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에 관한 예화 모음
고난에 관한 예화 모음
고난을 축복으로 “바꿉시다”
테러와의 전쟁으로 지구촌이 온통 긴장하고 있어 계절을 느끼지 못하고 하루하루 보내는 것 같아 아쉽다. 아프가니스탄의 한 여인은 서방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 땅은 소망이 없습니다.절망의 땅입니다”고 절규했다.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은 크고작은 숱한 고난을 만나고 이를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진다. 그러나 성경속의 요나를 통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요나가 당한 고난은 단 3일간의 고난이었지만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음부까지 내려간 고난이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요나에게 예고된 풍랑,물고기 뱃속에서의 사투 등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며 혼신을 다해 기도하는 요나가 처한 절망의 깊이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어떤 도움도 기다릴 수 없는 완전 절망의 상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절망의 극치를 보여준다. 요나는 이런 절망속에서 마침내 구원을 받고 다시 선교의 사명지로 떠나 그 사명을 완수하여 니느웨의 멸망을 막는 놀라운 승리의 삶을 살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요나는 완전 절망의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인생이 되었을까.
먼저 요나는 자기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그 하나님’께 기도했다. 요나는 자기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축복도 주관하시는 분임을 믿었다. 그러기에 그는 이 고난을 바꾸어주실 분도 오직 ‘그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었다.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깨닫는 만큼’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자포자기나 원망은 내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친히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만이 유일한 산 소망이 됨을 기억해야 한다.
또 요나는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자기의 기도가 주께 상달되었음을 확신하고 감사했다.요나의 기도는 점점 더 깊어진다. 처음에 그는 “여호와를 불러 아뢰었다”고 했다. 아버지 하나님께 지금 그의 고난을 다 말씀드렸다. 그런데 변화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오히려 점점 더 죽음의 고통이 그를 엄습한다.그래도 그는 낙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부르짖는 기도에 돌입한다. 지금 그가 처한 현실이 마치 지옥 같은 고통임을 시사하면서 그는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다”고 했다.스올은 죽은 사람들이 머무는 음부를 말한다.물고기의 뱃속에서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고통스럽게 부르짖었다. 극심한 고통속에서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할 즈음에도 그는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고 고백한다.
고난 중에 있을 때 ‘생각’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보라.주가 주시는 놀라운 평화가 넘쳐날 것이다. 스올의 뱃속에 있는 요나였지만 그의 영혼에는 비로소 평안이 찾아든다.생각을 바꾸자.고난이 크면 축복도 큰 법이다. 고난 저 건너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자.
완전 절망을 놀라운 축복으로 바꾼 요나처럼 진실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만 철저히 의지함으로써 이 고난의 시대를 이겨나가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예수 때문에 고난 당할 때
고전 15장10절에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한 것은, 다른 사람보다 고생 많이 한 것을 은혜라 하였다.
이는 일종 역설이다. 보통 인정으로 말하면 타인보다 편안한 것을 은혜라 하거늘, 바울은 타인보다 수고한 것을 은혜라 하였다.
금일 교인은 입교한 후에 가정살림이 풍성하여 지고, 몸이 평안하게 지내는 것을 감사하거니와 예수 때문에 가난하여지고, 예수 때문에 환난이 닥치면 불행으로 알거니와, 바울은 예수 때문에 환난이 고생하는 것을 감사하였나니, 과연 바울은 예수 때문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수고하였다.
교회의 급료를 받지 아니 하니, 땀흘리며 노동하여도 배고프고 헐벗었다. 정복음을 굳게 지키니 율법주의자의 박해가 뒤따르고, 선배 사도의 천서가 없으니, 업수히 여김을 받고, 기설 교회의 통제가 곤란하였다.
이방에 전도하려니 오해와 공격이 끊이지 아니하였고, 세계에 전도하려니 곤란이 첩첩 고생이 충충 끈 없는 고난이다. 주리고 매맞고 욕먹고 갇히고 물에 빠지는 등 바울 일생은 고난의 연속이였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하였나니, 예수의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은혜다.
고난 격언 모음
0 냇물에 돌들을 치우면 냇물은 노래를 잃어 버린다고 한다. 예로부터 선인은 고통 중에 낙이 있고 악인은 낙중에 고통이 있다.
0 고통은 성장의 법칙이요 우리의 인격은 이 세계의 폭풍우와 긴장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마더 테레사)
0 우리가 위험 없이 정복하는 것은 영광없이 승리하는 것과 같다.
0 고난으로 교육받지 않는 인간은 언제까지나 어린애와 같다(N. 토마제오).
