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화

공의와 진실에 대한 예화 모음

공 상희 2011. 7. 22. 15:25

공의와 진실에 대한 예화 모음

 <성구와 금언>
  ★ 저희를 위하여 내가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로 진실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17 : 19).
  ★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자 복이 있으리로다(시 112 : 3).
  ★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니(시 51 : 6).
  ★ 마 25 : 23 ; 암 5 : 14 ; 15

  ★ 다른 정직한 일은 성역과 같이 거룩하다(루터).
  ★ 사람은 수학자다 시인이다 종교가다라고 불리 우기 전에 먼저 성실한 인간이라고 불리어져야 한다(파스칼).
  ★ 기독교가 진실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증명해 주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광스럽게 죽는다는 것이다(웨슬레).
  ★ 나라를 유익하게 한다 할지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깐디).
  ★ 꿈속에서라도 진실을 버리지 말라 꿈에라도 거짓말을 했거든 애통하며 회개하라(안 창호).

 <실화>

  ★ 한○○ 목사님께서 미국에서 공부 할 때인데 후배 목사가 자기도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유학의 길을 열어 달라고 너무 졸라서 신학교 교장에게 말씀드려서 허락을 받아 초청장을 보냈다.  도착 예정일에 공항에 나가서 기다렸으나 약속한 날이 며칠 지나도 오지 않았다.  얼마 후에 편지가 왔는데 약속한 날 공항에 내리다 발이 삐어서 병원에 들려 진찰을 받으며 피검사를 하는데  피 속에 성병균이 들어 있음이 발견되어 의사가 깜짝 놀라 이런 사람은 우리나라에 들어 올 수 없다고 하여 거기서 다시 본국으로 귀국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것은 물론 목사가 되기 전에 일인데 중국에서 살 때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사창가에 들어갔던 것이 오랫동안 병균이 잠재해 있다가 수년 후에 하필 미국에 들어가는 문턱에서 드러나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회개하기를 미국에 들어가는 문턱에서 나타났기에 다행이지 천국에 들어가는 문턱에서 나타났으면 어떻게 할 뻔했을까 하면서 회개하였다.

   ★ 송희용 목사의 진실
  6.25 때 인민군이 남침했을 때에 송 목사님은 80고령의 어머니 병환으로 피난가지 못하고 군산 본가에 머물러 있다가 괴뢰군에게 잡혔다.  그들은 송 목사에게 네가 무엇해 먹는 놈이냐 하였다.
  그때에 송 목사는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요, 예수교에 목사라고 했다.
  그때 그들은 다시 물어볼 필요 없이 즉결처분할 놈이라고 하면서 총살장으로 끌고 가서  꿇어앉히었다. 그때 송 목사는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만 하고 있었다. 그들은 송 목사를 총으로 당장 쏠 듯 덤비다가, 잠시 고요히 있더니 다시 송 목사를 불러서 말하기를 너는 양심적인 인물이니 돌아가라고 하며 양심적인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다고 했다.  
  며칠 전에 어떤 두 놈을 잡아 문초하니 하나는 장사했다고 하고 하나는 농사했다 하기에 다시 탐문해 보니 두놈은 다 기독교 목사였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말로 교인을 속여먹는 놈이기에 곧 총살했다고 하더란 말이다.

  ★ 대방동 성락교회 김기동 목사님께서 예수 믿고 난 다음 얼마 되지 않았는데 하루 저녁에 철야기도하는데 꿈에 모든 사람들이 천국으로 들어가는데 흰옷을 입었더란다. 그런데 천국 문에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쫙 비치는데 어떤 것이라도 숨길 수가 없고 흰옷을 입은 사람은 아주 아름답게 보이며 천국에 서슴지 않고 들어가는데 그 중에 어떤 빨강 팬츠만 입고 있는 사람이 천국을 들어가는데 너무 빛이 밝기 때문에 부끄러워서 들어갔다가 도망 나오고 또 들어갔다가 울면서 나오더란다.  천국 문에는 수위가 없는데 누가 막지 않으나 자기 스스로 수치스러워 못 들어가더란다.  이것은 목사님에만 보였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또 다른 현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 옛날 익나티우스 감독은 길을 다닐 때나 집에 있을 때도 언제든지 얼음 위로 걸어가듯 늘 조심했다고 한다.
  성도들이 그 까닭을 물은즉 이런 대답을 했다 한다.  "나는 하나님과 그의 성령을 모신 몸일세." 그러므로 어찌 조심하지 않으며 깨끗하게 살지 않겠는가 했다 한다.

