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에 대한 예화 모음
만남에 대한 예화 모음
<성구와 금언>
★ 지혜로운 여인은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허니라(잠 14 : 1).
★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낫다(잠 31 : 10).
★ 어진 여인은 지아버지의 면류관이라(잠 12 : 4).
★ 다투는 여인과 큰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잠 25 : 24).
★ 믿지 않는 친척보다 예수 믿는 남이 낫다(최태중 목사).
★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예수님은 만나 주신다.
<실화>
★ 라몬 막사이사이는 그가 세상을 태어난 지 16개월만에 비율빈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괴질에 걸려 그를 치료하던 의사가 그의 어머니에게 생명을 포기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어린 생명을 단념하지 않고 치료를 정성껏 하였다.
마침 약 광고를 보고 병 하나를 가지고 자기 집에서 127마일이나 떨어진 마닐라까지 도보로 약을 사다가 치료한 결과 기적적으로 나았다. 만일 그 어머니와 같이 정성스런 마음을 가진 어머니가 아니었던들 세계적인 민주주의적 통치자를 만나보지 못 하였을 것이다.
★ 플라톤은 희랍 귀족의 아들로서 정치가의 꿈을 두고 있었던 중 철인 소크라테스 선생을 알게 되면서부터 뜻을 바꾸어 철학자가 되었다.
그가 만일 소크라테스를 만나지 않았던들 만고의 철학대가가 되지 못 했을 것이다.
★ 모세의 만남
모세는 구약에 나타난 위대한 지도자이다.
그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기 전에는 평탄하지 않았고 한 사람의 패배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모세는 태어날 당시부터 생명이 위협을 받아야 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남자아이를 낳으면 죽이라는 지령이 내려졌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태어나자 목을 눌러 죽이려 했지만 그 모습이 워낙 준수하고 인물이 비범해 보이는지라 차마 자식을 죽일 수가 없어 3개월을 숨겨 키웠다.
그러나 더 이상 숨겨 기를 수 없게 되자, 모세의 부모는 갈대로 바구니를 만들어 모세를 나일강에 띄워 보냈다. 하늘에 내어 맡긴 모세의 운명은 뜻밖에도 애굽 왕 바로의 딸이 하수가에 나왔다가 상자 속에 어린애를 건져 구출되어 공주가 자식처럼 왕자와 같이 궁중에서 자라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 요게벳이 유모로 왕자 아닌 아들을 왕자와 같이 길렀던 것이다.
모친이 철두철미한 교훈으로 인해서 자기는 히브리인이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택한 백성임을 알게 되었다.
그가 바로의 궁전에서 성장하여 애굽의 모든 학문과 웅변에 능통하게 되고 애굽에 대장군으로 성장하여 애굽의 영화를 다 누리며 살았으나 항상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나는 히브리인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고 자기 동족이 애굽에 노예생활을 하는 것을 보게 되자 젊은 가슴에 피는 북받쳐 올랐다.
모세는 청년이 되어 이들을 구원하는데는 나만한 실력자가 없다는 자만하기에 이르렀고 그 생각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 결국 자기 동족을 마구 때리는 애굽의 한 간역자를 쳐죽여서 모래 속에 숨겼다. 그는 이와 같은 자기 행동에 히브리 백성에게 신뢰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뜻밖에도 자기 동족의 고발로 인하여 자신이 위기에 놓이게 되자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린 때 뼈 맺히게 들은 하나님의 택한 한 백성이란 것과 종교적인 지식은 무서운 살인죄를 짓게 하고야 말았다.
하나님과 직접적인 만남의 체험하기 전에는 실패와 위기에 처하게 되고 하나님과 자기는 구만리 장천 먼 곳에 떨어져 있었고 저 구름과 안개 속에 희미하게 연상 될 뿐이었다.
그는 절망에 몸부림치며 미디안 광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모세는 자기의 꿈이 수포로 돌아간 상해에서 이름 없는 목동으로서 40년 간을 광야에서 지냈다.
이제는 옛날의 용맹한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는 주름잡힌 노구가 되어 지팡이에 의지하여 아기죽거리며 걸어야 하는 황혼의 인생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이한 형상을 보게 되었다.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나무는 하나도 타지 않는데 불이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하도 이상해서 가까이 가니 그 가운데 음성이 나타나 그를 부르신 것이다.
그는 여기서 어릴 때 말로만 듣던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를 부른 하나님은 그에게 애굽 땅에서 고생하는 히브리 백성을 건져내고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내라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이 말을 듣자 과거 애굽의 생활을 연상하며 패배의 과거가 되살아나면서 하나님이여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니 하나님은 할 수 없다고 하는 모세를 변화시키기를 원하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와 만남을 원하셨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모세에게 네 손에 든 지팡이를 땅에 던져라 했다. 모세는 주춤했다. 이제까지 의지하고 신세를 진 지팡이를 던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지팡이를 던졌다.
그랬더니 지팡이가 뱀이 되어 모세를 물라고 달려들고 있었다. 모세가 놀라 몸을 피하면서 자기를 향해 혀를 날름거리며 달려오는 뱀을 쳐다보더니 문득 하나님 말씀하시는 음성이 그의 심령에 들려 옵니다.
저것 보아라, 네가 그렇게 의지하던 네 지팡이가 결국은 너를 물고 찢고 죽이는 뱀이었다.
모세는 몸서리를 쳤다.
과연 모세의 과거의 종교적인 교육이나 힘이나 지식은 자기를 죽이려는 뱀과 같이 나를 돕는 자가 되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였다.
그대로 순종하니 그 뱀은 즉시 지팡이로 변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기 전까지는 인간의 지혜나 수단과 방법이 결국은 자신을 죽이는 뱀이지만 하나님 말씀을 좇아 이것을 사용하게 될 때 이 모든 것은 비로소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되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오늘날까지 20세기 동안 인간이 개발한 과학 문명을 보십시오. 인간의 두뇌로 애써 개발한 과학 문명은 결국 인간을 멸망시켜 왔으며 종국에는 스스로 함정을 파고 말 것이 뻔한 것이다. 하나님께 내어 맡기지 않은 인간의 모든 문명은 결국 독사가 되어 우리를 헤치고 맙니다.
미국에 핵무기를 연구한 과학자의 말에 의하면 핵무기를 만들어 낸 것을 탄식하고 후회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또 모세에게 네 손을 품에 넣으라 말씀하셨다. 꺼내보니 하얗게 문둥병이 들었다. 문둥병은 죄를 상징한다.
이것은 죄악으로 썩어가고 있는 심령 상태를 보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보라고 했다. 그대로 했더니 손은 정상대로 깨끗이 나아 보였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문둥병 걸린 죄악의 심령을 깨끗이 고쳐 주신다는 것이다. 모세는 이와 같은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과 만나는 새로운 교제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의 체험은 실패와 절망과 열등의식으로 꽉 들어찬 문둥병 걸린 그의 심령을 깨끗이 치료하여 주셨으며 용기와 믿음과 소망이 넘치는 새로운 심령으로 변화 받는 그의 80노구도 아랑곳 않고 유유히 애굽 땅에서 히브리 백성을 인도하여 낼 수 있었던 것이다.
★ 어거스틴은 하나님이여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모시기 전까지는 마음에 휴식이 없나이다. 하고 기도했다.
★ 19세기 아프리카 흑인 중에 제일 유명한 나이지리아의 사도라고 이름을 얻게 된 사무엘 애드자이 크라우드 라고 하는 분이다.
나이지리아는 그때까지 영국에 식민지였지 마는 지금은 독립국가이다.
아프리카 신생국 중에 베일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다.
이 나라는 이 애드자이의 공이 크다고 한다.
19세기 초엽인 그 때에는 해적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흑인들을 강제로 납치해 다가 웨스트 인디아라고 하는 섬에 데려가서는 여러 나라의 종으로 팔던 약한 사람들이 있었다.
한번은 애드자이가 사는 동네에도 이와 같은 해적의 무리가 와서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조리 강제로 납치해다가 배에 싣고서는 종으로 팔려고 대서양을 건너서 웨스트 인디아 섬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 때 마침 영국 군함이 그 해적선을 발견하고 추격해서 붙잡고 노영을 팔려던 흑인들을 다시 서아프리카로 싣고 가서 다 놓아주었다. 그 가운데 14살 된 이 어린아이도 시에라 레욘이라고 하는 서아프리카에 내려졌는데 마침 거기서 어떤 선교사를 한사람 만났다.
그의 사실을 다 들은 선교사는 그를 불쌍히 여겨서 도와주고 마침 그곳에 세워져 있는 기독교 학교에서 공부를 시키기 시작했다.
이 아이가 예수 믿게 되고 공부를 잘하여 학교를 졸업한 다음에 선교사가 영국까지 보내서 공부를 시켰다.
그 학생이 영국에서 공부를 하고 나서 노예로 팔려갈 수밖에 없던 자기가 좋은 선교사를 만나서 공부하게 되고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 복음을 자기 고향에 가서 전파해야 할 것을 결심하고 1843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검은 대륙을 녹지대로 개발하고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워 전도교육 문화, 사회, 각 방면에 많은 공헌을 해서 나이지리아의 신기원을 만들은 자로서 나이지리아의 사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니 이는 사람을 잘 만났기 때문이었다.
만남에 관한 예화 모음
▣ 창조주와의 만남
오랜만에 만난 이에게 별일 없이 잘 지냈느냐고 물었더니 한숨을 쉬며 "하나가 지나가면 또 하나가 오고 끝이 없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인생은 문제의 시작과 끝이 되풀이되며 종착역에 이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문제를 곤혹스러워 하는 어떤 이에게 문제없는 곳을 알려준 이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말없이 공동 묘지를 가리켰습니다. 죽음이 오기 전의 삶은 문제의 연속인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골짜기를 지날때도 험악한 바위 틈에 피어 오른 한 송이 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삶의 비밀스러움이기도 합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별은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기를 내는 발칸 산맥의 장미는 가장 춥고 어두운 자정과 새벽 두 시 사이에 딴다는 데 고난의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성경 속의 욥이라는 사람은 폐허가 된 집터에서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난 악창을 기와 조각으로 긁고 개에게 핥게 하며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창조주와 인간의 만남은 자아의 실존에 대한 자각입니다.
피상적인 존재의 의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고난을 통해 온다면 고난은 삶을 황폐하게 하기보다 삶을 향기롭게 하는 값진 의미가 될 것입니다.
(사랑은 사흘분의 설탕이예요/오인숙)
▣ 만남에로의 그리움
한 소녀가 서울역에서 온종일 날이면 날마다 오고 가는 여객들 가운데서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며 찾고 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묻는다. "누구를 기다리는지, 부모 형제인가 애인인가?" 누구냐고 물으면, 누구도 아니며, 누구인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고 대답한다. 그럼 왜 기다리느냐고 물으면 그것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그럼 기다리지 않을 수 없느냐고 물으면, 그럴 수는 없고,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살 길이 없다고 대답하나.
"누구인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나 나는 꼭 만나야하고 찾아야 합니다. 나는 그 만남과 기다림을 위해 태어났고, 그것을 위해 살아야 하며 기다리고 찾다가 죽을 숙명의 존재입니다. 그도 나를 찾고 있습니다. 내가 그를 만나는 날 나의 인생은 뿌리째, 송두리째 신부처럼 변해 버릴 것입니다." 예수를 향한 만남에로의 그리움을 암시한 비유이다.
-예수칼럼 : 김준곤-
▣ 처칠과 플레밍의 만남(인연)
영국의 한 시골에서 부잣집 소년이 연못에 빠져 거의 죽게 됐을 때, 가난한 집의 수영 잘 하는 소년이 그를 구해줬다. 그후 둘은 친한 친구가 됐다. 어느 날 부잣집 소년이 그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 소원을 하나만 말해 줄래? 너의 소원을 꼭 듣고 싶어!” 그러자 가난한 집 친구가 대답했다. “내 꿈? 내 꿈은 런던에 가서 의학을 공부하는 거야!” 그 부잣집 소년은 친구의 소원을 자기 아버지에게 얘기했고 마침내 플레밍은 친구 아버지의 도움으로 런던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의사가 됐다. 그가 바로 페니실린을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이었다. 그런데 페니실린을 발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플레밍은 그 부잣집 친구가 폐렴으로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들고 급히 달려가 그 친구를 간신히 살려냈다. 그렇게 살아난 친구가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이었다. 성경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베드로전서 4:10)고 권면하고 있다.
