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화

본받음에 대한 예화

공 상희 2011. 8. 1. 18:14

본받음에 대한 예화

 

요구하기 전에 본을 보여라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벧전 5:3.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빌 2:5∼8.

대학 기숙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학생들이 축제 분위기에 젖어 음식물을 가지고 벽에다 낙서를 하는 등 난장판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광경을 그 대학 학장이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학장은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잠시 생각했습니다. 학생들을 호되게 야단치고 그 벽을 깨끗이 닦게 했을까요 ? 아니면 청소하는 아주머니를 시켜 닦게 했을까요 ? 그러나 학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몸소 걸레를 가져다 벽을 닦았습니다.
그 모습은 학생들에게 큰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묵묵히 본을 보이는 자세는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줍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단체에든 속해 있습니다. 그 단체에 있는 구성원들이 옳은 쪽으로 변화되길 원한다면 먼저 본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저희에게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듯이 저희들도 주님을 닮아 요구하기에 앞서 본을 보이는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찐빵집 경영철학을 본받자
"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3:23)
'안흥찐빵'집 주인 심순녀씨(55)는 강원도 횡성에서 30년간 전통적인 방식으로 찐빵을
만들어 오고 있다. 심씨는 우연히 길거리 호떡장수에게 호떡 만드는 방법을 배워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심씨의 찐빵집은 전국에서 단골손님의 발길이 끓이지 않는 지역의 명소가 되었다. 심씨가 찐빵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비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비법은 남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하면서도 차별화된 맛과 전통음식을 팔면서 지역 연고 판매에 만족하지 않고 최신 물류시스템과 택배서비스를 접목시켜 전국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비법은 찐빵 하나 하나에 들어있는 심씨의 '정성'이었다.
최근 매출 1조 7천억원이 넘는 대기업 LG의 부회장 권문구씨는 이러한 안흥찐빵론을 직원들에게 강의했다. 작은 장사에서도 대기업이 배울 수 있는 많은 경영 기법이 숨어있다는 얘기다. 권부회장은 안흥찐빵집이 처음 장사를 시작할 때 호떡장사로부터 호떡 만드는 법을 배워 찐빵에 원용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일종의 '벤치마킹'이었다는 것. 그러나 권부회장이 특별히 강조한 것은 역시 '정성'이었다. 세계적인 LG전선에서 아직 불량품이 나오는 것은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결국 안흥찐빵의 '정성'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건강한 삶’의 본보기를 아십니까
의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생물학자이자 예방의학의시조로서 “돈을 잃으면 적게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은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전부
잃어버린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성도들이 주안에서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건강의 비결입니다. 예방의학이란 병들기 전 예방한다는 것입니다. 전염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예방주사를 맞듯이 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동물과 다른 영적 정신적 도덕적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정신의학자 폴 토르니에는 ‘건강을 해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첫째 남을 미워하는 마음과 증오심이 건강을 해치는 원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증오심으로 남을 미워하는 순간 오히려 자신이 큰 타격을 받아 질병에 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범죄하여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라고 말했습니다.‘우리 몸속에는 기본적인 인간의 평화와 반대로 죄성 독성 악성이 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을 미워하는 순간 기본적인 즐거움과 기쁨을 악에게 도둑맞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평화와 기쁨을 도둑맞지 않고 보존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길 외에는 묘약이 없다는 것 입니다. 건강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자 노력하는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최고의 선물인 것입니다.
둘째로 주안에서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은 치료에 있어서 하나님의 동역자로 선택될 뿐이기에 병을 낫기 위해 치료의 본질과 수단을 혼돈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든, 금식을 하든, 병원에 가든,약을 먹든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고쳐주신다는 사실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기에 매사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살 때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으로 건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셋째, 주안에서 아름다운 꿈을 가질 때 건강해집니다. 퇴임을 앞둔 맥아더 장군에게 어느날 한 장교가 찾아와 건강의 비결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는 “사람은 나이가 먹었다는 이유로 늙지 않는다. 사람은 꿈을 포기 했을 때 늙는다.세월은 피부에 주름살을 생기게 하지만 인생에 대한 꿈을 잃어버린 사람은 영혼에 주름살이 생기게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꿈을 갖는 사람은 얼굴에 기쁨이 넘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안에서 미소를 잃지 맙시다. 우리 한번 웃어봅시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주안에서 건강한 삶을 사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디옥교회를 본받읍시다.
성경: 행 11:19-30
요절: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 11: 25-26)

