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을 향해 가는 길 (행 20:13-16)
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14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 15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리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이 시간에 “오순절을 향해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오순절은 구약 이스라엘에서 첫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던 감사의 절기인데 신약에서는 이 날 성령이 강림하셨다는 점에서 영적으로 아주 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절기입니다. 즉 오순절에 첫 곡식을 드렸듯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 영혼이 아름답게 변화 성숙 되어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오순절 신앙이 일어나야 합니다. 오래 믿고 성경지식이 많고 교인 수가 많아도 오순절의 불길이 없으면 능력도 없고 매력도 없고 영향력도 없는 나약하고 흉한 죄의 모습일 뿐입니다. 이 시대에 당면한 여러 문제가 있지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밖에는 다른 대책이 없습니다.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는 해결 됩니다. 교회부흥과 교회개혁도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란스럽기만 할 뿐입니다. 본문은 바울이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하여 발걸음을 재촉하는 장면입니다.
그럼 오순절을 향해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전혀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13절에 오순절을 향한 두 방향의 길이 나옵니다.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그 길은 육로와 수로였습니다. 누가를 비롯한 모든 수행원들은 배를 타고 갑니다. 그러나 바울은 혼자 도보로 가기로 하여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32km를 걸어갑니다.
그러니까 한 길은 함께 가는 길이고 다른 한 길은 혼자 가는 길입니다. 수행원들이라 바울을 모시고 가고자 했으나 바울이 이렇게 하자고 정해 준 것입니다. 지난 밤 철야집회로 잠 한 숨 자지 못하고 심히 피곤한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오순절 안에 도착하기 위해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해상과 육상 두 길은 바로 오순절을 향해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처럼 오순절로 가려면 먼저 수행원들의 모습처럼 해야 합니다. 저는 수행원들의 모습에서 기도의 모형을 봅니다. 그럼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그들이 간 밤에 자지 못해 몸은 피곤했지만 피곤을 이기고 예루살렘을 향한 배를 탔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노동보다 힘듭니다. 그래서 늘 약해지고 부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내를 가지고 이기고 이기며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순풍에 돛을 달고 가는데 혼자 육로로 가겠다는 바울을 모시고 가지 못한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하였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을 구하고 사모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잘 모실까 더 영화롭게 할까 더 기쁘게 해드릴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땅에 성령의 계절이 오게 할까 이 땅의 주인은 주님이신데 하나님을 주로 시인하지 않는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해 안타깝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두 한 배를 탔다는 것은 공동운명체입니다.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을 다해 기도하고 뜻을 다해 기도해야 합니다. 목숨을 다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이 분산 되어 다른 곳에 출장 가 있으면 안 됩니다. 큰 역사를 위해서는 여럿이 합심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기다리던 초대교회는 모여 기도에 전혀 힘썼던 것입니다.
그리고 속히 앞서 가서 앗소에서 바울을 기다렸던 것처럼 성령의 계절이 오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오순절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고 해서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열심히 사모하며 마음을 다하고 합심하여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이 오순절로 가는 길입니다.
2. 열심히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서 궁금한 점은 바울이 오순절을 향해 가면서 쉽고 함께 가는 길을 물리치고 왜 홀로 육로를 택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노중에 교인들을 심방하기 위하여, 밤에 배 타는 것이 괴롭기 때문에, 홀로 여행하고 싶어서, 혹은 유대인의 음모 때문에 등의 추측이 있습니다. 그러나 왜 혼자 그 길을 택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점을 풀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주석가 롱넥커(Longeneker)는 육로로 걷는 중에 하나님과 은밀한 개인적 시간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지지를 받는 학설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이유는 성경이 침묵하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택한 그 길은 하나님과 묵상하기 좋은 환경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말을 걸거나 떠드는 사람도 없고 바다의 풍랑의 위험도 없습니다. 곁에서 이걸 드세요. 저걸 드세요. 이렇게 하세요. 하는 수종자들도 없습니다. 짧은 거리도 아니고 충분히 묵상 가능한 시간입니다. 바울은 혼자 걸어가며 누구에게 구애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찬송했을 것입니다. 지난 밤 죽은 자가 살아났으니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사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살려 주시지 않으셨다면 어쩔 뻔했을까?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통쾌하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걷는 걸음걸음마다 감사요 기쁨이요 찬송이었을 것입니다.
이 바울의 상황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말씀의 묵상이 그러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읽고 또 읽고 듣고 듣고 또 들으면서 “내가 하나님을 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내가 깨달는 것이 참 많구나.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구나 비천한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시다니,,, 아멘 할렐루야” 하면서 노래하며 회개하고 믿고 순종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 없으면 오순절의 일군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을 모릅니다. 하나님을 모릅니다. 회개도 모릅니다. 사명도 모릅니다. 아직 받지 못한 것처럼 아니면 혼자 받은 것처럼 착각합니다. 낙심합니다. 하나님을 구함보다 능력과 축복일변도로 나갑니다. 영 분별하지 못합니다. 겸손도 모릅니다. 자기 위치도 모릅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할수록 악령의 역사 속에 휘말립니다. 그래서 성령 운동하다가 하나님의 영광 가리고 교회를 시험 들게 하고 귀신의 말을 듣고 이단까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알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복음을 압니다. 보혈을 압니다. 회개를 압니다. 은혜를 압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압니다.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사명을 압니다. 영을 분별합니다. 감사할 내용을 압니다. 예수 안에서 주신 은혜를 압니다. 겸손합니다. 순종합니다. 충성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행할 줄 알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릴 줄 압니다. 그래서 보는 말씀마다 기쁨이요 찬송이요 눈물입니다. 이렇게 말씀에서 회개하고 은혜를 받으면 심령이 확 열립니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로 가는 길입니다.
