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설교

추수감사절 자료

공 상희 2011. 11. 18. 15:03

1. 성경의 추수감사절 (초막절)

 

곡물을 거두어들이는 것. 게셀의 달력은 고대 이스라엘의 추수기들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감람열매는 연초(9월 중순부터 11월 중순까지)에 수확되었는데, 사람들은 긴 나무막대로 감람나무 가지를 쳐서 그 열매를 거두어 들였다(신 24:20, 사 17:6). 또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3, 4월에 아마를 베어 말림으로써 아마를 거두어 들였다(수 2:6). 한편 보리는 4월이나 5월 초에 수확하였던 반면에 밀은 5-6월에 수확하였다. 그리고 8-9월에는 여름 과일들(무화과, 포도, 석류)을 수확하였다. 

스라엘이 큰 기쁨을 갖고 지키던 세 절기 가운데 하나로, 농사력이 끝나는 가을에 지켰으며, 40년간의 광야에서의 유랑을 상기하면서 계약을 갱신하는 절기는 초막절이다. 보통 장막절로 알려져 있다(참조 대하 8:13). 초막절의 다른 이름으로 성서에서 나오는 것들로는 「수장절」(출 23:16), 「여호와의 절기」(레 23:39, 삿 21:19), 「절기」(왕상 8:2, 65, 대하 7:8, 느 8:14, 사 30:29, 겔 45:23,25) 등이 있다. 

비록 신 16:16은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일년에 세 번 스스로를 「여호와께 보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초막절이 본래의 순례절기였던 것 같다.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는 매년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실로로 여행을 하였다(삼상 1:3, 21). 그가 순례를 한 때는 아마도 「매년」실로에서 벌어졌다. 「여호와의 절기」때였을 것이다(삿 21:19). 이 여호와의 절기는 포도원 무도회가 특색이었는데(삿 21:16 이하), 이러한 사실은 본 절기가 가나안 인들의 농경의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절기는, 초막절의 초기 형태를 이해하기에 가장 좋은 이스라엘의 절기였다. 초막은 후에 이스라엘이 그 유랑생활을 기억하기 위해 사용하였으나, 본래는 농경생활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올리브 과수원 주인들은 수확의 달(9월)이 되면, 밤마다 가지와 덩굴로 만든 오두막에 서서 올리브 밭을 감시했다. 

초막절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유대교에서 지극히 인기 있는 절기가 되었다. 본 절기는 특히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기회로 이용되었다. 순례자들은 바빌로니아나 그 밖의 먼 지역에서, 성전과 예루살렘 성을 위해 모은 봉헌물들을 가지고 왔다. 한편 노상강도들이 순례자들을 약탈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보호하는 문제가 때때로 언급되기도 한다. 초막절은 일곱 번째 달(티쉬리)의 열 다섯 번째 날에 시작되었다. 이달의 첫 번째 날은 특별히 거룩한 날(레 23:23-25)이었으며 열번째 날은 속죄 일이었다. 이 세 가지 행사들은 본래 하나의 의식이었던 것이 세분화된 듯하다. 일곱 번째 달의 첫째 날이 거룩한 날이었다는 점은 아마도 예전에 이스라엘의 1년이 가을에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징표일 것이다. 그러나 본래 초막절은 1년의 마지막에 지켜졌다(출 23:16, 34:22). 

초막절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몇 가지 의무가 주어졌다. 즉 그들은 7일 동안 먹고 자고 해야할 초막을 스스로 준비해야만 하였다. 더욱이 모든 순례자는 예루살렘의 주위에서 도금양, 버드나무, 종려나무 등의 잔가지들을 모아야만 하였다. 본래 가지들은 천막을 세우기 위해 사용하였다(느 8:13-18). 후에 그 가지들 중의 일부는 함께 묶어, 룰라브(lulab)라고 불리는 일종의 축제 장식물로도 사용하였다. 

헌수 의식은 절기 동안에 매일 아침마다 가장 먼저 드리는 공통의식이었다. 초막절의 첫날 아침, 제사장의 행렬은 실로암 못에 가서 일주일 동안 사용하기에 충분할 물을 그릇에 채웠다. 

 

네번째로 중요한 공통의식은 밤에 거행되었다. 이 의식은 축제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제사장들의 낡은 의복으로 만든 심지가 끼워진 4개의 커다란 「일곱 가지의 촛대」가 성전의 전지역을 밝게 비추었다.

그 촛불 밑에서, 의식에 참석한 자들은 피리에 맞추어서 횃불 춤을 추었고, 레위인들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시 120-134편)을 불렀는데 「이스라엘의 뜰」 에서 「여인의 뜰」로 걸어 내려가면서 열 다섯 계단의 한 계단에서 마다 노래 하나씩을 불렀다. 사 30:29에서 언급된 밤의 「거룩한 절기」는 바로 이 의식일 것이다. 이 의식은 7일 동안 매일 밤마다 거의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매일 새벽에는 제사장들이 장엄한 의식을 거행하였다. 닭이 울 때 그들은 성전의 동쪽 문으로 가서, 해가 뜨는 순간 서쪽을 향해 서서 성전을 마주 보면서 다음과 같이 암송했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곳에 있을 때 얼굴을 동쪽으로 돌려 동쪽 태양에 경배하였으나 우리의 눈은 주께로 향했다. "(겔 8:16) 

이러한 세 가지 공통 의식을 7일간의 축제기간 동안에 매일 행했다. 할렐 시편은 여덟째 날에 개최되었던 장엄한 의식에서도 불려졌다. 아홉째 날은 심하트 토라라고 불리는데 절기의 초첨이 자연에서 율법으로 옮겨짐을 나타내는 징표였다. 율법 낭독기간이 이때 시작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며, 아마도 초막절과 신년축제와의 관계와도 연관되어 있는 듯하다. 

초막절은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밭에서부터 거두어 드릴 때", 즉 추수기와 연관지어 있다. 출애굽기에는 초막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으며, 초막의 기념적 역할도 명시되어 있지 않고 초막절의 기간이나 규례도 밝혀져 있지 않다. 순례시의 요건을 언급한 구절로 간주되는 출 23:17은 14-16절에 나중에 첨가된 것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견해이다. 삼상 1:21을 고려해 볼 때 계약법전에서 수장절은 초기 이스라엘의 유일한 순례절기이다. 엘가나가 제사를 드렸던 실로에서의 의식은 삿 21:19 이하에 언급되어 있는 실로에서의 「여호와의 절기」와 동일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수장절은 어느 정도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환회의 의식이었던 것 같다. 수장절은 제사를 드리기에 가장 알맞은 시였고(민 29장에서 초막절에 드린 제물의 양은 어떤 다른 절기보다도 많다), 이러한 사실은 이 절기에는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삼상 1:3-9). 

또한 한나가 술에 취했을 것이라고 엘리가 짐작을 하는 것(삼상 1:14)은 이 축제의 성격을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으며, 명백히 유혹을 목적으로 한 포도원에서의 처녀들의 춤은 포도수확기에 먹고 마시고 놀던 가나안 사람들의 전통적 경향을 강하게 암시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축제는 「여호와의 절기」였으며 출 23:16에서의 규정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문화에 동화되어 가던 과정의 초기단계에서 생겨난 것이다. 

신 16:13-15에서 수장절은(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서 거행되어야 함) 초막절로 되어 있다. 하지만 초막의 의미나 기능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 초막절은 7일 동안 계속되었고,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에 대해 감사를 드렸다. 이 신명기에서는 「너의 절기」를 즐기는 데 있어서의 특별한 훈계(14절)가 "하나님이 농사를 축복하사 온전히 즐거워하게 되리라 "는 말과 함께 나온다. 



 

 2. 추수감사절의 기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너희의 소산을 먹을 때 너희에게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 고 명하였으며, 그 후로(혹은 그 전에도) 인간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땅의 소산을 허락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려왔다.

