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 강해
늘푸른 교회 이장우 목사
스바냐 1:1-6 멸절하리라 2005. 12. 14.
1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아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3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지면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4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손을 펴서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5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와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와 6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를 멸절하리라.
스바냐서는 생소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한 구절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3:17절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복음성가 가사로 사용하였기에 이 말씀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왜 이런 구절을 가사로 하여 노래를 만들겠습니까?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보기는 보아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 중심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향으로만 성경을 보기 때문입니다. 스바냐서를 있는 그대로만 보아도 전체가 심판의 말씀입니다. 끝부분에 조금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을 말씀하고 있고 나머지는 전부 심판의 소식입니다. 진멸한다, 소멸한다, 훼파한다, 멸절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도 ‘멸절하리라’는 제목입니다. 이런 제목의 설교를 여러분이 듣기에 아무런 부담이 없습니까? 전하기도 부담되고 듣기도 부담스러운 내용입니다. 긍정적이고 밝은 내용으로 세상에 꿈과 희망을 주는 그런 내용이라면 사람들이 좋아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현실은 어렵고 힘들어도 장래에 대한 희망으로 버티고 살아가는데 그런 희망조차 꺾어버리면 무슨 재미와 낙으로 살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1: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 말씀은 복음을 속히 떠나는 자들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면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사람 중심이라면 기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기에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의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이 둘 중의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좋게 하면 세상의 영광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좋게 하면 세상에서 핍박과 고난이 따랐습니다. 이런 모습은 복음을 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좋게 하는 복음이라면 사도들이 핍박을 받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에는 걸림돌이 있기에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 걸림돌이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무엇인지 다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봅시다. 스바냐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숨기셨다’는 뜻입니다. 선지자의 이름을 통하여서도 계시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상숭배가 가득하고 환난과 심판의 때에 여호와께서 숨겨주시고 보호하셔야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 시대 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천 명이 드러나지 않게 있었던 것처럼 여호와께서 숨기셔야만 신앙을 유지하는 그런 악한 시대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숨기시는 자를 드러내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인데 그 내용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선포와 남은 자들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심판을 받는 자들은 선지자의 말을 싫어하여 배척하게 되지만 구원받는 자들은 선지자의 말을 받고서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돌아오는 남은 자는 극소수였음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1절입니다. 유다 왕 요시아 시대에 스바냐에서 임한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라고 되어 있으니 왕족으로 봅니다. 대부분의 선지자는 특정 지파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선지자가 되는데 스바냐는 유다 지파의 왕족 출신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 자신이 속한 왕족에 대하여서도 심판의 소식을 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요시아 왕의 아비는 아몬으로 2년 동안 악한 왕 므낫세를 따르다가 반역으로 죽고, 요시아의 할아버지 므낫세는 유다로 하여금 심판에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손자 요시아가 엄청난 개혁을 하여 우상을 몰아내었으나 므낫세의 악을 인하여 결국은 멸망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시아가 8세에 왕으로 등극하여 요시아 왕 18년에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하고 대대적인 우상척결에 나섭니다.
그러므로 스바냐 선지자의 활동은 요시아 왕 초기로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요시아 왕이 개혁을 하여도 그 우상숭배의 뿌리는 계속되었기에 요시아 시대에도 우상숭배에 대한 심판의 선포와 멸망을 선포합니다. 이제 그 무시무시한 심판의 선포를 보고자 합니다.
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신다고 합니다. 그 대상은 사람, 짐승, 공중의 새, 바다의 고기, 거치게 하는 악인들을 지면에서 진멸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다 진멸하여 버리겠다는 말씀입니다. 노아 홍수 때보다 더 엄중한 심판의 선포입니다. 노아 홍수 때는 물고기에 대한 심판의 내용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다의 고기마저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그 세상을 왜 진멸하여 버리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아담과 하와와 범죄한 이후의 인간의 세계는 죄악이 관영한 세계였습니다. 그 죄악이란 하나님을 떠나서 스스로 자존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은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유혹으로 범죄 한 인생은 자기들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된 것입니다.
먹던지 마시던지 무엇을 하던지 자기들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 있는 상태가 죄악이 관영한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 홍수 때에 죄악이 관영하여 심판하시는데 그 죄악의 내용을 창세기 6: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셋 계열의 계통으로 봅니다. 사람의 딸들이란 가인 계열로 봅니다. 가인의 계열이 문화가 발달하여 세련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로 삼는 것이 죄악이 관영한 모습입니다.
아니,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무슨 노아 홍수의 심판이 임하는가 하실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좋아하는 대로 사는 것이 심판의 이유가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기에 자기 좋은 대로 사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한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들의 이름과 자기들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탑을 만들면서 자, 우리 이름을 내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노아 홍수 이후의 사건인 것입니다.
