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진목사

하나님의 관심 (창 31:1-3)

공 상희 2014. 2. 8. 12:20

하나님의 관심 (창 31:1-3)


이 시간에 “하나님의 관심”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리고 나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그 때 솔로몬이 구한 것은 바로 왕으로서 바른 재판을 위한 지혜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 3:10-13) 복 내려 주셨습니다.


이처럼 솔로몬은 하나님의 관심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일까요? 진정 그것을 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과 동거 동행 동역하며 우리의 삶은 탄탄대로를 향해 달려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삶의 갈등은 하나님의 관심의 관심과 우리의 관심이 많이 다르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9)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한 마디로 우리가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여 더욱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의 관심은 무엇보다 세상에서 성공하는데 있습니다. 여기에서 심각한 갈등과 괴리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이 믿음이나 하나님과의 관계나 혹은 주님을 닮는 것보다는 내 삶의 풍요와 번영을 추구하는데 더 관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마6:33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즉 하늘의 것을 구하면 땅의 것은 자동으로 책임져 주시는데 어리석은 인간의 관심은 여전히 땅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본문의 야곱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야곱은 지난 20년 세월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지냈습니다. 야곱이 삼촌과 함께한 20년 동안 그의 관심은 무엇이었습니까? 처음에는 그저 생존이었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형의 원한을 사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해 온 몸이라 그저 목숨만이라도 부지하고 산다면 그보다 더 다행스러울 건 없습니다. 그저 형 없는 곳에서 안전하게 사는 것이 그의 인생의 목적이었습니다.


창28:20-21에 야곱이 했던 기도가 있습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이처럼 먹을 것 입을 것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어느 날엔가 집으로 평안히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것이 그의 최대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좀 살만 해지니까 어디에 관심이 쏠립니까? 결혼하여 안정된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습니다. 라헬과 결혼하는 것을 그의 인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거기에 무려 14년을 쏟았습니다. 가족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자 다음의 관심은 재산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대로 했더니 양이 떼를 이루었습니다.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재물을 모았다”(창31:1-2) 면서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야곱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데 또 다시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늘의 것보다는 땅의 것을 위해 더 많이 관심 갖지 않았는가?


그러나 야곱의 그 20년 동안 하나님의 관심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야곱이 하란 땅에서 하나님을 철저하게 경험시키면서 그 믿음과 인격을 성장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살 수 없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하란으로 가다가 광야 벧엘에서 길을 잃은 일부터 시작하여, 결혼 문제도 맘대로 안 되고, 재산 문제도 순탄하지 않고, 집에 돌아오는 것조차도 앞에는 에서의 군대, 뒤에는 라반의 군대, 하나님의 절대적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월세를 살고 있었습니다. 월세를 살 때 전세만 가도 좋겠더랍니다. 그래서 죽어라 모아서 전세로 갔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매달 나가야 할 돈이 안 나가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1달도 안되어 전세 보다는 자기 집이면 좋겠더랍니다. 그래서 또 몇 년을 죽어라 돈만 모아 18평짜리 아파트를 장만했습니다. 내 집을 마련한 기쁨에 너무 좋아 잠도 오지 않고 먹지 않아도 배부르더랍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집이 좁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또 몇 년을 돈 모아 25평짜리 샀습니다. 이사하고 난 후 만족감은 역시 바로 사라지고 31평 아파트가 보이더랍니다. 또 그렇게 해서 31평 아파트를 샀습니다. 그 다음에는 48평짜리 아파트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돌아보니 31평 아파트를 사기 위하여 30년의 인생을 다 썼더랍니다.


이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불과 하룻길 같은 이 인생 삶을 위해서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농부와 같이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12:19) 하기 위해 몇 십 년을 거기에만 매달려서 살아갑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을 위해서 영원한 가치를 포기하는 어리석은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20년 하란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오고 싶어서 돌아오는 것 아닙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외삼촌 라반과 그 아들들이 야곱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으려고 한 것입니다. 야곱을 그토록 공짜로 부려먹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겨우 야곱이 자기 몫을 확보하니까 야곱을 죽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서지 않으면 편안하게 살도록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위기 속으로 끌고 들어가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신앙인들은 대부분은 고난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등 은혜로운 찬송시를 많이 쓴 사람 화니 제인 크로스비는 앞 못 보는 소경으로서 9,000여 편에 달하는 찬송시를 쓴 사람입니다. 식모의 불찰로 소경이 되었으나 어려서 할머니가 들려주는 성경이야기를 듣고 영의 눈이 열려서 기도하는 중에 신령한 노래를 많이 썼습니다.


그는 아홉 살 때 기도하기를 "만약에 하나님이 나에게 시력을 허락해 주신다 해도 나는 안 받으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밝은 눈을 주실 터인데 세상에서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눈으로 우리 주님의 얼굴을 보렵니다." 그러면서 "나는 내 눈을 멀게 한 그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그에게 한없는 감사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참되게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 것에 마음 두면 회개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만나게 하시고, 기도에 게으르면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시고, 예배에 소홀하면 정신 차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황을 주시고, 사명이나 헌신을 잊어버리면 하나님께서는 사명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 안 될 혹독함으로 몰아가십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란에 정착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그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한 약속의 땅, 사명의 땅인 가나안으로 돌아와 벧엘에서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형을 만나기 위해 얍복강에서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한 것입니다.


야곱이 돌아가야 했던 가나안은 천국의 예표입니다. 라반은 우리를 시련하는 불같은 연단이요, 에서는 우리 영혼과 갈등하는 육체를 상징합니다. 이원론이 아니고 영혼이 거듭나도 육체는 거듭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그저 육신 살기에만 골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하나님을 경외하기까지는 맘대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야곱처럼 온전한 믿음의 족장이 되어 하나님의 품 안에서 우리 사명 감당하고 영육간에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