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주제설교

새벽설교 종합편8

공 상희 2008. 5. 22. 15:05
 

한 가지 부족한 것  마가복음 10장 17~22절



어느 날 예수님께서 길에 나가실 때 한 사람이 달려와 꿇어앉아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본문은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8절엔 관원이라고 했습니다. 큰 부자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0절엔 청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갖기를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진 사람입니다 “젊음, 물질, 권세” - 이 사람은 좋은 것을 골고루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갈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영생의 문제, 이 영적 기갈은 세상의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 문제를 예수님께로 가지고 나왔습니다.

세상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14:6).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부자 청년 관원에게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말씀을 깊이 묵상하길 원합니다.


Ⅰ. 이 사람이 소유한 것은 무엇인가


1. 젊음입니다.

젊다는 것은 축복이요, 자랑이요, 소망입니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황금의 시절은 바로 청년의 때입니다.

실로 청년은 푸르른 잎이요, 싱싱한 꽃이요, 그윽한 향기요 달콤한 열매인 것입니다 또 젊음은 힘이요, 능력이요, 자랑이요 훈장입니다.

그래서 바이런은 젊음의 때를 “영광의 시절”이라고 했습니다.

괴테는 “젊음은 생명의 빛이라”하였습니다.

세계 제 2차 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독일은 처참하리만큼 폐허가 되었습니다.

이 때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는 그 유명한 “독일 청년에게 고함”이라는 글에서

“전쟁의 폐허에서 조국을 구원하는 길은 경제 발전이나, 공장 건설이 아니라

바로 독일청년의 순결한 정신”이라고 외쳤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젊은 세대의 건전한 정신만이 잿더미가 된 조국을 쓸모있는 나라로 만드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사람은 이렇게 귀중한 인생의 보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젊음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으니 그것이 곧 영생의 문제입니다.


2. 많은 재물을 가졌습니다.

누가복음 18장 23절에 “큰 부자”라고 했습니다.

재물은 그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재물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선용하면 세상과 하나님의 일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보다,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기가 쉽다”고 하신 것은(막10:25),

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이 아니고 재물의 특성상

재물을 많이 소유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재물의 힘은 막강하였습니다.

특히 산업경제가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더욱더 두드러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한 영역이 그만큼 많아진 탓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돈을 올려놓고 그것을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했습니다(마6:24).

사람이 물질에 관심을 가지면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고, 물질을 의지하게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재물을 우리에게 유용하나 결코 선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딤전6:10).

이 사람은 많은 물질을 가지고 있었으나, 물질에 대한 바른 물질관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3. 이 사람은 종교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문 19절에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술에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니 “이것을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철저한 바리새적 율법을 지킨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선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일신상의 어떤 문제를 가지고 예수 앞으로 나오지 아니하고,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인 영생에 대하여 깊은 고민이 없었다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깊은 고민을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사람은 결단력과 용기와 열심이 특출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과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니고데모는 세상의 이목이 두려워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은 일이 있습니다(요3:1).

그러나 이 사람은 대 낮에 만인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심으로도, 용기로도, 힘으로도 안 되는 것은 영혼의 문제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행4:12).


Ⅱ. 무엇이 부족한 가?


본문 21절에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하셨습니다.

하늘의 보화가 무엇인가? 영생입니다.

주님은 부족함이 없는 이 사람에게서 한 가지 가장 부족한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희생입니다. 희생적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에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세상 것 다 가졌는데 예수가 없다면 다 없는 것입니다.

세상 것 다 가지고 있어도 사랑이 없다면 다 없는 것입니다.


그는 큰 부자였는데 그 많은 물질을 나눌 줄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젊음을 주고, 물질을 주고, 권세를 주신 것은 그것을 가지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주신 것입니다(요13:34).


사랑은 희생입니다. 사랑은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 하나님 뜻대로 사용해야하는 것입니다.



Ⅲ. 한 가지가 부족한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1. 하늘의 보화를 잃었습니다.

본문 21절에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화를 약속하셨는데, 이 사람은 하늘의 보화보다 세상의 물질을

선택했습니다.


2. 슬픔과 근심을 얻었습니다.

본문 22절에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띄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11:28).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나온 자는 모두 안식을 얻습니다.

죄 짐으로부터,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런데 단 한사람, 이 젊은 부자 관원은 예수님 앞에 나와서 슬픔과 근심을 얻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슬픔을 안고, 근심을 안고 돌아서는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입니다.


오늘 나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없습니까?

그것 때문에 눌리고, 그것 때문에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다면,

오늘 그것을 모두 떨쳐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는 축복을 안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발의 예찬   로마서 10장 12~15절



B.C. 490년경 페르시아의 다리오왕이 그리스를 침공했습니다.

숫적으로 열세에 있었던 그리스군은 아테네 동쪽 40㎞에 있는 마라톤에서

페르샤 군과 대치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그리스군은 기적적으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기쁜 승전보를 왕에게 전하기 위하여 페이디피데스라는 병사가 40㎞나 되는

거리를 전력 질주하여 왕 앞에 다다라서 “우리는 이기었노라”하는 한 마디 말을

남기고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달려온 42.195㎞가 오늘날 마라톤 경기의 경주 거리가 되었습니다


1936년 제 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했습니다.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고 비통에 잠겨있던 국민에게 손기정 선수의 우승은 2천만

민족의 위로와 큰 기쁨이었습니다.

실로 그들의 발은 기쁨이요 소망이요 자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 보다 더 복되고 아름다운 발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복되고 아름답다고 예찬하는 그 발은 어떤 발인가 ?


Ⅰ. 복음을 전파하는 발이 복된 발입니다.


본문 13절에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하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발이 아름다운 발입니다.


1945년 미국의 원자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투하되었습니다.

미국은 이 원자탄을 투하하기 전에 수차례에 거처 원자탄의 가공할 위력을 알리면서 모든 사람들이 동경 사방 100리 밖으로 피해줄 것을 경고했습니다.

공중에서 살포한 전단을 받아본 일본 사람들은 “아무려면 세상에 그런 폭탄이 있을라구?”하면서 믿지 않은 사람들은 그날 아침 불이 번쩍하는 순간에 사람도, 건물도 다리도, 철도도 순식간에 재가 되고, 엿가락처럼 휘어졌으며, 그 땅엔 10년이 넘도록 풀 한포기 나지 않는 초토가 되었습니다.


노아시대의 물 심판 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로 심판하리라”고 120년 동안이나 경고했습니다.

노아이외의 어느 누구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의 불 심판 때에도 “내일 해뜨기 전에 이 성을 빠져나가라,

내가 불로 이 성을 멸하리라”고 했습니다.

