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언 강해

새벽 잠언 강해 20장

공 상희 2019. 1. 25. 06:41

115,거룩한 삶의 지혜 (20:1-3)

 

이 시간에 거룩한 삶의 지혜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조그만 수영장을 만들고 오리를 사다 넣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오리가 물에 빠져 죽어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육해서 기른 오리는 깃털에 기름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물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믿는다고 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거룩한 삶의 지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거룩한 삶을 위한 지혜는 어떤 것일까요?

 

1. 우리 속에 말씀과 성령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1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포도주와 독주를 의인화시킨 표현으로 술에 취하면 이성이 마비되어 지혜 없는 자와 같이 거만해지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됨을 지적한 것입니다.

 

여기 거만하다.”는 것은 조롱하다, 멸시하다.’는 뜻에서 파생된 말로 술에 취한 자가 안하무인격으로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처럼 술이 들어가면 사람을 완전히 다른 인격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알콜이 독하면 독할수록 더 심해집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알코올만이 아니라 동물성 식품이나 기생충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기생충이 몸에 들어와 자신에게 유리하게 숙주의 행동 양상을 바꾸는 것을 숙주조정을 합니다.

 

예를 들면 고양이 기생충인 톡소플라즈마가 쥐에 감염되면 쥐가 고양이에 대한 공포감이 사라져 고양이에게 쉽게 잡아먹힌다고 합니다. 혹은 사마귀나 귀뚜라미 속에 꿈틀거리며 사는 연가시는 때가 되면 곤충의 마음을 조절해 물에 투신자살하게 하여 물에서 제 2의 생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개나 고양이나 덜 익은 고기나 잘 씻지 않은 채소 등 조심해야 합니다. 간이나 신장기능이 약하든지 사람 몸에 독이 들어 있으면 짜증을 많이 내거나 독해지기도 합니다. 우리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조심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계셔야 거룩해집니다. 성령이 거하시고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 충만함의 도수가 강할수록 좋습니다. 그렇지 않고 눈으로 귀로 자꾸 세상 것 여과 없이 들어오면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눈 귀 잘 지켜야 합니다. 거룩한 삶의 기초는 우리 안에 거룩한 것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나의 두려워 할 자로 삼아야 합니다.

2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으니 그를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니라왕의 진노는 생사와 직결되므로 왕을 대적하거나 거스르지 말고 순종함으로 조심하라는 교훈입니다.

 

왕이 항상 백성들에게 따뜻한 선정만 베푼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왕에게는 사법권을 넘어선 즉결처형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함부로 왕을 비난하고 모해한다면 참으로 두려운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거룩은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이 두려운 줄 알 때 가능합니다. 8:13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 할 자로 삼으라고 말씀합니다.

 

7:10에는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그러면서 21절에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

 

베드로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1:17) 했습니다.

20:17-18"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 대적하면 산산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하나님을 이긴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머리카락까지도 세시며, 영혼과 육체까지도 지옥에 넣을 수 있고,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이 세상 뿐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함부로 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훼방죄가 뭡니까? 안식일에 회당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예수님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었기 때문이라고 비난할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성령훼방죄라 했습니다.

 

성령의 역할이 뭔데 훼방하지 말라 했을까요? 성령의 역할은 예수를 나타내시는 건데 고의적으로 예수님의 이미지를 훼방 쳐 구원의 도리를 훼방한다면 용서할 수 어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단죄 같은 죄가 성령훼방죄입니다.

 

바울이 기독교를 핍박했지만 용서 받았던 것은 알지 못하고 인자 예수만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사울일 때 자기와 비슷한 나이의 예수를 육체대로만 알고 메시아라고 하니까 무지한 나머지 율법적 정의감 때문에 분노했습니다. 즉 사람 예수 인자 예수에 대한 거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나 이단죄는 그것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두렵다면 결코 지을 수 없는 죄가 성령훼방죄입니다.

 

3. 시험이 될 것들은 최대한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3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거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다툼은 감정만 악화되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최대한 감정이입을 피한 상태에서 해야 합니다. 다투게 되면 감정은 또 다른 감정을 낳고 또 재생산되면서 더 깊은 다툼에 말려들게 됩니다.

이처럼 거룩한 삶은 우리가 시험의 요소를 최대한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믿는 자는 예수 안에서 이긴 자이지만 그렇다고 시험조차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를 시험 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더 열심히 하나님 경외하면서 최대한 멀리하세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도 깨끗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더욱 지킬 뿐 아니라 우리 마음에 말씀과 성령의 포도주로 채우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시험될 것을 최대한 멀리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삶을 영위해 나가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16,은혜를 회복하라 (20:4-6)

 

이 시간에 은혜를 회복하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이 땅에는 큰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천국에서나 있을 수 있는 그런 성령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은혜를 유지하지 못하고 수년 혹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그것을 회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기 저기 은혜의 집회 다 쫓아다니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지만 그 때의 은혜를 회복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럼, 은혜를 어떻게 찾아 회복할까요.

 

1. 성경 말씀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4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이스라엘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9-10월에 밭갈이를 시작하여 10-11월에 파종하기 때문에 봄에 양식을 거두려면 찬비를 맞고서라도 밭을 갈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농번기 때는 하루 벌어 열흘 먹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게을러 일하지 않거나 힘들다고 이 핑계 저 핑계 일하지 않는다면 누가 동정하겠습니까? 일하지 않는 자는 수확물을 거둘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차갑고 질퍽거리는 날일지라도 후일을 위하여 밭을 갈고 또 갈면서 씨를 뿌려야 합니다.

 

우리 영적생활도 그렇습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여기 우기의 차가운 비는 각종 시험이기도 하고 자신의 영적 상태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은혜를 쏟고 나면 그 영적 환경이 그렇게 싸늘할 수 없습니다. 3:8에도 나오듯 범죄한 후 에덴동산이 얼마나 서늘해집니까? 이것이 죄인의 영적상태입니다.

 

심령이 답답하고 괴롭고 성경을 봐도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해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한 번 거룩을 맛본 심령이기에 양심은 극도로 예민해져서 죄는 물론 죄 아닌 것까지도 우리 심령에 정죄심이 되어 다가옵니다. 그것이 얼마나 비극이든지 사망이 왕 노릇하고 사탄의 저주가 있으며 지옥이 마음 중심에 있는 듯합니다.

