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언 강해

새벽 잠언 강해15장

공 상희 2018. 11. 11. 06:26

66,평화를 만드는 사람 (15:1-3)

 

이 시간에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5:9에 예수님께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하십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마귀의 자녀입니다. 나와 여러분의 모습이 하나님의 자녀라면서, 혹 마귀 자녀라 일컬음을 받는 모습이라면, 회개하고 바꾸어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처한 곳을 평화롭게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의 상처 없이 신앙생활 잘 할 수 있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어떠해야 합니까?

 

1. 유순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1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를 잔잔케 하신 것처럼, 어떤 분노나 과격한 말도 잔잔케 하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유순한 대답입니다.

여기의 '분노'(히마)는 원어상 '', ''이란 말에서 파생된 말로, 맹렬한 분노를 가리킵니다. 사람이 열이 나고, 독성이 올라있을 때가 있지요. 이 때 무슨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위험한 때입니다.

 

삼상 25장을 보면 다윗은 광야에서 베푼 은혜를 모르고, 자신과 소년들을 멸시한 나발에게 보복하고자 했습니다. 열독이 올라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칼을 차고 200명의 부하를 이끌고 나발의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행동과 유순한 말 때문에, 다윗의 분노는 가라앉았습니다. 아비가일의 유순한 지혜가 피의 복수를 막았습니다. 훌륭한 다윗도 감정적이 되어 하나님 앞에 범죄할 뻔했는데, 우리들이야 더 말할 것 없지 않겠습니까?

이 아비가일의 유순함이 바로 우리가 갈망해야 할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말에 변환장치가 있어야 합니다. 과격하고 감정적인 말도 부드럽게 변환시켜 반응해야 합니다.

혹은 말에 여과 장치가 있어야 합니다. 나쁜 말은 걸러내고, 좋은 말만 전달해야 합니다. 곧이곧대로 말했다고 정직하다 할 수 없습니다. 지혜롭지 못하면 평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만들어내는 문제의 사람이 됩니다.

 

어떻게 해야 이런 장치를 가진 유순한 자가 될까요? 성령으로 충만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마음의 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2. 지식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와 지식의 근본입니다. 사람들이 왜 문제를 일으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잘 배우면 문제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엡4:21-24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하십니다..

 

여기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에서 쏟느니라”(야비아)'용솟음치다', '넘쳐흐르다.'란 의미로, 열성적인 단어이지만 이것은 말씀을 모르니까 나쁜 일에 열성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남이 잘못했을 때,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이라면, 혹시 내가 기도 못한 불찰은 아닐까, 나부터 돌아보게 되기 때문에 함부로 비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천사의 직분을 가졌을지라도, 말씀과 사랑이 없으면,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을 신나게 비판하다, 죽이고 마는 실수를 저질을 수 있습니다. 도우라고 직분 주고, 도우라고 신령한 눈 열어주니까, 오히려 그 밝은 눈으로 비판하고 도리어 해를 끼치더라는 말입니다.

3.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씻는 자입니다.

3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하십니다. '감찰하시느니라'(초포트)'주의 깊게 살피다', '자세하게 관찰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 무엇도, 숨길 수 없이 다 드러나고 맙니다.

 

4:13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하십니다. 그의 눈 앞에 피할 자 누구겠습니까? 그래서 시139:8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했습니다. 아간이 몰래 하나님의 것을 숨겼어도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없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속일 수 없습니다.

 

이 본문의 구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씻으라는 말입니다. 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할 뿐 아니라. 말씀과 성령으로 마음과 행실의 두루마기를 빠시기 바랍니다.

죄를 버리면 평안이 오지만, 죄를 품으면 환난이 옵니다. 사사기에 환난 후의 평화기는, 백성들이 회개할 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주님이 마음에 계시면 평화롭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악을 막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늘 충만하여, 과격한 노도 잔잔케 하는 온유한 사람, 말씀으로 충만하여 온전한 사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늘 씻는 거룩한 심령이 되어 자신과 이웃에 진정한 평안을 끼치는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67,세 가지 보물 (15:4-9)

 

이 시간에 세 가지 보물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성도의 보배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십니다.“성도의 보배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부의 사랑, 성자의 은혜, 성령의 임재가 보배입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징처럼, 성도가 가져야 할 세 가지 영적 보물이 있습니다.

