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화

불변에 대한 예화 모음

공 상희 2011. 8. 1. 18:13

불변에 대한 예화 모음

 

불변의 명령


“서로 사랑하라”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 보면 사랑을 5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첫째,관심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만나는 사람 중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이가 있는데 이것이 사랑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존경하는 것이다.

만나는 사람의 위치를 인정하고 높여주는 것이 존경이다.이 존경하는 마음이 사랑이다.
셋째,이해하는 것이다.

이해란 말의 영어의 뜻은 ‘아래에 서다’란 뜻이다.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입장을 낮추고 상대방을 바라볼 때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넷째,책임을 말한다.

사람들은 자기 입장과 권위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매사에 의무보다 권리를 주장한다.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맡겨진 일에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이 책임감이 사랑이다.
다섯째,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을 주고받는다.주는 사람은 사랑을 완전히 알 수 있다.사랑은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그러므로 주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기 직전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고 명령하셨다.


머리 나쁜 죄입니다 :
저와 아내가 사고 있는 1층에는 모두 네 군대의 수도시설이 있는데 수도꼭지는 여덟개나 됩니다. 저희 전용 욕실(안방에 붙어있는 조그만)에는 세면기와 샤워기가 있는데 냉.온수 꼭지가 따로 있지 않고 한 꼭지로 조절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늘 욕실에 들어서면 헷갈리게 됩니다. 같은 회사 제품인데도 한 군데(세면기인지 샤워기인지)는 손잡이를 올리면 물이 나오고, 다른 곳에선 손잡이를 내려야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의 아이.큐로선 이 정도의 상황만으로도 족히 엄청난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조건입니다. 집을 수리해서 입주한지 벌써 8개월째인데 아직까지도 솔직히 세면기가 위로 올리면 물이 나오는지 샤워기가 그런지 외우지 못하고 지금도 열심히 헷갈려서 낑낑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비극은 이런 수도꼭지가 1층에만 여덟개나 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머리가 돌 지경입니다.

그런데 저를 더욱 '환장'하게 만든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어떤 수도 꼭지는 달려있는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따뜻한 물이 나오는데 그 옆에 있는 수도꼭지는 왼쪽으로 돌려야 따뜻한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왜 머리카락이 이렇게 많이 둘러빠졌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이건 약과입니다. 1층 현관쪽에 있는 사무실 화장실인지 어디 다른 곳인지 모르겠는데 아니 거기는 공사하시는 분이 실수로(실수가 아니라 고의라면 이는 필시 저의 정신착란을 노린 사탄의 계략일 것입니다) 냉.온수관을 반대로 수도꼭지에 연결한 탓에 곡 같은 샤워기라도 다른 데는 왼쪽으로 돌려서 내리면 온수가 나오는데 이곳에선 반대로 오른쪽으로 돌려야 온수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샤워기=아래=왼쪽 이라고 반년동안이나
겨우 외운 공식도 아무 쓸모가 없게 됩니다. 오 주님!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까?

