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강해,26장~30장
♣민수기 26장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구약 성경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애굽에서 시작하여 광야생활과 가나안 까지는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교훈삼아야 할 신앙의 첩경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상고하는 것은 신앙의 뿌리를 찾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구약성경을 배제하고 신양성경만을 사랑한다면 이는 마치 뿌리가 잘려져 나간 꽃꽂이 신앙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꽃을 피우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 뿌리가 든든하다면 때가 되면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으며 그 꽃은 다시 열매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은 뿌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출애굽하여 가나안까지 들어가는 과정은 4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이 기간 동안 애굽에서 출애굽 하였던 사람들은 광야에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 죽임은 인간의 자연사도 포함되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한 대가였습니다. 다만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애굽에서 광야, 광야에서 가나안 까지 모두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간 대부분의 백성들은 이 두 사람만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에서 출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광야에서 두 번의 인구조사를 하게 합니다. 첫 번째는 광야의 시작에서 였으며, 두 번째는 광야의 마지막에서입니다.
민수기 26장은 광야생활을 마무리하기 위한 인구조사였습니다. 애굽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광야생활동안 죽임을 당하고 광야에서 새롭게 출생한 사람들로 하여금 백성의 주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는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의 계수한 자라 그들이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계수한 중에는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민26:63-65) 불순종의 결과는 똑똑하게 보이는 것 같지만 결국은 고생만하다 열매를 얻을 수 없게 합니다. 사랑하는 모든 가족들이 광야생활의 본을 삼아서 그들과 같이 반복하여 불순종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51-65절)
26장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민수기1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입성을 앞에 두고 정탐꾼을 보낸 일이 있었는데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의 정탐결과를 듣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했습니다. 그 대가로 내려졌던 선고가(14:29), 즉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들 중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선고가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64, 65절).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과 함께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은 언제라도 그가 계획하시거나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모르시는 것을 내가 기도로 말씀드릴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가장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아심으로 결국 원하시는 바대로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이사야와 바울이 좋은 본보기를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사38:1) 라고 히스기야 왕에게 알려준 사람은 이사야였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가 통곡하며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기 위해 기도했을 때, “~ 네 날을 십 오년을 더할 것이며”(왕하20:5-6) 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사람도 이사야였습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죽었을 것임을 성경은 명백히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38:1-22)
바울은 구원은 개인의 바람이나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롬9:16)은고 하는데, 이는 구원이 기도로써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원하는 ~ 구원을 얻게함이라.(롬10:1)”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지혜로우심, 선하심, 그리고 전지하심이 변치 않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때문에 기도할 용기를 얻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모순되는 주장에 놓여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마음을 정하시고 원하시는 것을 행하시는 한편, 인간의 기도에도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하고자 하시는 바를 주권적으로 정하신 대로 행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자 되심과 보호자요, 창조주 되심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민수기 27장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창1:29-30)
민수기27장에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민27:16) 라고 모세가 고백합니다. 모세는 ‘아바림’ 산에 올라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게 됩니다. 아바림 산은 모압 지방에 있는 산으로서 가나안을 바라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모세가 임종을 맞이할 ‘느보산’ 앞에 있으며 이곳에서 요단강 건너 여리고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입성에 있어서 첫 번째로 맞닥뜨리는 거대한 산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에 대한 상황 보고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여 애굽으로 돌아가자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40년간의 광야생활을 하게 됩니다. 여리고 성을 눈으로 확인한 모세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기도가 바로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라 고백하게 됩니다.
