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화

부흥에 대한 예화모음

공 상희 2011. 8. 1. 17:38

부흥에 대한 예화모음

 〈성구와 금언〉

  ★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가 사방에서 와서 이 사망을 당하는 자에게 붙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겔 37 : 9, 10).
  ★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수년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내에 나타내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소서(합 3 : 2).
  ★ 부흥회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적인 새생활로 인도하는 각성을 말한다(모이서 박사).
  ★ 하나님의 자녀가 성령의 인도하에 마음을 합하여 특별한 은혜받기를 기대하는 일이라고 했다(곽 안련 박사).
  ★ 부흥회란 선택받은 성도가 일정한 기간에 일정한 장소에 모여 영적 훈련받는 것이며 다른 말로 비유한다면 영적으로 보약 먹는 기간이다(김 진환 목사).

 〈실 화〉

  ★ 1907년 한국 전력을 강타한 성령의 역사와 그의 결과 놀라운 부흥에 대하여 저는 겸손하게 여기게 적어 본다.  인도, 일본, 중국 등지에서 선교하신 선교사들이 평양에 돌아와서 그들의 선교지에서 성령의 역사와 불신자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에 대하여 간증을 하였다.  이 간증을 들은 하디 목사 스월튼 목사 뉴욕에서 온 죤스톤 목사 그와 한국 전역에서 선교하신 선교사 약 20명이 겸비한 마음으로 감리교와 장로교 그 외 선교사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한국 교회 부흥을 위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때까지 정오에 기도회 시간을 가지자고 결의 했다.
  선교사들은 열심히 한 달 동안 기도를 계속했으나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고 부흥에 대하여 희망이 보이지를 않았다.  그래서 선교사 한 형제가 일어나서 우리들이 이와 같이 바쁜 때에 전도 하지 않고 기도만 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역설하고 선교 방법을 시정하자고 제안했다.  우리들이 한 달 동안 기도해 보았으나 별 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많은 시간만 허비 했다.  〈앞으로 기도를 계속하는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 합니다〉고 제안을 그럴 듯 하게 들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지방에 허락하신 부흥을 평양에도 주실줄 믿으면서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기도시간을 중단할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기도를 하자고 결정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기도회 시간을 정오에서 하오 4시로 변경했다.  그리고 나서 저녁 식사 때까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기도를 계속 했던 것이다.  그들은 기도하는 일에마나 중점을 두고 간혹 격려될 만한 것을 어떤 사람이 말하고자 한다면 여러 사람들이 기도를 계속하는 중에 흡수 되어졌다.  그들은 4개월 동안이나 기도를 계속했다.  감리교 선교사 장로교 선교사라는 교파 관념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하나라는 생각 뿐이었다.  그들은 연합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중에 여러 가지 역사가 일어 났다.
  그 무렵에 스월른 목사님과 불레이어 목사님과 함께 시찰 구역내에 있는 시골 교회 한 곳을 방문했다.
  각 교회에 가서 의례적인 방법으로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그때부터 한국교회 부흥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스월른 목사님은 말하기를 그러한 기현상은 일찍이 본 일은 없노라고 말하면서 그 청중을 휩쓸고 있는 강력한 역사를 억제해 보려고 찬송가를 선택 하여 불렀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스월른 목사님 강단을 사회자에게 맡기고 뒤로 물러 앉았으나 회개를 계속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07년 북한 전역에서 약 700명의 열렬한 기독교인들이 평양에 모여서 수양회를 자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모임에 별로 성령의 역사는 일어나지를 않았다.  그 집회는 별로 의미 없이 한 주간이 지나가고 마지막 날인 정월 8일은 주일날이었다.  그런데 주일 낮 예배에도 별로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없었다.  주일낮 밤에는 장대현교회에서 약 1500명 신도로 운집하여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그 예배에도 놋으로 천정을 덮인 듯 기도가 상달 되지도 않고 딱딱했다.
  그 집회는 다음날 아침에는 각각 흩어져 소속된 자기교회로 돌아갈 날이었다.  이때 그 교회 유력한 장로였던 길 선주씨가 일어 났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얼굴은 침통한 표정이었다.  "여러분 저는 아간입니다.  난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수도 없었고 성령의 역사도 없었습니다.
저는 약 1년 전에 내 친구 중 한 사람이 임종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 말하기를 '길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났지만 내 집 살림을 돌아봐 주시오.  내 아내는 무능하니까 말일세'하고 부탁 했습니다.  내가 잘 돌아보아 줄것이니 염려 말라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 하면서 미화 100불 상당의 금액을 나는 사취했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 해온 아간입니다.
  내일 아침 그 돈 전액을 그 미망인에게로 돌려 드리겠습니다."  이때 그렇게 무겁게 짓누르던 방해의 장벽은 별안간 무너져 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재하는 것 같았다.  그 죄책감이 청중을 휩쓸고 말았다.  그 주일날 밤에는 7시에 시작 했는데 다음날 새벽 2시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그 동안 수다한 교인들이 일어서서 울면서 자기 죄를 고백했기 때문이다.
  그 일 후부터 날마다 연이어 신도들이 모여 들었으며 정결케 하는 영이 언제나 그 성전에 계시다는 일이 분명했다.  인간들이 무엇이라고 악평 하더라도 이 자백들은 인간의 힘에서 지배되는 것이 아니었다.  마귀의 소행이냐 그렇지 않으면 성신께서 역사해 주심이냐 양단간에 하나임이 틀림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죄를 자백 시킨 것이 마귀의 역사였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숨겨진 죄가 있는 동안에는 전능하신 하나님도 방해를 받으셨으며 죄가 자백 되어지자 즉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으며 놀라운 부흥을 주셨다.