이렇게 죄악이 관영한 세상임을 알게 하시면서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인간의 죄악이 무엇인지를 대표로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계시의 도구로 선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고생을 말도 없이 하는 것입니다. 선택되지 않았다면 당하지 아니할 고생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면 심판을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방 나라들은 내버려 두시지만 이스라엘은 버려두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면에서 모든 것을 다 멸절시켜 버리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4-5절입니다. 우상 숭배자를 진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알이란 풍요와 다산을 준다는 우상입니다. 그런 신의 영향 하에 있는 자들도 함께 진멸됩니다. 이런 바알만이 아니라 인간을 이롭게 하여 준다면 어떤 형상이든 상관없이 섬기고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인지 하늘의 일월성신까지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므낫세 왕 때에 하나님의 성전에 일월성신을 섬기는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혼합종교입니다. 5절에 보시면 우상을 경배하고 우상에게 맹세하면서 여호와께도 맹세하는 자들을 멸절하신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쓸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말감은 ‘그들의 왕’이라는 뜻인데 우상을 그들의 왕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말감을 발음을 다르게 하면 ‘밀곰’이 됩니다. 이 밀곰을 섬기는 것은 자기 아들을 불에 살라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숭배가 얼마나 일상생활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으면 무슨 맹세를 할 때에 우상의 이름으로 맹세를 다 하였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혼합적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고 어떤 형상물을 섬기지 않으니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골로새서 3:5절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탐심이 우상숭배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겸하여 섬기는 정도가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재물을 달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멸절될 자들이 구약의 스바냐 시대의 사람들이 아니라 오늘 우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찾되 무엇을 위하여 찾고 있는 것입니까? 주여! 주여! 라고 부르짖으면서 무엇을 위하여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찾지 아니함이 문제가 아니라 찾아도 헛된 우상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반역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결국이 어떻게 됩니까?
참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그들이 평소에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배척하고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그들의 죄악을 보이신 결과입니다. 물론 그 중에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소수이며 약한 자들이며 보잘 것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3:12절입니다.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찌라” 곤고하고 가난한 자들은 세상의 힘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믿고 바랄 수 있는 곳이란 여호와의 이름을 믿고 바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남겨두셔서 여호와께서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보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3:20절입니다. “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찌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로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누가 모아내십니까? 누가 사로잡힌 자를 돌이키시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들의 선포가 나중에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것을 통하여 부분적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올 때에 찬송하며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하여 대사를 행하신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죄와 사망의 포로 된 곳에서 주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게 된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인간의 죄를 알면 알수록 주의 이름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만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멸절될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게 된 이 기적과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스바냐 1:7-18 여호와의 날 2005. 12. 21.
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찌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8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9 그 날에 문턱을 뛰어 넘어서 강포와 궤휼로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곡성이, 제 이 구역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11 막데스 거민들아 너희는 애곡하라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수운하는 자가 끊어졌음이니라 12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 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13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무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 거하지 못하며 포도원을 심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15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16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17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흘리워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찌라 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오늘 신문에 보니 명문대 수시합격자들이 수능고사 성적미달로 대량 탈락이 되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내신 성적으로 지원하여 수시합격을 하였다고 놀았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합격되었다고 좋아했던 그들이 오늘 떨어졌다는 소식을 확인하면 잔치집이 아니라 초상집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 날이 되면 자기들이 구원받는 날인 줄 알고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다리던 날이 심판의 날이 된다는 말씀이 선지자들의 공통적인 메시지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기다린 구원의 날이 심판의 날이 되어버린 것입니까?
지난주에 본 말씀에 의하면 그들의 우상숭배였습니다. 우상이란 자기를 위하여 신을 만들어 섬기는 것이 다 우상입니다. 십계명의 1계명과 2계명에 의하면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말씀과 너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어떤 형상물이든지 만들어 섬기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너를 위하여’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즉 나를 위하여 신을 섬기는 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형상물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나를 위하는 것이 모두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일을 하든지 종교생활을 하든지 취미생활을 하던지 간에 무엇이던지 나를 위하여 하는 것이라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니, 그러면 우상숭배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모두가 다 우상숭배자입니다. 그러므로 진멸당해야 마땅합니다. 이렇게 대답을 하면 기분이 좋습니까? 씩씩거리며 기분 나빠합니까? 이렇게 기분 나빠하는 것은 이미 이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해석하기에 그렇습니다.
온 세상이 나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화낼 일이 아니라 회개할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이나 교회나 간에 여전히 자기들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의 만족과 소원을 위하여 주를 부르고 있다면 주를 섬긴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대하여 진멸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진멸이 시행되었음을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고 남 유다가 바벨론에 망하는 모습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 심판 가운데서 남겨진 자가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냅니다만 그 남겨진 자들의 모습이란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이 전혀 아닌 것입니다. 3:12절 말씀처럼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남겨 두어서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자신이 어떤 모습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우리 국가가 어떻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이 되어서 십자가의 예수님만 바라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힘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 큰소리치며 살고 싶습니까? 후자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힘을 모으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라고 합니다. 바로 앞에서 보았던 하박국서 2:20절 말씀에서 잠잠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하박국서의 말씀은 우상숭배로 바쁜 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기 위하여 잠잠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스바냐서의 잠잠하라는 말씀은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평소에 기대하던 구원과 승리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 심판을 집행하기 위하여 희생의 제사를 차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제사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생제물을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심판의 날이 선포되었기에 희생의 제물이 유다 백성들이 되고 그 제물을 먹을 자를 청하여 놓았는데 그들이 바로 바벨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심판의 날이 되어버린 것입니까?