Ⅰ. 모델적인 교회
신약성경에 보면 수많은 교회이름이 나옵니다. 그 많은 교회 이름 가운데 사도행전 11장에 소개되는 안디옥교회는 모든 교회가 본받고 싶어하는 교회중의 하나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책망이없고 칭찬만 있는 교회였습니다.(참고 계2장 -서머나교회, 계3장-빌라델비아 교회) 특별히 이방지역에
세워진 첫교회였지만 열악한 환경을 잘 극복하면서 선교와 구제에 앞장선 교회가 되었습니다. 안디옥교회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멧세지가 무엇입니까?
Ⅱ. 안디옥교회의 특징


1) 아름다운 소문이 난 교회(26절)
안디옥교회 교인들은 숫적으로 미약했지만, 그들의 신앙과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방사람들이 그들의 행위를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챤이란 이름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편지요, 전권대사들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만날 때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살아야합니다. 어떻게하면 아름다운 소문이 나는 교회, 칭찬받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교인 한사람, 한사람이 사회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바로 감당할 때 세상사람들의 입술을 통해서 좋은 소문이 퍼져나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34주년을 맞이하는 성복중앙교회위에 크게 복을 주셔서 안디옥교회처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교회라는 소문이 널리 퍼질수 있기를 바랍니다.
2) 가르침이 넘치는 교회(26절)
안디옥교회를 담임하던 바나바는 다소에 가서 사울을 데리고 와서 교육목회에 전념하였습니다. 둘이서 일년간 교육하는 일에 전념했을 때 교회는 말씀중심으로 견고하게 서기 시작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말씀으로 성장했고, 말씀이 교회를 다스리는 은혜로운 교회가 되었습니다. 안디옥교회의
구성원들이 출신배경도 다르고, 얼굴색깔도 다르고, 사회적 지위도 달랐지만 말씀으로 잘 양육되었을 때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행 13:1)
3) 사랑이 넘치는 교회(29,30절)
안디옥교회는 개척교회였지만 모교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힘을 다해 그들을 돕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흉년이 들어 어려울 때 안디옥교회 성도들은〈각각 그 힘대로〉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안디옥교회는 도움을 받는 교회에서
이제“주는 교회, 베푸는 성도”들이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교회도 더 많이 구제하고 더 많이 선교할 수 있도록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Ⅳ. 적 용 : 나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불신자들로부터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는지 한 번 되돌아 보십시다.
Ⅴ. 합심기도 : 주여! 저의 언행심사를 통해서 매일매일 예수의 향기 들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그 날의 고난 본받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축복과 행복의 개념은 고난과 어려움이 없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축복과 행복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하여 더욱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했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면 아름다운 고난이며 또 죄가 없이 당하는 고난과 선을 행하면서 당하는 고난도 아름답습니다. 지금은 사순 기간입니다. 이때 왜 주님의 고난이 아름다운 고난인가 살펴보는 것은 그 의미가 큽니다.
첫째, 우리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습니다.“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벧전 2:21)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우리 죄를 사해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신 아름다운 고난인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엡 2:3). 왜냐하면 우리는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죄(원죄)를 이어받았고 지금까지 지은 죄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을 영접하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둘째, 각자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도록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고 하시었습니다(벧전 2:21). 주님은 얼마든지 십자가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주님은 천사들을 동원하여 악한 영을 모두 멸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했습니다(마 26:53).