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2
창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31. 누구의 영광을 구하는가?
32. 너희는 알지 못하나
33. 생수의 강
34. 고소
35.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36. 빛과 어두움
37. 죄의 권세
38. 자유
39. 자존심
40. 실로암
41. 예수는 그리스도
42. 역설
43. 새가정
44. 양과 목자
45. 양의 문
46. 선한 목자
47. 목숨을 버릴 권세
48. 빼앗을 자가 없다
49. 그 일은 믿으라
50. 하나님의 영광
51. 부활과 생명
52. 예수님의 눈물
53. 나사로야 나오너라
54. 진리와 현실
55. 예수님의 죽으심
56. 예루살렘 입성
57. 나귀 새끼를 타신 왕
58. 주님을 섬기려면
59. 인자가 들려야
60. 믿지 못하는 이유
요한복음 7:14-24 누구의 영광을 구하는가? 2000. 2. 13.
요즈음 텔레비전에서 학자로서 뜬 사람이 있습니다. 김용옥씨입니다. 강의를 할 때 거칠게 말하고 욕설과 반말이 예사로 나오며 정치 종교 교육 사회 전반에 무차별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기가 있는 것은 이 사람의 추구하는 바가 대한민국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을 통하여 세계 인류의 새로운 행복의 길을 만들어 내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저력이 우리에게 숨어 있는 것이니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젊은이를 바르게 교육하여 위대한 나라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그냥 구호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학문적 바탕 위에서 하고 있기에 더욱 인기를 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철저한 학문적 실력이 있고 또 우리나라의 영광을 말하니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왜 이사람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예수님과 비교를 해보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을 보는 사람들의 자세가 어떠한지를 보면 오늘 이 시대와 요구하는 자가 꼭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약 2,000년의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바라는 바는 그 때나 지금이나 꼭 같다는 것입니다.
14-15절을 봅니다. 명절 중간에 어떤 명절입니까? 초막절입니다. 이 초막절에 예수님이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기는 것입니다. 아니 배우지도 아니한 자가 어찌 가르치느냐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신학교도 안나온 사람이 어떻게 성경을 가르치느냐는 것이지요. 왜 이런 말이 나오는가 하면 성전에서 성경을 가르치실 터인데 그 당시에는 무슨 성경만 있습니까? 구약만 있지요.
구약은 무슨 글로 기록되어 있습니까? 히브리어입니다. 몇 곳에는 아람어가 있습니다만 거의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당시 백성들이 쓰는 글은 아람어입니다. 아람어란 바벨론의 언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70년 동안 포로로 잡혀 가서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대국의 언어를 배워서 사용하니 백성들은 아람어를 생활언어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달리다굼’이니 ‘에바다’하는 말이 아람어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려면 히브리어를 따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의 문하에서 배웠는가 하는 전통이 아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나는 가말리엘 문하이다, 나는 누구의 문하이다 하면서 자기의 전통들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특별한 문하에서 학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을 가르치니 도대체 어디서 배워서 가르치는가, 어느 신학교 출신인가 하면서 의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기가 없지요. 학문적 바탕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가르치는데 권위가 있으니 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렇게 가르치면서 사람들의 영광을 구한다면 그것이 별 문제가 안 되는데 오히려 무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까?
7:7절에서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학문적 실력을 갖추고 사람들의 영광을 구하면 인기가 있을 텐데 예수님은 어디서 배운지도 모르고 더더구나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고 하니 사람들이 얼마나 화가 났으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겠습니까?
이런 싸움이 왜 일어납니까? 율법에 대한 해석의 문제입니다.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와 예수님의 태도가 다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자기의 영광거리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정신과 그 뜻은 모르고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켜낸다는 자기들의 자부심과 자기 영광만 가득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자기 영광을 구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이 16-18절입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이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그 교훈이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하나님께로 온 것인지 알고서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을 구하기에 아무리 율법을 지켜도 그것은 헛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참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가지고 한쪽은 지켜서, 말로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면서 자기의 영광을 챙기는 것이고, 참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오늘 우리에게 적용을 해보고자 합니다. 목사치고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일한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한다 하고 또 교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가 이것도 저것도 하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는 일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아니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는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분별을 하는 것 자체를 터부시해 왔기에 우리는 맹목적으로 목사가 하라는 일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되겠지, 또는 교회에서 하는 일이니, 당회에서 결정된 일이니, 노회와 총회에서 결정된 일이니 하나님께 영광이 될거야, 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미덕이고 신앙 좋은 모습으로 알아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리를 분별치 못하고 맹목적으로 따라 가는 것입니다. 과연 말씀이 그러한가 하고서 따져 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경고하기를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고 온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노골적인 이단이야 분별이 쉽지요. 그러나 가장 신실하고 존경받는 모습으로 위장되어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죄 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영광을 구하는 자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9:16-22절. “봉독” 율법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는 사람이 무엇을 포기 못합니까?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의 문자는 지킨다고 하는데 결국 바로 앞에 계시는 영생주시는 분을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왜 지켰는지가 예수님 앞에서 들통이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니 근심하며 돌아 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그러면 누가 들어갑니까? 율법을 다 지켰다는 사람도 결국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여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갔는데 누가 천국에 갑니까?
26절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할 수 있느니라” 한곳 더 보기를 원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자기 영광, 자기 옳게 보임을 위하여 율법을 지키고 있는지를 봅니다. 누가복음 10:25-37절입니다. “봉독”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내용이 나온 이유는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테스트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자기는 이미 알고 있는 문제를 질문하는 것 자체가 자기를 옳게 보이고 또한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을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율법 선생이라면 그 당시에 아주 존경받는 사람이고 성경의 율법을 다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마음을 모르시겠습니까? 누구 앞에 테스트를 합니까? 그러니 예수님이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너는 어떻게 이해하는가? 이 질문에 아주 정답을 말합니다.
27절.(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옳다, 그렇게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런데 이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도 역시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질문입니다. 그러니 자기는 하나님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한다는 것이지요. 그 질문에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내용이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독립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잘난 체 하는 율법사에게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비유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자, 라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율법사가 평소에 자기는 불쌍한 이웃을 돕고 구제하고 있으니 자기는 영생 얻은 사람임을 보이고자 질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이웃이란 자비를 베푼 사람이 이웃입니다, 라는 대답을 율법사에게서 받아 냅니다. 그러면 강도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푼 자가 누구란 말입니까? 그 사마리아인이 누구란 말입니까?
예수님이심을 아시겠습니까? 그러니 그 율법사는 율법 선생이 된 만큼 율법의 핵심도 너무나 잘 알고, 율법을 준수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제를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고 있었기에 자기는 율법적으로 옳다고 하고서 질문을 하였지만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러 오신 예수님은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율법사가 율법의 핵심을 알고 그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는데도 결국 누구는 사랑 안한 것입니까? 이웃으로 오신 예수님은 사랑 안한 것입니다.
한 사람 더 예를 들자면 바울은 자기를 소개하면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바리새파요, 가말리엘 문하로서 율법의 핵심을 알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에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핍박합니까?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율법을 지킨다는 인간들이 그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이 결국 자기의 영광을 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것입니다.
다시 요한복음 7장에서 율법의 논쟁을 봅니다. 19절입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었는데 너희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우리가 언제 너를 죽이려고 하느냐, 네가 귀신 들렸느냐고 합니다. 이미 죽이려고 하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모세의 율법을 지키려고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하지 않느냐? 할례는 유대인으로 아주 큰일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법을 지키는 그 할례-물론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신 것이지만-모세의 율법에 주어져 있기에 그 할례를 난지 8일 만에 하는데 8일째가 안식일이면 안식일이라도 그를 할례를 행하는데 내가 안식일에 38년 동안이나 병에 붙들려 있던 자에게 전신을 건강케 한 일로 왜 노여워하는가? 할례를 안식일에 행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표시하는 것이라면 내가 안식일에 아브라함의 자손을 온전케 한 것이 왜 잘못인가? 외모로 판단치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지킨다는 사람들의 속이 다 들통 난 것입니다. 결국 율법을 지킨다면서 자기들의 영광을 구하였지 율법을 주신 분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이 예수님 앞에서 들통이 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이고 결국 죽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인간의 모든 행함이 부정되는 것입니다. 단지 착한 일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셨다는 그 율법을 스스로 지킨다는 유대인들조차 율법을 주신 분을 못 알아본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죄 된 모습입니다. 자기 영광을 챙기는 것, 그리하여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죄 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인을 구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 영광을 위하여 율법을 지키신 것이 아니라, 보내신 분의 영광을 위하여 율법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다 지킴으로 영생에 이를 자는, 자신 있게 율법을 다 지켰다는 유대인들은 근본적으로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자기의 영광을 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대강령인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사 그 율법을 온전히 이루심으로 의를 만들어 내신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신 그 이루심이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그 의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입고 사심을 아시고 이제 나의 영광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7:25-36 너희는 알지 못하나 2000. 2. 20.
박세리, 박찬호를 아십니까? 국무총리는 몰라도 이 사람은 알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우리는 아는데 그 사람들이 우리를 압니까? 모르지요. 우리가 그들을 아는 것은 정보를 아는 것입니다. 그들의 출신과 가정, 부모, 외모를 다 압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을 안다고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모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으로 큰일을 이루어 내어도 그날에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노라고 하시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분명히 나는 주님을 위한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 될 수 있고 심지어 주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정반대의 길을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데도 어중간하게 아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반풍수 집안 망한다든가 돌팔이가 사람 잡는다는 말처럼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바르게 알지 못함으로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꼴이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30년 동안 절에 다니던 사람이 어느날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년 만에 제법 큰 교회에서 권사가 되었답니다. 아무도 이분의 정성을 따라 올수가 없는 것이지요. 절에 가는 그 정성으로 교회를 나오니 교회에서 5년 만에 권사가 되었는데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분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같은 교회의 권사님과 예배당의 강단을 청소할 때 그 절에 다니던 사람이 양말을 안 신고 와서 강단에 올라가 청소를 하면서 안절부절 못하는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을 모시는 제단으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다행히 옆에 있는 권사님이 그런 곳이 아니다, 이것은 그냥 나무일뿐이라고 말을 하여도 쩔쩔매는 것이랍니다. 우리 안에 이러한 생각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느 특정 건물에 계신 것처럼 생각하면 그곳이 우상을 모신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하나님이 거하시겠습니까? 솔로몬도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서도 그 곳에 하나님을 모실 수 없음을 말하는데 어떻게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일으키리라 하신 주님이 성전이며 주님을 모신 성도가 성전인데 건물이 성전으로 둔갑을 한단 말입니까? 그러니 예배당의 건물을 성전이라고 하였으니 그것도 제일 높은 강단을 청소하는데 함부로 청소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정성이 주님을 바로 알고 주님을 바르게 섬기는 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것은 가르치는 자의 책임이 큽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그래도 하나님을 좀 안다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목사이지요. 그러니 목사가 제일 책임이 큽니다. 목사는 자기의 확신을 따라 하나님이 이러합니다, 라고 큰소리를 치고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입니다, 라고 하였을 지라도 그게 아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를 조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몇 곳만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호세아 4:6절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6:6절입니다. “제사보다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함” 마태복음 9:13절입니다. “호세아를 인용-주님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배우라” 요한복음 17:3절입니다. 참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가 증명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르게 섬기지를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인간을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얼마나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방인이 모르는 것이야 우리가 그렇다고 보아도 유대인 그것도 율법학자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보고자 합니다.
이 사람을 왜 안 잡아가느냐? 이 사람을 우리가 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병폐가 누구에게 가장 심각하게 드러나는가 하면 신앙의 연륜이 오래된 사람, 열심인 사람이 더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무언가 안다는 것입니다. 장로, 권사가 더하고 목사는 중증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대부분이 그러합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목사가 엉터리로 가르칠 때 목사님 그것이 아닌 것 같은데요, 라고 하면 인정합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뭘 좀 안다는 것이 병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어느 집 누구 아들인지 알고 그 형제들도 안다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성경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도 알고 메시아가 어떤 모습으로 와야 하는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안다고 하는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모르는 것이 나을 뻔 하였습니다.
28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안다고 하지만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이 참되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나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모른다, 이 말에 뭘 좀 안다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잘 안다고 여긴 유대인들이 얼마나 기분 나쁘게 들리겠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화가 났으면 당장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니기에 손을 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리 중에 믿는 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잘 모르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자라신 곳에서는 더욱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표적을 보고서 메시아가 와도 이만한 일을 하겠느냐며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나중에 검정을 받아야 하는데 이러한 무리들이 나중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함께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무리란 조금의 구별은 필요합니다. 예수님과 한 동네에서 살지 않은 사람이거나 또는 바리새인이나 유대인의 지도자나 제사장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다는 사람들이 더욱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32절을 봅니다. 예수님을 잡으려한 자들이 성경을 잘 안다는 바리새인, 대제사장들 즉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 한 것은 유대인 그것도 하나님을 잘 안다는 이들의 손에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하나님을 안다는 그 하나님이 얼마나 엉터리인가, 이들의 배후를 누가 장악하고 있는 가를 예수님이 다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잡으러 온 그들에게 내가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면 너희가 나를 만나지도 못할 것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나 있는 곳에도 오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십자가와 부활, 승천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르기에 이 사람이 어디로 가는데 우리가 저를 만나지도 못하고 가는 곳도 알지 못한다 말하는가?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에게로 가려는가? 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니 이 말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는 하나님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현실입니다. 이미 다른 권세가 붙들고 있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니 사람들이 기다린 메시아와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구하러 온 메시아라면 사람보다 뛰어난 특별한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보통사람보다 더 낮은 모습으로 오셨으니 어찌 이런 자가 우리의 메시아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거부감이 드는 것입니다.
낮아지신 하나님, 그렇게 낮아지신 하나님을 버리는 인간을 보면서 인간의 죄가 무언지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땅히 종의 자리에 서야 하는데 오히려 왕이 되고자 하는 죄의 속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는 십자가의 길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시는 그 길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20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하나님도 모르고 가는 길도 모르는 것이 유대인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과 부활, 승천으로 성령을 보내시는 이 내용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야만 하나님도 알고 예수님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은 세상이 능히 저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받지 못한다는 것은 세상의 어떠한 방법이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를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안다는 것입니다. 너희란 일차적으로 제자들입니다. 넓게 보면 택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택하신 자만이 성령이 임하게 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어떠한 종교라는 것과 단절되는 것입니다.
윤리 도덕적인 종교이든 초월을 말하든 간에 세상의 것은 인간에게서 출발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종교화되는 길은 사람의 일로 만들어 버리면 종교화되어 지는 것입니다. 종교와 복음의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받지 못하는 성령,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이미 사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알지도, 받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령이 임한 자만이 아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유대인도 아닙니다. 완전한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독선이다, 편협 되다, 하는 그런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예수님이 옳다고 따라 나선 것입니까? 그것은 세상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육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육이란 우리의 정신과 노력과 애씀이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처음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그 어떤 자질로도 안 되는데 오직 주의 긍휼로 인하여 택함을 입었기에 성령을 보내셔서 살려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알고 죄가 무엇인지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하심으로 된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성경을 통하여 더욱 주님의 그 일하심의 깊이를 알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이 일이 얼마나 강력하게 능력으로 역사하신지를 제대로 알아감으로 주님의 그 크고 깊으신 은혜와 경륜을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7:37-53 생수의 강 2000. 2. 27.
이 주간의 성경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찢으라.’이지요. 이 말씀은 요엘서 2:13절의 말씀인데 마음을 찢으라는 말이 무슨 내용입니까? 12절에 보면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를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회개입니까? 옷을 찢는 회개가 아니라 마음을 찢는 회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난감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찢는가?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은 모두가 할례를 행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역시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고 신명기 10:16절에서 말씀합니다. 몸의 할례는 누구나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구약에서 마음의 할례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옷을 찢거나 몸의 할례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할례나 마음을 찢는 일이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요엘서에서 말한 마음을 찢는다는 말이 무엇인지 요엘서를 봅시다. 요엘서 2:12-20절. “봉독” 회개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긍휼히 여기시리라. 그 중심이 뜨거워져서 적을 물리치시겠으며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큰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큰일이 무엇인지 28-32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의 신을 부어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을 찢는 일은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봅니다. 요한복음 7:37-39절입니다. 명절 끝날, 무슨 명절입니까? 초막절이지요. 이 끝 날에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생수의 강이 그 배에서 흘러 나리라는 말씀도 사람으로 이해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마치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마음을 찢으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서 그의 생수를 마실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 이 말씀은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면 그 안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수의 강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당시의 사람들이 모르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논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메시아는 다윗의 씨로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였는데 이 사람이 갈릴리 출신이라면 틀리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41-42절). 그러나 예수님이 어디에서 나셨습니까? 베들레헴에서 나셨지요. 그런데 자라기를 갈릴리에서 자랐으니 이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성령이 임하시지 않고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종교와 복음의 단절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란 사람이 깨우침을 얻는다든가, 아니면 지극한 정성을 바침으로 어떠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음을 먼저 전제합니다. 그러니 거듭나라는 말씀이나, 위로부터 나야 된다는 말씀이 사람이 스스로 날 수 없음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조차 마음의 할례나 마음을 찢는 일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령이 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여야 한다고 말하니 사람들은 또다시 성령 받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가 성령을 줄 수가 있습니까? 그러한 것이 다 종교적인 술책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일하심은 성령이 임의대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성부와 성자의 뜻을 따라 일하십니다. 이 말은 사람의 뜻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자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나의 정성이나 노력이나 애씀으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임하여야 생수의 강이 흐르게 되고 목마르지 아니하는데 이 일을 39절에서 무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성령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어떤 일을 이루어 놓으신 결과인지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예배하고 감사하고 연보를 하는 것이 조건적이거나 거래가 되는 것입니다. 나 이런 것을 하였으니 하나님 복 주십시오, 라는 것은 아직도 복음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종교적인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지키라는 날과 달과 절기들이 하나님이 무슨 일을 이루어 놓으셨는지 그것을 알고 기억하며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받아 누리는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있는 절기가 초막절인데 이 초막절은 어디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까? 유월절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의 절기들이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그 일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복을 받았기에 지키는 것입니다. (십계명이 출애굽이후)
지금 우리의 예배와 감사와 찬송을 하는 모든 것도 이미 주님께로부터 모든 복을 받았기(엡1장)에 하는 것이지 내가 이것을 함으로 다른 복을 받아 낸다는 식이 되면 그것은 하나님을 상대로 장사하고자 하는 종교적인 거래가 됩니다. 이런 식으로 나가게 되면 반드시 나오는 말이 일단 바쳐봐, 복 주나 안주나, 일단 기도해봐, 응답하나 안하나, 자기가 무엇을 먼저 드려서 갚음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무시하는 인간의 죄라는 것입니다.(롬11:35-36-누가 먼저 주께 드려서 갚음을..)
또 한 단계 더 나아가면 그래 안다,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이제 그 은혜를 갚아 내어야지, 그래서 많이 헌신 봉사 충성하는 것이야, 그래서 천국 갈 때 떳떳하게 나아가고자 하는 자세도 자존심의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감사와 예배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일하심이 얼마나 크신지를 제대로 알아감으로 나타나는 감사와 감격의 찬송인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가 바로 성령이 임하신 결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말씀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성령을 받게 되면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한 생수의 강이 어떻게 흘러넘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성령이 임하신다는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이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그 은혜가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이제 하나님께서 왕의 자리에 앉히심으로 모든 만물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신 왕으로의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종의 모습으로 낮아지신 분이 십자가로 승리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보좌에 앉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33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이 말씀은 오순절 성령이 임하신 사건을 가지고 베드로가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신 것을 요엘서 2장에서 말일에 만민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는 그 내용의 성취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큰일입니다. 그러니 오순절 성령이 임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으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왕의 자리에 앉으셔서 그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아버지께 받아서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4:8절을 봅니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셔서 왕의 자리에 등극하신 것은 우리가 마귀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로 승리하셔서 우리를 다시 사로잡아 내셔서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님의 엄청난 일하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죄인임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는 자기를 의뢰하지 아니하고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만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기적이며 복인지를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이 임하시면 목마르지 아니한다는데 우리는 지금 목마르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그리하면 생수의 강이 그 믿는 자의 배에서 흘러 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여러분은 목마름이 없습니까? 갈증이 없습니까? 정말 예수님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러면 우리가 도대체 성령을 받은 것입니까? 못 받은 것입니까?
60년, 70년대에 민주화 운동하는 사람들의 노래 가운데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노래가 있지요. 얼마나 민주화를 갈망하였으면 타는 목마름으로, 라고 외쳤겠습니까? 이 세대를 386세대라고 하는데 이들이 그렇게 갈급해한 민주화가 왔건만 또다시 타는 목마름으로 공천을 받기 위하여 안달을 하는 것입니다. 끝없이 타는 목마름으로 사는 것이지요. 이러한 목마름이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이럴까요?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저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지금부터 약 8년 전 신학교 다닐 때의 일입니다. 그때 몇 사람이 함께 책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늘 하는 말이 왜 목마른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분명히 예수를 믿으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리라는 말씀이 있는데 아직 목이 마르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세상에 대한 목마름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신학생이라도 세상의 성공한 목회자를 자기의 목표로 삼고 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러한 고민이 아닙니다. 참 많이 고민하다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대원 진학을 하느라고 바쁜데 신대원을 가는 것이 아니라 필리핀에 선교사로 가는 것입니다.
어떠한 교단의 지원이나 교회의 지원도 없이 떠난 것입니다. 물론 아는 몇몇 사람들이 지원을 하였지만 참으로 열심히 하였습니다. 침술도 배우고, 가서는 철거민들이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땅에서 사는 마을이니 얼마나 열악한 환경입니까? 그곳에서 기도하고 전도하고 침으로 치료도 하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치료가 되고 사람들이 모여 들고 그래서 100명도 넘게 교회로 모이고 예배당도 신축을 하였습니다. 5년 동안에.
그런데 간간히 나오면 함께 교제를 하였는데 그렇게 저돌적으로 들어간 것도 사실은 목마름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이렇게 밋밋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중에 이 사람은 성경을 공부하고 필리핀에서 신대원을 마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함께 복음의 교제를 나누기 시작하고 그리고서 자기의 교회를 돌보는 것 중에 인위적인 부분을 포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교인이 60여명으로 줄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하여 복음에 관하여 다시 점검을 하고서 현지인에게 그 교회를 맡기고 이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신대원을 마치고 어는 교회 부교역자로 있다가 담임 목사님께 전도하다가 함께 하지 못 하겠다 하여 지금은 섬에 조그마한 교회에 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전혀 목마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추구할 때에 계속되던 그 목마름이 이제 섬에 가 있어도 아무른 갈급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만으로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이야기가 얼마나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의 그 무엇에 대하여 갈급해 하지 않는 것입니다. 형편이 어떻든 간에 자족하기를 배운 것은 생수의 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생명에 대한 갈급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미 생명을 얻었기에 영생을 얻었기에 생수의 강을 마셔야만 갈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수가 얼마나 풍성한지 에스겔서 47장에 그 생명수가 강이 되어 흐릅니다. 이 생수의 강이 가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생수의 강이 우리에게 제대로 흐르는지를 점검하시고 이 생수의 강을 지금 마시는 자만이 요한계시록 22장의 생수의 강에 이를 것입니다. (끝으로 고로쇠나무의 물 마시는 이야기-생수의 강 때문에 다른 것에 목마르지 않는 복을 누림.)
요한복음 8:1-11 고소(告訴) 2000. 3. 5.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잘 알고 사용하는 말입니다.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가 하면 ‘털어서 먼지 나지 않을 사람이 없는데 누가 누구를 책망할 수 있는가’ 하는 말로 사용합니다. 자기의 잘못과 실수와 범죄를 정당화하는 일에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전인수격인 적용인 것입니다. 우리도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빌4:13. 능력-적극적 사고방식)
오늘 본문의 배경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끌려온 한 여인에 대한 고발로 시작이 됩니다. 간음을 하였다면 남녀가 함께 끌려 와야 하는데 여인만 끌려 온 것을 보면 남자는 도망을 간 모양입니다. 그러니 여인만 끌려 왔다고 하여 남자는 안심하여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결론적이긴 하지만 고소당하여 끌려온 이 여인은 용서의 복을 받았지만, 끌려오지 않고 도망감으로 고소당하지 않은 남자는 그 죄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고소당하지 않는다고 좋아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재판정에 끌고 가서 고소를 하면 되는데 왜 예수님께 끌고 온 것입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을 함정에 몰아넣기 위한 것입니다.
8:3-6절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인을 끌고 와서는 예수님의 판결을 묻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대로 하면 반드시 돌로 쳐 죽여야 하는 죄입니다. 반드시 죽일찌니라는 말씀이 20번이나 나오고 그냥 죽일찌라는 말은 수도 없이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비와 어미를 치는 자를 반드시 죽이라. 저주하는 자도 반드시 죽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부모는 하나님의 언약을 전달하는 자의 기능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죽일 일들 중에 간음하는 남녀도 반드시 죽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의 해석을 예수님께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죄인을 구하러 오셨다고 하시고 사랑을 말씀하시는데 모세의 율법은 쳐 죽이라는 이 말씀을 어기면 당장 모세 율법을 어긴 것이 되므로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찾고자 이 여인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러한 고소는 참소입니다. 억울한 일이 있어서 재판관에게 고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소라는 말에는 억울하지 않는데 헐뜯기 위한 고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라는 말이 하소연하다, 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헐뜯다, 라는 뜻도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헐뜯기 위한 고소입니다. 이러한 고소를 누가 잘합니까? 정치판에서 잘 하지요. 그런데 세상의 법정에 고소를 하는 일이 교회의 정치판에서도 그대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 법정에 설 일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교회안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에 고발하는 것은 이미 주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고소를 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헐뜯기 위한 고소거리를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면적인 행위는 자기들이 율법을 지킨다는 미명하에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미 그들을 장악하고 있는 자가 더 큰 고소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을 조종하고 있는 자가 바로 참소자라는 사단입니다. 사단이라는 말이 참소자라는 뜻입니다. 이 참소자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12:7-12절을 봅니다. “봉독” 사단이란 하늘의 천사가 반역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하늘에서 전쟁이 일어나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즉 천사들이 사단을 물리친 것입니다. 그리하여 쫓겨나는데 어디로 쫓겨납니까? 땅으로 쫓겨나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이 바로 밤낮 참소하는 자입니다. 참소라는 말이 바로 헐뜯기 위하여 고소하고 고발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이 참소자의 지령과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성도안의 문제로 고발을 일삼는 자는 이미 참소자의 지배아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 차라리 손해를 보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나중에 천사까지 심판을 한다고 합니다. 물론 타락한 천사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성도의 영광이란 얼마나 엄청나고 큰지를 알아야 합니다(고전6:1-3).
표면적으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으로 예수님을 옳아 메려고 하는 것이지만 그 배후에는 더 큰 세력의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사단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모순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발에 예수님이 어떻게 대처하시는 것입니까?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몸을 굽히셔서 땅에다 무엇을 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땅에 쓰신 내용이 무엇일까요? 아마 율법을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율법을 가지고 간음한 여인을 고소하니 너희의 율법 위반이 얼마나 되는가를 땅에다 기록함으로 그들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새 번역에서 이 내용을 각주 달기를 고대의 다른 번역에서 ‘그들 각자의 죄목을 쓰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손에 돌을 들고서 곧 치려고 하는 상황에서 예수님이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땅에 굽혀 무엇을 쓰시니 사람들이 다 그 글을 주목하여 보는 것이지요. 그 글을 쓰시고는 일어서셔서 둘러선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것입니다.이 말씀을 하시고 또 다시 예수님이 땅에 무엇을 쓰시는 것입니다. 두 번에 걸쳐 무엇을 쓰신 것입니다. 그 내용이 율법의 내용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행위가 모두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일대기처럼 기록되어 있는 계시의 내용입니다만 요한복음은 일대기 식으로 기록되지 않고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 행동 하나하나까지 다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기에 더욱 깊은 뜻이 있고 어려운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두 번 글을 쓰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구약의 율법을 받을 때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출애굽기의 내용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친히 돌 판에 쓰신 십계명을 가지고 내려 올 때 밑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자기들의 하나님이라고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돌판의 말씀을 그대로 가지고 내려오면 그들이 다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처음 돌판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두 번째 돌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두 번 쓰신 것이지요. 두 번째 돌판을 또 쓰신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취소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첫 번째 돌판과 두 번째 돌판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중재가 있습니다. 범죄 한 이들을 다 죽여 버리겠다, 하나님의 법의 엄격성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그렇게 하시면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죽이셨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들을 용서하소서, 아니면 저의 이름도 생명책에서 지워 주소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보 이후에 다시 돌판을 받습니다. 이제는 모세가 돌판을 만들어 가지고 가서 글은 하나님이 친히 쓰시는 것입니다. 처음 돌판이 깨어졌다고 그것을 폐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공의는 그대로 시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번째 돌판을 어디에 둡니까?
법궤에 담아 둡니다. 법궤의 뚜껑을 속죄소라고 합니다. 여기에 일년에 대제사장이 한번씩 피를 들고 가서 바른 곳이 법궤의 뚜껑입니다. 전에 복음의 맥을 공부할 때 들으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법이 그대로 노출되면 다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법궤에 담기고 그 법궤의 뚜껑에 피가 발라짐으로 속죄를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속죄소의 뚜껑을 다른 말로 ‘시은좌’라고 합니다. 은혜가 베풀어지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 고발당하면 살 자가 없습니다. 그러니 누군가 대신 희생을 당하여야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의의 세워짐과 동시에 은혜가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지금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보고자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율법을 가지고 간음한 여인을 고발합니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여야 하는 죄입니다. 이러한 고발 앞에 예수님이 율법을 쓰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목을 기록하고 있으니 그들이 그것을 보게 되고 예수님이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 앞에, 다 도망갑니다. 자기들도 다 죄인이며 간음한 여인보다 더 나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으로 정당하고 의로울 자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 앞에서 모두가 범죄한 것입니다. 하나를 어기면 율법 전체를 범한 것입니다. 이 저주 앞에 여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직면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자리에 직면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인 됨을 무시하고 자기가 주인인양 살아온 모든 것이 다 죄입니다. 이 여인처럼 간음을 하지 않았습니까? 마음속에 음욕을 품은 것이 이미 간음 하였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간음하는 여인들이여 세상을 사랑함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합니다.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모두 간음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 행함을 의지하는 것도 역시 간음입니다. 이러한 죄로 인하여 우리는 모두 돌에 맞아 죽어도 마땅한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저주의 중간에 예수님이 묻고 있습니다. 누가 너를 정죄하느냐?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게 됩니까? 이 여인을 용서하게 되면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 저주를 예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도 나타내시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란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의 지혜와 능력을 제대로 아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신앙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자세는 예수님 앞에 있는 이 여인의 자세여야 합니다. 이미 돌에 맞아 죽어야 마땅한 죄인이 주님의 그 죄를 담당하심으로 여인이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죄의 고발을 받음으로 오히려 사함을 얻은 것입니다. 잡히지 않고 도망간 남자나, 돌로 치려고 둘러선 사람들이나 그들의 죄가 노출되자 도망가 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 속에 숨어 있는 교묘한 죄들이 말씀 앞에 노출되어 지면 도망가시겠습니까? 도망가면 잠시 사는 것 같지만 영원히 죽는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의 책망을 받고서 주님께로 피하여 들어가야 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노라는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친히 저주를 받으사, 십자가를 지신 그 주님을 더욱 사랑하시고 더 많이 알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으리라(롬8:1-2)
요한복음 8:1-11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2000. 3. 12.
