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강해

민수기 강해,16장~20장

공 상희 2017. 4. 5. 07:00

민수기 16

 

질서의 하나님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질서는 만들어진 어떤 규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십니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 압축한 말이 삼위일체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분이신 거룩한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의 질서는 이 땅의 모든 지식, 모든 철학, 모든 종교, 모든 이성을 초월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의 기간은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6천년의 장구한 세월입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 한 분을 알아왔고, 그 알아 온 것을 이론적으로 정립했다 할지라도 빙산의 일각 그 이하로 인간의 지식은 제한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해서도 인간에 마음에 담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 존재 자체를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3:12)

그와 같이 인간의 이성에 하나님을 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믿음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질서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하나 되심도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영혼으로 믿어야 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질서의 본질인 것입니다.

 

(1-20)

민수기 16장 말씀에는 충격적인 사건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으로 진노를 받아서 염병이 돌아 14,700명이 죽임을 당하였고 백성들의 지도자 250이 하나님께 분향을 하다 향로에서 불이 나와 사르게 한 사건(16:32-35)입니다. 죽음의 숫자는 놀랍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현대는 더 많은 숫자가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동시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백성들 중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질서에 대한 도전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을 대표하여 말을 했던 사람은 고라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께 가까이 오게 한 후에 그들의 방식대로 향로에 불을 담아 두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250개의 향로를 준비하여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비방한 것에 대해 영적인 지도자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보셨으며 각자의 앞에 향로에서 불이 나와 그들을 태워죽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질서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해야 할 성격이 아니라 믿어야 하며 순종해야 할 거룩한 질서요, 생명의 질서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거룩한 질서에 순응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민수기 16장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꼭 지켜야 하는 사람들마저도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레위 지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막을 보호하고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레위 지파마저도 불신앙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이 얼마나 깊어졌고,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민수기 16장 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두 가지 반역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반역은, 민수기 161절에서, 40절까지 나옵니다. 여기서는 레위 지파 사람들의 주도로 하나님께 반역을 합니다. 두 번째 반역은, 1641절에서 50절까지 나옵니다. 여기서는 몇 몇 소수의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회중 전체가 하나님께 반역을 행합니다. 약속의 땅을 거절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반역을 하고 있습니다. 1절과 2절 말씀을 보면, 반역을 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자세히 나옵니다. 레위의 자손 고라와 다단, 아비람과 온, 그리고 일반인 지도자 250명이 합세하여 반역을 행했습니다.

 

3절 말씀을 보면, 반역을 한 사람들이 어떤 주장을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회중이 다 거룩하다는 이 말은, 그냥 들으면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 틀린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내에서도, 거룩함의 정도에, 분명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가장 거룩한 사람은 대제사장이고, 그 다음은 제사장이며, 또 그 다음에는 레위 지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거룩함의 차이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리가, 각각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역한 사람들의 주장은, 그런 거룩함의 차이를 전적으로 부인했습니다. 모두 다 거룩하기 때문에 모세와 아론만 특별한 권리를 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4절 말씀에서, 모세가 그들의 말을 듣고, 어떻게 반응을 했습니까? 성경은 모세가 그들의 말을 듣고, 엎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또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중보의 자세로 하나님께 엎드린 것입니다.

모세가 엎드린 후에, 5절에서 11절까지, 크게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5절에서 7절까지는 고라와 반역한 모든 무리들에게 말한 것이고, 8절에서 11절까지는 특별히 레위 자손인 고라에게 말한 것입니다. 첫 번째로 고라와 반역한 모든 무리들에게 모세가 말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 다음날 아침에, 성막 앞으로 각자 향로를 들고, 다시 모이도록 한 것입니다. 자신의 향로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둔 채로 들고, 성막 앞으로 모이면 하나님께서 직접 하나님께로 가까이 올 사람을 선택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맞는지 틀린지, 직접 하나님께 검증을 받자고 모세가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앞에서 향로 안에 향을 넣는 것은, 제사장들만의 특전이었기 때문에, 자격이 없는 사람이, 부정확하게 그 일을 할 경우,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레위기 101, 2절 말씀을 보면, 향로를 임의로 다룬 사람들의 예가 나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비록 아론의 아들이지만, 향로를 자기 마음대로 다루었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 정도로 향로를 다루는 것은, 아주 조심해야 하며, 정해진 사람이, 정해진 규칙대로 행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모세는 7절 말씀 끝에서, 자신이 들었던 비난을, 그들에게 다시 되돌려 줍니다. “레위 자손들아, 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느니라