모세는 이곳에서 자신을 이어 직무를 감당할 후계자를 선정합니다.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민27:18-20) 인간의 능력으로만 살아간다면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순종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본질적인 믿음만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 꿇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 본문에서 아직 자신들의 땅이 없었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비록 자신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심판을 받아 광야를 40년간 헤매고 있었지만, 하루라도 자신들이 발을 딛고 살아갈 땅, 그 가나안 땅을 잊은 적은 없었습니다. 땅이 있어야 이스라엘 백성들도 더 이상 광야를 떠돌지 않고, 정착해서 살 수 있었으며,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6장에서 행한 두 번째 인구조사는 군대로 재편성하는 데만 그 목적이 있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인구조사는 앞으로 가나안 땅을 분배할 것을 염두에 두고 행한 조사였습니다.(민26:52~56) 조상의 지파를 따라 앞으로 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 땅과 관련해서 아주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 없이 딸만 두고 죽었을 경우에, 그 땅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모세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들을 찾아온 것입니다. 한 가정의 앞날을 좌지우지하는 생존의 문제로 슬로브핫의 딸들이 찾아온 것입니다.(민27:1) 하나님은 슬로브핫의 딸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대답을 하셨습니다.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받게 하되 그들의 아버지의 기업을 그들에게 돌릴지니라”] 그런데 하나님은 슬로브핫의 딸들이 제기한 문제 외에도 더 다양한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시고, 다양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아들 없이 죽으면 딸에게 기업을 물려주고, 딸도 없으면, 죽은 그 사람의 형제에게 기업을 물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그 사람의 형제도 없으면, 죽은 그 사람의 아버지의 형제에게 기업을 물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땅을 물려받은 딸들이 다른 지파 사람들에게 시집을 가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민36:) 여러분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만일, 땅을 물려받은 딸들이 다른 지파로 시집을 가면, 그 딸과 함께 물려받은 땅도 다른 지파의 기업으로 더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들은 크게 세 가지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여자들의 권익을 보호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중근동 사회에서 여자들의 권리는 거의 보호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우리들이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율법이라는 것이 단지 사람을 옥죄고 속박하기 위해서 제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의 구체적인 현실 문제를 해결해주고 인간의 정당한 권리를 보호해주기 위해서 제정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이 무엇인지를 아주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 당시 최대 기업인 땅이 특정한 지파에게만 집중되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시기 위해, 아주 적절한 제도를 세우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왜 그렇게 땅을 보호하셨는지 아십니까?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통해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그래서 억눌림과 가난과 고통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셨습니다. 그 꿈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당시 경제적 기반인 땅을 선물로 주시고, 지파별로 땅의 경계가 무너지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그 필요를 우리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아주 섬세할 정도로 채워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이 먼저 하나님의 꿈을 품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꿈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더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6:33)
그러나 땅을 볼 때, 사실 땅을 보는 것 자체보다 과연 우리들이 어떤 마음으로 땅을 보느냐가 더욱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믿음의 눈으로, 신앙의 눈으로 볼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갈릴리 땅을 긍휼과 사랑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땅은 갈등과 분열과 상처의 깊은 골짜기가 곳곳에 파여 있는 척박한 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신앙의 눈으로, 더욱더 긍휼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공동체 내에서 지도자는 항상 중요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도자 교체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가 물러나게 되고,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이제 등장하게 됩니다. 모세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이유는 므리바의 반역 사건으로 인해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민20:)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는 말씀을 하시기 전에 먼저 말씀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민27:12) 모세는 하나님이 바라보라고 말씀하신 그 땅을 보면서, 하나님이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 번 굳게 믿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은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모세를 대신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로 세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여호수아는 이제 모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라는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모세와 같은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은밀하게 말씀하시지 않고, 모세의 얼굴을 대면하여 아주 명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모세는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하여 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계시와 관련해서 모세는 예수님의 모형과 그림자 역할을 했습니다.(민12:6~8) 하나님이 모세에게 계시를 주셨던 방법과 같이, 이제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에게도 그렇게 계시를 주시지 않습니다.
