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주일,내일의 희망을 품자 (마태복음 19장13-15)
내일의 희망을 품자 (마태복음 19장13-15)
관심과 사랑이 필요해요
외교관인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늘 일에 쫓겨서 외국에 출장도 잦고 모든 일이 너무 바빠서, 그래서 가정과 아이들에게 신경을 별로 쓰지 못 했습니다. 어느 날 모처럼의 휴일이 되어서 그는 생각하기를 '오늘은 좀 낮잠이나 실컷 자고 미루었던 책이나 보면서 하루를 쉬겠다.' 생각을 했는데 그의 아내가 "그러지 말고 아이들과 바람이나 쐬고 오라." 고 닥달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득이 아이들과 같이 낚시질을 나갔습니다. 아이들은 좋아서 마구 뛰면서 한껏 즐거워했습니다. 그들은 집에 돌아왔는데 이 외교관은 그 날 일기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은 아이들과 낚시를 다녀왔다. 그런데 소중한 하루를 낭비해 버렸다.' 그러나 그 아들 중에 하나는 커서 역사가가 되었고 그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게 될 때 옛 날 일기장을 보았습니다. 그 옛날 일기장에 이 아들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다녀왔다. 이날은 나의 일생에 가장 기쁘고 행복한 날이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이제는 어느 일간신문에 소개된 어느 아빠가 쓴 글을 소개합니다. “초등학교 6학년인 경진이가 이곳에는 ‘깡패?가 많으니 이사를 가자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는 차라리 학교를 좋게 만들기로 했고 나는 학부모회의 유일한 아빠 대의원이 됐다. 얼마 후 이번에는 초등학교 2학년인 안진이가 학교에서 맞고 왔다. 나는 담임 선생님과 함께 때린 아이를 만났다.?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사람이야. 네가 엄마 보석 반지를 던지면 엄마가 얼마나 화내시겠니?? 안진이, 경진이와 함께 그 아이를 햄버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친구 만들기를 시작했고 다시 공원에 가서 형제처럼 뒹굴며 놀았다. 헤어질 때 그 아이는 자신의 손때가 묻은 인형을 안진이에게 선물했다. 그 아이에게도 사랑과 친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 일을 겪으며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감사했다. 예수님은 위선과 자기애로 가득 찬 나를 방문하여 사랑을 주셨고 친구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내 아이와 때린 아이에게도 번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위선과 자기 사랑에 빠져 남을 보지 못하면, 어른들이 자기 경험과 편견에 빠져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의 생각과 사고, 그리고 그들의 문화와 세계와 삶을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교회의 미래는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교육 신학자인 존 웨스틴 호프 3세가 “우리의 아이들이 믿음을 가질 것인가?” 라는 책을 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교회의 신앙교육”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고 제목 밑에 부제를 달기를 “다음 세대에 신앙계승이 가능한가?” 이렇게 달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다음 세대에 대해 많이 얘기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세기를 대비해야 한다고 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과연 무엇을 대비해야 하겠습니까?
내 아이들이 과연 믿음을 가질 것인가? 내 아이들에게 믿음은 계승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교회에서 여러 가지 직분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로서 장로․권사․집사 ... 이런 일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다음세대 우리는 우리 아들 딸들과 함께 교회에서 믿음의 동반자 혹은 믿음의 동역자가 될 수 있을까?
그런 것은 고사하고 지금 주일이나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걱정되지 않나요? 개인적이든지 교회적이든지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가 되어져야 하는데 만일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 불안해질 것입니다.
복음의 다음 세대를 품어야 희망이 있다
예수님의 사역가운데 두드러진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많은 일을 하셨는데 그 중 하나가 어린아이와 관련된 것이고 또 한가지는 여성과 관계된 것입니다. 이 어린이와 여성 두 계층은 대표적인 소외계층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나라는 물론이거니와 동양권에서나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공통적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어린아이와 여성들이 소외를 당했습니다. 미국이 굉장히 여성을 위하는 나라처럼 생각되었지만 처음에는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이 투표권을 달라고 데모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이 자유를 말하는 나라이지만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60년대가 지나서야 투표권을 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린이와 여인들이 언제든지 소외계층이었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유명한 철학자라고 얘기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도 “여자는 짐승보다 조금 낫다”라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숫자에 포함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들을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귀한 신분으로 인정하십니다. 그리고는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이것은 굉장한 혁명적인 변화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다음세대를 위한 놀라운 역사로 이어집니다.
