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 골로세서 3:15-17
옛날에 어느 성문 곁에 지혜로운 노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와서 묻습니다. "할아버지! 이곳 살기 좋습니까? 한번 정착해 볼까 해서 와 봤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묻습니다. "자네! 전에 살던 곳은 살기 괜찮았는가?" "네. 괜찮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노인이 말합니다. "이곳도 살기 괜찮은 곳이네."
얼마 후에 다른 청년이 와서 묻습니다. "할아버지! 이곳 살기 좋습니까?" 노인이 역시 묻습니다. "자네가 전에 살던 곳은 어땠는가? 살기가 괜찮았는가?" "아주 지옥 같은 곳이었죠."
그 말을 듣고 노인이 말합니다. "이곳도 아주 지옥 같은 곳이네."
이 세상은 다 그저 그렇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갈립니다. 같은 환경에서 어떤 사람은 행복하지만 어떤 사람은 불행을 느낍니다. 그처럼 행복은 환경이 결정하지 않고 감사하는 태도가 결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두 가지 말을 잘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미안하다는 말이고, 또 하나는 고맙다는 말입니다. "그 동안 내가 못해주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하시고, "당신이 잘해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시길 바랍니다. 고맙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은 가장 위대한 천국 언어입니다. 감사 언어를 가지고 있어야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환경이 어떠하든지 감사의 심령으로 보면 그 심령에는 천국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불평의 마음으로 보면 그 심령은 고통과 불행에 휩싸이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행복이 좌우됩니다.
경제학자 죤 카우스키의 저서 "신생국가의 경제성장"이라는 책에서 그는 "인간들 마음 속에는 항상 불만족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는데, 이와 같은 심리를 "상승 기대 혁명의 심리"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경제생활이 과거에 비하면 괄목한 만큼 성장했음에도 항상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 불만을 토로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생활수준이 나아졌어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상대적 빈곤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비하여 경제수준이 향상되어 절대적 빈곤은 사라졌지만 남보다 못하다고 하는 상대적 빈곤 때문에 불만이 계속 남아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를 가리켜 "더(more)"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돈(more money), 더 좋은 집 (more house) 더 좋은 차(more car), 더 큰 행복(more happy)"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더, 더"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있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自足(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당부했습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감사하는 생활은 그것 자체가 벌써 축복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본문 말씀은 바로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문 15절 하반 절에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 있고, 16절 하반 절에도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는 말씀이 있고, 17절에도 "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세 번이나 "감사하라"는 말씀이 반복되어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주장하게 해야 합니다.
본문15절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케 하라"했다 마음은 인격의 좌소요 삶의 뿌리이기도 하며 생명의 근원입니다. (잠4;23) 마음먹기 여하에 따라 그의 삶이 감사의 동산이 될 수도 있고 불평 불만의 시궁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데모크리토스는 말하기를" 행복과 불행은 모두 마음에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려면 먼저 마음이 평안해야 합니다. 마음이 평안하지 않은데 감사가 나옵니까? 성도들이 감사의 생활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평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얻어지는 평안은 일시적이고 환경이 바뀌거나 조건이 바뀌면 즉시 평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으려면 깊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습니다. 보십시오 아무리 큰 풍랑이 몰아쳐도 바다가 깊으면 깊은 바다 속은 고요하기 마련입니다. 성도의 마음은 깊어져야 합니다.
마음이 얕은 사람은 조그마한 일에도 기뻐하다가도 얼마 후면 조그만 일에 낙심하고 슬퍼합니다.
에스겔 37장에 네 종류의 바다가 나옵니다. 첫째는 발목에까지 차는 바다요 둘째는 무릎까지 차는 바다요 셋째는 허리까지 차는 바다입니다. 넷째는 너무나 깊어서 헤엄쳐야만 건널 수 있는 바다가 있다고 했습니다. 성령에 이끌려 가는 성도는 발목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점 더 깊은 은혜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마음의 바다가 깊어집니다. "내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곳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 가운데 가보라."(찬408장)
성령이 이끌어주는 대로 은혜의 깊은 바다에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우리의 마음도 깊어지고 평안을 얻게 됩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깊은 마음을 가지면 어떤 어려움을 겪어도 평안한 마음을 갖습니다.