/김의환 목사
▣ 잘못된 만남
3년 전 야산을 지나다가, 그는 땅에 떨어진 대마 잎을 발견했다. 그는 그것을 들고 있던 신문지에 말았다. 그리고 불을 붙여서 한 모금 빨아봤다. 그 날 이후 막노동도 그만두고 그는 야생 대마초를 찾아 야산을 돌아다녔다. 대마 흡연량과 횟수가 점점 늘어났고, 지병인 폐결핵과 당뇨병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대마를 끊겠다고 몇 차례나 결심을 했지만 언제나 허사였다. 자신의 무력함이 안타까웠다. 어느 날 밤, 그는 아파트 공터에 앉아 마지막 남은 대마를 피웠다. 그리고는 경찰서로 향했다. 구속을 자청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대마를 끊어야겠기에
▣ 만남의 소망
많은 사람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던 배가 갑자기 불어오는 거센 폭풍우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비바람에 흔들리던 배는 그만 뒤집히려는 듯 요동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배안의 사람들은 모두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중 노인 한사람은 아주 평화로운 얼굴로 기도를 드리는게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배가 뒤집혀 다 죽게 되었는데 당신은 두렵지 않느냐고,
그 노인이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나에게는 딸이 둘 있습니다.
큰 딸은 몇년전에 잃고 지금은 작은 딸을 찾아가고 있는 길입니다. 만약 이 배가 뒤집혀 죽게 되면 천국에 있는 큰 딸을 먼저 만나게 될 것이고 다행히 배가 무사히 항구에 닿게 되면 작은 딸을 먼저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만남의 소망을 가지고 있으니 두려울 게 없군요"
▣ 만남
정채봉씨가 쓴 에세이집에 '만남'이란 글이 있다. 그곳에서 작가는 여러 가지 만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가장 잘못된 만남이 생선 같은 만남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한 만남은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으로 꽃송이 같은 만남을 든다. 피어있을 때에는 환호하지만 시들게 되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남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어떤 만남일까? 그것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기 때문이다.
만남이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한다. 우리 인생에 있어 제일 중요한 축복은 만남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자녀를 위해 기도하되 특별히 만남의 축복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김은호 목사(오륜교회)
▣ 처음 만난 사람처럼
공동생활을 오래했던 한 목사님이 이탈리아의 한 공동체를 방문했습니다. 4백 명이 함께 공동 생활하는 곳인데 서로를 대하는 이들의 모습은 매일, 아침이나 저녁이나 따뜻하고 변함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공동생활의 어려움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답니다.
"어떻게 이런 신선한 사랑을 매일 나눌 수 있습니까? 서로 지겹지 않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희들은 매일 아침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오늘 내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인 것처럼 대하게 하소서.'"
우리는 아내와 남편, 가족들을 대할 때 이미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대합니다. 그들에 대한 계산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가장 친한 벗에게 처음 만나는 사람인 것처럼 기대감을 가지고 선입견 없이 대할 때 신선한 사랑의 바람은 그곳에서 불어올 것입니다.
▧ 기도: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신 주님, 제게 생명주심을 먼저 감사 드립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 또 다른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귀하게 여기며 그들과 조화롭게 살며 잘 가꾸게 하소서.
▣ 3종류의 만남
만남에는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생선같은 만남,꽃과 같은 만남,손수건같은 만남입니다.
첫째, 생선같은 만남이란 만지기만 하면 비린내가 나는 만남을 말합니다. 만나면 서로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원한을 남기게 되는 만남입니다. 이런 만남은 오래 갈수록 더욱 부패한 냄새를 풍깁니다.
둘째, 꽃과 같은 만남은 만나면 향기가 나고 좋아 어쩔 줄 모르지만 금세 시드는 만남을 말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습니다. 풀은 쉬 마르고 꽃은 10일을 넘지 못합니다. 꽃과 같은 사랑은 풋사랑입니다.
셋째, 손수건같은 만남이 있습니다. 상대가 슬플 때 눈물을 닦아주고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인 양 축하하고 힘들 때는 땀도 닦아주며 언제나 함께 하는 만남을 말합니다. 부부나 목자와 성도의 만남은 손수건의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날 주님께서도 손수건으로 우리 눈물을 닦어주신다 하셨습니다.
/장자옥 목사(간석제일교회)
▣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한 어린 소년이 있었다. 그래서 소년은 초콜릿과 음료수를 배낭에 챙겨 들고 여행길에 나섰다. 한참을 걸었을 때 소년은 길에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할머니는 지치고 배도 고파 보였다. 그래서 초콜릿을 꺼내 할머니에게 드렸다. 할머니는 고맙게 받아드시고 소년에게 웃음을 지어보이셨다. 할머니의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기에 이번에는 음료수를 건네드렸다. 할머니는 또다시 웃어보이셨다. 할머니와 소년은 가끔씩 서로를 바라볼 뿐 다른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소년은 피곤함을 느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몇 걸음 걸어가다 말고 달려가 할머니를 꼭 껴안아드렸다. 집으로 돌아온 소년의 얼굴에는 행복이 넘쳐흘렀다. 소년의 어머니는 소년의 행복한 표정을 보고 소년에게 물었다. “오늘 무엇을 했기에 그렇게 행복해 보이니?” “오늘 하나님과 함께 점심을 먹었어요. 엄마도 아세요? 하나님은 내가 여태껏 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가지셨어요.” 할머니의 아들 역시 할머니의 얼굴에 나타난 평화로운 표정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어머니, 오늘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그렇게 행복해 보이세요?” 그녀가 대답했다. “오늘 공원에서 하나님과 함께 초콜릿을 먹었단다. 너도 아니? 그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더구나.” 마더 데레사는 하루에 다섯 번만이라도 미소를 지으라고 하였다. 그러면 주위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바뀔 것이고 쉽게 하나님을 뵐 수 있을 것이라고.
/ 권상혁 엮음
* 기도: 내가 지쳐 쓰러질 때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 항상 동일하게 베푸시는 그 사랑으로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평안으로 내 영혼을 채우시고 내가 그사랑과 평안을 전함으로 주님을 알리고 선포하게 하소서.
▣ 복된 만남, 사랑의 만남
복된 만남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기회를 준다. 우리 안에 있는 엄청난 가능성을 발견하도록 도와준다.
삼중고(三重苦: 입과 눈과 귀의 장애)를 겪는 어린 헬렌 켈러를 만난 설리반은 헬렌에게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그 가엾은 소녀 속에 감추인 가치를 발견했다. 그래서 평생 헌신했다.
사랑하면 비전을 보게 된다.
- 강준민의《비전과 존재혁명》중에서 -
* 누구에게나 그 사람만의 개성과 자기 빛깔이 있습니다. 무한한 가능성과 비전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내어 거름을 주고 꽃피게 해주는 사람, 그런 복된 만남, 사랑의 만남이 인생을 바꿉니다.
▣ 수가성 우물가에서의 어떤 만남
본문: 요한복음 4:2∼26
오늘 본문에서 아무도 물을 긷지 않는 뜨거운 대낮에 한 여인이 물가로 나옵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서 나온 여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려 남편을 다섯 번을 바꾸어야만 했던 기구한 인생을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사람과의 만남에서 부분적인 만남으로 인해 인생의 고통을 맛 본 여인이었습니다. 마음속에 외로움과 고독이 많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는 대낮의 수가성 물가에서 이 여인은 예수님과의 첫 만남을 통해서 자기가 찾고 있었던 만남,즉 전면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재능이나 기술,혹은 노동력만 필요해서 만났지만 수가성 여인의 예수님과의 만남은 자기의 마음 속 아픔을 털어놓을 수 있는 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슬픔과 고독 속에 허덕이던 그 여인을 예수님은 만나주셨을 뿐아니라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전면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그 여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해 주는 만남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인간 관계에 있어 부분적인 만남으로 인해서 아픔을 겪고 있지 않는지요? 이제 수가성의 여인처럼 주님과의 전격적인 만남을 갖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주님과의 만남은 그 만남으로 인해 놀랍게 역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만남을 중심으로 모든 사람과의 만남을 행복한 만남으로 변화시켜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 보아스의 밭에서 보아스를 만나다
본문: 룻 2:1 ~ 7
룻기서는 신앙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부모에 대한 효도, 노동의 신성, 근면하고 성실한 삶, 그리고 사랑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모든 의미가 다 담겨져 있는, 너무 아름다운 내용이 가득 찬 책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핵심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방인인 룻이라고 하는 소녀, 불쌍한 소망 없는 이 버림받은 여인이 보아스를 만나는 내용입니다. 보아스를 만나는 이것이 바로 핵심인 것입니다. 보아스는 누구입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룻이 아무리 노동을 하여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그의 마음이 아름답고 고상할지라도, 아무리 이삭을 주워서 부모에게 효도했을지라도 보아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여인은 슬픈 여인이요, 불쌍한 여인입니다. 이 여인의 눈물과 슬픔을 아무도 위로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보아스를 만나면서 그의 발걸음은 아름답습니다. 그의 모든 상처는 싸매어졌습니다. 보아스의 품안에 안기면서 그는 개인적으로 길이길이 만 대에 복 있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이 여인의 슬픔을 다 씻어주신 보아스가 있다면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주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 성경은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요,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온 인류의 보아스가 되신 것입니다. 나이가 많든지 적든지, 천하든지 귀하든지, 임금이든지 어떠한 노예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삶에 성경은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서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인류의 가장 복 있는 믿음의 조상이 되고 야곱도 길을 떠나 가다가 정처 없이 유랑생활 하다가 하나님을 만나므로 그가 복을 받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만나는데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민족, 보아스가 없는 민족과 개인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애굽의 영광이 황금으로 칠해져 있고 바벨론의 영광이 세계를 지배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나라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영원히 우리 온 인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김삼환 목사 설교 중에서
▣ 예수를 만난 자의 축복
누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나인성 과부는 순종의 삶으로 향기를 풍기며 살았던 사람입니다.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청천병력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늘 병약하던 아들이 그만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 아들은 그에게 남편이요 정신적인 지주였을 것입니다. 당시 가장 천대받던 계층은 고아와 나그네 그리고 과부였습니다.그렇지 않아도 과부로 많은 설움을 받고 살던 그녀가 이제는 정신적인 지주와도 같은 아들마저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비통하고 비참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러한 슬픔과 비통함이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녀는 절망에서 건짐받는 행복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절대 절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절망을 절대희망의 디딤돌이 되게 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실패자들은 절망속에 무너집니다. 그러나 많은 성공자는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자들입니다. 나인성은 ‘아름답다’의 뜻을 가진 성입니다. 그러나 그 성에 살았던 과부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아픔의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그런 중에 아들을 잃었으니 그 절망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대 세계에서는 아들을 잃어 대가 끊어지는 것을 하나님의 징벌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부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절망이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또한 그녀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현실적 문제에서 구원을 받는 행복을 누렸습니다. 기독교는 추상적인 종교가 아니라 현실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줍니다.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를 보고 “울지 말라” 하시고 아들을 살려서 과부에게 다시 돌려주었습니다.말로만 울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2장 15∼16절에 보면 “가난한 자가 왔을 때 더웁게 하라 평안히 가라 하면서 그의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기독교는 죽은 종교가 아닙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 과부는 죽었던 아들이 살아남은 물론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았다는 강박관념에서 해방되고 아들과 함께 살 수 있게 된 기쁨을 얻은 것입니다.마지막으로 과부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영혼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문제 때문에 헤매다가 주님을 만나고 그분 앞에서 기도하다가 분명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예가 많습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과부도 추상적인 신앙생활에서 자신의 삶속에 직접 관여해주시는 주님을 만났기에 평생 주님을 좇는 영생을 소망하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은 곧 영혼의 구원입니다.
▣ 그리스도의 사람을 만나면
일본의 토키치 이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잔인하고 무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못하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 살해했다. 그러다가 결국 감옥에 갇혀 사형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감옥에 있는 동안 캐나다 여인 두 명이 그를 방문하여 창살 너머로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그는 이맛살만 찌푸렸을 뿐,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결국 두 여인은 포기하고 성경만 건네주고 떠났다. 이시는 그렇게 받은 성경을 읽어 내려가다가, 마침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말씀에 그만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구절에서 멈추었다. 마치 17~18cm 가량 되는 대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오직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강퍅한 내 마음이 변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를 형장으로 끌고 가기 위해 온 간수는 자기가 예상했던 야수 같은 강퍅한 인간이 아니라, 얼굴에 광채 나는 웃음을 띤 사람을 발견했다고 한다. 살인마 이시가 거듭났던 것이다.
