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 감사절 설교28편
추수 감사
살전5:18
‘격세지감’(隔世之感)이란 말이 있습니다. 세상이 아주 많이 바뀌어서 전혀 딴 세대처럼 느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게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만, 그 중에 하나는 식량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옛날 하루 세끼 밥 먹기도 힘들었던 보리 고개 시절에는, 한 톨의 쌀이 얼마나 귀했습니까 그런데 요즈음은 그토록 귀하게 여겼던 쌀도 별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증거로 우리 교회에서는 일 년에 3차 곧 설과 추석과 성탄절에 어려운 가정들을 조금씩 도와드리는 일을 하는데, 어떤 가정들은 쌀이라고 하면 사양을 하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껴보았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이 고백한 대로 이밥 곧 쌀밥에 고기 국을 먹는 게 소원이라고 하는데, 남한의 경우 쌀밥을 먹고 고기 국을 먹는 것이 소원인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합니다.
또한 예전에는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동 메달 하나만 따도 온 나라가 떠들썩하고, 메달을 딴 선수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는데, 지금은 금메달이 아닌 은메달이나 동메달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지금 중국 광저우에서 열리고 있는 아시안게임에서는 우리나라가 현재까지 무려 50여개의 금메달을 따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그렇게 감동하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풍요속의 빈곤이라고 할까요 그렇습니다. 풍요속의 빈곤이 바로 감사일 것 같습니다.
오늘은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금년의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이지만, 사실은 한 해 동안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영육간의 은혜를 회고해 보며 감사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돌아보면 지나 온 우리의 생애 발자국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 아닌 것이 없지만, 금년에도 참으로 감사할 일들이 많은 한 해였습니다. 먼저 국가적으로는 역사 이래 가장 많은 국가 원수들이 한 자리에 모인 G20 정상회의를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치러내고, 우리나라의 위상을 한껏 드높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리고 교회적으로는 3천여 명의 전국 목사 장로들이 우리교회에 모여서 함께 기도하는 우리 교회 역사상 가장 큰 행사를 은혜 중에 잘 치르게 해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정적으로 개인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베풀어주신 영육간의 은혜도 지극한 줄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잊기 쉬운 계명이 있다면 ‘전도하라’ ‘감사하라’ 등의 계명일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소극적인 계명은 중요하게 여기면서, 적극적인 계명은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령 ‘살인’이나 ‘강도’ 같은 죄를 범하면 큰일 날 줄을 다 알지만, ‘전도하라’ ‘감사하라’ 등의 말씀은 경시하기도 하고, 혹은 잘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오늘 추수 감사 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감사 생활과 신앙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감사는 신앙생활의 기본적 요소입니다.
신앙을 표현하는 예배 중 찬양, 기도, 헌금 등을 들 수 있으나, 감사는 그 중에서도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있어 마땅한 일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첫째,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감사하지 않는 것은 본분을 망각한 처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주로 알면서도 감사하지 않는 자이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둘째,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일반 은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모든 조건이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구원받아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성도는 죄와 사망의 세계에서 영원히 해방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특별 은총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 천국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어찌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 감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입니다.
2. 감사하는 생활은 진보하는 생활입니다.
사람은 감사할 때가 있고,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할 때는 진보하고, 원망할 때는 퇴보하는 것입니다. 링컨은 “나에게 자신이 하는 일을 자랑하는 사람을 달라. 일을 하면서 노래하는 사람을 달라. 그는 더 잘 할 것이고, 더 오래 견딜 것이고, 더 많이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행복론을 쓴 ‘힐티’는 말하기를 “감사하는 사람은 젊어진다. ”고 했고, 루터는 “마귀의 세계는 감사가 없다. ”고 말하면서, 감사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신앙생활은 감사하는 생활이요, 감사하는 생활은 진보하는 생활입니다. 처녀나 아이들은 웃음이 많지만, 노인은 웃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는 자라고, 처녀는 아름다워지고, 노인들은 퇴보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람에게는 밝은 마음이 있고, 어두운 마음이 있습니다. 전자는 감사하는 마음이요 전진하는 마음이고, 후자는 원망하는 마음이며 퇴보하는 마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홍해를 기적으로 건넌 그들은, 해변에서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들은 그 감격으로 미지의 광야를 단숨에 건널 듯 행진해 갔습니다. 그러나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점령한 열두 명의 정탐꾼이 돌아와서 부정적인 보고를 하자, 그들은 소리를 높여 원망했으며, 그 후로는 계속하여 전진하지 못하고 사십 년 간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민족의 운명도 개인의 운명도 감사할 때 전진하고, 원망할 때는 후퇴하는 것입니다.
3. 감사하는 생활은 더 큰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합니다.
감사에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감사는 단순한 정서적 감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에너지가 됩니다. 뇔르 C. 넬슨은 ‘소망을 이루어 주는 감사의 힘’에서 “감사는 가정이나 직업에 대한 만족감과 기쁨을 증가시킴으로써 인간관계를 향상시키고, 사랑이 넘치도록 만들며, 갈등을 해소하고, 협력을 도모하도록 한다.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게 된다. 마치 기적처럼,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Thanks! 마음을 여는 감사의 발견’이라는 책을 쓴 캘리포니아 데이비스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에먼스는 마이애미 대학교 심리학과 마이클 매컬로프 교수와 함께 감사에 대하여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실험에 참여한 사람을 A. B. C. 세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들에게 일주일동안 세 가지 말과 행동에 집중하도록 했습니다. A 그룹은 기분 나쁜 말과 행동에 집중하도록 했답니다. 불평하는 그룹입니다. B 그룹은 감사를 드러내는 데 집중하도록 했습니다. 감사하는 그룹입니다.
C 그룹은 일상적인 말과 행동에만 집중하도록 했습니다. 감정을 유발하지 않는 일상적인 말만하는 그룹입니다. 관찰 결과 감사 그룹은 다른 그룹에 비해 25퍼센트 더 행복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감사 그룹은 일상적인 말을 하는 그룹에 비해 건강했고, 더 많은 시간을 운동에 할애했다고 합니다. 감사는 감정적인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들은 평균 수명이 9년까지 늘어나며, 감사하며 학창시절을 보낸 대학생들을 추적 연구한 결과, 16년 뒤에는 연평균 수입이 2만 5천 달러가 높았다고 합니다.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환자 119명을 대상으로 수술 1년 뒤를 추적 조사한 결과, 감사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이 훨씬 더 건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감사는 단순한 느낌을 뛰어 넘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 기업 내셔널의 창업자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집안의 몰락으로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자전거포 점원으로 일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온몸으로 살벌한 세상을 배워가며 570개 기업, 13만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대기업의 총수자리에 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세 가지를 말했는데, 곧 ‘가난’ ‘허약한 몸’ ‘못 배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것들을 불평의 조건으로 받아드린 것이 아니라, 감사의 조건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가난 때문에 부지런히 일했고, 몸이 약했기 때문에 건강의 소중함을 알아 몸을 아꼈고, 못 배웠기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만들어 배우는데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씀 중 범사란 무슨 뜻입니까 凡事란 ‘모든 상황 가운데’와 ‘언제든지’ 라는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성도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하고, 언제든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무슨 일이 잘 될 때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에도 감사하고, 나쁜 일이 생겼어도 감사하고, 학교에 입학을 했어도 감사하고, 떨어졌어도 감사하고, 취직이 되었어도 감사하고, 실직을 했어도 감사하고, 병이 나았어도 감사하고, 병들었어도 감사하고, 살아도 감사 죽어도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신자가 범사에 감사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얻은 성도의 본분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마치 승용차 한대를 선물 받은 사람은 기쁨이 충만해서 볼펜 한 자루 잃어버린 아까움을 능히 지워 버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 내 몸이 조금 아프다는 것, 내 생활이 조금 어렵다는 것도, 구원을 받은 큰 기쁨 앞에서는 결코 불행으로 느낄 조건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만으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롬 8장:28에 “우리가 알거니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불행한 것같이 보이는 일도 있으나, 그것이 결코 궁극적인 불행이 되지는 못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불행한 조건이라고 보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하여 더욱 영광을 들어내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보다 병들었을 때에 더 감사해야 할 경우가 있고, 실패가 성공보다 더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 ”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좋은 일에만 감사를 합니다. 그러나 시간을 좀 두고 살아보면 오늘의 좋은 일이 반드시 내일까지 좋은 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반면에 오늘의 실패와 불행이 내일에 얼마든지 전화위복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에디슨은 귀머거리였습니다. 그것은 분명 그에게 불행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에디슨은 그러한 불행을 극복하고 발명왕이 됩니다. 밀턴은 말년에 눈이 어두워지는 불운을 겪었는데, 그것이 그로 하여금 그 유명한 실낙원을 쓰는 계기가 됩니다.
작가 스티븐슨은 결핵 말기의 고통 때문에 고생하였지만, 그 병으로 인하여 그는 보물섬이라는 명작을 쓰게 됩니다. 파스칼은 청년시절부터 그를 괴롭힌 온 몸의 통증 때문에 팡세를 완성하게 됩니다. 베토벤은 청각장애 때문에 고통을 이기는 동안 명곡들을 작곡해 냅니다. 헨델은 그 장엄한 메시야 곡을 열병으로 24일 동안 식음을 전폐한 생활을 하는 동안 영감을 얻어 작품을 완성합니다. 진주조개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 몸속에 모래가 들어옵니다. 그 때 속살이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진주조개는 그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는 동안 값진 진주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유대 탈무드에 보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배우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를 이기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행복은 감사와 정비례합니다. 헬라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감사하는 사람의 것이다. ” 라고 했으며,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감사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이다. ”라고 했듯이, 감사한 만큼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빌헤름 웰러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많이 감사하는 사람들이다. ”고 했습니다. 행복은 소유에 정비례하기 보다는 감사에 정비례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마음은 지옥과 같고, 감사가 없는 가정은 메마른 광야와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지식과 명예와 권세와 부를 많이 쌓아놓았다고 해도, 감사가 없으면 진정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감사는 행복의 원료이며 풍요로운 삶의 재료입니다.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에너지입니다.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말하기를 “인생에는 두 가지 삶 밖에 없다. 한 가지는 기적 같은 건 없다고 믿는 삶. 또 한 가지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믿는 삶. 내가 생각하는 인생은 후자이다. ”고 했습니다. 사막에서는 물 한 방울 얻는 것이 기적입니다. 식물인간에게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기적입니다. 삶이 소중하고 감사한 사람에게는 땅 위를 걷는 것, 숨을 쉬는 것, 좋은 사람과 함께 마주 보는 것, 이 모두가 크나큰 기적인 것입니다.
체코가 자랑하는 작곡가로서 ‘안토닌 드보르작’이 있습니다. 주옥같이 아름다운 여러 음악을 작곡했는데, 그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신세계 교향곡’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작곡한 악보를 보면 어떤 곡이든지 맨 끝에다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이란 문구를 기록해 놓았다고 합니다. 힘들여 만든 음악의 말미에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이란 문구를 기록해 놓은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드보르작은 말하기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에게 재능을 주셔서 이토록 좋은 음악을 작곡하게 되었는데, 또 음악을 만들 수 있는 건강과 환경을 주셨는데, 내 음악의 뿌리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고 있는데, 그분께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임자가 있습니다. 한 낱 미물인 소도 그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의 구유를 안다고 했는데,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내 삶을 창조하신 분이 계십니다. 내 삶의 뿌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서는 향내가 납니다.
사람들은 다 사람들의 뜻을 알기 원합니다. 특별히 정치인들은 민심을 파악하려고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혹 ‘이심’ 즉 대통령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관심의 초점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민심’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나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이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의 공통된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과 저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즉 ‘천심’이 무엇인가 ‘천심’이 어디에 있는가 에 관심을 가져야 될 줄 믿습니다.
나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가 오늘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또는 찾기 위해 기도원으로 기도하러 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금식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라. ”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당신의 집에 전기가 들어온다면, 세상에 전기의 혜택 없이 사는 20억이 넘는 사람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집에 식수 시설이 되어 있다면, 그렇지 못해 아무 물이나 마시는 10억이 넘는 사람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루 천 원 이상으로 생활하고 있다면, 천 원 미만으로 살고 있는 12억 명의 사람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루 한 끼라도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영양실조로 고통 받는 8억 명의 사람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 당신의 몸이 건강하다면, 당신은 이번 주를 넘기지 못할 100만 명의 환자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한 번도 전쟁의 위험이나, 수용소의 외로움, 고문의 고통, 굶주림의 쓰라림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전쟁과 기아상태에 있는 5억 명의 사람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체포, 협박, 학대, 고문,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 없이 교회에 나갈 수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 30억의 사람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만일 당신의 냉장고에 음식이 있고, 당신의 몸에 맞는 옷이 있고,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있다면, 이 세상 사람들 75%보다 더 감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은행에 그리고 지갑에 약간의 돈이 들어 있다면, 이 세상의 8% 안에 드는, 감사할 이유가 있는 부자입니다.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시고 지금 혼자가 아니라면, 보기 드물게 감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또 당신이 글을 읽을 줄 안다면, 이 세상의 문맹자 20억의 사람들보다 더 감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에게 감사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줄 압니다. 우리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만 가지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깨닫고,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청교도의 추수감사신앙
시107:1-9
지난 한 주간 저는 개인적으로 꽤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목소리가 정상이 아닙니다만 감기가 아주 심하게 걸려서 몹시 힘든데 연말이라 이런 저런 교회 행사가 몰려 빠질 수도 없어서 설교를 할 때마다, 기도회를 인도할 때마다 여러분 앞에 지치고 힘없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했습니다. 목사로서 성도들 앞에 늘 강건하고 힘 있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는데 본의 아니게 여러분에게 저의 약한 모습을 보여드려서 참 미안하고 그 자체가 힘든 일이었습니다. 아직 완쾌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누워있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오늘 주일에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이 무엇보다 감사한 일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정채봉 시인의 첫 마음이라는 시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이 구절처럼 오늘 저는 추수감사절을 맞으며 가장 감사한 일을 하나만 꼽으라면 제가 그리 강골 체질이 아닌데 그래도 여호와 하나님이 제게 한 해 동안 건강 주셔서 강단을 지키고 목회하는 데 큰 어려움 없었던 것을 꼽고 싶습니다. 새해에는 이 시처럼 좀 더 제 몸을 잘 돌보아서 더 건강하고 힘 있는 모습으로 여러분 앞에 서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저처럼 올 한 해 가장 감사한 일 하나만 꼽으라면 무엇을 꼽으시겠습니까 잠시 생각해 볼까요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방금 우리가 했던 것처럼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한 해 동안 여호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추수감사주일의 유래에 대해 알려면 반드시 ‘청교도’라고 일컫는 사람들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이 ‘청교도’란 어떤 사람들이며 이들이 추수감사절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청교도, 그들은 누구인가
‘청교도’(淸敎徒)라는 한자말은 “깨끗한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영어의 ‘퓨리턴’(Puritan)을 이렇게 옮긴 것이지요. 청교도, 즉 이 퓨리턴들에 대해 알려면 잠시 영국의 역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국 역사에는 몇 명의 여왕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으로 불린 메리 여왕이 있습니다.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영국을 철저한 가톨릭 국가로 만들기 위해 개신교도들을 탄압하고 학살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피의 메리’지요. 그런데 메리 여왕은 5년 만에 죽고 그 뒤를 이어 영국의 여왕이 된 사람이 바로 엘리자베스 1세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개신교도였지만 그 신앙은 메리 여왕처럼 독실하지는 않았나봅니다. 자신은 비록 개신교였지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톨릭 신자들의 감정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구교인 가톨릭과 신교인 개신교 사이에 중용의 입장을 지키면서 둘 사이를 절묘하게 조화한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가 이때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어서 엘리자베스 1세는 여왕이 교회의 최고의 통치자임을 선포하는 ‘수장령’이라는 것을 발표합니다. 또한 1559년 ‘기도방식 통일법령’을 제정하고 영국의 모든 교회는 국교회인 성공회의 예배와 기도 형식을 따르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도 성공회가 있습니다만 혹시 성공회 예배를 보신 적이 있는지요 분명 성공회는 우리 장로교처럼 개신교입니다.
그런데도 앞에서 설명한 배경 때문에 예배 방식은 거의 가톨릭, 천주교와 흡사합니다. 그러니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여왕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영국의 모든 교회는, 심지어 개신교도 다 성공회의 예배 방식을 따르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마치 우리 장로교회에서 천주교식 미사를 드리라고 명령한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당시 많은 사람들이 여왕의 권력이 무서워 입을 다물었습니다. 바로 이때 등장한 사람들이 퓨리턴, 즉 청교도들입니다. 청교도는 칼빈주의(장로교의 아버지)의 철저한 원리를 따릅니다. 그들은 결코 여왕의 명령대로 성공회의 제도나 예배를 따를 수 없다고 저항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당연히 무서운 핍박과 박해를 받게 되지요. 특히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제임스 1세, 찰스 1세 때는 엄청난 박해를 받아 네덜란드와 기타 지역으로 피해 갑니다.
바로 그들 중에 몇몇 용감한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마침 1492년 콜럼버스에 의해 신대륙(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어 영국에서는 신대륙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그곳에 거주할 사람들을 찾고 있었는데 인디언들만 사는 그 미개척지에 누가 가려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청교도들 중에는 이 신대륙으로 건너가면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102명의 청교도가 1620년 9월 16일 그 유명한 메이플라워 호(號)를 타고 신대륙으로 향해 갑니다. 이들은 석 달 간의 항해 끝에 그해 12월 21일 지금의 매사추세츠 주 플리머스 지방에 상륙합니다. 바로 이들이 신대륙에 상륙해 정착하고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파종을 해서 이듬해 첫 수확을 거두게 됩니다. 첫 수확을 기념해 청교도들은 축제를 열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바로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된 것이지요.
청교도의 감사신앙
그런데 아마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이미 들어본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몰라도 대충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대륙에 가서 첫 추수를 감사한 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이라는 이야기 정도는 들어본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절반도 모르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시 청교도들의 상황이 정말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추수감사절을 지킬만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일까요 당시 청교도들의 상황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우선 많은 분들이 청교도들이 타고 간 메이플라워 호를 생각하면 큰 돛을 단 멋진 범선을 생각하며 아주 낭만적으로 생각합니다만 결코 아닙니다. 지금도 이들이 처음 상륙했던 플리머스 항구에 가보면 이 메이플라워 호가 복원되어 있는데 그 모습을 처음 본 사람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합니다.
무게 180t, 길이 27. 5m의 자그마한 배로 원래는 포도주를 운반하던 상선(商船)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작은 상선을 개조해 102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꾸역꾸역 태우고 갔으니 항해가 어땠겠습니까 게다가 폭풍우로 9월에 떠난 배는 석 달 만에 도착했습니다. 이 끔찍한 항해 도중 무려 44명이 목숨을 잃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원래 이들은 따뜻한 미국 동부의 버지니아에 도착해서 정착할 계획이었습니다만 험한 폭풍우 끝에 배가 도착한 곳은 원래 목적지인 버지니아보다 훨씬 북쪽인 매사추세츠였습니다. 아주 춥고 살기 힘든 곳이었지요. 버지니아로 가고 싶어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이들은 결국 여기서 삶의 터전을 개척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이 도착한 것이 12월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이 닥쳐왔습니다. 인디언과 전염병의 위협도 이어졌습니다.
첫해 겨울에 추위와 질병 배고픔으로 정착민의 절반 이상이 사망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꾹 참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많은 분들이 청교도들이 정착 이듬해인 1621년에 큰 풍년을 맞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라고 알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설교하는 목사님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실제로는 청교도들이 큰 수확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아주 참담한 흉작이었습니다.
청교도들은 흉년과 식량난으로 고생했으며 신대륙에 올 때 배를 빌리느라 진 빚이 이자가 불어나서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렸습니다. 그렇게 맨주먹 불끈 쥐고 노력했는데 완두콩농사도, 보리농사도 다 망쳤습니다. 인디언들에게 경작법을 배워 거둔 옥수수도 이십 에이커의 밭에서 난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한동안은 한 사람 당 하루 옥수수 5개가 식량의 전부로 배급되었습니다. 지금도 미국 사람들은 추수감사절에는 옥수수 5개를 식탁에 올려놓아 그 때의 궁핍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참담한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추수감사절이 정말 감사할 제목이 많아서 추수감사절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강단에는 풍성한 오곡백과가 차려져 있는데 첫 번째 추수감사절은 이렇게 풍성한 소출을 거두어서 드린 예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감사할 제목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처음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날 때 계획한 일 중에 지금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꿈꾸었던 아메리칸 드림이 다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따뜻한 땅에 가서 농사지으려 했는데 폭풍우에 시달린 끝에 엉뚱한 곳에 도착했습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집이 있습니까 기름진 옥토가 있습니까 엄청난 추위와 배고픔과 전염병이 그들을 끊임없이 위협했습니다. 그래도 다 참았습니다. 이번 농사만 잘 되면, 이번 농사만 풍년이 되면 그동안의 모든 고통과 실패는 다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꾹 참았습니다. 그런데 첫 수확은 먹고 살기도 힘들 정도로 흉년이었던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결과는 참담한 실패뿐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럴 때 정말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정말 원망과 불평 대신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못 하지요.
정말 놀라운 것은 이처럼 실망스럽고 참담한 결과를 앞에 두고 청교도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과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그 모든 상황에서도 추수감사절을 지키며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그 답은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07편에 나옵니다.
시편 107편의 감사신앙
시편 107편 본문을 함께 봅시다. 먼저 시편 107편 첫 절은 감사의 노래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누구나 할 수 있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그 감사의 이유가 2절부터 나옵니다. 2절과 3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대적의 손에서 우리를 속량하고 구원하여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고통스러운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셨으니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합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곧이어 어려움이 닥치게 됩니다. 그 어려움이 바로 4절과 5절에 묘사되고 있습니다. 함께 읽을까요
4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5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이것은 아마도 바벨론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대 땅으로 돌아오면서 겪은 고통을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었다고 해서 편안히 가시라고 이스라엘까지 모셔다 드렸겠습니까 우리나라도 8. 15 해방 이후에 일본 땅에 끌려가 있던 많은 동포들이 다시 돌아오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알아서 돌아와야 했으니 말입니다. 실제로 그 때 조선으로 돌아오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꽤 많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기가 알아서 유대 땅으로 돌아와야 했는데 그 때 척박한 광야를 지나고 사막을 지나며 목말라 고생하고 큰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6절입니다.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 근심과 고통 중에도 결코 절망하지 않고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십니까 그들을 고통에서 건져주셨답니다. 할렐루야!
또 바른 길로 인도하셔서 그들이 거주할 성읍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시편 107편의 시인은 이렇게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8절과 9절입니다.
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보세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청교도들은 그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해방된 것처럼 자신들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자유의 땅인 신대륙으로 가는 길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험난한 일을 수없이 겪고 많은 희생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정말 참담한 상황입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9절 말씀처럼 여호와 하나님이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지금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장차 여호와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미리 내다보며 감사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믿음대로 그대로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들의 삶이 풍성함을 누리게 되었고 이 작은 청교도 신앙으로 시작한 공동체가 지금의 미국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미국이 어떤 나라입니까
지금 미국의 지위가 흔들리니 어쩌니 하는 분들도 있지만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대국입니다. 세계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대국입니다. 지금 미국을 욕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미국은 지금도 여전히 대통령이 취임할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나라입니다. 바로 청교도 신앙 때문입니다. 이 청교도 정신이 살아있는 한 미국은 여전히 기적을 이루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바로 그들의 조상이 시편 107편의 감사신앙을 가진 청교도들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설교 첫머리에 올 한 해 가장 감사한 일 한 가지씩만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혹시 “나는 올 한 해 정말 복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신 분 계십니까 그런 분들은 정말 여호와 하나님 앞에 뜨겁게 감사해야 합니다. 내 능력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 은혜입니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해서, 내 정성을 바쳐서 그 은혜에 감사하기 바랍니다. 혹 반대로 “감사는 무슨 감사
한 해를 돌아보니 참 복도 지질이도 없는 한 해였다”고 생각하신 분 계십니까 하는 일마다 안 되고, 계획마다 틀어지고, 뜻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되십니까 건강, 가정, 자녀, 사업과 직장 등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까 그래서 감사의 제목을 찾으려야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분 계십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여호와 하나님 믿고 섬겼는데도 아무 복도 안 주셨다고 생각되십니까
이런 분들은 오늘 시편 107편의 감사신앙을 배우십시오.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된 청교도들의 감사신앙을 배우기 바랍니다. 그것은 고통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 아는 신앙입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손에 쥔 것이 없지만, 계획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지만 이 고통과 실패 뒤에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따라 올 것이라고 분명히 믿는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 8절 말씀처럼 여호와 하나님이 반드시 나에게 기적을 베푸실 것이라고 믿고 그분을 찬송할 수 있기 바랍니다. 9절 말씀처럼 어떤 실패나 역경에도 절망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감사할 줄 아는 영혼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반드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만족을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주린 영혼, 사모하는 영혼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반드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믿음입니다. 풍성한 복과 은혜 중에 감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것이 진짜 감사신앙인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바로 이 진짜 감사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흉작과 실패 가운데서도 하늘을 우러러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을 드릴 수 있었고 그 결과 여호와 하나님이 감동하셔서 그들 자신에게, 나아가 그들의 가정과 후손 대대에 큰 복과 기적을 일으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진짜 감사신앙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추수감사주일이 바로 이런 기적을 일으키는 감사의 시간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추수감사 삶
레23:39-44
추수감사절 예배에 참석한 교우 여러분 모두에게 한량없으신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우리 교회는 몇 해 전부터 11월 첫 주를 추수감사절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살아온 날들을 감사함으로 돌아보며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자리를 재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立冬입니다.
겨울 채비를 해야 할 때입니다. 비록 도시에 살고는 있지만 저는 습관처럼 24절기를 의식하며 삽니다. 절기라는 말은 ‘마디 절節’과 ‘기운 혹은 숨 氣’가 결합된 말입니다. 옛 어른들은 유장하게 흐르는 자연의 순환과 숨결을 나름대로 구획지어 놓고 철에 따라 사셨습니다. 그 숨결을 거스르지 않으니 삶이 여유로웠고 푼푼했던 것 같습니다.
이 맘 때가 되면 나뭇잎도 떨어지고 고니는 끼룩거리며 높이 납니다. 여성들은 무와 배추를 수확해 김장을 담그고, 남자들은 독이나 중두리, 바탱이 항아리를 짚으로 감싸 땅에 깊이 묻었습니다. 요즘이야 집집마다 김치냉장고를 들여놓고 지냅니다만, 살림하는 재미는 좀 덜하지 않나 싶습니다. 겨울을 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은 참 많았습니다.
방고래에 쌓인 재를 고무래로 긁어내야 했고, 바람벽에 맥질도 해야 했습니다.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뚫어놓은 창호문도 새로 해야 했고, 쥐구멍도 막아야 했습니다. 소나 돼지가 살고 있는 외양간에는 떼적을 쳐주어야 하고, 땔 나무도 준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분주하다고 해서 정신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마을 사람들은 함께 어울려 떡도 하고 술도 빚어 신명나게 놀며 부모의 은혜도 기억하고 하늘의 은혜도 기렸습니다. 그때가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단지 오래된 기억이기 때문일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때에 비해 삶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족해지고 편리해졌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헛헛합니다. 뭔가 고갱이가 쏙 빠진 것 같아 쓸쓸합니다. 엊그제 신문에서 명지대 김정운 교수의 칼럼을 보다가 혼자 피식 웃었습니다. 그는 도무지 그리운 게 없이 사는 자기 삶을 반성조로 돌아보다가 마지막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낙엽이 이렇게 서럽게 지는데도 도무지 그리운 게 하나 없다. 아, 이렇게 맛이 가는 거다. ”
순례 축제
그리움이 없다면 정말 심각한 일입니다. 세상만사에 다 심드렁해지면 우울해지기 쉽습니다. 김정운 교수는 그리운 것도 없고, 쓸쓸하기만 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제시합니다. 아주 처절하게 고독해 보라는 것입니다. 혼자 길을 떠나 며칠이고 사람과 만나지 말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라는 것입니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가끔 삶이 무겁다고 느끼는 것은 내 속에 침묵과 고독의 빈 터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제 가슴을 설레게 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순례’입니다. 순례란 물론 종교인들이 자기들의 정체성의 뿌리가 될 만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을 뜻하지만, 사실은 자기를 찾아가는 먼 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지순례라 하여 사람들이 패키지로 몰려다니는 순례 말고, 정말 철저히 고독한 순례를 해보고 싶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숨결이 머물고 있는 갈릴리나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걸으셨던 고난의 길퍔 dolorosa을 걷고 싶어 합니다.
순례란 자기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종교라는 말은 어원인 ‘religare’는 우리를 근원과 다시 연결시킨다는 뜻입니다. 팔레스타인 인근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일 년에 세 차례, 유월절(Pascha), 칠칠절(Shavuot), 초막절(Sukkot)에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 절기들은 원래는 농사력과 관련되어 있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들의 역사적 경험과 결부시켰습니다.
니산월(우리의 경우 3-4월)에 있는 유월절은 보리와 아마 수확을 기념하는 절기였는데 나중에는 출애굽 사건과 연결되었습니다. 이른 무화과와 포도 수확을 기념하는 절기인 칠칠절은 시내산에서 맺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념하는 절기라는 의미가 덧입혀졌습니다. 대추야자와 여름 무화과를 수확한 후에 즐기는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경험과 결부되었습니다. 각각의 절기마다 자연의 리듬을 배음으로 깔고, 역사적 경험을 주선율로 연주했던 것입니다.
‘서로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순례자들의 행렬을 머리에 그려 보십시오. 물론 혼자 걷는 이보다는 누군가와 더불어 걷는 이들이 많겠습니다만 그들은 모두 하나의 지점을 머리에 그리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슬쩍 그 흐름 속에 섞여 들어가 보십시오. 그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까요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안도감 같은 것일까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 가운데는 ‘소속에의 욕구’도 있습니다. 그것은 식물로 비유하자면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열망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소속감은 그러니까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내 옆에서 걷고 있는 이들은 모두 나의 설 땅이 되어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사람들, 두런거리는 소리, 모두 정겹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장 바니에는 “공동체란 모든 사람이―아니 좀더 현실적으로 보아 대다수가―자기중심이라는 그늘에서 빠져나와 참된 사랑의 빛 속으로 들어가는 장소”(공동체와 성장, 성바오로출판사; 1992, 17쪽)라고 설명했습니다.
공동체는 어떤 프로그램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기본 조건은 공통의 지향입니다. 이해관계도 다르고, 생각하는 바도 다르던 이들이 순례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순례를 통해 출애굽 사건을 기억 속에 소환하곤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들의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순례를 통해 시내산 계약을 떠올렸습니다.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 받은 자기들의 소명을 재확인했습니다. 순례를 통해 그들은 조상들이 감내해야 했던 광야생활의 고달픔과 그 속에서 맛보았던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했습니다. 순례는 그처럼 사람들을 마땅히 있어야 할 마음자리로 이끌어줍니다.
저는 순례의 축제를 가진 나라를 부러워합니다. 시편 기자는 “축제의 함성을 외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습니다. 주님, 그들은 주님의 빛나는 얼굴에서 나오는 은총으로 살아갈 것”(시89:15)이라고 노래합니다. 좋은 나무에서 딴 열매를 가져오고, 종려나무 가지와 갯버들 나무를 꺾어들고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찬양을 통해 그들은 더 깊이 하나로 엮여집니다. 오늘 오후에 있을 찬양의 가을걷이가 우리의 순례축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감사
추수감사절을 맞으면서 감사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고 보니 정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신지요 예전에는 찬송가 429장을 잘 부르지 않았습니다. ‘받은 복을 세어 보라’는 말에 대한 저항감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자꾸만 받은 복을 헤아려보지 않으면 우리 인생이 고마움임을 망각하게 됩니다.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어르신들이 계신 데서 외람된 말입니다만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 찬송가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약해지고 또 낙심되는 일이 있을 때 주님이 주신 복을 헤아리다보면 지금의 어려움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 문제의 크기가 과장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살다보면 어려운 일도 만나지만, 어떤 경우에도 세상이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한 가지 자유가 있습니다. 그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까 결단하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지만 시간 너머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감사는 꽉 막혀 버린 길을 여는 열쇳말입니다. 불평불만, 절망, 분노의 감정이 우리를 지배할 때, 받은 복을 헤아리다 보면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부드러워진 마음으로 바라보면 길이 보입니다. 우리가 다소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리고 있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저는 목사로 살아가는 것이 복이라고 느낍니다. 목사직은 멍에입니다. 때로는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지만 함부로 벗어버릴 수도 없는 게 멍에입니다. 울면서라도 가야 할 길입니다. 아직 멀었지만 예수님의 마음에 조율하며 살게 하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또한 우리 교회에 ‘생명 세상을 여는 녹색 교회’라는 분명한 지향점을 주셨습니다. 비록 더디기는 해도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동행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길지 않은 순례 길에서 좋은 길벗을 만나는 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와 은사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헌신과 봉사는 교회 안에서 갇혀선 안 됩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동합니다. 올해 결혼한 한 부부는 축의금의 십일조를 곤경에 처한 중증 장애인 가정을 위해 내놓았습니다. 물론 익명입니다.
또 다른 한 가정은 아기 백일잔치를 위해 여퉈두었던 돈을 역시 장애인 가정에 위탁하기로 했습니다. 넉넉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나누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그 마음을 주셨습니다. 자기 것을 덜어내 더 필요한 누군가에게 주는 기쁨을 맛본 사람은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내놓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교회도 많은 재물을 축적하기 시작하는 순간 타락의 길로 떨어지고 맙니다. 꼭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자꾸 나누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초막에 머물던 시절을 잊어버리는 순간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까지 잊어버리고 맙니다. 이게 어쩔 수 없는 사람의 한계입니다. 자신을 위해 덜 쓰고 다른 이들을 위해 더 쓸 때 교회는 건강해집니다. 너무 많은 재물은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마음
러시아의 농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민담이 하나 있습니다. 한 가난한 농부가 살았습니다. 그는 이른 새벽부터 밭에 나가 열심히 일했습니다. 쟁기질이 끝나고 시장기가 돌 무렵이면 나무 밑에 놓아둔 빵 한 조각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빵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맹물로 달래며 말했습니다. "오늘 하루 굶는다고 죽지는 않겠지. 누구든 그 빵이 필요했으니 가져갔겠지. 그 사람이라도 잘 먹으면 좋겠군. " 근데 그 빵을 훔친 것은 악마였습니다.
악마는 농부가 죄를 짓게 만들려고 빵을 훔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농부는 빵 도둑에게 악담을 퍼붓기는커녕 오히려 축복했습니다. 그 악마는 대장 악마에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악마다운 지혜가 부족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악마는 다른 술책을 꾸몄습니다. 농부의 빵을 훔치는 대신 농부의 빵을 늘려주기로 했습니다. 하인으로 변장한 악마의 도움으로 농부는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들어도 많은 수확을 하게 되었습니다. 곡식이 남아돌자 악마는 그것으로 술을 만들라고 부추겼습니다. 마침내 허기를 달래주던 일용할 양식이 쾌락을 위한 도구로 바뀌었습니다.
술이 생기자 농부는 친구들을 불러들여 먹고 마시며 놀았습니다. 술자리를 마칠 즈음이면 너나할 것 없이 인간의 모습은 간데없고 동물들로 변했습니다. 비책을 묻는 대장 악마에게 악마는 대답했습니다. 자기가 한 일이라곤 농부에게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수확을 준 것 밖엔 없다고 말했습니다. 남아도는 것이 생기자 농부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자신의 쾌락을 위해 쓰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인간의 마음에 묶여 있던 여우와 늑대와 돼지의 피가 다 뛰쳐나오더라는 것이었습니다. (톨스토이, 악마와 빵 한 조각)
옛 이야기이지만 역시 우리 삶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말씀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야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잇대어 있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김현승 선생님의 시 감사하는 마음의 마지막 연은 언제 보아도 감동적입니다.
감사하는 마음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主人이 누구인지를 아는 마음이다.
감사할 줄 아는 이는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 늦가을, 우리가 잃어버렸던 감사의 마음을 되찾는 행복을 맛보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추수감사의 출발점
살전5:18
100m 달리기 육상 경기에서 보면 선수들이 출발하는 출발점이 있습니다. 아무데서나 출발하지 않습니다. 마라톤 경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출발점에서 출발을 잘해야 좋은 성적을 거둘 수가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 데 그 감사의 출발점이 어디서부터인지 생각해볼 때 우리 주님의 음성이 여러분에게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까 그것은 감사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본문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분명히 밝혀 놓은 구절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성도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감사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분명한 뜻입니다.
성도의 입에는 언제나 우선 감사하는 말이 붙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감사합니다” 해놓고 왜 감사한지 그 이유는 나중에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일에든 반드시 감사할 이유가 있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없으면 감사하라고 했으니까 감사했다고 말하십시오. 그것도 훌륭한 감사의 이유가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감사하는 것이라면 그 감사의 출발점은 어디서부터일까요
1. 감사의 출발점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있습니다.
시 107:1 절에 보면 시편 기자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그의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한 인생들이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범죄한 대로 율법적으로 엄격하게 현재 이 땅에서 죄를 처리하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아마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죄인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결국 한 사람이 라도 더 회개하고 구원받게 하려고 하시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롬 9:22절에 보면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들은 범죄 하므로 이미 멸하기로 준비된 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생들에게 의로운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디 까지나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때문입니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그 어느 것으로도 비교될 수 없습니다.
정신분석학자 ‘빅토르 프랑클’은 이 세상에서 가장 엄격하였던 아버지를 메리메의 소설 ‘마테오 팔코네’ 속에 나오는 주인공 ‘팔코네’로 보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사르디아 섬 외딴 집에서 소년 ‘포르투나토’ 가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애국 독립군 게릴라들이 헌병에게 쫓겨 짚더미 속에 숨었습니다. 뒤쫓아 온 헌병들은 소년 ‘포르나토’에게 시계를 주면서 유혹하였습니다. 독립군들이 숨은 곳을 말하면 시계를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어린 소년은 그 시계 갖고 싶어서 독립군들이 숨어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독립군들은 체포되어 끌려갔습니다. 멀리 갔던 아버지 ‘팔코네’가 돌아와서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버지 팔코네는 총에 총알을 장진하고 아들을 끌고 개울가로 갔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질질 끌고 가는 아버지의 다리를 붙들고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막무가 내었습니다. 드디어 총소리가 울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아내에게 “놈을 위해 기도해 주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버지 팔코네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아들을 죽임으로서 피도 눈물도 없는 매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신 분입니다.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병을 가져온 마귀를 미워하셨지만 병자는 사랑하셨습니다. 팔코네는 죄인을 미워하였지 죄 처리 방법을 몰랐습니다. 속은 시원하고 정의감에 불타고 사람들은 애국자라고 높이 평가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들은 죽어 버렸고 아내는 그 충격으로 씻을 수 없는 아픔을 갖게 되었고 자신도 언젠가는 후회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인생들에 대하여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분입니다.
인생들을 향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죄인은 사랑하셔도 죄는 미워하시기에 인간들과 죄를 분리시킬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구약에서는 흠 없는 짐승이 죄를 짊어지고 인간의 죄 값으로 대신 죽게 하셨고 신약에서는 흠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서 피 흘리게 하셨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느니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자리입니다.
죄인 된 우리들에게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타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사의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2. 받은 은혜를 헤아리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없는 것은 잘 헤아립니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것은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잘헤아리지 못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빈손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우리들에게 주어지는지 모릅니다.