추수감사절을 따로 정한 것은 미국 이주자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즉 이 관습은 이미 오래 전부터 유럽에서 행해졌던 것이다. 매사추세츠의 청교도들은 크리스마스 절기를 가톨릭의 절기로 간주하여 이를 지키지 않았다. 이처럼 크리스마스를 로드섬을 제외한 영국의 식민지에서 절기로 지키지 않게 되자 추수감사절을 크리스마스 절기 대신에 정통과 청교도들의 절기로 지키게 되었다.

미국에서의 최초의 추수감사절은 미국에서의 첫 번째 수확기였던 1621년 가을에 플리머드 정착지에서 미국이 주자들에 의하여 지켜졌다. 미국 이주자들과 그들의 인디언 손님들은 야외에서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일주일간 이 추수감사절을 지켰다.

17세기 말 이전에 이 추수감사절은 코네티컷주와 매사추세츠주의 연례적인 성일이 되었으며, 이 관습은 서서히 다른 지역들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이 추수감사절은 특별한 종교적 절기(비록 나중에는 종교적 색채를 지니게 되었지만)가 아니었으며 단순히 영구의 율타이드(Yuletide)절기와 같은 것이었다. 추수감사절은 일반적으로 목요일 날 지켜졌는데, 그 이유는 목요일이 강연 일로서 매우 인기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관습이 보다 확고한 기반을 갖고 남부지방으로 퍼져 나가게 되자 각 주의 정치가들은 이 추수감사절을 각 주의 연례 행사로 정하는 문제를 정식으로 토외하게 되었다. 한편 1840년대에《Godey's Lady's Book》 의 편저자였던 사라 요세파 헤일 여사는 추수감사절(11월 마지막 목요일)을 미국 전역의 연례적인 절기로 지킬 것에 대한 캠페인을 벌였으며, 1863년 9월 28일에 추수감사절을 미국 전역의 연례적인 축일로 선포할 것을 촉구하는 서신을 그 당시 미국의 대통령인 링컨에게 보냈다. 그로부터 4일 후 링컨은 추수감사절을 미국 전역의 연례적인 절기로 공포하였다. 그 전 까지만 해도 감사일이나 기도 일에 대한 대통령의 선포는 연례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추수기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1863년 이후로 모든 대통령들은 링컨의 전례를 따랐으며 행정부도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 따라서 1941년까지 추수감사절의 날짜는 대통령의 연례적인 선포에 따라 각기 달랐으나 1941년에 미국 의회는 대통령과의 합의 아래 11월 네번째 토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하고 이날을 휴일로 공포하였다. 비록 의회는 이 추수감사절로 정하고 이날을 휴일로 공포하였다. 비록 의회는 이 추수감사절 날짜를 확정지어 놓고 있으나 대통령은 계속하여 링컨이 1863년에 시작한 전례에 따라 매년 추수감사절 날짜를 선포해 오고 있다. 


 

  3. 한국의 추수감사절

한국 교회에서 감사절을 지키기는 1904년부터이다. 제 4회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에서 서경조 장로의 제의로 한국교회에서도 감사일을 정해 지키기로 하였다.

우선 다른 교파 선교부와 협의하여 그 날짜를 정하기로 하고 우선은 11월 10일을 추수감사절로 선정하여 장로교 단독으로라도 지키기로 하였다. 

그후 1914년 각 교파선교부의 회의를 거쳐 미국인 선교사가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날을 기념한 매년 11월 제 3주일 후 3일(수요일)을 감사일로 정하여 예배를 드리고 감사헌금을 모아 총회 전도국에 보내 전도사업에 쓰기로 하였다. 

그후 수요일을 일요일로 변경하여 매년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켜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계 일각에서는 한국농촌의 실정에 맞는 시기인 중추절(추석)을 전후해서 한국교회다운 추수감사절을 새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자만 일반적으로 11월 셋째주로 지키고 있다.

 

  5. 감사에 관한 성경말씀

(레22:29)
너희가 여호와께 감사 희생을 드리거든 너희가 열납되도록 드릴지며 

(왕상9:25)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단 위에 해마다 세번씩 번제와 감사제를 드리고 또 여호와 앞에 있는 단에 분향하니라 이에 전 역사가 마치니라 

(대상16:8)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대상16:3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대상29:13)
우리 하나님이여 !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대하5:13)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시7:17)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 

(시18:49)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시26:7)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 

(시30:4)
주의 성도들아 !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시30:12)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시33:2)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52:9)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 

(시57:9)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95:2)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시97:12)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그 거룩한 기념에 감사할지어다 

(시100:4)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106:1)
할렐루야 !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118:19)
내게 의의 문을 열지어다 내가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시118:21)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시119:7)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시119:62)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 

(시136:5)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 로다 

(시136:12)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렘33:11)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집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로 돌아와서 처음과 같이 되게 할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33장 10절 내용의 계속임) 

(10절과 11절의 내용 같음)

(욘2: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요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롬1:8)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고전14: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고전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후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4:15)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후9:12)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고후9: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엡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빌1: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빌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골1: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골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후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딤전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4: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계7: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8. 감사에 대한 명언

  1. 이 세상에서 가장 상쾌한 과실은 감사다. 〈메난드로스/ 斷片〉

  2. 주 예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대에게 감사하나이다.
    (*그의 입에다 녹아 넘실거리는 뜨거운 납물을 퍼붓기 전에 이 순교의 성자는 기도를 올렸다.) 〈보니페이스〉

  3. 과도한 감사만큼 지나친 아름다움은 없다. 
    〈J.라 브뤼예르/사람은 가지가지〉

  4. 감사는 위대한 교양의 결실이다. 
    그대는 야비한 사람에게서는 그것을 발견할 수 없으리라. 〈S. 존슨〉

  5. 이렇게 고통 없이 나를 가게 해주신 친절한 신에게 감사하나이다. 
    〈P. 헨리〉

  6. 감사한 마음으로 받는 사람들에게는 풍부한 수확이 있다. 
    〈W. 블레이크〉

  7. 오랫동안 고통과 수난의 일생을 끝나게 해준 신에게 감사를 드리자.
    (*임종할 때의 말 중에서) 〈L. 베토벤〉

  8. 감사는 마음의 기억이다. 〈A. 프랑스〉

  9. 감사하는 마음, 그것은 자기 아닌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감정이 아니라 실은 자기 자신의 평화를 위해서이다. 감사하는 행위, 그것은 벽에다 던지는 공처럼 언제나 자기 신에게로 돌아온다. 〈編者〉

  10. 가을판에는 대부인 마님. 나막신짝을 들고 나선다.
    (*추수기에는 귀하신 마님께서도 나서 일한다는 뜻) 〈韓國〉

  11. 빽빽이 심는 자는 수확이 적고 성기게 심는 자는 수확이 많다. 〈프랑스〉

  7.추수감사절 설교자료

   dia_skyblue.gif하나님감사합니다(박조준목사)

