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선지서

[스크랩] 미가 강해

공 상희 2009. 5. 6. 12:14

 

 

 

 

 

 

 

미가 강해

 

 

늘푸른 교회 이장우 목사

 

 

 

 

 

 


미가 1:1-16  들을지어다  2005. 2. 2.

 
1 유다 열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2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거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3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4 그 아래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 5 이는 다 야곱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인함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뇨 사마리아가 아니뇨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뇨 예루살렘이 아니뇨 6 이러므로 내가 사마리아로 들의 무더기 같게 하고 포도 심을 동산 같게 하며 또 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 내리고 그 지대를 드러내며 7 그 새긴 우상을 다 파쇄하고 그 음행의 값을 다 불사르며 그 목상을 다 훼파하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

 

 

 

성도의 최고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성경의 마지막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22:20-21절에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말씀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입니다. 그리고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 지어다’로 끝이 납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과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메시아가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메시아만 오면 그들은 모든 정치적인 억압에서 벗어나서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나라가 될 줄 알고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이 전하는 메시아가 임하는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소망에 찬물을 끼얹는 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 날에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노라는 말씀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날이 소망의 날이 아니라 슬픔과 통곡의 날이며 형벌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하여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의 말씀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소설을 보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세상 이야기를 하면 시간가는 줄 모르면서 성경은 펼치기만 하면 잠이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경이 우리의 본성을 거슬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적인 삶의 방향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성경은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들을 성경은 탐심이며 우상숭배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덮어버리고 그저 성경을 잘 안다는(?) 목사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목사들이 설마 다 틀리게 말하겠느냐는 식으로 다수의 안전을 기대하면서 그들의 말을 맹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선지자들의 외침은 늘 외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나오는 생각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장하여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은 인기가 있었고 그렇게 전하는 자들은 또한 권세가 있고 무리가 많았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메시아사상은 언제나 자기 나라가 잘된다는 소식입니다. 아무리 적군이 쳐들어온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임한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심판의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1:1절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활동한 시대는 유다 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입니다. 요담은 웃시야 왕의 아들입니다. 웃시야는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나중에 교만하여 성전에서 제사지내다가 문둥병이 들어서 별궁에 거하고 그 아들 요담이 왕이 되는데 요담은 아버지의 경우를 보아서 그랬는지 성전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왕은 정도를 행하였으나 백성들은 사악을 행하였습니다. 요담의 아들인 아하스는 아주 악한 왕이었습니다. 온갖 우상숭배를 다 한 왕입니다. 그 아들 히스기야는 아버지와 달리 정직한 왕으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미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선포한 것입니다.

 

 

 

지난번에 보았던 요나서와 나훔서가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 성의 회개와 멸망을 보았는데 미가서는 그 중간시기로 보면 됩니다. 미가 선지자가 북 사마리아와 남 유다의 심판을 선포하는데 그 심판의 도구가 앗수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가 선지서는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는 주전 722년 전의 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1:2절입니다. 1절에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인데 이스라엘 백성들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다 들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다만 이스라엘만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온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소식은 모든 세상의 심판의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거하시되 성전에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나오신다고 하십니다. 구약의 성전이란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 없는 곳입니다. 다만 그 언약궤를 지성소에 두었고 그 언약궤 뚜껑인 속죄소에서 이스라엘을 만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을 따라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나오신다는 것은 언약을 따라 일하심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그 성소란 단지 땅의 성소만이 아니라 하늘에서 강림하신다는 내용입니다.

 

 

 

1:3-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시는데 그러면 그 산들이 불에 녹는 초와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과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마치 거인이 모래성을 밟아버리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서운 모습으로 임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5절입니다.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야곱의 허물은 사마리아이며 유다의 산당이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북 이스라엘의 사마리아가 우상의 도시가 된 것은 남북으로 나누어진 직후부터 여로보암 왕이 우상숭배를 하게 한 것입니다.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섬기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백성들이 가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남쪽 유다의 예루살렘은 괜찮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곳도 역시 우상숭배하는 산당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얼마 전에 멀리에서 사는 분이 메일로 질문을 해 왔습니다. 인터넷으로 설교를 듣는다는 분인데 ‘신년축복성회’를 하는데 강사의 말이 복은 제단을 통해서 밑으로 내려간다. 목사가 목회할 수 있도록 성도가 목사를 도와야 한다. 교회를 우습게 보지마라. 헌금 봉투 호명할 때 아멘을 제대로 해야 복이 온다. 복은 담임목사로부터 복이 내려오기에 담임목사가 복을 받아야 성도가 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것이 옳습니까, 하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방금 본 사마리아의 우상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신전을 만들어 놓고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신전과 신상을 만들어 놓았으니 이제부터는 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사시대에 미가 집안-선지자 미가와 이름이 같음-에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에봇과 우상인 드라빔을 만들어 놓고서 자기 아들로 제사장을 삼았다가 나중에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삼고서는 이제는 여호와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모습이 오늘날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1:6-7절을 봅니다. 사마리아를 어떻게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들의 무더기로 만들어 버리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새긴 우상을 다 부수어 버리고 기생의 값으로 모은 신상들이 약탈당하여 다른 나라의 기생의 값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선지자의 예언처럼 사마리아는 들의 무더기가 되어 버렸고 앗수르에 의하여 모든 금은들이 다 탈취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앗수르마저 결국은 다 황폐케 되는 것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이러한 심판의 소식을 들은 미가 선지자는 애통하며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곡하는 것입니다. 들개와 타조의 우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하였지만 아마 처절한 울부짖음이겠지요! 오늘 우리는 이 선지서를 보면서 이러한 애통이 나옵니까?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선지자의 울부짖음이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의 멸망의 소식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예루살렘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1:8-9절을 봅니다. 통곡이 일어나는 것은 사마리아의 멸망의 소식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예루살렘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상처는 고칠 수 없이 되어서 유다까지, 예루살렘까지 미쳤다는 것입니다.

 

 

 

1:10-15절입니다. 유다의 심판 소식을 가드에 알리지 말라고 합니다. 다윗 왕이 사울의 죽음을 가드에 알리지 말라고 한 것처럼 호곡하지 말라고 합니다. 수치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임하시는데 그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성읍의 이름들은 성읍의 이름을 빗대어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들레아브라는 먼지의 집이라는 뜻이므로 티끌에 굴라는 것입니다. 사빌은 ‘아름다운’이라는 뜻인데 벌거벗고 수치스럽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벧에셀은 가까이 있는 집인데도 방비하려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마롯은 근심 중에 복을 바라나 재앙이 임한 것입니다. 라기스는 그 지방에서 말이 나오는데 심판에서 도망가기 위하여 말을 준비해보라는 것입니다. 그 힘을 의지한 죄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가드모레셋은 예물로 앗수르 왕에게 주어질 것을 말합니다. 악십은 속임의 뜻인데 이스라엘의 열왕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마레사는 소유한다는 뜻인데 산헤립이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다윗에 아둘람 굴로 사울을 피하여 도망가듯이 그렇게 피하여 갈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16절입니다. 그들의 기쁨이었던 어린아이들조차 사로잡혀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슬픔을 표시할 때 머리를 풉니다. 그런데 슬픔이 지나쳐 아예 머리를 대머리같이 밀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갔기 때문입니다. 이 심판의 소식을 지금 우리에게 임한 것으로 받는 것이 선지자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소식은 이런 심판의 소식이 주종을 이룹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복을 주고 평안을 주고 하는 이야기들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심판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남기신 자들을 돌이켜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성경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섬겼던 우상과 같은지도 모르고 속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들을지어다. 무엇을 들어야합니까?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강림은 구원의 소식이 아니라 심판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과연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주님 강림하신다는 이 소식을 듣기를 좋아하고 있습니까? 임하시면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평소에 좋아하던 것들이 다 불태워질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베드로후서 3:1-13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소원합니다.

 

 

 

 

미가 2:1-5  재앙이 된 힘  2005. 2. 16.

 

 


1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찐저 2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취하니 그들이 사람과 그 집사람과 그 산업을 학대하도다 3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 내리기를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히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니라 하셨느니라 4 그 때에 너희에게 대하여 풍사를 지으며 슬픈 애가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 그가 내 백성의 산업을 옮겨 내게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 5 그러므로 여호와의 회중에서 제비를 뽑고 줄을 띨 자가 너희 중에 하나도 없으리라.

 

 

 

사람들마다 힘을 좋아합니다. 힘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자기 것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대에 무엇이 힘이 됩니까? 돈이 힘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늘 돈 벌기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사는 것입니다. 지식이 힘이 됩니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사교육비를 들여서라도 자기 자식들을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권력이 힘이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권력을 가지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잡으려고 합니다. 종교를 가지는 것이 힘이 된다면 무슨 종교라도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인간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힘을 추구하는 쪽으로 사람들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악한 것이며 죄임을 성경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세상의 힘을 자기 힘으로 삼으려는 인간의 죄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모델로 사용하셔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자기들의 힘으로 살아야 하였습니다. 남자는 종신토록 땀을 흘려야 먹고 살게 되며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더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평생 수고하며 땀을 흘리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을 때 뱀의 유혹은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지라도 인간들은 스스로의 힘을 키워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이 본능으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자 죄악도 역시 관영하여져서 심판을 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그 가족이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서 심판의 대상과 은혜의 대상으로 갈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노아홍수 이후에도 심판의 대상과 은혜의 대상이 어떠한지를 성경은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의 대상은 스스로의 힘을 비축하여 가는 자들이며 은혜의 대상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힘으로 삼는 자들입니다.

 

 

 

미가 2:1-2절입니다.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들은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범죄 이후의 인간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은 항상 악할 뿐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침상에서 악을 꾀하고 간사를 경영하는 것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 악을 꾀하고 간사를 경영하는 것의 목표는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힘을 더 가지게 될 것인가 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계획을 세웠더라도 자기 손에 힘이 없으면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권력이 있는 자들은 그 악한 일을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손에 권력이 있기에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취하며 사람들과 그 산업들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으로 한번 보겠습니다. “1 망할 것들! 권력이나 쥐었다고 자리에 들면 못된 일만 꾸몄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고 마는 이 악당들아, 2 탐나는 밭이 있으면 빼앗고 탐나는 집을 만나면 제 것으로 만들어 그 집과 함께 임자도 종으로 삼고 밭과 함께 밭주인도 부려먹는구나.