  ★ 유대인 랍비가 한번은 그의 제자들에게 사람으로서 바른 길로 가게 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첫째, 제자가 말하기를 좋은 성질이라고 했다.
  둘째, 제자는 좋은 친구라고 말했고
  셋째, 제자는 지혜라고 말했고,
  마지막 제자는 좋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옳아 자네는 앞서 말한 모든 사람의 말을 바로 이해했군.  그래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성질도 좋고 좋은 친구도 있을 것이고 현명한 사람도 얻게 될 것이니까 말이네 그러므로 사람은 언제나 마음의 신실함과 정확함을 늘 유지하도록 힘써야 되는 것이지 그것이 괴로움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는 법일세"고 말했다.

  ★ 언제나 거리에서 자고 돌아다니는 그리시아가 거지 철학자란 별명을 가진 디오게네스의 이야기다. 어느 날 한 낮에 촛불을 켜들고 무엇을 찾는 모양으로 아테네 거리를 바쁘게 다녔다.  "저 영감이 왜 저래 미쳤나,"하고 지나는 사람들의 비난이 있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가까이 가서 물었다.  "영감님 왜 이런 한낮에 촛불을 켜 가지고 다니지요?"하고 물었다.  "예 사람을 찾소, 세상이 혼란하고 어두워서 어디 햇빛만으로 옳은 사람을 찾아내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한다.

  ★ 어느 교회 목사님에게 한 자매가 찾아와서 기도를 해 달라고 하였다.
  그 자매는 화장품을 만든다면서 몇 가지 화장품을 내 놓는데 일류 메이커의 화장품이더란다.  그래서 목사님이 일류화장품 회사에 하청을 받아서 만드셨느냐고 물었더니 계면쩍게 웃으면서 "실은 상표만 그렇지 가짜입니다."하고 대답하더란다. 
  가짜 상품을 만들면서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이라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런 상업자가 많다는 것이다.

  ★ 서반아의 수도 마드리드시의 어떤 양복점에 부인 손님이 찾아 왔다.  그 손님은 마음에 드는 웃저 고리를 점원에게 사겠다고 하니 점원은 포장지에 싸기 시작하면서 "아니 이것은 여기 흠이 있는데요." 하면서 다시 풀렀다고 한다.
  부인은 다시 다른 것을 고르다가 그냥 가버리고 말았다.
  그 광경을 본 주인은 화가 났다.  "이 바보 같은 자식 그렇게 해서 손님을 놓쳐 버린단 말이야.  다 그만둬. 네 아버지께 알려서 데려가게 해야지."  주인은 점원의 아버지를 불렀다.  "아이가 도무지 장래성도 없고 눈치가 없어서 그만 데려가야 하겠습니다." "아니 웬일이십니까? 내 자식이 왜 장래성이 없다고 하세요."
  주인이 손님을 놓친 경위를 말하니까 "아 그렇습니까 잘 알았습니다.  순결한 내 자식의 마음에 티가 끼면 안 되겠으니 데려 가지요,"하고 아들을 데리고 유쾌하게 집으로 돌아가서 나중에 대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한다.

  ★ 어떤 여신도 한 분이 믿지 않는 큰 양말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책임은 양말을 타스로 묶는 일이다.
  그 주인이 하는 말이 양말 스무 켤레 중 한 켤레쯤은 흠이 있는 것을 같이 싸두어도 괜찮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여공은 양심이 허락지 않아서 자기 마음에 고충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
  친구들이 하는 말이 어떻게 우리 믿는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공은 주인에게 찾아가서 자기로서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노라고 말했다.  주인은 그렇다면 그만 두라고 하였다.
  여공은 그만두고 실직이 되자 친구들이 직장을 구할 때까지 생활비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 미국에 콜케이트 회사가 있다.
  이 회사에서는 비누와 치약을 만드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제품이 나오고 있다.  콜케이트란 사람이 17세쯤 되었을 때에 뉴욕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하는데 어떤 노인을 만나 같이 타게 되었다.
노인과 대화를 하게 되어 무엇 하러 뉴욕에 가느냐고 물으니 그냥 길을 떠나 갈 곳이 없는 몸이라고 하니 "전에 무엇을 해 보았느냐"고 물어 그 청년은 삼촌댁에 있을 때 비누를 만들어 보았다고 대답하였다.
  청년은 노인에게 앞으로 비누공장을 해보면 어떨까요? 물으니 노인은 말하기를 앞으로 뉴욕이나 온 미국에 비누 잘 만드는 유명한 회사가 생길 줄 아는데 혹 네가 그런 사람이 될지 아느냐고 권하여 해보라고 말하면서 꼭 한 가지 명심할 것은 비누를 만들 때 진실하고 신용 있는 비누를 만들라고 말하였다. 값을 논하지 말고 풀질을 잘 만들어 팔아야 하고 남을 속이지 말고 얼마를 벌든지 11조를 하라고 권면 하며 창가에 앉아서 기도해 주었다고 한다.  그 청년은 노인과 헤어져 뉴욕에서 조그마한 비누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고 후에는 큰 공장의 경영주가 되어 세계적인 비누와 치약제품을 생산하고 꼭 11조를 드렸다가 12조 14조 15조를 드려 복음사업에 투자하였다고 한다.