  부흥을 주셨던 실질적인 이야기들
 
  ★ 어떤 의사집에서 요리사로 일을 하고 있는 분은 이렇게 고백을 했다.  "지금까지 나는 주인을 속여 왔다.  내집도 내 토지도 주인을 속여서 장만한 것입니다." 하고 곧 가산을 정리하여 주인에게 보상을 하였다.

  ★ 어떤 교사의 고백이다.  이 교사는 선교회에서 선교회를 위해서 약간의 땅을 구입하도록 위탁을 받았었는데 이 교사는 대지를 80불을 주고 샀는데 500불을 주었다고 속여 420불을 사취했었다.  그는 그 부흥회 때에 죄책감에 눌려 울면서 고백을 하고 곧 420불을 선교부에 보상을 했다.

  ★ 종군기자 맥켄지씨에게 고용인 소년이 있었다.  이 소년이 4불 미만의 금전을 주인을 속인 일이 있었다.  그가 죄책감을 받게 되자 18마일이나 되는 길을 걸어와서 어떤 선교사를 찾아가 그 돈을 맡기면서 맥켄지씨에게 전달해 달라고 4불을 주었다.  4불을 받아든 선교사는 너무 너무 감격하여 눈시울이 뜨거웠다.

  ★ 평북 의주에 사는 한 멋진 사나이가 그 처자들을 두고 다른 도시에 가서 부자가 되었다.  거기서 다른 여자를 사귀면서 두 딸을 낳았다.  그가 성령의 능력을 받아 너무 죄책감을 억제할 수 없어 둘째 부인과 두 딸의 부양비를 주기로 하고 의주 고향으로 돌아가 본 부인과 다시 화합하게 되었다.
이혼이 성행하는 이때에 이 말을 들은 선교사들에게는 더욱 놀라움을 주었다.

  ★ 어느 날 공예배 석상에서 어떤 부인 한 사람이 일어나서 자기는 음행 죄를 범했다고 자백했다.  사회하던 목사님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유는 그의 남편이 그 예배에 참석하였음을 알았으며 그의 남편이 그의 여인을 죽이면 큰 시험이 올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남편도 눈물을 흘리면서 범죄한 부인 옆으로 가더니 무릎을 꿇고 기도하더니 그 부인의 손을 잡고 자기가 그 부인을 사랑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용서를 해주었다.  이렇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자 각 교회에서는 초만원을 이루었으니 조롱하러 왔던 사람들도 두려움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다.