0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의 고난을 대신 진다면 주님이 당신의 고난을 져 주시리라(일본 기까)
0 시련없는 생활 그것이 최대의 시련이다(맛손)
0 고난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온 귀중한 선물인지 모른다.(삼포능자)자 박해는 영적 향상의 필요
조건이다(톨스토이)
0 시험의 3대요소
1)마귀의 시험은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함이요 2)사람의 시험은 자기의 욕심에 미혹됨이요 3)하나님의 시험은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함이다.
0 안식은 모든 난관을 지나서 있다(괴테)
0 나를 높은 예지로 이끌어 주는 것은 고난과 눈물이다. 보옥과 즐거움은 이것을 만들지 못했
을 것이다.(페스타롯치)
0 고난은 풍족을 가져온것보다도 더 많은 가치를 가져온다. 만일행복했더라면 나는 결코 성숙되지 않았을 것을 고난이 가져다 주었다.(페스타롯치)
0 인생의 참다운 맛을 알려면 눈물과 함께 밥을 먹어야 한다(시126:1-6)
0 어려움에 시달린 사람은 쉽사리 낙담하지 않는다(죤슨)
0 고난과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펜)
0 불행은 천재를 장려하는 경우가 많다(오비디우스. 나소)0 고난은 기도의 선생이다(독일 격언)
0 아름다운 육체를 위해서는 쾌락이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영혼을위해서는 고난이있다(미상)
0 고난을 겪을 때마다 그것이 참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한다(괘테)
0 고난 당하지 않는 다는 것은 연약함의 증거이다. 왜냐하면 내가 고난을 감당할 수 없음을 아시기 때문에 나에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죠셉 홀)
0 양이 양떼로부터 떨어져 방황하게 되면, 목자는 개를 시켜 그 양을찾게 한다. 그것은 그 양을 다시 양떼 안으로 끌어 들이기 위함이지 그 양을 잡아 먹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목자도 마찬가지시다.(다니엘 카드레이)
고난 중에도
67세의 암환자.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영웅이라고 말한다. 골프의 제왕 아놀드 파머이야기다.
올해초 후두암 제거수술을 받은 그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각종 대회의 우승을 노리는 「의지의 제왕」.그는 최근 캐딜락 NFL골프 클래식의 프로암대회 출전에 앞서 『나는 영웅이 아니라 하루에 1천5백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암이라는 병을 지닌 또 다른 사람일 뿐』이라고 겸손해 하면서 『암 예방 및 치료 등을 위해 얼마든지 헌신할 생각』이라고 선언,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고난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당신이 괴로워할 때도 하나님은 계시는 걸까요? 그 질문의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당할 때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한가운데 계십니다. 질병과 비극과 재난과 기근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그 분은 그들의 고통을 함께 극복하기 위하여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가며 다가가십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 34:18,19). 고통의 와중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위로를 받아들여본 사람이라면 이 말씀이 진리임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나찌 독일의 악명 높은 수용소인 라벤스부르크에서 죄수로 지낸 바 있는, 유명한 코리 텐 붐 여사는 라벤스부르크의 악몽이 있은 이후 33년 동안 개인의 안식처를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85세의 고령이 되었을 무렵, 몇몇 친구들이 그녀를 위해 캘리포니아에 사랑스런 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그녀의 집에 머물면서 말했습니다. “코리, 너에게 이런 아름다운 처소를 주신 것을 보니 하나님은 선한 분이신가 봐?”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습니다.
“내가 라벤스부르크에 있었을 때도 역시 하나님은 선한 분이셨어. ”
희망을 보며 전하는 타고난 목자
소강석 목사는 양에 대한 애정이 유난히 뜨거운 목회자다.어떤 환경에서도 결코 낙망하지 않는 백절불굴의 목회열정은 신학생들에게 큰 희망이 되고 있다.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목회현장에 그대로 반영돼 끊임없는 교회성장으로 이어진다.
“한국교회는 희망이 많습니다.아직도 불신자가 전국민의 75%나 되지 않습니까.그리고 새벽을 깨우는 눈물의 기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목사는 ‘3맨목회’로 널리 알려져 있다.그는 ‘맨땅’에서 ‘맨몸’으로 일어나 ‘맨발의 목회’를 실천한
종이다. 전남 화순의 벽지에서 농촌목회를 시작한 그는 혈혈단신으로 상경해 서울 가락동에 목회의 둥지를 틀었다.경험 학력 연고도 없는 이곳은 망망한 고도(孤島)였다.그러나 뜨거운 기도,넘치는 소망으로 무장한 그는 유명 목회자들이 모두 집결해 ‘별들의 전쟁’으로 불린 분당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한없이 나약하고 의지할 것이 없었기에 더욱 열심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명 목사의 분당 입성이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재적교인 3000여명의 교회로 성장했지요”
소목사는 촌음을 아끼는 목회자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 계속 공부해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온 힘을 쏟는다.결코 현실에 안주하는 법이 없다. 그의 설교는 은혜와 감동이 넘친다. 설교에 등장하는 적절한 예화는 그가 얼마나 많은 독서를 하고 그것을 꼼꼼하게 정리하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그는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원고를 몇번이고 다시 작성하는 치열한 성격의 소유자다.
