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잠언 강해19장
105, 성령의 은사 (잠 19:1-3)
이 시간에도 “성령의 은사” 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받겠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도움입니다. 도우시는 은혜가 은사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는 열심을 내어 하나님을 섬기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열심과 관계가 큽니다. 몸과 마음 드려 열심히 섬기면 우리가 알 수 있게 은사가 나타납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성령의 은사는 잘 감당하면 능력이 되고 복이 되지만, 잘못 감당하면 잘못을 저지르고 패가망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실 때 잘 감당하면 귀한 도움과 도구가 되지만, 잘못 감당하면 그것으로 시험에 들 수 있듯이 은사가 그렇습니다.
♣교회사를 돌이켜보면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서 몰라 시험 들어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습니까? 잘못된 영으로 말미암아 교회를 대적하고 혼란시키는 이단과 암초가 생겨나고, 혹은 인륜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또 귀신이 들어 폐인이 되거나 귀신을 쫓아낸다고 물리적 힘을 가해서 생명을 앗아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에게 대해서 우리가 잘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에 있어서 무엇을 유의해야 할까요?
1. 무엇보다 교만을 조심해야 합니다.
♣1절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여기 “성실하게 행하는 자”란 ‘그의 완전함에 걷는 자’라는 의미로, 의를 추구하고 정직히 행하는 지혜로운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입술이 패역”한 자는 거짓말과 허풍으로 교만을 드러내는 어리석은 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얼마나 진실하고 겸손한가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성령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을 성령의 은사에 비유해보면 우리가 능력이 얼마나 크냐? 은사를 얼마나 받았느냐도 좋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진실하고 겸손하냐가 더 귀하다는 말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실재 은사가 많이 나타나면 교만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강하게 입혀주시는지 목적을 알아야지,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더 많이 알고, 하나님과 더 직통하고, 하나님께서 더 귀하고 크게 쓰는 줄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자기 체험을 추종합니다.
♣그러나 그건 대단한 오해입니다. 체험의 일차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피체험자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고 하나님의 진리 안에 들어오게 하시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주시는 여러 표적들입니다. 예수님께서 3년 반 동안 제자들 앞에서 무수한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는데 그 목적이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더 완악할수록 체험이 희귀하고 크고 강력합니다. 어떤 악인은 지옥까지 경험하고 돌아오기도 합니다. 바울 같은 사람은 길 가다가 부활의 예수 만나 며칠 동안 소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께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 같은 죄인을 회개케 하시기 위한 것으로 알고 감사할 일이지 자랑하거나 교만할 이유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자신의 어리석고 완악함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못하기 때문에 더 큰 체험을 주셨다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교만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2. 성경말씀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2절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 여기 “지식”은 정당하고 합리적인 가치의 기준을 뜻하고, “소원”은 자신의 이익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기본적인 욕망을 뜻합니다. 그리고 “발이 급하다.”는 것은 올바른 지식의 인도 없이 성급하게 판단하고 처신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할 때 신중함과 정당한 기준에 맞게 행동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고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성급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잘못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은사에 비유한다면 이와 같이 우리가 어떤 체험을 하든지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말씀의 기준을 떠나서 성급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기차가 철로를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씀을 떠나면 그것은 100% 귀신의 역사로 떨어지고 맙니다.
♣천로역정에서 기독도가 신비 따라 가다가 어둠과 절망의 늪에 빠져 몸부림치던 일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천성 가는 길과 나란히 있어서 안심도 되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어두워지고 험악해서 어떻게 행해야 할지 몸부림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떠나 체험에 의존하니 갈팔질팡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일을 만났을 때 말씀이냐? 체험이냐? 두 갈레 길에 선다면 조금의 미련도 없이 말씀에 서야합니다. 성경과 다를 때는 하나님이 뜻인지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묻는다는 것은 마치 발람이 돈 욕심이 나서 계속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겠다고 미루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씀을 듣고 깨달아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기적을 행한다 해도 말씀에서 떠난다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3. 결과를 보고 자기를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3절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자기 길을 굽게 한다.”란 하나님이 뜻에서 벗어나서 고집대로 행함으로 파멸의 길로 치닫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파멸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태도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든 잘못은 나에게 달렸습니다.
♣이처럼 악신이 역사하거나 잘못된 열매를 맺는다면 내 믿음이 잘못된 것이지 성령 탓이 아닙니다. 말씀이 없고 양심이 추하고 교만해지면 악신이 임합니다. 항상 성령의 역사만 있는 것 아닙니다. 사울처럼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악령으로 마칠 수도 있고,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칠 수도 있습니다.
♣그 원리도 모르고 나에게 역사하는 것은 다 성령일 것이라 고집하고 정당한 지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희망이 없습니다. 내 마음 상태에 따라서 성령 혹은 악령이 얼마든지 역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체험을 너무 고집하지 마세요. 잘못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잘한 체험이든 잘못된 체험이든 이 체험을 통해서 자기를 고쳐가는 것이 바른 길입니다. 좋은 체험을 했을 때는 그것을 통해서 더욱 온전한 믿음에 서고, 잘못된 체험을 했을 때는 그것을 통해서 자기를 반성하고 회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신비체험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자기주관에 빠지는 것입니다. 잘못되었다 생각되면 언제든지 돌이켜 말씀으로 돌아올수 있는 신앙의 유연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욱 바른 복음에 서고 바른 마음, 즉 겸손과 사랑과 진리와 순종과 화평의 마음을 가지면 악령은 떠나고 순수한 성령께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신실한 믿음 안에 설 때 하나님께서 귀히 써주시는 길로까지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 열심하는 자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눠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둔한 우리들을 은사로 입혀주셔서 성령께서 우리의 손을 잡고 은혜와 진리의 세계로 이끌어 주시고 계십니다. 성령의 은사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은사가 목적이 아니요 우리의 도움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고 더욱 말씀에 서고 자기 열매를 보고 늘 자기를 새롭게 하면서 더욱 온전한 성령의 은혜로 충만케 되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106, 믿음의 은사 (잠 19:4-7)
이 시간에 “믿음의 은사”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 중의 하나는 믿음입니다. 반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다름 아닌 불신입니다. 불신의 죄가 가장 큽니다. 다른 죄는 용서 받아 천국 갈 수 있어도, 불신의 죄는 사람을 이 땅에서부터 불행하게 하고 지옥까지 끌고 가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한 믿음 달라고, 더 큰 믿음 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들은 모두 유익합니다. 그 중에 믿음의 은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참으로 귀한 은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참 일군이 되려면 믿음의 은사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믿음의 은사는 어떻게 유익합니까?