  ★ 강원도 어느 고을에 큰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 꼭대기에 학이 집을 짓고 알을 낳았었다.  어느 날 전도사가 나무에 올라가 학이 낳은 알을 꺼내고 다른 새에 알을 넣어 주었다.
  학은 얼마쯤 품으니 새끼를 깠다. 새끼를 깠는데 숫학이 보니 자기 새끼가 아닌 게 있다.  깪! 소리를 내고 도망을 치더니 얼마 후에 20여 마리의 학이 날라 와서 주위를 돌다가 숫학이 암놈을 날개로 쳐서 집에서 쫓아내니 20마리의 학이 달려들어 암학을 물어뜯고 날개로 쳐서 죽이고 새끼도 물어 죽이고 집을 물어뜯어 허물어 버리고 어디론가 날라가 버리더란다.
  암놈의 학이 다른 짐승과 정을 통하여 제 새끼를 낳지 않고 남의 새끼를 낳다는 것이다.  학은 정조를 지키는 특별한 새다.       

 

사랑의 주님,공의의 주님
본문 : 출애굽기 15:7∼12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출 15;11)

술고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이 사람의 동생이 형님을 전도했습니다. “형님,교회에 나갑시다”“이놈아 교회에 나가면 술을 주냐,밥을 주냐”“형님,주일에 교회에 나가기만 하면 제가 술 한잔씩 사지요!”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형님이 변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갔다가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야,이제 약속대로 술 사라” 그날 술을 먹은 형이 탈이 났습니다. “형님,아무리 그래도 그렇지,교회에서 나오는 길에 그렇게 술을 먹으니 탈이 난 거예요”“무슨,아무리 그랬을라고…”
이 고주망태 마음속에 은근히 오기가 생겼습니다. ‘좋다, 다음 일요일에 교회에 갔다오는 길에 또 술을 먹어보자’ 그런데 또 배탈이 났습니다. 전엔 아무리 술을 먹어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몇 주 그런 일이 계속되자 덜컥 겁이 났습니다. ‘하나님이 진짜 계시는구나!’ 이렇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된 형은 참으로 훌륭한 인격을 가진 분으로 변했고 장로까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며 진노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또 다른 표현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스르는 자를 엎으시며 불처럼 태워버리십니다. 바닷속에 집어던지며 땅을 열어 대적자를 삼키게 하십니다.
영화 ‘레이더스’의 한 장면은 하나님의 진노를 이렇게 영상화합니다. 나치 비밀 조직원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엽니다. 갑자기 궤안에서 빛이 하늘로 솟아오르더니 그 빛이 날카로운 화살과 창이 되어 사방으로 휘돌아서 뻗칩니다. 그 빛에 닿은 사람은 모두 죽어 넘어지고 온 몸이 녹아서 없어집니다.
경외의 감정은 신앙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최고의 공경심을 가지고 그 앞에서 조심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온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면 세상이 하나님의 권능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나와 우리 가정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성공의 어머니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우리는 어려서부터 많이 들어온 말이다.
책상 앞에 혹은 머리에 질끈 맨 머리띠에 써 본 기억과 그 때의 마음가짐이 생각 나는 말이기도 하다. 결국 작심 삼일이란 말로 늘 자책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좋은 원칙이며 정직한 삶의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들어온 이 말이 우리의 마음 한편에 각인 되어 있다.
성경에도 노력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많이 그려져 있다. 그렇지만 성경은 세상에서 말하는 노력과는 결과는 물론 근본도 다르다고 말한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노력으로 모든 것을 구하고 있다. 노력이 마치 세상을 창조하듯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 있다.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될 때도 있으며 그것이 악 할지라도 노력이 가상하면 인정받는다. 그래서 인지 노력이란 말은 가치관으로까지 섬김을 받고 있다. 이것은 오늘 날 교회에서도 숨쉬고 있다. 노력은 좋은 행태이지만 성도의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구원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은혜 또한 노력으로 얻을 수 없다. 교회의 성장도 개개인 신앙의 성장도 노력으로 구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노력이 허무라는 것을 인정하고 절규할 때, 노력의 결과를 모두 부인 할 때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간절히 감사하여 사모하는 마음만을 갖는 것이다.
간절히라는 말에 노력의 의미를 더하려 하지 말라. 이것은 아기가 어미의 젖을 사모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노력으로 그의 선과 천국을 구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웃을 사랑하는 길에 노력의 행태가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노력이 사랑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노력을 빼면 우리는 금방 힘이 없어진다. 목표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엇인가라고 생각 할 때 분노한다. 그리고 분통해 한다 그 다음 진리에서 분리된다. 슬피우며 이를 가는 자가 된다..
성경을 백 번을 통독하고, 사십일 금식기도를 몇 번하고, 작정헌금을 얼마 한다고?, 총 동원 전도 주일에 목표를 달성하고, 목이 터져라 기도해야 속이 시원하고, 이러한 식의 노력에 뒷편에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고목만이 남는다. 노력은 천국의 어머니일수 없다. 노력이라는 방법론이 가져다주는 모든 허상을 벗는다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 서 숨쉬는 노력의 정체를 두루 꿰뚫을 수 있다.

