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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설교>
성탄절 정신
1. 섬김의 겸손
-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자기를 비워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 예수님
- 사관에 머물곳이 없어서 마굿간 말구유에 뉘인 예수님
2. 희생적 사랑 : 자기의 몸을 인류의 대속물로 주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
1.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2. 지금은 주의 인도를 받아야 할 때입니다
3. 성탄에 복 받는 가정
4.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
5. 임마누엘
동부제일교회 임은빈 목사님의 주일설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2:1-11
조선일보 가운데 광수 생각이라는 연재만화가 있습니다. 이 연재만화가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네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는데 목욕요금이 좀 다릅니다. 술취한 사람이 들어오면 삼천원, 거지가 들어오면 사천원, 일년에 목욕 한 번 하러 오는 사람은 오천원, 이 사람은 때가 더 많으니까, 그런데 정치인이 들어오면 칠천원 정치인 한사람이 와서 '왜 나는 더 받느냐' 하니까 '여보시오 당신 같은 사람을 닦는데 물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모릅니다' 정치인의 부패를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통해 제 모습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목사인 내가 들어가면 얼마가 들어갈까? 제 생각에 공짜로 시켜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더러운 때가 벗겨지는데 얼마가 들 것 같습니까?
우리는 우리들의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어떤 마음을 품고 사셨는가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에 어떤 마음을 품고 사셨는가.
우리 예수님은 여러분들과 저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그 마음에 사랑을 품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은 전부 다 그 마음에 사랑이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없는 말씀은 한 말씀도 없습니다. 전부다 그 마음에 사랑을 품고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환자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 고쳐준 많은 환자들에게 우리 예수님이 손을 대셨는데 그 손길은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님의 손길에는 그분의 사랑이 듬뿍 담겨 있었습니다. 그가 걸은 걸음걸음마다 사랑의 흔적이 그득히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에 사랑을 품고 사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한 분은 우리 예수님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유일하신 분입니다. 또 우리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웃되는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자신의 몸보다 더 사랑하셨습니다. 정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고 하신 말씀 그대로 자신의 몸보다도 예수님은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에 사랑을 품고 사셨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무엇을 품고 살아갑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마음에 무엇을 품고 살아가십니까? 내가 마음에 무엇을 품었느냐에 따라서 그 생각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게 되어있습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다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도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예수님처럼 사랑을 품고 살기를 바라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하시는 말씀은 사랑을 마음에 품으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을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들과 저를 사랑하셔서 그 사랑을 나누어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으로 여러분들과 저를 온전히 사랑한 사랑의 증표로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여러분들과 저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그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그런 일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라고 하면, 예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우리라고 하면 우리 마음에 당연히 예수님의 품으셨던 그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한번은 과학자가 잘못해서 자기 혈관에다가 주사를 찔렀습니다. 그런데 그 주사는 어떤 동물도 그 주사를 맞으면 24시간 안에 생명을 잃게되는 무서운 독이 들어있는 주사였습니다. 이 과학자가 "야, 나도 이제 종말을 맞게 되었구나. 내 인생도 이제는 끝장이구나. 24시간 안에 나도 목숨을 잃게 되었구나" 하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가족과 함께 남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집으로 가는데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냥 쓰러집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생각하기를 지금 이 시간에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내게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 돈일까? 돈 가지고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명예일까? 이것도 아닙니다. 가족일까? 가족도 지금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못합니다. 비로소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가 눈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옵소서. 하나님을 믿지 못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아들은 여러분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사랑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증표가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사랑했는데도 그 사랑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사랑을 받고 구원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마음에 예수님의 마을을 품어야 합니다. 그 마음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 사랑을 품고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에 빚진 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또한 겸손을 마음에 품고 사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그래서 종의 형체인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생을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을 낮추며 사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더 높이며 사셨습니다. 사람이 되셔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사람들 보다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음식 먹는 자리에서 제자들과 음식을 드신 후 주님은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형식으로 씻긴 것이 아닙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왔노라. 섬기셨습니다. 그리고는 섬김의 최절정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주면서 온 인류를 섬기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습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에 겸손을 품고 사셨습니다.
여러분들 마음에는 무엇을 품고 있습니까? 주님은 원하십니다. 여러분들 안에도 예수님이 당신 마음에 품고 사셨던 그 겸손을 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겸손할 때 주님의 음성이 내게 들립니다. 주님은 겸손한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겸손한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겸손한 이들에게 하나님은 말씀을 하시고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은총으로 역사하십니다.
일전에 집사님 한 분이 제게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말씀 듣는 중에 깨달은 바가 있어서 왔습니다. 그리고는 선교헌금 봉투를 내놓습니다. 저의 생활을 목사님께서도 아시듯이 전혀 여유가 없습니다. 약속된 헌금 외에는 더 드릴게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통해 주신 말씀을 들어보니까 내가 부스러기로 흘려버리는 것을 모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 쓰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부스러기로 낭비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정에 부스러기로 낭비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했습니다. 생각해보니 많더랍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남편이 자기와 같은 믿음생활을 했으면 너무너무 좋겠다. 그리고 남편이 피워대는 담배를 돈으로 계산해보니 한 달에 오만원쯤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일년이면 60만원이고 십 년이면 600백만원이고 70년 동안 피워대면 4천2백만원입니다. 이것이 부스러기로구나. 부스러기로 낭비하는 것이 너무 많구나 그래서 하나께서 내 남편의 믿음을 도와주셔서 이 부스러기를 낭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선교헌금을 드린다고...
여러분 우리가 겸손해야 주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겸손해야 나의 부족한 것들이 채워집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요구하십니다. 당신이 마음에 품었던 겸손, 또 그렇게 사셨던 겸손을 내 마음에 품고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겸손한 자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주님은 겸손한자 안에 소셔서 주인으로 좌정하십니다. 교만한 사람의 안에는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 우리 예수님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품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품고 사셨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는 무엇을 품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품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그의 입으로 증거 된 것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들은 전부다 한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예수 믿고 죽은 이후에, 휴거 된 이후에 가는 곳입니다. 그러나 거기만이 하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주시기 위해서 그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기 위해서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쏟고 죽으셨고 장사지낸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신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믿는 모든 이들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셨고 믿는 모든 이들이 가는 그곳에 영원한 처소를 예비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셔들이고 그 예수로 말미암아 그 분이 주시는 그 나라를 내 마음에 품고 살 때 하늘나라가 건설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전주에 가면우리 교단병원인 전주예수병원이 있습니다. 이 예수 병원에 구레인 박사가 있습니다. 이 분의 아버지가 구레인 선교사로 전북지역에서 선교사로 활동을 하셨던 분입니다. 이분이 안식년이 되어서 미국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미국에 가셔서 시골교회를 담임하시면서 목회를 하는 가운데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그 교회 시무장로님 가정에 아들 둘이 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한날 같이 물에 빠져서 익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공교롭게도 장로님 댁에 불이 나서 부인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하루아침에 두 아들과 아내를 잃었습니다. 장례식에서 목사님이 말을 잃습니다. 할말이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목사님이 장로님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장로님 장로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마음대로 원망을 해도 어느 누구도 뭐라고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게 오히려 믿음을 굳게 지키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여건 속에서도 굳건하게 믿음을 지키면 많은 사람에게 믿음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결정은 장로님 스스로 하실 수 있습니다. 장례가 끝난 후에 장로님이 목사님께 목사님 저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저는 어떠한 환경 중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는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저의 두 아들을 데려가신 이유를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여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있는 줄 믿습니다. 제 사랑하는 아내를 불러 가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제가 알기를 원합니다. 마음에 깨달음이 옵니다. 네가 네 두 아들에게 매여서 많은 버려진 아이들을 모르는 채 살아오지 않았느냐? 너를 아버지로 필요로 하는 많은 아이들이 있다. 그들의 아버지가 되어주면 어떻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고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고아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자신의 자녀로 삼고 그들을 보살펴줍니다. 미망인을 찾아가서 보살펴주고 그들의 남편이 되주면서 그들을 보살펴 줍니다. 돈이 들어갑니다. 재산을 팝니다. 감당하기 어려워집니다. 이 장로님이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이 많은 식구들을 거느리고 이 사람들을 보살피는데는 재정이 너무 어렵습니다. 하늘 문을 여시고 이들을 보살필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십니다. 장로님이 소유한 밭에서 석유가 쏟아져 나옵니다.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여러분 우리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품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 마음에 사랑을 품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에 겸손을 품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품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더 올라갈 수 없는 높은 자리까지 올려 세우셨습니다. 그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무릎을 그에게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그분에게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 그분이 품은 그 마음을 우리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마음에 모시고 예수님이 품었던 그 사랑, 겸손 하나님의 나라를 품고 하나님의 나라를 내가 이루고 가정에서 이루고 나와함께 더불어 사는 모든 사랑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나가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오늘을 사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저희들을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시는 동안 그 마음에 사랑을 품고 사셨습니다. 그분의 하신 모든 말씀은 사랑으로 하신 말씀이고, 그분의 손끝은 사랑이 있었고 그의 걸음에는 사랑의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주시면서가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사랑을 품고 사는 성도들이 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그리고 저희들의 마음에 겸손을 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낮게 여기고 섬기는 사람으로서 모든 일을 섬기며 살아나가는 그런 믿음생활 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 이 땅에는 바로 이런 사람이 필요한 때입니다. 바로 우리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저희들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품고 살기를 원합니다. 저희들의 입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뿐만 아니라 내가 모신 예수로 말미암아 내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우리가 사는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님의 주일설교입니다
지금은 주의 인도를 받아야 할 때입니다
마가복음 2:1-11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할 때 일입니다. 영국 국민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 때 영국 황실과 윈스턴 처칠 수상은 영국교회에 요청해서 일제히 전쟁이 발발하던 그 날, 온 교회에서 같은 시간에 종을 울리도록 요청했습니다. 웬 종일까요? 누구를 위해서 종을 울립니까? 제가 이 말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얘기가 있는데 어떤 형제가 와서 한번 저한테 그러더라구요, 목사님! 누구를 위해서 종을 울리나를 경상도 말로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저는 경상도 출신이 아니라 모른다고 그러니까, 니 종은 와 우노? 그 종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심기 위한 희망의 종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동시에 영국황실은 영국성공회의 존경받는 주교였던 윌리암 템플 주교에게 전 국민에게 보내는 방송 설교를 의뢰했습니다.