1. 믿음의 은사는 전도의 귀한 도구입니다.
♣4절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물질중심의 세상 현실을 개탄하는 말씀입니다. 물질의 유무에 따라 대우나 관심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부자라고 존중해주고 가난하다고 무시하는 것은 세상에서만 있는 일입니다.
♣이처럼 영의 세계에서도 진리가 있습니다. 은사가 풍성하면 많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주변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나타나는 은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을 전하자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모두 떠났습니다. 그래도 주님이 은사를 행하셨던 것은 복음전도와 또한 우리의 사역의 원리를 제시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맘대로 됩니까? 지금도 기사와 이적은 있고 아무 것도 없는 선교의 현장에서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의 현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기억할 것은 주님께서 사역의 원리를 보여주신 것이지 꼭 그대로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은사들을 통해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을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물질이 있다면 물질을 사용하세요. 선교지에 우물 파주고 전도하고 양식 주면서 전도하지 않습니까? 지역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제 발로 오지 않습니다. 무언가 접촉점을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는 교인만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구원을 위해 세워놓으신 기관입니다.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찾아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이 믿음 가지고 행할 때 많은 사람들이 가깝게 할 것입니다.
2. 우리로 진실한 증인이 되게 합니다.
♣5절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 율법에서는 법정에서 거짓 증거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 증인을 엄격히 처벌합니다. 신19:16-20에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고 말하면 -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이처럼 신령한 세계에서도 거짓 증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사람입니다. 성경을 믿지 못해 온갖 설로 난도질하는 신신학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만 거짓 증인이 아닙니다. 성경을 믿는다면서도 한 자락 의심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거짓 증인에 가깝습니다. 다른 사람이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시렵니까? 대답 못하면 못 믿는 것이고, 진리에 대해서 거짓 증인입니다.
♣현대 법정에서 묵비권은 피고의 권리입니다. 그러나 함부로 묵비권 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대제사장이 온갖 모함으로 치지만 잠잠하십니다. 그러나 진리를 물을 때는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막14:61-62에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 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빌라도 앞에서도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마27:11)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으면 거짓 증인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의 은사는 베풀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합니다.
♣6절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여기 너그러운 사람은 고귀한 신분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처벌할 권세를 가졌음에도 남에게 아량을 베푸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아량이란 권리를 가진 자만이 베풀 수 있는 특권입니다. 해를 끼친 사람이 아량을 베푼다면 말도 되지 않죠.
♣그리고 여기 선물은 때때로 뇌물과 같은 나쁜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나 여기서는 진실함이 담긴 좋은 의미의 선물로 이해할 용어입니다. 정성어린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됩니다. 주는 것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일 장사 잘되는 곳이 공짜 장사입니다. 공짜로 주면 정말 인산인해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있으면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베푸실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너무 똑똑해도 안 됩니다. 빌립 같은 계산꾼들은 주지 못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쌓아놓고만 하려고 하니 못합니다. 그건 불신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있어야 꿈도 꾸고 계획도 세우고 기도도 하고 사랑도 베풀고 아량도 베풀고 선물도 주고 불가능도 가능하게 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말씀 따라 전진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무엇이든지 못한다 마시고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십시다.
4. 믿음의 은사는 마음의 소원을 이루게 하십니다.
♣7절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앞의 4절과 동일한 의미의 교훈으로 가난한 자를 외면하고 배척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능을 지적한 말씀입니다.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는데 친구들에게야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친구하고파 불러도 그들은 상대해 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의욕만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려면 그 대상에 맞는 품격도 갖추어야 합니다. 고위급들과 친구하여 복음을 전하려 한다면 그 품격에 맞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털털한 일군도 필요하고 고상하고 품격 가진 일군도 필요합니다. 격에 맞아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귀히 쓰이려면 영적 품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홍해 앞의 모세 얼마나 위대합니까? 죽음 앞에 예수님도 얼마나 위대합니까? 최권능 목사를 보세요. 그것이 신령한 품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대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얼마나 못 났습니까? 보잘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막4:24-25에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계산하고 헤아리고 있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대하실 것이고 믿음 없으면 가진 것까지도 빼앗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의심 많은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처럼 믿음의 은사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전도의 귀한 도구가 되고, 진실한 증인이 되며, 베풀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귀히 쓰실 온전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107,말씀을 받는 자세 (잠 19:8-10)
이 시간에 “말씀을 받는 자세”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받겠습니다.
우리 믿음이 훌륭하려면 무엇보다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특히 말씀을 받는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예수의 발치에 앉아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마리아는 매우 값진 향유를 예수께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으며 예수님께 가장 큰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위대한 은총이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받으면 거기서 구원의 은총이 나고, 축복의 말씀을 받으면 거기서 행복이 나고, 또 어떤 말씀이든지 그 말씀에 서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기적이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집 보세요.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해서 그대로 했더니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위대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1.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8절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복을 원한다면,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지혜는 그냥 지혜가 아닙니다. 원문에 ‘레브’인데 ‘호크마’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것으로, 지식에 그치지 않는, 지정의를 포함한 참된 인식 상태를 강조한 낱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지혜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인격과 삶까지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 자기 영혼을 사랑한다면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약속한 복을 받으려면 그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이 있고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과 행복은 모든 인간이 사모하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목숨 얼마나 사랑합니까? 다른 본능은 있다가도 사라지지만 생명에 대한 본능처럼 지속적으로 강한 것은 없습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행복을 찾아 떠난 나그네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만큼의 애착을 가지고 성경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2. 말씀을 성령의 확신으로 받아야 합니다.
