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을 맞이하는 신앙
[성경본문] 눅 3:1-6
[헤밍웨이]의 단편 모음집 중에 이런 짤막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페인에 어느 엄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과 사사건건 충돌이 됩니다. 아버지의 시각으로 볼 때에 그 아들이 하는 일은 못마땅합니다. 그건 말도 안 되고 도무지 마음에 드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계속 충돌하는 나머지 이 아들은 집을 나가 버립니다. 가출을 해서 몇 해 동안 방황을 합니다. 아들을 내보내고 아버지인들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아버지는 날마다 괴롭습니다. 그래서 집나간 아들을 생각하며 항상 가슴 아파합니다. 잘못이 있어서, 내보낼 수밖에 없어서, 사람답지 못해서, 소망도 없어서 내보냈지만 아들을 내보낸 아버지는 여전히 괴롭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들을 용서하지 못한 아버지는 단 하루도 편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이 아버지가 집나간 아들을 용서하기로 굳게 결심하고 신문에다가 광고를 냈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파코"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짤막하게 광고를 냈습니다. “파코! 화요일 정오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화요일 예정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정오에 약속한 호텔에 가보았더니 무려 800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이 모였더랍니다. 파코라는 이름이 아주 흔한 이름이라서 그 동안 집나간 아이들이 800명이 모였더라는 그런 얘기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복음을 생각해 봅니다. “아빠는 너를 용서했다.”자, 여기에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여기 무슨 시비가 있습니까? 무슨 이유가 있고, 무슨 변명이 있겠습니까? 아무 변론이 없습니다. “거저 용서했다. 내 사랑으로 너를 용서한다. 내가 너를 다 용서했다. 돌아오라!”여러분, 이것이 복음입니다.
자, 그런데 문제는 이 복음에 대한 예비함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 있어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면 그 복음은 복음 되지 못합니다. 그 복음을 맞아들이는 것,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여러분, 이 파코라는 청년이 아버지의 이 광고문을 보면서 '아버지 웃기누만' 이렇게 생각했다면 어떻겠습니까? ‘이 아버지의 말은 믿을 수가 없어!’그랬다면 어떻겠습니까? 받아들이는 것의 결국은 신뢰 즉, 믿음입니다. 그 아들도 사실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좀 더 참을 걸 아버지로서 마땅히 하는 말씀을 들을걸...’후회하면서 그렇게 몇 해를 함께 괴로워하던 중에 아버지가 다 용서했다는 말 한마디를 전적으로 믿고 감격하여 가슴을 활짝 열고 자기가 잘했느니 못했느니, 뭐 얼마는 잘하고 얼마는 못했느니, 알바가 아니요. 다 지워버리고 그대로 염치없이 아버지께 돌아오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늘 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옵니다. 그런데요 이 돌아오는 일이 중요한 신앙입니다. 그는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아버지의 넓은 마음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찾아왔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버지는 그의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스스로 생각하며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기를“나는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아들의 자격이 없습니다. 아들이라고 부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머슴꾼의 하나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당연하지요! 머슴꾼의 하나만한 자격도 없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이 모든 것을 불구합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 얻었노라. 잔치를 하라!”잔치를 배설합니다. 아들은 체면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 잔치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염치가 없습니다. 뻔뻔합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기뻐하는
마음을 절대로 그렇게 무시할 수가 없고, 아버지의 마음을 다시 섭섭하게 할 수가 없어서 그는 부끄럽지마는 의젓하게, 형이 질투하는 것도 알면서 그 잔치에 앉아서 잔치를 받아먹었습니다. 그런데요 놀라운 것은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가끔 똑똑한 분들이 대개 이렇게 말하데요. “그 예수 믿는 사람들은 좀 뻔뻔하고 체면이 없어!”그래요. “왜요?”하고 물으면“아니 죄지었다고 회개하고 또 죄짓고, 회개하고 또 죄짓고, 다신 안 그러겠다고 또 하고…. 아 그거 평생 그러구 있으니 그 뻔뻔한 거 아니요.”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원래 뻔뻔한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딸이고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겠습니까?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랑 받았고 그 사실을 믿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나 하나만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인 것처럼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여기에 약속이 있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대로 그 엄청난 사랑을 영접하되 자 보십시오.“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한 증거로 네 죄를 내가 대신 지노라.”그리고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을 믿습니다.
이제 성탄절은 그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기를 기다리다 맞이하는 절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성전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복음이 누구에게나 들어지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예비하는 자에게만 주님이 마음에 들어오신 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곳에 모인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성탄하신 주님이 들어오시기를 기원합니다.