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뜻이기에, 성경을 이루시기 위해,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셋째,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해지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입었나니”라고 말씀하셨듯 주님의 고난은 우리들을 복되게 살라고 모든 짊을 대신 짊어지신 아름다운 고난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저주(갈3:13)와 가난(고후8:9)과 질병과 죄짐을 대신 짊어지신 아름다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아름다운 고난을 믿을 뿐 아니라 낙심한 자들과 불신자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고,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도록 본을 보이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으며,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해지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기에 아름다운 고난인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 때문에 구원받고 영생을 얻은 것을 감사하며 더욱 열심으로 주님의 아름다운 고난을 널리 전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믿음의 모본
성경: 엡6:4 * 찬송: 305장, 492장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어느 목사님이 길을 가다가 그 근처에 사는 교인댁 한 곳이 생각났습니다. 그 목사님은 내가 여기까지 왔으니 그 댁을 심방하고 가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예고도 없이 목사님의 방문을 받으니 심방받는 집에서는 반갑게 목사님을 맞이했습니다.
목사님은 자리에 앉아 말했습니다. "생각나는 성경 구절이 있어서 한 말씀드리고 가겠습니다. 성경책을 좀 가져오십시오" 그때에 그 교인은 생각했습니다. '이 기회에 우리 가정이 예수님을 얼마나 잘 믿고 있는지 목사님께 보여 드려야지.' 그래서 아이를 불러 말했습니다. "얘, 너 안방에 가서 엄마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책을 가져다주겠니?" 목사님 들으시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꼬마가 쏜살같이 달려가서 들고 나오는 책은 성경이 아니라 백화점 물품 구입 목록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그 가정의 신앙정도는 그 가정의 어린아이 말과 행동에서 밝혀집니다. 자녀교육의 첫 번째 법칙은 가르치는 교훈이나 개념보다는 본보기에 훨씬 많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됨됨이가 그들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우세합니다. 자녀들은 아주 작은 것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정보원"이라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우리가 실천함으로써 가르쳐야 됩니다.
자녀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원하시면 기도하는 모본을 보이고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순종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싶으시면 부모가 먼저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부모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모습처럼 자녀에게 아름다운 가르침은 없습니다. 따라서 부모로서의 나의 모습이 자녀에게 과연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지 돌아보고 믿음의 모본을 보입시다. 자식은 부모의 행위를 그대로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신6:1-9)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가정이 주님을 섬기며 주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며,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본이 되는 삶
성경: 롬2: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내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지난해는 갖가지 범죄와 사회문제가 발생하면서 유독 자녀에 대한 가정교육이 강조되어 왔습니다. 신앙이 있는 가정이나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모두가 공감하는 얘기였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자녀교육에 전제되어야 할 것은 부모의 본입니다. 학교 담임선생님께 돈봉투를 건네주는 사실을 아무 생각 없이 말하며 선생님을 비웃는 태도를 부모들로부터 보아온 한 학생이 훗날 자신도 모르게 선생님을 무시하는 자세를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선생님을 폭행하기에 이른 것 같다는 충격적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무서운 감시자가 있다면 바로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내를 폭행하는 남편, 남편을 무시하는 아내, 생활습관이 나쁜 부모의 모습은 자녀의 잠재의식 속에 그대로 각인되고 있습니다.
잠언 22장6절의 "가르친다"는 동사는 신생아에게 젖 빠는 방법을 가르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히브리 유모는 아기가 태어난 후에 올리브 기름과 으깬 대추야자 열매를 섞어 손가락으로 아기의 입천장에 발라줌으로써 아기가 젖 빠는 일을 자극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의 어근은 "의욕을 일으킨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올바른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갖게 하는 것은 부모에게 1차적 책임이 있습니다.
나는 자녀들로 하여금 훌륭한 삶의 본을 보이는 부모입니까? 혹은 지도자입니까?