하나님, 감사합니다


고린도후서 9:6-15   박조준목사


우리가 언제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감사를 드리지 아니하겠습니까만 이 처럼 1년에 한번 한 주일을 정해서 일년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퍽 의미가 깊다고 생각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 개인에게 주신 은 혜가 얼마나 큽니까? 우리 가정에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더구나 우리 교회에 베푸신 은혜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 기 관과 단체가 평안한 가운데 각자의 책임을 잘 감당하게 된 것을 감사드 립니다. 본 교회에서 후원하는 여러 나라 선교사들과 농어촌 교회에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신 것을 감 사드립니다. 더구나 우리 교회의 새 성전건축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진행되고 있는 것을 감사드립니 다. 지금 공정이 약 80퍼센트 진전 이 되었고 이제 내부공사와 조경공 사만 되면 정말 아름다운 예배당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내년 2000년 봄에 입당하게 될 것인데 생각만 해 도 감격스럽습니다. 그 동안 10여 년 동안 불편한 장소에서 고생 많이 하셨는데 이제 서너 달만 더 고생하 면 되겠습니다.
사실 우리 나라가 한국동란 이래 처음으로 IMF라는 국난을 겪게 되 어 우리 국민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 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제 IMF 2년의 터널을 지나면서 고생도 많았지만 배우고 깨달은 바도 많습 니다. 아직도 여러 가지 문제가 많 이 남아있지만 그래도 어려운 경제 가 다소 회복되는 단계에 이르게 된 데 대하여 감사드릴 수밖에 없습니 다. 또한 일년동안 하나님께서 온 세계교회와 온 세계 나라 위에 축복 을 더하여 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 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 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 야 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그리스 도인은 평소의 생활이 감사의 생활 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생활과 일생이 하나님의 은 혜를 감사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 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면 그 는 언제든지 제일 먼저 성도들을 향 해 문안을 한 다음에는 하나님께 감 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편지 를 읽어보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권 면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범사에 감사하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 라."
이와 같은 글을 쓴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만 감사하라고 한 것 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생활을 보면 그의 생활 자체가 감사의 생활 이었습니다. 바울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감격이 사무쳐 있었 고 따라서 그의 하루 하루의 생활, 한 달 한 달의 생활, 아니 일생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사도 바울은 감사 의 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 의 감사 생활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 습니까? 우리는 보통 '모든 것이 다 평안하고, 환경이 좋아야 감사한 생 활을 할 수 있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경우는 좋은 환 경이나 평안한 생활 때문에 감사한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1장 하반부를 보세 요. 거기에 보면 사도 바울의 일생 을 기록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매를 몇 번 맞고, 감옥에 몇 번 들어 갔 고, 몇 번 파선을 당하고, 길의 위험 과 산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도시 의 위험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도 핍박을 받았고, 이방 사람에게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다 메섹에서도, 에베소에서도, 고린도에 서도 예루살렘에서도 핍박을 받았습 니다. 로마에 가서도 대부분 감옥에 있었습니다. 바울의 일생은 거의 핍 박과 환난과 곤고의 생활로 점철되 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가운데서도 감 사의 생활을 했습니다. 어떻게 그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의 생활 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우리의 몸이 건강하 면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지 않 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병들고 몸이 괴로운데 무슨 감사를 할 수 있습니 까?"라고 말합니다.
"사업이 잘 되 어서 많은 이익을 남기게 되었으면 하나님 앞에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어려워 많은 손해를 보았는데 무슨 감사를 할 수 있습니 까?"
일반적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몸이 건강해 서 혹은 사업이 잘 되어서 감사한 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 서 12장에 보면 자세히는 알 수 없 지만 그의 육체 가운데 찌르는 가시 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가 분명히 심한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육신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 히 기도했지만 그냥 두었다고 했습 니다. 그러니까 찌르는 가시를 그냥 가슴에 안고 지냈습니다.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 한 내용 중에도 그가 병이 나서 다 른 곳에 가지 못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전도했다는 말이 있습니 다. 사도 바울은 몸이 건강한 사람 은 아니었습니다. 건강하기 때문에 그가 감사와 기쁨의 생활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우리 몸이 건강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러나 사도 바울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 니다.
또한 우리 가정이 다 평안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 이 가정에 베푸신 축복입니다. 우리 가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 나님의 은혜가 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의 경우 는 이 가정에서 오는 기쁨도 없었습 니다. 바울은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 습니다. 종일 일하고도 평안히 들어 와 쉴만한 집 일정한 가정이 없이 평생을 살았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 리 둘 곳이 없다"
고 주님께서 말씀 하신 대로 바울은 일생동안 나그네 로서 이곳 저곳을 방랑하며 육신적 으로도 평안히 쉴 곳이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제가 가끔 전도집회 때문 에 지방이나 외국에 가면 평안한 숙 소를 마련해 주고 좋은 것으로 대접 을 해 줍니다. 그러나 내 집, 내 가 정만큼 평안하지는 못합니다. 여행 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그렇게 평 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일평생을 가정이 없이 살았으니 그 불편함을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 사도 바울의 감사한 생각과 생활이 어디서 생겼습니까? 그것은 밖이 아니라 그 속에 있었습 니다. 그의 처한 환경이나, 그의 건 강이나, 그의 가정이나, 그의 재산이 나, 그의 명예나, 그의 지위나, 그의 성공이나 그런 데 있었던 것이 아닙 니다. 그의 감사생활은 그 속 깊은 심령 속에서 우러나왔습니다. 여기 서 말씀하는 대로 말할 수 없는 그 의 은사로 인하여 
"하나님, 감사합 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말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를 받았습 니다.
아까 우리가 부른 찬송대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합니다. 이구난설(以口難說)입니 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이필난기 (以筆難記)입니다. 얼마나 크고 귀한 지 말로다 할 수 없는 큰 은사를 마 음속에 받았습니다.
그 은사가 무슨 은사였을까요?
그 은사는 아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되고 믿게 되었습니 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신앙은 말하자면 그의 삶의 뿌리요, 그의 감사는 거기서 자란 나무에 맺는 열 매였습니다.
로마서 7장을 읽어보면 사도 바 울의 그야말로 세기적인 고민이 기 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 다. 그는 심각한 도덕적인 고민을 느꼈습니다. 그는 양심적인 인물이 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구약 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는 옳은 사 람이 되기를 힘썼습니다. 사람 앞에 서뿐만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도 부 끄러울 것이 없이 살아 꼭 옳은 사 람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 의를 얻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구약은 우리에게
"네가 하나님 앞에 서 의인이 되려고 하면 계명을 지켜 라. 율법 따라 살아라"고 가르칩니 다. 그래서 그는 양심대로 계명을 지키려고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사 도 바울이 이와 같이 양심적으로 계 명을 지키기를 힘써도 자기 육체 속 에 다른 힘이 있어서 그대로 살 수 없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는 또한 죄의 세력이 있 었습니다. 육신을 기초로 하는 죄의 세력이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습니 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 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 에서 나를 구원하랴"고 긴 탄식을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그리스도 의 십자가를 보게 된 것입니다. 십 자가의 뜻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새 생명의 복을 깨닫게 되고, 성령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망극하신 은혜를 받은 다음에 바울은 외쳤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다시 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했 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죄에서 해방을 받았기 때문입 니다. 죄에서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 습니다. 이 구속과 해방의 기쁨은 언제든지 그로 하여금 이 은혜를 감 사하여 보답하려는 감사의 생활로 변하게 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 은 그리스도를 만난 때부터 예수 그 리스도는 옛날 승천하신 그리스도만 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언제 나 자기 자신과 함께 계신 것을 깨 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육에 속한 자기는 죽었습니다. 그 대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속에 살 아 계신 것을 항상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 서 변명할 때 내 친구들은 다 나를 떠났습니다. 한 사람도 나를 도와주 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께 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강한 힘을 주고 주께서 언제든지 나와 같이 계 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전도하러 갔습니다. 그곳에 죄가 너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전도할 기회가 너무 컸습니다. 그러나 반대하는 유 대 사람들은 벌떼와 같이 일어납니 다. 그때 주님께서 특별히 사도 바 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고 했습 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 도시에 내 백성이 많으니 입을 닫지 말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라."
살아 계신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사도 바 울과 함께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중해에서 큰 풍랑 을 만났었습니다. 사실 그 배에는 바울뿐만이 아니라 로마 군인들과 뱃사람 그리고 로마로 호송되어 가 는 많은 죄수들이 있었습니다. 이 배에 타고 있었던 사람은 276명이나 되었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은 그 대로 있어서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 진 절망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이 풍랑의 와 중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절망 중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 했습니다.
"여러분,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 밤에 내 곁에 서서 말씀하셨습니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말 씀하고 있는 한, 내 삶에 대한 하나 님의 인도가 계속되고 있는 한 풍랑 은 두려워 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 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 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 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 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풍랑 속에서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 지 발견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 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 의 이유와 자기들에게 주어진 사명 이 무엇임을 각성하고 있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사 명을 알고 있습니까? 왜 우리가 이 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 입니까? 우리의 존재 이유를 아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풍랑 속에서도 노래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풍랑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 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풍랑 에도 불구하고 함께하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 을 듣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풍랑 만나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 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여러분, 안 심하십시오. 우리는 마침내 이 풍랑 을 극복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의 사명도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 다. IMF의 거센 풍랑 때문에 절망 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부통계에 의하면 IMF체제 2년 동 안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심해 졌다고 합니다. 20퍼센트는 전보다 오히려 나아졌는데 나머지 80퍼센트 는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고 합니다. 국민 한 사람의 최 저 수입이 월 23만원인데 이것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 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고난의 상황에서 하나 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편에 서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셨 기 때문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 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 리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풍랑 만나 어쩔 줄 몰라하며 두려워하는 제자 들에게 주님이 다가오십니다. 그리 고 겁에 질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 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 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심하지 못하고 당황하며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주님은 이렇 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그들이 조금 만 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면, 그 리고 조금만 더 주님을 신뢰할 수 있었다면, 풍랑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풍랑 속에서 배의 갑판에 사람을 모으고 축사를 했습니다.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 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 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먹기를 시작하매"(행 27:34∼35).
상상해 보세요. 지금 큰 풍랑이 일고 있습니다. 배는 미친 듯이 흔 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절망의 벼랑 끝에서, 생사의 갈림길에서 아 우성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들을 잠잠하게 한 자리에 모아놓고 떡을 떼며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 를 올리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생각 해 보세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풍랑 속에서 어떻게 살고 있 습니까? 하늘을 바라보시겠습니까? 찬양을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바울 처럼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고 백할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 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 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 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 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주님께 감사 하는 사람들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4장 13절 에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 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 씀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 그리스도만이 아 니었습니다. 현재에 자기와 같이 계 셔서 간단없이 능력을 주시는 그리 스도였습니다. 그러므로 풍랑을 만 날 때도, 핍박을 받을 때도, 돌에 맞 을 때도, 파선을 당할 때도, 조금도 두려워 할 것이 없었습니다. 언제든 지 주님의 능력이 함께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을 당할 때 사 도 바울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 는 말밖에는 할 것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다 이와 같 은 믿음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십 자가로 죄에서 구속을 받으셨습니 까? 우리가 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 께서 우리와 같이 하시는 것을 아는 이 새로운 믿음, 참 믿음, 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순 경이나, 역경이나, 괴로울 때나 평안 할 때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밤이나 낮이나, 언제나 감사로 충만한 생활 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생활을 하게 되니까 자연히 그의 생활에는 많은 열매가 맺혔습니다. 우선 마음 속에 성령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사 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 성, 온유, 절제의 열매가 맺혔습니 다. 가는 곳마다 죽은 심령을 구원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었습 니다. 가는 곳마다 주님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열매를 맺게 되 니 자연히 마음속에서부터 감사함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주를 위해서 무슨 열매를 맺든지 열매를 맺는 사람일수록 감사한 마음이 더 많이 있습니다. 주를 위해서 한 사 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 다면 그 사람은 감사한 마음이 더 많습니다. 주를 위해서 다른 사람에 게 옷 한 벌이라도 줄 수 있고, 목 마른 사람에게 냉수 한 잔이라도 줄 수 있었다면 그 사람에게는 감사한 마음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주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많 지는 않지만 선교비를 매달 꼭 내 고, 착한 사마리아인 주일에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는 일에 손을 펼 수 있었다면 그 사람에게는 더 기쁨이 있을 것이고 감사한 마음이 있을 것 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사도바울은 항상 빛나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우리를 위하여 지극히 크고 영 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는 것을 분명히 알고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 서 내가 조금 환난을 당하지만, 이 세상에서 내가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지만, 이 모든 것은 하늘나라의 큰 영광을 더하게 하는 것이니 얼마 나 감사합니까?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 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나를 위해서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언제나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그 러니 감사한 마음이 자연히 북받쳐 올랐습니다.