8-9절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이방인의 옷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 때에 그들을 본 받지 말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라의 방백들과 왕자들이 이방의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이방 문화에 깊숙하게 빠져있는 것입니다. 이방문화에 젖어있다는 것은 강포와 궤휼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을 때에 말씀하시기를 가나안의 사람들을 진멸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들과 교류하지 말고 그들의 풍습을 본받지 말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다 몰아내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날이 갈수록 그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펼쳐져야 할 약속의 땅에서 온갖 이방의 억압과 착취가 일삼듯이 일어나고 있기에 그들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0-11절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소식입니다. 어문이란 물고기를 들여놓는 문입니다. 그러니 그곳에서 장사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 이구역이란 어느 곳인지 모르지만 문맥에 비추어 보면 장사하는 곳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막데스 거민이란 낮은 지역의 사람들을 말하는데 역시 장사하는 지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백성 역시 장사하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에 왜 장사하는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까? 곡소리가 나고 부르짖는 소리가 나고 산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물건을 사고 팔 때에 한결같은 저울과 되를 가지고 장사하라고 율법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사의 속성이 그렇게 되지를 못한 것입니다. 아모스서에 보면 신 한 켤레에 궁핍한 자를 판다고 합니다.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조차 탐내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장사의 속성은 성전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질책하기를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12-13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등불을 들고 예루살렘에서 찾아내어서 벌하신다고 합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여호와께서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오직 자기들을 위한 삶인 것입니다. 그들의 삶의 목표란 재물을 하나님으로 섬기며 자기 집을 영원한 것인양 견고히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포도원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는 그들을 심판하실 때에 재물이 노략당하고 그들의 집이 황무할 것이며 집을 짓고도 거기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포도원을 만들고 포도를 심으나 그 열매를 먹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으로 주어진 심판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날이 무서운 심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14-18절입니다. 무시무시한 심판의 소식입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심히 빠르게 다가옵니다. 그렇게 되면 용사가 애곡합니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며 환난과 고통의 날이며 황무와 패괴의 날이며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며 구름과 흑암의 날이며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을 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 같이 행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여호와께 범죄함을 인함입니다.
이러한 범죄란 온 나라가 우상숭배가 가득하여 오직 세상의 힘이 그들의 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이방의 지도자처럼 백성들을 착취한 것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속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오직 금과 은이 그들의 힘이요 구원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에 그런 것들이 다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선지자들이 왜 이런 무서운 심판의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까?
2:1-3절입니다. “1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찌어다 모일찌어다 2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겨 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찌어다 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을 자가 있을까 하여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지자들이 외쳐도 그들은 심판의 길로 계속하여 달려간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심판의 날이 언제 이루어집니까? 일차적으로 바벨론이 유다를 쳐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몽둥이로 사용되어서 유다 땅을 공격하여 예루살렘을 망하게 합니다. 성전까지 파괴가 됩니다. 그 심판의 날에 힘 있고 강한 자들이 먼저 심판을 받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70년 만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정신을 차리고 바르게 살았을까요? 여전히 정치세력과 종교권력과 장사하는 사람들이 결탁하여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전을 재건하였지만 그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평가는 도적의 소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둘러엎으신 것입니다. 성전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이보다 더한 여호와의 날의 심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든 선지자들이 외친 그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입니다. 건물 성전을 헐어버리고 자기의 몸으로 새로운 성전을 만들어 세우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을 보내심으로 이루어내셨습니다. 이 성전은 사람이 세울 수도 없고 폐할 수도 없는 성전입니다. 주님의 자기 피로 세우신 주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최종적인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벨론의 심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보여주었던 여호와의 날이 어떻게 드러나겠습니까? 신약에서 이 날을 주의 날이라고 합니다. 주의 재림의 날입니다. 그 날에는 일찍 죽임당한 어린 양이 심판주가 되셔서 임하실 것입니다. 그 주의 날에 이 세상은 온통 불로 소멸될 것입니다.
스바냐 1:18절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가 될 것입니다. 이 날이 이제는 온 세상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8-13절입니다. “봉독”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하게 되면 온 세상이 불에 타서 녹아질 것입니다. 오직 그의 약속대로 의에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만이 영원할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자기 피로 세운 나라이기에 망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날을 믿는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이것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베드로후서 3:18절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스바냐 2:1-3 수치를 모르는 백성 2005. 12. 28.
1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찌어다 모일찌어다 2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겨 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찌어다 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올해가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가 다 가기 전에 할 일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서두르는 때입니다. 빚진 것이 있다면 갚고, 빌려온 것이 있다면 돌려주고, 맺힌 것이 있다면 풀려고 하는 기간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부끄러운 인간이 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당당하게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송구영신이라는 예배가 만들어지고 그것도 어떻게 해야 은혜로운지(?) 방법론까지 팔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정작 날짜의 바뀜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전도서에서 증거하기를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날이 이미 왔기 때문에 더더구나 어떤 특정한 날과 절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그 날이 있을 뿐입니다. 그 날이란 여호와의 날이며 이제 우리가 기다리는 그 날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임을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지난주의 말씀을 듣고서 한 주간 그 날을 준비하면서 살았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날을 기쁨과 구원의 날로 기대하고 기다렸지만 오히려 그 날이 심판의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의 문화에 빠져서 세상의 금과 은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면서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믿을 것이라곤 자신의 능력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아모스 5:18-20절입니다. “18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19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사모하여 기다린 여호와의 날이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그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2:1-3절입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이라고 합니다. 범죄하고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범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하면서 오히려 화를 내는 자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세상의 힘을 믿은 것이 죄가 됩니다.