오늘 교회도 복음의 다음 세대를 품어야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들이 다음세대를 품어서 우리의 미래를 대비할 수 있을까요?
오늘 성경말씀에는 아이들이 예수님 앞에 올 때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예수님은 “용납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세대를 품는 것이 무엇인가? 주님은 용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용납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받아들이다, 수용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격적으로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음세대를 용납하라 이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정하고 그 가치를 그대로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어린이든지 청년이든지 누구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이 창조의 본질에서는 꼭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자칫 사람들이 자기 소유에 따라서 권위에 따라서 계칭에 따라서 인간의 존엄과 인격이 다른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특별대우를 받기를 원합니다.
생명의 가치는 소중한 것
사람들은 자신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 누구보다 자신의 생명이 다른 생명과 다르고 자신의 인격이 다른 인격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생명과 인격과 존엄에 있어서는 누구나 선은 같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린 생명이나 어른의 생명이나 어떤 생명도 똑같은 것입니다. 그 생명권과 생존권과 생명의 가치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세대를 잘 수용하고 용납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천국의 시민으로 그 인격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다음을 이어갈 성장세대에게 그 자격과 가치와 권위를 인정해 주는 것이 용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젊은 세대에게는 실패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좌절의 위험이 있습니다. 자기의 생애에 위기의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들의 자격과 권위와 가치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
교육 심리학에서는 어린아이에게는 적어도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은 있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젊은 세대에게 있어서 성장세대에게 있어서 누군가가 믿어주는 사람 세워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어린아이도 어른도 노인도 문둥이도 소경도 모두가 다 용납되었고 강도나 귀신들린 사람도 무시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오늘의 교회는 이렇게 다음세대를 무시하지 않고 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어떤 때에는 정말 여러분과 제가 꼴을 봐주기에 눈 사나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무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이 교회에 드나드는 젊은이들 머리가 노랗든 빨갛든 짧든 길든 우리는 다 그들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그리고 다음세대를 품기 위해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용납하면 금하는 것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금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금 사람들이 자기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에게 가까이 옵니다. 예수님에게 기도를 받기 위해 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금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금하는 것에 대해 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와 다음 세대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은 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해 줄 수 있습니다. 기도해 주는 것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다 해주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며 어떻게 가치있는 일을 위해 생존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보면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입니다. 주님을 바라고 나아가는 일입니다. 즉 이 신성에 관한 관심과 영적에 관한 관심의 행위를 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부르든 찬송을 부르면 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기도를 한다면 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저들이 하나님앞에서 갖는 비전을 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어린이처럼 어른은 어른처럼 청년은 청년처럼 노인은 노인처럼 하게 둬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존재의 이유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다른 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짓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라도 이들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오기 원하고 주님께 찬양하기를 원하고 주님의 손길에 자신의 영혼이 터치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금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다음세대의 비전과 자신들의 정체성을 무시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속에서 그들은 동시에 금하는 법을 배운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하지 않으면 저들은 스스로 금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갖는 자유보다는 자기의 엄격성으로 통제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신앙으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는 엄격성으로 통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준이 아닙니다. 이미 굳어지고 제도화 되어있는 자기들의 그 기준을 두고 있기 때문에 금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기준을 없앴습니다. 주님은 그 기준을 깨시고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무한함을 생각할 때 자신의 엄격성과 정통과 인격으로 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교회의 기성세대가 나 중심의 기준과 틀로 계속 금하면 다음세대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땅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위선과 거짓의 나라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금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마지막으로 좀더 신앙적인 입장에서 다음세대를 품는 보다 적극적인 모습이 무엇인가?