월간고신 11호에 박선일 집사의 감사에 대한 글이 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습관성 유산으로 계속 아이를 유산시키다가 4년 만에 겨우 아이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3살 되던 해에 엄마와 함께 교통사고를 겪어 하늘나라로 보내고 말았습니다. 박집사는 몸부림치며 절규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절망 중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고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다보니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남편이 경영하는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하여 사업 터를 크게 확장하였습니다. 그러나 IMF 한파로 부도를 맞아 막대한 손해를 입고 빈 털털이가 되었습니다. 박집사는 낙심에 처한 남편을 위로하며 감사하며 살자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남편은 벌컥 화를 내며 철없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남편은 마음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박선일 집사의 마음은 이미 성령님께 이끌려 깊은 마음 속의 평안을 누리고 살았기에 남편을 잃고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깊은 마음을 가져야 언제나 평안한 마음을 잃지 않으며 항상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감사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요, 인위적으로 감사의 생활을 엮어 갈 수 없습니다. 성령님이 이끌어 주셔서 깊은 마음을 가짐으로 평강을 유지하며 살고 이런 마음에서 비로소 자연스럽게 감사하게 됩니다.
성령님 즉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강만이 어떤 조건 속에서도 감사하게 만듭니다. 심지가 굳고 깊은 마음을 가져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케 하여 감사하는 성도가 됩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할 때 감사하게 됩니다.
16절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곶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난하면 다른 사람을 후하게 대접할 수 없어 자연 인색해 지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말씀으로 부요해 질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른 영혼이 감사할 수 있습니까? 말씀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 넉넉한 마음을 가짐으로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암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우리 주변을 살펴보세요. 물질은 넘쳐나는데 왜 사람들이 헐떡거리며 살아갑니까? 저들의 영혼이 주리고 목마르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아모스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말세가 되면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요 마실 물이 없어 갈 함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갈증을 느끼며 살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성경이 없어 성경을 읽지 못하여 주리고 목말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이 안 계셔서 말씀을 듣지 못합니까? 성경은 한 집에 몇 권씩 꽂혀 있고 대한민국에는 술집 다음으로 교회가 많이 서있고 수 만 명의 목회자들이 있는데 왜 영혼들이 말씀을 듣지 못하여 주리고 목말라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일평생 성경 한 권 읽지 않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열 명 중 아홉이나 되고 사람들이 말씀을 멀리하니 강단에서 외치는 목회자들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귀가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설교만을 하다보니 성도들이 말씀 충만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말씀 충만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감사 충만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감사 충만이 없으면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다 보면 때때로 많은 말씀을 듣기 때문에 듣는 귀가 발달하기 마련입니다. 아마 2-4년만 교회의 물을 먹게 되면 세상말로 풍월을 읊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씀을 귀로만 들어 가지고는 말씀의 풍성한 은혜 안에 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성도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였습니다. 말로 전하는 것을 편지라고 합니까? 글로 전하는 것을 편지라고 하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려면 육의 心碑(심비)즉 마음에 글을 써 놓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말씀이 머리 속에 지식으로 남는 것이 말씀 충만이 아닙니다.
내 머릿속으로는 말씀을 기억하지 못할 지라도 마음으로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 은혜를 받는 것이 말씀 충만을 이루는 것입니다. 콩나물 시루에 물을 자꾸 부어 주지만 물은 밑으로 다 빠져나갑니다. 그 중의 적은 량의 물만이 콩나물을 적셔 자라게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내 마음에서 빨아들여 내 믿음이 자라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말씀 충만입니다. 말씀을 다 기억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말씀을 마음으로 빨아들이세요. 말씀의 은혜를 받는 성도가 말씀 충만이 이루어지고 이런 성도가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해밀턴은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 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적절한 해석을 했습니다. 1) 구원의 힘을 가진 말씀이다. 2)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말씀이다. 3) 인간의 생명을 보존해 주는 말씀이다 라고 했습니다.