지난주에 간음한 여인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임을 보았습니다. 돌로 쳐 죽임당하여야 하는 그 죄를 예수님이 중간에서 그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인을 치려든 돌을 율법의 책망 앞에서 잠시 놓았지만 그러나 또다시 더 힘 있게 돌을 움켜쥐고 던져서 죽인 자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여인은 정죄함을 받지 않고 용서를 받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서 율법의 저주를 자기의 온몸으로 받아 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무서움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결코 용서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를 십자가를 보면서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면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메달아 죽이시기까지 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단지 감상적으로 생각할 그런 십자가가 아닙니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얼마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미워하시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향하여 무어라고 하십니까? 용서하라, 사랑하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중에서 만약 죄가 없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그 여인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없는 분,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돌로 칠 자격이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으되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히4:15).
그러니 주님께서 돌로 치셔야 하시는데 안치신 것은 그 돌 맞아야 마땅한 여인의 죄를 죄 없는 자신이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정죄함을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0-13절을 봅니다. “봉독”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이러한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았습니다. 이러한 대신 저주받으심으로 통하여 여인은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발당한 것이 오히려 사는 길이었습니다. 죄인임을 아는 것이 복 있는 자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니 어떠한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자 하는 것이고 어떠한 행함이 있을 때 그것이 율법이든, 아니면 교회에서 정하여 주는 몇 가지의 내용이든지 그것을 지키면 의인이 된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마치 여인의 주변에 둘러선 사람들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14절에서 이는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심은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인에게도 미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시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자에게, 용서를 받은 자에게 주님께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는 정리가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정죄를 받지 않고 용서를 받았는데 다시 죄를 지으면 용서가 취소되는 것입니까? 예수 믿으면 죄가 용서받는다는데,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또 다시 죄를 우리가 짓는데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요한일서 3:9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이 말씀의 뜻을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간음한 이 여인이 용서를 받은 것은 율법의 행함입니까? 예수님의 은혜입니까? 은혜입니다. 그러면 이 은혜를 입은 자가 이제 무엇을 하면 죄가 되는 것입니까? 은혜를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죄가 됩니다. 자신이 용서받은 근거가 자기의 행함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졌다면 그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8:32절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진리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자유케 된다는 것은 이제 내 마음대로 해도 되겠네,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진리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들으면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다가 어떻게 나가는가 하면 어느 정도 복음의 정보가 들어오면 대부분 하는 말이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주일 성수, 십일조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면 그러면 내 마음대로 해도 되겠네, 그러는 것입니다. 이것이 벌써 우리의 관심사가 주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몸 하나 챙기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이 말씀을 이 간음한 여인에게 적용을 합니다. 곧 우리에게도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용서를 받았으니 내가 마음대로 하자는 것이 아니라 전에는 율법아래 갇혀 있었고 죄 아래 갇혀 있었는데 이제는 진리의 종이 되었다는 것이 자유라는 말입니다. 율법과 상관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자유를 얻은 것은 이제는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6:18절을 봅니다.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느니라.” 자유라는 말은 율법아래 갇혔음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라면 율법이라는 말 대신에 죄 아래 갇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용서하고 자유를 주셨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해도 되겠네,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종이 되는 것입니까? 의의 종이 되는 것, 진리의 종이 되는 것, 예수님의 종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이제 용서 받았으니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네, 죄 지어도 상관없구나, 하는 것입니다. 죄 지어도 용서받는데 이미 용서하였으니 더 이상 죄를 회개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라고 나가게 되면 구원파라는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구원을 확신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구원으로만 기뻐하는 아주 이기적인 죄인들의 집단인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 때에도 있었습니다. 니골라 당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지요. 이미 영혼이 구원을 얻었으니 육은 마음대로 하여도 죄가 아니다, 하면서 온갖 죄를 짓는다는 당이 바로 니골라 당인 것입니다.
2) 또 어떤 경우가 있는가 하면 내가 용서를 받았지만 잘못하면 잘릴 수 있으니 평생 조심해야지, 전에는 죄의 유혹에 넘어 갔으니 이제는 내가 정신을 차리고 죄를 짓지 말아야지, 여자도 조심하고, 돈도 조심하고, 그래서 평생을 조심스럽게 살아야지, 하는 자세로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다르게는 이제는 용서를 받았으니 주님을 위하여 멋있는 일을 한번 해보자는 쪽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을 따라 종교사업을 벌려 놓고서도 내가 거듭났기에 이제 나의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 라는 것으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복잡 하느냐고 말하고 싶겠지요. 왜 그런가 하면 죄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내려는 것이 사탄의 최대의 목표인데 얼마나 교묘하게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멀게 하는지 아셔야 합니다. 가장 주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면서 예수님을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이 어떤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까?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 율법의 예대로 하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용서를 하신 것입니다. 그 저주는 예수님이 지심으로 용서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여인에게는 무엇을 적용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율법을 적용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미 이 여인에게는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기에 이 여인에게는 율법의 저주가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사별한 남편인 것입니다. 율법은 사별한 남편이고 이제는 새 남편이 생긴 것입니다.
로마서 7:1-6절입니다. “봉독” 그러므로 이 여인은 이제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옛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다른 남편에게 가면 음부가 되지만 죽었다면 자유를 얻은 것이고 새 남편에게 가도 음부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를 주신 것은 율법을 따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영으로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구약에서 새 언약의 예언을 통하여 한 번 더 확인을 하고자 합니다.
예레미야 31:31-33절을 봅니다. “봉독” 옛 남편이 손을 잡고 나와도 뿌리쳤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공로로 출애굽을 하였건만 그들은 계속하여 자기들의 생존에만 관심을 가지고 물 달라, 떡 달라, 고기 달라 아우성치다가 사막에서 죽어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마음에 법을 심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게 되면 이때는 이들의 죄를 사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죄를 다시는 기억지도 아니하는 것이 새 언약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흘리신 피가 새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은 어디에 머무르는 것입니까? 주님의 보혈의 공로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마음에 말씀을 새긴다는 것이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늘 은혜아래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니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알게 된 죄는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요16:9)
그러므로 이제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은 은혜 아래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속에서 생수가 흐르듯이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은혜로 끌어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2절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시하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의 용서를 자기의 행함으로 바꾸려고 하거나, 또는 예수님이 용서하였으니 나는 내 마음대로 놀자, 하는 것도 결국 주님의 구원과 상관없는 자세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삽니까?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은혜로 산다는 것입니다.
집사님 어떻게 삽니까? 은혜로 살지요, 주의 긍휼하심으로 살지요. 이러한 삶이 날마다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앵무새처럼 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성령의 역사가 이렇게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우리에게 나타나는가, 아닌가를 말씀을 통하여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서 이러한 삶이 나타나면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보여 지는 것입니다. 억지가 아닙니다. 무슨 크고 놀라운 업적을 이루어 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진리 안에 자유의 종이 되어 있다는 것은 그 분의 일하심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지 나의 무엇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지어 짜내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은혜가 드러나는 삶을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어떠함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입은 자의 삶이 세상의 사람과 구별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에 종노릇 하는데서 율법의 종에서 행함의 종에서 빼내어 진리의 종을 삼으셨기에 이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이 바로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28-29절입니다. “봉독” 무엇이 죄입니까? 은혜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8:12-20 빛과 어두움 2000. 3. 19.
이 세상을 볼 때 캄캄한 어두움으로 보이십니까? 아니면 어두움도 있지만 그래도 밝은 것이 많다고 보십니까? 캄캄하다고 보면 부정적이다, 비관적이다, 허무적이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긍정적으로 세상을 보라고 합니다. 물론 어두운 부분도 있지만 밝은 부분이 많다, 악한 자도 있지만 선한 자가 더 많다, 그러니 세상은 살만한 곳이다, 우리가 조금 더 양보를 하고 질서를 지키면 좋은 세상이 될거야, 라는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으로 보십니까?
그러면 성경이 무엇이라고 증거 합니까? 온 세상이 캄캄한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있는 사람이 세상이 캄캄한 줄 모르고 불편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도 어두움이 무엇인지, 빛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동시에 어두움의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어두움 가운데 빛이 비치되 어두움이 빛을 깨닫지 못하더라. 깨닫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빛을 싫어하여 추방하여 버렸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율법선생인 니고데모나, 사마리아의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 치운 여인이나 꼭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못 알아본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어두움에 속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8장에서는 간음한 여인을 붙들어 와서는 율법의 공의를 실현하고자 함이 아니라 율법을 가지고 오히려 예수님을 고소하여 제거하고자 하는 악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율법을 제정하신 분 앞에 율법을 가지고 고소거리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유대인들조차 어두움아래 있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율법을 말하는 자들이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바르게 시행한다는 자들이 예수님 앞에서는 어두움의 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이 이렇다면 이방인들이야 말해 무엇을 하겠습니까? 당연히 어두움 안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의 일인 줄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얼마나 주님을 따르는 빛과는 반대로 가는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것이 4.13총선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당을 지지하십니까? 모두가 국가를 위하고 국민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거짓말임을 알지요. 그런데도 다른 대안이 없으니 그 중에서도 바른 사람, 바른 당을 찾아서 투표하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잠시만 넓게 깊게 생각해보면 그들은 결코 국가를 위하거나 국민을 위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혹시 정말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자가 있다고 하여도 빛이신 예수님,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는 전혀 무관함을 알아야 합니다.
정치하는 자들이 국가를 위한다는 그 국가가 도대체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허상입니다. 오히려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들의 입에 발린 말인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 행태가 조선시대에는 없었습니까? 그대로 있었습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라는 말보다 무엇을 위하여 한다고 합니까? 왕을 위한다는 것이지요. 종묘사직을 위한다는 것이지요. 텔레비전에서 사극을 할 때 왕궁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왕족 귀족이라는 인간 같지도 아니하는 자들의 놀음에 백성들의 피땀만 착취당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슨 백성을 위한다는 말입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기득권자들이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정치를 하고 법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그래 안다, 그러니 바른 정치를 하도록 시민단체가 연대를 하여 공명선거를 하자고 낙천 낙선 운동하는 것이다, 라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바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름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사람들마다 다 다릅니다. 결국은 자기들의 이익을 대변하여 주는 것이 바름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사람들의 정의라든가 옳다는 기준이 오직 인간의 이익과 행복에 결부되어 있습니다.
여당 사람이면 여당의 이익이 진리이고 야당 사람이면 야당의 이익이 진리입니다. 그러니 당을 옮기면 어제의 정의라고 외치든 것을 오늘 뒤집게 되는 것입니다. 확대하면 대한미국의 이익은 일본의 이익과 배치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이 일본의 이익을 위하여 손해보고 희생하는 것을 진리라고 합니까? 매국노라고 합니까? 매국노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서 아무리 노벨 평화상을 제정하고 인류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다는 숭고한 뜻을 가졌다 할지라고 인류의 이익에 상반되는 진리가 나타나면 그것은 여지없이 부수어 버리고 배척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관운장 이야기-억울하다고 원혼이 떠돌아다님. 어느 스님이 관운장에게 네가 억울하다면 너에게 죽은 자는 어떻게 하느냐? 그들은 사리사욕을 위하여 싸웠지만 유비는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 스님이 하는 말이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의 욕심을 원초적으로 드러내어 점수를 잃었지만 유비는 그런 욕심을 속으로 갈무리 하면서 대의명분을 내세웠지만 결국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은 것은 똑 같은 일이 아니냐, 라는 말에 원혼이 저 세상으로 갔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입니까?)
이것이 인간의 죄의 현실이고 어두움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1:3절에서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도다.”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이니 이 세상의 사람들이 자기를 지으신 분을 모르고 자기들이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두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소나 나귀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어 있으니 참된 주인이 빛으로 오셨건만 사람들이 주인을 알아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주인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어두움에 속하여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빛을 알았으니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자, 라고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니 사람들이 자꾸만 윤리 도덕적인 면에서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청년이 경실련 같은 곳에 들어가 일을 합니다. 이런 것을 시민운동차원에서 하는 일이야 말릴 생각이 없습니다. 세상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빛과 소금이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고서 달라진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전에는 어두움을 몰랐는데 이제는 어두움인줄 아는 것입니다. 보는 것입니다. 보고 알면서도 또 그런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라는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전에는 나오지 않은 내용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애를 쓰면, 노력하면 좋은 세상 만들 수 있어 하든지, 유대인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으니 이 율법을 따라 살수 있다고 하는 것이 모두가 어두움 아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빛이신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모르는 것입니다.
아직도 사람들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입니다.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입니다. 못난 사람이라고 나는 못났어,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못났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잘난 맛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 자기의 못남을 알고 사는 것입니다. 빛이 비추이기 전에는 자기 잘난 맛에 살았는데 이제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보니 잘난 것은 하나도 없이 못난 것뿐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런 자의 고백이 무엇이겠습니까? 주여 저에게 능력을 주소서, 그리하여 큰일을 이루어 내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주여 나를 용서하소서,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이 빛에 비춤을 받은 자는 무어라고 고백하는가 하면 큰일 났다, 주여 나를 살려주소서, 이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과 소금의 역할입니다. 세상과 구별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세상의 구별됨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란 결국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확인 시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종교를 가진 것은 서로 착하게 살자 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나가는 것만큼 복음을 왜곡시키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1:4-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악하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 얼마나 악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악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시범을 보이시고 나를 따라 하라,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따라 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빛을 비추시고 그 빛 앞에서 자기의 정체가 얼마나 악으로 가득한지를 알고서 경악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를 건지소서, 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자기의 말년에 무어라고 고백합니까? 나는 죄인중의 괴수로다, 라고 합니다. 김광일씨가 장로가 되어서인지 대통령을 지역감정의 괴수라고 하였다가 사과하기도 하였지요. 자기가 지역 이기주의를 이용하는 괴수임을 먼저 알아야 장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가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기선 목사는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빛의 비추임을 받고서 죄인임을 아는 것이 복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여 라고 부를 때에 그 주여 속에는 오직 나 같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소서,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 앞에 자기의 율법 지킨 것 가지고 나가서 유세할 자들입니다. 오늘 말씀을 봅니다.
12-19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내가 세상의 빛이다 생명의 빛이다, 하니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 하니 그 증거가 참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증거란 율법에 의하면 두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율법을 만드신 분 앞에 율법으로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자신의 증거가 옳은 이유는 자신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증거가 참임을 예수님이 자신을 위하여 증거하고 아버지가 나를 증거 하니 참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너희는 나도 모르고 아버지도 모른다고 하십니다.
결국 유대인들이란 자기들이 율법을 가지고 적용을 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이미 캄캄한 어두움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서 아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어설프게 알면 자꾸만 다른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개혁을 이야기하고 바르게 교회를 만들어 보자고 하게 됩니다. 도대체 개혁하여 될 것 같으면 선지자만 보내어도 충분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죄가 어느 정도인지를 빛이 비추어져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 중에 두 곳만 보고자 합니다. 332장, 441장. 이러한 고백이 찬양이 나오는 것은 우리보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기에 이런 찬양을 하는 것입니까? 주의 빛을 더 비춤을 받은 것입니다.
에베소서 5:8-14절입니다. “봉독”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두움의 일을 빛 가운데서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책망을 받는 것은 빛으로 나타나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빛 앞에 나타나는 것은 자신의 죄와 어두움이 더욱 밝혀지는 것입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죄악까지 빛 앞에 노출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와서 폼 잡고 자존심 챙기려고 하는 짓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빛이 비추이니 비로소 알게 된 것이고 그러니 더욱 세밀하게 빛 가운데서 자기의 죄가 드러남으로 더욱 더욱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21-30 죄의 권세 2000. 3. 26.
지난주일 낮에 이 세상이 어두움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두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밝은 면도 많으니 어두움을 줄이고 밝은 면을 잘 살리고 확대하면 좋은 세상이 오리라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소망이 눈에 보이는 것밖에 없으니 그렇게 말한다고 하여도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세상에서 보기에 아무리 숭고하고 아름다운 희생이 나오고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바쳐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무엇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까? 죄와 사망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이 세상에 발 딛고 살기에 이 세상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는 없습니다만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의 가장 선하고 가장 아름답고 고상하고 좋은 것을 다 모아서 만들어 낸다고 하여도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사는 현실에서 나오는 것으로는 죄와 사망을 이기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 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은 현실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현실에 나타나는 힘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인 힘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힘이란 세상을 살아내는 기술적인 측면의 힘이 아니라 세상을 포기할 수 있는 힘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주어진 힘인 것임을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받는 것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담대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이기신 것입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제 다른 권세 아래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옛사람의 습성이 남아 있기에 계속하여 주님의 권세를 보기보다는 자기의 행함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라고 할 때 자꾸만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목록개념으로만 보지 말고 권세의 개념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감기에 들리면 두통, 재채기, 콧물이 나오는 것처럼 죄의 권세가 있으니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자기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단지 죄인이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였기에 죄인이고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기들은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와서는 율법에 의한 처벌을 예수님께 묻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그러한 죄를 안 지었기에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이 무어라고 하시는가 하면 너희는 마귀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황당하고 기분 나쁜 말입니까? 아니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남이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떻게 자유 하라고 말하는가, 그것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자유를 얻는 것이라는 말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나를 믿었을거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보고서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시면서 그러니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 앞에서의 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나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너희 죄 가운데 죽으리라. 이 세상의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일을 이루어 내어도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면 자기의 죄 가운데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죄의 기준을 어떻게 정하고 있습니까? 자기 자신의 유익, 그리고 자기 자신이 속한 공동체, 나아가 인류 공동체에 이익이냐 아니냐를 그 기준으로 삼고 있기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진리이고 그렇지 아니하면 죄이고, 죄 가운데 죽으리라는 말을 사람들이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아십니까?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도 이 말씀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여도 밥을 퍼주고 장애인을 돌보고 적십자 운동을 하여도 예수 믿지 아니하면 죄 가운데 죽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얼마나 세상이 볼 때에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그러나 이렇게 믿는 사람이 훨씬 더 희생하고 봉사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주객이 전도되어 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23절의 증거입니다. “아래에서 났고 땅에 속하여 있다는 것과 위에서 났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비교합니다. 아래에서 났고 땅에 속한 것은 이미 죄의 권세아래 있기에 거기에서 서로서로 잘잘못을 따라 착하고 선하고의 기준은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군 훈련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단체 기합을 늘 주지요. 이것은 아마 군대의 단결을 위하여 일부러 그런 훈련을 하겠지요. 그런데 사회에서 살다가 군에 들어가니 단체기합이 억울한 것입니다. 그래서 상급기관에서 한번씩 소원수리 하러 나오지요. 그때 많은 훈련병이 단체기합의 억울함을 호소한 모양입니다. 그날 저녁 점호 시간은 지옥이었습니다. 절대로 단체기합을 안주고 한 사람 한사람 지적하여 벌을 주는 것입니다. 차렷 자세 하나만 지적하여도 모두 걸리는 것인데 옷 재봉선과 관물의 정돈까지 보면 안 걸릴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날은 단체기합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두 개인 체벌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적으로 생각하고 살다보니 선악의 기준을 세우고 있지만 참되신 주님 앞에서는 전부가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권세아래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죄인을 어떻게 해야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들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들리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2:31-33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이 들리신다는 것은 자기의 죽음이 어떠한 죽음인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들리면 주님의 택한 모든 백성을 예수님께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사건으로 무엇을 하시는 것입니까? 12절에서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는 것이 주님의 달리심과 부활로만 이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귀가 붙들고 있던 자들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마귀를 이기시고 자기의 백성들을 구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권세를 이겨내는 것은 사람으로서 이 땅에 있는 일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율법을 받고 그것을 지키느라고 하여도 결국 그들은 권세아래 있었다는 증거가 예수님을 배척한 것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율법을 들고 나와서 예수님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성전과 안식일문제,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는 것들을 가지고 율법으로 묶어 넣어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권세 아래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고, 십일조와 금식과 구제를 하고, 성전을 고수하여도 그것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임을 모르는 것이 바로 죄의 권세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으로 구원을 얻습니까?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를 구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윗을 예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다윗하면 우리는 그의 죄보다도 그의 훌륭한 점을 먼저 많이 생각합니다. 다윗이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고서 얼마나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 내었는가를 말합니다. 골리앗을 물리치고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자 늘 피하여 다니면서도 사울을 죽이지 아니한 것입니다.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라고 자기의 손으로 처치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사울 사후에 왕이 되어서도 얼마나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 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땅의 지경을 다윗 때에 다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도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의 영웅으로 모세와 다윗을 들고 잇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세나 다윗의 영웅담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날 것을 예언하는 것이며 다윗도 주님을 보았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러니 성경은 어떤 인물의 영웅적인 모습을 보고서 본받으라는 내용이 아니라 왜 예수님 만이어야 하는가를 증거 하는 책인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무엇으로 자신이 철저한 죄의 권세아래 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까?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그 간음한 사실을 숨기려고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아를 특별휴가를 주었지만 우리야가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기에 자기 아내에게 들어가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계략이 통하지 않자 우리아를 밀령으로 죽여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에게서 나온 죄의 권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백성을 하나님의 뜻대로 섬기여야 하는데 자기의 소유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이방의 나라들은 왕으로서 그 정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이 지금 이스라엘 국가가 주님의 언약으로 세워졌고 어린양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줄을 모르고 자기가 왕이 되다보니 자기의 소유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원수가 얼마든지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를 자기 소유화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누가 이런 짓을 잘 하겠습니까? 1번이 개척한 목사, 장로들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성도도 예외가 아니지요. 이런 모습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런 죄에 빠져 한 일이 바로 밧세바를 간음한 것입니다. 교회를 특정인의 사유화 경향이 되어 가는 현실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합동측의 대표격이라는 누가 그런 기준을 세웠는지 모르지만 어떻든 신문보도에 의하면 아버지가 아들을 당회장으로 세웠고 그러다가 지금은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으로 폭력배가 동원되는 곳이 충현교회라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 나왔다는 그런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입니까?
그러므로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과 다윗의 간음에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둘 다 돌 맞아 죽어야 마땅한 죄인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돌 맞아 죽어야 하는 동일한 죄인 것입니다. 오히려 다윗에게 더 중한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간음뿐 아니라 살인까지 하였고 또한 왕으로서 그렇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때 나단 선지자가 와서 책망을 합니다. 그 책망 앞에서 다윗이 자기가 죄악 중에 잉태되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자기는 의가 전혀 없으며 오직 주님의 용서가 아니면 도저히 가능이 없는 자임을 고백하는 것이 시편 51편입니다. “봉독” 그런데 이러한 다윗의 고백이 나오는 것은 무엇을 들고 간 것입니까? 우리아의 희생을 근거로 다윗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다윗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간음을 하면서도 밧세바를 정결케 하여 간음을 합니다. 율법을 적용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듯이 율법의 적용도 결국은 자기의 이익을 따라 적용 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권세아래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우리가 죄의 권세를 알고 있습니까? 자기의 행함에 기대를 걸고 자기 의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죄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최고의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니 이들에게 무엇을 들고 가야만 하는 것입니까? 우리아의 피를 가지고 다윗을 고발하듯이 예수님이 ‘들리심’으로만 이들을 정죄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기들이 죄인임을 고백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 때문에 희생당하신, 들리신 주님을 믿는 것이 죄의 권세를 이기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주님의 권세 아래에서 늘 사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8:31-36 자유 2000. 4. 2.
사람들은 자유를 다 좋아합니다. 모두들 무언가에 메여서 살기 때문입니다. 무언가에 메여있지 않은 자에게 자유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학생-학교와 수업, 직장인-직장과 일, 주부-가정과 가사, 목사는 목사의 일등에 메여 삽니다. 그러니 방학, 휴가 등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메여있는 일에서 좀더 자유로워지려고 사람들은 부단히 노력합니다. 지식을 더하고 과학을 발달시켜서 좀더 자유롭게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속박을 받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어디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터지는 전화소리, 온갖 첨단 전자장비들로 사람들의 경제활동과 모든 생활영역을 묶어 둘 뿐 아니라 사람의 사고까지 대중매체를 통하여 장악하고 있는, 이런 세상이 옛날 전기도 없었던 시대보다 삶의 질이 결코 나아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옛날이 좋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는 언제나 자기들이 자유를 찾아 나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란 한 발자국도 더 나은 자유를 찾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의 또 다른 면은 그렇게 자유를 원하지만 정작 자유가 주어지면 자유를 누리기보다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과외 선생과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 직장인도 오늘 하루 쉬쉽시오, 하면 좋아하지만 다음날도 또 쉬십시오, 그러면 불안한 것입니다. 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와 주일성수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면 그러면 십일조 안 해도 되겠네, 주일성수 안 해도 되겠네, 하면서도 십일조 안하면 무언가 찝찝하고 주일날 놀러 가면 혹시 사고가 나는 것은 아닌가, 그런 불안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무슨 봉사의 일을 할 때 힘들어서 못 하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러면 그냥 쉬십시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무어라고 하는가 하면 그래도 목사님이 열심히 하라고 해주어야지, 그러는 것입니다. 힘들어서 쉰다고 하기에 쉬라고 하였더니 왜 강력하게 하라고 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유하기 보다는 오히려 강력한 법을 제시하여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괴리현상입니다.
한편으로는 자유를 원한다 하면서 한편으로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영웅에게 묶이기를 원하는 이중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유를 누리기보다 무언가 강력한 법에 예속되기를 또한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박정희나 전두환을 좋아하는 정신 나간 사람들도 있고, 종교적인 면으로는 슈퍼스타들과 교주들이 기세등등하게 활개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그 근원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그 모든 만물을 다스리라는 뛰어난 피조물의 지위를 주셨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창조물입니까?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시는 그런 창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에게 누가 주인인지를 알도록 하나님께서 한 가지만 금령을 주셨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실과는 따 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렵거나 법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닙니다. 단 한 가지뿐입니다.
그런데 이 한 가지의 금령을 어기도록 사탄이 유혹을 하는데, 어떻게 하는지를 창세기 3:5절에서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하고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만 따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 그러면 그러한 지시를 받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는 것이라는 유혹입니다. 물론 이것은 거짓말이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였는데 결코 죽지 않는다는 거짓말도 한 것입니다. 이 유혹에 넘어간 인간은 결국 죽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죽음이란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고상하고 윤리 도덕적으로 완벽하고 남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준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이기에 그 사람은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고 합니다. 악취 외에는 나올 것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이 정도로 부정적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따 먹고서 자유다, 라고 외치는 그 순간 인간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이 때부터 인간들은 하나님의 다스림 없이 스스로 자기들의 삶을 책임지고 나가겠다는 독립을 외친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가 지금도 외치고 있는 자유를 향한 걸음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란 결국 하나님을 버리도록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러니 온 인류가 만들어 내는 사상이란 하나님 없이 우리가 하나님처럼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 먹을 때 따른 유혹의 내용입니다. 오늘날 어떠한 인간도 이 세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를 아이들의 장난감 놀이로부터 어른들의 문학과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인류의 영원한 미래와 자유에 도움이 되면 진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어린이의 장난감 선전에 지구의 자원이 고갈됨, 그러니 우주를 개척하러 가자, 이런 식으로 우주선 만드는 장남감이 나오는 것이고 어른들은 계속하여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서 우주를 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인류의 집단적인 꿈과 야망에 방해가 되는 인간은 인류의 행복을 깨는 적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몇 년 된 영화입니다만 ‘Independence Day’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미국 독립기념일이 ‘Independence Day’입니다. 디펜드는 기대다, 의지하다, 믿다 인데 부정접두어 ‘인’이 붙어서 독립, 자주, 자치, 자유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이 영국의 지배에서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날에 외계인이 거대한 우주선을 타고 와서 지구를 공격하는데 미국을 중심으로 인류가 서로 싸우다가도 인류의 공동의 적이 나타나니 함께 힘을 합하여 외계의 우주선을 물리치는 그런 영화입니다. 대학생 정도면 이런 영화를 미국 중심의 세계관이라고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장면을 보고서 가슴 뭉클해 하면서 아 인류는 영원하라! 라는 구호에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아마겟돈이라는 영화도 그런 면으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지구에 유성이 충돌하는데 그 유성을 폭파하러 가서 한 사람이 희생함으로 유성의 지구 충돌을 막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가 익어서 떨어지듯이 흔들리고 떨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마24:29, 계6:13). 하나님의 심판을 거부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를 아시겠습니까? 인류가 추구하는 자유라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다스림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그 원초적인 죄 아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인의 세계에 속한 죄에 종노릇하고 있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은 이방인보다 나은 것이 있습니까? 성경은 아니라고 합니다.
로마서 3:9-18절을 봅니다. “봉독”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자기들의 학문과 지식과 과학의 발전으로 인류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라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율법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선택을 받았을 뿐 아니라 율법을 안 지키면 죄이지만 자기들은 율법도 지키니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자유인이라는 것입니다. 간음하다 붙들려온 이런 여인이나 돌 맞아 죽어 마땅한 죄인이지 자기들은 돌로 칠 자격이 있는 의로운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모두 죄의 종노릇하고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요한복음 8장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31절에서 유대인들 중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시자 당장 유대인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그러므로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유란 종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자유라는 말이 성립이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자유인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예수님은 그들이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의 행세를 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보고서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 것을 보니 너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마귀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아비는 마귀라는 것입니다. 4절을 봅니다. 너희 아비는 마귀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너희가 진리인 나를 믿지 아니하는 것이 마귀의 자식임을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이보다 더 독선적으로 들리는 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물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너희 아버지는 마귀라고 하셨으니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요? 자기들이 종이 아니라고 마귀의 자식이 아니라고, 자유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시니 얼마나 분노가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의 거짓말이 무엇입니까? 선악과 따 먹어도 안 죽는다, 선악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 그러니 하나님께 메일 필요 없이 자유 하라고 속이고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메이는 것이 참으로 자유 하는 길인데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이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의 운명을 자기가 결정하는 자유가 있는 것처럼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 보고 무어라고 합니까? 사나가 줏대도 없이 여자들이나 나가는 예배당에는 왜 나가노? 남자가 술도 한잔씩하고 담배도 같이 피우고 사람이 사회성이 있어야지, 그렇게 고리타분하게 메여가지고 어떻게 사노, 불쌍하다, 그러지 않습니까? 옛날에 예배당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고 혹 남자가 와도 좀 모자라는 사람이나 오는 그런 곳으로 여겨졌지요. 그런데 요즈음은 너무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너무 많이 온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런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줏대도 없고 용맹도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까?
참된 자유란 아들을 믿는 자가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는 우리가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민주화를 이루는 그런 자유가 아닙니다. 독재정권이 물러가도 또 다른 민주라는 탈을 쓴 독재자는 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란 오직 예수님이 주셔야만 얻을 수 있는 자유입니다.
34-36절을 봅니다.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기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 죄의 기준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이 죄입니다. 참된 자유를 주시는 분,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시는 분을 믿지 아니하는 것이 이미 죄의 종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죄의 종이 되어 있기에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자유를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자가 들리셔야 자기 백성을 자기에게로 이끄는 것이며 오직 아들이 자유케 하시는 자만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한 모든 것이 죄임을 알고 오직 아들이 자유케 하심으로만 자유를 얻게 되는 줄 믿어지는 것이 자유를 얻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자유를 가지고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자유를 얻었으니 이제 마음대로 살자, 라는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자유하고 독립하려고 한 것이 죄의 근본이라면 이제 죄에서 자유를 얻었다면 주님께 제대로 메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고 묶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이제는 어떤 식으로 나타납니까?
새로운 법에 메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법에 메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기회로 삼는 것이 아니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으로 살던 자가 복음을 받고서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기를 자기는 먹을 수 있지만 연약한 자를 위하여는 평생토록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유를 가지고 주님의 종이 되고 형제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참된 자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말씀 한마디도 자기 임의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아버지에게서 받고 들은 것만 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들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 아들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요한복음 8:37-59 자존심 2000. 4. 9.