- 「십자가 주변의 사람들」/ 톰 휴스턴
▣ 만남이란
사람의 운명이란 때로는 사소한 사건, 우연한 만남에 의해 결정되는 미묘한 것이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여러 갈래로 뻗어 있는 삶의 길, 그중에서 어떤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것은 어쩌면 길 저쪽에서 반짝이는 이파리 하나, 혹은 희미하게 들리는 휘파람 소리일지도 모른다.
- 홍정욱의《7막7장》중에서 -
* 인생은 만남입니다. 만남은 오묘합니다. 우연처럼, 축복처럼 이뤄집니다. 길 위에 구르는 이파리 하나처럼, 혹은 희미한 휘파람 소리처럼 다가와 내 인생에 머물며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만남입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 인생은 만남
인생은 나그네이고 복음은 주변 지향적이므로 인생에게 필요한 것은 만남이다. 고달픈 나그네의 삶이 행복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만남이 필요하고, 복음적인 삶이 되기 위해서는 만남의 확장이 필요하다. 인생의 보람과 기쁨과 행복은 만남에서 온다. 구원도 목회도 선교도 만남이다. 성경의 이야기는 만남의 이야기이다. 나는 유학생활 초기에는 만남의 중요성을 바로 알지 못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러나 차츰 보람된 인생은 만남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나가는 외국인 학생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고 주말엔 내 처소에 초청하여 음식을 나누며 교제를 했다. 아이오와 시에서는 서로 만나지 않던 한인들을 함께 만나게 해서 피크닉과 운동회도 했다. 결국 한인회와 한인교회가 만들어졌다. 귀국후의 나의 삶은 불신자, 새신자, 성도, 어린이, 교회지도자, 아시아인, 세계인, 북한인들과의 만남의 확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 아브라함과 모세의 삶은 만남으로 이루어졌다. 아브라함의 삶의 시작은 하나님 만남에서 시작되었고 주변 사람들과 이방 사람들을 만남으로 이어져 갔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서 그곳 사람들을 만났고 애굽으로 가서 그곳 사람들을 만났으며 그랄로 가서 그곳 사람들을 만났다. 모세의 삶도 하나님 만남에서 시작되었고 사람들을 만남으로 이어져 갔다. “하나님이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출3:4).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10). 모세의 삶은 하나님 만남에서 시작되었고 그의 사역은 바로와 이스라엘 백성 만남으로 이루어졌다. 만남에서 모세와 모세를 만난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었다.
둘째, 수가성 여인의 삶도 만남으로 이루어졌다.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이 주님을 만났을 때 그리고 수가성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녀의 삶과 수가성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었다. 실패와 좌절에 빠져있던 수가성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녀의 삶에는 기쁨과 희망의 샘이 솟아나기 시작했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수가성으로 들어가서 사마리아인들을 만났을 때 사마리아인들의 삶은 물론 그녀의 삶도 다시 변화되었다. 구원도 전도도 복음화도 만남이고 기쁨과 행복과 소망도 만남이다.
셋째, 베드로와 바울의 삶도 만남으로 이루어졌다. 베드로가 주님을 만나고 다시 또 다시 만났을 때 그리고 도르가와 고넬료를 만났을 때 베드로의 인생관이 바뀌어졌고 욥바와 가이사랴의 역사가 바뀌어졌다. 이방에 대해서 가졌던 부정적인 선입견이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다시 또 다시 만났을 때 그리고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났을 때 바울의 인생관이 바뀌어졌고 마게도냐와 유럽의 역사가 바뀌어졌다. 빌립보 강변에서의 두 나그네의 만남은 두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루디아는 마음과 영혼과 집을 모두 열어 바치는 유럽 복음화의 문이 되었고 바울 또한 만남과 나눔을 통한 진정한 기쁨을 누리며 땅끝을 향해 달려가는 이방의 사도가 되었다. 구원도 전도도 복음화도 만남이고 기쁨과 행복과 소망도 만남이다. 인생은 만남이다. 만남을 확장할 때 그만큼 우리들의 삶은 부요해지고 풍부해진다. 동서남북의 만남이 필요하다. 우선 인사부터 하자.
/김명혁 목사
▣ 미래산업
소망교회에 정문술 집사님이라고 있어요. 전 미래산업 회장이신데 이 분이 요 근자에 300억이라고 하는 재산을 카이스트에 연구비로 이렇게 기증을 했습니다. 그래서 화제가 됐습니다. 장안에 화제예요. 300억을 과학기술원에 바쳤다. '도대체 어떤 이유일까?' 했더니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그가 그 사업이 부진하고 연구발전이 안되어가지고 고민하고 있을 때, 회사가 아주 어려울 때,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찾아가서 얘기한 것도 아닌데, 본인이 직접 찾아와서 첨단기술을 전수해 줌으로써 회사가 살아났습니다. "그 고마움, 한평생 내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본인이 찾아와서 그 첨단기술을 전수해 주었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나는 이 은혜를 갚고 싶었어요. 그래서 300억을 드렸다 하는 얘기입니다. 그 사람은 누구냐? 이광형이라고 하는 현재 카이스트의 교수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또 묻습니다. "당신은 어째서 그 회사에 찾아가서 그 좋은, 훌륭한 기술을 전수해 주었습니까?" 그분은 대답합니다. "국가가 저를 선진국 유학까지 시켜서 그래서 나로 하여금 과학기술인을 만들게 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봉사하고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이 정문술 회장과 이광형 교수의 만남, 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요, 또 은혜로 생각하고 은혜를 아는 그런 사람들의 만남의 관계로 그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러분, 내가 찾아가서 만나는 것을 탐구적 만남이라고 하겠지만 타인이 나를 찾아와서 만나 주실 때, 이것은 은총적인 것입니다. 인연이 아니라 이것은 은총입니다. 그걸 잊지말아야 합니다.
▣ 만남에는 그리움이 따른다
꽃은 향기로 서로를 느낀다. 서로의 향기로써 대화를 나누는 꽃에 비해 인간들은 말이나 숨결로써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꽃이 훨씬 우아한 방법으로 서로를 느낀다. 인간인 우리는 꽃에게서 배울 바가 참으로 많다. 적게 만나고, 적게 말하는 것. 만남에는 그리움이 따라야 한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마음의 그림자처럼 서로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으신지요. '한 때의 마주침'이 아닌, 서로의 향기를 오래
주고 받을 수 있는 '그리운 만남'으로 가꿔 나가시기 바랍니다.
▣ 좋은 사람과 사귀십시오
본문: 잠언 1: 10∼19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10절)
인생은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홀로 계시지 않습니다. 삼위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보시기에 좋지 않자 돕는 배필을 만드셨습니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남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다음은 좋은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실 때에도 사람을 통해서 주십니다. 인생의 좋은 기회를 주실 때에도 사람을 통해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축복입니다. 무엇보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만남을 위해 항상 기도할 것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말할 때에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혜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부모님의 교훈과 훈계를 소중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지혜가 그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가 어디 있느냐? 좋은 사람을 만나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사람 사귀는 것을 조심하라고 교훈합니다.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 누구와 함께 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에게서 배우기 때문입니다.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와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하여 자기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19절) 결국 운명이 그와 같아집니다. 우리 자녀들 중에 친구를 잘못 만나서 삐뚤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본래 좋은 아이였는데 좋지 않은 친구를 만나서 잘못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내 자녀가 누구와 사귀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혜로운 자와 사귀면 지혜를 얻고 어리석은 자와 사귀면 욕을 얻습니다. 선한 자로부터 선을 배우고 악한 자로부터 악을 배우게 됩니다. 아무리 부하고 성공하고 출세했어도 그 사람이 악하다면 그 사람으로부터 배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가난하고 어렵고 실패했어도 바른 사람이라면 그로부터 배울 것입니다. 결과만 보고 사귈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좋지 못한 말을 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말 것입니다. 지나치게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사람과 함께 하지 말 것입니다. 불평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 자기도 불평하는 사람이 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시1:1∼2) 감사하는 사람, 긍정적인 사람, 적극적인 사람, 순종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 나도 그와 같이 됩니다. 내가 함께 하는 사람,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사귀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복받을 사람인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하나님께 복받을 사람이면 그와 함께 하는 나도 복을 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사람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하셔서 삶이 복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창환 목사
▣ 만남에 관한 성경 말씀
0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시편85: 10)
0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13:20)
0 어리석은 일을 하는 미련한 사람을 만나느니,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콤을 만나라(잠17: 12)
0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잠22:24)
0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잠23:20)
0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와 더불어 사귀지 말라(잠24:21)
0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
0 다음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떠나시려다 빌립을 만나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요1:43)
0 빌립은 나다나엘을 만나고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책에 썼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찾았다. 나사렛 사람 요셉의 아들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시다."(요1:45)
0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고전5:9)
만남은 우리를 치료합니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열납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삼상 18:1b)
"굿 윌 헌팅"이라는 영화의 내용이다. 보스턴 빈민가의 청년 윌 헌팅은 건달친구들과 어울려 폭행을 일삼는 반항아였다.
그러나 한편 수학자들도 끙끙 앓는 문제를 척척 풀고, 해박한 역사지식으로 하버드 대학생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삐딱한 천재'이기도 했다. 메사추세츠 대학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윌은 수학과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낸 노벨상 수상자나 풀 만한 복잡한 수학문제를 단숨에 풀어내면서 수학과 교수 램보에게 발견된다. 램보는 그에게 체계적인 교육을 시키고 싶어한다
. 하지만 누구도 윌의 거친 성격을 다시리기가 쉽지 않았다. 램보는 절친한 친구인 심리학 교수 숀 맥과이어에게 윌을 부탁한다. 숀과 윌!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다. 숀 역시 고집 세고, 상처 입은 사람으로 마음에 빗장을 지른 채 살고 있었으며, 윌의 상처 입은 영혼을 달래주려 애쓴다.
숀은 윌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며 그가 어린 시절의 혹독한 경험에서 빠져나오도록 돕는다. 숀은 윌의 마음을 열었고, 숀 역시 윌을 통해 자신의 빗장을 풀게 된다. 윌은 결국 어렸을 적 의붓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상처를 치유받게 된다. 윌은 친구들이 조립해 만든 약간 엉성한 차를 생일선물로 받는다.
그리고 숀 선생님을 찾아가 메모를 남긴다. 자기 마음의 상처와 불신감 때문에 헤어졌던 그의 연인 스카일라를 찾아 떠나겠노라고! 그는 뻥 뚫린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신나게 달려간다.
적 용 하나님 안에서 우리들은 서로를 향한 진실한 친구로 부름받았다. 믿음의 지체로서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며 부둥켜안고 기도하도록 우리는 짝지어진 존재들이다. 이를 위해 우리 각자가 먼저 서로에게 다가가는 작은 노력들을 시작할 때이다. 형제의 아픔을 나의 가슴으로, 나의 상처를 형제의 따듯한 품으로 치료할 때이다.
약속된 만남
주께서 무소 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욥기 42:2)
'기쁨의 집'이 문을 연 것은 지난 98년 10월. 현재 '기쁨의 집'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나완숙 간사는 이 집을 마련하기 전에 수중에 가지고 있던 5백만 원을 가지고 방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녀야 했다. 하지만 그 돈으로는 지하방도 얻을 수 없었다.그런데 이 소식을 접하게 된 한 중개인이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하더니 대뜸 근처에 경매로 4년 동안 방치되어 있는 집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또한 집주인으로부터 사용허락까지 받아 주어, 나 간사는 2명의 할머니와 함께 '기쁨의 집' 개원예배를 드렸고, 지금은 여섯 명의 할머니와 나 간사를 포함하여 7명의 식구가 함께 살고 있다. 2년 가까이 '기쁨의 집'을 꾸려온 기간은 매순간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기적적으로 체험한 시간이었다는 나완숙 간사. 쌀이 떨어지면 누군가를 통해 쌀이 들어왔고, 전기세를 못 내고 있을 때는 어디선가 후원금이 들어와 전기세를 낼 수 있었고, 고기가 먹고 싶을 때는 꼭 그 때에 누군가를 통하여 고기를 주셨다. 풍족하지는 못해도 늘 부족함이 없이 채워 주시고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늘 경험했다.
아름다운 만남
성 구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여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눅 6:35-36)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 전쟁을 통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한-일양국 장수의 후손들이 한 향토사학자의 주선으로 종전 4백주년을 맞아 1999년 10월 21일 경기도 고양시 행주산성에서 '화해의 만남'을 가졌다.