 

이어서 두 번째로 모세는, 레위 자손인 고라에게 어떤 말을 합니까? 모세는 고라에게,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게 된 것이, 아주 특별한 은혜라는 것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특별한 섬김이, 너희들에게는 작은 일에 불과하냐고, 9절과 10절 말씀에서, 2번씩이나 되묻고 있습니다. 레위 지파의 일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만큼, 작은 일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일이라고, 모세가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하는 신앙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계속해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신앙의 모습을 드러낼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체험자체가 곧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교적 체험만으로는,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체험이, 곧장 우리의 믿음이 되고, 곧장 우리의 신앙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한 종교적 체험이, 우리 마음에 내면화되지 않고, 그 종교적 체험의 의미가 무엇인지, 말씀 앞에서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신비하고 기이한 체험에 불과한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체험으로 신앙의 승부를 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의 중심을 체험에 두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적 원형이 무속신앙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속 신앙은 신명나는 굿판은 있어도, 자신의 인생과 이 세상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항상 결여되어 있습니다. 문제만 생기면 신명나는 굿판을 벌려서 감정적인 폭발을 경험하면 그만입니다. 왜 우는지도 모르면서 울고, 왜 웃는지도 모르면서 웃는, 그런 무아지경의 감정적인 체험을 하게 되면, 속이 다 시원해지고 인생의 묵은 체증이 다 없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또 다시 그런 체험을 원하게 되고, 처음보다 더 강렬하고 더 자극적인 종교적 체험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경전의 신앙이며, 그 경전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신앙은 말씀 앙입니다. 말씀신앙은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말씀을 통해 자신의 인생과 이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여러분, 종교적 체험은, 믿음의 길로 들어가도록 도와주는, 촉매제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 강퍅하기 때문에 체험과 기적을 통해, 완악한 인간의 마음을 열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종교적 체험을,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말씀 앞에서, 제대로 소화를 해야만, 그 체험이 믿음의 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소화된 체험만이, 우리의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습니다.

 

(21-41)

오늘 말씀은, 레위 자손 고라를 비롯한, 일단의 사람들이 반역을 일으킨 지, 만 하루가 지난 다음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제안대로 다음날 아침에, 반역을 꾀한 사람들은, 각자의 향로를 들고, 하나님의 성막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고라는 이스라엘 온 회중을 회막 문 앞으로 모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영광중에,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드디어 고라를 비롯한, 일단의 사람들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모세와 아론 쪽이 옳은 것인지, 판가름을 짓는 시간이 온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스라엘 회중 전체를 심판하시겠다(16:21)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중보의 자세로 엎드린 것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이스라엘 회중에게 진노하시는 것을, 다시 한 번 고려해달라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생명의 하나님께,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명을 구명하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모세의 이런 기도를 들으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회중들에게, 반역의 지도자들인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집에서 물러날 것, 모세를 통해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회중들은 모세를 통해 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들의 집에서 안전하게 물러섰습니다. 그 때 모세는 고라를 비롯한 사람들이 아주 독특하게 죽는다면,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반역한 줄로 알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땅이 갈라져서, 마치 땅이 입을 연 것처럼 되어, 고라를 비롯한 반역의 지도자들을 삼켜서, 스올로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이 죽는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반역한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30절과, 33절 말씀에 나오는 스올이라는 곳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람이 죽으면 가는 장소로 여겼고, 그 위치가 땅 속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지옥과는, 똑같은 개념은 아니지만, 그와 유사한 개념을 가진 장소였습니다. 한 마디로 스올은 죽음과 사망의 장소였습니다. 그런 스올이 땅 속에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땅이 갈라진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공포였고, 땅을 갈라지게 한다는 것은, 언제나 신적인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땅이 갈라져서, 그들이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하나님의 심판의 표시로 말한 것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말을 하자말자, 모세의 말대로,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땅이 갈라진 것입니다. 고라를 비롯한 반역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소유와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갈라진 땅 속으로 빠져버렸고, 다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땅이 다시 붙어 버렸습니다(16:31). 모세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막 다른 편에서는, 각자의 향로를 들고 서있던, 일반인 지도자 250명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불에 의해서, 순식간에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으로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땅이 갈라져서 고라를 비롯한 사람들이, 땅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을 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16:34)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있던 죄책감으로 인해, 자신들도 스올로 내려갈 수 있다는 공포가 밀려왔기 때문에, 도망을 간 것입니다.