3. 성도가 서로 교통해야 합니다.
14절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앗소에서 바울이 배 타고 앞서간 일행과 만나는 장면입니다. 대단히 반가운 장면입니다. 하루 동안은 외로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크게 문제가 없었지만 뭔가 텅 빈 것 같고 부족했습니다. 바울은 바울대로 혼자였고 수행원들은 수행원들대로 바울이 없으니 허전했습니다. 그러나 앗소에서 만나게 되자 기쁨이 새로웠습니다.
바로 이것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듯 성도의 교통을 보여줍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혼자서 기도하고 말씀 보면 되는 줄 알지만 뭔가 안 되고 부족하고 만족이 없고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교통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기도가 오순절로 가는 가장 중요한 길이지만 성도의 교통도 필요합니다. 앞서 간 사람은 뒤에 오는 사람들을 돌보고 뒤에 오는 사람은 앞선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남의 믿음을 돕는 것은 허비가 아닙니다. 영적 도움을 받는 것도 은혜이고 도움을 주는 것도 은혜입니다. 주면 줄수록 은혜가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의 교통은 예배를 통해서 가장 잘 이루어집니다. 모여 예배만 드려도 심령에 영적 교통이 있습니다. 모이기만 했는데 힘이 생깁니다. 생명의 흐름이 있습니다. 언젠가 어느 은혜의 모임인데 가기 싫었습니다. 교만한 말 같지만 들을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지 않으려고 했더니 주님이 가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갔는데 역시 들을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제 심령이 회복되는 것이었습니다. 믿는 성도가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성도의 교통이라 해서 죽어 천국 간 성도를 불러 기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제가 없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요즘 케이블 TV라든가 천주교 방송 보면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하면서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는 성경의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을 교통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떨어져 있어도 서로 교통하지만 모여 예배하면 더 활발한 교통이 있습니다. 예배하다가 오순절이 옵니다. 안수 받다가 성령 충만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교통은 오순절로 가는 중요한 길입니다.
4. 중단 없이 전진해야 합니다.
오순절로 가는 길은 앗소가 전부가 아닙니다. 미둘레네로 해서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14-15절 “미둘레네에 가서 거기서 떠나 이튿날 사모에 들리고 또 그 다음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이 기록에서 우리는 바울 일행이 오순절 전에 도착하려고 하루도 쉬지 않고 진행한 것을 봅니다.
바울이 들렀던 곳은 당시 로마 귀족들이 찾는 유명한 휴양지(미둘레네)도 있었고, 로마군이 매일 사열하는 군사도시(사모)도 있었고, 상업이 발달하여 물품이 풍부한 무역항(밀레도)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희귀한 볼거리였습니다. 군사도시만 해도 그렇습니다. 역사가 요세퍼스도 로마군대의 사열식에 대해서 희귀한 볼거리로 소개했습니다. 지금 이런 부대 한 부대만 있어도 큰 관광자원이 될 것입니다. 바빠도 몸도 풀 겸 잠시라도 머물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순절 안에 도착하기 위하여 계속하여 전진에 전진을 계속했습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오순절의 역사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전진하라는 교훈입니다. 부흥의 역사는 하루아침에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량이 차야 합니다. 기도의 분량이 차야 합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120문도들이 열흘간 전무하며 하나님 경외했고, 1907년의 평양 대 부흥도 계속하여 기도한 결과였고, 역사 이래 모든 부흥도 기도의 결과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오늘 성령 충만해도 내일 또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이런 계속적이고 연쇄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운동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5. 시험도 이기고 전진해야 합니다.
16절 "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바울이 왜 에베소를 들르지 않았을까요? 행20:3에도 나와 있듯이 에베소에는 바울을 죽이려는 조직적인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배를 탈 것을 알고 죽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회길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에베소를 들른다면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또 다시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을 태운 배는 에베소에 들르지 않고 에베소 만의 입구를 가로질러 기오에서 사모로 행하는 직선 항로를 택한 것입니다.
무엇을 교훈해 줍니까? 오순절로 가는 길에 어떤 일이 있어도 시험에 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성령의 사람들을 좌절시키기 위해서 온갖 방해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반드시 마귀의 공작이 있습니다. 영의 일을 하는 사람은 이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에 들르면 큰 일납니다. 사건에 휘말려 들게 되면 사역을 그르칩니다. 뛰어내려 싸우고 싶어도 직선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배를 대라고 손짓해도 귀를 막고 앞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 성령의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질고와 환란 등 험한 시련은 물론 밖으로도 무수한 오해와 모함을 당했습니다. 일제시대 김익두목사를 중심으로 얼마나 부흥운동이 강했습니까? 그러나 1923년 총회에서 "금일에는 이적(異蹟)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라고 규정된 장로교 헌법 3장1조에 의해 김익두의 부흥회는 고비를 맞았습니다. 그가 여는 부흥회는 교회 내 지식계층의 비판을 받기 시작했고 공산주의 계열이 주도하는 반기독교운동으로 그의 부흥운동은 급격히 냉각상태로 빠져들었습니다.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종로경찰서에서 15일간 극심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으며 과수원에 가두고 목사직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는 등 어려운 시련을 당했습니다. 그래도 오순절을 유지하는 방법은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시험에 들지 말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오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성령이 임해야 완전한 믿음입니다. 성령이 임해야 부흥이 옵니다. 성령이 임해야 세상이 달라집니다. 우리 모두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고 예배와 사랑으로 교통하며 하나님을 경외함에 전무하고 앞 만 바라보고 어떤 시험도 다 이겨 이 시대의 부흥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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