'임란 종전 4백주년 기념 한.일 무장후손 친선회'에 참석한 우키다 히데오미(59)씨는 일본이 저지른 침략전쟁에 대한 용서와 화해를 구했다. "임진왜란은 한국인에게 불행하고 참혹한 일본의 침략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화합의 자리를 만들어 주니 고개가 숙여집니다." 우키다 씨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총지휘관이었던 우키다 히데이에 씨의 14대 후손으로 이번 행사 참석을 위해 동료 일본인들과 함께 이날 오전 입국했다.
이에 앞서 우리측 대표인 권율 장군의 12대손 영철(71)씨는 총검을 맞대고 잔혹한 전쟁을 치렀던 장병들의 후손들이 선조들의 원한관계를 청산하고 화합을 이뤄내는 뜻 깊은 자리를 마련했다면서 "오늘 이자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하는 한.일 우호의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친선회에는 한국측에서 권영철씨와 이순신 장군의 15대손 재엽(29)씨, 영의정 유성룡의 14대손 영하(71)씨 등 40여 명이 참석했고, 일본측에서는 우키다 씨와 벽제관 전투의 왜장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18대손 다치바나 무네야키 씨 등 16명이 참석했다.
적 용 세상 살마들도 원수관계를 청산하고 용서와 화합의 새로운 관계를 갖고 자 뜻 깊은 행사를 마련한다. 하물며 예수님을 통해 죄사함을 입은 성도가 원수를 맺고 살아가는 일이 있다면 더욱이 안 될 말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원수를 용서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먼저 용서하는 쪽이 진정한 승리자이며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이다. 출 처 국민일보, 1999, 10, 21
섭리의 만남들
두메산골 교회에서 착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가난한 집 처녀가 주님께 기도했다.
서울가서 신앙 좋은 가정에서 식모살이라도 하며 야간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해 달라
고 했다.
서울의 K권사님은 식모문제로 하도 속을 썩혀서 주님께 기도를 했다. 잘 믿는 착
한 시골처녀 하나 보내 주시면 딸처럼 사랑해 주겠다고 기도했다. 막연한 기대속에
서울역 대합실에 갔다. 의자에 앉아 무릎 위 성경책을 두 손으로 붙잡고 기도하는
소녀가 있었다. 혹시 직장을 구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주님이 만나게 해 주신 것이
다. 이 소녀는 K권사님 택에서 야간 성경학교를 다니며 가족처럼 살다가 마침내 아
느 독실한 집사님과 결혼하여 부부집사로 교회봉사를 하고 있다.
만남에 대한 감사
본문 : 빌레몬서 1:1∼25
‘내가 사람의 줄곧 사랑의 줄로 너희를 이끌었고’(호세아 11:4)
한 소년이 수영을 하다 물에 빠져 죽기 직전에 그 근처 농부의 아들에 의
해 구출됐습니다.도움을 받은 소년은 청년이 된 다음 농부의 아들을 찾아
가 옛 일을 감사하며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그러자 농부의 아들은
의학공부를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습니다.이 이야기를 들은 청년의 부
모는 돈을 대어 그 농부의 아들을 공부시켰습니다.농부의 아들은 의학공부
를 하여 페니실린이라는 약을 발견하고 나중에는 노벨 의학상까지 받게 되
었습니다.
한편 대정치가가 된 소년은 2차 세계대전 중 폐렴에 걸려 죽음의 위기에
처하였으나 농부의 아들이 발견한 페니실린 덕분에 또 한번 살아나게 되었
습니다. 이 정치가가 바로 윈스턴 처칠이고 농부의 아들은 알렉산더 플레밍
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우리는 만남의 신비라고 부릅니다.사람이 살아가면서 만
나게 되는 많은 만남들이 있습니다.그 가운데 하나가 내 인생의 스승(멘토)
을 만나는 일입니다.훌륭한 멘토를 만나는 일이야 말로 인생의 성장에서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헬런 켈러가 탄생하기까지는 설리반이라는 멘토가 있어야 했고 마이클 조
던에게는 딘 스미스(필 잭슨)이,장한나양에게는 무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
치가 있었습니다.플라톤이 있기까지는 소크라테스라는 멘토가 있었고 알렉
산더 대왕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훌륭한 멘토가 있었습니다.룻에게는
나오미가 사무엘에게는 엘리가 있었으며 여호수아에게는 모세가 있었고 엘
리사에게는 엘리야가 있었습니다.바울은 디모데에게 좋은 스승이었으며 요
나단과 다윗은 친구간에 좋은 우정을 쌓았습니다.
이렇듯 성경은 만남에서 만남으로 이어지는 책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
가운데 가장 큰 복이 좋은 만남을 허락하신 일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서 우리에게 좋은 스승을 허락하셔서 온갖 가르침을 주시고 깨우침으로 인
도했습니다.
그들은 적절한 때에 우리가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도전시키고
동기를 부여하기도 했으며 세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돌보아주
기도 했습니다.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사업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오네시모가 어떻게 해서 바울을 만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만남으로 그는 용서받는 사람이 되었으며 빌레몬의 용서로 말미암아 초대
에베소 교회의 주교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끊임없
이 만남을 만들어내고 계십니다.
그 만남에 의해 오네시모는 새롭게 평가되고 있었습니다.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유익’하다고 합니다.실제로 오네시모라는 이
름속에 ‘유익하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나의 삶을 유익하게 해준 그
만남들을 생각하며 감사해 보십시오. 뜻밖에도 ‘감사한다’는 말에는
‘그 가치를 높인다’는 뜻도 있습니다.
기도: 주님, 우리에게 때마다 좋은 만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과의 만
남이 나의 삶에 큰 유익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그
리하여 우리 모두 성숙에 이르게 하시고 삶의 가치를 깨달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음식과 약의 만남
한약을 먹을 때 무를 함께 먹으면 머리가 희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옛 선인들은 이러한 음식과 약의 작용 관계를 사람들 사이의 정처럼 해석했다. 약정(藥情) 혹은 식정(食情)이라 하여 병을 치료할 때나 음식을 요리할 때 쓰이는 재료들이 서로 잘 어울릴지를 살폈다.약이나 음식의 성분이나 칼로리보다는 특유의 성질을 파악하여 조화를 꾀했다. 즉 두가지 약물이 만나서 치료효과를 상승시키는 것을 상수(相須)혹은 상사(相使)라 하여 효과적인 약물의 만남을 말하는 것으로 당귀와 천궁, 인삼과 감초, 숙지황과 맥문동 등은 궁합이 잘맞아 정이 드는 약물의 짝들이다.
예를 들면 인삼만 달여서 복용하기보다는 감초를 함께 달여서 복용하면 더욱 좋은 효과를 거둘 수가 있다. 또 두가지 약물이 만나면 서로 견제하거나 싫어하며 부작용을 유발시킬 수 있는 것을 상오(相惡) 상외(相畏) 상반(相反)이라 하고 두가지 약을 배합하면 상대 약의 독성을 없애버리는 경우를 상살(相殺)이라 하였다.뱀의 독은 웅황과 상살의 관계이므로 뱀독을 해독할 때는 웅황을 쓰면 된다. 또 생지황과 무는 서로 상반되는 성질을 갖고 있어서 약효를 감퇴시킨다. 그래서 생지황을 쪄서 만든 숙지황이 들어간 약을 복용할 때 무를 먹게 되면 흰머리가 난다고 했다. 사실 숙지황이 들어간 약을 먹고 무를 먹어도 흰머리가 나는 것이 아니라 약효를 감퇴시키므로 금기하라는 것을 유희적으로 설명했던 것이다.
떳떳한 만남 이루려면
어느 해 겨울이었습니다.
“목사님 나와 보세요”
사모가 부르는 소리에 귀찮은 듯 일어나며 묻습니다.
“왜?”
짜증 섞이다 못해 신경질적인 대답이 맞을 겁니다. 못 이기는 몸동작으로 옷을 주섬주섬 챙기고 현관문을 열었습니다.
“무슨 일인데?”
이미 그때는 여러 사람들이 전봇대 밑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을 뒤로 하고 한사람이 전봇대 밑에 버려진 쓰레기 봉지를 뒤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에게 다가갔을 때는 구역질이 확 났습니다. 때가 꼬질꼬질 묻은 야전점퍼에 찢어진 여름바지를 입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부랑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토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차림이 아니라 그가 때묻은 검은 손으로 열심히 쓰레기 봉지를 뒤지며 음식물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없이 집으로 들어온 나는 지갑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잔돈은 소풍을 가고 김장철도 아닌데 배춧잎밖에 없었습니다. 이곳저곳 뒤져 잔돈을 찾아 간신히 2000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 전봇대 밑으로 자랑스럽게 갔습니다.
“그런 것 먹지 말고 식사라도 사드세요”
그러고는 도망치다시피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는데…서재문을 닫는 순간 머리가 ‘띵’했습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00원이라니? 지갑에 그것밖에 없었단 말인가? 만원권이 몇장인데…’.
정신을 차린 나는 지갑을 손에 들고 문을 박차고 나갔지만 그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나는 자동차 열쇠를 들고 나가 동네를 몇바퀴나 돌았습니다. 그러나 한번 사라진 그를 다시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용기가 없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해 속칭 거룩한 옷이라 부르는 성의(聖衣)를 벗어버릴 용기와 자신이 없습니다. 1950년대 궁핍했던 나폴리의 소년들을 위해 거룩하고 구별되었다고 하는 강단을 스스로 내려가서 그들과 함께 한 사제 마리오 보렐리같은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난 오늘도 사랑을 외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와 함께 애통해 하십시오.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눈물 흘리십시오”라면서 눈은 허공을 향합니다. 왜 이렇게밖에 못할까? 거룩한 외식된 자로, 교활한 위선자로 성경을 허리에 끼고 어기적거리며 걷고 있을까? 내가 목사가 맞는지 자문자답합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2000원짜리 목사’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강단에서 “베풀어라! 나누어라!”고 소리칩니다.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나는 움켜잡고 놓지 않으면서 거품을 물고 거짓을 토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 선다면 염소로 구별될지, 양으로 설지 깨닫지 못한 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여러분들이 오늘 하나님 앞에 선다면 어느 편에 설 것 같습니까? 양으로서 하나님 앞에 설 자신이 있습니까? 그날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지갑을 열어보는 성도들 되시길 바랍니다.
생명의 만남
세계적인 전도자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어느날 미네소타대학에서 강연하게 되었다.
강당을 가득 메운 교수와 학생들은 「호기심과 기대」를 갖고 그레이엄을 주시했다.
그때 그는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 때문에 만남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것은 생명으로 연결될 수도 있고 파멸로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호기심은 생명으로 연결되어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주인이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만남의 소망
많은 사람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던 배가 갑자기 불어오는 거센 폭풍우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비바람에 흔들리던 배는 그만 뒤집히려는 듯 요동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배안의 사람들은 모두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중 노인 한사람은 아주 평화로운 얼굴로 기도를 드리는게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배가 뒤집혀 다 죽게 되었는데 당신은 두렵지 않느냐고,
그 노인이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나에게는 딸이 둘 있습니다. 큰 딸은 몇년전에 잃고 지금은 작은 딸을 찾아가고 있는 길입니다. 만약 이 배가 뒤집혀 죽게 되면 천국에 있는 큰 딸을 먼저 만나게 될 것이고 다행히 배가 무사히 항구에 닿게 되면 작은 딸을 먼저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만남의 소망을 가지고 있으니 두려울 게 없군요"
만남의 소망
많은 사람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던 배가 갑자기 불어오는 거센 폭풍우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비바람에 흔들리던 배는 그만 뒤집히려는 듯 요동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배안의 사람들은 모두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중 노인 한사람은 아주 평화로운 얼굴로 기도를 드리는게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배가 뒤집혀 다 죽게 되었는데 당신은 두렵지 않느냐고,
그 노인이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나에게는 딸이 둘 있습니다.
큰 딸은 몇년전에 잃고 지금은 작은 딸을 찾아가고 있는 길입니다. 만약 이 배가 뒤집혀 죽게 되면 천국에 있는 큰 딸을 먼저 만나게 될 것이고 다행히 배가 무사히 항구에 닿게 되면 작은 딸을 먼저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만남의 소망을 가지고 있으니 두려울 게 없군요"
만남의 신비와 당위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열납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사무엘 상18 : 1)
시골의 호숫가에 홀로 뛰놀던 소년 하나가 호수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는 런던에서 온 귀공자였으며, 수영을 할 줄 몰랐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시골 소년이 그를 구해 주었다. > 십년 후 그는 시골 소년을 찾아갔다.