사실 감사는 믿음의 척도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 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마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을 모 릅니다. 그러므로 하박국의 말처럼 고기가 많이 잡히면 그물에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다가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점점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평안하면 감사합니 다. 그러나 괴로우면 감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건강할 때는 감사해도 병 이 나면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이 나 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점점 자 라나면 평안할 때도 괴로울 때도, 건강할 때도 병들었을 때도, 성공해 도 실패해도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는 우리
"믿음의 척도"입니 다.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신앙 에 들어가게 될 때는 문자 그대로 성경말씀처럼 모든 일에, 범사에 감 사하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 는 믿음으로 구원 얻은 사람만 모였 기 때문에 불평이라고는 없습니다. 불만도 없습니다. 하늘나라에는 기 도도 없습니다. 하늘 나라에는 목사 의 설교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도 찬송과 감사만 있습니다.
이 세상 교회에서는 기도가 필요 합니다. 왜요? 기도를 통해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 상 교회에서는 예배 드릴 때 목사의 설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늘 나 라에서는 예배할 때 찬송과 감사밖 에는 없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이 오직 찬송과 감사로 충만하다면 이 자리가 곧 하 늘나라의 그림자가 될 것입니다. 하 늘 나라의 축복을 미리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은혜를 받아서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환경 과 처지에서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dia_skyblue.gif전천후감사생활(이중표목사)

전천후 감사생활

   욥기 2:7-10  이중표목사

옛날에는 농사를 지을 때 비가 오면 농사를 짓고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못지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농사 기술이 개발되면서 저수지를 만들어서 날이 가물어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만들었는데 최근에는 더 발전해서 겨울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겨울에도 딸기가 나오고, 수박이 나오고, 모든 과일 채소가 나와서 1년내내 과일과 채소를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후에 전혀 제한받지 아니하고, 일기에 제한받지 아니하고 1년내내 짓는 농사를 전천후 농사라고 말합니다.

저희는 어렸을 때 천수답이라는 것이 있어서 산등성이에 있는 논은 비가 오면 농사를 짓고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못지었습니다. 또 모를 심었어도 비가 오지 않으면 다 말라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밭에까지 수리시설이 되어서 비가 오지 않아도 농사를 짓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환경이나 우리에게 오는 시련이나 역경에 영향을 입지 아니하고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전천후 감사라고 말합니다.

비가 오면 감사하고, 날이 가물면 한탄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비가 와도 좋다, 가물어도 좋다, 겨울이 와도 좋다, 가을이 와도 좋다 계절에 관계없이 어느 때든지 좋다' 이렇게 감사하며 살 수 있는 축복,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똑같은 예수를 믿지만 즐겁게 믿는 사람이 있고, 괴롭게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고 행복을 얻은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전혀 마음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여전히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한 분명한 기대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예수를 믿고 늘 감사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왜 감사하기를 원하느냐? 내가 감사하므로 나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첫째, 감사함으로 내 생이 행복해집니다. 두 번째로, 감사하므로 내 삶의 의미가 새로워집니다. 삶의 가치가 형성됩니다. 세 번째로, 감사하므로 내 인격이 높이 성숙합니다. 이 세 가지는 감사가 주는 최대의 축복입니다. 감사한 만큼 행복합니다. 감사한 만큼 우리 마음이 기쁩니다. 똑같은 부부가 살면서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행복합니다. 내가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살 맛이 납니다. 그러나 감사를 잊어버리면 그때부터 인생은 아무 살 맛이 없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받고 살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감사를 찾아내야 됩니다.

성경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고난의 승리자를 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은 부자였습니다. 양이 7천이요, 약대가 3천이요, 소가 5백 겨리요, 암 나귀가 5백 마리인 당시의 사회로 말하자면 대 재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추앙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후덕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악을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아들들이 생일잔치를 할 때는 혹시나 먹고 마시면서 잘못됨이 없을까 해서 아들들을 성결케 하고 다음날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감사를 했습니다.