내 믿음이 말씀을 먹고 자라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구원의 힘을 갖게 해 줍니다. 말씀이 내 안에 거하면 성취감을 갖게 하여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합니다. 말씀은 곧 생명입니다.
어느 철없는 어린 소녀가 남자 친구들하고 놀아나다가 임신을 하여 아기를 가졌습니다. 낙태할 기회를 놓쳤기에 원치 않는 아기를 낳아 기르게 되었습니다. 철없는 엄마는 남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아기를 작은 골방에 버려 두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남자 친구와 함께 밤새도록 술 마시고 춤을 추며 지냈습니다. 2-3일 만에 돌아와 보니 젖을 얻어먹지 못한 아기는 그만 기진 하여 죽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은 철없는 엄마가 아닙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거듭나서 새로 태어났는데 말씀의 젖을 부지런히 먹이지 않으면 영혼은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세끼 밥을 먹지 않으면 곤하여 지고 계속 밥을 먹지 않으면 생명을 보존 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생명의 떡인 말씀을 받아먹지 않으면 곤비하여 평안과 감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안에 풍성히 거한다는 것은 말씀하신 주님을 내 안에 모신다는 말도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모셨다는 증거는 내 마음 속에 있는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말씀과 연결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말씀이 내 마음과 행동의 지침이 되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풍성히 거한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이 풍성히 거하면 언제나 그 입술에 감사가 떠나지 않습니다.
주 예수를 힘입어 감사하게 됩니다.
교만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인생을 제 힘으로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기 위하여 오셨으니 우리는 그 분께 우리의 연약한 문제를 맡겨야만 합니다. 교만은 바로 우리를 도우려고 손 내미시는 주님의 손을 뿌리치는 믿음 없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탄의 결박에서 헤어 날 수 없으며 죄의 사슬을 끊지 못합니다. 영생을 얻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지도 못합니다. 주님의 도움이 없이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예수 믿는 성도는 예수를 힘없어 생활해야 합니다. 예수의 도움을 힘입어 행복해 지고 힘들고 어려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면 절로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주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였기에 감사가 없어요. 도움 받은 일이 있어야 감사가 나오지요.
주님은 가장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하여 일부러 아주 가난하고 비천한 몸으로 오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도움을 받으면 경제문제 건강의 문제 자녀의 문제, 세상 살아가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어요.
여러분 혼자의 힘으로 힘들게 살아가려고 하지 마시고 예수는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하여 오셨으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주님께 내려놓고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겠습니다.
독일의 어느 작은 마을에 피아니스트가 살았습니다. 그는 피아노 독주회를 준비하고 지방신문에 광고를 냈는데, 당시의 유명한 음악가인 리스트의 제자라고 자기 소개를 합니다. 물론 거짓입니다. 리스트를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연주회가 있기 며칠 전 리스트가 이 마을에 오게 되었습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거짓이 탄로 나면 음악가로서의 자신의 일생은 끝장나고 마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전전긍긍합니다. 아무리 후회를 해도 이제는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리스트가 마을에 왔을 때, 그는 백 배 용기를 내어 리스트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빕니다. "제가 선생님의 이름을 도용했습니다. 제가 아직 부족함이 많은 피아니스트인 주제에 감히 당신의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러자 리스트가 조용히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당신은 크게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앞에서 한번 연주해보시오." 연주를 시킵니다. 그는 벌벌 떨면서 리스트 앞에서 피아노를 칩니다. 리스트는 연주를 들으면서 중간중간 멈추게 하고 고쳐줍니다. 연주를 마치자 리스트가 그에게 말합니다. "단 한번이라도 내가 당신을 가르쳤으니 이제 당신은 분명히 내 제자입니다. 그리고 연주회에서 당신 연주가 끝나면 제가 한 곡 연주를 하겠습니다. 관객들에게 그렇게 소개하십시오." 그 연주회는 엄청난 기쁨과 영광의 연주회가 되었습니다. 시골 피아니스트는 리스트로부터 용서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의 도움을 힘입어 꽤 괜찮은 피아노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혼자의 힘으로만 하면 서투른 인생의 연주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을 힘입고 도움을 받으면 멋진 연주자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도움을 힘입어 사는 성도는 그의 삶이 풍성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분의 도움을 체험함으로 넘치는 감상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입술의 열매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인들은 감사를"야다"라고 했습니다. 본래 히브리어에는 감사라는 말이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히브리어도로 번역된 단어는 야다 (yada )라고 합니다. "야다"라는 말의 뜻은 "경배하다", "예배하다", "찬양하다"라는 것입니다. 감사가 경배와 찬양으로 귀속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이유는 피조물의 의무이며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경배이며 예배이며 찬양인 것입니다.