생명의 은인인 시골 소년의 근황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때, 시골 소년이 의사가 되고 싶어한다는 것과 가정 형편상 의과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는 시골 친구의 사정을 아버지에게 전했고, 그의 부친은 아들의 친구가 의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맡아주었다. 귀공자의 이름은 윈스턴 처칠이었다.
그리고, 그 시골 소년은 후에 페니실린을 발명한 불세출의 의학자 알렉산더 플레밍 박사가 된다.
1940년 5월 영국이 독일군의 침공을 받았을 때, 전쟁터를 순시하던 처칠 수상은 폐렴으로 눕게 된다. 당시만 해도 폐렴이라면 목숨을 건지기 어려운 불치의 병이었다. 이때 또 한 번 처칠의 생명을 살려낸 것이 바로 플레밍 박사의 페니실린이었다.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이 서로의 생을 크게 변화시켰다.
귀한 만남을 위하여 치르는 희생
" 극히 값진 진주를 하나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 (마태복음 13 : 46)
미얀마 '민주화 둔동의 기수' 아웅산 수지 여사(52)가 임종도 못본 채 끝내 남편과 사별했다. 그녀의 영국인 남편 마이클 아리스가 27일 영국 런던의 한 병원에서 암으로 숨졌다. 이날은 아리스의 53번째 생일이었다.
아리스는 전립선암이 척추와 폐에까지 퍼져 죽음이 임박하자 아내를 만나기 위해 비자 발급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얀마 군사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그가 아내를 거들어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탓도 있지만 실은 '눈엣가시'가 미얀마를 떠나주기를 바랬다.
수개월 전에야 남편이 암과 투병중인 것을 안 수지여사는 크게 상심하면서도 결국 미얀마를 떠나지 못했다. 군부가 다시 귀국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수지 여사는 남편의 사망 소식들 듣고
"항상 나를 이해해준 훌륭한 남편이었다."
며
"어떤 것도 그와의 소중한 기억을 빼앗지 못할 것"
이라고 말했다고 측근들이 전했다.
수지 여사는 영국 옥스퍼드대 재학시절 아리스를 만나 72년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88년 노모의 병환 소식을 듣고 귀국했으며 이 해 일어난 민중항쟁이 무력으로 진압되자 반독재운동에 앞장섰다. 비폭력저항운동으로 91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적 용 누구나 귀한 만남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희생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경우 그 희생은 희생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데 요즈음 기독교인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너무 시시하게 여긴다. 교회에서 하나님과 만나기 위하여 갖는 여러가지 프로그램들을 시간과 견주어 보기도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주일 예배를 친구의 결혼이나 TV의 프로그램과 바꾸기도 하고 날씨가 좋을 경우 그 시간에 가족끼리 야유회를 가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만남은 우리의 목숨을 걸고 이루어내야 하는 귀한 만남이다. 그 만남을 통하여 풀리지 않는 문제가 해결받고, 삶 자체가 변화하고, 영원한 죽음 대신에 영원한 복락의 삶이 주어지게 된다. 그 만남에서 주어지는 기쁨은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만남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끊을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노력해야 하겠다. 영원한 만남을 위하여...
섭리의 만남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신부 리브가를 나홀의 성 어느 우물가에서 만나고, 요셉
이 노예생활, 옥중생활 가운데 꿈 해몽하는 일로 애굽왕 바로를 만나 총리대신이 된
일, 다니엘과 바벨론 왕과의 만남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섭리의 만남이었다.
나는 처음 만나 25분 얘기한 사람에게서 35만불의 헌금을 얻은 일도 있다. 부산으
로 출장간 청년이 일주일간 여관 근처 교회에서 새벽기도 하다가 맨 늦게까지 남아
기도하던 처녀와 결혼하게 된 만남, 앞 버스를 놓치고 다음 버스를 기다리다 만난
친구 권유로 C.C.C. 수련회에 와서 만난 학생과 부부가 되는 만남등 촌분마다 섭리
의 손길은 우리를 인도하신다.
제목:이웃
어느 동네에서 차에 짐을 싣고 그 동네를 떠나 어디론가 이사가는 사람이 있었다. 식구들을 다 이끌고 다른 동네로 떠나가 버렸다. 그는 그 동네를 떠나면서 하는 말이 "이 동네는 사람이 살 곳이 못됩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모두 무식하고, 가난하고, 예절도 모르고 욕심도 많고, 싸움질만 하고....그래서 우리는 생각다 못하여 이 동네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하였다. 그런데 그날 같은 시간에 다른 한 사람은 식구들을 데리고 그 동네로 이사해 들어왔다.
역시 차에 짐을 싣고, 그 동네를 떠나가는 그 사람이 살던집을 사서 그리로 이사를 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이 동네 사람들이 가난하고, 무식하고, 많이 앓기도 하고, 불행하게 산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의 이웃이 되어 볼까 하여 이 동네로 이사 오기로 하였읍니다. 나는 우리 식구들과 함께 그들을 힘 자라는 대로 도와 볼까 합니다"라고 하였다.
제목:이웃사랑, 하나님이 갚으심.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어느 날 전 재산이 반 크라운(2실링 6펜스)밖에 안 되는데, 마침 가난한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갓난 아기를 안은 어머니가 몸져 누워있었다. 하룻밤을 넘기기 힘든 엄마와 아기였다.
"이 돈이 1실링짜리 동전 3개와 6펜스 동전 하나라면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1실링을 기쁘게 줄텐데!"하는 생각이 그에게 들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늘에는 자비로우시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가 계십니다."라고 권면하면서도 속에서는 '이 위선자, 이 사람들에게 사랑 많으신 하나님 운운하면서 네 주머니에 반 크라운을 움켜쥐고 있다니!' 하는 소리가 그의 가슴속에 울려왔다. 마음에 가책을 받은 그는 그들에게 자기가 갖고 있던 반 크라운을 꺼내 주었다. 그리고 시골길을 지나 단칸방으로 걸어오는 발걸음은 그의 빈 주머니만큼이나 가벼웠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사랑하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주는 자는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 빌려드린 것이 오래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저는 내일 점심부터 굶어야 합니다." 다음날 우체부 편으로 반 소프린(10실링)의 금화 하나가 우송되어 왔다.
제목:이웃 삼촌반(三寸半)
옹진골 옹당촌에 옹(雍)좌수가 살고 있었다. 재물은 많은데 인색하고 심술이 맹랑하며 매사를 고집으로 우겨대는지라 도사(道士) 하나가 옹좌수가 꼭 닮게 둔갑하여 옹좌수 집을 찾아든다. 진짜 옹가와 가짜 옹가가 서로 옹좌수임을 두고 패고 치고 싸운다. 양옹(兩雍)이 옹옹(雍雍)하니 이 옹 저 옹 분별하지 못해 관가에 송사를 한다. 진옹(眞雍)이 패소하여 곤장 30대를 맞고 유배당하며 가옹(假雍)이 그 많은 재물과 아내를 차지한다.
한지붕 밑에 1년 남짓 같이 살면서 서로를 모르고 살던 두 가장이 야반에 만나 서로 내 집이니 서로 도둑이니 패고 치고 싸우다가 옥상에서 떨어져 살상(殺傷)을 빚고 있으니 진옹 가옹을 다투는 옹가네 싸움을 연상케 한다.
옹가네 이야기는 웃어넘길 수 있지만 이 현대판 옹가네 이야기는 오늘날 사회의 아프디 아픈 치부(恥部)를 눈부시게 조명해 주고 있어 처참하다.
송(宋)나라 때 여승진(呂僧軫)이란 이가 새 집을 샀다. 누군가 집 값을 물으니 1천 1만 금이라고 했다. 무슨 놈의 집이 그렇게 비싸냐고 하자, 1만 금으로는 집을 사고, 1천만 금으로는 이웃을 샀다고 말하고 있다. 이웃과의 화목공존을 얼마나 중요시했던가 손에 잡히는 듯하다.
중종 때 학자 김정국(金正國)도 `천금으로 밭을 사고, 만금으로 이웃을 산다'는 시를 남기고 있다. 그리고 그가 지은 향약문(鄕約文)에 보면 이웃은 사촌(四寸)이 아니라 삼촌반(三寸半)이란 말을 하고도 있다.
이웃에 초상 같은 애사(哀事)가 나면 그 이웃들은 심상(心喪)이라 하여 반찬 가짓수를 줄였으며 심지어는 부부간에 합방(合房)도 하지 않음으로써 이웃의 슬픔을 공감(共感)하였다.
이웃간의 담장에 암키와(雌瓦)와 수키와(雄瓦)로 구멍을 뚫어놓게 마련인데 이를 `비린 구멍'이라고 불렀다.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 아닌 별식(別食)을 만들었을 때 그 별식을 주고받기 위한 구멍인 것이다.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비롯하여 멸치까지를 포함한 각종 어육(魚肉) 음식을 별식으로 쳤고 어육류를 비린 음식이라 했기에 비린 구멍이란 이름이 생겼을 것이다. 따습고 진한 정이 오갔던 정신적 구멍이 아닐 수 없다.
이 이웃 삼촌반이 근대화 과정에서 이웃 백촌(百寸), 아니 이웃 무촌(無寸)으로 촌간(寸間)이 멀어져 왔다. 그리하여 이웃 아닌 한지붕 아래 살면서 서로를 모르고 살다가 네가 옹가니 내가 옹가니 하고 싸우다가 추락 사상을 빚고만 이 해프닝은 웃어넘길 수만 없는 신랄한 현실 고발이 아닐 수 없다.
제목:이웃사촌
얼마나 가까운 피붙이인가를 나타내는 촌(寸)수, 우리는 전통적으로 이 촌수를 사용하여 친척간의 멀고 가까운 관계를 표시해 왔습니다. 한 가정 안에서는 부모와 1촌·형제와 2촌이지만, 일단 가정을 벗어나서는 아무리 가깝다 해도 3촌 이상입니다. 따라서 한 부모 아래서 태어난 형제들 말고는 비슷한 나이 또래의 사촌 형제만큼 친하게 지내는 친척이 없습니다. 사촌들은 인생을 살아야 하는 기간이 거의 맞물리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싸움도 곧잘 하며 커서는 집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함께 처리해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처럼 가까운 사촌들도 혼인하여 살림을 차리게되면 뿔뿔이 흩어져 일 년에 한두 번 만나기도 힘들어집니다. 집안의 아주 큰 일을 제외하고는 매순간 겪어야 할 시련을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합니다.
그때마다 도움을 주고 받는 사람들은 바로 주변의 이웃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이웃을 사촌으로까지 여길 정도로 가까와지곤 합니다. 우리 민족은 이웃 사촌이라는 친숙한 관계를 향약, 두레, 품앗이 등의 풍습으로 더욱 굳건히 해 왔습니다. 이렇게 다져온 이웃간의 공동체성은 근대화 물결과 더불어 밀어 닥친 개인주의적인 속성들로 말미암아 점차 깨어져 가고 있습니다. 아파트촌에서는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아침 저녁으로 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녀도 인사조차 안하고 지나칩니다. 이처럼 이웃간의 정이 메말라짐에 따라 온갖 범죄와 소외감이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사람이 살만한 지역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웃 사촌으로서의 친숙한 관계를 회복시켜 나가야 합니다. 더군다나 핵가족 제도가 정착화됨에 따라 가정마다 한두 자녀밖에 없는 이 시점에서는 아이들의 원만한 인격 형성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합니다 참조;잠27:17
불우한 이웃에 대한 관심
어느 날 밤 한 남자가 나를 찾아와 말했다.
"아이들이 여덟 명이나 되는 가정이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 가난해서 벌써 여러 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내가 그 남자와 함께 그 집을 찾아갔을 때 아이들은 오랜 영양실조로 얼굴이 뼈만 남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슬픔이나 불행 같은 표정은 없었다. 단지 배고픔의 깊은 고통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집의 어머니에게 쌀을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쌀을 두 몫으로 나누더니 절반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녀가 돌아 왔을 때 내가 물었다.
"어딜 갔다 오셨습니까 ?"
그녀는 간단히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웃 집에요. 그 집도 배가 고프거든요!"