♣9절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뱉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이 구절은 5절에서도 나오는 중복된 표현인데 그 전장도 아니고, 바로 앞의 말씀을 이중으로 기록했을까요? 지혜의 대왕 솔로몬이 잠시 정신이 오락가락했을까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책이기에 중복 같아도 중복이 아니고 실수 같아도 실수가 아니고 그 말씀이 그 위치에 있어야 하고 꼭 필요해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율법에서는 법정에서 거짓 증거를 절대 금지하고 있습니다. 신 19장을 보면 위증자에게는 그가 형제에게 꾀하려 한만큼 그에게 갚아준다(18-20절) 했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요즘도 무고죄가 큰 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증거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증인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위증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의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행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성령의 확신이 없으면 거짓 증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을 보세요.
♣살전2:13에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렇게 말씀을 잘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살전1:5-6에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성령의 은혜 속에서 전파되고 또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환난 중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갈급했고 그래서 더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은혜도 구하지만 우리도 힘써 믿어야 합니다. 성령 탓만 하지 말고 생명 걸고 믿자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 이것이 말씀에 대한 올바른 자세입니다.
3. 말씀 앞에 순복해야 합니다.
♣10절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이 적당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 미련한 자가 재물을 많이 소유했을지라도 올바르게 활용할 줄 모르고, 그저 육신의 욕망만 채우는데 만 급급하다면 종이 방백을 다스리는 꼴과 같다는 말입니다. 성령을 따르지 않고 육신을 따라 사는 육신에 속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방백은 시장이나 도지사 같은 관리입니다. 그런데 정치와 행정 분야의 배움도 경험도 없는 종이 방백더러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이 얼마나 우습고 비참한 일입니까? 전문가도 아니면서 스스로 전문가가 되어 전문가 노릇하다가 전문가들 일을 방해하고 그르치고 온갖 혼란을 야기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얼마나 많은 기업을 파산내고 혼란스럽게 합니까? 참으로 비참하고 우스운 일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유해 보십시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절대 복종해야지 종이 방백을 다스리듯 거역하지 말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이끌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복은 곧 하나님에게 순복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오직 아멘으로 받고 순복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뭘 보시고 의롭다 인정하셨나요? 말씀을 믿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롯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말씀을 믿지 않으면 불행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200년 전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라는 정치인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노예제도가 매우 성행했는데 그는 기도 중에 노예제도를 폐지시키고 모든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이 제도를 폐지한다는 것은 대통령도 하기 어려운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모든 정치인들이 노예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어 폐지를 원치 않았고 자신은 굽은 곱사등에다 외모마저 볼품없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어 누가 내 말을 들을 것인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며칠간의 고민 끝에 그는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이 없고 말씀하셨다면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헌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노예제도 폐지와 세계선교를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 결과를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에 응답하셨고 윌리엄이 세상을 떠나던 그 해 영국에서는 노예제도를 폐지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처럼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성경을 향한 우리의 바른 자세입니다. 성경은 믿는 대로 되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믿으면 성경이 우리를 위대하게 합니다.
♣그래서 요14:12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아버지께로 가셔서 성령을 보내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친히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말씀이십니다. 말씀을 받는 것은 하나님을 받는 것이고 말씀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 말씀을 받는 바른 자세를 가지고 말씀을 사모하십시다. 성령의 은혜와 확신으로 말씀을 받으십시다. 그리고 말씀 앞에 절대 순복하십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그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영육 간에 복되고 능력 있는 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108,마음의 평안 (잠 19:11-14)
이 시간에 “마음의 평안”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은사는 마음의 평안입니다. 내우외환(內憂外患)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는데 그 뜻은 안팎의 여러 어려운 일들과 근심거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환난 많고 고통 많고 죄도 많은데 할 일도 많은데 이런 세상을 어떻게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은 잠언에서 그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죽으면 평안해집니다.
♣11절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노하기를 더디 한다는 것은, 자기감정을 참고, 다스림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최고의 슬기라고 말씀합니다. 슬기롭기 원하면 자기감정만 잘 다스리면 슬기롭게 됩니다.
♣거기다 나에게 해를 입힌 자의 잘못을 용서할 수만 있다면, 그건 슬기를 넘어 자기를 영광스럽게 하는 일입니다. 올림픽의 영광도 영광이지만,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그보다 더 큰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나를 죽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잘 죽은 것 그것이 문제입니다.
♣이처럼 잘 죽으면 슬기와 영광은 물론 평안하게 됩니다. 이 평안은 예수 믿어 죽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입니다. 롬6:10-11에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평안하려면 내가 죽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가장 평안한 일입니다.
2. 하나님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12절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의 이슬 같으니라” 이 구절을 백성에게 한 교훈이라면 왕을 존중하고 두려워하라는 내용이 됩니다.
왕은 큰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을 거역하거나 노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왕이 노하면 사자의 부르짖음 같이 두렵고, 왕이 은혜를 베풀면 그렇게 좋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왕 하나님께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거역하거나 대적하면 그것은 불행입니다. 히12:25에 “너희는 삼가 말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경고하셨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사랑하면 어떻게 됩니까? 큰 은혜를 주십니다. 마치 하늘의 이슬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에서 5-10월은 건기라서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작물이 살 수 있는 것은 지중해애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에다 기온에 있어서 일교차가 커서 이슬이 흡족하게 내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때의 이슬은 보내 중의 보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생각하고 늘 높이고 찬양하고 사랑하면 이슬 같은 성령의 은혜를 주십니다. 시133:3의 헐몬의 이슬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러나 아합왕 시대를 보세요.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겼더니 이슬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모조리 잡아 처형하고 기도했더니 삼 년 반 동안 가물었던 땅에 하늘의 단비가 내렸습니다.♣하나님만 섬겨야 이슬 같은 성령의 은혜가 임합니다. 하나님만 높이면 형안이 옵니다. 그곳이 천국입니다. 진정 평안하려면 하나님을 경외하셔야 합니다.