템플 주교는 그의 역사적 설교를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대영제국의 국민 여러분 잠시 후 이 땅에 모든 교회는 종을 울릴 것입니다. 종소리를 듣거든 우리 모두 교회로 나가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십시다. 역사의 주인 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인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의 설교가 현실적인 대안이 결핍된 매우 종교적이고 상식적이고 심지어는 상투적인 설교라고 비판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상황에서 이 보다도 더 실제적인 대안을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역사의 모든 고통이 하나님의 손길을 거쳐서 허용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인도 없이 고통으로부터의 탈출이나 해방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금 우리 민족은 민족적으로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새로운 지도자가 선출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운 시련이 쉽게 끝난다는 환상적인 낙관을 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현실입니다. 우리가운데 어떤 이웃들은 이미 이 고통을 온 몸으로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장에서 물러나야만 했고 사업을 대폭적으로 추정하고 축소하고 조정하는 작업에 시작했고 꿈들이 깨지고 가정이 흔들리는 아픔들을 이미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에 이 때야 말로 주의 인도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주님의 인도를 받을 수가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주의 인도를 우리는 경험할 수가 있을 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해서 2000년 전 저 이스라엘 땅 동쪽에 살면서 주님의 특별한 인도 주님의 비상한 인도를 경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소위 동방 박사들의 이야깁니다. Wise man이라고 불리워지죠? 지혜로운 박사들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를 경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들이 이런 인도를 받을 수가 있었을까요? 우리가 본문을 묵상하면서 계속 이 질문을 주께 물어야 합니다, 그것은 고통스런 이 시대에서 우리가 내가 주의 인도를 받으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사실입니다.
그 첫째 대답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비전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주님의 비전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시랑하시는 여러분 제가 여러분 중에 어떤 한 분을 붙들고 이런 질문을 던진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형제님 당신은 최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고 계십니까? 정말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다 이런 하나님의 인도를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계십니까? 모르긴 몰라도 우리들 가운데 상당한 사람들이 이 질문 앞에 당황할 지 모릅니다. 왜 보편적인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인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당연한 특권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사는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구체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의 무의미한 반복적인 싸이클에 너무나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익숙해져 있는 까닭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린 이렇게 사는 거예요, 그냥. 그냥 사는 거지 뭐. 살다가 죽는 거지. 삶에 대한 돌파구를 찾으려는 구체적인 기도가 없습니다. 왜 없습니까? 바꿔 말하면 그것은 희망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꿈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내 가슴을 설레게 할 수 있는 인생에 새로운 꿈이 발견되었다면 우리는 주 앞에 엎드릴 것입니다. 하나님! 좀 도와 주십시오. 주님 좀 인도해 주십시오. 이런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열망을 주 앞에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타난 동방박사들의 그 모험에 찬 놀라운 진원이 동방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향해 베들레헴을 향에서 찾아오는 그 여행의 시작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어느 날 하늘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별을 본 것입니다. 이 별을 보자마자 그들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별이 그들의 인생에 새로운 목표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삶을 향해서 출발했습니다.
일구백팔십팔년 우리 88올림픽이 열릴 때 그 때 저는 미국에 있었는데요. 좀 한국 선수들 하면 좀 보도 해 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래서 이제나 저제나 한국 선수 나오나 봐도 미국이니까 말짱 미국 선수들만 보도하더라구요. 얼마나 속상한 지 몰라요. 그런데 계속해서 그 올림픽 상황이 보도되면서 미국의 TV들은 한 영웅적인 스타의 계속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기억하실 것입니다. 88올림픽의 세계적 영웅으로 떠오른 한 흑인여성 후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라는 흑인여성을 여러분 지금도 아마 기억하실 것입니다. 육상선수로써 세 개의 금메달과 한 개의 은메달을 혼자 거머줬던 여인, 날씬한 몸매에 수영복 차림을 하고 뛰었어요. 그걸 아주 인상적으로 텔레비전이 계속 비춰주는데 보니깐 이 손톱이 얼마나 긴지, 아주 진한 색깔의 메니큐어를 칠하고 그리고 아주 산뜻한 미소를 흘리면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조이너의 매혹적인 그 모습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조이너의 Life story가 계속해서 미국방송을 타고 들려 왔습니다. 본래 이 조이너라는 여성은 L.A에 로스엔젤레스의 남쪽에 아주 빈민가 열두 명의 식구들 중에 열 한 명의 자녀 중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끼니가 어려워서 정부의 보조를 통해서 살아가는 그런 소녀였습니다. 꿈이 없었습니다. 절망 속에 그녀는 늘 친구들을 피하고 우울증에 걸린 소녀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소녀 인생을 바꾼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흑인 영웅이 이 소녀가 다니고 있던 초등학교를 방문했어요. 흑인영웅이 뭐냐면 유명한 복싱 챔피언이 였던 슈가레이이라는 권투 선수였습니다. 생각나시죠? 슈가레이. 학생들은 환호성을 오리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슈가레이가 가만히 보니까 한 여학생 하나가 구석에 홀로 쭈그리고 앉아서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땅만 쳐다보고 있는 소녀가 눈에 들어왔어요. 그는 인터뷰를 끝나고 강연을 끝난 다음에 이 소녀 곁에 슈가레이라는 복싱 챔피언이 다가갔습니다. 어디 아프니? 애. 다 싫어요. 첫번째 다 싫어요. 저는요. 집도 싫고 학교도 싫어요. 집도 싫고 학교도 싫어요. 슈가레이는 이 소녀를 끌어안아 주면서 네 이름이 뭐니? 물었어요. 제 이름음 플로어 에요. 플로렌스 플로어 너 좋아한 거 있잖아. 너 좋아하는 거 뭐가 있니? 갑자기 소녀는 눈을 반짝이면서 저요? 뛰는 건 좋아해요. 뛰는 건 좋아해요. 그래? 그러면 말이야. 너는 나처럼 유명해 질 수 있어. 너는 세계적인 육상 스타가 될 수 있어. 그리고 꿈을 가진 사람은 부자야. 꿈을 가지면 너는 세계적인 육상선수가 될 수가 있단다. 내가 네가 그런 선수가 되도록 기도해 줄께. 손을 꽉 잡아 줬어요. 이 슈가레이의 한마디는 그 날 이 어린 소녀의 인생의 하늘에 별을 건 것입니다. 별을 봤어요.