나는 그녀가 쌀을 나누어 준 것에 대하여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은 실제로 더 많이 나눌 줄 아니까.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그녀가 이웃집이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개 우리 자신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는 자신의 고통만을 생각하나,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마음을 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마더 테레사>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2:4) 한 여행자가 말과 당나귀에 짐을 싣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기뻤으나 도중에 당나귀가 먼저 지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나귀는 동행하는 말에게 "견디기 힘이 드니 나의 짐을 조금만 덜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같이 친구 삼아 가던 말은 당나귀의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결국 힘에 지친 당나귀는 얼마 못 가서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주인은 당나귀가 지고 가던 모든 짐과 죽은 당나귀의 털가죽까지도 벗겨 말의 등에 실었습니다. 결국 울상이 된 채 그 여행이 다 끝날 때까지 말은 큰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돕고 보살펴야 쉬워집니다. 혼자만 잘 살려다가 결국은 고난을 혼자 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나의 일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해장국보다 더 진한 이웃의 정
" 또 주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 (사도행전 20 : 35)
부산 사상구 엄궁동의 '외갓집 사골 해장국' 주인 박기인(40)씨는 요즘 손님을 맞을 때마다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박씨에게는 '손님'이라는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개업한 지 1년밖에 되지 않는 박씨는 지난 6일 남들처럼 불우 이웃을 돕기 위한 성금을 위해 하룻동안 해장국을 서비스 했다. 그리고 출입구 옆에 성금함도 갖다 놓았다. 마음껏 먹고 마음껏 돈을 내라는 뜻이었다.
물론 그냥 나가도 되는 '자율 모금'이었다. 행사 당일 주방에서 나간 해장국은 모두 200여 그릇. 한 그릇에 4천원이니 어림잡아 80여만원어치다. 손님에세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모금함을 제대로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그냥 나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영업이 끝난 뒤 함을 열어보니 무려 103만 5천원이나 들어있는게 아닌가. 박씨는 이날 자선 행사를 위해 아르바이트생을 쓰려고 했지만 그마저 동네 새마을 부녀회원들이 몰려와 설거지, 홀서빙 들 무료 봉사를 해준 덕분에 한 푼이라도 더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 7일 아침, 동사무소에 "의탁할 곳 없는 어르신네들을 위해 써 달라"는 부탁을 하고 돌아 온 박씨는 요즘 30여평 가게에서 사골 해장국보다 더 구수한 인정과 사랑의 내음을 맛보며 살고 있다고 한다.
적 용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생각난다. 이 말은 사람에게서 따뜻한 마음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IMF체제가 우리에게 준 예기치 않은 선물은 어려운 이웃을 한 번쯤 더 돌아보며, 그들을 돕는 일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고 하는 마음이다. 삶의 기쁨은 지극히 평범하고 상투적인 모습을 빌려 우리에게 찾아 오곤 한다. 또한 우리가 삶의 기쁨을 찾아가는 모습도 그러하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이웃에 사랑과 관심을
연말이 다가오면서 신문이나 방송 등 각종 매스컴에서는 우리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는 내용이 보도되고 있지만 꽁꽁 얼어붙은 경제 탓인지 별다른 호응도가 없어 우리 사회가 자꾸만 메말라 가고 몰인정하게 변해 버리지 않나 하는 느낌이다.
연말까지는 아직 어느 정도 시간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하지만 예전 같으면 벌써부터 사회단체나 종교단체 등을 중심으로 불우이웃돕기 자선행사가 벌어지고 있을 때이고, 많은 주민들이 이러한 움직임에 호응 쌈지돈을 털어 기부하거나, 일부 독지가들은 선뜻 불우이웃을 위해 써 달라며 목돈을 쾌척하기도 하는 등 훈훈한 인정이 감도는 그런 때였음을 생각해 보면 결코 시기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물론 각 단체나 읍·면별로 어려운 이웃들에게 김장을 담가 준다든지, 불우시설에 땔감을 마련해 준다든지, 또는 먹거리를 마련해 준다든지, 아니면 주민들 각자가 숨어서 남모르게 인정을 베푸는 경우 등은 간헐적으로 있지만 전반적으로 예전과 같이 풍성한 불우이웃돕기 운동이 펼쳐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하는 일이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까지 메말라 가고 있는 데에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IMF영향도 있고, 대기업체의 부도로 대규모 감원이 이루어지는 등 우리나라 전체가 심한 경제침체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라고 자위해 보지만 올 연말은 왠지 쓸쓸하고 삭막한 연말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우리의 경제가 어렵고 모두가 힘들게 생활한다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따뜻한 인정마저 닫아 두어서는 안된다.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법이다.
가진 것이 풍족할 때 나눠주는 것보다 비록 풍족하지는 못해도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나눠주는 것이 더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이 복지사회이다. 이러한 복지사회는 나 혼자만이 호의호식하고 잘 산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나눔의 미덕을 베풀 때 비로소 우리 곁에 다가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동운명체라는 인식 하에 나 혼자가 아닌 우리 모두가 잘 살 수 있도록 도울 때에만 복지사회는 현실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따스한 인정이 그리운 연말이 가까워 졌다. 모두 닫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우리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내 주길 당부해 본다
'네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라'는 소명으로
교통사고를 통해 나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거듭나는 삶을 주셨다.
아직도 쓸모가 있어 나를 때리시고 살려 주셨으니 "나는 무엇으로 하나님 은혜에 보답할까?" 고민하던 끝에 내 남은 인생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데 사용해야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기도하던 중 불우한 소년소녀 가장들을 돕기로 마음먹고 지금은 12가정의 29명의 소년소녀 가장을 보살피고 이들의 생계를 도와주고 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또한 같이 생활하면서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에서 그들에게 보호자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이들의 모임인 소망회를 설립하여 앞으로 전국의 불우한 소년소녀 가장들을 도울 수 있도록 늘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틀림없이 하나님께서는 이 죄인을 도와 주실 것을 믿고 다시 태어난 이 생명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강도 만난 이웃에 무심했던 부끄러움
어떤 현자는 이렇게 물었다.
"북한에선 그동안 주민들이 김일성이를 보고 열광했는데
그렇다면우리는 무엇을 보고 열광 했겠습니까?"
머뭇거리자 그는 `돈이 아니던가요?'
질문하듯이 답을 풀어놓았다.
그렇다. 그들이 사람을 보고 열광하는 동안 우리는 돈을 보고 열광하고 성공을 보고 열광했다.
TV에 비친 그들의 모습이 어딘가 광신적이었다면 하나님 눈에 우리들은 어떻게 비쳤을까? 그게 궁금하고 부끄럽다.
요즘 한겨레 신문엔 조정래 님의 `한강'이 연재되고 있다.
월북자 아버지를 둔 유일민 유일표 형제의 몸서리치도록 기막힌 삶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우리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이 삶을 감시당하고 박탈당할 때 우리는 돈 세는 즐거움으로 살았다. 그러한 사람들이 있는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들이 곧 강도만난 자였던 것을 우리는 왜 몰랐을까
참된 이웃사랑
성 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뇨." (로마서 10 : 42)
오창석씨는 지난 13일 한양대병원에서 10년간 신부전증으로 고생해온 송장훈(18,동양공고 전자과3)군에게 자신의 신장을 기증했다. 오씨는 같은 병실에 입원한 오군에게 "젊은 사람의 장기를 받았더면 더 좋았을텐데 미안해서 어쩌지."라며 농섞인 말을 건네 송군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신장이 온전하게 기능을 발휘할 때 남에게 주고 싶었다."는 그는 "부디 건강을 되찾아 열심히 살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오씨가 신장기증을 결심한 것은 수년 전 서대문교도소에서 사형이 집행된 유괴범의 염을 하면서부터이다. 오씨는 "인간의 탈을 쓴 악마"로 불렸던 범인이 죽기 전에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다는 말을 듣고 "산 자는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오씨는 90년부터 무의탁 노인들을 집에 모셔왔으며, 경기 시흥의 양로원 '섭리의 집' 등 네 곳의 불우 시설에 매년 2,000여 포기의 김장김치도 담궈 보내고 있다.
장작패며 이웃 도운 대학총장
유명한 흑인 교육가 부커 워싱턴 박사가 앨라배마에 있는 터스키기 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한 후 그 지역의 부자들이 살고 있는 동네를 산책하고 있었다.
그때 어느 백인 부인이 그가 워싱턴 박사인줄 모르고 그냥 지나가는 흑인이려니 해서 멈춰 세우고 몇 달러 줄테니 장작이나 패달라고 요청했다.총장은 그때 특별한 일이 없었고 시간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웃으며 소매를 걷어붙이고 장작을 패서 그녀의 벽난로 옆에 차곡차곡 쌓아주었다.일이 다 끝나 그가 돌아간 후 그집 흑인 하녀가 그를 알아보고 주인에게 알려주었다.
그 부인은 너무 부끄럽고 당황해서 다음날 아침에 총장실로 찾아가 백배 사죄했다.그러자 부커 워싱턴 총장은 “부인,괜찮습니다.저는 가끔 가벼운 육체노동을 좋아합니다.그뿐입니까.이웃을 위해 돕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지요”하며 위로를 했다고 한다.
정말 겸손한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하나님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사람을 세워주신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태복음 23:12)
위기의 이웃 위해 사랑의 손 내밀자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주변에 여러 인물들이 나옵니다.강도 제사장 레위인들과 선한 사마리아인인데 강도는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서 자기의 목적을 이루겠다는 사람이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전에서의 모습과 세상에서의 모습이 판이하게 다른 쭉정이 직분자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자기의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면서 강도 만난 자를 살려내는 좋은 이웃입니다.여러분이 생각할 때 이 세 종류의 사람 중에 누가 가장 행복하고 가치있게 그리고 인생의 성공자로 살았다고 생각되십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면서 자기의 목적을 이루려했던 강도입니까.아닙니다.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놓고 자기만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직분을 받아 성전에서의 삶과 세상에서의 삶이 전혀 다른 제사장과 레위인이 행복한 인생입니까.이웃이 죽어가도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로 사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가치있는 인생입니까.이처럼 하나님의 성품과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에게 기쁨과 평안이 있을까요.
인생의 가치와 행복은 받는데 있지 않고 주는데 있습니다.덕을 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덕을 베푸는데 있습니다.이런 측면에서 볼 때 가장 행복하고 가치있는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부르시고 훈련하셔서 쓰시는 모든 일꾼을 보면 모두가 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이었습니다.하나님은 요셉을 선한 사마리아인 삼아 가뭄과 기근의 강도를 만난 이스라엘 가족과 애굽을 살리셨으며 모세를 사마리아인 삼아 강도 만나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심도,바울을 부르심도,나와 여러분을 부르심도 바로 이 시대의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삼으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찾아 보기 힘드니 어찌된 일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보다 교회 밖에서의 삶이 더욱 중요합니다.사실 우리의 선교지는 저 아프리카만이 아닙니다.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가정이며 직장이며 동리입니다. 불신 영혼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우리의 선교지입니다.
주일이 되면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당에 나옵니다.예배를 통해서 은혜와 능력을 힘입고 우리는 다시 우리의 사역지인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는 예배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사역이 끝난 것으로 생각합니다.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으로 음부의 권세에 생명을 빼앗기고 피투성이가 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이 땅은 소망이 있습니다.우리 모두 가정에서,직장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됩시다.이것이 한국을 살리는 길이요, 이와 같은 삶이 바로 우리 인생을 가장 행복하고 가장 가치 있게 만들 것입니다.
이웃돕기는 왼손도 모르게
우리나라는 체면을 중시하는 민족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사상을 귀히 여겨왔다. 선조들은 어려운 이웃을 도울 때 받는 자의 체면을 생각해서 모르게 도와주었다. 우리는 그 지혜로운 선조의 후예다. 수 년동안 가뭄과 홍수로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녘 동포가 있다. 다행스럽게 정많은 분들이 앞장서서 도움의 손길을 보내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다 퍼준다’고 요란을 피우는 것 같다.
길거리나 전철 안에서 불쌍한 사람에게 호주머니를 털어 도와주는 사람 중에는 어린이가 많다. 그들은 몇푼 주었다고 함께 사진 찍자고 하지 않고 다 퍼주었다고 자랑하지도 않는다. 성경에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갈 자가 없다”고 하심은 요란을 떠는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말씀이리라.어린아이들의 코묻은 동전부터 노인의 쌈짓돈까지 모아 북한을 도우려는 아름다운 손길에 찬물을 끼얹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생색내며 돕는 것은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 민족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다.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실천하는 사랑의 정신을 가져야 하리라
이웃 사랑
성경: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잠27:10)
중종 때 학자 김정국은 '천금으로 밭은 사고, 만금으로 이웃을 산다'는 시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은 향약문에 보면 이웃은 사촌이 아니라 삼촌반이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웃에 초상 같은 애사가 나면 그 이웃들은 심상이라 하여 일정 기간 동안 상주와 똑같은 근신을 했습니다.