자기의 부끄러움을 모르기에 자기 정당성만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신의 죄와 비참을 모르면 늘 나오는 것이 원망과 불평입니다. 내가 무얼 잘못하였다고 이런 대접을 받느냐며 원망하는 것은 결국 신을 향한 분노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하나님이고 뭐고 없다, 그저 힘이 최고다 하면서 나선 것이 예루살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의 세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능력은 어디에 나타난다고 여기고 있습니까? 약함과 무능함입니까? 강함과 유능함입니까? 온 세상이 능력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세상이 원하는 능력이라는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마귀의 유혹에서 거부하신 것들인데 예수님께서 거부하신 것들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가 온 세상을 속이는 방법입니다.
사람 앞에서 수치를 당하는 것이 무섭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수치를 당하는 것이 무섭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수치를 당하는 것이 무섭다고 말로서는 하겠지만 그러나 우리의 삶의 내용은 사람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를 얼마나 간절히 소원하고 있는지를 아십니까? 사람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특별기도와 특별헌금까지 하면서, 철야와 금식까지 하면서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가난하고 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더라도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는 그런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장에서 나오는 세상의 약하고 천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세상에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세상에 대하여 부요하여 세상에서 부끄러움 없이 살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인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하고 나서 에덴동산에서부터 행한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수치를 가리는 행위입니다. 무화가 나뭇잎으로 가리고 나무그늘 아래 숨었습니다. 왜 숨었느냐고 하나님께서 물으시니 부끄러워서 숨었다는 것입니다. 그 부끄러움을 무엇으로 가리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부끄러움을 가려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스스로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려보고자 애를 쓴 것이 성경에 나타나는 인간들의 노력입니다.
이런 자들을 향하여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외치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수치스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아 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여서 회개하고 겸손하게 여호와를 찾고 공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왜 ‘혹시’ 라고 하는 것입니까? 누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수치를 알 자가 있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외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택하신 남은 자들은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외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기 언약의 성취와 자기 택한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외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의 수치를 알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자기의 수치를 모르고 남의 탓만 하고 하나님의 탓만 하는 것은 자기의 수치를 모르는 자입니다. 이렇게 수치를 모르는 자만이 아니라 자신은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여서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자들도 역시 자기 수치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3절에 보시면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면 겸손하여 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의 규례를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지킬 수가 없기에 겸손하여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지키면서 지켰다고 여기는 자들은 교만하여 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영이 임하여 여호와의 규례를 보게 되면 자신이 지켰다고 할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주의 의를 구할 뿐입니다. 자기 수치와 죄를 제대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의 외침은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자신들이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심판을 선고합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지냈노라고, 율법대로 지켰노라고 하는 자들을 향하여 외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7장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전 문 앞에서 가로막아 서서 외칩니다. 이곳이 하나님의 전이라고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성전을 찾는 목적이 그들은 제사지냄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또 악을 행하기 위하여 달려가기에 그렇게 외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66장에서 소를 바침이 살인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고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이 심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떨지 아니하는 그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을 때에 평소에 율법을 잘 지킨다는 자들이 세례 요한 앞에 오는 것을 보고 무어라고 외쳤습니까? 독사의 새끼들아, 누가 너희로 하여금 임박한 진노를 면하라고 하더냐며 외치는 것입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찍혀서 불에 던져진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자기 뒤에 예수님이 오셔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고발을 받는 자들의 특징이 자기의 수치를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의롭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알고 지킨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눈에는 그들이 독사의 새끼들로 보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도끼를 들고 오시는 분이라고 증거한 예수님도 자신들의 수치를 모르는 자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시면서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말하는 자였기에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제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유혹한 마귀는 오늘날도 하나님의 백성마저 세상의 헛된 영광으로 속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실패한 것으로,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하여 멀리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란 처음 믿을 때에만 잠시 필요하고 그 이후에는 자신의 노력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자가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무엇을 이루어내었습니다.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부요하다, 부끄러움이 없다고 할 정도가 되겠지요!
요한계시록 3:14-22절입니다.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에서 가장 부요한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의 교회 모습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일곱 교회의 특징들은 계속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가 무엇을 추구하는가 하면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나는 부자라,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교회가 차지도 덥지도 아니한 교회로서 주님께서 토하여 내치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부자로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입니다. 자신들의 수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한다는 것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라고 합니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모습이지 않습니까? 자기 스스로는 부족함이 없다고 여기지만 주님이 보시기에 어떠합니까?
스바냐 선지자의 외침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아 모이라고 합니다. 모여서 들으라는 것입니다.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리하라고 합니다. 이미 2천년 전부터 여호와의 날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믿는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과 심판의 최종 확정이 주의 재림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스바냐 2:4-15 오직 나 외에는 2006. 1. 4.