오늘 말씀에서 보니까 「주님은 저희 위에 안수하셨다…」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우리는 용납하여야 합니다. 금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저들을 진정으로 품는 적극적인 신앙의 모습은 저들을 품고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족장들은 하나같이 자식들을 축복했습니다. 미래세대를 품는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품었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품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품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품었습니다. 여기서 기도한다고 하는 것이 그냥 잘 되라고 좋은 사람 되고 출세하라고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것은 다음 세대를 품기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저들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너 이상의 절대적인 힘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한 용기와 믿음과 격려를 주는 것입니다. 내일 미래가 있어서 오늘 화목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지금 현재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내 미래가 있기에 현재가 바르고 분명해야 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축복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음 세대를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안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이 내 맘대로 됩니까? 안됩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저들을 기도하고 품는것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세대를 용납하고 축복해야 됩니다. 금하기보다는 축복해야합니다. 내 마음대로 안되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고 축복해야 됩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 손에 의지하고 그 미래 세대를 품어야 되는데 만일 품지 못한다면 방랑자가 되고 불신자가 되고 회의론자가 됩니다. 우리자신과 그들의 미래까지도 물들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품으므로 믿음이 이어집니다. 이삭이 야곱을 품으므로 이스라엘이 됩니다. 야곱이 요셉을 품으므로 흉년을 이기고 은혜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요셉이 형들을 품으므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룹니다. 예수가 어린이들을 품으시고 여인을 품으시고 죄인을 품으시고 하나님 나라가 건설됩니다.
우리의 가슴으로 다음세대를 품자
요새 한참 뜨고 있는 인기 있는 영화 중에 "친구"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81년 부산의 한 고등학교 교실에 있었던 일로 이 영화는 시작이 됩니다. 야비하게 생긴 40대 중반의 교사가 교단에서 내려와서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나 학생의 뺨을 세게 움켜쥐고 나머지 손으로 뺨을 후려갈깁니다. 방금이라도 피가 터질 만큼 그렇게 세게 내려칩니다. "다음 학생"하고 부를 때 도살장에 들어서는 것 같이 움츠리고 벌벌 떠는 학생을 또 다시 무자비하게 마구 내려치면서 물어봅니다. "느그 아버지 뭐하노?" 학생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회사에 다니십니다." "이놈아, 상사에게 굽신굽신거려 가면서 돈벌어서 공부시키는데, 공부 꼴이 이게 뭐야?" 그리고 또 한바탕 먹입니다. 다음 학생에게 또 물어봅니다. " 느그 아버지 뭐하노?" 움찔움찔하다가 "장의사를 하시는데요." 말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합니다. 선생은 또 다시 눈을 부라리면서 말합니다. "아버지는 죽은 사람을 염해 가면서 오만 고생하며 벌어서 너 공부시키는데 이놈아 이 성적이 뭐꼬?" 그리고 또 한바탕 먹입니다. 그 학생은 장동건입니다. 그 다음에 유오성이 나타났습니다. 이 학생을 또 놓고 "느그 아버지 뭐하노?" 한참 망설이다가 "건달입니다" 그래요. 움찔 했지만은 또 다시 화가 나서 그대로 먹입니다. 이 매 맞는 학생들이 하나같이 피하지를 않고 그대로 맞습니다만 마음속에서는 반항이 막 불 일듯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자존심 상관하지 않고 막 짓밟으면서 도살장의 짐승 다루듯이 이렇게 매질을 하는데 딴에는 학생 잘되라고 하겠지요. 공부 잘하라고 하는 것처럼 되겠지요. 그러나 학생들은 끝까지 반항하고 이 두친구가 나가서 건달이 되고 그 일생이 망가지고 맙니다.
인생은 세상에 나면서 세 가지 복을 타고나야 된다고 합니다. 이건 내 선택이 아닙니다. 첫째, 부모를 잘 만나야 됩니다. 어찌하겠습니까? 내가 부모를 선택한 게 아닙니다. 부모가 나를 낳아 주어서 세상에 태어났지요. 부모를 잘 만나는 것, 이거 결정적인 축복입니다.
두 번째 복은 선생을 잘 만나야 됩니다. 단 한사람의 좋은 선생을 만나서 훌륭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단 한사람의 천하의 못된 선생을 만나서 일생이 망가지고 맙니다. 이것이 복이라는 겁니다.