 

공의로 갚아주시는 하나님
본문: 예레미야 39장 15-18절

오늘 본문에는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시드기야 왕에게 간청하여 예레미야의 목숨을 살려 준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하나님이 구원을 약속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를 배웁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몇 가지 살펴볼까요?

1. 항상 의롭고 양심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 내가 가는 길이 소수만이 가는 길이라도 그 길이 정말 의로운 길이라면 의로운 소수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배척하여 죽이려고 할 때 에벳멜렉은 예레미야를 살리는 극소수의 편에 섭니다. 소수가 가는 길에 동참하려면 어렵기에 솔직히 힘 좀 써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소수의 의로운 길로 가려면 갈등도 각오해야 하고, 청빈도 각오해야 하고, 고독도 각오해야 하고, 자기 부정의 아픔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소수가 가는 길이라도 그 길이 정말 선한 길이라면 그 길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진정 복된 사람일 것입니다.
시편 1편에는 복 있는 사람의 정의가 나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에벳멜렉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복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에벳멜렉은 무슨 대단히 큰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보기에 예레미야에게 한 방백들의 조치는 불법적인 태도라고 생각했기에 그는 예레미야를 살리는 길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양심에 충실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자기 양심에 충실하게 살면 됩니다.
보태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양심적으로 살면 그것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비방하는 사람들로 부끄럽게 하실 것입니다(벧전 3:16). 우리가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것은 '불의의 자리'이지 '소수의 자리'가 아닙니다.

2. 선을 행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보상을 해 주십니다.
에벳멜렉이 복을 염두에 두고 예레미야를 살려준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레미야를 살려 준 덕택에 복된 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선으로 행하는 자의 선행을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베드로전서 3장 13-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최선을 다해 선행을 해야 합니다.
구로공단에 있는 어떤 대기업 회장으로 있는 장로님은 일년 동안 성경공부에 개근하고 성경도 많이 읽습니다.
그런데 그 구로공단에서 가장 봉급을 적게 주는 분으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지탄의 대상이 되다가
공단 내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 공장이 가장 시끄럽습니다. 평소에 선을 심지 않는 사람은 어려움을 만나면 외로워집니다. 그러나 평소에 많은 것을 심은 사람은 보통 때에도 적절한 보상이 있지만 특히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는 특별한 돌보심과 보상이 있게 됩니다. LA 폭동 때 평소에 친절했던 가게는 흑인이 스스로 지켜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선을 행하는 자가 될 뿐만 아니라 선을 선으로 갚을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메시지가 예레미야를 통해서 에벳멜렉에게 온 것은 예레미야에게 그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있었다는 증거도 됩니다.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면 감사하게 받고 자기도 최선을 다해 도우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은혜를 항상 잊지 말고 사십시오.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도움 받은 것도 항상 잊지 말고 사십시오. 우리는 선을 선으로 갚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 차원 더 나아가기를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선을 선으로 갚아야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우리 믿은 사람들은 악을 선으로 갚는 모습까지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에 정말 아름다운 말씀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가장 깊고 아름다운 영성은 바로 악을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이와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미운 사람에게 떡 하나 더 주라..."
미운 사람과 싸우지 않고 상대방을 이기라는 영적 병법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매력적인 모습은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3. 항상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느끼며 사십시오.
하나님의 보상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손길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있어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렇게 살면 불평할 것도 없고,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불평과 원망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유익이 된다면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한 점도 유익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한 점도 유익이 없을 수 있습니까? 정말 없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불평과 원망은 정말 시간 낭비요, 인생 낭비요, 정말 내 인생에 하나도 보탬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평과 원망이 마음 속에 생기려고 하면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간섭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생각하지 않으면 인간이 연약한지라 불평과 원망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간섭하신다고 생각하면 기도하고 하나님의 창조적 손길을 기대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에게 한가지 탁월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의 처지와 사정을 보면 정말 할 말이 많을 텐데...
부잣집 앞에서 매일 연락하는 것을 보면서도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천국에 가서도 말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부자는 지옥에 가서도 얼마나 말이 많습니까?
오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말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탓을 많이 하고, 불평과 원망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나사로보다 훨씬 형편이 나은 데도 그렇습니다.
왜 나사로가 말이 없었을까요?
하나님의 섭리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섭리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삶, 나의 인생에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려운 세상에서도 능히 그 환경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생각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공의로운 심판


