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설교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 사랑

공 상희 2012. 12. 22. 06:33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 사랑

1:23

 

태초에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과 벽이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인간은 벽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 사이에 벽이 생겼습니다. 또한 환경과의 벽도 생겼고, 자기와의 벽도 생겼습니다. 이 벽이 있는 한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행복하게 살 수 없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벽을 없앨 수 있는 구약 율법을 통해 많은 방법들을 주셨지만, 어느 방법도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최후의 방법으로 그분의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그 모든 벽을 완벽히 허물어 주시고. 하나님께로 담대하게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첫 번째 성탄절이 약2012년 전에 있게 된 것입니다.

 

성탄절은 '벽을 깨뜨렸던 날'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에게 성탄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크리스마스 캐롤 들으며 즐거워하고, 밤늦도록 아는 사람들과 술과 춤으로 파티를 하는 날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성탄절은 '벽을 깨뜨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벽을 허물어뜨린 힘으로, 사람과의 벽을 허물고, 환경과의 벽도 허물고, 자기와의 벽을 허무는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가장 싫었던 사람에게 찾아가서 화해하고 용서해주는 날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탄절은 예수님이 주신 구원의 기쁨을 생각하며, 자기 자신과의 벽도 무너뜨려 비전자신감용기를 가지고 새롭게 결단 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앞에 있는 수많은 벽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인 성육신을 통해 우리가 받을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1.성육신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말인지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누가 그 사랑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언어로 잘 표현한다고 해도 그 사랑의 만 분의 일도 표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 같이 어리석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자녀 삼아준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조건이 있습니까? 자세히 보면 우리는 하나님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점을 하나님도 아시지만, 우리들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일방적인 짝사랑입니다.

우리의 진심''하나님의 진심'을 생각해볼 때 하나님은 사랑에 있어서 항상 손해 보시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손해로 생각지 않으시고 "허허!" 웃으시면서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기로 작정 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집념은 대단하십니다. 우리 같은 죄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심판을 면할 자격도 없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힘들게 사시다가 우리 죄를 지고,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수시로 하나님을 배신하는 우리의 부족한 모습을 보면, 그 사랑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어떤 고난과 환난이 와도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는 참된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할 것 입니다,

 

2.성육신은 '실천적인 사랑과 실천적인 믿음'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사랑은 말이나 생각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직접 실천하심으로 보여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그 실천적인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실천적인 믿음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실 때,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내밀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에 순종해서 지팡이를 들고 바다를 가리키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얼마나 큰 망신입니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세가 순종하니까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천적인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참으로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에는 실천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이 우리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는 우리를 사랑 한다고 하시면서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지 않는다면 진실한 사랑일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실천적인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형제가 춥고, 배고픈데, 말로만 따뜻 하게하라, 배불리 먹으라, 하고 실제로 돕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의 실천이 아닙니다.