 

믿음의 모본
저는“아이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간첩”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날 귀찮은 손님이찾아와서 “주인 양반 계십니까?”하고 묻습니다. 나는 자연스럽게“아침에 일찍 나가셨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 광경을 아이가 봤습니다. 그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어, 저럴 때 저렇게 거짓말을 하시는구나.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데도 안 계시다고 하는구나. 거짓말을 해도 되는구나.' 그래서 거짓말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전화로 옆집 부인 흉을 봅니다.
“우리 옆집 새댁은 어른을 봐도 인사는 커녕 본 척도 안해요.”
아이가 옆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그 말을 들었습니다.
'아, 전화로는 저렇게 남을 흉보는 것이구나.'
부모의 사소한 행동을 모두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에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려주면 아이는 '아니 어떻게 된 일이지? 아빠, 엄마는 안 그러시면서 흉보는 것이 사랑하는 건가 뭐'라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들이 자녀 앞에서 위선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그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저 아무 소리 안 하고 가만히 있으니까 모른다고 생각되겠지만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아이들은 똑똑합니다. 아주 작은 것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칠 때 첫째는 우리가 실천함으로써 가르쳐야 됩니다. 아이들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원하시면 기도하는 모본을 보이십시오. 아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순종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싶으시면 당신이 먼저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본받을 이교도
 요일 5:6-8; 요 3:16; 행 4:12
  스탠리 존스가 처음 인도에 갔을 때에 그는 인도 사람들이 가지고있는 좋은 점을 발견하려 하지 않았다. 만일 발견하면 복음을 전할 여지가 없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한 가지 불안이 일기 시작했는데, 자기 생각에 무슨 그릇된 점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완전케하러 왔노라."하신 말씀의 뜻을 깨달은 때부터 비로소 마음이 편하게되었다.
 그가 하루는 학생들을 데리고 갠지스 강을 건너게 되었다. 배를 타고 노를 저어갈 때 학생들은 수중에 돌팔매질을 하였다. 그러자 배를 같이탄 늙은 힌두교인은 얼굴을 붉히면서 "그대들은 우리의 어머니인 갠지스강에다 돌을 던지는가? 나는 꽃다발을 던지겠노라." 하며 흐르는 물에다 꽃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때에 존스 선교사는 "나도 꽃을 던지려 하니 내게도 꽃을 좀 주시오. 물론 당신과 같은 정신으로 하는것은 아니고 인도에 대한 나의 경의의 표현으로 꽃을 던지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늙은 힌두교인은 존스 선교사의 말에 만족한 듯이 감사하기를 마지않았다.

 
  게와 숭어의 대한 우화가 있다.
 게에게는 늘 옆으로만 걷는 자식이 있었다.
    하루는 게의 부부가 그의 자식을 위하여 걱정하던 끝에 물고기 숭어네 집으로 아들을 보내서 바로 걷는 교육을 시키도록 결론을 얻고 보냈답니다.   아들 게는 숭어네 집에 가서 오랫동안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아들 게는 똑바로 걸을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교육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러나 웬 일인지 아들 게는 집에 돌아오자 마자 다시 옛날처럼 다시 옆으로 걷는 거예요.게의 부모는 다시 아들 게를 숭어네 집에 보내 교육을 다시 받게 했다.  아들 게는 숭어네 집에 가자마자 다시 정상으로 잘 걷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옆으로 걷는 것이었다.  이에 속이상한 게의 부모가 아들 게에게 야단을 쳤다.  야단을 맞은 아들게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숭어네 부모는 바로 걷는데  엄마 아빠는 옆으로 걸으시니까 나까지 모로 걷게 되쟎아요?" 여러분 !  그렇습니다.  윗 사람들이 본을 보이는 것이 최상의 교육이됩니다.


