삽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동행을 하는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로 옮겨졌다고 해서 우리도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늘로 옮겨질까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동행하는 것이 바른 동행인가를 연구한다면-이런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지만-그것은 또다시 자기 구원욕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 하나님과 동행하여서 구원에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나타나셔서 계시를 주시고 동행하여 주심으로 동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유다서 1:14-15절입니다. “14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에녹이 예언자입니다. 그 예언의 내용은 심판의 내용입니다. 에녹이 그 당시에 예언자요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심판의 계시를 증거한 것입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는 낳고서 하나님의 심판의 계시를 받았는데 그 심판의 메시지가 므두셀라에게 있다고 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자녀를 낳을 때에 그 이름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므두셀라는 ‘무기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무기를 든 사람, 창을 던지는 사람의 뜻이라면 그 이름이 심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을 때에 계시를 받은 것은 므두셀라가 죽으면 이 땅에 심판이 임하리라는 내용으로 유추하여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므두셀라의 나이를 계산하여 보면 노아 홍수의 때와 일치를 하고 있습니다. 므두셀라가 187세에 라멕을 낳습니다.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습니다. 그러면 노아가 태어날 때 므두셀라는 369세입니다. 홍수심판은 언제입니까? 노아 600세 되던 해이기에 더하면 므두셀라 969세 즉 죽은 그 해가 노아홍수가 일어나는 해입니다.
에녹이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접하고 므두셀라가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내용을 믿고서 늘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동행한 것입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자다가도, 주님이 임하셔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이었습니다. 므두셀라가 잠시만 보이지 않아도, 몸이 조금만 이상해도 주님이 임하실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에녹이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하였을 때 사람들은 에녹을 어떻게 여겼을까요?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멀쩡한 세상을 하나님께서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여 경건치 아니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누가 믿었겠습니까? 마치 노아 홍수 때와 같이 사고팔고,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전부인양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에녹도 똑같은 생활방식으로 살았지만 무엇이 달랐습니까?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4장은 가인의 족보가 나옵니다. 가인의 족보에서 문명이 발달됩니다. 악기와 기구와 전쟁도구들이 발달하고 성읍을 만들어 도시문화를 이루어갑니다. 스스로를 보호해 가는 문화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5장은 죽은 아벨을 대신한 셋의 후손들로서 가인의 후손들과 다른 삶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다름이란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한다거나 노아처럼 홍수의 심판을 믿고서 방주를 예비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인의 후예처럼 살고 있습니까? 셋의 후예처럼 살고 있습니까? 도시문화를 이루고 사는 우리는 철저하게 가인의 후손들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서 주와 동행하며 살기를 과연 원하고 있는 것입니까? 주일학교 어떤 아이가 게시판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7월 1일이 저희 학교 시험이예요. 시험이라서 공부 땜에...ㅠㅇㅠ, 이번에도 점수가 잘 나와야 하는데..., 하지만 걱정 끝!!! 공부 잘해도 천국 못가니까!!! 예수님만 잘 믿으면 되는 것이니까. 시험 땜에 긴장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러면 기분이 좋을 껄요.” 이른 글을 올려놓았습니다. 이 아이의 부모가 이 글을 보고서 울어야 합니까? 웃어야 합니까?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삶은 틀림없이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한 삶이었습니다. 아마 가족에게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를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된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절입니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믿음의 삶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산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목표로 하고 살 때라도 에녹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에녹의 증손자 노아도 마찬가지의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삶이 있습니까? 없다면 우리의 노력으로 이런 삶을 살아 낼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의 삶이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삶을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신이 존재한다는 그런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존재하니까 내가 신에게 무언가를 대접하여 받아내겠다는 거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란 귀신도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어떤 믿음입니까? 에녹의 믿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모든 만물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동행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신을 모셔두고 정기적으로 예물을 바치면서 나의 삶을 윤택하고 안전하게 해 주기를 원하고 있다면 이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자기를 우주의 중심으로, 신으로 두고서 다른 존재들을 자기를 위하여 세워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의 이름이라고 하여도 자신이 복종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거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제사나 예물이 아닌 것입니다.
미가서 6:6-9절입니다.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평소에 이런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리라고 생각한 것을 거부하십니다. 수많은 제물, 내 맏아들, 내 삶의 열매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여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즉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행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 드는지 여러분이 여러 인간관계 속에서 알지 않습니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함께 사는 것이 그렇게 부담되고 귀찮은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홀가분하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이라니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구하시는 것이라니요!
둘째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는 상을 주신답니다. 이 상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서 사라질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요 방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상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상입니다.
어떤 예수님입니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기에, 세상 사람들이 밉다고 배척하여 버린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상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상급입니다. 이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는 틀림없이 미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부르심을 입은 증거이기도 합니다. 모두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좋다고 그것을 향하여 달려가는 현장에서 이것이 다가 아니라고 말하고 곧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이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이 불살라 없어질 것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런 자를 좋아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믿고 사는 사람이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과 동행을 하지 않기에 주님께서 늘 동행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졸음운전을 하여 다른 길로 가면 옆에 앉았던 사람이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것처럼, 순간순간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의 나라로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사건마다 일마다 주님이 동행하여 주시는 삶을 맛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 동행이란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약속의 세계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11:7 노아의 믿음 2004. 6. 30.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히브리서 11장을 통하여 믿음에 대하여 보고 있습니다. 오늘 제목도 노아의 믿음이라고 붙였지만 이렇게 말하면 노아가 좋은 믿음을 가졌구나, 하는 식으로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노아에게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지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위에서 온 것입니다. 이런 시각이 없으면 자꾸만 성경에서 나오는 믿음의 내용들을 사람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서 나오는 일들이란 땅의 일만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것들을 동원하고 이용하여 땅의 삶을 유익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서 우주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중국에서도 유인 우주선을 발사하는 일에 성공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인공위성을 몇 개 쏘아 올렸습니다. 평소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던 우주 공간을 보여주지만 그러한 노력을 통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영원무궁한 발전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믿음의 세계는 이 세상이 정죄 받아 멸망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땅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 피가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의인을 피를 흘린 저주스러운 땅이기에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에녹은 경건치 못한 이 세상이 심판 받는다는 계시를 받고서 선지자로 증거 하다가 이 땅을 떠나 버렸습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을 때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는데 그 내용이 지난주에 본 유다서에서 심판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주께서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셔서 경건치 아니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예언을 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세상을 심판한다는 예언을 하면서 자신도 세상에서 자녀를 낳고 살았습니다만 늘 에녹의 초점은 이 경건치 아니한 세상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그렇게 300년을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데려가 버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산 사람의 모습입니다.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고 라멕은 182세에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노아라 하였으니 이는 안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심으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는 뜻입니다. 이 땅에 참된 안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안식이 세상의 심판과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이나 에녹이나 노아나 간에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이 죄악이 가득하여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6: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것이 세상의 실상입니다.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인정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이 악한 것도 있고, 선한 것도 있는데 악은 억제하고 선을 북돋게 해야 한다고 말하지 전적으로 악하다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이 필요하고, 법이 필요하고, 종교가 필요한 것은 악을 제어하고 선을 신장시키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결국 인간이 전적으로 악하지 아니하다는 전제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실 때는 그 마음의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며 노아 홍수 이후에도 인간이 별반 달라지지 아니하여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할 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도대체 취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세상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어 하는 것이 믿음의 모습입니다. 이런 믿음은 참으로 찾아보기가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이란 은혜의 선물로 주어져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창세기 6:8절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 악한 세상에서 모두가 멸망할 세상만 바라보고 사는데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 은혜로 인하여 그 시대의 의인이며 완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입은 위력인 것입니다. 이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들게 하십니다.
히브리서 11:7절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 경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므로 물로 심판하신다는 경고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지상에 이루어질 조짐이 아직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방주를 만들고 있을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생전에 듣도 보도 못한 일을 노아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주를 만드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함이었습니다.
우리도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삶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입니까? 믿음의 사람 아벨과 에녹과 노아를 보니 이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셔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받을 세상을 목표로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삶이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요?
베드로후서 2:5절입니다.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노아가 의를 전파하였다고 합니다. 그 의란 여호와의 심판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심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무려 120년간이나 유예 기간이 주어졌는데도 단 한 사람도 방주에 탄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단지 노아의 가족 8명뿐이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노아가 분명히 의를 전파하였다고 합니다.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전도가 왜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하나도 먹히지 않았을까요? 노아의 열심 부족이었을까요? 기도를 하지 않아서 일까요? 전도 간증집회를 하지 않아서 일까요? 총동원주일을 하지 않아서 일까요? 태신자를 만들지 않아서 일까요? 아닙니다. 이 세상이 죄악이 관영하여 심판을 받는다는 전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노아처럼 전도하고, 에녹처럼 전도한다면 누가 과연 믿겠습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이 모두 다 불살라져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의의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은 다 세상에서 오는 것이며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찾기 바랍니다. 이런 전도를 계속하는 교회에 과연 교인들이 모여들겠습니까?
베드로전서 3:18-21절입니다. “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3)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4)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노아 홍수의 심판과 구원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과 구원으로 연결이 되는지를 증거 하고 있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 방주에 타야 하는 것이 구원이었는데 아무도 방주에 타지 않았다는 것은 보이지 아니하는 홍수의 심판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도 영으로 증거 된 것입니다. 오늘날은 방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전서 3:18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과연 이 복음의 내용을 믿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자신의 공로나 자신의 의를 전혀 인정하지 아니하고, 오직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히브리서 11:7절 본문의 말씀에서 방주 예비함을 통하여 세상을 정죄하고 자기 집은 구원하였습니다.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된 것입니다. 믿음을 좇는다는 것은 보이지 아니하는 일에 경고를 받아서 그 경고를 사실대로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재림의 징조도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전쟁이나 난리나 지진이나 기근이란 옛날부터 있어왔던 것입니다. 지구만이 아니라 우주적인 심판이 임할 징조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엄청난 천체 망원경을 가지고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멀고먼 우주공간을 살피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재림하실 그 어떤 징조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서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고 놀리더라도 우리는 말씀대로 되어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과학이 발달할수록 믿음을 찾아보기가 힘이 들것입니다. 그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18장에서 억울한 과부가 끈질기게 하소연하면서 자기의 억울함을 풀었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택한 자들이 밤낮 부르짖는 원한을 풀어주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24:29-39절입니다.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2)인자가 가까이 곧 문앞에 이른줄 알라 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35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예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노아의 때와 같이 임할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면서 심판의 경고를 무시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한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마땅하겠습니까?
베드로후서 3:1-18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의 강림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을 향하여 놀리는 것입니다. 세상이 처음 지어진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노아의 홍수를 부러 잊으려고 합니다. 그때 물의 넘침으로 세상이 멸망하였는데 이제는 경건치 아니한 자들과 함께 불살라지기 위하여 간수한바 되어 있습니다. 에녹의 경고, 노아의 경고, 예수님의 말씀과 베드로의 경고가 한결같지 않습니까? 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주어진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믿을진대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1:8-12 부르심과 순종 2004. 7. 7.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어려서부터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많이 들어 왔습니다. 그 이야기의 핵심은 언제나 아브라함의 순종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으며, 백세에 낳은 아들을 바치라고 하였을 때 순종하여 바쳐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순종하여 아브라함처럼 복을 받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사람들과 달리 순종이 몸에 배여 있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순종을 잘 하였을까요? 이런 의구심이 드는 것조차 믿음이 없는 생각으로 여기며, 이런 생각이 날 때마다 꾹꾹 눌러가면서 믿자! 믿자! 하면서 자신에게 다짐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브라함이 순종한 사건이 왜 믿음인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히브리서를 보아오면서 믿음의 내용물은 이 지상의 것이 아니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의 증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말씀을 통하여 확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말씀에 순종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이 눈에 보이는 땅에서 더욱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번창하자는 식으로 말한다면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이루어내신 그 내용물을 통째로 버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그 부르심에 순종한 내용들을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스스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부르심이 무엇에서 무엇을 위한 부르심인가를 먼저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르심은 인간이 원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부르심이 아니라 인간이 싫어하는 방향으로의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이루어진 일이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아브라함-하나님께서 이름을 고치시기 전에는 아브람이었지요!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첫 번째로 말씀하신 것이 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고대사회일수록 씨족공동체인데 그 공동체를 떠난다는 것은 장차 어떻게 될지를 모르는 상황입니다. 옛날 마을에서 마을의 질서를 위하여 마을법이 있습니다. 조리돌림이나 멍석말이 등의 벌이 있지만 최고의 벌이란 그 마을에서 추방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고향에서 터 잡고 잘 살고 있는데 낯선 외국으로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쉽게 일어날 수 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믿음의 사건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등을 떠밀어서라도 그 고향에서 떠나게 하시는 것을 믿음의 사건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통하여, 그리고 ‘신앙클리닉’이라는 금요 성경공부시간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상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한마디로 하나님의 열심이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에서 믿음으로, 라고 먼저 나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지도 아니하는 일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분리가 일어나는 일은 계속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 가운데서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분리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장남인 이스마엘을 쫓아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이삭마저 자신의 손으로 분리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와의 분리, 요셉이 형들과의 분리, 애굽에서의 분리, 가나안 원주민과의 분리, 이러한 분리가 하나님의 언약 성취과정에서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 자기의 백성들을 이 땅에서 분리시키는 일이 일어나기까지 계속하여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순종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분리에로의 부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분리란 우리가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것입니다.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우리가 어려서부터 들어 왔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계속된 분리입니다. 우리가 늘 붙어살고자 하는 땅으로부터의 분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그 부르심 속에 순종이 함께 내포되어 있는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그런 부르심에 응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방금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이 내포되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치 종합감기약처럼 부르심 안에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이 이미 믿음의 일인 것입니다. 부르심 자체가 믿음의 사건인 것입니다. 이 안에 순종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유효한 부르심이 아니란 것입니다. 성경 몇 곳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8: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3)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그 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 받는 것이며 그것은 이미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부르심의 목표이며 방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흔히 말하는 부르심에 순종하여 복을 받는다는 내용과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9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르실 때에 순종하느냐 아니냐의 여부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 뜻대로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은혜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르심이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7:14절입니다.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짐승과의 싸움에서 어린 양이 이기십니다.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시기에 이기시는데 그와 함께 있는 자들도 이깁니다. 그것은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긴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입어서 빼내심을 입은 자들이 진실한 자들입니다. 이들이 이기는 것입니다.
이제 히브리서 11:8절을 다시 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이 말씀이 무엇인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새롭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받을 영원한 기업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의 나라임을 알고 나그네로 살게 될 것이 부르심 안에 들어 있습니다. 만약 그 아들의 나라를 사모하지 아니하고 눈에 보이는 세상만을 목표로 살고 있다면 주님의 부르심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단지 육적인 눈으로 부르심에 순종하여 자기의 소원을 이루고자 할 뿐입니다.
히브리서 11:9절입니다.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믿음으로’라는 내용입니다. 첫 번째 ‘믿음으로’라는 내용에서는 부르심 안에 이미 부르심의 방향과 목표와 순종까지 들어있는 부르심이었습니다. 이제 두 번째 ‘믿음으로’라는 내용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동일하게 부르심을 입은 이삭과 야곱과 함께 외방에 있는 것처럼 장막에 살았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약속의 땅에 왔는데 그곳조차 외방에 온 것임을 알고 영원한 약속의 나라를 사모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말씀하실 때에 언제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것은 이들이 동일하게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이 같기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장막에 거하면서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0절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장막에 살면서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가나안 땅에 이르자 그 땅과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가나안을 차지할 힘도 없고 아이를 낳을 능력도 없었습니다. 부부가 한 몸이기에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아브라함도 자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주시면서 결국은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땅은 4대만에 주어지고 이삭은 당대에 주어지지만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앙 속에서 약속의 자녀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1-12절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세 번째로 ‘믿음으로’의 내용입니다.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분이 미쁘신줄 안 것입니다. 약속하신 분의 신실함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한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일이란 죽은 자와 방불한, 즉 죽은 자와 같은 몸에서 후손이 나와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아진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 안에 들어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약속하셨을 때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이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는데 나중에 이스마엘을 낳고나서 다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자식이 생길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이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웃었고(창17:17), 사라도 웃었습니다(창18:12).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신 것입니다. 인간의 불신앙을 배경으로 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드디어 이삭이 태어났을 때에 사라가 하는 말이 누가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라고 합니다. 즉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할 일이 자기에게 일어난 것을 보니 자기에게 말씀하신 분이 신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입니다.
