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12:1-3)
이 시간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고 그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기 전에 여러분에게 한 가지 실화를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 해 동안 늙고 병들어 병원 생활을 하고 있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오랫동안 정성껏 돌봐준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간호하던 여인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재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없었는데 그녀는 세상을 떠나면서 자기 재산을 먼 친척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간호사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고 커다란 십자가 하나만 주었습니다.
간호사는 마땅히 상속자가 아니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재벌이고 내가 그토록 열심히 돌봐드렸는데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좀 서운하기도 하였습니다. 간호사는 실망해서 그 십자가를 안 보이는 병원 한 구석에 치워놓았습니다. 십자가가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덩그럽게 크기만 하고 또 무겁기는 왜 그렇게 무겁습니까? 그래서 걸어두기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간호사는 십자가를 집으로 가지고 가서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뒷면에 무슨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뭔가가 반짝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구멍을 파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것은 거기에 아주 비싼 각종 보석들이 수없이 들어 있었습니다. 십자가속에 보물이 가득히 들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간호한 간호사에 대한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속에는 보물이 들어 있습니다.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구원이 들어 있습니다. 영생이 들어 있습니다. 자유와 해방과 복이 들어 있습니다. 천국이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따라 갈 때 하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만납니다. 성령님을 만납니다. 우리를 돕는 천사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뜨거운 사랑을 거기서 만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만큼 지혜롭고 현명한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요, 십자가 없는 믿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 교훈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죄와, 옛사람과 고통과 저주가 거기 함께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이걸 깊이 묵상하고 묵상하면 믿음이 생겨나서 구원이 생겨나서 다 벗어버리게 됩니다. 또 하나는 나를 위해 고난 받으신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달리신 그 자리에 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 속에서도 시험 들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멸시 받고 주님과 함께 고통 받고 주님과 함께 죽는 것도 기뻐하게 됩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면 가능합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뒤를 따랐던 예루살렘의 여인들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가능합니다. 요한도 주님을 사랑했기에 다 도망쳤지만 십자가 아래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영생과 영광과 영적 성숙을 충만히 체험하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면 어떤 믿음이 올까요?
1. 겸손의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겸손을 봅니다. 빌2:5-8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셨듯 십자가는 최고 겸손의 자리입니다.
아무리 낮춤을 받아도 십자가보다는 못합니다. 자기를 십자가 아래까지 낮추어 보세요. 시험이 조금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를 존중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기니까 시험이 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를 핍박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기면서 기뻐했습니다. 행5:41에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겸손하신 주님에게 어떤 결과가 있었나요? 빌2:9-11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면서 바울은 이것이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의 성숙을 말씀한 것입니다. 겸손의 십자가 자리에만 우리들도 성숙하고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2. 사랑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이 십자가로 나타났습니다. 눅23:34에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주님의 그 행동도 사랑이거니와 주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받는 자들을 위해서 그 고통 속에서도 죄인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자리입니다. 용서의 자리입니다. 축복의 자리입니다. 롬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세상에는 의인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죄인을 위해서 죽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인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남이 나를 해할 때만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33년 반 동안 이미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병인의 고통을 지셨고 가난한 자의 고통을 함께 지셨습니다. 이미 십자가 자리에 계셨고 이미 사랑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죄인까지 사랑하신 주님을 묵상할 때 사랑의 은사가 임합니다. 이 은사가 믿음을 온전히 성숙에 이르게 하는 가장 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13:10-13에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러므로 신령한 욕심이 있거든 사랑의 자리로 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하늘의 온갖 신령한 것들을 다 경험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사람 프랜시스가 신령했습니다. 프랜시스는 주님의 십자가를 얼마나 묵상했든지 몸에 성흔이 생겼다고 합니다. 프랜시스와 같이 신령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사랑의 자리에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순종의 믿음입니다.
주님이 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막14:36에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 지는 것 취미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십자가가 좋아서 지신 것이 아닙니다. 내 잘못으로 공연한 시험 불러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다릅니다. 우리 인생의 죄악을 지셔야 하는 대속의 십자가였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 길을 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응답은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버지 뜻에 순종하신 그 자리가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순종보다 더 한 것은 복종입니다. 이것은 자기 뜻을 내려놓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내가 죽는다는 개념은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순종이 안 되면 복종이라도 하세요. 그것이 내가 죽는 것입니다. 야생마 상태로는 명마일 수 없습니다. 야성을 죽여 잘 길들여져야 명마가 됩니다. 갈등이 없을 만큼 잘 죽어져야 합니다.
성경에 인물들이 나오는데 훌륭한 면도 있지만 부끄러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교회의 강단에서는 날마다 그들의 이야기가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천국에서 제발 내 이야기는 빼주세요 라고 하나님께 부탁했다는 말은 어느 누구의 간증을 통해서라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자기의 사건을 통해서 만인이 교훈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나를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죽음에는 과거와 현재의 죽음이 있습니다. 죄는 십자가에 이미 죽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자아는 날마다 죽어져야 합니다.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죽는 것입니다. 갈등이 있나요? 자아가 덜 죽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죽어집니까? 오늘 말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히12:3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져야 주님의 참 제자요, 이 길 가는 것이 영생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갔던 여인들처럼 주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므로 십자가의 자리 겸손의 자리 사랑의 자리 순종의 자리까지 나아가 예수님의 사랑 받는 신부요 하나님께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