  ★ 강도단 두목 한 사람이 빈둥거리는 태도로 호기심을 갖고 집회에 나왔다가 죄책감에 눌려 회개했으며 곧장 경찰서로 달려가서 "나는 강도입니다.  저는 도적입니다."라고 자백을 하였던 청년을 보고 있던 경찰관들이 놀라면서 "너는 고발하는 자가 없고 네가 네 자신을 고발하는구나.  한국의 법률로써는 네 사건을 처리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를 돌려 보냈다.

  ★ 1907년 부흥 당시에 일본인 관리 한 사람이 평양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는 서구의 불가지론 사상을 흡수했던 사람인고로 영적인 일들을 경멸하였다.  수다한 한국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언어가 잘 소통되지 않는 몇몇 일본 사람들에게까지도 이상스러울 정도로 계속해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이해 할 수 없는 그 사실을 너무도 당황하여 실태를 조사해 보려고 그 집회에 참석 했다가 드디어 그의 불신앙적 태도가 사라지고 그도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그가 일본인들에게 전도하여 많은 일본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그 상황을 스월른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5, 6개월 동안 기도했던 일은 보람있는 일이었다.  성령께서 임하시니 우리 선교사들이 반년동안 해온 일보다 더 큰 일을 반일(半日) 동안에 완성해 주셨다고 했다.  두 달이 채 못 되었는데 2,000명 이상의 죄인들이 회심하고 돌아 왔다.
  1907년 중간 무렵까지 30,000명의 죄인들이 돌아 왔으며 그 당시 평양 시내 교회가 4,5개 뿐이었는데 우후 죽순같이 일어나게 되었다.
  장대현 교회는 2,000명의 의자가 있는데 3,000명으로 증가 되었으니 수용할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2부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며 그해 10월에는 4,000명의 신도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1910년 경에는 13,000명이나 신도수가 증가되었다고 한다.  이는 오직 반년 동안 교파를 초월하여 합심하여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오, 주여 1907년도 한국교회 부흥을 다시 한번 이 강산에 부어 주셔서 이 강산을 성령으로 태우소서.  할렐루야(성령의 불길이란 책 참조).

  ★ 개성시의 부흥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개성은 고려시대의 도습지였다. 
  1907년 부흥회를 통하여 개성 천지에도 이 성령의 도회선이 붙어 계속 부흥이 일어났는데 1907년데에는 500명이 남직 하였으나 1910년에 시내에서 한 달 동안 특별성회를 열었는데 무려 2,500명이 회집하는 것을 보아서 개성시내에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서울의 부흥
  지금은 세계 예루살렘이라고 칭찬을 들은 바대로 서울은 지금 교회 천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부흥을 가져 왔는데 이 부흥은 1907년 한국을 강타한 성령의 역사의 영향이 컸다고 본다.  어느 선교서가 말하기를 1907년 당시 6주간을 전도 여행을 하던 중 서울에서 500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700명에게 학습을 세웠으며 시찰 구역내의 5개 교회가 일년만에 12개 교회로 증가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1910년 서울에서 결심서를 제출한 사람이 13,000명이었으며 서울시내 감리교회에서는 3,000명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입교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 서울에서 서해안 쪽으로 인천 제물포지역에서도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곳 감리교 선교회에서는 1908년 800명 신도를 가진 하나의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907년 경에는 그때 인천 인구 17,000명 밖에 안되었는데 그 인구 중 세례 교인이 무려 4,247명이 있었고 그때 인천 인구 반이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교인들은 인천시 전체가 예수께로 돌아 오기를 기도 했다고 한다.  얼마나 큰 부흥인가?

  ★ 우리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대구 시내의 부흥상을 살펴 보겠다.
  아담스 선교사의 보고에 의하면 대구 시내에서 10일 동안 기도회를 갖도록 교우들이 제안하였는데 기도회 제 7일째 되는 날에 성신께서 홍수처럼 임하사 그들을 부흥시켜 주셨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교회 자리는 비좁아지고 그 지역 일대의 교회들은 우후 죽순과 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1905년에는 회심자 1,976명을 1906년에는 3,867명을 1907년에는 6,114명을 얻었다는 것이다.
  아담스 선교사는 그때 가보지 못하였던 지역에서도 계속하여 교회들이 부흥되고 결심자가 생기게 되었다고 하였다.  대구시에서 복음을 들은 어떤 사람은 성경 한 권을 구해가지고 고향 마을로 돌아가서 이웃 사람에게 읽어 주는 중 50명의 신도를 얻게 되었다.