이 내용을 히브리서는 부르심을 입고 그 부르심에 순종한 믿음의 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입었다면 동일한 내용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약속하신 내용들이 성취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삶은 나그네의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자기의 기업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가정도, 직장도, 목사라면 자기가 경영할 교회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에 순종한 모습은 자기가 경영할 나라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경영하실 나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다는 것을 믿게 되는 것이 부르심에 순종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나그네로 살면서 영원한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게 되는 것이 부르심에 순종한 믿음으로 산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 안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습니까?
히브리서 11:13-16 나그네 2004. 7. 14.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인생은 나그네라고 사람들이 말합니다. 그것은 지상에서 계속된 머묾이 없다는 것이지요! 단지 조금 더 빠른가! 느린가의 문제이지 누구나가 다 나그네로 살다가 떠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무려 천년을 가까이 살았더라도 그 결국은 죽었더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7절입니다. “7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이 분명한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고 말도 하지만 그러나 행위는 나그네로 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천년만년 땅에서 살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것이 가증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도대체 믿는다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선진들이 살았던 삶의 자세와 태도 목표와 방향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미 길을 잘못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구약성경이 오늘날 성도들의 거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13절을 봅니다. 이 사람들은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죽는데 이들은 믿음을 따라 죽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 죽는 자들이 있고, 그냥 죽는 자들이 있는데 겉으로 볼 때는 같이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천양지차입니다. 믿음을 따라 죽으면 복 있는 죽음이며 영생의 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 죽으면 영원한 형벌의 길입니다. 그 영생과 영벌이 갈라지는 갈림길,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사라, 모세,,, 이들이 모두 약속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삶의 내용을 말하지 아니합니다. 약속을 바라보고 세상을 나그네로 살았다는 아주 간단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나그네로 살았다는 것은 유행가 가사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주 구체적인 방향성이 있는 나그네의 삶인 것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 한번 드리고서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세상에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믿음을 세상이 용납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서 데려가 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이란 이 세상에서 영원한 삶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노아는 이 세상이 심판받아야 마땅한 이유를 보여 주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장막에 살면서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실 터를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을 따라 죽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구원이란 어디에서 구원받았느냐는 것이 중요한 만큼 어디로의 구원인가도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구원이란 것은 자기 구원이 최종목표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말하는 구원이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경외하도록 구원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른 구원의 도식이 출애굽의 여정에서 잘 드러납니다. 종살이 하던 애굽으로부터 구원입니다. 그리고 방향은 가나안땅으로의 구원입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기 위하여 들어가는 것입니까? 애굽과 가나안의 신들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그들의 참된 신으로 섬기며 살기 위함입니다.
마찬가지로 나그네라는 것은 가야할 방향과 목표가 분명한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그네 삶인데 어디로 가야하는 나그네입니까?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실 나라를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메시아가 오심으로 되는 일이기에 구약에서 믿음을 따라 죽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약속을 바라보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약속의 실체를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바라보고 환영하였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3:23-27절입니다. “23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24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무슨 신이 능히 주의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25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1)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26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27 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 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모세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멀리서 바라만 보고서 들어가지는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한계를 또한 보이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이것은 역시 영원한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영원한 나라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기에 가나안 땅은 영원한 약속의 나라에 대한 그림자일 뿐입니다.
요한복음 8:56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들어가기를 사모하였는데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그 후손이 차지하리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그 땅이 최종 목표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때를 바라보고서 즐거워하였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믿음을 따라 죽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때를 바라보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12-14절입니다.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구원이란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빛 가운데 성도의 기업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면 기업이란 아들의 나라입니다. 아들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이 땅에서 나그네의 삶의 방향과 목표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3절을 다시 봅니다. 이제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하여 졌습니다. 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던 이유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기에 자기들의 떠나온 고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나 그곳으로 가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본향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증거를 보이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서 살면서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증거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창원지역에 수많은 외국인 근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보면 이 창원 땅에서 평생 살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압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창원에서 집을 사거나 미래를 설계하지 않습니다. 한 푼이라도 아껴서 그들의 고향에 돌아갈 생각을 하고 삽니다. 이 곳은 그들에게 낯선 곳이요 떠나야 할 곳입니다.
그런데 그 외국인들이 우리를 보면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모습이 보이겠습니까? 아니지요! 계속해서 여기에 머물러 사는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이 우리를 보면 우리가 이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산다고 보겠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시면 우리가 도대체 그 나라를 사모하며 사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까? 완전히 다른 나라를 사모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 되는 것이 문제라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선진들이 가졌던 동일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같은 내용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게 됩니다.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믿음이 없든지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땅엣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는 말씀을 듣고 살겠습니까?
골로새서 3:1-4절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다시 살리심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살림을 받지 못하였다면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사고팔면서 살아가는 모든 활동들이 죽은 자들의 몸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죽은 자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인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죽음과 흑암의 권세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라면 이 세상이나 세상의 속한 일들이 흑암아래 죽음아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자만이 위엣 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6절을 봅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면서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사람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이 영원한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시고 경영하실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며 사는 자들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한가지입니다. 청지기가 제대로 하지 못하여 해고하려는 것을 알고서는 자기가 해고당하고 난 뒤의 살길을 준비하느라고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증서를 절반 정도로 고쳐준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신 말씀은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지혜롭게 삽니까? 자기들의 살길을 다 대비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빛의 아들들은 과연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며 사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이 세대의 사람들이 잠시 있다가 사라질 세상을 위하여 준비하며 사는데, 빛의 아들들은 보이지 아니하는 주님의 약속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어떻게 준비하면서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땅의 것을 위하여 사는 것만큼 우리가 하늘나라를 위하여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땅의 것을 위하여 산다면 과연 믿음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양과 염소를 나누시는 기준이 나그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였는가를 기준으로 삼아버립니다. 예수를 믿는 지극히 작은 나그네 한 사람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을 나그네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춥고, 갇히고, 병든 자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누가 나그네를 알아보겠습니까? 함께 나그네 된 자만이 알아볼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보이지 아니하는 세상을 위하여 보이는 세상을 버리고 떠난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더 나은 본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17-21 믿음의 유산 2004. 7. 21.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 1)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ㄱ)네 2)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개하실 때에 가장 자주 말씀하시는 호칭 중에 하나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부르셔서 무엇을 이 땅에 남기고자 하셨는지 그 내용을 보고자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데 이 땅에 어떤 유산이 남겨졌겠습니까? 이 땅에서 피라미드나 만리장성 같은 거대한 유적을 남긴 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믿음의 유산을 동산이나 부동산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챤 뉴스위크’라는 신문에서 사고로 나온 내용입니다. [한국교회 제2의 성장을 위해 준비합시다. “위대한 재산 남기기 운동” 당신의 재산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증해 주십시오. 토지, 건물, 건축자재, 사무집기, 헌금 한국교회를 위해 역사적인 가치가 되도록 사용하겠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이 사역을 계속할 것입니다.] 자기 신문사에 재산을 남겨주면 위대하게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이 남겨놓은 것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1-16절에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의 믿음을 보았는데 그들이 이 땅에 남긴 증거물이란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남긴 유산입니다. 그러니 남긴 것이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적이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산 것은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실 터,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면서 순례자로 살았다는 것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고 오는 믿음의 세대들에게 계속하여 남겨지는 유산이란 나그네와 외국인이라는 유산을 받고 또 남기는 것입니다.
결국 그 유산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 믿음의 내용물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의 신실함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생애에서 최고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을 오늘 본문에서 아주 함축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의 자세한 믿음의 여정은 창세기에 나와 있지만 히브리서에는 그 최고의 순간만을 포착하여 남기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17-19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습니다. 그것은 약속으로 받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최고의 보물이요 자기 생명보다 더한 자식인데 그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늘 어떻게 아브라함은 그렇게 바쳤는가 하겠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최종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능히 살리실 줄을 생각한 것입니다.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기까지 아브라함은 수많은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75세에 부름을 받아 나왔습니다. 애굽에서 바로와의 대면, 소돔과 고모라성의 사건들을 통하여 자기를 불러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자식을 주신다는 부분에 대하여는 아브라함이 잘 믿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기 집의 종인 엘리에셀을 자기의 상속자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몸에서 날 자라고 하시자 사라의 여종인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고 그 아이가 상속자인줄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도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 99세 때에 할례를 행하게 하시고서 이삭을 낳게 됩니다. 사라는 처음부터 아이를 낳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이제는 경수까지 끊어진 상태에서 이삭을 낳은 것입니다. 이 이삭이 그들에게 최고의 선물이요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절정이 나옵니다.
그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능히 살리실 줄을 믿은 것입니다. 이삭의 제물 바침을 통하여 여호와 이레를 알았던 것입니다. 장차 여호와께서 친히 자신을 위하여 제물을 준비하시리라는 내용을 남겨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본 것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에서 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은 가운데서 살리시는 방식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이는 아버지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그 모습을 유산으로 남기게 된 것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믿고 있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 죄 없는 아들에게 죄를 정하셔서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자기 백성들을 의롭게 하시는 그 믿음의 유산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그 아들의 죽으심과 살리심으로 이루어지는 일인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지도 못한 유산이 우리에게 떨어진 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며 은혜입니까?
오늘 우리 안에 무엇이 담겨져 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담겨져 있던 이 믿음의 유산이 담겨져 있습니까? 평소에 바라고 소원하였던 것들이 무참히 깨어져나가고 그 텅 빈 자리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져 있습니까?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유산으로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복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삭도 야곱도 그들이 죽을 때가 다되어 알게 되는 것입니다.
20절입니다. 이삭의 믿음을 단 한 줄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삭의 평생을 통하여 남겨진 믿음의 유산이란 야곱과 에서를 축복하는 사건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사건이 무엇입니까? 에서와 야곱이 쌍둥이로 태어나지만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한 일을 행하기도 전에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건만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삭과 리브가는 자기 취향대로 자기가 선호하는 아들에게 복을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에서에게 축복하고 죽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야곱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이삭이 깨닫고서는 크게 놀라는 것입니다(창27:33). 자기는 에서에게 축복하기를 원하였고 그렇게 알고 축복하였는데 그것이 야곱인줄 알고 나서는 그제야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소원과 열망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에서가 그렇게 축복해달라고 매달리지만 축복해 줄 내용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야곱과 에서를 축복하였다고 합니다. 축복해 달라고 매달리는 에서에게 야곱이 한 축복의 내용은 자기의 칼을 믿고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창27:40). 즉 자기 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에서도 부자가 되고 자기의 사병이 무려 400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받지 못한 것입니까? 야곱처럼 약속을 받지는 못한 것입니다. 이삭이 야곱과 에서를 축복하는 사건을 통하여 무엇을 남긴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사람의 뜻이나 행위로 변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세워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달음박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부르시는 자로 말미암아 서게 하시는 것을 이삭이 그 노년에 자식을 축복하는 순간에 제대로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 믿음의 유산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21절입니다. 야곱의 생애도 역시 단 한 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요셉의 아들들에게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이 행한 믿음의 일이란 그 절정이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는 내용 안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무엇에 기대어 축복합니까?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였다고 합니다. 이 지팡이가 언제부터 짚고 다니던 지팡이입니까? 얍복 강에서부터 의지하던 지팡이입니다. 그곳에서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름입니다. 이것이 자랑스러운 이름입니까? 어떤 자식이 부모가 반대하는 것을 무릅쓰고 무슨 일을 이루어내었을 때 그 자식을 보고서 아버지를 이긴 자식이라는 말을 듣는다는 것은 불효자식인 것입니다. 얼마나 고집이 세었으면 부모가 져 주었을까요? 이런 이름이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이 되고서는 환도뼈가 위골되어 평생을 지팡이를 의지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야곱이 이제 마지막으로 요셉의 아들을 축복하는 내용을 히브리서는 믿음의 일로 기록하여 남겨두는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의 장남 므낫세가 야곱의 오른손의 축복을 받도록 자기의 왼손으로 붙잡고, 차남인 에브라임은 자기의 오른손으로 붙잡고 야곱 앞으로 인도하여 축복을 받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앞도 잘 못 보는 야곱이 갑자기 손을 어긋맞게 하고서는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한 것입니다. 이것을 요셉이 보고서 잘못되었다고 손을 바꾸려고 하자 야곱이 안다고 합니다. 이것이 야곱이 보여준 믿음의 유산인 것입니다.
요셉도 아직 아버지 야곱의 믿음의 내용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께 깨어지고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이삭이 축복한 사건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요셉은 여전히 세상방식의 축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요셉도 나중에 자기의 해골을 약속의 땅에 묻어달라는 것으로 참된 복의 뜻을 알게 되지만 아직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 사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 것이 드러난 것입니까? 사람은 다들 자기 뜻과 고집대로 살아가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택하신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뜻만이 그 사람의 삶에서 세워진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평생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경우는 참으로 험악한 세월을 보내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히브리서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과 동일하게 믿음의 유산을 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동일한 믿음의 유산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나타나지 않는다면 십년 후가 되든지, 죽기 직전이 되든지 반드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실 터가 있는 곳을 지금의 땅보다 더욱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렇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자기의 고집과 뜻과 상관없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유산을 우리가 받았다면, 우리도 이런 믿음의 조상들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주장과 고집이 꺾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결국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꿈과 계획이 산산이 깨어지고 부수어져서 하나님의 뜻만이 오롯이 담겨지는 그릇으로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자들의 마지막 고백이 무엇일까요? 나의 뜻의 무너지고 주의 뜻이 세워짐을 인하여 감사하다는 고백이 아닐까요? 이 고백이 우리의 삶에서 더욱 풍성하여 지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1:22 요셉의 해골 2004. 7. 28.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성경을 이야기하면서도 성경과 반대되는 이야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죄인 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성경에서는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성경을 보는 사람마다 각자 자기가 원하는 방향이라고 주장하고 고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을 누가 가르쳐 주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장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성경이 증거하고자 하는 뜻과 다르게 해석되는 대표적인 인물이 요셉일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하면 거의 백퍼센트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가 요셉의 꿈과 고난 그리고 애굽의 총리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꿈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총리가 되어서 가족을 살리고 수많은 사람을 살리는 영웅이 되어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에서는 그런 내용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딱 두 가지만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떠날 것과 자기 해골을 메고 나갈 것을 명한 것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믿음으로 된 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그 파란만장한 삶의 내용을 단 한 줄로 요약한 믿음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총리가 되어서 잘 먹고 잘 살았더라는 이야기로 요셉의 이야기가 결론이 나와 버린다면 그것은 정말 사람들이 환영할만한 내용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 없을진대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동기를 주는 것이 요셉의 이야기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남다른 꿈을 가지는 것,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할 것, 그러면 사필귀정, 고진감래로서 반드시 성공이 주어진다는 패턴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적절한 간증을 도입하면 경제문제도, 취업문제도, 가정의 문제도, 교회의 문제도 나라의 문제도 다 해결할 수 있다는 대단한 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요셉 자신은 임종시에 무엇을 유언하고 있는 것입니까?
창세기 50:24-25절입니다. “24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이러한 유언은 자기 아버지 야곱의 유언과 같습니다.
