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화

무서워말라는 예화 모음

공 상희 2011. 7. 30. 19:14

무서워말라는 예화 모음

 

안심입명
 40대 후반의 남자가 교통사고를 당해 3개월간 병원에 입원한 후 불면증과 식욕감퇴로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게 되었다. 그는 항우울제 투여후 잠시 호전되었다가 다시 재발되어 결국 정신장해 진단을 받게 되었다. 골절상을 당한 육체는 완전히 회복되었지만 자신의 삶 가운데 갑자기 다가온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적인 장애인이 되고 만 것이다.전인적(영·혼·육)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상속에서의 당하는 현실과 믿음으로 간직할 수 있는 영적 현실의 무게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평형저울의 양면의 추의 무게가 같을 때 저울이 안정감을 찾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영적인 차원의 세계와 접하고 있다.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십자가의 수직을 이루고 사람과의 옳은 관계가 십자가의 수평을 이루어 온전한 십자가를 이루듯이 이 두 차원의 삶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전인 건강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노도와 같은 세상 환난속에서 담대할 수 있음은 오로지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어떤 환난이 우리를 짓눌러도 굴하지 않고 믿음으로 주를 바라보며 힘을 얻고 담대히 일어나야 한다. 정신적 손상을 입을 수 있는 극한 상황을 만나도 우리는 주의 말씀의 보호인자를 통해 손상되지 않고 진정한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세상적 현실속에서도 영적 현실에 무게를 실어 마음의 평정을 찾도록 하자.

 

두려워 말라(1)
루마니아의 리처드 범블랜드 목사는 공산치하에서 모진 박해를 받고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절망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나갔다. 특히 그에게 날마다 용기와 소망을 주는 것은 성경이었다. 그는 옥중에서 성경을 읽다가 "두려워 말라"라는 말씀이 365회나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 1년 356일 동안 하나씩 그 말씀을 읽어가면서 용기와 위로를 얻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으로 하여금 어떤 어려움에 빠져도 "두려워 말라"라는 약속의 말씀을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다.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여호수아1:9).

 

보라! 내니 두려워 말라
시인 로우엘의 작품 중 '론팔의 꿈'이라는 것이 있다. 그 내용은 중.고 시대의 한 성주로 열렬한 크리스챤이었던 론팔 공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큰 공을 세워 보려는 생각으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실 때 사용하던 떡그릇과 잔을 찾기 위하여 갑옷을 걸치고 말을 타고는 성문을 나왔다. 그때에 문둥병 환자 한 사람이 공의 앞길을 막으며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구걸을 하는 것이었다.
론팔 공은 거친 목소리로, "나는 천명을 받들어 구주의 금잔을 찾고자 길을 가거늘 어찌 나를 번거롭게 하는고? 나는 너를 돌볼 시간이 없너라!"하고는 문둥병 환자를 뿌리치고 금화 하나를 던져주고는 말을 몰았다. 그로부터 수십 년 동안 론팔 공은 구아제국을 순회하면서 정성을 다해보았지만 금잔을 찾지 못한 채 성주의 몸에는 가난이 찾아왔고 머리에는 서리를 이게 되었다. 청년시대의 희망은 결국 달할 수가 없음을 깨달은 론팔 공은 눈보라가 치는 추운 겨울, 성문 가가이에 돌아왔을 때에 예전에 보았던 거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깊은 고난을 다 겪고난 론팔 공은 마음이 부드러워질 대로 부드러워져서 거지를 보는 순간 불쌍한 생각에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에게는 금과 은은 다 떨어졌고 가진 것이라고는 마른 빵 한 조각이었다. 공은 손수 냇가로 내려가 얼음을 깨고는 허리에 찼던 쪽박에 물을 담아다가 마른 빵 한 조각을 반을 쪼개어 문둥병 환자인 거지에게 주었을 때에 정중한 론팔 공의 친절을 받던 거지 환자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하며 감격해 하는 론팔 공에게 축복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니 두려워 말라! 네가 성배를 얻으려 했으나 머리가 희어지도록 얻은 것이 무엇이냐? 네 손에 든 그 빵과 냇물을 길어온 그 쪽박이 바로 성배로다. 네가 떼어준 빵조각은 찢기운 내 몸이요, 길어온 냉수는 십자가에서 흘린 내 피로다.
가난한 자들과 함께 나누는 그 음식이 진실로 성찬이로다."하고는 사라졌다. 놀라서 잠이 깬 론팔 공은 그 후 성문을 개방하고 창고를 열러 가난한 백성들을 돌보는 성주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하늘 나라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는 것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마25:31-46)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본문:요한계시록 2;8∼11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계 2:9)