3. 범사를 하나님께 맡기세요.
♣13절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미련한 아들이 아비에게 근심을 안겨 준다는 것은 앞의 잠언에서도 여러 번 언급된 바 있습니다.
♣창세기에도 에서의 잘못된 결혼으로 이삭과 리브가에게 근심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자녀들이 범죄의 길로 나간다든지 불행한 일을 당할 때 집안은 온통 염려와 근심과 고통으로 뒤집힙니다.
♣거기에다 다투는 아내까지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을 잠언 기자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에 비유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옥은 지붕을 평평하게 얹은 후 그 위에 진흙을 반죽하여 덮고 다시 회를 칠해 방수효과를 내었는데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에는 새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몇 방울 떨어지면 다행이지만 계속해서 이어 쏟아지면 집안을 온통 수라장으로 만들어놓습니다. 사사건건 문제 삼고 다투는 부인이 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아이들이 왜 미련한 길로 갑니까? 어릴 때부터 교육이 잘 되지 못해서입니다. 심는 대로 거둔 것입니다. 그럼, 부인들이 왜 잘 다툽니까? 둔하면 다투지 않는데 너무 예민해서 다투게 됩니다.
♣이처럼 이모로 저모로 아수라장된 우리 심령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벧전5:7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맡겨야 돌보십니다.
♣내가 하려고 하니까 더 혼란합니다. 애들요. 하나님이 키우십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무슨 일이든지 맡기고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너무 강박관념 갖지 않아야 합니다. 잘해야 한다. 유능해야 한다. 완벽해야 한다. 행복해야 한다. 실수하지 않아야 한다. 성공해야 한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너무 매이면 삶의 노예가 됩니다.
♣사명일지라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너무 강박관념 갖지 마세요. 하나님이 힘주시고 기회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래야 한다. 이렇게 강박관념 가지면 내가 삶에 꽉 차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기회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라고 초월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문제를 나에게서 떼놓을 때 평안할 수 있습니다.
4. 성령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14절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좋은 아내를 얻는 일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서 주시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이 말은 외적인 조건만 보고 결혼상대자를 고르는 세태를 경계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창 6장에 사람들이 땅에서 번성할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대로 아내로 삼아 문제가 되었습니다. 성령 따라 살지 않고 육신 따라 살다가 하나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게 되었고, 노아의 홍수로 모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롬8:13-14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형통합니다. 평안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하나님 섬기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만일 당신이 성령에 의해서 거듭난 사람이라면, 당신은 억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성령 따라 삽니까? 성령의 은혜를 받는데 힘써야 성령 따라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 주시기 위하여 우리 대신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담당하신 죄와 염려와 불안 더 이상 내가 지고 고통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방법은 알았지만 실천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십자가 공로로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고, 문제에 대해서 죽어 온전히 분리되고, 늘 하나님을 높이고 경외하여 은혜 충만 받아 온전히 성령 따라 삶으로 온전히 승리하고 참된 평안을 누리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109,위대한 믿음생활 (잠 19:15-17)
이 시간에 “위대한 믿음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하나님도 같고 성경도 같은데 어떤 사람은 위대하고 어떤 사람은 위대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믿음의 차이입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 믿는다면 어떻게 얼마나 믿느냐“ 그 차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에는 몇 가지 기본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믿어야 잘 믿는 것입니까?
1. 부지런하게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입니다.
♣15절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이 말씀은 게으름에 대한 경고입니다. 여기서 “깊이 잠”든다는 용어는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실 때 아담을 잠들게 했던 것과 같은 상태, 즉 죽은 것과도 같이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무의식 상태를 가리킵니다. 참으로 심각하죠?
♣게으름이 그렇게 두려운 것입니다. 게으름은 사람으로 하여금 삶의 가치나 목표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진취적 성취욕도 없이 되는 대로 살아가게 만듭니다. 게으르면 답이 없습니다. 미련해도 답이 없는데 게으르면 아무 쓸모가 없어요. 한 마디로 폐인이 되는 것입니다.
♣노숙자들 보세요. 외모는 멀쩡하지만 정신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삽니다. 이들은 가족도 정부도 돕지 못합니다. 일자리를 줘도 뛰쳐나오고 맙니다. 인내가 없습니다. 의지도 없어요. 정신불구자들입니다. 이것이 게으름이 만든 작품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중에는 부모의 그늘 아래 백수로 지내는 애들이 많다고 합니다. 일하지 않고 돌아다니며 사고치고 통신요금 수십 혹은 수백 만 원씩 올려놓고 원수가 따로 없습니다. 부모 잘못이 큽니다. 육신의 탯줄은 끊었으나 정신적 탯줄을 끊지 못해서 생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만들어 주실 것을 믿고 기도만 하고 죽든 살든 내버려둬야 합니다.
♣이처럼 부지런하지 않으면 영적 세계에서도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도 부지런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엘리사도 부지런했습니다. 왕상 19장을 보면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19절) 엘리사는 평범한 농부가 아니라 대지주였습니다. 무려 열두 겨리의 소로 밭을 갈고 있습니다. 겨리는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밤새도록 일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착하지 않아도 부지런 한 사람을 부르셨어요. 마태도 세리지만 세관에 있는 것을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생활의 기본은 부지런함입니다.
♣히6:11-12에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소망을 이루는 것은 부지런 아니고는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부지런하시기 바랍니다.
2. 말씀을 생명처럼 믿고 지키는 것입니다.
♣16절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거니와 자기의 행실을 삼가지 아니하는 자는 죽으리라” 여기 “계명”은 ‘미츠와’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키라고 요구하신 명령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영혼이란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만이 자기 생명을 지킬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법은 곧 생명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신30:19-20에서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생명으로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말씀 한 마디가 사느냐 죽느냐를 판가름할 만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 걸고 알고 그대로 믿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생명을 거세요. 다니엘의 믿음이 위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에 목숨 걸었기 때문입니다. 사자를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사람들도 사자 무서워서 기도하지 못하잖아요.