   ★ 평양 북부 지방 선천의 부흥
  선천은 평양 북부 철도연선에 위치하고 있다.  그 지방에 선교사가 배치된 지 겨우 8년 밖에 안되는 어린 기독교 도시인만치 많은 기독교인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실제로 선교사들이 방문했을 때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그러니까 1907년도 무려 기독교인들이 15,348명이나 되는 신도가 선천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선천 중앙교회는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가 있었다.  1907년 1년 동안에 중앙교회는 시골 교회 다섯이나 개척교회를 세우는 선교에 불이 붙기도 하였음을 입증하였다.  1916년 동해안으로부터 온 선교사 푸트 목사는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였다.  인구 3,000명 밖에 살지 않은 적은 촌락에 위치한 제일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했을 때 무려 2,500명이나 운집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적은 도시의 인구 전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다.

  ★ 용천군의 부흥
  요나단 고우포스씨가 약도를 가지고 압록강 하류에 위치한 용천을 갔을 때에 교회 간판이 붙여져 있는데 복판에 350명 교회를 표시했고 거기서 북방 1마일 미만의 지점에 250명 교회를 동북방 5마일 지점에 400명 교회를 동방 2마일 미만 지점에는 750명 교회를 표시하는 등 용천군 내에는 자립교회가 14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휘트모어 목사님의 보고에 의하면 용천군 북쪽 지방에는 5,000명 이상의 신도가 있으며 그 지방에는 자립교회가 35개 교회가 있다고 말하면서 400명 회집하던 교회가 다음해에는 3,000명으로 격증 한 교회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1884년에 선교사업이 시작된 이래 밤이나 낮이나 매 45분마다 한사람씩 교회에 입교하게 된 셈이라고 한다.

   ★ 숭실 학교의 부흥
  평양에 세워진 고등학교(숭실학교)를 선교사님들이 운영하였는데 그 학교에서도 성령님의 놀라우신 역사로 불티같이 부흥하였다고 한다.  1907년 2월 개학하는 월요일 아침 담당 선교사 두 사람은 일찍이 교장실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성령님께서 개학 초부터 주장해 주시기를 기원했다.  성령께서 주장해 주시지 않으면 그 학교는 한국 땅에 위협을 주는 교양 있는 불량배를 양성하는 기관에 지나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기독교 국가에 사는 우리들은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성령께서 주장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점에서 부족하다.  어떤 학교에서는 지나친 불신앙이 교육되어지고 있었다.  우리 숭실학교는 그런 학교가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 그들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간절히 기도한 후에 개학일 월요일 9시가 되기 전에 성령께서 그 남학생들을 죄책감으로 강타하게 되었다.  윗층이나 아래층에서 죄를 애통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조금 후에는 교장실까지 애통하는 남하가생들로 꽉차게 되었다.  그날 학교는 개학할 수가 없었으며 그 이튿날도 그러했고 금요일 역시 개학할 수가 없었다.  금요일 저녁까지 통곡하는 소리가 초상집 같은 형상이었다.  숭실학교 소학생들도 기도의 영이 너무 강하였던 탓으로 한동안 그 학교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어린이들이 성경책을 읽을 때 그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으며 한국 기독인들이 선교사들보다 기도하는 점에서 훨씬 앞서 있다는 것을 선교사님도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때 신기한 것은 12명 감리교 학생들이 목사님들에게 찾아와서 고백하기를 우리 감리교회가 부흥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리교회 목사님들이 시기하는 마음으로 12명 학생들에게 성경의 역사를 반대케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도 성령의 강한 역사는 계속 되었다.  그 결과 감리교 목사님들과 학생들이 선교사님들의 발앞에 엎디어서 자백하기를 부흥이 장로교회에서만 시작되었다고 해서 마귀가 우리들의 마음속에 시기심을 가득 채웠다는 것이다.  그 주간에 쥐어짜는 듯한 고통을 주는 고백들을 그 학생들로부터 듣는 일은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마치 지옥 뚜껑을 열어 놓은 것 같았으며 상상해 볼 수 없는 온갖 죄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 다음 주간 월요일 날까지는 그 학생들이 하나님과 선생님들과 학우들간에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으며 그 학교는 성령께서 주장해 주시는 가운데 개학이 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 무렵 감리교 선교회에 소속된 약 100명의 전도사들과 성서 행상들이 1개월간을 공부하려고 평양에 모였다.  연합기도회를 드리던 중 그 선교사들은 그 중요한 모임을 성령께서 주장하시도록 일임해 버린 것이다. 
힘으로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영으로만 되는 것을 그들은 알았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하나님께서 바로 첫 집회에서 임재하심과 능력을 나타내심으로서 그들에게 응답해 주셨다.  며칠 후에 삐뚤어진 일들이 바로 잡아졌고 효과 있는 교육을 받았으며 한 달이 끝날 무렵에는 용감한 개혁자들도 나가게 되었다.
  수일 후에 시골에 있는 장로교회 부인 신도들 550명이 선발되어 12일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려고 평양에 모였다.  그들은 모든 비용을 부담하였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그 집회에 참석하려고 5일을 걸어서 왔으며 한 어머니는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5일 동안을 걸어왔다.  이 집회를 주도한 선교사님들은 인간의 어떤 힘을 빌리지 않고 오직 성령의 선배님께 맡기고 시작된 그 집회야말로 한국 교회를 부흥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한다.  첫 집회부터 성령이 한국 부인들에게 강타하자 그 집회를 마치고 돌아간 부인들은 교회 부흥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어떤 시어머님은 며느리를 너무 학대했든지 며느리에게 무릎을 꿇고 손을 잡고 회개했고, 어떤 며느리는 동세끼리 손을 잡고 회개하며 삽시간에 부흥의 불꽃이 튀게 되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사명자가 되겠다고 모여든 신학생들이 200명이 넘었는데 이 학생수는 세계에서 제일 많은 학생을 가지고 있는 신학교라고 한다.

