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만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충만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1:1-18
이 시간에는 충만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지까지도,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잘 모르고 기도해도, 그 기도에 합당한 응답을 주십니다. 우리가 잘 모르고 기도해도 응답이 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우리의 무지도, 우리의 불의나, 연약함도, 그리스도의 중보 때문에 재 해석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부족을 주님의 충만함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6절에“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분입니다(1,14절).
♣1절과 14절을 보면,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고,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태초는 창세기에 나오는 태초와는 의미가 다릅니다. ♣창세기의 태초는 대우주의 시작 즉 시간과 공간의 처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태초는 만물의 창조 이전, 곧 영원을 가리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다는 말은, 주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히 13:8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변함이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지성적인 면에서도 완전하시고, 능력적인 면에서도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늙게 되어 있습니다. 무릎관절도 약해지고 눈도 침침해지고 힘도 약해지고 기억력도 쇠퇴합니다. 판단력도 흐려집니다. 늙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지 마시고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 드려아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한한 존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무한하신 영원하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분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보게 하는 안경입니다(1절).
♣1절과 14절에 보면, 말씀이라는 단어가 네 번 나옵니다. 여기서 말씀은, 로고스라는 단어입니다. 사도요한이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헬라적 표현인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 헬라 말과,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까?’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선택한 접촉점이 “로고스(Logos)였습니다.
♣로고스개념을 발전시킨 철학자는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B. C. 535-475)입니다. 그는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되지만, 변하지 않는 로고스에 의하여 지배된다.”고 했습니다. 그의 이 말을 기독교식으로 해석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딱 맞는 표현입니다.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변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지배됩니다.
♣사도요한이 사용한 로고스를 성경 번역자들은 말씀으로 번역했고, 이 로고스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로고스이십니다.
♣그렇다면 성경학자들은 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하였을까요? 알렉산드리아의 교부요 신학자였던 오리겐은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종교개혁가 존 칼뱅은 “아버지의 영원하신 뜻을 계시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분이 내린 정의는 제가 볼 때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되기 때문 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보려거나, 하나님의 비밀을 보려거나,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안경을 써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너무나 작아서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현미경으로 봅니다.
♣너무나 멀리 있어서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망원경으로 봅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안경을 써야만 보이는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1, 14, 18절).
♣1절에 말씀이 하나님이시고, 14절에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셨는데, 그분이 독생자이십니다. 그리고 18절에 예수님은 독 생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빌립이 주님에게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빌립의 요청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요한복음 14:9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본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삼위일체로서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세상 적으로 성공을 해도. 이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공허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십니다(3, 10절).
♣3절을 봅시다.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십니다.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 인하여 존재합니다. ♣10절에는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십니다.
♣여러분! “진화론은 신앙이다”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진화론은 과학이 아닙니다. 과학적인 증거가 없습니다. 일종의 믿음입니다.
♣잉거솔 이라는 유명한 무신론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살던 동네의 시계방 주인은 기독교인인데. 잉거솔은 그 시계방에 자주 가서 사장님과 신앙적인 토론을 했습니다. 사장님은 온 우주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믿었고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잉거솔은 우주도 인간도 우연히 만들어진 진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 번은 잉거솔이 시계방에 갔더니 전에 보지 못하던 아주 아름답고 정교하게 디자인된 벽시계가 있었습니다. 잉거솔은 그 시계를 보고 물었습니다. “못 보던 벽시계가 들어왔네요.
어디서 들여오셨어요?”, “박사님, 저 시계는 저절로 생겨난 것입니다.”, “아니,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저절로 생기다니요?”“박사님이 항상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박사님 말대로 하면 인간은 저절로 생긴 것처럼, 이 시계도 저절로 생긴 것입니다.”그래서 진화론이 진실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의 창조주이십니다. 창세기 1:26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이 말씀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 우리의 모양, 우리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자연 법칙에 지배를 받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자연의 지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역 기간 동안에도, 자연 법칙을 뛰어 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 시키셨고, 물위를 걸으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십니다.