욥은 늘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감사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잘될 때 교만하지 않고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잘될 때 교만하지 아니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복입니다. 부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만하지 아니하고 가난할 때 마음을 갖고 산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잘못될까 해서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신명기 8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 번째로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이 힘으로 내가 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내게 재물을 얻을 능을 주셨음이니라"

안될 때도 감사해야 합니다. 욥에게 어려운 때가 왔습니다. 재산은 일시에 없어졌습니다. 자식이 태풍으로 일시에 다 죽었습니다. 몸에 병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정수리로부터 발끝까지 질그릇 조각으로 긁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악창이 온몸에 덮쳤습니다. 아내까지도 "당신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봤자 뭐 나온 것이 있나 그래도 온전함을 끝까지 지킬 것이냐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하고 죽으라"고 하면서 욥의 심기를 건드립니다. 그때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어찌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같이 말할 수 있느냐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나님께서 주신 것 하나님께서 가져가셨는데 무슨 불평할 것이 있겠느냐"

이런 일이 생겼을 때 보통 사람 같으면 충격받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기를 비웠습니다. 속에 물질로 가득찬 사람은 물질을 잃어버리면 죽습니다. 권력으로 가득찬 사람은 권력을 잃어버리면 죽습니다. 자기 속에 가득찬 것을 빼앗기면 죽습니다. 그런데 욥은 마음을 비웠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현재 내게 있는 것으로 족하다. 알몸으로 나왔은즉 알몸으로 돌아갈지라" 이것이 우리 마음에 차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죽어 넘어질 시간에 욥은 일어났습니다. 기절하지 않았습니다.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이미 비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욥에게서 한가지 놀라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욥은 까닭없이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1:9-11)

사단이 하나님께 참소하기를 "욥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이 조건이 있으니까 감사하지 조건없이 감사하겠습니까 욥이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그의 집과, 사업과, 그의 모든 일들이 잘되니까 감사하지 그것을 한번 쳐 보소서. 당장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욥은 까닭없이 하나님을 찬양했기 때문에 욥을 내리쳤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1년 한해를 보내면서 가장 우리 생에 중요한 감사절을 맞았습니다. 감사라는 것은 우리 생의 중요한 운명을 결정합니다.

감사하는 자는 자기 존재가 영광스럽게 됩니다. 사람들이 불평하고, 원망하면 천해집니다. 그런데 감사하는 사람은 은혜를 기억했다는 인간됨 때문에 훌륭합니다. 공부를 많이 한 지성인이라 할지라도 불평하는 사람은 천해집니다. 우리가 자기 존재를 영광스럽고 위대하게 만드는 비밀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공부 많이 하고 출세한 자식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못해서 출세는 못했지만 부모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 부모는 자식에게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자식을 길러가면서 어렸을 때는 인물 좋은 자식이 마음에 듭니다. 자라면서는 공부 잘하는 자식이 괜찮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자녀들이 결혼도 하고 형편에 따라서 출세도 하는데 마지막 늙어서 부모님 마음 속에는 그런 것이 다 의미가 없고 부모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효도하는 자식이 최고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길러가면서 효자를 길러야지 공부 잘하는 자식 기르려고 신경쓰지 마십시오. 부모의 은혜를 감사하는 자식이 최고의 자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했는데 하나님이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너 내 아들 되었으니 출세해라 공부 잘 해서 나에게 영광 돌려라 사업도 잘 해서 사회에서 잘 되면 좋지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은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효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최고로 영광을 받으시는 비밀입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을 알아 사는 것도 아니요, 지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IQ가 높아야 최고였지만 지금은 EQ가 높아야 합니다.

감사한 마음이 속에서 우러날 때 우리 존재가 영광스럽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됨입니다. 사람됨이 따로 있나요. 은혜를 기억하고 사는 것이 사람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사람 중의 사람은 은혜를 은혜로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기억하면 내가 행복하게 됩니다. 감사할 때 행복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는데 모든 것을 가졌구나!' 그러면 감사한 마음 때문에 살았다는 것이 가슴에서 뭉클한 감격이 있습니다.

청년들에게 "그대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질문할 때 감격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메말라가는 이 세상에서 모두 다 말라버린 인정 속에서 감격하고 감동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복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자에게는 언제나 그 마음속에 행복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나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을지라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그 순간에 '아,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이 행복하다.' 하고 행복감이 솟아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삶 속에서 행복을 창조해 나가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인생을 살 용기가 생깁니다. 창조적인 존재가 됩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인생은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해 줍니다. 과거를 불평한다든지 후회하는 자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과거의 모든 것들이 다 나에게 의미를 주고, 보람을 줄 때 미래에 대한 패달을 가속화할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과거를 후회하고 과거를 탄식하면 미래가 없습니다. 과거의 어떤 것도 후회하지 마십시오. '아,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미래에 소망을 주려고 하는 예정된 코스였다.'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저는 이번에 제 생애 책을 하나 만들어 가면서 하루 한가지 한가지 사건이 하나님의 예정된 코스였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너무 감사하고 있습니다.

현재 내가 삶의 현장에서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그 삶 속에서 감사를 만들어 내십시오. 감사의 보약을 만들어 내십시오. 그때 우리의 골수가 윤택해질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감사한 마음으로 먹을 때 소화가 됩니다. 부부가 살면서도 감사한 마음으로 살 때 거기에 사랑이 싹터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감사한 마음을 가질 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한없는 영광을 돌리며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나의 것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한신교회 개척 이후에 최고의 헌금을 하는 여종이 있습니다. 시장에서 장사하면서 번 돈을 하나님 앞에 바칩니다. 매주 감사헌금을 드립니다.

제가 한번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한주간도 빠지지 않고 감사를 합니까?" 했더니 옛날 구역장이 매주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라고 가르치더랍니다. 이 분이 구역장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잘 믿습니까?"  "감사를 해야지"  "감사를 어떻게 합니까?"  "매주 해야 됩니다." 이 분이 구역장 얘기를 듣고 매주 감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3개월이 되어도 별로 잘 되는 것도 없고 감사를 했다고 은혜가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해서 "3개월 해도 별 것 없네요." 했더니 "3개월 가지고 되나요 1년은 해야지" 해서 1년동안 계속했습니다. "1년 해도 별 것 없네요." 했더니 "1년 해가지고 되나요 10년은 해야지" 하더랍니다. 그런데 이 분이 매주 감사헌금을 드리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IMF가 와서 경기가 안좋을 때 제가 한번은 물었습니다. "요즘 사업이 잘 됩니까?"  "사업 잘 됩니다." 제가 안된다는 얘기를 듣고 물었는데 잘 된다고 그래요. 그래서 "무슨 사업이 잘 됩니까?" 했더니 "예, 저는 한가지 사업은 불경기가 없습니다. 하나님 사업은 불경기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향하는 사업은 불경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 여종에게 절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여종이 매주 감사하는 것을 보고 저도 감사를 매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천후 감사가 우리 속에 흘러서 하늘을 품에 안고 땅을 디딜 때 '모든 것이 은혜다, 모든 것이 감사다, 모든 것이 축복이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dia_skyblue.gif하나님께 항상감사하라(유경재목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라

 

시 편 121: 1- 8  유경재목사


오늘은 우리 교회가 지키는 추수 감사절입니다. 우리가 농사를 지은 것이 없는데 무슨 추수 감사절이냐고 물으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농사꾼이든 도시의 소시민이든 근원적으로 인간의 삶은 심고 가꾸고 거두는 농사의 원리를 따라 이루어지기에 오늘 추수 감사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일년 동안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고 하겠습니다. 부지런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가 씨를 뿌리고 가꾼 결과 추수 때를 맞이한 것입니다. 추수는 하나님의 은총과 우리의 땀의 결과입니다.