바울이 보여준 본
  내가 아는 아주 친한 교수님 한분이 20년이나 대학교수 생활을 했다. 철학을 가르치던 분이었는데 믿음도 좋으시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대로는 만족을 하지 못하겠어요. 이제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자가 되어보렵니다."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나는 말렸지만 부득불 그리해야겠다고 하더니 정말로 신학을 공부하고 아주 뒤늦게 목사가 되었다. 그런데 내가 유심히 살펴보니, 목회를 하면서 그 분의 얼굴이 점점 더 작아지는 것이었다. 아주 몸이 약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요즘은 어떠냐, 하며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게 되는데 그 분의 말씀이 이러했다. "교수도 목회자도 어떤 의미에서는 다 가르치는 직업입니다. 둘 다 가르치는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좀 비슷합니다." - 철학을 가르치는 것이나 목회하며 설교를 하는 것이나 뭐 상당히 비슷할 줄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것은, 목회자는 대단히 어려운 직분이라는 거였다. 왜냐하면,
    첫째는, 계속적으로 창작(?)을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대학강의라는 것은 한 학기 강의이니 보통 한 3년에 한 번씩 같은 강의를 하게 된다. 가르치는 대상이 바뀌기 때문에 똑같은 것을 해도 되고, 연구를 해서 조금씩 보충을 하되 새로나온 책을 참고해서 연구하면 되니까 오히려 그런 면에서는 더 쉽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설교는 그렇지 않다. 두번째는, 영력을 지속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이 항상 영적으로 평안해 가지고 있어야 된다. 목회자가 근심에 매였던가 아니면 언짢은 생각이 있으면 안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영적 고민을 해서는 안된다. 항상 기쁜 마음으로 충만해 있어야 목회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전화하지 말라. 그것은 아주 잘못하는 것이다. 괜히 아무 쓸데없는 얘기, 걱정거리를 자꾸 얹어 주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어째든 마음이 평온하고 영이 항상 충만해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 충만을 지속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계속 해야 하는 설교를 위해서 영적 수평을, 평온함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어려운 점이다. 그리고 세번째가 오늘 본문에 관계된 이야기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본을 보여야 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신앙적 모델로, sample로 보여야 되는 것이다. 부득불 그러할 수 밖에 없다. 바울은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 내가 너희를 낳았도다.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나는 너희들에게 아버지이다." - 이런 말을 한다. 부모된 도리에서 어차피 자녀들에게 본을 보여야 된다. 자녀들에게 본을 잘못 보일때에 문제가 되는 것이요, 본 보일 것이 없을 때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교수도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목회자라는 것은 모든 면에 있어서 본을 보여야 된다. 신앙도, 생활도, 정열도, 사랑도, 기도생활도... 나 자신이 먼저 본이 되어야 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내가 믿지 않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내가 행하지 않는 일을 하라고 하기가 어렵다. 내가 먼저 하면서, 내가 먼저 믿으면서, 내가 먼저 확신하면서, 내가 먼저 헌신하면서... 이것을 가르쳐야 하니까 그 점에서 가장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수와 목회자와 다른 점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너희는 나를 따르라"(요14:6)  길이 없으면  진보가 없으며. 진리가 없으면  지식이 있을 수 없고.  생명이 없이는 삶이 있을  수 없느니라. 내가 길이니 너희는   나를 따라야 하고. 내가 곧 진리이니 너희는  나를 믿어야 하며 내가 곧 생명이니  너희는 나를 소망해야 하느니라.  나는 영원히 멸하지 아니할 길이요. 그릇됨이  없는 진리이며. 영원한 생명이니라.
  나는 가장  곧은  길이요. 가장 높은 진리이며. 가장 참된 생명이요 축복받은 생명이며 지음받지 아니한 생명이니라. 너희가 만일  내 길에 머물고자  하면. 너희는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며 (8:31,32) 영원한 생명을  붙들게 될 것이니라. 만일 너희가 영생으로  들어가고자 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마19:17)
  너희가 만일 진리를 알고자  하거든 나를 믿으라.  너희가 만일  완전하기를 바란다면  가서 너희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도록  하라(마19:21)
  너희가 만일 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너희가 만일  복된 삶을 가지려거든 이 현세의 삶을 무시하도록 하라.  너희가 만일 하늘에서 높임을 받고자 한다면  이 세상에서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낮추어야  하느니라(요12:25) 너희가  만일 나와 더불어   다스리는 자가 되려거든  나와  함께 십자가를  짊어지도록 하라(눅14:27) 이는  오직 십자가의  종들만이 축복과 참된 빛의 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니라.