‘서머나’라는 단어는 ‘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수없는 핍박을 받아 왔고 핍박을 피해 다니느라 생업이 유지되지 않으니 자연적으로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서머나를 향해 말씀하시길 “내가 네 궁핍과 환난을 아노니”(계 2:9)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마 25:12) 하시면 큰일인데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왕하 20:5) 혹은 “내가 네 궁핍을 안다”고 하셨으니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또 주님은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전능자가 서머나 교회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마 1:23)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다시 들어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서머나 교회는 환난도 극심하고 궁핍도 심했지만 처음이요 나중이시며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을 온전히 바라봄으로써 고난을 이기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진정한 부자이고 누가 강자인가요? 주님 안에 있는 자입니다.‘주님 계시면 나는 이미 승리자다’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 승리자입니다.
중세에 성자이었던 토마스 아켐퍼스에게 꿈속에서 주님이 나타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내게 주님께서 계신데 무엇을 원하리요. 저는 주님으로 만족합니다”고 대답했습니다.
10동안 환난을 받을 것이라 했는데 로마제국은 이 시대 아주 조직적으로 기독교를 핍박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옥에 갇히고 잔인하게 순교했습니다.
서머나 교회 교인들 중 ‘죽도록 충성한’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80세에 화형으로 순교한 폴리캅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지도자이었던 그는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다는 회유에도 굽히지 않고 이렇게 담대히 말했습니다.“80년동안 주께서는 나를 한번도 부인한 적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내가 이제 와서 어떻게 주님을 부인하겠습니까”
* 기도: 주님, 고난 중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죽도록 충성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도 듣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두려움
  어떤 사람이 처음 가는 밤길을 혼자 걷고 있었는데 양쪽은 모두가 높은 절벽이었다. 발을 잘못 딛은 실수로 떨어지던 그는 간신히 나무 뿌리를 잡고 메달리게 되었다. 기적적으로 위기를 모면한 그가 소리를 치며 구원해 달라고 했으나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손목과 팔의 힘은 점점 빠져갔다. 이제는 도저히 더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떨어져서 죽는 일만이 남았다. 드디어 그는 악! 소리를 치며 나무 뿌리를 놓쳤으나 이게 웬일인가? 수 십미터의 낭떠러지인줄로 알았던 것이 겨우 털석!하고 발이 땅에 닿는 약 1미터의 높이였던 것이다.
 손만 놓으면 떨어져 죽는줄 알고 겨우 1미터 높이의 곳에서 밤새도록 나무뿌리를 잡고 두려워 떨었던 것이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그것을 놓으면 죽기라도 하는 줄 알고 결사적으로 세상 것에 메달려 있는 사람이 그 얼마나 많은가?

 

두려움 없는 고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 당하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제자들이  찾아와 통곡하면서 "스승님, 이게 웬일입니까? 스승님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으셨는데 이렇게 감옥에 갇히셔야 하다니요.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웃으면서 제자들을 달랬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꼭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와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두려움 없는 삶
 어떤 사람이 공동묘지를 넘어 막 마을로 가려다가 너무나 밝은 얼굴로 뛰어노는 꼬마를 만났다.
 "공동묘지 근처인데 너는 무섭지 않니?"
 이렇게 묻자 꼬마는 "아뇨."라고 하면서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왜 무섭지 않지?" 다시 묻자 꼬마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빠가 이 묘지 관리인이거든요."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사 41:10)