 

그럼 방법은 없나요? 성경 말씀 속에 그 회복의 길이 있습니다. 성경을 몰라서 은혜를 잃어 버렸고 회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피의 복음을 이해하고 예수 안에서 이미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을 때 내가 은혜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은혜는 여전히 있는데 알지 못해 누리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농부가 차가운 비를 맞고 밭 갈고 씨를 뿌려야 하듯 자신의 영적 상태가 어떠하든지 나의 삶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상관하지 말고 말씀에 서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속죄와 아울러 영원한 영광과 함께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진정 그 은혜를 회복하게 됩니다.

 

2. 은혜는 기도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5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 여기 모략의 원문의 뜻은 상대방을 속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악한 계획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모략은 은밀한 중에 계획되고 실행되기 때문에 깊은 물과 같이 발견하기 힘들지만 명철한 사람은 사람과 사물에 대한 판단력이 뛰어나 악한 자의 숨겨진 모략까지도 분별해냅니다.

 

얼마에 고성 최전방 GOP에서 대형 총기사고가 났는데 어느 방송에서 대담하는 것 보니까 A급 관심사병이 되면 모든 일에 열외가 되기 때문에 후임들도 자동으로 선임 대접하지 않게 되고, 관심사병은 관심사병대로 후임들이 무시함에 극도의 스트레스 받아 모든 동료에 대해서 적개심을 품는다고 합니다. 이번 작전에 B급인데도 탄약을 주지 않고 빈총 가지고 나간 그 심정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군의 관심사병이 전군의 20%, 10만 명이 관심사병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많을까요? 누가 진짜 관심사병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정형편이 어렵다든지 가족을 잃었다든지 변심한 애인이 있다든지 누구랑 다투거나 무슨 좋지 않는 전력만 있어도 관심사병에 올려놓게 됩니다.

 

그러나 잠언은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 현명한 사람은 사람 중심의 숨긴 마음까지도 파악해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문에 심리학이라는 분야가 있습니다. 사람의 심리를 알 수 있다면 서로 이해하고 싸움도 덜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깊고 깊은 물 같으신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기도로서 알 수 있습니다. 고전2:10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그리고 16절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그런데 롬8:26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여기에 대해서 칼빈 선생은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나서 간구하게 되는 현상을 이렇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해야 하나님을 만납니다. 부족하지 않게 엎드려 혹은 생활 속에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모세처럼 대면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여 기도하고 있다는 생생한 현장감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마음으로 한 마디 한 마디 인격적으로 기도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고 은혜를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3. 진실한 사랑으로 회복할 수 있습니다.

6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여기 인자함이란 진실 됨이 없이 상대방에게 환심을 사려는 거짓으로 포장된 친절과 자비를 가리킵니다. 진실일지라도 상대방에게 잘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지 하나님을 닮아 아가페 사랑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천사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천사 노릇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막상 하루 해보면 우리 육신은 재미도 없고 피곤하고 더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예수님의 마음 가지고 사랑으로 섬긴다면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5:46-48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러므로 외식의 껍데기에서 나온 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진심으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낮아져서 사랑하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보다 낮은데 있는 사람들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14:12-14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84:11) 했습니다. 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가 없겠습니까? 우리의 잘못은 없는 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온전히 복음을 알고 복음에 서고, 항상 하나님을 대면하여 기도하고, 이웃을 위하여 늘 낮은 데 처하여 사랑함으로 잃었던 은혜를 온전히 회복하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117,의인의 믿음 (20:7-9)

 

이 시간에 의인의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성경 66권을 사람의 관점에서 표현한다면 의인행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1장의 말씀과 같이 인류가 타락한 이후 하나님의 은혜로 아벨 셋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의인들의 이야기가 계속하여 이어집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의인이 됩니까? 우리가 예수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의인되지만 좀 더 알아야 합니다. 영의 세계는 너무도 악해서 우리가 그 믿음을 강하게 붙들지 않으면 나의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혈을 믿되 담대하게 믿고 적용하고, 예수 안의 의롭게 새사람된 것을 믿되 이 의 없이는 난 살 수 없다는 주리고 목마를 만큼 사모해야합니다. 방법, 알아도 그만큼 원하지 않으면 될 수 없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것도 몰라서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믿음의 특징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럼, 의인의 믿음은 어떠해야 합니까?

 

1. 의에 목숨 걸어야 합니다.

7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의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온전하게 행하는 자란 모든 일에 완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불의를 거부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가는 의인의 생활태도를 가리킵니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쉬운 일입니까? 목숨 걸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옳다고 말할 때 나는 아니다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다가는 바보 되고 왕따 당하고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가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12:4) 싸우라고 말씀합니다.

11:36-38에는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은 세상이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죄도 아니고 의인데 왜 그럴까요? 의는 밝은 빛과 같아서 자신들의 죄가 밝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대조되기 때문에 싫은 것입니다.

딤후3:12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했습니다. 그래도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요셉 같은 핍박이 없어도 다니엘과 세 친구와 같은 시험이 없어도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내 심령이 죽기 때문입니다.

 

그의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후손에게까지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내가 바로 되지 않으면 후손에게도 복이 안 된다. 내가 자손들의 복을 막을 수도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삼사 대까지 이른다 했잖아요? 그러므로 내 성질도 죽이고 내 행실도 절제하고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의롭게 사는데 목숨 걸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8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그의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하느니라여기 눈은 통찰력을 말합니다. 옛날의 왕은 행정은 물론 사법권까지 가지고 있어서 심판 자리에서 선악 간에 판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얼마나 악합니까? 사실을 왜곡하여 교묘하게 꾸며대기 때문에 현실을 알지 못한 재판관은 잘못된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현명하고 지혜로운 왕은 꾐에 넘어가지 않죠. 요셉 앞에 형들이 곡식을 사러 왔습니다. 형들은 요셉인 줄 알지 못했지만 요셉은 다 알고 심문하지요. 다행히 형들이 교묘하게 꾸며대진 않았지만 만일 그랬다면 어떻게 요셉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훤하게 알고 계십니다.

이것을 흔히 코람데오라고 말합니다. 코람 데오(coram Deo)란 라틴어 그대로 발음한 것인데 라틴어로 코람은 '앞에'라는 뜻이고, 데오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이 두 단어가 합쳐져서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 용어는 특히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많이 주창했는데 당시 부패했던 중세 신앙 가운데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항상 하나님의 목전의식을 가지고 거룩하게 살자는 의미에서 강조했던 말입니다.