 

1. 사랑의 보물입니다.

4“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하십니다. 온순한 혀를 생명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살리는 나무이고, 치료하는 나무입니다. 22:2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했습니다.

 

여기 온순하다”(마르페), 원문의 뜻도 '치료하다', '건강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온순한 혀는 상대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패역한 말은 마음에 상처를 주지만 따뜻한 말은 마음을 치료합니다.

 

그런데 말이 따뜻하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사랑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보물을 소유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사랑하는 자에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가장 큰 자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전 1311-13절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하십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성장하면 더 완벽한 예언자, 더 완벽한 방언, 더 완벽한 지식, 더 완벽한 능력, 더 많은 체험자, 더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 더 성장성숙한 사람 ,그리고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아는 온전한 믿음에 도달한다는 말씀입니다. 은사의 수준을 뛰어넘는 온전한 은혜가 사랑의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보물로 여겨야 합니다.

 

2. 말씀의 보물입니다.

5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하십니다. 여기 훈계라는 용어는 뒤에 나오는 경계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바로 살기를 권하는 권면을 훈계라고 합니다. 딤후4:2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하십니다. 그러므로 5절에 나오는 보물은 말씀의 보물입니다. 늘 말씀으로 나를 깨닫게 하고 나를 일깨우게 하고 책망하게 하고 바른 길을 가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귀를 닫아버린답니다. 딤후4:3-4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하십니다.

 

내가 성경에 변화되어야지 내가 성경을 바꾸거나 편리한 종교를 따르면 그건 때가 다 된 것입니다. 천주교의 잘못은 성경 위에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말세에 벌어지고 있는 논쟁이 성경론입니다. 문서설이나 뭐다 성경의 진위 가지고 논쟁합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무시하거나 못 믿으면 다 무너집니다.

 

최고의 보물은 말씀입니다.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아비의 훈계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경히 알면 죽습니다. 6:23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말씀을 보배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3. 성령의 보배입니다.

6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하십니다. 의인의 집의 보물은 일반적으로는 소유나 재산의 풍족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물'(호센)은 물질의 부요 외에도 강함 능력 등을 의미하는 낱말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복은, 신약의 성령의 은혜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세 번째 보물은 성령입니다. 성령님을 보배로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성령의 온갖 은혜와 은사로 채워주십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고후4:7-9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은혜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온갖 은혜와 은사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예수 안에 아버지 사랑이 있고, 말씀이 있고 성령이 있습니다. 보배를 보배로 알지 못하면 아무리 귀한 보배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보배, 말씀의 보배, 성령의 보배를 귀히 여기고 사모하는 보배로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68,바르게 사는 길 (15:10-15)

 

이 시간에 바르게 사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죄인 된 인간은 어리석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보다, 어그러진 길로 가기를 더 좋아합니다. 이런 속성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남아 있어, 우리를 괴롭힙니다.

 

어떻게 실족하지 않고 바르게 살까요?

 

1.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10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하십니다. 하나님을 거슬리면 죽는다는 것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도를 배반하는 자의 의미는 '그 길을 버리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 길은 하나님이 제시하신 의의 길을 가리킵니다. 이 의의 길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회개시키시기 위해 견책하시는데 이 견책마저도 싫어하면 엄한 징계를 받거나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면, 경건의 길은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후7:1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견고히 선 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을 속이고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드러내려다가 엄한 징계를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이 사건이 나오는데, 11절을 보면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람이 함부로 좌지우지할 수 없도록 질서가 잡혔습니다.

 

에녹이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것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므두셀라를 낳던 날 세상 죄의 결과로, 다가올 홍수 심판을 보았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사는 첫째 방법입니다.

 

2. 하나님 앞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11스올과 아바돈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리요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음부(쉐올)는 죽은 영혼이 거하는 곳을 가리킵니다. 유명(아바돈)은 음부보다 더 깊은 죽음의 세계를 뜻하는 말로 '무저갱'(아폴레이아)으로 번역된 말이기도 합니다. 그 어둡고 컴컴한 음부 무저갱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항상 이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코람데오라고 합니다. 코람데오는 라틴어로서 코람(coram)”, “~ 앞에서라는 뜻이고, “데오(deo)”하나님을 가리키는데, 둘을 합해서 하나님 앞에서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니 죄 지을 수도 숨길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시139:7-12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만 알고 있는 죄일지라도, 회개해야 합니다. 다 토해내야 합니다. 토해내기 전까지는 살 수 없습니다. 체할 때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어디가 아픈지 파악이 어렵습니다. 미식거리고, 피도 돌지 않고, 견딜 수 없습니다. 그 상태가 심하면 죽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회개해야 합니다.