 

 

 

이런 일들이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보여져야할 이스라엘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힘으로 가나안 땅을 차지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애굽의 종살이하던 곳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고 그 땅을 자기들의 기업으로 받게 된 것은 그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토지는 영영히 사거나 팔거나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레위기 25장에서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을 말씀하시면서 토지의 경작권을 팔수는 있지만 언제든지 무를 수가 있고, 자신의 힘이 없으면 친척이 물려줄 수가 있고, 그것도 안 되면 희년이 되면 토지는 자기 앞으로 돌아오도록 율법으로 정하여 두었습니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생산수단은 땅에 의존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이 없다는 것은 곧 종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땅에서 은혜가 나타나야 하는데 권력 잡은 자들이 남의 땅과 집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대표적인 예가 열왕기상 21장에서 아합 왕과 나봇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합 왕궁 곁에 나봇의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아합 왕이 나봇에게 그 포도원을 팔라고 합니다. 자기의 나물 밭을 삼겠다고 하면서 더 나은 포도밭을 주든지 아니면 돈을 후하게 주겠다고 하지만 나봇이 조상으로부터 받은 땅을 파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왕도 어쩔 수가 없어서 고민하고 밥도 먹지 않고 침상에 드러누운 것입니다.

그때 그 아내 이세벨이 사정을 물어보고서 자기가 해결하겠다고 합니다.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그 성읍의 장로와 귀인들, 즉 권력 있는 자들에게 보내면서 깡패 두 사람을 거짓 증인으로 세워서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하고서는 죽이도록 합니다. 그대로 시행되어 나봇이 죽고 아합이 포도밭을 차지합니다.

 

 

 

권력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의로운 나봇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왕의 권력과 그 성읍의 권력이 결탁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나봇의 땅을 빼앗아 버린 것입니다. 아합이 권력이 없었다면 그런 마음은 있었을지라도 그렇게 행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력이 재앙이 된 것입니다. 이세벨이 왕에게 나봇이 죽었다고 하면서 그 포도밭을 차지하라고 하여서 그 포도밭에 갔다가 엘리야를 만납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 왕에게 “네가 죽이고 빼앗았느냐?”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면서 너의 피를 개들이 핥을 것이며 이세벨도 개들이 뜯어먹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미가 2:3절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나타나야할 약속의 땅이 권력을 이용한 탐욕이 가득한 이방인의 나라가 되어버렸으니 언약대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 내리기를 계획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들의 간사한 계획을 세워서 자기들의 힘으로 약탈을 계획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심판을 계획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또한 교만히 다니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재앙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미가 2:4-5절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이 차지한 땅을 도로 빼앗기게 됩니다. 언약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풍사로 지으며 슬플 애가로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 그가 내 백성의 산업을 옮겨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신다고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회중에서 제비를 뽑고 줄을 띨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 올 때에 그들은 제비뽑아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줄로 재어서 각자의 지파대로 땅을 나누어 차지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힘으로 차지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대로 된 것이기에 그 땅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만하면 그 땅이 안전하며 산물을 풍성히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심이 어떠한지를 율법은 그대로 드러내고 마는 것입니다. 이제는 적이 땅을 차지하게 되고 그들은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중에서 제비를 뽑고 줄을 띨 자가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성경의 말씀을 보면서도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힘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들마다 힘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습니다. 교회가 힘이 있어야 선교도 하고 구제도 하고 하나님의 일을 크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경구절들 가운데 상위에 들어갈 내용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 나에게도 능력을 주시옵소서! 그래서 내가 멋지게 하나님의 일을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정작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이 말씀은 무슨 능력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빌립보서 4:10-14절을 봅니다.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이 말씀에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우리가 평소에 좋아하는 힘이 되는 능력이란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회에 감사하는 것은 그들이 바울 사도를 생각한 것이 다시 싹이 남을 인한 것입니다. 바울을 위하여 연보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 연보를 인하여 감사하다고 하니 자신이 궁핍함으로 계속하여 연보를 보내달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함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는 것입니다. 비천하다고 비굴하여지지 않고, 풍부하다고 교만하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이 되는 돈이 자기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과 전혀 상관없다는 것이 참된 능력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힘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도 할 수 있다는 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에 세상의 힘으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힘을 거부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한 세 가지는 이 세상이 가질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경제적인 능력, 종교적인 능력, 세상의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힘이 되는 그 모든 것을 거부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로 가신 것입니다.

 

 

 

어제 저녁에 부산에서 어느 집사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전에 목사님이 은퇴하고 새로 목사님이 오셔서 6개월 정도 되었는데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벌써 성전건축헌금 작정하게 하고, 교인도 얼마 되지 않는데 안수집사 5명과 권사 8명을 뽑는다고 하면서, 자기는 아직 할 수 없는데 뽑히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안수집사로 뽑히면 못하겠다고 하면 되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한 시간 정도 이야기하였는데 똑 같은 성경을 보면서 제가 전하는 성경이야기는 생전 처음 들어본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해서 교회가 힘을 키워야 된다는 것 아닙니까? 그 힘이 곧 재앙이 되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에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고 우리에 양이 없어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구원받은 백성의 모습입니다. 이 말씀은 신약의 말씀이 아니라 구약의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만으로 만족이 안 된다면 우리가 믿음에 있는지 우리를 스스로 확정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4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신 것처럼 성도도 그렇게 살게 되어있습니다.

 

 

 

 

 

미가 2:6-11  예언하지 말라  2005. 2. 23.

 

 


6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어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7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신이 편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행위 정직한 자에게 유익되지 아니하냐 8 근래에 내 백성이 대적 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 중 겉옷을 벗기며 9 내 백성의 부녀들을 너희가 그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영히 빼앗는도다 10 이것이 너희의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찌어다 이는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이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 11 사람이 만일 허망히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

 

 

 

말세의 특징을 디모데후서 3장에서 여러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랑, 돈 사랑, 자긍, 교만, 훼방, 부모 거역, 감사치 아니함, 거룩하지 아니함, 무정함, 원통함을 풀지 아니함, 참소, 절제하지 못함, 사나움,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함, 배반하여 팜, 조급함, 자고함,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함,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결국 진리를 대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들이 나타나는 것이 말세의 특징이라면 인류의 모든 역사가 사실은 다 말세의 특징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아니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러므로 언제 망하여도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죄악된 인간들의 실상을 성경은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율법을 주심으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지를 못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보내신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책망을 합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책망의 내용은 침상에서 악을 꾀하고 간사를 경영하고서는 날이 새면 그것을 행할 능력이 있어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책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진 힘이 재앙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할 약속의 땅에서 이방인들의 탐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기에 선지자들이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드러나야 하는 땅입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구원받았기에 약속의 땅에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학대를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을 율법으로 명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땅을 빼앗기는커녕 사거나 팔지도 못하게 하였는데도 힘이 있다고 약한 자들의 땅과 집들을 빼앗아갔기에 여호와께서 재앙을 계획하시고 심판하신다는 예언의 말씀을 미가 선지자가 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의 말을 듣고서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에게 오히려 예언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6절을 봅니다. 예언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재앙과 심판의 내용은 예언할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욕하는 말을 그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심판의 말이 그들에게 욕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것을 예언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미가 선지자만이 아니라 모든 선지자들이 다 당한 일입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왕으로서 나봇의 포도밭은 빼앗았던 아합 왕 때에 미가야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인 시드기야로부터 뺨을 맞았습니다. 무려 400명이 똑같이 전쟁에 나가면 승리한다고 말하는데 미가야만 아합이 전쟁에 나가서 죽을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왕이 누구의 말을 듣겠습니까? 다수의 말을 듣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겁이 나서 변장하여 나갔지만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아서 피를 흘리며 죽었고 그 피를 개들이 핥았던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11:18-23절을 봅니다. “18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19 나는 끌려서 잡히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과실을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산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 이름으로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20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정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수를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21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취하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22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23 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

 

 

 

예레미야를 고향사람인 아나돗 사람들이 죽이려고 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끌려가는 순한 양처럼, 그들이 산자의 땅에 끊어버리자고 하는 것은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와 같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언하면 죽이겠다고 하는 이들이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지자들의 선포와 고난당함이 최종적으로 누구에게서 나타납니까?

 

 

 

마태복음 23:29-36절입니다. “29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견디지 못하여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신학입니다. 그것은 자기들 나름대로 재편집된 하나님에 대한 사고방식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시면 이렇게 번역이 됩니다. 공동번역. "야곱 가문이 저주를 받다니, 야훼께서 참을성이 없으시어 그런 일을 하신단 말이냐?" 하고 말한다만 너희가 올바로 살지 못했는데도 좋은 말씀을 내리시겠느냐? 미가의 심판의 소식을 듣고서 뭐라고 대답하는가 하면 야곱의 가문이 저주를 받다니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참을성이 없어서 그런 일을 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그들 나름대로의 신학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편급하게 심판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택한 백성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율법이 있고 선지자들이 있고 제사장들이 있습니다. 성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도 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조금 잘못했다고 심판을 행하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줄기차게 외칩니다. 그러나 너희의 행위를 보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행위가 올바르다면 나의 말이 유익할 것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가 어떻습니까?

 

 

 

8-9절입니다. 전쟁을 피하여 가는 자처럼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 중 겉옷을 벗기며 부녀자들을 그의 집에서 쫓아내고 그 어린 자녀에게서 내 영광을 빼앗아 갔다고 합니다. 보호받아야 할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 그들의 받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서 쫓겨난 것은 힘 있는 자들의 탐욕으로 인한 것입니다. 근래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자기들이 형벌을 받지 않으리라고 할 수 있느냐는 고발입니다.

 

 

 

10절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기들에게 무슨 형벌이 있겠느냐고 하면서 안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곳은 쉴만한 곳이라고, 즉 안식처라고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안식의 땅에서 안식에 어긋난 자들은 그 땅이 토하여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너희들의 쉴 곳이 아니니 떠나라는 것입니다. 안식의 땅이 이미 더러워진 것입니다. 그런즉 반드시 멸할 것이며 그 멸함이 클 것이라고 합니다.