4 ○가사가 버리우며 아스글론이 황폐되며 아스돗이 백주에 쫓겨나며 에그론이 뽑히우리라 5 해변 거민 그렛 족속에게 화 있을찐저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아 여호와의 말이 너희를 치나니 내가 너를 멸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 6 해변은 초장이 되어 목자의 움과 양떼의 우리가 거기 있을 것이며 7 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찌라 그들이 거기서 양떼를 먹이고 저녁에는 아스글론 집들에 누우리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들을 권고하여 그 사로잡힘을 돌이킬 것임이니라 8 ○내가 모압의 훼방과 암몬 자손의 후욕을 들었나니 그들이 내 백성을 훼방하고 스스로 커서 그 경계를 침범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 찔레가 나며 소금 구덩이가 되어 영원히 황무하리니 나의 끼친 백성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국민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10 그들이 이런 일을 당할 것은 교만하여 스스로 커서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을 훼방함이니라 11 여호와가 그들에게 두렵게 되어서 세상의 모든 신을 쇠진케 하리니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 12 ○구스 사람아 너희도 내 칼에 살륙을 당하리라 13 여호와가 북방을 향하여 손을 펴서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로 황무케 하여 사막 같이 메마르게 하리니 14 각양 짐승이 그 가운데 떼로 누울 것이며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기둥 꼭대기에 깃들일 것이며 창에서 울 것이며 문턱이 적막하리니 백향목으로 지은 것이 벗겨졌음이라 15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하며 심중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같이 황무하여 들짐승의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치소하여 손을 흔들리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사람들이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이들을 저주하면 하나님께서 저주하신다고 창세기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 애굽에 내려갔을 때에 자기 아내를 동생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로가 아내를 삼으려고 사라를 데리고 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바로 왕에게 나타나셔서 손도 대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아브라함도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뿐만 아니라 바로 왕에게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 내려가서 430년을 종살이 하다가 출애굽 하는 것도 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내면서 내 아들이라고 합니다. 시내산에서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합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돌판에 새겨 주셨습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만 참 하나님을 아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게 되면 반드시 심판을 하십니다. 그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이스라엘에 증거하실 뿐 아니라 다른 나라까지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셔서 높임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4:6-8절을 봅니다. “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7 내가 옛날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고하며 진술할 자가 누구뇨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고할찌어다 8 너희는 두려워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느냐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이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알지 못하노라”
이스라엘은 증인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증거할 증인인데 이 나라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되면 심판을 받아서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스바냐 1장에서 보았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놀랍게 멸절할 것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보다 이스라엘이 괴로운 것입니다. 다른 나라는 우상을 섬기든 무엇을 하든 내버려 두시지만 이스라엘은 내버려 두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 결과 유다 예루살렘이 주변 국가들의 침략과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러자 주변 국가들은 유다 예루살렘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보다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이 더 힘 있고 강한 신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만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나라에 대하여서도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하나님께서 저주하신다는 언약이 성취되는 과정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알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2:4-7절입니다. 블레셋에 대한 심판입니다. 여러 지명들이 다 블레셋의 성읍들입니다. 이 블레셋은 사사시대로부터 이스라엘을 많이 괴롭힌 나라입니다. 블레셋이 유다를 공격하여 이길 때마다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우리의 신이 너희의 신보다 강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교만하여진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를 멸하여 거민이 없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 나라가 무너져서 성읍이 목장이 되어버릴 것이며 유다의 남은 자손들이 그곳에서 양떼를 먹일 것이라고 합니다. 유다를 심판하셔도 멸절하지는 아니하십니다. 남은 자손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2:8-11절입니다. 모압과 암몬입니다. 블레셋이 유다의 서편입니다. 모압과 암몬은 유다의 동쪽 지역입니다. 이 모압과 암몬족속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살아남은 롯과 그의 두 딸 사이에서 나온 족속들입니다. 이 두 족속도 블레셋만큼이나 유다를 괴롭힌 족속입니다. 이들이 죄악상이 무엇인가 하면 스스로 커서 유다의 경계를 침범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땅을 침범하였기에 멸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약하여졌다고 그 틈을 노려서 공격하러 온 모암과 암몬을 벌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였듯이 그 나라를 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교만과 유다를 공격한 죄로 인하여 다시 소돔과 고모라 같은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오바댜서에서도 이미 보았습니다. 오바댜서는 에돔 족속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왜 심판을 받는가 하면 바위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살면서 누가 능히 나를 끌어내리겠느냐며 교만한 것입니다. 그 교만이 그들을 속인 것입니다(옵1:3).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야곱에게 행한 포학을 인함으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옵1:10). 교만이란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사상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유다를 공격하면서 더욱 노골화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12절입니다. 구스 사람들은 애굽을 지원하였기에 유다를 핍박한 나라로 간주됩니다. 구스는 유다의 남쪽이 됩니다. 이어서 나오는 앗수르는 유다의 북쪽이기에 유다를 배경으로 동서남북이 다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유다가 심판 받는 과정에서 주변 나라들이 강하여졌다고 교만하였으며 유다를 핍박한 것이 그들의 멸망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앗수르의 경우를 보면 나옵니다.
