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부활절

(종려주일)가신 길을 따라가자 (벧전 2:21)

공 상희 2012. 3. 28. 06:33

가신 길을 따라가자 (벧전 2:21)

 

종려주일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의 고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군중들이 종려가지를 들고 환영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 시간 왕이신 주님을 환영하는 마음으로 영접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에 가신 길을 따라가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에 보면 우리를 부르심은 앞서 가신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 가신 길은 고통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를 따라가는 우리에게는 고통과 죽음이 아니라 생명과 영광의 길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놀라운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고난의 길을 택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지로 가서 그 자취를 따라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 가신 길은 어떤 길일까요?

 

1. 겸손의 길입니다.

21:5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주님이 잡히시기 위하여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모습을 보세요. 어린 나귀를 타신 겸손의 모습입니다. 당시 왕은 즐비한 신하를 거느리고 백마를 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실용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겸손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겸손이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은혜 받고 싶습니까? 겸손해 보세요. 은혜가 임합니다. 높아지고 싶습니까? 낮아져 보세요. 하나님께서 높여주십니다. 영적 권세를 원하십니까? 겸손해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는 강물과 같아서 낮은 곳을 찾아 흘러내려옵니다.

 

겸손훈련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보세요. 섬기고 사랑하고 축복하세요. 그 때 받은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주님이 왕권을 가지고 임하실 것입니다.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그 길이 주님 가신 길입니다.

 

2. 복종의 길입니다.

2:8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죽도록 복종하셨습니다. 순종과 복종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복종은 이유가 없습니다. 싫어도 가야 합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22:42) 하셨던 것처럼 절대 복종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하신 그 기도는 단지 고통이 싫어서 하신 기도는 아니셨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광 때문에 하신 기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아버지 뜻이라고 확신하셨을 때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절대 복종하셨습니다. 복종은 바로 죽음입니다. 내가 죽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내가 혹은 내 생각이 내 개성이 내 영광이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가신 길을 비아 돌로롯싸’(via dolorossa)라 부릅니다. 비아 돌로롯싸 길은 14정류소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시다 멈추신 지점들입니다. 그중에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받아 대신 진 지점은 제 5정류소라고 합니다. 구레네 시몬은 예루살렘에 구경 왔다가 사형수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포악한 로마군인 앞에 군소리조차도 낼 수 없었습니다. 복종으로 나만 죽어지면 복을 받아요.

 

로마서 16:13에 나오듯 구레네 시몬의 가족들은 복을 받았습니다. 루포와 알렉산더 등 그의 자녀들은 로마의 저명한 교회 지도자요, 그의 아내는 바울의 오른팔보다 더한 어머니 같은 일군이었습니다. 이 가족을 보면서 구레네 시몬의 영향력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주님을 불평하고 교회를 불평하고 주의 일군들을 불평하면 절대 가정에서 이런 일군 안 나옵니다. 이걸 볼 때 시몬은 처음에는 억지였지만 그는 예수 만나는 놀라운 체험을 한 것입니다.

 

누가 대적해도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해야 하니 그 자리에서 엎드리세요. 백성들이 대적할 때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 앞에 엎드렸습니다. 내가 나타나려고 할 때 엎드리세요. 복종이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죽은 것을 귀중히 여기신다 했습니다. 내가 죽어야 귀히 써주십니다. 내 주장과 내 개성 내 인생까지도 내려놓아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사랑의 길입니다.

23:28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자기를 따라가며 우는 여인들에게 향하여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장차 예루살렘이 당할 형벌을 바라보시며 하신 주님의 애통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도 그 생각을 하셨습니다. 이 길은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류의 죄를 지고 가신 사랑의 길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도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따르라.”하셨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3:35) 하셨습니다. 진정 예수님의 제자라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천사만 된다면 세상은 천국으로 변하고 모두 모두 주님 앞으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가장 큰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할 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에게 십자가의 길은 고독의 길이었지만 그 공로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길입니다.

 

4. 사명의 길입니다.

26:53-54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셨습니다. 주님은 잡으러 온 자들을 물리치시기 위해 열두 령 즉 12사단도 더 되는 천군을 부를 수 있었지만 택한 백성들을 위해 참으셨습니다. 그 길은 죄인을 구원하는 사명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5:25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1:24에 바울도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했습니다. 교회를 위한 수고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왜 교회를 위한 수고가 십자가입니까? 교회는 죄인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 속에서 말없이 지고 가야 하는 길이기에 십자가입니다.

 

자기를 내던져버리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면서 내 양을 치라고 세 번이나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는 것이 주님 사랑하는 길이며 영생과 함께 핍박과 기업을 겸하여 백배로 받는 길입니다(10:30).

 

순교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후 32년 겨울 로마 황제는 기독교를 박해하기 위하여 이교 신전에서 제사 드리지 않으면 그 직분을 잃게 된다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300년 동안 무적의 사단이었던 로마 12사단에서 40명의 군인들이 황제의 명을 따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전쟁에서 승리한 천하의 용사였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장군은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직책에서 쫓겨나 큰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40명의 군인들은 시편을 읽고 찬송을 부르며 끝내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자 그들을 처형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들은 포박 당한 채 벌거벗겨 얼어붙은 호수 가운데로 끌려갔습니다. 호수 옆에는 따뜻한 목욕탕을 준비시켜 두고 그리스도를 거역하면 살려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신앙을 배반하고 황제의 명을 따르겠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날은 어두워지고 호수 가운데로 차가운 바람은 세차게 불었습니다. 목욕탕을 지키고 있던 보초병은 얼어붙은 호수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는 찬송소리를 들었습니다. 밤이 더 깊어지자 찬송소리는 약해졌습니다. 그런데 보초병은 그리스도인들의 중얼거리는 기도소리 위로 천사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40, 순교자 40, 그리고 40개의 면류관이로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40, 순교자 40, 그리고 40개의 면류관이로다.” 천사의 찬송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천사의 찬송 가사가 바뀐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39, 순교자 39, 그리고 39개의 면류관이로다.” 보니까 한 사람이 견디다 못해 목욕탕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보초병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기 내 옷을 입으시오. 내가 당신을 대신하겠소!” 보초병은 벗은 채로 그 사람을 대신하려고 뛰어 들어갔습니다. 보초병은 주님을 안 것은 짧은 순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주님을 위하여 영광된 하늘의 상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2:11),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십시다. 이 길은 겸손의 길입니다. 겸손하십시다. 복종의 길입니다. 복종합시다.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합시다. 사명의 길입니다. 사명 감당하십시다. 고난의 길이지만 은혜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요 영원히 복된 길입니다. 십자가 없는 은혜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기 위해 우리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