창세기 49:29-33절입니다. “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땅에 묻히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언은 사람들이 죽을 때 되면 고향을 생각하고 고향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내용과 다른 것입니다. 이들의 본향은 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경영하실 터를 바라본 것입니다.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는 줄 알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한 유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은 모형이고 실체는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공통점인 것입니다. 여기에 요셉도 합류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유언에서 애굽에 대한 미련이란 티끌하나 없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계속하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유언하지 않습니다. 애굽에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떠남이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묻힌 곳, 이삭이 묻힌 곳, 자기 아버지를 직접 묻은 곳에 자기도 묻히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을 통하여 계시되는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저와 여러분도 곧 이런 유언을 할 때가 오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던 우리도 해골이 되어 갈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인정이 안 되지요! 하기가 싫은 것이 아니라 아예 그런 마음이 들지를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분명한 진리인데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20대에 40대 중반의 사람들을 보면 중늙은이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40대 중반이 되고 보니 지금 내가 40대 중반의 중늙은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은 청춘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자기가 늙어가고 있고,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다만 몸이 따라가지 않으니 할 수 없이 늙어 가는가 보다고 간접적으로 인정할 뿐입니다. 실상은 매일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죽음을 부정하고 계속하여 산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으니 정작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요셉의 해골에 대한 내용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요셉의 성공시대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점점 해골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해골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요셉의 이 유언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멀쩡히 살아있고, 욕망하고 있는 자신을 보고서 마른 뼈와 해골이라고 누가 인정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자신이 해골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37장1-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14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 선지자가 여호와의 신에 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았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마른 뼈다귀들이었습니다. 해골더미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스스로 해골이 움직여서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니 뼈들이 맞추어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는 것입니다. 또 말씀을 대언하니 생기가 들어오게 됩니다. 이 마른 뼈들이 이스라엘이며 스스로 돌아올 수가 없는 상태에서 이들을 말씀으로 살리시고 돌아오게 하시는 일을 통하여 그렇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마른 뼈와 같은 자임을 아십니까? 이 세상에서 아름답다고 멋있다고 자기를 가꾸며 사는 일들이 해골이 굴러다니는 일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미스코리아를 뽑든, 얼짱, 몸짱을 말하든, 웰빙을 말하든 해골들이 덜거덕거리는 소리일 뿐입니다. 고운 것도 헛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될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실상인 해골임을 알지 못하고 껍데기만 포장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껍데기를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신이 들어 있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있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아들의 생명이 없는 자는 껍데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자랑할만한 것들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도 껍데기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자는 더 이상 껍데기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껍데기란 애굽의 영화이며, 세상의 영광입니다. 교회 나오는 사람들에게서 껍데기란 교회라는 외적인 모습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이제는 해골로 보이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해골을 위하여 유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해골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는 유언을 남기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떠날 것과 약속의 땅에 묻을 것을 유언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요셉에게 임한 은혜가 동일하게 임하였다면 이 세상에서 떠날 것을 알고 하나님의 약속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최고의 소원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이 보여준 유언의 내용이며. 이것을 히브리서는 믿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죽고 나서 수백 년이 지납니다. 요셉을 아는 왕들과 그 시대의 사람들도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만은 사라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성취가 일어나서 그들의 고역과 부르짖음을 통하여 언약의 하나님을 부르게 됩니다. 그러자 모세를 보내셔서 출애굽 시키시는데 요셉의 유언을 잊지 않고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출애굽의 마지막 장면이 됩니다.
출애굽기 13:18-19절입니다.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19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요셉이 단단히 맹세시킨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실 것인데 그때에 나의 해골을 가지고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챙겨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와서 묻는 것으로 여호수아서가 마무리 됩니다. 애굽을 떠나서 약속의 땅에 묻히는 것, 하나님의 약속에 들어가는 것이 요셉의 믿음이며 소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위하여 살고자 합니까? 우리의 자손들에게 단단히 맹세시킬 일이 무엇입니까? 과연 하나님의 약속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죽는 것이 복임을 알고 이것을 최대, 최고의 유언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마른 뼈로 무덤에 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시 살려내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하신 이 일에 놀라지 아니하는 우리의 무디고 무딘 심정을 회개하며, 우리의 해골도 예수 그리스도안에 묻히기를 소원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1:23-26 더 나은 재물 2004. 8. 11.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이란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것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유에서 유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무에서 유가 창조된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통하여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가 하면 눈에 보이는 세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추구하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보여준 것은 눈에 보이는 고향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모세가 더 큰 재물을 위하여 애굽의 모든 보화를 거절하였다는 내용을 보고자 합니다. 도대체 모세가 애굽의 모든 보화를 버리고 더 나은 재물을 얻은 그 내용물이 무엇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모세가 태어나던 때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애굽에서 요셉이 총리로 있다가 죽고 나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자 요셉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히브리 민족의 수가 많아지자 이들을 수를 제한하기 위하여 히브리 산파들로 하여금 히브리인들이 자식을 낳을 때에 여자 아이면 살리고 남자 아이는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산파들이 임금님 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오히려 살려내었습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작전이 통하지 않자 바로왕은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모든 사내아이는 나일 강에 던지라고 한 것입니다. 이때 모세의 부모는 석 달 동안 숨겨서 임금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히브리 산파나 모세의 부모는 바로의 눈에는 노예일 뿐입니다. 임금의 말 한 마디면 바로 죽임당하는 그런 사람들이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요한복음 16장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다는 말씀은 세상의 임금이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 당시의 애굽의 파라오란 세상 최고의 임금입니다. 그런 세상의 임금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두려워서 임금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그런 임금의 명령을 거절한다는 것은 참된 임금이 따로 계신다는 사실을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우리의 믿음은 어떤지 점검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무서워하는 것이 없습니까? 세상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 믿음 없다는 증거입니다. 나는 이것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그 무엇이 있습니까? 물질일 수도 있고, 직장일 수도 건강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두려운 분을 만나면 시시한 두려움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모두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2:15절에 보시면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에 매여 종노릇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죽는 것이 제일 두려운 것입니다. 죽는 것이란 단지 목숨 끊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실패하는 것도 죽음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사람들이 사망의 세력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이런 사망의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1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없이 하시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세력에 붙들려 일생동안 종노릇하는 자들을 해방시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은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은 세상의 그 어떤 것들이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참으로 두려워할 분 한분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은 백성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란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두려워할 분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있을지라도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31절에서는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히브리서13:6절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하노라”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이 모세 당시의 히브리 산파요, 모세의 부모요, 모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의 봅니다. 히브리서 11:23절에서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숨긴 것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3개월이 지나서 왜 강물에 버렸을까요? 만약 아이 울음소리가 담 밖으로 들린다면 당장 아이가 죽임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물에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갈대상자에 역청을 발라 나일 강에 띄워 보내고, 바로의 공주가 그 아이를 건져내고, 미리암이 유모로 모세의 친모를 소개하는 과정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 하에 일어난 것입니다. 젖을 떼고 바로의 궁에서 공주의 아들로 자라게 됩니다.
‘십계’라는 오래된 영화를 보면 모세가 어느 정도의 사람이었는지를 그리고 있는데 모세가 다른 왕자들보다 더욱 뛰어난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차기 파라오가 될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비록 자기 동족을 위하여 애굽의 관원을 죽였다고 할지라도 파라오에게 반역하지 않았다고 말만 하면 다 용서해 주겠다는 말을 듣습니다. 물론 성경의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의 이야기입니다만 그 정도로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지위가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위를 버리는 것입니다.
24절입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하는 것을 거절한다면 그것보다 나은 대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무언가 더 나은 한 가지를 위하여 다른 것 한 가지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것을 포기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25절과 26절입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것을 거절함으로 현실적으로 주어지는 결과는 고난과 능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능욕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긴 것입니다. 애굽의 모든 보화란 세상 최고의 보화들입니다. 단지 금은보화만이 아닙니다. 최고의 문명이며, 최고의 기술들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들이 다 있는 곳이 애굽입니다. 이것을 다 버리고 고난과 능욕의 길을 간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나은 상이 무엇입니까? 금은보화나 세상의 부귀영화는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그 상이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상입니다. 27절입니다. 임금의 노함을 두려워하지 아니한 것은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믿음의 세계를 위하여 눈에 보이는 세상의 최고의 가치를 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어젯밤에 기독교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마침 장경동 목사라는 사람이 설교를 하기에 잠시 들어 보았습니다. 8월 15일 광복절 기념 창원시 기독교 연합예배 강사로 초청한다는 안내문이 왔기에 들어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모든 것이 형통하고 잘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면서 무언가 일이 잘 안 풀리고 고난이 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현재 자기의 어려움의 문제를 풀기 위하여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과 어떻게 다릅니까? 전혀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보이는 세상의 영광을 거부하고 고난과 능욕의 길을 가고 있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인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그런 이야기가 귀에 솔깃한 것입니까? 먼저는 우리 안에 모세의 믿음 같은 믿음은 싫고, 반대로 애굽의 영화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치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할 때 주겠노라고 한 것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내 말만 들으면 세상의 영광을 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에 또 넘어가는 것은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귀도 성경을 가지고 유혹하지 않습니까?
신명기 28장을 가지고 설교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해서(이런 표현을 사용합디다) 모든 것이 다 형통하고 복을 받을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마음 심보를 고쳐야 하고, 근성이 남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기를 가지고 자기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왜 죄인인지를 밝히는 것이 율법의 기능인데 그것을 가지고 복을 받는 비결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를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모세를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모세를 믿었다면 예수님을 믿었을 것인데 모세를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기에 성경 이야기를 듣고서 그것을 지켰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는 마귀의 종노릇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45-47절입니다. “45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요한복음 5:39절은 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율법을 기록한 모세가 누구를 증거한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면서 지킨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면 모세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가지고 모세를 자랑하더라도 모세가 믿었던 것을 믿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믿은 것이 무엇입니까?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나은 재물로 여긴 그 상이 무엇입니까? 지상에서는 고난과 능욕이었습니다. 애굽에서 계속 살았다면 그는 고난과 능욕이 아니라 세상의 영광과 부귀를 다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세상의 죄악의 낙이라는 것입니다. 죄악의 낙, 죄 짓는 것이 다 재미있는 일이지요! 그런데 최고로 재밌는 죄악을 누릴 수 있는 그 자리를 버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자리로, 그리스도와 함께 능욕 받는 자리로 간 것이 모세의 믿음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까?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고 사실 것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능욕 받는 길을 가시겠습니까? 어느 누가 스스로 이런 선택을 하면서 살겠습니까? 오직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에서 나오는 믿음의 능력이 이렇게 살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통하여 세상의 유혹에 속지 마시고 모세가 믿은 바 그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1:28-29 피 뿌리는 예 2004. 8. 18.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 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교회에서 말하는 믿음의 내용과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내용이 어떻게 다른가를 점검하려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인가 아닌가를 물어보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내용이라면 교회에서 아무리 믿음을 말하고 믿음의 영웅들과 그 결과물을 말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에서 증거하는 믿음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증거하는 믿음의 내용은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여 귀를 막아 버리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비록 교회에 나온다고 하여도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에 대한 내용을 싫어한다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믿음에 대하여 지난주에 이어서 보고자 합니다. 먼저 지난주의 내용을 다시 요약하자면, 믿음은 세상의 임금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선택할지를 압니다.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능욕 받는 것을 더 나은 재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보이지 아니하는 분을 보듯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모세를 통하여 계시되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지금 우리도 모세와 같은 내용의 믿음이 아니라면 믿음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믿음의 내용을 가지기 위하여 스스로 노력해서 세상의 임금을 두려워하지 말자! 세상의 보화를 사랑하지 말자! 보이지 아니하는 분을 눈에 보듯이 살아가자는 구호나 노력으로 믿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보이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이란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물로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이런 내용을 좋아하면서 믿습니다! 하면서 따라가겠습니까?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11:28-29절입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행한 일이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넌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유월절에 대하여 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유월절이란 영원히 잊지 못할 날입니다. 그 날을 기억하기 위하여 달력마저 바꾸어버리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2:1-14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3 너희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매인이 어린 양을 취할찌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4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인수를 따라서 하나를 취하며 각 사람의 식량을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5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 이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 아침까지 남겨 두지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찌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찌니라”
유월절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간 종살이 하다가 나오던 날 밤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기 위하여 주어진 절기입니다.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10가지 재앙의 마지막 재앙은 장자의 죽음입니다. 사람의 아들만이 아니라 짐승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년 된 흠 없는 어린 양의 피를 문 인방과 설주에 바르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첫 해로 기록하고 대대에 이르게 할 절기로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 계속 전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2:25-27절을 봅니다. “25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26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27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대대로 이스라엘에게 증거되어야 할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신데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않고서도 자기 백성을 아실 텐데 왜 피를 바르게 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의 어떤 조건으로 구원 얻은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을 공격하실 때에 그 죽음의 천사들이 단 한가지만을 보고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린 양의 피입니다.
이것이 유월절의 뜻입니다. 어린 양의 피만 있다면 죽음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 피가 없으면 이 유월절을 선포한 모세 본인이라고 할지라도 그 장자가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인격이나 사람됨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혈통이나 육신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어린 양의 피로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모세가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라는 영화에서 유월절 밤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어떤 그림자가 다가오는데 어린 양의 피가 있는 곳은 피하여 가고 없는 집은 들어가는 것입니다. 들어가자 말자 곡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단이라는 사람은 히브리인으로서 바로에게 충성하여 애굽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나중에 다단과 고라의 반역이 나옵니다만 영화에서 그렇게 설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집에 죽음이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나와 보니 누가 피를 발라 놓은 것입니다. 그 집안에 살던 한 히브리 여인이 바른 것입니다. 영화의 이야기이지만 그 피를 보고 넘어간다는 것을 잘 그리고 있어서 기억이 남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과 그 피 뿌림을 모르면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모르게 되면 당장 우상숭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란 유월절의 정신을 잊어버리는 곳에서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직 어린 양의 피로서 구원이 이루어졌는데 자기들이 신을 섬기는 정성으로 무언가 얻고자 나서는 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가 이 어린 양의 피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유월절로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인 율법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18-22절입니다.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20 이르되 ㄴ)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는 것을 무엇을 통하여 계시하신 것입니까? 율법을 통하여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자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9:11-16절을 봅니다.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옛 언약 하에서 피 뿌림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통한 구원의 그림자 역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안에 있으면 그 어떤 적이라도 다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거대한 애굽의 군대조차 홍해바다에서 수장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를 홍해 바다에서 극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는 단 한 줄로 믿음의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29절입니다.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홍해 바다를 육지처럼 건넌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란 바로 유월절 어린 양의 피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피 안에 있을 때에 홍해바다가 그들을 엄몰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군대는 홍해바다에서 다 수장당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린 양의 피 안에 있지 아니하였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 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그 피가 계속해서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홍해바다를 건너고 광야를 건너고 가나안 땅에까지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너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할례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약속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할례를 통하여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거듭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단강을 건너서 제일 먼저 할례를 행하여 애굽의 수치를 굴려버립니다. 그래서 길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길갈에서 진을 치고 유월절을 지킵니다. 그동안 광야에서는 처음 유월절을 지키고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여호수아 5:10절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그러므로 유월절로 출애굽 하여 유월절로 가나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 피로 구원을 받고 그 피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입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어린 양의 피 안에 있는 것이 홍해를 가르고, 광야를 건너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이제 새 언약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말씀 한 곳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로마서 8:31-39절입니다.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ㄱ)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아멘
히브리서 11:30-31 기생 라합의 순종 2004. 8. 25.
30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지금까지 믿음의 사람들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 야곱, 모세를 보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의 사람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사람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에서 원인이 주어지고 그 결과가 보이는 세계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이라는 것이 그들의 영웅적인 행위가 아니라 선물로 주어지는 믿음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여리고성의 무너짐과 기생 라합의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여리고 성의 무너짐을 보고자 합니다. 여리고 성은 가나안 첫 성으로 아주 튼튼한 성입니다. 그런데 그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일에 있어서 특수한 무기를 만들거나 땅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 성을 하루에 한바퀴씩 6일을 돌고 7일째에 일곱 바퀴를 돌고 나팔을 불고 소리를 지르자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고함소리에 튼튼한 성벽이 무너진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혹시 우리나라 같으면 이해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부실 공사한 와우 아파트나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무너지는 것을 생생하게 보아왔기 때문에 여리고성도 고함소리에 무너진다는 것을 믿습니다,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옛날에 성벽이란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직접적인 보호막이기에 가장 튼튼하게 짓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무너집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서 무엇을 앞장세우고 들어갑니까? 언약궤를 앞장세우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물에 닿자 창일하게 흘러내리던 강물이 멈추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신 그 능력이 요단강물을 마른땅처럼 건너고 가나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에도 언약궤를 앞장세우고 도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팔소리와 함께 고함을 지르니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입니다. 요단강물이 끊어지는 것이나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이 다 하나님의 언약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약속에 의하면 가나안은 죄악이 관영하여지고 진멸당하여 마땅한 땅입니다.