3. 늘 성경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12거만한 자는 견책 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하느니라하십니다. 거만한 자는 자기가 가장 똑똑한 줄 압니다. 자기의 생각과 지식을 최고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혜자의 권고를 듣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멸시하고 조롱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10절 말씀대로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하십니다. 죽습니다.

 

그러면 지혜를 어디서 만납니까? 성경에서 만납니다. 딤후3:15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하십니다. 늘 성경을 보면서 경책을 받고, 깨우침을 받아야 실족하지 않습니다. 늘 말씀 보면서 늘 깨달아야지 하루만 보지 않아도 마음이 무뎌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알면 우리 심령도 검처럼 분별력이 생기는데, 그렇지 않으면 심령이 무뎌지고 맙니다. 안중근의사는 하루라도 책을 보지 않으면 입안에서 가시가 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루라도 성경을 보지 않으면 어디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생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바로 사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육신을 가졌지만, 늘 성경을 가까이하면서 깨우침을 받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의식으로 바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69,행복한 가정 (15:16-18)

 

이 시간에 행복한 가정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완전한 가정은 없다고 합니다. 가정의 구성원 인간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불완전한 인간이 어떻게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요? 잠언의 솔로몬은,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행복한 가정이 될까요?

 

1. 가산보다 하나님을 위에 두세요.

16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하십니다. 잠언 기자가 가산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이 육신을 입은 관계로 가산은 절대 필요합니다. 돈 없이 어떻게 생활이 유지되겠습니까? 돈은 가족의 생명과도 직결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무거운 짐을 져주시고, 육신도 살게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돈은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 이 기본이 잘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평안과 행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반면에 크게 부하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본문의 '번뇌', 물질 때문에 수고하고, 고통당하며, 다함없는 불만족의 근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부자가 좋은 것 같아도, 꼭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돈 때문에 번뇌하고 고통당할 수 있습니다. 상속 때문에 자식들의 전쟁을 보는 고통도 있을 수 있습니다. 돈으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선진국의 자살률이 높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요즘 맞벌이 부부가 많습니다. 맞벌이해야 겨우 먹고 아이들 교육시키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맞벌이해서 손해도 있습니다. 한 사람은 일해도 한 사람은 기도해야 하는데 둘 다 일하니 피곤해서 정서는 삭막해지고 기도는 자꾸만 줄어들고 가장 문제는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배후가 없으니 하나님의 뾰쪽한 도우심은 보이지 않고, 자녀들도 여러 가지 인격 장애와 시험을 당합니다.

남편과 아내 자녀까지 흩어지기 일보 직전의 어느 가정을 분석해보면서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 폭발 직전인데도 엎드릴 사람이 없다. 맞벌이해도 신앙에 힘쓰는 사람도 있지만, 극복할 수 없다면 물질보다 하나님을 경외함을 우선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행복의 유무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정에 중심에 주님이 없어서입니다. 가산보다 하나님 경외를 우선하면 행복을 주십니다.

 

2. 무엇보다 사랑을 우위에 두세요.

17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하십니다. 여기서 채소는 당시 값싸고 흔한 음식입니다. 반면 살진 소는 성대한 잔치를 위해서 특별히 사용되던 값비싼 음식입니다. 이런 음식을 먹고사는 가정이라면 고관대작의 가정입니다. 그렇지만 미워하고 산다면 채소 먹으며 사랑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하라 했나요? 본문을 보세요. “서로 사랑하라고 했어요. 사랑은 용납에서 출발합니다. 부족함이 많아도 받아야 합니다.

15:1-7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신 것처럼 서로 받아야 합니다.

