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인가? (히 13:12-16)
우리는 누구인가? (히 13:12-16)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이 시간에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참 성도의 모습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근대의 대표적인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해서 유명해졌습니다. 존재의 증거를 생각에서 찾고자 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고. 타고르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확실하고 영원한 생명의 경탄’이라고 했으며, 몽테뉴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찌하면 내게 진정 나 다와 질 수 있는가는 아는 일이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들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주변에서만 서성거리고 애매모호한 말만을 남겼지 객관적이고 분명한 인생관을 제시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불교 역시 인간을 정확히 정의하지 못했기에 자아라는 개념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든지 그 밖을 모릅니다. 과연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왜 사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 그리고 미래에 어디로 가는 것인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그야말로 불행한 우주의 방랑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는 반대로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이 역시 중요한 질문입니다. 힌트를 드린다면 성경에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 정체성에 대한 힌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붙여주신 수십 수백 가지의 이름들이 바로 우리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그만큼 성도의 정체성은 위대하고 아름답고 다양합니다. 이 시간에는 다 말씀드릴 수 없고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는 것만큼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럼 성도란 누구일까요?
1. 성도는 주님의 피로 구원 받은 자들입니다.
12절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이 말씀 속에서 성도의 정체성이 나타납니다. 성도는 영 죽을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의 피로서 죄 사함 받고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래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보혈 공로를 믿어 죄 사함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것과 믿지 않는 차이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의 좌우편에 두 강도가 있었는데 두 사람 다 흉악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믿었고 한 사람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는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하나는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구약에 대제사장이 1년 1차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갈 때 어린양의 피를 가지고 간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예수이 피를 믿음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히10:19-20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에도 담대가 나옵니다. 예수의 피 공로를 담대하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 피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2. 성도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13절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여기 그 능욕은 바로 예수님의 고난을 가리킵니다. 즉 세상에서 어떤 핍박과 능욕을 받더라도 감사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당시 십자가형은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고, 또 극도의 고난과 아울러 수치가 따르는 극형이었습니다.
516혁명이 일어나고 사회에 만연한 불량배를 소탕하기 위하여 잡아들인 다음에 깡패들의 개과천선 행진이라 하여 수갑과 포승으로 묶인 체 가슴에 큰 이름표를 달고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들의 심판을 받겠습니다.”하는 현수막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형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먼저 달리기 전에 매로 쳐서 인간의 모습을 얼굴에서 지운 다음에,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지고 거리를 행진시킨 후에 발가벗겨 답니다. 그런 고난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죽는 것이 쉽지 않지요.
어떤 사람이 한 신학자를 찾아가서 예수 안에서 죽는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신학자는 미웠던 사람이 있느냐? 그의 무덤에 가서 종일 그 사람을 욕하고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지극히 사랑했던 사람이 있느냐? 그 사람의 무덤에 가서 역시 종일 사랑한다는 애정 어린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이 뭐라고 하더냐? 가서 발길질을 하며 미워한다고 말하니 그 사람이 뭐라고 하더냐? 또 무덤을 쓰다듬으며 사랑한다고 말하니 뭐라고 하더냐?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요. 바로 그것이다. 그와 같이 예수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미움을 당해도 사랑을 받아도 높임을 받아도 반응하지 않고 주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다고 합니다.
정말 내가 사라져야 합니다. 마치 주님께서 금식하실 때 마귀의 온갖 유혹과 세상의 유혹 그리고 십자가의 환경 속에서도 반응하지 않으신 주님처럼 온전히 죽은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갈등도 없어야 합니다. 갈등한다면 아직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덜 죽어 꿈틀거리면 아직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롬6:10-11에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의 자화상입니다.
3. 성도는 지상에 사나 소망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14절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여기 장차 올 도성은 우리가 가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찾는다 했습니다. 이것은 천국의 소망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참 성도라면 세상 것에 취해 살지 않고 천국을 사모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어느 동갑내기 노부부가 있었는데 부인의 충실한 내조로 85세가 되어도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고로 부부가 동시에 돌아가 천국에 가니 베드로가 으리으리한 저택으로 인도했습니다. "이 집에서 사세요." "아, 이 집은 너무 비싸겠네요." "아니요. 여기는 천국입니다. 공짜예요." "그래요?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뷔페식당으로 갔습니다. 얼마나 좋은 음식들이 있는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마음껏 드세요.", "정말인가요?" "그래요. 여기는 천국이에요. 공짜입니다." 너무나 좋은 음식을 먹고 살이 찔까봐 할아버지가 다시 물었습니다. "혹시 저 칼로리 식당은 없습니까?" 그러자 "염려 마세요. 여기 천국은 아무리 많이 마셔도 아무리 먹어도 아프지도 않고 살도 찌지 않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팔딱팔딱 뛰면서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이 좋은 곳에 와서 왜 그러세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노려보더니 "이 할망구야, 이 할망구가 아니었으면 벌써 10년 전에 여기에 왔을 텐데 이 할망구가 나를 오래 살라고 현미밥 먹이고 생식시키고 운동시키는 바람에 고생만 하다가 이 좋은 곳에 이제 왔잖아." 그랬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지어낸 말이지만 천국이 그만큼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3-24) 했습니다. 그만큼 천국은 좋은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을 기다리지 말고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몸이 무겁고 힘들면 "예수님 언제 오시나요. 어서 오세요." 그렇게 기도해야 소망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4. 성도는 예수 때문에 항상 즐겁게 사는 사람입니다.
15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예수로 말미암아란 "예수 때문에", 혹은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런 뜻입니다. 세상에 웃을 일 없다 해도 예수님 때문에 그 은혜로 찬송하며 살아야 합니다.
누가 앞도 못 보는 한센씨 환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재미로 사십니까?” 그러자 “예수 믿는 재미로 삽니다.”고 대답하더랍니다. 이것이 성도의 참 모습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항상 기뻐하며 살면 하나님께서 육신적으로도 웃을 일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전2:26에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5. 마지막, 성도는 사랑하며 좋은 일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16절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이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하셨습니다. 성도는 세상에 보내진 하나님의 천사입니다. 정말 우리가 주님께 배운 제자라면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복음만이 아니라 사랑까지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 배운 대로 하지 않으니까 그렇지 그대로 한다면 지역 민족 세계복음화는 어렵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유기농의 대가인 로데일의 책을 보면 식물은 먼저 뿌리를 뻗을 곳에 자기 효소를 보내서 흙을 뿌옇게 변화시킨 다음에 뿌리를 뻗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무를 옮길 때는 꼭 그 자리의 흙을 가져다가 심어야 성공률이 높습니다. 이처럼 예수 복음도 선행과 사랑으로 전파됩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기도할 뿐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선행과 사랑을 실천한다면 세상 복음화는 어렵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주님의 피로서 구속 받은 자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요, 지상에 사나 소망 가운데 사는 자요, 예수 때문에 항상 즐겁게 사는 자요, 사랑하며 섬기는 천사라는 사실을 깨닫고 참 성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