  ★ 전도에 열이 붙은 한국 기독교인들 1907년의 부흥은 여러 가지로 결론을 내릴 수 있으나 그 중에 한가지 잊지 못할 것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전도의 열이 붙었다는 것이다.  그 한 예로써 동해안에서 열렸던 부흥회 때에 구원받은 한 모자 상인은 한 해 동안의 기독교 지역사회를 열 두 곳에 설립했다는 것이다.  그 지역 사회들 중에 하나에서는 회심자가 17명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어떤 신학생은 방학 한 달 동안에 복음을 듣지 못한 지역에 가서 전도를 했는데 100명 영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신학생은 날마다 적어도 여섯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했는데 9개월이 될 때는 무려 3,000명에게 전도했다는 것이다.

  ★ 길 선주 목사님의 기록한 서간문을 보면 8∼9세의 꼬마들까지도 학교를 끝마치고 나서는 거리에 나아가 행인들의 옷소매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예수 믿으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길목사님이 말하기를 최근 3∼4일 동안 400명의 사람들이 나와서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했다는 것이다.  그 어른들 마음에 그처럼 감동을 준 것은 어린이들의 간절한 애원인 까닭입니다고 한다.

  ★ 그 다음 한국교회 부흥된 이유를 든다면 많이 바치지 못하여 날마다 울었다는 실례가 있다.  그 한 예로의 어떤 선교사가 매우 빈곤한 선교본부에 있었다.
그런데 어떤 지도자들이 찾아와서 예배 처소가 개인 주택인고로 불편한 점이 많아 30불 되는 대지를 사기로 했다.  "참 잘되었군요.  사도록 하십시오."  "그렇지만 선교사님 우리들은 극빈자들입니다.  선교사님이 우리들의 사정을 모르십니다.  그 대지를 구입할 돈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은 안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빈곤한 것만 말했다.  그러던 중 부인반에서 말하기를 "남자 분들에게 계획이 없다면 우리들이 대지를 구입해 보겠습니다."  그 부인들은 장식품을 다 팔아 보았으나 10불에 불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낙심치 않고 계속 힘썼다.  어떤 부인은 한 개의 놋주전자를 팔았고 어떤 부인은 논주발을 바쳤고, 머리까지 배서 바쳤다.  그런 결과 20∼30불을 준비하여 대지를 샀다.