그동안 요한복음 8장을 다섯 번에 걸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동안의 내용을 잠시 정리해보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붙들어 와서는 예수님께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고 묻는 것입니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여야 하지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의냐 사랑이냐,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통하여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의도입니다. 이러한 배후에는 사단이 조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소 앞에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시자 모두가 떠나갔습니다. 그 여인을 정죄할 자격이 있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정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 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 죄는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자신이 담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것은 물론 그런 간음을 범치 말라는 말씀도 되지만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 안에 사는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여인을 고발하고 또한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나오는 그들이 어두움 아래 갇혀 있기에 빛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두음의 세력을 죄의 권세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자유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자유 하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죄와 사망의 권세에 붙잡혀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유란 아들이 자유를 주어야만 얻을 수가 있고 그러한 자유란 주님을 섬기는 것이 바른 자유임을 말씀드렸습니다.오늘은 예수님 앞에 당면한 인간이 어두움으로 드러나고 죄의 권세아래 붙들려 있음이 드러나는데도 결코 예수님께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적하는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람들끼리 말다툼을 하거나 논쟁을 하게 될 때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같지만 그러나 속마음은 자기의 자존심 챙기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시사토론회 같은 프로그램을 한 번씩 보면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하여 잘못된 것이 드러나면 어떻게 합니까? 솔직히 시인하고서 잘못했습니다, 하는 태도를 본적이 없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도 아주 애매모호하게 하고서는 곧이어 변명과 반격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국회의원 후보들의 온갖 파렴치한 전과를 모두가 변명하기에 급급하지 제가 잘못했습니다하고 사퇴하는 경우를 아직 못 보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다른데서 찾지 말고 우리 안에서 찾아도 당장 나오는 것입니다. 성도가 은혜를 나눈다고 하면서도 한참 말하다보면 결국 자기주장 자기의견을 관철시키는 것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틀림없이 나의 자존심을 챙기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존심은 아주 친한 친구사이든 심지어 부부사이라도 자존심을 챙기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이것 역시 자신이 최고의 신이 되고자하는 범죄의 소산물입니다.
내가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성도의 모임이라면 자기의 약함과 부족함이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죄란 얼마나 교묘한지 자기의 부족함을 말하면서 또 상대방을 공격하는 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 저는 부족합니다, 하는 말이 진심이 아니고서 나오는 말이라면 어떤 말이 됩니까? 그래 너 잘났다, 이런 식이 되는 것입니다. 좀 더 외식적이고 점잖게 표현하면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지만 그러나 좀더 솔직하고 노골적으로 나타내면 그래 너 잘났다, 라고 마무리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객관적으로 보기에 논쟁에서 졌다고 하여도 혼자서 내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리고 자기가 열 번을 지고 한 번을 반격하였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는 자기가 상대방을 완전히 묵사발 만든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전도도 말로 이기고 온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역시 예수쟁이 말 잘한다, 그러죠.)
그리고 완전히 참패를 당하고 왔더라도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가, 싶지요? 바로 여기에 있는 저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잘 아는 것입니다. 목사라는 직업이 말로 먹고 사는 것이니 누구와 붙어도 말로 이겨야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이 안 되면 억지를 부려서라도 자기주장과 고집을 관철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공부를 하든 어떤 모임에서 대화를 하였던 간에 나중에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의 주장과 나의 자랑을 하기위한 변론을 얼마나 하였는지가 보이는 것입니다. 때로는 말하고 있는 순간에도 이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나를 자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도 결국 자기 자랑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세윤 교수라는 교수는 지옥 가는 죄가 자기자랑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말로는 자기 자존심 세우는 것이지요.
이러한 자존심을 사람들끼리만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서도 자존심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시는데 예수 믿으라, 그러면 나 착하게 되고 나서 예수 믿을게, 그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다가 쉬고 있는 사람에게도 말해보면 내가 열심히 할 수 있을 때 그때 교회 나갈게, 이러는 것이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는 사람도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하는 경우는 적고 자존심 때문에 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서리 집사가 저 정도 하는데 안수 집사는 더해야지, 장로는, 목사는 더해야지, 이런 것이 자존심이라는 죄의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는 세계 제일이라는 말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탑을 하나 세워도 세계 제일, 정동진에 모래시계를 하나 세워도 세계 제일, 분수를 하나 세워도 세계 제일, 어느 지방에서 북을 가장 크게 만들었다니까 다른 고장에서 그보다 큰 북을 만들어 한국 기네스북에 올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조차 무리 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제자훈련을 한다, 우리는 이런 프로그램이 있다, 예배당 건물의 위용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또 다른 자기의 자존심을 채우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의 예를 보고자 합니다. 기독신문에 광고로 나온 내용입니다. 김포의 복된 교회인데 교회건축, 주차장 마련, 교육관 마련 등으로 끝없이 빚과 이자를 감당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배당을 건축하지 않기로 하고 전교인들도 찬성을 하여 일부러 상가건물을 임대하고서 재정의 70%를 나누는 일에 사용하고 있다는 광고입니다. 그러면서 나눔운동을 실천하고 전국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하는데 주차장과 강의할 수 있는 건물을 독지가가 지원하여 주기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정도의 자세가 나오는 것은 좋습니다만 그러나 이것이 또 다른 자기 의와 자존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정의 70%를 우리는 남을 위하여 바르게 쓴다, 너희는 예배당 짓는 일에만 쓰느냐? 하게 된다면 또다시 자존심을 세우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김포시민 중에서 쌀이 떨어진 사람이 누구라도 오시면 쌀 한 포와 식사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모퉁이돌선교회’ 이삭 목사의 글입니다. “저의 큰 고민은 선교회를 얼마나 크게 확장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선교부에서 성경배달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도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지도자를 양성 하느냐도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고 얼마나 많은 의약품이나 양식을 탈북자나 북한에 넘겨 줄 수 있느냐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그저 제게 주어진 일일뿐입니다. 저의 진정한 관심은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입니다. 아니 좀더 말을 바꾸어도 좋다면 ‘하나님을 내가 얼마나 아느냐?’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예를 들어본다면 보통 사람으로는 하기가 힘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날마다 고민하고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선교나 구제나 봉사란 우리에게 주어지면 마땅히, 당연히 감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주가 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또다시 주님보다 그 일을 하고 있는 우리가 자존심을 세우는 일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하라는 말입니까? 라고 묻고 싶겠지요? 그러나 그 질문을 조금만 더 보류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그러한 자존심이 어디에까지 이르게 되는가를 확인하고서 그런 질문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8:20절을 봅니다. 예수님이 참된 증거를 하시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고자 합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잡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예수님의 바른 증거를 받고서 오히려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8:37절과 40절을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틀려서가 아니라 자기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틀렸다고 하시니 그 자존심이 상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구원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 것이 예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자기들의 전통과 성전과 안식일 지킴과 율법지킴과 할례와 금식과 구제가 아무 소용이 없게 되니까 얼마나 화가 나는 것입니까? 자기들이 율법으로 정죄한 간음한 여인이나 창기나 세리나 죄인들이 오히려 천국에 먼저 간다고 하니 이들의 분노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말한 사람을 이들이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누구입니까?
44절입니다. 이들의 아비는 마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너희 아비의 욕심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의 욕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고자 한 것입니다. 피조물의 지위를 떠나서 스스로 높여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심이 가득하여 있으니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심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그들의 속을 다 들추어내니 이들이 결국은 어떻게 합니까?
59절입니다.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자존심이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마저 죽이려고 덤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자기의 자존심을 죽이는 자리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주인공이 되고 싶습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원치 않는 자리로 끌고 가시는 것입니까? 우리를 낮추어 버리시는 것입니까?
베드로의 경우를 생각해보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나설 때 무엇이든지 일들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충성도 남과 달리 다른 사람은 다 배신하여도 자기는 죽는 자리에까지 이르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충성스럽고 용감한 모습입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고 하시니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가 죽으면 죽었지 예수님이 죽으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모두 인간적이 생각이었고, 인간적이 생각이란 바로 마귀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 일이 베드로의 주장처럼 되었다면 베드로는 자기의 자존심을 챙길 수 있는 영웅적인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집종 앞에서조차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그의 그 잘난 자존심이란 여지 여지없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이후에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에 대한 대답을 어떻게 합니까? 예, 제가 목숨 걸고 사랑합니다,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앞으로의 베드로가 어떻게 될지를 예언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21:18절입니다. “봉독” 우리가 원하는 길은 우리의 자존심을 세우는 길뿐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존심을 깨어버리는 길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요한복음 9:1-12 실로암 2000. 4. 16.
4월 20일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장애인의 날입니다. 저도 잘 몰랐는데 많은 장애인 단체에서 장애인의 날이니 교회에서 장애인을 주제로 한, 설교를 하고 헌금도 한 번 하여달라는 요청이 와서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나옵니다. 아주 심각한 장애를 안고 사는 것입니다. 장애인 급수를 메길 때 양안실명이 장애인 1등급입니다. 그리고 순서로도 먼저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애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만 그러니 이러한 본문을 가지고 장애인을 돕자, 라는 설교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3절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을 어떻게 나타내시는지를 보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나 장애인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이런 때에 잠시 짚어보고자 합니다.
유대인들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죄의 개념으로 보고 있습니다만, 우리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어떠합니까? 길에 다니다 보면 중증 장애인들이 구걸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먼저 듭니까? 이런 사람들을 한꺼번에 모아서 수용하는 시설에 유치하면 안 될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우리의 이기적인 생각으로 가득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만약 사파동에 장애인 수용시설이 생긴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데모를 하겠지요?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중에 예수 믿는다는 늘푸른 교회 사람들도 아마 들어가서 피켓 들고 시위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상태가 아닙니까?
장애인에 대한 전문가의 말을 잠시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화여대 특수교육학과를 졸업하고 94년부터 경기도 광주의 한사랑 학교에서 장애인을 가르치고 있는 공진하씨의 글이 인물과 사상 5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시설에 장애인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에서 함께 살수 있도록 배려하자는 것입니다. 장애인 몇 사람이 함께 살도록 하고 동네 사람들이 함께 이웃으로 돌아보며 지내는 그런 상태가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누가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 우리도 사실 장애인을 돕는다고 한달에 10만원을 보내고, 또 여전도회에서 시설에 한달에 한번씩 머리를 해주러 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하면서 우리가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런 것으로 우리가 할 일을 다 했다는 안일감이나 우월의식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장애인들이 얼마든지 옵니다. 우리는 그러한 자를 동등하게 대우하여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부자라고 특별대우하고 가난한 자라고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여도 되겠습니다. 장애인이라고 그들의 신체적인 장애를 도와 줄 수는 있지만 그들을 우리보다 특별한 다른 사람으로 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동등하게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으로 인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또 다른 교만의 죄악 중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애를 가지고 있는 분도 자기의 장애를 스스럼없이 드러내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도 장애인입니다. 군에서 눈을 다쳐서 1종을 운전 못하고 2종만 운전하니 장애 등급을 받은 정도는 아니지만 분명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나온 사람은 신체적인 장애만 장애로 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 죄인이기에 주님 앞에서 모두가 장애인인 것입니다. 이러한 장애인이 아니라면 다음부터 교회에 나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9:9-13절을 봅니다. “봉독”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의인이라면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죄인이기에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장애인을 유대인들이 어떻게 봅니까? 1-2절, 예수님이 길 가실 때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소경을 놓고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 죄 때문입니까?
요한복음 8장에서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붙들어 와서는 무슨 질문을 합니까? 모세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여야 하는데 이 여인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기들이 간음한 자들임을 모른 자들입니다. 그 마음에 음욕을 품은 것이 이미 간음하였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단지 그들은 겉으로 들키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속을 예수님이 다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제자들이 일단 자기들은 본다고 인정하기에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이 된 것은 틀림없이 죄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들은 날 때부터 소경이 아니니 죄인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이겠지요?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랍니다.
그러니 이 소경의 역할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 역할이 실로암입니다. 실로암이란 7절에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경이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계시적인 사건에 동원된 도구일 뿐입니다. 이 사람이 눈을 뜨고 안 뜨고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이 사건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 소경에게는 눈을 뜨는 것이 일생일대의 사건이 되겠지만 그러나 성경은 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끌려 왔을 때도 이 여인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주님의 용서를 받는 그 엄청난 사건이 되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 죄를 자기가 담당하시면서.... 그러니 이 소경의 사건도 지금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예수님 때문에 눈이 뜨여지게 되었다, 우리도 불치병을 예수의 이름으로 낫게 하자, 라는 쪽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9장의 이 사건에서 정작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소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는데 그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소경의 눈에다가 침으로 이갠 진흙을 발라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이었고 길에서 구걸을 하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눈을 뜨고 다니니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 사람이 그 사람이다, 아니다, 비슷한 사람이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말하기를 예수라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개어 눈에 바르고서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여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소경이 나타내는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말씀으로도 눈을 뜨게 하실 수도 있는데 왜 진흙을 이개어 바르는 것입니까? 사람이 씻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부정한 자가 정결케 되기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부정한 것을 씻으라는 말씀이 얼마나 많은지 레위기를 보면 잘 압니다. 저도 청년 때에 레위기를 보고서 뭔가 좀 기분이라도 찝찝하면 씻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목욕탕이 없고 겨울이면 물을 데워서 수돗가에서 씻는 것이지요. 그렇게 한다고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것은 아닌데도 그렇게 하여 자기 위안을 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보니 결벽증이라 할 만큼 씻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씻을 거리를 바르심으로 씻게 하시는 것, 이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미 본다는 자들은 씻을 거리가 없는 것이지요. 이 진흙 바름을 예수님이 진흙으로 묻히실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 정도의 주님의 낮아지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일도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소경이 눈을 뜨게 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나타내시는 것입니까?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니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4-5절입니다. 예수님이 빛이시라는 말씀을 요한복음에서 줄기차게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이 이미 소경이기에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이신 예수님이 소경을 보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하실 일입니다. 4절의 말씀이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되어있습니다만 영어 번역에서 보면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내가 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아내를 부를 때도 나의 아내라고 하지 않고 우리 아내라고 잘합니다. 그러 듯이 이런 번역도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킹제임스 성경에 보면, “I must work the works of him that sent me,” 으로 되어 있습니다. I must, 내가 꼭 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꼭하셔야 될 일을 지금 누구를 통하여 나타내시는 것입니까? 소경을 통하여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일을 사람을 통하여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 안에는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도 못한다는 말의 뉘앙스가 들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발람 선지자에게는 나귀가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한다는 것은 도구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누가 구원을 받았는가, 못 받았는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구원파처럼 되는 것입니다. 자기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확신을 하는 순간 예수님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이든 신약이든 사람들이 등장되는데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등장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구원 여부가 초점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경이 가장 적절한 도구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이 날 때부터 태어난 소경은 예수님을 먼저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부분에는 예수님께 먼저 요청하는 장애인들이 나오지만 이곳에서는 소경이 요청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소경을 주목하여 보신 것입니다. 이 소경은 이제 성인이기에(23절) 날 때부터 소경이라면 이제 익숙하여져서 별 불편 없이 구걸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별 불편이 없다고 하여서 이상하시겠지만 중도 실명자 보다는 날 때부터 아무것도 보지 못한 자의 세계는 처음부터 그런 세상인줄 알고 사는 것입니다. 지금 전기 ,전화, 자동차, 이런 세상에서 사니까 갑자기 이런 것들이 없어지면 불편하겠지만 50년 전에만 하여도 불편 없이 살았습니다. 100년 전에는 전혀 불편 없이 살았겠지요?
이상무씨라는 만화가가 독고탁을 주인공으로 그리지요. 아주 오래전에 본 만화인데 날 때부터 소경인 아들을 세상과 격리시켜서 적응하여 살게 하는 과정을 만화로 그리는 것입니다. 본다, 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고 키우는 것입니다. 강아지가 마루를 빨리 올라가니 왜 강아지가 먼저 올라가느냐고 묻자 아빠가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발이 네 개라서 빨리 간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의 전개인데 날 때부터 장님 된 이 세상이 그 만화의 내용과 같다고 생각이 됩니다.
모두가 장님인데 서로가 장님 아니라고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속이는 것이지요. 눈으로 보고서 사니까 참 빛이 따로 있는데도 참 빛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소경이나 빛을 못 보는 저주받은 자이지 소경이 아닌 자기들을 저주받지 않는 보는 자라는 것입니다.(귀신들린 자-예수 안 믿는 모든 자, 요 8:44절. 그러나 세상은 이상한 짓 하는 자.) 이것이 이 세상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39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심판과 구원인데 본다고 하는 자는 무엇을 만들어 버립니까? 소경을 만들어 버리고, 소경은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자기들은 평소에 밝히 본다고 하는 자들인 바리새인들이 무어라고 합니까? 그러면 우리도 소경인가? 너희가 소경이었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가 소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주님이 홀로 행하신 일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소경을 눈뜨게 한 것입니다. 이 소경이 하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25절입니다. 한 가지 아는 것은 전에는 소경이었는데 지금은 보는 것입니다. 이 증거가 우리에게도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것이 실로암으로 우리가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9:13-34 예수는 그리스도 2000. 4. 30.
날 때부터 소경이 눈을 떴다면 축하하고 함께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뜨게 한 자가 예수라는 소문에 어떻게 하든지 예수가 눈을 뜨게 하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실 일을 어떻게 나타내시는지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소경이 자기의 죄도, 자기 부모의 죄도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나타내시는 것을 보이고자 하시는 것이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도 없고 또한 구원을 요청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은 상태, 즉 날 때부터 소경과 같은 자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아내는 세력을 또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원이 일어나는 것과 그것을 방해하는 사건입니다. 그러한 방해가 어떻게 집요하게 나타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뜨자 그 소문이 널리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직접 눈을 뜬 당사자가 다니고 있으니 소문이 분분한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 눈뜬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에게 갑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이 소경에게 자초지종을 묻습니다. 어떻게 네가 눈을 떴느냐는 것이지요. 그러자 이 소경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발라서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기에 그렇게 하였더니 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필 그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러자 한쪽 사람들은 안식일을 어겼으니 하나님께로 온 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목숨처럼 지키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 날, 그런 일 하면 시비를 걸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참된 안식이란 날 지킴이 아니라 내가 안식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은 죄인이 어떻게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다시 눈을 뜬 사람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너는 그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선지자입니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예수를 어떻게 하든지 죄인으로 몰아세워서 죽이려고 하는데 분명한 증거가 있느니 어떻게 할까, 궁리를 하다가 그 부모를 부르는 것입니다. 소경이 눈떴다고 하여도 부모가 소경이 아니었다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근한 위협과 압박을 가하면서 부모에게 묻는 것입니다. 이 자가 너의 아들이냐, 그리고 소경으로 태어났다가 지금 본다는 것이 어떻게 된 일이냐, 라고 묻습니다. 부모가 사실대로 이야기 하다가는 자기들이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할 것 같으니 다 알면서도 무어라고 말을 돌려 버립니까? 이 자가 우리의 아들인 것과 날 때부터 소경된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가 성인이니 그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왜 이렇게 대답합니까?
22절입니다.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라” 만약에 예수라는 사람이 우리 아들을 눈뜨게 하였으니 그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하면 유대교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서워서 그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출교라는 것이 그 당시의 사회에서 얼마나 치명적이면 이렇게 두려워하였겠습니까? 그러니 이러한 위협으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시인을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자 바리새인들이 또다시 그 눈을 뜬 자에게 묻습니다. 네게 어떻게 하여 보게 되었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 왜 또다시 묻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느냐고 하자 그들은 자기들이 모세의 제자라고 하면서 그가 어디서 왔는지를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자 소경이 이상하다, 그가 나를 이렇게 눈을 뜨게 한 것을 보니 분명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 뜻대로 행하는 자를 들으시는 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떴다는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니 이는 분명히 하나님께로 온 선지자입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이 사람을 내어 쫓아버립니다. 이것이 세상이 하는 일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정하고 방해하고 막아 보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와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 말뜻을 잠시 살펴보고자합니다. 예수라는 말은 마태복음 1:21절에 그 뜻을 설명하는데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여 내실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의 이름은 다른 사람에도 있는 이름입니다. 구약의 여호수아가 신약의 예수라는 이름과 같은 뜻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3:29절에서 예수님의 족보 중에 예수라는 이름이 골로새서 4:11절에서 바울의 동역자 중에서 예수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동명이인이 많은 것처럼 예수의 이름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역사적인 인물이 많지만 누가 그리스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성경대로,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성경대로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확증하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확증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보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역사적인 실존인물로야 다 믿습니다. 마치 공자, 석가를 성인으로 보듯이 예수도 그런 성인 중에 하나라고 보는 그런 것은 역사적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살았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정보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것을 사탄은 방해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동원하여 방해합니까?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집권자들과 민중들과 이방인들까지 다 동원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는 헬라어이고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메시아, 그리스도는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독교라고 하고 예수교라고 하는데 예수교란 예수를 한문으로 표기하여 야소라고 하였기에 옛날에는 야소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란 그리스도를 한문으로 표기하여 ‘기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면 유대교에서 출교를 시키는 것입니까? 유대인들은 분명히 메시아사상이 있었고 메시아를 대망하여 왔는데 정작 메시아가 왔는데 왜 배척을 하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 즉 그리스도 사상이 자기들의 욕심으로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배후에는 메시아가 오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사단의 세력이 조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메시아를 죽여라는 것입니다. 메시아만 나타나지 않으면 자기들이 보존되는 것이기에 사람을 동원하여 자기들의 반역에 끌어넣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메시아가 구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사단의 일이고 사단의 조종을 받고 있는 이 세상의 일인 것입니다.
시편 2편을 봅니다. 1-12절. “봉독”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 즉 메시아,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 세상의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비웃으시면서 자기의 왕 메시아를 시온산에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아니하면 철장권세로 깨뜨려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니 그 아들에 입 맞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사단의 조종을 받아 하는 일이란 온 세상의 권세를 다 동원하여서라도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에게서 끊어 내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25-28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입은 자 즉 그리스도를 누가 대적합니까? 시편 2편의 예언대로 세상의 군왕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와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이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자를 대적한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우리는 어디에 들어가겠습니까? 이방인에게 들어가지요.
유대인의 시각으로 유대인 외의 나머지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그러니 온 인류가 마음을 하나로 모은 유일한 사건이 무엇입니까? 합동으로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에 합동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도 여전히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말을 못하도록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일입니다.
어떻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양면작전을 쓴다고 봅니다. 첫째는 여러 가지 핍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와 로마의 박해 때처럼 온갖 핍박을 가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면 유대교에서 출교시키듯이 핍박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자의 밥이 되게 하기도 하고, 고문과 감옥으로 여러 모양의 핍박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핍박으로 없어질 것 같았던 예수를 그리스도라 하는 무리가 더욱 많아지고 핍박이 믿음을 더욱 견고케 되는 것을 보고서 사단도 작전을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핍박보다 군림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대신 기독교가 힘을 가지고 군림하는 종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심지어 국교로 정하여 버리니 핍박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자 기독교가 얼마나 타락하였는지 중세교회가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나라에도 적용을 해보면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하여 졌을 때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이미 거대 종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 믿는 국회의원이 91명이랍니다. 예수 믿는 대통령이 나왔습니다. 그러니 핍박이란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교계에서 하는 일들을 보면 연합회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서 꼭 하는 일이 힘을 모아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힘을 모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을 핍박을 하거나 아니면 그렇게 고백한 자들이 기득권을 누리게 하거나간에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사탄의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야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다음에는 그에게 붙어 있는 자가 부활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야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데 지금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도대체 무엇이 끼어 있는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본드로 무엇을 접착하려고 하면 언제나 사용설명서에 무어라고 적혀 있습니까? 접착할 면의 표면에 있는 이물질을 제거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사용설명서가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붙어 있으려면 이물질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우리가 붙어 있지 못하게 하려면 그리스도와 우리사이에 이물질을 자꾸만 집어넣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일이고 세상의 일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든지 그리스도에게 붙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핍박을 가할 수도 있고, 쾌락을 끼워 넣을 수도 있고, 미지근하게 할 수도 있고,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도 있고, 바쁘게도 할 수도 있고, 우리의 공로나 자랑이나 행함을 끼워 넣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2주전 기독신문에 두 명의 목사가 면직된 공고가 실렸습니다. 울산노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면직된 두 목사가 노회의 권위를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합동측 헌법을 동원하여 면직을 시켰는데 그 주된 동기는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라는 책에서 주일성수와 십일조의 문제를 다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기존의 질서를 흔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노회가 소환을 하면 고분고분 말을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나는 면직 되더라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것이 면직의 이유였습니다. 그 사람의 주장은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입니다, 라는 주장으로 노회에서 면직이 된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떠한 행함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모두가 쫓겨날 각오를 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 세상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지 못하도록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더 질문합니다.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으십니까? 이 고백이 얼마나 엄청난 고백인지를 아시겠습니까?
마태복음 16:15-18절입니다. “봉독”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복, 천하를 주고도 못 얻는 생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믿는 이 엄청난 복이 실감나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9:35-41 역설(逆說,Paradox) 2000. 5. 7.
며칠 전에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스크림의 이름이 ‘바꿔’였습니다. 포장지를 뜯어보니 파란색의 아이스크림인데 그 안에 흰 글씨로 ‘확’ 이라는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바꾸는데 어느 정도로 바꾸어야 하는가 하면 확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스크림이야 바꾼다면 더위를 시원함으로 바꾸자는 말도 됩니다만 한동안 이 사회에서 ‘바꿔’열풍이 불었습니다. ‘바꿔, 바꿔 세상을 다 바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총선과도 연결되어 바꾸자는 말을 그야말로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도 남한의 바꿔 열풍을 알았는지 북한의 신문에서 보도하였다는데 남조선에는 바꿔야 할 사회적인 문제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누가 누구를 말하고 있는가 싶지만 그러나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다 좋은 상태라면 그렇게 ‘바꿔’라는 말이, 그것도 모든 것을 확 바꾸라는 말이 필요가 없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세상은 결코 바뀌어 지지 않습니다. 정치가 바뀝니까? 자기가 나가면 확 바꾸어 놓겠다더니 기득권에 줄서기 바쁜 것입니다. 경제가 바뀌어 집니까? 계속하여 빈익빈 부익부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교육이 바뀝니까? 과외 허용으로 과외를 못하는 서민은 더욱 뒤처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헌법재판소에서 과외금지가 위헌으로 판결된 것은 정당합니다. 자본주의란 시장경제입니다. 자유로운 경쟁으로 강한 자만 살아남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꾸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해 아래 무엇이 새롭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 재림할 때까지 세상은 그대로 돌아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을 떠나기를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만 관심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을 보다 살기 좋게 만들어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조차 이 세상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싸움도 없고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자, 라고 합니다. 꼭 여호와의 증인들의 전도지에 보면 나오는 푸른 잔디밭에 가족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그려놓았는데 그 정도는 창원시내의 공원에서 얼마든지 나오는 풍경입니다. 먼저 성경 한 곳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0:34-36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이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랍니다. 오히려 칼을 주고 불화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성경에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말씀이 아닙니까? 예수를 믿는다,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좀더 평화롭게 서로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에서 성탄절을 축하하고, 교회에서 석탄절을 축하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종교란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종교 때문에 세상의 전쟁과 분쟁이 얼마나 많았는가 하는 말들을 합니다. 물론 그러합니다. 종교 간의 전쟁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종교 안에서도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 이 세상에서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을 챙기기 위한 싸움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란 무엇입니까? 자기들의 기득권을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교회가 이 세상에서 자기의 기득권을 챙기는 쪽으로 나간다면 근본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5:38-42절입니다. “봉독” 이것을 높은 윤리적인 차원이라고 사람들이 좋아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그러면 과연 이렇게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이어서 나오는 말씀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모두가 죄인 됨을 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격과 조건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입니다. 나머지는 모두가 탈락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란 역설로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 세상이 비진리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비진리로 가득한지를 참된 진리가 오기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조금만 노력하면 그래도 살만한 세상인줄 알고 서로 서로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참된 진리와 빛과 생명이 나타나니 그동안의 모든 진리라는 것은 전부 비진리이었고, 인류의 빛이라는 것이 모두 어두움 이었고, 생명이라는 것이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배척받아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까? 온 인류가 합동으로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으신 분이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분이 자신을 죽인 자를 구원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역설입니다.
이미 허물과 죄로 죽어 있기에 스스로 빛을 알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만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진리와 생명에서 떠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장님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가 눈을 뜰 수 있다고 착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이렇게 해야 만이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떴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조건과 이유 없이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어떠한 선행조건도 없는데 그저 한 일이란 이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 온 것입니다. 그것도 종교인이라는 얄팍한 양심하나 가지고 조금은 착한 척 흉내도 내어 보았지만 그러나 참된 안정이란 없이 남과 비교해 보고서 아, 저 정도면 나는 중간치는 하겠구나하는 안심 속에서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계속하여 증거하고 있는 바는 무언가 좀 안다는 사람은 예수님 앞에서 자꾸만 바보가 되고 무언가 본다는 자는 소경이 됩니다. 3장에서 니고데모가 유대인의 선생이면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아직 눈도 못 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예 세상적인 여인,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 치운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예수님이 생명수가 되심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아는 자는 모르게 되고 모르는 자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 날 때부터 소경되어 구걸하던 거지, 이런 사람들을 세상은 죄인이라 사람 축에도 넣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하필이면 이런 사람들을 불러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들이 다른 사람보다 나은 점이 무어가 있습니까? 나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 노골적인 죄인이고 불구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까? 주님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죄와 허물로 죽었기에, 모두가 이런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을 구원하심으로, 자기 자름대로 잘났다는 사람을 심판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 39절에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불만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미 성경은 메시아의 기능이 이러한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29:9-12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소경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되 그 마음은 멀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청년회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친구나 애인을 만나면 만 원짜리 쓰는 일이 아무것도 아니고 더 못써서 안타까운데 연보시간에 지갑에 미처 잔돈이 준비 안 되어 만 원짜리와 동전 몇 개가 있을 때에 만 원짜리를 하는가, 동전을 하는가, 갈등하다가 동전으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한다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노래하면서 행위로는 부정하는 가증한 자들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니 하나님이 이들을 소경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2:17-24절을 봅니다. “봉독” 로마서 1장에서 이방인의 죄를 말하고 있다면 2장은 유대인의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이 다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인간을 보는 시각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모두가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3:9-18절입니다. “봉독”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가 죄 아래 있는 것입니다. 모든 행위가 악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란 18절에서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는 것입니다. 소경이니 바로 눈앞에 하나님을 보고서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참된 하나님을 죽여 버렸다는 것이 성경이 증거 하는 인간의 소경됨, 죄인 됨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상황을 알고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이들의 죄를 드러내시면서 동시에 자기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침을 뱉어 진흙에 이개듯이 자신의 몸이 땅에 묻히시는 비참함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구하시는 것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땅에 오신 것이 자기 비하이요 낮추심인데 땅에 묻히시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하시는데 흙이란 땅의 먼지, 땅의 티끌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낮아지심으로 소경을 눈뜨게 하시는 것처럼 오늘 이 세상에만 눈이 밝아 있는 저와 여러분의 무지와 죄악과 소경됨이 그분을 죽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죽였지만 그분은 다시 살아 나셨고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셨습니다.