♣다윗도 왜 위대합니까? 찬송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날마다 찬송했습니다. 춤도 추었습니다. 말씀이 그를 위대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나의 생명으로 알고 배우고 믿고 생명 걸고 지키시기 바랍니다.
3. 더욱 큰 사랑으로 자라나가시기 바랍니다.
♣17절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자비를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사랑을 베풀고 도움을 주는 구제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기 백성에 대한 의무였습니다.
♣신15:7-8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심판 날에 구제의 여부를 가지고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선행의 보상을 넘어 반드시 해야 할 의무임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의무란 몇 번 하다 말거나 형식적으로 하지만 사랑만이 진실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는 달라고만 하고 이웃은 안중에도 없다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과 사랑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가지는 서로 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엡6:23에 “믿음을 겸한 사랑”이라 했습니다. 믿음의 크기는 사랑의 크기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키우려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엡4:15-16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했습니다.
♣사랑해서 손해 볼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17절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받을 은총은 심히 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고, 엘리야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오, 성경도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그만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부지런히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더욱 큰 사랑으로 자라나서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만큼 자라는 위대한 신앙생활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110,위대한 믿음생활 (잠 19:15-17)
이 시간에 “위대한 믿음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하나님도 같고 성경도 같은데 어떤 사람은 위대하고 어떤 사람은 위대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믿음의 차이입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 믿는다면 어떻게 얼마나 믿느냐“ 그 차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에는 몇 가지 기본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믿어야 잘 믿는 것입니까?
1. 부지런하게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입니다.
♣15절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이 말씀은 게으름에 대한 경고입니다. 여기서 “깊이 잠”든다는 용어는,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실 때 아담을 잠들게 했던 것과 같은 상태, 즉 죽은 것과도 같이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무의식 상태를 가리킵니다. 참으로 심각하죠?
♣게으름이 그렇게 두려운 것입니다. 게으름은 사람으로 하여금 삶의 가치나 목표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진취적 성취욕도 없이 되는 대로 살아가게 만듭니다. 게으르면 답이 없습니다. 미련해도 답이 없는데, 게으르면 아무 쓸모가 없어요. 한 마디로 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지런하지 않으면 영적 세계에서도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도 부지런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엘리사도 부지런했습니다. 왕상 19장을 보면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19절) 엘리사는 평범한 농부가 아니라 대지주였습니다. 무려 열두 겨리의 소로 밭을 갈고 있습니다. 겨리는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밤새도록 일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착하지 않아도 부지런 한 사람을 부르셨어요. 마태도 세리지만 세관에 있는 것을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생활의 기본은 부지런함입니다.
소망을 이루는 것은 부지런 아니고는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부지런하시기 바랍니다.
2. 말씀을 생명처럼 믿고 지키는 것입니다.
♣16절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거니와 자기의 행실을 삼가지 아니하는 자는 죽으리라” 여기 “계명”은 ‘미츠와’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키라고 요구하신 명령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영혼이란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만이 자기 생명을 지킬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법 계명은 곧 생명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신30:19-20에서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생명으로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말씀 한 마디가 사느냐 죽느냐를 판가름할 만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 걸고 알고 그대로 믿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니엘의 믿음이 위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믿고 기도에 목숨 걸었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왜 위대합니까? 말씀 의지하여 찬송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날마다 찬송했습니다. 춤도 추었습니다. 말씀이 그를 위대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나의 생명으로 알고 배우고 믿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생명 걸고 지키시기 바랍니다.
3. 더욱 큰 사랑으로 자라나가시기 바랍니다.
♣17절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자비를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사랑을 베풀고 도움을 주는 구제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기 백성에 대한 의무였습니다.
♣신15:7-8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고 말씀합니다.
♣마25:40에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도 심판 날에 구제의 여부를 가지고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선행의 보상을 넘어 반드시 해야 할 의무임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의무란 몇 번 하다 말거나 형식적으로 하지만, 사랑만이 진실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는 달라고만 하고 이웃은 안중에도 없다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과 사랑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가지는 서로 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엡6:23에 “믿음을 겸한 사랑”이라 했습니다. 믿음의 크기는 사랑의 크기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키우려면 사랑하세요.
♣그래서 엡4:15-16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했습니다.
♣사랑해서 손해 볼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17절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받을 은총은 심히 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고, 엘리야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오, 성경도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그만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부지런히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더욱 큰 사랑으로 자라나서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만큼 자라는 위대한 신앙생활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111,징계하시는 때 (잠 19:18-20)
이 시간에 “징계하시는 때”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징계하시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때는 언제일까요?
1. 그대로 두면 희망이 없을 때 징계하십니다.
♣18절 “네가 네 아들에게 희망이 있은 즉 그를 징계하되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 여기 네 아들에게 희망이 있으니 징계하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현재로서는 희망이 없다는 의미가 깔려 있습니다. 사람 보기에는 너무 비뚤어져서 바로 될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그를 징계하되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 얼마나 한심스러우면 죽일 마음을 두지 말라고 했을까요? 아무리 혈육이어도 너무 잘못하면 자식도 미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아들을 징계하라. 그러면 희망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징계하되 미워하지 말고 사랑으로 징계하라는 교훈입니다.
♣이처럼 징계란 아무리 좋게 봐도 희망이 없을 때 하는 것입니다. 징계가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말을 듣지 않고 버릇이 없는 아이들 징계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을러 일하지 않고 공부하지도 않는 사람 역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보실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일까요? 가만 둬도 희망이 넘치는 사람일까요? 자신 있게 말하지만 가만 두면 희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위대한 바울 같은 사람도 자고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에 찌르는 가시를 주셨는데 우리들이야 어떠하겠습니까? 법도 없이 살 사람이라고 지나치게 자기를 긍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롬1:21-23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게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대로 두면 희망이 없을 때 징계한다는 사실입니다.
2. 은혜를 경홀히 알고 망령될 때 징계하십니다.