여러분,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제사장 엘르아살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간접적으로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민27:21) 모세가 죽고 나면, 앞으로는 제사장이 출애굽기 28장 30절 말씀에 나오는 우림과 둠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됩니다. 우림과 둠밈을 통한 하나님의 결정을 여호수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전심으로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호수아의 지도력은 모세의 율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수1:7~ 8) 율법에 대한 순종이 있은 그 다음에야 형통이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직접 받았지만, 여호수아는 모세의 율법을 읽고 모세의 율법을 묵상하고, 모세의 율법을 다 지켜 행해야 합니다. 이렇게 여호수아의 지도력은 아주 철저하게 모세의 율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에게 성경에 나오는 여호수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에게 실망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가르치는 것과, 교회 지도자들의 말과 행동이 다른 것입니다.
♣민수기 28장
향기로운 예물
구약의 제사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예물은 불을 통과해야 합니다. 즉 번제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번제는 화제입니다. 불로 태워서 드리는 것입니다. 번제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온전하게 죽으심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와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그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죽음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죽음의 십자가가 아니라 생명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고전1:18)
지금 우리는 구약시대처럼 간접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이제 더 이상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완전한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시는 짐승으로 제사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적 의식만을 드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게 주어진 삶을 믿음으로 살아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하는 영적인 제사인 것입니다. (롬12:1)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화제로 드릴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민28: ) 향기로운 화제는 예물만으로 될 수 없습니다. 그 예물에 자신을 담아 드리지 않는다면 결코 향기로운 예물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예물만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행17:25)
우리 자신을 온전하게 드리는 십자가를 지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호흡을 풍성히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1-15절)
이스라엘이 드려야할 제사의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제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27장에 모세의 후계자로 세워진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입성하기 위해 준비된 사람입니다. 그가 가나안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언급하시면서 제사의 중요성을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 새로운 세대로 구성된 가나안 입성자들은 율법이 수여되었을 때에는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가나안을 정복해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자칫 소홀해 질 수 있는 제사를 기억나게 하심으로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과 화평을 유지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고 계십니다.
아침과 저녁에 매 한 마리의 어린 양을 드리라는 이 제사는 날마다 일정한 때에 항상 드리는 특성 때문에 상번제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2절 말씀에 내 헌물, 내 음식, 내 향기로운 것이라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제사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거듭 밝히고 계십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사람을 의식한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존귀히 여김을 받으시는 예배가 되도록 훈련해 가야 합니다. 아울러 예배당 안에서의 예배도 중요하지만 삶으로 드려지는 예배 역시 하나님이 받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른 기억을 하는 사람만이 바른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물은 흠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거나 제물을 드릴 때 아무 생각없이 습관적으로 준비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것은 흠없고 순결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을 얼마만큼 드리느냐라는 것보다 하나님께 올려드려지는 것을 어떤 마음으로 준비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매일, 매달, 매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에 대한 진실한 감사가 묻어 있는 예배와 예물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아침 저녁으로 매일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어느 한 날을 정해서 시간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이 하나님 앞에 집중된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쉬지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매일 둘씩 상번제로 드리라는 상번제를 뜻하는 말은 규칙적으로 드리는 번제를 의미합니다. 아침에는 흠없는 제사였다가 저녁에는 상한 제사가 아니라 일년내내 아침과 저녁에 드려야 하는 제사가 동일해야 했던 것처럼 우리의 매일과 매 순간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되도록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가나안 입성을 앞선 시점에서 다시 한번 언급하시는 제사가 지닌 영적인 의미는 매우 큽니다. 이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영속적인 언약 관계가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매일의 제사를 통해 재확인될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책임져주셨습니다. 흠없는 제물로 단번에 희생제물이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날 때 우리의 헌신과 충성은 온전한 것이 되어 아버지 앞에 올려 드려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날마다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려야 하는 상번제에 이어서 매 안식일과 매월 첫날에 드려야 하는 제사에 대한 규례가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안식일을 위한 제물을 준비할 때는 매일 드리는 상번제물의 두 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매일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일은 더욱 절제된 헌신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두 배의 제물을 드리도록 하신 것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그날은 여호와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창조 기사 후에 증거 된 말씀과 십계명을 통해 어떻게 안식일이 지켜졌는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기억하고 쉬는 날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해 놓으신 안식일의 정신을 우리의 마음대로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오늘날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주일은 우리 주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새로운 의미의 안식일 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생각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참된 예배로 주일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그러하기에 주일을 주일답게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의 부활을 온전히 인정하지 않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 후의 안식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되며,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웃을 몰라라 하는 행동밖에 되지 않습니다. 매 주일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며,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이웃을 향해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11절 말씀부터는 매월 초하루에 드려야 하는 번제물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날에는 매우 많은 제물을 바치도록 하셨는데 그렇게 제정하신 이유는 지난 일개월 동안에 지은 죄를 용서함 받으며 앞으로 지낼 새로운 한달동안 여호와께서 지켜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기를 기원하는 마음가짐을 표하는데 참된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날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새로운 한 달을 헌신하겠다는 다짐은 무의미한 일 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경건한 모습을 하고 예배 자리에 앉아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 된 모습이 우리 안에 있다면 그것은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속죄제를 받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15절) 하나님과 교제하고자 할 때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죄 문제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 입장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참된 신앙이겠지요.