 

주일학교 동화에 참외 서리 이야기가 있죠.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남의 참외밭에 갔습니다. 아들에게 망을 보라고 세워놓고 아버지는 참외를 따고 있는데 망보던 아들이 "아버지 누가 봐요." 소스라치게 놀란 아버지가 허겁지겁 기어 나와 "어디서 누가 보냐?" 그렇게 하다가 두 번이나 머리에 군밤만 얻어맞은 아들이 세 번째 말합니다. “아버지, 이번엔 진짜예요. 하나님이 보고 계세요!” 이 하나님 앞에서의 의식이 바로 코람데오입니다.

 

139:1-12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신다는 생각 속에서 바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의식이 크면 클수록 분명하면 분명할수록 실족하지 않게 우리를 지켜 줄 것입니다.

 

3. 항상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9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이 말씀은 사람의 힘으로 누구든지 이 땅에서 의롭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10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잘 알아야 합니다. 내 스스로 의롭기 위해 애쓸 때 더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우리가 의롭자는 것은 은혜로 의롭자는 것이지 그냥 다짐이 아닙니다. 다짐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이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늘 승리의 복음에 서시고 또 늘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시고 이웃을 축복하여 더욱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방심할 때 넘어집니다. 시험이 옵니다. 우리가 저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전까지 방심해선 안 됩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처럼 기도 쉬는 죄를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태산 같이 높을지라도 우리가 이 은혜를 목숨 걸고 붙들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의인되기를 갈망하고 의에 목숨 걸고 하나님 앞에서 살며 늘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충만하여 온전히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의인 되시기를 바랍니다.

 

 

 

 

 

 

 

 

 

118,성경의 완전성 (20:10-12)

 

이 시간에는 성경의 완전성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복은, 독생자 예수를 주신 것과,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최고의 도전은, 성경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2000년 교리사에 삼위일체 기독론 인간론 구원론 성례론 종말론 등 수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논쟁은, 20세기부터 시작된 성경에 대한 논쟁입니다. 사탄이 집요하게 달려드는 이유가 뭡니까? 성경이 부정되면 그 어떤 내용도 다 부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다 하면 안 계시나요? 성경을 부정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못하나요? 블레셋에 빼앗긴 법궤 이야기처럼 사람이 말씀을 버리면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스스로 싸워서 진정 진리임을 스스로 입증합니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이 버렸지만. 주님은 죽으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셨고, 이를 집행하던 백부장도 예수님의 운명하심을 보고 그는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럼 성경은 어떤 점에서 완전할까요?

 

1. 성경은 공정한 저울추와 같이 정확히 달 수 있다는 점에서 완전합니다.

10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여기 저울추와 되는 돌과 돌, 에바와 에바라는 뜻으로, 저울추와 되나 말 같은 부피를 일컫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서로 무게가 다른 저울추와 되를 사용하여 부당이익을 취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11:1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했고, 16:11에도 공평한 저울과 접시 저울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저울추도 다 그가 지으신 것이니라했고, 본문에도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그토록 저울추에 대해서 강조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이 계량기들이 하나님의 잣대인 영원불변한 성경에 대한 예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케론으로서 자와 같습니다. 이건 0.001푼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저울에 달면 정확히 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벨사살도 하나님의 저울에 달렸고, 연보하는 가난한 과부와 부자의 헌금도 예수님 앞에서 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도들의 삶도 성경으로 달아보면 복을 받겠다 못 받겠다 달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가 없을지라도 성경을 알면 영분별도 예언도 정확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의심하는 것은 100% 사탄의 역사입니다. 성경에 대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인생의 좌표요, 구원의 안내서요,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요, 영원한 불후의 명작인 동시에, 성경은 아름다운 시요, 역사를 비취는 조명이요, 완전한 위로외 힘이요, 환희의 음악이며 그래서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로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원천이며 진리에 대한 완전한 교과서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죄는 성경을 가감 변조하거나 교묘히 해석해 악용하는 것입니다. 이건 천국과 지옥의 이정표를 바꾸는 일로서 악 중의 악입니다. 자기만 아니라 수많은 인생을 잘못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벧후3:16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했습니다.

 

2. 성경은 그 열매로서 그 온전함을 증명합니다.

11비록 아이라도 자기의 동작으로 자기 품행이 청결한 여부와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사람의 올바른 사상과 인격은 행동과 삶을 통해서 증명된다는 말입니다. 이건 어른만이 아니라 말 못하는 어린이도 마찬가지라. 아이들도 내면의 것들이 그의 표정과 눈물과 말과 행위로 나타냅니다. 착한 아이는 착하게 나타낼 것이고, 급한 아이는 급하게, 지혜로운 아이는 지혜롭게, 미련한 아이는 미련하게 나타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12:34-35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하셨습니다.

 

이처럼 삶이 잘못된다면 그 믿는 교리에 문제가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최근 구원파 사건은 그들의 교리가 잘못됐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교리는 칭의가 전부인 줄만 알 뿐 새롭게 되는 회개가 없으며 율법 자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며,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강조하신 율법의 교훈도 그들에게는 참고의 대상도 아닙니다.

 

이처럼 성경은 그 결과로 볼 때 참으로 위대한 책입니다. 성경대로 해서 나쁜 열매 맺은 적이 있습니까? 기도하라. 찬송하라. 사랑하라. 사도 요한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체험한답니다. 성경 그 자체가 놀라운 체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 역시 그렇습니다. 행해 보면 내가 믿는 도리가 맞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성경 이해가 잘못된 것인지, 성경 이해는 정확하나 적용에 불충하고 미숙한 것인지, 아니면 무엇이 문제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성경은 그 열매로서 그 말씀이 온전함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3. 성경을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볼 때 그 완전함을 깨닫게 됩니다.

12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께서 지으신 것이니라여기서 듣는 귀나 보는 눈은 진리를 깨닫는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이 들을 귀는 진리를 깨닫는 귀입니다.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셔야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눅10:23-24"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진리의 눈이 열린 자만이 깨닫습니다. 성령께서 눈을 열어주시면 그 진리의 오묘함과 위대하심에 놀라지만 육신의 눈으로만 보는 자는 이 시대에 적용할 부분 많지 않는 따분한 고전일 뿐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보는 눈은 성령께서 열어주셔야 보입니다. 육신의 눈으로만 보면 오늘날 우리가 활용하기에는 보잘 것 없어요. 그러나 성경을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볼 때 하나님 나라와 우리 영혼이 구원 얻기에 그 위대함과 오묘함과 완전함에 놀라게 됩니다.