진멸당해 마땅한 가나안, 그 첫 성이 여리고성입니다. 이 성안에 기생 라합이 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믿음의 사람들과 참으로 어울리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직업은 기생이요 이스라엘 사람도 아닌 진멸당해 마땅한 이방인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사람입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라합의 직업을 삭제해 버리는 것이 더 낫지 아니할까요?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그대로 적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흉측하고 잔인하고 더럽고 추한 일들이 다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한복판에 오늘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벗어날 인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성이 여리고성이라는 것입니다. 진멸당해 마땅한 여리고성 안에 자신이 살고 있다는 인식이 되지 않으면 믿음의 이야기는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리고성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여 무너지고 멸망당해야 하는 곳입니다. 확대하면 가나안 전체가 그러하고, 이 세상 전부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라합이 구원을 받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였기에 멸망하는 여리고 성에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믿음입니까? 그 믿음이 내용을 보고자 합니다.
31절입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리고성의 모든 사람들은 순종치 아니하여 멸망당하였는데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한 것이 순종이 되었습니다. 정탐꾼은 여호와의 군대에서 가나안을 진멸하러온 정탐꾼입니다. 여리고 성에서 보면 적군입니다. 그런데 그 적군을 평안히 영접한 것을 믿음으로, 순종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기생 라합에게 대입하여 봅시다. 지금 적군이 쳐들어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땅한 것입니까? 성벽을 더욱 튼튼히 하고 보초를 세우고 철통같이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충성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가족을 지키고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대동단결하여 적을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기 가족을 위하는 길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영접합니다. 이것은 조국을 배신한 것입니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매국노입니다. 국가보안법에 따라 사형당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스파이를 숨겨주기 위하여 거짓말을 한 반역자 기생 라합을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순종은 어떤 것입니까? 교회에 열심을 내고, 교회나 목사가 무엇을 하자고 하면 군말 없이 시키는 대로 잘하는 것을 순종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까? 죄 짓는 일 아니면 순종하라고 하는 말을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착하게 바르게 사는 것이 순종인줄 알았는데 그러한 생각들이 기생 라합의 경우를 보면 완전히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왜 기생 라합의 이런 행위가 순종이요 믿음의 일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진멸당해야 마땅한 자기 자신과 나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진멸당하여 마땅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여호와의 군대에 항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정당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정이나 회사나 국가가 늘 안정적이고 발전하여 영원한 영광을 누려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진리라고 여깁니다. 이런 사람들은 여호와를 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군대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는 것이 순종이요 믿음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군대의 정탐꾼을 영접한 것은 오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여호와께는 믿음이요 순종이지만 이 세상에서는 반역인 것입니다. 그동안 이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자 아래서 눈에 보이는 세상이 다 인줄 알고 세상의 영광을 구하고 살던 사람의 편에서 보면 이 세상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반역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이 멸망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의 믿음입니다. 기생 라합의 믿음이 그런 것입니다. 여호와의 군대가 쳐들어오는데 막아 낼 자가 없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라합만 들은 것이 아니라 여리고 성의 모든 사람들이 가나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기생 라합만 그 소문을 듣고 정탐꾼을 영접한 것은 믿음이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기생 라합이 믿은 이런 믿음, 이런 순종이 과연 있습니까? 이 세상이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외면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바른 믿음의 이야기는 눈치 받는 이야기가 되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세상의 이야기, 세상의 영광은 환영을 받는데 기생 라합 같은 믿음은 배척받는 현실이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11:33절입니다.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예수를 믿는다는 것으로, 썩어질 세상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한다는 것으로, 비방과 환난을 당하여 구경거리가 되는 사람과 사귐이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노아를 봅니다. 노아가 무엇을 전하고 살았습니까? 이 세상이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다는 것을 전하였습니다. 물로 심판을 받는다고 방주를 만들며 120년 동안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비방과 환난을 당하였습니다.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노아와 사귀는 사람이 그 가족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세상이 심판 당한다는 사실을 미친 사람의 말로 여기고 먹고 마시고 사고팔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그 재미로 살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살기 좋은 소돔과 고모라 비옥한 땅에서 소출은 많고 부유하지만 온갖 타락이 가득한 성읍이 불로 심판을 당한다고 떠나자는 롯의 말에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고 살았던 세상이 유황불로 심판을 당한 것입니다.
노아나, 롯이나, 기생 라합이 믿은바 그 믿음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이 망한다는 것,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비방거리입니다. 모두가 보이는 세상을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데 혼자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보이지 아니하는 나라를 믿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비방거리가 되겠습니까? 이러한 사람들과의 사귐이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2:34-35절입니다.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무슨 표적이 되시는 것입니까?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동일하게 비방을 받게 됩니다. 어떤 비방입니까? 이 세상이 망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비방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과 그들이 모인다는 교회가 무슨 비방을 받고 있습니까? 이 세상이 망하지 아니하고 영원할 것처럼 세상에 더욱 애착을 가지는 것으로 비방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힘만으로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하는데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은 예수의 힘까지 빌어가면서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한다고 비방을 받지 않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누구와 사귐을 가지고 있습니까? 노아, 롯, 기생 라합, 그들이 믿었던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있습니까? 그것은 자기를 부인한 길이요 조국을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비방을 받는 자리입니다. 그 믿음과 순종이 나오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4:9-14절을 봅니다. “봉독” 바울사도가 세계 곧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비방을 받는데 오히려 그들을 축복하면서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사귀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런 대접을 받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세상을 향하여 달려갈지라도 기생 라합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와 사귐이 있는 사람들로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1:32 믿음의 사람들 2004. 9. 1.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믿음의 사람들에 대하여 일일이 다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히브리서 11장에서 나온 믿음의 인물들은 그 내용들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였습니다. 이제는 개인별로 소개하지 않고 한꺼번에 몇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만큼 소개하였다면 믿음이 무엇인지 알만하니 무슨 말을 더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계속 더 믿음에 대하여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작 오늘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까?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그 믿음의 약속을 믿음의 조상들이 받았다는 것은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결론부분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온전할 수 있다면 예수를 바라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초인적인 노력을 하여도 온전해질 수 없음을 알기에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를 바라본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나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웅적인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가를 드러내면서 온전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들로서 믿음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 중 다윗을 빼면 다 사사시대의 사람들입니다. 사사시대란 왕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왕은 없었지만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왕은 엄연히 살아계시는데 그를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온갖 우상숭배와 음행이 가득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셔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일 오후까지 사사기를 다 보았습니다. 사사들은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보통사람들보다 보잘 것 없는 자들임을 보았습니다. 왼손잡이, 겁쟁이, 기생의 아들, 여자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닌 바락, 하나님께서 주신 힘을 자기를 위하여 사용한 사람 등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한 것은 이들의 영웅적인 모습이 아니라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자들을 사용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따라 먼저 기드온을 봅니다. 미디안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큰 용사여! 하고서 부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얼마가 겁이 많은 사람인지 밀 타작을 포도원 움막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몇 번이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정말 부르신 것이 맞는지 확인을 하고서 군대를 모아 적을 칩니다. 그런데 처음 모인 사람들이 3만 2천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많다고 겁나는 사람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돌아가고 나서 남은 자가 1만 명입니다. 이도 많다고 하시면서 개울에서 물을 마시게 하셔서 3백 명만 남깁니다.
3백 명으로 미디안의 대군을 물리쳤다는 것은 기드온과 3백 명의 힘이 아님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붙이신 것임을 이스라엘로 알게 하셔서 여호와 하나님을 주로 왕으로 믿고 살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민중들은 기드온을 그들의 왕으로 세우고 그 자손들도 그들의 왕이 되어주기를 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세우셔서 그들을 구원하신 의도와 전혀 반대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눈에 보이는 적들을 두려워말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하시는 것인데 백성들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7:5-8절을 봅니다. “1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찌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저주와 복이 어떻게 오는 것입니까? 사람을 의지할 것인가, 여호와를 의지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사시대만이 아니라 왕들의 시대에도 끊임없이 사람들의 힘을 의지한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는 사람의 힘을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까? 여호와의 전쟁, ‘붙이시매’의 전쟁에 참여해본 기드온은 아는 것입니다.
사사기 8:22-23절입니다. “22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23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이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자기 자신을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저주를 받는 길입니다. 기드온처럼 내가 여러분의 왕이 되거나 여러분을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는 이 고백이 바로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고 계심을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바락입니다. 여선지자 드보라가 바락에게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니 나가서 싸우라고 하여도 겁이 나서 나가지 못합니다. 드보라가 함께 가면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전쟁에서 바락은 영광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변방의 한 여인 야엘이 적장 시스라를 잡아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으로 바락이 기록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믿음이란 자기 실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을 믿는 것이 믿음이기에 가장 적절한 사람이 드보라나 야엘보다 오히려 바락인 것입니다.
삼손은 태어나기도 전에 나실인으로 지정되어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큰 힘을 주셨는데 그 힘을 자기를 위하여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죽은 순간에 하나님의 원수들과 함께 죽기를 원하여, 죽을 때 죽인 자가 살았을 때 죽인 자보다 많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을 위하여 큰일을 하겠다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힘을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힘마저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을 보면 늘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멋있게 한번 사용되어 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홈페이지 ‘질의응답’ 란을 보셨습니까? 주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에 대하여 질문하기를 사회에서 높아지는 것이 귀하게 쓰임 받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답변하기를 참으로 귀하게 쓰임을 받은 바울사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예를 들었습니다. 만물의 찌기같이 여김을 받은 바울사도,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다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귀하게 쓰임을 받은 것이라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입다를 봅니다. 그 출신이 기생이 낳은 아들입니다. 그래서 다른 형제들에게 왕따를 당하여 다른 동네 가서 깡패처럼 사는 입다입니다. 이스라엘이 위기에 닥치자 가장 힘 있는 사람을 찾아낸 것이 입다입니다. 자기들의 위하여 싸워서 이기면 백성의 우두머리로 삼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우쭐해져서 자기가 전쟁에서 이기면 자기 집에서 제일 먼저 환영 나오는 자를 제물로 바치겠다고 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힘을 원하고, 입다는 하나님의 붙여주심의 전쟁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공로를 개입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 결과 무남독녀가 죽음의 희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참담함, 자기 공로를 개입시키고자 한 잘못된 서원으로 인하여 자기 딸이 희생되는 그 사건을 통하여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사들의 이야기에 다윗 왕이 나옵니다. 순서상으로는 사무엘이 먼저 나와야 하는데 다윗 왕을 왜 먼저 기록하였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사들은 모두가 다 허물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기드온도 에봇을 만들어 우상숭배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다윗도 간음과 살인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우리가 생각하기로 흠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장 나중에 기록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나 사무엘 역시 연약한 자임이 드러납니다.
우선 다윗을 봅니다. 다윗은 우리가 너무나 많이 들어왔습니다. 다윗의 영웅적인 이야기들입니다. 소년 다윗과 골리앗이 얼마나 영웅적인 이야기인지 영화로도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믿음의 이야기입니다. 너는 창과 칼과 방패를 의지하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간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되고나서 간음과 살인을 하고서도 죄인 줄 모르다가 나단의 책망을 받고서 비로소 자기가 죄인임을 제대로 알게 된 것입니다.
자기 죄로 인하여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을 하고 있는 우리야가 희생을 당한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다윗이 의인의 희생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무엘입니다. 제가 전도사 때 아주 기도 많이 하시고 성경도 많이 보시던 권사님이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사무엘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은 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나의 서원으로 잉태하여 젖을 떼고부터 성전에서 자랐고 그의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의 존경을 받은 사사요 선지자였습니다(삼상12:1-5). 그러나 사무엘이 늙어서 자기 아들들을 사사로 세운 것입니다. 사무엘의 권세라면 무엇을 못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사사란 세습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세우신 것인데 사무엘이 자기 아들들을 사사로 세운 것입니다.
사무엘상 8:1-3절입니다. “1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2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3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성경의 인물들을 흠집 내는 것이 취미가 아니라 믿음이 무엇인지를 증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 어떤 인물이라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 온전한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자기들의 연약과 부족을 알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다하려면 시간이 없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믿음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믿은 바가 과연 무엇입니까? 그들이 바라고 소망한 그 실상과 증거가 무엇입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의 영웅적이고 초인적인 믿음의 내용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결단과 대단한 행동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그 사건, 그 믿음의 정점을 바라보고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자기 기대에서 해방되시고, 남에 대한 기대에서도 해방되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으로 만족한 사람들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1:33-38 세상이 감당치 못함 2004. 9. 8.
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브리서 11:1절에서부터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이 땅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 즉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벨로부터 모세까지는 그 믿음의 내용들이 간략하게 소개되었지만 지난주에 본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는 개별적으로 다루지 않고 한꺼번에 다루면서 다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거론한 사람들과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역시 한꺼번에 묶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별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이름을 언급하지 아니하고 이런 모습들이 믿음의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내용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승리와 영광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고난과 핍박과 죽음의 모습입니다.
먼저 33-35절을 봅니다.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고, 의를 행하고, 사자의 입을 막고, 불의 세력을 멸하고, 칼날을 피하기도 하고, 연약한 가운데 강하게도 되고, 이방의 진을 이기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승리의 내용들이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이 도대체 누구로부터 나온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왔는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가 하는 것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나라를 이겼다는 내용을 봅시다. 믿음으로 나라를 이긴 경우는 가나안 정복과 사사시대, 열왕기시대의 이야기들입니다. 그중에 가나안에 들어가면서 어떤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과 아이성에서 패배하는 것을 통하여 믿음으로 이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크고 튼튼한 여리고성은 언약궤를 앞장세우고 돌기만 하였는데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조그마한 아이성을 자기들의 힘으로 이길 수 있다고 큰소리 치고 가서는 지고 왔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싸운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힘을 믿었기에 졌습니다.
사무엘과 사울의 경우를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였을 때에 블레셋이 쳐들어옵니다. 사무엘이 기도하고 어린 양의 번제를 드리고 나자 우뢰가 적들을 혼동케 하여 대승을 거둡니다. 그 승리를 기념하여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아말렉을 이기고 왔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운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지만 사무엘은 믿음을 보여주고 사울은 자기의 힘을 과시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으로 이긴다는 말이 믿지 아니하는 사람보다 세상에서 더욱 뛰어난 것을 말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이 땅과 하늘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자의 입을 막았다는 것은 다니엘을 말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을 때에 이미 사자의 입이 봉하여져 있는 것입니다. 불의 세력을 멸한다는 것은 다니엘의 세 친구를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불 속에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다른 분이 그와 함께 거기에 계셨던 것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믿었던 것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을 죽일 수 있는 임금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의 내용이었습니다.
다니엘 3:16-18절을 봅니다.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느부갓네살 왕이 지금이라도 금 신상에 절하면 용서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건져내시겠지만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여자들은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였습니다. 엘리야 시대의 사르밧 과부와 엘리사 시대의 수넴 여인의 경우입니다. 두 여인 다 자기 아들이 죽었다 살아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을 부활로 받았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 아들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로 받은 것이란 부활을 믿게 된 것입니다. 즉 죽음과 부활을 미리 증거한 내용인 것입니다.