♣창세기 1장보면, 창조는 ‘바라’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 다음 있는 것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 때는 ‘아사’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목수가 재료를 가지고 무엇을 만드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아무것도 없는데 재료를 만들었다면 바라,입니다. 목수가 있는 재료를 가지고 무엇을 만들었다면 아사입니다. ♣우리는 아사는 할 수 있어도, 바라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이신 주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5. 예수 그리스도는 참 빛이십니다(4절).
♣4절에 말씀이신 주님 안에 생명이 있었는데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입니다.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물리적인 빛은 있지만, 참 빛 되시는 주님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인생은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인과 바다]로 유명한 헤밍웨이 아시죠? 세계적인 문호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안타깝게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유서에서 그는 자신의 영혼은 필라멘트 끊어진 전구처럼 고독하고 어둡다고 말했습니다. 세계적인 지성과 문학적인 재능으로 빛나던 사람인데, 안타깝게도 그의 마음 깊은 곳은, 피폐해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왜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어둠 속에 있었을까요? 그에게는 참 빛 되시는 주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영적인 면에서의 어두움은 죄악이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물리적인 어두움을 밀어내려면, 불울 비추면 됩니다. 영적인 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움을 물리치려면, 주님의 빛으로 충만하면 됩니다.
♣스바냐 1:14-15에.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15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이 말씀은 말세에 어두운 때가 온다는 예언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지면 대 환란의 시기가 옵니다. 그때에 온 세상은 캄캄해질 것입니다. 그때는 영적으로 어두운 날입니다. 구름과 흑암의 날입니다. 그때 어둠에 파묻히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참 빛 되신 주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참 빛이십니다.
6.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으셨습니다(14절)
♣11절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 14절에 보면,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육체를 갖고 태어나셨을까요? 하나님이신 그분이 왜 인간이 되셔야 했을까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두 가지를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은 이유입니다.
①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독생자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을 사랑하셔서 세상을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독생자를 보내실 이유도 없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②대속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로 인하여 범죄 한 사람들은 멸망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도 없었으며, 그 누구도 인간을 구원해줄 수 있는 존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죄의 삯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입니다. 구약의 대속 죄일 역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죄를 대속하신 것을 보여줍니다. 대속 죄일에, 대제사장은 황소에게 안수하여 자신과 가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제물로 드립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는 두 마리의 염소를 선택하여 안수를 합니다. 이 두 마리의 염소 중에 한 마리는 ‘레아도나이’라고 해서 하나님께 드려지고, 한 마리는 ‘레아사셀’이라고 해서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한 제물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레아도나이’는 도살해서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한 ‘레아사셀’은 머리에 안수하고 붉은 끈을 매고 광야로 보냅니다. ‘레아사셀’ 염소는 죄와 수치를 상징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염소를 향해 돌을 던집니다. 그러나 맞아서 죽으면 안 되니까 염소 주변에 돌을 던집니다. 이 염소를 끌고 가는 일을 처음에는 일반인이 했는데, 사람들을 염소와 똑같이 취급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제사장이 염소를 끌고 광야로 나갔습니다. 동쪽 광야로 가는데 10개의 쉬어가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아침에 출발해서 해지기 전에 동쪽 절벽에 도착을 합니다. 그리고 동쪽 절벽에 아사셀 양을 떨어뜨립니다.
♣염소를 떨어뜨릴 때는 염소가 절벽을 보면 무서우니까. 춤추는 자세로 염소의 앞발을 잡고 절벽을 보지 않게 해서 밀어서 떨어뜨립니다. 아사셀 양이 떨어져 죽으면 붉은 색 끈이 흰색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흰색 깃발이 올라가고 중간에 쉬는 곳에 있는 사람들이 연이어 깃발을 올리고 마지막에 감람산에서 하얀 깃발이 올라가면 성전에 있던 사람들은 시103:12로 찬양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여기서 동은 레아사셀 양이 있는 곳을 말하고, 서는 레아도나이 양의 피를 뿌린 지성소를 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역이 이런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가 처리되는 것입니다.
대속 죄 일에 행했던 그런 포퍼먼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보여줍니다. 로마서 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 인하여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야 할 우리들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속죄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속죄 사역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면 누구든지 죄사 함을 받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말씀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보게 하는 안경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빛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으신 구세주이십니다.
이 예수를 믿음으로 이 땅에서도 복 되게 살고 영원한 영생의 하늘나라를 상속 받으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