1. 의의 심판
1) 이스라엘의 원수를 멸망케 함(사11:4, 사34:8, 사59:16-18, 학2:22,23)
2) 의를 세우기 위해 죄인을 벌주실 것임(출23:7, 왕상8:32, 대하6:23, 시51:4, 애1:18)
3) 의로운 자의 원수를 벌할 것임(시7:6-9, 시7:11-13, 시58:10,11, 시129:4)
4) 만민을 심판하실 것임(사51:5)
5) 큰 음녀를 심판하실 것임(계19:2)

2.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
1)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심(신10:17, 골3:25)
2) 불의나 치우침이 없으심(대하19:7)
3) 유대인과 이방인을 함께 벌하심(렘9:25)
4) 악을 행하는 모든 자를 심판할 것임(롬2:9, 벧전1:17)

 


공의를 따라 삽시다
본문 : 요한복음 7장 14 절-24 절

우리는 앞에서 장막절을 기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를 권하는 예수님의 형제들과 예수님 사 이의 대화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생각과 그 형제들의 생각이 너무 다른 것을 보았습 니다.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의 차이가 그러합니다. 이사야 55장 8∼9절에도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자 기에게 제시하시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자기의 생각을 하지 아니하 고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였습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명절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보통 장막절은 8일 동 안 지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흘이 지났을 때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의 분위기는 벌써 예수 님께 대하여 심상치 않았습니다. 이런 장막절 중간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셔서 가르치셨습 니다.여기서 3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첫단계로, 14∼24절은 유대인을 상대하여 율법에 비친 그 리스도를 증거하셨습니다. 둘째 단계로, 25∼31절은 예루살렘 주민을 상대로 하여 하나님께로부 터 오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셋째 단계로, 32∼36절은 제사장과 바리새인을 상 대하여 돌아가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였습니다.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여 명절 중간에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성전에서 가르치 시는 예수님을 보고 그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 게 글을 아느냐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2 장 46∼47절에 보면 예수님의 부모가 유월절을 당하여 예루살렘으로 절기를 지키려고 올라가는 데, 예수님도 나이 12살이므로 전례를 따라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모 든 의식을 마치고 돌아가는데, 부모는 어린 예수가 따라오는 줄로만 알고 하룻길을 갔는데, 동 행한 친척 중에서 예수를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부모는 염려하며 다 시 하룻길을 걸어 예루살렘성전에 올라가 예수를 찾았습니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예수를 만났는데 어린 예수가 나이 많은 선생님들과 자리를 같이 하고 가 운데 앉아 성경에 대해 토론하며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선생들도 어린아이가 뜻밖 에 성경에도 대해서 잘 알고 있으므로, 평생 처음 보는 일이므로 하도 신기해서 자리를 떠날 줄 모르고 예수님과 토론에 열중하면서 그 지혜와 대답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예수 님은 이렇게 어릴 때부터 성경에 통달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교육제도를 보면 6살부터 회당에서 율법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좀더 공 부하려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야만 하였습니다.거기에는 초등교육으로 서책의 집(Beth Hassepel), 고등교육으로 설명의 집(Beth Hattalmud), 전문교육으로 연구의 집(Beth Hamidrach) 라는 교육 기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어떤 정규적인 교육을 받으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여 기 본문에 배우지 않았다 는 말은 어떤 저명한 선생의 문하에서 배운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세상 사람의 표준으로 생각하면 너무 쓸쓸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는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자라나 학교도 다녀본 적이 없고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목수방에서 일하며 뼈가 자랐습니다. 그는 저서 한 권 남긴 것이 없습니다. 가정도 가져본 적이 없고 자기의 집이란 것 도 없었습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기는 커녕 요샛말로 초등학교도 다닌 적이 없는 분이었습니 다. 큰 도시에 자주 다녀본 적도 없습니다. 난 곳에서 200마일 밖의 곳을 여행해본 적도 없었습 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업신여겼습니다. 가난한 집 자손, 배운 것도 없는 사람, 아 무런 경험도 없는 청년으로만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람은 배운 것이 전혀 없 는 사람인데 어떻게 글을 읽나? 라고 말하며 의아해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6절).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유명한 랍비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세 상의 과학도는 인간적인 선생에게서만 배웁니다.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셨습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앞에 섰을 때 그들을 똑같은 내용으로 비 난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들이 본래 학문이 없는 범인(凡人)으 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느 랍비 학교에 다닌 적이 없습니다. 그 당시 관례로는 랍비들 가운데서도 우수 하다고 인정된 제자들 한두 사람만이 성경과 율법을 가르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 갈릴리 목수는 어떤 교육도, 훈련도 받은 일이 없는데 감히 그들에게 모세의 말을 인용하고 설 명하였습니다. 그러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군거리며 그들이 인간적인 표준에서 보는 예수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때 보통 사람 같으면 나는 선생이 필요 없다. 나는 스스로 배웠다 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 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는 나의 선생을 누구라고 믿느냐? 너희는 무슨 권세로 내가 말하고 성경을 해석하는가를 묻느냐? 나의 교훈과 나의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라고 분명히 말씀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배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반복되는 주장입니다. 내가 내 자의로 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 이 나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훌륭한 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오직 겸손하게, 감사하는 마음 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해 주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배 운 것을 자랑하거나 우리들이 이룩한 발견이 그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아니한 독자적인 것이 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자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대한 인물은 자기 자신의 재주 나 능력을 염두에 두지 아니합니다. 