찬송가 489장의 후렴 부분에 보면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받은 복을 세어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신 16:10절에 보면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릴 때 받은 복을 헤아려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받은 복을 헤아릴 줄 하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감사가 나옵니다.
생명을 받았습니다. 건강을 받았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살 집이 있고 하루 끼니 걱정하지 않을 만큼의 그날 그날 양식이 있습니다. 더구나 마음껏 신앙생할 할 수 있는 영적 환경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들입니다.
하루 세끼 밥 먹을 수 있는 것에 대한 진정한 감사가 있는 사람은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받은 은혜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은 은혜입니다.
어떤 군인이 월남전에 참전하였다가 지뢰를 밟는 바람에 양 발목이 잘리어 나갔습니다. 그는 후송되었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을 받아들일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 원망하며 자신의 삶을 비관하였습니다.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꿈속에 주님이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무엇을 잃었니 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라고 불평스럽게 대답하였습니다. 그 때 주님은 미소를 머금고 그에게 또 다시 물었습니다.
손 있니 예 있습니다. 팔있니 예
눈 있니 예
코있니 예
먹고 말할 수 있는 입 있니 예
따듯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가슴 있니 예
주님은 계속 물었습니다. 그 때마다 그는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무엇을 잃었니 병사는 대답했습니다. 예 두 발목만 잃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우리에게 없는 것 때문에 불평하기도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는 있는 것을 헤아림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없는 것 잃은 것 가지고 불평하지말고 있는 것 받은 것 가지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3. 마음은 낮춤으로 감사가 나옵니다.
마음을 높게 가지면 언제나 불평과 원망만 쏟아집니다. 그러나 마음을 낮추어 보십시오.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 마음들을 좀 낮춥시다.
바을은 롬 12:16절에서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고 했습니다.
미국의 어느 부자가 영국의 유명한 대학 옥스포드를 찾아 갔습니다. 공부가 끝난 오후 시간에 찾아간 것입니다. 엄숙한 학교 분위기에 그 부자는 압도되었습니다.
둘러보니 아름다운 잔디를 깎고 있는 노인이 한사람 눈에 들어왔습니다. 노인은 허술한 옷차림으로 열심히 잔디를 깎고 있었습니다. 미국 부자는 잔디가 보기에 너무도 아름다워 노인 곁으로 다가 갔습니다.
"영감님, 이떻게 하면 이렇게 아름다운 잔디를 기를 수 있습니까"
"예, 매일 물을 주고 깎아주면 됩니다. "
지극히 평범한 대답이었습니다.
"이 잔디를 얼마나 손질을 했습니까"
"이와 같은 일을 300년 동안했습니다. "
미국의 부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잔디 밭 하나 가꾸는데 300년이 걸리다니. 미국의 부자가 더욱 놀란 사실은 그 잔디를 깎고 있는 노인이 그 대학의 총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눈을 돌려 세상을 보면 서로 높아지려는 아우성 뿐 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세를 낮추고 목소리를 낮추어 겸손의 본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도 이런 겸손을 직접 행동으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마음을 낮추면 감사가 나옵니다.
여러분!
한 끼의 양식이 없어 굶은 인구가 지구촌에 수없이 많습니다. 병들어도 약이 없어 속수무책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이제는 좀 낮아집시다. 그러면 감사가 저절로 나올것입니다.
여러분!
11월은 감사의 달입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때문에 여러분이 구원의 은혜 받은 것을 생각하여 감사합시다. 그리고 받은 은혜를 헤아려 감사합시다. 이제는 마음을 좀 낮추고 감사합시다.
추수감사와 찬송을 받으소서
시118:1-5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지키는 3대 절기는 성탄절과 부활절, 그리고 추수감사절입니다.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절기로 역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부활절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은 역사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거나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기독교의 3대 절기에 속하게 되었을까요 감사가 없는 절기는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모든 절기의 기본입니다. 성탄절도 감사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나를 구원해 주신 그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다면 부활의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우리의 삶,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감사입니다.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언어는 ‘엄마, 아빠’ 다음으로 ‘감사’라고 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언어, 가장 아름다운 삶, 가장 놀라운 축복은 감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는 늘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감사의 말을 하고, 감사의 마음을 품고, 감사의 생활을 하는 것이 진정한 성도의 삶입니다.
감사는 축복의 뿌리
시편 105편 1절에 보면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16편 12절에도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시편 98편 4-6절에 보면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할지어다 소리를 발하여 즐거이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수금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라 수금과 음성으로 찬양할지어다 나팔과 호각으로 왕 여호와 앞에 즐거이 소리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48편 12-14절에도 “청년 남자와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심이로다 저가 그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저는 모든 성도 곧 저를 친근히 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거리로 다 할렐루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9절에도 “우리가 우리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보답할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7절에도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이작 왈톤은 “여호와 하나님은 두 곳의 거처가 있다. 한 곳은 천국이요, 다른 한 곳은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이 땅에서는 감사하는 우리의 마음에 계십니다.
영국의 격언에 ‘지옥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고, 천국은 감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감사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감사가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감사가 넘치면 남보다 조금 덜 먹어도, 남보다 좋은 옷을 못 입어도, 남보다 조금 작은 집에 살아도, 남보다 출세하지 못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설교자 찰스 스펄전은 "불행할 때 감사하면 불행이 끝나고, 형통할 때 감사하면 형통이 연장된다. "고 말했습니다. 감사는 세상 무엇보다도 가장 귀합니다. 노르웨이 속담에도 “감사하는 마음에는 사탄이 씨앗을 뿌릴 수 없다. ”는 말이 있습니다. 사탄은 악한 영입니다. 우리 마음에 악한 영이 들게 하여 우리의 마음과 가정을 파괴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은 문빗장이 견고하여 어떤 마귀도 틈을 탈 수 없습니다.
감사할수록 넘치는 축복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셔서 감사하는 민족으로 기르시고, 감사하는 훈련을 철저하게 시키셨습니다. 유대인의 3대 절기는 유월절과 맥추절(오순절, 칠칠절), 그리고 초막절(수장절)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구원받은 사건을 자자손손 끊임없이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은 보리를 추수하며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지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하시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 주시고 보호해 주셨던 40년의 장막생활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반드시 이러한 절기들을 지키며 광야 같은 세상에서 늘 돌보아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왜 세계적인 민족이 되었습니까 감사하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1789년에 국가적으로 감사절을 제정하였으며, 링컨 대통령은 1863년에 ‘Thanks Giving Day’라는 절기를 만들어 국가공휴일로 정하고, 온 국민이 일주일 동안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했습니다. 감사하는 민족이 잘되고, 감사하는 나라가 잘됩니다.
오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살아갈 때에 늘 감사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입으로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넘치게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정상에 올라가도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불만하며 살다가 우울증에 걸려 자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감사하지 않는 삶은 허무함을 이겨 내지 못하고 좌절하여 수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쉽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갈 때에 이 세상은 감사로 가득한 세상이 될 줄 믿습니다. 감사의 분량만큼 행복하고, 감사의 분량만큼 잘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지상의 많은 나라와 개인 가운데서도 특별히 감사하는 개인, 감사하는 가정, 감사하는 민족이 잘되도록 질서를 창조하셨습니다. 언제나 감사하는 개인과 가정과 나라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온 민족을 살릴 수 있는 미래의 에너지는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 인류는 모든 분야를 개발하며 여기까지 왔지만, 감사를 잃어버린 우리의 인격과 가정과 사회가 얼마나 많이 망가져 가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가 이렇듯 병이 든 것은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좋은 세상에 살면서도 감사하지 않으면 언제 감사하겠습니까 이렇게 좋은 햇빛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걸을 수 있도록 건강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가정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우리나라를 축복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의 힘은 감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감사할 때 행복의 샘물이 솟아난다고 합니다. 건강한 부부, 건강한 이웃과의 관계에 필요한 것도 감사입니다. 부모님께 감사하면 효도가 되고, 형제간에 감사하면 우애가 깊어집니다.
건강도 감사에서 온다고 합니다. 감사하면 면역력이 생겨서 쉽게 병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감사하면 우울증에 걸리지 않고, 우울증에 걸린 사람을 건져 내는 유일한 길도 감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최고가 되어서 감사하고, 완전해서 감사하고, 모든 것을 다 가져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주의 백성들은 항상 주님께서 인도해 주시므로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기쁨은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영적 죄에서 건짐 받지 못한 구원은 참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죄에서 건짐 받은 기쁨만이 참 기쁨이요, 영원한 기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쁘게 감사하며 찬송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넘치도록 감사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생각나는 것은 오직 감사밖에 없습니다. 살다 보면 때로는 비바람이 몰아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뿌리를 더욱 든든하게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려워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려움이 오히려 더 큰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그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하늘과 땅에 모두 감사할 일들 뿐입니다. 우리 민족을 축복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여러분의 가정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늘 감사가 넘치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추수감사로 해석하는 관계
고전1:4-9
오늘은 한국 교회가 전통적으로 지키는 추수감사절입니다. 추수 감사절의 유래는 미국에 건너온 청교도들의 추수 감사절에서 온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갖은 고난을 겪으면 첫 번 수확을 거두고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한 절기였습니다.
미국에서는 11월 셋째 목요일부터 추수감사절로 정하고 학교도 쉬며 가장 큰 명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미국 교회의 영향을 받아 선교 20년 후인 1904년 제 4회 조선 예수교 공의회에서 추수감사절로 지키기로 결의했습니다. 처음에는 장로교만 11월 10일에 추수 감사절로 지키다가 1914년 각교단 선교부가 미국 선교사 최초 입국일인 11월 셋째 주 수요일을 추수 감사절로 지켰습니다. 1021년 11월 셋째 주일로 변경하여 지금까지 추수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키는 추수 감사절은 성경에 나온 절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감사와 관련된 3대 절기인 무교절(유월절), 칠칠절(맥추절, 오순절, 초칠절), 초막절(수장절, 장막절)이 나옵니다. 무교절은 봄의 보리 추수와 관련이 있고 칠칠절은 유월절로부터 칠 주가 지난 날로 여름철의 밀 추수와 관련이 있습니다. 초막절은 농산물뿐 아니라 올리브나 각종 과일의 추수를 포함한 가을 추수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추수 감사절은 바로 초막절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애굽의 노예 생활을 하던 백성들이 해방이 되어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살던 때를 기념하여 가을철 추수를 다 끝내어 놓고 지키는 절기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을 농경의 풍요를 주는 신으로 섬기며 바알축제를 하였는데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로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이 기간에 첫날과 제 8일에는 성회로 모이고 7일간 매일 감사제물을 드리고, 성경을 낭독하며 잔치를 즐겼습니다(민29:12~38)
초막절은 한 해의 추수를 하도록 은혜를 베푸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일주일 동안 함께 모여 즐거워하며 그들의 생업에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해서 감사의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초막절은 여호와 하나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백성들이 모두 초막에 거하며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몸소 체험하였습니다. 매일 여호와 하나님께 속죄의 제물을 드리고, 죄의 용서를 구할 뿐 아니라 구속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레 23장; 민 29장).
초막절은 지역과 계층을 초월한 나눔의 감사 축제였습니다. 초막절 잔치에는 빈부나 신분의 고하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참여했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의 대명사인 종과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가 함께해 먹고, 나누며, 기뻐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왔고 지역과 계층을 초월한 나눔과 배려가 있는 축제였습니다. 청교도들의 추수감사제나 성경의 초막절은 다 공통점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로 해석한 절기입니다. 무수히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지난 과거를 감사로 해석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웃과 함께 축제로 드린 절기입니다.
오늘 2009년 추수 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도 지난 세월을 감사로 해석하고 특별히 12년 만에 건축한 교회 입당을 앞에 놓고 지금까지 열린교회를 섬겼던 모든 성도와의 관계를 감사로 해석하며 감사로 드리는 추수 감사절이 되었으면 하여 설교 제목을 “감사로 해석하는 관계”라고 잡아 보았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인간관계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관계 속에서 태어나서 인간관계 속에서 살다가 인간관계 속에서 죽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관계를 형성하며 살게 됩니다. 처음에 부모와 자녀관계로부터 시작하여 형제관계, 친구관계, 사제관계, 선후배관계, 상사와 부하관계, 부부관계 교우관계 등 폭이 넓어집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성질상 필연적으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조력관계'라고 부릅니다. 이런 인간관계는 몇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독특성이 있습니다. 어떤 인간관계도 똑같을 수 없습니다. 둘째는 대체불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떠한 인간관계도 다른 인간관계에 의해 대체될 수는 없습니다. 셋째는 상호의존성입니다. 관계하는 당사자의 운명이 상호 연관되어 있습니다. 넷째는 보상성입니다. 생산적인 인간관계를 가지면 서로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이 됩니다. 자기존중감을 높여주고 위로를 주며 즐거움을 줍니다. 인생을 살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힘을 주고, 정신건강에 기여하여 행복하게 하고, 자아 실현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활기를 줍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털어놓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인간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보다 병에 걸릴 확률이 배나 낮다고 합니다.
대학교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룸메이트끼리 서로 싫어할수록 감기에 걸릴 확률이 높았고 병원에 가는 빈도가 높았다고 합니다. 타인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흔히 불안, 우울, 좌절, 소외, 갈등, 긴장 등을 경험하지만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는 사람은 심리적으로 성숙하고 건강한 정신 건강을 가지고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현실적으로 정확하고 올바르게 이해하고(자기이해) 있는 그대로의 자신, 즉 자신의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까지도 용납하고 수용하며(자기수용)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남에게 개방할 수 있는 태도와 능력(자기노출)을 갖는 다고 합니다.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는 사람이 직업적으로도 성공한다고 합니다. 직장에서 효과적으로 자신이 맡은 업무를 수행하고 직업적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세 가지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 기술이란 기능적 기술(technical skill), 개념적 기술(conceptual skill) 그리고 인간관계기술이라는 것입니다.
기능적 기술이란 자기가 맡은 전문분야의 업무를 말합니다. 개념적 기술이란 거시적으로 조직 전체의 목표달성과 생산성 향상을 꾀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합니다. 인간관계 기술이란 문자 그대로 일보다는 직장의 다른 동료, 상사, 부하들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관계 기술이 직업적 성공을 거두는데 85% 정도이고, 기술적인 지식은 15% 정도라고 밝혀지고 있답니다.
직장에서 해고된 대부분의 사람들 중 66% 정도는 대인관계의 실패 때문에 해고되었던 것이고, 단지 34% 정도가 일과 관련된 기술이라든가 지식부족 등의 원인으로 해고된답니다. 인간관계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참 만남의 희소성입니다. 사람은 평생을 살면서 온갖 종류의 인간관계를 경험하지만 그러한 관계상황 속에서 진정한 참 만남의 인간관계를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살벌합니까 서로 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를 고독한 전사로 만듭니다. 만인대 만인의 투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얼마신 보도를 보니까 보험을 타기 위해 어머니와 누이를 죽였답니다. 아내와 남편을 죽입니다. 직장에서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중상모략을 합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섬김의 주도권이 아니라 경영의 주도권을 갖기 위해 투쟁합니다. 왜 이런 인간관계가 이루어집니까
학자들은 몇가지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현대사회는 조직화되고 거대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거대한 조직사회 속에서 개인의 역할은 점점 더 왜소해지고 따라서 개인의 존재가치와 존재의미는 점점 미약해져가고 있습니다. 개인은 거대한 조직사회 속에 파묻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기계의 부속품처럼 갈아 끼우는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둘째, 현대사회는 효율성과 신속성을 강조하는 경쟁사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실질적인 또는 잠재적인 경쟁대상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애정과 정성을 기울일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빨리 성립되면서 또 빨리 붕괴되고 있지만 전혀 아쉬움이 없습니다.
셋째, 현대사회는 다원화된 사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관, 사회정치적 신념, 생활양식, 기호, 취미 등이 다양하다 보니 사람 간의 공통분모는 감소하고 대립되는 갈등의 요소가 증가하다는 것입니다.
넷째,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현대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물질적 가치가 강조되고 따라서 정신적 가치가 경시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물질적 가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로는 현대사회는 전자통신기술로 인한 연결망이 발전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전자통신수단은 사람 간 접촉의 양을 증가시켰지만 접촉의 질을 피상적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시대만 인간관계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 기록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사는 어느 곳에서나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인간관계는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보십시오. 유다가 예수님을 인신 매매 했습니다. 그보다 오래 전인 다윗의 아들을 보십시오.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를 죽이려고 합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시기심으로 자기 사위를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시대보다 더 전인 요셉의 형제들을 보십시오. 자신의 동생을 팔았습니다.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바울과 바나바를 보십시오. 동역자이지만 마가 문제로 다투고 갈라섰습니다. 바울 사도와 고린도 교회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여 1년 반쯤 섬겼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분쟁합니다. 서로 바울파, 아볼로 파, 베드로 파, 예수파라고 싸우는 것입니다. 계모와 불륜을 행하는 음행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서로 교인끼리 싸우고 법정에 고소하는 것입니다. 교인 가운데 매춘부와 함께 하는 성범죄가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시는 바울 당시에는 인구 60만을 헤아리는 대도시였다고 합니다. 상업의 도시로 번창했으나 반면에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극히 암담하고 무질서하였답니다. 이들은 다신교를 숭배했고(행 17:16-22) 그들의 생활은 음란했다고 합니다. 교인들이 세상을 닮아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마음에 맞지 않는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교인들 가운데는 바울의 사도권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목회자로 인정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엉망으로 살면서 바울을 비난합니다. 자신들은 법정 고소까지 하면서 바울이 방문하기로 하고 사정이 있어 오지 못하니까 일관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이중 인격자라는 말입니다. 욕심을 부리고 있다고 합니다. 돈 욕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글은 잘쓰는데 말이 서툴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설교를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인 바울은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이럴 때 바울은 그들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인간관계를 감사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하는 감사는 어떤 감사입니까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감사입니다.
인간의 조건을 보고 감사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그들이 바울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고 감사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타인이 내게 대하는 태도를 보고 감사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시는 일을 보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부족한 그들이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여호와 하나님 백성 삼아준 그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감사입니다. 은혜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주신 것입니다. 비록 나를 비난하고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은혜로 여호와 하나님 백성 삼아 주었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인간 관계의 기본 요소 네 가지는 “자기이해, 타인이해, 의사소통, 자기 개방”이라고 말합니다. 건강한 인간관계, 창조적인 인간관계가 되려면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객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타인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과 타인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인간관계의 유형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생산적 인간관계는 자기도 긍정하고 타인긍정의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나도 옳고 너도 옳다‘의 입장을 갖고 인간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나도 천국 갈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고 너도 영원한 천국에서 만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같은 아버지를 섬기는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잘 나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부족하지만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라는 것입니까 2절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별된 성도라는 것입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그들도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공격적 인간관계(자기긍정, 타인부정의 투사적 태도)는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라고 합니다. 이런 관계를 가지면 타인을 매우 불신하고 강한 의혹을 품고 있으며 타인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데 시간을 많이 소비합니다. 투사적 입장을 가지고 자신의 실수를 남에게 전가시키고 자신은 희생이나 박해를 당했다는 기분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자신은 공격적인 태도와 우월감, 자만심 속에서 살면서 타인은 부정합니다.
허무적 인간관계 (자기부정, 타인긍정의 도피주의적 태도)는 ‘나는 틀렸고 너는 옳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열등감, 죄의식, 무기력, 굴복, 도피, 번민 속에 사는 우울질의 사람이 됩니다. 늘 타인에게 의존하고 항상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합니다.
파괴적 인간관계(자기부정, 타인부정의자기비하의 태도)는 ‘나도 틀렸고 너도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은 무가치하고 좋은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이고 희망이 없는 삶을 살며, 좌절이 심하고 공격적이며 파괴적인 행동을 합니다. 바울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까 부족하지만 자신도 긍정하고 고린도 교회 성도도 긍정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은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고 고린도 교회 교인은 그리스도의 성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보며 부족하다고 원망하고 불평하기 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서로를 향하여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족한 고린도 교인들이지만 바울은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이는”이라고 말씀합니다. 감사하는 이유를 말씀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언변과 지식에 풍족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담대히 말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예수님께서 진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하게 되어, 은사를 부족함없이 받아 재림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부정적인 면을 확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의 긍정적인 면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부어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은혜를 보지 못하고 인간적인 기준으로 늘 성도를 비난하고 성도와 감사의 인간관계를 가지고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 완전한 교회 완전한 성도, 완전한 교회가 없는가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완전한 교회 완전한 성도는 없습니다.
스펄전 목사님께 어떤 날 어느 젊은이가 찾아 와 요청했답니다. "목사님 저는 교회 생활에 늘 시험을 받고 늘 지쳐 있는데 목사님 좀 문제없는 완전한 교회 하나 소개해 주세요. " 그 때 스펄전 목사님은 청년을 향해서 빙그레 웃으면서 "자네가 혹시 그런 교회를 찾으면 나에게 꼭 알려주게 나도 그 교회 가서 그 교회 교인이 되고싶네 그러나 자네는 말이야 그런 교회를 찾거든 자네만은 절대로 그 교회에 속하지 말게"라고 했답니다. 청년이 "왜요"라고 반문하자 "자네가 끼면 그 날부터 그 교회의 완전은 깨질 테니까 말이야 바로 자네 때문에 말이야"
완전한 교회를 찾는 것은 허구적 이상주의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 사는 동안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를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감사는 어떤 감사입니까 4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문제를 감사로 푸는 감사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페리(위하여)라는 말은 “관하여, 때문에”라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인들 때문에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있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 중에는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중인격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만 좋아한다고 비난하고 설교를 못한다고 비난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대인관계를 가질 때 상대가 비난을 하면 어떻게 해결합니까 힘이 있는 자들은 힘으로 제압을 합니다. 힘이 없는 자들은 관계를 청산하고 도피해 버립니다.
사람이 대인관계를 갖는 욕구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심리학자 Schultz의 대인적 욕구 이론를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가 소속(inclusion)의 욕구입니다. 타인들이 자신과 함께 어울려주고 좋아해주기를 바라면서 자신도 남과 어울리기를 바라는 욕구입니다. 그런데 서로 욕구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욕구의 강도에 따라 비사교형(undersocial) 행동, 과잉 사교형(oversocial) 행동, 사교형(social) 행동이 나옵니다.
두 번째 대인욕구는 지배(control)의 욕구입니다. 이는 힘이나 권력, 그리고 권위를 행사하고자 하는 욕구와 함께 남으로부터 지배받고자 하는 욕구를 말합니다. 역시 지배의 욕구도 강도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되는데 무지배형(abdicrat), 독재형(autocrat), 민주형(democrat)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욕구는 애정(affection)의 욕구입니다. 타인을 좋아하고자 하는 욕구와 타인이 자신을 좋아해주기를 바라는 욕구를 말합니다. 이 욕구도 그 강도에 따라서 무심형(underpersonal), 과잉 관심형(overpersonal), 관심형(personal)으로 나뉘어 집니다.
의미있는 이론입니다. 사람은 서로 소속되고 싶어, 서로 지배하고 지배당하고 싶어, 서로 애정을 받고 주고 싶어 관계를 가집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힘이 있으면 이렇게 비난 받으면 관계를 끊어 버리거나 힘으로 지배해 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영적 힘이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도피하지도 힘으로 제압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요 너희를 인하여서입니다. 개역성경 번역으로 이해하면 너희를 위해서입니다.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성숙한 신앙인으로 세워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고린도 교회 교인과의 교제가 소속 욕구를 위해, 지배 욕구를 위해, 애정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맺어진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고린도 교인들이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바울은 어떻게 고린도 교인들과 인간관계가 맺어졌다고 해석하고 있습니까
9절을 읽어 보세요. 바울도 주님과 교제하고 고린도 교인들도 주님과 교제하는데 누가 이 교제를 있게 만들었다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미쁘시다는 것입니다.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그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맺어준 관계입니다. 애정 욕구 때문에, 소속 욕구 때문에 지배 욕구 때문에 맺은 관계가 아닙니다. 좀더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설명하면 환자가 있기 때문에 의사는 사는 것입니다. 죄인이 있기 때문에 판사, 검사는 사는 것입니다. 연약한 그들이 있기 때문에 바울이 존재할 필요가 있는 것이고 연약한 그들이 점점 성숙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사람들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감사로 해석하며 서로 도와야 합니다. 우리의 관계는 서로에게 위로해도로 맺어 준 것입니다. 서로를 사랑하도록 맺어준 것입니다. 서로 세워주도록 맺어 준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서로의 매력을 느끼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더 이상 관계를 하지 않을 수도 있고(면식단계) 피상적인 수준에서 머물 수도 있고(접촉의 단계) 더 깊은 관계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상호의존의 단계). 우리 신앙인은 그냥 면식단계, 접촉 단계에서 끝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끝까지 세워주고 도와 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한 번 불러 여호와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한 우리를 우리 주님은 끝까지 버리지 않습니다. 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근본적으로 우리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끝까지 견고케 세워 주십니다.
문제를 감사로 해석해야 합니다. 감사하면 미래가 달라집니다. 감사하면 감사의 열매가 맺히고 불평하면 불평의 열매가 맺힙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 앞에 5병 2어 밖에 없었지만 오히려 감사하여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누이가 늦게 왔다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서 감사하였습니다. 고라신과 벳세다야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감사합니다. 다니엘은 중상 모략으로 죽음 앞에 서 있었습니다. 예배드리면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입니다.
모든 명예와 부와 권력을 하루아침에 빼앗기도 목숨까지 위태롭습니다. 그러나 올무를 놓은 그들을 원망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결과는 감사한 대로 되었습니다. 감사로 모든 문제를 푼 것입니다.
자동차의 왕 헨리 포드에 대한 이야기 중에 이런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미국 조지아주에 말터벨이라는 여 선생님이 있었답니다. 시골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너무 가난하여 피아노가 없어 당시 미국 최고의 부자였던 자동차의 왕 헨리 포드에게 1000불만 보내달라고 간곡한 편지를 보냈답니다. 이 편지를 받고 포드는 마음이 상했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헨리 포드에게 돈을 요구해 받아갔지만 대부분은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것으로 끝났기 때문이었답니다.
이 선생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절할 수 없어 10센트를 보내주게 했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것을 감사하게 받았답니다. 10센트 만큼 땅콩을 사서 학교 운동장 한 구석에다 심었답니다. 수확을 거두어 팔아 그 돈의 일부를 헨리 포드에게 감사와 함께 보내었답니다. 또 다음 해에도 더 많은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두었답니다. 그 결과 5년만에 피아노를 살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너무 감사하여 헨리 포드에게 다시 감사의 편지를 보내었답니다. 포드는 여 선생님의 편지를 받고 너무 기뻐서 선생님이 요구한 천불의 10배나 되는 만불을 보내면서 거기에 "당신이야말로 내가 미국에서 만난 유일한 사람이오. 나는 당신에게 돈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보내오, 나는 당신을 만나므로 감동을 받았소. "라는 편지를 동봉했답니다.
감사는 경쟁력이 있습니다. 돈도 별로 들지 않습니다. 감사한다고 세금 내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감사하는 사람 싫어할 사람 없고 감사하는 얼굴에 침 뱉을 사람 없습니다. 양이 양을 낳고 소가 소를 낳듯이 불평은 불평을 낳고 원망을 원망을 낳지만 감사는 감사를 낳습니다. 감사한 만큼 삶은 풍요롭고 여유 있으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감사가 매마른 시대입니다. 감사 불감증에 걸린 시대입니다. 감사 결핍증에 걸린 시대입니다. 이 정도 사는 것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과거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국 사람이 절간의 쥐처럼 가난하다고 했습니다. 봉건 이씨 왕조, 식민지 생활, 해방하자마자 민족상잔의 비극을 격은 나라입니다. 1900년에 한국에 교회가 840개 있었는데 지금은 교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
리스토 텔레스가 "인간의 마음 중에 가장 쉽게 늙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곧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지적했듯이 감사를 의도적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쉽게 입술에서 잊혀지게 됩니다. 문제를 의도덕으로 감사로 해석해야 합니다. 감사하면 세상이 좋아지고 이웃 복을 받고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바울은 어떤 감사를 합니까
셋째로 상황의 변화를 초월하여 항상 감사하는 감사입니다.
사람의 관계는 늘 변화합니다. 어제 좋은 관계가 오늘 지속된다고 보장할 수 없고 오늘의 좋은 관계가 2년 후에도 유지된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을 때는 감사했다가 나빠지면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좋은 관계가 아닌데도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라고 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꼭지켜야할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란 잘 될 때나, 잘 못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죄입니다. 감사를 못하면 우리의 마음이 허망해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우둔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롬1:21,22) 감사하지 않으면 자신이 손해입니다. 늘 불평하고 원망하면 사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잘 되지 않습니다. 주어진 조건에 감사하지 못하고 사기 치고 다른 사람 이용하고 하는 사람들 결국 행복하게 살지 못합니다. 감사는 우리 삶에 능력을 가져오게 합니다.
반면에 감사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시 50:23) 기쁘시게 하고 우리가 풍요롭게 산다고 말씀합니다.
(눅17:19) 감사한 만큼 삶은 풍요롭고 행복합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감사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으면서 쓴 편지를 옥중서신이라 합니다. 그 옥중서신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감옥에 있으면서 쓴 모든 편지에 감사함이 있습니다. (엡1:16,5:4,5:20; 빌1:3,4:6; 몬1:4)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감사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에베소서에서(1:16)는 "너희의 믿음과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빌립보서에서는(1:3)"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
빌레몬서에서는 (1:4-5)"주예수와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골로새서에서는 (1:3-5) 골로새 교인들의 믿음, 사랑 소망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자신이 섬기고 있는 교인들을 보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문제가 있고 연약하고 미성숙했다고 해도 섬길 수 있는 사람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속았다고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아직은 미숙하지만 그들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있을 것을 보면서, 성도의 신앙이 점점 성숙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감사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교인들의 부정적인 면을 보면서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을 보면서 감사한 것입니다. 해석의 감사입니다. 모든 것을 감사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띵크(Think)', '땡크(Thank)'라는 말은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생각의 문제입니다. 각도의 문제입니다. 어느 쪽에서 바라보냐는 것입니다. 똑같이 눈이 작지만 그것을 감사로 해석하는 사람에게는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있지만 눈이 작은 것을 불평으로 해석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불평의 조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눈이 작은 것이 바람부는 날 먼지 적게 들어오고, 늙으면 눈이 큰 사람보다 적게 쳐지고 얼마든지 감사의 조건을 찾으면 많이 있습니다. 어디에서든지 감사를 찾는 사람은 감사가 보이지만 불평을 찾는 사람에게 불평만 보입니다.
성경에서 감사를 가장 많이 고백한 사람은 다윗과 사도 바울입니다. 다윗은 수많은 환난과 역경 속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를 찾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가난과, 굶주림과, 고통이 항상 떠나지 않았지만 어떤 조건에서도 감사를 찾았고 가슴으로부터 샘물처럼 흘러나오는 감사로 일평생 살았습니다. 상대적 감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감사는 수명이 짧습니다. 모든 것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하는 절대적 감사는 시간과 공간은 넓혀 범사에 항상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면서 감사의 조건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 아내, 자식, 부모 비록 내 마음에 맞지 않을 지라도 감사의 조건을 찾아보십시오. 얼마나 감사한 일이 많이 있습니까 아직은 미숙하지만 그래도 교회에 나와 신앙 생활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일본의 테레사수녀"로 불리는 다마키 여인은 평생을 한센씨병 환자들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요양원을 만들고 고름이 나는 환자들의 피부를 치료하다가 그만 자신도 한센씨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한센씨병에 걸린 것을 알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제 육의 눈이 가려지고 영의 눈이 열려 감사하다. 눈썹이 빠지면서 눈썹의 고마움을 알았다. 먼지가 자꾸 눈에 들어가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은 미처 몰랐다. 여호와 하나님은 내게 병을 주어 여러가지 감사의 마음을 알게 하셨으니 얼마나 고마운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1946년 6월 공산주의자들은 일제하에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 주 영진 전도사를 잡아 갔을 때 주 목사님의 부인 오정모 여사 "오!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목사님을 제물로 받으시더니 또 그 아들까지 받으시려 합니까 한없는 영광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린 종에게 담대한 마음을 주시사 시험에 들지 않게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다니엘의 감사, 요나의 감사, 하박국의 감사가 바로 그런 감사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감사의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를 어렵게 하는 자가 나를 성공시키는 자라고 감사함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때문에 더욱 성군으로 존경을 받습니다. 요셉은 형들 때문에 결국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자신을 괴롭히는 브닌나 때문에 기도의 어머니가 되었고 사무엘을 나아 민족을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추수 감사절입니다.
모든 인간관계를 감사로 해석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금의 상태나 조건을 보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상대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하여야 하겠습니다. 문제를 감사로 푸는 감사생활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상황의 변화를 초월한 항상 감사하는 감사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추수감사
눅17:11-19
어거스틴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이 말씀에 한 마디를 더하라고 한다면 나는 감사를 더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 경험하기 14번째 시간 감사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최고의 제물이기도 하고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하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문학가 “오스카 와일드”의 우화적 소설지옥의 단편이란 글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과거에 은혜를 입혀준 몇 종류의 사람을 그 후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우화적으로 엮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으로 한 주정꾼을 만납니다. 그는 거의 폐인과 같이 된 젊은이였습니다. 예수께서 “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주정꾼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이 걷지 못하던 나를 일으켜 걷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걸어 다닌들 무엇을 먹고살라는 말입니까. 그동안 직업을 구해 보았으나 만족한 직업 하나도 없었습니다. ” 그 후 세상을 비관하다 이 꼴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 예수는 한 여자가 창녀가 되어 남자들 사이에서 희롱받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예수는 여자에게 말합니다. “어째서 이런 생활로 되돌아갔습니까” 창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창녀에서 건져 새 사람을 만들어준 것 같았으나, 창녀에서 발을 씻은들 무슨 행복이 있단 말입니까. 나는 더욱 고독해서 살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창녀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 세상사람 누구도 내 진실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 후 예수는 한 불량자가 정신없이 이웃과 싸움질을 하고 있는 장면에 부딪힙니다. 예수는 그에게 묻습니다. “여보게 청년, 어째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불량자는 예수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당신이 눈을 뜨게 해 준 옛 소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무엇을 보라는 겁니까 보이는 것이 모두 신경을 돋구고 귀찮고 화나는 세상입니다. 결국 나는 화풀이도 하고, 마구 치고 받고 하는 생활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 나는 차라리 세상을 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죽었다 살아나는 체험을 해도 감사를 잃어버리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의 설교 가운데 저주받은 심령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저주하실 때는 질병과 고통, 실패와 아픔으로 저주하지 아니하시고 감사할 줄 모르는 거친 심령으로 저주한다”고 했습니다.
말세가 되면 사람들의 심령이 무디어 져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할 줄도 모르고 영광도 돌리지 못하고 허망하고 미련한 것에 마음이 어두워진다고 로마서 1장 21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북한과 옛 공산주의 국가 몇 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한 분의 보고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공산주의 체제 하에 있던 나라를 방문해 보니까 한결같이 가난하게 살뿐만 아니고 저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없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결같이 거짓말을 잘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없는 말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사랑합니다”라는 말이 없고,
두번째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없다고 합니다. 투쟁으로 얻은 체제이니 만큼 모를 심어도 벼를 베더라도 모심기 투쟁! 벼베기 작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 나병 저주
오늘 본문에 보면 감사해서 큰 복을 누린 한사람과 감사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비된 복을 잃어버린 아홉 명의 나환자들의 얘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나병환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옛날 번역에 문둥병자라고 번역했습니다만 그들을 천시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저희 교단에서는 “한센병” 또는 “한센씨 병”이라고 통일하기로 했습니다.
한센이라고 하는 사람은 노르웨이 의학자였는데 1879년 나병의 병원균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분의 이름을 따서 한센병이라 그렇게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분은 나병요양소에 의사로 재직하면서 나병에 대해 깊이 연구하다가 1879년 나병은 유전병이 아니라 전염병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병원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언젠가 음성 나환자촌 부흥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부흥회 기간 중 만나는 사람마다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기가막힌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토막! 점심식사를 대접해 주었던 한 집사님의 사연입니다.
집사님은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딸아이 하나를 곱게 곱게 키웠답니다. 이 아이가 학창시절엔 자기가 나환자촌에 산다는 사실을 숨겨야 했기에 친구들에게 부모를 얘기할 수도, 자기 집을 소개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 동네로 들어오는 버스를 탈 때도 전봇대 뒤에 숨었다가 아무도 없으면 얼굴을 가리고 쏜살같이 버스에 올라탔곤 했습니다. 이런 저런 갈등속에서도 딸은 대학까지 졸업하고 드디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한센병을 앓았다는 사실을 신랑측에서 알게되면 파혼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됨을 속일 수 밖에 없었고 온 희망을 걸고 키워온 사랑하는 딸이 결혼예식을 올리는 예식장에서도 다른 사람의 손을 붙잡고 들어가는 딸아이의 모습을 식장 구석진 자리에서 썬글라스를 쓴채 눈물을 삼키며 바라보아야만 했더랍니다.
물론 오늘날은 한센병을 고치는 약들이 나와 이들은 모두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었고 의사로부터 더 이상 전염되지 않는다는 완치 선언을 받은 음성나환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식사시간마다 그들의 어려움과 아픔을 간증으로 들으며 밥 대신 눈물을 삼키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나환자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눈들이 이럴진데 오늘 본문 성경이 기록되었던 당시의 상황이야 오죽했겠습니까 당시 나병은 천벌을 받은 병으로 취급했고 부정한 병이라 하여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없음은 물론 사람들과 100m 50m 가까이 갈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혹시 나환자들 곁으로 지나가려고 하면 저들은 윗 입술에 손을 갖다 대고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 소리치며 사람들이 다 지날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만 했습니다. 온 몸이 썩어 고약한 냄새가 나고 눈이 골아 앞이 보이지 않고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지고 코가 떨어지는 고통도 고통이거니와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사람들의 냉대와 가족들의 멸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어느 한 구석진 마을에 나환자 열 명이 함께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처참한 하루 하루를 지내던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본문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12절에 “멀리 서서” 그래서 목소리 높여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멀리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쳤습니다. 이 외마디 외침 속에는 이들의 한 많은 지난 세월, 아픔이 담겨있었고 살고자 하는 강렬한 소망과 기도가 담겨져 있었던 것이지요. 이때 예수께서 보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한센씨 병을 진단하여 동네에서 쫓아내기도 하고 또 완치된 것을 확인하여 가족과 함께 살아도 좋다고 하는 증명서를 발급해 주는 사람이 제사장이었습니다. 레위기 14장 3절에 “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나병 환부가 나았으면”이라고 기록합니다. 나은 상태에서 제사장에게 찾아가는 것입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까지는 한 두 가지 커다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① “가서 보이라”는 말씀을 하셨을 뿐 별다른 조처나 보장이 없었습니다. 가서 보이라는 이 말씀은 네 병을 낫게 해 주겠다는 약속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고름이 나고 진물이 나는 자신의 몸을 뻔히 들여다 보면서 나았다는 믿음을 가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환자들은 순종하여 갔습니다. 순종하여 갔던 이 믿음이 기적을 가져오게 된 것이지요.
② 한걸음 더 나아가 믿음으로 간다고 길이 훤히 열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두 번째 난점이 있었습니다. 한 둘도 아니고 나환자들이 여나무 명씩 떼를 지어 예루살렘 성 한복판에 살고 있는 제사장을 찾아가면 필시 사람들은 길을 막고 돌을 던질게 뻔한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의 순종은 죽음을 무릅쓴 순종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적이 있었습니다. 죽음을 무릅쓴 순종과 믿음! 여기서부터 능력이 발휘되고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4절 하반절입니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미처 예루살렘에 도착하기도 전에 믿음으로 가던 도중에 한센병이 나았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를 부를 때도 여전히 나환자였습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그 시간에도 여전히 온몸은 고름으로 가득차 있는 한센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고 순종하여 길을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할렐루야!