 

어느 동네에 두 집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집은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대가족이고, 한 집은 젊은 부부만 사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대가족을 이룬 가정은 항상 화목하여 웃음꽃이 피는데, 부부만 사는 집은 항상 싸움이 잦았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젊은 부부가 선물을 사 들고 이웃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 ! 그것은 우리 가족은 모두 바보들이기 때문이죠!" "아니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자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죠. 내가 출근하다가 물을 엎질렀습니다. 그때 나는 내 아내에게 내 부주의로 엎질렀다고 용서를 청했지요. 그랬더니 아내는 자기 생각이 모자라 물그릇을 그곳에 놓아두었으니 자신의 잘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계시던 저의 어머니께서는 '아니다, 나잇살이나 먹은 내가 그것을 보고도 그대로 두었으니 내가 잘못이다.' 하셨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해 바보가 되려고 하니 싸움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후 젊은 부부는 크게 깨닫고 서로 잘난 체하지 않고 화목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3. 감정표현을 더디 하시기 바랍니다.

18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하십니다. 여기 시비(리브)는 하찮은 말다툼이나 무익한 논쟁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다투는 것을 보면, 하찮은 것 가지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문제가지고 싸우나 나중에는 말꼬리 가지고 싸우다 감정으로 떨어집니다.

조금만 자제력이 없으면 언제든지 다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잠언 기자는 지혜를 말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표현을 조금 늦추라고 말씀합니다. 조금만 더디 하면 평화가 옵니다. 사람은 같아요. 그렇지만 표현의 차이는 있습니다. 표현을 더디 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조금만 더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부부는 가깝고도 먼 사이라고 합니다. 마주보고 누웠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이지만 서로 등을 돌리고 누워있으면 부부사이는 10만 리나 됩니다. 지구를 한 바퀴(40,350km) 돌아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가정을 맨 먼저 만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맨 처음 가나 혼인집에서 가정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거대한 가정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의 행복을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잘 경외하면서, 늘 기도함으로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고 감정표현을 늦게 하여 항상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70,교회생활의 원리 (15:19-21)

 

이 시간에 교회생활의 원리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받겠습니다.

교회라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부름 받은 공동체로서, 교회는 이 우주에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눈다면 천상교회와 지상교회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중 지상교회는 어떤 곳일까요? 지상교회는, 하나님께서 지상 성도에게 영적인 쉼과, 불신자를 구원하시며, 믿음을 가르치고, 훈련시켜, 장성한 천국백성을 준비시키기 위한 곳입니다. 지상에서 가장 귀한 곳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교회생활은 어떻게 해야 잘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본문에 비유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게으르지 않아야 합니다.

19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하십니다. 여기 게으른 자, 사소한 장애나, 어려움도, 극복하기 싫어하여, 일들을 회피하고 변명하며, 실제적으로 아무것도 행치 않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왜 가시울타리라 했을까요? 일하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하는데 고통으로 느끼기 때문 입니다.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기쁨으로 해야지 고통스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경 개념으로 볼 때 게으름은 악함입니다. 게으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지런히 섬기세요. 은혜 충만은, 열심을 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것입니다. 천국의 상은 부지런한 자의 것입니다. 12:11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생활도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주일 빠지면 안 됩니다. 각종 예배나 기도나 봉사에 빠져도 안 됩니다. 교회생활은 최소한의 영적활동이기 때문에 이것마저 빠지면 우리의 영적생활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여기 정직은 게으름의 반대말로 쓰인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정직의 의미를 찾으려면, 원문으로 분석하거나 그래도 나오지 않으면 문맥에서 찾아야 합니다. 즉 부지런하면 대로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부지런만 해서는 부족하지만, 교회생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 만찬에 초대된 것이니 부지런히 참여하여 은혜를 받으면 됩니다.

 

그리고 대로니라”(셀룰라)는 의미는 '쌓아 올리다.' 곧 단단하게 흙을 돋우어 만든 길이란 의미로 그 길이 탄탄하고 장애가 없이 평탄함을 시사합니다. 이처럼 교회생활의 기본은 부지런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은혜의 대로입니다.

 

2. 사역자를 인정해야 합니다.

20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하십니다. 이 말씀 이대로도 귀한 교훈입니다. 이것을 교회생활에다 비추어 말씀해보면, 교회에도 믿음의 부모 형제자매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사람들입니다.

 

4:11-12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하십니다. 양이 목자장 되신 예수님과 하나님의 세우신 목자를 떠나서 잘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한다 했는데 어떤 즐거움일까요?