셋째는 배우자를 잘 만나야 됩니다. 행복을 찾아 결혼하지만 서로가 진정으로 사랑하면 천국이 될 수 있지만 사랑이 식어지고 나면 그 순간부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생각하는 곳이 가정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있을 때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아비의 마음이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이 아비에게로, 가정이 구원되어야 합니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구원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이 천국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마음이 문제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많이 하지만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녀를 괴롭게 한다면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을 주고 마음을 받아들일 때만이 그것이 사랑이요, 그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먹고 사람은 사람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밥을 먹고사는 게 아니라 사랑을 먹고사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사랑은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자 앞에는 정직합니다. 사랑은 거짓이 없습니다. 진실만이 최고의 웅변이요 최고의 교육입니다.
우리의 가슴으로 다음 세대를 품을 때 소망과 생명력이 있으며 주님은 저들과 함께 하시고 저들 안에 역사하십니다. 저들 앞에 계시고 뒤에 계시고 둘러싸시고 위로하시고 인도하시고 축복하시고 승리케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녀와 우리의 젊은이들,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주어질 축복입니다. 우리의 이 희망과 하나님 나라의 성취가 바로 저와 여러분의 가슴 속에 담겨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우리의 마음 속에 다음 세대를 품읍시다. 그러할 때 은혜가 넘치고 변화가 가능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는 역사를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에 저 젊은이들을 사랑으로 품을 때 아름다워지고 충만해지고 쓸모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슴 깊이 젊은이와 어린이를 품읍시다. 그리할 때 희망으로, 축복으로, 충만으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버린다면 우리의 축복도 버리는 것입니다.
5월의 편지
마지막으로 이해인 수녀가 쓴 어린이를 위한 시를 소개합니다.
해 아래 눈부신 5월의 나무들처럼
오늘도 키가 크고 마음이 크는 푸른 아이들아
이름을 부르는 순간부터
우리 마음 밭에 희망의 씨를 뿌리며
환히 웃어 주는 내일의 푸른 시인들아
너희가 기쁠 때엔 우리도 기쁘고
너희가 슬플 때엔 우리도 슬프단다
너희가 꿈을 꿀 땐 우리도 꿈을 꾸고
너희가 방황할땐 우리도 길을 잃는단다
가끔은 세상이 원망스럽고 어른들이 미울 때라도
너희는 결코 어둠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지 말고
밝고, 지혜롭고,꿋꿋하게 일어서다오
어리지만 든든한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 다오
한번뿐인 삶, 한번뿐인 젊음을 열심히 뛰자
아직 조금 시간이 있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 하늘빛 창을 달자
너희를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에도
더 깊게 , 더 푸르게
5월의 풀물이 드는 거 너희는 알고 있니?
정말 사랑해!
어린아이가 없는 세상, 어린아이가 없는 사회는 그저 황량한 바람이 부는 사막과 같이 느껴집니다. 한 가정에는 어린아이 청소년 어른 할아버지 등 여러 세대가 함께 있어야 좋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정의 본래 설계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부유하고 유명하다 해도 어린아이가 없는 집은 미래가 없는 집이며 죽어가는 집안입니다. 사실 어린이들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과 교훈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은 어린아이들을 통해 많은 영적인 일들을 하셨습니다. 한 시대의 지도자였던 엘리 제사장을 두시고도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 꿈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타국생활을 하며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을 주었던 어린 요셉, 들판에서 양을 치다 느닷없이 황급하게 오라는 호출 명령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았던 어린 다윗, 오병이어 사역에서 단순하고 순박한 어린아이의 도시락으로 기적을 일으키신 주님...
어린이주일을 맞이해 왜 하나님은 많은 어른들을 두고 어린이들을 사용하셨는지 조금은 알 듯 합니다. ‘지금도 어린아이가 태어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직도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라는 말이 있습니다.자녀들이야말로 부모들에게 소망과 기쁨이 됩니다.내일의 희망인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품고 미래를 새롭게 시작해 나가는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