어느 집사님이 예배를 드리는데 안내를 하는 집사님이 황급히 와서 집에 불이 났으니 빨리 가보라고 했습니다. 급히 달려가 보니까 집이 불타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빨리 물을 가져다 불을 꺼야 하는데 이 집사님은 그 자리에 꿇어앉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집사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시간에 집에 불이 났다고 하면 얼마나 조롱거리가 되겠습니까? 하나님, 이 불을 꺼 주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게 해 주옵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눈을 떠 보니까 집은 다 불타고 재만 남았다고 합니다. 이런 신앙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믿음이 자기 할 일은 하지 않은 채 기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에게 심부름만 시키는 믿음, 하나님을 하인 취급하고 내가 해야 될 일을 하나님께 다 미루어 버리는 믿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미신입니다. 기도에는 항상 실천이 따라야 하고, 사랑에도 항상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실천이 없는 기도, 실천이 없는 사랑은 거의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3.성육신은 '헌신의 중요성'을 가르쳐줍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입장에 되셔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드렸습니다. 즉 성육신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드림이고, 하나님의 헌신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성육신에 반응해야 합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자신을 드림과 같이 이제 우리도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쓰임 받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사람에게도 우리 자신을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전도를 하려거든 먼저 성육신의 자세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가장 소중한 존재인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전도는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는 희생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자기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를 준다는 것은 전도 대상자와 같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임마누엘과 성육신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전도는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함께하고 기쁨을 함께하여 마음을 나눌 때 올바른 전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돈도 많아야 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서, 전도 대상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풍성함을 추구하십시오. 부요함도 추구하십시오. 그래서 부요함을 얻었거든 혼자만의 부자가 되지 마시고 사명적인 부자가 되시고, 의로운 부자가 되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가진 것을 가지고 낮은 자를 위해 쓰고, 선교지에서 고생하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쓸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더욱 행복하게 살고 보람된 인생이 되고,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예비하는 인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맞아 우리는 주님처럼 찾아가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지금 연말입니다. 주위의 어려운 분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많이 펼 수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진정 우리의 발걸음이 성육신의 의미를 이해하는 아름다운 발걸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2천 년 전에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탄절이 '찾아가는 성육신의 사랑''따뜻한 마음'을 회복하는 귀한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예수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한 교인이 기차를 타고 어디를 가게 되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기도한 후 눈을 떴더니 옆에 앉은 손님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교회 나가십니까?" "!" 그들은 곧 친해졌습니다. 가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한 사람이 김밥을 꺼내서 먹었습니다. 옆 사람이 몇 개는 주겠지 생각하고 기다리는데 계속 혼자만 먹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참 못된 교인이다!" 그 낌새를 느끼고 이 교인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기 말라고 하셨는데 남의 것을 탐내다니 참 못된 교인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남을 향해 "못된 교인이다!"라고 하는 이기적인 성도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기주의적 성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남이 나를 찾아와 주기보다는 내가 남에게 찾아가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해서 구원받은 천국백성이 되었다면 남의 위치에까지 내가 낮아지는 성육신의 사랑이 없으면 알맹이가 빠진 신앙이 된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때문에 당하신 주님의 성육신의 희생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이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라는 갈대 섬으로 봄철에 야유회를 갔었습니다. 한참 노는데 주변에서 불이 났습니다. 봄철에 갈대밭에 불이 붙으니 어마어마하게 타는데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해왔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달려가서 불을 끄는데 한 친구가 갑자기 무릎꿇고 기도했습니다. 평소에 그 친구는 참 믿음이 좋았습니다. 친구들도 다 인정했습니다. 친구들은 가끔 색깔이 있는 구두도 신었지만 그 친구는 항상 검정 구두를 신고 검정양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누가 색깔 있는 구두나 양복을 입으면 "신학생이 그게 뭐냐?"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 급한 순간에 그 친구는 불을 끄지 않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친구들은 다 동원이 되어 불을 껐습니다. 불길이 다행이 잡혔습니다. 그때 다른 친구들은 기도한 친구를 향해 모두 "! 그 친구 믿음 참 좋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믿음이 없이 불을 껐던 친구들은 다 목사가 되었는데, 혼자서 간절히 그렇게 기도했던 그 믿음 좋은 친구는 목사는커녕 나중에 이단에 빠져서 돌아다니다가 이제는 예수도 안 믿고 지낸다고 합니다.

 

어느 날 밤, 양 우리에 이리 떼가 나타나 양들을 무참히 찢어 죽였습니다. 양들은 깜짝 놀라 사방으로 도망쳤습니다. 아침에 주인은 양떼를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양들은 이리 때문에 너무 놀라서 인기척이 나면 다 도망갑니다. 강제로 한두 마리 붙잡았지만 주인도 몰라보고 앙탈을 부렸습니다. 양들을 사랑했던 주인은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주인의 아들이 보고 말했습니다. "아버님! 제가 양들을 찾아오겠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양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양을 찾아다녔습니다. 양을 만날 때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양처럼 소리를 내고, 양처럼 기어다녔습니다. 그렇게 찾다가 머리는 가시에 찔려 피투성이가 되었고, 목은 쉬었고, 손과 발은 찢겨져 나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 마리, 한 마리 찾아 12마리를 찾았지만 결국 아들은 양을 찾다가 입은 상처 때문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그냥 지켜봤던 아버지는 너무 매정했습니다. 어떻게 양 몇 마리 때문에 아들을 죽게 놔둡니까? 또한 그런 모습을 자행했던 아들은 너무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어떻게 양 몇 마리 때문에 자기 목숨을 버립니까? 그렇게 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양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우리에게 첫 번째 성탄절이 있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