그 의미를 알려면 이 말의 대구인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의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됩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존중합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존중을 받으면, 그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하십니다. 어미는 영적으로 말하면 교회입니다. 4:26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하십니다. 교회는 모성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인정하고 하나님이 세운 사역자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살전2:7)다고 말씀합니다. 요한삼서에서 말 한 것처럼,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살 때 그것이 사역자의 최고의 기쁨입니다. 지혜로운 아들처럼, 하나님의 종들을 인정할 때, 정상적인 교회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 세상에 나가서도 잘해야 합니다.

21무지한 자는 미련한 것을 즐겨 하여도 명철한 자는 그 길을 바르게 하느니라하십니다. 여기 두 종류의 사람이 나타납니다. 무지한 자와 명철한 자입니다. 그 중에 무지한 자”(하사르 레브), 원어상 '마음이 없는 자'로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상실한 자를 가리킵니다.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믿음 따로 생활 따로, 성경 말씀의 관념 없이 내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반면 명철한 자는 그 길을 바르게 한다 했는데 그 길이란, 신앙적, 도덕적 삶의 정도(正道)를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성도는 세상에 나가서도 말씀대로 믿음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성도로서 뿐 아니라, 사회인으로서 국민으로서, 이웃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 의무를 다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성도가 하지만, 전도 길을 막는 것도 성도입니다. 동네복음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혹시 나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과 한 멍에는 멜 수 없지만, 최대한 좋게 사시기 바랍니다. 손해 볼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예비해놓으셨지 않을까 하면서 양보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끄실 때, 엘림 오아시스를 준비해 놓으신 것처럼, 광야 같은 세상에 하늘의 오아시스가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를 구주로 믿어, 참 교회의 일원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상교회에 대한 사명을 다하고, 교회를 통해 베풀어주신 은총을 온전히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71,크고 귀한 사람 (15:22-24)

 

이 시간에 크고 귀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누구나 다 하나님의 종입니다. 16:4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물론이고, 악한 사람도 꼭 거기에 맞게 쓰임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가룟유다도, 당시 제사장도, 서기관도, 빌라도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하게 쓰임 받았기에 저는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는 주님의 책망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악의 일에 쓰임 받지 말고, 선한 일에 크고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을 크고 귀하게 쓰실까요?

 

1. 성령의 지도를 받는 사람입니다.

22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하십니다. 의논이 없으면이란 서로간의 긴밀한 숙의가 없으면이란 뜻입니다. 개인적인 아집과 독단만이 있는 상황을 말합니다. 이런 경영은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무너진다”(하페르)는 말은 '실패하다'란 뜻의 어근 '파라르'에서 유래된 절대 부정사로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독단적이게 되면 항상 불신과 불화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경영을 하려면, 개인의 독단을 버리고, 함께 참여하는 열린 경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열린 경영은 더 나은 지략을 모으기 위해서입니다.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여기 경영을 개역 성경에서는 모사라고 했습니다. '모사'는 특별한 정책수립에 참여하는 제갈공명 같은 조언자나 충고자를 가리킵니다.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서로 의논하고 유능한 조언자들의 말을 참고할 때 완벽한 지식을 얻어 계획과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귀히 쓰임을 받는 사람은, 독단이 아니라 위대한 성령의 지도를 받는 사람입니다. 16:3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하셨습니다. 사람의 지도도 받지만, 하나님께 묻고 여쭈어야 합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영감 받고 또 영감 받고, 다듬고 또 다듬고, 완성하고 더 완성하고, 하나님께 영감을 받는 열려 있는 경영이 되어야 합니다.

 

2. 말씀의 은혜를 끼치는 사람입니다.

23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하십니다. 기쁨을 얻고 유익을 얻는 말의 조건은, 약 두 조건입니다. 먼저는 인격에서 나온 말이어야 합니다.

 

그 입의 대답”(마아네핀), 원어상 '정중하고 겸손하여 호감을 주는 적당한 대답'이란 의미입니다. 말이란, 같은 말도 듣기 좋기도 하고, 듣기 싫기도 합니다. 인격에서 나온 말일 때는 듣기 좋지만, 비인격적인 말일 때는 듣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첫째는 인격적인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쁨을 얻고 유익을 얻는 말은 때에 맞는 말입니다.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때에 맞는 말이란, 나와 상관이 있는 말입니다. 나와 상관이 없는 말은 아름다워도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말을 잘하기 위해서 수사학을 공부했습니다.