고라의 무리들이 죽은 그 다음날, 이스라엘 온 회중이 모여,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고라의 편을 든 것(16:41)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은, 고라의 무리들을, 41절 말씀에서, 이스라엘 회중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어쩌면 고라의 반역이 성공해서 광야에서 살면서 세월을 허송하기보다는,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염병으로 치셨습니다(16:49). 하나님이 보내신 염병으로 인해서, 만 사천칠백명이 죽었습니다. 그 때 제사장으로서, 아론이 드린 분향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심판을 중단하신 것입니다.

민수기 16장은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대한 내부적인 도전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왜 모세와 아론만이 지도자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내부적인 도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대해 도전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다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목회자라는 직분은 구약의 어떤 직분과도 직접적인 상관이 없습니다. 선지자와 사도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글로 기록했거나, 계시적인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의 계시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완성된 계시가 바로 우리들이 보는 성경책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종결됨에 따라,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사도라는 직분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분명히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항상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기록된 성경 외에 새로운 계시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목회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존재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목회자는 완성된 계시인 성경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그런 역할을 맡은 사람입니다.

구약의 모세는 신약의 예수님에 대한 모형이었습니다. 모세가 말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18:15)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어느 누구도 자신이 모세와 동등한 것처럼 말할 수 없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아주 독특한 사건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처럼 자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런 잘못된 교훈으로 인해 여러분 안에 종교적 공포와 종교적인 두려움이 있다면, 공포 대신 기쁨으로, 두려움 대신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기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민수기 17

 

아론의 싹 난 지팡이

 

하나님의 거룩한 질서에 도전을 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250명과 거기에 동조한 17,600명이 염병(장티푸스)으로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형벌이 있은 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족장에게 그들의 지팡이를 취해 각자의 이름을 쓰게 하고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만나는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명령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권위와 질서에 대한 도전에 충격적인 사건에 대한 위로하심과 동시에 아직도 하나님의 권위에 불순종하려는 마음이 있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나타내기 위함이셨습니다. 족장들은 각자의 지팡이에 이름을 기록하여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었습니다. (17:1-4)

증거궤는 하나님의 법궤로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였으며 그 안에는 시내산에 받은 법궤 두 돌 판과 아론의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담겨져 있지 않은 상태로서의 법궤였습니다. 백성의 두령들은 모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팡이는 그들의 인생과 함께 살아온 필수품이었습니다. 손때가 묻었을 뿐 아니라 인생의 경륜이 새겨져 있기에 반질반질 하였으며 단단하여 생명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에 하나님께서 싹이 돋게 하셨습니다. 열두 개의 지팡이 중 하나님의 권위의 상징인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게 하셨습니다.(17:7-8)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많은 문제를 야기하게 됩니다. 반드시 영의 감동으로 이해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우리를 없는 가운데 부르셔서 시대의 획을 그으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지혜와 능력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드려질 때 그곳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1-10)