(16-25절)
오늘 본문에는 유월절과 칠칠절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유월절은 아주 중요한 절기입니다. 유월절이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현재 가나안을 바라보는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월절은 출애굽의 기쁨과 해방을 제공하신 하나님의 영광스런 경륜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출애굽이란 한 사건을 중심으로 유월절은 초 태생의 죽음을 강조합니다. 16절에 유월절을 지키되 여호와를 위하여 지킬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을 제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고통받는 자기 백성을 위해 오래 전에 언약해 놓으셨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기념하는 날로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켜야 했습니다. 유월절을 우리의 삶에 적용한다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기억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게 하신 사실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죄인의 괴수같은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일 뿐입니다.
17-25절에 나타나는 제물들은 무교절에 드려야 하는 제물에 대한 지시 내용입니다. 무교절은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을 강조하는 절기로 지켜졌기 때문에 이 두 절기는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구분을 한다면 유월절은 정월 14일 저녁 하룻밤만의 어린양 식사 의식을 말하고, 무교절은 정월 15일부터 한 주간동안 지켜지는 무교병 축제 의식입니다. 박해받던 애굽에서 급히 나와야 했던 당시의 고통과 새로 거듭난 존재로서의 변화를 기념하는 거룩한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교절을 지내면서 집안 내부에 있는 모든 누룩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누룩은 죄와 부패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철저히 배제되는 물질로 간주되었기에 무교절에는 누룩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26-31절)
밀의 첫 소출을 하나님께 바치는 칠칠절에 대한 규례입니다. 유대인의 3대 절기의 하나로, 유월절에서 7주째 즉 50일째에 거둔 첫 이삭을 드리는 절기입니다. 이 날도 성회로 모여서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절기를 지킬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30절 말씀에 속죄하기 위해 숫염소의 피를 드리도록 하셨는데, 속죄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고자 하는 자에게 필수적인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유하심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위해 전제조건으로 우리에게도 오래 전에 언약의 피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을 잊지 않기 위해 애쓸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허락하셨던 은혜를 우리 삶 가운데도 풍성히 채워주실 것입니다.
♣민수기 29장
일상보다 중요한 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은 분주합니다. 하루 단위로 사용했던 시간 단위가 이제는 초 단위로 사용되어 지고 있습니다.(겔1:14-15) 이렇게 빠른 일상의 삶이기에 삶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은 삶의 우선순위를 결정케 합니다.