 두려움이 사람을 죽인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서반아 왕 가운데 페르디난도 5세라고 하는 황이 있었는데 이 왕이 어떤 점장이에게 "왕께서는 '마드리갈'이라고하는 곳에 아예 가지 마세요. 그 '마드리갈'에서 왕은 장차 죽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왕의 별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무서워서 자기의 좋은 궁전을 지어 놓고도 21년 동안 거기를 못갔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서반아 지방을 여행하다가 어떤 조그만 촌락에서 하룻밤 자면서 그만 병이 났습니다. 왕은 이 지방이 어떤 지방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이 곳은 '마드갈레'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마드리갈'과 비슷했습니다. 사실은 '마드리갈'은 아니고 비슷한 이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왕은 "아이고 나는 죽겠구나!"하더니 며칠 안 되어서 죽었다고 합니다.
 병이 죽인 것이 아닙니다. 공포심이 죽였다는 말입니다. 공포심이 사람의 마음을 엄습하게 되면 신경이 쇠약해지고, 혈압은 높아지고, 위액 분비가 잘 안되어서 소화도 안 되고, 심장이 뛰고, 당뇨병이 생기기 쉽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실상은 세균에 의한 병보다도 공포심이 원인이 되어서 병나는 이가 더 많고, 죽는 사람도 더 많다고 합니다. 이렇게 공포심이 우리 인간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60세 가량 돼 뵈는 어떤 신부님 옆좌석에 앉게 되었다. 무엇 때문에 우리의 대화가 그렇게 흘렀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 삶에 대해서 얘길했는데. 아마도 내가 불평을 했기 때문인것 같다. 나는 삶을 비관적으로만 보는 35세 된 남자였다. 그 신부님이 “당신은 인생을 폭넓게 사는 것 같지가 않은데요. 왜죠.”라고 말하는 걸 봐서 내가 불만을 겉으로 나타냈었던 것이 분명했던 모양이다. “글쎄요. 내가 생각하기로는 항상 모든 일에 대해 지나치게 두려워하기 때문일겁니다. 이렇게 하기도 겁나고 저렇게 하기도 겁이 납니다.” 내가 말했다. 내 옆에 앉아있던 그 신부님은 미소를지었다. “난 당신이 많은 걸 놓치고 있는 것은 당신이 대답했듯이 지나치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너무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인 거예요. 두려움이란 항상 부정적인 것은 아니예요. 바람직한 방향의 두려움도 존재한답니다. 삶에 있어서 진실로 중요한 것을 잃게 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짐으로써 그러한 것들을 취하고자 하는 시도를 저지시키는 것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때 그 신부님을 잊을 수가 없었다. 전에 느끼던 그 부정적인 의미의 두려움으로 인한 좌절과 실망 혹은 다른 이들의 의견에 강압받을 때면 그 신부님의 말을 떠올린다. 그때 이후로 내가 시도한 모든 일에 대해서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상당부분을 성공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은 너무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말은 내게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던져 준 것이었다.


두려움
두려움을 단순히 심리학적인 현상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두려움을 병리적심리로만 돌려버릴 수는 없다. 두려움은 '실재하는 것'에 근거한다. 없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두려워해야 할 일이 있기에 '두려움'이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무서운 것이 없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답하겠다. 두려운 마음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다름없다. 심판 받아버린 사람이다. 화인 맞은 사람이다. 벌써 제외되어버린 사람이다. 두려움 - 이것은 마지막 보루이다. 아직도 우리의 마음에 두려움이 존재한다면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소망이 있다. 두려워하는 마음, 떨리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무서워할 줄 안다는 것이기 때문에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심판과 무서운 사망의 저주를 두려워하는 것 - 이것이 바로 구원의 시작이며, 경건의 시작이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더는 소망이 없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보자. 중요한 것은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두려워하는대상이 무엇이냐이다. 사람의 격(格)은 여기서 평가된다...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 이것이 그 사람의 사람됨을 평가해 준다. 예컨대, 매는 두려워하면서 매를 든 자를 무서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께서 들고 계신 매, 막대기는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을 무서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과거의 일은 두려워하면서 다가올 심판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두려워하면서 다가올 심판은 두려워할 줄 모른다. 자신이 겪는 실패와 고통은 두려워하면서 3,4대까지 내려 가면서 자손들이 겪는 실패와 고통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