저는 외우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렇찮아도 머리가 나빠서 고생이 심한데 화장실에 들어가 손 하나 씻으면서도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다니! 닥치는 대로 아무렇게나 눌러 보고 돌려보다가 물이 나오면 그걸로 감사해야지 그렇지 않고 일일이 외워서 하려했다간 일주일도 못되어 정신분열증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샤워라도 하려고 따뜻한 물이 나오게 하려면 아마 저는 두통약을 스무개는 먹고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오! 그때가 좋았습니다. 찬미 사무실 한쪽 방을 꾸며 신혼생활을 하던 그때 말입니다. 그땐 그저 수도꼭지를 틀면 차가운 물이고, 큰 양동이에 그걸 받아서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데우면 그게 온수였습니다. 그땐 적어도 수도꼭지 때문에 두통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편리하게 만든다고 연구해 놓은 쇳조각들이 왜 도리어 저로 '환장'이니, '정신분열'이니, '머리가 돌 지경'이라느니 하는 용어를 쓰게끔 만드는 것입니까?
제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오늘, 이 문제 때문에 수박밭에 앉아 곰곰히 묵상해 본 결과 두가지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첫째는, 수도꼭지로 인한 이 모든 [고난]은 제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지 수도꼭지는 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예수마을에 십여명이 살지만 수도꼭지 때문에 '환장'하는 사람은 최용덕이밖에 없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다들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더우기 같은 1층에 사는 아내조차도 말입니다.
우리의 생애에 일어나는 많은 '고난' 가운데 대부분은 사실 우리 자신이 잘못해서 자초한 것들이라는 점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공부를 안해서 낙제를 해놓고 하나님께 원망을 하는 건 당치도 않습니다.
최고 제한속도가 시속 100Km인 고속도로에서 시속 120, 130Km로 달리다가 차가 뒤집어졌는데 중환자실에 누워 '오, 하나님.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억울합니다'라고 끅끅대는 건 한대 더 맞을 짓입니다. 방만하고 무계획적인 경영으로 부도를 맞아 사업이 망했다면 그건 우리 책임이지 하나님 책임이 아닙니다. 온갖 부정직하고 약삭빠른 세상적 방법으로 사업을 해 놓고는 쫄딱 망한 이후 '하나님께서 내 사업을 막으셨다. 신학교에 가라고!' 한다면 그건 코메디입니다. 길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자빠져서 뒤통수가 깨진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 탄식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길을 잘 살피지 않고 간 탓밖에 다른이유가 없습니다.

가족들 식사도 챙겨주지 않고 교회일이라며 돌아도니다가 남편에게 얻어 터져 눈두덩이가 앞산만해 진 걸 가지고 신앙적 핍박이니 순교니 사탄의 방해니 하는 것도 옳은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매사를 주님의 뜻과 연결시키는 태도는 좋은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에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가 무의미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어떤 쪽으로 하나님의 뜻을 적용시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길을 정신없이 뛰어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자빠져서 코가 깨졌을 때, 우리는 쌍심지를 돋구고 "하나님! 제 발앞에 왜 돌이 있게 하셔서 저를 이렇게 고생시키십니까?"하고 원망하는 것으로 [시비거시는 하나님]의 심술로 그 뜻을 해석할 수도 있고, 그와는 달리 "아이고 주님! 제게 멀쩡한 눈과 충분한 판단력과 육체적인 기능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조심하지 않아서 이렇게 주님께서 허락하신 귀한 몸을 상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며 주님의 뜻을 생각하는 길도 있습니다.

잘못은 우리가 해 놓고, 그리고 정작 손해보신 이는 하나님이신데, 우리는 뻑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이렇게 해서 내가 이와같은 시련을 겪고 있다. 오... 그렇지만 억지로라도 감사해야지. 하나님께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으니까"라며 간증하고 떠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대단한 아량을 보이는 셈이 됩니다. "이번엔 제가 하나님 봐 드리지요"하는 꼴 아닌가요?