히브리어에 나타난 또 하나의 감사라는 단어도 호-드 (hod )라는 말이 있는데 주로 시편에 많이 사용된 단어로서 존귀 혹은 영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 돌리는 것을 감사의 표현으로 나타냈습니다.
본문 16절 중반 절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고 했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죄를 고백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것,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시종일관(始終一貫)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감사하는 마음이 결여된 예배라고 하면 그것은 형식적인 예배에 불과하고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드리는 이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가 넘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103편에 보면 다윗의 감사가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너무나 감사하여 여호와를 찬송하고 축복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다윗의 첫 번째 감사는 하나님이 자신의 허물과 죄를 사하여 주신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영원히 멸망 받아야 할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셔서 영생을 주신 것과 온갖 죄악을 밥먹듯이 저질렀음에도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여 주심에 대하여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의 두 번째 감사는 자신의 무서운 질병을 고치셔서 인생의 파멸에서 고쳐 주셨음을 감사했습니다.
세 번째는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독수리처럼 새롭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이 독수리에게 새로운 날개와 새로운 힘을 주셔서 하늘의 왕자가 되게 한 것처럼 우리에게 새로운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합시다.
주님이 주시는 이 놀라운 감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합니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경배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림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감사제를 드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옛날에 어느 성문 곁에 지혜로운 노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와서 묻습니다. "할아버지! 이곳 살기 좋습니까? 한번 정착해 볼까 해서 와 봤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묻습니다. "자네! 전에 살던 곳은 살기 괜찮았는가?" "네. 괜찮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노인이 말합니다. "이곳도 살기 괜찮은 곳이네."
얼마 후에 다른 청년이 와서 묻습니다. "할아버지! 이곳 살기 좋습니까?" 노인이 역시 묻습니다. "자네가 전에 살던 곳은 어땠는가? 살기가 괜찮았는가?" "아주 지옥 같은 곳이었죠."
그 말을 듣고 노인이 말합니다. "이곳도 아주 지옥 같은 곳이네."
이 세상은 다 그저 그렇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갈립니다. 같은 환경에서 어떤 사람은 행복하지만 어떤 사람은 불행을 느낍니다. 그처럼 행복은 환경이 결정하지 않고 감사하는 태도가 결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두 가지 말을 잘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미안하다는 말이고, 또 하나는 고맙다는 말입니다. "그 동안 내가 못해주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하시고, "당신이 잘해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시길 바랍니다. 고맙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은 가장 위대한 천국 언어입니다. 감사 언어를 가지고 있어야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환경이 어떠하든지 감사의 심령으로 보면 그 심령에는 천국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불평의 마음으로 보면 그 심령은 고통과 불행에 휩싸이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행복이 좌우됩니다.
경제학자 죤 카우스키의 저서 "신생국가의 경제성장"이라는 책에서 그는 "인간들 마음 속에는 항상 불만족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는데, 이와 같은 심리를 "상승 기대 혁명의 심리"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경제생활이 과거에 비하면 괄목한 만큼 성장했음에도 항상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 불만을 토로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생활수준이 나아졌어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상대적 빈곤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비하여 경제수준이 향상되어 절대적 빈곤은 사라졌지만 남보다 못하다고 하는 상대적 빈곤 때문에 불만이 계속 남아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를 가리켜 "더(more)"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돈(more money), 더 좋은 집 (more house) 더 좋은 차(more car), 더 큰 행복(more happy)"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더, 더"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있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自足(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당부했습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감사하는 생활은 그것 자체가 벌써 축복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본문 말씀은 바로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문 15절 하반 절에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 있고, 16절 하반 절에도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는 말씀이 있고, 17절에도 "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세 번이나 "감사하라"는 말씀이 반복되어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주장하게 해야 합니다.