♣19절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 네가 그를 건져 주면 다시 그런 일이 생기리라” 누구나 자기 성질은 쉽게 고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19절은 좀 다릅니다. 크게 실수해 곤경에 처했을 때 구해주었지만, 또 다시 그런 일을 반복하는 사람입니다. 즉 구해준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잠언기자는 이런 사람에게는 벌을 주라, 징계하라, 그를 건져 주면 다시 그런 일이 발생하리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은혜를 줘도 은혜인 줄 모르고 경홀히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은혜를 베풀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사람이 최소한 은혜는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모르고 배은망덕하면 도와줘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은혜를 배반한 죄가 가장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참 심각한 문제입니다.
♣고후5:14에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고 아들까지 보내셔서 십자가에 피흘려주셨건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내 뜻대로 사는 일이 더 많습니다. 배은망덕은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짐승도 은혜를 아는데 은혜를 모른다면 사람도 아닙니다. 누가 징계를 받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경홀히 알고 망령되이 행하는 자입니다.
3. 꾸지람을 받고도 회개하지 않을 때 징계하십니다.
♣20절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 여기 권고나 훈계는 잘못할 때 하는 꾸지람입니다. 권고보다 훈계가 더 강한 의미입니다. 처음에는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계속하여 듣지 않으면 권고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훈계합니다.
♣그래도 훈계까지는 말씀의 수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신사적으로 대해 주시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신사적이실 때 들어야 합니다. 속담에 “좋은 말해서 들어라.” 정말 좋은 말씀하실 때 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대로 순복했다면 무슨 광야가 40년이나 필요하겠습니까? 약 1년이면 될 텐데 자기 뜻을 굽히지 않고 불신했기에 40년이나 훈련시키셨습니다. 부드럽게 말하면 훈련이고 강하게 말하면 징계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셨습니다.
♣그래서 신8:2-3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얻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셨습니다.
♣여기 만나는 말씀을 상징합니다. 매일 매일 새벽마다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이처럼 말씀을 먹어야 산다는 것을 깨우쳐주셨습니다. 만나 먹지 않으면 죽지요? 이처럼 성경도 보지 않으면 우리 심령이 죽습니다.
♣성도는 본 교회에서 은혜를 받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교회를 애정으로 돌봐야 할 직분자들은 본 교회를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애정이라도 받쳐줘야 하는데 교회와 떨어져 있으면 애정도 사라지고 체면도 사라지고 점점 남남처럼 됩니다. 남남처럼 된 마음으로 교회를 위해 충성한다면 얼마나 하고 이해를 한다면 얼마나 하겠습니까?
♣이처럼 성경도 늘 가까이 하여 읽고 묵상하여 말씀으로 은혜를 받지 않으면 소원해지고 남남 같이 멀어져 잃어버리거나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깨달았으면 돌이켜 행해야 합니다. 계시록 2장에 두아다라교회가 자칭 이세벨을 용납하고 회개하지 않을 때 무엇이라 경고하십니까?
♣계2:21-23에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참으로 두려운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무슨 불합리한 큰 사건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곧잘 이런 말을 잘합니다. “신이 없는 것이 분명해, 신이 있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렇지만 그건 대단히 잘못된 판단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영원한 안식처가 아니요 광야와 같은 신앙의 훈련소이기 때문입니다.
♣훈련소가 편합니까? 이 훈련에서 사탄도 한 몫을 합니다. 바른 믿음 갖지 아니하면 반드시 사탄의 시험이 옵니다. 바로 살지 아니하면 누구의 손을 빌어서라도 징계하십니다. 사사시대를 보세요. 더 험악하고 불합리한 일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징계의 목적은 우리가 죄악에서 회개하고 돌아와 믿음을 바르고 굳세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말씀합니다. 히12:8에“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징계하신단 말씀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징계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회개하고 더 이상 희망이 없거나, 은혜를 경홀히 여기거나, 꾸지람을 받고도 회개하지 않는 그런 일은 버리십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께 사랑을 크게 받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112,바른 신앙의 3요소 (잠 19:21-23)
이 시간에 “바른 신앙의 3요소”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바른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지정의가 고루 갖추어진 신앙이 바른 신앙입니다. 우리 인격의 3요소가 지정의이듯이 신앙의 구성요소도 그렇습니다. 만약 어느 한편으로 치우친다면 사탄의 시험에 빠지는 등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벧후1:5-7에“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했습니다. 이 속에는 지정의를 고루 갖춘 신앙이 들어있습니다.
그럼 바른 신앙은 어떤 것일까요?
1. 말씀의 냉철함이 있어야 합니다.
♣21절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어떤 일을 위해 사람이 아무리 다양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대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람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이 대비되고 있는데, 여기서 사람의 계획이 우리의 생각이라면, 여호와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신앙도 그래야 합니다. 인간의 생각은 내려놓고 말씀에 서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미련함이 사람의 지혜보다 낫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사55:8-9에 “이는 내 생각이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러므로 말씀의 기초에 서야 합니다.
♣예외란 없어요. 성경과 다르면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잠14:12에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했고, 잠16:25에도 동일한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바로 하려면 눈을 부릅뜨고 바로 분별하며 해야 합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진리 가지고 시험하잖아요. 그러니까 교묘하게 포장한 비진리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교단들이 이단 교리와 타협하고 세상 문화와 타협하고 이방종교와 타협하는 일들이 많은데 이건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두 번 다시 못 박는 큰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칼날처럼 예리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말씀으로서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 말씀으로는 죄인을 구원해 내지 못하며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양육해 내지 못할 뿐 아니라 시험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합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사랑의 뜨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22절 “사람은 자기의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여기 “인자”란 ‘헤세드’인데 이 말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사용할 때는, 전혀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자기 백성에 대해서 변하지 않고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하며, 인간과 관련하여 사용할 때도 역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헤세드에 두 종류 사람이 있습니다. 하반 절에 나오듯 가난한 자와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즉 가짜와 진짜입니다.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무슨 말이냐면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하지 않는 거짓말하는 사람보다, 사랑하고 싶지만 가난해서 온전히 섬기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그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은 안타까워하는 그 중심으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능력대로 사랑하십시다. 그리고 능력으로 안 되면 기도로 사랑하십니다. 기도로 돕는 것도 크게 돕는 것입니다. 사랑의 이 뜨거움은 신앙의 중요한 속성입니다.