그 날부터 이 소녀는 달라졌습니다.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88올림픽에 세계적인 스타로 그녀는 부상했고 그는 미국 전체에 가장 영향력 끼치는 여성 중의 한 사람으로 지금 맹렬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저는 오늘 이 한국역사에서 지금 이순간 제일 필요한 것이 있다면 우리 민족이 하늘의 별을 보는 것입니다. 비전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경제회복의 논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예요. 우리는 아직도 이 어두운 하늘아래서 우리 만족은 볼 수 있는 별이 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을 위해서 하늘의 별을 걸어 놓으시는 하나님입니다. 믿으십니까? 성경에 보시면 주께서는 끊임없이 약속을 되풀이하십니다. 말세에 내가 나의 종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리니 그러면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꿈을 주시는 하나님, 비전을 주시는 하나님, 당신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찬란한 꿈과 비전을 바라보고 인생의 길을 달리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눈을 들어 보십시오. 어두운 하늘, 저 높은 곳에 하나님이 걸어 놓으신 희망의 별을 그리고 비전을 볼 수가 있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먼저 이 비전을 봐야 되요. 그리고 이 비전을 보는 순간 내 인생을 끝나지 않았다., 주님은 아직도 내 인생에 대한 기대를 갖고 계시다. 내가 살아야 할 그리고 내가 걸어가면서 해야 할 내 인생의 마지막 plan이 남아있다. 이 하나님의 꿈을 보는 순간 사랑하시는 여러분, 좌절은 이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인도를 기대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할 수가 있습니까?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 이 동방의 박사들이 어떻게 해서 주께서 하늘에 보여주시는 이 별이 메시아의 별인 것을 알게 되었을 까요? 그것은 이 박사들의 정체를 좀 알아볼 필요가 있어요. 동방박사들. 무슨 박사일까요? 화학 박사일까요? 무슨 박사일까요? 박사는 본래 밖에서 공부하다가 죽는 사람이 박삽니다. 이 박사라는 말이 영어 성경에 보시면 magi라는 단어로 되 있어요. M.A.G.I. magi . 그 말하고 가장 가까운 영어 단어 하나를 우리가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뭐예요. Magic. Magic. 마술이죠. 마술. Magic. 마술. 마술사 그러면 magician이라고, 마술사. 마술사. 본래 마술삽니다. 박사들은 마술삽니다. 마술사 그러면 오늘의 개념, 오늘의 우리의 선입견으론 마술사 그러니깐 상당히 낮은 지위의 사람들을 생각할지 몰라요. 그러나 지금의 우리가 박사라는 단어가 떠올리는 뉘앙스처럼 그 시대의 마술사, 고대의 마술사는 오늘날의 박사들과 거의 같은 대접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 나라 이국의 포로로 갔다가 남의 꿈 한번 풀어주었다가 출세한 유명한 사람 한 사람 있죠? 누굽니까? 요셉도 그렇고 또? 한 사람. 자, 다니엘서 한 번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다니엘서. 2장입니다. 다니엘 2장입니다. 자, 이 다니엘의 중요한 주인공, 누굴까요? 그건 말할 것도 없이 다니엘이죠?
자, 다니엘 2장 한 번 찾아보세요. 다니엘 2장입니다. 어떤 분은 아예 그냥 다니엘 2장이 찾아지지 않으니까 포기를 해 버리는 분도 계십니다만. 다니엘 2장의 마지막 두 구절한 번 보세요. 다니엘 2장 48절과 49절입니다. 다니엘 2장 48절 먼저 읽겠습니다. 다니엘 2장 48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 귀한 선물을 많이 주며 세워 바벨론 온 도를 다스리게 하며 또 바벨론 모든 박사의 어른을 삼았으며. 자 다니엘이 왕의 꿈을 풀었습니다. 그러면 상 받고 끝나면 되요. 지금 같으면. 근데 다니엘에게 어떤 지위가 주어 졌습니까? 총리가 된 거예요. 바벨론 온 도를 다스리게 했다. 도지사들까지 다 감독하는 최고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이 48절의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그는 이 다니엘은 바벨론 모든 누구의? 박사의 어른이 되었다. 그러니까 다른 박사들이 많이 있었잖아요. 다른 박사들이 바로 점성술 취급하고 그러는 사람들이죠. 그들 중에 우두머리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그들에게 주어진 직책을 보면 그 당시에 이런 점성술사는 일종의 그런 마술사 정도가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의 엘리트들입니다. 그 만큼 존경을 받았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주어졌습니다. 자, 그런데 이 박사들 가운데서 다니엘은 뭐가 됐어요? 우두머리가 됐어요. 최고 두목이 되었습니다. 자, 그들이 풀 수 없었던 왕의 꿈을 풀었습니다.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느냐 사람들이 물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틀림없이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이런 지혜를 주고 있는 놀라운 책이 하나 있습니다. 틀림없이 다니엘은 그 사회의 사람들에게 이 중요한 책을 소개했을 것입니다. 뭘까요? 성경입니다. 성경. 그래서 바벨론이라는 외국 땅에 이 성경이 역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박사들은 바빌로니아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나 이쪽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성경을 접하면서 그들은 성경의 중요한 예언하나를 주목했을 것입니다.
민수기서에 보면 민수기 24장 17절에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리라. 이스라엘을 구출하고 온 세계의 소망이 되기 위한 구세주가 messia. 메시아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나온다. 그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 어느 날 출현할 것이다. 이 말씀을 알았을 것입니다. 다니엘을 통해서 이 말씀을 전해 듣고 이 말씀을 받고, 그리고 동방의 박사들은 하늘의 천체들의 움직임을 주목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별이 하나 나타났어요. 이상한 별이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자연스런 별의 어떤 변화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별의 등장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나타난 별이에요. 강력한 빛을 발하면서 하늘에 등장한 혜성같이 유성처럼 등장한 이 한 별의 출현을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이 박사들은 다 메시아다. 메시아다. 메시아가 오셨다. 그리고 그들은 여행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인생이 뒤바뀌는 놀라운 순간이예요. 그들의 삶을 바꾸는 놀라운 journey가, 여정이 그들의 인생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찰라였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매우 크리스천들이 오해하는 대목 중에 하나가 있어요. 그 오해는 뭐냐 하면, 주로 이것은 크리스마스 캐롤이나 찬송가 때문에 오는 오해예요. 우리가 지금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도 보면 동방의 박사들이 별 따라왔다. 그러니까 이 별이 한 번 딱 나타난 다음에 그 다음에 그 별은 계속적으로 박사들의 걸음을 인도하면서 그들은 사막을 건너고 강을 건너고 들을 지나서 별 따라 드디어 예루살렘까지 왔다고 착각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아요.