 

그 뿐 아니라 역사 속의 위대한 사역자들에게 열어주신 것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더 확실하고 풍부하고 명료한 해석을 통해서 어둠 가운데 헤매는 영혼들에게 달려갈 길을 온전히 제시할 수 있도록 많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께서 친히 저자가 되사 기록하시고, 예수님께서도 성경을 무수히 인용하신 완전한 성경입니다. 성경 무너지면 다 무너지고 반대로 성경 붙들면 모두 회복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정직한 저울추와 같이 정확히 달려지고, 그 아름다운 열매로 진리임을 깨달으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경이 위대한 책임을 더욱 확신할 수 있는 이 귀한 사실을 확신하고 이 완전한 성경을 열심히 묵상하고 실천하시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119,성경의 만족성 (20:13-15)

 

이 시간에는 성경의 만족성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 영혼을 가장 복되게 하고 가장 기름지게 하는 음식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시편 기자는 시19:7-11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노래했습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에게 진정 만족할까요?

 

1. 부지런히 성경을 보는 사람입니다.

13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이 족하리라게으른 자에 대한 경고입니다. 잠언에는 게으른 자에 대한 경고가 많습니다. 게으르면 답이 없습니다. 국가도 어떻게 해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는 자에게 눈을 뜨라고 말씀합니다.

 

영혼의 양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보기에 게을러서는 영혼의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광야에서 만나가 언제 내렸습니까? 16:13-14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그리고 21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새벽에 내려 아침에 거두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지런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많이 읽어 닳을수록 좋습니다. 성경 깨끗한 건 자랑이 아닙니다. 보고 또 보고 일고 또 읽고 밑줄 치고 또 밑줄 치면서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여러분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속일 수 없어요. 사람은 먹은 것만큼 크고 힘을 씁니다. 영의 양식 많이 먹어야 믿음도 생기고 큰 사람 될 수 있습니다.

 

다윗 보세요. 119:147-148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했습니다. 다윗보다 더 분주하고 바쁜 사람 있을까요? 우리 육신 하나 추스르며 사는 것도 분주해서 이 난린데 왕의 몸과 마음 그리 편안한 자리 아닙니다. 그래도 성경부터 보았습니다. 그랬기에 그 엄청난 믿음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보세요. 쉬운 책부터 보세요. 신약부터 보세요. 많이도 좋지만 매일 빼놓지 않고 꾸준히 보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성경을 항상 가까이 하세요. 그렇게 하면 많이 볼 수도 있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진정한 영적 부요와 만족을 느낄 수 있습니다.

 

2. 알지 못해 갈등하더라도 계속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14물건을 사는 자가 좋지 못하다 좋지 못하다 하다가 돌아간 후에는 자랑하느니라이건 틀림없는 말입니다. 사지 않을 사람은 무조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살 사람은 좋다 나쁘다 싸다 비싸다 따집니다.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참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돌아간 후에는 그 물건을 잘 샀다고 자랑합니다.

성경도 처음 볼 때는 의문도 들고 갈등합니다. 그러나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모든 말씀이 값지고 자랑스런 보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이 밤송이와 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달콤하고 고소한 밤을 먹으려면 가시를 벗기고 또 단단한 밤 껍질을 벗기고 또 떫은 막을 제거해야 하는 것처럼 성경도 그러합니다.

성경을 봐도 처음에는 배경도 모르고 단어도 모르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더 큰 원인은 영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영의 흐름을 타지 못하면 이해되지 않습니다. 영적 체험이 없으면 무슨 말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 알고 나면 이보다 더 귀한 책은 없습니다. 믿으면 믿는 대로 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신비로운 책입니다. 성경은 쉬우면서도 어렵고 어려우면서도 쉽고, 다 해석한 것 같아도 다 해석했다고 볼 수도 없고, 보는 자의 관점에 따라 무궁무진하게 풀려나옵니다. 성경 주석 하나 가지고 있다고 다 아는 것처럼 하다가는 낭패입니다.

 

처음 예수 믿고 성경을 알고 싶어서 신학교 다니시는 전도사님에게 내촌감산 선생이 쓰신 구로자기 주석을 사다 달라고 해서 보는데 아는 사람이 봐야 알지 모르니까 더 혼란만스러웠습니다. 삶의 적용도 되지 않고 어디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습니다. 성경도 꿸 줄 알아야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보면서 전체적인 주제와 맥을 알아야 합니다. 총회헌법 대요리문답 제 5문에 성경은 주로 무엇을 가르치는가? 성경은 주로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어떻게 믿을 것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무가 무엇임을 가르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보면서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은 우리 구주이시며, 성령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구속사적이고 신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이걸 알면 답답하지 않습니다. 뭔가 우리를 위한 구원의 말씀일 것이다 라는 답을 가지고 성경을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3. 성경을 읽고 들을 뿐 아니라 행하는 사람입니다.

15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지혜의 우월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혜가 세상 사람들이 가장 가치 있다 생각하는 금이나 진주보다 더 가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했습니다. 그냥 지혜가 아니라 말하는 지혜니까 일종의 행하는 지혜입니다. 이처럼 성경에도 금과 같고 은과 같고 진주 같은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더 귀한 것은 그 말씀을 믿고 읽고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1:3에도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했습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께서 외치시던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곁에 있으니 복음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임합니다. 장래만이 아니라 당장에 복이 오기 시작합니다.