3. 기적보다 믿음이 먼저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왜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현대는 기적의 시대가 아니란 말입니까 기적의 시대는 끝난 것입니까 기적은 지나간 것입니까
노만 빈센트 필 박사의 말처럼 기적의 시대가 지나 간 것이 아니고 믿음의 시대가 지나 간 것입니다. 기적을 믿을 만한 믿음이 우리 가운데 없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기적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계산하고 따지는 이성은 발달했으나 순종은 퇴색하고 말았기 때문에 기적이 퇴화하고 만 것이지요. 가라할 때 가면 기적을 볼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이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분이 말씀하셨다. 아멘! 하고 믿으면 이 시간에도 기적이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의 초점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의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적을 관리하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축복보다 중요한 것은 받은 복을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4.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들
한센병이 나았다는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로서는 굉장하고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구원받은 것이요 멸망의 자리에서 살아나는 일이었습니다. 저주에서 놓임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①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사람.
② 제갈 길 바빠 감사를 잊어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 주목할 만한 사실은 감사를 드린 한 사람은 이방인이었고 한결같이 감사를 잊어버리고 제 갈길 가 버린 사람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어느 면으로 보나 감사할 만한 말씀과 율법과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던 사람이 유대인이었고 감사를 잊어 버려야 된다고 하면 말씀과 율법을 들어보지 못한 이방인이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묘하게도 이 이방인은 돌아와 감사를 했습니다. 부자집 아들이 밥투정한다는 옛말이 거짓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은혜를 많이 누리는 사람들, 그 누구보다 더 부유한 환경속에서 여유있는 삶의 분위기를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이 감사할 것 같은데 그러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불평원망이 많은 사람을 보면 누구보다 여호와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은혜를 입고 사랑받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한 것 밖에 없지 않습니까 오늘이 구태여 추수감사주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가 누리고 있는 여러 가지 분복들을 헤아려 보면 진실하게 겸손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 보면 감사한 것 밖에 없지요.
저는 결혼하고 처음 대전에서 공군장교생활을 했습니다. 지금은 시집간 딸을 처음 낳았을 때가 이 무렵쯤 되었을까요 보너스 타고 귤 한 박스를 사서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 귤 한 박스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 너무나도 배가 고파서 사과 하나를 따먹으러 들어갔다 주인한테 얼마나 얻어터졌는지요. 명절날이 되면 할머니가 사과 껍질을 벗기는데 그것 길게 뜯어먹으려고, 할머니가 깎는 사과껍질을 손에 붙들고 쩔쩔맸던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쌀밥 배부르게 먹을 수 있던 시절이 몇 년전 시절입니다. 어릴 때 꿈에도 소원이 쌀밥 배부르게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귤 한 박스를 사 들고 집에 들어간다 가족이 앉아서 이 귤을 까먹는다 배가 부르게 귤을 먹는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소원이 라디오 집에 두고, 라디오 만한 밧데리 고무줄로 묶어서 라디오 듣고 싶을 때 라디오 들어 보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얼마나 엄청난 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분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불평하고 원망하고 짜증 한숨이 그렇게 많은지요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며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됩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은혜를 알만한 아홉은 어디 갔느냐 마땅히 돌아와 감사해야 될 유대인들이 누구냐 아홉을 찾으셨지요. 주님 제가 왔습니다. 주님 앞에 돌아오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작은 은혜는 시시해서 접어두었고 큰 은혜는 도무지 갚을 수가 없으니 팽개쳐 두었더란 말입니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귀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야 합니다.
나병환자 열 명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꼭 같은 병에 걸려 있었고 꼭 같이 비참한 상황에 처하여 함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에 관해 들어 알고 있었고, 예수님에 의한 병 고침의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이 있는 곳 근처를 지나가심을 알고는 함께 큰 목소리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라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며 외쳤던 것입니다. 그들의 병을 고쳐주시겠다는 약속도 없이 그저 대뜸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을 뿐이지만 이에 대해 의아해 하거나 “아니 선생님, 먼저 저희 몸을 깨끗케 해주셔야 저희가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여도 보일 것 아닙니까” 라고 반문하지도 않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아홉 사람의 유대인과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면 한 사마리아사람이 아홉 유대인과 달랐던 것은 무엇입니까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발견하자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가던 길을 돌아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본문 첫머리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라고 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마을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계셨는데 쉽게 다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그 사마리아인은 제사장에게로 가던 길을 많이 가지 않았고, 그의 몸이 깨끗해졌음을 발견하자 지체 없이 돌아서 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같이 가던 동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서만 슬며시 돌아서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모진 질병과 고초를 함께 나누던 다른 동료 아홉에게 적어도 한 번 쯤은 “여보게들, 우리 몸이 정말 깨끗해지지 않았는가! 나는 예수께 가서 이 사실을 직접 보여드리고 감사해야 되겠네. 같이 가지 않겠나” 하고 권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 아홉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같은 본문을 가지고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라는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실컷 설교를 해 놓고 아홉이 어디 있느냐 나 자신에게 물어봤더니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아홉 명이 어디 갔을까 왜 감사하지 못했을까 상상을 한번 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사람, 진짜로 나았는지 확인 좀 해 봐야겠다. 낫기는 나은 것 같은데 재발되면 어떡하지. 이것 저것 복잡하게 따지고 생각하고 받은 은혜를 의심하다가 주님 앞에 돌아오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받은 은혜, 받았다고 그러면 받은 거지 뭐가 그렇게 의심이 많고 복잡한 생각이 많습니까 생각이 복잡하면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못하고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더라는 것이지요.
두 번째 사람, 가기는 간다. 그러나 지금은 갈 수 없지 않겠느냐. 몸은 아직 목욕도 못했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어야 될 것이고 가면 빈손으로 갈 수 있겠나 그래서 나중에 천천히 출세한 다음에, 돈 번 다음에, 그런 다음에 깨끗이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 내가 진짜 나병이었을까 아마 간단한 부스럼 정도인데 괜히 나병이라고 진단을 한 걸게야. 나을 때가 되었으니 나았겠지. 그 말 한마디 했다고 났겠어! 그래서 이래 저래 의심하는 사람, 여호와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없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 사람, 예수님이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 그러셨지. 그리고 말씀을 묘하게 자기 나름대로 해석합니다. 이 얘기는 틀림없이 제사장에게 가서 내 몸을 보이고 신분을 보장받으라는 말일 게야. 출세 좀 하고 신분 보장받고 그럴 듯한 폼을 잡고 거드름을 피우며 내가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예수님! 그때 예수님 만나 깨끗함을 받은 누구입니다. 제가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제가 조그만한 중소기업 벤처기업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명함 척 내밀며 좀 거드름을 피우면서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예요. 그러다가 갈 기회를 잃어 버렸다 그렇게 생각이 되어졌어요.
다섯 번째 사람, 예수님께서 해준 일이 뭐 있어.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 그거야 뭐 아무나 할 수 있는 얘기지. 예수님께 찾아가 감사할 일이 뭐 있겠어. 그래서 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시쳇말로 말하면 안수를 해줬나 안찰을 해줬나 쓰다듬기를 해줬나 약을 지어줬나 한번 끌어안아 주길 했나 예수님 앞에 감사할 것 없지. 이또한 예수님 앞에 돌아가지 못할 사람입니다.
여섯 번째 사람, 못된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요. 나병을 앓고 있을 때 멸시하고 천대하던 사람, 그 사람을 늘 묵상하고 낫기만 해봐라 원수를 갚아야지! 그러다가 깨끗이 나으니까 복수하러 달려 간 사람이 있어요.
일곱 번째, 몸은 깨끗하게 나았다. 야~ 이게 얼마 만이냐 한잔하자. 술집에 가서 댄스 한바탕 추고 땀을 흘린 다음에 캬~ 하다가 못간 사람. 한잔 하다가 그만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가 못간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덟 번째 사람, 얼마나 보고 싶었던 가족입니까 얼마나 만나고 싶었던 친구입니까 처가 집에 달려가서는 장인 어른 내 몸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친구들 만나 여기 갔다가 저기 갔다가, 큰 집에 갔다가 작은 집에 갔다가 외삼촌 집에 갔다가 그러다가 그만 감사의 기회를 잊어버린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홉 번째 사람,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달려갔더니 마누라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네. 그래서 도망간 마누라 찾아 평생을 보내다가 예수님 앞에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 같다는 추측을 한번 해 보았습니다. 주경가가 그렇게 말한 것도 아니고 또 어떤 책에 쓰여진 것도 아닌데 한번 짐작을 해본 거예요. 이쯤 되면 감사할 여유가 없는 게지요. 축복과 은혜를 저주로 바꾼 사람입니다.
V. 은혜의
결론
은 감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다가 은혜를 잊어버릴 수 있어요. 많고 많은 복을 누리고 살아가면서도 다 감사하며 살아갈 수 없는게 타락한 인간이지요. 그러나 절대로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잊지 말아야 될 것 있습니다.
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날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날 살리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독생자를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 분의 옆구리가 터진 다음에야 그 보혈의 은총이 내게 임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기억하고 사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피 위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던 것입니다. 섬기는 교회에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② 부모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자식을 갖는 것보다는 독사에게 물리는 것이 낫다는 리어왕의 독백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십시오. 부모를 높이십시오.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하늘을 나는 기러기 새끼 한 마리도 어버이보다는 앞질러 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시꺼멓게 못생긴 까마귀 새끼 한 마리도 그 어버이 보다 높은 가지에 앉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배은 망덕한 자식은 까마귀에게 그 눈이 쪼이리라는 잠언의 기록이 있습니다.
③ 날 사랑했던 이웃이나 벗들을 배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왕정 야사를 보면 물고 물리는 배신과 망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원수가 됩니다. 이건 몰이 잡배들이나 하는 짓이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할 짓이 못되는 겁니다. 여러분 정치하는 사람들 보십시오. 여기 붙었다 저기 떨어졌다 이합집산과 야합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 그래서 이 나라 이 풍토 젊은이들의 가치관이 이 모양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 앞에 신의와 의리를 지킬 줄 알아야 인간이요 신앙인입니다.
세상이 복잡하고 복잡한 것 같지만, 직장 생활에 상처가 많고 가정생활에 어려움이 많은 것 같지만 “여보 고마워” “엄마 고마워요”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말 한 마디면 모든 게 끝이 납니다. “여보 감사해요” 이 말 한 마디면 온갖 은혜를 갚을 수 있습니다. 잘못할 수 있습니다. 실수할 수 있습니다. 허물이 들통날 수 있습니다. 그때 “여보 미안해요. 용서해 주세요. ” 이 한 마디면 모든 게 끝납니다.
성경에 보면 배은망덕으로 인해서 완전히 실패한 인생을 살아간 한 인물이 나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의 제자로 신임을 받았고 재정을 쥐고 책임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달라지자 예수님을 은 삼십에 깨끗이 팔고 말았습니다. 자기 스승을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은 삼십냥 가운데 한 푼도 쓰지 못하고 목매달아 자살했습니다. 새끼줄이 터져서 언덕에 곤두박질해서 창자가 쏟아져 나와 죽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테가 쓴 신곡에 보면 지옥편에 지옥 중에서 가장 밑바닥에서 고생하는 인물이 바로 배은망덕한 사람들, 바로 가룟 유다 같은 사람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은혜를 받는 것 중요하지요 귀하지요. 그러나 더욱 귀한 것은 받은 은혜를 어떻게 간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 번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축복 그 이후! 이는 신앙인에게 대단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받은 축복은 감사가 따를 때 온전한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축복을 완성합니다. 감사는 은혜를 완성합니다. 감사는 축복의 매듭과도 같습니다. 매듭이 없는 새끼줄이 풀어지고 말 듯이 감사가 없는 축복은 그 축복을 지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일 동안만 본다면 이라는 헬렌 켈러의 글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유일한 소망 하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죽기 직전에 꼭 3일 동안만 눈을 뜨고 보는 것이다. ”
만약 내가 눈을 뜨고 볼 수 있다면 나는 나의 눈을 뜨는 그 첫 순간 나를 이만큼 가르쳐 주고 교육을 시켜준 나의 선생님 설리반을 찾아가겠다. 지금까지 그의 특징과 얼굴 모습을 내 손끝으로 만져서 알던 그의 인자한 얼굴 그리고 아리따운 몸매 등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보면서 그의 모습을 나의 마음속 깊이 간직해 두겠다.
다음엔 친구들을 찾아가고 그 다음엔 들로 산으로 산보를 가겠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사귀들, 들에 피는 예쁜 꽃들과 풀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석양에 빛나는 아름다운 노을을 보고 싶다.
다음날 이른 새벽에는 먼동이 트는 웅장한 장면, 아침에는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 오후에는 미술관 그리고 저녁에는 보석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하루를 지내고 마지막 날에는 일찍 큰 길가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들, 아침에는 오페라하우스, 오후엔 영화관에서 영화를 감상하고 싶다.
그러다 어느덧 저녁이 되면 나는 건물의 숲을 이루고 있는 도시 한복판으로 나와서 네온싸인이 반짝거리는 거리, 쇼윈도에 진열돼 있는 아름다운 상품들을 보면서 집에 돌아와 내가 눈을 감아야 할 마지막 순간에 나는 이 3일동안 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하여준 나의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기도를 드리고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볼 수만 있다고 한다면 한번이라도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그들이 그리워하는데. 여러분 보지 못합니까 걷지 못하는 사람은 네 발로 걸을 수만 있다면 나는 소원이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걷지 못합니까 배부르게 밥 먹어 보는게 소원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오늘도 배부르게 밥 먹을 수 있는 환경속에서 살아가는데, 잠잘 수 있고 일어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잃어버린 것 같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게 많은데 무엇이 그렇게 원망스럽고 불평이 많은지요. 왜 그렇게 감사하지 못하는지요.
V
I. 아홉을 찾습니다.
한 사람의 감사는 나머지 아홉 가지 감사할 수 있을 때 그 기적은 완성이 되어집니다. 아홉 사람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한 사람만 돌아와서 감사의 찬송을 할 때 예수님은 안타까이 말씀하십니다. 그 아홉 사람은 어디 있느냐!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열 가지 은혜를 받고서도 아홉을 잊어버리고 한 가지만 들고 나와 “감사합니다” 말할 때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불평하고 저것은 감사할 때에 어제는 감사했으나 오늘은 원망할 때에 부분적인 감사를 하고 살아갈 때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넋두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싶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내가 구원받은 백성이 분명하다고 하면, 천지를 창조하고 우주를 운행하시는 분이 우리 아버지이심을 고백하고 살아가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 내가 이해가 안될 때도 나는 무조건 감사하겠다. 작정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할 때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찾으실 때에 “감사하지 못했던 죄인이 여기 있습니다” 주님 앞에 돌아 올 때 여러분은 축복을 완성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8살 어린나이에 홀어머니 손에 맡겨진 버려진 아이와도 같았습니다. 길거리 불량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고 남들이 학교 갈 때 깡통 들고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맬 수도 있었겠지요. 남의 집 머슴살이로 평생을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힘이 되어줄 친척이나 가족도 없었습니다. 등록금을 내지 못할 때도 찾아가서 등록금 도와달라고 손을 벌릴 수 있는 친척이 없었습니다. 내 인생에 어려운 고비 고비마다 의논할 똑똑한 친척 이웃 하나 없었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 앞에 사랑하는 자식을 맡겨놓고 기도하는 어머니 한 분! 어려운 일이 있으나 좋은 일이 있으나, 새벽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기도하는 내 어머니! 그리고 금요일이 되면 언제나 금식기도 했던 내 어머니! 지금도 주일 아침이면 금식하며 하루 종일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는 내 어머니! 그것이 내가 가진 인생에 자산의 전부였던 것을...
인생의 어려운 고비마다 좋은 일이 있으나 어려운 일이 있으나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하는 것 밖에는 내가 가진 자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밥을 굶어 본 적이 없고 옷을 벗어본 적이 없고 공부하고 싶은데 못 해 본 적도 없고 남들 공부할 때 나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누구도 기댈 때가 없었고 누구도 의지할 때가 없어서 여호와 하나님 한분의 은혜로 이렇게 살았습니다. 생각만 하면 얼마나 감사한지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만 생각해 보면 가슴이 든든해지고 세상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여러분이 잘나서 그 자리에 온 것이 아닙니다. 똑똑해서 가진 것 아닙니다. 가질만해서 가진 것 아닙니다. 누릴만해서 누리고 있는 것 아닙니다.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기적 중에 기적 내가 구원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고난을 당해도 온갖 어려움이 있어도 온갖 아픔이 있어도 오늘 내 인생이 끝난다 할지라도 영원한 세상에서 눈을 뜰 것을 영생 얻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면류관 쓰고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갈 것을, 무엇이 그렇게 감사하지 못하겠습니까
감사는 축복 이외에 더 큰 축복을 가져다 줍니다. 예수께서 돌아와 엎드려 감사하는 이 사람에게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감사는 구원을 완성합니다. 감사는 축복을 완성합니다. 감사는 은혜를 완성합니다. 육신의 병고침을 감사함으로 영혼까지 구원을 받았습니다. 땅의 것을 감사함으로 천국까지 축복으로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감사를 몰랐던 아홉 나환자는 기적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기적 그 이후에 축복을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육신의 고통이 멈춰졌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커다란 불행입니까
왜 예수님께서 그 아홉을 찾는 것일까요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나환자들의 코 묻은 돈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 아홉명마저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 아홉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들이 깨닫지도 듣지도 보지도 누리지도 못했던 더 큰 신령한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 선생이시여, 나를 긍휼히 여겨 주소서! 부르짖을 수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소중한 믿음이지요. 그러나 그것 가지고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 매달려서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무서운 병이 나았습니다. 소중한 믿음이지요. 그러나 그것 가지고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 돌아와서 더 큰 은혜를 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그 은혜를 우리가 누릴 수 있습니까 주님 앞에 돌아와야 합니다. 받은 복 가지고 끌어안고 도망가면 안됩니다. 세상으로 흩어지기만 하면 안됩니다. 돌아와야 합니다. 입술이 주님 앞에 돌아와야 합니다. 손발이 주님 앞에 돌아와야 합니다. 그 몸들이 주님 앞에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받은 복이 주님 앞에 돌아올 때에 은혜가 감사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받은 복이 주님 앞에 돌아올 때에 더 큰 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더 신령한 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발아래 엎드려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고향이 어디셨습니까 그분은 하늘을 고향 삼아 사시던 분이십니다. 그러나 나사렛 마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했습니다. 천군천사들의 시중을 받던 분이십니다. 시중을 누리던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하늘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땅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능하게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습니다. 왜요 나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은혜 그 이후! 너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 네가 받아 누리는 복이 이 땅에 썩어질 것들만을 위하여 쓰여지지 말고 신령한 역사를 경험해야 하느니라. 구원의 역사를 경험해야 하느니라. 주님 앞에 온전히 돌아와야 하느니라. 무거운 은혜로 네게 되돌려 주리라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감사 깊이 만큼 성숙한 사람이요 감사의 크기만큼 행복한 사람이다.
죤 밀러의 말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어쩌다 보니 산에서 살았습니다.
일산에 살다가 울산갔다 부산 갔다 양산에서 다시 일산으로 돌아왔습니다.
금요일 양산에서 있었습니다. 양산에 계신 목사님들과 바닷가에 나가서 점심을 먹는데 어느 횟집에 들어갔더니 부인이 나와서 영접해 주었습니다. 저를 보는 순간 뒤로 넘어집니다. 손님들을 맞이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남편에게 전화해서 여보 여보 4인4색 왔어요. 아니 뭐 4인4색 4인4색 류영모 목사 맞아요. 맞아. 남편이 고기 잡으러 나갔다 헐레벌떡 들어왔습니다. 여기 세우고 사진 찍고, 저기 세우고 사진 찍고. 사진을 찍어서 한 방에다 그 집에 왔다 갔던 유명한 정치인들 교계의 유명한 인사들 다 사진을 찍어서 스물 댓명 사진을 찍어 놓았더라구요. 교계에서 이름대면 알만한 사람들 안왔다 간 사람이 없더라구요. 정치인들 수 많은 사람이 왔다 갔고 기업인들 가운데 유명한 사람들은 다 왔다 갔더라구요.
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듣자하니까
이 분이 구계교회(김종무 목사)에 출석하는 김상태 안수집사인데 20년 전에 예배당을 지어놓고 수리 한번 하지 못했어요. 겨울에 찬바람이 예배당 안으로 그냥 들어오고 비가 오면 비가 새고 이곳 저곳 갈라지고 찢겨지고 무너졌습니다. 교인들 몇 명 안되는데 목사님 생활비 드리기도 어려워서 예배당 수리할 수도 없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 예배당은 낡았는데 찬바람이 씽씽 들어오는데 수리할 비용이 없습니다. 목사님의 손을 붙들고 “목사님 이번에 고기가 좀 많이 잡혀야 성전이라도 수리할 수 있을 텐데요. 고기 좀 많이 잡아야 크리스마스 제대로 보내는데, 크리스마스에 고기가 좀 잡혀야 목사님 회라도 대접할텐데... ”
집에 있는 그물을 들고 나가서 기도하고 정치 그물망을 이곳 저곳에 쳐 놓았습니다. 좋은 물 흐르는 곳에는 다른 사람들이 다 쳐놓았고 배를 타고 들어가 빈자리 가운데 고기가 안 다니는 곳에 들어가서 그물을 앞에도 치고 뒤에도 치고 서너군데 쳐 놓았습니다.
내일이면 크리스마스예요. 24일날 고기라도 몇 마리 건져볼까 해서 나가봤더니 고기가 한 마리 두 마리 들어가는데 아닙니다. 2열 종대로 줄을 지어서 김상태 집사가 배에 앉아있는 것을 본 것인 양 그물로 들어가는 겁니다. 커다란 방어들이 계속 들어가는데 다른 사람들이 쳐놓은 그물로는 한 마리도 안 들어갑니다. 첫 번째 그물을 거두었는데 2370여마리 10kg짜리 한 마리에 169,000원. 그물 하나에 4억원이 걸렸습니다.
경북 영덕군 남정면 구계리에서 21세기 베드로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수천마리씩 들어있는데. 예배당 수리하려고 기도하고 쳐놓은 정치그물망에 얼마나 어마어마한 방어떼들이 들어갔는지요. 단 몇 마리라도 옆 집에 들어갔으면 기적이 아니예요. 김상태 집사님 그물망에만 여호와 하나님이 쫓아서 보낸 것처럼 일렬로 서서 쫙 빨려들어가는 겁니다. 김상태 집사가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히 아닌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주신 것입니다. 이 고기는 내 고기 아니고 판돈은 내 돈이 아니로다. 팔아서 몽땅 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갖다 바쳤더니 수리하려던 예배당을 새로 번듯하니 지었습니다.
이걸 알고 국민일보에서 싣고, 인터넷에 뜨고 방송국에 와서 간증하고 세계에 다니면서 간증하고... 그렇게 유명한 집인 줄 저는 몰랐지요.
이 양반이 세계에 다니면서 간증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유명하다고 해서 다오니 가게는 언제나 차고 넘치고 제가 간 날은 민어가 얼마나 많이 잡혔는지요. “목사님 저 떼부자 되었습니다. ” “목사님 저 유명한 사람되었습니다. ” “목사님만큼 저도 유명합니다. ”
여러분 이게 감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받은 게 없다구요 보는 눈이 없었던 것이지요. 내가 누리는 모든 것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신학적인 안목이 없었던 것이지요.
감사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영광돌리고 감사로 예배하고 감사로 또 다른 은혜를 매듭짖고
또 다음 복을 누리는 복된 추수감사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땅히 해야 할 추수감사
신16:13-17
오늘은 일년에 한 번씩 지키는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추수감사 주일은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감사하고 사는 사람인가를 한번 점검해 본다는 의미에서 굉장히 뜻이 있는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지수가 얼마나 높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한번 살펴보는 것입니다.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습니다. 감사지수가 낮은 사람일수록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감사를 잊어버리는 것은 영혼에 병이 든 증거입니다. 영혼에 병이 들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막혀 버립니다. 결국 모든 게 막혀버립니다. 이런 연유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1년에 3번씩 영혼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라고 절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감사절은 신앙의 건강 정기검진일인 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3절기를 앞에 놓고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마음에 잘 정리해서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사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1년 중 중요한 명절 3개를 지정해서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16절에 보면, 유월절, 맥추절 그리고 초막절이 이 세 절기입니다. 이 절기를 지킬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신 은혜들을 회상하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도록 한 것입니다.
이렇게 매년 몇 개월에 한 번씩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하다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히 감사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그 감사가 체질화되고 생활화되는 것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 각자의 신앙을 점검해 봄으로 신앙의 건강을 회복하고 감사 신앙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무엇을 감사할 것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 긴 세월동안 노예생활을 한 국민이 다시 독립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모세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세우고 그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손으로 구원해 애굽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 해방시킨 날을 기념하여 유월절로 지킨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하라는 의미에서 이 날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유월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와 누룩이 들어 있지 않은 떡을 먹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무서운 노예의 쇠사슬에서 건져 주셨는지를 나누면서, 그 은혜를 다시 한번 기억하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유월절은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세상만사 다 흘러갑니다. 내가 좋아하던 것이 있다가도 없어질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도 금방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주신 이 구원, 너무너무 소중한 구원, 영원히 빼앗길 수 없는 이 구원을 나에게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 하고 나도 모르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격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랑하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누구입니까 그 생명이 코의 호흡에 붙어 있는 하루살이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는 원수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런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사 십자가에서 돌아가게 하시고, 그 위에서 방울방울 흘리신 보혈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말끔히 씻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여호와 하나님,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간 나와서 예배하는 영광스러운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은혜가 아닙니까 이 감격은 평생 감사로 남아야 합니다.
그리고 유월절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맥추절을 왜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맥추절은 농사를 지어서 추수한 많은 곡식을 창고에 쌓아놓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처럼 풍성하게 먹고 마실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을 주셨음을 회상하면서 이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서 왔다는 것을 고백하는 절기였습니다. 이것이 칠칠절, 맥추절입니다. 단 하루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것 하나 하나도 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내가 마시는 물 한 방울도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서 왔습니다. 나 같은 것을 이렇게 사랑하셔서 일용할 양식을 때를 따라 주시니 감사합니다. ' 하고 경배하며 찬양하는 절기가 바로 맥추절입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초막절을 지키라고 했습니까 이 초막절이 바로 오늘 우리가 지키는 추수 감사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1주일 동안 다음과 같이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초막절만 되면 사람들은 들로, 산으로 가서 올리브 가지나 종려 가지 등을 잘라와서 자기 집 옥상이나 마당,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야외에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텐트, 초막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들어가서 1주일 동안 가족들이 기거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초막절을 지키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나서 40년 이상 그런 초막을 짓고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이제 그 광야 생활을 되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어렵고 무서운 광야생활 동안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도와주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셨는가를 회상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초막절이었습니다.
시편 107편에 보면, 그들의 광야 생활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시107:4-7) 그들의 광야생활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었는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방황하고, 성을 찾지 못해 애를 쓰고, 주리고, 목마르고, 근심 중에 빠져서 하루하루 살던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이었습니다. 그럴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도와 주셨는지, 어떻게 때를 따라 먹여주셨는지, 어떻게 원수로부터 지켜주셨는지, 어떻게 그들의 몸에 질병이 생기지 않도록 은혜를 주셨는지 그것들을 회상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토록 하기 위해 나뭇가지로 초막을 지어놓고 그 속에서 살도록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보세요. 그의 생애 역시 파란만장한 생애였습니다. 골리앗을 물리치고 난후 승승장구해야 할 인생인데, 왕의 시기와 미움 속에서 그 그늘 속에서 젊은 청춘을 다 보내야 했습니다. 20년이 넘는 세월, 황금 같은 시절을 쫓기는 자로 광야에서 소망 없는 자처럼 보내야 했습니다. 시102:6-7에 보시면 ‘나는 광야의 당아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삼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여기 광야의 당아 새, 황량한 곳의 부엉이, 밤새도록 외롭게 앉아 떨고 있는 지붕 위에 참새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생물학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그 감정은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고독하고 처절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시입니다.
그는 어린 소년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는 약속을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람입니다.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싸움터에서 그가 세운 전공으로 모든 이스라엘 앞에서 추앙을 받던 영웅이었습니다. 너무 특출해 버리니까 왕으로부터 질투를 받아서 이제는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을 연단하기 위해서 주신 한 때의 괴로움이었는데 그 한 때라는 것이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시116:12에 다윗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여러분, 기가 막힌 고백이 아닙니까 어떻게 이런 고백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와 같은 감사가 있게 했습니까 그가 이와 같은 감사 고백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짓눌렀던 환경가운데서도 여전히 자기를 지켜 주시고 함께 하시는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 영혼을 사망에서 건져 주신 여호와 하나님!/내 눈을 눈물에서 건져 주신 여호와 하나님!/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져 주신 여호와 하나님! 그 여호와 하나님의 때문에 광야에서도 기쁨과 감사를 참 맛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감사해야 합니까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보십시오. 우리 가운데 광야 같은 세월을 보내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 기간은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다 광야 같은 위기를, 광야 같은 역경을 한두 번씩은 경험하며 지내왔습니다. 그럴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그럴 때 그 위기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넘기게 하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돌이켜 보십시오. 눈앞이 캄캄한 어려움을 당했을 때 어디를 가야 될지, 어느 쪽에 탈출구가 있는지 모르고 허우적거렸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위기를 넘겼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과거에도 함께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도 광야 길을 다시 걷게 될 때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 하고 고백하면서 감사하는 것이 초막절입니다.
둘째는 이 감사절기에는 이웃과 함께 지켜야 했습니다. 구약의 감사 절기의 가장 아름다운 특징은 모든 이웃과 더불어 감사 절기의 풍요와 기쁨을 함께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특히 사회의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과 함께 절기를 함께 지킬 것을 명하셨습니다. 신명기16:11,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즐거워할지라. " 고 하셨습니다.
자기 소유가 없는 객과 나그네, 농사지은 것 없는 과부와 고아, 분깃이 없는 제사장인 레위인 들에게는 물질을 나누어주고, 그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며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감사 절기는 어떤 특정 부류나 있는 자들만의 축제가 아니라, 하늘 아래 사는 모든 사람들이 기쁨을 맛보는 축제였던 것입니다. 나와 여호와 하나님과만 관계하는 기회가 아니라 이웃들과도 함께 기뻐하는 절기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감사는 은혜 받는 그릇'이라고 우찌무라 간조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감사의 그릇이 클수록 은혜가 크게 임하고 또 우리가 감사하는 그릇이 많을수록 은혜도 많이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받기도 하고, 은혜를 베풀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래서 대개 보면 남의 은혜를 많이 받고 사는 사람보다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잘됩니다. 받는 사람은 나중에 또 더 받기를 좋아하며 또 받은 일에 대해서 만족하기보다도 더 많이 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아쉬운 생각을 가집니다.
그러나 은혜를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베풀고 나서도 또 더 베풀고 싶고, 또 자기에 대해서 어떤 유익과 자기의 어떤 소득을 생각하기보다도 나누어주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항상 자기 생활에 만족을 느끼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분들의 생활은 정말 행복한 생활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는 것은 꾸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남을 도와주는 것은 내가 꾸어주는 것과 같아서 언젠가는 받을 날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게 됩니다.
셋째는 감사는 모든 사람이 다 해야 되고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1년에 3차례씩 명절을 지키라고 당부하시면서 재미있는 명령 1가지를 주셨습니다. 곧 명절을 지킬 때마다 남자들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와서 얼굴을 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남자들만 이렇게 보이라고 했을까요 남자들만 감사하라는 말일까요 언뜻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가정을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와 얼굴을 보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남자들처럼 여호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오진 않아도 모든 여성들과 어린 아이들은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유월절 양을 잡아 놓고 모든 식구들이 둘러 앉아서 그 양을 먹어야 했습니다. 한 사람도 빠지면 안 됐습니다. 그리고 곡식을 추수한 다음에 모든 가족이 모여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신데 대해 감사했습니다. 초막을 지어놓고 모든 식구가 그 속에 들어가 1주일 동안 기거하면서 광야 생활을 회상하며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따라서 한 사람도 빠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감사는 모든 사람이 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절 하반절에서 17절에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찌니라” 여기 공수라는 말은 빈손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약점이 있습니다. 돈은 가지면 가질수록 내 마음이 자꾸 그곳에 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갑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 '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감사를 받으시기 위해 빈 손들고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 보물을 네 손에 들고 나와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예물을 손에 들고 나오면 그 예물 때문에 마음까지도 여호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 없이는 한 순간도 위기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것들은 하루 아침에 나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가정이 평안합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안심하고 앞날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를 받고 사는데 빈 손들고 나오거나 형식적으로 드리면서 '감사합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마음이 담긴 예물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사회복지법인 '애양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100년 전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나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여수 지역에 만든 나환자촌입니다. 애양원이 유명해진 것은 지금부터 약 50년 전 손양원 목사님이 배출되면서부터 입니다. 그분이 그곳에서 사역하다가 공산당에게 순교를 당하고, 그 두 아들도 순교를 당해 유명해진 곳입니다.
그 애양원에는 손발과 얼굴이 뒤틀린, 한 마디로 소망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특별한 몇 가지가 있습니다. 주일예배,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금요예배에 모이는 숫자가 똑 같은 한국의 유일한 교회입니다. 한 사람도 결석을 안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배에 다 나오는 교회. 따라서 그들의 가슴은 뜨겁습니다.
그들은 양계, 양돈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이 되면 거기에서 번 돈으로 헌금을 하는데 수천만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십일조는 말할 나위도 없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감사하면서 헌금을 많이 드리는지 모릅니다. 한 예로 손양원 목사님 기념관을 세울 때 예산이 10억이 조금 넘었는데, 그 가운데 상당한 부분을 그들의 손에서 나온 헌금으로 충당했습니다. 그리고 여수 지방에 400여 교회가 있는데, 그 중 40개 교회가 이 나환자촌에 있는 성도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해서 드린 예물로 개척한 교회라고 합니다. 문둥병자에게 무슨 감사입니까 문둥병자 입에서 무슨 감사가 나올 수 있습니까
그들의 손에 무슨 감사하다는 예물이 들려질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은혜 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영적으로 누리고 보니 비록 육신은 망가졌지만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입으로 감사하는 것으로는 도무지 모자라 그 손가락이 없는 손으로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들고 나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예물로 드리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런 감사를 받으십니다. 이 감사야말로 진정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예물을 들고 나왔을 것입니다. 한번 조용히 여러분의 마음에 이 예물을 두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오늘날까지 받은 구원의 은혜, 일용할 양식을 주신 은혜, 가정에 공급해주신 갖가지 은혜, 그리고 어려울 때 눈물 흘려 기도하면 어김없이 응답해 주신 은혜 등등. 이런 은혜를 다 생각해보면 과거에도 감사하면서 예물을 드렸지만, 추수감사절을 맞아서 특별히 이런 은혜를 감사하며 드린다고 할 때 그 예물이 너무 적거나 초라하거나 형식적이라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충분히 담긴 예물을 준비해서 드려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예물을 예배로 받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 3절기를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받았습니다. 무엇을 감사해야 할 것인가를 배웠습니다. 구원의 은혜, 일용할 양식의 은혜, 환난 중에 광야 생활에서 도와 주신 은혜를 특별히 감사해야 된다고 배웠습니다. 또한 감사는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감사에는 제외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할 것이 없어서 감사 못할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알아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감사는 우리 손에 예물을 들고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입으로 감사함과 동시에 마음으로 감사하기 위해 우리의 물질도 주님 앞에 드리며 진정 구원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험한 광야 같은 세상 살 동안 도와주시고 은혜 주시는 좋으신 여호와 하나님, 그분에게 진정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오늘 주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원천의 추수감사
살전5:16-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라 감사의 계절을 맞이하였습니다. 11월은 추수감사의 계절이고 감사절기의 달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가장 좋은 마음이고 복을 받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하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더 좋은 감사를 불러오고 결국에는 기적을 불러옵니다. 사람들은 감사하기 보다는 불평하고 불만하고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삶의 현장을 오염시키고 삶이 삭막해지는 것입니다. 철없고 생각 없는 사람이 늘 불평하고 불만하고 원망하고 살아가기 쉽습니다.
본문에서는 감사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 말은 감사의 삶을 살되 반드시 좋은 일에만 감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좋은 일에만 감사를 합니다. 시간을 좀 두고 살아보면 오늘의 좋은 일이 반드시 내일까지 좋은 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의 실패와 불행이 내일에 무슨 일로 연결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인간사 새옹지마”라고 했습니다. “새옹지마”라는 말은 “득과 실”이라는 말입니다. 한때 득이 후에 해가될 수 있고 지금의 해가 후에는 득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에디슨은 귀머거리였습니다. 그것은 분명 그에게 불행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는 그 해로 인하여 발명왕이 됩니다.
밀턴은 말년에 눈이 어두워지는 불운을 겪었는데 그것이 그로 하여금 그 유명한 실낙원을 쓰는 계기가 됩니다. 작가 스티븐슨은 결핵 말기의 고통 때문에 고생하였지만 그 병으로 인하여 그는 보물섬이라는 명작을 쓰게 됩니다. 파스칼은 청년시절부터 그를 괴롭힌 온 몸의 통증 때문에 팡세를 완성하게 됩니다. 베토벤은 청각장애 때문에 고통을 이기는 동안 명곡들을 작곡해 냅니다.
헨델은 그 장엄한 메시야곡을 열병으로 24일 동안 식음을 전폐한 생활을 하는 동안 영감을 얻어 작품을 완성합니다. 조개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 몸속에 모래가 들어왔습니다. 속살이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웠겠습니다. 그러나 그 조개는 그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는 동안 그 안에서 진주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감사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타납니다. 신앙의 삶은 감사의 삶이 주류를 이룹니다. 그래서 감사는 기적을 불러옵니다. 더 좋은 감사를 불러옵니다. 삶을 밝고 따뜻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감사생활이 주는 열매입니다.
감사절의 기원을 보면 구약시대의 3대 절기 즉 유월절과 맥추절과 장막절에서 비롯됩니다. 3대 절기의 정신은 “감사”입니다. 지난날에 감사하고 오늘에 감사하고 미래에 감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국가에 감사합니다. 확실히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불러옵니다. 감사는 인생의 깊음과 성숙함을 나타내는 삶의 척도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의 원천의 감사를 읽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감사의 사람입니다. 감사도 원천의 감사입니다. 성경에 보면 몇 가지 원천의 감사가 있습니다.
죄에서 구원받음의 감사
바울은 로마서8장2절에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됨을 감사한다”고 고백합니다. 이 감사가 원천의 감사입니다. 죄로부터 해방과 구원받음은 감사 중 최고의 감사의 조건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죄로부터 해방되고 자유함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옥은 사람을 묶어놓고 자유를 유보하기 때문에 감옥입니다.
그 보다 더 큰 감옥은 죄의 삶을 사는 창살 없는 감옥입니다. 죄는 사람을 사정없이 얽어맵니다. 그래서 죄인은 누가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도망하고 피하고 숨습니다. 얼마나 큰 구속입니까. 바울은 그 죄로부터 해방과 자유함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원천의 감사입니다.
사망에서 승리함의 감사
고린도전서15장57절에서 바울은 “내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죽음에서 해방되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은 단어조차 어둡고 두려운 단어입니다. 사람들이 암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탄식하고 두려워하고 눈물을 흘리고 몸부림을 칩니다. 마틴 하이덱거는 죽음의 5가지 특징을 말했습니다.