수사학이란 언어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국민들을 움직여 거대한 전쟁을 시작한 것은, 단순하고 반복적이고 유치하게 감정에 호소하여 대중의 뇌리를 세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수사법은, 감정을 움직일망정, 사람의 영혼은 움직이지 못합니다. 영혼을 움직이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말씀을 전파할 때 모두에게 진정한 은혜와 기쁨을 줍니다.

그러므로 성경 많이 보고, 기도 많이 해서, 성령의 은혜를 끼쳐서

크고 귀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크고 귀한 일군은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24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하십니다. 스올이란, 음부 지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세속적 삶에만 집착하여, 죄의 성향 속에 사는 자가 가는 궁극적인 처소가 지옥입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많을까요? 불신자가 많을까요? 불신자가 더 많습니다.

한국컴퓨터선교회에서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2009년 통계로 세계적으로 기독교 인구는 약 22억이라고 합니다. 세계인구가 68억이니까 약 3분의 1이 기독교인입니다. 그런데 이 숫자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는 명목상의 숫자이고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은 그것의 10분의 1 26천만 명 정도라고 합니다.

많은 영혼들을 어떻게 지옥으로 가는 길에서 구할 수 있을까요? 그걸 잠언이 잘 말씀해 줍니다.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하십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을 전하는 것만이, 지옥으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크고 귀한 자는, 영혼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12:3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하십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전도하는 것은 천하를 얻은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앞서 가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항상 성령의 지도와 인도를 받고, 사랑의 말, 축복의 말, 은혜의 말씀을 하며, 할 수 있는 대로 전도하여 죽어가는 생명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크고 귀한 일군이 되시기 바랍니다.

 

72,미워하시는 것들 (15:25-27)

 

이 시간에 미워하시는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깨달아 피하면 됩니다. 피하되 철저히 피하고, 나아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우리도 함께 미워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교만입니다.

25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하십니다. 여기 교만한 자의 집은, 교만한 자에게 속해 있는 모든 사람과 부속물들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전체를 가리킵니다.

 

교만이 무엇일까요?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하신 그 말씀에, 교만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지계 즉 경계를 넘어가는 것이 교만입니다. 마귀가 그랬습니다. 교만은, 범죄한 천사의 첫 죄목인데 천사가 받들어야 할 자기 분수를 잃고,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자기 분수를 넘지 않아야 합니다. 교만은 마귀 범죄입니다. 처음 입교한 자에게 큰 직분을 주면, 교만하여 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정죄에 빠진다 했는데, 그 마귀 죄가 교만입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가만 두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11:22-24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하셨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신의 권력과 힘을 악용하여 땅의 경계를 표시하는 지계석을 임의로 옮김으로써 가난하고 연약한 자를 곤경에 처하게 하는 사례가 허다하였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항목 중의 하나입니다.

 

2.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불신입니다.

26악한 꾀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하십니다. 여기 악한 꾀가 무엇일까요? 낱말 그대로는 악한 생각, 악한 계획 등의 의미이지만, 26절의 악한 꾀는 조금은 다릅니다. 26절의 악한 꾀는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한 그 말씀의 반대입니다.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의미가 뭘까요? 선한 말(이므레 노암)은 원어상 '(유쾌한) 즐거운 말'을 의미합니다. 은혜로운 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정결하니라'(테호림)'(육체적으로) 순결한', '(도덕적, 의식적으로) 흠 없는'이란 뜻으로, 제사 제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한 말이란 하나님이 열납하실만한 영육간의 은혜를 끼치는 말을 가리킵니다.

 

이 은혜로운 말의 반대가 바로 악한 꾀입니다. 그렇다면 악한 꾀란 은혜가 안 되는 불신의 생각과 말입니다. 성경과 다른 말, 성경과 다른 생각, 성경과 다른 행동, 이것이 불신인데 이것은 은혜가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십니다.