본문15절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케 하라"했다 마음은 인격의 좌소요 삶의 뿌리이기도 하며 생명의 근원입니다. (잠4;23) 마음먹기 여하에 따라 그의 삶이 감사의 동산이 될 수도 있고 불평 불만의 시궁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데모크리토스는 말하기를" 행복과 불행은 모두 마음에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려면 먼저 마음이 평안해야 합니다. 마음이 평안하지 않은데 감사가 나옵니까? 성도들이 감사의 생활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평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얻어지는 평안은 일시적이고 환경이 바뀌거나 조건이 바뀌면 즉시 평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으려면 깊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습니다. 보십시오 아무리 큰 풍랑이 몰아쳐도 바다가 깊으면 깊은 바다 속은 고요하기 마련입니다. 성도의 마음은 깊어져야 합니다.
마음이 얕은 사람은 조그마한 일에도 기뻐하다가도 얼마 후면 조그만 일에 낙심하고 슬퍼합니다.
에스겔 37장에 네 종류의 바다가 나옵니다. 첫째는 발목에까지 차는 바다요 둘째는 무릎까지 차는 바다요 셋째는 허리까지 차는 바다입니다. 넷째는 너무나 깊어서 헤엄쳐야만 건널 수 있는 바다가 있다고 했습니다. 성령에 이끌려 가는 성도는 발목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점 더 깊은 은혜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마음의 바다가 깊어집니다. "내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곳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 가운데 가보라."(찬408장)
성령이 이끌어주는 대로 은혜의 깊은 바다에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우리의 마음도 깊어지고 평안을 얻게 됩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깊은 마음을 가지면 어떤 어려움을 겪어도 평안한 마음을 갖습니다.
월간고신 11호에 박선일 집사의 감사에 대한 글이 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습관성 유산으로 계속 아이를 유산시키다가 4년 만에 겨우 아이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3살 되던 해에 엄마와 함께 교통사고를 겪어 하늘나라로 보내고 말았습니다. 박집사는 몸부림치며 절규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절망 중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고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다보니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남편이 경영하는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하여 사업 터를 크게 확장하였습니다. 그러나 IMF 한파로 부도를 맞아 막대한 손해를 입고 빈 털털이가 되었습니다. 박집사는 낙심에 처한 남편을 위로하며 감사하며 살자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남편은 벌컥 화를 내며 철없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남편은 마음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박선일 집사의 마음은 이미 성령님께 이끌려 깊은 마음 속의 평안을 누리고 살았기에 남편을 잃고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깊은 마음을 가져야 언제나 평안한 마음을 잃지 않으며 항상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감사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요, 인위적으로 감사의 생활을 엮어 갈 수 없습니다. 성령님이 이끌어 주셔서 깊은 마음을 가짐으로 평강을 유지하며 살고 이런 마음에서 비로소 자연스럽게 감사하게 됩니다.
성령님 즉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강만이 어떤 조건 속에서도 감사하게 만듭니다. 심지가 굳고 깊은 마음을 가져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케 하여 감사하는 성도가 됩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할 때 감사하게 됩니다.
