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주일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십니까?(행19:1-7)

공 상희 2007. 5. 23. 14:37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십니까?(행19:1-7)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십니까?(행19:1-7)


성도 여러분! 대개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성령을 체험하는 이 모든 신앙 생활을 하나의 사상이나 관념적인 것으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것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결코 아니라 실존적으로 실제적으로 체험되어져야 신앙생활의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실존적인 신앙이 되게 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속에 임재해야 합니다. 즉, 성령을 받아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만이 성경의 모든 말씀도 실존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요, 설교를 해도 기도를 해도 찬송을 불러도 실존적인 것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철학에는 여러 가지 학파에 있는데 그 중에 실존주의 철학이라고 하는 학파가 있습니다. 이 실존주의(Existentialism)가 발생하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역사가들이 소위 암흑 시대라고 말하는 중세기에는 신앙심이 극도로 부패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종교의 부패성과 세상의 타락을 보고 마틴·루터(Martin Luther)는 96개 조항을 내걸고 종교개혁을 단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종교적인 개혁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문학, 철학, 예술에 있어서도 새로운 사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계몽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몽주의적인 문학이나 계몽주의 철학이 성행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 신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주장은 형식주의 내지는 관념주의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다면 마치 설계도는 고층 빌딩이지만 정작 그 사람이 살기는 조그만 초가집에서 사는 것과 같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결국 그들은 현실에 헛된 욕망만 심어준 관념론 이상주의를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관념 철학에서 반발적으로 생겨난 사상이 바로 실존주의입니다. 그런데 이 실존주의도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키에르케고르 같은 사람들에 의해 발전된 하나님을 인정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샤르트르나 까뮈나 니체 같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있습니다. 아무튼 실존주의는 현실적이고 체험적이고 사실적인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태평양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믿는 기독교 신앙, 예수복음은 관념적이지 않습니다. 그저 교회나 다니고 성경과 교리만 잘 알아서 관념과 사상을 아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진정한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 체험이 예배때마다, 그리고 날마다의 생활속에서 있어져야 합니다. 주님을 만날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뜨거운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이 내 안에 들어와 체험되어져야 그의 신앙은 확실하고 생명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받는다고 하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관념적으로 믿던 하나님을 내 속에서 현실적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되는 것도 아니요, 어떤 직분을 맡아서 잘해 나간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요, 성경을 잘 알고 외운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이 성령의 도움으로 실존적이며 체험적으로 살아 움직여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 감정과 지식과 의지와 내 인격 전체를 기울이고 내 생명까지라도 투자할 수 있는 전인적인 신앙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전인적이라는 말은 영혼과 육체를 모두 포함한 총체적 인간이란 말입니다. 형식적으로 교회만 왔다갔다 하는 것은 실존적인 신앙, 체험적인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야만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체험적이지 못하고 관념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교회의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인들이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니까 찬송도 기도도 힘이 없고 생명력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실존적인 체험이 없는 영적 어린 아이임음을 분별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사람들은 모였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한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사랑하는 태평양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을 받은 분들입니까? 에베소 교회 교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성령충만한 사도 바울에게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교회생활에 열심은 있지만 성령님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니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원래 아볼로라고 하는 젊은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아볼로는 학식도 많고 성경말씀도 잘 알아서 잘 가르쳤습니다. 아볼로는 설교도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아주 논리적이고 유창하게 잘했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한가지 매우 중요한 것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도 정작 아볼로는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증언을 무시했던 까닭입니다. 아볼로는 성경을 지식적으로 전하고 잘 가르치는 성경 선생에 불과했습니다. 아볼로는 깊은 영적 체험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기의 아는 것이나 충실히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뜨거운 성령체험을 하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치 비닐 하우스 안에서만 자란 식물처럼 영적으로 아주 연약한 성도들이었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이것을 파악한 사도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즉시 바울은 그들에게 성령 충만에 대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에베소 교인들은 성령충만을 받게 되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처럼! 우리 태평양교회도 성령충만이 불붙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태평양의 일군 여러분! 지금까지 형식적으로 혹은 관념적으로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니지는 않았습니까? 그냥 습관적으로 교회 다니지는 않으셨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다고 했는데 무슨 성령을 또 받으라고 하느냐고 비난 하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강조하면 그것을 샤머니즘이라고 비웃어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코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무엇이라고 질문합니까? 19:2에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질문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3년간 따라다니며 전도도 하며 섬겼던 제자들이 12명입니다. 그 외에 여러 여자들도 주님을 따라 다니며 일했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수 제자는 예수님을 향하여 무어라고 했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까지 신앙 고백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3년간 주님을 따라 다녔지만 성령을 실존적으로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7절에 보니까, 내가 너희를 떠나가야만 너희들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제자들을 위한 축복의 기도를 하시고 기도 동산에 가셨다가 기도 하신후 가룟유다의 배신으로 잡혀 십자가처형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 이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아주 간곡한 부탁을 했는데 그것은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3년간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성령님의 큰 능력을 수없이 체험하였지만 그 능력은 자신들과 무관하게 생각했던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영적 무능함, 영적 무기력함, 영적 성장을 포기했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의 소원보다는 육신의 포로됨을 회개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영적 변화를 경험하자 바로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고 강하고 담대한 일군이 되었습니다. 성령충만해져서 그들은 나가서 외치고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날에는 3천명씩이나 회개시키는 능력도 체험했습니다. 어떤 날에는 감옥에도 갖히고 두들겨 맞기도 하지만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게 살아갔습니다.


사랑하는 태평양의 일군 여러분! 성령님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라고 보내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입니다. 그러므로 역동적인 능력있는 성도가 되려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모셔들여야만 합니다. 성령님을 체험하고 순종하지 아니하고서는 영이신 하나님을 바로 섬길수도 없습니다.


또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나 인간의 총명과는 다릅니다. 그런데 이곳에 모인 성도 여러분은 모두가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이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속에 성령님이 활동하시고 계십니까? 성령님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속에서 주도권을 잡고 여러분을 지도하시고 끌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시는 방법은 육의 감정을 자극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만이 감화를 받아 고백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즉, 영과 진리로 예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체포직전에 사랑하는 제자들! 아직도 영적 체험이 없이 머리만 큰 제자들에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기도할 것이고, 기도하면 받게 되고 기도 응답까지 받으니 기쁨이 철철 넘칠것이라고 요한복음 16장 24절에서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지난 월요일, 화요일 부여 화성교회 성회인도를 하면서 성도들에게 성령충만이 왜 중요한가를 또 절감했습니다. 성령충만하지 못하니까 흑암의 권세에 붙잡혀서 울부짖는 영혼과 육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자유케 하시려고 오셨고, 또 성령을 선물로 주셨는데 주님을 섬기는 성도가 자유하지 못하고 기쁨이 넘치지 못한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성령충만과 상관없이 자기 생각 충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성령의 체험을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우리 모두 일평생 날마다 사모하십시다. 악한 마귀는 우리가 초청하지 않아도 찾아와서 정복하지만 성령님은 우리가 환영하고 사모하고 문을 열어 드리지 않으시면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사탄은 불법을 일삼는 존재이지만, 여러분이 받을 성령님은 신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을 부를 때, 기도를 드릴 때, 간절히 사모하는 심령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너희의 밤낮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우연히 임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침노하는 자에게 주는 선물이며 상급입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님과 관계된 신앙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오로지 성령충만을 위해 전심전력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