  ★ 또 어떤 곳에서 헌당식이 있다고 하여 참석했는데 그 교회에 50불의 부채가 있다는 것이다.  그 교회 신도 한 사람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목사님 다음 주일날 50불을 제가 바쳐서 그 빚을 갚겠습니다."고 했다.  목사님은 그 사람이 얼마나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서 "혼자서 그렇게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우리 다같이 협력하면 멀지 않아 갚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주일날 그 가난한 농부는 50불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목사님은 놀라면서 어디서 이 돈을 구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염려 마십시오.  그 돈은 아주 깨끗합니다"하고 지나 갔다.
  몇 주간 후에 그 목사님이 이 지방을 순회하다가 그 집에 들렸다.  남편이 없어서 어디 갔느냐고 물었더니 들에 나가서 밭을 갈고 있는 중이라고 부인은 대답했다.  목사님이 들에 나가 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이 쟁기를 매고 늙은 아버지는 쟁기를 조종하고 있었습니다.  놀란 목사님은 묻기를 "황소는 어데 두었소" 물었다.  이 농부의 대답은 간단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50불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을 제가 차마 볼 수 없어서 내 황소를 팔아서 바쳤습니다"고 대답하였다.(1907년 한국을 휩쓴 성령의 불길이란 잡지에서)

   ★ 서울 성결교회 부흥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자리잡고 있는 서울 성결교회가 있다(담임목사가 이 계섭).  이 교회는 예수교 성결교회 기독교 성결교간 분쟁 때문에 분열된 지 3년 만에 2억원을 들여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여 준공을 보았고 작년말 7백 50명이나 되는 굴지의 교회로 부흥되었다.  이 부흥이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또 땅에서 솟은 것도 아니라 온 교우들이 기도하고 전도하여 봉사에 열이 붙었다고 한다.  특별히 여전도회에서 주최가 되어 화요일 밤에는 산상철야 기도회를 벌려 3년간 계속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교회에선 하루도 빼놓지 않고 3년간 철야기도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표어를 〈내 일보다 먼저 교회 일을〉걸고 그렇게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 중앙 성결교회 시무하신 이 만신 목사님의 간증을 적어 본다.  이 목사님이 지금부터 15년 전에 교회가 부흥되지 않아서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 보았다.  공부를 더 해보고 조직을 면밀히 세워 보고 물질로 포섭해보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 했으나 헛 수고였다.
  그리하여 내가 먼저 은혜를 받아야 하겠다고 비상한 각오를 가지고 산에 가서 은혜 받고 이런 노래를 지어 불렀다.  내가 살아야 교회가 살고 교회가 살아야 민족이 사니 무엇보다 긴급한 내 심령을 살리소서.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못하오니 성령으로 역사하사 나의 소원 이루소서.  기도하여 은혜 받고 역사하는데 교회가 놀랍게 부흥하더라는 것이다(이 만신 목사 설교에서).

   ★ 성결교회 부흥
  성결교단 부흥상을 이 만신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다.  카우만씨가 A.P. 심프손 부흥사에서 은혜를 받았다.
  그는 모든 사업을 끊어 버리고 복음을 전파하겠다고 결심하는 데에서 성결교단이 형성이 되고 시작하였다.  카우만씨는 본래 전기회사의 1등 기사로서 근무하고 있었으나 은혜를 받고 보니 복음전파의 시급함을 느낀 그는 아내의 피아노를 팔아서 여비를 준비하여 일본에 왔었다. 
1901년 카우만씨 길보른 두 선교사가 일심동체가 되어 복음을 전파하여 성서학원을 설립하였다.  여기에서 정빈 김 상준, 이 영직 목사님들이 교육을 받았다.  학과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염곡동에 본부를 두고 전도를 시작하였다.  만일 이분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더라면 한국 성결교회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성결교단을 염곡동에서 무교동으로 전도 지역을 옮긴 후 현재까지 1,000 교회가 이룩하게 되었다고 자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