16장 마지막절까지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고 이제 이스라엘백성을 싸매주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말씀부터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파의 지휘관의 지팡이들을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지팡이에 각지파의 이름을 쓰라고 하셨습니다. 누구의 지팡이인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레위의 지팡이에만 이름을 레위로 쓰지 말고 아론이라고 쓰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것은 어느 지파를 말씀하시기보다 이 문제가 아론에 대한 불신임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확실히 해주시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가 이미 들어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택한 자를 세워주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만날 수 있습니다. 강력한 심판으로 말미암아 모세를 세워주셨고 또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제사장을 세상에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지팡이가 나옵니다. 각지파의 지팡이를 가져오라고 하셨는데 왜 하필 지팡이였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보통 지팡이는 여행자나 목자의 호신용 또는 도보용으로 사용했던 막대기이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지도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기구로 봄이 옳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지휘봉을 하나님의 증거궤 앞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지팡이를 증거궤 앞에 두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중에 한 지팡이에 싹이 나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누구를 선택하셨는지를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각 지파의 지휘봉을 하나님의 증거궤 앞에 두라는 것은 이스라엘 각 지파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하나님의 보호와 주권아래 있다는 것을 재인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르게 인식하면서 살 때 믿는 자들은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지팡이를 증거궤 앞에 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곳은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는 곳이 어디인가 말입니다. 그곳은 증거궤 앞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는 곳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날에 하나님을 어디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 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입니다. 그 말씀 앞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냥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세와 아론을 세우시고 그냥 그 자리에서 나타내셨다면 오히려 간단할 것입니다. 내가 함께하고 선택한 자를 충분히 간단히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지팡이를 가지고 오라고 하시고 싹이 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첫째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생각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시간을 주시는 것이지요.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행할 일을 미리 말씀을 하시고 그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언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셋째로는 내일 더욱 깊이 말씀드리겠지만 완전하신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마른막대기에서 어떻게 싹이 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선택한 것처럼 또한 아론을 선택하신 것처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를 선택하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향해 우리가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임을 당당히 나타내실 것입니다.지팡이에서 싹이 나듯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그 지팡이들을 증거궤 앞에 놓아두었는데 그 결과가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린 것입니다. 죽어있는 막대기, 그 마른 막대기에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시려는 것입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고라 무리의 반란으로 인해 250이 불로 소멸이 되었습니다. 14700이 열병으로 이미 죽어 갔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백성들은 두려움과 혼란 가운데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과 떨림의 현장을 신비한 생명의 현장으로 바꾸어 가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오늘 본문말씀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막대기 이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현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지팡이에 살구열매가 맺혔다고 했으므로 이 지팡이들은 살구나무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지팡이에 싹만 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막대기에 움이 돋게 하셨고 또 순이 나게 하셨습니다. 또 그 지팡이에 꽃이 피게 하셨고 살구열매가 열리게 하셨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싹이 난 자체만 가지고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증거로 불충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지팡이에 네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게 하신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연출해 내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선택하신 자를 위한 증거를 주시되 변박할 수 없는 증거를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말씀 10절에 보면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은 멸망이 아니라 생명임을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는 멸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죄를 등지려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사람을 살려내십니다.

 

(11-13)

이제 오늘 말씀에 보면 그 모든 사건들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신들이 자행한 일에 대한 죄책감 속에 사로잡혀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라고 탄식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13절에 보면 성막에 가까이 나아가는 자마다 다 죽사오니 우리가 망하여야 하리이까?” 라고 극단적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드신 이유는 성막을 통해서 백성들과 교제하시려고 만드신 것입니다. 제사장을 세우시고 그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 적당하게 만들어 놓으신 절차를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인간들의 하나님께 대한 고집과 오해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에는 사랑도 있지만 공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온전히 알지 못할 때 극한 오해와 좌절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세우시고 제사장을 세워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교제할 수 있는 길을 분명히 열어놓으셨던 것입니다.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시고자 다가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시고 그 지위를 지지해주셨습니다. 그 역사를 이루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바로 아론과 그 자손에게 주어진 책임에 대해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인간 안에는 죄성으로 인해 조금만 높임을 받거나 또한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면 금방 교만해지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교만해지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보장하심과 배려해 주심으로 용기백배한 이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바로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심은 그들이 교만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해 가시려는 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지혜입니다.

본문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막중한 직무를 맡은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그 직무에 맞게 무겁게 경계해 주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성소에 대한 죄는 성소와 관련되어 발생될 소지가 있는 모든 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사장 또는 레위인 이외의 사람들이 성소에 접근했을 때 혹은 함부로 성물(聖物)을 만져 하나님의 거룩성과 영광이 훼손되었을 때 그 죄를 담당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사가 무성의하거나 불성실했을 때의 죄도 그것에 대한 책임이 아론과 그 자손에게 있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한편 레위인의 의무는 아론과 아론의 자손을 도와서 회막에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성소 기물에 가까이 가거나 재단에서 번제물을 태운다거나 피 뿌리는 예식에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가까이 하면 죽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소에서 일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의무와 책임 그리고 그 한계를 정해놓으셨습니다. 이것은 누가 더 높고 낮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정해 놓으신 자리인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는 자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자로 또한 자신의 위치를 지킬 수 있는 자로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민수기 18

 

십일조의 십일조

 