이보다 더한 복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까지 하여 우리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하신 것은 이제 썩어질 것을 바라보지 말고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그 아들의 나라를 바라보라고, 그 영광의 기업이 어떠한지를 바라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뜨여지기는 뜨여진 것입니까? 뜨여졌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히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처음에야 어리벙벙하여 무엇이 무언지 잘 모릅니다. 그러니 눈을 뜬 이 자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알게 되었지만 자신은 그가 누구인지 아직 눈을 뜨고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언제 예수님을 제대로 보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말을 인하여 유대인들에게서 쫓겨났을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8:34-35절을 합께 봅니다. “봉독”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하셨는데 그 결과는 쫓겨남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자의 어려움입니다. 그러나 이 싸움이 우리에게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인내를 배우고 그로 말미암아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일만 생기리라는 것을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시련이 닥쳐올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으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로 하여금 저 영원한 나라를 향한 소망을 심어주는 것이구나, 하고서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꾸만 소돔과 고모라를 보게 되다가 롯의 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4장의 이 세상의 모습이 처처에 지진과 기근이 난리와 전쟁의 소문이 들리는 것은 예수님 재림직전의 일만이 아니라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세상에 너무 미련 두지 마시고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눈뜬 자의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다가 핍박을 받는다면 누가 영접하러 오십니까?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고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집사였는데 설교 한편하고 돌 맞아 죽었습니다. 이 정도의 능력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큰일을 할 텐데 돌 날아오는 것 그대로 맞고서 죽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성전신앙을 공격하였기 때문입니다.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나서 한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설교한 것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어찌 하나님이 계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전 모독이란 유대인들이 죄인으로 여기고 돌로 쳐 죽일 죄목의 몇 번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소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아무도 보지 못한 내용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좌에 서 계셨습니다. 보좌란 앉아 있는 곳인데, 예수님을 위하여 죽어가는 스데반을 영접하러 일어서신 것입니다. 끝으로 성경 한 곳을 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13:7-17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이 영문 밖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자기 피로써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도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영접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찾는 영원한 도성은 이곳에 없습니다. 오직 장차 나타날 것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눈뜬 자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 서로 선을 행하며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23-31 새가정 2000. 5. 14.
5월은 무슨 달이라고 합니까?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가정의 달이라고 가정을 위한 프로그램과 행사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가정의 달이라고 하여 지난주는 어린이 주일, 오늘은 어버이 주일, 다음주는 스승의 주일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주일이란 주님의 날이라는 말인데 다른 말을 붙혀서 주일이라고 하면 주님의 날이란 말을 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가정의 달이라고 하면서 가정을 주제로 다루면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가정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러므로 가정이 회복되어야 한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심각한 지경에 이른 이혼문제, 이로 인한 결손가정에서 나타나는 자녀들의 탈선과 범죄행위들의 수치를 말하면서 가정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가정생활세미나가 교회에서 인기가 있고 또 부부생활세미나라고 하여 외국까지 여행하는 몇 백만 원짜리 세미나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부생활세미나에 참석도 못할 정도입니다만 그러나 세상에서나 교회에서 가정에 대하여 말할 때마다 기존의 가정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정의 행복과 안전과 발전과 영속을 위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존의 가정을 잘 가꾸고 행복하게 하자는 것이 목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정에 대하여는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 우리의 삶에 맞지 않아서 그렇겠지요. 만약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다면 모든 가정생활세미나, 부부생활세미나라는 것은 설자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존의 가정을 절대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정은 전혀 들어올 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의 말씀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없다는 자세로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어느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서는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결론은 이런 자가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으로 3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하자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이 청년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합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는 수준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 가진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청년이 부자인고로 근심하며 떠나갑니다. 영생의 문턱에서 무엇 때문에 떠나갑니까? 재산이 많아서, 재산을 영생이신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여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서 예수님의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쉽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놀라서 그러면 누가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습니까? 부자이지만 율법을 다 지켰다는 그런 자가 천국에 못 들어간다면 누가 과연 갈수 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느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가로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라 나섰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배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나선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습니까? 그러나 베드로가 나중에 무엇을 못 버립니까?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살기 위하여 예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집과 부모형제를 버린다고 영생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무엇을 버리는 행위로 구원 얻는다면 이단이 되어 버립니다. 많은 이단들이 집안에서 반대하면 버리고 오라고 하여서 집을 버리고 이단의 단체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버리는 것 자체가 그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하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안심이 되십니까? 그러나 주님의 구원을 받은 자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라는 말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29-30절입니다. “봉독”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 형제, 자매, 어미, 아비. 아비라는 글자위에 작은 숫자가 있습니다. 그 글자가 난하주에 있습니다. 무어라고 되어 있습니까? 어떤 사본에는 아비나 다음에 아내가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가정세미나 하는 분은 예수님을 위하여 다 버려도 아내는 버리라는 말이 없다고 하는데 여기서 성경의 다른 사본에는 아내도 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식,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서 몇 배를 받게 됩니까? 백배를 받는 다고 합니다. 이와 병행구절을 봅니다.
마태복음 19:29절입니다. “봉독” 몇 배를 받는다고 합니까? 여러 배를 받습니다. 그리고 내세에는 영생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배를 받든지 백배를 받든지 현세에서 받습니다. 그리고 내세에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현세에서 여러 배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받는 것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버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집, 형제, 자매, 어미, 아비, (아내), 자식, 전토입니다. 8가지입니다. 그런데 받는 것은 집, 형제, 자매, 모친, 자식, 전토입니다. 6가지입니다. 무엇이 빠집니까? 아비와 아내가 빠집니다. 이것이 새가정의 구성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새 가정이 구성됩니까? 하늘나라가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를 침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우리에게 쳐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길이 차단되어 있기에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씀이 수동태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천국은 침노당하는 자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가정을 고수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어가게 되니까 그런 가정에서 분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49-53절을 봅니다. “봉독” 불을 던지러 오신 것입니다. 화평이 아니라 분쟁케 하려고 오셨답니다. 한집에 다섯 사람이 있다면 둘이 셋과, 셋이 둘과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분쟁하는 것입니다. 기존의 세상에 우리가정, 우리가정하고 살던 사람들 안에 복음이 들어가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시인을 하면 요한복음 9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유대교 회당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정 안에서도 이러한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초대교회 때에 일어났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핍박을 받고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하고 가정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때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동일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가정이 행복해지고 세상에서 복을 받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예수를 좋아할까요? 그런 예수님 전하는 사람을 좋아할까요?
가덕도에 어느 강도사님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버리셨습니다, 라고 말을 하였답니다. 예수님을 버리신 사건이란 이 세상을 하나님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예수님의 버려짐 속에 들어 있어야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애쓰지 말고 예수님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전하니 사람들이 전에 목사님이 전하든 것 하고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일 열심인 집사님 두 분이 전에 담임하던 목사님께 전화를 해가지고 목사님이 가르치던 것과는 다르다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자 전에 담임하던 목사가 내가 가르치던 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노회에 고소하겠다고 하더랍니다. 자기가 진리인 모양입니다. 성경적으로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변에서 성경에 있는 대로만 전하여 보십시오. 같이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이라면서 여러분을 핍박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복음이 들어온 사람을 기존의 가정이 기존의 종교단체가 가만히 두지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 버리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쫓겨나는 것입니다.
‘벤허’라는 영화에서 보면 로마군대의 장군이 리디아라는 예수 믿는 여인을 사랑하지요. 그런데 이 장군이 무어라고 합니까? 나를 사랑하겠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사랑하겠소? 그러자 예수님을 버릴 수 없다고 하지요. 사랑의 차원이 다르다고 하자 나무 십자가를 부러트려 버리고서는 화가 나서 갑니다. 물론 영화니까 나중에 돌아와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는 합니다만 이 세상이 예수 믿는 사람을 제대로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분열이 일어나고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잘못하여 미움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자기의 행실이 악하고 게을러서 얻어먹는 욕을 가지고 예수님 때문이라고 핑계하면 안 됩니다. 성경 몇 곳을 봅니다.
베드로전서 4:12-19절입니다. “봉독” 예수님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시련이 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쫓겨날지라도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잘못하여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남의 일에 간섭하는 그런 일로 고난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판이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순종치 아니한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받을 벌이 어떠하겠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5:8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자기의 가족을 안돌아 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의 욕심 때문이지요. 그러면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입니다. 그리고 또 안돌아 보는 자는 어떤 식으로 안돌아 봅니까?
마가복음 7:6-13절입니다. “봉독”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안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서 장로들의 유전을 범한다는 힐난에 대하여 예수님이 사람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고 자기들의 편리대로 해석하는 유대인들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한다고 하지만 마음이 먼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마땅히 자기 부모를 공경하여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돌로 쳐 죽여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부모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신명기의 말씀에 의하면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도 믿음의 부모라면 자녀의 믿음의 신앙교육이란 부모가 담당하여야 합니다. 일주일에 예배당 한 번 오는 것으로 신앙교육 다한 것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부모를 때리거나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모를 교묘하게 속이는데 부모님께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함으로서 마땅히 섬길 부모를 섬기지 않았다면 이것이 바로 자기들이 욕심이요 이용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청년 때에 이런 고민을 많이 하였습니다. 십일조를 가지고 교회에도 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나도 빠듯한 삶에 부모님도 좀 도와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가, 십일조를 반반 나눌까? 교회에만 낼까? 고르반의 뜻을 생각해보았는데 그럴 때 어느 분이 예수 믿는 사람은 십의 삼조를 하고 산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교회에, 십일조는 부모에, 십일조는 구제와 선교에. 그러나 청년 때에 월급을 적게 받아서인지 그렇게 하면 나 혼자 먹고 살기도 힘든 지경이었으니 그렇게 못하였습니다. 이것을 법으로 삼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십일조를 엄격히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부모에게 가는 것이 아까워서 자기 주머니 채우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라는 질문이 나오지요.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십시오.
그러므로 자기의 욕심 때문에 가족을 돌보지 않고서 그들에게서 핍박을 받거나 예수 믿는 사람이 더 인색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하지 않는데도 아내로서 남편에게 세상의 도리를 다하는데도 무조건 예수 믿는 것이 싫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식의 도리를 다 하는데도 오직 예수 믿는 이유만으로 싫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럴 경우를 성경에서 보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7:13-15절입니다. “봉독”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믿는 남편이나 아내와 함께 살기를 원하거든 함께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을 때는 이혼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에 믿는 자가 구속받을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평 중에 하라는 것입니다. 이혼불가가 아니라 이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마음을 품고 자기의 정욕을 쫓아 아내를 내어 쫓을 구실을 가지고 남자들이 모세법을 악용하여 이혼증서만 주고서 이혼하려고 하는 것은 악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인들이란 세상의 법에 메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메이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든지 안하든지 가정을 이루든지 아니든지 간에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29-35절을 봅니다. “봉독” 이렇게 함은 주를 섬기게 함이라. 우리의 현재 상황이 가정을 이루었던, 아니든 처녀이든 총각이든 과부이든 간에 우리의 관심사는 새 가정의 가장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람들이 무슨 기존의 자기 가정만을 위하여 예수님을 끌어드리겠습니까? 마치 집안에 시원한 에어콘이 하나 있으면 행복하겠지요. 시원한 에어콘 하나 들여 놓듯이 예수라는 분을 모시면 행복해집니다, 라는 것이 기존의 가정을 위하여 예수님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되는 것입니다.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도 예수님을 기준으로 새 가정이 도래되었기 때문에 세상의 것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예수 믿는 자를 싫어하여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련 없이 쫓겨나오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종교단체에서 쫓겨나와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쫓겨나와 보니 갈 데가 없지요.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자기처럼 쫓겨난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카타콤입니다.
그곳에 가보니 예수님 때문에 어머니를 버리고 왔는데 어머니가 여러 명 또는 백 명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에게서 쫓겨났는데 형제가 여러 명, 자매가, 자식이, 집과 땅이 그렇게 있더라는 것입니다. 집과 땅이란 다른 형제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주님의 것이니 주님의 백성이라면 함께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론만이 아니라 초대교회 때에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그 형제들이 필요에 따라 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충만한 역사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이란 이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새 가정에 여러 배를 받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내입니다. 새 가정이란 아버지는 한 분뿐입니다. 한 아버지, 한 주님을 모신 새 가정인 것입니다. 천국에는 시집, 장가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와 아내라는 말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신랑, 교회는 신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쫓겨나거나 또는 예수님 때문에 버리고 온 자들이 현세에서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는 영생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과연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자매 된 자를 여러분의 혈육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우리는 새 가정 안에 살고 있습니까? 세상의 그 어떤 가정보다 더 소중하고 더 보배로운 예수의 피로 이루어진 가정에 속한 사람만이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6 양과 목자 2000. 5. 21.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지금 요한복음을 가지고 10개월을 설교하였습니다. 10개월이면 아이가 하나 만들어져 출산되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복음이 무엇인지 말하라면 무엇을 말하여야 할지 감감 하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의 개인적 자질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아는 것을 싫어하는 권세와 세력이 있다는 것을 먼저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계속하여 복음에 접근을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는 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그런 것이구나, 38년 된 병자를 물에 들어가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안식을 주심으로 온전케 하시는 것이구나, 영생을 얻는 생명수와 상관없이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그런 물이 있다면 좀 주셔서 다시는 물 길러 오지 않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그런 여인에게 기어이 생명수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어 믿게 하시는 것이 복음임을 알았지만 돌아서면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살다보니 또다시 은혜는 간곳없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나의 운명을 스스로 지고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내가 이해하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는데 내가 설득당하여 복음을 좋아하는 자리에까지 이르는 것이 복음입니다. 왜 이해하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는가 하면 복음이란 십자가의 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좋은 소식이라고 하면 나에게 덕이 되고 이익이 되어야 좋은 소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나지 못하고 세상에 속한 상태에서 좋은 것이라고는 철저하게 주님의 약속과는 무관한 그런 것만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주시면 될 텐데 좋아하시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좋은 소식입니까?
십자가란 사형 형틀인데 그것은 우리로 함께 죽자는 초대인데 누가 이것을 좋아합니까? 본능적으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실패를 두려워하고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서 한번 잘살아 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인데, 그런 십자가는 거리끼고 미련한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도를 누가 좋아합니까? 그런데도 이런 십자가를 좋아합니다,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자리에까지 이르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내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독교를 소개할 때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죄를 용서해 놓았으니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된다, 라는 식으로 전하면 오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구원을 받아 낼 자격이 있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자가 무슨 수로 예수님을 보겠습니까? 예수님이 직접 가셔서 눈을 뜨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어느 누구도 희망 없다, 가능성 없다, 스스로 구원을 요청할 자가 없다, 라는 것이 복음의 전제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이 제대로 살아나서 눈을 뜨고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어떠한 인간도 스스로 살아나올 수가 없는 죽음의 권세아래 있었다는 것이 전제입니다.
고린도후서 4:3-6절을 봅니다. “봉독” 복음이 이 세상 신에 의하여 가려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머리가 모자라서 복음을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정성이 부족해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신이 혼미하게 하여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이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6절에서 어두운데서 빛이 비치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캄캄한 어둠에서 빛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오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에게 비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여기에서 머무르게 됩니다. 지옥 갈 나를 살려 주셨으니 이제는 그 은혜를 보답해야지, 예수님 나를 살리신다고 고생하셨지요, 이제는 평안히 가만히 계세요, 제가 열심히 주의 일을 하겠습니다, 라는 쪽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그렇게 가르침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구원이후에도 여전히 주님께서 일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금요 구역공부에서 나왔습니다.
금요 구역공부에 못 나오시는 분이라도 오늘 말씀만으로도 복음의 풍성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더욱 풍성한 복음으로의 초대를 위하여 말씀을 듣고 배울 수 있는 시간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이 얼마나 좋았으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배설물로 보여 지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서도 복음의 능력을 맛보시고 세상의 것이 갑자기 시시해보이고 주님의 일하심과 주님만이 뚜렷이 보여 지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이 양의 목자가 된다는 이 사실을 알고 믿는다는 것이 소경이 눈뜨는 사건보다 전혀 모자라지 않는 기적의 사건임을 알아야 합니다. 소경이 눈을 떠는 것이 단지 병고침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20:30-31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의 표적이 많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어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의 목적이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증거하면 알아듣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생명을 얻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지고 사람들이 평소에 좋아하는 것들을 주는 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 천하가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이 땅의 모든 권세와 부귀를 누린다하여도 그 영혼이 지옥가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이란 오직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만을 좇아 달려가는 우리들을 붙들어 세우시고 돌이켜서 영원한 세계를 맛보게 하시고 이제는 반대로 달려가게 하시기까지 하는 능력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능력을 목자와 양의 말씀을 통하여 보고자 합니다.
우선 유대인의 양치기는 이러하답니다. 낮에는 각자의 양들을 들판에서 먹이고는 저녁에 우리에 넣을 때는 공동으로 만든 양의 우리에 넣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침번을 세워서 들짐승이나 도둑이 들지 못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의 특징이 약하고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이 없고 그래서 양 그러면 목자가 반드시 있어야 하듯이 따라 나오는 말인데, 그러나 한 가지 양의 잘하는 일은 자기의 목자의 음성을 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한 우리 안에 집어넣어도 목자가 양떼를 부르면 반드시 자기의 양떼들만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인가 하여 직접 실험도 해보았답니다. 다른 사람이 꼭 같은 복장을 하고서 양을 인도하려고 하여도 양들이 안 따라 오더라는 것을 아주 오래전에 보았습니다.
양의 주인이 아침에 우리에서 몰고 나갈 때 문지기는 양은 확인 안 하는 것입니다. 양의 주인만 확인하고서 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의 목자는 자기의 목소리로 양들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앞장서서 가면 양들은 자기의 주인의 목소리를 알기에 자기의 주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들이 자기의 주인의 목소리를 알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양은 따르지 아니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야 주로 양치기를 하는 사람들인데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을 얼마나 잘 알아듣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6절을 봅니다.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이것이 요한복음 전체에서 아니 성경전체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못 알아듣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으로 오셨는지를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양의 목자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는 것을 보니 너희들은 나의 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목자라고 인도자라고 하지만 그러나 참된 목자를 증거 하지 못하는 목자이기에 강도요, 절도라는 것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자가 참된 목자인데 오히려 양들을 이용하여 자기의 배를 불리는 것이니 너희는 다 절도요, 강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목자가 참된 목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목자,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신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자가 참된 자기의 양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8:47절을 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 하였음이로다” 요한일서 4:6절을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그러므로 제대로 된 양이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입니다. 누가 진짜 목자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누가 진짜 목자입니까? 10:15절에 보시면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죽으심을 본격적으로 언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양이란 자기 목자가 어떻게 죽는가를 아는 양입니다. 진짜 양은 목자의 죽음 속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목자란 자기의 죽음, 즉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 양들을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십자가의 정신이 빠져버린다면 아무리 예수를 주여, 주여, 라고 부른다고 하여도 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목자는 죽음으로 만나러 오시는데 양이 살기 위하여 만나러 온다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늘 실패하는 이유가 무어라고 배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편의와 우리의 완급경중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동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아니라 나의 필요를 채워주고,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나를 더욱 행복하게 해주는 하나님으로 부른다면 가짜 양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만나는 자리가 십자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되면 모든 종교 활동이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즉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십계명에서 우상이란 자기를 위하여 만들어 내는 것이 우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부른다고 하여도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 내라는 신은 바로 금송아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말씀과 어긋나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양이란 자기의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처럼 우리가 바른 성도라면 예수님을 어디에서 만나는가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다 빠졌을 때, 정말 나는 아무 것도 아님을 알 때, 목자가 부르기 전에는 도저히 한 걸음도 목자를 향하여 스스로 나아갈 수도 없는 그런 상태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친히 와서 무엇을 하십니까?
3절에서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내느니라. 자기 양의 이름만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다른 양은 들을 수가 없습니다. 결코 따라올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목자의 음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양은 따라 오기는커녕 도망갑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서 있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자기들은 본다는 자들입니다. 눈을 떴다고 소경의 인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듣고 따르기는커녕 목자의 음성을 듣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이 말씀에 비추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님의 양이 아닌 자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어떻게 합니까? 도망갑니다. 그러면 주님의 양은 어떻게 합니까?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도 좋다고 따라 나설 자가 누구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하여 살지 말고 영원한 것을 위하여 살자는 말씀을 누가 따르겠습니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즉 족한 줄 알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누가 좋다고 따르겠습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을 듣고 누가 따르겠습니까?
갈라디아서 6:14절을 봅니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새번역으로 보니 좀 쉽지요. 내가 세상을 보니 세상은 무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나를 보면 내가 무덤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게 이러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극기 훈련하여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양에게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라는 것은 이러한 십자가를 전하였을 때 따르는 자가 있으면 주의 양이고 따르지 않고 도망가면 주님의 양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사람을 꼬이는 것이 아니라 누가 진짜 양인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가짜 양을 많이 모아 놓았다고 진짜 양이 아니지 않습니까? 몇 년 전에 어느 목사님이 헌신 예배시에 십자가의 도를 전하시면서 사람들이 열사람 정도 모인 곳에 개들이 많이 모였다고 그 개들을 사람 수에 넣는가 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예수님께서 자기의 양들을 불러 내시는데 어떻게 불러내시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통하여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좋게 하여서 나중에 십자가를 전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은 이미 틀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양만 불러내시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면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반드시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하신 자들은 그 음성을 듣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이 없기에 자꾸만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기독신문에서 이런 사설이 실렸습니다. 교회의 상업화, 안될 말이다. 그 내용에 몇 가지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어떤 주일학교에서 쿠폰을 나누어 주게 하고서는 그 쿠폰을 가지고 오는 아이에게 현금을 5,000원씩 주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는 인기 코미디언을 초청하였답니다. 그리고 어떤 교회는 헌금하는데 인센티브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구마다 헌금 할당액을 정하고 초과달성하는 교구의 교역자에게 성과급을 후하게 주었더니 간단하게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사람을 모아보자는 식으로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문제는 그 신문의 광고란이 거의 사람 꼬이는 내용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현금을 5,000원 주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으로 가득 찬 광고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매춘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디에 버려두었습니까? 예배당에 십자가는 폼으로 메달아 둔 것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초대하는 것은 십자가에로의 초대입니다. 어느 유명한 사람의 글에 행복에로의 초대라는 책이 있는 데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함께 죽자는 초대입니다. 그러니 누가 이 초대에 응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이러한 십자가의 부름에 응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주님의 양인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재림이 임하지 않은 것은 아직도 주님의 양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사람 꼬여서 자기 교회 교인 수 확보하는 차원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양이 누구인지 십자가만을 증거 하여 분리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양이라면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교회를 따르거나 목사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양이 아니라면 교회를 다르고 목사를 따를 수는 있어도 예수님을 따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길인데도 따라 나선다는 것은 사람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복음이 복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능력 안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만을 따라 사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0:7-10 양의 문 2000. 5. 28.
생존을 위하여 사는가? 생명을 위하여 사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생존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을 얻기 위하여 생존을 포기하는 삶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지고 있는 수많은 종교행사들이 생명을 말하기 보다는 생존에 어떤 보탬이 되는 쪽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곳에 와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보탬이 되리라고 생각하신 분이 없으시겠지만 혹시라도 계신다면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하시고 새롭게 생명의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람이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은 자기의 이익과 결부되어야 행동을 합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행동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희생하고 봉사하는 행동도 있지 않느냐고 말하시겠지요. 자기의 이익이 아니라 남의 이익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한두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자기를 돌보지 않고 남을 위하여 희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그러한 희생과 봉사가 세상의 다른 것보다 훨씬 뿌듯하고 기분 좋은 유익을 알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하고 살아 보시면 얼마나 행복하신지를 알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예수를 믿고서 사랑하고 희생하고 봉사하자라는 것이 일차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나중에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나서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랑을 입은 자로서의 반응이 나타나는 것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그러한 봉사나 윤리 도덕적인 일을 하기위한 기독교라면 그것은 세상의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무엇입니까?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생명을 우리가 스스로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명 존중하는 그런 생명은 하나님 앞에서 이미 죄로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성경을 통하여 인간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죽어 있기에 행동하는 모든 행동이 악한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입만 벙긋하면 그 속에 가득한 썩고 부패한 것이 나오는 것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2:22절 말씀에 인간은 수에 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수를 헤아린다는 것은 무언가 가치가 있을 때에 수를 헤아리는 것입니다. 완전히 썩어버린 것은 수를 헤아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몽땅 폐기처분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배추가 속대가 올라오면 상품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김해에서 배추 농사를 지은 사람이 배추를 갈아 엎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갈아엎을 때에 수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수를 헤아릴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인간입니다. 좀더 낫게 말한다고 하여도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요 바람이요 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 하나님을 모르는 것, 이것이 죄이고 이것이 저주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것, 그 안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고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며 사는 이런 세상이 저주 받은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잘되고 더 사는 그런 차원이 전혀 아닌 것입니다. 이런 악한 세대에서 떠나자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서 우리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자, 그런 말을 많이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삶의 자세입니다.
지난주에 양과 목자에 대하여 말씀을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양을 치는 일을 잘 아는데도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7절 말씀에서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시되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는 강도요 절도라고 합니다.
1-6절에서는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가 절도요 강도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자신이 양의 문이기에 자신을 통하여 들어가지 않으면 강도요 절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문이라는 것입니다. 양의 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을 들어가야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거부하는 자가 모두 강도요 절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일차적인 대상은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은 다른 이방인들은 구원을 못 받아도 자기들을 다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선택하시고 선지자를 보내시고 율법을 주시고 세계 열방 중에서 자기들에만 계시를 주셨기에 자기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어려움도 메시아만 오면 모든 정치 경제 등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여 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자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망가시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왕은 이미 사단의 세 가지 시험 중에서 거절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이런 것을 준다는 것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절한 것을 자기들이 준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잘 분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 때나 지금이나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끊임없이 생명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못 알아듣는 이유를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자기들은 다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이방인이라도 구원을 얻으려면 자기들처럼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으로 개종을 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다 불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불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구원 얻는 문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율법입니다. 율법의 울타리 안에 있어야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은 이미 저주 받은 자요, 또 유대인이라고 하여도 율법의 기준에 들지 못하면 저주받은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율법의 문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을 말하고 있으니 유대인들이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못 알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하니 이런 자를 죽여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문을 거부하는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가입한 것은 죄를 더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율법을 주신 것은 어느 인간도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 얻을 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는데 오히려 자기들은 율법이 있으니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이 은혜로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신 것이 율법보다 400년이나 앞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00년 후의 율법이란 왜 은혜로만 구원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차원에서 율법이 개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온 것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19-20절을 봅니다. “봉독” 율법은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 얻을 자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양의 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행위로도 스스로의 구원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체가 가만히 있으면 냄새라도 덜 날 텐데 무언가 선한 일을 한다고 움직이면 악취만 더 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유대인을 선택하시고 율법을 주신 것은 인간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뜻을 모르고서 교묘하게 율법의 정신을 변질시켜서 자기들의 수준으로 깎아 내리고서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가지고 무어라고 적용하고 사는 것입니까? 모세법에 이혼하려면 이혼증서를 주고서 이혼하라는 것을 가지고 오히려 자기들의 아내가 싫증나니까 새로운 아내를 취하고 싶어서 이혼증서를 내어 주고서 이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시자 그러면 장가가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학인하고 싶으십니까?
마태복음 19:10절입니다. 그렇다면 장가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이 율법을 가지고 적용한다고 하는 인간의 수준입니다. 모세가 인간의 악함을 인하여 이혼을 허락하였는데 이혼증서를 주는 것은 여인을 보호하는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나가, 그러면 그냥 나가야 되는 것이 유대사회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하자 그러면 장가 안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혼도 못하면 무슨 재미로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율법의 정신을 어떻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마음에 음욕을 품어도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다른 생각 안한 사람이 있습니까? 율법을 가지고 교묘하게 자기들이 이용하고서 나는 율법을 지킨 의인이다, 라고 구원받는다고 하는 자들에게 이 예수님의 말씀을 적용하여야 합니다. 그분이 아닙니다. 형제에 대하여 욕 한 마디 하여도 이미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이란 우리의 죄 아래 가두어 버리고 심판아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전제이고 복음의 전제입니다. 이것이 확인되지 않으면 예수님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이용하여 그저 우리 가정, 우리 사업, 우리 교회 잘되게 하자는 식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일차적으로 강도요 도적이라는 지적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라는 것을 거절하니 강도요 절도입니다. 다른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자꾸만 다른 것을 섞어 넣는다면 절도요 강도입니다. 사람의 행위를 개입시키면 안 됩니다. 교회란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입니다. 부동산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저께 편지가 하나 왔는데 어느 교회에서 예배당을 짓고서 빚을 갚지 못하여 경매처분에 넘어 가게 되었다고 긴급히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무어라고 하는가 하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경매위기에 처하여 있습니다. 도와주세요, 라고 합니다. 물론 그 분의 위기는 인정을 한다고 하여도 주님의 몸 된 교회는 경매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가 어떻게 법원 경매에 넘어갑니까? 음부의 권세가 죽음의 권세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러니 이분은 지금 부동산 건물을 주님의 몸 된 교회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배당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니 도와주십시오, 하면 모르겠는데 이러한 호소를 하고 있으니 이것이 오늘날 우리 주변의 분위기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만이 양의 문이 되는 것을 거부함으로 절도요 강도가 되듯이 오늘날 우리주변에도 절도와 강도가 많습니다. 예수님만으로는 부족한 듯이 말하는 모든 자가 절도요 강도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은혜로 되었지만 그 이후에 복을 받고 천국에서도 상급을 많이 받아 내기 위하여서는 우리가 행하여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복음을 오해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하여 우리 보고 하시라고 하였겠습니까? 은혜에 보답하자고 합니다. 갚을 수 있는 은혜는 은혜가 아니고 삯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전도와 봉사와 섬김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훈련과 성숙, 즉 하나님의 사람됨을 원하는 것이지 우리의 업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구원만 하시고 지금은 팔장끼고 계시면서 너희들이 대접을 잘해보아라, 그러면 내가 복을 주마, 그러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일하고 계심이 있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9-10절을 봅니다. 예수님이 문입니다. 구원의 문입니다. 이 문을 통하여 들어가고 나오며 꼴을 얻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양들에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어떻게 하신 것입니까? 자기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밤에 어린양을 잡아 피를 바른 것은 무엇을 보호 받는 것입니까? 생명이 보호되는 것입니다. 재산 보호를 위하여 어린양의 피가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를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것들에 도입하는 모독을 행치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5:1-7절을 봅니다. 이것을 전도하는 일에 자주 사용하시는데 목자가 양을 찾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누가 찾아 나섭니까? 목자가 나섭니다. 그리고는 어깨에 메고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주님에 의하여 찾아진바 되고 주님께 붙들려 여기까지 와있다는 사실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 그래서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더욱 풍성히 얻어가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0:11-18 선한 목자 2000. 6. 4.
시편 23편을 함께 봉독합니다. “봉독”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합니다. 다윗의 시편인데 다윗은 왕으로서 자신을 양으로 생각하고 주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어 주신다는 것을 시로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겼었습니까? 장인이 죽이려고 군사를 풀어 쫓아오는 그런 위기 속에서 외국으로 망명 갔다가 미치광이 짓을 하고서 살아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황무지와 광야의 동굴로 전전하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편을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다윗이 왕이 되어 편안히 지낼 때 이런 시편이 나온 것이 아니라 참으로 위험한 순간순간에 이러한 시편이 나왔다는 것입니다.그러면 그러한 환난 가운데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주님을 찬양하는데 오늘 우리는 예수님만으로 부족함이 없으십니까? 예수님만 계시면 만족하십니까? 쉽게 아멘이 안 되시죠?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목자라고 하면서 왜 부족함을 느끼고 살고 있습니까?