롯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선지자, 전도자, 수많은 교회 강단에서 원자탄 보다 수소폭탄보다 수억 만 배나 되는 하나님의 지옥 형벌이 임한다. 라고 해도 “설마 지옥이 있을라구”

“2천년 동안 오지 않은 예수가 하필이면 내가 살아있을 때 오실라구”하면서

귀 기울이려고 하질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히9:27).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과 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라고 했습니다(계6:12~14).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했습니다(벧후 3:10).


성경은 주님의 재림의 예언으로 꽉차있습니다.

전도자와 교회는 목청을 돋우어 회개와 구원을 왜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것은 그 사람들의 문제라고 합니다.

그들이 멸망 받는 것이 어찌 나 때문이냐?고 합니다.

정말 우리는 그들의 멸망에 책임이 없는 것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주며 살육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치 말라(구원하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겠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달하지 못하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고 했습니다(잠24:11~12).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저들의 영혼이라고 해서 수수방관할 수 있겠습니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하늘에서 울려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막겠습니까?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16:9) 하는 바울의 본

환상과 그 음성을 못들은 척 하겠습니까?

“가라 ! 그렇지 않으면 보내든지 하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음을 들고 영혼을 구하러 달려가는

발이 복되고 아름다운 발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구원 받은 자의 사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입니다.

나를 위하여 내 이웃의 영혼을 위하여 귀하게 쓰임 받는 발이 복된 발입니다.


Ⅱ. 성전에 올라가는 발이 복된 발입니다.


사도행전 3장 1절에 “제 9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매고 오니 -”라고했습니다.

성전으로 향하던 종들은 성전 앞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만나서 그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고 그의 영혼의 병도 치료해 주었습니다.


이사야 58장 13~14절의 말씀에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고했습니다.


왜 주일을 존귀히 여기며 성전으로(교회) 오는 발이 복된 발이 되는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거룩히 구별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출20:11).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한번 먹고 열흘이나 한달을 살수 있도록 창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매일 매일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광야에 내린 만나도 아침마다 거두게 하시고, 엘리야에게 공급하신 까마귀 역사도 아침, 저녁 공급하도록 하셨습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할 사람이 하나님의 제단을 멀리하고

일주일에 한번이나, 2주일에 한번이나 말씀의 양식을 먹고야 무슨 능력으로 살겠습니까?


성경은 “보라 날이 이른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했습니다(암8:11)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 하면 배가 불러도 목마르고 허기지고,

세상 것 다 갖고도 곤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입니다.

Ⅲ. 죄의 길로 가지 않는 발이 복된 발입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119편 101절엔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않았사오며”라고 했습니다.


죄는 속성상 암과 같아서 사람이 죽어야 같이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악에 빠졌다가 회개하고 돌이키는 발걸음도 복되지만,

더욱 복된 발은 가면 안 될 곳에 가지 않는 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살전5:22).


전도하는 발, 선교하는 발 !

성전을 가까이 하는 발 !

죄악의 길에 들어가지 않는 발 !

그 발이 아름답고 복된 발입니다.

인류의 역사 위에 교회의 역사 위에 선명한 발자취를 남기는 복되고 아름다운 발이 되시길 바랍니다.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인생   사도행전 27장 9~20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죄수가 된 바울은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당시 세계의 심장부인 로마를 향하여 압송되고 있었습니다.

배가 지중해 한 복판을 항해하고 있을 때, 지중해에 부는 강력한 북동풍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습니다.

배는 파도에 부딪혀 깨어지고 선원들은 배를 밧줄로 동여매고 배의 기구와 화물들을 모두 바다에 버렸습니다.

열나흘 동안이나 햇빛과 별빛을 보지 못하고 사람들은 물 한 모금,

떡 한 조각 먹지 못하고 요동치는 바람에 떠밀려 바다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본문 20절은 “구원의 여망이 없어졌더라”고 했습니다.


인생이 한 평생을 살아가다보면 때로는 이러한 유라굴로 광풍 같은 역경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나에게 닥친 환란의 이유를 묻는 것입니다. 왜 ? 그것은 우리를 너무나 고통스럽게 하고 때로는 우리의 소망의 불빛마저

꺼져갈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참새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 한다면 우리에게 닥치는 이 돌발사태를 우연히 일어나는 자연 현상일수는 없지 않은가 ?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불필요한 것을 주시거나, 필요한 것을 빼앗아 가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닥친 유라굴로 광풍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만난 유라굴로 광풍은 오늘 성도들이 만난, 인생 풍랑을 해석하는 잣대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 그들에게 유라굴로 광풍이 몰아쳤는가?


Ⅰ. 때를 분변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에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던 시기는 디스리월 15일 - 양력 9~10월 15일 경입니다.

금식하는 절기는 디스리월 15일에 지키던 초막절 절기 때입니다(레23:34).

이 때는 지중해에 계절풍이 불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작은 범선으로 항해하던 당시에는 9월부터 3월까지는 항해하는데 주의를 요하고, 특히 11월부터 2월까지는 지중해 항해가 전면 금지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탄 배는 항해하기에 위험한 11월까지는 아직도 한달반 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미항에서 뵈닉스까지의 짧은 항해야 충분히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고 안이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바로 자기의 코앞에 다가올 큰 위험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사람들도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선지자와 하나님의 종들을 보내셔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느니라”고 했습니다(마3:2).


예수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막1:15).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벧전4:7).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개인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을 예비했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 없느냐”고 하셨습니다(마16:2~3).


바울이 탄 배가 때를 분별치 못하여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것처럼 이 시대의 사람들도, 종말의 때를 분별치 못하여 노아시대의 물 심판처럼,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처럼 하나님의 징계의 매를 맞지 않겠는가?

성경은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했습니다(고후6:2).


Ⅱ. 약간의 불편을 참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에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베닉스에 가서 -”라고했습니다.


바울이 탄 배가 미항에 도착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성경은“풍세가 허락지 않았다”고했습니다(행27:7).

그리하여 예정보다 지체되어 힘들게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미항에 도착하고 보니 이곳은 작은 항구이고, 여러 가지 시설이 미비하여 내년 3월까지 과동하기에는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베닉스라는 큰 항구가 있고 그곳은 그들이 즐기면서 과동하기에 좋은 곳 이였기 때문에 다소 어려움이 있더라도 무리하여 출항을 결행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이것이 죄와 재난의 원이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사도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약1:5).


Ⅲ. 그릇된 다수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본문 11절에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더라”고 했습니


이번 항해에 있어서 백부장은 세 사람의 고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전에도 두 번의 파선 경험이 있었습니다(고후11:25).

바울의 경험으로는 금식하는 절기가 지났으니 행선하기가 위태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 행선이 화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했습니다.

그런데도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는가?

이 배의 선장은 지중해 항해에 풍부한 경험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 호는 애굽에서 제일가는 무역선이었습니다.

