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강해, 6장~10장
♣민수기 6장
거룩한 자 나실인
나실인은 스스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믿음으로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께 서원으로 드려지게 됩니다. 현대 문명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인 제도입니다. 영국은 제도적으로는 기독교 국가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공식 석상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법률적으로 금지된 나라가 바로 영국인 것입니다.
영국 국교인 성공회 성도보다 공식적으로 모슬렘 교도들의 숫자가 늘었습니다. 영국 내에 현재 1500개의 넘는 회교사원과 397만 명의 신도가 존재하고 있습니다(2001년 통계).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배우는 하나님의 말씀 보다 학교에서 배우는 진화론과 무신론, 신앙 자유에 대한 배움의 속도가 더 빠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뿐 아니라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나실인으로 구별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나실인이란 세상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힘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영적인 힘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3)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능력위에 학문을 쌓고, 지식과 실력을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능력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능력위에 세상의 능력을 믿음으로 쌓아야 합니다. 그러한 자가 오늘날 성령 안에서 나실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사는 나실인이 되길 축복합니다.
나실인은 ‘구별된 자’, ‘성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자’, ‘세상과 분리된 자’라는 뜻으로 성별에 관계없이 일정 기간이나 평생동안 온전히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자들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평생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삼손의 경우입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선택된 사람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구별되었고, 나실인의 규정을 지키는 동안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살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 나실인이 되어 평생을 헌신한 사람도 있었고, 사무엘처럼 부모의 서원에 따라 나실인으로 산 사람도 있었으며, 자발적으로 서원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나실인으로 서원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절제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술을 삼가해야 합니다. 모든 포도나무에서 얻게 되는 소산물은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포도는 기쁨, 축제, 풍요를 상징합니다. 동시에 그 발효된 알콜 성분으로 인해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쾌락과 세상적인 사치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술을 삼가하라는 것은 마음의 정결과 절제를 유지하여 맑은 정신으로 여호와께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술을 삼간다는 것은 육적인 유혹을 멀리하고, 자신의 가장 큰 기쁨을 여호와께 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나실인으로 사는 동안 머리털을 자르지 말아야 합니다. 나실인이 머리털을 기른 것은 생명의 힘의 근원이 오직 하나님이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당시 관념으로 머리털은 피와 마찬가지로 생명을 상징했기 때문에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행위는 생명의 주권자께 대한 복종과 경외를 나타낸 것입니다. 길게 자란 머리를 힘과 생명력의 상징이라고 보기도 했습니다. 살아있는 존재만이 머리카락을 생성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실인으로 하여금 머리를 기르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만이 경배 받으실 분이며, 하나님만이 자기 생명과 힘의 유일한 근원임을 인식하여 모든 힘을 다해 그분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머리를 기르도록 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입니다. 나실인은 그 정한 기간동안에는 비록 가장 친한 친지가 죽었을지라도 그 시체와 접촉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주검, 즉 시체는 결국 죄악이 빚어낸 결과이므로 의식상 부정하게 취급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실인으로 하여금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죄를 멀리해야 한다는 상징적인 표현이었습니다. 나실인이 지켜야할 이런 규정은 보통 사람들도 일정 기간 동안 자발적으로 지킬 수 있었는데 그러한 개인적인 서원이 뜻하는 바는 사람이 무슨 물건으로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나실인 제도는 분주함과 혼란함이 난무한 세상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순수한 신앙을 간직하도록 교훈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드렸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삶과 신앙이 온전히 하나님께 올려져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온전한 헌신은 부모에 의해 헌신되었든, 자발적인 헌신이든, 하나님께서 한 개인을 향해 명령하신 헌신이든 철저한 경건생활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자기 부인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자다운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정결한 삶을 위해 시간을 드리고, 구별된 삶을 위해 마음을 드리는 삶이 우리 가운데 매일 매일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매일의 성찰이 있을 때에만 구별된 삶을 주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앞에서 구별된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 다음으로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보적 역할을 담당한 제사장의 축복 기원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자신의 백성들에게 복을 내려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복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습니다. 축복은 사람이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생명력을 부여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은 창조 때로부터 모든 피조물위에 있었습니다(창1:28). 하나님의 이름이 본문을 통해 세 번 반복해서 이스라엘 위에 선포되어지고 있는데(24, 25, 26절), 이 이름은 단순한 낱말이 아닙니다. 이 이름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신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관심을 똑똑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이 복의 주체가 될 수 없는 피조물을 향해 반복해서 불러대는 이름이 아닙니다. 