2:13-15절입니다. 북방의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를 황무하게 하여 사막같이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각양 들짐승들의 거처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한때 기쁜 성읍이라고 하며 염려 없이 거하며 심중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고 하던 성읍입니다. 그런 성읍이 황무하게 되어 들짐승이 거처하는 곳이 되어버렸기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비웃음으로 손을 흔드는 곳이 된다고 합니다.
지난 주일낮에 이 말씀을 예로 들었습니다만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을 때에 너희도 하나님처럼 되리라고 유혹한 것입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 먹은 이후의 모든 인간은 다 이런 사상이 마음에 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이 된 것인양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선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모습이 앗수르의 교만에서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는 것이 교만이며 죄악의 뿌리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멸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사상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인 것입니다.
나훔 1:1-3절입니다. “1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2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
나훔서도 수요일에 이미 보았던 말씀입니다. 요나 선지자의 전도로 일시 회개하여 용서를 받은 니느웨 성이 다시 교만하여져서 죄악이 관영하였습니다. 그 죄악이란 무력과 폭력으로 주변 국가들을 지배한 것입니다. 그러한 힘으로 튼튼한 성벽을 만들고서는 기쁘고 염려 없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고 하는 이 사고방식이 바로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옛날 구약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삶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과연 우리 안에 누가 있습니까?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입술로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오직 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대적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흉악한 범죄자만 하나님의 대적이라고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고상하고 인류를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하여 자기의 목숨을 바쳤다고 하여도 그 사람의 사고방식이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는 식으로 행동하였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대적인 것입니다. 석가모니가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자신만 홀로 존재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은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일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이 모습이 원래 하나님께서 원하신 인간상입니다. 그러나 범죄 이후에 모든 인간이 다 자기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됩니다. 자신이 주인으로 알고서 행한 모든 일이 다 죄임을 알게 됩니다. 이제부터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나는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죄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나의 뜻이 부인되고 꺾어지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는 사람이 새롭게 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새해라고 온갖 비전과 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가 그대로 효력을 발휘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 성도들에게 나타납니다. 그 모습은 도대체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는 이 사고방식을 정죄하면서 일하시기에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만 아는 이 죄로 인하여 우리의 참 주인이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성도는 알게 됩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영원히 주가 되소서! 아멘.
스바냐 3:1-13 심판과 구원 2006. 1. 11.
1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찐저 2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3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4 그 선지자들은 위인이 경솔하고 간사한 자요 그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5 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6 내가 열국을 끊어 버렸으므로 그 망대가 황무하였고 내가 그 거리를 비게 하여 지나는 자가 없게 하였으므로 그 모든 성읍이 황폐되며 사람이 없으며 거할 자가 없게 되었느니라 7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거니와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한과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나라들을 소집하며 열국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9 ○그 때에 내가 열방의 입술을 깨끗케 하여 그들로 다 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하리니 10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하수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드릴찌라 11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너의 중에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를 제하여 너로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니라 12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찌라 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
사람들은 다 구원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이 생각하는 구원과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구원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범죄한 인간이 생각하는 구원이란 지난주에 본 말씀대로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고 할 정도의 상태를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구원이란 하나님 외에 다른 구원자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한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생각하는 구원과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구원과는 서로 적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의 구원이 이루어지겠습니까?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하나님의 구원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무엇을 인정하게 되는가 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요 진멸의 대상임을 철저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 내용을 오늘 말씀에서도 보고자 합니다.
스바냐 1:1-2:3절까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내용입니다. 그들의 죄악이 얼마나 엄청난 죄악인지 지면의 모든 것을 진멸하신다고 합니다. 사람과 짐승과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까지 진멸하고 멸절하신다고 합니다. 노아 홍수 때보다 더한 심판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진멸은 인간의 범죄로 인한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도 인간의 죄악이 관영하여 심판을 받습니다만 그 근원은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3:17-19절입니다.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었기에 땅까지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런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다른 피조물까지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면서 내가 범죄하지 않은 아담의 죄를 내가 왜 받아야 하는가 하고 항변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항변을 못하는 이유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며 그러한 죄인 중에 구원을 얻은 자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드러내셔서 주님 홀로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도 전혀 인정을 할 수가 없다고 사람들은 데모하고 나섭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 열방이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향하여 대적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잘못하였다고 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아올 길을 열어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스스로 금욕적으로 회개하면 주께서 받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중세시대에 흑사병이 돌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몸에 채찍을 휘두르며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메고 행진을 하였습니다. 흑사병이라는 전염병이 하나님의 저주로 일어난 것으로 보았기에 그 저주를 없애기 위하여 스스로 고행을 한 것입니다. 그런다고 죽음이 피하여 가지 않습니다. 그런 고행이 아무른 소용이 없는 것을 보고서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변하여 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도 인간이 구원받을 어떤 방법이 있는 것처럼 본다면 주께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게 될 것입니다. 구약의 예루살렘 백성들이 이렇게 잘못하였으니 이제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고 거듭난 양심으로 바르고 착하게 살자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성령이 임하지 않아서 그렇게 살지 못하였으나 신약에는 성령이 임하였기에 우리가 고치고 바르게 살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바르게 사는 사람을 구원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탈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이미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께 돌아갈 수가 없는 형편에 있는지를 너무나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구원받은 자들이란 인간의 가능성을 믿지 않습니다. 오직 구원이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의 언약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그분에게만 영광이 돌려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증거하고 보증하기 위하여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인간이 어느 정도로 진멸 받아 마땅한지를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3:1-2절입니다. 예루살렘 성읍을 향한 선지자의 외침입니다. 다른 곳이 아닙니다. 성전이 있고 율법이 선포되고 날마다 희생제사가 드려지는 예루살렘의 모습이 이렇다면 다른 곳은 말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성읍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화 있을찐저! 누구의 음성으로 들립니까? 스바냐 선지자의 음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가장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율법을 잘 지킨다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화 있을찐저!