 

 

 

11절입니다. 참된 선지자들의 예언을 금하면서 그들은 거짓된 선지자들을 선호합니다. 거짓된 자들이 전하는 소식은 포도주와 독주가 풍성하리라는 것입니다. 풍요를 전하는 그런 선지자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참된 선지자들치고 심판을 전하지 아니한 선지자가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런 선지자들보다는 축복을 말하는 선지자들을 훨씬 선호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가나안의 원주민들을 다 몰아내었습니다. 그들의 죄악이 관영하였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원리는 애굽의 원리와 같이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억누르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는 힘의 논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의 원리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식의 땅을 더럽혔기 때문에 그들이 쫓겨나서 70년 동안 땅이 안식하고 나서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오는 자들이 남은 자들인데 이들은 더 이상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셔서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또다시 자기들의 힘을 축적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힘이란 정치 경제적인 힘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힘마저 그들의 의로 축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의들이 결국 예수님을 배척하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예언하지 말라고 선지자들에게 말한 모습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에게도 그대로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자 그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복음의 소식을 듣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돌을 던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택하신 자들은 회개하고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자기들의 좋은 이야기는 챙기지만 싫은 이야기는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귀에 이롭게 할 거짓 선생들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좋아합니까? 인간을 긍정해주고 발전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인간의 행위를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협력하는 그런 하나님을 선호합니다. 자기도 무언가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믿고서 점점 더 나은 사람, 힘 있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의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심을 그의 영광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12-13절을 봅니다. 이 부분은 다음주에 더 자세하게 보도록 하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나서 야곱의 남은 자를 모으시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모으시고 친히 왕이 되셔서 선두로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무리들은 더 이상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지 않는 무리들입니다.

 

 

 

이 말씀은 결국 그들이 배척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친히 목자가 되시고 왕이 되셔서 자기 백성들을 다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광은 그 아들을 통하여 받으시는 것입니다.

 

 

 

 

 

미가 2:12-3:12  친히 목자가 되심  2005. 3. 2.

 

 


2:12 ○야곱아 내가 정녕히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정녕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 양떼 같게 하며 초장의 양떼 같게 하리니 그들의 인수가 많으므로 소리가 크게 들릴 것이며 13 길을 여는 자가 그들의 앞서 올라가고 그들은 달려서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좇아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

 

 

 

본문이 길어서 두 절만 보았습니다. 다른 본문은 설교 중에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성경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안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표현으로는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친히 일하심으로 여호와의 뜻을 이루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무슨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왜 인간은 스스로 안 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귀는 가려져 있고 그들은 눈은 감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고침을 받고 돌아오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사6:9-10).

 

 

 

시편 58:1-5절입니다. “1 인자들아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어찌 잠잠하느뇨 너희가 정직히 판단하느뇨 2 오히려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의 강포를 달아주는도다 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 곧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할찌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연히 공의를 말하고 정직히 판단하여야 하는데도 중심에 악을 행하고 손의 강포를 달아주는 것입니다. 모태에서부터 멀어졌고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서 거짓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귀머거리 독사와 같은 것입니다. 술사들이 독사들을 길들여 움직이게 하지만 귀머거리 독사들에게는 통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이 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한 표현들입니다. 이보다 더한 표현들도 많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과 연관시켜 찾아본 몇 구절의 말씀들이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왜 인간으로서는 안 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친히 일하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2:12-13절에서 여호와께서 친히 남은 자를 모아내시겠다고 하십니다. 마치 목자가 양을 인도하듯이 인도하시며 그들의 왕이 되셔서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여호와께서 친히 목자가 되시고 친히 선두로 행하셔야 하시는 것입니까? 인간 지도자들에게 맡기시면 어떻게 되기에 그렇게 친히 인도하셔야 하시는 것입니까?

 

 

 

3:1-5절입니다. “1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아 청컨대 들으라 공의는 너희의 알 것이 아니냐 2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3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남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4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찌라도 응답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의 악하던 대로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우시리라

 

 

 

이스라엘의 백성을 공의와 선으로 다스리고 보호해야할 지도자들이 오히려 백성을 학대하기를 마치 양을 잡아먹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죽을 벗기고 살을 뜯어 먹고 그 뼈까지 다져서 먹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어느 집에 가니 왕만두를 대접하는데 만두속에 꿩고기를 다져서 넣어야 하는데 꿩이 귀하니 꿩 대신 닭을 다져서 넣었다는데 뼈까지 함께 다져서 넣었다는 것입니다. 뼈가 씹힐 때 이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마치 양들을 잡아서 뼈까지 다져서 먹어버리는 것과 같은 지도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이러니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의 때가 되자 이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구원하여 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응답지 아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의 악하던 대로 얼굴을 가리시겠다는 것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타락하면 선지자들이 등장하여 그들의 죄악을 고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조차 함께 타락한 것입니다.

 

 

 

3:5-7절입니다. “5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6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흑암을 만나리니 점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7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 다 입술을 가리울 것은 하나님이 응답지 아니하심이어니와

 

 

 

선지자라는 자들이 자기 백성을 유혹하여 입에 무엇을 채워주면 평강을 외치나 채워주지 아니하면 전쟁을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점을 치는 사람들이 복채를 많이 내면 좋게 말하고 복채를 적게 내면 자꾸만 무시무시한 재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겁이 나서 어떻게 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는가 물으면 큰 굿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액운도 막아낼 비방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이와 똑 같아진 것입니다.

 

 

 

지금 이 이야기들이 과연 구약시대의 이스라엘만의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오늘 우리의 이야기들입니까? 우리 주변의 이야기들입니다. 목사에게 잘하면 복 받고 잘못하면 벌 받는다는 이야기가 이 거짓 선지자들의 이야기와 별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저에게 상담이 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이런 이야기들입니다. 물론 몇 사람 되지 않지만 그들의 한결같은 질문들이 이와 같은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답을 해주어도 그래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직분을 맡았는데 이것을 그만두고 나오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지 않을까 하면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그런 이야기를 들었으면 이런 지경이 되었겠습니까?

 

 

 

이런 선지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점치지 못하게 하십니다. 해가 져서 캄캄하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점 궤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들이 지어낸 말을 가지고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선지자들이 가득한 중에도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참된 선지자를 세우신 것입니다.

 

 

 

3:8절입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미가 선지자는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인하여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입고서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가 선지자가 전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가 할 일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무엇을 보여주는 사람들입니까?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면 축복을, 자기들에게 손해가 되면 저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선지자는 자기의 이해와 상관이 없습니다. 비록 돌에 맞아 죽을지라도 여호와의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바로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입니까?

 

 

 

3:9-12절입니다. “9 ○야곱 족속의 두령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 곧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청컨대 이 말을 들을찌어다 10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11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12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한마디로 심판의 소식입니다. 야곱 족속의 두령과 치리자들이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기에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공의와 정직으로, 긍휼과 자비로 건축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피와 죄악의 성읍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을 하며, 제사장들을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선지자들을 돈을 위하여 점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총체적으로 부패했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총체적으로 부패하여 있는데도 그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11절을 다시 봅니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니 우리에게 재앙이 임하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바로 자기 스스로 속고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고, 삯을 위하여 교훈하고,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도 자기들은 여호와를 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는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만 속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을 듣는 자들도 함께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우리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복을 받고 재앙을 받지 않는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는 무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까?

 

 

 

12절입니다. 시온은 밭같이 갊을 당할 것이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될 것이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선지자의 말이 듣기가 좋습니까? 심히 괴로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돌로 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구약의 선지자 시대만 그렇습니까? 오늘도 여전히 그렇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보면서 저 자신을 봅니다. 저도 저에게 누가 입에 무엇을 채워주면 좋은 말을 해줄 것입니다. 채워주지 아니하면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인간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인도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목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란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저도 여러분과 성정이 같은 사람입니다,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인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중매쟁이일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서는 자기는 빠져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친히 목자가 되시고 왕이 되셔서 자기 백성을 이끄신다는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34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이 당시에 왜 목자가 없었습니까? 수많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종교지도자들이 가득한 예루살렘에서 목자 없는 양 같은 백성들을 주님께서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지금도 이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친히 이끄시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도적은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양과 목자는 서로 압니다.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그 주님께서 자기의 양들을 지금도 친히 모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라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그가 친히 자기 백성의 목자가 되시고 왕이 되셔서 지금 선두로 행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음성이 오늘도 주의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들려지기를 소원합니다.

 

 

 

 

 

미가 4:1-8  남은 백성  2005. 3. 9.

 

 


1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2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3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4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 5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7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로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리라 하셨나니 8 너 양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이전 권능 곧 딸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오리라.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다는 말을 우리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사람이 없으면 일도 못하신다는 말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다우시려면 사람을 위하여 일하시고 사람을 통하여 일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대마다 사람들은 뛰어난 지도자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거나 사람을 위하여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에 나타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그들 중에 백성의 지도자로 세움을 입은 자들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지도자로 세워졌을 때에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나를 따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보라고 증거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인 모세다윗의 경우를 보아도 둘 다 치명적인 결함이 나타난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온전하게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므리바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지 않고 화를 내었기에 자신도 가나안까지 들어가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다윗 왕도 간음과 살인을 인하여 자신의 죄인 됨이 그대로 들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다윗 같은 자들이 한 역할이 무엇인가 하면 완벽한 인도자요 구원자이신 메시아를 예언하고 예표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출애굽기 15:13,17,18절을 봅니다. “13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8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홍해 바다를 건너고 나서 모세가 찬양한 내용입니다.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주의 힘으로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주의 처소를 삼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의 처소를 삼으시기 위하여 구원하셨기에 사람이 주의 처소를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인 것입니다.

 

 

 

지난주 본문을 다시 봅니다. 미가 2:12-13절입니다. “봉독” 방금 보았던 출애굽기의 말씀과 별 다를 바가 없는 내용입니다. 주께서 친히 자기 백성들을 모아서 한 처소에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의 왕이 되셔서 친히 선두로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인간 지도자들에게 맡겨두지 못하시고 친히 행동하셔야 하시는 것입니까?