가장 정확한 사건, 아무도 때를 모름, 가장 큰 비극, 단 1회적 사건으로 반복이 없고, 개인적이고 아무도 대신할 수 없다는 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문제를 예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완벽하게 해결하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그렇게 부활한다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죽음에서 해방 받은 것을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직분 주심의 감사
디모데전서1장12절을 보면 “내가 주께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주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간서 첫 머리에서는 언제나 “주께로부터 부름 받아 사도된 나 바울”이라고 적었습니다. 사도직에 대해서 바울처럼 그렇게 소중히 여겼던 사람도 없습니다. 그 직분이 왜 소중하냐 하면 하늘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전 미국대통령 지미 카터는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모든 직함을 내려놓고 교회 교사직만은 고수했다고 전해집니다. 왜냐하면 그 교사직이 하늘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이라는 의식 때문입니다. 선교사 리빙스턴은 “여호와 하나님께 주신 직분을 이루는데 사명을 다할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 ”는 말을 했습니다. 바울은 그 직분주신 것에 대해서 늘 감격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직분에 대해서 너무 의미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약함의 감사
바울은 고린도후서11장30절에서 “나는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건강도 감사의 조건입니다. 성공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약함도 감사해야 할 이유입니다. 반드시 건강과 성공만 감사할 일이 아닙니다. 오늘의 실패가 내일 어떤 결과가 주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은 너무 눈에 보이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섭리의 손길을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몸에 병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는 그 병을 가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고쳐주지 않으시고 그대로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뒤로 그는 다시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나는 나의 약함을 자랑하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부족한 자리에서, 병중의 자리에서 감사할 수 있는 감사가 진정한 감사입니다. 우리는 너무 넉넉함에 감사하는데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부족해도 불평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넉넉해져도 감사를 모르게 됩니다. 어린아이 수준입니다. “나의 약함을 자랑하노라. ” 이것은 원천의 감사입니다.
범사의 감사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의 감사는 가장 성숙한 감사를 말합니다. “범사”를 영어로 “all things”라고 합니다. 헬라어로는 “en panti”입니다. 우리말로는 “어느 경우에도”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생존하고 있음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살아있음 그 자체가 감사할 일입니다. 살아있기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는 것도 복입니다. 내가 200년을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적당할 때 죽을 수 있는 것도 복이고 은총입니다. 죽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또 기쁘고 좋은 일에 감사하는 일입니다.
금년 한해를 살아오는 동안 기쁜 일과 즐거운 일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좋은 집으로 이사하고 아이를 낳고 진학하고 직장을 얻고 건강하게 살아왔고 좋은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고 신앙의 삶을 유지하고 살고 있음은 모두 감사할 조건들입니다. 그런데 한해를 살아오는 동안 이런 감사한 일만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역경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금년 년 초에 경제 한파가 다시 예고되면서 년 초에 우리국민들이 얼마나 당황했습니까. 모두 또 다시 지난날의 어려움을 예상하고 나라가 망하는 줄 알고 걱정하였는데 시간이 지난 오늘 생각해 보니 그것도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경에도 감사할 일입니다.
지난 봄에 미국 LA지역에 큰 불이 발생하여 2천여 집이 불에 탔습니다. 여러 한인들 집도 불탔습니다. 그런 재앙 속에서도 소망적인 두 사례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흐뭇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노인부부의 집이 다 불났습니다. 그것은 분명 그 노부부에게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부부는 지금 한창 불타고 있는 집을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서 “이 재난에서 우리 노부부의 생명을 건져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라고 기도하였다는 소식이 모두에게 알려졌습니다. 말하자면 그 감사가 원천의 감사입니다.
또 다른 사례는 우리 한인 집이 불에 탔습니다. 그것도 분명내 집에는 큰 재앙입니다. 그때 그 가정의 고교생 아들이 자기 집이 불타고 있음에도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불조심하라고 외치고 다녀 인명피해를 크게 줄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학생이 대학 수능시험을 치를 때 그 사례를 썼는데 그 점이 인정받아 그 학생이 전체 장학생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역경에서의 감사가 결국 이 같은 기적을 일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가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역경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어려움이 있는가 하고 생각하면 그 고난이 더 커집니다. 그리고 낙심도 더 커집니다. 들어보면 그런 애로들이 다 있습니다. 목사님에게 상담 요청자가 10명이나 신청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같은 시간에 모두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일 목사님은 바쁜 일이 생겨 시청에 갔다 올 테니 함께 이야기 하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어 시간 후에 와 보니 한사람만 남아 있었습니다. 서로 이야기를 듣더니 모두 자기 처지는 그래도 나은 편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집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남아 있느냐”니까 “나는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남아 있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괜히 혼자 큰일 난 것처럼 야단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진정한 감사는 좋은 조건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감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 한계상황을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나옵니다. 미국 LA 엔젤스 야구팀 투수가 짐 아보트(Jim Abbort)인데 그는 출생할 때 오른 손이 없는 기형아로 태어났습니다. 왼손 하나로 야구선수 투수가 되어 시속 94마일(150km)을 던집니다. 서울 올림픽 때 와서 던져 미국팀에 금메달을 안겨준 주역입니다. 인터뷰할 때 그는 “세상은 내일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매일 발생하는 작은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다음 기회의 교훈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내가 손 하나 없다는데 대해서 신경 쓰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취급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 말했습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라는 영화를 보면 2차 대전 때 헤롤드 럿셀이라는 공수부대원이 전투에 참가했다가 포탄에 맞아 두 팔을 잃고 졸지에 불구자가 되어 좌절 빠져 “나는 이제 쓸모없는 고깃덩어리구나”하고 자책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중 차츰 깨닫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잃은 것 보다 가진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자각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의수를 하고 글을 쓰기 위해서 타이프를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그의 삶을 영화화해서 그는 직접 출연하여 마침내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습니다. 상금을 상이용사를 위해 기부하는 그에게 기자가 “당신의 신체적인 조건이 당신을 절망하게 하지 않았는가”고 물을 때 “아니다, 나의 육체적인 장애는 나에게 도리어 축복이 되었다, 언제나 잃어버린 것을 계산할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며 남은 것을 사용할 때 잃은 것의 열배를 보상받게 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참으로 눈물겨운 고백입니다.
청교도들이 1620년 102명이 무작정 배를 타고 미지의 땅으로 항해하여 마침내 오늘의 미국 땅에 도착합니다. 그해 겨울 102명중 44명이 죽는 큰 불행을 겪습니다. 자유롭게 신앙생활하며 살아보자고 떠났는데 도중에 3/1이 죽었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농사를 지어 첫 곡식을 거둬 음식을 만들어 놓고 그들은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린 것이 오늘 추수감사의 예배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그 조상들은 프리마우스 지역 언덕에서 예배드리고 그 언덕에 세운 비문에 “너희 조상들이 어려움 가운데 성취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기억하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오늘은 감사를 잊은 시대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시대의 교부인 크리소스돔은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감사하지 않는 죄”라고 했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없이 살아가는 삶이 저주받은 삶입니다. 내촌감삼은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죽음이나 질병이나 실패나 배신당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성경을 읽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도록 막힌 귀로, 감사가 없는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풍요로운 때를 살면서도 모두 감사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넘치는 시대인데 그 넘치는 의미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삶에 감격이 없고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멕시코의 어떤 마을에 냉탕 온탕 나오는 샘이 있는데 그곳에서 아낙네들이 빨래를 합니다. 온탕에서 빨래하고 냉탕에서 헹굽니다. 관광객들이 그 모습을 보고 “참 좋겠다”고 하자 “왜요”라고 반문합니다. “냉온탕에서 빨래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하자 “천만에요, 감사하기보다 아쉬워요, 비누물이 나오지 않잖아요”하고 반문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에서 근본이 안 풀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 없이 살면 이렇게 됩니다.
본문 말씀에서 감사의 차원 즉 원천의 감사를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뜻입니다. 조건이나 환경이나 성공을 떠나서 그것과 상관없이 어느 때나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원천의 감사입니다. 오늘의 행복이 내일 또 행복으로 열매 맺지 않습니다. 오늘의 불행이 내일 또 다시 불행의 연속으로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감사를 해 보며 살아가십시다.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내 삶을 되돌아보면 우리들도 이 원천의 감사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머리카락이 없는 어느 목사님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감사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감사의 조건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 머리에 머리카락이 없는 것을 흉보지만 생각하면 내 머리가 대머리 된 것이 무척이나 감사하다,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날마다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셔서 머리가 다 빠질 정도가 되었으니 나는 행운아가 아닌가, 둘째는 머리를 감을 때마다 비누와 샴푸와 물을 상당량 줄일 수 있으니 물자절약해서 얼마나 좋은가, 셋째는 여호와 하나님이 날마다 내 머리를 세실 텐데 여호와 하나님의 수고를 덜어 드려서 좋지 아니한가. ”
우리들이 눈을 조금만 크게 뜨고 내 주위를 살펴보면 얼마든지 이렇게 성숙한 감사를 외칠 수 있습니다. 이런 감사로 여러분의 삶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라”
추수 감사하는 한 사람
눅17:11-19
지금은 농경사회가 아니고 도시화된 생활 환경과 문명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추수감사주일이라는 것이 조금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추수라고 하는 것은 꼭 농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수고하여 얻는 모든 것이 다 추수하는 의미에서 폭넓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추수 감사라는 말 보다 개인적으로는 범사 감사주일이라고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현대인들은 감사하는 마음이 참으로 희미해졌습니다.
받은 은혜나 사랑과 축복에 대하여 감사할 줄 모르고 삽니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여호와 하나님이든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원망 불평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있습니다. 주어진 것 있는 것에 대한 감사보다 없는 것에 대한 불평의 소리가 더 크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다른 짐승보다 더 나은 면이 있다면 감사할 줄 안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모르거나 배은 망덕하는 사람을 두고 짐승만도 못한 ()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는 삶을 살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중국인들이 태평성대를 누리던 때는 요임금과 순임금 시절입니다. 그래서 살기 좋은 시절을 요순시절이라고 말합니다. 그 요임금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중국백성들이 불렀던 노래 중에 격양가(擊壤歌)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경전이식(耕田而食)하고 천정이음(穿井而飮)하니 제은어(帝恩於)하여 하관언(何關焉)" 이라는 노래입니다. 해석하면 "우리가 밭을 갈아서 밥을 먹고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는데 임금의 은혜가 내게 무슨 상관이냐" 라는 내용입니다.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려 자신들이 태평 세월을 보내고 있음을 모르고 자신의 힘으로 평안한 시절을 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임금의 은혜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노래입니다. 어쩌면 우매하고 어리석은 우리 인생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온통 그 은혜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도 으레 그런 것인 줄 알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못할 뿐만 아니라 아예 잊어버리고 내가 똑똑하여 잘 사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감사이며 모든 것이 다 감사일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된 증거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한 맘을 잊고 살다가 추수 감사절만 되면 갑작스럽게 감사를 생각하는 그런 모습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추수 감사절 뿐 아니라 항상 감사합시다. 그리고 항상 감사할 뿐 아니라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옛날 나라도 개인도 가난하고 궁핍한 시절 식량난이 심했을 때 어디 가서 목구멍 풀칠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저 하루 세끼 밥만 굶지 않고 먹을 수 있으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열심히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하루 밥 세끼 먹을 수 있는 것은 별로 감사할 조건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더 큰 감사의 조건이 자신에게 생기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하루 세끼 밥 먹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 어느 부분 어느 것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무 곳에도 없습니다.
나의 삶의 현장에 구석구석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배어 있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여전히 살건만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어리석음과 인색함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에 감사하는 한 사람과 감사하지 않는 아홉 사람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나병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편견과 오해를 받은 병입니다. 그것은 저주 받은 병으로 인식되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병은 나병만이 아니고 모든 병이 저주를 받아서 생기는 것입니다.
열 명의 병자들이 주님을 만나서 긍휼히 여김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 모두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셨고 그들이 제사장에게 보이러 가는 중에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열 명 모두 주님의 긍휼로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긍휼히 여기심이 나타난 것입니다.
인생은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함을 얻어야 삽니다.
육신적인 한센씨 병은 현대의학에서 완전히 치료가 가능한 병입니다. 그러나 죄악의 나병은 현대 의학으로 치료될 수 없습니다. 영적인 나병에 걸려 완전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시편기자는 시 86:15-16절에서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오니 내게로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감사하러온 사마리아인 한 사람
주님의 긍휼하심은 열 명의 나병환자 모두에게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열 명이 다 깨끗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15-16절에 보면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인이라” 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나은 것을 느낀 이 사람은 가던 길을 돌이켜 먼저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본문은 그가 큰 소리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사례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례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는 주전 722년에 앗스루에 의해 함락된 이후 이방인들과 혼혈되었습니다. 그래서 혈통의 순수성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이 볼 때 이방인들과 같이 취급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홉은 어디에...
예수님은 열 명이 다 고침을 받았는데 어찌하여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이냐고 한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감사하는 사람을 일컬어 “이 사마리아 사람 외에는 ... ” 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아홉은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로 추정되는 나머지 아홉 명은 예수께로 와서 최소한 감사의 표시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17절에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라고 감사하지 않는 다른 아홉에 대하여 불만족스러운 심경을 표현하셨습니다. 은혜는 다 같이 받았지만 감사하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① 감사는 신속히 해야 합니다.
만사는 다 때가 있습니다. 감사해야 할 때 감사해야지 사이다를 김이 다 빠진 후에 마시는 것처럼 지난 다음에 감사하는 것은 진정한 감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시119:60절에 보면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감사나 인사를 해야 할때 하지 못하고 욕을 다 먹고 난 다음에 하는 행위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아마도 열사람 중 신속히 와서 감사한 한 사람 빼 놓고는 모두 나중에 해야지 ... 하며 제사장에게 갔을 것입니다.
아마 그들 중에는 제사장에게 가서 나았다는 진단을 받고 다시 와서 예수님께 사례를 하려고 했을 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이들은 너무 기뻐서 가족에게로 달려갔을 지도 모릅니다. 우선 가족에게 기쁨소식을 알리고 나중에 예수님을 찾아뵈어야 하겠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주님이 그들의 그런 마음을 모르실리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제사장에게 가는 것도 중요하고 가족에게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해도 될 일 들입니다. 우선 주님을 찾아 감사해야 신선한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선 다른 일보고 나중에 와서 감사하는 것은 그 감사의 의미가 절반 내지는 완전히 감소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감사를 받기를 원치 않으신 것입니다.
② 감사는 구체적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감사하러 돌아온 한 사람 그에게서 믿음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어쩌면 우연으로 돌렸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병 나은 것이 우연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쳤다는 확신을 가질만한 근거가 되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병 고침을 받았으니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제사장에게 보이라는 것입니다. 병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했을 뿐 직접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이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사례한 것입니다. 감사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여기 까지 살아온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이 되어집니까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는 믿음이 필요하고 그런 믿음이 있으면 구체적으로 사례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 사례하십시오.
어느 교회에서 매년 감사절기가 되면 교인들에게 미리 헌금봉투를 나누어주고 작정헌금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그것을 예배 시간에 꼭 발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장로님이 30만원을 작정했는데 목사님이 그만 잘 못읽어서 300만원 작정하였다고 잘못 발표해버렸습니다. 순간 그 장로님은 깜짝 놀라며 당황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말하지 않고 나중에 발표된 300만 원을 기꺼이 헌금하셨습니다.
얼마 뒤 이야기를 전해들은 목사님은 장로님께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셨습니다. 그러자 장로님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는 제가 30만 원짜리 감사인생인줄 알고 30만원 헌금하려고 했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목사님 입을 통해 300만 원짜리 감사인생이란 것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사실 몹시 당황했습니다. 그 날 밤 여호와 하나님께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데 기도하면서 가만히 헤아려 보니 제 인생이 30만 원짜리가 아니라 300만 원짜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300만 원짜리 인생을 만들어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인생의 값을 높여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 넘치는 감사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믿음입니다. 감사는 믿음으로 해야하고 구체적으로 그 믿음의 행위가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만일 고침 받은 한 사람이 예수님께 감사한 마음만 가지고 그냥 돌아갔으면 그도 감사하지 않은 아홉 사람과 다를바 없을 것입니다.
③ 감사는 겸손으로 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예수님께로 와서 겸손히 엎드려 사례하였습니다. 죽을 죄인이 구원받았으니 겸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대체로 교만한 사람은 감사할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교만해지면 여호와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감사도 잊어버립니다. 신명기 8:12-14절에 보면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 8:17절에 보면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십일조나 감사헌금을 드릴 때 먼저 겸손해야 합니다. 많이 바칠 수 있게 되었다면 적게 바치는 사람보다 은혜를 더 많이 받았음으로 더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드리면 드리고도 복을 받지 못합니다.
이제 한 사람의 사마리아 인처럼 우선의 감사를 드리는 믿음이 됩시다.
골 3:15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명령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면 감사할 마음이 생깁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불평과 불만이 가득해지고 감사한 마음이 없어집니다. 이 사마리아 인이 돌아와 주님께 사례한 것은 그의 마음이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 바라보는 마음이 되게하여야 합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생각하면 오늘 나의 현실이 불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대하 20:12절에서 여호사밧 왕이 적의 침략을 받아 국가적 위기 처했을 때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대하 20:21절에 보면 여호사밧은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 라고 말했습니다.
즉 주만 바라본 그에게는 감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에게 “여호와께 감사하세” 라고 찬양하게 한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감사할 조건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찬양을 시작할 때 여호와 하나님의 천사들이 나타나서 적군을 다 물리쳐 주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 보십시오
십자가에 지신 주님만 바라봅시다. 나를 위해 가시 면류관 쓰시고 물과 피를 다 쏟아서 생명을 주신 주님만 바라봅시다.
마음과 생각을 주님께로 돌이켜 그에게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래야 감사할 수 있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납니다. 돌아와 사례한 사마리아 인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인정 즉 칭찬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병 고침의 완전한 보장을 받았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의 유형에 속합니까 긍휼을 받고도 감사치 않는 열사람의 속에 속합니까 아니면 주님께로 돌아와 감사로 사례한 이 사마리아인의 유형에 속합니까
우리를 향해 베푸신 주님의 크신 긍휼과 은총에 대해 깊이 감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살을 다 찢어 주셨습니다. 성찬 예식은 날 위해 물과 피를 다 찢어 나누어주신 주님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나의 죄를 씻으시고 질병의 굴레에서 자유케 하심을 묵상함으로 성찬 예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추수 감사가 주는 행복
합3:17-19
우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 이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항상 기뻐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행복은 여호와 하나님의 소원이시기도 하지만 우리들의 제일 가는 소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에 늦게 누우며 정말 열심히 자신의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행복을 위해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행복은 어디서 오는지를 아는 지혜가 우선하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행복을 얻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행복하십니까 저는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무성할 때 행복합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맺힐 때 행복합니다. 감람나무에 소출이 많을 때 행복합니다. 밭에서 먹을 것이 넘치도록 수확 될 때 행복합니다. 우리와 외양간에 양과 소가 넘쳐날 때 행복합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우리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무화과와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는 언제나 소출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풍년이 들 때도 있지만 흉년이 들 때도 있습니다. 때문에 어쩌다 행복할 수는 있지만 항상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은 늘 풍년이 들어도 사람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우리 나라 처럼 빠르게 그리고 많이 성장한 나라가 세계에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50년대는 그만두고 60년대 초와만 비교해도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거의 300배 정도 성장하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 중에 하나였습니다.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풍성할 때 행복하다면 세상에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행복해야 할 사람이 없습니다.
60년 초보다 우리는 300배 행복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먹고 남을 만큼 무화과 열매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보다 더 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와 비교하며 만족하지 못하며 늘 불만 가운데 불행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이와 같은 기막힌 고백을 하는 사람의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의 기자가 행복한 까닭은 어디에 있다고 여러분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것이 감사할 줄 아는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의 기자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감사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가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사람은 감사할 때 행복합니다. 감사는 자신을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 즉 감사의 대상이 되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알고 감사할 때 부모는 무엇보다도 행복해 합니다. 그런데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알고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알면 부모도 부모이지만 자신이 먼저 행복해 집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 이하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신 기쁨과 감사는 같은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면 항상 기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사에 서툽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사가 무화과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사가 무화과에 한정되게 되면 결국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으면 그 때문에 감사할 수 없고, 무화과 나무에 늘 열매가 많이 맺혀도 늘상 그러는 것이니 새삼스럽게 감사하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일 년에 한번 드리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절기를 좇아 감사주일이라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나오신 분들이 아마 대부분일 겁니다. 정말 넘치는 감사를 가지고 나와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시는 분이 우리 중에 몇 분이나 될까요 특히나 올해는 금융위기를 격고 있는 해이니 더더군다나 감사가 많이 퇴색되었을 것 같습니다.
본문의 기자가 행복했던 까닭은 그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데 에도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감사의 조건이 무화과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그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가 무성한 물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많이 맺히는 것 역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입니다. 밭에 소출이 많고 우리와 외양간에 소와 양이 가득한 것도 말할 것 없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입니다. 그러니 그럴 때에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큰 풍년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고 ‘내 영혼아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고 하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땅에서 누구보다 부자였지만 하늘에서는 누구보다도 가난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도 그런 어리석은 부자가 있을는지 모릅니다.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마 많을 겁니다. 아마 많은 것이 아니라 대부분일 겁니다. 부자의 대부분은 어리석은 부자들입니다.
그러나 부자만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대부분 똑같이 어리석습니다. 받은 보다 큰 은혜와 축복을 헤아리지 못하고 받지 못한 보다 작은 은혜와 축복만을 헤아리며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어리석은 가난뱅이들입니다.
부자라고 행복한 것 아닙니다. 부자도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도 불행합니다. 그것이 정답입니다. 세상을 보면 누구나 그 정답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저 부자가 되려는데만 온 정신을 다 쏟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기자와 같은 소수의 사람들만 빼고 말입니다.
지난 주 높은 뜻 하늘교회에서 설교하면서 하였던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인터넷을 통하여 제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은 복습하는 마음으로 다시 들으시기 바랍니다.
제 아내가 한 달 정도 미국에 있다가 그제 돌아왔습니다. 둘째 손녀 돌 때문에 갔다가 온 것입니다. 아내가 없는 집에서 한 달을 살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참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아내에게 빨리 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기회에 중요한 연습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내와 헤어지는 연습입니다.
아내는 제 행복과 감사의 첫째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내가 있기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아내의 사랑을 늘 받고 살기 때문에 저는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내는 저와 늘 함께 영원히 이 땅에서 함께 살 수는 없습니다. 제가 먼저 가면 좋겠지만 아내가 먼저 갈 수도 있습니다. 얼마가 될는지 모르지만 아내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습니다. 그 때 잘못하면 저는 마치 여호와 하나님 없는 사람처럼 한 없이 불행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짧은 한 달이었지만 (물론 제게는 긴 한달이었습니다) 저는 그 기간 동안 아내 없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연습하였습니다.
우선 인간적으로 볼 때 저는 제법 성공한 사람입니다. 큰 교회를 목회하기도 하였고 무엇보다도 교회를 개척하여 짧은 기간에 제법 크게 성장시킨 사람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에게는 일이 행복입니다. 제 행복과 감사의 둘째 조건은 목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목회가 행복하기 때문에 늘 불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목회에서 내려와야만 하는 날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젠가는 목회의 현장에서 은퇴해야만 하고 언젠가는 사람들이 나를 더 이상 주목하지 않고 스포트라이트가 나 아닌 다른 후배에게도 집중되는 것을 보아야만 할 초라한() 날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준비 없이 은퇴하게 되면 그때 저는 은퇴 후 시간을 불행하게 지낼 것입니다. 그 시간이 평균적으로 그다지 짧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마지막 시간을 불행으로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은퇴한 후에 일없이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연습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연습을 했습니다. 그것이 안식년이었습니다. 저는 안식년 동안 지금하고 있는 일들을 손 놓고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연습하였습니다.
저는 운동을 위하여 남산을 잘 걷습니다. 차가 다니지 않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경치가 아름답고 적당한 굴곡이 있어서 걷기 운동에 참 좋은 곳입니다. 차가 다니지 않기 때문에 장애인들이 많이 오셔서 운동들을 하십니다. 시각장애인들이 많으시지만 중풍병에 걸리신 분들이 운동하러 나오시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중풍에 걸려 걸음이 부자유하신 분들을 보면 표정이 대개 어둡습니다. 얼굴은 굳어 있으시고 시선은 땅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으십니다. 자신이 중풍에 걸려 걸음이 자유롭지 못한 것이 부끄럽고 속상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밝게 웃으시면서 그 아름다운 길을 걸으시는 분을 잘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길을 제법 빠른 걸음으로 걷습니다. 저는 아직 건강하여 제법 힘든 운동도 잘 합니다. 아름다운 남산 길을 씩씩하게 걸으며 이런저런 운동을 즐기며 저는 아직 제게 남아있는 건강을 마음껏 누리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행복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또한 늘 내게 있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제 저녁 집에 들어가니 아내가 은행을 까고 있었습니다. 한 시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아내와 함께 앉아서 은행 까는 일을 도와 주었습니다. 일을 다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전처럼 벌떡 일어나지지 않았습니다. 노인처럼 허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일어났습니다. 아내가 보고 웃었습니다. 제게도 점점 노화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지금처럼 씩씩하게 걷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당뇨 관리가 지금보다 어려워 질 겁니다. 그러다가 건강을 잃고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남산을 걸으며 장애들을 마주칠 때마다 저는 매우 중요한 연습을 마음으로 합니다. 원치 않는 일이지만 만에 하나 나에게 저런 일을 당한다고 하여도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다짐하며 연습합니다.
같은 마음으로 저는 자주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씩 가난을 연습합니다. 돈이 없지 않지만 마치 돈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며칠 정도를 살아봅니다. 저는 가난해지기 싫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싫은 것은 만에 하나 가난해 졌을 때 그것 때문에 세상이 다 망한 것처럼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저는 가난해져도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 영원한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부요함도, 건강함도, 형통함도 다 불완전합니다. 그것은 수시로 흔들립니다. 내 인생을 그것에 의존하고 살면 언제나 바람 따라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며 늘 행복하게 이 땅에서나 저 하늘에서 구원 받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려면 여호와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하는 법을 배우며 그 대화 중에 여호와 하나님과 연애하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리고 사소한 것이라고 흘려 보냈던 작은 것들 하나 하나를 은혜로 느끼며 감사하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리고 늘 여호와 하나님께 감격할 줄 아는 것을 연습해야만 합니다.
김남조 시인의 밤 기도 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그 시 속에 나타난 그분의 삶을 부러워 합니다.
하루에 분주한 일들 차례로 악수해 보내고
밤 이슥히 먼데서 오는 듯만 싶은 주님과 나만의 기도시간.
주님. 단지 이 한 마디에 천지도 아득한 눈물.
날마다 끝 순서에 이 눈물 예비 하옵느니
오늘도 내일도 나는 이렇게만 살아지이다.
깊은 밤에 눈물 한 주름을 주께 바치며 살아지이다.
이렇게 살 수만 있다면 오늘 본문의 하박국 선지자처럼 비록 무화과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어도 밭에 먹을 것이 없어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기막힌 삶을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제 가족들을 사랑하지만 저들에게 집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는 성공한 일과 그 일을 하게 하는 자리를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거기에 연연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부요한 삶이 좋지만 너무 거기에 빠져들어 바보처럼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건강한 삶이 좋아 건강을 위하여 노력하며 최선을 다하겠지만 그 건강을 잃었을 때에 모든 것을 다 잃은 사람처럼 우울하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비록 아내가 먼저 내 곁을 떠난다고 하여도
은퇴하여 소위 뒷방 늙은이가 된다고 하여도
돈과 건강을 잃어 사람 보기에 초라한 사람이 된다고 하여도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감격하며
날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며 내 삶의 모든 순간을 구원 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천국을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함께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감사가 주는 행복을 누리며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와 축복
시136:1-26
여호와 하나님은 이 우주와 영계를 지으시되, 인간을 위해 지으셨다. 즉 나를 위해 지으셨다. 그러므로 저 영계와 이 우주 공간에는 감사할 것이 충만하다. 그래서 본문은 끊임없이 감사의 찬양을 하고 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가 저 영계와 이 우주 공간에 가득한 감사의 조건을 찾아 구체적으로 감사하는 것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찾고 받는 것이다.
시 37:4절.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본문의 시는 하나의 일정한 운율로 되어 있다. 인도하는 사람이 '여호와께 감사하라' 하면 회중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화답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보면 '모든 신에 뛰어나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라 -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3)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4) ...
여기에는 깊은 영적 의미가 있다.
'하나'에 대해 감사하면 그 하나에 대해서 더 주시고, '둘'에 대해 감사하면 그 둘에 대해서 더 주시고, '열'에 대해 감사하면 그 열에 대해서 더 주신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보면 다음과 같은 뜻이다.
5절.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 하나님은 지혜로 하늘을 지으시되, 그 지은 것이 바로 '나'를 위해 지으셨다는 것이다. 이를 감사하라는 것! 그리하면 그 지으신 혜택이 바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밝은 태양을 감사하고, 밤의 달과 별들을 감사하고, 산천초목 공중의 나는 새 바다의 물고기를 감사하면 그 지으신 모든 혜택이 바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나를 위해 만들어 주신데 대해서 감사하시기를 바란다! 이 땅의 모든 과학에 대해 감사하고, 자연환경에 대해 감사하고, 이웃에 대해 감사하고, 부모에 대해 감사하고...
이것이 축복의 비결이다.
눅 6: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
감사의 마음과 태도가 중요하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지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감사가 100% 꽉 차 있을 때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주신다면 그 결과는 엄청난 결과가 될 것이다. 하지만, 마음에 감사가 20%만 차 있다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준다 할지라도 그 결과는 흡족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어느 집사님은 간증하기를, 됫박으로 감사하라는 말을 한다. 됫박으로 감사할 때는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질 수 있지만 만일, 감사의 마음이 요만큼 밖에 되지 않는다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감사에 풍성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내적인 일이든 외적인 환경이든,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것'을 연구하고 또 찾고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그럴 때마다 '주여, 이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이 일에 대해 감사합니다. 이 사람에 대해 감사합니다. 이러한 여건에 대하여 감사합니다'라고 할 때, 그 면에 대해서 더 주시고 자꾸 주시는 것이다.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것만큼 축복이 커지는 것!
감사하시기 바란다.
언제나 감사하시기 바란다.
풍성한 마음으로 감사하시기 바란다.
1. 감사할 것을 찾는 것은 주님을 찾는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도 자기에게 주는 자를 좋아하고 따른다. 감사란 나에게 주신 것을 찾고 깨닫는 것이다.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신 분의 은총과 은혜를 찾고 또 찾는 것이다. 결국 주님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찾으면 찾을수록 주님과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주님께 더 친절해지고 더 믿고 더 의지하고 더 바라보게 되고 더 사랑하고 순종하게 된다.
시대 상황이 아무리 어둡고 주변 상황이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무한히 선하신 분이시며 세상의 가장 중요한 분이심을 깨닫고 발견했을 때 하박국 선지는 고백했던 것이다. "..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눈에 보이는 모든 상황이 그렇게 어두웠지만 주님께서 내게 주신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했을 때 그는 주님을 찾았던 것이다.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믿음이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다. 나를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자녀 삼으셨고 약속 안에서 오늘도 인도하시고 섭리하시고 역사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다.
-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최고의 보배요 능력이요 축복이다.
설령, 모든 일이 다 뜻대로 안 되고 제반 여건이 좋지 못하다 할지라도 가장 소중한 것을 소유한 것만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바로 이 믿음이다!
그래서 하박국 2:4절은 말씀한다. "...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감사할 것을 찾는 것은 주신 것을 찾는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을 주셨다. 믿음이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다.
2. 감사를 찾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찾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다 나를 위해서 창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우주와 영계가 다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각양 아름답고 신기하고 좋은 것들이 다 나를 위해서 주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내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조건은 이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할 때! 이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감사하면 그것은 내 것이 되는 것이다.
하늘의 것도 내 것 땅의 것도 내 것, 이제 것도 내 것 장래 것도 다 내 것이라는 것이다. 감사할 때!
마11: 12절.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
모든 것을 감사하다보면 이 우주 안의 모든 것들이 다 점점 내 것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점점 내 것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이 우주 안에서 내가 감사를 찾으면 찾은 만큼 내게 더 많은 것이 돌아오고 내가 확장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감사의 축복이다!
그 은혜를 깨닫고, 감사할 것을 찾아 감사하다보면 내가 주님 품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염려는 사라지고 평안과 담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그랬다.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품안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서에 어인이 찍인 것을 알고도 돌아가...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사했던 것'이고, 사자 굴도 풀무불도 두려워하지 않고 우상 앞에 절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 100:4절.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
감사는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께 인도한다.
감사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문이다.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 안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사람들은 낙망하고 실망해도 여호와 하나님은 결코 실망시키신 적 없으시다.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사랑하시는 신실하신 주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너를 떠나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리라" 너는 내 품에 있다는 것이다. 영원히 너는 내 품에 있다는 것이다! 감사하고 찬송하라는 것이다.
- 기쁠 때도 감사하지만, 슬플 때도 감사하고 찬송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씀한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란다!
우리는 오늘도 주님 품안에 있기 때문이다!
3. 감사를 찾는 것은 기쁨을 찾는 것이다.
감사를 찾는 사람은 항상 기쁨과 즐거움으로 산다. 어머니 품속에 있는 아이가 아무런 염려를 하지 않는 것처럼,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런데 우리를 불평하게 하고 원망하게 할뿐만 아니라 고통과 좌절 가운데로 이끌어 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마귀 사단이다.
성령과 악령이 있다.
감사를 찾게 하는 것이 성령이요 감사를 찾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악령이다.
지혜로운 자가 있고 미련하고 불행한 자가 있다.
감사를 찾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이요 감사를 찾지 못하거나 잃어버린 자가 미련하고 불행한 사람이다.
왜 지혜롭고 왜 불행할까요
감사를 찾는 사람은 성령에게 붙들려 있기 때문에 점점 행복해지는 것이고, 감사를 찾지 못하는 사람은 악령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점점 불행해지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생활 속에서 감사할 것을 자꾸 자꾸 찾아야 하는 것이다.
감사할 것이 많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내가 뿌리지 않고도 거두게 하신 것'이 많다는 것이다. 수고한 것이 없음에도 내게 주어지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예로, 남자에게 시집 와서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살림살이 도맡아 해주는 여자들이야말로 남자들에게 '뿌리지 않고도 수확한 결실'이 아닌가 그녀가 시집오기까지 자라고 공부하고 여러 능력을 소유하게 되기까지 내가 해준 것이 무엇 있는가 그런데 전혀 일면식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던 한 남자에게 시집을 와서 이런 일 저런 일 다해주니 이것이야말로 '땀흘리지 않고 거둔 수확'이 아닌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여자에게 있어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생활 속에는 이와 같은 감사의 조건이 많이 있다. 행복한 삶이란 이러한 감사의 조건을 찾는 것이고 풍성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삶이다.
※ 감사를 찾는 것은 주님을 찾는 것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찾는 것이요 기 쁨을 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사를 찾는 것은 돈을 찾는 것이고 성공을 찾는 것이고 좋은 남편을 찾는 것이고 좋은 아내를 찾는 것이고 좋은 자녀를 찾는 것이고...
감사를 찾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제일 기쁘게 하는 것이요 여호와 하나님을 제일 사 랑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의 것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추수한 자가 찬송할것이라
사62:6-9
우리는 오늘 한해의 추수에 대한 결실을 감사 드리는 주일을 마지 했다.
감사의 내용을 이사야서를 통해 계시한 말씀 속에서 찾아보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어진다(벧전5:10)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으로 결실 맺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리자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였느니라"(40:5)의 말씀으로 시작하였다.
지금은 그 영광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결론
을 내리고 있다. 이사야60장에서 66장까지에서 "영광" 이란 말이 23번이나 나오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곳에는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첫째: 새로운 날의 여명(사60:1-22)
1절 "일어나 빛을 발하라"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잠에서 깨우치시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에 이제 새로운 날의 여명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는 태양 빛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예루살렘에 임한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은 한때 성막 안에 계셨다(출40:34-38). 그러나 이스라엘의 죄로 인하여 영광이 떠났다(삼상4:21). 그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에 임했다(왕상8:11) 그러나 나라가 우상을 섬기자 영광이 사라졌다(겔9:3;10:4).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게 되었다(요1:14). 그러나 나라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오늘날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교회,성도, 신부들 안에 거하고있다(엡2:20-22, 고전6:19-20). 그러나 이제 곧 그영광이 만인들이 볼 수 있도록 계시 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 가장 암흑기를 마지했었다. 그러나 이때가 가장 어두운 때가 아니라 앞으로 이 땅에 무서운 7년 환난이 임할 주의 날이 임할 때가(아모스5:18) 가장 어두운 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지상재림 하실 때 영광스러운 빛이 임할 것이다.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합2:14).
이때는 이스라엘 국가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새로운 날이 도래될 것이다(3,10-13)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메시아 예수그리스도를 경배하며 예물을 바치게 될 것이다(2:2-4)
60:5-7 "…. 열방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v12 "너를 섬기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파멸하리니 그 백성들은 반드시 진멸되리라"
v14 "너를 괴롭게 하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 엎드리어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의 시온이라 하리라.
15절-22절 말씀에서 주님은 앞으로 영광스러운 왕국의 기쁨과 경이를 설명하고 계신다.
17절 "내가 금을 가져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져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을 삼으며 의를 세워 감독을 삼으리니"
예수님께서 지상재림하셔서 이룩하실 이같은 일이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에서 예언되고있다.
둘째: 새 생활의 시작(사61:1-11)
61:1-9 예수님께서 나사렛의 회당에서 인용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셨다. (눅4:16-21).
이 말씀의 배경은 "희년" 을 바탕으로 다루고 있다(레위기 25:7) 모든 억누름에서, 모든 영적 빚에서 자유를 탕감 받게되어 새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2절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매 7년마다 유대인들은 안식년을 지키며 땅과 종을 자유롭게 돌려주어 새로운 시작을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난뒤에 영적인 "새 안식년" 을 시작한다. 죄의 멍에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으며 주님께 지은 죄의 빚을 청산케 되었다. 즉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살게되며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61:3). 즉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의의 옷을 입게되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께 불순종하던 때에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없는 동산 같으리니"(사1:30) 였는데 이제 주님이 다스리시는 왕국에서는 "물댄 동산"(사58:11)같게 된다. 그리고 모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도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많이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같게 된다(시1:1-3)
61:3 "....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61:8 "...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세울 것이라" 는 예레미야 31:31-37절에서 설명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주어진 새로운 언약의 축복이다(히10:1-18, 마26:28).
61:10-11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같이 주 여호와께서 의와 찬송을 열방 앞에 발생하게 하시리라"
이 구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대신하여 말하고 있다.
지금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해놓으신 모든 일을 감사하며 찬송 드리고 있다.
오늘 우리도 지나간 한해 동안 주님께서 해 놓으신 많은 일 가운데 이것을 특별히 기억하고 감사 드리는 추수 감사주일이 되기를 바란다.
55:10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의 추수 감사이다.
이들은 장례식에서 결혼식으로 옮겨졌다.
셋째: 새로운 이름의 부여(사62:1-12)
2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그의 목적이 달성 될 때까지 말씀하시며 일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는 시온 뿐 아니라 전 세계를 향하신 목적이며 약속이다.
예루살렘이 새 이름을 그리고 주님의 영광의 관이 될 때까지 이 땅에는 의도 없고 평화도 없다.
이스라엘은 부정한 아내로서 버림을 받았지만 이혼 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새로운 이름 헵시바 즉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를 받을 때에 모든 시련을 다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부를 기뻐하신다. 그래서 옛날 이름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54:1) 대신 뿔라 즉 "결혼한 바"의 새 이름을 부여받게 된다.