교회가 건강하다는 것을 헌금에 대한 투명성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교회의 특징은 반석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반석은 어떤 상징이나 교리나 목회 철학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 그 본질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예수님이 명령하셨던 지상 과업을 이루기 위한 지체입니다. 오직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란 것은 예수 안에 교회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 안에 세속이 물들지 않으며 교회를 인간 집단의 힘이나 권력으로 사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역사를 보면 교회를 집단이기나 힘의 상징인 권력으로 사용했던 부끄러움이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그것은 반복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주님의 하신 일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주님은 교회의 모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말씀사역과 치유사역, 구제사역과 제자사역, 선교사역입니다. 오늘날 모든 교회들은 주님이 보여주신 교회의 5대 사명을 기초하여 교회를 세우고 있습니다. 교회에 드려지는 헌금에 대해서는 투명하게 관리되어야 하며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투명의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레위인에게는 기업을 주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직업을 가질 수 없어서 수입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백성들의 십일조로 레위인들이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레위인은 십일조 중에서 다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18:26) 그 십일조의 십일조는 제사장 아론의 몫이 되게 했습니다.

 

(1-32)

레위인의 직무는 제단에 제물을 드리는 일로부터 휘장 안에서 등대의 불을 관리하고 떡상의 떡을 진열하고, 분향단에서 향을 피워 올리는 일, 대제사장은 지성소 안의 언약궤에 피를 뿌리는 일 까지 이와 같은 일들은 오직 제사장된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맡겨진 고유한 직분이었습니다.

8절에 거제물이 언급되고 있는데, 거제물이란 '거제로 드려진 제물'이란 뜻으로, 예물을 높이 들었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놓는 제사 방법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하나님의 거제물이 다시 제사장에게로 돌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8:8) 이 말씀이 뜻하는 것은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친 것으로 생계를 보장받아야 함을 규정해 주신 것 입니다.

, 하나님은 제사장들(아론과 그 후손들)에게 성막에서의 평생 봉사를 명하셨고, 그에 대한 대가로서 그들에게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들(불사르는 제물을 제외한 것, 9)을 평생의 보수로 제공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성전에서 일을 맡은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독일에서는 성직자의 보수를 나라에서 책임지고 돌보고 있기도 합니다.

12절 이하에 기록된 말씀에 보면, 처음 익은 모든 열매와, 생물의 처음 나는 모든 것, 소나, 양인, 곡식이나, 처음 것을 하나님께 바치도록 규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예물을 요구하셨고, 또한 그러한 예물을 당신의 종들에게 응식으로 주셨던 것입니다(7:11). 한편, 그런데 백성들이 '첫 소산'을 봉헌하는 가장 큰 목적은 자신의 모든 소산물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서 알게 하시기 위함이며, 또한 결실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감사는 은혜를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내 힘으로 모든 것이 얻어졌다고 생각한다면 감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 욕심만을 채우기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목적된 인생을 살 때 그곳에 기쁨과 감사와 가장 큰 행복이 넘치며 보장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은 제사장을 도와 성막 업무를 담당하는 레위인 들에게 주어지는 십일조에 관한 언급입니다.

즉 레위인 들은 백성들이 여호와께 드린 십일조를 분깃으로 받아 생활하였으며 받은 십일조 중에서 십일조를 다시금 하나님께 드렸습니다(26-28).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레위인으로 하여금 십일조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생계를 유지하게 하심으로, 그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막을 위해 선택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손길만을 바라고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십일조 제도는 비단 레위인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에게도 자신의 삶의 근원이 여호와께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것의 일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어떤 의무사항을 이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3:8)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찾아가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복의 통로를 막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손해를 보게 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의 표현입니다.