열왕기상 17:17-24절을 봅니다.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 어미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줄 아노라 하니라”
엘리야의 등장으로 자기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죄를 알게 합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기도하여 아들이 살아났을 때에 당신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35-38절을 봅니다. 33절에서 35절 상반부와 다른 분위기입니다. 악형을 받고, 희롱, 채찍질, 결박, 옥에 갇히는 시험, 돌로 치는 것, 톱으로 켜는 것, 시험과 칼에 죽는 것,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살면 세상에서 승리하고 성공하는 것아 아니라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래도 예수를 믿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금 전반부에서도 보았지만 나라를 이기고 의를 행하고 죽은 자를 부활로 받는 이야기들도 결국은 세상이나 세상의 영광을 말하는 것이 아니듯이 지금 보는 후반부는 모든 사람들이 지극히 꺼리는 일들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런 일들이 닥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세상에서 드러나는 것이 믿음이 내용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은 믿음이 나타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믿음이 나타나지 않도록 온갖 유혹을 다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과 핍박이라는 두 가지 무기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강’이라는 소설에서 한 국회의원의 이야기입니다. 군사독재 시절에 야당을 하는데 온갖 협박과 회유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자기들과 손잡으면 출세를 보장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니까 갑자기 체포하여 가서는 온갖 고문을 가하는 것입니다. 변절할 수 없다고 항거하면 할수록 고문은 더하여지는 것입니다. 결국 약점을 잡아서 굴복시키고 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죽임당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가 죽은 자로 알아야 합니다. 죽이고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는 죽음을 맛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극도의 괴로움을 견디고 참으며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죽은 자로 따른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죽으심을 말리자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생각이 사람의 생각이고 사람의 생각이 곧 마귀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서 일어나는 세상을 이기고, 의를 행하고, 약속을 박고, 사자의 입을 막고, 불의 세력을 멸하는 것들이 다 믿음으로 일어나는 것이기에 자기의 자랑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역사하신 주님의 능력을 드러낼 뿐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믿음으로 승리한 것도 아니고, 내가 핍박과 환난과 고난을 이겨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사시는 분에 의하여 승리하고 이긴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자를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에 대하여 미련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세상의 영광이 유혹이 되고, 세상의 핍박과 환난이 두려움이 되는 것이지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는 사람에게는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거부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감당이 안 되는 것입니다.
38절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세상의 영광을 준다고 하여도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늘의 영광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무서운 환난과 핍박과 고난을 가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이기에 그렇게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죽는 것이 영광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세상이 무엇을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데 과연 우리의 믿음이 이런 내용입니까? 세상의 영광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하여 온갖 열심을 다 바치며 살지 않습니까? 나는 죽으면 안 된다. 실패하면 안 된다. 세상에서 고난과 핍박을 당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진다고 노심초사 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미 끝난 세상인데 이미 심판받은 세상인데 여기서 무엇을 성공이며 실패라고 할 것이 있습니까?
이런 믿음의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다르게도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로 헤매며 다녔습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살만한 곳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로 헤매며 다닌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살만하십니까? 세상은 늘 속이고 있습니다. 악이 비록 있다고 하여도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은 불살라지기 위하여 준비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를 날마다 사모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세상에서 배척을 받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감당치 못하여 핍박하고 쫓아내어 버릴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 세상이 살만한 곳이 못되기에 날마다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이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1:39-40 증거와 약속 2004. 9. 15.
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39절의 말씀을 보시면 믿음으로 증거는 받았는데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증거는 받았는데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은 옛 언약의 증인들, 즉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로 증거된 사람들이 증거는 받았지만 그 믿음의 실상인 약속된 것은 받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증거는 무엇이며 약속된 것은 무엇인지 또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방금 이 말씀, 증거와 약속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기는 합니다만 과연 성경에서 증거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서도 설교를 합니다만 그 약속이란 것이 모두 자기에게 유리한 약속들만 말하고 듣기를 좋아한다면 성경과 정 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완성하신 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신 내용을 다 완성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예수님을 믿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러한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또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11: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바라는 것이 약속입니다. 아직 보지는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있는데 그 약속하신 것이 주어진다는 증거는 받았지만 약속의 실체는 받지 못하였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그 실체를 받지 못한 것입니까? 구약의 성도들입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오늘 새 언약의 완성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러 언약들이 나타납니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에게 하신 언약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는 새 언약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언약들이 결국 새 언약으로 완성이 되어야 하는데 그 새 언약의 실체에 대하여 증거만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약속을 받은 사람들은 더 좋은 것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40절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 더 좋은 것이란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나는 이 수많은 증인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이 구약의 그 어떤 인물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11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말씀하시면서 구약의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고 합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 보다 큰 이가 없다고 합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 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고서 증거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증거하였습니다. 그 천국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몰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천국은 죄 사함을 받아야 가는 나라인데 예수님을 보고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증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인데 그 증인들의 정점에 세례요한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어떤 선지자보다 더 큰 자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목격하고 증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열리는 천국에서는 그를 믿고 천국의 백성이 된 사람은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세례요한 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신약의 성도들이 구약의 성도들보다 신분이나 지위가 더 높아서 하늘에서 더 큰 사람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내신 그 언약의 완성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그 피를 그림자로 믿는 자들과 실체로 믿는 자들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 하에서 희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것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온전함을 이룬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같은 죄인이 오직 그의 보혈의 공로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십자가의 온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더 이상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과 성령의 법에 소속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완성인 것입니다.
이제 히브리서 11장을 마무리하면서 구약에서 약속의 실체를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 증거들만 받았다고 하는데 그들의 믿음으로 받은 증거들이 어떻게 약속의 실체를 바라보는 것인지를 다시 보겠습니다. 그동안 개별적으로 보았습니다만 그것은 오늘은 전체를 한꺼번에 보고자 합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커다란 퍼즐이 있다고 합시다. 그 퍼즐의 그림을 완성하는데 구약의 성도들이 퍼즐의 한 조각씩 맞추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성된 그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가만히 있다가 전체 퍼즐의 그림의 완성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의 풍성함을 극도로 드러낸 것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서 전체를 조감하고자 합니다. 올림픽에서 양궁을 보셨지요! 단체전에서 여러 선수들이 각자가 쏘는데 그 목표점은 한 곳입니다. 모두 한 과녁을 향하여 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구약의 증인들이 퍼즐 한 조각을 든 사람이요, 화살 한 대를 목표를 향하여 쏜 것이 됩니다. 그 화살이 구약의 수천 년을 날아서 십자가라는 목표에 명중을 하는 것입니다.
아벨을 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제물과 제사가 함께 녹아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를 드리고서 죽임을 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피로서 제사를 드리고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은 증인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의 실체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4절을 봅니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입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죄를 지시고 죽으신 후에 다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갔습니다.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를 받아 방주를 예비하여 세상을 정죄하고 믿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구원의 방주가 되십니다. 그를 믿는 자는 세상의 정죄에서 구원을 받고 의의 후사가 되는 것입니다. 방주는 모형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몸이 구원의 방주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구원의 방주라고 말하는데 틀린 이야기입니다. 교회 나와서 죽도록 봉사, 충성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가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았습니다. 그것은 더 나은 본향,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실 그 아들의 나라를 사모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그 나라의 왕이요 주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은 이삭을 통하여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브라함의 복인 것입니다.
이삭은 자기 취향대로 축복하려고 하였으나 축복이란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만 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천국은 우리가 가고 싶다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원한다고, 달음박질 한다고 가는 곳이 아니라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야망이 꺾어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게 되는 것이 참된 복임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그 손을 어긋맞게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이 인간의 소원과 다름을 보이셨습니다. 오직 그의 약속대로만 주어지는 것을 믿었습니다.
요셉은 그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묻히기를 유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시키실 때에 자기의 해골을 메고 나가게 한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영광과 보물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더 나은 보물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한 것의 모형과 그림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월절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습니다.
사사들과 선지자들을 다 말하자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나라를 이기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고, 약속을 받기도 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칼날을 피하기도, 죽을 자를 부활로 받기도, 또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고, 희롱과 채찍질, 결박, 옥에 갇힘, 돌로 치는 것, 톱에 켜임, 궁핍과 환난과 학대, 이 모든 것들이 다 증거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퍼즐이 완성되고, 그들의 화살이 목표에 명중되고 보니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사실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분명하게 완성된 그 약속을 받게 되고 믿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그 약속의 증거물로 한 조각의 퍼즐을 가졌다면 우리는 완성된 그림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구약의 증인들과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회개할 일 외에 달리 없지 않습니까? 퍼즐 한 조각을 가지고 목숨을 버렸는데 우리는 완성된 그림을 들고서 다른 것을 기웃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고린도후서 1:20-22절입니다.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됩니다. 우리는 아멘입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 약속이 우리에게 부어진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는 사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의 마음에 주신 것은 구약의 그 어떤 증거물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이 약속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면 될까요?
고린도후서 5:1-10절입니다. “봉독” 한마디로 죽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주와 함께 거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약속의 실체를 성령의 보증으로 받은 사람들의 믿음의 내용입니다.
히브리서 12:1-3 예수님을 바라보자 2004. 9. 22.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1)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의 삶을 성경은 종종 경주에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단거리가 아니라 마라톤에 비유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이제 천국까지는 내가 달려가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출발점이 되고 결승점에 달려가는 것은 내가 달려가서 영광을 얻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장애인 올림픽이 그리스에서 열리고 있습니다만 그러한 경주는 모두가 처절한 경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경쟁의 마음이 우리에게 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자가 다 달릴지라도 상 얻는 자는 하나라는 말씀을 하면서 상을 얻기 위하여 달리자고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공적에 따라 상을 차등 있게 준다고 하면서 독려를 하는 것입니다.
‘뉴스엔조이’라는 인터넷 신문에서 어떤 목사가 이런 주장을 하였습니다. 공산주의가 망한 것은 차별을 없앴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교회가 망하는 것도 상급의 차등을 없애는 것이라고 강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상이 무엇인지를 알면 상급의 차등을 이야기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창세기 15:1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상급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상이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상이었습니다. 정말 그러합니까? 다음의 말씀을 봅시다.
요한복음 8:56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 상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23-27절을 봅니다.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바울사도가 믿음의 경주를 하라고 우리에게 독려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도 바울의 저작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믿음의 경주를 하는 그 목표점이 무엇입니까? 복음에 참예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자기를 쳐 복종하게 하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상을 받아 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참예되지 못할까봐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예외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상이란 복음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부르심의 상에 대하여 한곳의 말씀을 더 보고자 합니다.
빌립보서 3:10-14절입니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2)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3)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이러한 상을 우리가 원한 적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상으로 우리에게 덮어씌워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에 참예하는 것이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빌립보서의 말씀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단 두 가지의 경주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그 마침이 멸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며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주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경주입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는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인내로서 경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주해야할 목표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날입니다. 지금은 감추어져 있지만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나 모든 창조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이 온 세상이 드러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분명한 목표를 향하여 우리가 어떻게 경주해야 할지를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다시 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12:1절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한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그 수많은 사람들입니다. 온갖 핍박과 유혹과 어려움들을 믿음으로 이겨낸 것입니다. 그러한 증인들이 있기에 우리도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서 경주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달리기를 하는데 무거운 것들과 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내로서 경주한 자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그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으로 경주한 그 믿음이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는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좌절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몇 가지만 보겠습니다.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더 나은 부활을 얻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가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악형을 가한다면 우리가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희롱, 채찍질, 결박, 옥에 갇히는 것, 돌로 치는 것, 톱으로 켜는 것, 궁핍, 환난, 학대를 우리의 힘으로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모든 시험을 내 힘으로 이겨야만 한다면 저는 도저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어떤 증인들입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인 예수님을 바라본 자들입니다. 그들 스스로에게서 나온 믿음으로 온전케 된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온전케 된 것이 누구 때문이라는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시간상으로는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장에서 열거된 이 수많은 사람들이 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믿음의 경주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런 믿음의 길을 갈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주님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붙잡으셨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은 믿음의 창시자요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믿음을 주신 분이요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실 수 있는 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원이 나에게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의 열심과 자기의 의로움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지금까지 인내로서 잘 달려왔는지 자꾸만 자기의 행위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를 바라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뒤엣것은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잘한 것이나 잘못한 것이나 뒤엣것을 다 잊어버리고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즐거움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그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그 영광의 자리에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그것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까? 그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와 긍휼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언약을 다 완성하셨기에,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심을 통하여 즐거워하신 것입니다. 그 뜻을 이루심을 통하여 또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비하신 자기 백성들도 함께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즐거움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를 인하여 기뻐하시는 그 교제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상이며 즐거움입니까? 내가 아버지와 함께 하듯이 너희도 나와 함께 하리라는 예수님의 그 약속의 말씀을 이루시기위하여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이 임한 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광의 날을 사모하며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입니까?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기다린다면 날마다 자기를 점검하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얼마나 경주를 잘 하였는가? 성경은 몇 장 읽고, 기도는 얼마나 하였는가? 전도는 얼마나 하였는가? 공적예배는 얼마나 참석했는가? 주간점검표를 만들어서 체크하고 그것을 교회에 제출합니다. 주보에도 온갖 점수를 다 냅니다. 그러면 경주를 잘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자기 성적표를 바라보게 되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것은 믿음의 시작도 예수님이요 믿음의 온전함도 예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믿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느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할까요?
시편 123편입니다. “1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 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 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 평안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심령에 넘치나이다” 교만한 자는 주님을 바라보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자는 주의 긍휼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치 종이 그 상전의 손을 바람같이 우리 눈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히브리서 12:3-11 생각하라 2004. 9. 29.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ㄱ)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생각하라!
신앙생활은 마라톤 경주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피곤하고 포기하고 싶은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지난주에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경주라면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를 격려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경주는 자기를 바라보는 싸움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싸움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믿음의 경주에서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생각해보라는 것입니까? 죄인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얼마나 거역하였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예수님께 거역하고 반항한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처럼 참아내자! 라는 식이 되어버리면 이것은 예수님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시범조교로 바라보는 것이 됩니다. 시범조교란 대신하여 주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태도가 부족한 환경에서 자라났습니다. 군사부일체라는 유교적 환경과 신분의 차별로 인하여 무엇이든지 지시하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환경이 몸에 익어 있다가 보니 교회에서 어떤 모습이 나오는가 하면 당회에서 결정한 것이니, 목사님이 결정한 것이니, 어련히 알아서 하였겠는가 하면서 무조건 순종하는 것을 믿음이 좋은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아멘하면서 무조건 충성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물을 받지 못한 일반인이라도 성경을 보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유시민이라는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 어느 기독교 신문기자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국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자신이 믿지는 않지만 성경을 몇 번 보았는데 한국교회는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라고 한다는 말을 하다가 선거 때에 교회의 항의를 받고 사과하기도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시면 베뢰아의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신사적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하게 받고 그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믿는 사람들이 많았고 헬라인 귀부인들과 남자가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듣고 보시면서 이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하면서 생각을 좀 하자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처음에 받아보는 성도들이 얼마나 고난의 상황에 처하여 있는지를 서신서 앞부분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예수를 믿는데 믿지 아니하는 것보다 고난과 핍박이 더 닥치는 상황에서 왜 그런지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생각입니까? 죄인들이 거역하였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참으신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는 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믿음의 싸움은 놀이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피 흘리기까지, 즉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사가 달린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싸움을 무슨 수로 싸우는 것입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죄인들의 거역을 죽기까지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힘과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와의 싸움입니다. 혈과 육의 싸움이라면 올림픽 경기에 나가는 사람들처럼 절제하고 인내하고 계속하여 훈련하면 메달을 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싸움은 그러한 혈육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피 흘리기까지, 죽기까지 싸우는 것이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말씀할 수 있겠습니다만 단 한가지로 말할 수 있는 죄가 무엇입니까? 모든 죄가 용서를 받지만 이 죄는 용서를 받을 수가 없는 죄가 있습니다. 성령을 훼방하면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보지 않으면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할렐루야 기도원 원장이 손톱으로 환부를 찢고서 종양덩어리를 잡아내는 것을 성령의 역사로 보고서 그것을 거부하면 성령훼방죄가 되는 줄 알고 많은 목사들이 그 집회에 들러리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사건을 보고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귀신이 들려서 그렇게 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함을 얻으려니와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자를 거역하면 사함을 얻지만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거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훼방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6:7-14절입니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면 진리의 성령은 자의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지기 이전에는 예수님을 거역하여도 사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후에는 천하 인간에 구원받을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성령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은 요한복음 16:9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아니함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운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세력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마귀가 모든 것을 다 허용할 수가 있습니다. 기적도 행하게 하고, 부자가 되게 하기도 하고, 수많은 능력을 행하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방해하면 마귀는 성공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어떤 유혹을 심어 놓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전래로 자기 집안 잘되는 일이라면 어떤 희생도 다 감수하는 민족성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그러하겠지만 우리나라는 더욱 특별합니다. 그래서 아들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정한수 떠놓고 손이 닳도록 빌고 비는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현대적으로는 아이 좋은 대학가기 위해서 과외비를 벌려고 노래방 도우미라고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풍토 속에서 예수를 믿으면 자식이 잘되고 집안이 잘된다는 말을 하면 무슨 희생을 바치지 못하겠습니까? 특별새벽기도회를 못하겠으며, 고3 수험생을 위한 철야기도회나 금식을 못하겠습니까? 헌금을 못하겠습니까?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을 믿는데도 계속하여 고난이 오고, 핍박이 오고, 환난이 닥치는 경우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징계의 목표
12:5-6절입니다. 고난을 인하여 낙심이 되고 피곤하여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잠언 3:11-12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자마다 채찍질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징계하심을 가볍게 여기지도 말고 그 꾸지람에 낙심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징계가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12:7-9절입니다. 우리를 아들로 대접하시는 것입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라고 합니다. 세상의 아버지도 자기 자식을 위하여 징계합니다. 세상의 아버지가 징계를 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공경하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 해서만 징계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교육시키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12:10절입니다. 세상의 아버지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징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는 우리를 거룩함에 참예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잘못해서 징계가 오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를 거룩함에 참예시키기 위하여 적극적인 훈련의 차원에서도 징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 목표가 거룩함에 참여입니다.