 

 

 

3:1-12절에서 보았던 대로 그 지도자들이 행한 모습이 어떠하였습니까? 양떼를 보살피라고 세운 지도자들이 양의 껍질을 벗기고 고기를 뜯어먹고 뼈까지 다져서 먹어버리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꼴을 보고 고발해야 할 선지자들은 자기들의 입에 무엇을 물려주면 평강을 외치지만 아무것도 채워주지 아니하면 전쟁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고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고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로 건설되어야 할 시온이 피로 건설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망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헛된 소망과는 달리 시온이 망하게 되었습니다. 밭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더미에 묻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도자들만의 죄악으로 그렇게 망하게 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지도자들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은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듯이 백성들이 뇌물을 갖다 바치고 자기들의 사욕을 위하여 제사장과 선지자들을 이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5:30-31절을 봅니다. “30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3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에스겔 14:10절입니다. “선지자의 죄악과 그에게 묻는 자의 죄악이 같은즉 각각 자기의 죄악을 담당하리니” 선지자들이 거짓을 예언하고 제사장들이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데도 백성들은 그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지도자들의 죄악이나 그에게 묻는 자의 죄악이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는 스스로 구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친히 나서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 지도자를 세우지 마시고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왜 어렵게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들추어내셔야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인간의 배후에 있는 악마의 실체도 함께 드러내어 심판하여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 배후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인간 세상에서는 우리에게 더 완벽한 지도자를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정치계에서도, 종교계에서도 지도자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지도자는 한분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지도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 지도자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구약성경입니다. 그 지도자가 친히 나서시는 것을 구약에서 말일이라고 합니다.

 

 

 

4:1-5절입니다. 말일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서고, 민족들이 몰려들며 이방인들도 그곳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여호와의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일에 주님께서 많은 민족을 심판하시고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즉 평화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 아래에서 안연히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기에 그렇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여호와의 약속을 믿는 사람은 이방의 신들의 이름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이름으로 영원히 행하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성취가 언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일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으로 봅니다. 포로로 잡혀갔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도자로부터 백성들까지 모두가 죄악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의 남은 백성을 모아내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돌아올 능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마치 애굽의 종살이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자들인데 여호와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출애굽을 하듯이 이제 바벨론의 포로에서도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데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 남은 백성들을 돌이키시는 것입니다.

 

 

 

4:6-8절입니다. 누가 모아내시는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친히 모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아내는 남은 백성들이 어떤 모습입니까? 저는 자, 쫓겨난 자, 환난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을 남은 백성이 되게 하여 강한 나라가 되게 하셔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다스리시겠다는 것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오는 모습이 저는 자, 쫓겨난 자, 환난 당한 자의 모습이라는 것은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1:7-9절입니다. “7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 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8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9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여기서도 돌아오는 남은 자들의 모습이란 자기 힘으로 오지 못하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인도함을 받아 오는 것입니다.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바른 길로 행하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이 땅에서 직접 수행하시는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임을 예레미야 31:31-3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새 언약의 능력으로 이방인이요, 저는 자요, 쫓겨난 자요, 환난 당한 자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돌아온 자들은 무엇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까? 주님의 일하심과 그 능력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주께서 남기신 주의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주일낮에 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곳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너희 부르심을 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미련하고 약하고 천한 것들을 택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셔서 세상의 지혜롭고 강하고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르신 것은 아무라도 자기의 육체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주님의 일하심의 능력을 증거하고 찬송하는 자들이 주께서 돌이키신 남은 자들인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만이 대접을 받는 이 세대 속에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자들이 주께서 남기신 백성들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미가 4:9-13  포로 됨과 구원  2005. 3. 16.

 

 


9 ○이제 네가 어찌하여 부르짖느냐 너희 중에 왕이 없어졌고 네 모사가 죽었으므로 네가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함이냐 10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애써 구로하여 낳을찌어다 이제 네가 성읍에서 나가서 들에 거하며 또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너의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 11 이제 많은 이방이 모여서 너를 쳐 이르기를 시온이 더럽게 되며 그것을 우리 눈으로 바라보기를 원하노라 하거니와 12 그들이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하며 그 모략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 여호와께서 곡식 단을 타작마당에 모음 같이 그들을 모으셨나니 13 딸 시온이여 일어나서 칠찌어다 내가 네 뿔을 철 같게 하며 네 굽을 놋 같게 하리니 네가 여러 백성을 쳐서 깨뜨릴 것이라 내가 그들의 탈취물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며 그들의 재물을 온 땅의 대주재께 돌리리라.

 

 

 

오늘 본문 10절의 말씀을 보시면 딸 시온의 구원이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서 그 땅(이스라엘)에서 바로 구원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곳(바벨론)에 가서 구원하셔야 하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셔서 가나안 땅으로 오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약속의 땅에서 그대로 살게 하시면 되실 텐데 왜 애굽에서 430년이나 종살이를 하게 하시고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게 하시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당신은 지금 죄와 사망의 포로로 잡혀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십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 사람이 무어라고 할까요? 웬 미친놈인가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정상인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죄와 사망에서의 구원이라는 것은 생각조차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이지 하나님의 의를 구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아담의 모든 후손이 다 이러한 것입니다. 단지 그들이 살아가면서 현실에서 어떻게 좀더 편하고 즐겁고 행복할까를 추구하고 사는 것입니다. 여력이 있다면 사후세계를 위하여 길 닦음도 해두자는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것은 인간의 구원욕구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지를 보여주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포로 됨과 구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출애굽의 과정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대로 때가 차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들여놓으시기 위하여 모세를 보냅니다.

모세가 등장할 때 그들은 강제노역으로 그 탄식소리가 하늘에 사무친 것입니다. 그런 포로 된 상황, 종된 상황에서 모세가 나타나서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백성들이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바로 왕이 강퍅하여 내어보내지 않고 오히려 고역을 가중시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고 하나님께 하소연합니까? 모세를 벌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 때문에 고생을 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기쁜 소식이란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구원관이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 몸 하나 편하면 최고인 것입니다. 열 가지의 재앙을 직접 목격하고 나왔지만 홍해 앞에서 아우성을 지르고, 홍해를 건너면서 그 큰 구원을 보고서도 3일 만에 물 없다고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만 어려우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데모한 것입니다. 애굽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노예로 살아도 먹고 사는 일에는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포로로 종살이를 하면서 고생하던 때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가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모두 다 진멸되어야 마땅하나 하나님의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의 언약을 위하여 다 멸하지 아니하시고 가나안 땅에 들여 놓았습니다. 그곳에서도 역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강력한 지도자를 요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무엘상 8:4-9, 18절입니다. “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9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왕을 세움으로 그들이 부담하여야할 징병과 세금에 대한 것을 다 말하여도 그래도 자기들은 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왕들로 인하여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아니하리라는 이 말씀대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4:9절을 봅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라는 자들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고, 제사장들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고,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부르짖어 보아도 구원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믿었던 그 왕이 죽었느냐? 그 모사들이 죽었느냐? 네가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함이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들이 부르짖어도 바로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어디까지 가야 합니까?

 

 

 

4:10절입니다. 들에 거하며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로 잡혀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 포로로 잡혀가는 것은 애굽에서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으로 오는 것과 지역만 다르지 역순으로 같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은 제2의 출애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포로로 잡혀가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자기들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은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인간의 지도자도 자기들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역시 인정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로 된 자리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전혀 자기들의 공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포로로 잡혀가서 죽어야 마땅한 것을 인정할 뿐이지 구원하여 달라고 할 처지가 못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로에서 돌아오는 자들은 무엇을 의지하지 않겠습니까?

 

 

 

5:7절입니다. 야곱의 남은 자란 포로에서 돌아오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많은 백성 중에 있게 될 텐데 여호와에게서 내리는 이슬과 단비 같다고 합니다. 이슬과 비란 사람이 좌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은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는 자들입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남은 백성들과 함께 연결됩니다. 남은 백성들은 저는 자요, 쫓겨난 자요, 환난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이들을 주님께서 시온에서 영원토록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자기가 어디에 사로잡혀 있었던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애굽이나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이 그들의 힘과 의지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결과물로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은 더 이상 인간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지도자의 능력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의 긍휼로 구원되었음을 알기에 주님만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뜻을 신약의 백성들은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못 박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속하시는 것은 그 어떤 인간이나 인간 지도자의 노력이 아니라 순전히 주님 홀로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셨는데 그 성령이 임한 자는 구원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이 세상의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그 영, 공중 권세 잡은 자에게 포로로 잡혀 있었기에 이 세상의 풍속을 따라 살 수밖에 없었던 자들임을 알게 됩니다. 강한 자가 결박하고 있으면 스스로 빠져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강한 자가 와서 그 강한 자를 결박하여 버리면 그 결박당하여 있던 자를 해방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란 자기가 어떤 처지에 있었던지 알게 됩니다.

 

 

 

로마서 11: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모든 사람을 가두어 두셨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불순종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합니다. 불순종에 포로로 잡혀 있었는데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 긍휼을 베푸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의 종으로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로 됨에서의 구원이란 구약 백성들의 사건들을 통하여 오늘 구원받는 모든 자들에게 나타는 주님의 구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구원이란 죄와 사망의 포로에서 의와 생명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포로 됨에서 구원이란 이스라엘의 구원만이 아니라 이방나라를 심판하는 계기가 됩니다.

 

 

 

4:11-13절입니다. 많은 이방이 모여서 시온이 더럽게 되며 그것을 우리 눈으로 보자고 몰려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때에 열방들이 놀렸던 것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지요! 이제 너희는 다 망했다고 환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모략을 몰랐던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통하여 이방 나라들을 심판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하나님께서 저주하신다는 언약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에 동조하고 비웃은 자들을 타작마당에 곡식을 한꺼번에 모아서 타작하듯이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온이여 일어나 네 뿔을 철 같게 하고 네 굽을 놋 같게 하여 여러 백성을 쳐서 깨드리고 그들의 탈취물을 구별하여 온 땅의 대주재께 돌릴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궁극적인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포로로 잡혀가는 모습을 보면서 조롱하는 자들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실패한 것이라고 조롱하는 자들이나 다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유대인이라도 심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혈통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이스라엘이란 혈통적인 이스라엘에서 남은 자와, 이방인 중에서 택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포로 됨에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남은 자란 애굽과 바벨론의 포로 된 상태에서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맛본 자들이라면, 신약시대는 죄와 사망의 포로에 갇혀 있던 자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됨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그 복을 기뻐하며 증거할 것입니다. 인간의 가능성과 행함의 능력만 인정받는 이 세대 속에서...

 

 

 

 


미가 5:1-15  메시아 예언  2005. 3. 23.

 

 


1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찌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 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3 그러므로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4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5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6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무케 하며 니므롯 땅의 어귀를 황무케 하리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 내리라.