민수기 29장 말씀은 인간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일곱째 첫 날” 은 유대력으로는 ‘티쉬리’(Tishri)로 새해로 태양력으로 1월에 해당합니다. 유대력으로 7월에는 중요한 세 가지 절기를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나팔절(7월1일), 속죄일(7월10), 장막절(7월15일) 입니다. 이 날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노동은 인간에게 주어진 저주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요, 노동을 통하여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하신 것입니다.(살후3:10-11)
안식일과 7월의 첫째 날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은 단지 일을 쉬라는 개념이 아니라 삶의 우선순위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신앙적 행위입니다. 마음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멈추고 정해진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적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예배하기 위해서 삶을 멈춰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적으로 판단할 때 손해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코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신앙적 우선순위가 있다면 당연 이 땅의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기억하여 예배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떠한 계획보다 언제나 우선순위 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길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1-6절)
본문말씀에 이르는 말씀은 제사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계속 반복 되어지는 것 같아도 제사의 규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며 제사의 목적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민족에 있어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일곱째 달은 큰 의미를 지닌 달입니다. 일곱째 달을 유대월력의 명칭으로는 에다님 월이라고 합니다. 태양력으로는 9월-10월에 해당됩니다. 이 달의 중요한 의미는 이 달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포로 이전까지 새해 시작의 달로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년을 축하하는 성격이 있는 달이 바로 일곱째 달인 것입니다.
이날, 7월 초하루를 나팔절이라고 부릅니다. 이 날에는 나팔을 불었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하루 종일 나팔을 불며 축하하였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도 나팔소리로 하늘로부터 강림하신다고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편 제사에 대해서 출애굽기 29장 41-42절에 보면 이 제사의 향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백성과 만나시며 교제하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제사에 임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양의 제물과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순종의식인 것입니다. 드리는 자의 중심의 향내가 하나님께로 상달되는 것입니다.
또 특별히 이 나팔절(7월 1일)에 드릴 희생 제물은 도합 세 가지가 중복되었습니다. 상번제 즉, 매일 드리는 희생 제물과, 월삭으로 즉, 매월 드리는 희생 제물, 그리고 나팔절의 희생 제물을 드리므로 세 가지의 제사를 한꺼번에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 가지의 제사를 한꺼번에 드리도록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헌신을 3배 이상의 열심으로 신년을 시작하라는 말씀으로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한 해 전체를 하나님께 헌신, 봉사하는 기간으로 삼겠다는 주의 백성 된 자들의 아름다운 신앙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 5절에 신년제가 시작되면서 속죄제로도 드리는 것은 새해를 시작하는 시간에 과거에 부족했던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속에서 새로운 날들을 맞고자 함인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성회로 모이는 날에 노동을 일체 금지하셨습니다.(민29:1) 여기에서 노동은 생계을 위해 일상적으로 하는 정규노동을 뜻하는 것입니다.
제사나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의 말씀과의 만남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순종을 작정하여야 완성되는 것입니다.
(7-절)
오늘 말씀은 대속제일인 일곱째 달의 열흘날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7월 10일은 대속죄일로서 대제사장이 1년에 단 한번 자신과 온 백성 그리고 성소의 죄를 속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는 날입니다. 이때 백성들은 금식을 하며 회개합니다.(레 16:29; 23:27), 또한 안식합니다. 특히 아무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날에는 생계를 위한 노동은 물론 오락과 같은 육신의 유익과 같은 어떤 형태의 노동일지라도 모두 금지하도록 하신 것입니다.<레 23:36>. 이날만은 오직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에만 전념하게 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레 23:28,29>.
본문말씀에 보면 7절에 ‘심령을 괴롭게 하며’ 에서 - 여기서 '괴롭게 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니템'은 '거칠게 다루다', '억누르다', '겸비하다'는 뜻의 '아나'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럼으로 죄악된 자신의 모습을 뼈저리게 자각하며 애통하는 심령과 자세를 가르키는 것입니다.<레 23:27>.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계시지만 죄에 대해서는 냉엄한 심판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죄에 대한 속성을 살펴보면
첫째로 나를 하나님과 분리시키고 또 나와 이웃을 분리시킵니다.
둘째로 죄에는 빠른 전염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빨리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주위사람들도 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죄는 마비시키는 성질이 있습니다. 죄를 계속 가지고 있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죄에 마비가 되어버려 무감각해지는 것입니다.