♣그래서 롬12:11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했습니다. 신6:4-5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열심을 품어야 합니다. 열심 떨어지면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랑받고 이웃에게 칭송 받을 만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해야 사랑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3. 경외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2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만이 모든 만물의 근원이시며 생사화복의 주관자시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또한 그 분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할 때 자기 영혼이 구원 받게 됨은 물론 현세에서도 하나님의 형통의 복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삶입니다. 말이 아니고 삶입니다. 실천해야 합니다. 게으르기로 소문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 날도 역시 모두 밭으로 일하러 가고 그 농부만이 집에 남아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결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니 어느 간 큰 도둑이 대낮에 담을 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도둑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농부는 마음속으로만 ‘어 도둑이네... 저놈 담장을 넘어 마당에 들어오기만 해 봐라’ 중얼거리며 다시 스르르 잠 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이내 다시 ‘쿵’소리가 들렸습니다. 농부가 힘겹게 눈을 떠보니 도둑이 담에서 뛰어내려 마당을 살금살금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농부는 무겁게 내리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렸습니다. ‘집 안에 들어오기만 해 봐라’ 농부가 깊이 잠든 줄 안 도둑은 살금살금 집 안으로 들어와 농부의 옆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농부는 잠에 취한 채 중얼거렸습니다.
♣‘어 저 놈이 안방으로 들어가네... 뭘 가지고 나오기만 해 봐라...’얼마 후 도둑은 안방에서 값이 나갈 만한 물건들을 한 보따리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대문 쪽으로 나갔습니다. 게으른 집 주인은 대문을 열고 나가는 도둑의 뒷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잠꼬대처럼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이 놈 다시 오기만 해 봐라’ 이처럼 말씀을 배워도 행함이 없다면 이 게으른 농부나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했지만 이제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대접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을 바탕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지정의를 다 갖추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신앙도 지정의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지정의를 갖추되 그냥 지정의가 아닌 진리의 말씀의 지와 뜨거운 사랑의 정과 하나님을 경외함의 실천이 담긴 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지정의 신앙의 3요소를 두루 갖춰 바른 신앙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113,정상적인 교회생활 (잠 19:24-26)
이 시간에 “정상적인 교회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교회는 복음의 전진기지요, 양치는 목자의 장막이요, 천국 시민의 훈련소요, 악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영적 요새이기 때문에 교회생활 잘해야 합니다.
마치 교회는 아궁이와 같아서 아궁이를 떠난 나무가 탈 수 없는 곳과 같이 교회를 떠난 심령은 시간이 지나면 점점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멀리하면 거기엔 답이 없습니다.
♣그대로 둔다면 그 심령은 반드시 원수 마귀 사탄의 표적이 되어 세상풍조에 빠진다든지 사탄이 돌아가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는데 가령 교회와 반감을 갖는 교묘한 사건을 만나게 하여 돌아 올려야 돌아올 수 없는 여러 가지의 올무와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생활에 시험이 들면 안 됩니다.
정상적인 교회생활 하려면 어떻게 할까요?
1. 열심을 품고 교회 생활해야 합니다.
♣24절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비록 풍자적이긴 하지만 게으른 자의 상태를 정확하게 지적한 말씀입니다. 진짜 게으르면 꼼짝도 않고 밥을 떠먹기도 힘들어합니다.
어느 것 하나 제 스스로 하려는 것이 없습니다. 물줘, 밥줘, 옷줘, 양말줘, 뭐해줘,, 가족은 모두 자기 하인들입니다. 아이들 그렇게 키우면 안 됩니다.
♣교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게으르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 정한 예배 모두 열심히 참여하고 늘 기도하고 봉사하며 전도해야 합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봉사를 받기보다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초신자가 불평하면 이해라도 하지만 봉사해야 할 사람이 불평할 때는 할 말을 잃습니다. 같은 성도로서 누구는 봉사하고 누구는 봉사를 받고 불평까지 듣고 , 따진다면 그것도 불합리한데 나서서 봉사해도 부족할 사람이 같은 교인에게 불평은 왜 합니까? 부지런해야 합니다.
♣사람들 습성이 조금만 힘들면 안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일은 힘들어도 하지만 교회생활은 조금만 힘들면 안하려 해요 교회생활 부지런해야 합니다.
2. 교회의 훈계와 권징을 존중해야 합니다.
♣25절 “거만한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으리라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잘못된 행위에 대한 징계는 징계하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교훈이 되어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명철한 자라 할지라도 교만해지지 않도록 항상 견책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것은 누구나 지속적인 훈계를 받지 않고는 스스로 완전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것은 견책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것은 개인적으로, 전체적인 풍조와 관련된 것은 회중 앞에서 견책해야 합니다. 징계의 제도도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두 징계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당한 징계에 감정을 품고 교회를 혼란하게 하는 일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결정 앞에는 누구든지 순종해야 합니다.
♣마 18장에서 주님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출교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5-20절) 하셨습니다.
♣즉 교회 회중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회중의 기도하고 결정한 내용은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알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이런 두려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맘에 안 든다고 교회를 뒤엎고 다니는 사람들 교회에 대한 두려움을 모르는데 교회를 해하는 것은 주의 몸을 해하는 것이니 주님을 해하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3. 주의 일군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26절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 여기 “구박하다.”는 말은 학대하다. 혹사하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리고 “쫓아내다.”라는 건 학대에 못 이겨서 스스로 집을 나가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가정의 위계질서를 파괴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신적 주도권을 도전하는 자로 간주하여 율법에는 죽음의 형벌을 내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레20:9에 “만일 누구든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리고 잠30:17에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져도 위계질서는 지켜져야 합니다.