16절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곶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난하면 다른 사람을 후하게 대접할 수 없어 자연 인색해 지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말씀으로 부요해 질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른 영혼이 감사할 수 있습니까? 말씀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 넉넉한 마음을 가짐으로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암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우리 주변을 살펴보세요. 물질은 넘쳐나는데 왜 사람들이 헐떡거리며 살아갑니까? 저들의 영혼이 주리고 목마르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아모스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말세가 되면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요 마실 물이 없어 갈 함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갈증을 느끼며 살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성경이 없어 성경을 읽지 못하여 주리고 목말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이 안 계셔서 말씀을 듣지 못합니까? 성경은 한 집에 몇 권씩 꽂혀 있고 대한민국에는 술집 다음으로 교회가 많이 서있고 수 만 명의 목회자들이 있는데 왜 영혼들이 말씀을 듣지 못하여 주리고 목말라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일평생 성경 한 권 읽지 않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열 명 중 아홉이나 되고 사람들이 말씀을 멀리하니 강단에서 외치는 목회자들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귀가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설교만을 하다보니 성도들이 말씀 충만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말씀 충만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감사 충만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감사 충만이 없으면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다 보면 때때로 많은 말씀을 듣기 때문에 듣는 귀가 발달하기 마련입니다. 아마 2-4년만 교회의 물을 먹게 되면 세상말로 풍월을 읊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씀을 귀로만 들어 가지고는 말씀의 풍성한 은혜 안에 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성도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였습니다. 말로 전하는 것을 편지라고 합니까? 글로 전하는 것을 편지라고 하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려면 육의 心碑(심비)즉 마음에 글을 써 놓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말씀이 머리 속에 지식으로 남는 것이 말씀 충만이 아닙니다.
내 머릿속으로는 말씀을 기억하지 못할 지라도 마음으로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 은혜를 받는 것이 말씀 충만을 이루는 것입니다. 콩나물 시루에 물을 자꾸 부어 주지만 물은 밑으로 다 빠져나갑니다. 그 중의 적은 량의 물만이 콩나물을 적셔 자라게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내 마음에서 빨아들여 내 믿음이 자라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말씀 충만입니다. 말씀을 다 기억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말씀을 마음으로 빨아들이세요. 말씀의 은혜를 받는 성도가 말씀 충만이 이루어지고 이런 성도가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해밀턴은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 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적절한 해석을 했습니다. 1) 구원의 힘을 가진 말씀이다. 2)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말씀이다. 3) 인간의 생명을 보존해 주는 말씀이다 라고 했습니다.
내 믿음이 말씀을 먹고 자라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구원의 힘을 갖게 해 줍니다. 말씀이 내 안에 거하면 성취감을 갖게 하여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합니다. 말씀은 곧 생명입니다.
어느 철없는 어린 소녀가 남자 친구들하고 놀아나다가 임신을 하여 아기를 가졌습니다. 낙태할 기회를 놓쳤기에 원치 않는 아기를 낳아 기르게 되었습니다. 철없는 엄마는 남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아기를 작은 골방에 버려 두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남자 친구와 함께 밤새도록 술 마시고 춤을 추며 지냈습니다. 2-3일 만에 돌아와 보니 젖을 얻어먹지 못한 아기는 그만 기진 하여 죽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은 철없는 엄마가 아닙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거듭나서 새로 태어났는데 말씀의 젖을 부지런히 먹이지 않으면 영혼은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세끼 밥을 먹지 않으면 곤하여 지고 계속 밥을 먹지 않으면 생명을 보존 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생명의 떡인 말씀을 받아먹지 않으면 곤비하여 평안과 감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안에 풍성히 거한다는 것은 말씀하신 주님을 내 안에 모신다는 말도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모셨다는 증거는 내 마음 속에 있는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말씀과 연결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말씀이 내 마음과 행동의 지침이 되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풍성히 거한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이 풍성히 거하면 언제나 그 입술에 감사가 떠나지 않습니다.
주 예수를 힘입어 감사하게 됩니다.
교만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인생을 제 힘으로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기 위하여 오셨으니 우리는 그 분께 우리의 연약한 문제를 맡겨야만 합니다. 교만은 바로 우리를 도우려고 손 내미시는 주님의 손을 뿌리치는 믿음 없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탄의 결박에서 헤어 날 수 없으며 죄의 사슬을 끊지 못합니다. 영생을 얻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지도 못합니다. 주님의 도움이 없이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예수 믿는 성도는 예수를 힘없어 생활해야 합니다. 예수의 도움을 힘입어 행복해 지고 힘들고 어려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면 절로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주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였기에 감사가 없어요. 도움 받은 일이 있어야 감사가 나오지요.