웬만한 풍랑쯤은 능히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주는 선주대로, 하루라도 빨리 로마에 닿아야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안락한 곳에서 여가를 즐기면서 과동하겠다는 백부장의 계산이 맞아 떨어졌던 것입니다.

3:1 ! - 다수결의 원칙 ! 민주주의를 하는 데는 다수결의 원칙은 포기되어서는

안 될 원칙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다수결의 역기능에 대하여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찬성하느냐? 가 아니고 얼마나 정확하게 보았느냐? 얼마나 옳은 판단을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가나안을 정탐한 열 사람은 세상눈으로 판단하고,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은 영의 눈으로 판단했습니다(민14:9).

Ⅳ. 때 아닌 남풍에 속았습니다.


본문 13절에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았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미향이 불편하여 뵈닉스로 가고자 결정했는데 “마침” 때아닌 남풍이 순하게 불었다 - 고 했습니다.

겨울이고, 계절풍의 때이니 - 동풍이나 북풍이 불었더라면 출항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미침, 남풍이 순하게 부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 “마침”에 걸려 넘어지곤 합니다.


요나가 욥바 항으로 가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득의한 줄로 알고 배에 올랐습니다.

이것이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 까지 들어가는 대환난의 원인이었습니다.


오늘 바울이 탄 배도 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므로 득의한줄 알고, 손뼉 치며 미항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여”라고 했습니다(14절)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라고 했습니다(약4:14).

그런데 우리는 종종 세상 쾌락의 남풍과 번영의 순풍에 유혹을 당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먼저 부드러운 쾌락의 남풍으로 속이고, 달콤한 번영과 행복의 순풍으로 손짓하며 유혹합니다.

경성하십시다. 갑자기 찾아온 행운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요동치는 폭풍의 속에서도 기도했던 바울처럼, 순경 중에도, 역경 중에서도 기도로 승리하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위대한 하나님 말씀의 영광   요한복음 5장 39~44절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책인 동시에 인간에 관한 책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이야기도 없으며, 인간과 관계없는 하나님의 기사도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창조물의 대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생을 “땅위에서 흙(육체)의 장막 안에 살도록 지음 받은 작은 신들”이라고 예찬했습니다(고후5:14).


이 위대한 신적 창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6, 17절의 말씀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하느니라”고 했습니다(딤후3:15).

하나님은 말씀 자체로 계셨습니다(요1:1). 그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요1:3, 히1:3). 그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경영하고 계십니다(히1:3).


구약은 율법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약은 복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성서 주일을 지키면서 "위대하신 하나님 말씀의 영광"에 대하여 생각하길

원합니다.


Ⅰ. 성경은 영원히 살아 있는 말씀이므로 영광스러운 책입니다.


이사야 48장 8절의 말씀에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기록한 책은 한때는 잘 팔리며,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기도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시간이 흐르면 서점의 뒷줄로 밀려나고,

결국은 우야무야 먼지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기록된 책이고,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시간이 갈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날로, 날로 그 영광을 더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이고 인간의 역사가 존재하는 한 그 말씀은 더욱더 흥황하여 갈 것입니다.


프랑스의 계몽철학자 볼테르는 자신 있게 예언하기를 “앞으로 100년 후에는 대영 성서공회에서 찍어내는 성경을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후 그의 집은 영국 성서공회의 성경을 찍어내는 인쇄 공장이 되었고, 1930년 한 해 동안에 성서공회는 643개 국어로 된 성경을 1200만부를

발행했습니다.

유사이례 수많은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도전해 왔지만 아직도 성경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건재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 그토록 찬란하던 아름다운 예루살렘성전은 이 땅에서 없어졌지만 그 곳에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렇게 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위대한 책의 영광은 영원히 살아 있는 그 말씀의 생명력에 있습니다.


Ⅱ.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이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본문 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계시라는 뜻의 헬라어 “아포칼류시스”라는 말은 “은밀한 곳을 드러내 보이다,

가려진 곳을 벗겨내다”란 뜻입니다. 열계(啓), 보일시(示)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 영생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며, 인간의 구원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만물과 세상의 역사, 인간의 양심들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부패한 인간의 본성은 자연 계시로서는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직접 인간에게 말씀하시므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기록하게 하시므로,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노력이 곧 특별계시로서의 신구약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책에 천지창조로부터 인간의 구원, 천국과 지옥,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을 섬기는 법, 세상을 사는 법, 모든 것을 자세히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신앙과 삶의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Ⅲ. 성경은 유일한 구원을 계시한 책이므로 영광스럽습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5절에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1493년 컬럼버스는 세척의 범선을 이끌고 대서양을 항해했습니다.

그의 목적은 인도에 가는 새로운 항로를 발견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무턱대고, 항해를 계속하던 그들은 인도로 가는 항로는 발견하지 못하고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천국에 가는 길을 찾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캄캄한 항해를 무턱대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에는 천국에 가는 길과 천국에 가는 방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분을 구주로 믿고, 그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습니다(롬10:13).

구하면 주시고, 찾으면 찾고, 두드리면 천국의 문이 열립니다(마7:7).


Ⅳ. 성경은 사후의 생명에 대한 약속이 있으므로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14:3).


죽음 후에도 생명이 있는가?

이 질문은 이 세상을 살다간 수많은 인생들의 궁극적인 명제였습니다.

그런데 꼭 한 곳! 성경에 이 문제의 명쾌한 해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있다”입니다.


어떻게 이 난제 중의 난제인 사후의 세계에 대하여 이토록 명쾌한 해답을 주고 있는가?

그것은 ! 하나님만이 인생의 미래에 대하여 확실하게 아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롬10:11).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롬10:9~10).


이 위대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하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만 만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고, 영생 복락을 누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인간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영원한 죽음아래 있는 인생들을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원과 영생의 길로 초청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3··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롬8:38).


성경은 확실한 천국의 초청장이며, 천국 열차를 타는 티켓입니다.



















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장 18~25절



“십자가의 도”란?

“십자가에 관한 말씀, 십자가를 통하여 받은 구원진리” - “복음”이란 뜻입니다.

본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왜?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복음이 미련하게 보이는가?

그들은 철학적이고 아름다운 변론을 가장 고상하고 고귀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상사신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 받는다”는

복음의 말씀은 어리석은 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멸망 받는 자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그 진리가 구원을 얻는 성도들에게는 실제로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롬1:16).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신실하시기 때문에, 그의 약속대로 자기의 백성을 반드시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는 기독교의 상징 일뿐만 아니라, 부활과 더불어 기독교 복음의 Α. Ω.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기독교! 십자가가 빠진 복음! 십자가가 없는 교회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생각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십자가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그의 정신, 그의 인격의 초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를 이해함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으며, 이 십자가를 알지 못하고 기독교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 십자가 구원! 십자가 복음을 깊이 묵상하며 은혜 나누길 원합니다.