대학 4학년 2학기 때 공부는 안하고 [크리스챤 문화공간]을 운영한다며 친구와 함께 방세 다 뽑아서, 게다가 힘에 겹게 빌려서 대학교 앞에 50평짜리 홀을 꾸며 놓고는 발버둥치다가 저희는 쫄딱 망했습니다. 돈 다 날리고 졸지에 우스겟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때는 100일 작정 회개기도를 해야합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잘못했다고, 분수에 넘치는 무모한 계획과 운영으로 오히려 주님 마음 아프게 해 드리고 주님 이름 욕되게 했다고, 살려 달라고 주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희는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바보들 같으니라구는!) 어느 한 형제가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주님께서 전기대 입시에 낙방케 하셨습니다. 주님의 특별하신 뜻이 있는가 봅니다. 왜 저를 떨어지게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주일 성수도 잘하고 기도도 많이 했는데 막상 대학에 떨어지고 보니 너무 억울하고... 하나님이 밉기도 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녔는데 그만 대학입시에 떨어졌기 때문에 교회다니는 걸 때려 치웠다는 사람들을 보면 참 답답합니다. 그걸 가지고 주님께 대한 신앙까지 들먹이는 걸 보면 "아이고 이 사람아!" 싶을 때도 있습니다.
대학입시에 떨어진 것에 대한 주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하나는, 성적이 합격선에 못 미쳤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그만큼 안했든지, 저처럼 머리가 안 돌아가든지 말입니다. 성적이 안 되어서 대학에 떨어진 것이지 주님께서 답안지를 조작하신 게 아닙니다. 공부를 안해서 성적이 잘 안 나왔든, 머리가 안 돌아가서 죽도록 했는데도 성적이 잘 안 나왔든 어쨌든 말입니다. 그걸 가지고 왜 하나님께 시비거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건 순전히 [우리]선에서 책임져야 할 문제입니다. 오히려 우리 능력은 학력고사 220점 수준인데 실제 학력고사에서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290점을 얻게 되었다면
그건 '감사헌금'대상 1순위 제목이 아니라 무서워서 벌벌 떨어야 할 일이거나 하나님께 '항의'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뜻이 있는데 그것은 대학 학력고사 성적은 그 사람의 능력과 노력만큼 나온다는 것입니다.
백일 작정 새벽기도까지 했는데 자기 아들이 대학에 떨어졌다고 예수욕을 고래고래 내지르며 돌아다니는 엉터리 기독교인들을 봅니다. 그런 신앙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모욕입니다. 흔히 입시철이 되면 교회마다 '입시생을 위한 OO일 특별 기도회'를 여는데 평소보다 몇 배는 되는 학부모 교인들이 나온다고 합니다. 만약 그 기도회에 나와서 "우리 동팔이 대학에 꼭 붙게 해 주시고, 우리 춘심이 고등학교에 꼭 붙게 해 주십시오. 비나이다.
비나이다"라는 기도를 날이면 날마다 하고 있다면 그건 하나님을 3류 잡신으로 대접하는 꼴입니다. 우리 자녀들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겨우 대학입시합격 여부 하나로 평가하고 신앙한단 말입니까? 이럴 땐 그저 하나님은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우리를 애처롭게 바라보시며 침묵하실 수 밖에 없으신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3학년때에도 주일 예배와 성가대만큼은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떤 이들은(교회 장로님들도 계셨는데) "야 이놈아! 고3이 집에서 공부나 하지 왜 교회에 얼쩡거리냐?"고 책망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에 대한 신앙을 내팽개쳐 가면서까지 학력고사(당시는 예비고사) 점수를 한 두점 더 얻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공부 한답시고 교회 주일예배에 한 두번 빠지다 보면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급격하게 쇠락해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흔희 "이번 1년만 교회를 쉬고 대학들어가서..."하는 고3치고 나중에 대학생이 된 후 제대로 주님을 섬기며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이들이 무척 드문 것은 이미 그 1년동안 그들의 영적인 건강이 중환자실에까지 갔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무서울 정도로 지키고(이 말이 무엇을 뜻하지요?) 성가대까지 해도 평소의 모의고사 점수는 그런대로 잘 나온 셈이었고 그 정도면 국립 B대학 건축과는 합격할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실제로 치른 학력고사(당시 예비고사) 점수는 평소보다 20여점이나 깍여 버렸습니다. 덕분에 저는 2류인지 3류인지 어쨌든 지방 Y대학 건축과를 지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눈꼽만치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었습니다. 원망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평소 실력만큼도 점수가 안 나온건 제가 시험을 잘 못치룬 때문이지 하나님의 '장난'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가 주일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성가대까지 한 건 주님께 대한 사랑과 제 자신의 영적 건강을 유지 위하여 때문이었지 나중 학력고사에서 하나님의 비상한 간섭으로 플러스 알파의 점수를 더 얻기 위함이거나, 제가 주의 일에 대해 헌신한 댓가로 일류대학 입학 합격장을 받아 내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나타난 결과에 대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원망을 한단 말입니까?
제가 깨달은 두번째 사실은, 이렇게 한심한 사람까지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며, 또 적절하게 쓰신다는 것입니다.