모든 천지 만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으로,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주관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그 주신 것 중 십분의 일만을 하나님의 것으로 정하시고 이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십일조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십일조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사실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맨 처음 십일조를 드릴 때 망설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염려를 버려도 되는 분명한 이유는 십일조를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넘치는 복을 주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3:10)

 

민수기 19

 

예언의 성취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 고백합니다. 삼위이면서 일체이신 하나님이신데 그 일체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1:3)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함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땅에 오시기로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계획하셨습니다. 그 계획하심을 구약 성경을 통하여 예언하였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구약 성경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킴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5:39)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어느 날 정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하신 방법으로 오신 것입니다. (18:32)

민수기19장에 나오는 붉은 암송아지는 광야의 모형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40년간 광야생활을 하면서 그들이 범죄 하였을 때 붉은 암송아지를 번제로 드리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쉼 없이 반복되는 인간의 나약함은 언제나 같은 것을 반복하여 죄를 범하게 됩니다. 같은 허물, 같은 실수, 같은 악을 범하게 됩니다. 그렇게 나약하여 같은 실수를 반복하여 넘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 하나님은 붉은 암송아지를 번제로 드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일회성 예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우리의 연약함을 영원히 용서해 주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에 대한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신약은 구약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즉 예언을 성취한 것이 신약성경이라면 그 예언이 바로 구약성경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옛 약속과 새 약속이 구약과 신약성경입니다. 그 약속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었다(19:30) 고백하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을 성취하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본문은 레위기 11-15장의 각종 정결 규례와 맥락을 같이 하는 부분으로 시체로 인한 부정을 씻는데 필요한 잿물 제조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결법은 시기적으로 볼 때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하다가 이에 따른 여호와의 심판 선언 이후(14:26-35) 20세 이상 되었던 자들의 죽음이 속출하고 있을 때 주어진 말씀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염탐하고 돌아온 12명의 정탐꾼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모두가 비관적이요, 불신앙적인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며 백성들을 선동하여 애굽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 없는 백성들에게 진노하셔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백성들이 저주를 받아 가나안땅을 밟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정결 의식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부정으로 정결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역을 예표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백성은 철저한 거룩을 유지해야 함을 보여 줍니다.

본문은 정결용 잿물 제조에 이어(1 -10) 그 잿물을 사용하는 경우와 방법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직접적으로 시체와 접촉한 자는 물론 간접적으로 부정케 된 그릇과 기구까지도 잿물로써 씻음을 받아야 함을 일러줍니다(11-19). 그리고 이를 이행치 아니하는 자가 당할 형벌과 이 규례의 영속성(永續性)에 관해 강조합니다(20 22).

이처럼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시체와 관련된 정결 의식에 관해 상세히 규정하고 있는 것은, 죽음의 원인은 죄이며 시체가 썩어 악취를 내어 온 방안을 오염시키듯 죄도 그 영향력이 강력하여 그 영향권 아래 있는 모든 것을 오염시키는 성질이 있음을 알게 하므로 죄를 멀리하고 성결한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구별되었기에 시체를 만지거나 가까이 하면 반드시 씻고 나서야 정결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죄로 말미암아 죽은 시체를 가까이한 모든 것과는 결코 함께 하실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죄는 우리를 더럽게 합니다. 죄를 짓고 더러운 모습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하고 죄를 멀리 해야합니다. 죄를 지었으면 반드시 회개하여 깨끗함을 받아야합니다. 회개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본문에서는 시체로 인한 부정을 씻는 방법을 소개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죄를 씻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죄를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는 것입니다.

회개는 돌이기는 것입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완전히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지난날의 삶이 죄악의 길이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길은 의의 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았던 지난날의 삶이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죄악의 길이었다면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사는 길이 천국 길이요, 하나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민수기 20

 

므리바

인간의 삶은 위기의 연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 생활하는 동안 많은 위기를 맞이합니다. 위기의 종류는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과 원망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힘든 문제가 있다면 비전이 다른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사람 수 만큼이나 이상이 다르고 자란 배경과 추구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러한 다양성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하는 조화를 이뤄가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는 온전한 찬성도 없으며 또한 온전한 반대로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교회의 본질을 잃게 되면 분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의 광야생활에서 열 번이나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 있었으며 그것은 모세를 향한 불신으로 나타났습니다. (14:22-23) 열 번이란 숫자적인 의미도 포함되지만 꼭 열 번이 아니라 수시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은 평탄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사건이 생길 때 마다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였고, 모세를 비방했다는 것입니다.