♣이 말씀은 믿음의 부모에게도 적용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4:15) 했듯이 영의 양식을 먹이는 사람을 믿음의 아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영적 위계질서가 파괴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딤전5:19-20에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했습니다. 교회의 혼란과 나쁜 풍조를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 않고 교회에서 지도자나 중직자에 대해 함부로 하는 풍습이 생겨나면 그 교회는 너도나도 걸핏하면 대대로 일군들을 걸고 넘어져서 가장 불행한 교회가 되고 맙니다. 여러 교회들을 보시잖아요. 그 교회 교인들이 행복하겠습니까?
♣예를 들어 자녀들이 열두 명 있는데 들어가고 나가면서 아버지 머리에 군밤 한 대씩 먹이고 나가면 좋겠습니까? 부모가 무시되는 가정이라는 것 자체가 가정의 비극입니다. 위계질서가 파괴되어서는 안 됩니다.
♣13장을 보면 세상 권세에도 그렇게 하라 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1-7절)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딤전5:17에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장로님들도 존경해 주시고 목회자도 그렇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잘해야 존경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 부모가 잘하시든 못하시든 많이 배우셨든 못 배우셨든 많이 가지셨든 가난하든 존경하는 것처럼 주의 이름으로 세우셨다고 생각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는 물론 자신의 영적생활에 손해가 되지 않고 정상적인 교회생활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우리 예수님께서 피 흘려 사신 교회입니다. 사람이 모인 곳 같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전 삼고 가운데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온 천하는 잠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말씀과 훈계와 경책으로서 자기를 순복시키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군들을 존경하고 따름으로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자라가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114,정상적인 은혜생활 (잠 19:27-29)
이 시간에 “정상적인 은혜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죄악이 관영하여 보편화될 때 이건 아니다 하면서, 의롭게 살아갔던 의인 노아와 같이 어떻게 이 죄악 된 세상에서 믿음 지키고 의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성경은 노아의 성공비결을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창6:8에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고 말씀합니다.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어떻게 은혜를 입을까요?
1. 복음의 진리에 서시기 바랍니다.
♣27절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 참된 진리를 지키며, 거짓 교훈을 경계할 것을 당부하는 말입니다. 여기 지식의 말씀은 영원불변의 성경입니다.
♣세상 이론과 하늘의 이론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세상 이론은 아무리 합리적이고 사실적이어도 그건 진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앞에 홍해, 얼마나 사실적이고 비 전략적입니까? 앞에는 바다요 옆에는 절벽이요,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있습니다. 손자병법에 보면 사면초가에 빠지면 100% 패할 수밖에 없는 위치입니다. 이때는 36계를 놔도 성공할지 미지수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죄가 있어도 성경은 우리를 예수 안에서 죄 없다 말씀하시고, 병이 있어도 병 없다 말씀하시고, 자꾸 넘어지는 옛 사람이어도 성경은 예수 안에서 새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둘러봐도 복이 없는데 복 있다 말씀하십니다. 도울 자가 없는데 도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심령은 빈털털인데 성경은 높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광 중에 은혜 중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것을 믿으시겠습니까? 진리에 서시기 바랍니다. 은혜 생활이 기초는 복음의 진리입니다. 일단 이 기초에 서시기 바랍니다.
2. 선한 양심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28절 “망령된 증인은 정의를 업신여기고 악인의 입은 죄악을 삼키느니라” 증인이 나오는데 증인은 어떠해야 합니까? 진실만을 말하고, 거짓하지 않아야죠. 법정에서 증인이 진실만을 증언하겠다고 서약하고서, 거짓을 말하고 악을 행한다면, 위증자로서 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피해를 가장 많이 주는 증인이 있습니다. 양심의 잘못 된 증인입니다. 양심에 역행하면 은혜 생활은 불가능하고 믿음에 대해서는 파선합니다. 그래서 딤전1:19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선한 양심은 어떻게 소유할까요? 죄를 씻어내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용서와 씻음은 다릅니다. 두 가지 다 은혜로 되지만, 방법은 아주 다릅니다. 용서는 진실로 인정하고, 고백하면 되지만 ,씻음은 성령의 은혜로 마음에서 죄악을 떨어내야 합니다.
♣“주여 여기 더러운 심령이 있습니다. 깨끗이 씻어주세요.” 기도하시기 랍니다. 그래서 약4:8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했습니다.
♣복음으로 끝내면 안 됩니다. 복음을 실상화시키는 것은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말씀을 믿을 뿐 아니라, 엎드려 성령으로 씻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흠결이 보이는 대로 엎드려 기도함으로 씻으면, 씻은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집니다. 더러운 심령으로는 안 됩니다. 충분한 기도생활이 예방하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이 부족하면 안 됩니다.
3. 하나님 앞에 낮추며 떠시기 바랍니다.
♣29절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 거만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거만은 교만인데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징계하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낮추고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은 천사를 떨어뜨려 마귀가 되게 하고 겸손은 사랑으로 천사가 되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높아지면 가만 두지 않으십니다. 심판과 채찍은 미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나타나는 순간 그만큼 내가 약해집니다. 이건 신령한 공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새벽빛처럼 일정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풀리쳐에게 한 신학생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유능한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까?" 풀리쳐는 조용히 대답하기를 "자네가 유능한 전도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이 한 가지를 잊지 말게나! 그것은 영국에서 내가 가장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자세를 갖춘다면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자네를 통해 일하실 것이네"
♣그래서 잠29:23에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했습니다. 나를 조금이라도 높게 생각하니까 속이 상하고 실망하고 괴로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로 내려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당시 관념으로 본다면 그 자리에 선다는 것은 인간 취급도 못 받는 자리입니다. 더구나 나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잘하고 영광스러워도 그 자리를 잊으면 안 됩니다. 어떤 순간에도 자기 권리 주장하지 말고 감사하고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안에 온갖 아름다운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은혜 받은 자라는 복음의 진리에 서서, 더욱 엎드려 성령으로 나를 성결하게 하며, 어떤 형편에든지 우리가 받는 멸시와 고통은 주님에 비하면 사치 중에 사치라는 생각을 가지고 날마다 감사하고 찬송함으로 은혜로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