패역하고 포학하며 명령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패역하지 말자, 포학하지 말고 명령을 듣고 교훈을 받으며 여호와를 의뢰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갈 자가 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7절을 봅시다.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거니와 너희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에 부지런한 것입니다. 시편 58:4절에서 이런 상태를 묘사한 말이 있는데 귀머거리 독사라고 합니다. 어떤 뱀을 부리는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하여도 귀가 먹은 귀머거리 독사이기에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말을 듣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독까지 있는 것입니다.
3:3-4절입니다. 백성의 지도자와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와 같고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와 같다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위인이 경솔하고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며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이정도면 이미 끝장난 것입니다. 도저히 손쓸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부지런히 선지자를 보내시고 부지런히 심판을 집행하셔서 경고를 주십니다.
3:5-7절입니다. 그런 패역한 중에도 여호와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간단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십니다. 쉼 없이 공의를 나타내셔도 불의한 자들은 자기의 수치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안에서 심판을 행하십니다. 그래도 알지 못합니다. 예루살렘 주변나라를 심판하십니다. 그들의 교만을 심판하시지만 그러나 예루살렘 백성들이 깨닫지를 못합니다. 이제 어떻게 하셔야 합니까?
3: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일어나서 벌할 날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제 심판만 남았습니다. 주께로 돌아오라고 하니 그들은 부지런히 거역하였습니다. 그들의 수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 재앙으로 심판을 받는 것을 보아도 감각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것은 하나님께서 뜻을 정하셔서 심판하시는데 하나님의 분한과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나라들을 소집하고 열국을 모으시는 것입니다.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하리라!
이것이 예루살렘의 운명이며 온 열방의 운명입니다. 하나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될 것이 우리의 운명임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나는 오직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고 살아온 우리의 모습, 자기 밖에 모르고 자기만 사랑하고 살아온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와 질투의 불에 소멸되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고달프고 힘 든다고 해서 원망할 처지가 못 됩니다.
그보다 더한 지경에 빠지더라도, 하루아침에 재산이 다 날아가고 자식 열명이 다 죽고 마누라는 하나님을 욕하고 도망갈지라도 주신이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이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본래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렇게 합니까? 그러므로 진멸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그 진노와 심판의 날에 구원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8절과 9절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진노를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회개하였다거나 돌이켰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이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9절을 봅니다. 그 심판의 때에 이방의 입술까지 깨끗하게 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0-11절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구원입니다.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어야 하는 현장 속에서 어떻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흩어진 자들이 구스 하수 건너편에서 예물을 가지고 주께 돌아와 드릴 것이며 그 날에 하나님께 범죄한 자들이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와 자랑하는 자를 제하여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2절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들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구원받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나오게 될 자들입니다. 이 말씀이 언제 성취가 되었습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오는 것은 그림자입니다.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이방인 중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며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의 가능성을 믿지 않습니다. 오직 주의 이름을 부르며 오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나의 이름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는 주가 아님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인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보면 누구의 이름을 부릅니까? 오직 자기의 이름에 목숨을 겁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의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며 삽니다. 이것이 심판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은 주님의 주 되심을 증거하시기 위하여 나타내셨습니다. 평생에 주의 이름만을 찬송하며 증거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스바냐 3:14-20 구원의 즐거움 2006. 1. 18.
14 ○시온의 딸아 노래할찌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찌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15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16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18 내가 대회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를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너의 치욕이 그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느니라 19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로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20 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찌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로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요한복음 5:2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이미 사망 아래 있는 것이며 그 결과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와 사망 아래 살다가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어제 학생회 수련회를 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사람이 선천적으로 악한지 선한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느 학생이 늘 선한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선한 것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가끔 선한 것이 무엇이냐고 다시 물으니 우물쭈물 하기에 길에 가다가 구걸하는 사람에게 천원을 주면 그것이 선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고개를 끄떡이기에 그것은 단지 우리들의 생각일 뿐이고 성경에서 요구하는 선한 것의 기준이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작은 구제를 하고서 그것을 선이라고 여기겠지만 성경의 기준에서는 미달하기에 악한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전 재산을 다 나누어주고 자기의 몸마저 장기를 기증하면 그것은 선한 것입니까? 그러나 그것도 자기 의가 나오게 되면 역시 악한 것입니다.