 

 

 

오늘 본문의 말씀을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베들레헴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가 오시면 적을 물리치고 구원하여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 예언대로 메시아가 베들레헴에 왔습니다. 그런데 왜 그 메시아를 믿지 않고 배척한 것일까요? 이 계시를 받은 유대인들조차 믿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마다 자기들의 메시아상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여서 가정을 이루고 마을을 이루고 국가를 이루면 그 집단들마다 또 다른 메시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난에 시달리면 가난을 벗어나고 싶고, 질병의 고통이 있으면 건강하게 되고 싶고, 포로로 잡혀 있으면 해방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 사상은 누구에게나 있는 욕망인 것입니다. 이런 욕망을 채워주고 해결하여 주는 메시아를 원하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배척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떤 메시아를 믿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데 그리스도라는 말이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며 구원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자로 믿고 있는데,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인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는 또 다시 자기의 나름대로 상상의 메시아를 믿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메시아가 어떻게 예언되고 성취되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5:1-6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막대기로 뺨을 맞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수치를 당하며 적군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메시아가 나올 장소를 말하는데 그곳이 ‘베들레헴 에브라다’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라는 말은 베들레헴에 정착한 에브랏 집안사람들입니다. 사무엘상 17:12절에서 다윗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자의 아들이었는데” 그러므로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윗의 왕위가 영원하리라는 사무엘하 7:16절의 예언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의 고향에서 메시아가 오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장에 보시면, 동방박사들이 왕의 탄생을 보기 위하여 별을 따라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당연히 왕궁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여겨 헤롯의 궁전에 들어가서 물었던 것입니다. 그때 헤롯이 모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모아서 그리스도, 즉 메시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대답하기를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고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들어서 대답합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목자가 나리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5:2절을 봅니다. 그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가 나오는데 그 근본이 태초에, 상고에,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다윗보다 먼저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2:41-46절입니다. “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예수님은 아브라함조차 나의 때 볼 것을 기다리다가 보고서 기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5:3절입니다. 메시아가 그렇게 오시지만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 중에 붙여두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이사야 선지자도 증거하였습니다. 이사야 7:14절에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예언의 말씀대로 메시아가 오셨고 그 메시아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하셨습니다.

 

 

 

5:4절입니다. 여호와의 능력과 여호와의 엄위로 오셨습니다. 여호와 자신의 일을, 한 여인의 후손으로 오시고 베들레헴 마구간에 오셔서 메시아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셔서 안연히 거하게 하시고 땅 끝까지 이르게 되며 그는 우리의 화평이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3절과 4절의 말씀을 보시면 이 땅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늘의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이 땅의 현실에서 구원하여 줄 것을 바랐습니다. 그러나 정작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는 이 땅의 현실에서 더 나은 삶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현실 자체에로부터 구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4-5절입니다.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5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그리스도께 구원하신 것은 이 땅에서 평안하고 잘 먹고 잘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의 구원이며 이 땅에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땅의 현실만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보이지 아니하는 하늘의 현실을 믿게 하시는 것이 메시아가 하시는 일입니다. 그 구원은 우리의 죄에서 구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을 기뻐하지 않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메시아의 예언을 보면서 그들의 눈이 감겼고, 그들의 귀가 막혔기에 오직 땅의 현실에서만의 구원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었던 것은 5:5-6절의 말씀을 봅니다. 앗수르 땅과 니므롯 땅에 적들이 몰려오면 그들을 물리치고 구원하여 내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성경을 보아도 참된 메시아를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성경을 보게 된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구약을 적용하시고 해석하신 그대로 적용하고 해석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에 유대인들과의 충돌이 일어난 것은 성경의 해석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은 율법에 의하면 저주 받은 죽음이요,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못한 실패의 죽음인데 어떻게 메시아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믿지 못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5:7-9절을 봅니다. “7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에게로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 8 야곱의 남은 자는 열국 중과 여러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 중의 사자 같고 양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 9 네 손이 네 대적 위에 들려서 네 모든 원수를 진멸하기를 바라노라

 

 

 

이들이 야곱의 남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여호와에게서 내리는 이슬과 단비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인생을 기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지도자라는 자들을 만났습니까? 예수님 당시에만 하여도 얼마나 많은 메시아가 등장하였습니까? 그래서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을 때에 사람들이 세례 요한이 오시리라 하신 그 분이신가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만 메시아를 알아보고 그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대적을 진멸하는 역할도 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12:3절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저주하실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지만 그 근본은 태초이며 상고부터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며, 그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란 사람을 두 편으로 갈라버리는 것입니다. 한편은 구원이요 한편은 심판인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란 인생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직 구원하시는 주님만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 받는 자들은 인생을 의지하고 자기를 의지하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5:10-15절입니다. “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이르러는 내가 너의 말을 너의 중에서 멸절하며 너의 병거를 훼파하며 11 너의 땅의 성읍들을 멸하며 너의 모든 견고한 성을 무너뜨릴 것이며 12 내가 또 복술을 너의 손에서 끊으리니 네게 다시는 점장이가 없게 될 것이며 13 내가 너의 새긴 우상과 주상을 너의 중에서 멸절하리니 네가 네 손으로 만든 것을 다시는 섬기지 아니하리라 14 내가 또 너의 아세라 목상을 너의 중에서 빼어 버리고 너의 성읍들을 멸할 것이며 15 내가 또 진노와 분한으로 청종치 아니한 나라에 갚으리라 하셨느니라

 

 

 

그 날에 있을 일입니다. 사람들이 의지하는 말과 병거를 부수어 버리시고 우상을 없애버리고 성읍들을 멸할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를 부르기는 하여도 그들이 부르는 메시아는 말과 병거를 원한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살아갈 힘들을 구하였지 이 세상에서 구원받기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은 세상의 힘을 의지하다가 심판당한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을 의지하고 병거를 의지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 결과 포로로 잡혀갑니다. 포로에서 돌아올 때에 그들은 저는 자요, 소경이요, 잉태되고 해산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오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올 수 없는 자들의 모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자기들의 의로움을 말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오직 주의 긍휼만을 입고 온 자들입니다.

 

 

 

이렇게 남은 자들의 모습과 흡사한 모습들이 누가복음 14장에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여 놓고 사람들을 초청하였더니 모두들 핑계대고 오지 않았습니다. 밭을 사서 보러가고, 소를 사서 시험하러 가고, 장가간다고 못 온다는 것입니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원래 자격이 없는 자들을 마구잡이로 불러 모았는데 그들의 모습이 야곱의 남은 자와 같은 모습들입니다. 가난한 자, 병신들, 소경들, 저는 자들입니다. 물론 이들 가운데서 예복을 입지 않는 자가 쫓겨나는 내용이 마태복음에 있습니다만 결국 자기 능력과 실력으로 남은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각자의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메시아는 원하지 아니합니다. 그것은 미련하고 어리석게 봅니다. 이 세상의 현실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힘을 원하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만 있으면 다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현재 이 땅의 삶이 어떠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메시아를 만났습니까? 세상의 힘과 능력을 주는 메시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메시아를 만났습니까? 그분을 만난 자들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루라도 빨리 죽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주님과 함께 거하기를 소원합니다. 이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미가 6:1-5  하나님의 고소  2005. 3. 30.

 

 


1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일어나서 산 앞에서 쟁변하여 작은 산으로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2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쟁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쟁변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3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엇에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거하라 4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종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어 네 앞에 행하게 하였었느니라 5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의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추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추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의 의롭게 행한 것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1-2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소하고 있습니다. 산 앞에서 쟁변하자는 것입니다. 산을 재판관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증인을 부르시는데 작은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입니다. 이들은 배심원들과 같습니다. 피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러한 재판의 형식으로 이스라엘을 고소하는 형식들이 다른 선지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1:1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과 쟁변하자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증인들은 1:2절에 보시면 하늘이여,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고소의 내용은 짐승들도 자기의 임자를 알건마는 자기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고발입니다.

 

 

 

1:3절입니다. 재판관을 세우고 증인까지 세웠기에 이제 본격적인 변론이 있습니다. 이러한 소송은 언약에 관한 문제이기에 언약 소송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먼저 고소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잘못이 있는지를 증거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괴롭게 한 일이 있으면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너희들이 언약을 배반해도 정당하겠지만 도대체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그러한 배반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0:1절입니다.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와서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부친 앞에서 나의 죄가 무엇이관대 그가 내 생명을 찾느뇨”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자 다윗이 요나단에게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이 있는지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다윗이 잘못한 것이 없이 핍박을 받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 하나님의 고소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다윗이 범죄하고서는 하나님께 다윗이 고발을 받습니다.

 

 

 

사무엘하 12:7-9절입니다. “7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8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9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 고발 앞에서 다윗이 범죄하였음을 인정합니다. 한 때는 자기가 억울하다고 하소연하였지만 그러나 정작 자기로 인하여 고통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다윗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억울하고 누가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입니까? 하나님보다 더 억울하신 분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고발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많은 원망과 불평과 짜증을 내면서 살아왔습니까. 그러한 원망이 결국 어디로 향한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원망들입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그것도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을 믿는 나를 왜 이렇게 괴롭게 하시는가 하는 원망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아니하는 자들은 어려움도 없이 편안하게 사는데 나는 왜 이리 고생하고 어려움이 많은가 하는 원망들이 없습니까?