Ⅰ. 십자가의 도는 구원의 도입니다.


본문 18절에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며”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4절에 “그의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사 십자가를 지심은 무엇보다도 죄와 비참에 빠진 인생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습니다(엡2:1) 여기에 전제되는 것은 인간이, 죄와 허물로 인하여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불순종의 죄를 범하므로, 모든 인류는 범죄하게 되었고, 죄로 인하여 죽음이 왔습니다(롬6:23).

그러나 죄와 허물로 죽어서 비참에 빠진 인생을 구원할 자는 세상에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롬3:10).


왜 ? 모두다 죄악에 휩쓸렸고, 모두다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내 스스로 내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무능한 실존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롬3“23~24).


성경은 우리에게 행위의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했습니다(계20:12).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심판! 여기에 그리스도의 대속, 여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요청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이 죄 문제를 해결하고,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베들레헴 말구유로 오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의 시간 속으로 오시고, 인간의 역사 속으로 오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하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했습니다(사53:5).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께서는 속죄 구령의 대업을 완수하고자 십자가를 지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고로 기독교 복음! 십자가의 도는, 구속의 진리가 핵심이며 으뜸입니다.

Ⅱ. 십자가의 도는 화목의 도입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6절에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를 화목케 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드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함이라”고 했습니다(요일2:2).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했습니다(요일4:10~11).


죄악이 세상에 들어옴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원수의 사이가 되었습니다.

죄악으로 인하여 생명 줄이 끊기고, 죄악으로 인하여 은혜의 통로가 막히고, 죄악으로 인하여 축복의 통로가 막혔습니다.

죄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내어, 저주와 진노와 심판과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심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화목케

하셨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했습니다(롬5: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했습니다(롬5:8).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다”고 했습니다(롬5:10).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화목의 다리입니다.



Ⅲ. 십자가의 도는 일치의 도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일치와 연합을 이루게 하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로 귀일하는 것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수평적 관계와 수직적 관계의 일치를 봅니다.

십자가는 종적선과 횡적선의 만남의 일치와 조화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는 대신관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인관계가 있습니다.

내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세도 있습니다.

교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윤리도 있습니다.

신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도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일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사랑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공의도 만족케

하셨습니다.


만약 이 양자의 문제가 수렴되지 않는 다면 그것은 두개의 막대기 일뿐 십자가는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구속의 도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화목의 도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일치의 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오늘도 여전히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태복음 27장 45~50절



하얀 목련의 꽃망울이 터지는 소리 - 빨간 진달래가 피는 소리가 봄의 소리로 다가오는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 버림 받는 아픔의 소리가 4월의 정적을 깹니다.


예수님께서 제 3시에 십자가에 달리신 후 제 6시로부터 제 9시까지 온 세상이

칠흑 같은 어둠에 덥혔습니다.

십자가 아래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천둥 같은 음성이 들려 왔습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이 말씀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는 고통의 절정에서 부르짖는 절규였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인간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죄도 흠도 없으신 분이셨습니다(히4:15).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셨으며, 예수님 또한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습니다(마17:5).

그 분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하신 분이며,

아버지의 품에 계시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후에도 결코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예수님의 형제들이 잡으러 왔는데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이러라”고 했습니다(막3:21).

동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요1:46).

“자기 땅에 오시매 그 백성이 그를 영접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요1:11).

그러나 하나님만은 예수님을 버리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다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순간 아버지한테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들로서가 아니라, 세상 죄를 모두 진 죄인 예수를 버리신 것입니다 육신의 고통! 영적인 고통! 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절규가 바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입니다.


1.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히브리서 4장 15절의 말씀에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는 아무 상관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정녀 탄생을 통하여 세상에 오시므로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부터 자유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했습니다(사53:5~6).

이것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향하신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엔 “유월절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영혼을 찢는 그리스도의 고통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Ⅱ.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시는 순간!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께 옮겨졌고, 하나님의 심판은 주님의 머리 위로 떨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실 뿐 아니라, 죄로 인한 고통의 형벌도 받으신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롬6:23).

그러나 이제 우리는 죄 값을 치룰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의 형벌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망과는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대가를 다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피로 값 주고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롬4:7~8).

우리 몸의 피같이 붉은 죄, 주홍같이 붉은 죄, 먹같이 검은 죄, 무슨 죄, 무슨 죄, 태산 같은 죄악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게 됩니다(롬324).


성경은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옮기셨다”고 했습니다(시103:12).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시43:25).

“나는 나를 위하여 네 죄를 도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사43:25).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사44:22).

내 죄를 지워 버리고 파 버리는 것은 내 노력이나 내 공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입니다.

애굽의 장자 재앙이 내리던 밤에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르고,

방에 숨어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자 재앙에서 구원 받았습니다(출12:13).

이것이 유월절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담당하신 십자가 공로만 믿고 주께 나아가가면 구원을 얻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내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했습니다(요5:24).

예수의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생명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피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의 고통의 부르짖음 속에서 우리는 새 생명의 태동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의 공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한 면만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하나님의 공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묵과하실 수 없음으로 하나님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심판주 하나님의 공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발견하셨을 때, 독생자 예수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형벌하셨거늘 믿지 않는 죄인들의 죄야 말할 것 있겠는가?

자기의 죄가 아닌 다른 사람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을 이같이 심판하셨다면

자기 죄를 회개하지 아니한 죄인들의 받을 형벌은 어떠하겠는가?

바울은 로마서 2장 4~5절의 말씀에서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체질이 불에 녹고, 하늘이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날아가는 심판을 유보하고 계십니다(계6:14).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없이 기다리시겠는가?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한다고 했습니다(살전5:2).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예수님의 부르짖음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를 깨닫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 부활의 축복   마가복음 16장 1~8절



기독교라는 하나님의 집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네 개의 기둥위에 세워진

생명종교입니다.

첫째 기둥은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유대 땅 말구유로 오신 동정녀 탄생의

기둥입니다.

둘째 기둥은 갈보리 언덕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죄 없으신 하나님의 독생자가 내 죄를 위하여 피 흘려 돌아가신 속죄의 기둥입니다

셋째 기둥은 장사한지 사흘 만에 무덤 문을 여시고 생명의 처음 열매로 살아나신 부활의 기둥입니다.

넷째 기둥은 장차 세상을 심판할 권세를 가지고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이 땅에 오실 재림의 기둥입니다.

그런데 이 네 기둥 가운데 상기둥은 바로 부활의 기둥입니다.

기독교는 이 부활의 기둥에 기둥과 기둥이 연결되어 튼튼하고 아름다운 기독교라는 집은 건축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기둥 가운데 부활의 기둥을 빼면, 기독교는 영생의 소망이 없는 세속종교와 같이 될 것이요, 우리의 인생은 절망적인 삶이 될 것이요, 우리의 생명은 죽음으로 끝나는 비참한 영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의 장에서 만약 부활이 없다면

①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② 믿음도 헛것이요

③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며

④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⑤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니라, 고하였습니다(고전15:16~19)

실로 기독교 부활진리는 기독교의 중심 진리요 기독교 교리의 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부활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과 사건을 통하여 부활의 의미를

되새겨보길 원합니다.