다시 본문을 조심스럽게 보면 이 별이 나타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별은 아마도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이 별의 출현을 통해서 메시아가 오셨다 그는 당연히 이스라엘 땅에 나셨다.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의 수도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 수도가 어디예요.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까지 오는 동안에 그들은 별을 보고 찾아 온 것이 아니고 그들은 말씀을 붙들고 찾아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그 말씀하나 붙들고 이 말씀의 주인공이 당연히 있어야 할 팔레스타인 땅을 향해서 그들은 찾아온 것입니다. 예루살렘까지 왔어요. 그리고 사람들을 붙들고 묻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어디 나셨습니까? 아니 인류의 왕이 인류의 소망이 될 메시아는 어디에서 나셨습니까?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도움을 통해서 성경에 의하면 그분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다 그래서 드디어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은 아주 가까운 거리예요. 먼 거리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 분당에서 수원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거리예요. 그래서 분당에서 수원으로 가다가 동방의 박사들이 가다가 갑자기 다시 그 동방에서 보았던 별이 출현합니다. 그 때 비로소 출현한 것이 예요. 자, 마태복음 2장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장이요. 9절입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2장 9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 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여기 9절에 동방에서 보던 이란 말이 과거 시제입니다. 보았던 동방에서 보았던 그 별,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기 위해서 기적적으로 출현했던 하나의 별 그 별을 보았어요. 보았던 그 별이,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도상에서 도대체 베들레헴 어디 계실까? 당황하며 찾아가던 그들에게 갑자기 별이 다시 출현한 것이 예요. 그것은 얼마나 감격이였을까요. 그래서 그 다음절, 그 다음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0절 다같이 시작!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뭐 별 따라 계속 왔다면 이제 와서 뭐 놀랠 필요가 어디 있어요. 근데 동방에서 보았던 그 별이 베들레헴 상공에 갑자기 나타나서 강렬한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기쁨이고 감격이었을까요? 그들은 놀라기 시작합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어요. 그러므로 그들이 팔레스타인까지 걸어오는 그 과정에서 그들이 줄곧 그들을 인도한 것은 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을 보고 그들은 쫓아온 것이 예요. 말씀을 붙들고 쫓아 온 것이 예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기 위해서 의지해야 할 그 중요한 source. 방편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기적은 항상 일어나지 않아요. 기적은 가끔 일어나기 때문에 기적입니다. 기적이 날마다 일어나면 더 이상 기적이 아니 예요. 기적이 없을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인생을 살다 보면 신앙인들의 생애 속에 어느 날 기적이 체험될 수가 있습니다. 갑자기 눈이 열립니다. 삶의 길이 환해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이런 기적이 항상 일어나는 것은 아니예요. 하나님의 기적이 그쳐버린 밤, 내 삶이 캄캄한 어둠의 들을 헤매는 고독한 이 밤 중 기적이 없는 밤중에 뭘 의지하시겠습니까? 그 때도 우리가 의지할 것이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 신앙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신앙의 근거는 언제나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붙들고 말씀을 신뢰하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행진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믿음은 어디에서 나며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무엇으로 말미암았습니까? 그리스도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이 없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내 삶의 속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다고 단념하지 마십시오. 이 어두운 밤 중 기적이 없는 어두운 밤에도 나는 하나님 말씀을 붙듭니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성경이, 메시아가, 이스라엘에서 탄생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이스라엘 땅 어디엔가 나셨을 것이다. 말씀 하나, 그 말씀을 붙들고 사막을 건너고 강을 건너고 들을 건너던 동방의 박사들처럼 내 인생이 사막을 헤맬 때 내 인생이 캄캄한 어둠을 헤맬 때 내 머리 위에 기적의 별이 나타나지 않아도 여러분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을 의지하고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주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을 배우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세번째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기 위해서 주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되야 합니다. 주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 이 말을 들을 때 뭐가 느껴지세요. 무엇이 가장 커다란 관심이 됩니까? 예를 들어서 사업을 하시던 분이 사업을 하시던 분이 어떤 분이 예배라고 그러는데 그건 그렇게 대답한 분은 돌연변이에 속합니다. 예외에 속해요. 자, 하나님의 사업, 내가 어떤 지금 사업에 있어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를 좀 받아야겠다. 하나님! 제 사업을 인도해 주십시오. 기도를 했어요. 그 다음에 내 머리 속을 지배하고 있을 생각은 어떤 생각이 인도될까요? 어떤 사업일까?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도와 주실까? 그 부분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또 혼자 사는 자매가, 노처녀가 결혼을 위해서 인도를 받고 싶어합니다. 하나님 인도해 주십시오. 아무 남자나 인도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인도를 기도했어요. 그 다음에 자연스럽게 뭘 생각할 까요? 이 남잘까? 저 남잘까? 내 님은 김씰까? 이씰까? 뭐 이런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고자 할 때 가장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본문의 말씀을 주해하던 지나간 시대의 청교도 설교가였던 토마스 왓슨은 이런 매우 주목할 만한 발언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인도하실 때 하나님이 우릴 첫번째로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에게로 인도하신다. 잘 들으세요. 하나님 우리를 인도하실 때 하나님이 제일 먼저 인도하는 곳은 어디라고요? 하나님 자신에게로 인도하신다.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내가 인도함을 받아서 어떤 일을 하게 되느냐 내가 인도를 받아서 어떤 축복을 누리겠느냐, 하나님의 인도에는 반드시 보너스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의 인도함을 통해서 경험하게 될 축복보다도 먼저 우선적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내가 주님이 나를 인도하신다면 나는 그 주님을 만날 수 있다 역사를 창조하신 하나님, 인류의 소망이신 그 분, 나의 구원이신 그 분, 내가 주님을 경험한다. 그 자체가 내 삶에서 감격이고 흥분일 수가 있을 까요? 이것이 중요한 것이예요.
자, 그런데 이 동방의 박사들, 그들은 처음부터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들은 이 메시아를 만남으로 그들이 출세할 것에 관심 있지 않았어요. 물론 그런 기대도 은근히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한 한의 목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들이 지금 여기까지 예루살렘까지 찾아왔던 목표가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2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자, 우리 2절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시작!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느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뭐 하러 왔다고요? 경배하러 왔노라. 메시아가 나셨다. 이 순간, 이 동방의 박사들을 지배한 가장 커다란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어떤 분일까? 역사의 소망, 인류의 소망, 우리들의 소망이신 Messia. 그 분을 그 분 앞에 엎드리고 싶다. 그 분을 경배하고 싶다. 그들은 이 경배의 소원, 경배의 열망을 가지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열망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주님은 이 박사들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늘의 별을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섭리를 통해서 그들을 마침내 이 땅에 오신 하나님 그 분 앞으로 인도하십니다. 이 메시아를 만나는 감격의 장면을 오늘의 본문은 어떻게 묘사합니까? 11절 보세요. 자, 우리 11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자, 집에 들어가서 이 동방의 박사들은 맨 먼저 무슨 일을 했습니까? 경배했습니다. 누구에게 경배했습니까? 아기께 경배하고. 여기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박사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별을 쓰셨습니다. 그러나 이 박사들은 별을 경배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은 별을 쓰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신 별이 경배의 대상이 되면 별은 그 순간부터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해서 마리아를 쓰셨습니다. 마리아라는 아름다운 여성을 쓰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경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 점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11절에 보시면 이 집에 들어가서 아기 예수가 있는 집에 들어가서 박사들은 누구를 경배했다고 그랬어요? 아기께. 자, 그 옆에 누가 있었어요? 마리아가. 그 모친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그러나 경배의 대상은 한 분이였습니다. 누구였습니까? 아기께 경배하고. 어떻게 해서 이 아기가 경배의 대상이 될 수가 있을 까요? 그 아기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십니까?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인간을 위해 오신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만이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셨습니다. 바로 그 분 앞에 엎드립니다. 엎드려서 경배합니다. 경배의 초점은 뭘까요? 경배의 초점은 드리는 것이 예요. 받는 것이 아니 예요. 여러분 예배를 생각할 때 예배를 통해서 좀 이익이 있어야지 어떤 축복이 있어야지. 축복이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선한다면 그것은 예배 정신의 타락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 자신이 예배의 관심이 되야 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나를 구원하신 주님, 그 분 앞에 사랑을 드립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찬양을 드립니다. 기도를 드립니다. 헌금을 드립니다. 예배정신의 핵심은 드림이 예요. 그들은 받는 것에 관심 있지 않았습니다. 드리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뭘 드렸습니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목에서도 사람은 사람들은 중요하지 않는 부분에 이상한 관심을 가져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뭐의 상징일까? 뭐 이런데 관심을 가져요. 정답을 말씀 드릴께요. 황금은 무엇을 상징하느냐? 황금은 황금을 상징합니다. 유향은 유향입니다. 몰약은 몰약입니다. 필요 없는 의미 없는 해석을 여기다 붙일 필요가 없어요. 그들은 최선의 것을 바쳤습니다. 그들이 준비한 최선의 것을 이 최선의 주님 앞에 최고의 왕 되신 그 분 앞에 구세주 앞에 그들은 최고의 것을 바치길 원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여러분을 지배하는 관심입니까? 오늘 우리 민족의 최대의 관심은 경제 회복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민족이 만약 경제 회복에만 관심을 갖는 다면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축복하지 않는 다고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경제 회복은 우리 민족에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경제 회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빨리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그러나 경제 회복만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돼요. 우리가 더 이상의 높은 목표가 없이 경제회복만을 추구한다면 또 잘 살게 되면 잘 살게 된 그것 가지고 뭘 할까요? 딱 하나 밖에 없어요. 타락하는 것 밖에 없어요. 그것이 지나간 10년간 이 민족의 역사였어요. 우리는 경제 회복보다도 높은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이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민족이 되고자 하는 꿈. 이 꿈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하십시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과 이웃들을 섬기고 세계의 열방들을 섬기는 겸허한 민족이 되는 민족. 잘 살게 된 경제 회복을 가지고 우리를 위해서 사는 자가 아니라 우리 주변의 이웃 민족들을 도와 주고 그들 앞에 겸허히 섬기는 민족이 되는 더 높은 꿈이 없다면 경제 회복은 허상입니다. 저는 하나님 축복 안 한다고 생각해요. 더 높은 꿈.