그는 언제나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행할 수 있도록 자기를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인간에게 있어서 보편적인 진리를 계속 규명해 주십니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참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뿐이라 고 말씀하십니다. 17절에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했습니다. 전에 바울의 선생이던 가말리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 님의 뜻을 내 뜻처럼 이행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 뜻을 당신의 뜻처럼 행할 것이다. 이것은 신자적(信者的)적인 진리가 아니고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우리는 행함으로써 배웁니다(We learn by doing). 의사가 교과서를 통해서 수술하는 것을 배웁니다. 그는 모든 가능한 수술 방법을 이 론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수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실제 수 술하는 실습을 통해서 외과 수술을 배워야만 합니다. 행함으로 배우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모든 진리를 이해할 수 있고 믿 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 는 대로, 믿는 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진리는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성경을 모두 믿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면 당신이 믿을 수 있는 것부터 그 대로 행하여 보세요. 그렇게 되면 믿을 수 없던 부분까지 믿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렇 습니다. 우리는 행함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19절에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 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실 모세를 공경하였습니다. 그 러나 저희들은 모세를 통해 준 율법은 지키지 않았고, 안식일에 병 고친 것 때문에 예수를 죽이 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 18절에 베데스다 못가에 38년 된 환자를 불쌍히 여겨 고쳐주신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가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하여 안식일을 범 했다고, 더구나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하나님과 동일시한다 하여 예수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본문은 그 사건의 연속입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을 향한 예수님의 역습입니다. 너 희는 내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것 때문에 안식을 범하였다고 하지만 너희는 안식일에 나를 죽 이려 하지 않았느냐? 이것은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니냐? 이미 너희는 정신적으로 안식일을 범 하고 있다 고 지적하였습니다. 이때 무리들은 입을 모아 당신은 미쳤소 하고 외치며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오? 하며 달려들 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피해망상증 환자이든지 정신 착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2∼24절을 보면 귀신 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고쳐주었더니 뭐라 했어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낸다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8장 48절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 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0절에도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 하되 저가 귀신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고 하였습니다. 이쯤 되면 하나님의 아 들 메시야를 죽이면서도 당연한 줄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메시야를 미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무리들에게 차분히 논리를 펴 나갑니다. 22절에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 를 주었으니 너희가 안식일에도 할례를 주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난 것입니다(창 17:10∼14). 모세의 율법에도 할례란 난 지 8일만에 이스라엘 남자의 양피를 자르는 예식인데(레 12:3), 8일이 안식일인 경우에는 안식 일에도 할례를 주었습니다. 랍비 아키바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안식일 전 저녁에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도록 하라. 그러나 할례만은 7일째이어서 안식 전야에 못하면 안식일에 할 수 있다 (미시나 숍 20:1). 이렇게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 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즉 모세의 율법에 할례에 대한 조문도 폐하지 아니하려고 안식일에 할례를 주어 도 괜찮은데 내가 죽어가는 사람의 전신을 고쳐서 건전케 한 것을 왜 부당하다고 노하느냐? 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24절에 결론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 라. 우리는 누구나 평화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갈망한다고, 원한다고 평화가 반드시 오는 것은 아닙니다. 평화는 한 결과인데, 평화를 조성할 수 있는 원인이 있기 전에는 평화가 올 수 없습 니다. 그러면 그 조건은 무엇입니까? 공의입니다. 정의입니다. 이사야 32장 17절에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니라 하였습니다. 평화와 안전을 원하지 않는 사람 이 누구겠습니까? 그러나 먼저 공의가 있어야 합니다. 시편 85편 10절에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춘다 고 하였습니다. 공 의는 평화의 전제 조건입니다. 의가 없이 참된 평화가 올 수 없습니다. 공의는 평화의 기초가 됩니다. 평화는 공의의 터 위에만 건설될 수 있습니다. 불의의 터 위에 건설된 평화의 기구나 어떤 정권이나 어떤 제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래 위에 선 것 같아서 언제 넘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화산 위에 세운 것 같아서 화산이 폭발할 때에 다 폭발되어서 없어질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하였습니다. 우리 국가의 안녕과 질서도 역시 이 공의의 법칙에 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 헌법 정신에 근거 해서 입법, 사법, 행정이 모두 공의에 의해 집행될 때에만 우리 국내에 진정한 불행이 없는 평 화가 올 것입니다. 특히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법 아래서 평등의 원칙이 잘 준수 될 때에만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불의한 방법으로 하려 할 때 거기서 불행이 생기고, 불행이 생기는 곳에 불안이 조성되고, 결국 난국에 처하게 되고, 끝이 나고야 말 것입니다. 잠언 14장 34절에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의 번영은 결국 공의를 시행할 때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는 오직 공 법을 물과 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리게 할지니라 고 외쳤습니다. 우리 나라가 이대로 살 때에 만 기관이나 단체나 사회가, 국가가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국가만이 아닙니다. 가정도, 개인도 그렇습니다.