 

 

 

이런 원망들이 쌓이게 되면 어떤 반응들이 나오겠습니까? 두 가지 반응이 나올 것입니다. 첫째는 오기가 생길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하여 정성을 바치고 순종하는데 언제까지 나를 축복하지 아니하시는지 보자는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마치 야곱이 기를 쓰고 하나님과 씨름하듯이 한번 이겨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보란 듯이 나서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 믿는다고 나를 비웃고 조롱한 자들 앞에서 한번 큰소리 치고 싶은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면서 언약을 배반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동안 율법을 지키고 이것저것을 한다고 하였지만 그렇게 해 보아도 별 뾰족하게 나아지는 것도 없으니 이제는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속에서 반발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동안 교회에서 이렇게 저렇게 하면 복을 받는다고 해서 열심히 해 보았으나 그렇게 되지 않으니 삐딱하게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없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도 이러한 모습이 동일하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서 고소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잘못하였느냐, 무엇을 괴롭게 하였느냐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물론 괴로운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이나 부자들이나 간에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니 괴로웠을 것입니다. 눈앞에 이익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괴로움을 가지고 하나님께 항변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오히려 하나님이 괴로움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43:22-24절입니다. “22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로와하였으며 23 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예물로 인하여 너를 수고롭게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인하여 너를 괴롭게 아니하였거늘 24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케 아니하고 네 죄 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괴로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예물과 유향으로 수고롭게 하거나 괴롭게 하지 않으셨는데도 그들이 번제의 양이나 제물이나 유향을 드리는 것을 괴로워한 것입니다. 그들의 힘에 지나치도록 하신 적이 없습니다. 가난한 자는 양이 아니라 비둘기나 가루 한 움큼이라도 동일한 향기로 받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괴로워한 것입니다. 그들의 죄 짐으로 하나님을 수고롭게 하고 괴롭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고발, 네가 너희에게 못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네가 너희들을 괴롭게 한 일이 무엇이냐는 말씀 앞에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은 혹시 하나님께 대하여 항의하실 내용이 있습니까? 그래도 나는 정당하다는 주장을 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할 말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뭐라고 할말이 없지만 그래도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는 나은 데 그럴 수 있는가 하는 원망은 또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게 하신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 준 일이 무엇인가 하는 항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보다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보다 좀 더 나은 무엇을 나에게 해주신 일이 무엇입니까? 또는 믿지도 아니하는 자보다 나에게 더 나은 것을 해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이러한 항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겠습니까?

 

 

 

4-6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애굽의 종살이에서 속량하여 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서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의 피로 그들을 속량하여 내신 것입니다. 이것 한 가지 만으로도 평생에 감사하여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어 그들 앞에서 인도하신 것입니다. 애굽에서 해방만 시키시고 가나안까지는 그들의 힘으로 가라고 하여도 감사하며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모압 왕 발락이 발람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발람이 아무리 저주를 하려고 하여도 그 입에서는 축복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로 구속받은 백성은 마치 방탄유리가 둘러쳐져 있는 것처럼 저주가 통하지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또한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추억하라는 것입니다. 옛날을 돌이켜 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에서 가나안에 들어오기까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속량하여 나와서는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이끌고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하시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며 옷이 헤어지지 아니하고 신발이 떨어지지 않도록 친히 이끄셔서 인도하셨건만 그들이 행한 일이라고는 반역을 한 것 외에는 달리 행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결국은 약속의 땅까지 인도하여 내신 것입니다. 이 일을 추억하여 보면 여호와의 의롭게 행하신 일을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고소인 것입니다.

 

 

 

오늘 이 고소를 우리가 받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친히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주신 것이 우리에게 무언가 부족합니까? 그 아들만으로 감사하며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비록 우리의 상황이 어려움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우리에게 아무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만약 부족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이것저것을 더하여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체질을 아시기에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벼락을 맞게 되거나 벼락출세를 하면 감당치 못하기에 우리의 은혜가 우리에게 족하도록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기 보다는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고소를 받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으로 괴롭게 하였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옛날을 추억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몰랐다면 여전히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이 세상의 욕망을 따라 살다가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느냐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짐승들도 하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고소하는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행하였느냐? 무엇을 괴롭게 하였느냐?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친히 인도하여 가나안까지 들여 놓았는데 이 일들을 추억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의롭게 행하신 것을 알리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반역과 하나님의 의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원망의 입을 닫고 주님의 십자가를 감사하며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미가 6:6-8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  2005. 4. 6.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강원도에 산불이 나서 천년된 사찰도, 불을 끄려고 간 소방차도 불에 타버린 무서운 불의 위력을 보았습니다. 그 불을 보면서 지난주에 고린도전서 3장에서 불로 공력을 나타낸다는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라고 말씀하시고(신4:24, 히12:29),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을 던지려고 오셨다고(눅12:49)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세상은 불살라지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벧후3:7).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을 불살라 버리시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범죄한 인간에게서 나온 모든 것들을 다 불태워 버리시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만 남기시려고 불태워 버리시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어떤 죄악들이 나오는지를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죄가 무엇인지 지난주에 하나님의 고소를 보았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지난날을 추억해보라는 것입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잘못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과 인도와 보호를 받은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의롭게 행하신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듭거듭 반역한 것만 남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당해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고소에 응답을 해야 할 차례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6-7절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일년 된 송아지 번제물,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인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위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라고 묻습니다.

 

 

 

무엇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이 말씀과 상관없이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신다고 들어왔습니까? 우리가 직접 전도나 선교를 하지 못해도 무엇을 하면 된다고 들었습니까? 헌금을 하면 대신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돈을 많이 바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어왔습니까? 이제 그런 이야기들은 어느 정도 식상해졌습니다. 이제는 자기 몸의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봉사와 구제만이 아니라 문화활동, 서비스까지 교회에서 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몸의 열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런 것들은 아니라고 합니다. 가장 귀한 제물인 일년 된 송아지 번제물, 엄청난 양의 희생제물, 강물 같은 기름, 그보다 더 귀한 내 맏아들, 아니면 내 몸의 열매, 이 모든 것을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율법에서 정하여 놓은 내용인데 왜 그런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실 수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1:10-17절을 봅니다.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러한 말씀은 모든 선지자들에게 다 찾아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인간이 행하는 제사나 번제나 희생의 제물, 절기를 지키고, 분향을 하는 것들이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희생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희생당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들의 삶에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나는 삶이어야 하는데 그들의 삶에서는 학대와 착취를 일삼으면서 하나님께 제물드림으로 그들의 악한 행위를 더욱 공고화하려고 한다는 책망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얼마든지 이러한 모양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삭이 늙어서 고기를 좋아하여 에서에게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오면 축복하여 주겠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오늘 우리들이나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저 늙고 탐욕스러운 늙은이처럼 고기나 가득 채워주면 만족하여 복이나 주는 그런 하나님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이 바치면 복을 받는다는 식입니다. 이제는 그런 말도 아주 세련되게 합니다. 몸의 열매를 이야기하면서 사회적인 선행이나 구제로 기쁘시게 하자는 식입니다. 성당에서는 사회구제가 많으니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기들의 욕심만 채우니 싫어한다고 합니다. 둘 다 다를 바 없는 자기들의 욕심 채우기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손에서 무엇을 받아서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이미 알려주셨습니다. 희생의 제사를 드리게 하심도 그 제물 드림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흠 없는 제물의 희생을 통하여 죄인이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공의를 알고 인자를 알기에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미 다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을 알지 아니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셨는데도 그들은 자기들이 행할 수 있는 제물드림으로 대체하여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자기들이 의롭다고 여기고 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는 것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에서 유대인들이 생각해낸 것은 무엇을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셨는지, 하지 말라고 하셨는지를 조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켜내겠다는 것입니다.

3세기경에 유대랍비 samlai라는 사람이 율법에서 613가지의 계명을 찾아낸 것입니다. 365가지의 부정적 명령과 248가지의 긍정적인 명령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조문들을 다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최초의 명령이 무엇이겠습니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인공적인 단산을 한 사람들 모두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은커녕 저주가 와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고방식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고 있으니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이 자기들의 행위를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잘못된 것이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하는 것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예레미야 7:8-11절입니다. “8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9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전에 와서 이것이 성전이라고 하면서 제물을 바치는데 그들이 왜 성전에 와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까?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평소에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도적질, 살인, 간음, 거짓맹세, 바알에게 분향하며 사는 것입니다. 바알은 풍요와 다산의 신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성공이나 부를 쫓아 살면서, 또 성전에 와서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적의 소굴입니다. 이러한 선지서의 내용과 오늘 한국의 교회들과 과연 무관한 내용입니까? 아니 오늘 우리와 무관한 내용입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미 알려 주셨습니다.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헤세드’라는 말인데 ‘언약적 사랑’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다고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은 이와 정반대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당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어도 인간이 행할 능력이 없는 것이 증거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것을 보여 주어도 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그 성취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께서 다 완성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공의를 행하지 못합니다. 공의를 행하기보다는 사사로운 이익을 쫓아 행하는 것입니다. 이 사회가 공의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든 선과 악의 개념에서 나오는 공의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의란 결국 인류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신 분은 예수님뿐이십니다. 우리는 인자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사랑하셔서 죽기까지 그 언약에 충성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하지 못합니다. 아담의 후손이기에 끊임없이 교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을 통하여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밝히신 것입니다. 이제 새 언약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요6:29).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말하는가 하면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자기가 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 한번만으로 끝나고 그 뒤에는 나의 행함만 남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믿음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히11:6).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이 모두 죄입니다(롬14:2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

 

 

 

그 보내심을 입은 분이 하나님의 언약을 다 완성하셨습니다. 그 분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자신의 그 어떤 가능성을 믿지 말고 예수님을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주님을 믿고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 아멘.

 

 

 

 

 

미가 6:9-16  심판 선고  2005. 4. 13.

 

 


9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찌니라 10 악인의 집에 오히려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11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12 그 부자들은 강포가 가득하였고 그 거민들은 거짓을 말하니 그 혀가 입에서 궤사하도다 13 그러므로 나도 너를 쳐서 중히 상하게 하였으며 네 죄를 인하여 너를 적막하게 하였나니 14 네가 먹으나 배부르지 못하고 속이 항상 빌 것이며 네가 감추나 보존되지 못하겠고 보존된 것은 내가 칼에 붙일 것이며 15 네가 씨를 뿌리나 추수하지 못할 것이며 감람을 밟으나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를 밟으나 술을 마시지 못하리라 16 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행위를 지키고 그들의 꾀를 좇으니 이는 나로 너희를 황무케 하며 그 거민으로 사람의 치솟거리를 만들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내 백성의 수욕을 담당하리라.

 

 

 

법원에서 날아온 고소장을 받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법원, 검찰 이런 소리만 들어도 위압감을 느낍니다. 만약 고소장이 날아오면 법원 쪽의 아는 사람이 있는지를 알아보면서 대책을 마련하기에 고심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고소를 받고서도 무덤덤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고소라고 여기지 말고 바로 오늘 우리를 위한 고소라고 여기고 이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2주전에 ‘하나님의 고소’라는 제목으로 6:1-5절까지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말해보라고 하셨습니다. 할말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만 증거된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속량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발람의 저주를 막아내시고 가나안 땅에까지 들여놓으신 것입니다. 과거를 추억해보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의로운 일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6-8절까지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일년 된 송아지 번제물, 천천의 수양, 강수 같은 기름, 자신의 맏아들, 자신의 몸의 열매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한 것을 알려주어도 선을 행할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봅니다. 9절에서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십니다.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것은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매를 드시는 것은 심판의 목적이 아니라 순종하게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1:4-6절을 봅니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자식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부모가 울면서 매를 드는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를 드는 것은 고치고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맞았는데도 그 맞은 곳이 아물다가 또다시 맞아서 새로 생긴 상처뿐인데도 돌아오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얼마나 순종하지 않는지를 보여주는 시범 케이스인 것입니다.