 

너는 나를 본받으라
사도 바울이 그의 편지 가운데 여러 곳에서 '나를 본받으라'하는 말씀을 종종한다. 특별히 빌립보 3장 17절에도 보면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한다. 나를 본 받으라. 나를 닮으라 한다. 해석자에 따라서는 이 말씀을 좀 못 마땅하게 여기는 분도 있다. 해석자에 따라서는 이 말씀을 좀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도 있다. 아무리 바울이 훌륭한 사도라지만 어떻게 감히 자기를 닮으라고 할 수 있느냐 한다... 그러나 사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을 받는 자에게 나를 닮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닮으라고 하든 안하든 닮으니까. 자식이 부모를 닮는데 어쩌겠는가? 자식을 가르치면서 '날 닮지 마라'고 가르치는 부모가 있다면 가정교육 0점이다... 그래서 좀더 나아가서는 나를 닮으라 할 수 있으면 더없이 훌륭한 부모요 스승이요 교수라고 생각을 한다. 참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닮을까봐 걱정이다. 그래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를 닮으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교육자의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그것을 해답하고 있다. 나를 닮으라 할 때에 나처럼 'full time ministry'로, 결혼도 하지 않고 한평생 나그네로 다니면서 복음 전하는 나처럼 살라, 나처럼 순교하라 하는 얘기는 아니다. 그런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본문에 그 해답이 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애쓰는, 수고하고 전심전력하는 바로 그것을 본받으라 하는 말씀이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 그런 것이다. 내가 예수 믿으려고 애쓰는 것, 신앙생활 하려고 애쓰는 것, 그것을 본받으라, 어찌하든지 교회 중심적으로 살려고 애쓰는 것, 그것을 본 받으라 -  얼마나 중요한 얘기인가?
    ...그리고 2절로부터 3절에 보면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준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한다. 이제 바로 본받는 것이다.


 니고데모를 본받아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한  여러가지 소문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으면서  무조건  예수님을 영웅시하거나  아니면  예수님을 이단시 했다.    성도는  어떤 사건이나    사람에  대해서 소문만 믿고  함부로 판단하면 안된다.  남이 좋다 한다고 해서  있는 칭찬 없는 칭찬 다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이  나쁘다고  하니  나도  함부로 남을 폅론하는 자리에 빠져서는 안된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나 보기 전에   단지  소문  만으로   예수님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그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며  그의 가르치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참으로  훌륭한  인격자이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본질도 알지 못한채   기독교를 이단시 하거나  예수를  욕하고   교회를 판단하고 성경을  비판하는  일을 스슴치 않았던 것이다.
  니고데모 처럼  어떤 문제이던지  소문에 의지해서  아는  지식에 만족하지 않고  실제로  그 문제를 깊이 아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어떤  사람을 만나서  오래 사귀어 보지 않고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해서는 안된다.    어떤 일에  직접 땀을 흘리지 않고서  그 일에 대해서   판단해서는  안된다.
야고보 사도는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까닭 하지 않으면서 말 만 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진리를 배울 수 있었다.    예수님을 직접  일 대 일로 만난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욕한 사람이  별로  없다.   우리가  누구라도  진정으로 가까이 해 보면  대개는  사랑할 수  있다.   우리의  삶속에서  진실한 경험은  우리의 삶에 위대한   동기가  된다.   충성한  성도는  충성한  교회를 욕하지 않는다.   진실로 사랑한 성도는 상대가 좀 부족해도 욕하지 않는다.   깊이 기도한 사람은 기도에  열매가 없다해도 기도가 필요 없다고 하지 않는다.  기도 그 자체가 이미  성도에게는 복이기 때문이다. 전도에  힘을  쓴 사람은  전도하려고   하다가 많은 수모를 당한다 할찌라도  전도에  대해서 결코 나쁘게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전도 하다가  많은 고난을 받고  심지어  그  일로   죽었던 사람이면서도   우리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사람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힘써 전도하라고 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예수님께 대한 많은 지식을  가졌었다.니고데모가 얻은 지식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않고는  들을 수 없는   중생의 진리였다. 예수님 만이  이 진리를  선포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복음은  그  자체가  직접  체험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감추인  보화인 것이며   값진  진주 인 것이다.