 

눈으로도 읽고 글로 쓰기도 하지만 입술로도 읽어보세요. 독서량과 속도에 매이지 말고 뜻을 생각하면서 읽어보세요. 음성으로 읽는 은혜도 대단합니다. 42장을 보면 율법을 읽고 해석만 해줘도 모든 백성들이 은혜를 받아 울며 회개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행하는 가치는 구원을 얻게 하고 영적으로 풍성함은 물론, 삶의 원동력 세상을 이기는 힘을 얻게 하며, 경제의 복, 건강의 복, 형통의 복, 승리의 복, 평안의 복 등 현실적 가치도 무한합니다. 그래서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습니다. 혹 음식 없이 살 수 있다 해도 성경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바쁘더라도 그 무엇보다 부지런히 성경 보고, 알지 못해 재미없고 의문 나더라도 기도하고 성경 보고, 또 읽고 들을 뿐 아니라 행하므로 우리가 알지 못한 만족하고 귀한 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120,성경의 은혜성 (20:16-18)

 

이 시간에 성경의 은혜성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성경은 얼마나 은혜로운 책일까요? 10년 전 영국 런던의 한 신문 편집자가 국회의원, 대학교수, 사업가, 작가 등 사회 각계 주요인물 1백 명을 대상으로 "만일 당신이 3년간 밀폐된 생활을 한다면 꼭 지니고 갈 3권의 책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라는 설문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응답자의 98%가 첫 번째의 책으로 성경을 꼽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은 교회를 다니지 않거나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고난을 당할 때 성경만이 용기와 위로를 주리라 믿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불신자들도 성경을 가장 귀하고 은혜로운 책으로 손꼽았는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경을 얼마나 보고 또 은혜를 받고 계십니까?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은혜를 받는 방법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은혜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말씀을 겸손한 자세로 받아야 합니다.

16타인을 위하여 보증 선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을 위하여 보증 선 자는 그의 몸을 볼모 잡을지니라이 말씀은 보증을 함부로 서지 말라는 교훈과 맥락을 같이하는 말씀입니다. 모세 율법에 동족에게 돈을 꾸어줄 때 이자를 받지 말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한 편으로는 채무액의 확실한 반환을 위해 전당을 잡거나 보증을 세우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다. 이런 보증 함부로 서주지 않는 사회에서 남의 보증을 서 준다는 것은 특별한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자기가 망할 것을 각오하고 보증 서 주었는데 이것이 보통 은혜입니까? 자녀가 보증 서 달라고 해도 그게 쉽습니까? 누구나 사업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임에도 불구하고 보증을 서주었다면 이건 특별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리 하나님께서 예수의 피로서 그리고 또 성령으로 영원히 구원하시고 복 주신다고 보증을 서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공자도 석자도 마호메트도 그 누구도 보증 서 주지 않았으나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히 책임지셨습니다.

 

성경은 그 보증의 말씀입니다. 보증서가 성경이에요.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대할 때 바로 이런 자세로 대해야 합니다. 무릎을 꿇고 겸손히 감사한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미 사랑으로 볼모 잡힌 종과 같이 감사하며 사모하며 어떤 말씀이든지 받아들이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나를 위해 독생자까지 주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주신 그 생명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이런 겸손하고 사모하는 자세를 가진 자에게 성경은 은혜로 다가옵니다.

 

2. 행할 마음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

17속이고 취한 음식물은 사람에게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의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정당하지 않고 부당하게 취한 음식이 당장에는 맛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당하게 취한 음식은 후에는 먹지 않음만 못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멀리는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가깝게는 양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자기 양심도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목전에 범죄하는 큰 죄가 될 뿐 아니라 속이고 취한 음식물은 후에는 그의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한 말씀처럼 그 끼치는 영향이 최악의 상태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대할 때는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지만 배우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그 지식이 나를 시험에 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 지식이 나를 교만하게 합니다. 그 지식이 나를 착각하게 합니다. 그 지식이 나를 건방지게 합니다.

 

그 지식이 나를 정죄합니다. 율법도 그렇고 율법이 아니더라도 그렇습니다. 성경의 여러 교훈이 율법처럼 다가와서 나를 정죄하여 시험에 빠뜨립니다. 자기 마음이 그렇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인들이 설교를 즐기기만 하고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무리 즐겁게 들어도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도 냉철해야 하나 가슴도 뜨거워야 하고 손발도 부지런해야 합니다. 말씀을 배웠으면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율법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주일성수를 배웠으면 주일성수하고, 십분의 일을 배웠으면 십분의 일도 하고, 사랑을 배웠으면 사랑도 하고, 성령을 배웠으면 삶에서 환영하고 인정하고 대화하고 간구하며 체험해야 합니다. 행할 마음 없이 배운 성경이 여러분에게 모래를 씹는 것처럼 다가오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즉 행할 마음 가지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행할 때 진정한 은혜가 나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듣는 자도 복되지만 행하는 자가 가장 복이 됩니다.

 

3. 적용 가능하도록 세밀한 지식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18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지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여기 의논과 지략의 원문은 예차라 해서 같은 단어입니다. 그 의미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어떤 일을 연구하고 도모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전쟁과 같이 중대한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착오란 존재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착오는 훈련 상황에서 이미 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수행하기 전에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으고 또 모아서 모든 지모지략이 완벽하게 수립되어야 합니다. 그래도 실전에서는 착오가 생깁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영적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교본이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과서는 훌륭한데 해석과 적용이 미비 되어 있다면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총도 쏠지 모른데 전쟁터에 나가면 되겠습니까? 대포는 있지만 어떻게 쏠지 모르면 무용지물입니다. 잠수함은 있지만 어떻게 활용하는지 모른다면 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배워도 어떻게 믿어야 할지 어떻게 삶에 적용해야 할지 막연하다면 어떻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구원 받는 법, 회개하는 법, 죄를 없애는 법, 율법의 정죄를 피하는 법, 방황을 종식하는 법,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가는 법, 사탄과 저주를 이기는 법, 성령 충만 받는 법, 전도하는 법, 기도의 응답을 받는 법, 치유의 은혜를 누리는 복, 복 받는 법,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 법 법,,, 그 세부적인 진리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체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 전쟁 속에 정말 확실하고 구체적인 말씀이 필요합니다. 지식의 말씀에 관심 갖기 바랍니다. 회중을 움직이는 웅변도 좋지만 세부적으로 잘 가르쳐야 하겠더라고요. 앞으로 이 부분 많이 연구하고 개발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방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활 잘하시려면 구체적인 삶에 불편 없는 세밀한 지식의 말씀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늘 보시고 성경에서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에 감복하여 감사하고 겸손한 자세로서 말씀을 받고, 한 마디를 배우더라도 행하기 위해서 배우고, 나의 구체적인 삶에 적용 가능하도록 지식의 말씀으로도 충만한 은혜롭고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121,은혜를 체험하려면 (20:19-21)

 

이 시간에 은혜 속에 살려면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은혜를 받는 것인지, 잠시만 아니라 항구적으로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인지 알지 못해 방황할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 은혜를 체험하며 살 수 있을까요?

 

1. 은혜 속에 살려면 말씀에 서야 합니다.