 

11: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하십니다. 믿음을 이렇게 기뻐하신다면, 반대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 불신앙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가장 큰 죄는 불신죄라고 합니다. 살인자도 회개하면, 천국 갈 수 있지만, 마지막까지 불신앙하면 어림없습니다. 믿음의 말을 하면 은혜가 됩니다. 은혜 끼치려면 믿음의 말을 하세요. 성경의 말씀을 하세요. 벧전4:11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하셨습니다.

3.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탐심입니다.

27이익을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살게 되느니라하십니다. 여기 '이익'(바차)은 원어상 '약탈한 것', '부정하게 획득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뇌물은 당시 재판관과 많이 연관된 용어입니다. 뇌물을 받고 불공정한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들은, 자신은 물론 가족에게까지 준엄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3:5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우상인데 탐심이 우상이라면 왜 미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탐심이란 나를 위한 도 넘은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우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 나를 못 박아야 합니다.

탐심이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재판장의 마음을 흐리게 하는 것이 뇌물이듯이, 마음의 탐심이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됩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살게 되느니라하십니다. 어떤 것에도 탐심을 품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내 것이 되지, 탐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23:5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했습니다.

탐심을 품으면 도리어 도망합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피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언제나 함께 하시고(8:29), 구하는 것마다 다 주시고(요일3:22),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고 타인이 모아 쌓은 것까지도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신다(2:26)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항상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피하십시다. 철저히 피하십시다. 우리 모두 경계를 넘는 교만을 피하고, 은혜롭지 못한 불신을 피하고, 나와 내 집을 파괴하는 탐심을 피하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73,시험을 당했을 때 (15:28-30)

 

이 시간에는 시험을 당했을 때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성경에 시험에 관한 진리의 대가는 야고보입니다. 야고보는 야고보서에서 시험 당했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시험 당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우리에게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시험 당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뜻이 어디 있는지 찾아야 합니다. 28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하십니다.

어떤 좋지 않는 일을 당했을 때, 의인과 악인의 반응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의인은 감정을 자제하면서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합니다. 반면 악인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서 그대로 악을 쏟아냅니다. 누가 현명합니까? 더 현명한 의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시험 당했을 때, 감정적으로 나가지 말고, 하나님이 뜻이 어디 있는지 찾아야 합니다. 야고보도 약 1장에서 야고보가 시험을 말씀하면서, 왜 지혜를 구하라는 말씀을 삽입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1:5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신자가 불신자와 다른 점은, 어려운 일 당할 때, 신자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돌아봅니다. 단순한 내 잘못인지, 우연인지, 아니면 기도 부족으로 온 건지, 어떤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인인지, 하나님의 징계인지, 큰 은혜를 주시려는 서곡인지,,, 묵상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을 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신앙과 연계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점이 다릅니다.그러므로 불신자는 하나님의 뜻도 알 수 없고 문제를 풀어나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의인과 악인을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의와 악. 두 가지가 다 들어있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현명할 때도 있지만, 미련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만나도, 특별한 뜻이 있든 ,없든 ,하나님의 뜻을 찾는 습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2. 시험 당할 때 더 낮추고 회개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29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하십니다. 악인을 멀리하신다 했는데 멀리하시고”(라호크)는 어떤 친분 관계를 '물리다', '옮기다'란 뜻의 어근 '라헤크'에서 파생된 말로, 그 관계의 간격이 극히 먼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악인에게서 돌아서는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그들과의 관계를 단절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경멸의 지경에 처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무슨 일을 당할 때, 먼저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은 없는지, 살펴보면서 낮추며 겸비해야 합니다.

 

이런 악인에게 의인이 박해를 받습니다. 그 때 우리가 할 것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하십니다. 여기 들으시느니라”(쉐마) '깊은 관심으로 주의 깊게 듣는다'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울 때 일수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5:13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고난당할 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시험 받을 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50:15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하십니다.

 

3. 시험 당할 때 더욱 새로워지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30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하십니다. 이 구절은 눈과 귀에 대한 구절인데, 눈이 밝다는 것은 단지 시력을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 관념상 '얼굴', 그 중에서도 눈은, 사람의 내면이 외부로 가장 많이 표출된다는 점에서, 눈이 맑고 밝다는 것은, 그 사람의 내면이 지극히 순수함을 표현한 말입니다.

 

이처럼 시험은 우리를 더 순수하고, 간절하고 열심하며 온전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약1:2-4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나의 삶을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시험을 통해 자기 발전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욥이 시험을 만나고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고백했습니다. 더 신령해졌습니다.