12:11절입니다. 징계는 다 힘들고 어렵습니다.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입니다. 그러나 후에는 그로 말미암아 연단이 된 자는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고진감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의 성공의 이야기가 아니라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평안이 아니라 의가 깃든 하늘의 평강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을 묵상하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과연 이 말씀이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그 예수님을 생각하도록 그리하여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고 의의 평강한 열매까지 맺게 하시는 사랑의 손길이 징계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세상의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히브리서 12:12-13 고침을 받게 하라 2004. 10. 6.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브리서 11장에서 성도를 나그네요 외국인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 땅이 본향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본향 가는 길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피곤하고 낙심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방해들이 있습니다. 손이 피곤하여지고 무릎이 연약하여 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고 저는 다리로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시면 “그러므로”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의 단락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앞부분은 징계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생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하시기에 징계가 있는 것이며, 징계를 통하여 거룩함에 참예하게 하고,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언약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7:14-16절입니다. “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다윗이 하나님의 전을 지어드리려고 하였을 때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 왕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윗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집을 지어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성전은 그 아들이 지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아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를 아들로 삼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아들이란 솔로몬인데 죄를 범하면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는 하시지만 사울에게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지는 아니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언약을 인하여 은총을 거두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로 대우하시는 언약적인 사랑입니다.
오늘 성도에게도 이런 언약적인 사랑이 주어지기에 비록 징계가 있고, 낙심과 환난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어떤 위험이나 핍박이나 칼이나 죽음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다는 것이 바로 언약적인 사랑의 결과인 것입니다. 솔로몬이 비록 죄를 범할지라도 다윗과의 언약으로 인하여 은총을 거두시지 아니하시는 것처럼 오늘 성도란 성부와 성자의 언약으로 인하여 그 은총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2절에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고, 저는 다리로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고 합니다.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이란 유대 문학에서 낙심과 절망에 빠진 태도를 묘사하기 위하여 종종 쓰인 친숙한 이미지입니다. 신앙생활이 경주와 같고,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것이기에 낙심과 절망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경주는 우리 힘으로 가는 길이 아니기에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생각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곧은길을 만들고 저는 다리로 어그러지지 않게 하는 것도 우리 스스로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고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고침을 받는 것이 스스로 할 수가 있다면 단체로 극기 훈련을 하는 사람들처럼 ‘하면 된다!’는 머리띠 두르고 가면 됩니다. 그러나 신앙의 경주는 날마다 고침을 받으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고침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칼뱅은 고침을 받는 것에 대하여 반신반의가 고침 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아니하는 것을 고침 받아 전적으로 믿음으로 가야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가야하는 목표는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아들의 나라입니다. 그 약속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나그네로 가는 것입니다.
복음성가 가사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운 일 보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때 슬픔 네 두려움 없네......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주의 약속 생각해 보네 내 맘속에 믿음 잃지 않고 말씀 속에 위로를 얻네 주님의 도우심 바라보며 모든 어려움 이기도다 흘러가는 순간순간 마다 주님 약속 새겨봅니다” 우리가 믿음의 나그네라면 숨쉬는 순간마다 어려운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으로 위로를 얻고 고침을 받아 바르게 순례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세우라는 이 말씀과 곧은길을 만들게 하는 말씀이 구약의 이사야 3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구약의 본문을 살펴보면 구약에서 주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이 어떻게 돌아오는 지를 보게 됩니다. 그들을 향하여 약한 손을 강하게 하고 연약한 무릎을 굳게 하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어떻게 선포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35장 전체를 보겠습니다. “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1)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주며 4 2)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 3)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시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4)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9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이스라엘이 범죄로 인하여 외국에 사로잡혀간 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입고서 돌아오는 장면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일차적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오는 모습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돌아오는 길은 대로입니다. 거룩한 길입니다. 깨끗지 못한 자는 다니지 못하는 길입니다. 오직 구속함을 입고 속량함을 입은 자들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속함을 입고 대로로 돌아오는 자의 표상이란 소경과 귀머거리, 저는 자, 벙어리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7-9절을 봅니다. “7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 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8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9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왜 이런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입니까? 자기들의 힘과 능력으로 돌아오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구원의 능력을 보이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고, 높은 산이 깎이고, 깊은 골짜기들이 메워지며 대로가 만들어져서 주의 백성들이 돌아오리라는 것입니다. 대로가 아니면 어떻게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자들과 해산하는 자들이 돌아오겠습니까? 그러므로 주께 구속함을 입고 돌아오는 자들은 자기 힘과 능력을 의지하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힘과 능력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오는 대로역시 주님께서 친히 만드시는 대로입니다.
이사야 49:6-13절입니다. “8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1)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9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자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10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 11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 12 혹자는 원방에서, 혹자는 북방과 서방에서, 혹자는 시님 땅에서 오리라 13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니라”
히브리서를 받는 성도들이 여러 가지 환난과 핍박가운데서 이 서신을 받고서 위로와 격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는 신앙의 여정이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내용들이며 주께로 돌아가는 길이 그들의 힘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인도하셔서 대로로 가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현실은 힘이 빠진 손, 연약한 무릎, 저는 다리이지만 그러나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렘31:1)는 여호와의 언약으로 인하여 그들이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취가 되었고 온 열방에서 주의 택한 백성들이 주께로 돌아오고 있다는 방대한 구약의 내용들이 히브리서에서는 단 두절로 압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그 주께로 돌아오는 자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지금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환난과 핍박으로 인하여 믿음의 길을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된 것을 다시 고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주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모습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범죄하여 이방의 나라에 사로잡혀갔을지라도 그곳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대로로 인도하여 시온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보라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자들의 피곤하고 연약한 모습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은 완벽하게 인도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지금의 피곤하고 연약한 모습들, 믿음의 길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것들이 고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지 않습니까? 성도로서 나그네의 길을 가고 있다면 분명히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영광을 위하여 가고 있다면 걸림돌이 되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남보다 눈치가 빨라야 하고, 말도 잘해야 하고, 걸음도 빨라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더 잘 살아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구속함을 입고 나오는 자들의 모습은 세상에서 연약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구속함을 입은 자들에게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며 노래하며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자기 잘난 사람은 걸어갈 수가 없는 곳입니다. 오직 주님께 구속을 받고 속량을 받은 자들만 걸어가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합니다. 세상의 능력의 유무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의 구속함을 입은 것으로만 노래하고 기뻐하며 가는 곳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믿음의 길에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고 고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2:14-17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2004. 10. 13.
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17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말씀에 두려워하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두려워하고, “쓴 뿌리가 나서 더러움을 입을까”두려워하고,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두려워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것을 두려워하라고 하시는데 그러나 실상은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유 잃어버림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봅니다. 그 소유가 유형이든 무형이든 자기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들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산, 건강, 사람, 지위, 명예 등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소유가 많을수록 염려는 더 많고 두려움은 더 많은 것입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면서 무엇이 과연 두려운가를 물어보았습니다. 돈은 원래 없으니 잃어버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돈 잃어버릴 두려움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자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환경이 돈이 많았다면 잃어버릴까 두려워할 것이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나는 무엇이 두렵지 않다고 할 때에 그 사람의 상황에 따라 다를 수가 있기에 그것이 특별한 것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두려움인가? 수시로 바뀌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정당한 생각과 행위를 하였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이 없는데 목사가 그렇게 해서 되겠는가하는 생각과 행위를 하였을 때는 그런 모습이 사람들에게 알려질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지금 저의 속마음이 다 노출된다면 부끄럽고 두려울 것입니다. 여러분은 목사니까 다르겠지, 하실지 모르지만 인간의 욕심이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단지 그 모양과 색깔만 다를 뿐이지 그 밑뿌리는 같은 것입니다.
요즘 우리 교회 홈페이지 방문자가 많아졌습니다. 호주에 사는 어떤 분이 ‘십자가 마을’에 저의 설교를 소개해서 전에는 20-30명이 설교를 보았는데 지금은 100여명이 넘어가니 괜히 신경이 쓰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해서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까? 더 잘해야 할 텐데 하는 부담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설교를 한 것이 누구를 위하여 한 것이 됩니까? 나를 위하여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이름의 영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쓸데없는 것을 두려워말고 말씀을 두려워하라는 이 말씀이 저의 마음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두려움이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 두려움이 어떻게 해결이 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서 우리가 정말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최초의 두려움은 역시 에덴동산에서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 부끄러움과 두려움이었습니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고 어떤 두려움도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유혹에 넘어가 범죄하고 나니 부끄럽고 두려워 숨었던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아담의 모든 후손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일평생 동안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살아가야 한 것입니다. 자기를 가리고 자기의 소유를 늘려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기의 소유를 늘리기 위한 싸움, 지키기 위한 싸움, 빼앗기지 아니하려는 싸움이 계속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세상의 싸움이라면 교회는 어떤 모습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독차지하기, 혼자서 신에게 잘 보이기, 자기 업적을 과시하기의 싸움에 나선 것입니다. 이 모든 싸움들이 두려움을 이겨보고자 하는 몸부림에 지나지 아니한 것인데도 자기들은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한다고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성공이란 자기 밥그릇 확실히 지키고, 더 크게 하는 것입니다. 서울의 어느 큰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부목사들에게 밥그릇 크게 키워서 나 혼자 독차지하지 않겠으니 열심히 교구관리 잘하라고 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이런 이전투구의 현장에서 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히브리서 2:15절 말씀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죄와 사망이라는 권세아래서 종이 되어 있기에 일생이 죽을까봐 무서워하면서 삽니다. 단지 목숨 끊어지는 것만이 무서움이 아닙니다. 자존심 상하는 것도 무서움이고, 사업에 실패하는 것도 무서움이고, 목회 실패하는 것도 무서움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나는 죽으면 안돼, 실패하면 안돼, 그러면 내 이름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닥달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을 위하여, 교회의 성장발전을 위하여 끊임없이 일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심으로 일평생 죽기를 무서워하는 죽음의 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2:14-17절을 봅니다. “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4)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혈육에 속하셔서 사망을 맛보심은 사망으로 사망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이제 사망의 왕에서 놓여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자들만이 세상의 두려움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은혜로 온 것입니다. 이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시고 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고 우리의 거룩함이 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4절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볼 자는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는 자라고 합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것, 유대인과 이방인의 원수된 것을 다 허무시고 자기 피로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것을 좇는 것입니다. 이들이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0:28-31절입니다.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1)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주의 자녀들은 세상의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분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세상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두려워하라고 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절 상반절입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할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설교시작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이 다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란 결국 아직도 자기 행위를 기대하고 있기에 두려움에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두렵습니까?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 있고 없고가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행하신 일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 마귀가 손을 대지 못하는 것입니다.
15절 하반절입니다.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쓴 뿌리가 무엇입니까? 지금 유대 기독교인들을 다시 옛 율법의 제도 속으로 들어가게 하려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쓴 뿌리로 인하여 괴롭게 되고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으로 치장하는 것은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쓴 뿌리가 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에서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에서는 자기의 장자권을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장자권이란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어진 것인데 그들이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무시한 것입니다. 자기가 장자이기에 당연히 받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망령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해서 받는다는 생각이 망령된 생각입니다. 어떠한 자격과 조건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를 모독하는 것, 자신의 자격으로 여긴 자의 모습은 아무리 울면서 간구하여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두려워하라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의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두려움 없는 가운데 살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두려움 없는 삶을 아버지와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실 때 예수님의 가장 큰 고통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끊어지는 고통이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하시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을 인하여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은사로 받은 자들은 세상의 것들이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닙니다. 오직 그 사랑에 이르지 못할까, 그 은혜에 이르지 못할까가 가장 큰 두려움이요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1서 4;15-18절입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 안에서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으로 심판 날에까지 담대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그 사랑 안에 거하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2:18-24 성도가 이른 곳 2004. 10. 20.
18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19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20 이는 ㄴ)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21 그 보이는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ㄷ)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오늘 본문에서 “너희가 이른 곳”이라는 말씀이 두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른 곳이란 지상의 시내산을 말하고 두 번째 이른 곳이란 하늘의 예루살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이미 이른 곳이 어디인가를 말씀함으로 현재 믿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당하는 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지 않고 보이는 세계를 목표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씀이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누가 믿음의 사람인지를 골라내는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신을 받는 사람들에게 닥친 믿음의 시련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완전한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으로 모든 율법의 규례들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지에 대하여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율법의 규례를 지켜오다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이 믿음에 대하여 계속된 핍박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하여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시작부터 지금까지 대비한 내용들은 여러 가지입니다. 천사와 예수님을 대비합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의 사환이지만 예수님은 집 주인의 아들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온전치 못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자기 백성을 대속하는 온전한 대제사장입니다. 첫째 언약은 흠이 있었지만 새 언약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흠이 없이 완전한 언약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지상의 시내산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시온산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18-21절입니다. 너희가 이른 곳은 이런 곳이 아니라고 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받을 때에 일어난 일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지 감히 접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불붙는 산,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소리가 울려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기가 무서워서 더 말씀하시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대신 듣고 전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짐승이라도 접근을 하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조차도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두려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놓고서도 그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끊임없는 반역이었습니다. 그 두려움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돌아서면 그만인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마음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성도가 이른 곳은 어디입니까? 옛 언약 하에서 그들이 이른 시내산에서는 두렵고 떨었습니다.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나가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새롭고 산 길이 열린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9-22절입니다.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새롭고 산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고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으면 양심의 악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악을 깨닫는 사람이 마음에 뿌림을 받은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만이 몸을 맑은 물로 씻은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씻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으로부터 발 씻음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이런 사람들은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아가서 이른 곳을 여러 가지로 오늘 말씀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22-24절입니다. 첫째,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위치한 산을 시온산이라고 합니다. 이 시온산을 성도가 이르게 된 곳이라고 합니다. 지상의 시온산이 아니라 하늘 성소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지상의 예루살렘의 성전이 하늘의 하나님을 모실만한 곳이 못됩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하늘의 예루살렘이란 사람의 손으로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부흥사가 하늘에서 성도가 거할 집이 지어지고 있는데 그 건축의 재료는 지상에서 성도들이 전도하고 봉사한 것으로 재료를 삼아서 천국의 집이 확장되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넓고 좋은 집에 살고 어떤 사람은 합숙소 같은 곳에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예루살렘이란 사람의 손이 미치지 못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11-12절입니다.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의 대제사장이 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르게 된 곳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피로 만들어내신 아들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둘째,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라고 합니다.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라고 합니다. 왜 장자들의 총회인 것입니까? 그것은 맏아들의 공로로 이루어진 모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출애굽기 4:22절에서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장자란 혈통의 순서가 아니라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동생들을 살려내는 자가 장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란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공로로 모여진 사람들이 하늘의 장자들의 총회요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계에서 스스로 장자 교단이니 장자 총회니 하는 말들을 사용하는 것은 자기들이 맏이 노릇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장자란 오래된 역사와 숫자의 힘을 가지고 말합니다. 하늘의 장자들의 총회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면서 장자교단이기를 좋아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무슨 교계의 사업이든지 자기들이 주동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런 모습이 과연 없습니까? 장자의 희생으로만 만들어진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셋째, 만민의 심판자인 하나님과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 있는 곳입니다. 만민의 심판자 앞에 누가 감히 있을 수가 있습니까?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두렵고 떨려서 감히 나아갈 수 없었는데 그 심판자인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곳입니다. 이곳이 성도가 이르게 된 곳입니다. 어떻게 심판의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가 있습니까?