19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한담이란 심심풀이로 하는 잡담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더 나아가 알려져서는 안 될 사람의 비밀이나 근거 없는 헛소문을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러한 사람의 말에는 신뢰할 만한 근거가 없으므로 그를 사귀는 자는 오히려 큰 해를 입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잠언 기자는 미련한 자와 함께 어떠한 일을 도모하는 것이 결국에는 매우 불행한 일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영적 생활에도 얼마나 실없는 말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성경을 보면 율법주의 이단이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 오늘날 안식교도 비슷한 주장을 합니다. 예수 믿지만 안식일도 지켜야, 그러나 이것은 실없는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안식교인들은 모두 은혜 속에서 살아야 하는데 대부분 심령은 율법의 정죄에 사로잡혀 깡말라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어느 것 하나 맘 놓고 먹을 음식이 없습니다. 쪽발 가진 짐승이어야 하는데 그것도 피를 빼야 합니다. 그런 고기가 어디 있나요? 돼지고기, 닭고기, 비늘 없는 고기들이 즐비한데 양념에 이르기까지 그걸 피해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음식 하나 맘대로 먹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머리를 들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몰라 실없는 말에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 외 어떤 방법도 복음의 말씀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면 다 소용 없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을 보세요. 복음이 먼저 제시되잖아요?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복 주셨다면서 그 복음에 서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중에 높이 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이 복음 진리에 서는 믿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안정적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2. 은혜 가운데 살려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20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의 등불이 흑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이는 십계명의 제 5계명을 범하는 자에게 대한 경고로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가 당하게 될 처참한 결과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등불이 흑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는 말은 인간이 내리는 법적 처벌에는 벗어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부모에게 저주하는 자식에게는 어떠한 희망도 없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20:9만일 누구든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이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면 어떻게 됩니까? 6:2-3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영적 진리도 동일합니다. 우리의 영의 아버지 하나님을 높이고 경외하는 자에게 은혜가 임합니다. 경외하지 않으면 그 심령에 빛이 비칠 날이 없습니다. 흑암이 계속됩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하셨습니다. 나를 낮추면서 늘 하나님을 높이면 은혜가 임합니다.

그래서 시34:9-10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84:11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늘 찬양하세요. 어린이처럼 하나님을 받드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은혜를 경험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라 하지 않았습니까? 늘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엎드려 나를 낮추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체험시켜 주십니다.

 

3. 은혜를 체험하려면 연단을 거쳐야 합니다.

21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속히 잡은 산업이란 정당하지 못하게 이룬 재산이거나 부정하지는 않지만 수고 없이 갑작스럽게 얻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15장에 탕자가 아버지의 유산을 갑자기 받아 부자가 되니까 허랑방탕하지 않았습니까?

 

미국의 한 언론사가 1000만달러(120억 원) 이상의 복권에 당첨돼 5년이 지난 70명을 대상으로 행복지수를 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예상과는 달리 70명 중 무려 56명이 복권당첨 이후 더 불행해졌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처음에는 집과 차를 바꾸며 행복을 만끽했으나 결국에는 가정파탄에 빠졌다고 회고했습니다.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않는다는 잠언기자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은혜의 세계도 이와 같습니다. 무슨 이유로 갑작스럽게 큰 은혜를 체험하면 그 은혜를 감당하지 못하고 오래 지속하지 못합니다. 교만해지거나 잘못하여 다 쏟아버립니다. 기본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기본도 없고, 겸손의 기본도 없고, 가르침을 존중함도, 교회를 존중함도, 경건하게 사는 경외하는 기본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주인공이 되려면 경건생활을 기초에서부터 배워야 합니다. 복음의 말씀과 아울러 경건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한 시간의 기도도 없이 은혜생활이 가능할까요? 하나님 나라가 그냥 임합니까? 그만큼 받들어야 합니다. 시험이 와도 이기고,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이 경건생활이 잘 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요1:16-17에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그러므로 우리 모두 아버지께서 이미 예수 안에서 허락하신 은혜를 믿고, 기도하고 찬송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더욱 겸손하며, 근심하며 깨어 기도하는 경건한 영적 생활이 갖추어져 하나님과 그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위대한 믿음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122,성경을 이해하라 (20:22-24)

 

이 시간에 성경을 이해하라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성경이 아무리 생명의 말씀일지라도 그 내용을 알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일이야말로, 최초의 성경을 쓴 것만큼 중요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요셉이 시위대 감옥에 갇혔을 때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했고 그 해석한 대로 성취되므로 애굽의 위대한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하고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잘 이해하고 그걸 믿으면 성경은 우리에게 애굽의 총리, 바벨론의 총리보다 더 위대한 예수와 함께 높이 된 참으로 위대한 구원과 영광과 승리를 우리에게 안겨다 줍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벧후3:16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성경을 잘못 해석하다가는 멸망에 이른다. 왜 이단이 생깁니까?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떤 자세로 성경을 해석해야 할까요?

 

1. 육신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22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율법에는 범죄자에 대해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보복하는 동해보복법이 일반적인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잠언에서는 그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금지라기보다는 이 법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감정에 치우친 과다한 징계를 가하는 경우가 빈번하여 보복의 악순환을 초래함은 물론 보복하는 자까지 범죄자가 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기다리라는 것은 감정적으로 복수하지 말고 정당하고 합리적이며 신중한 태도를 취하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욱하는 감정이 문제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경해석에다 비유해 보면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에 대해서 신중해야지 함부로 육신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려 들어선 안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한 것처럼, 알지 못한 것은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며 연구하며 기도하며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알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확실히 알지 못하면 몇 년이라도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벧후1:19-21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했습니다.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기다리라는 것은 영감을 말하며 육신적으로 사사로이 해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도 육신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2.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23한결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 20:10의 교훈이 반복된 것으로 상거래에 있어서 남을 속이는 부당한 방법을 취해서는 안 됨을 경고합니다. 한결 같은 저울추여야지 속이는 저울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연구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저울추는 성경입니다. 성경 전체의 내용에 위배된 해석이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지만 언제나 결론은 성경을 떠나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도로부터 물려받은 신학이 정통신학입니다. 이 신학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개혁주의 신앙은 오직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원리를 따릅니다.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으로 해석하고 신약성경은 그리스도 중심인데 구약성경의 바탕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박윤선 박사는 계시의존사색이라고 하였습니다. 계시는 성경인데 오직 성경을 기초로 사색 연구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답을 이미 가지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세상 연구와 다른 것이 그것입니다.