왜 그런지를 창세기 6장 5절 말씀을 찾아 읽게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 말씀을 읽고 나서, 마음과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는 상태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모습이 아니라 바로 앞의 1-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자로 아내를 삼는다는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즉 자기의 마음에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죄악이 관영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된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대로 살아야 하는데 자기 마음에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죄악이 가득 찬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홍수로 청소하고 나면 죄가 줄어들었을까요? 창세기 8:21절에 보면 사람의 계획이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모르면 인간에게도 무엇인가 선한 것이 조금은 나올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성경이 밝히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물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그 큰 구원의 역사를 보고서도 계속하여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모습을 통하여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완전히 진멸하고 심판하여 버리셔야 하실 텐데 왜 하나님께서 은혜로 남기신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베풀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을 즐거움을 노래하기 전에 스바냐서에서 보았던 죄악이 어떤 모습인지 한 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1장에서 지면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진멸하리라고 하십니다. 노아 홍수 때는 코로 호흡하는 것들을 진멸하셨는데 이제는 아가미로 호흡하는 물고기조차 진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상숭배입니다. 복을 내리거나 화를 내리는 그런 하나님은 없다고 합니다.
2장에서 스스로 힘을 키워서 마음속에 말하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고 합니다. 온 세상이 이러할지라도 이스라엘은 달라야 하는데 3장에 보면 방백들이 부르짖는 사자가 되었고 재판장들을 저녁 이리가 되었으며 선지자들을 경솔하고 제사장들을 성도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한 것입니다. 그들이 부지런히 그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심판 외에는 달리 그 어떤 소망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3:9절부터 하나님의 구원을 베푸시는 장면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결론으로 14-20절입니다.
14-17절입니다. 구원의 즐거움을 노래하라고 합니다. 기쁘게 부르고 즐거워하며 노래하라고 합니다. 구원이란 결코 인간의 일이 아닙니다. 인간이 행한 것이라고는 죄밖에 지은 것이 없는데 구원이 일어났다는 것은 인간이 행한 일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일이 있기에 그것을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형벌을 제하신 것입니다.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그 형벌을 제하여 버리신 것입니다. 이 형벌이란 유다 예루살렘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지만 그러나 그곳에서 돌이켜서 해방시켜 주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옮기실 것을 보여주는 계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벌의 제거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심으로 죄와 사망에서 옮겨진 것이 구원입니다. 이 구원을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둘째, 원수를 쫒아내었습니다. 선지자는 바벨론에서 해방되는 것을 1차적으로 말하는 것이지만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와 사망의 권세를 잡은 마귀를 십자가로 승리하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셋째, 자기 백성 가운데 여호와께서 왕으로 거하시는 것입니다. 15절과 17절에서 두 번이나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하여 낸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말고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 가운데 거하시는 여호와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라고 합니다. 이 여호와의 왕 되심으로써 함께 거하심이란 역시 십자가로 구원하여 내신 자기 백성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주로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백성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구원을 인하여 누가 궁극적으로 기뻐하시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17절에서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원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인하여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무언가 선한 것이 있었습니까? 구원받을 만한 행위가 있었습니까? 이미 살펴본 대로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그 백성을 보시면서 그렇게 기뻐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선물보따리를 들고 가서 기뻐하시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한 짓이라고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행하고 그저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사고방식으로 살아왔는데 어느 날 구원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의 능력이며 실력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루어 놓으신 일을 인하여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깨끗하게 마무리 지어서 이루어 놓으면 뿌듯한 보람과 기쁨을 누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기쁨이란 사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홀로 받으셔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이기에 그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범죄 이후에 인간이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가로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란 끊임없이 자기 이름 내기의 역사인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해야 할 교회마저 교회에 공헌도가 있다는 사람들의 이름이 예수님의 이름보다 앞서 있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이런 세상도 역시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자신의 이름만을 높이시는 일에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루어 내셔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그 기뻐하심과 즐거워하심에 참여된 구원받은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오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18-20절입니다. 쫓겨난 자, 저는 자,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이들은 결코 자기들의 공로를 주장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오직 주의 긍휼을 받아서 돌아오는 자들이기에 오직 구원의 즐거움이란 여호와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할 뿐입니다. 이렇게 돌아오는 모습을 다른 선지자들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1:7-9절입니다. “7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 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8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9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이것이 구원받은 자들의 고백이요 부를 노래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아는 대로 예레미야 31장은 새 언약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것은 돌아오는 자들의 공로의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돌아오기에 그들은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하고 해산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남의 도움이 없이는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돌아온 자들이 한결같이 부를 노래는 시편에서도 노래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시편 126편입니다.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그러므로 구원의 즐거움을 노래할 자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신의 죄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죄로 인하여 사망의 포로가 되었으며 진멸당하여야 마땅한 자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은 것은 오직 주의 은혜를 찬송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시편 51편에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하는 내용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범죄를 모르고 있을 때는 구원의 즐거움도 모르는 것입니다. 살인하고 간음하고 있으면서도 죄를 알지 못하였던 다윗이 자신의 죄를 알고 나서 고백하는 내용이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뻔뻔스러운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죄를 인하여 꺾어진 뼈를 인하여 즐거워하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에 용사로 나선 우리아가 희생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은 것을 아는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오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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