요한복음 5:24절입니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2)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두 완료형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 믿는 자는 이미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도 우리가 이른 곳은 이미 만민의 심판자인 하나님이 있는 곳이라고 완성된 나라를 말씀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심판받으셨기에 그를 믿는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심판자인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자인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나은 뿌린 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 언약에서 모세의 중보는 온전하지 못하였습니다. 모세 자신도 두렵고 떨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중보는 완전하시기에 그의 백성들을 온전케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직 그의 피로서 온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곳이 성도가 이른 곳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좋아하십니까? 하나님의 나라 그러면 황금보석으로 꾸민 집, 걱정근심, 고통, 사망이 없는 곳으로만 알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요한계시록의 그러한 천국의 묘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른 하나님의 나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으로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이며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뿌린 피로 이루어지는 나라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질문을 합니다. 성경에서 약속하는 이런 곳이 정말 좋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이른 곳이 이러한 곳이 좋아서 세상의 것들이 다 시시하게 보이고 죽은 것으로 보입니까? 아니면 내가 만들어 낼 수 있고, 내가 꿈꾸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이 좋은 것입니까? 성경에서 약속하는 믿음의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세계입니다. 그 내용을 우리가 히브리서를 통하여 살펴보았습니다만 과연 이 믿음의 세계가 좋기는 한 것입니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인 ‘주홍글씨’라는 영화의 안내를 보았습니다. 시작부분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모든 유혹은 재미있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 왜 피하겠는가...” 이렇게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 이야기라는 끝 부분에서는 성경을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3:6절이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결국 눈에 보이는 세상은 유혹의 세상입니다. 이런 보암직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그 끝이 허무요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보암직한 세상에 미련이 없는 것입니다. 혹 있더라도 그것이 죄인 줄 아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영광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업적에도 미련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로 이루어내신 그 나라, 성도가 이미 이르게 된 그 하늘의 예루살렘이 좋은 것입니다. 이 세상은 썩어지고 쇠하여지고 더렵혀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1:3-4절입니다.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주셨는데 그것은 하늘에 간직된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이 기업을 히브리서에서는 성도가 이미 이른 곳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을 받은 자는 오늘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히브리서 12:25-29 진동치 못할 나라 2004. 10. 27.
25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ㄹ)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2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2)은혜를 3)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세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에서 무엇을 선과 악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자기들이 살아가는 일에 이익이 되면 선으로 여기고 불편과 손해를 주면 악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안의 모든 인간을 지배하는 의식인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음이 죄와 악이라는 사실을 누가 말하겠습니까? 반대로 하나님과 함께 함이 복이며 구원이라고 누가 믿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렇지!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자, 그것이 우리의 복이라고 하였으니 하나님께 가까이 하면 더 많은 복을 받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 역시 자기중심적인 복의 개념입니다. 성경에서는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죽음인 것입니다. 얼마나 가까이 할 수 없는 거룩하신 분이신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여주심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요 복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성도가 이른 곳은 시내산이 아니라 하늘의 도성인 예루살렘이라고 보았습니다. 시내산에 하나님께서 강림하시니 온통 불과 구름과 연기기둥과 나팔소리와 진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곳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모세를 통하여 엄중하게 명하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현현 앞에 죄인이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이후에 천사가 불 칼로 지키는 것과 같이 접근불가의 영역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를 입은 모세만이 나아가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서 내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시내산 정도가 아니라 하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내산에 나아가는 것도 인간의 자격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만 나아가게 되는데 감히 하늘나라에 누가 갈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걷지도 못하면서 날려고 한다는 말처럼 시내산도 나아가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하늘나라에 이를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말보다 더 엄중한 말씀이 하늘로 쫓아 말씀하시는 분의 말씀인 것입니다.
25절입니다.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분이 누구입니까? 히브리서 1:1-2절입니다. “봉독” 오늘 우리가 누구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옛날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아들을 위하여 만유를 지으셨고, 그래서 그 아들이 후사가 되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시며 그 형상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죄를 정결케 하시며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땅에서 경고한 자 모세의 말을 거역한 자도 피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물로 하늘로서 경고하신 예수님을 배반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28-29절입니다.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지금 히브리 기독교인들이 예수님보다 모세 편으로 기울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명한 것들을 과연 무시할 수가 있는가 하는 흔들림인 것입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는 얼마나 대단한 기적들이 나타났습니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서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백성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을 과연 계속 믿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직 은혜로만을 이야기하면서 끝까지 나아가겠습니까? 은혜를 받았는데 은혜에 보답을 해야지, 보답도 하지 않는데 그래도 괜찮을까 하는 염려는 없습니까? 내가 옛날과 비교해보니 기도도 봉사도 제대로 없는 것 같은데 이대로도 괜찮을까? 그런 염려는 없습니까?
어제 금요일 성경공부하는 몇 분과 함께 화왕산에 갔습니다. 억새풀의 장관 속에 수백 명이 올라왔었습니다. 그 중에 한 무리는 여전도회 단체로 왔는지 특송을 하는 것을 보면서 지나쳤는데 산 정상쯤 이르니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돌아보니 그곳에서 통성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열심입니까? 그 산에까지 와서 온 산에 들릴 만큼 통성기도를 하는데 그때 같이 간 집사님 한 분이 갑자기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같이 있던 목사는 “아멘”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위하여 그곳에서까지 통성기도를 하는지 모르지만 저가 아멘을 한 것은 인간이 해아래 행하는 것이 모두 헛되다는 사실로 아멘 한 것입니다.
해아래 인간이 행한 모든 것들이 다 헛되기에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다 흔들리는 것입니다. 내가 금식을 한 것도, 통성기도를 한 것도, 목이 쉰 것도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늘의 은사로 주어져야만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늘로부터 말씀하신 분이 다시 오셔서 온 땅과 하늘을 다 진동시키실 것입니다.
26-27절을 봅니다. “봉독” 모세가 경고할 때는 땅만 진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재림하실 때는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할 것입니다. 그렇게 흔들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흔들리고 변동될 것들은 다 파괴시켜버리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변동되지 아니할 것들만 영원히 남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어버리시는 것입니다.
29절에서는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흔들어버리고 불태워버리고 나서 남게 되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후서 3:8-13절입니다. “봉독”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라도 불살라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남습니까? 새로운 창조물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약속대로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의에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기에 새롭게 창조된 의인만이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 중에 한 집사님이 전화가 왔습니다. 박 집사님의 집에 어제 오전에 불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화를 했더니 어제 집을 비운 사이 텔레비전에서 누전이 되어 불이 났다는 것입니다. 이웃에서 화재신고를 해 소방서에 불을 껐는데 거실과 부엌이 다 탔다는 것입니다. 지금 회사 사택에 임시로 거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목사가 무어라고 위로해야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전했습니다. 세상의 것들은 다 불에 탑니다. 그러므로 불에 타지 아니할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삽시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땅과 하늘까지 다 흔들어버리시는 것입니다. 일본에 지진이 나니 도로가 붕괴되고, 다리가 무너지고,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지진에 대비하여 튼튼하게 만들지만 그러나 조금 흔들리는 지진에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 세상을 흔들어 버리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흔들리지 아니할 것들만 남습니다.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께로부터 온 것들만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나 사고방식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어제의 진리라고 여긴 것들이 오늘 틀린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들이 무엇을 만들었든지 그것은 다 바벨탑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암직한 업적을 남긴다고 하여도 그것을 흔들어 부수어버리시고 불태워버리시고 오직 하나님 홀로 이루어내신 일만 남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이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만들어 내거나 이룰 수 있는 나라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그 나라, 의에 거하는 바 그 아들의 나라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만을 남기시기 위하여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까지 흔들어버리시고 불살라 버리시는 것입니다. 흔들리고 변동되고 불탈 것들을 제거하여 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자기 아들의 피로 창조된 세계만을 남기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부터 창조의 완성이었습니다. 인간이 범죄 하자 사후대비책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시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인 것입니다.
이런 나라를 성도는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나라에 성도가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흔들리지 아니하는 나라를 받았으면 이제부터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28절입니다. 진동치 못할 나라를 우리가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고 합니다. 이상한 논리 같습니다. 은혜로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기에 이제는 은혜를 갚자고 하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자고 하지 않고 왜 또다시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진동치 못할 나라는 은혜의 나라입니다. 무궁한 은혜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갚을 수 없을 만큼 은혜가 풍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은혜를 갚을 만한 능력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저 주어야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공급받아야 살아가는 인간이 그 은혜를 거부하고 스스로 살겠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한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이제부터는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받고 살겠습니다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 은혜를 받았기에 이제는 다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누가 무슨 행함의 그럴듯한 유혹을 하여도 흔들리지 아니하는 나라를 받았기에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로 주어지는 나라입니다. 그 아들의 피로 인하여 세워진 나라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것에 관심을 두는 것 자체가 아들의 공로를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9절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불로 소멸하여 남는 것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변동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런 것은 사람이 만들어 낼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와 은사로 주신 것들만 남기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작품전시회가 열리는 곳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시행되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더욱 더 은혜를 사모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으니 은혜를 받고 삽시다.
히브리서 13:1-6 나그네 대접 2004. 11. 3.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3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4 1)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ㄱ)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ㄴ)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의 가정에 손님이 온다면 어떻습니까? 그것도 잠시 왔다 가지 않고 며칠을 묵어야 하고, 떠날 때는 여비도 넉넉하게 드려야하는 그런 손님이 온다면 부담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어릴 때에 시골에 살았기에 방학이 되면 도시에 있는 친척집에 놀러가고 싶어서 가려고 하면 어머니께서 말리시던 기억이 납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이라도 그 집에 가면 손님이 되는데 얼마나 힘들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말리신 것이지요! 심방이나 다른 성도들이 오는 것이 기쁩니까? 아니면 귀찮습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좋아하는 일들을 계속하라면 좋을 텐데 부담되는 일을 하라고 하실 때는 어떤 마음이 듭니까? 내가 할만한 일은 알아서 하고 하지 못할 일이나 귀찮은 일은 모른 체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형제 사랑의 계속이나 손님 대접을 하는 것이 단순히 인간적인 도리가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2절 말씀에서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형제와 손님이란 함께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손님이란 나그네로 볼 수 있습니다. 형제, 손님, 나그네가 다 성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의 조상들을 나그네요 외국인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서 베드로 사도는 성도를 흩어진 나그네라고 합니다. 단순한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이 형제요 손님이요 나그네라면 접대하는 것이 당연하고 계속 대접하는 것이 성도의 당연한 자세입니다.
그러면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과 롯입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나그네 세 사람을 대접하였는데 그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두 사람은 천사였습니다. 두 천사는 소돔과 고모라로 향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장래에 대한 일과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로 향한 두 천사의 모습은 역시 나그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누가 영접합니까? 롯이 영접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나그네를 상관하고자 끌어내려고 한 것입니다. 그 나그네를 자기들의 정욕을 풀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 소돔과 고모라성이 어떻게 됩니까? 나그네를 영접한 롯의 가족은 구원되지만 나머지는 불과 유황불로 심판을 당한 것입니다.
분명 손님 대접한 것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어떤 손님을 대접해야 하는 것인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대접할 수도 없고, 모든 학대받고 핍박받는 자를 다 도울 수도 없는 문제 아닙니까? 이 설교를 준비하는 중에 장애인 협회라는 두 곳에서 전화가 와서 도와 달라고 합니다. 다 도울 수가 없지 않습니까? 어디를 돕고 어디를 돕지 않아야 합니까? 그러므로 롯이 구원되는 것은 자신이 나그네를 환대함으로 구원받아야지 하는 의도에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런 은혜를 입은 증거가 나그네를 대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손님을 잘 대접하여 구원받아야지 하는 의도조차 죄임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그네 대접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나온 이후에도 율법에서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자주 말씀하시기를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도 애굽에서 나그네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그네를 학대하면서 성전제사를 아무리 잘 드린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나그네만이 아니라 고아 과부도 포함이 되고 우상숭배도 포함이 됩니다만 왜 나그네가 들어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0-11절입니다.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3)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 예수님께서 주인이신데 주인이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주인의 영광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종의 모습으로 가난한 나그네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영접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영접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죽여 버린 것입니다. 어느 누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그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자기의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영접하는 자들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의 말씀을 봅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을 대접하고, 형제가 갇혀 있다면 자기도 갇힌 것같이 생각하고 형제가 학대를 받는다면 자기도 몸을 가진 자로서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 받은 한 형제로서 당연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나그네를 대접하고 안하는 문제가 아니라 영생이냐 영벌이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지켜서 영생을 얻을 자는 한명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에게서 이러한 열매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성도라고 모였다고 할지라도 그가 참으로 은혜를 입은 자인지 아닌지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3서 5-12절을 봅니다. “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6 저희가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거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저희를 전송하면 가하리로다 7 이는 저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8 이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9 ○내가 두어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10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12 데메드리오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거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거가 참된 줄을 아느니라”
히브리서나 요한 서신이나 초대교회 때에 복음을 전하는 순회전도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나그네들에 대한 대접은 함께 진리를 위하여 수고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교회 안에서 가이오 같은 자가 있고 디오드레베 같은 자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이오 같이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디오드레베 같은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이오는 선에 속한 사람이기에 나오는 열매이고, 디오드레베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어떻게 나타난 것입니까?
히브리서 13:12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그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싫다고 성문 밖으로 끌어내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는데 오히려 그 일이 자기 백성들을 거룩케 하기 위한 피 흘리심이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나는 그를 별 볼일 없는 자라고,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천대하고 박대하고 죽이기까지 하였는데 오히려 그는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시고 자기 백성을 위한 대속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함께 받았습니까? 이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한 형제사랑은 계속되며, 형제 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 학대받고 갇힌 자를 돌아보는 일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무슨 운동이나, 그렇게 함으로 복을 받는다든가, 영생을 얻는 방법으로 하는 것은 모두 가짜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4-5절입니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고 합니다.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있는 바를 족한 줄 알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인간의 의지적인 결단으로 될 일입니까? 마음의 음욕도 간음이며 범사에 돈을 사랑함이 항상 터져 나오는데 어떻게 이런 열매들이 나오는 것입니까? 형제사랑, 나그네 대접, 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를 돌아보는 것도 다 돈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하신 말씀은 네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도 간다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까?
5-6절입니다. 영문 밖에서 자기 피로 백성을 거룩케 하신 그 능력이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능력이 임한 사람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나를 어찌 하리요” 이 은혜가 있는 사람이 성도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하늘의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서 형제 사랑은 지금까지 계속 되어왔고 복음을 전하는 나그네를 대접하여 왔으며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이러한 은혜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능력으로 유지되어 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님 오시는 그 날에 이런 말씀이 선포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31-46절을 봅니다.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아멘!
히브리서 13:7-13 영원히 동일하신 분 2004. 11. 10.
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하여 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안정이나 기득권에 대하여 미련이 있는 사람이라면 변화를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란 이 땅에서 나그네요 외국인이기에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는 것입니다. 미련이 없으니 두려움도 없는 것입니다.