이웃간의 담장에 암키와와 수키와로 구멍을 뚫어 놓게 마련인데 이를 '비린 구멍'이라고 불렀습니다.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 아닌 별식을 말들었을 때 그것을 주고받기 위한 구멍인 것입니다.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비롯, 멸치까지를 포함한 각종 어육음식을 별식으로 쳤고 어육류를 비린 음식이라 했기에 비린 구멍이란 이름이 생겼을 것입니다. 따뜻하고 진한 정이 오갔던 정신적 구멍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까이에 살면서 늘 만나는 이웃이 멀리 떨어져 살면서 뜸하게 만나는 사촌보다 훨씬 더 다정하고 낫다는 말입니다. 환난을 당했을 때 친구와 이웃은 누구보다도 나의 사정을 잘 알고 물심 양면으로 도와주며 힘과 용기를 주어 환난을 이겨내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친구 관계, 이웃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 묵상: 당신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삶에서 실천하고 있습니까
장기기증은 '이웃사랑'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이사장 김상복 목사)는 창립11주년을 맞아 충 633건에 이르는 비혈연간 신장이식결연에 대한 현황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신장 기증인에 대한 분석 결과 성별로는 전체기증인 가운데 남성이 375명, 여성이 258명으로 남자의 신장이식 건수가 월등히 많았는데, 이는 여성의 경우 미혼인 여성은 기증을 금하고 있고, 배우자의 동의를 얻을 경우 남편보다는 아내를 설득하기가 훨씬 용이한 점 등이 작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기증 동기로는 가족에게 기증하는 경우보다는 신앙적인 동기나 이웃사랑의 실천으로 기증한 경우가 전체의 68.7%인 435명으로 조사됐다. 연령별로는 30,40대가 가장 많았으며 서울의 경우가 타 지역보다 월등히 높게 나타났다.
이번 조사에서 눈의 띄는 것은 신장기증인의 경우 종교별로 봤을 때 기독교가 64.3%로 반수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장기기증이 고통당하는 이웃에게 새생명을 준다는 의미가 기독교의 '이웃사랑' 정신과 일치해 기독교인들이 장기기증에 많은 참여율을 보이는 것으로 조사됐으며, 운동본부의 홍보활동이 주로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점도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여진다.
좋은 이웃이 되는 길
하루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참다운 영생을 얻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며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를 일컬어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정한 사랑이 어디에 근본을 두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알지만 하나님의 참사랑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특징은 내가 먼저 받는 사랑이 아니라 내가 먼저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사랑은 주는 사랑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랑만 받으려 하고 베푸는 사랑이 없기에 사랑의 근원이요 공급처가 되어야 할 교회마저도 사랑이 메마르고 기갈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앞서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환경, 조건을 초월한 아가페의 사랑,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교회는 상처받고 환난받고 고통당하는 자들의 피난처가 되어야 하고 나아가 외로운 자들에게 휴식처요 평안한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길거리를 방황하는 노숙자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육적인 경제가 어려워서 생겨난 노숙자들보다도 영적인 노숙자들이 더욱 방황하고 있는 데 문제가 있고 그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마다 거리에서 방황하는 노숙자들을 위해서 밥도 주고, 빵도 주고, 옷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그들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임시방편임을 압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나누어줘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교회에서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비롯한 국민 모두의 관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그러나 영적인 노숙자들은 육신의 먹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 우리 목회자, 우리 성도들이 마음과 힘을 합해 통회하며 가슴을 찢는 회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고난과 헌신, 희생없이는 그들을 구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다시 깨어 성령운동을 전개하고 성령의 불을 던져야 합니다. 교회가 살아야 국가가 살 수 있습니다.목회자가 살고, 성도가 살아야 모든 이에게 구원의 역사가, 천국이 확장됩니다. 국가를 탓하고 정치가 부패했다고 탓하기 전에 교회가 교회로서의 기능을 잃어가고 목회자가, 성도가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음을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의 구원자가 사마리아인이었다면 오늘날 마귀에게 세상에서 상처받고 신음하는 인간들의 구원자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는 모든 세상 사람들의 좋은 이웃이 되어 그들에게 기쁨과 소망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내가 너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하면서 우리 모두 “나도 이같이 행하리라”는 다짐을 하길 원합니다.
불우한 이웃의 필요에 민감하라
성경: 신명기 24:17-18 이스라엘 사회에서 타국인, 고아 그리고 과부는 사회에서 불우한 처지에 있는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타국에서 온 사람들은 가진 것이 별로 없고 또한 새로운 환경에서 살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아나 과부도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처지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과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일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필요에 민감하라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명령하고 있습니다. 나는 불우한 이웃의 필요에 대해 얼마나 민감하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일시적인 도움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명령을 주시면서 그들 자신이 이전에 애굽에서 노예였을 때 하나님께서 긍휼로 그들을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명하십니다. 한때 내가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어려웠던 시간이 있었다면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주위를 잘 살펴보십시오.
불우한 이웃에게 나누어주라
성경: 신명기 24:19-22
이스라엘은 농경사회로서 농산물을 수확할 때 일부를 남겨두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떨어진 것을 수확하여 먹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사회에서 문자 그대로 적용하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그 정신은 여전히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이 명령은 불우한 이웃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주라는 말씀입니다. 일시적으로 성탄절 때 도와주는 것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좀더 구체적으로 일상적인 삶에서 이러한 것을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근본 정신으로 하나님이 베푸신 구속의 사건을 두 번이나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18, 22절). 우리는 하나님이 그 은혜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신 것을 기억하고 일상적인 삶에서 주변에 있는 불우한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선을 베푸는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웃 사랑
성경: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9-40)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은 당연히 지켜야 할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님께서 자녀들이 부모님을 공경하고, 또 형제 자매간에 우애와 사랑으로 살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녀가 그 부모를 닮듯이 우리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형제를 멸시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예물을 드리며 찬송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이웃 사랑에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 이웃에게 어떤 사랑을 줄 까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웃 사랑
성경: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잠27:10) 중종 때 학자 김정국은 '천금으로 밭은 사고, 만금으로 이웃을 산다'는 시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은 향약문에 보면 이웃은 사촌이 아니라 삼촌반이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웃에 초상 같은 애사가 나면 그 이웃들은 심상이라 하여 일정 기간 동안 상주와 똑같은 근신을 했습니다.
이웃간의 담장에 암키와와 수키와로 구멍을 뚫어 놓게 마련인데 이를 '비린 구멍'이라고 불렀습니다.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 아닌 별식을 말들었을 때 그것을 주고받기 위한 구멍인 것입니다.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비롯, 멸치까지를 포함한 각종 어육음식을 별식으로 쳤고 어육류를 비린 음식이라 했기에 비린 구멍이란 이름이 생겼을 것입니다. 따뜻하고 진한 정이 오갔던 정신적 구멍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까이에 살면서 늘 만나는 이웃이 멀리 떨어져 살면서 뜸하게 만나는 사촌보다 훨씬 더 다정하고 낫다는 말입니다. 환난을 당했을 때 친구와 이웃은 누구보다도 나의 사정을 잘 알고 물심 양면으로 도와주며 힘과 용기를 주어 환난을 이겨내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친구 관계, 이웃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물난리와 이웃사랑
낙동강을 따라 살아가던 이웃들이 수해를 입어 슬픔에 잠겼다. 밀려온 물에 침수됐다가 물이 빠지니 쓰레기와 진흙 등으로 전답과 가옥이 성한 데가 없다. 이삭이 팰 논의 벼들은 줄기가 썩어 주저앉았고 김장거리 채소들은 녹아서 흔적조차 없다. 물구덩이에서 살아난 이웃들은 전쟁을 치른 느낌이라 했다. 물속에서 구사일생한 무용담은 계속 들어도 다음이 궁금하다. 고립되어 있는 동안 날라다주는 빵과 라면은 전쟁통에 주먹밥을 받아먹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어려움을 겪어보니 라면도 배불리 못 먹는 이북동포가 생각났다는 초로의 마음은 정의 민족임을 실감나게 한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더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는 정의 문화가 있기에 미래가 밝다. 어려울 때 함께 하는 우리 민족의 정은 십시일반의 지혜다. 낙동강 물길을 안고 사는 윗동네 함안으로부터 아랫동네 한림면까지 이웃의 한숨소리는 가슴을 아리게 한다. 아픔을 당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한달음에 달려온 이웃 주민들이 도움의 손길을 보태고 있다. 따스한 손길에 눈물을 닦고 일어서자. 이번 물난리에 얻은 것은 이웃사랑이다. 아픔을 위로하고 극복하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미소가 보이는 듯하다.
향기를 품어 이웃에 전하자
노먼 필 박사의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헐값으로 조그마한 토기를 샀습니다. 그 토기 속에 장미 향수를 넣어 두었는데 얼마 후에 보니 향수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어느날 그 토기를 잘못 관리해서 마루 위에 떨어뜨렸는데 산산조각 났습니다. 그러나 하나 하나의 파편이 계속해서 장미 향기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사실 사람은 토기처럼 평범한 흙으로 지어진 질그릇과 같습니다. 그 질그릇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에 따라 향기의 내용이 각양각색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를테면 질그릇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다고 하면 그의 말이나 눈짓이나 얼굴, 행동에는 온통 사랑의 향기가 풍겨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시기, 질투, 미움이 담겨있다면 말이나 눈짓이나 얼굴, 행동에는 온통 미움의 악취가 풍겨 나올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은 기독인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내는 운동, 곧 ‘그리스도의 향기운동’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린도후서 2:15)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삶을 살되 특별히 사랑의 향기를 풍기는데 최선을 다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나를 살린 이웃사랑
존 록펠러는 그의 나이 53세에 세계에서 한 사람뿐인 억만장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즈음 그는 탈모에 몸이 오그라드는 독두병에 걸려 의사로부 터 1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그는 웃음과 삶의 의미를 잃
고 불면의 밤을 보냈다.
그러다 어느날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며 내세에 갖고 갈 것도 못된다는 것을 깨닫고 「록펠러재단」을 설립, 교회를 세우고 극빈자를 돕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는 웃음을 되찾았고 건강도 회복, 무려 98세까지 살았다.
이웃 사랑
아르헨티나에 "한 영혼도 예수님께 인도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말하는 할머니 한분이 있었다.
그 할머니는 오랫동안 교회에 출석했었다.
그런데 어느날 주님께서 이 할머니에게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다. 할머니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경건서적을 내려 보내신 것이 아니라, 오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사시며 사라들을 고쳐 주신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깨달았다. 그분은 우 리를 도우셨고 우리와 나누셨다. 이 할머니는 자기도 같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의 앞 집은 세를 주려고 내놓은 집이었다. 사람들 집에 이사오자마자 할머니는 준비를 갖추었다. 커피와 도넛을 가지고 가서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먹을 것을 조금 가지고 왔수. 방금 이사를 와서 무엇이라도 해먹을 겨를이 없겠지 내 가서 그릇을 가져오리다. 바쁜데 설거지를 언제 하겠수." "아, 그리고 식료품 점을 알고 싶다면 내 가르쳐 드리리다. 식료품 점은 저기 저 구석에 있수..." 할머니는 도넛 밑에 복음을 위한 어떤 것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 음식을 가져가서 그들을 대접했을 뿐이다.
잠시 후 할머니는 그릇을 가지로 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뭐든지 또 필요하면 내게 말하시우. 무엇이든지 기쁘게 도와드리리다." 할머니는 결코 그리스도에 관해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달 후에 그 가정은 할머니가 그들에게 비춘 빛 때문에 모두 세례를 받게 되었다. 예수님은 "이같이 너희 말을 사람에게 말하여 저희로 너희의 멋진 말을 듣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너희 빛을 비추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빛이란 곧 사랑이다.
이웃 돕는
"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 (신명기 10:18)
울산 현대중공업의 최봉락(조선사업부 건조5부·47)씨는 매달 한 두 번 20㎏짜리 쌀자루를 짊어지고 후미진 골목을 돌아 대문도 없는 집을 찾는다.
쌀가게 주인으로 오해할 만큼 1년 가까이 쌀자루를 메고 다녔지만 주위에선 아직도 그가 누군지 잘 모른다.
최씨가 퇴근길에 「쌀자루 순례」에 나서는 집은 동구 남목3동 관내의 김모(83)옹 등 무의탁 홀로 사는 노인과 생활보호대상자 6가구. 최씨는 이들이
"하루 세끼 끼니라도 제때 해결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이 일을 시작했다."
