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충성이다 2 (삼하 23:13-17)
이것이 충성이다 2 (삼하 23:13-17)
13.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14.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15.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16.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17.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이 시간 “이것이 충성이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 충성된 사람으로 유명한 사람 중에 갈렙이 있습니다. 얼마나 충성했든지 신1:36에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셨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지 못한 가나안을 여호수아와 갈렙 만은 들어갔습니다. 상징적인 의미도 있는데 여호수아가 예수라면 갈렙은 충성입니다. 예수 믿되 그 믿음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충성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자기 믿음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갈렙은 개를 뜻하는 히브리어 ‘켈렙’에서 유래됐습니다. 그러니까 갈렙의 이름은 개(dog)입니다. 성경은 개에 대한 부정적 비유가 많지만 충성에만은 긍정적으로 쓰였습니다. 주인에게 충성한 개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는 너무나도 많지만 중요한 것은 갈렙처럼 동물에게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의 다윗의 세 용사에게서 그런 충성을 봅니다.
계속하여 충성이란 무엇일까요?
5. 충성은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행하는 것입니다.
세 명의 용사는 다윗의 말을 듣고 물을 구하러 떠났습니다. 아둘람 굴에서 베들레헴까지 왕복 100리 길인데 물을 얻기 위해서 적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대장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그 말을 들으면 다윗이 허락하겠습니까?
이처럼 충성은 말없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나 보아달라며 떠들며 일합니다. 이것은 자기 이름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하늘의 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6:1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믿음이 점점 자라고 있기 때문에 헌금 발표도 조금씩 줄이려고 합니다. 주보에 이름이 나가고 있기에 강단에서 이중으로 부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전국 대부분의 교회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헌금함을 만들고 호명은 물론 주보에도 이름도 내지 않았지만 교인들의 자발적인 헌금으로 큰 예배당을 건축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헌금하지 않을 것이라고들 했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일은 강제할수록 역효과가 나지만 성령의 감동대로 자원함으로 하면 더 풍성해집니다. 정말 충성된 사람은 그저 하나님의 일만 잘되기를 바랄 뿐니다.
6. 충성은 그분을 위한 것이라면 더 효율적인 것을 택합니다.
16절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세 용사가 힘을 합해 물을 길어왔습니다. 힘을 하나로 모으면 능력이 몇 배가 된다고 합니다. 얇은 2mm 베니어합판을 접착제로 두 겹으로 붙이면 하중을 8배나 견딘다고 합니다. 여기다 한 겹 더하여 세 겹이 되면 무려 15배의 하중을 견딜 수 있다고 합니다.
최근 목재를 더욱 강하게 압착하여 밀도를 3배로 높였더니 두께가 5분의 1로 줄어든 반면에 강도는 11배로 뛰어나고 가벼운 목재를 발명했다는 뉴스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삽겹줄은 끊어지지 않는다 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한 사람이 천을 쫓으며 두 사람이 만을 쫓는다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세 용사는 나름대로 다들 능력 있는 용사입니다. 요셉밧세벳은 800명이나 되는 적을 물리친 장수였습니다. 엘르아살은 불레셋과 전쟁할 때에 손이 칼에 붙기까지 적을 쳐서 크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삼마는 블레셋과 전쟁할 때에 사람들이 다 도망을 쳤지만 홀로 남아서 적을 막아낸 장수입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훌륭했지만 자기 공보다 무엇이 다윗을 위한 것인지 판단한 후 힘을 합해 나아갔습니다.
충성된 세례요한도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했습니다. 이처럼 진정 충성된 사람은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면 그 길을 택합니다. 무엇이든지 꼭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못했어도 다른 사람이 주님의 뜻을 이루었다면 기뻐할 일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7. 충성은 어떤 난관에 봉착해도 그만 두지 않습니다.
다시 16절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왔으나” 여기 돌파하고 지나서 길어왔다 했듯 그들이 물을 길으러 갔을 때 때부터 적과 싸웠다는 것은 나올 때 얼마나 많은 적에게 둘러쌓였을지 상상하게 합니다. 독 안의 쥐와 같이 수천 명의 적군에 에워싸였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왕을 위해 물병을 놓치지 않으려고 움켜쥔 채 싸우고 또 싸웠습니다.
이처럼 충성은 어떤 난관에서도 그만 두지 않는 것입니다. 감정 따라 상황 따라 변하는 반짝 충성은 충성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조선시대 이방원의 하여가보다 정몽주의 단심가를 더 좋아하는 것도 그 충성심 때문입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고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미국 서부에서는 야생마를 길들일 때 나귀와 같이 묶어 놓는답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말이 콧방귀를 뀌며 껑충껑충 뛰어다니면서 나귀를 끌고 다니며 나귀를 떨쳐버리려고 애쓰지만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며칠 뒤에는 말이 지칠 대로 지쳐서 나귀가 말을 끌고 옵니다. 처음에는 말이 나귀를 우습게보지만 나중에는 나귀에게 끌려오는 것입니다. 당나귀의 인내심을 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충성은 내 감정이 빠져야 진짜 충성이 가능합니다. 별 일 없을 때는 혼자 충성을 다하는 것같이 하다가 진짜 일군이 필요할 때는 뒤로 숨지 말아야 합니다. 온 교인들은 땀을 흘리며 수고하는데 뒤에서 총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는 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엡6:24) 복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8. 충성은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16-17절에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다윗은 세 용사의 목숨과 같은 물을 감히 마시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부어드리며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가장 귀한 목숨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이처럼 충성은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무엇이 아깝다면 그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의 차이가 바로 거기서 나타납니다. 정말 주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주님을 위하는 것이라면 어떤 것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령의 열매에 충성이 있습니다. 무엇이 아깝다면 아직 은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자기 신에게 충성하려고 갠지스 강에 자녀를 수장시키기도 한다고 합니다. 어느 날 강둑에 한 여인이 두 아이를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선교사는 이를 만류하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한참 후 그 여인은 둘 중에 건강한 아이는 물에 빠뜨리고 약하고 병든 아이만 데려왔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은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당신들은 당신의 신에게 병들고 약한 것을 드리느냐”고 반문하더랍니다. 이 말을 들은 선교사님은 무엇으로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답니다. 이교도들도 자기 신에게 이러한데 영원하신 참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그들의 미신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우리 마음 만큼은 주를 위해 충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하늘 보좌 높은 곳에서 낮고 천한 이 땅에까지 오셔서 아버지께 죽기까지 충성하심으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에게서 배우십시다. 충성이란 주님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주님의 마음을 존중하며,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작은 일도 소중히 여기고, 나타내지 않고 조용히 행하며, 그리고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어떠하든지 기뻐하고 지속적이며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윗의 충성된 세 용사와 같이 성령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하다 칭찬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