농사를 짓지 않은 우리도 농사 풍년이 들었다고 하면 안심이 되고 함께 기뻐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이 농사의 결과에 따라 영향을 받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풍년의 소식은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모든 삶에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에 감사하게 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시에 살면서도 이렇게 추수 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매듭 없는 우리의 삶에 매듭을 주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금년에 우리가 무엇을 추수했는지 점검해보고 감사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다함께 모여 감사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 모두가 똑같은 추수를 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은 정말로 많은 추수를 하였는가 하면, 어떤 분은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많은 것을 얻었든지 혹은 잃었든지 간에 그 모든 것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총 안에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삶의 감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추수했느냐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과 위기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추수 감사절은 우리가 거둔 추수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절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지키는 하나님

오늘 읽어드린 시편 121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며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우리를 지키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낮과 밤에 지키시며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이제부터 영원까지 지키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시인은 다른 시편들처럼 어떤 큰 고난 가운데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또 큰 고난 가운데서 구원함을 받아서 기쁨으로 감사의 찬송을 드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마도 이 시인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 험한 산길을 걸으면서 조용히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며 이 시편을 읊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의식하든 안하든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며, 나의 삶이 기쁨을 맛볼 때에도 나를 돌보셨으며, 내가 고통가운데 있을 때에도 나를 떠나지 아니하셨다는 사실을 이 시인은 깨달은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길은 험한 산길로서,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쪼여 걷기 힘들며, 밤에는 추워 떨게 만드는 길입니다. 우리가 요즈음 성지 여행을 할 때는 시원하게 냉방이 된 편안한 차를 타고 하기 때문에 잘 느끼지 못합니다. 만약에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 걸어서 가라고 한다면 대부분 지쳐 넘어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광야의 험한 길을 걸어 올라간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여행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너를 지키는 분, 주님은 네 오른쪽에서 서서, 너를 보호하는 그늘이 되어 주시니, 낮의 해도 너를 해치지 못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시 12:5-6

유다의 광야길 같이 험한 우리 인생의 길을 생각하면서 그 길에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시인은 지금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 성전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의 삶에 언제나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깊은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금년에 농사는 풍년이 들었다고 하지만, 우리의 경제적 여건들은 그렇게 썩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대기업들조차 부도 위기에 몰리고, 취업은 점점 더 어려워져서 실업률은 자꾸 높아지고 있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대외 무역은 계속 적자를 기록하고 있고, 통상 압력은 점점 더 거세어져서 우리 상품의 수출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의 삶은 계속 구름이 잔뜩 낀 날과 같이 찌푸려 있습니다. 사람들이 스포츠 소식에 이상적으로 열광하는 것은 그나마 그것이 우리의 숨통을 터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국 프로야구 선수인 박찬호의 승리에 열광하고, 우리 축구선수들이 일본전에 역전승을 거둔데 이어 아랍 에미레이트전에서도 대승을 거둔 일에 대하여 온 나라가 열광적으로 기뻐 날뛰고 있습니다. 이렇게 온 국민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덮고 있는 모든 검은 구름을 거두어 내고 싶은 열망이 축구의 승리를 통해 분출되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사회를 덮고 있는 검은 구름이 우리에게 그늘을 드리운다 할지라도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은 그 검은 구름 너머로 태양이 빛나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121편 기자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의 깊은 속은 보지 못한 채 겉에 나타난 현상에만 집착하여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표면에는 때로 파도가 일기도하고 폭풍우가 몰아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깊은 곳에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총이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우리의 모든 삶에 아니 이 땅에서의 삶만이 아닌 영원한 세계에서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체험하는 아주 작은 일에서도 늘 감사함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진 것 아무것도 없다 할지라도 아침에 뜨는 해를 보며 즐겁게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처럼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한 平生을 심한 육체의 장애로 산 핼렌 켈러가 그의 저서 <The Story of Life>라고 하는 책에서 점자로 써서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런 것입니다.

 

"내가 단 한번만 저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 볼 수 있었으면 
내가 단 한번만 떨어지는 저 낙엽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 볼 수 있었으면 
내가 단 한번만 저 깊은 산 속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시냇물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내가 단 한번만 저 아름다운 가르침과 자상한 친절을 베풀어주시는 우리 선생님 셀리반 선생의 아름다운 그 미소를 바라볼 수만 있었으면 
내가 한번만 저 오케스트라의 연주하는 장엄한 그 음악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내가 단 한번만 나에게 그 귀한 감동을 주시는 필립스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수만 있었으면.... 
내가 한 번만 그 말씀으로 내 삶을 바꾸어 놓았던 그 감동스런 성경말씀의 내용을 직접 내 눈으로 보고 읽을 수 있었으면 
내가 한번만 지는 해의 그 아름다운 석양의 노을을 직접 내 눈으로 바라 볼 수만 있었으면 ..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 그럴 수만 있으면 지금 당장 죽어도 한이 없겠다."

얼마나 소박한 소원입니까?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그녀의 간절한 소원은 소박하지만 이룰 수 없는 소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볼 수도 들을 수도 있는 우리는 본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들을 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유명한 부흥목사 스펄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별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은 달빛을 주실 것이다. 달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햇빛을 주실 것이다. 햇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마음의 빛, 영혼의 빛을 주실 것이다."

마음의 빛, 영혼의 빛을 얻는 길은 아주 가물가물한 작은 별빛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매일매일의 작은 일에서 늘 감사할 때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어떤 일란성 쌍둥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아이는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고 낙천적이었는데 반해, 다른 아이는 극히 비관적이어서 항상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근심에 쌓인 부모가 그 아이들을 심리학자에게 데려갔습니다. 심리학자는 그 아이들의 성격을 균형 잡히게 만들 계획을 부모에게 일러주었습니다. 
"이번에 돌아오는 아이들의 생일에는 그들을 각자 다른 방에서 생일선물을 끌러보게 하십시오. 비관적인 아이에게는 당신들의 능력이 닿는 대로 가장 좋은 선물을 주도록 하시고 낙천적인 아이에게는 말똥을 한 상자 주도록 하십시오." 
아이들의 부모는 이러한 제안을 따랐고 그 결과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습니다. 부모가 비관적인 아이의 방을 가만히 엿보니 이런 불평소리가 새어나왔습니다. 
"이 컴퓨터는 색깔이 맘에 안 들어… 이 계산기는 쉽게 깨질 것 같아… 이 전자오락 게임은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야… 어떤 애는 이 장난감 자동차보다 더 큰 차를 가졌는데…."

그들은 조용히 복도를 건너가 낙천적인 아이가 있는 방을 엿보았습니다. 그 아이는 기쁨에 넘쳐서 말똥을 공중으로 던져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킥킥 웃어대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아빠가 나를 놀리신 거야. 이렇게 많은 말똥을 어디서 구하셨겠어? 내 생일 선물로 준비하신 조랑말이 있는 데서 가져오신 것이 아니겠어?"

우리 마음에 빛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선물도 별로 달갑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에 빛이 깃들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선물이라 할지라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밤이나 낮이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가물거리는 별빛에도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 삶 깊은 곳에 늘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모든 일에,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엡 5:19-20

모든 일에 항상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생활은 여러분의 신앙을 자라게 할 것이며, 여러분의 영혼을 맑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을 뵈올 것이며, 그가 보여주시는 풍성한 세계를 바라보며, 거기로부터 오는 지혜와 능력을 얻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큰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감사의 넘친 삶을 통해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이룩해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dia_skyblue.gif내가주께감사하리이다(김우영목사)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시 118:28)       김우영목사

나의 하나님, 내가’ ‘나의 하나님, 내가’로 연결되어 있는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구원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신앙인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높이겠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첫째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는 믿음의 사람 시편 기자가 하나님과 자기와의 내밀한 관계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피상적 존재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과 번영, 미래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에게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his God)’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my God)’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객관적인 분이 아니라 주관적이신 분이시요, 남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어머니, 나의 어머니’ ‘우리 교회, 내 교회’ ‘우리 나라, 내 조국’이라고 일컫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하나님이심으로 우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시며, 이렇게 될 때만이 하나님과 나와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믿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목사의 설교를 듣고, 어떤 성도의 간증을 듣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설교나 간증이 신앙을 갖거나 믿음을 성장케 하는 데 도움은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믿음 그 자체는 될 수가 없습니다.
신문에 실린 어떤 기독교 대학 교수의 글입니다.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만나며 그들로부터 많은 인사를 받는다. 그러나 거의 의례적인 인사이다. 허나 때로는 의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정한 감사가 담긴, 나를 가르쳐 주시는 나의 고마우신 선생님으로 알고 진심으로 인사하는 학생도 있다. 그러면 교수도 그 학생 신상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고 기억 속에 입력을 시키며 깊은 마음을 주게 된다.”
추수감사예배는 매년 연례 행사로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닙니다. 과거에도 은혜를 주셨고, 지금도 은혜를 주시며, 미래에도 은혜를 주실 나의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리는 특별하고도 뜻깊은 예배입니다. 
특히 오늘, 1999년 11월 21일의 추수감사예배는 단순히 1999년의 추수감사예배가 아니라 20세기에 마지막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 죄를 사해 주시고, 크고 작은 고난, 삶의 구석구석, 순간순간에 은혜를 베풀어 주신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과 감사로 관계되어야만 합니다. 
가장 완전한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요, 감사의 봉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내 삶을 만들어 주신 내 하나님을, 내 주님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의 작은 축복에 감사함이 또 다른 큰 축복을 받는 통로입니다. 