수도꼭지때문에 머리카락 다 둘러 빠진다는 저의 고백을 듣고 적어도 70%의 사람들은 "아이고 이 인간아! 인간아! 왜 사니?"라며 저를 측은히 여기셨을 것입니다. 참 제가 생각해도 한심한 제 자신입니다.
그뿐입니까? 저의 머리가 상당히 돌이라는 사실 외에도 저는 정말 '심각한' 건망증 환자입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제가 스스로에게 붙인 별명이 [금붕어]입니다. 왜 하필 금붕어냐구요? 그건 금붕어의 기억력 유지시간이 0.2초밖에 되지 않는다는 '과학적 근거'에 의해서 말입니다.
책상에 앉아 있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일어나 방문을 나섰는데 주방까지 와서는 "내가 왜 여기 왔지?"하는 정도는 늘 있는 일입니다. 아내나 삼도봉 예수마을 식구들, 찬미식구들은 이미 저의 기억력에 대해 포기한지가 오래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렸던가요? 하도 잘 잊어 먹어서 꼬박꼬박 수첩에 메모를 해 두었는데 문제는 그 수첩을 갖고 다니는걸 영낙없이 잊어 먹는다든가, 아니면 수첩이 옆에 있어도 그 메모를 보는 일 자체를 까마득히 잊어 버린다는 '전설' 말입니다.

기껏 한 두번 밖에 만난 적이나 전화통화를 나눈 적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저에게 "아...저.. 누구누구입니다. 왜 그때 거기서 뵈었지요?"하고 정색을 하고 반갑다고 손을 내미시는 분들은 저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 분들입니다. 설령 제가 "아 예예! 아- 이거 반갑습니다!"하고 반가와하는 척 하더라도 그 대부분은 상대방이 상처입을까봐 하는 저의 '쇼'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이런 멍텅구리 기억력은 대인관계, 사회생활에서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아!- 슬픈 이야기입니다. 최용덕이란 사람은 동정을 충분히 받을 만한 사람 아닙니까?
그러나, 이런 사람도 하나님께는 [금이야 옥이야]라는 사실을 또한 아십니까? 여전히 저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여전히 저는 하늘나라를 이룰 백성이며, 여전히 저는 주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받으며 사는 주님의 소유입니다. 제가 아무리 멍청하고 똥고집이고 한심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보다 더욱 확실하고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이런 저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며,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하셨다는 점입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영원히 나와 함게 하겠다고 하셨는데 제가 무엇때문에 기가 죽는단 말입니까? 오히려 배짱을 튕기며 히히덕거리며 살 만 하지 않습니까? 까짓거, 수도꼭지... 그런거 때문에 제가 혀를 빼물고 삶의 회의를 느낀다는 게 말이 됩니까?

오늘 하루 동안에도 제 자신의 '한심한 꼬락서니'를 백가지는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를 기대하시며 오늘도 주님 섬기는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살려 두시는데 제가 왜 죽는단 말입니까? 오히려 열심히 살겠습니다. 열심히 말입니다.