황두용 목사의 글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현대인들은 사자와 호랑이 같은 용맹스러운 삶을 동경하면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하고 있다’라고 합니다. 예수님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양으로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자나 호랑이처럼 목자가 없이 독립적으로 자기의 삶을 개척하여 사는 그런 자세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목자라고 부르면서 예수님만으로 만족을 못하는 괴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의 성공담이라는 것은 사람이 어려운 환경가운데서 불굴의 의지로 투쟁하고 개척하여 출세하였나를 성공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성공시대입니다. 또 모든 위인전이나 자서전이라는 것이 모두가 인간의 용기와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도 성공담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여 성공하고, 이삭은 이렇게 하여 성공하고, 야곱은 이렇게 하여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인물도 자기의 능력으로 성공하였다, 라는 그런 관점에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스스로가 독립하여 행동하려는 것을 오히려 죄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의 인물들이 한결같이 드러내는 것은 주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왕이면서도 자신의 개척정신이나 불굴의 투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호와 인도가 없이는 하루도 살수 없는 양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글에서 양의 특징에 대하여 본적이 있습니다. 양은 지독히 근시라서 목자가 없이 길을 다닐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에선 양이 언덕으로 굴러 떨어지면 다음 양도 그냥 그리로 가서 굴러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격용 무기가 없지 않습니까? 스스로 방어할 능력이 없는 것이 양의 특징입니다. 그러니 양이란 목자 없이는 스스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으로 양과 목자와의 관계를 주님과 성도와의 관계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는 것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것입니까? 전능하신 능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능한 능력으로 인도하신다고 하니까 자꾸만 알라딘의 램프처럼 그런 초능력자로 생각하시는 경향이 있는데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원하시는 사람, 목자가 원하시는 양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인도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원하시는 방향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조그마한 어려움만 닥치면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양으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늑대요 이리요 여우요 사자와 호랑이처럼 자기의 삶을 자기가 이루어 나가겠다는,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더 우뚝 서서 성공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살기에 주님이 나의 목자가 되신다고 말은 하면서도 주님만으로 만족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우리는 주님의 양이 아닌 것입니다. 혈통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이스라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더더구나 양의 모양도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생존경쟁 속에서 어떻게 하면 사자와 호랑이처럼 먹이 사슬의 최고의 자리에 이를까만 염두에 두고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약육강식의 세상 속에서 살다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도 나의 생존경쟁에 보탬이 되는 차원에서 예수를 끌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 나는 갈 길도 모르는 어린양이오니 나를 인도하소서, 라고 하기 보다는 이미 자신의 야망 찬 계획과 위대한 비전을 이미 확보하고서 주여 이것을 이루어 주옵소서,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멋지게 영광 돌리겠습니다, 라는 엉터리 같은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양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시편 23:3절에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허물과 죄로 죽어 있습니다. 주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 사는 것이 죽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입니다. 기존의 우리에 들어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한 자들을 주님께서 한 우리에 넣어서 한 목자가 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관심사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것과 또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의 소생이나 의의 길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선뜻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우리의 죄인됨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우리의 관심이 세상적인 것으로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질기고 질긴 호랑이, 사자 같은 가죽들이 좀 찢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왜 오셨는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부자 되고 성공하는 그런 삶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을 소생하고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0:11,15절.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으로 양의 그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인도를 받는 것은 세상의 평안이나 형통의 길이 아니라 의의 길입니다. 의의 길이란 세상이 알지도 못하는 길입니다.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 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이 없다면 더더구나 갈수가 없는 길입니다.
이 인도와 보호를 위하여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부활하셔서 성령을 보내셔서 지금도 자기의 양떼를 빈틈없이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도와 보호하심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도와 보호가 어디로 향한 인도와 보호입니까? 의의 길로 가도록 하기 위한 인도와 보호입니다.
그런데 선한 목자와 비교하여 삯군이 나옵니다. 이는 이리가 오면 도망가는 것입니다. 자기 양이 아니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일차적인 대상은 유대인들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자기들이 선생이라, 인도자라 하면서도 선한 목자에게로 인도하지 아니하는 삯군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목자라고 하면 자꾸만 목사를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요구하는 목사상이 겸손하고, 청빈하고, 인자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화내지 않고 부드럽고, 온화하고, 저금통장도 하나 없고 이런 쪽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좋은 목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희생한다고 하여도 목사는 죄인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지신 분은 따로 계십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할 일이란 십자가를 지신 선한 목자가 따로 계신다는 것을 끊임없이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목사를 세우신 이유는 자기 양을 삼으라고 목사를 세운 것이 아니라 선한 목자가 따로 계심을 보여주어야 하고 증거 하여야 하는 것이 교회에 목사를 둔 이유입니다.
사도행전 20:28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자기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양떼를 치는 것이 목사의 일입니다. 감독이라고 하지요. 무엇을 감독하라는 것입니까?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분의 공로가 방해받지 않도록 감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가 아닌 다른 것이 슬며시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목숨을 걸고 막아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공로나 땀이나 피가 섞이지 못하게 감독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들어오지 못하게 감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양을 자기 양으로 삼아 자기의 이익을 채우려는 자가 삯군입니다.
에스겔서 34:1-24절까지를 봉독합니다. “봉독” 여기에 보면 삯군에 대하여 나옵니다. 양떼를 자기의 이익의 재료로 삼는 것입니다. 양떼를 잡아먹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자에게 양떼를 맡기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자기의 양떼를 인도하여 내어서 친히 목자가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목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양들 사이에서도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밀치는 것에 대하여 책망을 합니다. 그러니 목자와 양을 다 책망하고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자기의 양떼를 인도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번 적용을 하고 갑시다. 먼저 목사인 나는 삯군이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저는 보나 마나 삯군입니다. 매달 삯을 받고 있으니 당연히 삯군입니다. 그리고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는커녕 삯을 올려주면 기분좋아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예를 들자면 공동의회에서 제가 원한 것이 아닌데도 여러분이 차를 사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중고 티코를 구입하여 5년 정도 타고 다니니 고장이 많이 나서 수리 중에 있는 것을 누가 보았고 이야기가 나온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작년에 워낙 교회 사업을 하지 않아서 이월금이 좀 많아서 인지 차를 하나 사기로 공동의회에서 결의하였는데 목사 차산다고 재정이 마이너스가 나면 모양세가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천천히 하라고 하였는데 몇 달이 지나고 차를 사기에는 재정이 빡빡한 것입니다. 그러자 무슨 생각이 드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왜 헌금을 안 하노,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교인이 아닌 다른 사람과 이런 이야기를 하였더니 아니 목사님도 그러세요, 그러니 목사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좋겠지요, 하더라구요. 당연한 말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럴 경우가 있지도 않겠지만 어느 큰 교회에서 월급도 많이 주고 대우도 잘 해줄 테니 오라고 한다면 저는 아마 갈 마음이 있을 겁니다. 이런 말을 하여서 저 목사 솔직하다 하여 또 다른 인기를 바란다면 이것이 또한 사기꾼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까? 선한 목자가 누구인가를 증거하기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양떼도 책망을 받습니다.
17-22절까지입니다. 좋은 꼴을 먹고 좋은 물을 마신 것을 작은 것으로 여겨서 다른 약한 양들이 먹지도 못하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진 양과 그들의 등살에 못 견뎌 파리해진 양 사이에 주님이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심판을 목자와 양에게 하신 후에 다윗을 목자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미 죽은 사람인데 다윗을 세우겠다고 하신 것은 다윗과 언약하신 그 영원한 왕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한 목자를 세우셔서 친히 그들의 목자가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4-16절을 봅니다. 예수님이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선한 목자는 양우리에 들지 않은 양까지 인도하여 내셔서 저희도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는 한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사야 53:6절에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저에게 담당하셨도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란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이분만을 소개하지 않는다면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11:20절에서 바울 사도는 자기가 전한 복음을 방해하는 육체의 행위를 자랑하는 자들의 말을 듣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책망을 합니다.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구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양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주님만이 참으로 선한 목자입니다. 그분의 음성만을 제대로 듣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양이라면 반드시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분이 친히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기에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적신이 되어도 그 인도와 보호하심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7-21 목숨을 버릴 권세 2000. 6. 11.
10여년 전에 어느 목사님이 유교와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며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물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는 나올 수가 없어서 살려달라고 고함을 지릅니다. 그런데 그때 유학자가 지나다가 말하기를 사람이 늘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지, 하고는 지나가더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목탁을 두드리며 지나가던 스님이 그 광경을 보고는 모든 것이 업보요, 하고 지나가더라는 것입니다.
드디어 기독인이 지나다가 그 광경을 보고서 물에 뛰어 들어 그 사람을 건져내고서는 자신이 죽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독교를 대신 죽은 것이라는 것으로 표현하고자 그렇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러나 복음이란 단순히 대신 죽었다는 것보다도 훨씬 더 깊은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살려달라고 소리라도 지르지만, 죄에 빠진 사람은 살려달라고 소리치기는커녕 죄를 짓는 것이 너무 좋고, 죄 속에서 사는 것이 그들의 생의 목표이기에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신다고 하면 오히려 화를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신다고 말하지 않고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잘된다고 말하면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적하고 죄의 삯이 사망이며 심판이 있음을 말하면 싫어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런 죄를 지적하는 것도 단지 윤리 도덕적인 죄만 지적을 하게 되면 그런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자기는 죄인 아닌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간음 말라, 살인 말라 그러면 기존의 세상적인 법적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그런 죄 안 지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음욕을 품은 것이 이미 간음하였습니다. 탐심이 우상숭배입니다. 남을 미워한 것이 살인한 것과 같은 죄입니다. 행위만이 아니라 이미 죄인이기에 죄의 동기, 죄의 권세, 죄의 힘이 사람을 사로잡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란 죄의 목록이 아니라 경향성입니다. 사람을 가만히 두어도 죄가 나오는 것이면, 아무리 좋은 환경이 주어져도 끝없는 죄가 나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하고 오히려 죽여버린 이 세상이 죄의 지배아래 있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면 죄의 심각성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죄로 가득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죄인을 위하여 예수님이 죽으시지 않으시고는 해결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조차 예수님의 죽으심을 잘못 이해하고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흔히 하는 오해란 내가 2,000년 전에 유대땅에서 살았다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 개의 못’이라는 노래의 가사에 보면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노래를 할 때 정말 그 때 그 무리가 아니라 바로 내가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말하기를 내가 그때 있었다면 못 박아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들도 있었으니 나는 아마 믿는 무리 중에 있었을 거라고 착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들이 2,000년 전의 사람들과 꼭 같은 생각입니다.
마태복음 23:29-36절입니다. “봉독”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면서 우리가 그 시대에 있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니 너희가 그들의 후손임을 스스로 증거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 조상의 양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과거에 그렇게 하였지만 앞으로도 예수님이 보내시는 자들을 그렇게 대접하는 것이 이 세상의 일입니다. 이미 신약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당하는 고난을 통하여 증명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른다고 인간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오늘날도 순교자들의 무덤을 꾸미는 자들이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무덤과 비석을 세우면서 이것이 우리의 전통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순교자를 배출한 교파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비석을 세우고 기념관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치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높이 세워진 십자가, 찬란한 네온사인으로 조명되는 십자가가 서로 서로 경쟁하듯이 세위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에 과연 십자가의 정신이 살아있는 것입니까?
기장교리교회 방문을 한 집사님들이 이 교회에는 왜 십자가가 없느냐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십자가 탑이 없는 것은 처음에 세울까 말까 하다가 자금 사정도 여의치 않고 하여 세우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그렇게 지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에 십자가가 네온사인으로 밤하늘을 수놓는 십자가를 생각하고 있지만 그런 십자가는 없습니다. 처절한 죽음의 형틀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십자가가 악세사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목걸이, 반지, 집안에, 차안에 십자가 장식물이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장식물이 아닙니다. 성도님들도 십자가를 목걸이로 하고 계시는 분이 계시겠지만 그것이 어떤 부적처럼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러므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드라큐라’ 같은 공포영화 같은데서 십자가를 들면 귀신이 물러가는 그런 식의 십자가는 없습니다. 그런 것이 십자가의 정신을 흐리게 하는 사단의 작전입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일말의 그런 십자가의 형상을 악세사리로 가지고 계시다면 속히 철거를 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물고기 모양의 표적도 부치고 다닙니다. 헬라어로 물고기가 ‘익투스’인데, 다섯 글자로 되어 있는데 그 글자의 하나씩을 약자처럼 사용하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 구원자라는 단어의 첫 글자가 됩니다. 이것을 모으면 익투스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상은 성도들이 핍박을 받을 때 자기들끼리의 암호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것을 차 뒤에 붙이면서 다니는 이유가 무언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붙이고 신호를 잘 지키고 양보를 잘하는 것도 아니던데 부적처럼 붙이고 다닌다면 속히 그런 것도 떼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물론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바르게 운전하겠습니다, 그러고 싶으면 운전석 앞에 잘 보이게 붙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형상으로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를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나도 날마다 죽는다는 생각을 늘 하시는 십자가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십자가가 하나의 형상으로 걸어지게 되면 가톨릭의 서물숭배가 될 수 있으면 이런 것을 여호와의 증인은 우상숭배라고 공격을 하게 됩니다. 물론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의 온전하신 구속을 막을 방법으로 그렇게 합니다만 우리가 십자가를 꾸미는 자가 될 수 있는 죄인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 당시의 사람들이 악하여서 예수님의 말씀을 잘 못 알아듣고 예수님을 죽여 버렸다, 그 사람들이 말을 잘 알아들었다면 죽이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통일교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그렇게 신문에 광고가 나오지 않는데 몇 년 전, 약 10여년 전에만 하여도 종종 전국적인 신문광고란에 ‘누가 예수를 죽기 위하여 왔다고 하는가?’라는 제목의 광고를 통하여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지 죽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고 아주 논리적으로 성경의 구절을 들어가면서 광고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야 예수님의 구원이 반쪽 구원이기에 문선명이가 있어야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자기들의 주장을 펼치기 위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8절에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사람들이 무지하여 잘못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앞뒤를 보면 인간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죄 아래 있기에 절대로 주님의 영광을 알아볼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죽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 무지한 사람들 주님의 영광을 알기는커녕 오히려 죽이는 그들을 자기의 죽음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처음에 예를 들은 내용은 살려달라고 고함을 치는 것은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관한한 모든 인간들은 살려달라고 요청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살려달라고 요청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구원하시는 길은 자신이 죽음으로 살려내는 것뿐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예수님은 자신이 스스로 죽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힘없이 잡혀 십자가에 처절하게 죽는데 어떻게 스스로 죽는다는 말인가 할 것입니다만 그러나 이 십자가로 스스로 걸어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연히 실수로 죽인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죽으심을 통하여 인류의 배후를 사로잡고 있는 그 실체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인류가 스스로 잘한다고 살아온 모든 것이 결국 마귀의 조종아래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이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들도 역시 별 볼일 없이 죄의 권세아래 있었다는 것이 십자가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1, 17:22절. “봉독”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어라고 하십니까?
오늘 말씀 요한복음 10:17-18절입니다. 목숨을 예수님에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죽으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감히 예수님을 죽일 수가 있습니까? 베드로가 칼을 들고 말고의 귀를 벨 때에 예수님이 지금 내가 명하여 하늘의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할 수 없어서 이러는 줄 아느냐, 이렇게 되면 아버지의 뜻이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천사 한명만 와도 앗수르 군대 18만 5천명이 하루 밤 사이에 다 죽어 버리는데 열두 사단 더 되는 천사가 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잡혀 가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자기 비우심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마음을 비운다고 하여도 다 계산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기 비우심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 순종이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버리시고 버리시는 권세가 예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버릴 권세가 없는 것입니다. 자살한다면 버리는 것이 아니냐고 할지라고 이미 그 배후에 사망이 왕노릇 하기에 자살한다고 자기 목숨을 스스로 버렸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죽을 권세가 있고 더 놀라운 것은 얻을 권세도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10-11절입니다. “봉독” 빌라도가 죽이고 살릴 권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죽는 것이며 이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기에 십자가를 지는 것이지 빌라도 너의 권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는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백성의 죄를 지고서 대신 죽으신 죽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이 세상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6-14절을 봅니다. “봉독” 십자가의 비밀은 세상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죽으셨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한 자만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12절). 이러한 은혜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인데 눈으로 보지도 귀로 듣지도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밀은 육에 속한 자는 받을 수가 없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은 자는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목숨을 버릴 권세를 가지고 죽으심으로 아버지께서 택하시고 붙여주신 자들을 살리신 것입니다. 또한 버릴 권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얻을 권세도 있는 것이 예수님이십니다. 이 길을 스스로 자기를 비우셨기에 가신 길입니다. 자신이 비우시고 그 비워진 자리에 아버지의 뜻이 세워진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통하여 드러난 것입니다.
이러한 비밀, 이러한 은혜를 받은 주님의 백성들도 이제는 목숨을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살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기의 자존심이 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명예가 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모습을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하심,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죽음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살아야 돼, 죽으면 안돼, 그러고서 삽니다. 살아야 한다는 것은 단지 목숨을 부지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랑하는 삶, 뛰어난 삶, 영웅적이고 남을 지배하고 싶은 그런 삶입니다. 이러한 것이 사라질 때 사람은 자살까지 합니다만 이러한 죽음은 목숨을 버리는 권세가 아니라 오히려 사망의 종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주님의 은혜가 임하고 나니 어떠한 삶이 드러나는가 하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세상의 가치관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존심 상하여 말도 못한 부끄러운 이야기, 자기의 약함을 스스럼없이 내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아가 죽은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이 나타나는 것은 다른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 와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세상의 것으로 삶의 목적을 삶고 있다면 방향이 아직 제대로 잡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살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하여 사는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싸움이란 한편이 죽지 않아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소한 다툼에서 지역적인 갈등, 국가적인 갈등과 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자기가 살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 또 자기는 남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 일어나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성도란 이제 그런 싸움은 끝이 난 사람입니다. 십자가에서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스물 스물 기어오르는 나는 살아야 돼, 하는 것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초대란 그러한 우리가 함께 죽고 이제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에게도 나타나서 사망의 종에서 벗어난 생명의 종의 모습으로 살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요한복음 10:22-30 빼앗을 자가 없다 2000. 6. 18.
지금 남북의 정상이 만나게 된 것을 가지고 세계가 예민하게 반응을 보입니다. 겉으로는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라고 그래서 서로가 만나고 통일되는 것이 좋다, 라고 하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원하지 않는 나라들이 많은 것입니다. 자국의 이익을 따라 손익계산을 부지런히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바로 전쟁입니다. 총칼을 든 전쟁이 아니라 정치와 외교와 경제적인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빼앗으려하고, 또는 빼앗기지 아니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모두가 눈에 보이는 이런 전쟁만 생각을 하고 삽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도 아직 발을 이 땅에 딛고 있기에 이런 전쟁에 관심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는 남북통일보다 우선되는 것이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남북이 화해하고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고 경제협력으로 살기 좋은 나라, 21세기의 강한 나라가 된다고 하여도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죄와 사망의 권세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향한 집중력이 잠시 잠간 만에 빼앗길 수 있다는 것에 놀라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계시하고 있는 것이 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남북의 장미빛 미래보다 더욱 관심을 가지고 우리의 온 마음과 뜻과 몸을 다하여 주님의 뜻을 알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성도의 자세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 빼앗기지 않는다는 말씀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28-29절입니다. 28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내손에서 빼앗아 갈 자가 없다, 라고 하십니다. 29절에서는 저희를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런 말씀은 전쟁에 관한 표현입니다. 빼앗고 빼앗기는 것입니다. 이런 전쟁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시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전쟁, 즉 영적 전쟁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삶의 방향이 잡히는 것이고 믿음의 방향이 잡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권투선수가 허공을 향하여 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때가 수전절입니다. 수전절은 율법에서 지키라고 하는 절기는 아닙니다. 기원전 160년대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는 사람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집니다. 그것을 마카비라는 지도자가 성전을 다시 짓기 위하여 12월중에 일주일 동안을 헌신절로 만들어 민족의 절기로 정하여 성전도 새로 짓고 또 지은 성전을 보수하기 위하여 헌신의 절기로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절기에 예수님이 솔로몬의 행각이라는 곳에 다니시는 것입니다. 이때에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질문합니다. 언제까지 당신이 우리의 마음을 의혹케 하려고 그렇게 말합니까? 당신이 메시아라면 속 시원히 밝혀 주시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이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으나 너희가 믿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하신 일이 충분히 메시아임을 증거하였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이미 다른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메시아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메시아가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을 새번역에서는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려고 합니까, 라고 합니다.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도록 하는지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속 시원히 터놓고 메시아인지를 밝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인 것 같습니까? 우리가 그동안 요한복음 1장에서 10장까지를 약 11개월에 걸쳐서 보고 있습니다만 예수님이 과연 어떤 메시아입니까? 병고치고, 먹을 것 해결해주고, 그러니 유대인들이 이는 우리의 메시아다,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억지로 자기들의 임금 삼으려고 하니 예수님은 도망을 가십니다. 이것은 나는 그런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 그런 문제를 해결하러 온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북문제 해결하러 오신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헷갈리는 것입니까?
그 행하는 능력으로 보면 무엇이나 이루어 줄 것 같은데 자꾸만 꽁무니를 빼는 것처럼 보이니 얼마나 답답한지 제발 당신이 메시아인지 아닌지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취를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메시아라면 확실히 따라 갈 것이고 아니라면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나는 이미 말하였고 나의 행한 일을 통하여 메시아임을 증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희가 믿지 못하는 것은 왜 믿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26-27절입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메시아를 선택하여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너희가 나의 말을 믿지 못하고 나를 따르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말씀 앞에서 다시 한번 심각한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의 양인가를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제대로 알아듣고 따라 가고 있는가를 점검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신을 선택하고 종교를 선택하여서 가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나에게 더 유익이 있겠는가를 계산해보고서 따르든지 말든지 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할 때에도 계산을 한번 해보고서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계산을 해보시고 지금이라도 아니라고 생각이 되시면 그만두시는 것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영 아니다 싶으면 중간에 그만두는 것이 낫지 끝까지 밀어붙이다가는 끝까지 간 것만큼 손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다 싶으면 빨리 손 틀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소개받을 때에도, 또는 소개할 때에도 언제나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먼저 좋은 말들을 하여서 현실적인 이익들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저의 어머니가 무어라고 하시는가 하면 그래가지고 예수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너희 교회가 그렇게 크지도 않다고 하던데 제발 좀 살살 하라고 합디다. 처음에는 좀 살살 하고서 나중에 가서 좀 강하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교인들 다 가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가 하는 염려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새벽기도회 때 본 말씀입니다만 다시 한번 보고자합니다.
누가복음 14:28-32절을 봅니다. “봉독” 망대를 지을 때 거기에 소요될 경비를 예산해보고서 짓는 것이지 하다가 모자라면 비웃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전쟁을 할 때도 지피지기를 해보고서 안 되겠다 싶으면 화친을 하는 것이 낫지요.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다가는 오히려 더 큰 낭패를 당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계산을 해보고서 이런 일을 하듯이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계산을 해보고서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25-27절을 봅니다. “봉독” 이 계산하라는 말씀은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시고서 너희가 무엇 때문에 나를 따르려고 하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나를 따른다는 것은 이런 것이니 미리 계산해보고서 아니다 싶으면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나를 따른다는 것은 부모와 처자식 형제자매와 및 자기의 목숨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나를 따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33-35절입니다. “봉독”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따라 오라는 것입니까? 오지 말라는 것입니까?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따라 갈 수 없는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계산하고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이 세상의 것이 모두 없어져도 다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심지어 나의 목숨까지 죽어진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습니까? 대답하시기가 곤란할 것입니다. 제가 5년 전에 6만 킬로미터를 탄 티코 중고를 사고서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카렌스 새 차를 얻었으니 기분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침에 새벽기도회 오면서 차 한번 보고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서 한번씩 봅니다. 혹시 긁힌 데는 없는가 하고서 보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소유가 많아지면 이렇게 걱정거리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제 친구목사에게 하자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자기는 봉고를 36개월 할부로 구입하고서 밖에 세워 두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기도 하기 전에 차의 안부부터 먼저 챙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그런데 저 차를 오래 타다가 더러워지고 고장이 나면 또 싫어지고 더 나은 차를 구입하였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 아닙니까?
그러니 예수를 믿으면서 나의 것을 버리기는커녕 나의 소유를 보존시켜주고, 확대시켜주는 예수님, 거기다가 천국까지 보내주는 그런 예수님을 우리가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는 이런 말씀을 통하여 중간 결산을 해보고서 가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예수를 믿고 가면 무엇이 나에게 주어질 것인가 계산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를 믿는다고 수십 년을 믿어 왔지만 아직도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인지 땅에 속한 눈에 보이는 것을 주시는 메시아인지 아니면 이 땅의 것이 아닌 것을 약속하셨는지 헷갈리고 마음이 졸인다면 점검을 해보시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메시아 입니까? 밝히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한 곳을 더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9:58-62절입니다. “봉독” 여기서는 허다한 무리가 아니라 몇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당신이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겠습니다, 라고 하시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이곳이 아니기에 여기서는 쉴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따른다는 것은 너희들이 기대하는 것을 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바로 앞의 43절에서 48절에 보면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자기들 중에 누가 서로 크냐고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라 나서는 자들에 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까지 예수를 믿는다고 믿어 왔는데도 별 뾰족한 수가 없었는데 그러나 그래도 정성이 쌓이고 쌓이면 혹시나 복권 터지듯이 한번 하늘에서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지 않나 하는 기대마저도 무너져 내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부터 그만두려고 하니 또 한편으로 염려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데 지옥이 없으면 다행이지만 만약 지옥이 있다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니 그만둘 수도 없고 갈등이 되실 것입니다. 요즈음은 지옥과 천국에 대하여 들어 보기도 힘든 시대입니다만.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말씀하신 이러한 말씀, 너희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이런 말씀을 듣고서도 주님을 따라 갈 수 있다면 이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닌 것입니다. 부르신 분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은 결코 빼앗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하셔서 예수님께 붙여 주시고, 예수님이 그들을 위하여 자기의 피로 대속하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 쳐 주셨기에 누가 감히 우리를 주님의 손에서 빼앗아 갈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기에 아무에게도 자기의 백성을 빼앗기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그를 선택하여 믿은 것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슨 이익을 바라고 예수를 믿었다면 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서 떠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괴로우면서도 그래 그 말씀이 맞아 하고서 따른다면 우리는 주님께 택함을 입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여러 가지 세상의 험한 일들로 인하여 불안하거나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만유보다 크신 분이 우리의 주님이라면 무엇으로 우리를 주님에게서 끊어 낼 수가 있겠습니까? 적어도 우리가 이 세상의 것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영생을 바라보고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는 나라를 사모한다면 이 세상의 어떠한 환난이라도 우리가 주님에게서 빼앗기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30-39절입니다. “봉독” 그 어떠한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 낼 수 없습니다. 빼앗기지 아니합니다. 이런 든든함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고, 세상을 가볍게 보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0:30-42 그 일은 믿으라 2000. 6. 25.
오늘 교회에 나오실 때 계산을 하고서 나오신 것입니까?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시는 분은 지난주에 결석을 하셨거나 조신 분이면 모르실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할 때에는 손익을 계산해보고서 행동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무엇이 이익이 되고 손해가 되는지를 계산해보고서 따르라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를 믿는다는 것, 또는 종교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이익을 바라고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고 착하고 바르게 살고자 하는 것이지 무슨 다른 계산을 하고서 따르는가? 라는 생각이 드시는 분은 아직까지 자신의 윤리 도덕적인 능력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예수를 믿는 것이 지옥 갈까 봐서, 무서워서 믿는다는 것을 아주 우습게 여깁니다. 지옥 갈까 무서워서 예수 믿는다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고, 종교를 가짐으로 고상하게 살고, 윤리 도덕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면 아직도 죄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죄란 것은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계산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집을 지으려면 비용이 얼마가 들지 계산을 해보고서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부모와 처자식과 형제와 심지어 자기의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를 따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에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난주에 이 말씀을 듣고서도 오늘 또 나오셨다는 것은 아마도 제정신이 아닌 것입니다. 무언가 다른 힘에 끌려 온 것입니다.
마치 진공청소기에 먼지가 빨려 들어가듯이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저항의 힘보다도 빨아들이는 힘이 강하기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천국이란 사람이 스스로 알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끌려들어 가는 것입니다. 먼지, 티끌이라고 하니 기분이 나쁘실지 모르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무엇으로 만드셨나요? 흙으로 만드셨지요. 흙이 무엇입니까? 영어로 보면 땅의 티끌(dust of ground)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땅의 티끌에 하나님이 자신의 호흡을 불어 넣어 주셔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고 사는 것이 사람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러나 범죄 이후로 인간은 스스로가 피조물이 아니라 자신도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죄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생들에게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것은 원래 땅의 티끌이니 땅의 티끌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후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아담의 형상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스스로 나갈 수가 없기에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죄로 인하여 죽어 있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신이 임하심으로 살려 내시고 자기의 일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불러내실 때는 하나님의 강력한 힘으로 끌어내시는 것입니다.
이 강력한 힘이 무엇인지 에베소서 1:17-23절을 봅니다. “봉독” 강력한 힘이란 그 능력이 그리스도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이기에 그 발 앞에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을 만물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강력으로 역사하신 능력입니다.
우리가 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는데 하나님이 강력히 역사하셔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살리시고 하늘에 앉히시는데 그 일에 자기의 택한 백성도 함께 참여시키시는 것이 바로 강력한 능력이며 강력한 역사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2:4-7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살아나서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능력이요 강력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그리스도가 머리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리의 지시에 따라 몸을 이루는 것이 교회이기에 오늘 여기에 모인 것은 머리의 지시를 받아서 끌려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머리의 지시를 받지 않는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지요.
우리의 몸을 머리가 지시하여 움직이듯이 오늘 우리가 이렇게 교회로 모인 것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는 없는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이끄신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사는 일에 별 도움이 안 되는, 도움은커녕 밟으면 밟히고 찢으면 찢기우는 그런 삶으로 초대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서도 따라나서는 것은 이렇게 다른 힘과 능력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무슨 수로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까? 어떻게 십자가를 달게 지고 나갈 수가 있습니까? 주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이끌고 계시지 않는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아십니까?
요한복음 10:20절에 예수님을 보고서 귀신들려 미쳤다고 합니다. 31절에서는 돌로 들어 치려고 합니다. 39절에서 예수를 잡고자 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왜 이런 반응을 보입니까?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과 나는 하나다, 이렇게 말하니 예수님을 참람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으로서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신성모독죄가 어디 있는가 하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너희 율법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를 신이라 하였는데 어찌 하나님이 친히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을 참람(어그러지고 함부로 말하는 것)하다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율법이라는 말씀은 구약전체를 말할 때 율법에서,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구약에서, 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시편 82편에 있습니다.