Ⅰ. 부활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네게 복이라”고 했습니다(시73:28).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롬4:9).

“부활에 참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계20:6).

본문 말씀에 세 사람의 여자가 나옵니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입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에 있었습니다(막15:40).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의 현장에도 있었습니다(막16:6). 이들은 멀리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따라서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입니다.


왜? 그들이 먼 길을 걸어서 예루살렘까지 왔는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한 후에는 예수님을 가까이하는 데는 상당한 위험이 따랐습니다.

그래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도 골방에 숨어서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생전에 주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고, 기적의 떡을 먹은 사람들도 모두

숨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끝까지 주님 곁을 지켰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담대하게 했는가?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은 모든 고난과 난관을 참고 견딥니다.

사랑은 자기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습니다(요10:11).

누가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축복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복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복입니다. 이 축복을 현세와 내세에 보증된 축복입니다.


Ⅱ. 헌신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영국의 찬송시인 하버갈은 주님의 희생과 헌신을 다음과 같이 찬양했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주느냐? 아버지 보좌와 그 영광 떠나서 밤 같은 세상에 만백성 구하려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하느냐? 죄 중에 빠져서 영죽은 인생을 구하여 주려고 나 피를 흘렸다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하느냐? 한없는 용서와 참사랑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값없이 주었다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주느냐?”


이 날 아침 주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은 원통해서 통곡하러 간 것이 아닙니다.

병 고침을 받고, 문제 해결을 받기 위하여 간 것이 아닙니다.

얻으러 간 것이 아니고, 드리러 갔습니다.

구하러 간 것이 아니고, 희생하러 갔습니다.

그녀들은 주님의 몸에 바를 향료를 준비하고,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 일찍이 무덤을 찾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드릴 수 있습니까?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몸바칩니다.”(찬141)

바다 같은 사랑! 태산 같은 은혜! 주님의 제단 앞에 헌신의 제물을 드리는 복 있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Ⅲ. 문제를 해결 받는 복을 받았습니다.


본문 3절에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만나는데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사나운 로마 병정들이 주님의 무덤을 굳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누구도 돌문에 손을 댈 수 없다는 총독의 인으로 무덤이 인봉 되어 있었습니다.

셋째는 무덤을 막고 있는 돌문이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입니다.

넷째는 하나님께 대하여는 이단이요, 로마 황제에게는 반역죄로 죽은 예수님을

가까이하는 것은 신변에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을 겹겹이 싸고 있던 모든 문제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 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모든 문제들은 일시에 해결되었습니다.


1. 돌문이 굴려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본문 4절에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러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고 했습니

2. 환경을 극복하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4절에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세상의 권세는 마치 삼손을 결박한 썩은 삼 줄처럼 무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릅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슥4:7)

하나님 앞에서 인생들의 태산 같은 문제는 평지가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Ⅳ.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제일먼저 듣는 복을 받았습니다.


본문 6절에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 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인류 최대의 소망인 부활의 소식은 주님가까이에 있던 충성스러운 종들이 들었습니다 이 아침 예수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듣고, 세상에 널리 전하는 축복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무덤 문이 열린 부활의 현장에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종이 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축복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산 소망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성도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   데살로니가 전서 1장 9~10절



사람이 하는 일에는 완성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곳에 가면 큰 집이나 빌딩을 짓다가 골조만 세우고 그만 둔 것도 있고,

어떤 사람은 석· 박사학위를 받고 평생을 그 분야에 바치고도 “나는 내 학문을

완성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운동을 하고, 철저히 건강을 관리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질병이 찾아와서 그를 덮치고 낫으로 밀단을 잘라 눕히듯이 죽음이 그의 건강한 몸을 뚝 잘라 눕히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모든 도모는 평생을 공들여 쌓아도 그것들은 파도에 휩쓸려 사라질 모래성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미완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무슨 유성이 지구와 충돌하여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이라고 소란을 피우지만, 천지 창조이래 지금까지 어느 별이 충돌하여 없어졌다는 말을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지구가 자전을 하면서 태양의 주위를 도는 공전을 하지만, 수억 년 동안 그 질서는 일분일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겁의 시간과 분과 초를 다 관장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정확무오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계획을 세우시고 때가차 매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완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게 하시고, 지금도 예수를 믿는 자들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처소를 예비하시고 계십니다(요14:3).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는 계획입니다.

그러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어떤 것인가?

성도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삶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Ⅰ. 성도의 어제는 죄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본문 9절에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주제는 회개와 중생입니다.

성도의 삶은 어떤 곳에서 어느 곳으로 돌아서는 삶입니다.

우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죄에서 그리스도에게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돌아선 사람들이 곧 성도입니다.

여러분이 기독교인인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인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느 날인가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선 사람들입니


사도바울은 유대교에 특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옥에 가두고 핍박하던 박해자였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게 했는가?

그가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가 후에 사도가 되어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했습니다(딤전1:12).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확실히 알게 된 바울은, 예수 핍박자의 길에서,

예수 복음의 전파자로 돌아선 것입니다. 베드로는 불학무식한 갈릴리 어부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갈릴리 해변에서 그물질을 하다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우직한 어부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마4:19).

그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께로 돌아설 때,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고,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하루에 3천명, 5천명씩, 회개를 시키고, 병든 자를 고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능력 있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요한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전의 요한은 “우뢰의 아들” 이었습니다.

그는 혈기가 많고, 분노가 많아 천둥번개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을 때 그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우뢰의 아들을 사랑의 아들로 변하게 했는가?

그것은 죄에서 돌이켜, 예수께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어제는 돌이키는 삶입니다.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돌이켜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Ⅱ. 성도의 오늘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본문 9절에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고-”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죄에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선 성도는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8절의 말씀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하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존재목적과 존재 이유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여러분 ! 우리가 다 전도사가 될 수 없고, 우리 모두가 성가대원이 될 수는 없습니그래서 성경에도 “다 사도 겠느냐, 다 선지자 겠느냐, 다 교사 겠느냐, 다 능력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졌겠느냐”라고 했습니다(고전12“29~31).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는 삶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마음으로 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입술로 만 섬기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자기의 희생이 따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16:24).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하나님을 위해 최선의 것을 드리고,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 허신하는 것입니다.


Ⅲ. 성도의 내일은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은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을 섬기며,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도적이 임함같이 홀연히 임한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살전5:3).

우리는 언제 주님이 오시더라도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기다려야합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처럼 등에 기름을 준비하고, 심지에는 불을 켜고 기다려야합니다.