주님은 가장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하여 일부러 아주 가난하고 비천한 몸으로 오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도움을 받으면 경제문제 건강의 문제 자녀의 문제, 세상 살아가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어요.
여러분 혼자의 힘으로 힘들게 살아가려고 하지 마시고 예수는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하여 오셨으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주님께 내려놓고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겠습니다.
독일의 어느 작은 마을에 피아니스트가 살았습니다. 그는 피아노 독주회를 준비하고 지방신문에 광고를 냈는데, 당시의 유명한 음악가인 리스트의 제자라고 자기 소개를 합니다. 물론 거짓입니다. 리스트를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연주회가 있기 며칠 전 리스트가 이 마을에 오게 되었습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거짓이 탄로 나면 음악가로서의 자신의 일생은 끝장나고 마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전전긍긍합니다. 아무리 후회를 해도 이제는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리스트가 마을에 왔을 때, 그는 백 배 용기를 내어 리스트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빕니다. "제가 선생님의 이름을 도용했습니다. 제가 아직 부족함이 많은 피아니스트인 주제에 감히 당신의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러자 리스트가 조용히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당신은 크게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앞에서 한번 연주해보시오." 연주를 시킵니다. 그는 벌벌 떨면서 리스트 앞에서 피아노를 칩니다. 리스트는 연주를 들으면서 중간중간 멈추게 하고 고쳐줍니다. 연주를 마치자 리스트가 그에게 말합니다. "단 한번이라도 내가 당신을 가르쳤으니 이제 당신은 분명히 내 제자입니다. 그리고 연주회에서 당신 연주가 끝나면 제가 한 곡 연주를 하겠습니다. 관객들에게 그렇게 소개하십시오." 그 연주회는 엄청난 기쁨과 영광의 연주회가 되었습니다. 시골 피아니스트는 리스트로부터 용서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의 도움을 힘입어 꽤 괜찮은 피아노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혼자의 힘으로만 하면 서투른 인생의 연주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을 힘입고 도움을 받으면 멋진 연주자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도움을 힘입어 사는 성도는 그의 삶이 풍성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분의 도움을 체험함으로 넘치는 감상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입술의 열매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인들은 감사를"야다"라고 했습니다. 본래 히브리어에는 감사라는 말이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히브리어도로 번역된 단어는 야다 (yada )라고 합니다. "야다"라는 말의 뜻은 "경배하다", "예배하다", "찬양하다"라는 것입니다. 감사가 경배와 찬양으로 귀속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이유는 피조물의 의무이며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경배이며 예배이며 찬양인 것입니다.
히브리어에 나타난 또 하나의 감사라는 단어도 호-드 (hod )라는 말이 있는데 주로 시편에 많이 사용된 단어로서 존귀 혹은 영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 돌리는 것을 감사의 표현으로 나타냈습니다.
본문 16절 중반 절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고 했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죄를 고백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것,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시종일관(始終一貫)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감사하는 마음이 결여된 예배라고 하면 그것은 형식적인 예배에 불과하고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드리는 이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가 넘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103편에 보면 다윗의 감사가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너무나 감사하여 여호와를 찬송하고 축복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다윗의 첫 번째 감사는 하나님이 자신의 허물과 죄를 사하여 주신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영원히 멸망 받아야 할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셔서 영생을 주신 것과 온갖 죄악을 밥먹듯이 저질렀음에도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여 주심에 대하여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의 두 번째 감사는 자신의 무서운 질병을 고치셔서 인생의 파멸에서 고쳐 주셨음을 감사했습니다.
세 번째는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독수리처럼 새롭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이 독수리에게 새로운 날개와 새로운 힘을 주셔서 하늘의 왕자가 되게 한 것처럼 우리에게 새로운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합시다.
주님이 주시는 이 놀라운 감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합니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경배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림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감사제를 드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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