시편 82편 1절. 하나님이 재판장들 가운데 서시며. 이 재판장을 난하주에 보면 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재판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이를 신이라 한 것입니다. 6절에도 보시면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신을 받으면 신들이라 지존자의 아들이라 불렸는데 어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느냐? 왜 믿지 못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배후에 무엇이 붙들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민수기 11:16-17, 26-29절을 봅니다. 모세를 도와서 재판을 할 지도자 70명이 하나님의 신을 받습니다. 그러자 그 지도자의 모임에 참여하지 않고 장막에 있는 두 사람 엘닷과 메닷도 함께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다는 보고를 할 때 여호수아가 저들의 예언을 금하소서, 라고 합니다. 이때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왜 그것을 질투하느냐? 하면서 여호와께서 그 신을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신이 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를 신이라, 재판장이라 하였는데 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을 그렇게 믿지 못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그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이들이 장님인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일하셔서 눈을 뜨게 하셔야만 아들을 알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라고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승천하신 분이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가 성령을 받고서 예수님을 알게 되고 눈뜨게 되고 믿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라는 것이 많지만 모두가 자기의 자존심을 세우거나 이익을 위하여 종교생활을 합니다. 이익이라면 눈앞에 이익을 말하거나 아니면 사후의 내세의 이익을 말하기도 합니다. 현세에서도 복을 받고 죽어서도 좋은데 간다라는 식의 이익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우습게 여기는 고상하고 자존심이 센 사람들은 무어라고 하는가 하면 아니야 우리가 종교를 가지고 신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 희생하고 사랑하고 섬기면서 좋은 세상 만들자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종교 간의 화해를 말하고 달라이 라마를 초대하고 교황을 초대하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란 인간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것이요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나 예수를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37-38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보고서 믿지 못하겠거든 나의 하는 일을 보고서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기적을 베푼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을 고치고 먹을 것을 주시는 것은 결국 자신이 병을 짊어지고 가시는 이사야 53장의 예언 성취이며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은 자신의 살을 찢어서 영생의 양식을 주시는 표적으로 베푸신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나는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고서 믿지 못하겠거든 예수님이 하시는 아버지의 일을 하면 그 일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일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35-40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이 영생이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살리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아버지의 일입니다. 아버지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자기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가 예수님을 보내셔서 하신 일입니다. 이 일을 보고서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가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지 사람들이 믿지를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는데 하나님이 홍해바다를 가르듯이 그러한 능력으로 자기들을 구원하여 주는 표적을 구하는데 힘없이 죽은 십자가는 표적과 능력과는 상관없는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이기에 정말 유대인들에게는 꺼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헬라인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의 죄를 자기가 져야지 남이 지는가,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도 자기가 로마를 반대하고 유대교를 반대하다가 자기 죄로 죽은 것이지 무슨 대속의 죽임이냐고 어리석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란 사람들이 호감을 가지고서 좋아하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꺼려하고 미련하다하도 어리석다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일을 보고서 믿으라고 하여도 믿을 자가 없기에 주님의 일이란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기어이 살려 내고야 마시는데 그 살려 내시기 위하여 대신 죽으시고 부활승천 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거듭나고 다시 태어난 사람만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믿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로 모이고 예수를 믿는다는 일이 이 정도의 엄청난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더욱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 주님의 일하심을 알아가고 그 일하심에 순종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 우리는 죄인이기에 못 한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땅히 감당하여야 할 부분을 감당하지 않고 도망가려고 하는 교묘한 술수입니다. 그러면 어떤 모습으로 가게 됩니까? 세상의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이 보면 참으로 어리석어 보이고 미련하게 보이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8-25절입니다. 세상의 지혜를, 총명을 다 폐하시고 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일을 믿는 것이란 참으로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러나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 버리신 그 일을 믿고 가는 것이 주님의 일하심입니다. 아무리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러나 그 십자가가 구원 얻는 자에게 능력이기에 누가 뭐라고 하여도 나는 예수님이 좋습니다, 하고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다는 것의 내용은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그 일, 즉 십자가를 믿고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에게 이제 이 세상은 더 이상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세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성도란 세상이 죽어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기적을 맛보며 사는 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1-16 하나님의 영광 2000. 7. 2.
뉴 밀레니엄이란 요란한 말로 시작된 올해도 벌써 절반이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무엇을 위하여 살아 왔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시렵니까? 왜 삽니까? 제목에 힌트를 받아서 대답을 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대답을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시지요? 그보다 더 걱정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더 곤란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된다는 당위론적인 명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의 교리적인 기초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입니다. 여기 기초한 문답이 두 가지인데 대요리 문답과 소요리 문답입니다. 요약된 교리문답인데, 대요리 문답은 196문답이고 소요리 문답은 107문답입니다. 이 두 문답의 제일 첫 번째 질문이 같은 내용입니다.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이뇨’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 한다는 것은 그분 한 분만으로 기쁘고 즐겁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자녀가 고등학교 2학년쯤 되어 교회에 열심을 내면 은근히 염려가 됩니다. 무슨 임원을 하고 토요 기도회다, 임원회다, 수련회 준비다, 문학의 밤 준비다, 찬양준비 한다면서 교회 붙어살면 걱정이 됩니다. 무슨 걱정입니까? 저러다가 대학 떨어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말합니까? 아들아 네가 좋은 대학 들어가서 더 크게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라, 그러니 지금은 11시 예배만 참석을 하고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열심히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부분은 내가 대신 맡아서 할 테니, 내가 평소의 두 배를 기도하고 봉사할 테니 너는 공부만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좋은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런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도대체 성경 어느 구절에서 좋은 대학 들어가면 하나님의 영광이고 재수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고 되어 있습니까? 그러나 이런 영광관이 가득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잘되어야 하는데... 그러면 십자가는 세상에서 잘된 것입니까?
이러다 보니 교회라는 모습이 세상의 영광을 가져다 놓고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다르듯이 오늘 우리의 영광이라는 것과 성경이 증거하는 영광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돌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부터 요한복음 11장에 들어갑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입니다.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는 형제들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서 그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긴 자입니다. 그런데 이 자매의 오빠가 병이 들자 자매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좀 와달라고 합니다. 와서 병을 고쳐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들도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나중에 죽도록 하여서 다시 살려내셔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구나, 라고 이미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잠시만 생각하여도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들이라면 죽을 병에 들리지 않게 하시지 어떻게 죽을 병에 들리게 하시고서 살리심으로 영광이라고 하는가? 그리고 요한복음 9장에서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죄가 누구 때문인가의 질문에 예수님은 부모의 죄도 자신의 죄도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되고 또 병들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 자체가 우리가 보기에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놀라운 것이고 신기한 기적이기에 하나님께 영광이다, 이렇게 보시면 너무나 피상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보시면 오늘날 우리도 사람들이 놀랄만한 일을 일으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겠는가, 라고 하면서 보통사람들이 잘 못하는 초인적인 금욕생활이나 신비적인 기적을 보임으로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다, 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님을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십자가란 기적이 아닙니다. 실패의 모습이고 힘없이 붙잡혀 죽은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는 저주받아 죽은 모습입니다. 이방인들이 볼 때는 유대 독립운동 하다가 로마에 의하여 처형된 실패한 혁명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이 십자가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가를 아는 것이 성경을 바르게 알게 되는 첩경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는 그 천지만물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날 사람을 만드시고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천지가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일에 누가 도움을 주거나 보탬을 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신적 작정에 의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창조의 역사에 어떤 피조물도 동참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나 욥기에 보시면 인간이 무슨 항변을 할 때에 하나님의 대답이란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늘을 뺨으로 재어 보았느냐? 바닷물을 손으로 헤아려 보았느냐, 산들을 저울로 달아 보았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란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시고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창조에 죄가 들어오게 되고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고자 하는 기도들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아담이후의 인간의 모습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무엇으로 드러나는가 하면 사람의 인위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범죄하고서 최초로 행한 행동이 하나님이 두려워서 숨는 것입니다. 몸을 숨길뿐만 아니라 몸을 가리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를 가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래의 영광, 하나님의 홀로 일하심의 영광을 우습게 여기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저마다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의 지위를 떠나서 스스로 창조자의 지위를 가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바벨탑으로 연결되어 지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흩어짐을 면하고 자, 우리의 이름을 내자라는 것입니다.-세상의 모든 것들 정치 경제 도덕 교육.
그러므로 사람들이 열광하는 일이란 자기의 이름이 나는 것에 대하여 열광을 합니다. 자기의 이름이 영광을 받지 않는다면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자기의 이름이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내신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 구절이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하나님의 이름만이 구별되어 영광을 받는 것이 기도의 첫 번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보다 누구의 이름에 더 관심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나의 이름에 관심을 가지고 삽니다. 나의 이름은 드러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주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면 됩니다, 라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데 자기의 이름을 늘 염두에 두고 있으니 교회에서도 무슨 일을 하여도 사람들이 알아주는 방향으로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흐름을 요한복음 1-10장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끊임없는 질문이 무엇입니까? 내가 어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합니다. 자신들의 행함의 능력을 가지고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질문을 한 사람들은 오히려 영생의 길을 알지도 못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요한복음 1-10장까지의 메시지는 너희는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상태입니까? 니고데모 같은 율법의 선생이라는 자도 거듭나지도 못하였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야 어떤 상태입니까? 38년 된 병자요, 날 때부터 소경된 자요,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돌 맞아 죽어 마땅한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동원시켜서 하시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63절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육이 살리는데 무익하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행위도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현실인데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금 나사로의 병들었다는 말을 들으시고 일부러 죽도록 기다렸다가 무덤에 장사하고서 냄새가 나는 때에 이들에게 찾아 가시는 것입니다(6절).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 왜 죽였다가 살리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이라면 처음부터 병이 생기지도 않게 하여 크고 멋있는 일을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될 텐데 병 주고 약주는 식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그 의미를 살피고자 합니다. 첫째는 모든 사람이 다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은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스스로 살아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사로를 아플 때에 가서 치료하시지 않고 일부러 죽고 나서 가서 살리시는 것입니다. 아플 때에 가서 살리시면 무언가 가능성이 사람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죽어 버리면 허준도 못살려내는 것이기에 나사로의 동생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러 늦게 오시자 무어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을 텐데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부러 늦게 오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모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내려면 언제 구하여야 됩니까? 물을 몇 잔 먹고 축 늘어졌을 때 구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힘이 전혀 손 쓸 수 없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지입니다.
숨이라도 붙어있어야 침을 놓든지 손을 쓰든지 할 텐데 이미 죽고 4일이나 되어서 무덤에서 썩어 냄새가 나는 정도로 된 상황, 사람의 손이 전혀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이 세상이 죄로 인하여 죽어 있는 것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죽음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기의 영광과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택한 자를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 불러내시는 일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듯이 홀로 이루어 내시는 일이기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행함을 하나님의 영광에 섞어 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데 은근히 자기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홀로 이루어 내신 그 일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시는 방법으로 오늘 주의 백성들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셨다면 썩어서 냄새만 더 나는 인생이었습니다. 시체들끼리 모여서 무슨 윤리운동을 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 남북이 통일이 되고, 어제까지 때려잡자 공산당, 무찌르자 괴로군, 그러다가 이제는 김정일 신드롬이 일어나는 이런 세대도 다 한 철 지나가는 시체의 냄새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살려내시는 일은 주님께서 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체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부르신 것은 시체가 알아듣고 나온 것입니까? 그렇다면 시체가 아니지요. 주의 말씀의 능력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 내시고 없는 것에서 만들어 내시는 그 창조의 능력이 살려 내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동일하게 불러내신 것입니다. 여기에 누가 잘나서 시체를 부르시는 소리에 응답하여 나온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은 이렇게 불러내신 그 사랑과 그 능력과 그 열심을 우리가 알아 가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냄새나는 시체들 사이에서 더 버티려고 하지 말고 다시는 죽는 일이 없는 냄새나는 일이 없는 그 나라와 그 의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살아나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말들입니다. 눈을 뜨지 않은 자들에게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빛으로 비추어서 살려 낸 자들은 그 빛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어두움의 일을 벗으라고 하는 것은 빛 가운데 들어 왔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제는 이 주님의 일하심에 항복하여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1:17-32 부활과 생명 2000. 7. 9.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무엇이다, 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말씀, 생명, 빛, 선한 목자, 양의 문, 등의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수님이 자신이 부활과 생명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과 생명이 되신다는 이 말씀의 뜻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하여 부활과 생명의 능력을 지금부터 맛보며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 생명, 빛, 선한 목자, 양의 문, 이런 단어가 우리의 마음에 와 닿습니까? 아니면 공중에 붕 뜬 그런 느낌입니까? 이런 단어들이 현실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보다는 현실적인 것들이 더 잘 들어오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사는 모습입니다. 성도의 복이란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금요일 저녁에 오신 분은 기억하십니까?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데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생명, 빛, 선한 목자, 양의 문, 하나님의 나라, 영생, 하나님의 영광, 의, 이런 단어들이 낯설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동행이 없을수록 이런 단어들은 따분하고 졸음만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란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기에 저는 이 말씀을 여러분이 좋아하든지 아니 하든지 간에 증거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아들이는 능력이나 제 자신이 증거를 잘하는 능력이 아니라 부활과 생명이 되시는 그 주님의 능력이 지금 이 시간에 역사하고 계시는 것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주님이 약속을 하셨습니다. 두세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곳에 모인 것이 ‘늘푸른’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장우 목사의 이름으로 모인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주님께서 이곳에 임하여 계시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임하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 속에서 주님 자신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그 말씀을 받고서 그 말씀을 따라 주와 함께 동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의 배경이 어떠합니까?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가 살고 있는 가정에 나사로가 죽은 것입니다. 부모의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부모는 일찍 돌아가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정에 가장이랄 수 있는 오빠가 죽은 것입니다. 얼마나 상심이 크겠습니까? 그것도 병이 들었을 때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지만 예수님은 일부러 이틀이나 더 지체하시고서 이제 죽은 지 4일이나 지나서 장사를 지냈고, 썩어 냄새나는 상태에 예수님이 이 가정에 오신 것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서 마중을 나옵니다. 나와서 하는 말이 21절에 보면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지금도 주님께서 무엇이라도 하나님께 간구하면 무엇을 들으실 줄 아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무어라고 합니까? 마지막 날 부활에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 라고 합니다. 이러한 부활의 사상이 유대인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중에 바리새파는 부활을 믿는데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전도하다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서 부활에 대하여 증거하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패가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리새파 사람은 바울이 옳다 하고 사두개인은 바울이 틀렸다고 합니다. 부활의 중요성보다 자기들의 패를 더 생각하는 모습입니다만 유대인들 안에서도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으니 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은 정치와 경제 등의 영역에서 특권 계층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마르다나 마리아는 부활을 믿기는 하는데 어떤 부활인가 하면 마지막 날에 다 부활하는 그런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이란 선지자들이 내다본 부활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메시아를 통하여 부활을 동시에 시키시는 한 때를 내다보는 것입니다.
에스겔 37:1-14절을 봅니다. “봉독” 마른 뼈는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이런 마른 뼈 같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살려 내셔서 고토로 돌아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는 것을 무덤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무덤에 살고 있기에 스스로 무덤을 나올 수 있는 자들은 없다, 라는 것입니다. 무덤에 있는 정도가 아니라 썩고 썩어서 마른 뼈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에스겔에게 보이면서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뼈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니 뼈들이 척척 제자리를 찾고서는 힘줄이 생기고 가죽이 덮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없습니까? 생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시 생기를 대언하라고 하자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바벨론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환상 중에 보니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고 썩고 나서 이제는 바짝 마른 뼈다귀만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상은 메시아가 오면 현실적인 상황이 모두 회복된다고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그렇게 갈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죽음후의 부활도 내다본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죽은 자가 살아나리라는 것입니다.
지금 마르다는 이러한 부활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자기 오빠가 살아나리라는 것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부활을 믿지요. 죽음 후에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하는 것을 믿습니다. 의인은 생명의 부활로, 악인은 심판의 부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요한복음에서 그러한 부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마르다와 마리아의 관심은 죽은 자기 오빠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하지만 지금 죽은 자기 오빠로 인하여 울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없다면 오빠가 부모 같았을 테니까 이들의 슬픔이야 더한 것이지요.
그런데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이해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적용하여 영생을 전하는 영생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활과 생명이란 지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부활안에 생명 안에 있기에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11-13절을 봅니다. 나사로가 잔다고 하자 제자들은 자면 일어나겠지요, 그러자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잔다고 하는 것을 제자들이 못 알아듣자 제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죽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보시는 것은 사람들이 보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24-29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을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이것을 무덤에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바라본 그 때란 바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사이의 한 기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온통 무덤인 것입니다. 마치 에스겔서에서 나오는 마른 뼈다귀들입니다. 이러한 무덤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사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31-33절입니다. “봉독”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모세의 법에 의하면 형이 죽어 자식이 없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여 후사를 잇게 하여야 하는데 일곱 형제가 그렇게 하였다면 부활 후에 이 여인은 뉘 아내가 됩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다는 것입니다. 부활 후에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이 천사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세상이 이미 죽은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이 되어 있는 상태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에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불러내시는 자들의 대표와 모델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예로 드는 것입니다. 이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죽은 자는 이해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살아난 자만이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울고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내가 부활과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나사로가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잔다는 것입니다. 이미 부활과 생명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주어지는지는 요한복음에서 계속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을 보내심으로 살려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믿고 나서 나중에 죽고서 부활하는 것만 부활이 아니라 지금 부활 안에, 생명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에 다시는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이 죽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헌옷을 벗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몸이 새 몸을 입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로가 비록 썩어서 냄새가 나지만 그를 다시 살려내심으로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증거하시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0-58절을 봅니다. “봉독”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부활하리니 그때에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게 됩니다. 이러한 부활을 받는 자는 지금 예수를 믿는 자입니다. 지금 예수를 믿는 자가 부활안에, 생명 안에 있기에 생명의 부활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이란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기 위함이고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사망이 왕노릇 하고 있는 자를 부활과 생명이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4절의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는 이 말씀이 이사야 25:8절에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시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려내심을 통하여 무엇을 증거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담대함이란 죽어도 산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담대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에서의 원리는 나 죽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나, 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들 죽어도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란 서바이벌 게임장입니다.
누가 살아남는가, 내가 살아남기 위하여 남을 죽여야만 하는 그런 장소입니다. 그러나 부활과 생명을 이미 받은 사람이라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죽음이란 목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자존심과 명예심 이런 것들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죄인이라도 주님의 용서를 받고 나니 사람들의 힐난과 수군거림이 상관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과 생명을 받은 자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시에 다 홀연히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활에 참여하고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부활과 생명 안에 있어야 생명의 부활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붙어있는 자는 다 생명의 부활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이 사망아래 있는 우리를 삼키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알고 믿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부활의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이 세상의 유혹을 이깁니다. 썩어질 것을 분별합니다.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들에 목숨을 걸지 않는 것입니다. 손해보고 당하여도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순교를 당하여도 기쁘게 당하는 것이 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이미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이 그 사람을 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동일하게 오늘 우리도 그러한 능력으로 붙들고 계시는 주님을 믿으신다면 이 세상을 죽은 세상으로 보시고 생명주심에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성경 한곳만 봅니다.
사도행전 4:32-35절입니다. “봉독”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고서 자기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능력이 부활과 생명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에게도 풍성하여 지기를 소원합니다.
요한복음 11:28-39 예수님의 눈물 2000. 7. 16.
부활과 생명을 공짜로 받는 것이 좋습니까? 현금을 백만 원 공짜로 받는 것이 좋습니까? 제가 너무 유치한 질문을 하였지요? 그러나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기뻐하고, 슬퍼하고 사는가를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화를 내고 원망을 하는가를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예수를 믿는다고, 신앙 생활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약속과는 상관없이 현실적인 이익 앞에서 좌우되고 있는가를 보자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성도가 큰 손해를 보고서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목사에게 상담을 요청할 때 목사가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라고 하면 여러분이 무어라고 응답하시겠습니까? 아 그거는 그거고 지금 내 문제를 보라고, 억울하지 않느냐고 항변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예수님 입장 한번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고 따지는 것이 우리의 수준이 아닙니까?
제가 처음 전도사 때에 어떤 할머니가 예배당에 나왔습니다. 몇 달을 다니고 나서 학습문답을 위하여 교육을 하면서 목사님이 물으셨지요. 할머니,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 할머니의 대답이 ‘예수고 뭐고 내 몸이나 나았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할머니의 이야기가 너무 심하다고 싶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오늘 우리의 대부분이 예수를 믿으면 안 믿는 것 보다 무언가 세상에서 더 나은 것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분위기였습니다. 지금은 그래도 조금 나아진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노골적이지는 않아도 여전히 예수를 믿는 것이 현실적인 이익들과 현실적인 가치들을 결부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현실적인 것들을 말하지 않고 늘 영생과 내세와 생명과 그 나라와 그 의만 말하고 있습니까? 라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도 창조하시고 이 세상에서 잘사는 것도 하나님의 복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러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도 하나님이 햇빛과 비를 주시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는 악인이나 선인이나 동일하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택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이 땅의 썩어질 것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3-4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에 주시는 것은 없습니까? 왜 없습니까?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다면 족한 줄로 알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것은 이방인이나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추구하는 방향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달려가는 방향은 언제나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산 소망이 아니라 썩어질 것, 더러워질 것, 쇠하여질 것을 쫒아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보시고 주님께서 우시는 것입니다. 통분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말과 마리아의 말이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저의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텐데요, 라고 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마리아가 자기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울자 마리아를 따라 나선 유대인들까지 우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33절에 보시면 통분(痛憤)히 여기시고 민망(憫惘)히 여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다는 말씀이 오늘날 우리의 뜻에 잘 와 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번역을 보니 비통하게 여기시고, 안타깝게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의 눈물과 유대인들의 눈물을 보면서 나사로가 죽었으니 자기가 사랑하는 자가 죽었으니 슬퍼서 우는 것은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통분히 여기셨다는 것을 거꾸로 말하면 분통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시는 그런 눈물이라고 봅니다.
35절을 봅니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하시고 나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켜본 유대인들이 무어라고 합니까? 보아라,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얼마나 사랑하였으면 저렇게 울까 하고서는 무어라고 합니까? 그렇게 사랑하였다면 죽지 않게 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수준이고 마르다, 마리아의 수준입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셨다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나사로를 사랑하였다면 왜 죽도록 내버려 두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사랑이란 단지 자기들에게 손해가 안 오는 정도의 사랑입니다. 병들지 않고, 슬프지 않고, 손해 보지 않았으면 하는 이런 모습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관점에서는 알 수가 없는 이들을 보시고 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는 죽음이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에 예수님 근처에 죽음이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 나사로 말고도 누가복음 7장에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서 장사지내러 가는 것을 보시고 아들을 살려내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은 자가 일어나고 말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5장에서는 죽은 소녀를 일으키십니다. ‘달리다굼’이지요. 소녀야, 일어나라고 하시니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현재 부활과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떻게 죽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누가 예수님을 죽일 권세가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허락하셔야만 죽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요한복음 10:18절에서 예수님은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도 있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이 우시는 것은 이렇게 사망의 권세에 붙들려서 살고 있는 이들을 보면서 우시는 것입니다. 부활과 생명이 곁에 계시는데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들이 나중에 주님의 부활의 영이 오셔야만 알게 됩니다만 그 이전에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여도 아직은 잘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셨다는 내용을 한곳 더 보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9:41-44절입니다. “봉독”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우시는 것입니다. 평화의 소식을 모르고 숨겨져 있는 것을 인하여 우시는 것입니다. 같은 내용을 마태복음에서 한 번 더 봅니다. 마태복음 23:37-39절입니다. “봉독” 예루살렘을 향하여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눈물입니다. 이 세상의 택한 자라는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이, 예수님의 사랑을 입고서 또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이들의 모습이 사망과 죽음의 권세아래에서 꼼짝을 못하고 있는 것을 통분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분통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이러한 주의 택한 백성들을 자기의 죽음으로 살려내시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이란 무엇입니까? 생명이 없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자들에게 생명의 줄을 연결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의 일을 모르고 예수 믿으면 뭘 주는데요,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이러한 모습 때문에 주님은 울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데 우리는 무어라고 합니까?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에게 해 주신 일이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준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오빠나 죽지 않게 못하시나요? 사랑하신다면서 우리에게 해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말라기 1:1-5절을 봅니다. “봉독” 여호와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하시자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그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로 하여금 포로로 잡혀 가게 하시고 지금도 열강들 속에서 기도 못 펴고 살게 하시면서 무엇을 사랑하신다는 겁니까? 이렇게 대어드는 것입니다.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날 위해 무엇을 해주었다고 잔소리를 하는 것입니까, 하는 말과 같지요? 낳고 기르고 먹이고 입히고 사람 되라고 그렇게 공부시켜왔는데 이놈들이 머리가 커지자 아버지 나에게 무얼 해주었다고 잔소리예요? 이러는 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울지요. 통분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항의를 하자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조건으로야 장자이고 남자답고 활달한 에서가 나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고생을 합니까? 야곱이 죽을 고생을 합니다.
지금 주일 저녁에 야곱에 대하여 보지만 형에게서, 외삼촌이며 장인에게서 죽음의 위협과 죽을 고생을 합니다. 그런데 에서는 어떻습니까? 고향에서 자기 사병이 400명이나 되는 것 같으면 그냥 목동들까지 합하면 얼마나 큰 거부입니까? 고생하였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나중에 짐승 떼를 선물로 준다고 하자 나도 넉넉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에서는 영영한 진노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개입을 하심으로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모르니까 주님을 원망하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면서 무엇을 사랑하시는데요, 내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 하나 해주시지 않으면서 무얼 사랑하신다고 하는 겁니까? 하는 이 백성들을 향하여 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우리로 하여금 죽을 것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는 걸음들을 달려가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이켜서 생명을 향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간섭이 우리에게는 싫은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이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대나무를 휘어잡으려면 잘 안되듯이 휘어잡았다가 놓아버리면 다시 원위치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나무를 사용하려는 사람이 대나무를 휘어지게 해서 사용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휘어가지고 휘어진 부분에 불로 좀 구우면 휘어진 채로 있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모습이 아닙니까? 그냥 내버려두면 대나무 원래의 성질대로 자라지만 하나님이 그를 택하시고 돌이키시려면 얼마나 우리를 불로 구우셔야만 돌아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풀무를 통과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는 스스로 돌아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사로를 불러내시듯이 우리를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썩어서 냄새나는 나사로를 불러내시듯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사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던 우리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셨다면 편하였을 것입니다. 흘러 떠내려가는 것이야 쉽습니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 어렵고 힘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상 어렵고 힘 드는 일을 싫어합니다. 더더구나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이란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런 우리가 주님께서 불러내시니 부름 받아 나온 것입니다. 시체가 순종하여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시듯이 그 창조의 능력으로 나사로를 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동일하게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던 우리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간섭이 시작되었습니다. 결코 놓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이 이 예수님을 알아가기 보다는 우리 오빠, 우리 남편, 우리 가정, 우리 교회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알아감으로 오는 감사와 감격과 기쁨은 사라지고 그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 테니 하는 그런 가난한 신앙생활을 이제는 청산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이러한 우리를 보시고 울고 계시지 않으실까요? 지금 생명과 부활로 계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울고 있습니까?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기 오빠 때문에 울고, 우는 그들을 보고서 울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란 예수님이 이들을 사랑하였다면 죽지 않게 하시면 되었을 텐데 소경을 눈뜨게 한 자가 나사로를 고치지 못하였는가 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늘 우리를 보고서 울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교회를 보면서 울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까? 저는 울고 계신다고 봅니다.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로마서 8:26절에 보시면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께서 탄식하시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울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그 영광의 세계를 알까, 언제 썩어지지 아니할 것을 준비하며 살까, 언제 부활과 생명의 능력 안에서 살까, 하는 주님의 탄식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를 향하신 그 사랑을 몰라보고서 무엇으로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까? 하고서 대어드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의 눈을 열어주소서 그리하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길이를 제대로 알아감으로 세상의 것들이 결코 빼앗아 갈수 없는 그 사랑을 맛보며 살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고집과 썩어질 것을 향하여 달려가는 우리를 위하여 오늘도 탄식하며 울고 계시는 주님의 눈물을 기억하시고 이제는 주님께로 돌이키며 살기를 소원합니다.
요한복음 11:38-44 나사로야 나오너라 2000. 7. 23.
창세기 1장 1절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믿어지십니까? 아무리 믿으려고 하여도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무슨 말을 하여도 믿기로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무엇으로 창조하신 것입니까?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2-5절을 봅니다. “봉독”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가득하였는데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이미 삼위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 말씀의 능력이 창조를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절을 봅니다. “봉독” 창세기 1장의 창조를 더 상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말씀으로 지은바 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은 사람들에게 빛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빛을 알아보지 못하더라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왜 못 알아봅니까?
이사야 식으로 말하면 소경이고 귀머거리입니다. 그러니 빛을 볼 수도 말씀을 들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마치 창조전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만이 사람들에게 가득한 것입니다. 이미 죄와 사망의 권세가 사람들을 혼돈스럽게 하였고 공허하게 하였고 캄캄함 아래 갇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진, 선, 미라는 것이 결국 혼돈과 캄캄함이라는 것입니다. 썩어서 냄새나는 것들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임을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증거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선생이란 자가 거듭나지도 못한 자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무슨 수로 물에 들어갑니까? 무슨 힘으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갑니까?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어떻게 눈을 뜰 수 있습니까?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어떻게 살아납니까?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예수님이 무엇을 증거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가 어떤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와 사망 안에 있기에 스스로는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불가능함을 보이시기 위하여 동원된 자들이 요한복음의 등장인물들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은 오히려 눈이 멀어지고 귀가 막아지는 일이 동전의 양면처럼 예수님의 사역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부활과 생명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증거하시고 예수님 자신이 친히 살려 내셔야만 살아나는 것임을 증거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난 것입니까? 우리가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믿어주어서 살아난 것입니까? 아니요,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어서 마른 뼈들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죽어서 냄새를 피우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온갖 썩어질 것들, 없어질 것들을 좋아라고 쫓아다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생명과 부활에는 아예 관심도 없었습니다. 오직 나의 욕심과 쾌락을 쫓아 달려 간 것입니다.
욕심과 쾌락을 말하니 나는 그렇지 않고 고상하다고 말씀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예수님 없는 이 세상의 고상함이란 전부 냄새나는 것입니다. 악취를 풍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멀고 귀가 멀고 후각도 마비가 되어서 썩어지는 냄새를 맡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스스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살려 내셔야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39절입니다. ‘돌문을 옮겨 놓아라.’ 마르다의 대답. ‘이미 죽은 지 나흘에 되어 냄새가 납니다.’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바위굴에 넣으니 냄새가 나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세입니까? 아니 지금 죽어 냄새나는 자를 어떻게 하시려고 바위를 옮기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 말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내 말이 네가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시니 바위를 옮겨놓습니다. 그리고서 예수님이 무엇을 하십니까? 기도하십니다.
41, 42절입니다.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기도하면서 살려주실 줄 믿습니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말을 들으심을 감사합니다. 항상 내말을 들으시는 줄은 압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을 저들로 믿게 하려고 하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기도하시지 않아도 이미 하나님과 하나 되어 있기에 그냥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여도 그 창조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것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이들이 우스개 소리로 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하셨을까 하고 말합디다. 만약에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지 않고 그냥 나오너라 하셨다면 시체가 다 살아나올 것이기에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하였다고 합디다. 우스개 소리로 하였지만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시니 몸에 붕대를 감은채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풀어서 다니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증거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도 죽으면 부활한다는 것, 물론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지난주에 보았듯이 지금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를 살리신 것도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신 이러한 창조의 능력으로 우리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시고 말씀이 임하여 우리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무덤에 누워 있었던 자들입니다. 세상의 풍습을 좇아 살았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살았습니다.
그러니 죽은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 살아 나온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 내가 반응을 보여서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시체에게 아무리 소리 지른다고 살아납니까? 불로 태운다고 뜨겁다고 합니까? 손을 자른다고 아프다고 합니까? 그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감각이 없이 살아온 저희들인데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는 것처럼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오너라고 불러 주신 것입니다. 각자의 이름을 불러 주신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는 말에 자기 이름을 넣어서 한번 말해 봅시다. 누구야 나오너라. 이 말을 듣고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 말씀 자체가 능력이 있어서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셔서 살리시니 주님의 음성을 이제는 알아듣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났으니 이렇게 예배도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도 듣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살아나지 않은 자가 어떻게 듣고서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불러 내셔서 무엇을 하시려고 불러내신 것입니까? 다시 죽음의 생활을 하라고 불러내신 것입니까? 다시 썩어질 것을 향하여 달려가라고 우리를 불러내신 것입니까?
요한복음 12:2절입니다. 나사로가 그냥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9-11절을 봅니다. 예수님을 보러 왔지만 예수님만이 아니라 나사로도 보려고 온 것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이 증인인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나사로 까닭에 유대교를 떠나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허물과 죄로 죽어서 썩어 냄새는 것들을 좋아라고 살던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 살아났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 세상을 떠나서 예수를 믿어야 되겠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썩어질 것에서 구원하여 내신 것은 영생을 위하여 살라고,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더럽지 아니하는 나라가 있기에 그 나라를 준비하며 살라고 우리를 불러내셨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지금까지 몇 년을 살아 왔습니까?