이 이름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가나안을 향해 가는 여정 가운데 모압 광야의 이스라엘 민족들을 향해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선포했다면 하나님 나라로 가는 여정 가운데 있는 우리를 향해서는 구원자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복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이 시간 되돌아보기를 원하는 것은 과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을 누리기 위해 나는 어느 자리에 서 있는지를 바르게 알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다음과 같은 경고를 그 백성들에게 들려주고 있다고 합니다. '당신은 행여 이 초라한 제사장이 나에게 무슨 축복을 베풀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에게 복을 주시는 자는 그 제사장이 아니라, 그 제사장을 통해 말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때론 하나님보다 축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더 크게, 더 가까이 느껴지기도합니다. 그러나 한 시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바로 당신의 백성을 향한 사랑과 평강과 자비와 은혜라는 것입니다. 24절에 하나님께서 지키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의 지키다는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다’ 란 뜻입니다. 이 의미는 ‘세심하고도 철저한 보호와 보존, 주의 깊게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어린 아이를 돌보실 때 얼마나 잘 지키게 됩니까. 혹여 넘어질까, 불편한 것은 없는지 얼마나 주의를 기울여 지키는지 모두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그렇게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한하지만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는데 무엇이 염려될까요? 우리의 모든 염려는 우리를 세심하게 지키시는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개인을 향해, 가정 공동체, 교회 공동체, 민족 공동체를 향해 얼굴을 비취실 때 생명과 구원이 선포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 거하는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어디에서 평강을 구하고 계십니까? 여호와 하나님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인생이 더욱 풍성해가고, 성별되어 가고, 주인의 마음을 흡족히 해 드리는 일군으로 살아가는 일에 우리를 일으켜 세워야 할 것입니다.
♣민수기 8장
일곱 등불
성경에 나오는 숫자는 상징성이 강한 영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특히 7이라는 숫자는 성경에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일곱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완전수를 나타냅니다. 반대로 인간의 수는 6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는 일곱 등잔이 놓여 있습니다. 등불의 의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이요 빛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빛으로 오셨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꺼지지 않도록 일곱 개의 등잔불을 밝히는 것과 요한 계시록에 일곱 개의 촛불의 의미는 모두 빛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며, 또한 빛의 자녀인 성도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자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는 다른 표현으로는 어둠에서 빛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빛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죄와는 상관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조금도 어둠이 없으십니다. 어둠은 곧 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이 빛 된 삶을 산다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등불을 켜서 감추는 이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라는 것은 감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믿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동일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적인 신분이 부끄러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되지만 내 신앙을 감추는 것은 옳지 않은 신앙태도인 것입니다.
민수기 1장에서 10장까지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일종의 준비단계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디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장과 2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한 군대로 재편성하는 과정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3장부터 10장까지 나오는 여러 가지 준비는 그 초점이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결해지고 거룩해지는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치르게 되는 전쟁의 승패는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의 수나, 무기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함이 가나안 정복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적인 열쇠입니다.
민수기 8장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은 성소 안의 등잔에 대한 말씀입니다. 역시 이 부분도 순종에 초점이 있습니다. 1절과 2절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아론에게, 성소 안의 등대에 일곱 개의 불을 밝힐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3절 말씀은 아론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정확하게 순종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4절 말씀도 등잔을 만드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시사항과 아주 정확하게 일치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한 준비 과정을 아주 성실하게 순종하면서 감당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8장 5절에서 26절까지는 레위 지파 사람들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민수기 8장 5절에서 19절까지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레위지파 사람들을 정결하게 하는 방법을 상세하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8장 20절에서 26절까지는 레위 지파 사람들을 정결하게 하는 방법대로 신실하게 행해졌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사장을 세우고, 제사장이 정결의식을 행할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것도 하지 않고, 단지 그 과정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레위기 8장을 보면 제사장을 구별해서 하나님 앞에 세우는 과정이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을 세우는 그 과정을 오직 모세가 혼자서 전부 다 진행합니다.
그러나 민수기 8장에서 레위 지파 사람들을 정결하게 하는 과정에, 이스라엘 전 회중이 참여를 하게 됩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봉헌하는 과정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손을 레위 지파 사람들 위에 얹어놓고 안수를 했습니다(민8:10).