미국에서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편 성을 따라 새 이름을 받게된다. 이는 극히 성경 적이다.
본문말씀 62:6-12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백성들을 인도할 직분을 주었는데 그들은 충성치 못했다. (56:1) 지금은 그들에게 충성스런 파숫군을 주셔서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도록 하셨다
7절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 하시게 하라"
이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평강"을 구하라 하셨다 (시 122:6)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수확을 적으로 하여금 빼앗기지 못하게 약속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의 추수마당에서 수확의 기쁨을 누리도록 약속하셨다.
에스겔 40-48 이스라엘이 천년왕국 기간 중에 갖게될 성전을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거기에서 주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다. 그때서야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라나 오늘날 그들의 마음이 베일에 가려있다(고후 3:14-18) 그러나 그 때에는 눈을 뜨게 될 것이다.
62:10절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의 길을 예비하라 대로를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
이 대로는 긴급한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주님이 속히 오시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해야한다.
11절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이는 땅 끝에서 땅 끝까지 선포되는 말씀이다 주께서 오시면 새 이름을 주실 것이다
12절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
이 얼마나 놀라운 새 이름인가. 주님의 신부들도 거룩한 백성,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 찾은바 된자, 버리지 아니한 성읍의 새 이름이 주어졌다.
추수감사절을 지켜라 (본문 : 신명기 16:13-17)
본문 신명기 16장은 구약의 3대 절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1-8절은 유월절에 관한 규례이며, 9-12절은 칠칠절에 관한 규례입니다. 그리고 13-17절에서는 초막절에 관한 규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미 출애굽기나 레위기에서 3대 절기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데, 모세는 본 장에서 이에 관해 다시 한 번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신명기서 자체의 목적이 그러하듯이, 백성들로 하여금 그 절기를 지킬 때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깊은 의미와 교훈을 보다 분명히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추수감사절의 뜻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3대 절기
(신 16:12신 16:12)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지켜야 될 3대 절기를 명하셨는데(출 23:14-17; 34:18-24출 23:14-17; 34:18-24 레 23:4-8, 15-21, 34-43레 23:4-8, 15-21, 34-43), 유월절(무교절), 칠칠절(오순절, 맥추절),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이 그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 중 20세 이상의 모든 어른은 1년에 세 차례씩 반드시 중앙 성소에 올라가 절기를 지켜야 할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選民)으로서 지녀야 할 참된 신앙과 행위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신 16:16신 16:16)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무교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날을 기념하는 것이며, 칠칠절(七七節)은 맥추절로서 봄 농사를 통해서 얻은 수확과 풍작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초막절(草幕節)은 모든 가을 농작물의 수확과 과일의 수확을 끝마치고 드리는 절기입니다.
사람들도 일반적으로 각종 일들을 기념하기 위해 공휴일을 정하거나 날을 정하여 축하하고 축제를 베품으로 그 의미를 가슴속에 되새기도록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절기를 하나님께서 강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며, 또한 이스라엘이라는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과 결속을 다지고, 영적 각성의 계기를 삼고자 함입니다.
특별히 본문은 절기를 지킴에 있어서 명심해야 할 사항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절기에 연락하라'(14절)고 했습니다.
(신 16:14신 16:14)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宴樂)하되 이것은 절기에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도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해야 한다면, 우리 신약의 성도들은 이 절기를 보내면서 기뻐할 뿐 아니라 '영원히 주안에서 언제나 즐거워하는 것'을 의무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한 집에 잔치가 있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와서 식사를 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곳에는 어떤 사람이나, 심지어는 초청 받지 않은 거지라도 와서 식사를 하게 하고 함께 즐거워하며 기쁨을 나눕니다.
우리 자신이 즐거워 할 때 우리는 자녀와 노비와 객과 고아와 과부들 즉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궁핍한 자들에게 쓸 것을 공급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분의 귀천이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또한 빈부의 차이도 물론하고 이 절기를 지키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기쁜 절기로 지키라고 명하십니다.
둘째로, '온전히 즐거워하라'(15절)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음껏 즐거워하라', '충분히 즐거워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무엇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해야 하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실 것'을 인하여 감사하라는 것이고, 그 때에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 됩니다.
(신 16:15신 16: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모든 일에 더 많은 복을 주실 것을 인하여 온전히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감사는 믿음으로 주실 복을 바라보고 확신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믿음의 태도인 것입니다. 감사는 즐거워하는 마음이고 서로를 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상대적 빈곤감을 가질 뿐더러, 끊임없는 탐심을 갖고 만족치 못하고 불평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는 일평생을 병마와 싸워가면서 근근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들을 위해 ARS(자동응답시스템)로 모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는 불평이 얼마나 사치스런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복 주실 것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화란의 아덴에서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플리머스란 곳에 도착한 청교도 105명은 한 해의 추수를 마치고 하나님 앞에 감사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감사는 참으로 악조건 속에서였습니다. 그들 중의 거의 반이 험한 환경과 질병으로 인해 희생되었고, 추수물도 그리 풍족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추수감사주일의 기원이 된 것입니다.
2. 구약 절기의 의미
그러면 오늘날의 성도들이 구약의 절기를 같은 방법으로 철저히 준수할 필요가 있는가 아니면 모든 것이 폐지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이렇게 구약에 나타난 규례들은 모두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까지도 폐지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의미와 정신은 신약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하는 시대 상황에 맞춰서 이것을 새롭게 조명하고 그 의미를 확인, 발전시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그 성격에 따라 크게 도덕법(Moral law), 시민법(Civil law), 의식법(Ceremonial law)으로 구분됩니다.
도덕법은 신?구약시대를 막론하고 영구히 지켜야 하는 법인데 십계명이 이에 속합니다. 그리고 시민법은 대부분 그 시대와 상황에 국한하여 주어진 것으로 결혼 제도나 이혼, 금기된 음식 및 생활 습관 그리고 종에 관한 규례 등이 이에 속합니다.
마지막으로 의식법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표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들로 각종 제사 제도나 절기에 관한 규례가 이에 속합니다. 그런데 구약의 의식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부활, 승천 사건으로 말미암아 대부분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그 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 정결법(레 11:1-15:33레 11:1-15:33)이나 이스라엘의 3대 절기와 같은 의식법을 여자적(如字的)으로 지킬 필요는 없으나, 그 안에 있는 속뜻은 신약에 예수님의 정신과 의미로 이어지고 있으며, 그것을 사도 바울은 보다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골 2:16,17골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月朔)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貶論)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와 같은 의식법을 통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성결된 삶'의 원리와 정신을 오늘날의 성도들도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이나 십일조 절기 등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날과 절기에 관한 규례는 주의 영광을 위해서 지켜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롬 14:5롬 14:5)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은 의문(儀文)의 율법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는 의식법(Ceremonial law)으로서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를 깊이 깨달으며 그 근본 정신을 준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마 5:17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
'폐한다'는 것은 없애 버리는 것으로 '완전케 하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완전케 하다'는 말은 원래 '가득 채우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깊은 뜻을 드러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희미한 그림자적 내용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때 그 깊은 뜻이 무엇인지 바로 깨닫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목적은 율법이 목적하는 그 온전한 뜻과 속 깊은 내용을 완전히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서 입니다.
3. 추수 감사절
초막절은 40년 광야 생활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하며 가을에 농작물과 과일의 수확을 끝마치고 이를 창고에 저장한 후 7일 동안 지킵니다(출23:16; 34:22출23:16; 34:22). 이 때는 히브리 민간력으로 1월인데, 오늘날의 태양력으로는 9,10월경에 해당됩니다.
'초막절'이라는 단어는 소출을 위하여 포도밭에 초막을 지은 것에서 유래되었고, 또 이 절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였던 사실을 되새기기 위하여 가나안 땅에 새로운 장막을 짓고 그 곳에서 7일 동안 거처하며 지키므로 '장막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또 이 때 모든 곡식이 창고에 수장되어 있으므로, 일명 '수장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출 23:16; 34:22출 23:16; 34:22).
이 때에는 본래 3가지 일을 했습니다. 첫째, 곡식을 거두어들인 다음에 제일 좋은 곡식으로 추수(소득)의 1/10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1/10은 '온전한 십일조'라고 하였습니다(말 3:10말 3:10). 이것은 자신의 원천적인 소득 중 1/10을 모두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과된 의무(신 14:22신 14:22)로서, 충성과 순종의 표시로 신약에서도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주일과 절기 및 헌물은 우리의 삶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청지기적인 사고와 함께 구원의 감격과 감사와 기쁨을 동반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부채가 있는 사람은 추수감사절이 오기 전에 모든 것을 갚고 깨끗한 마음으로 절기를 지켰습니다.
셋째, 가난한 사람과 더불어 곡식을 나누면서 추수 감사절을 보냈습니다.
(신 16:16,17신 16:16,17)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라"고 한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 올 때 하나님을 형식적으로만 섬기지 말고, 진정한 마음으로 섬기라는 뜻입니다. 또 이 말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 년에 3번 절기를 지키는 것에 그치지 말고, 하나님께 진정 감사하는 증거를 보이라는 뜻입니다.
고대 팔레스틴의 풍습에 백성이 왕 앞에 나아갈 때 예물 없이는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뿐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것입니다(딤전 6:15딤전 6:15). 그러므로 우리가 그 분 앞에 나아갈 때 빈손으로 나아가지 말라는 권면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예물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중심한 신본주의적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출 23:14; 34:23출 23:14; 34:23).
(골 3:17골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결론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지키면서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해야 할 지를 상고해 보았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 기쁨과 감사로 나아와야 합니다. 또한 주신 복과 은혜를 인하여, 또 앞으로 주실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을 바라보며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에 참석할 때에는 신령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나올 뿐만 아니라, 정성스런 예물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절기를 통해 성도들은 자신이 과거 죄의 장막에 거하며 죄의 종노릇하던 자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전 가운데 온전히 거하게 된 자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적으로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신 16:15신 16: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이 사람의 감사 (본문 : 누가복음 19:1-10)
이번 달의 가이드 포스트에 보면 Pay a Pilgrim's Thank 라고 하는 제목으로 간단한 Article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첫 해에 미국의 청교도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라고 제목을 걸고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평안해서가 아닙니다. 성공해서도 아닙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여러분, 감사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진정한 감사, 감격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감격은 사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영과 자유와 무슨 형통함과 성공과 영광,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병든 곳에 오히려 가난한 곳에 아주 절박한 곳에 그 고통 중에 진정한 감사가 있습니다.
저는 종종 식탁에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내 일생 제일 음식으로 감사했던 때, 제일 큰 감사를 드렸을 때가 언제인가, 그 때 생각을 늘 합니다. 그래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밥투정은 안 합니다. 왜요? 그때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혼자서 피난을 나왔을 때, 1951년 정월입니다. 너무 어렵고 춥고 배고프고 괴로운데 혼자서 지나가다가 거기에 고구마 굽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고구마 냄새가 코에 싹 들어오니까요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더라구요. 도저히. 그래서 가지고 있던 시계, 이 팔목시계를 풀어서 주었습니다. 그래 돈은 뭐 통하지 않는 때니까. 이거를 주고 고구마를 달라고 했더니 고구마 네 개를 주었어요. 요새 팔목 시계는 흔하지만 그 때는요 온 동리에 나밖에 없었어요. 팔목시계 가진 사람이. 그런데 이 귀중한 시계를 풀어주고 고구마 네 개를 손에 들었는데 서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때 눈물이 똑똑똑똑 떨어지는데요 그 때에 감사했던 그 마음은 일생동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아무리 좋은 음식 아무리 좋은 여건에 있어도 그 때의 그 감사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이 뜻을 알 것 같습니다. 저들은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 견디지 못했던가. 그들은 먼저 건강을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1620년 12월, 추운 때입니다. 긴 긴 항해 중에 백열명으로 출발한 사람이 배 안에서 다 죽었습니다. 괴혈병과 각종 바이러스 병으로 죽고 48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절반이 살아남았습니다. 살아남은 데 대한 감사. 그리고 이만큼 건강을 지킨 데 대한 감사. 이것이 첫째 감사였습니다. 또한 의복과 거처가 문제입니다. 낯선 곳에 도착했는데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여기서 그들은 나무를 찍어서 오두막, 통나무집 오두막을 일곱 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통나무집에 들어가서 저들은 불을 피워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감사절입니다. 또한 음식으로 말하면 Plymouth 라고 하는 곳에 도착은 했지만 낯선 땅에 아무 것도 없는데 저들이 가지고 온 종자 몇 가지, 그 중에 보리와 밀을 심어보았지만은 토양이 달라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의 덕으로, 덕분으로 옥수수를 얼마 추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옥수수를 갖다 놓고 그리고 들에 뛰어 다니는 칠면조를 잡아서 그걸 구워놓고 감사절을 드렸습니다. 이 음식을 놓고, 그래서 지금도 미국에 가서 지내면 Thanksgiving 이 때쯤 되면은요 어느 식당 어느 가정이든지 온통 칠면조입니다. 아무리 먹어봐도 칠면조는 별 맛 없더라구요. 그래 나도 나만 그런가 해서 물어봤어요. 미국 학생들한테 "너희들 칠면조 맛있냐?" 그러니까 맛없데요. "닭하고 칠면조, 어느 쪽이 맛있냐?" 내가 여러 사람한테 물어 봤어요. "아 거 닭이 맛있지." 그럼 왜 칠면조를 먹느냐. 우리조상들이 이것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했기 때문이다. 그 전통을 따라서 그렇게 먹는 거라 그래요. 여러분, 참된 감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가장 어렵고 절박한 바로 거기에서 눈물로 고난 중에 진실한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Courage to Be 라고 하는 그 유명한 책에서 이렇게 역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고대인의 불행은 숙명과 죽음의 문제에서 왔다.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어떤 고난도 팔자요, 숙명이요, 운명이라고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운명에 저항할 생각을 못했어요. 그대로 그 많은 고생을 치르며 수 천년을 살아오게 됩니다. 중세기 사람들의 불행은 죄와 벌에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저주다. 죄에 내리시는 신의 저주다. 죄와 벌! 그 무서운 심판 앞에서 벌벌 떨면서 흑사병이 돌아도 저주다. 전염병이 돌아도 저주다. 홍수가 나도 저주다. 이렇게 몰아치는 무서운 저주 속에서 저들은 헤어나지 못하고 고생을 했습니다. 현대인은 그 불행의 원인이 생이 무의미에서 비롯된다고 신학자는 말합니다. 무의미함.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배고픈 것도 아니에요. 집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왜 그렇게 걱정이 많습니까? 왜 그렇게 고독해 하는 것입니까? 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겁니까? 왜 감사가 없고 왜 감격이 없습니까? 그만하면 감사 감격할 만도 한데. 뭐 때문이냐구요? 끝없는 욕심 때문이요. 더 가지려는 마음이 저 앞에 가 있기 때문에 요것 가지고는 못 살아요. 또 교만하기 때문이요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신앙 때문입니다. 어느 사이에 인간의 생각과 철학이 세속화되면서 사람은 불행으로 치닫기 시작을 했습니다.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그런고로 고마운 마음도 감사한 마음도 그 고마움에 따르는 행복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나타난 이 사람 삭개오는 특별한 감사를 드렸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현대인의 이미지를 가진 독특한 성격의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삭개오라는 사람. 우리가 잘 아는 얘기입니다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그 당시로 돌아가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세리장입니다. 로마 사람이 유대나라만 아니라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을 때입니다. 로마를 떠나서 살 수 없구요. 로마를 피해서 살수가 없어요. 로마 권력이 온 세계를 지배하는 때에 유대나라 역시 로마 권력 하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정치적 상황에서 대세를 잘 이용한 사람이요. 세상을 잘 요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세속적으로는 그는 세리의 장이요 권력자요 요새 말로 실세입니다. 실세올시다. 그리고 부자입니다. 로마를 대표한 총독 이하 군인들은 이 세리장 같은 사람을 가장 귀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얻지 못하면 정치도 못합니다. 로마 세력도 소용없습니다. 이 세리장이라는 이 사람은 부자요. 누구든지 어느 군인이든지 마을에 들어서면 세리장 앞에 무릎을 꿇게 되어있어요. 왜요? 그는 실세요 그는 부자이기 때문이에요. 그는 자기보다 더 높은 권력자하고 친하기 때문이에요. 이게 세리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성공한 사람이에요. 권력 있죠. 부귀하죠. 돈 있지요. 자 그런데 이 사람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고민입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등진 것 같은, 죄를 짓고 사는 것 같은 그런 고민이 있구요. 또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반 민족주의자라고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로마 사람을 위해 일하고 있으니까. 또 그리고 로마 사람의 힘을 빌어서 자기 권력과 자기 부를 취하고 있으니까 그 마음속에 갈등이 있습니다. 민족을 배반한 고통이 있습니다. 적어도 이만한 고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나름의 독특한 의식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왜요? 이대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현실대로는 안 된다는 거야. 이대로 세상이 오래갈 수는 없다. 어서 속히 메시아가 와서 새로운 질서, 새로운 평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그런 Messianic Expectation, 메시아 대망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큰 세력을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잘 살기 위해서 예수를 만나러 갔나겠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 누구처럼 병 고치려고 예수를 만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려하는 생각은 독특합니다. 왜요? 그는 소문에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좋지 못한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별명을 가진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열둘밖에 없는데 그 중에 하나가 마태입니다. 세관에 앉은 현장에서 불러서 제자를 삼았어요. 도대체 어떻게 어떤 분이면 저렇게 온 세계 사람들이 다 천대하고 온 이스라엘이 미워하는 죄인의 대명사로 부르고 있는 세리를 불러서 제자를 삼았단 말인가? 세리를 제자 삼은 그 사람이 누구냐? 세리의 친구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세리를 사랑한 그분이 누구냐고. 그런 분이 누구냐고 그 분을 보고 싶었던 겁니다. 자기도 세리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키가 작았어요. 많은 사람이 옹위해 가지고 밀어닥치는데 도저히 예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그는 뭐 체면이고 뭐고 불구하고 뽕나무로 기어올라갔어요. 그리고 지나가는 일행 속에 있는 예수님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그는 이 은총적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요. 이 한 번 있는 일생에 딱 한 번 있는 이 중요한 시간을 놓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가 기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뽕나무에서 예수님을 멀리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상황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를 어떻게 대하셨나 보세요. "우러러보시고" 그랬어요. 쳐다보았어요. 오히려 이상하게 됐지요. 삭개오가 예수님을 우러러 본 게 아니라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게 됐지요. 보셨다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Personally, 개별적으로 개인적으로 보아주신 거예요. 얼굴과 얼굴, 눈과 눈이 마주치는 시간입니다. 이게 아주 소중한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을 보듯이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에요. 지명하여 한 사람을 집중적으로 보신거예요. 삭개오를 보신 거예요. 즉 나를 보셨단 말입니다.
또 하나는 삭개오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여기에 주고받는 말이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충분히 알았습니다. 왜 저 사람이 뽕나무에 올라갔는지, 왜 나를 보려고 하는지, 왜 저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지 그 마음을 예수님은 읽으셨습니다. 그의 고민, 그의 깊은 관심, 그의 궁극적 관심을 예수님은 읽으셨습니다. 다 아셨어요. 무슨 긴말이 필요합니까? 이만하면 알지. 충분히 알았죠. 예수님은 삭개오의 마음을 다 알아주셨습니다. 그의 말을 통하지 않고 그의 행동을 통해서 그의 깊은 고민을 다 알아주셨습니다. 여기에 감격하고 있는 거예요.
또 한 가지는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님께서 하신 첫 번째 말씀입니다. 여기에 긴긴 설명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할 것이라. 세리의 집입니다. 온 유대 사람이 상종하지도 않고 인사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거지도 세리의 돈은 받지 않았답니다. 받았다가도 도로 던져 버렸답니다. 이렇게 더럽게 취급하는 세리의 집에 예수님은 오늘 밤 너희 집에서 자겠다. 원 세상에 이런 고마움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가장 큰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게 물질을 주시는 분입니까? 내게 지식을 주는 분입니까? 가장 소중한 것은 내 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의. 의인이 죄인의 집에 오시고 메시아가 죄인의 집에 오심으로써 그의 신분을 바꾸어 놓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너무 감사한 것이요.
이조 시대에 있었던 이런 일화가 전해집니다. 난리가 나서 왕이 피난을 가게 됩니다. 변장을 하고 신하들과 같이 몰래 도망을 해서 어느 시골로 숨어들었습니다. 그 촌부의 집에서 누군지는 모르지만 점잖은 어른들이 몇일 유하시겠다고 해서 그대로 묻지도 않고 정성껏 참 잘 대접을 했더랍니다. 대접을 받고 왕은 상황이 바뀌어서 환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궁한 다음에 생각하니 그 촌부가 너무 고마워요. 이 난리를 피하게 해 주었느니 말이요. 그래서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아 불러들이고 보니까 아이고, 이서방이라고 알았는데 이제 보니 지체 높은 왕이에요. 그 왕은 그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나를 이렇게 도와주었으니 무슨 소원이든지 말하게. 딱 하나의 소원을 들어주마." 뭐 땅이든 벼슬이든 뭐든지. 그럴 때 이 천부는 "아니에요. 저는 바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며칠 후에 제 환갑날이 되는데 애들과 함께 환갑 잔치를 하게 되는데 환갑잔치에 한 번 저희 집에 와 주시지요." 이제 왕이 거절하게 됐습니까? "그러지." 왕이 천부의 환갑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요새나 옛날이나 마찬가지요, 얼마나 많은 뇌물이 들어왔는지 그냥 그냥 부자가 됐답니다. 왕이 우리 집에 한 번 오신다. 한 번 모신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 것이냐? 내 신분이 달라지는 것이에요. 내 의가 달라지는 것, 사람이 달라지는 시간이에요 이 시간은.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셨다, 굉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느니라." 임마누엘입니다.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완전한 의롭다함을 얻는 엄청난 복을 내리십니다.
이제 보십시다. 이 사람의 감사가 무엇입니까? 삭개오는 바로 이 시간, 이 은혜 가운데서 첫째가 "즐거워했다" 그랬어요. 기뻐해야 됩니다. 감사는 기뻐하는데 있는 거예요. 기쁨이 없는 감사란 감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기쁜 얼굴로 고맙다고 해야지요. 고맙다는 말도 억지로 하는 건 고맙다는 말이 아니겠죠. 감사, 기쁨. 그 기쁨 자체가 은혜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응답이거든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물질을 얻었다는 것도 아니고 권세를 얻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집에 오신다는 것 때문에 그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때문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만족한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를 영접했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영접하고.
또 하나는 마음이 열렸습니다. 당장 입이 터졌어요. 마음이 열리면서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삭게오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삭개오는 지금 예수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돕는 분이다.'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내 재산 절반을 내서 가난한 사람을 돕겠습니다, 라고 마음이 열립니다. "토색한 것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습니다." 이 말은 율법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렇게 명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율법을 지키는 자로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참된 감사가 어디 있습니까? 원래 참된 감사는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Think, Thank 라는 말은 어원이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생각이 없으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어느 방향으로 생각하느냐,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감사하게 됩니다.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 못합니다. 얻은 것을 생각하고 내가 받은 것을 생각하고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할 수 있는 것이에요.
어떤 식물인간 된 남편을 위해서 수고하는 부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십년 동안을 시중을 해도 아무 보답이 없습니다. 말 한마디가 없어요. 너무 답답하고 괴로워서 이렇게 말하더만요. 눈을 한 번 뜨고 "여보 고맙소" 딱 한마디만 하는 것을 들어도 한이 없겠다 그래요. 아무리 수고해도 소용이 없어요. 반응이 없어요. 말이 없어요. 느낌이 없어요. 깨달음이 없어요. 이게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지요. 감사하는 마음, 이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그 깨달음 속에 있어요.
인간이 무상하다, 하는 것을 알면 불교인입니다. 인간의 삶에 도리를 알면 유교인입니다. 은혜를 알면 기독교인입니다. 오직 은혜를, 모든 것이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면 그가 바로 그리스도 인이요, 신앙인 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입에 감사가 없으면 그리스도 인이 아닙니다. 범사에 감사할 것입니다. 특별히 감격하는 것입니다. 감격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또한 감격이 간증으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 하는 실천상황이 여기서 나오고 있습니다. 베푸는 마음, 이것이 감사입니다. 기뻐하는 마음이 감사입니다.
여러분, 깊이깊이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깨닫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감격하고 이 감격한 마음을 행동에 옮겨 보세요. 이제부터 새로운 삭개오의 생이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405장에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워.' 이것은 죤 뉴우톤(John Newton)이라고 하는 분이 본래 노예상인이었습니다. 극악한 사람이었는데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은혜! 감격 감격합니다. 그 감격으로 주를 찬양하며 피곤 없이 한 평생 복음을 전하면서 살았습니다. 여러분 성공이 뭐겠습니까? 감사하는 것이 성공이요 기뻐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종은 울려 소리가 나야 종입니다. 그 마음에 벅찬 감격이 있고 감사가 있으면 바로 그가 행복한 자요 성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넉넉히 감사할 만큼 주께서는 은혜를 베풀어주었건만 우리는 이루지 못한 것, 못다 한 것, 얻지 못한 것만 생각하며 원망과 불평에서 헤어나지 못함을 주여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는 것은 주의 은혜를 깊이깊이 깨닫고 저 삭개오와 같이 즐거워하며 감격하며 주를 영접하며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베푸는 마음으로 바꿀 수 있는 그러한 주님의 사람들 되고 감사로 원망을 이기고 기쁨으로 모든 어두움을 물리칠 수 있는 주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본문 : 시편 136:1-4)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러한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 번 따라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다시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자."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잔치 날입니다. 더 많이 감사하는 날입니다.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하는 날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절입니다. 또 2천년대의 첫 번째 추수감사절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바쁜 일상으로 인해서 감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감사할 일이 수없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바쁜 일에 좇기다 보면 감사를 잊어먹고 있습니다. 성도가 감사를 잊어먹는 것은 하나님을 잊어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가 감사를 잊어먹은 것은 하나님을 잊어먹은 것이요, 예수님을 놓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잃어버린 감사가 회복되고, 잃어버린 신앙을 다시 회복하는 아주 좋은 기회를 우리가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우리가 누구에게, 무엇을, 왜 감사해야 하는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이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두 번 나옵니다. 첫 번째 감사는 고라신과 벳새다 고을에서였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0절로 26절 말씀에 그 말씀의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가장 많은 권능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실패한 것입니다. 속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기에 감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25절, 2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환경이 어려워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감사할 일이다, 그 말씀인 것입니다.
또 두 번째 감사는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있을 때입니다(요 11:41요 11:41). 깊은 슬픔과 절망이 사람들을 감싸고 있을 때 예수님은 감사했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장 40절로 41절에서 이렇게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요, 구원받은 성도는 구원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과 감사하는 조건이 달라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좋을 때, 감사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언제 감사했느냐고 하면서 불평해버리고 맙니다. 원망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는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좋을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뜻이 이루어질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니까, 나는 하나님 아들이 되었으니까,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나에게 있으니까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 다윗은 시편 37편 4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 우리가 생각할 때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성령과 말씀으로 우리를 돌보심에 우리는 또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순종할 말씀을 주신 것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을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또 받을 말씀이 있습니다.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 우리가 들을 수 있다는 것, 우리가 손으로 잡을 수 있다는 것, 이것만 가지고도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 지 모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일까,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산 예배, 산 제물 되는 것
첫째로, 산 예배드리고, 산 제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한다는 것은 산 예배, 역동적인 예배, 성령 충만한 예배, 말씀 충만한 예배. 예배를 산 예배로 드릴 때,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다, 그 말인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면,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산 제사로 드려져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라"(요 4:24요 4:24) 그랬습니다. 그렇게 드릴 때, 주님이 찾아오신다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려 "예배의 제사"를 드리고,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드려 "봉사의 제사"를 드려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몸과 마음을 드려 "산 제사, 산 예배"로 드리고, 시간과 물질을 드려서 "봉사의 산제사"를 드려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로 드려지는 예배와 봉사의 산 제사는 기적을 산출할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에 보면, 오병이어의 사건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4복음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감사 기도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한 소년의 정성어린 "감사의 헌신"이 그 기적을 낳게 했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 중 남자만 오천명입니다. 부녀자까지 수만 명이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빌립에게 "저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가 주라"고 했습니다. 그 때, 빌립은 계산했습니다. "예수님,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합니다." 그랬습니다. "장정 하루 품삯을 1데나리온으로 본다면, 이백 명이 일한 것을 가져야 떡을 먹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광야에서, 또 황혼 저녁에 그런 돈도 없고,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요 6:7요 6:7).
그러나 그 제자 안드레는 먹을 것을 찾으러 갔습니다. 어린 소년이 가져온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발견했습니다. 어린 소년에게 말을 합니다. "소년아, 우리 예수님이 이 많은 사람들을 다 먹이라고 말씀하신다. 너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나에게 주어서 이것을 예수님께 갖다드리면,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먹을 수 있단다." 그 소년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 고민했을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 점심 먹으라고 싸 주신 도시락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인데, 예수님 말씀을 듣다가 먹을 시간이 없어서 먹지 못했는데, 그런데 이것을 먹어야 허기를 면하고 배를 채울 수 있고 힘을 찾을 수 있고, 그래서 우리 집까지, 먼 집까지 갈 수가 있는데..."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컸어요.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컸어요. 예수님의 기적을 그는 똑똑하게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때 그 소년이 헌신하는 겁니다. "그래요. 내가 이것을 먹어야 허기를 채울 수 있어요. 이것을 먹어야 내가 기운을 차릴 수 있어요. 이것을 먹어야 내가 집에 갈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 드리는 일이라면,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서 드리는 일이라면, 내가 내놓을게요. 아저씨 가져가세요. 가져가세요." 어린 소년은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내놓는 헌신의 제사, 헌신의 감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받으신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먹여야 하는 사람들이 남자만 오천명, 부녀자까지 수만명. 어떻게 생각하면 "야! 제자 안드레야, 가져오려면 많이 가져오고 적게 가져오려면 가져오지 말지, 나만 왜 괴롭게 하느냐?"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먹여야 할 사람이 수만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보리떡 다섯 덩어리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우러러, "하늘을 우러러 축사했다" 그랬습니다. 그 축사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감사"의 의미가 있습니다(요 6:11요 6:11의 '축사'란 헬라어 '유카리스테오'로 '감사하다'는 말). 먹어야 할 사람은 남자만 오천명, 부녀자까지 수만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작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가지고 불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책망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감사하셨습니다. 떼어 주었더니 남자만 오천명, 부녀자까지 수만명이 배불리, 원대로 먹게 하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했습니다. 이 기적을 믿으시면 "아멘"하겠습니다. 이 기적이 여러분의 삶 속에도 그대로 일어나기를 원하시면 "아멘"하겠습니다.
둘째,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
두 번째,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가, 은혜
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됩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전 10:31)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자녀들은 그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현대인의 성경).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0절입니다. 자녀들은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19장 32절에 보면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부모와 어른들을 통해 생명을 탄생하게 합니다. 출생하게 합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태어난 생명을 유지하고, 자라게 하고, 보존합니다. 하나님이 아담 한 사람만은 직접 흙을 가지고 빚으셨습니다. 그 코에 생기를 '후~' 불어넣어서 사람되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하와를 만들 때는 그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고,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인인 하와를 만들어 아담에게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하나님은 단 한사람도 직접 사람을 만들지 아니하셨습니다. 자기 아버지와 자기 어머니를 통해서 사람을 이 땅에 태어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자 그러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를 낳게 하셨습니다. 그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을 낳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 혼자 일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하나님이 함께 일하셔서 우리를 태어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럼으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저나 여러분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실 때, 여러분의 아버지가 없었다면 여러분의 어머니가 없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이 땅에 낳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일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지 않는 것은 생명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가인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분명 가인과 아벨에게 예배에 대해서 가르쳤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아벨은 그 아버지, 어머니가 가르쳐 준 그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아버지 아담, 어머니 하와의 말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불순종과 불공경은 하나님 앞에 잘못된 예배를 드리고, 형제를 살인하는 살인자의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며 사는 길이기도 한 것입니다.
한국은 오천년 역사를 이어온 나라입니다. 작은 나라입니다. 지하자원도 없는 나라입니다. 외침도 많았던 나라입니다. 내란도 많았던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오천년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이 땅에 종교가 들어오기 전에, 유교가 들어오기 전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기독교도 들어오기 전에 한국, 우리 민족은 효 정신이 있었습니다. 가족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효 정신과 가족제도가 이 작은 나라, 힘없는 나라, 이 선한 나라, 외침도 많이 받은 나라, 오천년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서구문화가 들어오면서 안타깝게도 효 정신이 죽었습니다. 가족제도가 파괴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기독교 신앙으로 착각했습니다. 서구문화가 몽땅 다 성경문화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효 정신도 버리고, 가족제도도 버렸습니다. 그것이 "현대인"인 것처럼 알았습니다. 그것이 "지식인"인 것처럼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다시 보고, 다시 보니까 성경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우리가 할 일이 뭐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우리가 추수감사 주일을 맞아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다면, 그 감사하는 것 중에 우리가 감사할 것이 뭐냐? 그 감사의 조건이 무엇이냐? 감사하는 행위가 무엇이냐?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하나님 주신 은혜, 하나님 주신 사랑, 하나님 주신 복을 빼앗기지 말고, 누리고 살아가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
그 다음에 세 번째입니다.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
그렇습니다. 이웃을 향한 감사는 그 이웃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주셔서 영혼구원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불신 이웃이 있다면, 아직 예수 믿지 않는 이웃이 있다면, 이는 전도의 상급을 위해 하나님이 붙이신 것이다. 그렇게 알아야 됩니다. 만약 주위에 나를 괴롭히는 이웃이 있다면, 그는 나의 인격과 삶을 연단 시키는 "가시"(고후 12:7고후 12:7)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시편을 많이 기록한 다윗, 목동이 이스라엘 왕이 된 다윗,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다윗, 많은 시편을 기록한 다윗, 그 많은 시편은 그가 왕이 되어서 호위호식 하면서 왕궁에 있을 때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광야에서 연단 받을 때, 고통 당할 때, 아픔을 당할 때, 시험을 당할 때, 괴로움을 당할 때 지은 시편이 다 그 은혜로운 시편들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웃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이웃을 향한 원망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웃이 나에게 아픔을 준다면, 고통을 준다면, 모난 나의 삶을 부드러운 삶으로, 둥근 삶으로, 원만한 사람으로, 은혜로운 사람으로, 성령의 사람으로, 말씀의 사람으로, 예수 사람으로 바꾸어주는 것으로 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출애굽기 16장 8절입니다. 모세가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우리가 사람에게 원망하는 것은, 그것은 곧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다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다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사람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럼으로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마 22:39마 22:39) 그랬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은 무엇이냐?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이다, 그 말인 것입니다.
넷째, 어려움 당하는 이들을 돕는 것
그 다음 네 번째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돕는 겁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돕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제의 특징은 모든 이들이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랬습니다. 특히 추수감사 절기에, 특히 감사절기 때는 어려움 당하는 이들과 함께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너만 먹지말고, 네 가정만 먹지말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과 함께 먹어라. 함께 즐겨라. 함께 잔치를 하라"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16장 11절입니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약한 자들을 위로하고 돕도록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건강을 주셨습니까?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왜 나에게 물질을 주셨습니까? 물질이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왜 나에게 은사와 영적인 능력을 주셨습니까? 전도하고, 그들을 신앙인으로 잘 돌보아주고, 보살펴 주라고. 지금 이 땅에 수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업하다가 부도나서 어려움을 당하는, 직장에서 일하다가 직장을 잃어버린 실업자. 그 뿐이 아닙니다. 아버지, 어머니 없이 가족을 이끌고 나가는 소년 소녀 가장이 있습니다. 고아가 있습니다. 과부가 있습니다. 그리고 생활보호 대상자, 자녀 없는 독거 노인. 자녀가 있어도 부모를 돌보지 못해 생긴 독거 노인이 있습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외국에서 한국에 가면, 돈 좀 벌어보겠다고 왔다가 직장을 잃어버렸거나 직장에서 노동을 착취당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외국 근로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다 우리의 도움을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도움의 손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움은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필요할 때 주는 것이 도움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는 것이 도움입니다. 외로운 사람을 위로해 주는 것이 도움입니다. 배부른 사람에게 내 밥이 남으니까 좀 먹을래? 아닙니다. 돈이 많은 사람에게 돈 자랑하기 위해서 내가 좀 사줄게 먹을래? 그것이 아닙니다. 도와준다는 것은 뭐냐? 내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상대가 필요해서 주는 것. 이것이 도와주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처럼 어려운 중에서도 자원하여 돕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 2절로 3절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힘들어 할 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또 구약에서 잠언서 11장 24절로 25절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것이 뭐냐구요?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돕는 겁니다.
다섯째, 자연을 잘 돌보는 것
다섯 번째입니다. 자연을 잘 돌보는 것, 자연을 잘 돌보는 것. 그렇습니다. 자연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또 그 은혜의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뭐냐구요? 에덴동산을 지어서 아담에게 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뭐냐구요? 이 삼라만상을 다 지으셔서 인간이 생활할 수 있도록, 마음대로 공기를 마시며, 햇빛을 받으며, 물을 먹으면서, 꺼지지 않는 땅에서, 땅에서 나오는 생물로 말미암아 먹고살게 만들어 주신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대한 사랑의 증거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우리 예수님으로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신 것만이 아닙니다. 이 자연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은 수도 없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난 일년간도 자연을 통해서 우리를 먹이셨습니다. 또 입히셨습니다. 또 돌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연을 파괴한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는 자연을 보존합니다. 자연을 아낍니다. 자연을 돌봅니다. 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도록 돌보아 주는 이런 삶. 이것이 뭐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연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 자연의 주인은 하나님. 자연을 섭리하시는 분도 하나님. 자연을 통해서 우리에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분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서 12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의인이 누구냐구요?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이 있는 것. 나무나 풀이나 새들이나 짐승이나 어족이나, 이런 것들을 돌아보는 것이 의인이다, 그랬습니다. 악인은 누구냐구요? 그런 것에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잔인하게 사는 삶, 이것이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자연을 보호해야 의인답게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자연을 보호하지 아니하고, 자연을 훼손하고, 그것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잔인하게 죽여버린다면, 꺾어버린다면, 못살게 만든다면, 그것에 대해 성경은 말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악인이다.