 

본장에는 중요한 인물 두 명의 죽음이 나옵니다. 모세와 관련된 지도자들의 죽음입니다. 그의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의 죽음입니다. 그들은 혈통을 나눈 형제이지만 자란 환경은 형제로서의 애틋함은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특별한 사람이었으며 자란 환경도 특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을 동안 아론을 중심으로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미리암은 모세의 아내 구스여인인 십보라를 핍박하기도 했습니다. 그럴지라도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백성들은 므리바에서 또 다시 모세와 하나님에 대해 원망하여 다투게 됩니다. 그것은 마실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20:3-5) 백성들의 원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일단 원망부터 합니다. ‘므리바란 다투다는 의미입니다. 마실 물이 없을 때 그들은 해결책을 찾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기 보다는 모세와 다투어 원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지도자를 향한 원망은 오히려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할 뿐입니다.

모세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20:12) 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셨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와 자비를 항상 베푸셨습니다. 그런 모세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원망한 죄보다 모세가 지은 죄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에게 물을 내라는 명령을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물을 내라는 명령 대신, 손에 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두 번 치라고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매우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세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는지, 그 이유를 사실 정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 판을 깨뜨린 것(32:19)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은 언약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로 인해 깨어졌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행위였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세의 혈기에 대해서 전혀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모세의 그런 행동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불신앙이라고만 밝히고 있습니다. (20:12) 약속의 땅, 가나안은 오직 믿음으로 들어가는 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도, 아론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남보다 특권을 더 누릴 수 있는 자리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성경은 항상 인간에 대해 가장 냉정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성경의 이러한 냉정한 평가에 부딪칠 때마다, 내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미리암이 죽어서 장사되었다는 슬픈 소식이 나옵니다.(20:1) 미리암이 죽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광야 세대의 지도력이 교체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예고하는 사건입니다.

민수기 20장 말씀은 크게 4가지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옵니다. 첫 번째는 미리암의 죽음입니다. 두 번째는 므리바의 반역사건이 나옵니다. 세 번째는 형제인 이스라엘을 환영하지 않는 에돔 족속과의 안 좋은 만남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론의 죽음이 나옵니다.(20:29)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던 세 명의 지도자 모두 죽었습니다. 미리암 첫째 달, 아론은 5월 초하루, 모세는 년말경에 죽게 됩니다. 한 해 동안 세 명의 지도자가 다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들이 죽을 뿐만 아니라, 같은 형제인 에돔으로부터도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에돔은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입니다. 정중하게 도움을 청한 이스라엘을 에돔은 아주 매몰차게 거절합니다. 형제인 에돔에게 이스라엘이 도움을 청한 것은 광야 길에 지친 사람들의 목을 축일 수 있는 물도 아니었고, 음식도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경제적인 도움을 전혀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에돔에게 경제적인 피해가 있다면 전부 다 보상을 해주겠다고 이스라엘이 적극적으로 의사를 피력했습니다. 오직 왕의 큰 길로만 지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20:17) 이 길로 가면 곧장 가나안 땅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모세가 에돔 왕에게 그 길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청원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에돔은 군사적인 시위를 할 도로 강하게 반대를 했습니다.(20:20)

미리암의 죽음, 므리바의 반역사건, 에돔 왕의 거절, 그리고 아론의 죽음이 이어지는 민수기 20장은 우리들이 보기에 별로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사건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먹구름이 잔뜩 껴 있기는 하지만, 그 어두운 먹구름 사이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밝은 하나님의 빛이 비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취고 있는 빛은 두 가지의 밝은 빛입니다.

첫 번째 빛은 민수기 201절에 나옵니다. 1절 하반절에는 미리암의 죽음이 나오지만, 1절 상반절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옵니다. 1절 상반절을 보면, 첫 째 달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의 가데스라는 지역에 다시 도착했습니다. 가데스라는 지역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도착한 것이 아니라, 다시 도착한 것입니다. 여러분, 민수기 1326절 말씀을 보면, 가데스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불신앙으로 저버립니다. 그렇다면 가데스라는 지역에 다시 도착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불신앙으로 저버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판으로 내리신 40년간 광야를 방황하는 생활이 드디어 끝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민수기 13장에서 민수기 19장까지가 광야 40년의 생활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드디어 40년의 광야 생활이 끝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이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첫 번째 은혜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빛은 아론의 죽음 속에 있습니다. 죽음 속에 빛이 있습니다. 아론의 옷을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힌다는 것(20:25-26)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신앙적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전히 언약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 호르마를 다시 정복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21:1-3)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려고 했다가 오히려 전쟁에 져서 호르마까지 쫓겨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정복한 것입니다. 호르마를 정복한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가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