 

세상 연구는 답이 나중이지만 성경연구는 답을 먼저 가지고 접근합니다. 본문을 전혀 모른다 할지라도 이건 틀림없이 예수 이야기고 복음 이야기라는 확신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을 완벽하게 이해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혹시 본문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성경의 결론을 떠나지 않는다면 안전할 뿐 아니라 사용하심에 따라 그것도 일종의 메시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울추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저울추가 변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는 김기동 귀신론도 자기 체험일 뿐 성경 어디에도 없는 저울추에 입각한 해석이 아닙니다.

이장림의 시한부종말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의 그 날과 그 시는 알지 못한다고 하셨고 곳곳에서 그런 내용이 있다면 그 기준에 따라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 곳곳에서 그리스도만이 구주라 했으면 그 기준을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해야지 성경을 떠난 해석은 수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성령의 도우심이 해석의 열쇠입니다.

24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사람은 자기 앞 길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우리 일생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만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 앞에 겸손하고 그를 두려워하고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성경 해석에도 절대의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저자이신 성령께서 깨닫게 하여 주십니다. 14: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하셨습니다.

죤 칼빈이 그런 사람입니다. 칼빈의 주석에서는 다른 개혁자들보다 성령의 역사, 성령의 인도, 성령의 조명에 대한 강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의 신학자라는 평가까지 들었는데 그만큼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천 년 이상 말씀에서 벗어나 왜곡된 길을 걸어가던 교회를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도록 방향을 전환시킨 종교개혁을 완성시킨 인물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천재적인 머리가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다면 해석자는 단지 이성에 근거한 학문적인 방법으로 종교의 경전을 윤리적으로 해설하는데 그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잠11:2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은 안다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가르쳐 주지 않으세요. 하나님께서는 알려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도와주십니다.

그렇다고 연구도 안 하는 자를 도우시는 건 아닙니다. 기본이 되어야 하나님도 알려줄 수 있습니다. 준비도 최선을 다해 해야 합니다. 성경지식에 자만 교만 모두 좋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사랑하사 성경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 선물은 성경을 육신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성경을 떠나지 않으며 겸손한 자에게만 열립니다. 성경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어 풀어야 할 비밀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일생 바른 가르침만 받도록 기도할 뿐 아니라 성경을 잘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종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123,영에 속한 사람 (20:25-27)

 

이 시간에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고전 2장과 3장을 보면, 사람은 크게 세 종류가 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 그리고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은혜로 사는 사람이고, 육에 속한 사람은 본능대로 사는 사람이고, 육신에 속한 사람은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지만 아직 육신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령 따라 사는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영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1. 율법 아래 있지 않아야 합니다.

25함부로 이 물건은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덫이 되느니라여기 살핀다는 원어적 의미는 조사하다. 숙고하다. 탐색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무엇을 바치겠다고 서원한 후에 그것을 아까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바치지 않을 방법을 찾는데 그렇게 하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덫이 된다는 것입니다.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랬습니다. 자기 소유를 팔아 바친다고 했다가 아까운 마음에 빼돌렸는데 그것도 모자라 사도 앞에서 거짓말하다가 성령을 속인 죄로 죽음을 당했습니다. 함부로 서원했던 것이 덫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신앙에도 덫을 놓지 않아야 합니다. 그 덫은 먼저 율법의 덫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 앞에서 맹세했습니다. 율법을 준수하겠노라고, 24:3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맹세했습니다.

 

그런데 율법 아래서 행복했나요? 율법이 주어진 후부터 맹렬한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졌습니다. 율법에 덫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진 것이라(3:19). 그 법에 내가 죽는 것입니다.

율법이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는 건 좋은데 율법 아래 있게 된 후로 온갖 탐심과 사망에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율법의 저주를 당하셨으니 이제는 나를 정죄하는 율법에서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율법적인 사람이 되어 날마다 자신을 바라보며 자아심판하면 심령에 평안이 깃들 날이 없습니다. 성령의 은혜 속에 살 수 없단 말입니다. 보혈의 복음으로 철저히 자기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정죄의 덫에서 해방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덫은 게으름의 덫입니다. 6:9-11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신앙생활에도 게으르면 답이 없습니다. 열심은 엔진과 같습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따라 살려면 율법 아래서 나와 은혜 아래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살려면 다음 몇 가지 부수적인 것도 참고해야 합니다.

 

2. 삶에서 잘 분별해야 합니다.

26지혜로운 왕은 악인들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를 그들 위에 굴리느니라키는 알곡과 가라지를 골라내는 도구입니다. 지혜로운 왕은 키질하듯 악인을 정확히 구별해 내어 징계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가라지든 돌맹이든 키질 앞에서 구별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분별만 잘하는 것 아닙니다. 단호합니다. 여기 타작하는 기계가 나오는데 그 기계의 바퀴는 나무로 만든 3-4개의 바퀴에 톱날이 박혀 있어 소가 끌면 바퀴가 돌면서 타작하는 콤바인인데 당시로서는 대단히 현대화된 농기구입니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하시면서 너를 날카로운 타작기계로 삼으리라는 말씀에 나오는 기계가 이것입니다.

이처럼 지혜로운 왕 앞에 서 있을 악인은 없습니다. 지혜로운 왕은 범죄한 악인을 잘 분별해 낼 뿐 아니라 악인에 대하여 엄격하고 무거운 징벌을 가함으로 다른 사람이 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본을 보입니다.

 

이처럼 은혜 안에 살려면 육에 속한 것을 분별해 엄격히 처리해야 합니다. 용서 받은 것으로서는 부족합니다. 옛사람까지 처리해야 합니다. 처리할 뿐 아니라 나의 원수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분별이 어려울 때가 있어요. 옛사람에 속한 것이지만 선행을 표방하고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심령 안에서 자꾸만 거부하는 감이 옵니다. 마음은 아시아인데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니다 하시는 것입니다. 자꾸 막히고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꿈에 마게도냐에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봅니다. 이처럼 성령의 흐름을 분별해야 합니다.

 

찬송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흥미 위주의 찬송에는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즐거운데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부담이 옵니다. 가족 사랑도 그렇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애착한다든지 지나칠 만큼 마음 아프게 깊이 오래 생각한다든지 그러면 시험이 옵니다. 선행일지라도 출처가 어디냐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방황합니다. 그래서 도구가 필요합니다.