 

공의로운 십자가
어떤 임금이 법률을 선포하였다. 누구든지 간음죄를 지으면 두 눈을 뽑는다고 하였다. 제일착으로 임금님의 황태자가 그 죄를 지었다. 그래서 임금님은 황태자의 눈을 뽑기로 결정하고 눈을 뽑으려 하니 대신들과 백성들이 겁독자의 눈을 뽑으면 왕위를 계승할 수 없을 것이라겂고 굳이 만류하였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않고 그러면 법이 없어지는 것이야 하고는 눈 한 개를 사정없이 뽑았다.
그러나 또 하나를 뽑으면 정말 장님이 되겠고 안 뽑으면 법이 완성되지 못하니 왕은 생각하다 못하여 그만 자기의 오른 눈을 뽑았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간음죄를 지으면 두 눈을 뽑는다는 법을 준수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계명을 모든 인생들은 다 범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을 다 멸망시키자니 하나님의 사랑이 허락치 않고 또 무조건 용서하자니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이 파괴될 것이므로 마침내 자기의 오른 눈보다 더 귀한 독생자를 희생시키어 공의를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공의로운 십자가를 깨닫게 될 때에 죄를 미워하고 또한 하나님의 법을 중히 여기는 생활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공의의 심판자
항상 당신의 마지막을 생각하고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는 가장 공정한 심판 주 앞에 나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뇌물이나 변명으로 사정을 보아 주실 분도 아니며, 다만 공의로써, 사 람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의 진노 앞에서도 떨고 있는 어리석고 가련한 인생들이여, 당신의 모든 악을 샅샅이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무엇으로 대답하려고 합니까? (욥 21:14) 어찌하여 당신은 아무도 당신을 변명해 주거나 사정 보아 줄 자가 나설 수 없고 각자가 자기 행한 데서 답변해야 할 그 마지막 심판에 대하여 왜 아무러한 준비를 하지 않고 있습니까?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당신의 노력이 쓸 데 있고 당신의 눈물도 보람이 있어 영혼을 깨끗케 할 수 있고 또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도 있습니다.

인내하는 사람은 크고 전체적인 정화를 경험합니다. 고난이 해치는 동안 그 자신의 잘못을 탄식함보다 다른 사람의 악을 슬퍼하며, 그는 원수를 위해 기도하며, 그는 충심으로 그들의 진노를 용서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용서 구하는 일을 주저하지 아니합니다. 그는 분노보다 동정심을 가지며, 엄격하게 자기를 제어하며 모든 일에 있어서 그의 육체가 영혼에 복종하도록 애씁니다.
우리의 죄를 보상하고 악을 지금 물리치는 것이 후일의 평화를 위하여 그냥 두는 것보다 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치게 우리 육체를 사랑하는 것으로 우리 스스로를 속이고 있습니다.