 

 

 

10-12절입니다. 범죄의 구체적인 예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하신 뜻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악을 일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불의한 재물이었습니다. 어떻게 모았기에 불의한 재물이 되었습니까? 되를 속이고 저울을 속이는 것입니다. 되질과 저울질을 교묘하게 속여서 불의한 이익을 챙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강포가 가득하고 그 거민들은 거짓을 말하므로 그 혀가 궤사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백성들이 범죄하게 된 것은 15절에서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의 행위를 지키고 그들의 꾀를 좇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남쪽의 유다 백성들이 다윗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북쪽 이스라엘의 범죄한 왕들의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다윗을 따르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고 오므리와 아합을 따르는 것이 그들에게 매력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오므리가 반역하여 왕권을 차지하고서는 여로보암의 뒤를 따랐다고 합니다. 여로보암은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면 그의 왕위가 오래 가리라고 선지자로 하여금 들었지만 언약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에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이스라엘을 구원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그곳에서 제사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북 이스라엘의 죄악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보암의 뒤를 따른 오므리이며 그의 아들이 아합인 것입니다. 아합 시대에는 국가에서 월급을 받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이 850명이나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우상숭배를 지금 예루살렘 백성들이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예루살렘 백성들이 다윗의 율례를 버리고 오므리와 아합의 율례를 따르는 것입니까? 다윗은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만을 바라보았기에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의 왕들이 섬겼던 신들은 이 세상의 보암직한 것들, 세상의 영광을 제시하기에 그것을 쫒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요 비밀이요 약속인 십자가의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앞에서 우리의 죄가 고발 받고 주님의 긍휼만 바라보게 하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도 보암직하게 살고 싶고 하늘나라에서도 당당하게 살고 싶은 것이지,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인데 주님의 은혜로만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하는 것은 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말로 해도, 매를 들어도 듣지 않을 경우에 최종 심판이 선고되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내용은 13-16절입니다. 13절에서 ‘그러므로’ 라고 합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이 계속 범죄함으로 심판을 선고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중하게 쳐서 적막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한때 불의한 재물로 부자가 되었다고 흥청거렸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심판하심으로 적막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먹으나 배부르지 못하고 속이 항상 빌 것이라는 것입니다. 감추나 보존되지 못하고 보존된 것은 칼에 붙이신다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나 추수하지 못하고, 감람을 밟으나 기름을 바르지 못하고, 포도를 밟으나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황무케 하여 그 사는 곳이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수욕을 담당하리라는 심판의 선고입니다. 이러한 선고는 율법대로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28:33절. “네 토지 소산과 네 수고로 얻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 민족이 먹겠고 너는 항상 압제와 학대를 받을 뿐이리니”. 신명기 28:36-40절. “36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37 여호와께서 너를 끌어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램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38 네가 많은 종자를 들에 심을지라도 메뚜기가 먹으므로 거둘 것이 적을 것이며 39 네가 포도원을 심고 다스릴지라도 벌레가 먹으므로 포도를 따지 못하고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며 40 네 모든 경내에 감람나무가 있을지라도 그 열매가 떨어지므로 그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이러한 말씀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심판의 선고대로 다 멸망하였습니까? 물론 그들의 범죄한 대로 심판하신다면 진멸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의 언약을 위하여 조금 남겨두셨습니다. 이사야 1:8-9절입니다. “8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원두밭의 상직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미가 6:13절에 보시면 적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성한 과일들을 수확하고 나면 덩그러니 남은 원두막처럼 적막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조금 남겨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법대로 처리하시면, 공의대로 심판하시면 조금이라도 남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남겨두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열조와 맺으신 언약으로 인하여 남겨두시는 것입니다.

 

 

 

미가서 7:18-20절입니다. “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19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20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죄악을 용서하시고, 야곱에게 성실을,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이스라엘의 행위대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언약을 따라 긍휼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약의 율법들을 적용하는 것은 인간이 왜 자기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는지를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구원받고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성실과 인애하심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결국 야곱과 아브라함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실과 인애를 드러내시기 위한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45-47절입니다.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고소는 율법이 합니다. 즉 모세가 고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라는 모세를 믿었다면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세는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글을 믿지 아니하는데 어떻게 나를 믿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발을 받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 우리의 죄악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 신약시대이니 율법과 다른 체계를 만들어 지켜야 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율법주의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계명은 세상과 다른 독자적인 윤리체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의 목적과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사도들이 증거한 내용입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일본을 비판하면서 일본이 세계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따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예수 믿는다는 우리는 무엇을 따르는 사람들입니까?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선고를 듣는 사람들입니다. 그 심판에서 유일한 피난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전도는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심판의 소식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서 어찌 할꼬? 할 때에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의 선고를 받고서 나온 주의 백성들은 더 이상 자기 행함에 기대를 걸지 않고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됨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미가 7:1-7  재앙이로다!  2005. 4. 20.

 

 


1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실과를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2 이와 같이 선인이 세상에서 끊쳤고 정직자가 인간에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3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도다 그 군장과 재판자는 뇌물을 구하며 대인은 마음의 악한 사욕을 발하며 서로 연락을 취하니 4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그들의 파수꾼들의 날 곧 그들의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 5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찌어다 6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 7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미가 선지자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재앙이라고 탄식을 하였습니다. 왜 재앙이라고 탄식하는가 하면 선한 사람과 정직한 자가 없기에 재앙이라고 탄식을 한 것입니다. 선하고 정직한 사람이 있는가 하여 찾아보았으나 여름 실과를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송이가 없고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선인이 세상에 끊어졌고 정직자가 인간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군장과 재판자가 뇌물을 구하고 대인은 마음의 악한 사욕을 발하며 서로 연락을 취하니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가 찔레 울타리보다도 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파수꾼들, 즉 선지자들이 예언한 형벌의 날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재앙의 날과 심판의 날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3:10-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0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11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12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니 재앙이 오지 아니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예루살렘에는 선한 사람이나 정직한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의가 없으면 심판이 시행되는 것입니다. 의란 의로운 자에게서 나와야 의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루살렘을 살펴보아도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다 치우쳐서 자기의 사욕만을 쫓아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루살렘을 보는 선지자는 재앙이라고 외치면서 형벌의 날이 다가왔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한 것은 의인 10명이 없었기에 멸망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에 의인 한명만 있어도 예루살렘 성을 사하리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예레미야 5:1절입니다. “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그러나 한명도 없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를 한 것입니다.

 

 

 

에스겔 22:30-31절입니다. “30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고로 31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루살렘의 파괴를 막아서며 하나님으로 멸하지 못하게 막아설 한 사람도 찾지 못하셨기에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선지자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에 의인이 한 사람도 없어서 심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4: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살펴보시기에 단 한명도 의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사람의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미가서 7:1-6절의 내용입니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 형제를 그물로 잡는 것입니다.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며 뇌물과 사욕이 가득한 성읍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친구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품에 누운 여인도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다 파괴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와 대적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는 등 사람의 원수가 곧 집안 식구가 된 것입니다. 이런 세상이 어찌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구약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더 이상 인간에게서는 소망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가 선지자는 7절에서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에게서 그 어떤 선한 것이나 정직한 것을 기대할 수가 없기에 구원의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미가 선지자 자기 자신도 포함이 되어야 합니다.

 

 

 

의인이 한명도 없는 이런 세상에 참된 의인이 오셨습니다. 그 의인을 향하여 인간들이 행한 행위가 무엇입니까? 자기의 형제의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고, 그물로 잡고, 그의 가족조차 배신을 하는 미가 시대의 이러한 악행의 결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미가 시대만이 아니라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에게서 다 나오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악행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0:21-22절입니다.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데 가족들에게서까지 미움과 배척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이런 미움과 핍박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미가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한 죄악의 결과로 인간관계의 철저한 파괴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의의 체제를 종말에 세우신 것입니다. 이 재앙과 형벌의 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시고 그를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은 기존의 모든 인간의 선한 것이나 정직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세상과 그리스도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것은 세상이 수용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하는 내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그의 제자가 되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받을 그 고난의 징표들이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가족간의 불신과 배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믿고서 착하게 살기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예수 믿고서 거듭났기에 윤리 운동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세미나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환경 보호운동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세상이 핍박할 리가 없습니다. 세상이 환영하며 도와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재앙이요 심판이라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34-39절입니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그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미가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의로운 사람이 한명도 없어서 이런 재앙과 형벌의 날이 선포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유일하게 의로우신 분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심판의 구도가 새롭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의 기준은 하나로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느냐 아니하느냐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아비나 어미를, 아들이나 딸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면 합당치 않다고 하십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조차 미워하지 아니하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미가 선지자의 탄식이 나오지 않습니까? 재앙이로다! 재앙이로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이 세대를 보면서, 교회를 보면서, 우리 자신을 보면서 재앙임을 알아야 합니다. 형벌의 날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세대가 바로 재앙의 세대이기에 무엇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미가 선지자는 그 악한 세대 속에서 오직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바울사도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22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 3:8-13절입니다.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도다

 

 

 

곧 심판의 날이 임하게 될 터인데 그러면 이 세상의 것들이 다 불에 타 살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세대를 재앙으로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곧 형벌의 날이 도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의에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간절히 사모하며 사는 것이 이 재앙의 세대에 유일한 위로요 소망인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미가 7:7-13  그의 의를 보리라  2005. 4. 27.

 

 


7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8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찌어다 나는 엎드러질찌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데 앉을찌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9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10 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 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목도하리로다 11 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 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12 그 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 애굽에서 하수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13 그 땅은 그 거민의 행위의 열매로 인하여 황무하리로다.