사랑하는 여러분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에게 주시는 항상 축복이 있어요. 축복이 있어요. 그러나 그 축복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주님에 대한 관심. 주님의 관심.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그 분은 먼저 우리를 자기 자신에게로 인도하신다. 드디어 박사들을 아들로 오신, 아기로 오신 그 분 앞에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엎드리는 순간, 주님은 얼마나 기뻐 하셨을 까요? 그리고 이제 보너스 축복이 시작됩니다. 보너스 축복이 뭐였어요? 그 다음절 보시면 12절에 보세요. 1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자, 아기 예수를 경배한 다음에 그 날 밤 하나님은 그들에게 역사 하셨습니다. 그래서 계시를 주십니다. 어떤 계시예요?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 헤롯을 만나지 말라. 다른 길로 네 고국으로 돌아가라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가 있었어요. 특별한 인도. 왜 돌아가면 어떻게 되요? 예루살렘으로 가면 헤롯은 서둘러 이 박사들과 그리고 모든 아기들을 죽이는 일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배했던 그들에게 하나님은 특별한 계획을 준비 하셨습니다.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예배의 보너스에는 하나님의 인도가 있어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역사의 어두움 속에서 내 삶의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 겸허히 엎드려 경배하는 자들에게 인생의 새로운 길을 우리 인생의 미래를 인도하실 하나님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주께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주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민족이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새로운 날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앞날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당분간 보너스에 관심을 갖지 마십시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십시다.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비우시고 이 땅에 오신 주님. 그리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보배로운 피를 흘리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 구원의 주님. 그 주님 앞에 엎드려 내 최선의 사랑의 사랑을 드리며 감사를 드리며. 주님 감사합니다. 경배를 드립니다. 이 예배를 배울 때 그리고 예배를 배우는 성탄이 될 때 우리 민족에게는 새로운 내일이 내 인생의 장에 새로운 하나님의 인도가 함께 하실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할렐루야! 기도하십시다.
광림교회 김선도 목사님의 주일설교입니다
성탄에 복 받는 가정
누가복음 2:1-14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면, 옛날에 밤잠을 자지 아니하고 성탄 트리를 만들고 연극을 준비하며 뛰어다니던 참으로 행복한 추억들을 회상하며 동심을 돌아가게 됨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성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교회에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이 성탄 성극을 준비하였습니다. 바비이라고 하는 어린이가 베들레헴의 여관집 주인역을 맡았습니다. 바비의 부모님들은 손님이 오면 융숭하게 대접을 하는 친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비는 여관집 주인의 역을 하면서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에 찾아왔을 때에 성극의 대본대로 "미안합니다. 이 여관에는 방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가 돌아서 나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소년은 늘 눈물이 글썽이게 되었습니다. 며칠을 연습한 후 성극을 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을 찾아왔습니다. 문전에 서서 이 소년은 대본대로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그 소년은 대본에도 없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잠깐 들어오셔서 차나 한잔 들고 가시지요." 이것이 동심의 세계의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성탄절은 온 세계의 가정이 성탄절로 인해서 축복을 받는 세계의 명절입니다. 서구의 성탄절은 흩어졌던 온 가족이 집으로 돌아와서 음식을 나누며 정담을 나누고 선물을 주고받는 날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구정과 같습니다.
처음 성탄절의 기록을 보면 가정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호적을 하러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정혼한 요셉과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어린 아기를 낳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말구유에 예수님이 탄생했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homeless-people이 노숙하는 곳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노상에서 탄생하신 예수님, 말구유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어떻게 우리 가정이 복된 가정으로 성탄의 은총을 입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온 세계의 가정의 명절인 이 성탄절에 우리가 축복을 가정이 되기 위해서 세 가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의 가정에 평화의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축복의 가정이 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성탄의 메시지는 평화의 메시지입니다. 세계 제 1, 2차 대전 때에 성탄절이 되면 정전 협정도 없이 서로 전쟁을 멈추고 적들과 먹을 것을 나누고 선물을 나누며 피차간의 가정을 그리고 향수에 젖는 날로 보냈다고 합니다. 저 멀리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태어난 예수님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거친 세상, 살벌한 세상, 서로 물고 뜯으며 싸우는 이 세상에서, 성탄절의 평화의 왕이 우리 가정에 태어나게 될 때에 그 가정에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절의 축복입니다.
한 달 반전에 저희 가정에 7번째 손자가 태어났습니다. 이름을 호산이라고 했습니다. 이 이름은 "호산나! 호산나!"라는 말이 좋다고 제 손자인 호백이가 지어준 것입니다. 저도 집에 함께 있으면서 어린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기도하며 순산하기를 바랬습니다. 마침내 한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소리를 지르며 이 가정의 가운데 뉘어질 때에 온 가정이 변화되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기뻐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는 바로 어린 아기가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신비스럽습니다. 우리 가정에 손자 한 명이 태어나도 그렇게 기쁘고 즐겁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평화의 왕으로 우리들의 가정 한 가운데 태어나게 될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탄생될 때에, 그리고 그 아기 예수님을 믿음으로 맞이하게 될 때에 우리는 기쁘고 감사하게 되며 365일을 평화의 날로 행복을 누리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한 유대인이 "행복의 비결"이라는 책에 행복은 건강, 재물, 아름다움, 즐거움, 조화 등이 있어야 된다고 갖가지 조건을 썼습니다. 그는 그 책을 유대인 랍비에게 읽어보라고 드렸는데 그 유대인 랍비가 그 책을 읽어보고는 그 많은 조건들이 다 갖추어져도 불행해 질 수 있으며 행복을 위해서 한가지 꼭 필요한 것이 있다고 그에게 말했는데 그것은 바로 "평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돈과 권력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평화가 없이 다투기만 한다면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평화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이 우리 가정에 탄생될 때에 늘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행복의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광림 교회에 있는 스태인드글래스를 자세히 보시면 색유리 조각들이 모여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상징하고 성령과 교회를 상징하며 숲 속에 불타는 호렙산, 웨슬리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조화를 이루어서 위대한 예술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조각나고 모난 것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뭉쳐지게 될 때에 아름다운 조각품처럼 아름다운 축복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가정입니다. 우리 가정에 평화가 임할 때에 이 살벌한 시대에 주님을 모시고 참으로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2. 어린 아기 예수를 찬양하고 예배할 때에 행복한 가정이 된다.
성탄절 때에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천군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께 찬양을 하고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Christ(그리스도) + mass(천주교의 미사)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즉 그리스도에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지 않는 성탄절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백화점 앞에 가보면 산타클로스가 사슴들이 끄는 썰매를 타는 것이 성탄인 것으로 상징을 합니다. 그러나 처음 성탄절의 이야기에는 산타클로스가 없습니다. 서구 사람들은 주일 예배를 잘 드리지 않다가도 성탄절과 부활절 때에는 예배에 꼭 참석을 한다고 합니다. 성탄절 때에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성탄절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성탄절이 가까워 올 때마다 고향에서 어린 시절에 공산치하에서도 어떻게 하면 그 날만큼은 마음껏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기쁘게 지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옛날의 추억에 행복감을 느끼게됩니다. 성탄절 성극을 할 때에 제가 모세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억압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을 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모세역을 할 때, 공산치하에서 억압받는 가운데 그 성극을 하게 될 때에 저는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공산당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새벽에 성도들의 가정을 찾아다니며 그 앞에서 캐롤을 부르고 찬양을 하며 성도들과 뜨거운 정을 나누면서 성탄을 지냈던 그때를 생각할 때에 그것이 바로 참 성탄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점성학을 연구하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이상한 별을 보고는 예물을 들고 베들레헴에 찾아온 것은 예배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왕 앞에 경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카스파라는 동방박사는 황금을 가지고 예수님께 드렸는데 황금을 드렸다고 하는 것은 인간 소유의 최고의 것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넬콰이어라는 동방박사는 사상과 영향력을 상징하는 유향을 드렸습니다. 발타진이라는 박사는 몰약을 드렸는데 예수님의 시체를 썩지 않게 하기 위해서 몰약을 드렸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 정성을 다해서 예배드릴 때에, 어린 아기 예수님 앞에 경배하고 찬양할 때에 큰 축복이 여러분의 가정에 임하게 됨을 믿습니다. 찬양하는 성탄, 예배하는 성탄이 바로 축복의 상징입니다.
3. 주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는 가정에 축복이 임한다.
