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부활절

우리 안의 가롯 유다 (종려주일)

공 상희 2019. 4. 13. 14:53

우리 안의 가롯 유다 (막 14:10-21)


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속죄의 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하는 구원의 기쁨과 위로부터 임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위에 더욱 넘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에는 “우리 안의 가롯 유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롬8:9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했고, 갈2:20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했습니다.


어러분 마음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이것은 구원과 관계 되고 영생과 우리 모든 삶과 관계가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예수님이 계신 여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고후13:5에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했습니다.


예수 말고 내가 있는 것도 두려운데 우리 속에 가롯 유다가 있다면 그것은 더욱 두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두 번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본문 21절에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제일 좋았을 뻔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가롯 유다는 무얼까요?


1. 교만입니다.


잠16:18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했습니다. 교만하면 패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 주간 넷째 날인 수요일을 사랑과 배신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그때 주님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사랑을 받았고 바로 다음에 가룟 유다로부터 배신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극과 극의 장면이 연이어서 나올까요? 그것은 가룟 유다의 오해에서 비롯된 예수님께 대한 분노가 깊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다른 제자들보다 똑똑했습니다. 계산이 빨라 돈 궤를 맡았고, 출신도 다른 열한 제자들은 북쪽 갈릴리 출신인데 유다는 남쪽 유다의 가롯이라는 도시였습니다. 가롯 지방은 교육여건이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엘리트 의식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조금만 소외나 무시당한 듯 싶으면 문제를 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유다는 비싼 향유를 허비했다고 그 여인을 책망할 때 예수님께서 도리어 자기를 제지시키고 도리어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승으로서 마땅히 제자에게 할 수 있는 것인데도 교만한 유다는 그것을 감정으로 받았습니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자기는 무시 받고 별 볼일 없는 여인을 두둔하시니 면박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까지 회계 맡으며 수고했는데 일개 무명의 여인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거냐? 그 격한 감정 가운데 마귀가 들어가 결국 유다는 예수님을 팔려고 결심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교만이 무섭습니다. 교만이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합니다. 많은 시험이 교만 때문에 옵니다. 우리 마음에 교만이 있다면 그 교만이 때를 만나면 얼마든지 큰 사고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의 가롯 유다는 우월감과 교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철저히 버리시기 바랍니다.


2. 내 생각입니다.


롬8:7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했습니다. 이처럼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판 다른 이유는 자기 야심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도 한 동안 그런 야심을 가졌는데 유대인의 왕 예수를 따르다 한 자리하려는 정치적 야심이었습니다.


가롯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런 야심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을 무수히 들었지만 귀로 흘려서 들었을 뿐 깊이 듣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이적과 기사 등 메시아의 표적이 나타날수록 자신의 야심은 힘을 더해갔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서까지 누가 크냐로 다투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점점 자기 기대와는 다르게 그 반대의 길로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을 찌르는 인기와 능력을 이용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왕이 될 채비를 하지 않고 여전히 비천한 사람들만 섬기며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다는 말씀만 하십니다.


이것을 본 가룟 유다는 너무 답답하고 속 터질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예수님에 대한 배신은 성만찬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요13:2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했고, 27절에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했습니다. 유다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참으로 달갑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 생각입니다. 유다는 야망을 비전으로 착각했습니다. 비전과 야망은 다릅니다. 비전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지만 야망은 자기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해도 내 생각이라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가 됩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자기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그냥 “하나님의 종이 여기 있습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하면서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그 소원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3. 탐심입니다.


히12:16-17에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가룟 유다에게 있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약점은 바로 물질에 대한 욕심이었습니다. 그가 옥합을 깨뜨려 부은 여인을 책망한 것은 선교와 구제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아 그것을 훔쳐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팔아먹을 것이 없어서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았으니 얼마나 탐심이 대단한 사람입니까?


이처럼 탐욕 때문에 믿음을 판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를 파는 것입니다. 이 욕심이 문제입니다. 이 욕심 때문에 신앙생활 바로 하지 못하고 이 욕심 때문에 세상은 온통 범죄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딤전6:10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했습니다.


이것은 가룟 유다에게만 있는 약점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그런 욕심이 한 가지 이상은 있습니다. 부자 청년은 모든 계명을 다 지켰지만 물질에는 아주 약했습니다. 다윗은 다른 것은 다 잘 이겼는데 이성문제에 넘어졌습니다. 베드로는 한 순간 자기 목숨을 사랑해서 거짓을 말했습니다.


4. 자존심입니다.


눅14:27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나를 죽이는 일이 가장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 자존심이 가장 강한 사람은 가롯 유다였습니다. 자존심이 때로는 어떤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잘못하면 마음 문을 닫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여러 차례의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향유 사건을 통해서 질책하시므로 유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적의 마음을 회개하기는커녕 반항함으로 예수님을 팔 결심을 했습니다.


주님은 최후의 만찬에서도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시며 그의 회개를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저건 나 들으라는 소리구나!”하고 자존심 소리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주님의 말을 듣고 근심하며 한 사람씩 “접니까?” 하고 질문했지만 그런 상황에서 유다는 콧방귀만 끼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유다에게 또 다시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그러시면서 “나를 파는 그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그는 차라리 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뻔하였느니라” 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자존심은 사탄이 주는 세상말로 몽니입니다. 이걸 빼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세상에서 누구도 환영하지 않습니다. 자존심 내려놓으면 젊은이들도 내 친구가 되고 어린이들도 내 친구가 됩니다. 만약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자존심 생각하셨다면 이 땅에 오실 수 있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 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교만, 육신의 생각, 탐심, 자존심 등 주님을 대적하는 마음을 방치한다면 이 시간에 다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죄들은 예수님을 두 번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을 큰 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앞으로 한 주간 동안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더욱 새롭게 변화되는 복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