 

 

 

오늘 하루를 살면서 무엇을 바라보며 사셨습니까? 무엇에 바빠하면서 하루를 보내셨습니까?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39편입니다. “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우리가 바쁘게 살면서 재산을 좀 모으고 다른 것들을 이룬 것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들은 그림자와 같고 헛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5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셀라)” 자기의 인생이 허사임을 아는 사람만이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왜 소망이 주께만 있다고 합니까? 단지 허무하기 때문에 소망을 주께 두는 것이 아닙니다. 8절입니다. “나를 모든 죄과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하소서” 죄에서 건져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구원이나 복이란 어떤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까? 시편 기자가 말하고 있는 헛된 것들이 많아지는 것을 복이라고 여기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에 그런 것입니다. 이 세상이 죄로 인하여 심판받는다고 생각을 한다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복이라고 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건짐 받는 것을 복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 고통당하는 상황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고통당하는 중에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세우고서 바라보라고 합니다. 바라보는 자는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 세상이 죄악의 고통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4-15절을 봅니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들리신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불뱀에 물려서 고통당하는 중에 뱀을 바라본다는 것이 어리석은 모습이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고통을 해소하기 위하여 열심히 살아가는데 최고의 고통이요 저주인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니 누가 바라보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를 바라본다는 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라보도록 만드시는데 무엇에 대하여 절망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인간의 모든 행함에 대하여 고발을 하면서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은 인식시키시고 주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바라보면서 또 엉뚱한 것들을 기대하고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 미가서 7:7절을 봅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미가 선지자는 왜 여호와만 바라보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이스라엘, 그것도 예루살렘 안에 죄악만 가득하기에 그렇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도자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자기의 욕심을 따라 뇌물을 주고받으며 오직 자기 배만 섬기며 사는 세상인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8-9절입니다. 범죄 함으로 인하여 엎드려지고 어두움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자 대적들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선지자는 자기들의 죄를 인하여 심판을 받음이 마땅하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하심에 소망을 두게 됩니다. 비록 엎드려지고 어두움에 처할지라도 주님께서 인도하사 빛으로 인도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적들아 즐거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므로 죄악을 그냥 두시지 않으시고 심판을 하시지만 그 심판의 때가 지나면 광명으로 인도하실 텐데 그러면 내가 그의 의를 보리라고 합니다. 구원 받은 자는 그의 의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그 의가 나타나면 대적들이 부끄러워한다는 것입니다. 대적들이 무어라고 하였겠습니까? 예루살렘 백성들이 적에게 포로로 잡혀가고 나라가 망하게 되니 너희가 여호와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 전능한 여호와가 어디에 있느냐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범죄를 인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 그것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판 중에 있을 때에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하던 자들이 대적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조롱을 받아 왔습니다. 그들의 범죄로 인하여 심판을 당하는 중에 이러한 조롱을 받지만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죄를 사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 79편을 봅니다. “1 하나님이여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으로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2 저희가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며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 짐승에게 주며 3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면에 물 같이 흘렸으며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4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운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5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6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7 저희가 야곱을 삼키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함이니이다 8 우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가 심히 천하게 되었사오니 주의 긍휼하심으로 속히 우리를 영접하소서 9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10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주의 종들의 피 흘림 당한 보수를 우리 목전에 열방 중에 알리소서 11 갇힌 자의 탄식으로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12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훼방한 그 훼방을 저희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13 그러하면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리이다

 

 

 

범죄 함으로 인하여 심판을 당합니다. 주변의 적들이 온갖 조롱을 합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죄를 사하셔서 주의 이름을 인하여 구원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벌을 내려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의를 보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의가 나타나면 적들은 거리의 진흙같이 밟힐 것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의 백성들이 온 세계에서 주께로 돌아오리라는 것입니다.

 

 

 

11-13절입니다. 그 날에는 네 지경이 넓어지리라는 것입니다. 앗수르에서 애굽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 그 당시의 알려진 세계입니다. 그곳에서 주의 백성들이 돌아올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갔던 자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함께 돌아올 것입니다. 나온 그 지역들은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이 예루살렘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미가서 4:1-3절입니다. “1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2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이러한 말씀의 성취는 도대체 언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까? 부분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으로 봅니다만 궁극적인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배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인하여 예배가 일어나는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구원이란 바로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주의 백성들이 온 세상에서 주께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들이 무엇을 보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성취되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죄 없이 죄인들이 받을 조롱과 멸시를 다 받으신 것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지 보자는 조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죄의 심판의 자리에서 또한 주의 구원이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19-22절입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율법으로는 모든 입을 막고 심판 아래 있게 됩니다. 즉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본 미가 선지자의 증거도 구원 얻은 자들이 하나님의 의를 보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의를 증거하면서 심판과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듯이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말하는데 율법과 선지자의 증거를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받게 되는데 그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내신 의가 되는 것입니다. 심판을 다 받아내시고, 그 의를 자기 백성에게 선물로 주시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구원 받은 자는 결코 자기를 자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에게 돌리시면서 자기 백성을 의롭다고 하신 하나님의 의에 돌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구원받은 자들은 이 세상이나 세상의 보이는 것들은 구하거나,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자랑하지 아니합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받음으로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미가 7:14-20  맹세하신대로  2005. 5. 4.

 

 


14 ○원컨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 속 삼림에 홀로 거하는 주의 기업의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 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옵소서 15 가라사대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내가 그들에게 기사를 보이리라 16 가로되 열방이 보고 자기의 세력을 부끄려서 손으로 그 입을 막을 것이요 귀는 막힐 것이오며 17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인하여 두려워하리이다 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19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20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미가 선지자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은 심판과 구원의 내용입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다 그렇습니다만 죄로 인한 심판을 먼저 선포하고서 구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심판을 선고하고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인간이 범죄하고 나서는 자기들의 죄를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죄를 모르는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하면, 자신은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우주만물이, 천지를 창조한 신조차도 자기의 행복을 위하여 존재하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선으로 보고,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모든 것들은 악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이후, 인간의 본성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안중에 없고 자기 영광을 위하여만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죄인을 구원하시기 전에 죄가 무엇인지를 반드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죄를 알고 나면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고 심판받고 멸망 받아 마땅함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때 구원이 선포되면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자기 맹세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임을 알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맹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으로 언약한 내용은 파기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 내용들이 성경에 계시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자기 맹세로 이루어내시는 중에 인간은 무슨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자기 맹세를 인간의 도움이나 협조를 받아서 이루지 아니하시고 홀로 이루어 내셔야 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역할이 인간의 역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후손이 4대만에 이 땅을 차지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자기의 후손도 없는 상태에서 그런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말씀이 성취되는 일에 아브라함이 왜 도움을 주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어 내셔야 하시는지를 보이시기 위하여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부부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사라의 태와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한 후에 이삭을 태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일에 거들어 드리기 위하여 행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는 사람의 솜씨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으로 나오게 됨을 분명하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해서 출애굽하거나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때에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시기 위하여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 애굽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으로 출애굽 하였다면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언약의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서 따라갔겠습니까?

 

 

 

신명기 9:5-7, 24절을 봅니다. “5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외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6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7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24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오므로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것도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도 그들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그 맹세를 이루시려고 들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목이 곧은 백성이라 늘 거역하고 항상 거역한 일뿐입니다. ‘’과 ‘항상’은 가끔이라는 뜻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이 일어났다면 무엇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까? 그들의 의로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기 맹세를 이루시기 위하여 일하신 결과임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16절을 봅니다. 주의 지팡이로 주의 기업의 떼를 먹여달라고 간구합니다. 외로이 버려져서 갈멜산 산림에 홀로 거하는 주의 기업의 떼를 옛날 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여달라고 간구합니다. 바산과 길르앗은 좋은 목초지가 있는 곳이니 그렇게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선지자의 이런 간구가 뻔뻔스럽지 않습니까?

 

 

 

그들의 죄악이란 이미 앞에서 봤습니다.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고,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고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재앙이 임하지 아니하리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을 당해야 마땅한데 오히려 목자가 양을 먹이듯이 인도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선지자는 무엇을 믿고 이런 간구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16-17절입니다.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그들에게 기사를 보여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열방이 자기의 세력을 부끄러워하며 입을 가리고 뱀처럼 티끌을 핥고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이신 여호와께로 돌아와 주로 인하여 두려워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인하여 열방까지 함께 두려워 떨게 되는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5:13-16절입니다. “13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4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15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16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홍해 바다를 건너고 나서 모세가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뜻이나 소원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출애굽으로 인하여 열방이 두려워 떨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구원이 다시 일어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범죄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그곳에서 70년 만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 9:18-19절입니다. “18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바 됨이니이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상황에서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70년의 뜻을 깨닫고서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릎 쓰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처절한 회개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기에 그 언약을 따라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기에 자기들이 간구할 그 어떤 의로움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간구하는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주님 자신을 위하여 구하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그 언약을 믿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철저하게 자기들의 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긍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출애굽을 통하여,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옴을 통하여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이 일어날 때 열방이 두려워 떨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면 무엇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까?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가 아닙니다. 오직 주의 언약을 따라 그의 긍휼하심으로만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을 마귀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전을 쓰는 것입니다. 전적인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로운 행위를 자꾸만 보태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에서 구원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이렇게 분명하게 계시하셨지만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하여 마귀는 이런 활동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맹세를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신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미가 7:18-19절을 봅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에 있느냐고 감탄하는 것입니다. 찬송하는 것입니다. 어떤 주님이시기에 그렇게 찬양하는 것입니까? 죄악을 사유하십니다.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겨버리십니다.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십니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져버리십니다. 죄로 인하여 심판과 저주가 임하는데 그 죄를 하나님께서 해결하여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에게는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주님께서 옛적에 맹세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맹세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약속이 야곱에게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성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인애를 더하신 것입니다. 야곱의 생애를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그가 구원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은 하나님의 성실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람이 아브라함된 것은 하나님의 인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애란 언약적인 사랑입니다. 그 언약적 사랑을 성실하게 지키심으로 아브라함과 야곱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4-55절, 72-74절을 보시면 마리아와 사가랴의 찬송이 나오는데 그 내용이 하나님의 맹세, 즉 아브라함에게 행하신 맹세를 기억하심으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신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됨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구원도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 맹세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너를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신 그 맹세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인 우리까지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오직 주님의 자기 맹세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맹세를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의 죄를 자신이 홀로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그 죄와 죄악과 허물을 몽땅 십자가로 해결하셔서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시고 자기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 맹세하신대로 구원이 일어난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인자와 성실하심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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