성탄절은 홀로 지낼 수 없습니다. 혼자서 지내는 성탄절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지내는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자, 외로운 자를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홀로 성탄을 맞이한 경험이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성탄을 맞이하게 되면 한 달 동안을 분주하게 지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텅텅빈 기숙사에서 홀로 성탄을 맞이했습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창가에 앉아 홀로 성경을 펴고 성탄에 관한 성경 구절을 읽고 로마서를 읽었습니다. 홀로 보내는 성탄절은 적적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저를 늘 사랑해 주시던 미국인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도 홀로 성탄절을 맞이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그 할아버지에게 선물할 큰 구두를 한 켤레 사 가지고 홀로 계신 그분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제가 찾아가자 그분은 반갑다고 저를 끌어안으셨고 제가 드린 그 선물을 붙잡고 너무나도 기뻐했습니다. 둘이서 식사를 하며, 서로를 위로하며 성탄절을 지냈던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홀로 지낼 수 없는 성탄절에 너그러운 마음,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살벌한 세상 속에서 성탄절에 선을 베풀고자 하는 선한 마음, 사랑의 마음을 가질 때에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여러 해 전에 카돌릭 교회의 "마리세리노"라는 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영화에서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가 오갈 곳이 없을 때에 수도원에 가서 수도사의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다락에 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곳은 수도사들조차도 들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이 소년은 그 방을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도사는 그 방은 금단의 방이라 수도사들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라고 소년에게 말을 했으나 소년은 몰래 그 방을 들어갔습니다. 그 방에는 다른 것은 없고 예수님이 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고(古)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한참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그 소년은 예수님이 얼마나 추우실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소년은 담요 한 장을 훔쳐 가지고 벗은 몸으로 있는 예수님의 상을 덮었습니다. 그 소년은 예수님이 시장해 보이는 것처럼 느끼고는 매일 아침마다 빵 한 덩어리를 예수님께 가져다 드렸습니다. 동심에 젖은 이 소년이 정성을 기울이는 동안에 이 소년은 예수님과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소년이 예수님께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보고 싶다고 호소를 합니다. 이 소년의 애타게 부르짖는 모습을 보시고는 예수님이 잠시 사라지셨다가 나타나셔서 그 소년의 어머니가 천국에 있으니 함께 가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이 소년이 굶주리고 추운 예수님을 돌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이 소년에게 있었던 지극한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신비스러운 영화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실직을 당한 신체 장애자들 95명을 비행기로 제주도에 모시고 가서 서귀포에 있는 호텔에 모셨습니다. 그분들은 건강한 사람들도 출 수 없을 정도로 기쁨에 넘치는 춤을 추었습니다. 그분들은 그 다음날 아침에 일출봉에 올라갔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일출봉에 오르려는 그분들을 제주도 도지사가 119 구조대원들과 부녀소방대원들을 동원해서 신체장애자들을 부둥켜안고 일출봉을 올라가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해가 뜨는 모습을 보는 그분들에게 부녀소방대원들께서 따끈한 커피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크리스천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을 베푸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 가정이 어떻게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축복을 받은 성탄에 평화의 왕을 우리 가정에 모시는 믿음이 있을 때에, 어린 아기 예수님을 찬양하는 예배가 있을 때에, 주님의 이름으로 선을 베푸는 사람들의 가정에 성탄의 축복이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님의 주일설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
누가복음1:26-33
우리 모두가 이 시간 목사라고 하는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전하려다 보니 하나님이 사람을 세워서 말씀을 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에 담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 이 말씀은 나를 위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구나.' 이렇게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만 그 설교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그 말씀이 우리의 눈을 밝게 하고 우리의 병든 곳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으면서 '성령님, 내 영의 귀를 열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 무척 어려운 때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설교로서 끝나는 시간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수 주 전에 저는 누가복음 1장을 읽다가 천사 가브리엘이 나사렛이라고 하는 작은 촌에 사는 처녀 마리아를 찾아가서 그에게 소식을 전한 내용의 말씀을 보고 새삼스럽게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천사가 이 처녀에게 찾아가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눅1:28절). 이 구절을 킹 제임스 버전(KJV)과 같은 영어 성경은 "은혜를 크게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라고 번역하여 은혜를 보다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번역을 했든 간에 천사가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라고 했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저는 이 대단한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크고 영화로우신 하나님,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 너무 광대하셔서 작은 것은 하나도 눈에 안 들어올 것 같은 그 하나님이 나사렛이라고 하는 작은 촌에 살고 있는 평범한 처녀에게 찾아와 '내가 너와 함께 한다. 평안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답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위대하시고 크시고 놀라우신 분이면 상대하는 사람도 좀 체면이 서는 사람을 상대해야 할텐데 저 시골구석에 있는 보잘 것 없는 한 처녀에게 찾아와서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날따라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야, 이거 보통 기사가 아니구나.' 하고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요즈음이야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온 세계 여성들이 추앙하는 대단한 인물이 되었지 않습니까? 지난 2천년 동안 여성 중에 가장 위대한 명예를 누린 사람을 들라면 누구나 마리아를 꼽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를 따라갈 여성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리아를 너무 추앙하다 보니 많은 사람이 자기 이름을 마리아(Maria)로 정해 놓고 자기도 마리아라고 우쭐거리면서 살았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라는 이름이 자꾸 사용되다 보니 마리아에서 조금 변형된 비슷한 이름들만도 20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마리아, 마리, 미리암, 이런 것들이 다 마리아라는 이름에서 변형된 것입니다. 게다가 남자들도 마리아를 너무 좋아해서, 어떻게 하면 마리아를 남자 이름으로 쓸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나중에 결국은 이름을 약간씩 바꾸었습니다. 마리오, 마리온, ...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자랑스럽게 자기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만 보아도 마리아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언젠가 미국에서 조사를 했더니 마리아 혹은 마리아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미국 여성이 372만 명이나 된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하는 것을 제가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사실 마리아라는 이름은 본래 그 의미가 그리 좋지 않은 이름입니다. 비통 혹은 고난, 슬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의미만 보면 그렇게 매력을 느낄 만한 이름이 절대 아닙니다. 그럼에도 마리아라는 이름이 이토록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된 것은 마리아라고 하는 처녀가 예수님을 낳았다는 사실 때문일 것입니다.
만일 천사 가브리엘이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유명해진 마리아를 찾아와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말했다면 차라리 수긍이 갈 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 가브리엘이 처음 나사렛을 찾아와 마리아를 만날 당시 그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였습니까? 1장 48절에 보면 마리아는 자기 자신을 일컬어서 "비천한 계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하찮은 존재였습니다. 동네 사람에게조차 그 존재가 미미했던 평범한 처녀에 지나지 아니했습니다. 더욱이 그가 태어나서 자란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유대 나라 마을 중에서도 가장 후진 마을 아닙니까? 예수님이 나사렛이라고 하는 이름을 달고, 나사렛 출신 예수라는 그 딱지 때문에 얼마나 멸시를 당하고 불신을 당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나사렛이라고 하는 그리 명예롭지 못한 동네 출신에다가 그곳에서도 이제 내일 모레면 목수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사는 어떤 총각하고 결혼하게 되어있는 처녀였기에 "비천한 계집"이라는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날마다 대패질이나 해가면서 먹고살아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서 유명할 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남자한테 시집가는 여자가 대단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흔히 말하듯 여자로 태어나서 나이가 차서 어떤 남자에게 시집가게 되고, 시집가서 살다 보니 자식도 낳게 되고, 자식을 기르다가 그 일생을 마치게 되는 그런 평범한 운명의 여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크고 광대하시고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그런 비천한 한 여자를 눈여겨보시고 "마리아야, 너야말로 은혜를 입은 자니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고 말씀하셨다니 이것이 어찌 사소한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야, 이것 참 대단한 일이다.'하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은혜의 파격성
여기서 우리는 은혜의 파격성을 다시 한 번 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격에 안 맞는 대우를 하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가 격에 맞아서 하나님이 그렇게 잘 봐주셨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가 잘난 것도 없고, 명성도 없고, 가문이 좋은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니고, 무슨 공로를 세운 것도 아니고, 하나님 마음에 드는 어떤 특별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 이 모든 자격 없는 것을 무시해 버리시고 무조건 사랑해 주셨기에 은혜인 것입니다. 파격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임한 은혜가 바로 이런 파격적인 은혜였습니다.