고 했다.
그렇지만 이들 가정에선 정작 최씨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밝힌 적이 없기 때문이다. 쌀자루와 라면 박스를 전달할 때는 함께 간 동사무소 사회복지 부녀요원인 김진희(49·여)씨에게 슬쩍 넘겨 줄 뿐 정작 자신은 빠져 버린다.
선박건조 현장근로자인 최씨가 봉사활동에 나선 것은 지난 90년부터. 당시에는 회사 동료들과 함께 어려운 이웃의 집수리를 도맡아 해주곤 했다. 그러다가 IMF로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이웃들이 여기저기 생겨나자 남몰래 주머니를 털기 시작했다. 백화점 애프터 서비스센터에 근무하는 부인 김순옥(40)씨는 남편의 숨은 봉사활동의 든든한 후원자. 최씨 부부는 주말이면 선물꾸러미를 들고 인근 양로원을 찾곤 한다.
최씨는 또 지난 7월부터는 엄마가 가출하고 아버지가 만성 결핵으로 실직상태인 이진우(9·울산 상평초등 2년)군의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대학졸업까지 지원을 약속하고, 이군 통장에 장학금을 입금해주고 있다.
24평 아파트에 사는 최씨 부부 역시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다. 하지만 매달 100만원씩 적금을 꼬박꼬박 붓고 있다. 퇴직 후 양로원이나 고아원을 건립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남 모르게 이웃을 돕는 사람들을 보고 저도 같이 따라한 것뿐입니다. 새해는 어려운 사람끼리 서로 도우며 더불어 사는 살맛 나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새 천년을 맞는 최씨의 소망이다.
쌀 나누며 이웃 사랑 실천하고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 (히브리서 13 : 16)
지난 연말에 풍납 2동 동사무소에서는 환경미화원들과 생활보호 대상자들을 위한 송년 잔치가 열렸다
행사는 풍납동에서 유천냉면집을 운영하는 최 일경, 우화자씨 부부가 마련한 것이다. 이들 부부는 2년 전부터 추석 명절과 연말에 풍납동 일대에 사는 불우한 이웃들을 초청해 다과회를 열고 쌀 1포대를 나눠주는 일을 해왔다.
이 일 외에도 최씨 부부는 '송파장학회'에 장학금으로 1천만원을 두 차례 기증했으며, 2년 전부터는 생활이 어려운 4가구에 매달 생활비로 각 가구당 10만원씩을 보내고 있다. 최씨 부부가 이 같은 선행을 시작한 데는 사연이 있다. 89년부터 부인 우씨가 허리병이 심해져 두 차례 척추 수술을 받았다.
그때 최씨 부부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단다.
이번에 건강해지면 어려운 이웃을 돌보겠다고 말이다. 우씨는 남을 돕는 일에 물질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한다. 마음 없이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선뜻 그런 일을 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누가 참된 이웃인가
"오직 선을 행함과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 (히 13 : 16)
피곤한 한 길손을 자기 집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쉬도록 한 랍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손님이 거의 100세가 된 노인이라는 것을 알게되자 랍비는 그에게 종교적 신념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는 무신론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화가난 랍비는 "우리 집에 무신론 자를 묵게할 수 없소."라고 말하며 그를 내 쫓았습니다. 아무 말없이 그 노인은 캄캄한 밖으로 비틀비틀 걸어나갔습니다. 랍비가 성경을 읽고 있을 때에 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 아들아 왜 그 노인을 내어 쫓았느냐?" "그는 무신론자 였습니다. 저는 그와 함께 하룻밤을 지낸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음성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를 거의 백년이나 참아 주었다." 랍비는 급히 뛰어나가 노인을 다시 불러들여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미화원들의 이웃 사람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 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눅 21 : 1-4)
'빈자의 촛불이 부자의 등 보다 낫다' 서을 성북구청 소속 환경미화원 4백52명은 16일 "구청으로부터 여름에 두벌, 겨울에 한벌씩 받는 피복비 예산 총 7천 2백만원을 올해엔 받지 않겠다."고 결의, 구청에 통보했다. 고지대가 많은 성북구는 50%이상이 청소차량도 못들어 가는 좁은 주택가로 돼 있어 다른 어느지역보다 작업조건이 열악하다 이 때문에 미화원들은 통을 멜빵으로 멘 채 쓰레기를 수거한다.
1주일전부터 미화원들은 적게는 6,7명 많게는 20명으로 구성된 동 청소반별로'경비절감 방안에 대해 토론해왔다.
피복비는 반납해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취지에 90%이상은 선뜻 동의를 했지만 옷이 다 떨어져 입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5년이나 10년 이상 미화원 생활을 해 온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옷을 동료들과 나눠 입기로 해 결국 100% 찬성을 유도해 냈다.
서로 도와 이웃사랑을
"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 (레위기 19 : 10)
새마을 금고 연합회는 98년 9월부터 '사랑의 좀도리 운동'을 실시하여 99년 11월말까지 전국 2194개 새마을 금고에서 쌀 530톤과 현금 13억 9천 7백만원을 모금했다고 밝혔다. 새마을 금고는 모금한 쌀 가운데 310톤과 현금 3억 9천 7백여만원은 이미 생활보호 대상자나 무료 급식단체, 복지 시설, 결식아동, 소년-소녀 가장, 실직가정 등 2만여명에게 지원했다고 말했다. 또 나머지와 앞으로 모금되는 쌀과 현금은 식량과 난방비로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좀도리 운동에는 지역 새마을 금고에서 베포하는 봉투에 쌀을 담아 내거나, 후원계좌 가입, 현금성금을 통해서 참여할 수 있다.
연합회의 관계자는 "다들 어렵지만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랑을 나누려는 작은 정성들이 많다고"고 말했다.
'좀도리'는 옛날 어머니들이 밥을 지을 때 부엌에 항아리를 두고 한 숟가락씩 쌀을 덜어 모아두던 것을 말하며 '조금씩 덜어내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는 뜻을 갖고 있다.
받은 달란트를 이웃사랑의 도구로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마10:8)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아마추어 음악모임 '아마데우스 챔버 오케스트라'가 그동안 교회 순회 공연에서 벗어나 어려운 이웃과 시민들을 위한 음악 연주 봉사활동에 나섰다.
이들은 지난 99년 4월 10일 광주 송정 공원에서 송정리 그랜드교회 자원봉사자와 이곳에서 점심을 먹는 노인 80여명 등을 초청, 꽃구경을 나온 광산구민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첫 야외음악회를 가졌다.
이날 음악회에서는 한동준의 '사랑의 서약'등을 비롯, TV드라마 첫사랑의 주제가 '포에버', 헨델의 '날 울게 하소서', 모차르트의 미뉴엣 등 클래식-가요-팝송-성가곡이 망라된 다양한 선율이 연주되어서 시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97년 10월 음악을 전공하는 고교-대학생과 주부, 직장인등으로 결성된 이 오케스트라는 그 동안 광산지역 교회를 돌며 작은 음악회를 열어왔다.
이들은 이번 야외음악회를 계기로 앞으로 실내외를 가리지 않고 어디든 찾아가 음악으로 시민들과 만날 계획이다.
"순수한 아마추어 정신을 간직한 채 기량은 프로수준을 목표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휘와 연주단 살림으 맡고 있는 노경호씨는
"우리들의 작은 정성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된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쌀 나누며 이웃 사랑 실천하고
성 구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 (히브리서 13 : 16)
지난 연말에 풍납 2동 동사무소에서는 환경미화원들과 생활보호 대상자들을 위한 송년 잔치가 열렸다. 이 행사는 풍납동에서 유천냉면집을 운영하는 최 일경, 우화자씨 부부가 마련한 것이다. 이들 부부는 2년 전부터 추석 명절과 연말에 풍납동 일대에 사는 불우한 이웃들을 초청해 다과회를 열고 쌀 1포대를 나눠주는 일을 해왔다. 이 일 외에도 최씨 부부는 '송파장학회'에 장학금으로 1천만원을 두 차례 기증했으며, 2년 전부터는 생활이 어려운 4가구에 매달 생활비로 각 가구당 10만원씩을 보내고 있다. 최씨 부부가 이 같은 선행을 시작한 데는 사연이 있다. 89년부터 부인 우씨가 허리병이 심해져 두 차례 척추 수술을 받았다. 그때 최씨 부부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단다. 이번에 건강해지면 어려운 이웃을 돌보겠다고 말이다. 우씨는 남을 돕는 일에 물질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한다. 마음 없이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선뜻 그런 일을 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적 용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이웃과의 사랑이다. 나누는 삶을 통해 우리의 자리가 한층 넓어지고 깊어지며 의미 있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웃이 많아질 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 가운데 임하게 될 것이다. 남 돕는 데서 얻는 기쁨과 보람이 크다는 우씨의 말처럼 우리들도 그런 보람을 느끼는 올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어려워도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우리 사회는 진정 밝고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이다.
받은 달란트를 이웃사랑의 도구로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마10:8)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아마추어 음악모임 '아마데우스 챔버 오케스트라'가 그동안 교회 순회 공연에서 벗어나 어려운 이웃과 시민들을 위한 음악 연주 봉사활동에 나섰다.
이들은 지난 99년 4월 10일 광주 송정 공원에서 송정리 그랜드교회 자원봉사자와 이곳에서 점심을 먹는 노인 80여명 등을 초청, 꽃구경을 나온 광산구민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첫 야외음악회를 가졌다.
이날 음악회에서는 한동준의 '사랑의 서약'등을 비롯, TV드라마 첫사랑의 주제가 '포에버', 헨델의 '날 울게 하소서', 모차르트의 미뉴엣 등 클래식-가요-팝송-성가곡이 망라된 다양한 선율이 연주되어서 시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97년 10월 음악을 전공하는 고교-대학생과 주부, 직장인등으로 결성된 이 오케스트라는 그 동안 광산지역 교회를 돌며 작은 음악회를 열어왔다.
이들은 이번 야외음악회를 계기로 앞으로 실내외를 가리지 않고 어디든 찾아가 음악으로 시민들과 만날 계획이다.
"순수한 아마추어 정신을 간직한 채 기량은 프로수준을 목표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휘와 연주단 살림으 맡고 있는 노경호씨는
"우리들의 작은 정성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된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함께 나누는 이웃 사랑
이웃이란 한 지역에서 서로 돕고 협동하며 함께 사는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오늘날 세계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점차로 온 인류가 하나의 지구촌을 형성하며 가까운 이웃이 되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운명의 건축가이다. 그러나 이웃 사람은 그 건축을 감독한다"는
G.에이디의 말처럼 이웃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세계 모든 사람이 이웃 사촌이 되어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개인과 가정뿐만 아니라 나아가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좋은 이웃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좋은 이웃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의 말씀과 같이 내가 먼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마 22:39),
이웃이 하는 일을 간섭하기보다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적극적으로 이를 도와주어야 한다.
사람이 한 평생 살아가면서 서로가 좋은 이웃이 된다면 얼마나 도움되는 일이 많은지 모른다.
J. 하우얼은 "각자의 이웃은 그의 거울이다"라고 이웃과의 일체감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인간은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서로가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
좋은 이웃은 서로 믿고 돕기 때문에 그 어떠한 분쟁과 분열이 있을 수 없고
서로가 사랑과 봉사로써 기여하기 때문에 단 하나의 지역에서도 인간이 소망하는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장작패며 이웃 도운 대학총장
유명한 흑인 교육가 부커 워싱턴 박사가 앨라배마에 있는 터스키기 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한 후 그 지역의 부자들이 살고 있는 동네를 산책하고 있었다.
그때 어느 백인 부인이 그가 워싱턴 박사인줄 모르고 그냥 지나가는 흑인이려니 해서 멈춰 세우고 몇 달러 줄테니 장작이나 패달라고 요청했다.총장은 그때 특별한 일이 없었고 시간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웃으며 소매를 걷어붙이고 장작을 패서 그녀의 벽난로 옆에 차곡차곡 쌓아주었다.일이 다 끝나 그가 돌아간 후 그집 흑인 하녀가 그를 알아보고 주인에게 알려주었다.
그 부인은 너무 부끄럽고 당황해서 다음날 아침에 총장실로 찾아가 백배 사죄했다.그러자 부커 워싱턴 총장은 “부인,괜찮습니다.저는 가끔 가벼운 육체노동을 좋아합니다.그뿐입니까.이웃을 위해 돕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지요”하며 위로를 했다고 한다.
정말 겸손한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하나님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사람을 세워주신다.“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태복음 2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