넷째로 죄에는 파멸성이 있습니다. 죄를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작은 죄 같더라도 그 죄로 인해서 그 사람은 결국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 문제에 관한한 냉정해야 하며 죄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깨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 문제를 놓고 오늘 말씀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는 전심으로 회개해야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통회할 때에 결단코 외식으로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욜2:13) 하나님은 통회하며 우는 것을 귀하게 보십니다.(약 4:9-10)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속죄하는 제사 즉 대 속죄일(7월 10일)에 드리는 제물을 말씀하셨습니다. 드리는 제물을 종합해 보면 매일 드리는 상번제 제물과 그에 따른 소제와 전제를 드리는 것은 나팔절과 동일하게 드립니다. 그리고 또 특별히 제사장과 그 가족을 위한 속죄 제물(수송아지 한 마리)과 백성을 위한 속죄 제물(수 염소 한 마리)을 다 드려야 했습니다. 또 그와 더불어 수 염소를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짐승들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예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수없이 많은 짐승을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죽여야 했고 또 각을 떠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단 번에 죽으심으로 이 모든 제물을 대신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주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나서도 아니요. 한 일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다만 긍휼의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가 이 크신 은혜를 거저 받게 된 것입니다.
초막절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초막절은 “장막의 축제, 장막의 절기”라 하여서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한 해의 모든 추수를 마치고 수확한 소출을 창고에 저장하는 날이라 하여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광야에서의 장막생활을 기념하기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집을 떠나서 나뭇가지로 만든 초막에 거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이 초막절은 성도들에게 따르는 일시적인 고난을 위한 피난처를 마련해 주시는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초막절은 7일간 지켜졌고 8일째 되는 날은 대성회로 지켰습니다. 그리고 대 성회 후에 각자의 초막을 헐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 절기를 마쳤습니다. 또한 추수를 마치게 해 주신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로 이 초막절을 추수감사제라고도 하며 신년을 축하한다 하여 신년제 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의 양은 수송아지만 빼고는 매일 동일한 양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수송아지의 숫자만은 하루에 한 마리씩 줄어서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수송아지의 숫자가 완전 숫자인 일곱 마리를 드림으로 마치게 됩니다. 7일 동안 바쳐진 짐승의 숫자는 도합 203마리입니다. 그리고 8일째 되는 대 성회 때 드리는 것까지 합치면 모두 215마리나 되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일 년 동안 지켜지는 모든 절기 중 마지막 절기인 동시에 가장 큰 감사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절기에는 다른 어떤 절기에서도 볼 수 없는 많은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드림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들의 기쁨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1절과 12절을 보면 초막절을 속죄일 바로 다음 날에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회개가 기쁨으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시126:편 5-6)
한편 오늘 말씀에 보면 모든 제물들을 바치면서도 반드시 상번제를 드려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번제는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 말씀을 어떤 특별한 봉사라 할지라도 정해진 우리의 예배를 미룬다거나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드려야 할 예배를 바르게 정해진 대로 드려야 그 밖의 모든 봉사들도 온전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보면 서원제와 낙헌제가 나옵니다. 서원제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맹세를 함으로써 그분의 뜻대로 살겠다는 신앙 고백적 제사입니다. 또한 낙헌제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구애됨 없이 하나님께 자원하는 심정으로 드리는 기쁨의 제사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다양한 이름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고 또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제사 드릴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이는 제사를 통하여 이스라엘민족을 만나시기 원하시며 교제하심으로 복주시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초막절, 장막절의 행사는 우리의 미래의 천국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 절기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가지와 시내버들”을 취하여 여호와 앞에서 칠일 동안 즐거워하였습니다.(레 23:40) 또한 큰 의미에서 장막절은 감사절로도 지켰기 때문에 감사행위도 절정에 도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장막절은 감사로만 충만한 천국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절기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그 절기의 의미를 되새기며 또한 절기를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서 기억하고 회상하고 기념하는 것은 인간에게 깨달음을 주며 자신들의 삶의 방향을 재정립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잊지 않는 삶, 기쁨으로 예배하는 삶이 우리의 삶이 될 때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우리 주님, 또한 흠 없는 어린양이 되신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의 하루를 새 힘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민수기 30장
서원의 최종 목적
서원은 사람이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하는 약속을 의미합니다. 자발적인 약속일 때 그것이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마음 깊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결정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원의 문제는 물질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서원한 것이 파괴될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 요소는 시집가지 않은 여성의 서원은 아버지의 허락을 받았을 때 서원의 유효합니다.(민30:5) 이는 아버지는 집안의 가장이기 전에 하나님의 가정 제사장으로서 모든 가족들을 영적으로 통솔하며 복을 명할 수 있는 영적 권위자이기 때문입니다.