둘째 : 내가 감사하리이다
감사란 타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나의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며 잃어버렸던 감사를 찾으시고 쏟았던 감사를 회복하십시오. 기독교인들의 최대 치욕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정신의 결핍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마음을 찾고 회복하여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만 있다면 21세기라는 내일에는 복되고 건강한 나, 가정, 교회, 그리고 나라가 될 것입니다. 여기저기에 분쟁이 있고 미움이 있으며, 문제가 생김은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겐 매사가 감사로 귀결되나 불평하는 자에겐 모든 일이 불만으로 끝납니다. 기독교인들의 생은 불만 속에서 피폐한 삶으로 종지부를 찍어서는 안 됩니다. 
감사는 은혜의 산물이요 신앙의 표현이며, 축복의 열매요, 천국 생활의 상징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최고의 제사입니다. 
내 속에 감사한 마음을 두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며,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만족도 기쁨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감사란 기독교인을 나타내는 표시이며 감사가 나타나는 곳에 참 신앙이 있습니다.
독일 재무장관을 지낸 마르티 바덴 이야기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말할 수없이 궁핍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지방 여행을 갔다가 싸구려 여관에 투숙,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의 신발이 없어졌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어떤 죽일 놈이 내 신발을 훔쳐갔냐.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나같이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도둑질해가게 그냥 놔두시다니…”라고 하나님을 원망했답니다. 
그러자 여관 주인이 창고에서 헌 구두를 꺼내주며 그에게 “오늘은 주일인데 나와 같이 교회에 가지 않겠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는 마지 못해 여관 주인을 따라 교회에 갔습니다. 
헌데 그의 옆 자리에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 앉아 눈물을 흘리며 찬송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더랍니다. “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두 다리를 잃었구나. 신발이 있다고 해도 신을 수 없구나. 저 사람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복된가? 신발이야 또 사서 신으면 되는 것을….” 마르티 바덴의 삶에 변화가 왔습니다. 그는 삶의 상황에 따라 감사하는 자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서 감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명 재무장관이 되어 국가와 국민에게 크게 봉사하였고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감사하며 사는 생활이 올바른 삶이며 축복 받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가 올바로 살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다.” 어거스틴(Augustine)의 말입니다.
왜 없는 것만을 가지고 불평불만을 하십니까? 지금 내게 있는 것으로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세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이기는 능력에 의하여 증명됩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대략 140억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헌데 기억을 관리하는 것은 대뇌의 후두부이며, 여기에 저장된 기억은 되새기지 않은 상태에서 얼마를 지나면 잊혀지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것으로 저장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저장된 기억은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으로 분리되며, 전자는 의지를 사용해서 노력해야만 기억되는 것이고, 후자는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절로 떠오르는 기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조건을 조사하고, 찾아 내어 어거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생활 속에서, 그냥, 나도 모르게, 당연히, 저절로 내 속에서 살아나야만 합니다.
폭풍우로 인하여 미국의 에반 스톤 해안에서 배가 난파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노스웨스턴대학생들이 인명 구조에 나섰는데 그 가운데 에드워드 스펜서(E. Spen- cer)라는 학생이 17명을 구조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토레이(Torray) 박사가 LA의 한 모임에서 그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 스펜서 씨가 지금 여기에 참석해 계십니다.”라고 외쳤습니다. 
토레이 박사가 그를 강당 위로 초대하자 백발의 노인이 우레 같은 박수 속에서 올라왔습니다. 토레이 박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그 때의 일들 가운데 특별히 인상에 남는 것이 있으신지요? 스펜서의 대답입니다. “단 한 가지 있습니다. 제가 구했던 17명 중 그 누구도 내게 감사하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몰랐던 17명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감사를 잃어버리고 사는 현대인들입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장).”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었건만 한 사람만이 감사했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십니다. 주님께선 지금도 아홉을 찾고 계십니다.

셋째 : 내가 높이리이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자가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와 감격이 없이는 하나님을 높일 수가 없습니다. 
영국의 어떤 학교에서 무신론자 과학 선생이 무신론을 주장하고자 칠판에 ‘No where is God(하나님은 어디에도 없다)’이라고 썼습니다. 그러자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 나가 칠판에다가 ‘Now here is God(하나님께선 지금 여기에 계시다)’라고 고쳐쓰더랍니다.
하나님을 알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높임에 있어 언제, 어디서,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고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주저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가 높이는 만큼 높아지십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수가 늘지 아니하고 있음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땅에 떨어뜨리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내가 보잘 것 없는 낮은 존재임을 시인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아니시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높이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겸손이란 나를 낮추는 것이요 자기를 감추는 것이며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면 나를 낮추고 내가 숨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높이려 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내세우며 나를 포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릴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원인이 있습니다.
성 프란체스코(St. Francesco)의 제자 중에 마태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겸손의 덕을 영원한 생명으로 알고 겸손의 은혜를 얻기 위해 불붙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늘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에게 “마태오야, 마태오야, 네가 간구하는 은혜를 내가 주면 너는 그 대신 나에게 무엇을 바치려느냐?”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주여 저는 저의 가장 귀한 눈을 빼어드리겠나이다.” “나는 네가 원하는 은혜도 주고 네 눈도 보존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바로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이랍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절).”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결정을 하십시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결단을 내리십시오. 그리고 실천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내 것이 될 것이요,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에머슨(R. W. Emerson)은 말합니다. “마음에 결정된 것을 주의하라 그것이 네 것이 되는 까닭이니라.”고…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애인이 될 것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좋은 신부가 될 것입니다. 새로운 마음은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새로운 삶은 내 생활을 복되게 할 것입니다. 
내가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의 하나님을 내가 높인다면 허락하신 모든 은혜와 축복이 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객관적인 분이 아니시라 주관적이신 분으로, 그의 하나님(his God)이 아닌 나의 하나님(my God)이십니다.
·가장 완전한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요, 감사의 봉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하나의 작은 축복에 감사함이 또 다른 큰 축복을 받는 통로입니다.
·분쟁이 있고 미움이 있으며 문제가 생김은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은혜의 선물이요 신앙의 표현이며, 축복의 열매요 천국 생활의 상징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최고의 제사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감사란 기독교인임을 나타내는 표시이며, 감사가 나타나는 곳에 참 신앙이 있습니다.
·감사란 삶의 상황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로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요,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내가 보잘 것 없는 낮은 존재임을 시인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아니시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나를 낮추는 것이요 자기를 감추는 것이며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면 나를 낮추고 내가 숨어야 합니다.


    
dia_skyblue.gif감사의차원(이정익목사)

감사의 차원

 

대상 16:34-36  이정익목사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 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금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일년의 삶을 지켜 주셨고 한 해의 농사를 축복해 주셔서 올해도 풍년을 맞이했습니다. 한 해 동안 사건과 사고도 많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 시간까 지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추수에 대한 감사뿐이 아니고 일 년의 삶을 생각해 보면서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감사"라는 말을 참 많이 사용합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감사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마음은 하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결코 쉬운 마음이 아닙니다.

일본의 내촌감삼은 "하나님께서 만일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 그리고 배신이나 죽음으로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못 하는 불신앙으로, 그리고 성경을 읽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막힌 귀로, 또한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도록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분명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셔야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감사하는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몇 가지 교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은 "믿음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화되면 불만과 원망과 불평의 마음부터 우러나옵니다. 이것들은 감사의 싹을 자르는 요소들입니다. 오늘 신앙인들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이 원망과 불만과 불평을 안고 살아갑니다. 기뻐하고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아는 신앙인들보다는 매사에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이 약화되어서 그렇습니다.