  니고데모는  어떤 일에 대해서 판단하기 전에  그 일에 대해서  바로  알려고 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였다.  이탈리아의 문호 빠삐나는  원래  무신론자 였다.  교회를 핍박하는 자로써  성경을 반대하기 위해서  성경속에 허위를 파 헤치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했는데  아무리 보아도   성경속에 잘못된 부분이 없고 오히려 자신이  성경의 진리에 사로 잡히게  되어   신앙인이 되고 말았다. 판단하는  사람은  사실과 대항하는  사람이다.  예수님 께서도  너 자신의 눈에 들보가  있음을 먼저 보라고 하셨다.


본받는다는 것
그리고 2절로부터 3절에 보면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준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한다. 이제 바로 본받는 것이다...
    첫째, "나를 기억하고"했다. 사도 바울을 본받는 데 있어서 먼저 바울을 '기억'했다. 바울을 인격적으로 사랑했다. 본받는다는 것은 사랑함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랑하다보면 알게 모르게 닮게 돼 있다(?,어떤 의미에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렇다). 닮으려고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사랑하고 존경하면 꼭 닮게 돼 있다. 사랑을 하면 그가 좋아하는 것 내가 좋아하고 그가 있는 곳에 나도 있고 싶고 - 그렇지 않은가?
    두번째로,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준대로"라 했다. 바울이 일구월심 역점을 두고 총력을 기울이는 것은 복음이다. 바울이 복음 전하려고 그렇게 애쓰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바울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다.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것, 복음, 그것을 너희가 받아서 지키니 내가 너무도 좋다, 한다... 목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전해주는 말씀을 잘 받는 것이다. 그보다 좋은 일이 없다.
    세번째로, 조금 더 신학적이고 깊은 의미의 말씀이 하나 여기 더 있다. 그것이 뭐냐하면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이다. '그 유전' - 이것은 신학적으로 많은 해석을 필요로 하는 말씀이다... 이는... 우리가 복음을 받아 가지고 우리 생활 속에서 소화를 한다. 소화해 나가면서 우리가 또 그 복음에 대한 간증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복음이 내게서 생활화하게 될 때에 여기서 하나의 유전이 생긴다. 전승 - tradition이다. 이것은 하나의 교리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교리가 구성이 된다. 이것은 신앙고백 - 사도신경이 되고 또 무엇을 먹고 안 먹고 하고 안하고 하는 우리 생활 속의 교리가 되어 간다는 것이다. 아직도 교리가 형성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교회생활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들게 여겨지는지 모른다. 그러나 신앙생활이 딱 교리화되고나면 문제될 게 하나도 없다. 또 그게 본인에게만이 아니라 그 자녀도 그렇게 하고 또 그의 친한 친구들도 같은 모양으로 맞물려 돌아간다. 이 전승, 복음으로 인해서 이루어진 유전, 그것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 참 귀한 말씀이다.
    네번째는,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해서 알기를 원한다, 하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