사실은 얼마전, 아침에 안방 화장실에 들어섰다가 이마를 윗 문턱에 힘껏 들이 받았는데 손을 씻고 돌아서서 나오다가 더블로 또 다시 이마를 들이 받았습니다. 저녁에 머리 감으러 들어 가다가 또 다시 이마를 들이 받고 뒤로 나자빠졌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날 뇌세포가 400개는 죽는 바람에 머리가 더 돌이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이큐가 80은 넘을 겁니다. 기억력 유지시간이 0.2초인 금붕어도 열심히 사는데 제가 열심히 못 살 이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하루에 세번씩이나 이마를 문턱에 들이 받던 날 밤... 솔직히 '아파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눈을 뜨니 제가 여전히 살아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할렐루야!
또 다시 '하루'의 삶의 기회를 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거듭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열심히 주어진 생애를 살겠다는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아내가 들어와 "여보! 전번에 김천나갔을 때 예수마을 물건사면서 제 지갑에서 빌려갔잖아요. 2만원! 주세요"라며 천연덕스럽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래? 그랬어? 그럼 줘야지"하며 일어나 은경이한테 돈타러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저의 뒤에서 끌어 안으며 깔깔댔습니다.
"아 아녜요. 거짓말예요. 아유 재밌어! 아니, 정말 그렇게도 모르시겠어요?
그렇게도 생각이 안 나신단 말예요? 신기해!" "....."
그렇게 상대방에서 진지하게 나오면 백이면 백 속을 수 밖에 없는게 저의 한계입니다. 그래도 저는 이런 멍청한 제 자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때문에. †

* 물론 때로 주님께선 우리의 삶에 급격한 전환점을 만드시기 위해 상식과 일반적인 법칙을 뛰어넘어 개입하시기도 한다는 점을 덧붙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허락하시는 고난과 어려움, 실패도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때문에 크리스챤에겐 의미없는 실패, 의미없는 고난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자초한 고난이라면 우리 자신을 겸허하게 만드는 보약일 것이요,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주어지는 고난이라면 우리를 성숙되게 인도하는 멋진 훈련과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바탕은 불변

   제 2차대전 얼마의 이야기다.
배우인 루시앙 귀뜨리에게는 고무 공업을 하는 친구하나가 있었다.
막대한 재산을 모은 그 친구는 부자가 되자마자 남들이 하는 것처럼 자기도 곧 백작의 작위를 한 자리 샀다.
이 소식을 들은 귀뜨리는 그 말을 전해준 사람에게 물었다.
 "얼마나 지불했을까?"
 "4만 프랑이라네."
 "흐음, 끔찍이도 비싸군."
 "뭘 그 정도의 액수로서는 그 자의 호주머니는 끄떡도 하지 않을 걸세"
 "하기야 그렇지.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갑자기 백작다워 보이지는 않을 거 아니야?"


불변의 가치
 신앙을 갖고 내일을 소망하는 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진다.언제나 새롭게 하시는 주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이것이 신앙의 위대한 힘이다.미국의출판인이며
정치가,과학자,저술가로 명성을 떨친 벤저민 프랭클린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책이 낡아 그 표지가 찢어지고 금박이 떨어지고 벌레가 갉아먹어 보기에 흉하게 될 지라도 훌륭한 책의 가치는 소실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좋은 책은 그 출판사에 의해 아름답게 재판되기 때문이다』


불변의 신앙과 승리

 구세군 창설자 윌리엄 부쓰 대장이 시카고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하나님의 선하심만 믿고 그를 의지하라고 설교를 하는데 한 노동자가 앞으로 나오더니 "여보시요, 부쓰 목사, 그리스도가 당신에게 가장 소중하며 당신을 도와 준다고 이야기하나 만일 당신의 아내가 죽고 어린것들은 엄마를 못잊어 마구 울어댄다고 해도 지금 하신말씀을 할 수 있단말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후 부쓰 대장의 아내가 열차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그녀의 시신이 구세군 교회로 운구되어 장례를 치뤘다. 다시 집회를 인도하는 자리에서 "얼마 전 바로 여기에서 집회를 가질때 어느 분이 아내를 잃고 애들이 울어대는 데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그를 의지할 수 있느냐고 하셨는데, 그분이 여기에 계시다면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은 지금 갈기 갈기 찢어진 상태이나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의지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 마음에 새로운 노래를 담아
주셨습니다. 내 그릇에 주신 거죠..."라고 하였다. 그 사람은 거기에 참석해있었다. 앞으로 걸어나온 그는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그렇게 도와주시는데왜 의지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는 것이었다. 역경중에 승리하는 모습은많은 사람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어 승리하게 한다.