오늘은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주일입니다. 21세기를 맞이하는 문턱에서 맞는 2000년에 첫 번째로 맞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감사는 은혜를 받는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은혜를 받는 그릇."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려면, 우리는 감사로 그릇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감사가 없으면, 받은 은혜가 다 쏟아집니다. 엎어집니다. 빼앗깁니다. 잃어버립니다. 우리 모두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시편기자가 말을 합니다. 시편 136편 1절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 모두 다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 주일을 맞이해서 마음껏, 힘껏, 재능껏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시다. 사람들에게도 감사합시다. 자연에게도 감사합시다.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마음껏 누리면서 행복하고, 즐겁게, 복되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날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은혜 베풀어주시는 주님, 고맙습니다. 진실로 오늘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 주일, 2000년대 맞아서 첫 번째 맞는 추수감사 주일,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 귀한 음성을 듣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감사함으로 은혜를 담는 그릇들을 다 준비하게 하여 주옵소서. 받은 은혜를 누리며, 베풀며, 주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다 (본문 : 에베소서 5:20-21)
오늘은 일년에 한번씩 지키는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추수감사 주일은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감사하고 사는 사람인가를 한번 점검해 본다는 의미에서 굉장히 뜻이 있는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지수가 얼마나 높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한번 살펴보는 것입니다.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습니다. 감사지수가 낮은 사람일수록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매우 강한 어조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여러분이나 저나 이 말씀을 읽으면 제일 먼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범사에'라는 말과 '항상'이라는 말입니다. 감사하라고 하는 말에 '범사'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으면 우리는 왠지 모르게 부담을 느낍니다. 감사하라는 말 앞에 '항상'이라는 수식어가 있으면 기가 죽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범사'라는 말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어떤 일을 당하든지 무조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항상'이라는 말은 시종일관, 어떤 상황을 만나도 변함 없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강도 높은 의미를 가진 말씀을 읽으면서 가책 받지 아니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 그 가운데는 목사인 저 자신이 가장 많은 가책을 받을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를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항상 감사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때가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려고 무척 노력을 하고 또 감사도 많이 하지만 이 본문 말씀이 요구하는 선에는 아직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저 자신이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담을 느낍니다. 저같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잘못하면 이런 말씀도 그저 쉽게 이야기하고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남의 말 할 때는 쉬운 겁니다. 자신이 지키지 못해도 가르칠 때는 쉬운 겁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1988년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한창 전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을 때 중요한 이슈가 사형 폐지론이었다고 합니다. 민주당 후보였던 마이클 듀카키스라는 후보는 사형 폐지론을 주장했습니다. 사형제도는 없애야 된다며 전국을 누비면서 유세를 했습니다. 어느 날 CNN의 토크쇼에 그가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쇼에는 유명한 버나드 쇼라는 앵커가 담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듀카키스를 앞에 놓고 이 버나드 쇼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사형제도를 폐지하라고 주장 하신다죠?" "네, 그렇습니다." "참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 묻겠습니다. 선생님, 만약에 선생님의 아름다운 그 부인이 괴한에게 끌려가서 강간을 당한 후 살해당했다고 합시다. 나중에 그 범인이 잡혔을 때 선생님은 여전히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고서 이 사람은 당황했습니다. 머뭇머뭇하고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수천 만 명의 시청자들이 보고 있었는데 이 장면에서 그들이 받은 인상이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자기와 상관이 없으니까 사형 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지 진짜 자기 일이 되면 그런 소리를 할 사람 아니라는 인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토크쇼 때문에 그가 대선에서 패배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는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할 때에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하고 설교하기는 쉽습니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하고 얼마든지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좀더 진지하게 이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어 가는 아내를 쳐다보는 남편이 과연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오랜 지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아무리 기도하고 부르짖어도 고쳐주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병은 점점 더 깊어 가는 자신을 보면서 과연 그 입에서 감사가 나올까요? 평생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야 될 어린 장애아인 자녀를 갖고 씨름하는 부모가 그 입에서 정말 감사가 나올까요?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력서를 수십 통 써 가지고 다니면서 취직을 해보려고 하지만 회사에서 면접 한 번 하지 못하고 연거푸 퇴짜를 맞는 젊은이의 입에서 과연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말이 나올까요? 내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정말 감사할 수 있을까요? 저나 여러분이나 이런 입장에서 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이 말씀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비현실적인 말씀입니다. 이상론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은 적당히 보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태도로 이 말씀을 넘겨도 괜찮을까요?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자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놓고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꼭 깨달아야 됩니다.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지, 왜 항상 감사하라고 하시는지 이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름으로'라는 말을 '때문에'로 바꾸어도 전혀 잘못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지금 말씀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것은 너무 비현실적인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변명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한번 여러분 마음에 되새겨 보십시오. 그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의 죄를 짊어지고 저 무지하고 잔인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흘만에 그를 죽음에서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의 옷자락을 믿음으로 붙드는 사람은 어떤 죄를 범했든지 어떤 과거를 가졌든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세례 받으시는 형제 자매 여러분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공로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어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이 말은 "내가 너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노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기가 막힌 신분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이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그 예수님을 우리는 마음에 모시고 삽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예수님 한 분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이 가지고 즐기는 것이 나에게 없다 할 지라도 나에게 예수님이 계신다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도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설혹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 할 지라도 예수님 한 분만 소유하고 그분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진정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을 찾았다면 그 사람은 언제든지 감사할 수 있고 어떤 조건에서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찬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런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이 말씀이 나와 별로 관계가 없다고 밀치면 안됩니다. 만약 지금까지 예수님 때문에 범사에 항상 감사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면 옥 목사가 가슴에 가책을 받고 여러분에게 고백하듯이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이것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시고 고쳐야 됩니다.
우리나라에 영감 있는 시인이 있습니다. 송명희 여사를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뇌성마비로 한번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로 온 몸이 비비 꼬여서, 말 한마디를 하려고 하면 죽다 살아나는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해야 할 정도로 일급 장애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얼마나 많은 시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 시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가슴에 저미어 오는 감동이 있지 않습니까? 그가 쓴 시 가운데 '나'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못하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보는 것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가만히 음미를 해 보십시오.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까? 뇌성마비로서 남이 가진 것의 90%를 못 가진 자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마음을 가득히 채웠습니다. 그러자 무엇이라고 감사합니까? 남이 갖지 못한 것 내게 있고 내가 가진 것 남이 없는 것을 비교하면서 오히려 '주님, 나는 세상 사람이 가지고 즐기는 것 없어도 예수님 한 분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눈으로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항상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아름다운 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수준에 저 자신이 도달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저만이 아닙니다. 제가 사랑하는 여러분들 모두가 이런 수준에까지 올라가기를 원합니다.
많이 가졌다고 감사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건강한 사람 중에 감사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자기 뜻대로 다 소원성취 하는 사람 입에서 감사가 나오는 것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저는 수만 명을 상대하고 삽니다. 없습니다. 진정한 감사를 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진짜 감사는 누구에게서 나오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아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면 진정한 감사가 나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감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명령하시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명령하실 때에는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뒤따라 보내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하나님 저는 못합니다." "잔소리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해. 내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도록 은혜를 줄게."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라." "어떻게 항상 감사합니까?" "할 수 있어. 내가 네게 능력을 준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명을 하면 안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결론을 하나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것만큼 믿습니다. 누구를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앞길이 막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옵니까? "하나님, 제 앞길 캄캄하지만 주님이 제 앞에 있는 구름을 걷어내고 어둠을 쫓아 주실 날이 올 줄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시니 이런 고난을 주시는 줄로 압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감사하는 사람의 믿음은 알아줘야 합니다. 감사하는 것만큼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어느 정도 믿고 계십니까? 감사하는 것만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행복할 수 있습니다. 100평 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감사가 없으면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스무평 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눈만 뜨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그 입에서 찬송이 나올 정도로 주님 앞에 감사하는 심령을 가지면 그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행복을 누가 빼앗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다릅니다. 누구하고 다릅니까? 세상 사람하고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입만 열면 불평이 심합니다. 불평은 하지 않을 지 모르지만 감사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입에서 계속 감사가 나옴으로써 내가 그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감사가 없습니까? 그러면 그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강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천성적인 장애를 안고 나온 자녀를 가진 부모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어떤 자매의 말을 들으면서 저 자신이 자주 도전을 받습니다.
"목사님 우리 애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복을 받고 있는지 아십니까?" 사실 말이 아닐 것입니다. '복은 무슨 복인가?' 우리는 당장 그렇게 느낍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 애 때문에 가정이 얼마나 화목한지 모릅니다. 우리 애 때문에 우리 아빠가 예수 믿고 돌아왔습니다. 아마 애가 저러지 않았으면 아빠는 예수 안 믿었을 것입니다. 우리 애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잘 살아도 교만하지 않을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 애 때문에 세상에서 천대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 고통 당하는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이 애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주신 복이 보통 많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이 사람만큼 강한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누가 이 사람을 꺾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습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 좋아집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 행복해 집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세상 사람 앞에 매력적인 존재가 됩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 강해집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오늘부터 돌아가셔서 의도적으로 감사하십시오. '나는 예수님 믿는 사람이다. 예수님 때문에 나는 무조건 감사할 수 있어.' 하면서 감사하면, 지금까지 불평하던 것을 감사하면, 지금까지 남을 원망하던 것을 거꾸로 뒤집어서 감사하면, 지금까지 만족하지 못하던 것을 감사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날보고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나는 감사해야 돼. 아버지에게 순종해야 돼.' 하면서 어떤 형편에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감사할 것들을 찾아 하나님 앞에 감사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이 좋아집니다. 우리가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강해집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에게 매력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런 멋있는 자녀가 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아멘.
감사하는 생활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5:16-18)
오늘은 1년에 한 번씩 지키는 추수감사주일이다. 우리의 삶에서 잃어버린 감사를 다시 찾는 기회이기도 하다. 현대인은 일상생활에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많이 잊어버렸다. 감사하다는 말보다는 서로 원망하고 불편하며 비판하고 상처 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살아간다. 그러기에 문명은 더 발달되고 살기는 더 편리해지고 물질적으로는 더 풍요해졌지만 그 내면적인 삶은 더 깡마르고 행복하지는 못하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우리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드는 심금을 울려주는 말씀인가?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항상 삶을 즐겁게 살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감사하며 사는데 있다.
이 세 가지, 항상 기뻐하는 것과 쉬지 않고 기도하는 생활,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은 서로 분리된 별개의 것 같지만 사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은 셋이 아니고 하나이다. 항상 기뻐하는 삶은 항상 감사하는 삶과 일맥상통한다. 우리의 삶에서 기쁨이 사라질 때 감사도 메마르게 된다. 우리의 삶 속에 참된 감사가 없으면 기쁨도 있을 수 없다. 이처럼 기쁨과 감사는 행복한 삶의 양면이요 안과 밖이다. 우리 마음 깊숙이 에서 억제할 수 없는 기쁨이 용솟음 칠 때 우리는 자연히 우리의 삶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과 감사는 결국 기도하는 삶에서 싹튼다. 우리의 기도만이 폭풍 속에서도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기쁨의 유일한 샘터요 감사의 물줄기이다. 우리가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가? 아니 역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살아가며, 모든 사건을 기도하는 정성으로 처리하는 사람에게는 손실과 실패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삶의 지혜와 용기가 솟아나는 것이다.
유명한 성경주석가 메튜 헨리는 그가 도적을 만났을 때 이런 간증을 하였다.
첫째, 전에는 도적을 만난 일이 없는데 처음으로 도적을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하고, 둘째는, 그들이 내 지갑만 훔쳐가고 내 생명을 빼앗아 가지 않은 것을 감사하며, 셋째, 그들이 비록 내 물건을 가지고 갔지만 별로 많은 것을 잃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 넷째, 내가 도적질을 하지 아니하고 도적을 만난 것을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그는 도적을 만난 손실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다. 우리도 좀더 깊이 생각해 보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실패와 손실 속에서도 여러 가지로 감사할 수 있게 된다.
스위스의 격언에는 '항상 노래하기를 원하는 사람만이 노래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감사의 노래를 부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보다 더 풍성한 감사의 삶이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8세 때 소경이 되었지만 유명한 찬송가 작사자가 된 Fanny Crosby는 이렇게 자신의 신앙을 노래로 읊었다.
'비록 내가 보지 못하지만 아, 나는 얼마나 행복한 영혼인가! 이 세상에서 나는 만족하기를 배웠노니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하는 얼마나 많은 축복을 내가 누리는가! 소경이기에 나는 많은 사람들이 눈물 흘리고 탄식하는 일을 나는 하지 않노라'고 감사했다.
이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감사의 삶을 터득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고백할 수 없는 삶의 간증이다. 사실 그렇다. 눈으로 보기 때문에 갖고 싶어하고 욕심을 부리고 시기질투 하며 범죄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어떠한 환경과 삶의 조건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감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물질적인 감사이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축복이라든가 이익을 얻었을 때 기뻐하고 감사한다. 어린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 주면 온 세상을 얻은 듯 기뻐하고 고마워한다. 그러나 그 장난감을 빼앗길 때 온 세상을 잃은 듯이 슬퍼한다. 이것은 어른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종류의 감사를 우리는 물질적 감사 또는 경제적 감사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감사를 항상 물질적인 측면에서 측정해 보는 감사이다.
둘째는 철학적 감사이다.
철학적 감사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넘어져 다리를 다쳤다. 그러나 일어나 목이 부러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하고 감사했다. 이런 종류의 감사를 철학적 감사 또는 사변적 감사라고 말할 수 있다. 더 큰 손실을 생각하므로 적은 손실에 대해 위로 받으려는 소극적인 감사이다.
셋째는 크리스천의 감사이다.
물론 크리스천의 감사에도 위에서 말한 물질적인 감사와 철학적 감사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감사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보다 더 깊은 곳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한 사죄의 은총과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삶 그 자체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삶이기에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바울은 옥중에서도 찬송할 수 있었고 굶주림과 매맞음과 역경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는 자기의 연약함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었다. 그는 풍부에서뿐만 아니라 가난과 궁핍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어떻게 그러한 삶이 가능하였는가? 그것은 그가 삶 자체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물질적인 것에 감사의 근거를 두면 범사에 감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의 근거를 영원한 생명이시오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 둘 때 우리는 역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고 실패와 손실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추수감사절을 지켜라 (본문 : 신명기 16:13-17)
본문 신명기 16장은 구약의 3대 절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1-8절은 유월절에 관한 규례이며, 9-12절은 칠칠절에 관한 규례입니다. 그리고 13-17절에서는 초막절에 관한 규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미 출애굽기나 레위기에서 3대 절기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데, 모세는 본 장에서 이에 관해 다시 한 번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신명기서 자체의 목적이 그러하듯이, 백성들로 하여금 그 절기를 지킬 때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깊은 의미와 교훈을 보다 분명히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추수감사절의 뜻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3대 절기
(신 16:12신 16:12)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지켜야 될 3대 절기를 명하셨는데(출 23:14-17; 34:18-24출 23:14-17; 34:18-24 레 23:4-8, 15-21, 34-43레 23:4-8, 15-21, 34-43), 유월절(무교절), 칠칠절(오순절, 맥추절),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이 그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 중 20세 이상의 모든 어른은 1년에 세 차례씩 반드시 중앙 성소에 올라가 절기를 지켜야 할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選民)으로서 지녀야 할 참된 신앙과 행위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신 16:16신 16:16)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무교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날을 기념하는 것이며, 칠칠절(七七節)은 맥추절로서 봄 농사를 통해서 얻은 수확과 풍작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초막절(草幕節)은 모든 가을 농작물의 수확과 과일의 수확을 끝마치고 드리는 절기입니다.
사람들도 일반적으로 각종 일들을 기념하기 위해 공휴일을 정하거나 날을 정하여 축하하고 축제를 베품으로 그 의미를 가슴속에 되새기도록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절기를 하나님께서 강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며, 또한 이스라엘이라는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과 결속을 다지고, 영적 각성의 계기를 삼고자 함입니다.
특별히 본문은 절기를 지킴에 있어서 명심해야 할 사항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절기에 연락하라'(14절)고 했습니다.
(신 16:14신 16:14)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宴樂)하되 이것은 절기에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도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해야 한다면, 우리 신약의 성도들은 이 절기를 보내면서 기뻐할 뿐 아니라 '영원히 주안에서 언제나 즐거워하는 것'을 의무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한 집에 잔치가 있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와서 식사를 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곳에는 어떤 사람이나, 심지어는 초청 받지 않은 거지라도 와서 식사를 하게 하고 함께 즐거워하며 기쁨을 나눕니다.
우리 자신이 즐거워 할 때 우리는 자녀와 노비와 객과 고아와 과부들 즉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궁핍한 자들에게 쓸 것을 공급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분의 귀천이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또한 빈부의 차이도 물론하고 이 절기를 지키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기쁜 절기로 지키라고 명하십니다.
둘째로, '온전히 즐거워하라'(15절)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음껏 즐거워하라', '충분히 즐거워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무엇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해야 하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실 것'을 인하여 감사하라는 것이고, 그 때에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 됩니다.
(신 16:15신 16: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모든 일에 더 많은 복을 주실 것을 인하여 온전히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감사는 믿음으로 주실 복을 바라보고 확신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믿음의 태도인 것입니다. 감사는 즐거워하는 마음이고 서로를 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상대적 빈곤감을 가질 뿐더러, 끊임없는 탐심을 갖고 만족치 못하고 불평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는 일평생을 병마와 싸워가면서 근근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들을 위해 ARS(자동응답시스템)로 모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는 불평이 얼마나 사치스런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복 주실 것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화란의 아덴에서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플리머스란 곳에 도착한 청교도 105명은 한 해의 추수를 마치고 하나님 앞에 감사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감사는 참으로 악조건 속에서였습니다. 그들 중의 거의 반이 험한 환경과 질병으로 인해 희생되었고, 추수물도 그리 풍족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추수감사주일의 기원이 된 것입니다.
2. 구약 절기의 의미
그러면 오늘날의 성도들이 구약의 절기를 같은 방법으로 철저히 준수할 필요가 있는가 아니면 모든 것이 폐지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이렇게 구약에 나타난 규례들은 모두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까지도 폐지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의미와 정신은 신약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하는 시대 상황에 맞춰서 이것을 새롭게 조명하고 그 의미를 확인, 발전시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그 성격에 따라 크게 도덕법(Moral law), 시민법(Civil law), 의식법(Ceremonial law)으로 구분됩니다.
도덕법은 신?구약시대를 막론하고 영구히 지켜야 하는 법인데 십계명이 이에 속합니다. 그리고 시민법은 대부분 그 시대와 상황에 국한하여 주어진 것으로 결혼 제도나 이혼, 금기된 음식 및 생활 습관 그리고 종에 관한 규례 등이 이에 속합니다.
마지막으로 의식법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표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들로 각종 제사 제도나 절기에 관한 규례가 이에 속합니다. 그런데 구약의 의식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부활, 승천 사건으로 말미암아 대부분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그 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 정결법(레 11:1-15:33레 11:1-15:33)이나 이스라엘의 3대 절기와 같은 의식법을 여자적(如字的)으로 지킬 필요는 없으나, 그 안에 있는 속뜻은 신약에 예수님의 정신과 의미로 이어지고 있으며, 그것을 사도 바울은 보다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골 2:16,17골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月朔)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貶論)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와 같은 의식법을 통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성결된 삶'의 원리와 정신을 오늘날의 성도들도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이나 십일조 절기 등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날과 절기에 관한 규례는 주의 영광을 위해서 지켜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롬 14:5롬 14:5)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은 의문(儀文)의 율법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는 의식법(Ceremonial law)으로서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를 깊이 깨달으며 그 근본 정신을 준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마 5:17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
'폐한다'는 것은 없애 버리는 것으로 '완전케 하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완전케 하다'는 말은 원래 '가득 채우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깊은 뜻을 드러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희미한 그림자적 내용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때 그 깊은 뜻이 무엇인지 바로 깨닫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목적은 율법이 목적하는 그 온전한 뜻과 속 깊은 내용을 완전히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서 입니다.
3. 추수 감사절
초막절은 40년 광야 생활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하며 가을에 농작물과 과일의 수확을 끝마치고 이를 창고에 저장한 후 7일 동안 지킵니다(출23:16; 34:22출23:16; 34:22). 이 때는 히브리 민간력으로 1월인데, 오늘날의 태양력으로는 9,10월경에 해당됩니다.
'초막절'이라는 단어는 소출을 위하여 포도밭에 초막을 지은 것에서 유래되었고, 또 이 절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였던 사실을 되새기기 위하여 가나안 땅에 새로운 장막을 짓고 그 곳에서 7일 동안 거처하며 지키므로 '장막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또 이 때 모든 곡식이 창고에 수장되어 있으므로, 일명 '수장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출 23:16; 34:22출 23:16; 34:22).
이 때에는 본래 3가지 일을 했습니다. 첫째, 곡식을 거두어들인 다음에 제일 좋은 곡식으로 추수(소득)의 1/10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1/10은 '온전한 십일조'라고 하였습니다(말 3:10말 3:10). 이것은 자신의 원천적인 소득 중 1/10을 모두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과된 의무(신 14:22신 14:22)로서, 충성과 순종의 표시로 신약에서도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주일과 절기 및 헌물은 우리의 삶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청지기적인 사고와 함께 구원의 감격과 감사와 기쁨을 동반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부채가 있는 사람은 추수감사절이 오기 전에 모든 것을 갚고 깨끗한 마음으로 절기를 지켰습니다.
셋째, 가난한 사람과 더불어 곡식을 나누면서 추수 감사절을 보냈습니다.
(신 16:16,17신 16:16,17)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라"고 한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 올 때 하나님을 형식적으로만 섬기지 말고, 진정한 마음으로 섬기라는 뜻입니다. 또 이 말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 년에 3번 절기를 지키는 것에 그치지 말고, 하나님께 진정 감사하는 증거를 보이라는 뜻입니다.
고대 팔레스틴의 풍습에 백성이 왕 앞에 나아갈 때 예물 없이는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뿐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것입니다(딤전 6:15딤전 6:15). 그러므로 우리가 그 분 앞에 나아갈 때 빈손으로 나아가지 말라는 권면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예물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중심한 신본주의적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출 23:14; 34:23출 23:14; 34:23).
(골 3:17골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결론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지키면서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해야 할 지를 상고해 보았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 기쁨과 감사로 나아와야 합니다. 또한 주신 복과 은혜를 인하여, 또 앞으로 주실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을 바라보며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에 참석할 때에는 신령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나올 뿐만 아니라, 정성스런 예물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절기를 통해 성도들은 자신이 과거 죄의 장막에 거하며 죄의 종노릇하던 자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전 가운데 온전히 거하게 된 자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적으로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신 16:15신 16: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이 사람의 감사 (본문 : 누가복음 19:1-10)
이번 달의 가이드 포스트에 보면 Pay a Pilgrim's Thank 라고 하는 제목으로 간단한 Article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첫 해에 미국의 청교도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라고 제목을 걸고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평안해서가 아닙니다. 성공해서도 아닙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여러분, 감사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진정한 감사, 감격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감격은 사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영과 자유와 무슨 형통함과 성공과 영광,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병든 곳에 오히려 가난한 곳에 아주 절박한 곳에 그 고통 중에 진정한 감사가 있습니다.
저는 종종 식탁에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내 일생 제일 음식으로 감사했던 때, 제일 큰 감사를 드렸을 때가 언제인가, 그 때 생각을 늘 합니다. 그래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밥투정은 안 합니다. 왜요? 그때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혼자서 피난을 나왔을 때, 1951년 정월입니다. 너무 어렵고 춥고 배고프고 괴로운데 혼자서 지나가다가 거기에 고구마 굽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고구마 냄새가 코에 싹 들어오니까요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더라구요. 도저히. 그래서 가지고 있던 시계, 이 팔목시계를 풀어서 주었습니다. 그래 돈은 뭐 통하지 않는 때니까. 이거를 주고 고구마를 달라고 했더니 고구마 네 개를 주었어요. 요새 팔목 시계는 흔하지만 그 때는요 온 동리에 나밖에 없었어요. 팔목시계 가진 사람이. 그런데 이 귀중한 시계를 풀어주고 고구마 네 개를 손에 들었는데 서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때 눈물이 똑똑똑똑 떨어지는데요 그 때에 감사했던 그 마음은 일생동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아무리 좋은 음식 아무리 좋은 여건에 있어도 그 때의 그 감사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이 뜻을 알 것 같습니다. 저들은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 견디지 못했던가. 그들은 먼저 건강을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1620년 12월, 추운 때입니다. 긴 긴 항해 중에 백열명으로 출발한 사람이 배 안에서 다 죽었습니다. 괴혈병과 각종 바이러스 병으로 죽고 48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절반이 살아남았습니다. 살아남은 데 대한 감사. 그리고 이만큼 건강을 지킨 데 대한 감사. 이것이 첫째 감사였습니다. 또한 의복과 거처가 문제입니다. 낯선 곳에 도착했는데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여기서 그들은 나무를 찍어서 오두막, 통나무집 오두막을 일곱 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통나무집에 들어가서 저들은 불을 피워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감사절입니다. 또한 음식으로 말하면 Plymouth 라고 하는 곳에 도착은 했지만 낯선 땅에 아무 것도 없는데 저들이 가지고 온 종자 몇 가지, 그 중에 보리와 밀을 심어보았지만은 토양이 달라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의 덕으로, 덕분으로 옥수수를 얼마 추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옥수수를 갖다 놓고 그리고 들에 뛰어 다니는 칠면조를 잡아서 그걸 구워놓고 감사절을 드렸습니다. 이 음식을 놓고, 그래서 지금도 미국에 가서 지내면 Thanksgiving 이 때쯤 되면은요 어느 식당 어느 가정이든지 온통 칠면조입니다. 아무리 먹어봐도 칠면조는 별 맛 없더라구요. 그래 나도 나만 그런가 해서 물어봤어요. 미국 학생들한테 "너희들 칠면조 맛있냐?" 그러니까 맛없데요. "닭하고 칠면조, 어느 쪽이 맛있냐?" 내가 여러 사람한테 물어 봤어요. "아 거 닭이 맛있지." 그럼 왜 칠면조를 먹느냐. 우리조상들이 이것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했기 때문이다. 그 전통을 따라서 그렇게 먹는 거라 그래요. 여러분, 참된 감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가장 어렵고 절박한 바로 거기에서 눈물로 고난 중에 진실한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Courage to Be 라고 하는 그 유명한 책에서 이렇게 역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고대인의 불행은 숙명과 죽음의 문제에서 왔다.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어떤 고난도 팔자요, 숙명이요, 운명이라고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운명에 저항할 생각을 못했어요. 그대로 그 많은 고생을 치르며 수 천년을 살아오게 됩니다. 중세기 사람들의 불행은 죄와 벌에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저주다. 죄에 내리시는 신의 저주다. 죄와 벌! 그 무서운 심판 앞에서 벌벌 떨면서 흑사병이 돌아도 저주다. 전염병이 돌아도 저주다. 홍수가 나도 저주다. 이렇게 몰아치는 무서운 저주 속에서 저들은 헤어나지 못하고 고생을 했습니다. 현대인은 그 불행의 원인이 생이 무의미에서 비롯된다고 신학자는 말합니다. 무의미함.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배고픈 것도 아니에요. 집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왜 그렇게 걱정이 많습니까? 왜 그렇게 고독해 하는 것입니까? 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겁니까? 왜 감사가 없고 왜 감격이 없습니까? 그만하면 감사 감격할 만도 한데. 뭐 때문이냐구요? 끝없는 욕심 때문이요. 더 가지려는 마음이 저 앞에 가 있기 때문에 요것 가지고는 못 살아요. 또 교만하기 때문이요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신앙 때문입니다. 어느 사이에 인간의 생각과 철학이 세속화되면서 사람은 불행으로 치닫기 시작을 했습니다.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그런고로 고마운 마음도 감사한 마음도 그 고마움에 따르는 행복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나타난 이 사람 삭개오는 특별한 감사를 드렸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현대인의 이미지를 가진 독특한 성격의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삭개오라는 사람. 우리가 잘 아는 얘기입니다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그 당시로 돌아가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세리장입니다. 로마 사람이 유대나라만 아니라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을 때입니다. 로마를 떠나서 살 수 없구요. 로마를 피해서 살수가 없어요. 로마 권력이 온 세계를 지배하는 때에 유대나라 역시 로마 권력 하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정치적 상황에서 대세를 잘 이용한 사람이요. 세상을 잘 요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세속적으로는 그는 세리의 장이요 권력자요 요새 말로 실세입니다. 실세올시다. 그리고 부자입니다. 로마를 대표한 총독 이하 군인들은 이 세리장 같은 사람을 가장 귀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얻지 못하면 정치도 못합니다. 로마 세력도 소용없습니다. 이 세리장이라는 이 사람은 부자요. 누구든지 어느 군인이든지 마을에 들어서면 세리장 앞에 무릎을 꿇게 되어있어요. 왜요? 그는 실세요 그는 부자이기 때문이에요. 그는 자기보다 더 높은 권력자하고 친하기 때문이에요. 이게 세리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성공한 사람이에요. 권력 있죠. 부귀하죠. 돈 있지요. 자 그런데 이 사람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고민입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등진 것 같은, 죄를 짓고 사는 것 같은 그런 고민이 있구요. 또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반 민족주의자라고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로마 사람을 위해 일하고 있으니까. 또 그리고 로마 사람의 힘을 빌어서 자기 권력과 자기 부를 취하고 있으니까 그 마음속에 갈등이 있습니다. 민족을 배반한 고통이 있습니다. 적어도 이만한 고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나름의 독특한 의식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왜요? 이대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현실대로는 안 된다는 거야. 이대로 세상이 오래갈 수는 없다. 어서 속히 메시아가 와서 새로운 질서, 새로운 평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그런 Messianic Expectation, 메시아 대망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큰 세력을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잘 살기 위해서 예수를 만나러 갔나겠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 누구처럼 병 고치려고 예수를 만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려하는 생각은 독특합니다. 왜요? 그는 소문에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좋지 못한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별명을 가진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열둘밖에 없는데 그 중에 하나가 마태입니다. 세관에 앉은 현장에서 불러서 제자를 삼았어요. 도대체 어떻게 어떤 분이면 저렇게 온 세계 사람들이 다 천대하고 온 이스라엘이 미워하는 죄인의 대명사로 부르고 있는 세리를 불러서 제자를 삼았단 말인가? 세리를 제자 삼은 그 사람이 누구냐? 세리의 친구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세리를 사랑한 그분이 누구냐고. 그런 분이 누구냐고 그 분을 보고 싶었던 겁니다. 자기도 세리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키가 작았어요. 많은 사람이 옹위해 가지고 밀어닥치는데 도저히 예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그는 뭐 체면이고 뭐고 불구하고 뽕나무로 기어올라갔어요. 그리고 지나가는 일행 속에 있는 예수님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그는 이 은총적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요. 이 한 번 있는 일생에 딱 한 번 있는 이 중요한 시간을 놓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가 기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뽕나무에서 예수님을 멀리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상황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를 어떻게 대하셨나 보세요. "우러러보시고" 그랬어요. 쳐다보았어요. 오히려 이상하게 됐지요. 삭개오가 예수님을 우러러 본 게 아니라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게 됐지요. 보셨다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Personally, 개별적으로 개인적으로 보아주신 거예요. 얼굴과 얼굴, 눈과 눈이 마주치는 시간입니다. 이게 아주 소중한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을 보듯이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에요. 지명하여 한 사람을 집중적으로 보신거예요. 삭개오를 보신 거예요. 즉 나를 보셨단 말입니다.
또 하나는 삭개오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여기에 주고받는 말이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충분히 알았습니다. 왜 저 사람이 뽕나무에 올라갔는지, 왜 나를 보려고 하는지, 왜 저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지 그 마음을 예수님은 읽으셨습니다. 그의 고민, 그의 깊은 관심, 그의 궁극적 관심을 예수님은 읽으셨습니다. 다 아셨어요. 무슨 긴말이 필요합니까? 이만하면 알지. 충분히 알았죠. 예수님은 삭개오의 마음을 다 알아주셨습니다. 그의 말을 통하지 않고 그의 행동을 통해서 그의 깊은 고민을 다 알아주셨습니다. 여기에 감격하고 있는 거예요.
또 한 가지는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님께서 하신 첫 번째 말씀입니다. 여기에 긴긴 설명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할 것이라. 세리의 집입니다. 온 유대 사람이 상종하지도 않고 인사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거지도 세리의 돈은 받지 않았답니다. 받았다가도 도로 던져 버렸답니다. 이렇게 더럽게 취급하는 세리의 집에 예수님은 오늘 밤 너희 집에서 자겠다. 원 세상에 이런 고마움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가장 큰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게 물질을 주시는 분입니까? 내게 지식을 주는 분입니까? 가장 소중한 것은 내 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의. 의인이 죄인의 집에 오시고 메시아가 죄인의 집에 오심으로써 그의 신분을 바꾸어 놓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너무 감사한 것이요.
이조 시대에 있었던 이런 일화가 전해집니다. 난리가 나서 왕이 피난을 가게 됩니다. 변장을 하고 신하들과 같이 몰래 도망을 해서 어느 시골로 숨어들었습니다. 그 촌부의 집에서 누군지는 모르지만 점잖은 어른들이 몇일 유하시겠다고 해서 그대로 묻지도 않고 정성껏 참 잘 대접을 했더랍니다. 대접을 받고 왕은 상황이 바뀌어서 환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궁한 다음에 생각하니 그 촌부가 너무 고마워요. 이 난리를 피하게 해 주었느니 말이요. 그래서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아 불러들이고 보니까 아이고, 이서방이라고 알았는데 이제 보니 지체 높은 왕이에요. 그 왕은 그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나를 이렇게 도와주었으니 무슨 소원이든지 말하게. 딱 하나의 소원을 들어주마." 뭐 땅이든 벼슬이든 뭐든지. 그럴 때 이 천부는 "아니에요. 저는 바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며칠 후에 제 환갑날이 되는데 애들과 함께 환갑 잔치를 하게 되는데 환갑잔치에 한 번 저희 집에 와 주시지요." 이제 왕이 거절하게 됐습니까? "그러지." 왕이 천부의 환갑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요새나 옛날이나 마찬가지요, 얼마나 많은 뇌물이 들어왔는지 그냥 그냥 부자가 됐답니다. 왕이 우리 집에 한 번 오신다. 한 번 모신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 것이냐? 내 신분이 달라지는 것이에요. 내 의가 달라지는 것, 사람이 달라지는 시간이에요 이 시간은.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셨다, 굉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느니라." 임마누엘입니다.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완전한 의롭다함을 얻는 엄청난 복을 내리십니다.
이제 보십시다. 이 사람의 감사가 무엇입니까? 삭개오는 바로 이 시간, 이 은혜 가운데서 첫째가 "즐거워했다" 그랬어요. 기뻐해야 됩니다. 감사는 기뻐하는데 있는 거예요. 기쁨이 없는 감사란 감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기쁜 얼굴로 고맙다고 해야지요. 고맙다는 말도 억지로 하는 건 고맙다는 말이 아니겠죠. 감사, 기쁨. 그 기쁨 자체가 은혜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응답이거든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물질을 얻었다는 것도 아니고 권세를 얻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집에 오신다는 것 때문에 그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때문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만족한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를 영접했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영접하고.
또 하나는 마음이 열렸습니다. 당장 입이 터졌어요. 마음이 열리면서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삭게오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삭개오는 지금 예수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돕는 분이다.'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내 재산 절반을 내서 가난한 사람을 돕겠습니다, 라고 마음이 열립니다. "토색한 것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습니다." 이 말은 율법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렇게 명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율법을 지키는 자로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참된 감사가 어디 있습니까? 원래 참된 감사는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Think, Thank 라는 말은 어원이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생각이 없으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어느 방향으로 생각하느냐,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감사하게 됩니다.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 못합니다. 얻은 것을 생각하고 내가 받은 것을 생각하고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할 수 있는 것이에요.
어떤 식물인간 된 남편을 위해서 수고하는 부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십년 동안을 시중을 해도 아무 보답이 없습니다. 말 한마디가 없어요. 너무 답답하고 괴로워서 이렇게 말하더만요. 눈을 한 번 뜨고 "여보 고맙소" 딱 한마디만 하는 것을 들어도 한이 없겠다 그래요. 아무리 수고해도 소용이 없어요. 반응이 없어요. 말이 없어요. 느낌이 없어요. 깨달음이 없어요. 이게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지요. 감사하는 마음, 이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그 깨달음 속에 있어요.
인간이 무상하다, 하는 것을 알면 불교인입니다. 인간의 삶에 도리를 알면 유교인입니다. 은혜를 알면 기독교인입니다. 오직 은혜를, 모든 것이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면 그가 바로 그리스도 인이요, 신앙인 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입에 감사가 없으면 그리스도 인이 아닙니다. 범사에 감사할 것입니다. 특별히 감격하는 것입니다. 감격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또한 감격이 간증으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 하는 실천상황이 여기서 나오고 있습니다. 베푸는 마음, 이것이 감사입니다. 기뻐하는 마음이 감사입니다.
여러분, 깊이깊이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깨닫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감격하고 이 감격한 마음을 행동에 옮겨 보세요. 이제부터 새로운 삭개오의 생이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405장에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워.' 이것은 죤 뉴우톤(John Newton)이라고 하는 분이 본래 노예상인이었습니다. 극악한 사람이었는데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은혜! 감격 감격합니다. 그 감격으로 주를 찬양하며 피곤 없이 한 평생 복음을 전하면서 살았습니다. 여러분 성공이 뭐겠습니까? 감사하는 것이 성공이요 기뻐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종은 울려 소리가 나야 종입니다. 그 마음에 벅찬 감격이 있고 감사가 있으면 바로 그가 행복한 자요 성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넉넉히 감사할 만큼 주께서는 은혜를 베풀어주었건만 우리는 이루지 못한 것, 못다 한 것, 얻지 못한 것만 생각하며 원망과 불평에서 헤어나지 못함을 주여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는 것은 주의 은혜를 깊이깊이 깨닫고 저 삭개오와 같이 즐거워하며 감격하며 주를 영접하며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베푸는 마음으로 바꿀 수 있는 그러한 주님의 사람들 되고 감사로 원망을 이기고 기쁨으로 모든 어두움을 물리칠 수 있는 주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본문 : 시편 136:1-4)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러한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 번 따라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다시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자."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잔치 날입니다. 더 많이 감사하는 날입니다.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하는 날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절입니다. 또 2천년대의 첫 번째 추수감사절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바쁜 일상으로 인해서 감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감사할 일이 수없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바쁜 일에 좇기다 보면 감사를 잊어먹고 있습니다. 성도가 감사를 잊어먹는 것은 하나님을 잊어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가 감사를 잊어먹은 것은 하나님을 잊어먹은 것이요, 예수님을 놓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잃어버린 감사가 회복되고, 잃어버린 신앙을 다시 회복하는 아주 좋은 기회를 우리가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우리가 누구에게, 무엇을, 왜 감사해야 하는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이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두 번 나옵니다. 첫 번째 감사는 고라신과 벳새다 고을에서였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0절로 26절 말씀에 그 말씀의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가장 많은 권능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실패한 것입니다. 속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기에 감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25절, 2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환경이 어려워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감사할 일이다, 그 말씀인 것입니다.
또 두 번째 감사는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있을 때입니다(요 11:41요 11:41). 깊은 슬픔과 절망이 사람들을 감싸고 있을 때 예수님은 감사했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장 40절로 41절에서 이렇게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요, 구원받은 성도는 구원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과 감사하는 조건이 달라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좋을 때, 감사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언제 감사했느냐고 하면서 불평해버리고 맙니다. 원망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는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좋을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뜻이 이루어질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니까, 나는 하나님 아들이 되었으니까,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나에게 있으니까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 다윗은 시편 37편 4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 우리가 생각할 때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성령과 말씀으로 우리를 돌보심에 우리는 또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순종할 말씀을 주신 것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을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또 받을 말씀이 있습니다.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 우리가 들을 수 있다는 것, 우리가 손으로 잡을 수 있다는 것, 이것만 가지고도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 지 모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일까,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산 예배, 산 제물 되는 것
첫째로, 산 예배드리고, 산 제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한다는 것은 산 예배, 역동적인 예배, 성령 충만한 예배, 말씀 충만한 예배. 예배를 산 예배로 드릴 때,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다, 그 말인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면,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산 제사로 드려져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라"(요 4:24요 4:24) 그랬습니다. 그렇게 드릴 때, 주님이 찾아오신다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려 "예배의 제사"를 드리고,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드려 "봉사의 제사"를 드려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몸과 마음을 드려 "산 제사, 산 예배"로 드리고, 시간과 물질을 드려서 "봉사의 산제사"를 드려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로 드려지는 예배와 봉사의 산 제사는 기적을 산출할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에 보면, 오병이어의 사건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4복음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감사 기도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한 소년의 정성어린 "감사의 헌신"이 그 기적을 낳게 했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 중 남자만 오천명입니다. 부녀자까지 수만 명이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빌립에게 "저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가 주라"고 했습니다. 그 때, 빌립은 계산했습니다. "예수님,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합니다." 그랬습니다. "장정 하루 품삯을 1데나리온으로 본다면, 이백 명이 일한 것을 가져야 떡을 먹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광야에서, 또 황혼 저녁에 그런 돈도 없고,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요 6:7요 6:7).