서원한 것이 파괴되는 것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서원이 파괴될 수 있는 두 번째 요소는 여성이 결혼 전에 한 서원입니다. 만약 그 서원을 남편이 듣고 허락하면 반드시 갚아야 하지만 남편이 허락지 아니하면 그 서원은 파괴되는 것입니다.(민30:6-8)
서원이 파괴될 수 있는 세 번째 요소는 결혼한 여성이 서원하였을 경우 남편이 그 서원한 것을 듣고 허락지 아니하면 서원은 파괴될 수 있습니다.(민30:10-12)
I. 서원의 일반적인 규례 30:1-2
모세는 이 법률을 이스라엘 지파들의 두령들에게 전달하였고 그들이 그들의 책임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르치게 했습니다.
(1) 여기서 제시된 경우는 어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을 하는, 즉 여호와를 대상으로 약속을 하는 경우입니다. 서원의 내용은 합법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서원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교훈에 비추어 볼 때 금지된 일이라면 이행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여기서 서원하는 자는 '마음에 제어하기로' 서약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영이신 하나님께 대한 서원입니다. 그러므로 그 영혼은 힘을 다해 하나님께 속박되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하는 약속은 신분을 걸고 하는 것이나, 하나님께 하는 약속은 영혼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2) 이러한 서원들은 성실하게 이행해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Ⅱ. 서원 규례의 특별한 예외 30:3-16
여기서는, 자기 임의대로 행할 수 있는 모든 사람, 또한 건전한 이해력과 기억력을 지니고 있는 모든 사람은 그들의 서원이 법적이고 가능한 것이라면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당연한 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서원하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으며 다른 사람의 뜻에 따라 행해야 되는 사람이라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여기 아주 비슷한 두 가지 경우가 제시되었고 그에 대한 규례가 지정되었습니다.
(1) 먼저 자기 아버지의 집에 있는 딸의 경우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서원의 일반적인 규칙에 의하면 장성한 남자가 서원을 했을 경우 반드시 그 서원을 이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집에 있는 딸의 경우는 특별합니다. 딸의 서원은 그녀의 아버지가 그것을 알되 그녀에게서 들어 알게 될 때까지는 무효이거나 미정 상태로 간주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에게는 그 딸의 서원을 알았을 때 그것을 허락하거나 취소시키는 권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아버지가 그 서원에 대해 침묵을 지킬지라도 그것은 그 서원을 허락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 아비가…서약을 듣고도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 모든 서원을 행할 것이요(4절). 즉 침묵을 찬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2)아버지가 그 딸의 서원을 반대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무효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서원이 그 가정에 불리한 것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선한 뜻을 가지고 서원을 하였고 또 서원 속에서 그녀가 하고자 한 것들이 진실한 것이었다면, 비록 아버지의 반대로 지키지 못했다 해도 그 서원은 하나님께 열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순종한 것이 제사보다 더 낫게 여겨질 것입니다.
(2) 아내의 경우도 거의 같습니다. 과부이거나 이혼 당한 여자의 경우에는 그녀를 제어할 아버지나 남편이 없기 때문에 그녀가 그 마음을 제어하는 서원을 한 것은 무엇이든지 지켜야 했습니다(9절).
서원은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하므로 오늘날에도 하나님께 대한 서원은 일시적 감정이 아닌, 전 인격적인 헌신의 결단 하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