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복음서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신망 (눅 18:1-8)

공 상희 2017. 1. 15. 12:54

말세의 신망 (18:1-8)

 

이 시간에말세의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겠습니다.

지금부터 약 100년 전, 제정 러시아가 망하던 날은, 참으로 참혹했습니다.

볼셰비키 공산혁명으로 기마병들이 모스크바를 향해 쳐들어올 때, 모스크바의 피난 대열에는, 금은보화를 잔뜩 실은 마차와, 처녀들, 사제들, 그리고 귀족과 같은 부자들이, 100만 명 이상이나 됐습니다.

먹을 것은 없고, 날씨는 추워, 영하 40도를 오르내려, 그 와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얼어 죽고, 병들어 죽는가 하면, 만삭이던 부인이 아기를 낳다가 아기와 함께 죽기도 할 뿐 아니라, 그들은 어떤 곳으로도 피할 수 없어, 황량한 땅에서 비참하게 최후를 맞게 됩니다.

 

그럼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은 어떻게 될까요?

말세에 사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부정적입니다. 먼저 마24:37-39.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사람들이 먹고 사는데 정신이 팔려, 신앙생활 형식적일 것이란 말씀입니다.

 

17:28-30에서도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말세에는 세상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렇게들 바쁘고, 그렇게 죄악이 발달하여,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고,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고, 죄가 보편화되고, 세속에 물들어, 보통 각오로는, 참된 신앙생활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버림을 당할 자도 많다는 교훈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그것입니다. 주님의 교훈 중에 충격적인 말씀이

8절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말씀은 말세에 성도들의 믿음이 떨어질 것을 경고함과 동시에, 가장 기도가 요구되는 말세지말인 재림 직전에 깨어 기도하는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을 탄식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있으십니까? 한 가정밖에는 남지 않았던 노아시대, 롯밖에는 남지 않았던 소돔 고모라 시대와 같은 오늘, 주님을 맞이할 준비되셨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준비가 안됐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답을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즉 말세에, 원한 맺힌 과부와 같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그런 강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아니고는 믿음 지킬 수 없고,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없으며, 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한을 품듯, 신앙 생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그렇지 않고는, 말세에 믿음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죄의 원수가 있습니다.

7:22-24,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거하는 죄악의 원수입니다. 이 죄악의 원수를 처리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원수는 배고파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10:36-38에도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십니다.

이것은 가족을 원수 삼고 대적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내 가족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여 살다보면, 내가 신앙생활 하는데 원수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그것이 원수가 됩니다. 나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내가 주인 되고, 나를 넘어뜨리고, 나를 시험 들게 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내 속의 죄가 가장 큰 원수입니다. 이걸 놔두고 어떻게 예수님을 나의 주로 모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원수인, 육신의 생각도 다스려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죽이지 않고는 우리 영혼이 잘 될 수가 없습니다.

12:1-2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했습니다.

말세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과부가 원한을 품고 간청하듯 부르짖는 기도와 육신의 생각을 죽이는 철저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2. 한을 품지 않으면, 말세에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사명에 대한 한이 큰 사람입니다. 특히 동족인 유대인들의 구원을 향한 원한이 컸습니다.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습니다.바울은, 자신이 지옥가도 좋으니 내 동족을 구원해 달라는 간청 입니다.

이런 기도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기도입니까, 그런 거룩한 원한을 가졌기에 그 핍박 다 받아가면서도 낙심하지 않고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도 출32:32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모세도 그 민족의 구원을 위한 거룩 한, 한을 가졌기에, 그 믿음 없고,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지 않고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말세에 사명을 감당하고자 할 때, 우리 마음을 실망시키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일, 감상으로 알고 접근했다가는 큰 실망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많은 일군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상처 받고, 고통당하거나, 쉬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만만하게 봤다가는 그렇게 됩니다. 굶어도 좋고, 억울해도 좋고, 맞아도 좋고, 죽어도 좋으니 십자가 지겠노라는, 그런 사명에 대한, 한 맺힌 소원이 없이는, 사명 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말세에 과연 이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말세에 사명을 감당 하려면 한을 품은 듯 한 간절함으로 부르짖고 나 자신을 죽이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기를 힘써야 합니다.

 

3. 한을 품지 않으면, 말세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5:13-15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세상에서 성도의 역할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제정 러시아가 망한 이야기를 드렸는데 왜 멸망했을까요? 니콜라이 황제와 괴승 라스푸틴의 잘못된 정치도 요인이 있겠지만,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였습니다.

 

기독교가 사회전반에 걸쳐서 영향을 끼치던 사회였지만, 그 시대의 정신이 되어주지 못했고, 사제들이 너무나 쓸모없는 논쟁에 에너지를 소비한 결과, 세상에 대한 사명을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사제복의 색깔, 축도할 때 손가락을 펴는 방법, 십자가에 천사가 얼마나 앉을까, 등등 사제들은 아무 쓸모도 없는 일에 관심을 갖고 논쟁하고, 당 짓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못함으로, 볼셰비키 공산혁명의 토양을 마련해 주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과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하고 있습니까.

 

세상은 어쩔 수 없다는 숙명론은 잘못입니다. 세상이 완전해질 수는 없을지라도, 더욱 힘써 평안한 가운데 하나님 섬기기 좋고, 사람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일명 복음화라고 합니다.

이 나라도. 하나님이 높임 받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좋은 사회가 되어 질때 공산주의가 침투할 토양은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12세기 이탈리아의 아시시의 성자 프란시스코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은, 깊은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청년시절 기도하던 중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고, 그 환상에 따라, 복음의 말씀 그대로,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제자의 삶을 살겠다고 헌신했습니다. 그 소원이 얼마나 강렬했든지, 아버지도 그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는 평생 가난한 자 병든 자와 하나가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내 집을 보수하라는 주의 음성을 듣고 타락한 기독교를 개혁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아가 프란시스코는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신들이 소유한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또 손수 일을 하면서 평화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자신을 비우고, 겸비하고,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는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갈망하는 한으로 가득 찬 삶이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의 역활을 할 수 있고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로서 이 거룩한 한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어떻게 가득할 수 있습니까 이 한은 바로 성령이 임하실 때 다가오는 마음의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말세에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2:17-18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하셨습니다.

 

이 예언 환상 꿈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한입니다.

이 꿈이 누구에게나 임하면 우리는 가만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억울한 일 만난 과부와 같이, 거룩한 한을 품고, 철저히 회개하고, 부르짖어 성령 충만 받고, 능력 받아서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철저한 믿음을 지키고, 사명 잘 감당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가장 복되고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 예수이름으로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