두려워 말라
 이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께서 위로해 주신다." 창조주 되시고 심판주 되시는 구원의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은 누구라도 이런 말을 할 권리가 없다. 하나님 한 분 말고는 진정한 의미에서 위로할 자가 없다.
    ...구체적인 말씀을 하신다. "내가 너를 속량하였다" - 이 '속량'이라는 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사랑받을 만한 거룩함과 정결과 의가 내게 없음을 내가 안다는 것 - 이것이 문제이다. '나는 차한(此限)에 부재(不在)다. 나는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괴롭고 두려워지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 너를 속량하였느니라(I have ransomed you. I gave ransom.) - 'Ransom;대속(代贖)'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대신 값을 치렀다는 말이다.


매와 용서
교육학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을 한다. '아이들을 키울 때에 때린다는 말을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될 수 있으면 때린다는 말은 하지말되, 만약 때린다고 했으면 반드시 때려야 한다' - 때린다고 해놓고 용서한다며 안때리고 놔두면 그 용서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용서한다 용서한다 했다가 다 모아서 야단치겠지'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다. 평소에는 용서를 해주다가 한 번 야단치게 되면 아무때는 뭘 잘못했고 아무때는 뭘 잘못했고 해가면서 야단을 친다. 이때에 어린 아이들은 내 그럴 줄 알았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못된 짓 한 번 했으면 한 대 맞아야 시원하다. 본인이 맞건 누가 대신 맞아 주건, 맞을 일을 했으면 맞아야 시원하다. '아! 이제 됐다. 이제 끝났다' - 그래야 문제의 해결이 있는 것이다. 그래야 사랑이 확증되는 것이다. 그래야 그 용서하심이 확실해지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서론)얼마전 텔레비전에서 '믿거나 말거나'라는 제목으로 방영되던 프로그램이 있다. 외국 프로그램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인데, 원제는 'Whether you believe it or not'이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외국에서도 무척 재미있게 보았었다. 내용인죽 신기한 이야기,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면 높은 건물에서 사람이 떨어졌는데도 죽지 않은 이야기, 큰 집에 불이 났는데 다 탄 잿더미 속에서 병아리가 기어나오는 이야기 같은 것을 보여주고는 "믿거나 말거나" 하고서 끝내버린다.
    믿거나 말거나 - 이 말 자체를 깊이 생각해 보자. 여러분, 내가 믿거나 마거나 무슨 상관인가? 우리는 가끔 지나친 착각을 한다. 내가 인정하면 되는 것이고, 인정을 안하면 안되는 것으로, 내가 믿으면 있는 것이고 믿지 않으면 없는 것으로, 내가 납득을 하면 사실이 되고 납득을 하지 못하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참으로 한심스러운 생각이다. 믿거나 말거나, 우리가 인정을 안하든, 사실은 사실이다. 'Fact is fact'이다. 여기에 무슨 동의가 필요한가? 내가 지지하건 안하건, 내가 인정하건 안하건, 내가 믿건 안믿건 사실은 사실이다. 간혹 좀 불량한 아이들이 "난 부모가 없어요"하며 불평하는 것을 본다. 그렇다고해서 부모가 없는가? 있는 것이다. "난 사랑받지 못했어요." 세상에 사랑받지 않고 태어난 사람도 없고 사랑받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도 없다. 사랑을 못받았으며  어떻게 살아남았겠는가? 내 마음대로, 내 주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내가 믿건 안믿건 그 사건 자체와는 상관이 없다. 내가 목숨을 걸고 믿더라도 사실이 아닌 것은 사실이 아니다. 또 내가 아무리 부인하여도 사실은 사실인 것이다. 사실 - 객관적 진리는 나의 주관적 의견의 동의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믿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냐'이다. 내가 믿으면 그 사건은 나를 위한 사건이 된다. 내가 믿지 않으면 그 진리와 사건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어진다. 사건 자체와 아무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것만이 차이가 있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문제는 믿는다는 것과 나와의 관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