그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준비 된 마음이 있어야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주님이 오시는 첩경을 평탄케 하는 자만이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골짜기는 메워져야하겠고, 모든 산은 낮아져야 하겠고, 굽은 곳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는 모든 골짜기가 메워져야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어느 길이든지 반듯한 길을 만들기 위해서는 패인 골짜기를 메워야 길을 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에 주님이 들어오시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골짜기가 메워져야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 골짜기로 움푹 패여 있습니까? 우리 속에 있는 그 어떤 골짜기라도 메워져야 합니다. 좌절과 절망과 불신의 골짜기가 다 메워져야합니다. 주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실 수 있도록 그 메워져야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골이 깊이 패였다.”는 말을 합니다. 이렇게는 주님을 만날 수 없는 일입니다. 감정의 골짜기, 미움의 골짜기, 질투의 골짜기들이 메워지지 않고는 주님을 맞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각자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내 속에 패인 골이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입니까? 이 성탄절에 주님을 만나시기 원하신다면 여러분의 절망의 골짜기를 희망으로 메우시기 바랍니다. 불신의 골짜기를 믿음으로 메우시기 바랍니다. 부정적인 골짜기에 확신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미움의 골짜기에 사랑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소극적인 골짜기에 적극성으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실패의 골짜기에 성공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에 깊이 패인 골짜기를 기도로 메우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메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탄하신 주님을 만나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 모든 산은 낮아져야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높은 산들을 깎아 내려야 주님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교만의 높은 곳을 깎아내어 겸손하게 낮아져야 합니다. 세상을 사는 데는 우리들의 신분, 학력, 재산, 명예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주님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주님 보다 더 귀할 수 는 없는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속에 우뚝 서 있다면 주님께서 자리할 곳이 없습니다. 어찌 주님을 모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오시는 예수, 그 복음을 영접하려면 우리의 마음의 산이 낮아져야 됩니다. 바리새주의적인 교만, 자기 의를 의지하는 교만, 잘났다고 하는 교만, 뭔가 자기가 이룬 것같이 생각하는 교만, 이런 것들이 다 낮아져야 됩니다. 낮아지고 또 한번 또 한번, 땅에 닿을 때까지 낮아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오시는 주님을 바로 영접할 수가 없고 “내가 네 죄를 사했느니라.”하는 이 복음도 내가 낮아지지 않고는 수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데 있어서는 겸손해야 되고 나아가 끝까지 겸손해야 됩니다. 깨끗하게 마음을 비워야 됩니다. 내가 낮아질수록 주님은 높아지는 것이고 그럴 때에야 비로소 높이 계신 주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겸손의 골짜기가 깊을수록 은혜의 봉우리는 높아집니다. 내가 많이 낮아져야만 하나님께서 높아지시는 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신앙인격이 겸손하디 겸손하여 져서 이 성탄절에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한 가지 주님을 볼 수 있는 길은 굽은 곳이 곧아질 때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내 마음의 구부러진 부분과 비뚤어진 부분을 제거하고 곧게 피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굽었다는 것은 매사를 비판하기를 좋아하고, 무조건 적으로 비방하기를 즐기며, 먼저 부정부터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마음을 바로 잡고 곧게 펴야 주님을 영접할 수 있으며 모든 사람들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굽어진 마음, 갈고리 같은 마음, 편견과 오해로 똘똘 뭉친 마음으로는 주님을 절대로 만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다 지워버리고 순전한 마음으로 깨끗하게 주를 영접할 수 있어야 하고 사랑을 영접할 수 있는 자의 수용자세가 분명해야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꼬부라진 마음에서 시작 된 부정적인 요소들은 반드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고 맙니다. 꼬부라진 끝이 어디로 향합니까? 결국은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이거든요. 미워하면 미움이 자기에게로 돌아옵니다. 원망하면 또 다른 원망이 자기에게로 돌아오고 맙니다. 욕을 하면 배가 되어서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이걸 안다면 꼬부라진 마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한 여자가 옥합에든 300데나리온에 해당되는 값진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때 [가룟 유다]가 이 행동을 보고“왜 이런 값진 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데 사용한다면 많은 사람을 구제할 수 있을 텐데...”라고 비난하고 책망을 했습니다. 비단 이 문제만이 아니라 가룟 유다라고 하는 인격이 문제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편견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었던 사람이란 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무엇인들 좋게 보일 리가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못마땅하고 귀찮은 태도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매사를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언제나 돈과 관련하여 평가하는 데만 눈이 초롱초롱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스승 되시는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버리는 인류 최대의 실수를 범하는 범법자가 되고 맙니다. 결국 꼬부라진 마음의 끝이 자기를 찌르고 만 곳입니다.
우리에게 혹시라도 미운 사람이 있거나 미움 마음이 생기면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내 마음이 좁고 비뚤어졌고, 잘못 되었구나.’하며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신을 새롭게 변화 시켜야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습관적인 비방과 비판은 모두를 불행하게 할 뿐만 아니라 모두를 죽이는 행위임을 알아야합니다.
어떤 사람이 가장 아끼는 물건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사람은 그때부터 이웃집 아이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이 밖에 가져갈 아이가 없다고 판단했고 그 이후로 그 아이의 행동이나 말하는 것이 모두 도둑처럼 보였습니다. 인사를 해도, 웃어도, 자주 보여도, 안 보여도 모두가 도적질과 관계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우연히 자기 집을 청소하다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았습니다. 다음 날 그 사람은 이웃집 아이를 보았습니다. 보는 순간 어느 면으로 보아도 아이가 도둑처럼 생기지를 않았고 그렇게 준수할 수가 없더랍니다. 자기가 여태껏 생각했던 도둑의 이미지는 어디를 봐도 찾을 수가 없더랍니다.
우리가 세상을 볼 때나 남을 대할 때 자신만의 판단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봅시다. 의심과 비판으로 꼬부라진 마음은 나도 남도 행복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주님을 우리의 마음속에 모시려고 합니다. 온전히 주님을 모시려면 마음을 공사합시다.
골이 진 마음을 메우시기 바랍니다.
교만해 진 마음을 낮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부러진 마음을 곧게 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며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바라며 무엇보다도 오신 주님을 마음 가득히, 인생 가득히 채우시는 복된 성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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