세상은 죄악으로 관영하고 동트는 새벽처럼 어둠에 쌓여 있습니다.

세상의 어디에 소망의 빛이 있습니까? 세상 어디에 의와 진리가 살아 있습니까?

지금 우리는 갈보리의 십자가 사건과 영광 중에 다시오실 그리스도의 재림 사건의 사이에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의 날이 가까웠으매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해야 합니다(살전5:6)

믿음의 사람   누가복음 14장 13 ~ 35절



세기적인 명장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1956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행한 연설중의 한 부분은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여러분은 신념이 있으면 젊고, 의심이 있으면 늙습니다.

희망을 품으면 젊고, 절망을 품으면 늙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한 가운데에는 녹음실이 있는데 이 녹음실에 아름다움과 희망과 격려와 용기에 관한 말이 들어오는 동안은 우리는 젊을 수가 있습니다.

전선이 다 끊어지고 당신의 마음이 염세라는 눈과 회의라는 얼음으로 뒤덮이게 되면 오직 그때야 비로소 당신은 늙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할 때, 예수를 믿을 때 젊고, 불신앙할 때는 늙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젊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항상 힘 있는 삶, 소망의 삶, 희망의 삶을 살아갑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삶, 평안의 삶, 행복한 삶을 살아갑니다.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이십 오리 즉 10㎞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엠마오라는 촌을 향하여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엄청난 충격적인 한 사건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를 하며 그 길을 갑니다.

근심과 슬픔이 가득표정으로 서로 이야기를 하며 길을 가는 그들에게 한 사람이

다가와 동행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묻기를 “너희가 길을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하였습니다.

글로바라는 한 사람이 “당신이 예루살렘에 살면서 어찌 최근에 거기서 일어난 일을 당신혼자 알지 못합니까?”라고 반문을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지금 자신들과 동행하는 그 분이 자신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십자가 대속 사건의 주인공이신 예수,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구해낼 선지자로 생각하며 추종하고 따른 많은 무리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자신들의 기대와는 달리 로마병사들에 의하여 조롱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엄청난 사건을 목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슬픔마음을 서로 나누며, 여인들에게 의하여 전해진 부활의 소식도 믿지 아니하고 엠마오로 낙향을 하는 믿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소망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의해 눈이 열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은혜로 인하여 삶의 행로가 바뀌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받는 가운데 00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믿음의 사람이 되는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Ⅰ. 자기 생각에 갇히지 아니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은 결코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기에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실의에 빠져 낙향하는 그들의 모습은 도무지 믿음의 사람과는 거리 먼 모습입니다. 슬픔과 낙망으로 가득한 모습으로 낙향하는 그들을 누가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


예수님을 따르던 두 제자가 왜! 이같이 믿음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자기 생각에 철저히 갇혀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21절에「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救贖)할 자라고 바랐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분명한 생각입니다.

그들은 결코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영원한 죄악에서 구원할 메시야로 생각하거나

믿지 않았습니다. 여러 선지자 중의 한 사람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라는 그들의 이야기가 이같은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는 그들의 말에서도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박에서 해방시킬 선지자로 생각하며

따르고 있습니다.

저들의 생각과 소망에는 예수를 통한 이스라엘의 해방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러한 저들의 소망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자신들의 생각과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소망을 간절하게 표현하였습니다(막10:37).


저들의 포기하지 아니한 소망과 버리지 아니한 자기 생각이 결국에는 자신들의 눈을 가리게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와 동행하는 순간에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본문 16절에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제자는 예수의 십자가 고난의 모든 일을

알고 이야기할 정도로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따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분명 예수님의 얼굴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지금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길을 가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저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성경은 저들의 눈이 가리워져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눈이 “가리워져서 (ἐκρατουντο)”는 라는 말에는 “억제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16절의 말씀을 그대로 직역 한다면 “그들의 눈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게 계속 억제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눈이 가리워졌다는 것은 육적인 눈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두 제자의 영적인 상태 즉 자신의 들의 생각, 자신들의 소망에 갇혀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지 못하는 불신앙의 상태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는 두 제자들의 의식과 시각이 시간이 흐름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함이 없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며 가르침을 받는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의 변화가 없는 불신앙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 천사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자신이 가는 길목에 선”것을 타고 가는 나귀는 보았는데, 믿음의 눈이 가리워져 자기 욕심에 이끌린 발람은보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발람은 자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천사의 칼을 피하는 자신의 나귀를 지팡이로 때렸고, 그 때에 하나님께서 나귀는 입을 열어 “제가 주인 어른께 무슨 잘못을 하였기에, 저를 이렇게 세 번씩이나 때리십니까 ?”(민22:28)

“제가 언제 이처럼 버릇없이 군 적이 있었습니까 ?”(민22:30)하시며 자기 욕심의 생각에 갇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길을 가는 발람을 책망하였습니다.


믿음의 눈이 가리워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는 불신앙의 사람은 결국

기쁨을 잃어버리고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본문 17절에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었다고 하였습니다.


스승을 잃은 제자는 그 가슴이 아프고 시린 슬픔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스승이 살아났다는 소식은 모든 슬픔을 일순간에 기쁨으로 바꾸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런데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자신들이 믿고 의지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슬픔에 잠겨있습니다.

이는 예수 부활의 소식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하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부활의 말씀, 예언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슬픈 빛은 십자가 고난의 현장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소망이 무너짐에 대한 슬픔입니다.

따르고 추종할 선생이 없어짐에 대한 낙망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소망이 사라진 허탈감으로 인한 슬픔입니다.

살아갈 의욕과 목적을 상실하고 실의에 빠진 모습입니다.


결국 그들은 슬픔의 빛을 띠고 고향으로 낙향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본문 13절에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그날은 분명 예수님이 부활하신 소식이 제자들에게 들려진 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엠마오로 낙향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참으로 힘겨운 발걸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끄러운 발걸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더 이상 머물 이유를 찾지 못하고 엠마오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26:32)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마28:7)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28:10)고 잡히시기 전에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두 제자가 가야할 곳은 엠마오가 아니라 갈릴리입니다.


불신앙의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자신의 역할을, 자신이 가야할 향방을 잃어버림으로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자기의 생각과 뜻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그 길을 고집하며 갑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자기 생각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이다”(눅5:5) 고백하며 순종하여 많은 물고기를 잡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바울은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 원했지만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16:9) 하는 성령님의 요구에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순종함으로 엄청난 복음의 열매를 맺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Ⅱ. 주의 은혜로 사는 사람입니다.


본문 32절에「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고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생각에 갇혀 불신앙의 사람이 되어 슬픔 빛으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서너 시간의 먼 길을 동행하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길을 가면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에 관한 말씀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날이 어두워질 즈음에 저들의 강권(强勸)함을 뿌리치지 아니하시고 저희와 함께

한 곳에 유하시면서 떡을 떼어 축사하시고 저들에게 주셨습니다.