언젠가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스톰스(Storms) 박사의 말을 다시 한번 인용하지요. "은혜란 당신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당신의 무공로로 잃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당신의 선함과 자랑할 만한 것을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그것이 구원이든 건강이든 장수든 부귀든 그 무엇이든 은혜일 수가 없습니다. 은혜는 우리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파격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파격적인 은혜를 마리아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해서 낳을 여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와서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을 가만히 읽어보십시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을 처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셔서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벌써 오래 전부터, 어떻게 생각하면 마리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부터, 마리아의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그를 아셨고 사랑하셨고 그와 함께 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그와 함께 계신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것이 파격적인 은혜입니다. 기독교만이 이런 은혜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만이 이런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십니다.
언젠가 영국에서 비교종교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모여서 수련회를 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비교종교학이란 기독교, 불교, 회교, 힌두교, 이런 종교들을 다 함께 놓고 비교하며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도 연구할 수 있는 학문이고, 안 믿는 사람도 연구할 수 있는 학문입니다. 이 비교종교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모였으니 얼마나 요란하겠습니까? 그 시간 그들의 연구 과제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서 독특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분명하게 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종교에 대해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는 학자들이 모여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교리가 무엇인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의미의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하는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우리가 성탄절을 맞아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태어나신 그 사건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우리는 흔히 이것을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교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비교종교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신이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내용이 조금 다를 뿐 다른 종교에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꼭 기독교만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중심이요, 기독교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비교종교학자들에 따르면 기독교 외에도 신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하는 그런 종교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활 교리 역시 기독교만 가지고 있는 교리라고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여러 주제를 놓고 티격태격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때 C.S. 루이스라고 하는 캠브리지 대학의 유명한 크리스천 교수가 그들이 토론하는 장소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한참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여러분은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토론을 하고 있습니까?"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서 독특한 게 무엇인가를 가지고 우리가 토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건 쉬운 문제인데요.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이 있다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은혜가 기독교의 독특한 면입니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루이스의 말을 놓고 다시금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들 모두 과연 은혜가 기독교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교리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만이 은혜를 갖고 있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아무 조건을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다니 얼마나 굉장한 은혜입니까? 아무 조건을 달지 않고 오직 믿기만 하면 영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니 얼마나 대단한 은혜입니까? 이것은 오직 기독교만이 갖고 있는 은혜입니다. 마리아와 같은 비천한 여자를 찾아오셔서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말씀하시는 그런 은혜는 다른 종교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고 무조건 자기 자녀로 삼아 주셨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은혜입니까?
이런 은혜는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소위 피안에 이르는 8개의 길이라든지, 힌두교의 인과응보 교리라든지, 또 유대교에서 가르치는 율법이라든지, 회교가 이야기하는 계율이라든지, 이런 것들 안에는 은혜라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에게 스스로 구원을 쟁취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손수 구원해주시고 인간의 어떤 노력도 요구하지 아니하시는 이런 은혜는 다른 종교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에게 찾아오셔서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라고 말씀하는 이 은혜,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
그런데 이 은혜를 마리아만 받는 것입니까? 저는 누가복음 1장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를 보면서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비천하고 하찮은 마리아를 아시는 하나님이었다면 오늘 나를 아시는 것도 틀림없다! 그렇게 초라한 여자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함께 하셨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저는 마리아를 보면서 이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감격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하시던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성탄의 감격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성탄의 기쁨이 어디에 있습니까? Merry Christmas가 왜 merry입니까? 왜 성탄이 기쁘다고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비천한 나를 찾아 오셨기 때문이요, 찾아오신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은혜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탄이 기쁜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독일의 유명한 설교자 헬무트 틸릭케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탄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 있든지 찾으러 오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성탄의 메시지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찾아오신다. 그리고 모든 것이 절망에 다다른 듯이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의 기회는 정말 시작된다는 데 있다." 좀더 쉽게 이야기하면, 내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마리아를 찾아오셨던 하나님,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모두를 찾아오신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다는 데 성탄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내가 절망에 빠져 고통을 당하며 허덕이고 온 천지가 캄캄해 보여도 그 순간에 하나님이 나를 찾으시고 나를 통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진리를 가르쳐주는 데 성탄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가 체험한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와 같은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마리아처럼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 가운데는 유명한 분들도 가끔 계시긴 합니다만 그런 분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길에 나가서 반나절을 돌아다녀도 저를 안다고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평범합니다. 그리 부자도 아닙니다. 가문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잘난 것도 별로 없습니다. 한국 사람이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미국 사람 옆에 갖다 세워놓으면 잘나지 못했습니다. 우린 다 못난 사람들입니다. 여자고 남자고 간에 하나님이 동양 사람을 만드실 때는 좀 실수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내놓을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찾아오시고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말씀합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우리가 험한 인생고의 파도가 쉴 날이 없이 몰아치는 망망한 대해와 같은 이 세상을 살다 보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믿음을 끝까지 붙들고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이미 체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가장 뛰어넘기 어려운 장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하나님이 계시면 어디 계시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해 버릴 만큼 절박한 상황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냐 안 계시냐를 가지고 의심하는 판국에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 세상이 험하기 때문에 어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믿었는데 오늘은 믿기가 힘들다고 하는 생각을 가질 때도 있다는 말입니다.
과거의 선지자들도 이런 시험에 빠진 일이 있었습니다. 또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이런 시험에 빠진 때가 많았습니다. 제가 잘 아는 몇 분도 평안할 때는 그렇게 주님을 위해 살고 그렇게 주님을 잘 섬기다가도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고통의 수렁에 빠지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부정하더라고요. 우리 모두는 연약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믿음의 혼란을 겪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어떤 때는 내가 잘못해서 화를 자초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내가 게을러서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젊어서 함부로 살다가 나이가 들어서 고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예수 잘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으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을, 내 머리만 믿고 내 젊음만 믿고 건방지게 까불다가 결국에는 화를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이 내가 잘못해서 당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잘못해 당하는 것은 전체의 20 퍼센트 정도도 안될 것 같습니다. 대개는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잘못해서 내가 뒤집어쓰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나라가 경제 위기를 당하자 이제 IMF라고 하는 이상한 괴물이 나타나서 지금 나라를 달달 볶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것이 우리나라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요,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일 때문에 굉장히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예전에 우리는 IMF라는 이름을 들어본 일도 별로 없습니다. IMF하면 'I am fine'으로 알았지, 언제 우리가 'I am fired'라고 스스로 생각한 일이 있습니까? 언제 우리가 'I am F학점을 받았다' 거나 '나는 F다' 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요즈음 IMF라는 말을 가지고 이처럼 별의별 이야기들이 다 돌고 있습니다만 아무튼 IMF가 우리를 참 힘들게 하는 시어머니임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은 대부분 내가 잘못해서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의 지도자가 뭔가 잘못해서 당한 것입니다. 정부가 잘못해서 당한 것입니다. 기업이 잘못해서 당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려온 모든 관행이 잘못되어 당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나 없이 모두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분노가 있습니다. 마음에 억울함이 있습니다. '나라를 잘 다스려 달라고 세워 놨더니 나라를 이 꼴로 만든 게 누구냐, 기업 경영을 잘 할 줄로 알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상 앞에 앉아서 열심히 일을 했는데 회사를 이 꼴로 만든 사람이 누구냐' 하는 생각을 하면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경유착으로 인해서 일어난 일이든, 정부 주도의 경제정책 때문에 빚어진 일이든, 검은 돈 거래 때문이든, 부정직한 수치 때문이든, 아니면 방만한 경영 때문이든, 무책임한 지도자들의 언동 때문이든, 위기에 적절히 대응할 때를 놓친 때문이든, 국제 사회의 신용을 잃어서이든, 무슨 이유를 대든 간에 결국 오늘날 우리가 당하는 여러 가지 고통은 대개가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당하는 고통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당하게된 고통이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라고 생각하니 우리 마음에 울분과 분노가 있는 것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기업들의 대부분은 돈 많은 아버지를 가진 아들이 어설프게 사업한답시고 벌려 놓고 이리 저리 손을 대다가 돈이 부족하고 잘 안되면 아버지에게 달려가서 돈 달라고 사정해서 돈을 집어넣고, 그러다가 또 돈이 모자라면 또 아버지께 손을 벌리기를 반복하는 아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아버지가 "나, 이제 돈 없어. 