그러나 그 제자 안드레는 먹을 것을 찾으러 갔습니다. 어린 소년이 가져온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발견했습니다. 어린 소년에게 말을 합니다. "소년아, 우리 예수님이 이 많은 사람들을 다 먹이라고 말씀하신다. 너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나에게 주어서 이것을 예수님께 갖다드리면,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먹을 수 있단다." 그 소년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 고민했을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 점심 먹으라고 싸 주신 도시락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인데, 예수님 말씀을 듣다가 먹을 시간이 없어서 먹지 못했는데, 그런데 이것을 먹어야 허기를 면하고 배를 채울 수 있고 힘을 찾을 수 있고, 그래서 우리 집까지, 먼 집까지 갈 수가 있는데..."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컸어요.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컸어요. 예수님의 기적을 그는 똑똑하게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때 그 소년이 헌신하는 겁니다. "그래요. 내가 이것을 먹어야 허기를 채울 수 있어요. 이것을 먹어야 내가 기운을 차릴 수 있어요. 이것을 먹어야 내가 집에 갈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 드리는 일이라면,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서 드리는 일이라면, 내가 내놓을게요. 아저씨 가져가세요. 가져가세요." 어린 소년은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내놓는 헌신의 제사, 헌신의 감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받으신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먹여야 하는 사람들이 남자만 오천명, 부녀자까지 수만명. 어떻게 생각하면 "야! 제자 안드레야, 가져오려면 많이 가져오고 적게 가져오려면 가져오지 말지, 나만 왜 괴롭게 하느냐?"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먹여야 할 사람이 수만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보리떡 다섯 덩어리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우러러, "하늘을 우러러 축사했다" 그랬습니다. 그 축사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감사"의 의미가 있습니다(요 6:11요 6:11의 '축사'란 헬라어 '유카리스테오'로 '감사하다'는 말). 먹어야 할 사람은 남자만 오천명, 부녀자까지 수만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작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가지고 불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책망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감사하셨습니다. 떼어 주었더니 남자만 오천명, 부녀자까지 수만명이 배불리, 원대로 먹게 하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했습니다. 이 기적을 믿으시면 "아멘"하겠습니다. 이 기적이 여러분의 삶 속에도 그대로 일어나기를 원하시면 "아멘"하겠습니다.
둘째,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
두 번째,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가, 은혜
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됩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전 10:31)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자녀들은 그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현대인의 성경).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0절입니다. 자녀들은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19장 32절에 보면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부모와 어른들을 통해 생명을 탄생하게 합니다. 출생하게 합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태어난 생명을 유지하고, 자라게 하고, 보존합니다. 하나님이 아담 한 사람만은 직접 흙을 가지고 빚으셨습니다. 그 코에 생기를 '후~' 불어넣어서 사람되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하와를 만들 때는 그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고,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인인 하와를 만들어 아담에게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하나님은 단 한사람도 직접 사람을 만들지 아니하셨습니다. 자기 아버지와 자기 어머니를 통해서 사람을 이 땅에 태어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자 그러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를 낳게 하셨습니다. 그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을 낳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 혼자 일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하나님이 함께 일하셔서 우리를 태어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럼으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저나 여러분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실 때, 여러분의 아버지가 없었다면 여러분의 어머니가 없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이 땅에 낳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일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지 않는 것은 생명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가인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분명 가인과 아벨에게 예배에 대해서 가르쳤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아벨은 그 아버지, 어머니가 가르쳐 준 그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아버지 아담, 어머니 하와의 말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불순종과 불공경은 하나님 앞에 잘못된 예배를 드리고, 형제를 살인하는 살인자의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며 사는 길이기도 한 것입니다.
한국은 오천년 역사를 이어온 나라입니다. 작은 나라입니다. 지하자원도 없는 나라입니다. 외침도 많았던 나라입니다. 내란도 많았던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오천년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이 땅에 종교가 들어오기 전에, 유교가 들어오기 전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기독교도 들어오기 전에 한국, 우리 민족은 효 정신이 있었습니다. 가족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효 정신과 가족제도가 이 작은 나라, 힘없는 나라, 이 선한 나라, 외침도 많이 받은 나라, 오천년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서구문화가 들어오면서 안타깝게도 효 정신이 죽었습니다. 가족제도가 파괴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기독교 신앙으로 착각했습니다. 서구문화가 몽땅 다 성경문화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효 정신도 버리고, 가족제도도 버렸습니다. 그것이 "현대인"인 것처럼 알았습니다. 그것이 "지식인"인 것처럼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다시 보고, 다시 보니까 성경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우리가 할 일이 뭐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우리가 추수감사 주일을 맞아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다면, 그 감사하는 것 중에 우리가 감사할 것이 뭐냐? 그 감사의 조건이 무엇이냐? 감사하는 행위가 무엇이냐?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하나님 주신 은혜, 하나님 주신 사랑, 하나님 주신 복을 빼앗기지 말고, 누리고 살아가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
그 다음에 세 번째입니다.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
그렇습니다. 이웃을 향한 감사는 그 이웃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주셔서 영혼구원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불신 이웃이 있다면, 아직 예수 믿지 않는 이웃이 있다면, 이는 전도의 상급을 위해 하나님이 붙이신 것이다. 그렇게 알아야 됩니다. 만약 주위에 나를 괴롭히는 이웃이 있다면, 그는 나의 인격과 삶을 연단 시키는 "가시"(고후 12:7고후 12:7)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시편을 많이 기록한 다윗, 목동이 이스라엘 왕이 된 다윗,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다윗, 많은 시편을 기록한 다윗, 그 많은 시편은 그가 왕이 되어서 호위호식 하면서 왕궁에 있을 때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광야에서 연단 받을 때, 고통 당할 때, 아픔을 당할 때, 시험을 당할 때, 괴로움을 당할 때 지은 시편이 다 그 은혜로운 시편들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웃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이웃을 향한 원망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웃이 나에게 아픔을 준다면, 고통을 준다면, 모난 나의 삶을 부드러운 삶으로, 둥근 삶으로, 원만한 사람으로, 은혜로운 사람으로, 성령의 사람으로, 말씀의 사람으로, 예수 사람으로 바꾸어주는 것으로 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출애굽기 16장 8절입니다. 모세가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우리가 사람에게 원망하는 것은, 그것은 곧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다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다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사람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럼으로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마 22:39마 22:39) 그랬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은 무엇이냐?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이다, 그 말인 것입니다.
넷째, 어려움 당하는 이들을 돕는 것
그 다음 네 번째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돕는 겁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돕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제의 특징은 모든 이들이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랬습니다. 특히 추수감사 절기에, 특히 감사절기 때는 어려움 당하는 이들과 함께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너만 먹지말고, 네 가정만 먹지말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과 함께 먹어라. 함께 즐겨라. 함께 잔치를 하라"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16장 11절입니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약한 자들을 위로하고 돕도록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건강을 주셨습니까?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왜 나에게 물질을 주셨습니까? 물질이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왜 나에게 은사와 영적인 능력을 주셨습니까? 전도하고, 그들을 신앙인으로 잘 돌보아주고, 보살펴 주라고. 지금 이 땅에 수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업하다가 부도나서 어려움을 당하는, 직장에서 일하다가 직장을 잃어버린 실업자. 그 뿐이 아닙니다. 아버지, 어머니 없이 가족을 이끌고 나가는 소년 소녀 가장이 있습니다. 고아가 있습니다. 과부가 있습니다. 그리고 생활보호 대상자, 자녀 없는 독거 노인. 자녀가 있어도 부모를 돌보지 못해 생긴 독거 노인이 있습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외국에서 한국에 가면, 돈 좀 벌어보겠다고 왔다가 직장을 잃어버렸거나 직장에서 노동을 착취당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외국 근로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다 우리의 도움을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도움의 손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움은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필요할 때 주는 것이 도움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는 것이 도움입니다. 외로운 사람을 위로해 주는 것이 도움입니다. 배부른 사람에게 내 밥이 남으니까 좀 먹을래? 아닙니다. 돈이 많은 사람에게 돈 자랑하기 위해서 내가 좀 사줄게 먹을래? 그것이 아닙니다. 도와준다는 것은 뭐냐? 내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상대가 필요해서 주는 것. 이것이 도와주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처럼 어려운 중에서도 자원하여 돕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 2절로 3절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힘들어 할 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또 구약에서 잠언서 11장 24절로 25절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것이 뭐냐구요?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돕는 겁니다.
다섯째, 자연을 잘 돌보는 것
다섯 번째입니다. 자연을 잘 돌보는 것, 자연을 잘 돌보는 것. 그렇습니다. 자연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또 그 은혜의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뭐냐구요? 에덴동산을 지어서 아담에게 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뭐냐구요? 이 삼라만상을 다 지으셔서 인간이 생활할 수 있도록, 마음대로 공기를 마시며, 햇빛을 받으며, 물을 먹으면서, 꺼지지 않는 땅에서, 땅에서 나오는 생물로 말미암아 먹고살게 만들어 주신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대한 사랑의 증거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우리 예수님으로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신 것만이 아닙니다. 이 자연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은 수도 없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난 일년간도 자연을 통해서 우리를 먹이셨습니다. 또 입히셨습니다. 또 돌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연을 파괴한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는 자연을 보존합니다. 자연을 아낍니다. 자연을 돌봅니다. 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도록 돌보아 주는 이런 삶. 이것이 뭐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연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 자연의 주인은 하나님. 자연을 섭리하시는 분도 하나님. 자연을 통해서 우리에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분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서 12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의인이 누구냐구요?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이 있는 것. 나무나 풀이나 새들이나 짐승이나 어족이나, 이런 것들을 돌아보는 것이 의인이다, 그랬습니다. 악인은 누구냐구요? 그런 것에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잔인하게 사는 삶, 이것이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자연을 보호해야 의인답게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자연을 보호하지 아니하고, 자연을 훼손하고, 그것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잔인하게 죽여버린다면, 꺾어버린다면, 못살게 만든다면, 그것에 대해 성경은 말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악인이다.
오늘은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주일입니다. 21세기를 맞이하는 문턱에서 맞는 2000년에 첫 번째로 맞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감사는 은혜를 받는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은혜를 받는 그릇."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려면, 우리는 감사로 그릇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감사가 없으면, 받은 은혜가 다 쏟아집니다. 엎어집니다. 빼앗깁니다. 잃어버립니다. 우리 모두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시편기자가 말을 합니다. 시편 136편 1절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 모두 다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 주일을 맞이해서 마음껏, 힘껏, 재능껏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시다. 사람들에게도 감사합시다. 자연에게도 감사합시다.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마음껏 누리면서 행복하고, 즐겁게, 복되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날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은혜 베풀어주시는 주님, 고맙습니다. 진실로 오늘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 주일, 2000년대 맞아서 첫 번째 맞는 추수감사 주일,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 귀한 음성을 듣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감사함으로 은혜를 담는 그릇들을 다 준비하게 하여 주옵소서. 받은 은혜를 누리며, 베풀며, 주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다 (본문 : 에베소서 5:20-21)
오늘은 일년에 한번씩 지키는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추수감사 주일은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감사하고 사는 사람인가를 한번 점검해 본다는 의미에서 굉장히 뜻이 있는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지수가 얼마나 높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한번 살펴보는 것입니다.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습니다. 감사지수가 낮은 사람일수록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매우 강한 어조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여러분이나 저나 이 말씀을 읽으면 제일 먼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범사에'라는 말과 '항상'이라는 말입니다. 감사하라고 하는 말에 '범사'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으면 우리는 왠지 모르게 부담을 느낍니다. 감사하라는 말 앞에 '항상'이라는 수식어가 있으면 기가 죽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범사'라는 말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어떤 일을 당하든지 무조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항상'이라는 말은 시종일관, 어떤 상황을 만나도 변함 없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강도 높은 의미를 가진 말씀을 읽으면서 가책 받지 아니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 그 가운데는 목사인 저 자신이 가장 많은 가책을 받을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를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항상 감사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때가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려고 무척 노력을 하고 또 감사도 많이 하지만 이 본문 말씀이 요구하는 선에는 아직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저 자신이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담을 느낍니다. 저같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잘못하면 이런 말씀도 그저 쉽게 이야기하고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남의 말 할 때는 쉬운 겁니다. 자신이 지키지 못해도 가르칠 때는 쉬운 겁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1988년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한창 전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을 때 중요한 이슈가 사형 폐지론이었다고 합니다. 민주당 후보였던 마이클 듀카키스라는 후보는 사형 폐지론을 주장했습니다. 사형제도는 없애야 된다며 전국을 누비면서 유세를 했습니다. 어느 날 CNN의 토크쇼에 그가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쇼에는 유명한 버나드 쇼라는 앵커가 담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듀카키스를 앞에 놓고 이 버나드 쇼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사형제도를 폐지하라고 주장 하신다죠?" "네, 그렇습니다." "참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 묻겠습니다. 선생님, 만약에 선생님의 아름다운 그 부인이 괴한에게 끌려가서 강간을 당한 후 살해당했다고 합시다. 나중에 그 범인이 잡혔을 때 선생님은 여전히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고서 이 사람은 당황했습니다. 머뭇머뭇하고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수천 만 명의 시청자들이 보고 있었는데 이 장면에서 그들이 받은 인상이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자기와 상관이 없으니까 사형 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지 진짜 자기 일이 되면 그런 소리를 할 사람 아니라는 인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토크쇼 때문에 그가 대선에서 패배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는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할 때에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하고 설교하기는 쉽습니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하고 얼마든지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좀더 진지하게 이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어 가는 아내를 쳐다보는 남편이 과연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오랜 지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아무리 기도하고 부르짖어도 고쳐주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병은 점점 더 깊어 가는 자신을 보면서 과연 그 입에서 감사가 나올까요? 평생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야 될 어린 장애아인 자녀를 갖고 씨름하는 부모가 그 입에서 정말 감사가 나올까요?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력서를 수십 통 써 가지고 다니면서 취직을 해보려고 하지만 회사에서 면접 한 번 하지 못하고 연거푸 퇴짜를 맞는 젊은이의 입에서 과연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말이 나올까요? 내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정말 감사할 수 있을까요? 저나 여러분이나 이런 입장에서 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이 말씀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비현실적인 말씀입니다. 이상론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은 적당히 보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태도로 이 말씀을 넘겨도 괜찮을까요?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자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놓고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꼭 깨달아야 됩니다.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지, 왜 항상 감사하라고 하시는지 이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름으로'라는 말을 '때문에'로 바꾸어도 전혀 잘못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지금 말씀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것은 너무 비현실적인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변명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한번 여러분 마음에 되새겨 보십시오. 그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의 죄를 짊어지고 저 무지하고 잔인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흘만에 그를 죽음에서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의 옷자락을 믿음으로 붙드는 사람은 어떤 죄를 범했든지 어떤 과거를 가졌든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세례 받으시는 형제 자매 여러분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공로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어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이 말은 "내가 너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노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기가 막힌 신분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이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그 예수님을 우리는 마음에 모시고 삽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예수님 한 분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이 가지고 즐기는 것이 나에게 없다 할 지라도 나에게 예수님이 계신다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도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설혹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 할 지라도 예수님 한 분만 소유하고 그분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진정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을 찾았다면 그 사람은 언제든지 감사할 수 있고 어떤 조건에서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찬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런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이 말씀이 나와 별로 관계가 없다고 밀치면 안됩니다. 만약 지금까지 예수님 때문에 범사에 항상 감사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면 옥 목사가 가슴에 가책을 받고 여러분에게 고백하듯이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이것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시고 고쳐야 됩니다.
우리나라에 영감 있는 시인이 있습니다. 송명희 여사를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뇌성마비로 한번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로 온 몸이 비비 꼬여서, 말 한마디를 하려고 하면 죽다 살아나는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해야 할 정도로 일급 장애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얼마나 많은 시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 시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가슴에 저미어 오는 감동이 있지 않습니까? 그가 쓴 시 가운데 '나'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못하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보는 것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가만히 음미를 해 보십시오.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까? 뇌성마비로서 남이 가진 것의 90%를 못 가진 자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마음을 가득히 채웠습니다. 그러자 무엇이라고 감사합니까? 남이 갖지 못한 것 내게 있고 내가 가진 것 남이 없는 것을 비교하면서 오히려 '주님, 나는 세상 사람이 가지고 즐기는 것 없어도 예수님 한 분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눈으로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항상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아름다운 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수준에 저 자신이 도달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저만이 아닙니다. 제가 사랑하는 여러분들 모두가 이런 수준에까지 올라가기를 원합니다.
많이 가졌다고 감사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건강한 사람 중에 감사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자기 뜻대로 다 소원성취 하는 사람 입에서 감사가 나오는 것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저는 수만 명을 상대하고 삽니다. 없습니다. 진정한 감사를 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진짜 감사는 누구에게서 나오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아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면 진정한 감사가 나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감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명령하시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명령하실 때에는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뒤따라 보내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하나님 저는 못합니다." "잔소리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해. 내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도록 은혜를 줄게."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라." "어떻게 항상 감사합니까?" "할 수 있어. 내가 네게 능력을 준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명을 하면 안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결론을 하나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것만큼 믿습니다. 누구를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앞길이 막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옵니까? "하나님, 제 앞길 캄캄하지만 주님이 제 앞에 있는 구름을 걷어내고 어둠을 쫓아 주실 날이 올 줄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시니 이런 고난을 주시는 줄로 압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감사하는 사람의 믿음은 알아줘야 합니다. 감사하는 것만큼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어느 정도 믿고 계십니까? 감사하는 것만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행복할 수 있습니다. 100평 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감사가 없으면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스무평 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눈만 뜨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그 입에서 찬송이 나올 정도로 주님 앞에 감사하는 심령을 가지면 그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행복을 누가 빼앗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다릅니다. 누구하고 다릅니까? 세상 사람하고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입만 열면 불평이 심합니다. 불평은 하지 않을 지 모르지만 감사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입에서 계속 감사가 나옴으로써 내가 그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감사가 없습니까? 그러면 그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강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천성적인 장애를 안고 나온 자녀를 가진 부모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어떤 자매의 말을 들으면서 저 자신이 자주 도전을 받습니다.
"목사님 우리 애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복을 받고 있는지 아십니까?" 사실 말이 아닐 것입니다. '복은 무슨 복인가?' 우리는 당장 그렇게 느낍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 애 때문에 가정이 얼마나 화목한지 모릅니다. 우리 애 때문에 우리 아빠가 예수 믿고 돌아왔습니다. 아마 애가 저러지 않았으면 아빠는 예수 안 믿었을 것입니다. 우리 애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잘 살아도 교만하지 않을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 애 때문에 세상에서 천대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 고통 당하는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이 애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주신 복이 보통 많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이 사람만큼 강한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누가 이 사람을 꺾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습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 좋아집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 행복해 집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세상 사람 앞에 매력적인 존재가 됩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 강해집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오늘부터 돌아가셔서 의도적으로 감사하십시오. '나는 예수님 믿는 사람이다. 예수님 때문에 나는 무조건 감사할 수 있어.' 하면서 감사하면, 지금까지 불평하던 것을 감사하면, 지금까지 남을 원망하던 것을 거꾸로 뒤집어서 감사하면, 지금까지 만족하지 못하던 것을 감사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날보고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나는 감사해야 돼. 아버지에게 순종해야 돼.' 하면서 어떤 형편에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감사할 것들을 찾아 하나님 앞에 감사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이 좋아집니다. 우리가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강해집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에게 매력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런 멋있는 자녀가 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아멘.
감사하는 생활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5:16-18)
오늘은 1년에 한 번씩 지키는 추수감사주일이다. 우리의 삶에서 잃어버린 감사를 다시 찾는 기회이기도 하다. 현대인은 일상생활에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많이 잊어버렸다. 감사하다는 말보다는 서로 원망하고 불편하며 비판하고 상처 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살아간다. 그러기에 문명은 더 발달되고 살기는 더 편리해지고 물질적으로는 더 풍요해졌지만 그 내면적인 삶은 더 깡마르고 행복하지는 못하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우리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드는 심금을 울려주는 말씀인가?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항상 삶을 즐겁게 살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감사하며 사는데 있다.
이 세 가지, 항상 기뻐하는 것과 쉬지 않고 기도하는 생활,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은 서로 분리된 별개의 것 같지만 사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은 셋이 아니고 하나이다. 항상 기뻐하는 삶은 항상 감사하는 삶과 일맥상통한다. 우리의 삶에서 기쁨이 사라질 때 감사도 메마르게 된다. 우리의 삶 속에 참된 감사가 없으면 기쁨도 있을 수 없다. 이처럼 기쁨과 감사는 행복한 삶의 양면이요 안과 밖이다. 우리 마음 깊숙이 에서 억제할 수 없는 기쁨이 용솟음 칠 때 우리는 자연히 우리의 삶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과 감사는 결국 기도하는 삶에서 싹튼다. 우리의 기도만이 폭풍 속에서도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기쁨의 유일한 샘터요 감사의 물줄기이다. 우리가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가? 아니 역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살아가며, 모든 사건을 기도하는 정성으로 처리하는 사람에게는 손실과 실패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삶의 지혜와 용기가 솟아나는 것이다.
유명한 성경주석가 메튜 헨리는 그가 도적을 만났을 때 이런 간증을 하였다.
첫째, 전에는 도적을 만난 일이 없는데 처음으로 도적을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하고, 둘째는, 그들이 내 지갑만 훔쳐가고 내 생명을 빼앗아 가지 않은 것을 감사하며, 셋째, 그들이 비록 내 물건을 가지고 갔지만 별로 많은 것을 잃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 넷째, 내가 도적질을 하지 아니하고 도적을 만난 것을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그는 도적을 만난 손실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다. 우리도 좀더 깊이 생각해 보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실패와 손실 속에서도 여러 가지로 감사할 수 있게 된다.
스위스의 격언에는 '항상 노래하기를 원하는 사람만이 노래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감사의 노래를 부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보다 더 풍성한 감사의 삶이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8세 때 소경이 되었지만 유명한 찬송가 작사자가 된 Fanny Crosby는 이렇게 자신의 신앙을 노래로 읊었다.
'비록 내가 보지 못하지만 아, 나는 얼마나 행복한 영혼인가! 이 세상에서 나는 만족하기를 배웠노니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하는 얼마나 많은 축복을 내가 누리는가! 소경이기에 나는 많은 사람들이 눈물 흘리고 탄식하는 일을 나는 하지 않노라'고 감사했다.
이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감사의 삶을 터득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고백할 수 없는 삶의 간증이다. 사실 그렇다. 눈으로 보기 때문에 갖고 싶어하고 욕심을 부리고 시기질투 하며 범죄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어떠한 환경과 삶의 조건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감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물질적인 감사이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축복이라든가 이익을 얻었을 때 기뻐하고 감사한다. 어린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 주면 온 세상을 얻은 듯 기뻐하고 고마워한다. 그러나 그 장난감을 빼앗길 때 온 세상을 잃은 듯이 슬퍼한다. 이것은 어른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종류의 감사를 우리는 물질적 감사 또는 경제적 감사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감사를 항상 물질적인 측면에서 측정해 보는 감사이다.
둘째는 철학적 감사이다.
철학적 감사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넘어져 다리를 다쳤다. 그러나 일어나 목이 부러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하고 감사했다. 이런 종류의 감사를 철학적 감사 또는 사변적 감사라고 말할 수 있다. 더 큰 손실을 생각하므로 적은 손실에 대해 위로 받으려는 소극적인 감사이다.
셋째는 크리스천의 감사이다.
물론 크리스천의 감사에도 위에서 말한 물질적인 감사와 철학적 감사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감사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보다 더 깊은 곳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한 사죄의 은총과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삶 그 자체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삶이기에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바울은 옥중에서도 찬송할 수 있었고 굶주림과 매맞음과 역경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는 자기의 연약함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었다. 그는 풍부에서뿐만 아니라 가난과 궁핍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어떻게 그러한 삶이 가능하였는가? 그것은 그가 삶 자체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물질적인 것에 감사의 근거를 두면 범사에 감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의 근거를 영원한 생명이시오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 둘 때 우리는 역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고 실패와 손실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추수감사 (본문 : 역대상 29:10-14)
오늘 이 시간에는 "추수와 감사"라는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추수이고 감사입니다. 하나님이 추수하게 하시고, 성도들은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감사하는 글 몇 가지를 제가 소개하고자 합니다. 뇌성마비 송명희 시인의 감사입니다. 그가 쓴 시 중에 이런 시가 있지요.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못하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보는 것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위의 가사는 뇌성마비로 한번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한 1급 장애인 송명희 시인의 "나"라는 시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무것도 감사할 것이 없지만 예수님 한 분만으로 감사하는 송명희 시인처럼, 예수님 한 분만으로 감사하며 사는 우리가 되어야 될 것입니다.
또 발명왕 에디슨의 감사입니다. 에디슨은 청각 장애로 매우 고통을 당했습니다. 청각에 장애가 생긴 것은 소년시절에 신문을 팔다가 기차에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에디슨은 신문을 팔며 기차 한 구석에서 실험을 하곤 했는데, 어느 날 기차의 진동으로 실험작품이 떨어져서 불이 난 것입니다. 이에 격분한 차장이 에디슨을 떠밀었습니다. 이때 귀를 다친 것입니다. 누가 그에게 묻습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연구하기 힘들지 않았습니까?" 질문을 받고 에디슨은 대답합니다. "나는 귀머거리가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딴 소리에 신경 쓰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으니까요."
또 영국의 유명한 목사인 스펄젼 목사님의 설교에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반딧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촛불을 주신다. 촛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전깃불도 주신다. 또 별빛도 주신다. 별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달빛을 주신다. 달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햇빛도 주신다. 햇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반딧불도, 촛불도, 전깃불도, 별빛도, 달빛도, 햇빛도 필요 없는 영원한 천국을 주신다.
오늘 참 좋은 날입니다. 21세기 들어서 2001년 첫 번째 맞이하는 추수감사주일, 지난 1년 동안 지키시고 보호하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감사할 것이 없다는 사람들도 뒤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삶이 풍족해졌는데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10명의 문둥병자가 치료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감사하는 자가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은 뭐라고 가르칩니까?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살전 5:18살전 5:18).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 1년에 한 번 추수감사주일만 감사하라,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혹이라도 범사에 항상 감사해야 할 삶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가 감사를 잊었다면, 감사를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1년에 한 번 추수감사주일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이렇게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사에 항상 감사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합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 넘치게 임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말합니다. 구약 역대하 5장 13절입니다.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하다, 그 말이 맞습니다.
이 시간, 2001년도 21세기 첫 번째 맞는 추수감사절을 맞이해서 무엇을 감사해야 할지를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날마다 감격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첫째, 자연의 열매에 감사
첫째로, "자연의 열매에 감사." 그렇습니다. 자연의 열매에 감사하는 자는 좋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입니다. 자연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자연은 누가 섭리하십니까? 하나님이 섭리하십니다. 봄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 여름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 가을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 겨울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 싹을 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 잘 자라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열매가 자라고, 다 수확을 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연의 열매는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왜 자연의 열매를 해마다 맺게 하십니까? 우리 하나님이 사람들을 해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의 열매가 해마다 해마다 열매를 맺는 것은 뭡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을 해마다 날마다 사랑하시는 증거다, 그 말인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종자를 갖다 심었다 하더라도, 아무리 많은 거름을 주었다 하더라도, 농약을 쳐서 벌레를 잡아주었다 하더라도, 그 곡식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다 알곡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시고, 공기를 주십니다. 그래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그것을 먹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일지라도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리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성경에 말합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 하반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치 않고,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신앙이 없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 지 116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조상들은, 우리의 선조들은 예수님도 몰랐어요. 하나님도 몰랐어요. 그들은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열매는 귀하게 여겼어요. 쌀 한 톨이라도, 수수 한 톨이라도, 감자 하나라도, 콩 하나라도, 얼마나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모릅니다.
자연의 열매에 감사하는 것은 만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선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자연의 열매에 감사치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내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만물은 하나님께 속했으며, 모두가 다 하나님의 소유인 것입니다. 성경에 말합니다. 역대상 29장 11절 말씀이십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그랬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것을 잠시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것을 우리가 먹고, 입고, 마시고, 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것 중에 좋은 것을 취하셔서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시편 136편 25절입니다.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우리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의 양식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을 위해서 예배드리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찬송하게 하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를 사랑하십니다. 육체를 먹이시기 위하여, 육체를 건강하게 하시기 위하여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말합니다.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첫 열매로,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림으로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말합니다. 신명기 16장 16절로 17절 말씀이십니다.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 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찌니라“. 또 신명기 26장 10절입니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 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은 마음을 다 해서 하나님 앞에 귀한 물질을 추수감사절 예배에 헌물로 드렸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으로, 농사를 지은 사람은 농사를 지은 대로, 농사를 짓지 않았다면 그 열매와 곡식이 너무너무 감사해서 돈을 주고 사서 지금 성전에 가득 갖다가 드렸습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또 많은 농부와 (과수원의 과지기들이,) 과수원지기들이 땀흘리고 애쓰고 수고해서 만들어진 작품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으로 가져와서 믿음으로 드렸습니다. 순종하며 드렸습니다. 이게 다 모아져서 예배로는 하나님께 드려지고, 이 물질이 이 물건들이 다 모아져서 이제 우리 주위의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고아, 과부, 자녀 없는 생활보호대상자, 독거노인들, 이런 분들을 위해서 전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둘째, 생활의 열매에 감사
또 두 번째, "생활의 열매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삼서 2절에 보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생활의 열매에 감사하는 것은 범사에 일어난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그 환경에 따라서, 그 장소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나타나는 환경이 다 달라요.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습니다. 사랑받을 때가 있고, 사랑 못 받을 때가 있습니다. 건강할 때가 있고, 또 아플 때가 있습니다. 돈이 막 벌릴 때가 있고, 이런 것을 막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잘 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일이 일어나든, 나쁜 일이 일어나든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에게 필요한 자세는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가 어려울 때 있어요. 힘들 때 있어요. 좋을 때 있어요. 이 모든 것이 다 합력하면 인생의 맛을 알아요. 인생의 의미를 알아요. 그런 사람들의 말 한 마디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면서 변화를 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난 1년 동안 우리를 품에 안으셨습니다.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셨어요.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셨어요. 그 뿐이 아닙니다. 비가 오지 않아서 비가 오게 해달라고 우리는 또 얼마나 부르짖고, 새벽마다 기도했습니까? 신명기 1장 31절입니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우리를 안아주셨어요. 때로는 업어주셨어요. 때로는 손 붙들어주셨어요. 하나님이 길을 인도하여주셨어요. 여기까지 왔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행복은 소유가 많은 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권세가 높은 데만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건강과 아름다움만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모두가 다 자기 마음에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품으셨다. 하나님이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신다.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나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래서 내 마음이 기쁘다. 감사하다." 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날마다 날마다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올해에 복 주신 하나님이 내년에 더 큰복을 주실 것을 믿고 살아갈 때, 더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올해보다 내년에 더 잘될 것을 믿고 감사할 때, 더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뭐냐? 희망이에요. 비전이에요. 꿈이에요. 신명기 16장 1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찌니라“. 이 말이 뭡니까? 지금은 아직 부족하더라도, 오늘보다 내일, 이번 달보다 다음 달, 금년보다 명년, 나의 대보다 자손의 대에 더 잘될 것을 알고, 믿고, 비전을 가지고, 꿈을 가지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그 축복이 장차 하나님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나의 삶을 꿈꾸며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축복이 날마다 더해서 30배, 60배, 100배, 한번 더 말할까요? 1000배,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나를, 현재의 환경을 보고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좋으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믿음을 보고 우리가 감사하면 틀림없이 더 감사할 일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영혼의 열매에 감사
그 다음 세 번째입니다. "영혼의 열매에 감사"하자. 따라하시겠습니다. "영혼의 열매." 그렇습니다. 자연의 열매, 귀합니다. 생활의 열매, 귀합니다. 그런데 제일 귀한 것이 뭐냐? "영혼의 열매."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님의 은혜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죽은 영이 살았습니다. 중생했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마귀의 종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죄인이 의인되었습니다. 지옥 갈 자가 천국 갈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얼마나 감사해요? 하늘나라에서 내 영혼이 열매 맺는 것보다, 내 영혼이 추수되어서 알곡이 되어서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보다 더 귀한 것, 더 감사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처럼 의식주 때문에 구원의 감격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돈 버는 것 때문에, 직장 때문에, IMF에 삶이 어렵다고 해서 구원의 열매, 구원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삭의 아들 에서는 사냥하러 갔다가 배가 고파서 팥죽 한 그릇 먼저 먹으려고 장자권을 팔아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우리가 맺은 열매 중에 하나님을 통해서 맺어질 제일 귀한 열매는 영혼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영혼이 추수되는 것입니다. 알곡 되는 것입니다. 어린 양 생명록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신부가 되고, 이걸 생각하면 너무너무 고맙고 너무너무 감사해요.
성경은 끊임없이 너의 구원의 날을 기억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6장 3절입니다. “유교병을 그것과 아울러 먹지 말고 칠 일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아울러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속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너의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가 예수를 처음 믿은 날, 자기가 구원받은 날, 애굽 같은 죄악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진 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날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받고 성령충만 받은 것은 하나님 은혜입니다. 이것을 잊지 아니하는 사람은 날마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올려드림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날마다 새롭게 맛보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시편에 말합니다. 50편 23절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보이지 않는 구원이 있고, 보이는 구원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구원은 이제 주님이 재림하시면 우리가 천국을 가는 것입니다. 죽어서 천국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구원이 뭡니까?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깨어진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실패한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불치의 질병이 치료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구원에 감사하고, 구원받은 것에 감사하면, 우리 하나님은 보이는 구원으로 우리를 축복하셔서 범사가 다 형통하게 하시고, 건강하게 하시고, 강건하게 하시고, 행복하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시고,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수많은 영혼들이 추수꾼을, 추수의 일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 35절 하반절에 보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안타까운 마음으로 추수할 일꾼을 간절히 찾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로 38절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추수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추수할 일꾼은 누구입니까? 먼저 구원받은 "나"나 여러분들인 것입니다. 추수할 때가 되었습니다. 추수꾼이 있어야 해요. 추수할 일꾼이 필요합니다. 내가 나가서, 여러분이 나가서, 우리가 나가서, 예수를 모르는 많은 불신자들,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찾아가서 예수 복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롬 10:17)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고, 중생하고, 구원을 받으면, 많은 영혼이 추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고가 거듭거듭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가서 예수를 모르는 영혼들을 복음의 낫으로 추수해야 합니다. 전도의 낫질을 쉬면, 전도의 기도를 쉬면, 영혼의 열매를 추수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추수감사주일에 영혼의 열매를 감사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1년 중 추수감사주일날 우리가 할 것 중에 제일 먼저 할 것이 뭐냐? 아직 구원받지 못한 가족, 친척, 친구, 이웃들에게 우리가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해주거나, 우리가 생활의 모범으로 성도의 삶을 보여줘서, 또 기도해서,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고, 그들의 영혼이 추수되게 하는 것입니다.
넷째, 나눔의 열매에 감사
네 번째, 하나 더 말하겠습니다. "나눔의 열매에 감사."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나눔의 열매에 감사하자."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채워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구원의 체험을 받아야,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세례받고, 은혜를 받아야, 하나님의 은혜로 더 건강해야, 하나님의 은혜로 물질도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이 넓어야, 우리는 남에게 나눠주면서, 베풀어주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눠주는 것, 나눔의 열매, 아무나 하나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되는 거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나눌 수 있는 마음과 삶을 가졌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하나님께 더 많이 감사해야 합니다.
홀몸노인을 우리가 손길로 도와주고, 마음으로 도와주고, 말로 도와주고, 양식으로 도와주고, 소년소녀 가장을 후원하고, 베데스다 어린이들을 위해서 우리가 교육관을 만들어주고,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사랑으로 권면해서 그들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주고,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고,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돌봐주는 것, 이것이 나눔이에요. 이것은 누가 합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그러므로 이것을 할 때, 자기 자랑하면 안 되요.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하나님 고맙습니다. 나눌 수 있는 삶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화목의 삶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물질을 주셔야 하고요. 성령의 능력을 주셔야 하고요. 시간을 주셔야 하고요. 모든 것을 주셔야만 할 수 있어요. 나눌 수 있어요. 그래서 역대상 29장 1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가 나눠주고, 베풀어주고, 실천하는 모두 모두, 모두가 다 주의 손에 있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눠주고 베풀어주면서 꼭 기억할 것은, 절대로 우리가 공치사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자랑하면 안 되요. 교만하면 안 되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겸손해야 해요. 더 낮아져야 해요.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힘을 주셔서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영광과 찬양과 존귀는 주님만 받아주옵소서."
또 기억할 것은 이 귀한 추수 감사, 나 혼자만 감사하지 말고 모든 분들과 함께 감사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절기 때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즐거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명기 16장 11절입니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찌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홀몸노인, 소년소녀 가장, 불우 청소년, 가난한 이웃, 고아와 과부와 함께, 오랜 병으로 고통당하는 환자들과 함께 추수감사절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로만 감사가 아니라, 이 은혜를 받은 우리가 이제 교회를 떠나서 동리로, 지역으로, 구역으로, 사회로 나가서 그들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만의 추수감사예배보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과 함께 추수를 나누고, 예배를 드리고 사는 삶을 기뻐하신다, 그 말인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감사와 불평은 벽에 던지는 공과 같다고 했습니다.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은 감사할 것이 자기에게 더 많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반대로 불평을 자꾸 하는 사람은 오나가나 불평거리만 자꾸 생기는 것입니다.
지난 1년 동안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하고, 서로 함께 나누는 2001년 추수감사절이 되도록 합시다. 틀림없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나도 살고, 너도 살고, 우리도 살고, 교회도 살고, 나라도 살게 됩니다.
- 기 도 -
하나님, 감사합니다. 2001년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주님,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에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추수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더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과 나누기를 원하오니, 성령이여,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감사신앙을 찾으신 예수 (본문 : 누가복음17:11-19)
하나님은 감사와 영광을 받으시기 합당한 분이시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으며 우리에게 감사절을 주셔서 평생에 감사를 잊지 않도록 하셨다. 요즘은 교회에서 ”스폰지 교인이 되자.”는 말이 유행이다. 스폰지는 부드러워서 공격을 당해도 상처받지 않고, 상처를 주지도 않는다. 또한 푹신해서 남을 편하게 해 주며, 부딪혀도 소리가 안 난다. 스폰지 교인은 흡수력이 뛰어나서 늘 하나님 은혜와 감격에 젖어 살며, 감사에 예민하고 잘 감동한다.
1.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은 모두 감사신앙을 가졌다.
성경에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을 보면 감사신앙이었다. 오빠 나사로를 살려 준 예수님의 은혜에 너무 감격해서 마리아는 다 드려도 아깝지 않는 마음으로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았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만 되고,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었지만 예수님의 은혜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천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다. 한나는 자식이 없어 늘 고통 속에 살았지만 기도가운데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주시자 사무엘을 하나님의 것으로 드렸다. 하나님을 귀히 여긴 한나를 하나님도 귀히 여겨 세 아들과 두 딸을 주셨다. 귀한 것을 드렸을 때 하나님도 사무엘을 귀하게 사용하셨다.
