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부활절

(종려주일)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

공 상희 2012. 3. 28. 06:36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

(53:4-6)

 

이 시간에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고난 당하셨는데 그 고난이 헛되지 않도록 충만한 은혜와 복을 누리려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주님의 고난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익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일단은 복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은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강력히 주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으로 주어진 복음이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에 대해서 함께 은혜 나누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1. 영혼의 구원입니다.

 

53:5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허물과 죄를 담당하심이란 우리 영혼 구원을 의미합니다. 영혼 구원이란 몇 가지 의미가 있는데 먼저는 하나님과 관계 회복, 다음은 영혼의 소생과 기능의 회복, 그리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 잃어도 영혼 구원만큼은 결코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임종환자들을 돕는 호스피스 봉사를 하던 한 자매님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믿게 된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임종 직전의 환자들을 돌보다보니 타 종교인들은 대부분 죽음의 공포감으로 맞이하는데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죽음을 평안한 중에 맞이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자매님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가 참 종교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예수의 공로로 영혼이 구원을 받은 것이 다릅니다.

 

2.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는 마음의 치유입니다.

 

4절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담당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마음의 치유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상처 때문에 현재의 고통은 물론 미래에도 계속해서 고통을 당합니다. 이것을 히12:15을 보면 쓴 뿌리라고 하는데 이것이 나면 한없이 고통을 생산하고 또 남까지 괴롭게 합니다. 조선 왕조의 연산군이 왜 폭군이 되었습니까? 히틀러가 왜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했습니까? 모두 쓴 뿌리 때문입니다. 이처럼 쓴 뿌리는 무섭습니다. 그래서 쓴 뿌리 나는 것을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지금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쓴 뿌리도 그렇지만, 중국의 오만불손한 쓴 뿌리들도 염려 됩니다. 저들이 경제대국이 되기 전에 예수 복음으로 바꿔놓지 않으면 아무도 저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답니다. 개인이나 국가의 상처의 근본적 치료는 복음 외에는 없습니다. 즉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이 있을 때 치료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잘 아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마음의 고통도 상처도 슬픔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사35:10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했습니다. 51:11에도 동일한 말씀이 반복됩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마음의 슬픔과 고통 이 시간에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다 치료받으시기 바랍니다.

 

3.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는 육체의 건강입니다.

 

5절에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말씀합니다. 주님은 채찍에 맞으셔서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고난당하신 이유는 성도의 영육간의 질고를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고통은 본래 죄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누리려면 이 예수 공로를 믿을 뿐 아니라 회개하며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을 주셔서 치료해 주십니다. 혹은 치료의 길을 내어 주십니다.

 

프랑스 군인들은 전쟁터에 나갈 때에는 배낭에 책 두 권은 꼭 넣고 나간다고 합니다. 하나는 성경이고 다른 하나는 파스칼의 팡세입니다. 파스칼이 팡세를 쓰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여동생이 불치병 안질에 걸려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파스칼은 처음으로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타나더니 동생 눈을 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파스칼이 기도를 마치고 동생을 찾아가 눈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오빠!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눈이 방금 나았어요.” 이 때 파스칼은 나는 철학자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노라.” 했습니다. 이처럼 지금도 주님은 채찍 맞으신 그 공로로 병인들을 치료하고 계십니다.

 

4.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는 환경적인 회복입니다.

28:15에 보면 하나님께 불순종하므로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도 범죄하면 기근 전쟁 역병 내란 짐승 등 환경적인 저주가 왔고 회개하면 악이 물러가고 환경이 회복되었습니다. 개인도 가문도 국가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저주도 속량하셨습니다.

 

그래서 고후8:9에 보면 본래 부요하신 주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에게 최고의 선물이 무엇인줄 아세요. 약속의 말씀의 선물입니다. 보이는 물질은 한 트럭 주어도 먹고 나면 사라지지만 부요의 말씀을 주면 그 말씀 붙잡을 때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요케 해 주신 복음에 서서 부요를 소유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더 알아야 할 것은 부요하신 주님이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시듯 우리들도 주님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함으로 가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스스로 가난하게 되는 진리까지 알아야 하늘의 상을 쌓습니다.

 

5.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는 대인관계의 회복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를 회복시키심입니다. 2:18에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했습니다. 3:13에서도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우리 대신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미국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가정과 직장과 사회의 인생살이에서 실패한 사람들 만 명을 표본 조사해 보았더니 흥미 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들이 전문적 기술과 지식이 없어서 실패한 사람은 15%밖에 되지 않았고, 85%가 인간관계의 실패였습니다. 그래서 놀라 도대체 인간관계란 또 무엇이냐? 심층 분석해 보니까 이 사람들은 한결같은 부정적 의식이 가득했습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대신 버림당하심으로 인간의 관계를 바꾸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형을 만날 때 얼마나 대하기 역겨운 상대였습니까? 그러나 브니엘하나님의 얼굴뵌 것 같다고 했듯 모든 사람을 나의 천사로 알고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몹쓸 사람이다가 아니라 귀한 재목이다, 원수다가 아니라 은인이다, 방해자다가 아니라 협조자다, 보기 싫다가 아니라 보고 싶다, 나와 관계없다가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분이다로 타인의 인간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복음으로 본 인간론입니다. 바울처럼 어떤 사람도 육체대로 보지 마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마음 가지면 대인관계에서 실패할 사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으면 대인관계가 좋아집니다. 반대로 신앙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대인관계가 나빠집니다. 이것을 볼 때 인간관계란 예수의 공로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공로로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국가도 국제사회도 더욱 아름다워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6.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는 영적전쟁에서 승리입니다.

 

2:15을 보면 우리의 원수인 정사와 권세 즉 마귀의 역사를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마귀는 주님을 아프게 고난을 주었지만 결국 자기를 못 박고 죽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승리가 있는 이상 사단은 성도들 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 안에서 승리했다고 믿으세요.

 

고대 블레셋 전쟁에서 보여주듯 대장이 이기면 다 이긴 것으로 보았듯 성도는 싸우기도 전에 이미 예수님의 승리의 공로로 승리자가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이 이기셨으므로 예수 안에서 우리들도 이긴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고난을 통해 주시는 은혜를 누리십시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의 영육간의 강건함을 위해서, 하나님과 대인간의 회복을 위해서, 그리고 부요와 온전한 승리와 사명을 위해서 우리 대신 고난 받으셨습니다. 이 은혜의 복음에 서서 그 은혜를 누릴 뿐 아니라 이 고난의 주님을 깊이 감사하는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