 공의와 사랑
 
 어떤 사람이 아주 중죄를 지은 이야기를 들었읍니다. 그는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읍니다. 재판석의 자리에서 재판장을 보게 되었읍니다. 그는 그 판사를 보고 깜짝 놀랐읍니다. 판사는 여러해 동안 보지 못했던 학교다닐 때의 친구였읍니다. 자기 친구는 판사이고 자기는 그 재판석에 죄인으로 서게 된 것입니다. 그 재판은 오래 계속되었읍니다. 증인이 와서 죄에 대해서 증언도 했읍니다. 그 다음에 판사가 선고를 하게 되었읍니다. 이 판사와 죄인은 그 자리에서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읍니다. 법정에 있는 사람들은 판사가 어떻게 판결을 내리는가 하고 기다립니다. 이 사람이 중벌을 내릴 것인가 아니면 가볍게 내릴 것인가 법정 안에 있는 사람들은 조용히 선고를 기다립니다. 판사가 선고를 내렸읍니다. 그가 선고한 판결은 법이 정한 가장 중한 판결을 내렸읍니다. 그것은 그 죄수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아주 많은 벌금이었읍니다. 이제 그 벌금을 내든지 아니면 감옥에 가게 되는 것이었읍니다. 그때에 청중들은 그 선고가 너무 가혹해서 깜짝 놀랐읍니다. 모두 자기 친구에게 저렇게 할 수가 있을까를 생각할 정도였읍니다. 그러나 잠시 후 정의의 법정에서 볼 수 없는 일이 생겼읍니다. 이 판사가 자기 자리에서 내려와서 죄수가 서 있는 곳으로 가서 손을 내밀어서 그 죄인의 손을 잡고는 이렇게 말을 했읍니다. “내가 그 벌금을 자네 대신 물어주겠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해결된 것입니다. 벌금도 내고 그 죄인은 자유롭게 해방되었읍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공의와 사랑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은 율법을 완성시킵니다.
   어느 나라에 법을 엄하게 정한 왕이 있었다.
   국법을 어기는 자는 두 눈을 뽑아버리도록 새로운 법을 정했다.
   그 법을 만든후 한달만에 왕자기 그 법을 어기고 말았다.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그 국법을 닥시 고치자고 건의했다. 국법을 고치지 않으면 왕자의 두 눈은 뽑혀야 했다. 왕은 생각끝에 다음과 같이 하도록 지시했다.
  "왕자의 한눈과 나의 한쪽눈을 뽑돌고 하라."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은 실행토록 했다. 모든 백성은 왕의 준법정신과 함께 왕자를 사랑하는 왕의 인격에 감동했고 그 나라는 범죄가 없는 살기좋은 나라가 되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공의의 심판자
  항상 당신의 마지막을 생각하고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는 가장 공정한 심판주 앞에 나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뇌물이나 변명으로 사정을  보아 주실 분도 아니며, 다만 공의로써, 사람을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의 진노 앞에서도 떨고  있는 어리석고 가련한 인생들이여, 당신의 모든 악을  샅샅이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무엇으로  대답하려고 합니까? (욥21:14) 어찌하여 당신은 아무도 당신을 변명해 주거나 사정 보아 줄 자가 나설 수 없고 각자가 자기 행한 데서 답변해야 할 그 마지막 심판에 대하여 왜아무러한 준비를 하지 않고 있습니까?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당신의 노력이 쓸 데  있고 당신의 눈물도 보람이 있어 영혼을  깨끗케 할 수 있고 또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도 있습니다.
  인내하는 사람은 크고 전체적인 정화를 경험합니다.  고난이 해치는 동안그 자신의 잘못을 탄식함보다 다른 사람의 악을 슬퍼하며, 그는 원수를 위해기도하며, 그는 충심으로 그들의 진노를 용서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용서 구하는 일을 주저하지 아니합니다. 그는 분노보다 동정심을 가지며, 엄격하게 자기를 제어하며 모든 일에 있어서 그의 육체가 영혼에 복종하도록 애씁니다.
   우리의 죄를 보상하고 악을 지금 물리치는 것이 후일의 평화를 위하여 그냥 두는 것보다 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치게 우리 육체를 사랑하는 것으로 우리 스스로를 속이고 있습니다.

  당신이 구할 것은 자비뿐
  소련 스파이 로젠버그를 재판할  때 카프만 (Kaufman) 판사는  사형선고를 내린다. 피고의 변호사는 "판사님, 공정을 기해주십시오"하고 항의한다.
이 때 카프만 판사는 "정의와 공정은 이미 집행되었읍니다. 당신이 구할 것이 있다면 자비뿐입니다"고 대답했다.
    우리가 하나님께 공정을 따질 자격은 전혀 없다. 구할 것이 남아있다면 하나님의 자비뿐이다.  회개란 실상 나의 결심을 아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태도이다. 용서는 오직 주님의 자비에 의한 은혜로서만  가능해 진다.  소위 인간이 말하는 높은 윤리나 밝은 양심따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소로운 것이다. 나의 여하한 노력도 나를 구할 수는 없다. 은혜로서만 구원을 이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