적 용 : 성경에 나오는 감사 신앙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봅시다.
2. 감사신앙을 찾으시는 예수님
감사의 수준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다. 본문에 10명의 문둥이가 나오는데 이들을 고치시기 위해 예수님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길로 그들을 찾아 가셨다. 그 자리에서 고치시지 않으시고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고 하시며 그들이 순종했을 때 가다가 깨끗함을 받게 하셨다. 성경에서 많은 자들이 고침을 받았지만 다 다른 방법으로 고침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는 방법도 사람마다 다르다. 주님이 각자에 따라 주시는 은혜 방법이 다르지만 어떠한 일을 당하든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면 역사가 일어난다.
아홉 명의 유대인 문둥이는 고침 받고도 제 갈 길로 가고 한 명의 사마리아 문둥이는 먼 길을 다시 돌아와 예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님은 열사람이 고침을 받았는데 나머지 아홉명은 어디 갔느냐고 물으시며 찾으셨다. 예수님은 감사인격을 찾으시고 감사를 기다리시며 기대하신다. 오늘날도 받은 은혜가 너무 큰 것에 비해 감사하는 인격, 감사하는 신앙이 1/10밖에 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마리아인 같은 불신자보다 은혜 받은 믿는 자들이 감사의 생활을 하지 않는다.
적 용 : 예수님은 왜 문둥이들을 그 자리에서 고쳐 주시지 않고 가다가 고침 받게 하였습니까?
3.감사신앙을 더 축복하기 위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나머지 아홉명의 문둥이를 찾으신 이유는 오히려 감사하러 찾아온 사마리아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였느니라.”고 말씀하시며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시편50:14,15에 감사를 잘 하는 자가 환란을 만날 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주께서 건져주신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은 결코 보증 받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사람 같은 감사의 인격을 가진 자를 찾고 계신다. 성도의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하는 인격, 감사하는 영성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감사의 영성과 인격을 회복하고 감사의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적 용 : 왜 예수님은 아홉 명의 고침 받은 문둥이를 찾았습니까?
만민들아 여호와께 감사하라 (본문 : 역대상 16:8-10,25-29 골로새서)
오늘 우리는 살아 계신 우리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의 감사의 모든 뜻을 모아서 정성을 다하여 감사를 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기의 힘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떤 임금님이 하루는 너무도 음식을 잘 차려 주어서 맛이 좋아서 주방장을 불렀습니다. 이 사람아 어떻게 하면 그렇게 솜씨가 좋은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어디서 이렇게 준비를 했지. 아닙니다. 오늘 가게 주인이 얼마나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제공해 주어서 음식이 맛이 있었습니다. 제가 잘한 것이 아닙니다. 임금님께서 가게 주인을 불렀어요. 어떻게 그렇게 좋은 물건을 팔았느냐고. 저는 장사꾼이에요. 농사를 지은 것을 가져다가 파는 것이지 내 공로가 아니에요. 임금님께서 농사짓는 분을 데려다가 물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농사를 잘 지었느냐고. 어디에 그런 기술이 있냐고. 어떻게 그렇게 좋은 농산물을 생산하느냐고. 아닙니다. 저는 그냥 심었고요. 김 조금 메었고요, 저는 잘한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햇빛 주시고, 단비 주시고, 적당한 기후 주시고 내게 건강주시고, 만가지 은혜를 주셔서 거둔 것입니다. 저는 농부입니다. 저는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지나오면서 우리가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까? 누구의 은혜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십니까? 공부하는 여러분이십니까? 항상 공부할 수 있도록 돌보아 주시고 건강하게 하시고 오고가는 길 사고 없게 하시고 의사이십니까? 주사 한 방만 부작용이 나도 문닫는 병원을 제가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것이요 내 공로 아닙니다. 한번만 실수해도 큰일나는데 하나님이 천번 만번 도와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 이것이 지성이에요. 본성이에요. 가장 훌륭한 인격이에요.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언제나 감사할 것을 신?구약 성경에 다 말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왜 생겼느냐? 감사 때문에 생겨난 거예요. 우리는 앞으로 뭐가 잘 되려고 교회에 나온 거 아니에요. 지금까지 지내온 은혜에 대해서 너무 감사하고 나를 구속해 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여기 나온 거예요.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러분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고만 하세요. 내가 선창을 할 테니까 엉뚱한 말하시지 말고.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데서 기념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편에 나오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30여 개의 이런 감사에 대해서 배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감사, 감사밖에 없습니다. 시 100편 4절에는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 96편 7~9절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찌어다. 여호와께 돌릴찌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찌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찌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찌어다"
시 149편에도 말씀합니다.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찌어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시온의 거민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할찌어다.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찌어다"
여러분 여러 악기가 동원 되었습니다마는 악기를 연구하는 학자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악기는 리듬이나 모든 내용이 감사와 승리와 환희와 축복에 대해서 이미 누리고 있는 한없는 은혜에 대해서 찬양하는 곡조로 되어 있고 악기도 다 그런 악기들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저도 악기를 많이 모았습니다. 그 학자가 말했습니다. 원시 사회에서부터 오늘날까지 하나님이 없는 곳에 사용된 악기들은 다 인간의 허무함을, 괴로움을, 인간의 고통을 표현하는 슬픈 리듬이고 모두가 슬픔으로 이어져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노래는 한숨입니다. 슬픔입니다. 울음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찬송이요, 감사요 하나님께 영광인 것입니다.
시 148편.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과 방백과 땅의 모든 사사며 청년 남자와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찌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심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하겠습니까? 추수 감사절은 농민들이 지은 것을 가져다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다 도시에서도 농민 이상으로 받은 은혜가 많습니다. 일년 동안 지내오면서 만가지 주신 은혜를 농민들이 땀 흘려 지은 농사를 가져다가 잘 먹고, 우리는 편하게 잘도 지났습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뭐 감사한 게 있냐? 감사는 찾아보면 너무나 많은 것이 감사입니다.
저는 어저께도 그런 것을 감사했습니다. 머리카락이 없는 분은 요사이 머리를 심는데요 머리 한 개 심는데 만원씩 1000개 심어봐야 얼마 안 됩니다. 만개 심어도 얼마 안 돼요. 머리가 한 20만개 정도 된다고 하는데 간단하게 잡아도 머리카락만 해도 20억이에요. 머리 한 움큼만 잡아도 5억이에요. 얼마나 감사해요. 감사한 일이 그렇게 많은 거예요. 팔 하나에 1억씩 해도 2억, 다리 1억씩 하면 4억, 1억에 이것을 팔겠어요? 눈, 얼마씩에 팔겠어요? 이 심어서 해 넣으려면 얼마나 돈이 많이 들겠어요? 다 감사예요. 밤에 잠 잘 자게 하시고 음식 잘 먹고 열심히 살 수 있는 은혜, 이 충만한 우주에 모든 감사, 너무 좋은 것 보고 듣고 우리가 누리는 엄청난 축복, 누구의 것이옵니까?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성도들아 감사하라. 이것이 옳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의인들아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것이 마땅하니라 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 하나님께 더 많은 감사로 주를 영화롭게 하는 복된 성도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의 감사는 다 있어서, 좋아서 감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부족함이 없이 부유하고 영광스럽고 축복 받고 잘 되어서 감사하는 것이 성도의 감사가 아니에요. 성도의 감사의 뿌리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영 죽을 우리를 죄어서 건져주신 거예요. 우리가 걸어가도 뒤따라오는 추적하는 죄악이 없는 거예요. 자유를 주셨어요. 사망과 저주에서 우리를 건져주신 그 은혜가 우리 성도들의 감사의 샘이요 뿌리예요. 우리는 모든 것이 없어도 이 하나 때문에 감사하고 어디 가서도 이 하나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거예요.
오늘 현대인들이 정말 없어서 이렇게 허전하고 공허하고 자살하고 서로 해치고 온갖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정말 없어서가 아니에요. 감사할 조건이 많지만은 죄사함이 없는 심령은 감사가 있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때 이제 모든 염려를 우리의 모든 짐을 우리의 모든 죄악을 주님이 다 짊어 주시고 사해주신 이 은혜에서 우리는 감사가 시작되고 또 감사가 싹트고 거기에서 감사의 열매가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도 오늘 본문은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감사의 삶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할 것과 입으로 말할 때마다 늘 감사의 말을 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늘 생각하며 우리는 감사의 삶을 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 5:18살전 5:18,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엡 5:20엡 5:20,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 2:7골 2:7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에 따라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은 그래도 우리는 늘 감사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유명한 히아테스라는 분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에게 어떤 것을 주시던 하나님께 감사하면 마귀가 발을 붙일 자리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마귀가 재산을 통해 들어갑니까? 마귀가 사업장으로 들어옵니까? 아니지요. 마귀는 늘 불만을 갖는 그 마음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 아니에요? 마음에 들어와서 마음이 무너지고 마음이 무너지니 몸이 무너지고 몸이 무너지니까 사업도, 가정도, 무너지는 것 아니에요. 마귀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찾아가는데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마귀가 넘어뜨릴 능력이 없는 것이지요.
가장 좋은 언어는 감사라고 합니다. 열 살까지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는 7000개 정도라고 합니다. 성인이 되면 2만 5천 개의 단어를 우리가 사용하는데 여러분, 열 살까지 예를 들어서 7000개의 단어를 사용해서 제 아무리 똑똑한 말을 한다 할지라도 감사하다는 한 마디가 7000개의 단어를 더 능가한다라는 거예요. 이것 없이 다른 말을 아무리 해 보세요. 아이가 별나게 똑똑하다. 이렇게 생각하지 그러나 엄마 감사합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 말 한마디가 7000개의 단어보다 더 귀합니다. 2만 5천 개의 단어를 가지고 아무리 최고의 웅변가가 되고 명 연설가가 되고 학자가 된다 할지라도 감사라는 말을 안 하면 그 심령은 죽은 거예요. 하나님이 찾아보시는 말은 하나님이 찾는 언어는 감사의 언어입니다. 감사, 할렐루야.
감사해야 합니다. 에디슨은 신문 배달하다가 얻어맞고 귀가 멀었지만은 그는 감사의 삶을 살면서 나중에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게 하시려고 귀를 멀게 해서 한쪽 분야에만 전심 전력해서 이렇게 놀라운 일을 하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로 구속함을 입은 그 심령은 이렇게 감사의 삶을 살아가면서 어떤 환경도 역전시키고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고 최후 승리를 얻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는 적은데서 출발하는 거예요. 식물과 같아요. 조금만 감사해도 감사할 때마다 나무는 쑥쑥 자라는 거예요. 열매와 같대요. 적게라도 감사를 시작하면 그 감사는 점점 더 열매를 맺는데요. 맨발을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 양말을 주시고, 양말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 신발 주시고, 신발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 양복 주시고, 양복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 코트 주시고, 코트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 자동차 주시고, 자동차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 기차 주시고, 기차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 비행기 주시고, 비행기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 저 천국 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다라는 거예요.
우리 기독교 역사에 가장 훌륭한 설교자는 스펄젼입니다. 영국의 목사님이신데. 이 분은 한번 설교할 때 마이크 없이 3만 명을 대상해 설교한 최고의 설교자입니다. 이분이 한 유명한 말 기억하시죠. 촛불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 전깃불 주시고, 전깃불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 별빛 주시고, 별빛 은혜를 감사하면 달빛 주시고 달빛 은혜를 감사하면 햇빛 주시고 햇빛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 영원한 어둠이 없는 하나님의 빛으로 비추어 주신다. 감사는 자꾸 자라나게 되어 있고, 불평도 자라나요. 이것은 파괴하는 거예요. 그러나 감사는 건설하는 살리는 거예요. 축복이에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예요.
우리 모두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 되기를 바랍니다. 존 밀러는 말하기를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는 그의 감사에 달려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시 30:11-12시 30:11-12.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할렐루야"
다윗의 감사, 나의 감사 (본문 : 시편144:1-3)
오늘은 시편 144편 1절에서 3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다윗의 감사, 나의 감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편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들으셔야 합니다. 본문에는 다윗의 감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감사는 나의 감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감사절의 직접적인 유래는 청교도들의 감사 예배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들은 1623년에 큰 풍년이 들어 많은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일년 전에 신대륙으로 올 때에는 굶으며 죽으며 왔다가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감사하면서 예배드린 것이 유래가 되어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추수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왔기에 믿음의 자유를 얻고 감사한 것입니다. 또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을 감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주변에 사는 인디언들을 초청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농사를 지을 줄 모르고 그 땅의 풍토를 잘 몰랐으므로 그들은 인디언들의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디언들을 초청해서 함께 예배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나중에는 인디언들을 죽이고 내 쫓아 버리고 땅을 빼앗았습니다. 하여튼 청교도들의 감사가 우리들의 감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다윗의 감사는 어떠한 감사였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승리 주심을 감사 (1-)
본문 1절을 보면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치게 하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씀에서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씀 대신에 '감사하리로다'라고 해도 됩니다.
'저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어느 누구와 싸우도록 싸움을 붙이셨다는 뜻입니다.
'손가락을 가르쳐 치게 하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다윗으로 하여금 치게 하니까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얻어맞게 하셨다면 패배하는 것이요,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에게 승리하게 하셨고 다윗은 승리 주심을 감사했습니다.
다윗이 이런 시를 읊을 때에는 책상에 앉아서 묵상을 하는 중에 시상이 떠올라서 쓴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과거의 경험을 바탕에 두고 그 사실에 근거해서 이 시를 쓴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엘라 골짜기에서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양쪽에서 마주 진을 치고 서로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블레셋의 대장군 골리앗은 키가 9척 같고 베틀채 같은 창을 들고 나와서 "누구든지 일대 일로 싸워서 이 싸움을 끝내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 군사들 중에는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고, 대부분이 오금을 펴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다윗이 소년으로서 형들 셋이 전쟁에 나가 있었기 까닭에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안부를 알려고 싸움터에 왔었습니다. 그런데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싸움을 돋우며 하나님의 모욕하고 능멸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그냥 보고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다윗은 격분하여 물매돌 다섯 개를 들고 싸우러 나갔습니다. 싸우러 나갈 그 때의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일으켜 골리앗과 싸움을 싸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그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제 오전에 어떤 텔레비젼 프로에 혼혈아 즉 백인과 흑인 부부가 쌍쌍이 출연을 했는데 그 부인들은 전부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는 중에 혼혈아들의 고통스러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들을 혼혈아, 아이노꼬, 깜둥이 하면서 조롱하는 것은 얼마든지 참아 낼 수 있었으나 자기 어머니를 향해서 양공주니 뭐니 하면서 욕을 할 때는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나에게 잘 해주는 고마운 분이요, 훌륭한 분인데 왜 욕을 하느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죽을 힘을 다해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웠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욕하는 것은 못 견디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저렇게 욕하는 블레셋 대장 골리앗을 보고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다윗이 분노하는 것은 믿는 사람으로서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물매돌 다섯 개를 가지고 나가서 처음으로 돌을 던졌더니 그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맞아 골리앗이 쓰러졌습니다. 물매돌이 아직 네개가 남아있습니다. 쓰러진 골리앗이 죽지는 않았는지라 자기에게는 칼이 없기에 골리앗이 차고 있는 칼을 빼앗아 목을 쳐서 죽였습니다. 자기 칼에 자기가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사람의 말로는 이런 것입니다. 골리앗을 상대로 싸울 때 누가 다윗이 이긴다고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손을 가르쳐 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치게 하시므로 골리앗이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물매돌에 골리앗이 맞아 쓰러지겠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치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골리앗의 목까지 잘라 버렸으니 완전 승리였습니다. 이 승리는 다윗이 잘 싸워 쟁취한 승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감사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감히 상대가 안 되는 다윗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싸워 이기게 하시고 승리 주시니 감사했다는 것이 본문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로마서 8장 37절을 보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 아닙니까?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싸움은 다 이겨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 까닭에 넉넉히 이긴다, 완전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승리하신 그 승리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와 더불어 싸워 승리하셨습니다. 마귀라는 말만 들어도 우리가 얼마나 무서워했었습니까? 또 죽음이라는 무서운 세력과 싸워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즉 죽음 권세 깨고 승리하셨습니다. 제일 무서운 마귀 그리고 죽음을 우리 예수님이 전부 싸워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예수님을 힘입어 넉넉히 이겨 죽음이 이제는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이제는 우리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완전히 승리했기 까닭입니다. 결국 우리는 죄에서 자유, 죽음에서 자유 또는 마귀에서 자유를 완전히 얻었습니다.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우리가 돈 몇 푼을 더 벌어 놓았다는 것과 비교하거나 계산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또는 예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는 참 어려운 싸움 한가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직접 싸워주시지 않지만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나 자신과 싸워서 이긴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꼭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대성교회 강도사로 부임해 갔더니 장로님 한 분이 그렇게 저를 못살게 굴었습니다.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요, 막말로 말해서 그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의 심정이었습니다. 얼마나 못살게 굴던지 제가 목사 고시를 치를 때 전국에 있는 고시 위원들을 찾아다니면서 김창인이 목사 시키면 안 된다고 부탁하고 다녔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목사로 시키신다고 하는데 왜 자기가 안 된다고 합니까? 그래서 그 사람을 보기만 하면 속이 뒤집어지고 심장이 널뛰듯 뛰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장로를 보기만 하면 혈압이 굉장히 올라갔는지 머리가 쪼개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미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니 찬송이 되겠습니까? 기도가 되겠습니까? 설교가 되겠습니까? 믿음이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안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그것을 정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네 원수 갚는 것을 내게 맡기라"는 말씀대로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박살을 내려면 내시고, 세상의 복이란 복은 모두 다 가져다 주시려면 주시고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정리를 하고 털어 버리니까 얼마나 마음이 평안한지 모릅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되었습니다. 찬송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설교가 되었습니다. 나와의 싸움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렇게 너를 괴롭히는 문제를 네가 끌어안고 싸우지 말고 나에게 맡기라"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그 이후의 그 장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별로 잘 되지를 못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 그렇게 평안이 있고,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나에게 승리 주신 주님께 감사하노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 믿음 주심을 감사 (2-)
내가 믿는 믿음은 몇 일을 가지 못합니다. 손해를 보게 되면 안 믿는다고 합니다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오면 나는 안 믿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내가 만들어서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고 나는 그 믿음을 받아서 믿는 믿음은 손해와 고난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 즉 예루살렘 교회 감독인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약 2:1약 2:1)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너희에게 편지하노니"(벧후 1:1벧후 1:1)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을 받았다, 받았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재간이 있습니까? 그리고 2천년 전에 죽은 예수가 오늘날 내 죄를 위해서 죽었다는 맹랑한 소리를 우리가 어떻게 믿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에게 돈을 준다 하여도 절대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영인 성령의 감동 때문입니다. 성령은 예수로 통해 보내 주시기 까닭에 예수의 영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그 영이 내 마음을 감동시키실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아버지처럼 믿어지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이 철석같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내 놓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나를 감동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영이 나를 감동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들에게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믿게 하시는 사역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면 성령을 받은 증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그 결과는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받아서 믿는 것이지 내가 만들어서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 믿음 주심이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공로를 세우고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윗은 우리아 장군을 죽이고 그 아내 밧세바를 빼앗았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와서 얼마나 신랄하게 책망을 하는지 "내가 죽일 놈이지"라는 뜻에서 그 자리에 엎드려 기도하고 눈물 흘리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리하고 난 후에 쓴 것이 시편 51편입니다. 그쯤 되었으면 이제는 왕의 자리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부귀영화도 다 빼앗기게 생겼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치시는 경우 건강도 빼앗기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런 것은 빼앗아 가도 좋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만 나를 쫓아 내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한 다른 것은 빼앗긴다고 해도 빼앗기는 것이 아니요, 잃는다고 해서 잃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계시면 됩니다. 그리고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어 가시면 내 믿음이 뭐가 됩니까? 믿음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나의 전부요, 하나님이 보내주신 그 성령이 나의 전부입니다"라는 신앙 고백이 시편 51편 11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바로 그 성령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전부라는 것을 고백했고, 성령으로 믿음 주심을 감사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절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인자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자시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 대해서 일곱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나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나는 살아 남을 재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전부를 잃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런 믿음이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쌀 몇 가마니를 더 추수해서 쌓아 놓는 것이 문제입니까? 그것도 감사할 일이지만 이런 믿음 주신 하나님께 다윗은 감사했습니다.
제가 신학교 1학년을 마치고 휴학한 후에 부산에 가서 남부민 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 그 교회 예씨 성을 가진 예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안동 옆에 있는 예천 분이었습니다. 이 분이 예수 믿게 된 동기를 간증하시는 것을 듣고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 권사님에게는 아들 형제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두 아들을 낳고 아들들이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큰아들이 고열 때문에 헛소리를 하면서 몇 일을 계속해서 앓았습니다. 백약이 무효라 무슨 수를 써도 낫지를 않았습니다.
한번은 동네 밖을 나가고 있는데 점잖은 분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생전 처음 보지만 자기 느낌에 도인 같더라는 것입니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무조건 붙들고 "내 아들이 이렇게 죽어 가고 있으니 살려 주십시오"라고 하였답니다. 그랬더니 "그러면 집으로 갑시다"하여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 가서 이 분이 꿇어 엎드려서 아들을 붙잡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를 하는지 진액을 빼는 것 같았답니다. 그 결과 아이가 열이 내리고 밥을 달라고 하여 밥을 먹고는 일어나 나가서 놀더라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그 분이 바로 그 동네 사람을 전도하러 오던 전도인이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죽을지 살지 모르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완고한 시아버지가 아들 죽은 후 며느리가 두 손자를 데리고 사는데 예수 믿겠다고 하는 것을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아들이 그 집의 장손, 즉 그 가문의 장손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문중이 들고일어나서 "너희가 제사 지내는 것 때문에 너희 집에 준 거창한 땅을 다 내 놓으라 그리고 예수를 믿을 것이면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즉 문중이 달려들어 빼앗고 내 쫓았습니다. 그 때 "나는 예수 안 믿겠습니다"라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부 내 놓고 대구로 나와서 안 해 본 일 없이 열심히 살면서 두 아들을 공부 시켰습니다. 알고 보니 큰아들은 저와 동갑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영어 선생이 되었고, 작은 아들은 그 당시 큰 회사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큰 회사에 들어가 요즘으로 말하면 팀장이 되어서 얼마나 잘 나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 자기가 한 일이 너무 잘했다는 것이 예권사님의 간증이었습니다. 논 몇 마지기를 더 가지고 내가 예수를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예수님은 나의 전부요, 하나님은 나의 전부요, 예수 잃고 하나님 떠나면 하나도 되는 것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감사였고, 예권사님의 감사였습니다. 이런 믿음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알아주심을 감사 (3-)
시편 27편 10절을 보면 다윗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언제 부모한테 버림을 받았습니까? 그런 적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부모는 나를 버렸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버림받은 나를 영접해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고백한데는 배경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하나님의 눈에 거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꼴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베들레헴에 있는 이새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 보내어 아들들 중에서 왕을 미리 뽑아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사울이 죽는 날에 왕으로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집에 가서 아들들을 전부 부르라 했을 때 일곱 명이 모였습니다. 큰아들을 보니 신장이 훤칠하고 멋있고 좋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로구나'하여 기름을 부어 왕으로 예선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는 외모를 보지만 나는 중심을 보는데 그 중심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허대가 멀쩡해도 속을 보면 못 쓸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둘째도 아주 기골이 장대한지라 기름을 부으려고 하니 역시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일곱째까지 다 지나갔습니다. 사무엘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들이 더 없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있기는 있습니다" "그 아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들에서 양을 치고 있는데 부르지 않았습니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축에 안 끼워 주었다는 말입니다. 사무엘이 빨리 데려 오라 하여 데려온 아들이 바로 다윗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자니 기름을 부으라. 다윗을 통해서 내 뜻을 이루겠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뽑아 주셨습니다. 그 사실을 전부 다윗이 알았습니다. 다윗은 "내 부모가 이럴 수 있을까? 왜 나를 형제들 축에 나를 끼워 주지 않았느냐? 왜 나를 왕따 시키고 제외시켰느냐? 부모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해 주셨습니다. 알아주고 인정해주셨습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나를 부러워 아니해줘도 좋고 또 인정해 주어도 안 해 줘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시고 인정해 주시면 최고로 감사할 일인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절을 보면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은 다윗이 한 노래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무엇이관대 이렇게 알아주십니까? 내가 무엇이관대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생각해 주십니까? 하나님이 알아주시니 그렇게 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언제 공부를 제일 잘 했을 것 같습니까? 저는 초등학교 3학년과 4학년을 다닐 때 공부를 제일 잘 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은 스모도 선생님이었는데 항상 채찍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시험 점수가 나쁘거나 숙제를 안 해 오거나 책을 읽으라 하여 잘 못 읽으면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매 맞기 싫어서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그 때는 갑 을 병 정으로 점수를 매길 때였는데 시험을 치르고 성적이 나온 것을 보니 전부 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전부 A였다는 말입니다.
한 학년을 진급하여 4학년에 올라갔습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나를 때리면서 공부를 시킨 그 선생님이 그 때는 미웠으나 지금 생각하면 너무 고맙습니다. 공부를 잘해 갖고 4학년에 올라갔더니 담임 선생님이 아라이라는 이름의 쭉 빠진 처녀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때 공부를 시키는데 3학년 때 공부를 그렇게 했으면 제가 좀 뭘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때는 국어 공부를 해도 일본어 공부였습니다. 아라이 선생님께서 일어나 읽으라 해서 제가 한 구절을 읽으면 학생들이 한 구절씩 따라 읽었습니다. 그러면 이 선생님이 얼마나 잘했다고 칭찬을 해 주고 쓰다듬어 주었는지 모릅니다. 또 음악 시험을 치를 때에는 나와서 부르게 한 후에 선생님이 들어보고 갑 을 병 정으로 점수를 매길 때입니다. 노래를 부르고 나면 잘 했다고 얼마나 칭찬을 해 주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눈을 감고 그 선생님을 생각만 해도 좋았습니다. 보기만 해도 좋구요, 음성을 듣기만 해도 좋았습니다. 공부가 안 될 리가 있습니까? 선생님한테 더 칭찬을 받으려고 밤이 깊도록 피곤을 모르고 공부했습니다. 성적이 나온 것을 보니 전부 갑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성격에 따라 표현이 다릅니다.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교직원실 앞을 지나가면서 살짝 곁눈질하여 보았으나 관심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지나갔습니다. 이것이 반대 표현입니다. 성격이 조금 내성적인 사람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격이 적극적인 사람은 "선생님!"하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아가씨들한테 총각들이 고개를 돌리고 지나가면 사랑하는 줄 아시면 됩니다. 그 때 가서 붙들면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저도 새벽 기도 시간에 여자 교인들이 인사를 안하고 고개를 돌리고 지나가는 것을 보곤 하였습니다. '저 여자가 나를 사랑하는가 보다'라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알고 봤더니 화장을 안 해서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돌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아라이 선생님이 저를 알아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학교에서 집에 가려면 5리에서 10리 사이가 되는데 친구들과 함께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선생님이 남으라고 하였습니다. 남아 있으면 자기 일을 좀 도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도와주면서 얼마나 좋았는지 아십니까? 혼자 집에 가도 좋았습니다. 선생님이 나를 인정해 주고 알아주었기 까닭입니다. 학생이 학생한테는 인정을 받아도 좋고 못 받아도 괜찮습니다. 선생님한테 인정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은 다윗은 감사한 것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윗은 첫째 승리 주심을 감사했습니다. 골리앗을 이긴 것은 자기가 쟁취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주신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둘째 믿음 주심을 감사했습니다. 자기가 만든 믿음은 몇 일 가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믿는 믿음이기에 하나님은 나의 전부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알아주심을 감사했습니다. 부모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알아주시니 다윗은 감사했습니다.
큰 감사, 큰 기적 (본문 : 마태복음 14:14-21)
옛날에 사탄이 지구상에 내려와 저 동구 유럽의 노르웨이에다가 창고를 하나 지었답니다.
사탄의 창고에는 각종 씨들, 곧 미움, 슬픔, 불평, 원망 등의 씨들을 저장해 놓았습니다.
이 씨들은 누구의 마음 속에 뿌려도 싹이 잘 나는데 한 동네 사람들한테만큼은 효력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동네의 이름은 "기쁨"이었는데, 어떤 슬픈 상황과 절망적 처지에서도 그들은 언제나『감사』하는 자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에는 사탄이 씨를 뿌릴 수 없다"는 노르웨이 속담이 나온 것입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사탄이 틈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 어거스틴은 이런 고백을 들려줍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만일 자기더러 한 가지를 더 말하라고 한다면 "감사"를 덧붙이고 싶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은 언제 어디서 누가 들어도 좋은 말입니다.
우리 모두 양옆의 분들과 '함께 예배드리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합시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감사 불감증에 걸려 있는 듯 합니다. 감사할 줄 모릅니다. 감사가 인색합니다
말세가 되면 이 세상은 살기가 고통스러워지는 이유 중 하나가 곧, 감사할 줄 모르는데 있다고 예고합니다(딤후 3:2딤후 3:2).
그러나 성경은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라고 합니다(골 2:7골 2:7).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항상 감사가 넘치는 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칼 힐티의 「행복론」에 보면,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은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정의합니다.
"감사하라. 그러면 젊어진다. 감사하라. 그러면 발전이 있다. 감사하라. 그러면 기쁨이 있다."
옛날에 한 언론인이 프랑크 감독에게 "행복해지는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나는 행복해지는 비결을 모릅니다. 그러나 불행해지는 원인은 알고 있지요."
두 가지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①이웃 사람처럼 행복했으면 하고 남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결국 불행하게 되고,
②그때처럼 행복했으면 하고 과거에 얽매이는 사람은 틀림없이 불행해진다고 지적합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병들면 감사가 사라집니다. 불평과 불만과 원망과 짜증만 나옵니다.
사람이 감사한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순간적입니다.
저희 교회는 선교후원에 있어서도 참 마음 아픈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농어촌교회나 선교단체는 이제 더 이상 우리가 후원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하여 후원을 중단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물론 사전에 충분히 검토하고, 또 같이 협의해서 결정합니다.
그런데도 어떤 경우에는 더 이상 자기를 후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처럼 좋았던 유대관계가 마치 원수가 된 것처럼 서운하고 불편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감사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감사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더라도 예수님은 어린 아이의 작은 도시락 하나를 가지고도 하늘을 우러러보며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줄거리는 우리가 잘 아는 스토리입니다. 어린아이의 작은 도시락,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밑반찬 두 마리로 남자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풍성한 나라요, 능력의 나라임을 보여주시는 사건계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본문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감사가 클수록, 기적도 크게 일어난다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감사가 얼마나 큰 기적을 일으켰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있는 것에 감사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벳새다 언덕에서 특별 부흥회를 하셨습니다. 하루 종일 계속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은혜 받는 일에 심취하였습니다. 벌써 해가 지고 저녁때가 되어 모두 다 시장기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선한 목자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영의 양식뿐만 아니라, 육체의 배고픔도 해결해주시려는 애정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그들을 먹여서 보내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의 대답은 매우 퉁명스럽고 짜증스러웠습니다.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여기 우리에게는 떡 다섯 조각과 초라한 밑반찬 물고기 저린 것 두 개 뿐입니다."
여기 그들의 대답은 굉장히 불평스러웠습니다. 영어 번역은 아주 실감납니다.
"We have here only five loves of bread and two fish." 굉장히 짜증스런 표출입니다.
누가복음 9장 13절은 이런 뉴앙스로 내뱉었습니다. "이것 밖에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이 없고, 돈도 부족하다는 사실만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6장 7절에서는 "이 사람들을 조금씩만 먹이려 하기 위해, 200 데나리온어치를 산들, 역시 모자란다"고 볼멘소리로 대답합니다.
그들의 대답은 하나같이 퉁명스럽습니다. 짜증스럽습니다. 예수님은 설교는 잘하시지만, 현실은 잘 모르셔.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적입니다.
첫째는 가진 것이 없다. 둘째는 조금씩만 먹이더라도 라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입니다.
셋째는 돈도 없다는 것이요, 넷째는 이 지역에는 그만한 음식점이나 식량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다릅니다. 제자들은 없다는 사실만을 힘주어 보고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지금 있는 그것을 가져 오라"(18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있는 것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 드리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없는 것만을 골라서 불평할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찾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는 동일한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부정이 되기고 하고, 긍정이 되기도 합니다.
원래 Think(생각한다)는 말과 Thank(감사한다)라는 말은 같은 어간을 갖고 있습니다.
한치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얼마든지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우리 모두 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인 T.S. Eliot은 그의 책 「황무지」에서 이런 교훈을 줍니다.
"현대인은 텅 빈 사람이요, 동시에 가득 찬 사람이다."
'있어야 할 믿음, 소망, 사랑, 감사는 없고, 없어야 할 죄, 미움, 시기, 질투, 욕심만 가득하다'고 지적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나에게 있는 것부터 헤아려보며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옛날 독일의 재무장관을 지낸 마르티 바텐이라는 분이 그의 젊은 시절에 배운 좋은 교훈이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매우 가난하여 지방 출장을 가게되면 매우 값싸고 허름한 여관에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구두가 없어졌습니다.
그는 허탈한 마음으로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하필이면 나같이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훔쳐가게 하시다니" 라고 원망했습니다.
그 날은 마침 주일이었습니다. 그는 여관 주인한테 헌 신발 하나를 빌려 신고 저녁 굶은 시어머니 상판을 한 체 교회당으로 갔습니다.
그는 예배당에 들어서서 자리에 앉자마자 놀라운 감동을 받게 됩니다.
자기 바로 앞자리에서 두 다리를 절단한 사람이 앉아서 경건하게 예배드리고 있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 장애자는 밝고 명랑한 표정으로 열심히 찬송을 부르며 한껏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저 사람은 신발을 잃은 정도가 아니다. 두 다리를 몽땅 잃었다. 저런 사람에 비하면 겨우 신발만 잃은 나는 얼마나 다행스런 사람인가? 그런데 나는 겨우 신발 한 켤레를 잃은 것이 마치 지상 최대의 불행이라도 되는 듯 하나님까지 원망하고 있다니."
그 후부터 그는 무조건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존경받는 재무장관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아침도 두 다리로 이 자리에 걸어와 앉을 수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어제 계돈 뗀 사람 얼굴모양으로 찡그리지 마시고, 기쁨으로 예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없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있는 것을 헤아리며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우리가 있는 것을 감사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옛날 독일 나치 정부 시절에 신앙적 핍박을 받은 코리 텐 붐 여사가 이런 간증을 합니다.
코리는 수용소에서 동생 베시와 함께 처참한 감옥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 어려운 고통의 자리에서도 그들은 독일군의 감시를 피하여 비밀리에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수용소 생활 중에서 가장 고통스런 것 중 하나는 벼룩이었습니다. 감옥에는 벼룩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동생 베시(Betsie)는 성경에는 모든 환경 중에서도 감사하라고 말씀하니, 감사하며 살자고 언제나 밝은 표정을 띠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독일군 초병이 혼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엿들었습니다. 그 군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 수용소 안에는 유독 벼룩이 많아 들어가기가 역겨워 ……"
그래서 코리는 자기 방에 벼룩을 많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동생 베시의 성숙한 신앙에 머리를 숙이며 감사했습니다. "벼룩은 비록 우리의 잠을 방해하지만, 독일군 간수로 하여금 우리 방에 못 들어오게 하니 마음껏 성경공부를 할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가!" 할렐루야!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지금 있는 것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기적이 따라옵니다.
2. 작은 것에 감사할 때 큰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작은 소년의 초라한 도시락, 보리떡 다섯 조각과 밑반찬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도 얼마나 큰 감사를 드리고 계신가요?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드리십니다』(19절. 누가복음 9:16)
이 장면은 너무나 거룩한 광경입니다. 복음서 모두 다 이 광경을 최대한 리얼하게 부각시킵니다.
어린 아이의 작은 도시락 하나를 두 손으로 높이 받쳐들고 하늘의 하나님께 큰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영국이 나은 설교자 스펄젼 목사님의 감사기도 가운데 이런 아름다운 기도가 있습니다.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전기 불을 주시고, 전기 불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자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천국의 영광을 비춰주실 것이다." 할렐루야!
우리가 큰 것만 보면 감사하기 어렵습니다. 작은 것부터 감사해야 행복합니다.
평범한 일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별 일이 없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무 일 없음을 감사하세요
어떤 장로님 가정에 부자지간이 식탁에 함께 앉아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버지, 오늘 하나님 은혜에 참 감사합니다. 제가 차를 몰고 오다가 운전을 잘못해서 자동차가 두 바퀴나 굴렀는데도 전혀 다치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은혜에 참 감사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아버지 장로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 감사하구나. 그런데 나는 너보다 더 감사하구나. 나도 오늘 차를 타고 시외를 다녀왔는데, 뒹굴지도 않고, 사고도 안 나고, 아무 탈 없이 집에까지 잘 돌아왔으니 참 감사하구나. 나는 너보다 훨씬 더 감사하구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떤 사람은 병원에서 잘 치료받고 퇴원한 후에 감사 드리지만, 병원에 가지 않고 살고 있음에 더욱 감사하지 않으세요?
어떤 사람은 큰 사고 중에도 기적적으로 다치지 않음에 감사할 수 있지만, 우리는 평소에 작은 사고도 없이 지냄을 더욱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작은 것에 큰 감사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 식탁 옆에 "기도하는 할아버지" 그림을 걸어놓으셨을 것입니다.
소박하게 행상하여 먹고사는 어떤 할아버지의 감사기도 모습입니다. 식빵 한 덩어리와 수프 한 컵을 놓고도 얼마나 진지하게 감사하는 모습인지요.
『가난한 식탁에, 풍성한 감사!』 여기에 행복이 있어요.
우리가 잘 아는 화가 밀레의 "만종"이라는 그림의 소제가 무엇입니까?
들녘에서 하루종일 일을 한 부부가 저녁 예배당 종소리를 들으며 하루 일과를 마치는 감사기도의 풍경입니다.
부부가 함께 회사에 나가서 하루 종일 일을 하며 살더라도, 건강한 부부 됨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 평범한 것, 일상적인 것, 작은 것에 큰 감사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 못하는 병아리도 물 한 모금 마시고 하늘을 쳐다보며 감사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얼마나 벅찬 감사를 드려야 할까요?
감사가 넘치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어린 소년의 초라한 도시락 하나라도 남아있음을 감사 드리시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도시락 하나를 가지고도 두 손 높이 들고 하늘을 우러러 큰 감사를 드리시는 모습은 너무나 숭고합니다.
그랬더니 어떤 결과가 나타나나요?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 스토리입니다.
장정만 오천 명이 다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불평하는 자에게는 항상 모자랍니다. 늘 부족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자에게는 풍성합니다. 넘칩니다. 남습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할렐루야!
저희 교회는 21세기 새로운 패러다임의 영상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좋은 프로젝션 시스템으로 생동적인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Beam Projector가 1년 사이에 성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한달 전에 새 기종을 전시했습니다. 참 좋은 신제품입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제품과 신제품을 교환 처리하더라도 1,500만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한달 전에 한 분이 50만원을 헌금하셨습니다. 1,500만원의 필요 액에 비하면 50만원은 적은 액수입니다. 그러나 그 즉시 이런 종자헌금을 하셨다는 자체가 얼마나 희망적인지요!
저는 그 헌금을 보면서 이렇게 기도 드렸습니다.
주님, 이 헌금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어주시옵소서! 종자를 주셨으니, 열매도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은 기꺼이 응답하셔서 지난주간에 한 분이 특별헌금을 하여 오늘 이처럼 훨씬 멋진 영상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 최대의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감사의 분량만큼 최대의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다같이 따라서 하십시다. 큰 감사, 큰 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