내가 이제 너를 도와줄 수가 없어. 이제 네가 알아서 해야 돼." 라며 도와주기를 거절하니까 아들이 그제야 정신이 나서 뭘 좀 제대로 해 보려고 하는데 잘 될 리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기업은 벌렁 나자빠지고, 하는 사업은 사업대로 잘못되어버리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다가 돈 없으면 정부에 손 내밀어서 돈 얻어서 쓰고, 잘 안되면 뇌물 갖다 주고 금융 지원 받는 식으로, 국민의 돈인 세금을 무조건 막 받아다가 맘대로 집어넣고 방만하게 문어발 식으로 사업을 경영했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이제 IMF 시어머니가 와서 이제는 돈 못 준다고 하니까 정부가 돈을 못 내어 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 아우성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로 인해서 당하는 어려움은 전부 사원들에게,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그 사원과 노동자들에게 목매고 사는 식구들에게 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아침에 목이 날아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아침에 부도가 나 버렸습니다. 멀쩡하던 기업이 연쇄 부도가 나는 바람에 함께 넘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를 위해서 보증을 서 준 것이 화가 되어 집까지 다 날려 버리고 길바닥에 나앉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 잘 하는 사람을 보고 너무 좋아서 돈을 갖다 맡기면서 쓰라고 했는데 그 돈을 다 날려버렸습니다. 나라가 잘해 줄 줄로 알고, 안정적일 줄 알고 증권시장에 투자했다가 몇 배의 손해를 보고 거지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을 보십시오. 이렇게 경제 상황이 어려워지고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고통을 당하는 처지가 되자 사람들은 "내핍하자. 아끼자. 절약하자." 하고 새삼스럽게 호들갑을 떨어 댑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게를 열어 놓고 그저 매일매일 벌어서 살던 사람들이 손님이 끊어지자 모두 아우성입니다. 이제 해가 바뀌면 물가가 얼마나 뛰어오를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전에 백만 원 가지고 살던 사람이, 백만 원을 쥐고도 50만 원을 가지고 사는 꼴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고통이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 마음에 화가 있습니다. 분노가 있습니다. 사업도 잃어버리고, 가정도 잃어버리고, 가정이 깨어지고, 그 동안 모아놨던 돈도 날리고, 고민 고민 하다가 나중에는 병까지 들어버린 사람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말을 안 하겠습니까? "내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면 회개라도 하겠지만, 내가 그렇게 성실하게 하려고 노력했고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겠다고 애를 쓰면서 사업하고, 애를 쓰면서 장사하고, 애를 쓰면서 직장을 다녔는데 이게 무슨 꼴인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왜 이 어려운 일을 하나님이 미리 막아주시지 않았는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사전에 나에게 경고라도 해 주셔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잠잠하면서 내가 너와 함께 한다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이런 원망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누구나 다 그런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무슨 유행가도 아니고 벽에 붙여놓은 무슨 경구도 아닙니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인데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상황이 모순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아마 이런 시험에 빠져있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와 함께 한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소위 운명이라고 말하는 모든 것까지도 통제하시고 지배하시는 전능하신 만유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헤아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떨어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통제하고 계시고 이 만물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까지도 다 간섭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을 믿으라
그렇다면 나에게 일어난 고통을 하나님이 모르고 계셨을까요?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이 어려움을 하나님이 모르고 계셨을까요? 천만예요.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왜 나에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계시고 또 이 모든 일들을 다 알고 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입에 쓴 것이라도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시면 허락하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실 때, 이 좁고 험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 결과적으로 나에게 선이 되고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라고 판단하시면, 그 결말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아무 말도 않으시고 나를 그냥 그 길로 밀어 넣어버리십니다. 밀어 넣으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씀도 안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이렇게 될 것이라는 암시도 안 주십니다. 그냥 밀어 넣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가만히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이 되지 않고, 우리에게 복이 되지 않는 일은 일절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허락과 함께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 안에는 참 고통스러운 일을 당한 가정이 있습니다. 그 아들이 미국 미시건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굉장히 유망한 인재로 촉망받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믿음도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 아들에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이 가정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금방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직접 대놓고 말은 하지 못해도 앞으로 반년이 지나고 일년이 지나면 저는 이 말을 꼭 할 작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허락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이 사건이 이 가정에, 또 세상을 떠난 그 아들에게 선이 되고 복이 된다고 하나님이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요? 하나님이 그 가정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반년 후나 일년 후에 꼭 그 말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신데 잠깐 낮잠 자느라고 모르고 계시는 사이에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상, 그것은 우리에게 선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형들이 그 어린 나이의 요셉을 질투하고 미워해서 결국 노예로 팔아먹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임마누엘입니다. 요셉의 기사를 보면 중요한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꼭 말씀하시는 한마디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별명이 임마누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자연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요셉에게 함께 하셨다면, 형들이 잔인하게 그 동생을 노예로 팔아먹는 그 자리에서 왜 침묵하고만 계셨는가? 하나님은 그 때 무엇을 하고 계셨단 말인가?' 형들이 "형이여, 살려다오. 살려다오. 잘못했어. 살려다오." 하며 울부짖으며 몸부림치는 동생을 굴에서 끌어내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노예로 팔아먹을 때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셨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하나님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분명히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니라."
하나님은 요셉에게 한마디도 안 하셨습니다. 15년 동안 왜 그가 그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15년 내지 20년이 지나고 나서 드디어 요셉은 스스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아하, 하나님이 나에게 이 잔인하고 피눈물을 쏟지 아니할 수 없는 고통을 허락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하는 사람으로 완전히 바뀌었지 않습니까? 창세기 50장 20절을 보십시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쉽게 말하면 이런 말입니다. "형들이여,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고 했고 사실 많은 해를 끼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악을 선으로 바꾸어서 나도 살고 당신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작정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한동안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 헤맬 수도 있습니다. 요셉은 15년 동안이나 헤맸습니다. 우리도 왜 부도가 났는지, 왜 이렇게 생활이 갑자기 어려워지는지, 왜 이렇게 직장을 얻지 못해 방황을 해야 하는지 헤맬 수 있습니다. 기도도 잘 안나옵니다. "하나님!" 하고 울부짖다가도 속에서 화가 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런 일을 나에게 허락하신 데는 분명 선한 뜻이 있다는 믿음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생명입니다. 이 고난이 나중에는 축복으로 바뀐다는 믿음을 꼭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오늘밤에는 우리 가정에서 눈물이 떠나지 않지만, 내일 아침에는 기쁨이 찾아온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고난의 길을 걸어가면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날이 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허락된 이 고통도 선한 뜻을 가지고 허락된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항상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과 다른 차이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어려운 고통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 앞으로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고달픈 삶이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절대 의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통이면 여기에는 선이 있다. 여기에는 복이 숨어있다. 그러므로 기다리면 하나님이 이 고난을 통해서 나를 축복하실 것이요,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것이다." 여러분이 이런 고백을 쉼 없이 하시면 하나님이 그 믿음대로 반드시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금년 말과 새해에는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확연하게 드러나서 어디를 가든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간증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연동교회 이성희 목사님의 주일설교입니다
임마누엘
이사야 8:5-10, 마태복음 1:18-23
성탄절은 예수님께는 가장 슬픈 날이지만 가장 기쁜 날로 만드셨다. 하나님 없던 사람을 하나님 있게 하셨고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예수님의 탄생 800년 전에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한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의 목적이다. 이런 의미를 예수님 오실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셨다. 성탄 주일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탄생 때에 주어진 이름의 의미를 통하여 성탄의 의미가 살아나게 하자.
1. 성탄의 방법
사람이 세상에 오는 방법은 부모님의 몸을 통하여 온다. 그러나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시려 오시는 예수님은 죄인의 방법으로 오실 수 없다. 그 방법이 초자연적인 방법인 처녀가 잉태하여 이 땅에 오는 방법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이며 단절된 자체가 죄이다. 단절은 하나님께 대한 죄악이며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 죄를 범한 인간은 절대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탄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후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2. 성탄의 이름
이사야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 한다. 그 외에도 그리스도, 인자, 하나님의 아들, 선한 목자, 등 예수님의 이름은 많다. 태어나실 때에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나셨고 구원자 외에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나셨다. 죄가 분리라면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으면 죄와 멀어지고 멀어졌던 하나님과 함께 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고 하셨다. 임마누엘은 그 이름이 구원이며 그 이름에 힘이 있다.
3. 성탄의 목적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려는 목적은 성취된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은 성탄의 목적을 성취하신 것이다. IMF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만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IMF이다. 하나님은 큰 날개로 우리를 감싸고 계시며 원수를 패망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을 하나님이 없는 백성이 결단코 이기지 못한다. 이 하나님은 "세상 끝날 까지 나와 항상 함께 하리라"고 하신다. 임마누엘로 오신 주님과 함께 구원을 체험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용기를 가지고 승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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