여기에 “축사하시고”라는 말은 “축복을 빌다”는 뜻으로 어떤 사물을 축복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시므로 장정만 오천명이 되는 많은 무리를 배불리 먹이신 일이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그 현장에 있었다면, 떡을 떼어 축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진행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주실 그 때에 저들의 눈이 밝아 졌다고 하였습니다.(31절) 여기에 “눈이 밝아져”라는 말은 “눈이 열려졌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눈이 자신들의 노력이나 의지로 떠졌다는 것일 아니라 누군가에 의하여

떠졌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눈을 뜨게 되었고, 지금까지 자신들과 함께 하시며 말씀으로 교훈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의 은혜로 사는 사람인데 그 은혜는!


1.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임마누엘의 은혜는 함께 하심의 은혜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는 은혜입니다. 먼저 찾아오시는 은혜입니다.

가는 길을 동행하시는 은혜입니다. 슬픔을 함께 나누며 치유하시는 은혜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예수님이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도무지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시면서도

그것 때문에 떠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함께해 주셨습니다.

자신들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일어난 슬픔의 문제까지도 성경의 말씀을 조용히

설명하면서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는 은혜입니다.

이는 우리의 실수와 연약까지도 품으시는 사랑입니다. 십자가 대속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두 제자가 성경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예수를 발견하고 깨달아 알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결국에는 그들이 예수를 발견하게 하시고, 조용히 당신이 가야할 길을 가셨습니다.


2. 영원한 기쁨의 은혜입니다.

영원한 기쁨의 은혜는 눈이 열려지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눈이 열려지는 은혜입니다. 자기 생각을 버리는 은혜입니다. 멸망 받을 죄악의 생각을 벗어 던지는 은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신 예수를 도무지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으로 감겨진 눈이 열려지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부활을 믿음으로 모든 슬픔은 사라지고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은혜입니다.

죄와 사망에서 생명으로 나오는 영생의 기쁨이 있는 은혜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누구나 이 임마누엘의 은혜, 구원의 은혜, 영생하는 영원한 기쁨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은혜로 세상의 모든 환란과 고통을 넉넉히 이기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그 어떤 위협도 우리를 이 은혜의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게 한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롬8:35).


Ⅲ. 할 일이 있습니다.


본문 33절과 35절에「곧 그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진 것을 말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사람의 특징은 생명력입니다.

생명이 있다는 말은 움직이는 활동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가만히 앉아 있거나, 머뭇거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을 받은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즉시로, 곧, 그 말씀에 순종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역시 믿음의 사람이 되는 은혜, 눈이 열려지는 은혜를

받았을 때 성경은 “곧 그 시로 일어나”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곧 그 시로”라는 말은 “그리고 바로 그 똑같은 시간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 설명하신 모든 말씀이 눈이 열려짐과 동시에 깨달아지기 시작하고, 지금까지 자신들과 함께 하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깨닫는 그 시간, 그 순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사람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변하는 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은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곳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예수 부활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입니다.


이같이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명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은 물고기를 잡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고, 가정을 주시고, 직장을 주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삶의 환경은 이 일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한 도구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 예수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예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 됩시다. 내 증인이 되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나의 삶에서 예수의 냄새가 나는! 사람들로부터 “예수쟁이”라는 말을 듣는 성도들이 됩시다.

천국은 어린이의 세계   마태복음 18장 1 ~ 10절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 5월입니다.

진한녹색의 산들이 우리의 눈을 시원하게 하고, 원색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꽃들이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이 5월에 우리에게 가정의 달을 허락하시고

어린이 주일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한 시를 소개하면서 말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 나는 어린이를 좋아한다 / 모두가 어린이가 되었으면 하고 / 어린이가 되지 못한 어른이 싫다 / 내 나라에는 어린이들만이 들어오기를 바란다 / 이것은 영원으로부터 결정되어 있었다고 / 꼬부라진 어린이, 등이 굽은 어린이, 주름살 간 어린이, 하얀 수염 난 어린이 / 어떤 어린이든 좋다 / 다만 한 가지, 어린이면 된다 /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법칙 / 어린이 외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 나는 어린이를 좋아한다 / 그들 속에서는 내 모습이 아직 흐려지지 않았고 / 그들은 내 모습을 일그러뜨리지 않고 있다 / 아직도 새롭고 순수하여 찌그러졌거나, / 얼룩진 모습이 도무지 없다 / 그들의 모습은 나를 용케도 닮았다. / 내가 그들을 좋아하는 것은 /그들이 아직도 자라는 중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어른들에게서는 /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 이미 더 크지도 자라지도 않는 어른들이 / 스스로 완성되었다 믿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 나는 어린이를 좋아한다 / 그들은 아직도 몸부림치고 싸우고 / 아직도 죄를 범하기 때문에 / 또 그것을 스스로 알고 정직하게 고백하며 / 다시는 범죄치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 그들은(어른들은) 누구에게도 잘못한 일이 없고 / 가책 받을 일이 하나도 없다 / 나는 그들에게 용서해 줄 것이 없고 / 그들은 내게 용서받을 것이 없다고 한다 / 슬픈 일이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니 / 참으로 슬픈 일이라고 / 할렐루야! 할렐루야! 어린 늙은이들이여! / 모두 문을 열어라 바로 나다 / 너희에게 어린이를 부활시키러 온 / 부활한 영원자다 / 서둘러라 때가 왔다! / 너희에게 다시 한 번 아름다운 얼굴과 / 어린이의 맑은 눈을 주러 / 내가 왔다… / 나는 어린이들이 좋다 / 모두 어린이가 되기를 바란다고 /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글은 하나님이 어린이를 좋아하신다고 하는 어린이 예찬의 글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어린이들을 좋아합니다.

어린이가 아니면 당신의 나라에 들어 올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천국은 어린이의 세계』라는 말씀을 함께 받을 때,

천국을 소유하는 어린이의 심령을 회복하는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Ⅰ.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천국이 어린이의 세계”라는 말이 단순이 어린이를 예찬하기 위해 사람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요,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본문 3절에『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제일 큰 자입니까?”하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자기 앞에 모인 여러 어린이들 가운데 한 아이를 불러 저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돌이켜 이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연령적으로, 체력적으로, 지적으로 미숙한 한 어린아이를 한가운데 세우고 천국을 교훈하신 것은, 결국 그가 이룩하실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은 사실상 어린아이들이 중심된 세계임을 웅변적으로 예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내다 본 메시야 왕국의 특징 중의 하나는 그 왕국의 시민들이

모두 어린아이로 묘사된 평화의 나라였습니다.


예수 자신이 「한 아기」, 「한 아들」(사9:6)로 예언되었습니다.