 

그리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했는데, 험을 잘 이기면 좋은 소식이 옵니다. 우리를 온전케 하실 뿐 아니라, 육신적으로도 회복해 주십니다.

욥도 시험을 이긴 후에, 하나님께서 건강 주시고, 갑절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험이든, 마귀가 주는 시험이든, 어떤 시험이든지 승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가 없으셨습니다.

다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좋아하지 않지만, 다가온 시험은 믿음으로 이기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시험 당할 때,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더욱 자신을 채직하여, 영적으로 새로워지고 강해지는 온전한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74,낮춤 받는 자의 복 (15:31-33)

 

이 시간에 낮춤 받는 자의 복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겸손한 자가 받는 복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2:4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하십니다. 재물과, 영광과, 생명은, 영의 신령한 복과, 육신의 형통한 복입니다.

겸손의 복이 가장 크고 가장 다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낮추셔서라도 겸손케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 낮추셔서 라도 받게 하는 복은 무엇일까요?

 

1. 낮춤을 받은 자가 받는 복은, 생명입니다.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31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에 있느니라하십니다. 생명의 경계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가리킵니다. 6:63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에 따라, 생사가 판가름 나기 때문입니다.

 

롯의 사위들처럼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롯의 사위들은 소돔성이 불로 멸망한다는데, 농담으로 여기다가 불로 멸망했습니다. 성경 말씀을 듣느냐 거부하느냐는, 개인의 자유이지만, 그 결과는. 생과 시가 결정 되는 중요한 일 입니다. 듣는 자는 살지만, 거부하는 자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생명의 말씀을 전도해도 보통 사람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소리가 고막을 울린다고 들려지나요? 마음의 준비가 되어져 있어야 들리는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가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말해도 소귀에 경 읽기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기까지 그 낮춤을 경험했습니다. 재산을 잃기도 하고, 명예를 잃기도 하고, 무고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건강을 잃기도 하고, 견딜 수 없는 슬픈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다 낮추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낮추십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생명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2. 낮춤을 받은 자가 받는 복은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낮추신 것입니다. 32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하십니다. 여기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경히 여긴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증오하다', '경멸하다'란 뜻입니다.

훈계를 싫어하면, 자기 영혼을 증오하고 경멸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이걸 반대로 말하면 훈계 받기를 좋아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의 의미도 그런 의미입니다. “지식을 얻느니라”(코네 레브)는 그냥 지식이 아니라. 원어상 '마음을 얻는다.'란 의미로, 마음이 인격의 좌소라는 점에서, 그리고 상반절과 대조할 때, 이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합니다. 훈계를 받는 것은 나를 얻고,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12: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하십니다. 아무니 징계합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징계가 있거나, 내가 긴장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정신을 차리고, 그것 때문에 내 인격이 바로 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바로 가르치기를 원한다면 남에게 맡겨야 합니다.

허준 드라마에서 명의 유의태의 아들 유도지보다 허준이 더 뛰어납니다. 허준이 더 머리가 좋아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세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허준은 자기 목숨처럼 스승을 받들었지만, 유도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경망스러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 자식 내가 교육 못 시킵니다. 더 낮춘 사람이 승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낮추시는 것입니다.

3. 낮춤을 받은 자가 받는 복은 존귀입니다.

낮아지지만 낮아진 만큼 올라갑니다. 33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하십니다. 여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겸손이 동의어입니다. 두 가지를 동일선상에 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높이 경외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 현상을 잠22:4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겸손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우주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물도 몇 모금만 마시고, 음식도 곡식을 헤아려서 먹으면서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겸손은 의미가 없습니다. 인생의 근본을 모른 체 나 홀로 겸손은 도리어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도전입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자기를 창조한 절대자 하나님을 부정하고, 내가 근본이요, 부처라는 자들을 어떻게 겸손이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신 것은 존귀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약4:10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하셨습니다. 요셉이 높아진 것도, 낮추심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자에게 축복과 영예가 따라옵니다.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하십니다.,

4:6에도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하늘 높이 올리셨습니다.

이 원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낮추심을 감사할 뿐 아니라 더욱 스스로 낮춰 생명과 사랑과 존귀를 얻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