 

그 도구는 바로 본문의 키입니다. 키가 무엇일까요? 22:31-32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키는 시험입니다.

 

이처럼 우리 삶에서 승리하거나 넘어지면서 무엇이 영에 속한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내 심령에 어떤 반응으로 다가오는지 면밀히 감찰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일을 하는데도 자꾸 약해진다면, 그 일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거나 잘못인지, 일 자체는 좋은데 방법이 잘못인지, 무엇이 잘못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3. 선한 양심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27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여기 영혼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운 생활을 준수하도록 요구하는 양심의 활동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 양심은 하나님의 등불과 같습니다. 양심의 등불이 밝아야 바로 살게 됩니다. 양심을 어떻게 밝힐까요? 하나님의 말씀 성경으로 밝힙니다. 119:105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하지 않았습니까? 성경 열심히 보면 양심이 밝아집니다. 바로 살아야지 하는 마음의 소리가 커집니다.

 

그러나 말씀을 멀리하고 세상 소리를 많이 들으면 타락합니다.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은 것처럼 무뎌집니다. 이처럼 죄가 죄인 줄도 모르면 성령의 은혜를 모시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늘 성경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속에 온통 주를 위해 살 마음으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가득 채우세요. 늘 찬송하고 늘 기도하고 감사하고 순종하고 전도하고 늘 기쁘게 사세요. 이것이 영혼을 밝게 하는 것이요, 그런 심령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깃드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 안에서 더욱 신령하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시고 영에 속한 사람이 되기를 더욱 갈망하십시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 율법과 게으름의 덫에서 벗어나고, 육신적인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떠나며, 말씀으로 충만하여 우리 양심에 선함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에 속한 신령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124,성공의 안전장치 (20:28-30)

 

이 시간에 성공의 안전장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안전한 삶을 추구합니다. 지금 서울에 난데없는 싱크홀이 발생하여 시민들이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특히 지하철이나 도로나 국회나 청와대나 중요한 국가기관의 주변의 땅이 내려앉아서 혹시 땅굴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북에서 연결된 굴이 아닐지라도 국가 중요기관의 지하가 뚫려있다면 이건 어떻게 악용될지 모르는 좋지 않는 현상입니다.

 

안전만큼 귀중한 것이 있겠습니까? 정치를 하든 사업을 하든 목회를 하든 신앙생활을 하든 실패 없이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장치가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돈 있는 사람들은 유능한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데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더 위대하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도우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급하게만 서둘지 말고 우리 마음의 문을 열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린다면 언제나 보혜사 성령께서는 우리의 영육 간의 삶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성공을 돕는 안전장치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1. 인자에는 진리가 안전장치입니다.

28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의 왕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이 말씀에 왕이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 2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인자 즉 사랑으로 백성들을 평안하게 보살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불의로 인해서 사회질서가 파괴되고 혼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엄격하게 진리를 적용하여 공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2가지는 어느 한 가지라도 빼서는 안 됩니다. 만약 뺀다면 그 나라는 공포정치로 인하여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하거나 아니면 무질서와 혼란에 바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왕은 항상 이러한 원칙들을 기억하고 지킴으로서 나라를 평안히 다스리게 됩니다.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잠언이 통치자의 좋은 교과서입니다. 국민을 사랑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 정권을 견고히 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포악한 정권은 언제 망해도 망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백성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솔로몬의 말이 맞습니다. 인자만이 아니라 공의로워야 한다고, 공의의 장치가 빠지면 안 된다. 그래야 나라도 굳건히 서고 정권도 견고하다. 이 얼마나 위대한 진리입니까? 사랑하되 원칙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처럼 사랑의 안전장치는 진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2. 능력의 안전장치는 지혜입니다.

29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여기 백발은 단순한 흰머리가 아니라 긴 인생의 여정을 통하여 습득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노인의 지혜라고 하지 않습니까?

 

즉 젊은이들은 무슨 일이든 의욕적이고 정열적으로 행동하는 반면 노인들은 그렇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신중하고 지혜롭게 일을 처리하는 장점을 가졌습니다.

여기서 능력의 안전장치가 지혜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힘만 있다고 의욕만 있다고 지혜 없이 나서다가는 낭패를 당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천히 사탄은 조급하게랍니다. 조급하게 서두르면 실패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칼 융은 말하기를 "조급함은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마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조급증이 오면 사탄으로 생각하고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좀 더 지혜로우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게을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준비 잘해 열 번 실수할 것 한 번의 실수도 없다면 가장 이상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할 때 온전한 지혜에 도달하기까지 성급하지 말고 기도하고 연구하고 실습해야 합니다.

 

3. 교육에는 징계가 안전장치입니다.

30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징계에 대한 교훈인데 징계가 너무 약해서는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징계는 징계다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징계를 무서워 하지 않으면 교육적 효과는 덜어집니다.

 

그렇다고 가혹하란 말도 아닙니다. 깨달을 수준이면 됩니다. 그리고 어릴 때는 매일 수 있지만 성인에게는 부드러운 말 한 마디가 더 아프게 들릴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교육법은 칭찬과 징계를 하는 것입니다. 칭찬과 아울러 징계를 할 수 있다면 그는 이 시대의 최고의 교육가일 것입니다.

 

기억에 남는 선생님들은 어떤 분들입니까? 열심히 가르치면서 우리가 잘하면 칭찬도 하면서 잘못할 때는 엄하게 매도 드는 그 분들입니다. 이처럼 아이들은 판단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칭찬과 징계를 통해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현대교육에서는 징계를 교육학에서 빼버렸습니다. 감정으로 무분별하게 폭행하는 것도 문제지만, 징계 자체를 금하는 교육도 문제입니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부모가 아이들을 징계하면 경찰이 와서 잡아갑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양육권까지 빼앗아갑니다. 악마 같은 사람에게 적용해야 할 것을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건 너무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3:13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13:24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29:15에는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19:25에는 거만한 자(배움 받기를 거부하는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경성하리라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삼하7:14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하나님도 징계하셨는데 왜 징계가 잘못입니까? 오늘날 교육은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교사가 아이들에게 매를 맞고 영상에 찍혀 유포되고 인권이 유린당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징계의 안전장치를 빼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덴동산의 선악과는 하나님의 안전장치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 배우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갖 사랑과 은혜를 다 베푸시지만 안전장치만은 확실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사랑에는 진리, 능력에는 지혜, 교육에는 징계의 안전장치를 달고 열심하여 온전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성공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