천국에서는 「어린아이」(사11:6)에게 양과 표범과 어린 염소와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들이 끌려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아무 해됨이나 상함이 없는 평화 충만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이사야는 천국의 시민을 ‘어린아이’, ‘젖 먹는 아이’, ‘젖 뗀 아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갓난아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2:2). ‘방금 태어난 아이’를 뜻합니다.

그 아이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빨면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본질적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요3:3, 5, 고후5:17).

새 사람, 곧 아이들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 버리고, 옛 것은 벗어 버린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감사기도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비밀이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겨져 버리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나게 됨이 감사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마11:25).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마11:26).

이른바 유대교권주의자들이 아닌 예수님의 갈릴리 제자들, 죄인들, 병든 자들,

가난한 자들 곧 구원받기로 작정된 모든 자들을 어린아이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우리가 이를 하나님의 나라(천국)는 아이들만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천국에는 이른바 어른들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셀 수 없는 큰 무리, 곧 오른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저들이 받은 구원의 감격을 고백하는 모든 무리는 예외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어린아이들입니다(계7:9∼10).


영적으로 천국은 거듭난 새 사람의 세계, 곧 어린아이들의 세계입니다.

어린아이들이 판을 치는 세계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수님이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Ⅱ. 어린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누군가 18세기는 남자를 발견했고, 19세기는 여자를 발견했고, 20세기는 어린이를 발견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역사의 원년을 이루는 그의 삶 속에서 어린이를 저희 한 가운데 세우시고 천국의 표본으로 교훈하셨습니다.


어린이를 천시하던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왔습니다(막10:13).

이것을 본 예수님의 제자들은 저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본 예수님은 분히 여기시며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10:14)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막10:16).


사실상 어린이들은 성년이 되기 전에는 여자들과 함께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여겨졌던 시대였습니다.

어린이는 아직까지 미숙한 존재로 가운데가 아닌 구석이나 밖에 있어야 될 자들로 취급받던 때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저들 가운데 새우셨습니다.

실로 놀라운 예수님의 행동이었습니다.

이는 어린아이의 그 존재적 중요성을 알려주는 의미 있는 예수님의 행동입니다.


1. 어린이는 마땅히 영접 받아야 할 소중한 존재입니다.

어린이는 부모와 가족과 사회와 국가에서 언제나 그 중심으로, 한가운데로 영접

곧 환영받아야 될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그 큰 이유는 어린이를 영접함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영접할 정도가 아니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결과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가운데 있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2. 천국인의 표본이 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본문 3절에『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이, 어린이는 누구든지 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린이에게 있는 특성을 강조함으로 중생인, 거듭난 사람, 구원받은 사람의 성품을 조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에게는 ① 돌이킴, 곧 회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잘못에 대한 자기 변화가 있다는 말입니다.

②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의 마음입니다.

③ 남을 섬기는 받듦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아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④ 부모를 향한 신뢰심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부모를 믿고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⑤ 가르침에 대한 순종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에 대한 절대적 순종입니다.

⑥ 주어진 행복에 대한 만족과 감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⑦ 미래를 향한 소망심이 가득 차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3복음서에서는 어린이에 대하여 말할 때,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야말로 참으로 한가운데 세움을 받을 자들입니다.

참으로 소중한 자들입니다.


3. 사랑과 축복을 받아야 될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① 영접하였습니다.

② 자기에게 나옴을 용납하였습니다. ③ 그 어린아이들을 안아 주었습니다.

④ 저희 위에 안수해 주셨습니다. ⑤ 그리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시며, 친히 그들을 사랑하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지금 우리들도 사랑하시며, 축복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어린이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Ⅲ. 교회 한가운데 어린이를 세우라는 말입니다.


본문 5절에「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에 대한 교훈을 행하신 그 배경에는 제자들의 다툼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누가 높으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나고 쟁론이 있었기 때문에

어린아이를 저희 가운데 세우게 된 것입니다.

저들은 또한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주님께 질문하였습니다.

이는 교회에서는 누가 크냐? 고 하는 질문고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천국에서는 어린이가 제일 큰 자”라고 대답하시는 가운데,

한 어린아이를 저희 가운데 세우고 천국에 대한 교훈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어린이를 교회 가운데 세워야 한다는 책임 있는 교훈을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어린이를 한가운데 세우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1. 예수 믿는 하나의 소자라도 실족케 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소자”는 앞에 나오는 어린아이를 지목할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0장 40절에 나오는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리고 “실족”이란 말은 “넘어지게 하다” 혹은 “오해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유혹에 빠뜨려 그 믿음을 넘어뜨리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고 함으로 소자를 실족케 하는 자의 받을 보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자를 실족케 하는 손이나 발이나 눈은 예외 없이 지옥 불에서 고통을 당한다고 하였습니다.


2. 예수 믿는 하나의 소자라도 업신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은 “멸시하지 말라, 관심 밖의 존재로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있는 데도 없는 것 같이, 귀한 데도 천한 것 같이 여기지 말라고 한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그 소자들은 이미 하늘에서 파송 받은 하나님의 천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국가를 지키는 수호천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단10:13, 12:1)

교회를 지키는 수호천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계1:20).


혹은 개인을 지키는 수호천사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행12:15).


본문에는 어린이를 지키는 수호천사가 마치 신복이 왕을 가까이 배알하듯이

하나님 앞에서 저 어린이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3. 예수 믿는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지 않고 찾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4절에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하여 일백 마리의 양을 기르는 사람이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리고 찾도록 찾아다니다,

그것을 찾은 기쁨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한 영혼을 소중히 생각하심을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에 대한 교회의 목자적 심정을 알려주는 말입니다.


한 소자에 대한 교회의 목자적 가슴은 ① 개인적인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② 참으시는 인내의 사랑입니다.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는 인내입니다.

③ 궁극적으로는 찾으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찾고 마는 것입니다.

④ 그것은 기뻐하는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⑤ 그것은 영원한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궁극적 구원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은 오늘 교회가 어린이, 소자를 소중하게 생각해야할 사명입니다.

교회가 어린이를 소중하게 생각함에 있어 그 어린 소자 하나도 실족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를 잃어버렸을 때는 찾도록 찾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천국은 바로 아이들의 세계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였습니다.

사나운 짐승들이 어린아이에게 끌려 다니는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젖 먹는 어린아이와 젖 뗀 어린 아이들이 맹수들과 함께 사는 평화세계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갓난아이들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영적 중생인들의 세계를 말합니다


예수님계서 한 어린아이를 저희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인의 성품을 교훈하셨습니다. 어린아이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어린아이의 모습이 되라고 하십니다.


하늘문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이 교훈을 받아

먼저 어린이를 소중하게 여기는 눈이 열리고, 자신들이 믿음의 소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또한 믿음의 소자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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