레위지파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참여를 한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여러분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음 난 자, 즉 열두 지파의 장자를 대신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레위지파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일종의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받쳐진 것입니다. 여러분 희생 제물을 받칠 때, 제사 드리러 온 사람이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제물을 받치지 않습니다. 반드시 희생제물에게 안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위지파 사람들을 정결의식을 통해 구별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지파 사람들 위에 손을 얹어놓고 안수를 한 것입니다(민8:12).
그리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장자를 받쳤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하나님께 받쳤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를 받치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행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7장에서는 열두 지파들의 대표들이 헌신했고 순종했습니다. 민수기 8장에서 레위지파 사람들을 하나님께 구별할 때도 하나님의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시내 광야를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해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수기 11장에서부터 불순종과 원망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사실이 과연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모습은, 어제의 순종이 오늘의 순종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매순간 믿음으로 순종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오늘의 순종과 오늘의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께 순종과 믿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매일매일 순종하는, 그런 복된 삶으로 이끌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민수기 9장
오늘 말씀은 유월절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절기입니다. 유월절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종살이를 하지 않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애굽의 노예에서 자유인이 되었습니까? 그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유월절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9장 6절과 7절 말씀을 보면, 사람의 시체로 말미암아 부정하게 된 사람들이 유월절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모세와 아론에게 청원을 한 것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기다리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어떻게 명령하시는지 내가 들으리라(민9:8)
여러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처럼 군림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얼마든지 유월절과 관련된 율례와 규례대로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시체로 말미암아 부정하게 된 사람의 경우와, 먼 여행 중에 있는 사람의 경우에도, 한 달 후에 유월절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민9:10).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민수기 9장 13절 말씀에 나옵니다. 민수기 9장 13절 말씀을 보면, 부정하지 않고 정결한자가, 유월절을 지키지 않거나, 또 여행 중에 있지 않으면서도,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하나님은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아주 의도적으로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경우에는 하나님이 용서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경우에는 예외적인 규정을 두셨지만, 사람이 고의적으로 유월절을 어겼을 경우에는 예외를 인정하시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아주 명백하고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인들은 정죄를 늦게 할수록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문제나 상황에 대해 신속하게 정죄하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정죄가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복잡한 현실에 대한 좀 더 충분한 생각과 좀 더 충분한 이해가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물론 율법의 기능 중에 사람을 정죄하는 기능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사람을 정죄하는 이유는 오직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능히 감당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군림하면서 율법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면, 정말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고유한 일을 사람이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을 다 아실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아주 철저하게 율법을 문자적으로, 기계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정죄하는 일에 아주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을 살리기보다,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되신 하나님은 사람들을 살리셨습니다.
민수기 9장 8절 말씀을 보면, 아주 중요한 동사가, 두 가지 나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모세는 기다리는 것과 듣는다는 동사를 강조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와 관련해서 기다리는 것과 듣는다는 동사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동사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당연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기다려 주는 것도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삶의 자세가 우리들에게 꼭 있어야 하듯이, 사람들을 기다려주면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는 신앙의 자세가 우리들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항상 받아서 살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원하는 이유 중에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실패를 안 할 것 같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고생을 안 할 것 같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만사형통할 것이라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성막에 구름기둥이 등장합니다. 구름기둥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시내산까지 인도했던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실 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시내산에서 한동안 머물고 있는 동안에는 구름기둥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시내산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해 진군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구름기둥을 쫓아 애굽에서 시내산까지 따라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나타난 구름을 보며,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출애굽할 때처럼, 가나안 땅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확신으로 그 마음이 가득 찼을 것입니다. 구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구름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그만큼 길을 인도하는 구름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혹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알려주는 아주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2)”.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의미는 예수님을 자신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왕으로서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순종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분명하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에 우리들이 순종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인도가 무엇인지를 우리들에게 깨닫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인도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많은 경우에 나와 관련된 인생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치 족집게처럼 하나님의 인도를 구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고질적인 병폐입니다. 하나님을 통해 내 뜻을 이루고자 하는 자아중심적 생각이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라는 전체적인 그림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인도를 새로운 차원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통해 내 뜻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민수기 10장
- 시내광야의 행진
이제 모든 제도와 전열을 정비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을 출발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본격적인 행군을 시작한다. 본장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이 행진을 시작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나팔 신호에 따라 행진을 시작하도록 명하셨다(1-10절). 이에 진 배치에 따라 유다 지파를 선두로 행진을 시작하였다(11-28절). 한편 모세는 처남인 호밥에게 길 안내를 부탁하고(29-32절), 법궤의 이동에 따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바라는 기도를 드렸다(33-36절).