그런데 나를 보고서 너는 이상하다, 왜 이렇게 좋은 것을 시시하게 여기고 돈 안 되는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니 이런 의문을 가지고 우리에게 물어온 사람이 과연 몇 명이 됩니까? 우리를 보고서 우리가 가진 소망에 대하여 물어오는 자들이 얼마나 됩니까? 나사로 까닭에 유대교를 떠나듯이 나 때문에 세상을 떠나려고 마음이라도 먹어본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아니 살리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잖아요, 하고서 핑계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보일 수 있는 통로는 예수님 때문에 살아 난 자들을 보고서 예수님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서 몇 년을 더 살다 죽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서 죽기까지 어떻게 살았다고 생각이 됩니까? 한번 천국의 맛을 보고 온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어서 빨리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천국을 보고 왔습니다. 그러자 빨리 죽어서 가고 싶다, 그러나 가지 못하는 것은 너희를 위함이라고, 사명 때문에 가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미 살아난 자는 그 주님의 영광의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 이 세상에서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과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전혀 낙심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고서 사는 것입니다. 죽도록 고생하면서도 내 은혜가 내게 족합니다, 하고 사는 것입니다.
왜 이럴까요? 살아났으니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나사로처럼 바울처럼 살아 난 사람이라면 무언가 다른 삶이 나타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나타나지 않고 있는 우리가 비정상입니다. 왜 영원을 준비하지 않고 있습니까? 왜 아직 썩어질 것들에 대하여 목숨을 걸고 있습니까? 왜 세상 것들에 대하여 그렇게도 포기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조사를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이 방학하면서 성적표를 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항목들이 있는 것처럼 여러분의 인생의 성적표를 한 번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신앙생활을 점검하는 성적표를 한번 스스로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기준입니다.
얼마나 말씀을 순종하였는가? 얼마나 기도하였는가? 얼마나 희생하였는가? 얼마나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겼는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였는가? 항목을 만들어서 체크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씀드려도 안하실 것 같으니까 지금 당장 시도해 봅시다. 나는 살려낸 후의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점검표는 베드로전후서입니다. 중고등부 수련회 말씀을 준비하다가 우리의 살아난 이후의 삶이 어떠한지를 점검하는 좋은 기준이라서 지금 적용을 합니다. 성경에 밑줄을 그으시든지 연필 없으시면 접어두시든지 표시를 해두시고 나중에 한 번 더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1:3-4절. “봉독” 썩어지고 더렵혀지고 쇠하는 죽음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살려 내신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베드로전서 1:13-17절 “봉독” 그러므로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에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고서 예수님 재림하실 때 가지고 오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라.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살고 있습니까? 체크하시기 바랍니다. 이전에 알지 못하고 좇던 사욕을 위하여 살지 말고 순종의 자녀처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어라. 외모로 판단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그네로 있을 때에 두려움으로 지내라. 지금 우리는 나그네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임하실 날을 바라보며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주님 앞에서 두려움으로 지내라.
베드로전서 1:18-25절을 또 봅니다. 우리가 구속된 것은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된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서 죽음의 자리에서 살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살리심은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입니까? 땅입니까?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십니까? 피차 뜨겁게 사랑하십니까? 말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십니까?
베드로전서 2:1-3절을 봅니다. 이렇게 하십니까? 베드로전서 2:11-12절입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있습니까? 나의 선한 행실로 인하여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주를 사랑하는 행실로 인하여 나의 남편에게서 나의 아내에게서 나의 자녀에게서 당신은, 아빠는, 엄마는 정말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입니다, 하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까?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계십니까?
베드로전서 3:8-12절입니다. 이렇게 하십니까? 베드로전서 2:20-22절입니다. 주님을 안다고 하면서 또다시 더러움에 얽매이게 되면 알지 못한 것이 더 나았다는 것입니다.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다시 들어가는 일을 우리가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성적을 확인합니다. 이런 말씀에 몇 점을 받았습니까? 합격점이 60점이라면 몇 점이 됩니까? 이렇게 점검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좌절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고, 그러면 어찌할꼬, 회개라도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낙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는 그 능력이 이렇게 살라고 하시는 말씀과 동일한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면서까지 이런 사람으로 만드시고야 마시는 것입니까? 내가 순종을 안 하여도 영생을 준비하며 사는 사람으로 만드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3절입니다. “봉독” 고난을 통하여서라도 세상을 좇지 않게 하실 것이니 걱정을 마시기 바랍니다. 매를 때려서라도 주님을 향하는 것이 생명이기에 우리의 복이기에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5-57 진리와 현실 2000. 7. 30.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죽어서 나흘이나 지나서 냄새가 나는 사람이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것 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그런 소리 말고 나의 절실한 필요를 채워 주라고 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어제 저녁에 교육의 7단계를, 교사를 위하여 강의한다는 어느 분의 강의를 주보 복사하러 가면서 잠시 들었습니다. 아이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잘 알아서 낚시에 미끼를 걸듯이 아이들의 잠재적이고 영적인 필요를 채워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죽어 있는 자에게는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름 어린이 성경학교를 하는데 성경공부 시간에는 엉뚱한 짓 하다가도 간식시간에는 눈이 초롱초롱 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는 늦을지라도 수영장 가는 시간에는 미리 미리 나와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비단 어린 아이의 모습만일까요?
그러면 오늘 우리의 진정한 필요는 무엇입니까? 이 더운 날씨에 우리의 진정한 필요는 시원한 피서지가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는 피서를 가든지 휴가를 가든지 영적인 일에 민감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설교를 준비하면서 박영선 목사님의 강해집을 보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얼마나 죄인이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더럽히고 있는지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인간 외의 모든 피조물은 자연을 더럽히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짐승들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조화를 이루기에 짐승의 배설물도 적절하게 처리되는 것이기에 자연이 더러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가지 않았을 곳이라고 생각하고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는데 그 골짜기에 라면봉지가 있다면 갑자기 어떤 생각이 납니까? 그곳에서 잠시도 있고 싶은 생각이 없어집니다. 그것뿐입니까? 온갖 페트병이라든지 사람의 배설물이 있는 곳들을 보면 휴가가 아니라 짜증이 납니다. 책의 내용을 그대로 몇 절 옮깁니다.
“인간은 모든 부패와 오염의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최대의 공해가 누구입니까? 인간입니다. 소를 사람만큼 먹여보십시오. 하루 세 끼씩 먹이면 코끼리만큼 커질 것입니다. 인간만큼 많이 먹을까요? 인간만큼 쓸데없는 소리를 할까요? 인간만큼 쓸데없이 살이 찔까요? 인간이 죄악 덩어리이며 어떻게 더럽게 살아 왔으며 하나님의 손길에 대하여 무감각한가를 이루 필설로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이 내용이 기분 나쁘십니까? 그러면 이 분에게 가서 따지시기 바랍니다. 물론 인용한 저도 책임은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러한 내용보다 사실은 더한 것이 우리의 상황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도대체 진리를 찾으려고 하겠습니까? 진리 그러면 진리가 밥 먹여주나 하고 덤비는 것이 이 세상이며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가 오늘 진리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것이 나사로가 살아나온 기적보다 하나도 못하지 않는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과 손에 잡을 수 있는 것들만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기가 달려가는 그 가속도로 인하여 이제는 스스로 멈출 수도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람들에게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소귀에 경읽기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러한 말씀이 귀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요즈음 새벽기도회에 잠언서를 마치고 전도서를 보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전도서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한번쯤은 누려 보았으면 하는 모든 것들을 다 누려 보았다고 합니다. 부귀, 영화, 권세, 거기다가 지혜에까지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 올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술과 여자와 취미생활까지 안 해본 것이 없이 다 누려 보았으나 그러니 이 모든 일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론을 내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마땅한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거기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성경에서 세상의 그러한 일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하는 그러한 것을 좇아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그러한 세상에서 건짐을 받아 진리를 말하는 자리로 나아오게 된 이것이 얼마나 큰 기적이며 놀라운 은혜인지를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봅시다.
45절입니다. 예수의 하신 일을 보고 많은 유대인들이 믿었으나 그러나 그중에 어떤 자가 바리새인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보고서 믿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것을 고발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하여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나의 형제에게 나사로를 보내서 지옥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을 하자 이미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죽은 자가 살아서 가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일을 보고서 믿는 자가 있는가 하면 고발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다가오면 진리를 향하여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경우와 진리를 배척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에 분리를 일으키러 온 것입니다. 진리의 자녀와 비진리의 자녀를 나누는 것입니다. 편가르기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서로서로 하나가 되자고 그렇게 말합니다. 종교 간에도 하나가 되고 나라 사이에도 하나가 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와 비진리는 섞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악과 선이 함께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이러한 혼돈의 세상에 참된 진리가 오자 세상이 두 쪽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와 예수님을 고발하고 죽이는 자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47-48절을 봅니다. “봉독”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의논합니다. 예수님이 잘못한 게 아닙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모의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보이니 저를 가만히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따라갈 텐데 그러면 민심이 그곳으로 옮겨 가면 데모가 일어난 것으로 알고 로마 군대가 들어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다 빼앗아 가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이라는 말을 다른 사본에서는 성전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 이들의 말하는 의도는 성전을 위하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의 민족을 염려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하나님께 대하여도 충성되고 나라에 대하여도 충성되게 보이는 것입니다.
공의회로 모인 자리에서 이러한 대세의 흐름을 누가 감히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시대의 정신이고 흐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별 다른 의견이 나오게 된다면 그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요 민족을 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당장 정죄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배척하게 하는 사람들의 현실관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됨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말들이 얼마나 엉터리 같은 말입니까? 만군의 여호와를 섬긴다는 자들이 로마군대가 겁이 나서 벌벌 떨뿐만 아니라 로마가 주는 그들의 기득권의 단 맛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한 사람을 죽여서 많은 사람을 살리자는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49-50절입니다. “봉독” 아마 의회에서 여러 의견들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결론을 내립니다.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유대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로 생각지 아니하느냐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진리관입니다. 진리냐 비진리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다수의 이익과 직결되는가 하는 것이 이들의 진리관입니다. 이것이 또한 민주주의의 원리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의회를 모았다는 것은 일종의 의회입니다. 이들이 정치적인 처결권은 식민지이기에 로마에게 있지만 로마가 점령국들에게 종교나 문화는 관대한 편이어서 그들의 종교나 문화는 그대로 인정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대교의 종교적인 문제들은 자기들의 의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의회에서 내린 최종결론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죽어서 유대민족을 살리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이 그 해 대제사장이 되어서 하게 된 것이지만 그러나 이 말을 하게 된 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이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권세를 가지고 아무리 큰 소리 치더라도 모든 것이 주님의 주권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51-52절을 봅니다. “봉독” 이 말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죽이려는 대제사장의 입을 빌려서 하나님은 자신의 하실 일을 미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진리관은 다수의 이익을 위하여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모습입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그 체제를 수호하기 위하여 진리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그렇게 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뜻이 그들에 의하여 방해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희생의 정치적이고 외형적인 원인은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대신하여 죽는 것이 났다는 지극히 실리적인 이유, 현실적인 이익을 계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날부터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를 한 것입니다. 그 전에는 공의회에서 공식적인 제거 음모를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대제사장의 입을 빌어서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민족이 망하는 것 보다 낫다는 이 말을 하고서부터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57절에서 보면 예수님을 잡아들이라고 수배령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러한 결정들까지도 자기의 뜻을 이루어 내시는 일에 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하가 이미 주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잠시 있다가 없어지고 변동될 것들입니까?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우리 주일학교에, 학생회에 성경학교와 수련회를 통하여 증거 하려고 하는 것은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전달하려는 우리가 얼마나 진리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기준에 서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의 기준은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진리입니까?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가상현실 같은 이 세상입니까? 말씀 몇 곳만 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4:16-17절. “봉독”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속죄를 이루사 부활승천 하시어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진리의 성령은 세상이 받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자만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6:13절. “봉독”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어디로 인도하시는 것입니까?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받고 있습니까? 세상의 썩어질 구습을 좇는 일을 버리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생명과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살고 계십니까?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장래의 일에 대하여 믿고 계시는 것입니까? 베드로후서의 말씀처럼 이 세상이 경건치 못한 자들을 불사르기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떠한 자가 되어야 마땅합니까?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안전지대란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30년 동안이나 한번의 사고도 없었던 콩코드 비행기, 그래서 프랑스에서 미국을 왕복하려면 비행기삯만 1,000만원이나 하는, 그런 비행기도 추락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한 구절 더 봅니다.
요한복음 18:33-38절을 봅니다. “봉독” 빌라도의 질문, 예수님의 대답. 진리에 속한 자는 내 말을 듣느니라.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 바로 앞에 진리를 두고서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빌라도는 자신의 왕위를 보존하기 위하여 민중들의 항의에 예수님을, 진리를 내어 주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의 아우성이 없습니까? 나의 욕망을 위한 아우성에 예수님을 내어 주시는 않습니까?
요한복음 12:1-8 예수님의 죽으심 2000. 8. 6.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겉모습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사는 모든 원리가 위선과 체면으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위선과 체면이 가득하다 보니 의례히 우리가 사는 세상의 원리가 이러한 줄 알고 우리도 그렇게 동의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간에 겉이 번지르한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도 어디로 치우치는가 하면 외형적인 대로 치우치는 것입니다. 우선 눈에 나타나는 실적들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누구는 예수 믿고서 어떤 복을 받았더라고 하는 말과 간증들 속에서 대부분이 이 세상에서 잘 된 것을 가지고 그 결과를 평가 하더라는 것입니다. 신앙간증이란 것들을 들어보면 한마디로 고진감래라는 말을 듣는 기분입니다. 어렵고 힘든 때를 극복하니 하나님이 이렇게 좋은 삶을 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장 큰 간증은 순교입니다. 주를 위하여 열심히 살았는데 그 결과가 힘없이 죽었더라, 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간증이 나오지 않는 것을 우리는 이상하게 여겨야 합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냥 돌 맞아 죽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어떻습니까? 거지인 채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러한데도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란 죽음을 말하고, 죽음을 기뻐하고,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을 당기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니 죽음을 기뻐하고 죽음을 당기고 싶어 하다니 무슨 말입니까, 하고 싶으시겠지만 오늘 말씀을 보시면 왜 이것이 중요한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2:1절에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이르십니다. 베다니라는 마을은 바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마을입니다. 그리고 유월절 엿새전이란 예수님이 이제 잡히시고 죽으실 유월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동네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 잔치집이 시몬이라는 집에서 열었습니다. 나사로의 집이 좁아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베다니 마을 시몬의 집에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같은 본문을 다른 복음서에서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26:6-13절입니다. “봉독”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
마가복음 14:3-9절입니다. “봉독” 거의 같음.
누가복음 7:36-50절입니다. “봉독”
향유를 붓는 것은 같은데 그 내용이 다르기에 같은 사건으로 보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그러나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는 것은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나 나의 장사를 준비한다는 말씀과 이 내용이 복음이 전하여지는 곳에 함께 전하라는 것과 죄사함이 많기에 많이 사랑한다는 말씀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다른 사건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사함이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만 해결되는 문제이니 이 말씀도 주님께서 죄사함을 선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직접적인 죽음을 언급하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죽음을 근거로 죄사함을 선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이라면 이 본문의 말씀도 같은 사건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을 빼더라도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서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성인의 일당이니 하루에 5만원을 받는 사람이라면 천오백 만원이나 나가는 귀한 향유입니다. 그런데 이 향유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두 사람의 태도와 예수님의 평가를 보게 됩니다.
먼저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서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습니다. 그러자 향유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 차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1:15절에 보면 여자의 긴 머리는 여자에게 영광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자에게 가장 큰 수치는 머리털을 밀어 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영광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광이란 예수님의 발아래입니다.
이것을 누가 제대로 압니까? 마리아가 제대로 안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았기에 예수님의 발에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기는 것이겠습니까? 유대인의 인사란 입맞춤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길 때 입맞춤을 사인으로 하여 넘기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 마리아는 물론 여자가 남자에게 입맞춤으로 인사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가장 영광스럽다는 그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발에 향유를 붓는데 마태와 마가복음에는 머리에 붓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머리에도 붓고 발에도 부은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집에 귀한 손님이 오면 종들이 물로 그 손님의 발을 씻기고 향유를 조금 뿌려서 향기를 나게 한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한 죄 많은 여인이 향유를 붓는 장면에서 예수님이 시몬을 책망합니다.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서 그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니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입니다. 아니 자기가 선지자라면 저 여인이 누구인지를 모르는가, 왜 만지도록 그냥 버려두느냐는 것입니다. 부정한 자가 만지면 부정하게 되는 것이 율법의 정결법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속으로 그렇게 하였겠지요.
그러자 예수님이 그 속마음을 아시고 비유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시몬을 부르시고서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가 동시에 탕감을 받았다면 누가 더 탕감하여 준 자를 사랑하겠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자 시몬이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판단이 옳도다, 하시면서 시몬이 비판한 한 여인과 비교를 하시는 것입니다.
첫째는 너는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눈물로 나의 발을 씻어 주었다. 둘째는 너는 입 맞추지도 아니하였지만 이 여자는 들어올 때부터 내발에 입 맞추기를 멈추지 아니하였다. 입맞춤으로 손님을 접대하지 않은 것은 천대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지만 이 여인은 향유를 부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많이 사함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서 그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이 얼마나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입었다면 그렇게 하겠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 향유사건은 결국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비하는 예언이 된 것입니다. 유월절 엿새전이기에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예수님이 잡히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사건을 예언하는 것이 되는 것이 이 향유를 붓는 것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 후 그 때로부터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고 죽으실 일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됩니다, 하면서 예수님을 말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어라고 하십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만이 자기의 택한 자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시면 안 된다고 말리는 것이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사건 앞에서 예수님이 계셨더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텐데, 라고 마르다와 같은 반응을 보였지만 오빠가 살아나고 나서 그랬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었다는 것이 누가복음 10:38-42절입니다. “봉독” 마르다는 예수님 대접하기에 분주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마리아도 나를 도와주라고 하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이 너는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분주하다마는 그러나 한 가지만으로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것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대접하는 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일이 우선이 아닙니다. 우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목사를 대접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심방을 하면-잘 안하지만-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시는 것이 참된 대접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잘 들었기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제자들도 몰랐는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비하게 된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관심-지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지리산에서 여러 교회가 연합으로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약 40여명 모였는데 부산에서 울산에서 경기도에서 대구에서 수원에서도 왔습니다. 그런데 한 자매가 혼자인 것 같아서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니 수원에서 혼자 왔다는 것입니다. 경희대 4학년이라는데 2년 전에 자기 교회 전도사님으로부터 복음을 듣고서 그때는 많이 다투기도 하였다는데, 가고 나서 복음에 눈이 뜨이게 되고 그래서 이번 수련회를 인터넷을 통하여 알게 되어 혼자 참여하였다는 것입니다.
수원에서 기차를 타고 진주 와서 다시 지리산으로 그것도 남자도 아니고 여학생이 혼자서 왔더라는 것입니다. 경비도 만만치 않았는데 그렇게 오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어느 정도로 바쁜 일들을 제쳐둡니까? 마리아가 주님 발 앞에 가만히 있었던 것이 더 좋은 것을 택하였기에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된 것이 다 주님의 은혜로 된 것이며,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비한 사건이기에 그들은 한 도구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도구 중에서 가야바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원수로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죽어 자기의 민족을 살린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였다고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입니다. 그 처참한 죽으심이 바로 우리의 죽음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 죽음이 바로 우리의 죄 때문임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모르면 신앙이라는 것이 이 세상의 겉모습을 추구하다가 한평생을 보내는 것입니다. 마치 가룟 유다가 아이고, 저 아까운 것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지 하는 태도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가룟 유다가 돈 주머니를 맡아서 관리를 하다보니 그 돈을 때때로 훔쳐내는 도적이기에 그렇게 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제대로 이해 못하게 되면 우리의 어떤 행위로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00 데나리온이라면 가난한 자를 얼마나 많이 도와줄 수가 있는데, 하는 태도입니다. 돈으로 힘으로 무슨 선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12:8절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너희가 도와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항상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이 여자가 좋은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의 장사를 예비하였기에 복음이 전하여 지는 곳 마다 이 여인의 행한 일도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여인의 행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준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기 전에는 세상의 것으로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마치 가룟 유다와 같은 태도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의 이유를 잘 모르면 가룟 유다처럼 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돈을 쓰고 힘을 모아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자라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 이런 기대로 다녔는데 아무리 보아도 그런 기미가 없으니 팔아넘긴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이렇게 팔아넘긴 것은 죽음에 임박하면 예수님이 어떤 초능력을 발휘하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를 가졌을 것이라고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음을 베드로를 보면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 몰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죽지 않고 무슨 천지개벽을 일으키시면 나 여기에 있다고 나갈 생각을 가지고 따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의 예수님을 따르는 평소의 모습을 보면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일하셨습니까? 그의 죽으심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이 모든 일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에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다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다 드러내시고 인간의 모습이 십자가에서 버림 받는 그 모습이어야 하고, 그리고 그 진노와 저주를 다 담당하시고 자기의 백성들을 대속하심이 그의 죽으심입니다. 그리고 그의 부활도 그의 죽으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예수님의 죽으심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죽는 것이 실패인줄 알고 있습니다. 성공하지 못하면 저주받은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세상이든 교회이든 무언가 시작하였다면 초능력을 발휘하든, 인간의 불굴의 의지를 동원하든지, 귀신의 힘을 빌리든지 간에 성공하고 출세하고 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고 별세를 말하면서 역시나 관심은 우리의 교회이고 우리의 나라이고 내가 속하여 있는 나의 소유를 붙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에 동원시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사람들의 능력과 실력과 힘을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일을 멋있게 이루어 드리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29절에서 그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이 그의 피가 속죄를 이루사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알게 된 바울 사도가 무어라고 하는지 몇 곳만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6:3-4절입니다. “봉독”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마리아가 단지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발에 입맞춤으로 그의 죽으심에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져야 함께 살리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새 생명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하여 살기 위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에 대하여는 죽기 위하여 믿는 길입니다.
빌립보서 3:7-9절입니다. “봉독”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지혜가, 자기의 능력이, 자기의 권세가 해롭다는 것입니다. 도움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신앙에 방해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가장 귀하다는 것입니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서 난 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착하여도 아무리 좋은 것을 만들어 낸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제대로 알아가는 것이 신앙의 자람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어떤 고백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6:14절입니다. “봉독”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의 죽으심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옛날의 경력도 아니요 자기의 헌신과 충성과 봉사도 아니요 자기를 살리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그의 죽으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의 부활에 참여하는 참으로 복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2:12-16 예루살렘 입성 2000. 8. 13.
오늘날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고 있습니까? 도대체가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고 다들 한마디씩 할 것입니다. 금요일 저녁에 시내 공원에 나가보니 무슨 공연을 하고 있어서 잠시 보았습니다. 공연 내용이 통일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학생과 노동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어린이까지 나와서 하는 내용들이 보안법 철폐, 미군 물러가라를 공공연하게 외치고 미군의 범죄행위를 사진으로 공개하고 어린이들은 반갑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아마 나이 드신 분들이 이런 장면을 보았다면 특히 반공 이데올로기로 무장되어 있는 분이라면 기절초풍할 일들이 지금 마구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할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는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미군이 물러가고 통일이 되면 좋은 세상이 올 것 같습니까? 통일이 되면 무엇을 하고 싶느냐고 반갑습니다, 라는 노래를 부르고 난 어린이들에게 누가 질문을 하니 물론 준비된 대답이겠지만 어떤 어린이는 두만강에 수영하고 싶다고 하고 어떤 여자 아이는 신혼여행을 백두산으로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게 통일되면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어떨까요? 이들의 원하는바와 다를 바가 있을까요?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좀더 노골적이고 좀더 위장된 모습으로 나타날 뿐이지 인간의 죄성이란 결코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미군이 우리나라에서 범죄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군인들이 월남전에서 비록 미군의 용병으로 갔지만 범죄를 한 것입니다. 우리가 미군처럼 힘이 있는 나라라면 미군 못지않게 학대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한민족이고 이산가족들도 있지만 그러나 정말 통일을 논하려면 남한 사람 전체가 지금의 생활수준을 절반으로 낮출 각오를 하고 자기의 재산을 절반을 내어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본을 가진 자가 자본이 없는 자를 다시 노예화 하는 것입니다. 형제라도 가난하면 외면하는 것인데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잠언 19: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 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만약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로 인하여 장미빛 미래를 꿈꾼다면 아직도 죄의 심각성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일어나는 어떠한 일도 자질구레한 것들입니다. 너무 기대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은 헛될 뿐입니다. 해 아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생각해 볼 때는 대단한 사람처럼 여겨져도 그러나 휴가를 가도 될 정도로 별 볼일 없는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휴가를 가더라고 세상 돌아가는 것은 그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시간이라도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봅시다. 참으로 역사의 주관자이신 주님의 일하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님의 일하심을 온 세상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다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신이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게는 그 어둠의 장막을 뚫고서 복음의 빛을 비추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눈을 뜨고 보니 이 세상의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정도가 아니라 그러한 것만을 추구하는 삶이 죄임을 알고 오, 주님 이 악한 세상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는 말이 호산나입니다. 호산나는 지금 우리가 죽게 되었으니 나를 구하여 주소서 하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 헛된 세상에서, 죄 된 세상에서 무엇을 쌓으시렵니까?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허상 그리고 죽음뿐임을 알지 못하고 달려가는 사람들이 불쌍해 보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하여 사는 사람으로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생명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모습에서 생존을 위하여 허덕이는 사람으로 보입니까? 아니면 생명을 위하여 사는 사람으로 보입니까?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가정이던 직장이던 어디서든 생명의 가치를 알고 사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이미 생명을 맛보고 생명 안에 산다면 틀림없이 생존을 위하여 사는 사람과 다른 시원함이 나타날 것입니다. 넉넉함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 생명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생각하여봅시다. 예수님이 자신이 메시아임을 제자들에게 비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자신이 예루살렘 성으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입성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메시아임을 공개적으로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지상의 활동은 모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었으며 또한 그 일은 성경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예루살렘 입성에 대하여 어떻게 예언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신다는 말씀은 다음에 보기로 하고 우선 예루살렘 입성에 대하여 선지자들의 예언과 그 성취를 보고자 합니다.
16절 말씀을 보시면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신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를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다가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란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된 책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얼마나 놀랍게 예언되었고 성취되었는가를 추적하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에녹을 볼 때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지 않고 하늘로 올리운 내용을 말씀드리면서 므두셀라를 낳을 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말씀을 유다서를 통하여 확인을 하였습니다. 그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이었음을 므두셀라 죽던 해 곧 노아 600세 되던 해이었음을 성경의 인물들 나이를 조사해보니 꼭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예루살렘 입성은 어떻게 예언되어 있는가를 봅니다.
다니엘서 9:24절을 봅니다. “봉독”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이 예언의 배경은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그곳에서 포로기간이 70년 동안 되리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읽고 기도합니다. 자기 백성들의 죄를 회개하면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어 장차 될 일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 계시는 일차적으로 70년이 차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성과 성전이 다시 중건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을 것이 예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포로에서 귀환 후에 바로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는 일 즉 메시아가 나타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 그러한 일이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고레스를 기름 부어 자기의 도구로 삼았습니다만 그러나 그는 영원한 의의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의를 가지고 오시는 메시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이 분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셔서 메시아직을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70이레에 대하여 조금 더 살펴봅시다. 이레란 7을 말하지요 그러므로 칠이 70이란 것을 490년을 말합니다. 포로기간이 70년인데 다니엘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데 70이레가 차면 백성들의 죄를 사하고 메시아가 나타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70 이레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는 곳이 다니엘서 9:25절입니다. “봉독” 7이레와 62이레로 구분합니다. 그러면 69이레가 되는데 69이레면 490년이 아니라 483년이 됩니다. 7년이라는 단위가 빠지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계산은 희년을 계산하는 것을 보아도 이해가 됩니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 그렇게 되는데 7안식년을 지나면 49년이 됩니다. 그런데 희년은 50년째를 희년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7이레 또는 69이레의 기점을 어디에서 잡는가 하는 것을 성경에서 보면 느헤미야 2:1-9절에 보면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도록 허락이 됩니다. 이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이 역사적으로 몇 년인가를 성경학자들이 아니라 고고학자들이 발견하였는데 약 10년의 차이가 나지만 기원전 455년과 445년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33년으로 보면 아닥사스다 왕 20년이 455년이라면 기원후 28년이 되고 445년이라면 기원후 38년이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33세를 기준하면 위 아래로 5년 차이가 납니다. 그러면 고고학자들이 맞겠습니까? 성경이 맞겠습니까? 성경이 맞습니다. 이렇게 보는 것은 성경의 날짜를 계산하여 무엇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시는가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7이라는 숫자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잠시 더 보고자 합니다. 매 7일은 안식일입니다. 매 7년은 안식년입니다. 안식년 곱하기 안식년은 49년입니다. 49년이 안식년이 되고 그 다음해가 희년입니다. 이러한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메시지가 됩니까? 사람의 생명이란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일하지 않음으로 메시지를 만든 것입니다.
한편의 설교입니다. 안식일, 안식년의 쉼이 그러합니다. 하루를 쉬면서 안식년, 일년을 농사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손길을 배제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국이 희년입니다. 희년은 모든 빚진 자가 탕감을 받고 땅을 팔았으면 자기 소유로 돌아오고 종으로 팔렸더라도 자유를 얻는 엄청난 해방과 자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해가 됩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제대로 지킨다고 하여도 비록 문자적이긴 하지만 안식년을 제대로 지켰다거나 희년을 제대로 지켰다는 것은 성경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안식이 없는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안식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이 온전히 드러나는 것이 안식이며 구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안식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을 토하여 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안식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양보 없이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레위기 26:43-44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법을 싫어하는 그들을 쫒아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은 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고서 다시 회복시키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의 구체적인 실현이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통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역대하 36:20-21절입니다. “봉독”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였다는 것입니다. 70년 동안 사람이 없기에 연속 안식년을 누리는 것입니다. 7년마다 안식년을 누리는데 매년 안식년을 누리니 무려 490년 동안의 지켜야 할 안식년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이를 보면 결국 그 목표점이 안식을 주시는 희년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70년 만에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사건과 예수님이 70이레에 오신다는 것은 다 자기 백성의 안식을 주러 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입성을 구약이 예언한 것이며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하시면서 그 예언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 기름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의 기능을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의 일을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하신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제자들이 언제 깨닫게 되는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승천 하셔서 성령을 보내시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세상 사람들의 역사관이나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에 마음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관심이 주님의 움직이심에 그분의 뜻에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를 세상에서 구출하셔서 당신의 나라에 들여 놓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해방을 주시고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로 가신 것입니다. 이제는 종말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이 바로 종말에 일어날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에는 시간을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종말이라는 상황 안에 있기에 언제 몇 날 며칠이라는 것은 무의미 합니다.
오직 우리의 자세는 나중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밤에 내 영혼은, 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당신의 안식을 자기 백성에게 주시기 위하여 걸어가신 그 주님을 생각한다면 오늘 지금 이 시간에 세상의 기대를 버리고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호산나하고 부르짖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안달하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라면 왜 내 모양을 이 꼴로 만들어 놓았는가, 우리 가정을 우리 교회를 나라를 하면서 원망 불평을 합니다. 이것은 이미 역사의 중심에 누구를 두고 있는 것입니까? 자기 자신을 역사의 중심으로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택함을 입은 자는 호산나라고 외칩니다.