믿음과 신앙과 영적 풍성함을 유지하고 살아갈 때 그 마음에 소망이 있고 넉 넉함이 있고 감사함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한 시인은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 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라고 노래했습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그 풍성한 축복을 경험해 본 사 람만이 할 수 있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거친 들도 초막도 천국이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들만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믿음의 열매로 그의 신앙을 증거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은 "축복 받은 마음"입니다.

감사는 분명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아무나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그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그런 마음을 가질 수가 있고 그것을 표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원망과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입만 열면 불평 불만이 튀어나옵니다.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감사나 만족함을 표현하는 사람 이 적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축복 받은 마음입니다.

미국의 어느 청년이 청년답지 않게 늘 감사하면서 살아갔습니다. 대개의 청년들은 꿈도 크고 야망도 누구 못지 않게 대단하기 때문에 현재의 삶이 늘 미흡 하다고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젊은이가 그렇게 감사하면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이 청년이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 하나를 절단해야 했습니 다. 그리고 절망의 삶을 살았습니다. 할 일도 많고 결혼도 해야 할 나이인데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늘상 없는 다리 한 쪽만 생각하며 살자니 앞날이 캄캄 했을 것입니다. 이 지점이 인간의 한계점입니다. 사람은 없어진 다리에 집착합 니다. 그러는 사이에 또 다른 다리는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인가 눈이 뜨이면서 다리 하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없어진 다리 대신 남아 있는 그 다리를 발견하게 된 것입 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다리가 하나 남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고무다리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청년은 이 남은 다리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이 청년은 마침내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 훈련 을 마치고 마침내 그 다리를 가지고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식인종들이 덤벼들 었습니다. 그는 고무다리를 던져 주었습니다. 식인종들은 그 다리를 씹어보았지 만 씹히지 않자 마침내 그 선교사를 신적 존재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비로소 하나님이 자신의 다리를 절단하게 하신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 때 그가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오늘 현대인들은 한편 참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전에 없 던 풍요를 누리고 문화를 누리며 편리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또 한편 으로 생각해 보면 오늘 현대인들은 참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대개는 만족함과 행복함이 없이 살아갑니다. 늘 부족을 느끼고 불만하며 갈증 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인간의 행복이나 만족함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님에도 말입니다.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래서 하늘이 주 시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은 "더 큰 감사를 불러들이는 마음"입니다.

확실히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일이 더 많이 생깁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은 더 큰 감사를 불러들입니다. 감사하는 곳에는 또 기적이 일어납니다. 불 평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불평의 조건만 늘어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들에 게는 언제나 감사의 조건들이 더 많이 만들어지는 것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스펄전은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 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해와 달이 필요 없는 영원한 빛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월등 한 감사의 조건을 점점 더 부여하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감사하지 않는 죄"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감사해야 함에도 불구 하고 감사하지 않는 것은 무지해서 감사를 깨닫지 못하거나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무지하거나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 는 불신앙이므로 근본적인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해서 드린 감사의 기도문입니다. 이스라 엘에는 언약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법궤라고도 불렀습니다. 그 속에는 아론의 지팡이와 십계명 돌비와 만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적 권위 가 거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왕 때에는 이 언약궤가 70여년 동안 변방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왕이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작업이 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놓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감격했고 안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너무나 감격해서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그때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 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 원하여 만국 가운데서 건져내시고 모으시사 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할지어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 까지 송축할지로다".

다윗은 참 기막힌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목동으로 초라하게 살았습 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골리앗과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사울로부터도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 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참 기적과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되었을 것입 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안치시켜 놓고 나서 이 감격 의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 닙니다. 진정한 감사는 다음과 같은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첫째는 "과거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과거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초라했든지 화려했든지 누구나 과거를 가지고 있 습니다. 그리고 과거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지난날 가운데 뼈아팠던 일, 억울했던 일, 서운했던 일, 그리고 배은 망덕했던 사람을 생각합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지적했듯이 사람은 지난날 속에서 행복했던 일, 기뻤던 일들이 더 많이 있었음에도 사람들은 각자 뼈아픈 일들만 생각하고 원망과 불행했 던 일들만 기억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런 습성 때문에 과거를 잊지 못하고 매여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16:9-17에서 하나님은 "맥추절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당부가 아니고 명령입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애굽에서 430년을 종살이를 하 면서 압박과 고난의 삶을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광야에 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평화의 땅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첫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결실입니까. 과거를 생각하면 꿈같은 생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 수확을 거두고 감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과거를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즉 "과거의 쓰라림을 잊지말고 그 고난 가운데서 인도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미국인들의 가장 큰 명절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그것은 미국인들 의 조상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난 당했던 지난 세월의 그 아픔을 잊을 수 없 기 때문입니다. 그 조상들이 지켰던 추수감사절의 그 기막힌 의미를 어떻게 잊 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윗은 과거를 생각하면 뼈가 저렸을 것입니다. 지나온 생애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과거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똑같은 감회에 젖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지난날을 생각하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축복의 마음입니다.

둘째는 "현재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현재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입 니다. 즉 "구원의 삶"입니다. 오늘 내가 "주 안에서 살고 있다"는 이것이 축복 입니다. 생각하면 감격할 일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밀턴은 말년에 소경으로 살았습니다. 에디슨은 귀머거리가 되어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결같이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고 보니 귀머거리, 소경인 것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에디슨에게 하나님은 발명왕으로, 밀턴에게는『실낙원』으로 보상해 주셨습니 다. 이것이 감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이고 상급입니다.

빌리 그래함이라고 하는 분이 전도집회를 하면 언제나 따라다니며 찬양도 하 고 간증도 하는 한국출신 맹인 성악가가 있습니다. 그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 다. "사람들은 맹인인 나를 인도해 줄 때 100m 앞 전방에 뭐가 있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눈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 뛰라든가, 층계가 있으니 올라가 라고만 말합니다. 나는 그 인도자의 말만 듣고 따라가면 안전하게 목적지에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나를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10년 앞을 모릅니다. 20년 앞도 모릅니다. 또 알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만을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면 우리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옛날 태어났던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 감사의 기 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지금은 한 나라의 임금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적같 은 일입니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말하기를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현재를 생 각할 수 있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태어났을 때 그 환 경, 그 삶이 어떠했습니까. 가난, 무지, 초라함이 그 때의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오늘의 삶을 상상이나 했습니까. 그때는 모두 무작정 상경한 분들 많았을 것입니다. 대책 없이 고향을 떠난 분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까지 내 뜻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입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날이 이렇게 왔듯이 장 차 우리의 미래도 하나님은 그렇게 인도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분명히 우리 의 앞날도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길로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 실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고 만족함이 있 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내일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장차 주어질 하 나님의 영광과 은총과 그 나라를 생각하는 생활입니다. 그것도 없이 살면 그것 은 신앙도 아닙니다.

그래서 칼빈은 임종시 고통 속에서도 "오늘의 고난은 장차 주어질 영광과 족 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구절을 암송하며 죽어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신앙의 세계는 위대한 것입니다. 사람은 미래가 중요합니다. 미래가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는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추장이 임종을 맞았습니다. 한겨울이었습니다. 후계자감 세 명을 불러서 말하기를, "산너머에 가서 선물을 한 가지씩 가져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이들은 눈 덮인 산을 넘어가서 한 사람은 양지바른 곳에 핀 꽃 한 송이를, 또 한 사람은 청초 한 포기를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사람은 그냥 빈 손으로 내려 왔습니다. 저마다 가져온 선물을 드렸지만 빈손으로 온 청년은 선물대신 의미있는 보고 를 했습니다. "저는 산너머에서 꽃도 보았고 풀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 보 다 더 좋은 것을 보았습니다. 산 너머에서는 넓은 들을 보았고 넓은 강을 보고 왔습니다, 그 곳이 장차 우리 부족이 살아갈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서 속히 쾌유하셔서 우리를 이끌고 그 넓은 곳으로 가서 살게 해 주십시요" 하고 말했 습니다. 그 때 그 추장은 이 세 번째 젊은이에게서 소망에 찬 부족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추장은 마침내 그 젊은이에게 추장 자리를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저 앞에 놓인 즐거움, 꿈, 소망, 그것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 는 사람들입니다. 감사는 믿음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같은 축복이 함께 하 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