6절의 말씀을 봅시다.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이것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종말을 주의 깊게 보라는 것이 7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1세기 때에 복음을 전하던 자들의 행실과 그 종말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여러 가지 위협과 핍박 중에도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고, 순교까지 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행실은 죽음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이 세상에서 고요하고 두려움 없이 믿음으로 살다가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9절입니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는 것입니다. 성도의 마음이 은혜로 채워져야 하는데 다른 교훈들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훈들은 아직도 구약의 그림자들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먹을 수 있는 정결한 음식과 먹지 못할 부정한 음식을 구별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신 지금까지 아직도 그러한 규례에 매어있다는 것이 다른 교훈에 끌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은혜로 채우지 못하고 법으로 채워진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1세기 때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할 거짓 스승을 많이 두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을 때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골라서 먹게 되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자기의 입맛에 맞는 것만을 골라서 섭취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말씀은 어떤 것들입니까? 자기의 행위도 가치가 있다는 인정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 음식이나 먹지만 나는 율법대로 음식을 골라서 먹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환상 가운데 온갖 부정한 음식을 먹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먹지 못한다고 하였을 때 주님께서 그것을 깨끗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 고넬료에게 전도하라는 말씀입니다만 주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율법규례의 정결법으로 부인하고 있는 것이 베드로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은혜로 채워져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교훈들과 법들로 채워져 있는 것입니까? 은혜로 채워져 있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만이 우리를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며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임을 믿는 것이 은혜로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것들을 자꾸만 주섬주섬 같다 붙이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이 다른 교훈들로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받아야 할 믿음의 사람들이 있고, 본 받지 말고 경계하고 배척하여야 할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7절은 본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은혜로 채워진 자들이며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9절은 여러 가지 다른 교훈들을 끼워 넣으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무언가 새로운 것들을 자꾸만 추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종교적인 개념들과 이상한 경험과 체험들을 끌어들여서 자기들의 길로 끌고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명확한 기준은 무엇입니까? 8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말씀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와 상관없이 이 변화무쌍한 역사세계와 상관없이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이루신 일만이 영원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사람들이 인식하는 역사 속에서 파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시 파악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만의 일이지 영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창세전에 예정된 일입니다. 창조 안에서 인과율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영원하신 분을 히브리서에서 어떻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히브리서 1:10-11절입니다. “10 또 ㅂ)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이 세상에 지어진 것들은 다 멸망하고 옷과 같이 낡아집니다. 그래서 의복처럼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물을 지으신 주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이 영원하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로 모든 하나님의 언약을 다 완성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지 않으시고 다 찾아내시며 그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아니하도록 기도하고 계십니다. 또한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9:27-28절입니다.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아니한 자는 주님 오시는 날이 영원한 심판의 날입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죄와 상관없이 주님을 바랄 수가 있습니까?
히브리서 9:24-26절입니다.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님은 그림자인 성소에 들어가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하늘 성소에 나아가신 것입니다. 그 성소에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함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10-12절을 봅니다. 구약의 제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제물 중에 제사장들이 먹을 수 없는 제물이 있습니다. 그 제물은 속죄제나 일년에 한번 드리는 대속죄일의 제물입니다. 속죄를 위하여 드린 제물은 그 가죽과 고기와 머리와 다리와 내장과 똥까지 몽땅 제단의 재를 버리는 곳에 가져다가 불살라 태우는 것입니다(레4:12, 16:27)
이 속죄를 위한 제물이 예루살렘 성문 밖에 버려져서 태워지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문 밖에 나가서 죽임 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구약의 제사에서 구약의 여러 가지 교훈들을 지키고자하는 사람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자기 몸을 드리심으로 거룩하게 하신 이 속죄의 혜택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는데 이것을 부인하는 자들은 이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에 참여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온전히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한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12절을 봅니다. 예수도 자기 피로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백성을 위한 영원한 속죄제사인 것입니다. 이것으로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들은 다 영원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림자요 모형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을 믿지 못하고 있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단번에 영원토록 거룩하게 하심을 믿으십니까? 아니면 그것만으로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래서 자꾸만 무엇을 보태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창조 속에서 만들어진 것들로 채워 넣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마저 흔들어버리시는 것입니다. 흔들리고 변동될 것들을 다 사라지게 하시고 흔들리지 아니하고 변동되지 아니할 영원하신 주님께로부터 온 은혜만 남기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원하신 분을 변동될 것을 목숨처럼 붙들고 있는 자들이 성문 밖으로 내어좇아 죽여 버렸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겠습니까? 잠시 있다가 멸망할 것들을 붙들고 있는 자들에 의하여 배척을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께서 이루어내신 영원하신 일만을 믿는 사람들도 역시 배척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어디로 가게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이 가신 성문 밖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여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붙들고 있습니까? 변동되고 사라질 것들을 붙들고 있으면 두렵습니다. 세상의 변화가 두려운 것입니다. 전쟁도 두렵고, 자연재해도 두렵고, 경제가 어려워지는 것도 두렵고, 자기의 명예나 재산이 날아가는 것도 두려운 것입니다. 온통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일생동안 죽음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결국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께서 은혜로 자기 백성들에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변동될 것과 상관없이 영원하신 주님을 믿고 찬송할 것입니다.
찬송가 133장 1절 가사입니다.
어저께나 오늘이나 아무 때든지 영원토록 변함없는 거룩한 말씀.
믿고 순종하는 이의 생명 되시며 한량없이 아름다운 기쁜 말일세.
어저께나 오늘이나 영원 무궁히 한결 같은 주 예수께 찬양 합시다.
세상 지나고 변할 찌라도 영원하신 주 예수 찬양 합시다.
히브리서 13:13-17 영구한 도성 2004. 11. 17.
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참과 거짓을 어떻게 구별하겠습니까? 그 기준은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60억 인구가 다 옳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참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참으로 간주하지 아니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이 세상이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 속아서 거짓을 참으로 여기고 사는 것임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건은 이 땅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원인이 하늘에 있는 사건입니다. 하늘에 있다는 말은 사람의 손에 의하여 좌우되지 아니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들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19:10-11절입니다. “10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줄 알지 못하느냐 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유대인들의 고소와 빌라도의 결정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라 위에서 허락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사건은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구속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12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 자기 피로서 자기 백성을 거룩케 한 것을 믿는 사람은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창세전에 예정을 입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영구한 도성이 이 땅에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영문 밖에서 죽임당한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영문 밖에서 죽임 당한 이유는 구약의 속죄 제물이 영문 밖에서 불살라지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서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다시 속죄를 위한 다른 제사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13절입니다. ‘그런즉’ 예수님께서 성문 밖으로 나갔기에 성도도 그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성문 밖으로 나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성문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묶여 있는 성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도가 왜 성문 밖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나라의 속담을 예로 들어봅시다. 사람이 태어나면 서울로 가고 말이 태어나면 제주도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고로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서울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울로 진출하지 못하면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조선시대부터 계속하여 굳어진 관습법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출세하려면 서울로 가야하고 서울에서 살더라도 사대문 안에 살아야지 성밖에 사는 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사는 것입니다. 서울 지향, 성문 안으로의 지향이 인간들의 보편적인 심성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문화가 어떻게 번성하게 됩니까? 가인과 그 후손들의 모습은 자기를 위하여 성을 쌓고 무기를 만들고 악기를 만든 것입니다. 도시문화의 발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의 모습은 나그네로 살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나그네요 외국인으로 살았습니다. 비록 예루살렘에 정착하게 되었지만 그 성읍이 영구한 성읍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눈에 보이는 도성을 지키기 위하여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도성을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향하여 이 성전을 헐라 내가 3일 만에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시자 그것을 사형시켜야 할 죄목으로 고소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건물 성전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다 무너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자기 몸의 성전 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지을 수도 없고 창조 안에 속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하고 창조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성 안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이 성전이 되시기 때문입니다(계21:22).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대입 수학능력시험을 쳤습니다. 자녀의 점수가 아주 높게 나왔다면 어디로 학교를 보내겠습니까? 서울로 보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저도 자녀가 대학을 간다면 점수가 안 되면 몰라도 점수만 되면 서울로 그것도 성안에 있는 학교로 보내고자 할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의 말씀은 찢어내고 싶은 부분이 아닙니까?
13-14절입니다. “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성문 안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보암직하게 살아야 성공이며 축복이라고 여기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말씀은 우리의 삶의 형태 전체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로 부름 받은 자는 성문 밖으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성도에게 덮어씌워지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장차 올 것을 찾도록 조치하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서신을 받는 사람들은 유대주의라는 안전한 도성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약의 규례로 돌아가서 자신들의 율법지킴의 자기 의에서 빠져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중세시대라면 교회가 구원을 준다는 거짓된 안전지대에서 빠져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인간의 윤리와 도덕, 지식과 과학의 힘으로 세우고자 하는 안전지대, 또는 종교성으로 만든 안전지대에서 빠져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다 자기들의 힘으로 이루고자 하는 성읍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8절에서 두 증인이 죽임당하는 성이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며 애굽이며 예수님께서 죽임 당하신 곳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지 예루살렘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배척하는 모든 곳이 다 소돔이며 애굽이며 예루살렘이 되는 곳입니다. 이런 성읍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18장에서는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8:1-5절입니다. “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1)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1)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바벨론이 성읍입니다. 이 성에서 자기 백성을 향하여 나오라고 합니다. 이 바벨론은 세상의 힘이 다 모이는 곳입니다. 이 바벨론의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은 바벨론이 무너질 때 통곡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성읍에서 믿음 때문에 핍박당한 자들은 그 성읍이 무너짐을 인하여 오히려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8:20절입니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이 바벨론은 큰 맷돌을 바다에 던지는 것처럼 다시는 보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떤 성읍에서 살고 있습니까?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성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성읍이 영원한 것처럼 살자고 합니다. 그 성읍 한가운데로 더욱 더 들어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내 백성아, 그곳에서 나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영구한 성읍이 아닙니다. 우리는 장차 나타날 영구한 도성을 바라고 찾는 자들입니다. 그 영구한 도성이란 영원하신 주님과 함께 사는 곳입니다.
15-16절입니다. 누가 이렇게 살수 있습니까?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들만이 그런 삶을 주신 주님을 찬양하며 사는 것입니다. 영구한 도성을 받았기에 장차 무너질 도성의 일들로 인하여 울고불고 하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찬미의 제사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변화무쌍한 무너질 도성의 일들이 아니라 영구한 도성을 바라보기에 세상의 조건과 상관없이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찬양은 증거의 입술입니다. 영원한 도성을 증거하는 입술, 그 증거의 입술이 찬미의 제사입니다. 이런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심으로 나타나는 제사입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사는 무너질 성읍을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에게는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시 비슷하게 선행을 행하고 나눠주는 일을 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영구한 도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장차 망할 이 세상의 영원을 위한 것이라면 다른 열매인 것입니다.
17절을 봅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인도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말씀을 증거하는 자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것은 어떤 경우나 무조건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증거하여야 합니까? 무너질 성이 아니라 영구한 성을 바라보게 하는 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목사든 전도사든 평신도이든 간에 복음을 증거하면 순종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들에게 맡겨진 영혼을 위하여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처럼 경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영구한 도성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누구에게 더 순종하고 복종을 하고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성읍, 장차 망할 성읍 안에서 성공하고 복 받는다는 이야기에는 목숨을 걸고 순종하며 복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흥회를 하면서 강사가 예언의 은사가 있다고 하면서 당신의 아들이 장차 의사가 되겠다고 말하니 그 부모가 너무 좋아서 감사헌금을 듬뿍하였다는 이야기를 바로 곁에서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장차 망합니다. 바벨론입니다. 그 성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증거하는 자들은 오히려 핍박을 받고 쫓겨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일들이 교회라고 모인 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쫓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오늘날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내 백성아, 그곳에서 나오너라! 이 곳은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자기의 힘이나 의로 만든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만든,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유익이 우리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히브리서 13:18-25 끝 인사 2004. 11. 24.
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19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24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찌어다.
오늘 말씀은 히브리서의 결론 부분입니다. 기도의 요청과 이 서신을 기록한 사람의 축복과 끝 인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밝히지 않는 것은 저자의 이름입니다. 자기와 함께 하는 디모데의 이름은 밝히고 있지만 자신의 이름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처음에 받는 사람들은 저자를 알 수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를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저자의 관심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간다고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말하자 세례요한은 자신은 쇠하여야 하고 예수님은 흥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자신이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것으로 기뻐하는 자들이 증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님을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를 한 번 더 전체적으로 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1:1-3절입니다. 옛적에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으나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로 말씀하시는 것이며 이 아들은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이 아들로 말미암아 만유를 지으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아들은 또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시고 보좌의 우편에 앉으신 분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증거입니까? 이 내용이 믿어지는 사람이라면 세상의 무엇이 두렵거나 부럽겠습니까?
이런 선포를 구약의 성경을 인용하면서 히브리서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천사보다 뛰어나심, 모세는 사환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의 아들이심, 구약의 제사장들은 자기들도 흠이 있기에 온전하고 영원한 속죄를 드릴 수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셔서 자신의 피로 단번에 영원히 온전한 제사를 드리심 등을 히브리서 전체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20-21절입니다. 히브리서의 결론 부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평강의 하나님께서 그 선하신 뜻이 자기 백성들에게 이루어지도록 이 서신의 기자가 축복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이 축복의 내용이며 기도의 제목인 것입니다. 우리는 축복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축복이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의 말씀을 봅니다.
18-19절입니다. 자기들을 위하여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와 서신서를 기록한 자들은 주의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기록한 사도들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에게 자기들을 위하여 기도를 요청하는 것은 자신의 연약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이 선하게 행하여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이루어내는 선이 아니라 선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니 그 뜻이 자기들에게 임한 것을 확신하기에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도의 부탁은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속히 돌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편지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나서 교제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많은 서신서에서 이러한 표현이 많이 있습니다. 너희를 만나보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제가 있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23-24절을 봅니다. 역시 교제의 내용입니다. 디모데가 오면 그와 함께 너희에게로 가서 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자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이탈리아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합니다. 문안이란 성도의 교제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성도의 문안이 있습니까? 성도가 모여서 교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임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20-21절입니다. 이 서신은 한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서신입니다. 그렇다면 시작할 때에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영광과 그 일하심이 결론부분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3절과 13:20-21절을 함께 보시면,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증거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새번역으로 봅니다. “20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려서, 양들의 위대한 목자가 되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화의 하나님께서, 21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는 바를 5)우리에게 이루어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영원무궁히 있기를 빕니다. 아멘.”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려서 양들의 위대한 목자가 되신 우리 주 예수라고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한 언약의 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떡을 주시면서 자신의 몸이라고 하셨고, 잔을 주시면서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하여 흘리는바 곧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막14:22-24).
히브리서 9장과 10장에서 이미 보았습니다만 구약의 언약도 피로 세운 언약입니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를 피를 가지고 우슬초로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리며 언약의 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즉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짐승의 피는 참 형상의 그림자이기에 온전한 속죄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온전한 속죄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렇게 언약의 피를 흘리심으로 양들의 큰 목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사망에서 이끌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목자에게 있는 양들은 사망마저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들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해 주시기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는 바를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여기서 축복하는 내용, 즉 기도의 내용을 보시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도록 빌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잘 분별하여야 합니다. 사람들이 소원하고 이루고자 하는 것들은 욕망입니다. 그러한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축복의 내용이 귀에 들리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영이 임한 자들에게는 이 축복의 내용이 참된 복임을 알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 복이란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서 성도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기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갈 길을 알지 못하고 각자 제 길로 간 길 잃은 양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자들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였습니다. 이사야 53장 6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참된 목자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참된 목자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에서 인도자란 참된 목자를 증거 하는 인도자라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피 흘린 자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들을 자기 소유화하면 그는 양의 도둑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를 바라봅니까? 누구의 음성을 듣습니까?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그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그 목자의 인도를 받아 사는 것이 영원한 복입니다. 그 인도를 받아 사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얼마나 완벽하고 온전한지 히브리서의 마지막 인사말인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들에게 있을 찌어다! 라고 합니다. 이 은혜가 무엇인지 한 번 더 살펴보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히브리서 2:9절입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2)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은혜란 죽음의 고난을 대신 받게 하신 것이 은혜입니다. 누가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을 수가 있습니까?
히브리서 4:15-16절입니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죄는 없으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날마다 때마다 받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28-29절입니다.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심판은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즉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무시하는 것은 자기 의로 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히브리서 12:15절입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히브리서 10:29절과 연결해 보아도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의 행위가 얼마나 완벽해야 되는가를 가지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은혜를 부인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28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2)은혜를 3)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기에 은혜를 받자는 것입니다. 은혜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자가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의 나라입니다. 히브리서 13:9절입니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우리의 마음을 은혜로 굳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결론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그를 믿는 자는 한번의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그 일을 십자가에서 자기피로 이루시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완벽하게 중보하고 계십니다. 그 은혜의 바다 속에서 자기의 행함이 얼마나 대수롭지 않은지를 아시고, 그 은혜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아 가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들에게 있을 찌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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