1. 은 나팔 제작과 신호 규례
1) 이스라엘의 유일한 권위자이신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체결하고 또 하나님의 임재 처소인 성막을 완공한 후 마침내 대망하던 가나안 땅을 향해 광야 행진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때는 시내 광야에 정주한 지 약 1년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광야 행진을 시작하기에 앞서 그들이 광야 행진시 필요한 은 나팔 제작을 명하시게 됩니다. 성경에서 나팔 소리는 흔히 하나님의 위엄에 찬 임재와 그 분의 초월한 음성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은 나팔을 만들어 그것으로 신호를 하게 하신 것은 광야 행진 시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이끌어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서 유일한 권위자시요, 유일한 인도자가 되시는 분입니다.
2) 깨어 있어야 하는 이스라엘
하나님께서는 은 나팔 두 개를 만들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 은 나팔 신호 규정을 마련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신호 규정은 자칫 잘못 듣게 되면 큰 혼선을 빚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늘 깨어 있어 긴장하며 제사장이 부는 은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역시 깨어 있어 하나님의 뜻을 매일 발견하는 영적 긴장과 근신의 삶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2. 본격적인 광야 행진 시작
1) 나그네로 살아가야 하는 이스라엘
이스라엘 백성은 근 1년 간 머물던 시내 광야를 출발하여 약 3일 길을 간 후에 바란 광야에 당도하게 됩니다. 물론 바란 광야에 도착하기까지 두 곳의 중간 기착지가 있었습니다. 어쨌든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이 숙영지를 옳긴 것은 다만 광야에서 또 다른 광야로 나아갔을 뿐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불안정하고 험한 나그네 같은 생활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헤매는 40년 동안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 과연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실로 우리 성도는 하늘 가나안에 당도하기까지 이 세상의 삶에서는 그저 행인이요 이방인이자 나그네일 수밖에 없습니다.
2)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대로 진행해야 함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행진해 감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정해 놓은 원칙과 기준을 따라 차례차례로 행진해 가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과 기준에 따라 질서대로 진행해 갔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들의 고집과 독선으로 인해 이기적으로 하기보다 자신의 고집을 꺾고 모든 결정권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명령대로 행할 때 거기에 반드시 부흥과 번영이 있을 것입니다.
3. 호밥에 대한 지원 요구와 언약궤의 인도
1) 인간의 재능을 이용하시는 하나님
광야 여행을 함에 있어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자, 한 사람을 이스라엘 행진의 길 안내자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미디안 족속의 제사장 르우엘의 아들이요, 모세에게는 처남인 호밥이었습니다. 호밥은 오랫동안의 광야 생활로 인해 광야 여러 곳의 지리와 그 곳의 형편을 소상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모세는 광야 여정 동안 도움을 받고자 호밥에게 길 안내를 요청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으로 인해 모세는 호밥을 설득할 수가 있었습니다. 한편 이 같은 노력에 대해 자칫 모세의 믿음이 결여됨으로 인한 불신앙적인 행동이라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재능까지 선히 이용하시어 당신의 거룩한 일을 이뤄 가시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섭리라는 측면에서 바라봄이 더욱 좋을 것입니다.
2) 궁극적인 인도자이신 하나님
모세는 광야 행진을 하는 동안 내내 하나님이 명하신 바를 좇아 하나님의 거룩한 법궤를 앞세워야만 했습니다. 법궤란 다름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물건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앞세워야만 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죽음이 늘상 머물러 있는 광야를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안전히 진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후원이 필요했습니다.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의 궁극적인 인도자 역시 우리 하나님이셔야만 합니다.
결론
법궤와 하나님의 임재. 본장에서 이스라엘이 법궤를 중심으로 행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모세는 법궤의 이동에 따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간구 하는 기도를 드렸다. 이런 모습은 당시 고대 근동의 성물 숭배 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물의 영험을 의지하는 근동의 사상과 이스라엘의 법궤 중심 사상은 뚜렷한 차이가 있다. 근동의 사상은 성물 자체의 능력을 의지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의 가시적 상징일 뿐이다. 이것은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 없이 법궤만을 가지고 전쟁에 임했다가 대패하고 법궤마저 빼앗긴 사건에서 잘 나타난다(참조, 삼상4장) 이처럼 법궤에 대한 신뢰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 신뢰의 표현이며,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에 대한 확증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