불변의 진리
  이태리의 천문학자요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었던 갈릴레이 갈릴레오가"지구는 둥글고 태양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선포함으로인해 17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교회는 그를 이단자를 탄핵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그가 가르치는 특권을 빼앗긴 후에그의 주장을철회했다고 하지만 그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렸다는 것이다. 비엔나의 대주교 쾨니히 추기경은 지금이라도 갈릴레오에게 내
려졌던 정죄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세기에 와서야 로마 카톨릭교회가 그에게 내려진 정죄를 철회했다. 물은 가장 낮은 곳을 따라 흘러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듯 진리는 공감하는 인간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흘러 그것이 진리임이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있다. 원수들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흐르지 못하게 막으려 했으나 20세기의 강을 흐르고 있다.


   어떠한 처지에 있어도

 우리가 어떠한 사정에 처하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에는 변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활동하는데 정신적인 압박이나 제한을 받을런지는 몰라도, 하나님은 이 불리한 여건들을 유리하게 바꾸어 놓는 비결을 가지고 계십니다.
 봉사하는데 있어서 주님의 기준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자원하는 것을 귀하게 보십니다.
 오그스 버거씨가 쓴 [용서로부터 오는 해방감]이라는 책에 윌리암 뿌스 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뿌스 씨는 장님이었고, 구세군의 창시자(1878년)였습니다.
 이 분의 아들 브람웰은 어느날 늙으신 그의 아버지가 실명할 것이라는 사실을 힘들게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실명한다고?"하고 그 장군은 반문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더군요"하고 아들이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다시는 너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된다고?  아마,  이 세상에 살 동안에는 보지 못하겠지? 브람웰아, 나는 내  눈으로 이 때까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일해 왔구나.  이제부터는 장님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할 것이란다"하고 뿌스 장군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쓴 오늘의 성경 말씀은 "건강하고 튼튼한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실은 바울 사도도 그의 육체에 가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고후2:7).
 사실은 "자주나는 병"을 가진 디모데에게(딤전5:23)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딤후2:1)하고 바울  사도는 격려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우리들의 처지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든지 관계없이,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려야만 합니다. 
 뿌스 장군과 바울 사도가 보여준 자발적인 행동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활속에서 자발적인 행동을 자주 발견하십니까?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영원히 변치 않는 것
    영원히 변치 않는 것
    1. 자연법칙은 변하지 않았다.
    2. 하나님의 법은 변하지 않았다.
        1)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거룩함은 변하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의 말씀입니다.
    3. 도덕적인 법도 변하지 않습니다.
    4. 구원의 길은 변하지 않습니다.


불변의 사랑
 찰스 스펄전은 어느날 농장 건물의 지붕 위에 달린 바람개비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라는 구절이 쓰여 있는 것을 보고 그 주인인 농부에게 물었다.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이 저 바람개비처럼 변하는 것이라고생각합니까?"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께서는 핵심을 놓치셨습니다 그려.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불거나 상관없이 하나님은 조용한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게 바람개비 위에 적혀 있는 것입니다" 농부의 말속에는 많
은 진리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영원하므로 사랑은 영원하다고 알고있다. 하나님은 절대 변하시지 않기 때문에 사랑도 절대 안 변한다. 사랑은 하나님의 품성에 뿌리박고 그 위에 세워진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을 알 때에만 사랑을 알 수 있고 하나님과 계속적인 관계를 맺을 때에만 사랑 받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