요한복음 12:12-19 나귀 새끼를 타신 왕 2000. 8. 20.
지난주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구약적인 배경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입성을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러한 입성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가 어떤 예수를 믿는지를 점검하고서 나귀 새끼를 타고오신 그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요즈음의 화두는 단연코 남북의 문제입니다. 이산가족, 통일, 김정일 위원장 등의 이야기들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갔을 때 공항에서의 영접하는 모습이 어떠하였습니까? 공항에 붉은색 카펫을 깔고서 절도 있는 의장대가 환영을 하고 인민들은 열열이 환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차는 최고급의 차로 환영을 하였습니다. 지구상에서 조그마한 나라 그것도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는 한 나라의 대통령을 영접하는 일에 그 정도의 엄청난 준비를 하고서 영접을 합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모습을 보십시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모두 이 예루살렘 입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함께 보면 예수님이 타고 가신 나귀 새끼도 예수님이나 제자들의 소유가 아니라 남의 나귀 새끼입니다. 과연 그러한지 한곳만 봅시다.
누가복음 19:29-34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귀를 풀어 오라고 하시는데 33절에 보니 임자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왜 남의 나귀를 푸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시키신 대로 주님께서 쓰시고자 한다, 라고 하자 끌고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귀 그것도 새끼 나귀를 빌린 것입니다. 그런 나귀 새끼를 타고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시는데 사람들이 겉옷을 펴서 깔고 나무 가지를 베어서 길에 깔고 종려나무를 손에 들고 호산나, 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시편 118편 25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여기서 이제 구원하소서 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호쉬아-나입니다. 그러니 이 내용을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편 118편 25-26절을 간단히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12:13절의 내용입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소리를 지르며 환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양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왕의 행차라면 리무진을 타고 가야 하는데 경차를 타고 가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집권자들이 보기에 얼마나 우습게 보였겠습니까? 특히 동양사회는 체면문화라고 하여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일부러라도 고급차를 타야만 대우를 해주는 그런 나라에서 살다보니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이가 나귀 새끼를 타고 오다니 얼마나 초라한 행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행렬을 보고서 민중들이 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환영을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지금 절기가 유월절인데 유대인의 성인 남자라면 다 성전에 올라와서 유월절 절기를 지켜야 하는 그런 때입니다. 늘 이들의 기대는 메시아의 도래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나사렛 예수라는 청년이 병도 고치고 먹을 것도 해결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더더구나 얼마 전에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실이 알려지면서 기대는 최고조에 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2:17-19절에 보시면 나사로를 살려 낼 때 보았던 자들이 소문을 많이 내었고 이에 많은 무리가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행렬이 왕의 행차와는 비교가 안되지만 그러나 곧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원하여 내리라는 기대 속에서 호산나 하면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루살렘 성에 들어 가셔서 하신 일이란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을 정화한 것뿐입니다. 채찍으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쫒아 내시고서 다른 특별한 영웅적인 일을 행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호산나 하던 이 무리들이 예수를 죽이려는 무리들의 선동을 받고서는 당장 돌아서서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왕과 예수님이 이루어 내시는 왕의 차이를 보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왕이란 나귀 새끼를 타고 오는 왕이 아니라 백마를 타고 오는 왕이었습니다. 물론 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의 재림 시에는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님이 초림 시에는 나귀,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그런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왕이 아니라 한번 호령하면 천하가 벌벌 떠는 그런 왕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왜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자신들은 이미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이미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선택받은 자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세상의 악한 자들이 자기들을 지배하고 있으니 이러한 현실에서 자기들을 구원하여 달라는 호산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에게 구원하여 주소서라고 할 때에 무엇에서 구원을 말하고 있는가를 잘 보아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구원의 부르짖음도 세상의 물질이나 출세나 남북통일이나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서 강대국이 되는 그런 것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구하여야 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구하여 주소서입니다. 죄에서 구하여 달라는 간구를 하지 못하는 것이 유대인들이고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백마를 타고 오셔서 한번 본때를 보여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주님께서 2천년 전에 백마를 타고 오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미 우리는 끝난 사람들입니다. 심판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9:11-16절입니다. “봉독” 재림하실 때 주님은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그리고 대적한 자들을 발로 밟습니다. 마치 포도주틀을 밟듯이 밟는 그 분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그분이 바로 철장으로 다스리시는 시편 2편의 그 분입니다. 그 아들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십니다.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바는 이러한 왕을 원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죄를 알지 못하기에 이러한 왕이 오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다가, 스가랴 9:9절에 이러한 주님이 오시리라는 예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주님의 영을 받고 나서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림 직전까지는 아직도 구원의 때입니다. 아직도 은혜의 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증거 되고 있는 것입니까? 나귀 새끼를 타고 계시는 분으로 십자가를 지신 분으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내가 예수를 믿는데도 왜 이 모양 이 꼴이냐 또는 다른 사람들이 너 예수 믿는다면서 예수는 천지를 창조한 분이라며 그런데 너 꼴이 그게 무어냐 그런 소리를 들으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주님 지금 한번 나타나셔서 본때를 보여 주십시오, 그런 생각이 들지요?
이런 생각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아니 너희들 천지를 창조한 여호와를 섬긴다면서 꼴이 그게 무어야 남의 나라 식민지로 살고 있다니 그러니 이들이 늘 구하는 왕이란 한번 본때를 보여줄 왕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성경에서 왕이 오리라는 예언이 있으니 더더구나 그런 말씀에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모른 것 한 가지는 자기들이 구원받아야 하는 죄인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오신 것입니다. 이들이 기다리는 왕과는 다른 왕인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스가랴 9:9-10절을 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셔서 무엇을 제거하여 버리시는 것입니까? 에브라임의 병거와 에루살렘의 말과 전쟁하는 활을 끊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입장이나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적들의 병거와 말과 전쟁무기들을 제거하여 버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바로 유대인들의 병거와 말을 없애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서 율법으로 금지하신 것이 있는데 왕으로서 병거와 말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왕은 전쟁용으로 병거나 말을 갖추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구원함에 있어 병거와 말이 무용지물이라는 말씀을 시편에서 자주 보았습니다. 언제 보았는가 물으시면 새벽기도회 때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분이 병거와 말을 끊어 버리신다는 것은 그러한 병거와 말 한마디로 힘이 너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계속하여 스가랴서 9:11절을 봅니다. “또 너로 말할진데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무엇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언약의 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구하는 것이라면 피로 구원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병거를 가득 주시고 말을 가득 주시면 됩니다. 요즈음 말로는 돈을 주고 힘을 주고 권세를 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죄에서 구원하셔야 하기에 피를 주시는 것입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기독교라는 단체를 돌아보면 도대체가 나귀 새끼를 타고오신 주님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티코를 타고 오는 것보다 리무진 정도를 타고 오면 대우가 달라지는 곳이 호텔이 아니라 교회가 되어 버렸다면 이미 우리는 주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셔서 병거와 말을 끊으시려고 오셨는데 우리는 제발 병거와 말을 달라고 하니 이게 어찌 주님을 믿는다는 자들의 모습이 됩니까?
시편 20:7-8절을 봅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저희는 굽어 엎드려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리로다” 시편 33:6-7절을 봅니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지금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그 주님을 믿지 않고 병거와 말을 의지하는 자는 엎드려 질 것입니다. 언제입니까? 정말 주님이 백마타시고 철장 권세를 가지고 오실 재림 때에 그동안 주를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세상의 힘을 구하기 위하여 주의 이름을 부른 자들을 밟아 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까?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였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말자가 됩니까? 그 정도의 실력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안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길은 친히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셔서 병거와 말을 끊어 버리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무엇을 끊어 버리시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내가 세상에서 귀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끊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못산다고 하는 것들을 끊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길입니다. 단지 우리의 의지하는 것들을 끊어 버리시고 이제는 나를 믿으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시기까지 낮아지신 주님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셔서 무엇을 하신 것입니까? 잡히시고 죽으시는 것입니다. 왕이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을 살려 내시는 것이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2:23-24절을 봅니다. “봉독”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심이 인자가 영광을 받는 길이며 이것이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그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가 되고 말과 병거를 의지하지 않는 자가 된 것은 이러한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신 주님 때문에 되어진 일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믿는 자는 백마타고 오시는 분을 기쁨으로 맞이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2:20-26 주님을 섬기려면 2000. 8. 27.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시는데 사람들이 무어라고 환영을 하였습니까?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였습니다. 그런데 호산나라고 주를 부르지만 이들이 곧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 무리가 됩니다. 왜 그렇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죄의 종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장님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2:37-40절입니다. “봉독”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들어도, 보아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눈이 멀고 마음이 완고하여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환호를 하고서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더라도 그 구원이 죄에서의 구원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저 내 형편이나 나아졌으면 하는 그런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이스라엘이 이 정도라면 이방인이야 말해 무엇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은 인간은 어떠한 가르침과 종교와 의식으로도 거듭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잘나서 무언가 하나님을 잘 섬길만한 구석이 있어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란 이런 모습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죄와 완고함, 목의 힘줄이 놋쇠 같은 굳은자들을 돌이키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일하심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만의 선택이 아니라 온 열방가운데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불러내시겠다는 것을 이미 창세기 12장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하여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은 자기의 행위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보여주시는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취가 오늘 말씀 20절에 보시면 명절에 예배하러 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헬라인은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빌립을 통하고 안드레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데 그때 예수님이 무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주님께 찾아 온 것을 보시고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는 것은 이들이 모두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방인이 예수님께 나아온 것을 보시고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되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영광의 때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갈릴리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때를 말씀하실 때 그 때란 언제나 무엇에 초점을 맞추시고 하신 때였습니까? 언제나 자신의 죽으심을 말씀하신 것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람들이 잡고자 하였으나 언제나 피하여 나가신 것은 무엇이 안 된 것입니까?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성경의 완성을 위한 때가 다 된 것입니다. 이방인도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으로 자신이 죽으심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영광 받을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영광이란 무엇이 영광입니까? 자신의 죽으심이 영광이란 것입니다. 자신의 죽으심을 영광이라고 하시는 분 앞에서 무슨 영광을 구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에서 취미로 식물이나 동물을 기르고 계십니까? 아마 한두 가지는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들을 위하여 물을 주고 먹이를 주면서 기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르는 자의 자기 기쁨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섬기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섬기기 위한 차원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고 주를 섬긴다고 이렇게 하고 있습니까? 나를 섬기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까? 정말 예수님을 섬기기 위하여 이렇게 하고 있습니까? 정말 아무른 반대급부 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가 있습니까? 세상적인 것이 하나도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여도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주를 사랑하거나 섬기는 수준이 안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지 남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하기 위하여 남을 사랑한다는 말을 할뿐입니다. 남녀가 사랑한다는 말을 왜 합니까? 정말 상대를 섬기고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한다고 말합니까? 마치 아름다운 한 송이 꽃을 꺾어다가 자기의 화병에 꽃아 두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이 무엇을 섬기는지를 너무나 잘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4절을 봅니다. “봉독” 이 말씀이 예수를 안 믿는 사람에게 쓰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까? 자기 사랑, 돈 사랑, 자긍, 교만, 훼방, 부모 거역, 감사치 아니함, 거룩하지 아니함, 무정함, 원통함을 풀지 아니함, 참소함, 절제 못함, 사나움,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음, 배반, 조급, 자고,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함. 처음에 자기를 사랑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타나는 현상들이 결국 하나님보다 자기의 쾌락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무엇을 제시하여 예수를 믿게 하시겠습니까? 현실적인 이익들을 제시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겠지요. 자기에게 이익이 되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신을 따름이 무엇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2:25절입니다. “봉독”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리고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를 사랑합니다. 남을 위하여 희생한다고 하여도 희생하는 자기의 고귀함을 자기의 가치에 기분 좋아하는 사람인데 도대체 어떻게 자기를 미워한다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신을 미워하여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무언가 잘하는 것 하나 없이 나는 내가 미워 차라리 탁 죽어 버리자 하는 것도 자기 사랑의 다른 면입니다.
이미 자기가 자신을 주로 섬기고 있기에 자신의 변변찮은 모습을 보고서 견디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자기를 미워하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이든지 남을 위하여 희생을 하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자기의 못난 모습을 한스러워 하면서 자신의 부모를 탓하고 시대와 환경을 탓하면서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나 하는 사람이라도 결국은 자기를 사랑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가 자기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길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모습입니다. 죄란 세상의 법정개념이 아닙니다. 세상의 윤리도덕적인 면에서의 죄의 개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죄란 마땅히 주를 사랑하고 주를 섬겨야 하는 인간 피조물이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섬기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6:22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주님이 재림하시면서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주 당연하게 살고 있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여 지기 위하여 자신을 섬기기 위하여 인생을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주를 자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그런 사람이 누구냐고 반문을 하실 것입니다.
24절을 봅니다. 안 그러신 분이 한분 계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사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한 알의 밀알로 죽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시는 것이 예수님의 영광이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한 알의 밀알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 열매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오늘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희생의 열매로 나온 것이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20:28절. “봉독” 주님이 우리를 섬겨주심,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심, 한 알의 밀알이 되심. 그러므로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사심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으심 안에 자기의 백성들을 끌어넣으시는 것입니다. 누가 스스로 자기를 미워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리로 가는 자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사랑한다는 제자들마저 주님의 죽으심에서 도망을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역할도 무엇을 보여 주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도망가는 제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신 그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많은 열매를 맺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 죽으심에 자기의 제자들을 끌어넣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주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이 자기의 모든 백성들을 주님께로 이끌어 들이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대로 우리가 끌림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자기의 몸의 즐거움과 마음의 즐거움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투자하면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는 감각조차 없었던 우리가 주님이 이끄시니 이제는 무언가 달라진 것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이나 믿은 후나 몸은 그대로입니다. 아직도 육체의 욕구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무엇이 나에게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우리 안에 들어 온 것입니다. 내가 원해서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떻게 자기를 미워하는 것을 원할 수가 있습니까?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세상이 그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새 사람 된 증거입니다. 물론 자신이 잘못하여 욕을 얻어먹고 미움을 받는 것은 자기 잘못입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배척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극동방송에서 윤석균씨가 인도하는 찬양프로그램에서 어떤 이발사를 소개하면서 자신이 예수를 믿고서 세상의 친구를 버렸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감동스럽다고 하면서 예수를 믿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버렸는가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세상의 친구를 버린 내가 자랑이 됩니다. 내가 세상의 친구도 버리고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 자기의 자랑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나를 미워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차원의 믿음이란 내가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믿음은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을 받고 보니 세상이 오히려 나를 미워하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버리고 세상의 친구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기 전에 그렇게 좋아하던 친구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까? 그 친구가 지금도 예수를 믿지 않는데도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만나 보았자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창회나 계모임 같은 모임에서 자기가 있을 자리가 아님을 압니다. 야, 쟈 빼라 빼, 물 흐린다, 그러지요. 청년이 노래방에 가서 복음성가를 불렀더니 돈 내어 주면서 나가라고 그러더래요. 노래방 물 흐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내 안에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신 그분의 생명의 씨앗이 들어온 증거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종자가 다른 것입니다. 종자가 다르기에 함께 살기는 사는데 자꾸만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미 주께서 우리를 자기의 생명의 세계로 옮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였기에 예수님께 속한 자를 세상이 미워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나를 미워하는 것에 겁내지 마시고 당연하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씨앗이 다릅니다. 썩어질 씨앗이 아닙니다. 영생의 씨앗이 들어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주님이 일하시고 이끄심의 결과입니다. 이렇게 되어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섬기는 자를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고 주님이 계시는 곳에 주님을 섬기는 자로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도망갈래야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욱 주님을 섬기는 일만 남았습니다. 제대로 주님을 사랑하시고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섬길수록 더 귀하고 사랑할수록 더 사랑을 알아갈 것입니다.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새끼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오리가 알을 부화하여 새끼를 키우는데 그 중의 한 마리가 조금 다르게 생겨가지고 다른 오리에게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미움을 받을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았겠지요. 하늘을 유유히 나르는 백조이지요. 그것을 그리워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날게 됩니다. 현실은 더러운 물에서 노는 오리이지만 그러나 무엇이 달랐습니까? 씨가 다른 것입니다.
이제는 훨훨 나르면서 삽시다. 높이 나르면 세상 것이 시시하게 보입니다. 신앙의 비상을 하면서 여유 있게 사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2:27-36 인자가 들려야 2000. 9. 3.
호산나라고 찬송을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시편 118편의 내용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여 주옵소서, 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호산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이 구절을 기억하고 늘 호산나로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호산나, 하는 가벼운 율동을 곁들여 노래를 하지만 유대인들의 호산나는 자신들의 식민 상태에서 비장한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한 정도가 온 천지가 들썩거릴 정도로 호산나 하였지만 단지 며칠 만에 저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라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지난주에도 잠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 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구원관이란 이처럼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의 구원관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낮은 단계의 구원관이라면 미신을 들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세상의 윤리 도덕적인 기준도 없습니다. 그저 내 하나 잘되기만을 바라면서 자기의 부정행위들이 감추어지고 자기의 부와 명예들과 목숨이 지켜지기만을 바라는 것들입니다. 비는 대상은 아무것이라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돌이든 나무든 부적이든 상관없는 것입니다. 나를 좋게 하여 준다면 어디라도 정성을 바치고 물질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보다 조금은 낫다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래서 종교에도 하등종교와 고등종교로 나누는데 하등종교란 미신과 같은 맥락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고등종교란 무엇이 다른가 하면 자기 부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을 부인하고자 하는 내용이 들어 있을 때 고등종교가 됩니다. 가장 자기 부인을 잘하는 것이라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불교입니다.
이들은 인생이라는 괴로운 바다에서 해탈하기 위하여 가정도 부모도 다 버리고 금식하고 고행하며 해탈에 이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부정의 종교가 오늘날 대중화되면서 어떤 설법이 인기가 있는가 하면 행복한 가정생활, 정신세계와 건강 이런 제목으로 호텔에서 강연회를 가지는 것입니다. 장가도 안가고 산으로 간 사람이 행복한 가정생활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만 그러나 이러한 설법이 인기를 얻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불교를 잘 알아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를 말하는 이유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기 부정을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보는 고등종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분류하는 고등종교의 수준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 오늘날의 한국 불교와 기독교가 아닙니까? 자기 부인은커녕 어떻게 하든지 자기의 존재를 확대시키고 영속화시키기 위하여 부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미신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절에서 100일 기도를 하고 1,000일 기도를 하면서도 그것이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을 위하여 빌고 빈다면 절에서는 비는 것이 원래 없지만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까? 교회에서 새벽기도 철야기도 릴레이 기도 40일 금식기도 작정기도 하면서 정작 구하는바가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참으로 자기를 부인하기 위하여 기도합니까? 나에게 있는 것으로 자족함을 알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까? 나의 욕망으로부터 자유케 하여 달라고 기도하십니까? 돈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십니까?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기도하십니까? 이렇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 왜 인자가 들려야만 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27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보시면 이 때를 할 수만 있으면 면하게 해달라는 기도로 보입니다.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동일하게 사람의 몸을 입으셨기에 갈증과 피로와 고통이 우리와 같이 수반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의 뜻을 행하고자 함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생애는 예수님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아버지의 뜻대로 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애의 모든 일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면 다른 말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자신이 이 때를 면하였으면 하고서 그렇게 간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새번역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때를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말할까? 아니다 내가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이 때에 왔다” 고민과 괴로움이 있으셨겠지만 그러나 주님의 분명한 사명은 이 때를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간구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이것이 주님의 지상사역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나면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영광스럽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의 하신 일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광의 때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때입니다. 예수님이 들리시는 것입니다. 이때 하늘에서 소리가 난 것은 예수님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위하여 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하신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또 앞으로도 영광이 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가장 가깝게는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그리고 부활과 승천과 성령강림과 재림까지 하나님의 영광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하시는 그 영광의 일이란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인자가 들려야 한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들리심의 사건으로 인하여 하늘에 올리우시는 사건까지 연결이 됩니다.
주님의 들리우심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주님의 들리우심이 아니면 어떻게 미신적이고 종교적인 우리, 우리의 죄와 허물로 죽어 있기에 그저 나 자신이 신이 되어 온 세상이 모두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만 기분이 좋아지는 이런 인간을 살려 내실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자의 들리심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성경 두 곳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3:13-14절입니다. “봉독”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라고 하시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가 들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이신가 하면 유대인의 관원이요 랍비인 니고데모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선생이라는 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못 알아듣습니다.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율법선생의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들려야 한다고 하시는 것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 나를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들려야만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이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놓쳐버리면 아무리 성경적인 말을 하여도 사람들의 의지와 지혜와 힘을 짜내어서 만든 종교집단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 3:15-16절이 누구든지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이 말씀은 자신의 들리우심을 전제로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사건이 무엇입니까?
민수기 21:4-9절입니다. “봉독” 광야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그런 길로 인도하시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낮추시고 그들이 주님을 신뢰하는지 아니하는지를 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이 좋다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불뱀을 보내어 물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려서 죽은 자가 많습니다. 그리고 물려서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뱀의 모양을 한 구리로 만든 뱀을 쳐다보라니 여러분은 쳐다보겠습니까? 그런데 쳐다본 자는 사는 것입니다. 쳐다볼 가치가 없는 것을 쳐다 본 것은 자기의 실력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인자가 들린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도 나무에 달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무에 달려 주는 것은 신명기에 의하면 저주 받아 죽는 죽음입니다. 아니 쳐다볼게 없어서 저주 받아 죽은 그런 자를 쳐다봅니까?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성공시대를 보면 일주일에 한명씩 성공한 사람을 소개하고 세계의 위인전기들을 보면 얼마나 성공한 자들이 많습니까? 그러다 보니 요즈음에 예수님이 성공한 자라고 책을 낸 사람이 있었습니다.
‘최고 경영자 예수’라는 책입니다. 인기 있게 팔린다는 것입니다. 모든 지도력을 다 갖추었기에 12명으로 시작하여 최고의 영향력을 끼쳤다는 그런 내용인데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가시 면류관을 쓰신 것을 보고서 머릿결이 눌러 붙지 않도록 고무 가시를 모자 안에 만들어 특허를 얻어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와 다를 게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저주 받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3:13절입니다. 물론 이 저주는 우리의 저주를 대신 받은 저주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저주 받으시기 위하여 나무에 달리신 것입니다. 저주 받아 죽은 예수님을 쳐다보고서 누가 나를 구원하소서, 라고 하겠습니까? 제자들도 다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22-24절에서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합니다. 이 십자가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전혀 표적이 아니고 오히려 거리끼는 것이고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너무나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저주받아 죽으시는 십자가 아래에서 이방인인 로마의 백부장이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죽어가던 두 강도 중 한 강도가 그 십자가위에서 함께 저주받아 죽는 죽음 속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들리심으로 자기 백성을 자기에게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달리심, 들리심은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의 임하심과 재림까지 함께 포함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들리심으로 자기의 백성을 이끌어 내시는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리우십니다. 십자가에 들리심이 부활과 승천, 하늘로 들리우심이 함께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에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지금도 자기의 백성을 자기에게로 끌고 계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8-10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이 위로 올라가시는데 내려 오셨기에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하늘 보좌에서 내려오신 분이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심, 이것보다 더 큰 사건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나무에 들리신 것입니다. 이제 나무에서 하늘로 올리우시는 것입니다. 올리우시면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아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사망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모두가 꼼짝을 못하고 세상의 임금에게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망과 죄의 권세아래 사로잡혀 있는 자를 다시 사로잡아 내시려면 어떻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까? 전쟁을 하셔서 사망과 죄의 권세를 깨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들리심이란 이 두 가지의 일을 동시에 하시는 것입니다. 사로잡혀 있는 자를 사로잡으시고 그리고 자기 백성을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람보’ 영화를 혹 보셨습니까? 포로로 잡혀 있는 자들을 구출하여 내는데 초인적인 전투력으로 포로 된 자들을 구하여 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적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포로를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은 어떻게 죄와 사망의 포로로 잡혀 있는 자들을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까?
창세기 3:15절에서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 나옵니다.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여인의 후손은 그 머리를 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이 사망으로 사망을 이겨버리신 사건입니다. 대신 저주 받으심으로 저주를 끊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 31-32절입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거리끼고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 저주 받아 죽은 모습, 가장 실패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떤 자에게는 능력이 됩니까? 주님께서 이끌고 계시는 사람은 십자가가 능력이 됩니다. 이 이끌림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의 복임을 잊지 말고, 늘 체험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2:36-43 믿지 못하는 이유 2000. 9. 10.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습니까?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얻지 못하는 자는 왜 얻지 못하는 것입니까? 믿지 않아서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논리에 너무나 세뇌(洗腦)되어 있습니다. 이렇게만 말하게 되면 믿음의 주체가 ‘내’가 되어 버립니다. 내가 믿음이란 조건을 충족시켜서 구원을 얻었고 구원을 얻지 못한 자는 믿음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복음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 위에 세워진 구원관이란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믿어준 자신이 자랑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어준 행위가 얼마나 대견하게 여겨지겠습니까? 믿음이란 말을 이렇게 사용하고 있으니 어떤 종교적인 업적을 이루어 놓고서도 믿음으로 이루어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말 중의 하나가 믿음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금요일 성경공부를 꾸준히 하신 분은 어느 정도 믿음이 정리가 되셨으리라 생각을 합니다만 그러나 그것도 돌아서고 나면 또다시 우리의 행위에 기초한 믿음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의지적 결단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았는데 거저 주시는 은혜로 되어진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믿음을 그렇게 강조하지만 그러나 성경에서는 인간의 믿음 없음을 너무나 잘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죄란 믿음 없음이 죄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성령이 임하심으로 책망을 하시는데,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하시는데,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함이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될 텐데 왜 예수님을 믿지 아니할까를 오늘 말씀에서 두 가지만 찾아보고자 합니다.
37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표적을 행하셨으나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53:1절을 인용합니다. 이사야 53:1-6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선지자들이 전한 바를 누가 믿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믿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믿을만한 구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본 자들도 귀히 여기지 않았고 우리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한 것입니다. 더구나 대신 죄를 담당하시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의 행위가 없이 용서를 받고 복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선악의 기준이 이미 범죄 함으로서 있기에 거저 주시는 은혜와 대신 받으시는 저주를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를 확정하는 것이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이사야 6:8-10절입니다. “봉독”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나고서 죽은 자처럼 됩니다. 부정한 입술을 가진 자가 하나님을 보았기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죽지 아니함은 하나님의 용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가 제단의 숯불에 입술의 지짐을 받고서 하늘의 음성을 듣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가 대답합니다. 제가 여기있사오니... 그런데 가면서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2:40절입니다. 스스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사람들이 나를 믿지 못하는 이유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고 돌이켜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고서 나오는 자가 없는 것이 성경의 예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여야 합니다. 누가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믿을 수 없도록 눈과 귀를 막아버리셨는데 어떻게 스스로 나와서 믿습니다, 할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이 믿지 못하게 하셨으니 믿지 못하여 지옥에 가는 것도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범하여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스스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올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아무리 고안하고 자기들의 구원의 방도를 만들어 낸다고 하여도 그것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범죄이후에 생명나무로 접근을 차단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에서 차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실 때도 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10-17절입니다. “봉독”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천국을 쉽게 설명하여 많은 사람을 천국에 들여 놓기 위함이 아니라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택한 자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역시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택한 자와 아닌 자를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와 저희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알아듣게 하시는 너희와 알아들을 수 없게 하시는 저희를 구분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예수님이 오신 그때부터 분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못 알아듣는데 알아들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귀를 열어 주시고 마음으로 깨닫게 해주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인용한 곳을 한곳 더 보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28:23-28절입니다. “봉독” 우리는 흔히 사도행전 그러면 사람들이 성령 받고 전도하여 수천 명씩 믿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전도하여 많은 사람들을 모으자, 그런 식으로 많이 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끝이 무엇입니까? 전도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고침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실력으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미 죄와 허물로 죽어 있기에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갇혀 있습니다.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빠비용’이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이것은 실화를 근거로 한 영화입니다. 살인현장에 우연히 지나다가 억울하게 범인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유배되는 것입니다. 검사의 과욕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배된 섬에서 탈출을 시도하는데 결국 성공하여 가는 빠삐용을 보고서 옆에 있던 죄수가 무어라고 합니까? 이곳에서 탈출하여도 너의 마음의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탈출한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는 부분에서 순간의 자유를 얻었다고 하여도 그것은 또 다른 감옥의 일부일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 된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1:32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귀머거리요 소경이고 마음이 완악하여 있기에 스스로 고치고 돌아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몇몇 사람이 주께로 돌아온 자들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지난주에 말씀을 생각하여 보면 누가 들리심으로? 인자가 들리심으로, 예수님이 들리심으로 자기 백성을 끌어내신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긍휼을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주님을 믿노라고 나온 것은 우리의 실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십자가에 들리심으로 자기 백성을 긍휼로 이끌어 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긍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영광을 구하고 있기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첫째 이유가 이미 우리가 죄의 감옥 안에 갇혀 있기에 스스로 돌아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2:42-43절입니다. 유대인들의 관원들 중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많은데 바리새인 때문에 드러나게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유대교에서 쫓겨 날까봐서 말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결국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믿을 수가 없는 사람들로 태어나는데 그러나 어느 정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까지 바르게 믿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그 긍휼의 정신이 계속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라지면 반드시 인간의 자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의 영광이 드러나는지를 우리 주변에서 보고자 합니다. 사람의 영광이란 결국 자기 이름에 관한 싸움입니다. 자기 이름이 영광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빼앗기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영광을 결코 다른 것에 돌리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2:8절에서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방해하는 인간의 영광은 하나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에서 영광을 주님께 돌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115: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이 충돌이 됩니다. 영원한 주의 영광을 인간이 범죄함으로 그 영광을 마땅히 돌려야 할 주님께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교에서 출교 당할까 봐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일들, 즉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고자 합니다.
‘회복의 신앙’이라는 책에 보니 몇 년 전에 서울의 모교회에서 예배당을 짓다가-성전이라 하겠지요. 돈이 모자란 것입니다. 일은 크게 벌려 놓았고 돈은 턱없이 모자라니 얼마 이상을 헌금하면 교육관 이름을 헌금한 사람의 이름으로 부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액을 헌금하면 교회 이름을 그 사람의 이름으로 부르겠다는 광고가 나왔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자기의 이름이 나는 일과 이름이 나지 않는 일, 자기에게 칭찬과 영광이 돌아오는 일과 그렇지 않는 일, 어느 곳에 마음을 더 두고 계십니까? 신학교 안에도 건물들 마다 들어서면 그곳에 헌금한 사람들의 이름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예배당의 기초석 밑에 헌금자 이름을 기록하여 넣는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이것이 자기의 이름을 남기는 일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의 이름은 죄인이며 오직 주님이 불쌍히 여겨 주셔야만 합니다, 하는 반응이 나올 수가 있을 까요? 정말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개라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아니합니까, 라는 자세가 오늘 우리에게 있습니까? 이방인의 장교가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것이 부하이듯이 주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될 줄 믿습니다, 종에게 말씀 하옵소서, 하는 그런 자가 누구입니까? 이것이 자기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 긍휼을 입은 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죄인들의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두시니 눈이 감긴 것이고 마음이 완고하여져서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사람들이 사람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구원은 인간을 불순종아래 가두심으로 스스로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긍휼을 입은 자만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이 나와서 하는 말은 오직 주의 긍휼하심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습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서 받으소서, 라고 하는 것이 구원받은 백성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죽어서 천당 가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누구의 이름과 누구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있는지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람의 영광을 구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주님의 영광이란 주님의 하신 일로 인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사는 것도 모두가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명절에 사람들이 모이면 모두가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주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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