맨발의 소명자 소강석 목사. 그는 누구보다 많은 기도의 지원병을 갖고 있다.그리고 양들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유별난 종이다.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스승을 잃은 슬픔에 잠겨있던 제자들에게는 예수가 부활한 것이 너무 기뻐서 믿지 못할 정도(누가복음 24장 14
절)였다.반면 무덤을 지키던 병사와 제사장,장로,총독은 부활이 두려워 거짓소문을 퍼뜨렸다.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에
게 나타나 기쁜 소식을 확인해주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부활한다면 누구에게 먼저 나타날까.세상에서 실패하고 낙담해있는 사람일수록 예수를
만날 가능성이 클 것이다.
서울 구로동 조선족교회 서경석 목사는 올해 고난주간을 금식으로 버텼다.국내에 체류중인 재중동포(조선족)들을 향한
정부 정책에 항의하는 단식 시위다.정부가 불법체류 외국인과 고용주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밝히면서 재중동포들
은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재중동포 1000여명은 지난 26일 서경석 목사가 무기한 단식을 하고 있는 조선족교회에서
1000개의 촛불을 켜고 정부 정책에 항의했다.서목사에겐 부활절이 지나도 고난주간이 계속될 것이다.
이들 조선족의 고향인 중국 지린(吉林)성,헤이룽장(黑龍江)성 등 동북3성에선 지금 대대적인 수색작업이 벌어지고 있다.
굶주림에서 벗어나려고 북한을 탈출해온 ‘불법 체류자’를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지난 14일 탈북민 25명이 주중 스페인대
사관을 통해 한국에 들어온 사실이 대대적으로 알려지면서 중국에 남은 5만여명의 탈북민들은 언제 중국 공안이 들이닥
쳐 자신들을 북한으로 송환할지 몰라 두려움에 떨고 있다.
대테러전쟁으로 폐허가 된 아프가니스탄에 지난 27일 지진이 일어났다.지진이 발생한 나린 지역의 군사령관은 “헬기를
타고 피해지역을 둘러봐도 온전하게 버티고 서있는 가옥이 눈에 띄지 않는다”면서 “주민들은 폐허 속에서 가족을 구하거
나 시신을 찾느라 여념이 없다”고 말했다.나린 지역의 아이들은 잿더미와 시체 위에서 부활절을 맞아야 한다.
골고다의 고난이 없었다면 부활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고난이 클수록 더 큰 기쁨이 있을 것이라는 게 부활의 약속이
다.31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 6만명이 모이는 것을 비롯해 전국에서 성도들이 ‘부활의 영광,월드컵 승리’라는 주
제 아래 모여 예배를 드린다.오늘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난의 현장을 기억하는 성도라야
고난 중에 참기쁨
누구나 좋은 사람과는 함께 있고 싶어하고 성격이 사나운 사람과는 함께 지내기를 한사코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사람 곁에서보다도 성격이 사나운 사람 곁에서 겸손의 덕을 닦기가 훨씬 더 낫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까다로운 사람 없이 우리가 어떻게 참아야 할 일이 있고. 남에게 시달리는 일 없이 우리가 어떻게 인내의 덕을 닦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나의 일을 가로막는 사람 없이 어떻게 용서하는 사랑을 배울 수 있고, 나의 뜻을 반대하는 사람 없이 어떻게 인종의 아름다운 덕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 부당한 명령을 하는 사람 없이 어떻게 자기 부정의 연단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고, 나에게 빈번히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 없이 어떻게 남에게 자비를 베풀 기회가 주어지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서 보다도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서 더 훌륭한 덕을 닦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일을 절대로 싫어해서는 안됩니다. 겸손은 여러 사람들 속에서 수많은 괴로움과 시달림을 받으면서 다듬어져 나오는 보석 같은 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도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극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고난에 대해서는 극복하려는 생각보다는 피하려는 생각이 앞선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런 고난을 피하지 아니하고 정면에서 극복하였다.
당장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
(It is fimished)고 말씀하셨다.
도이취의 삼대작곡가(바하, 브람스)로 알려진 베토벤도 고난을 극복한 사람중 하나이다.
그는 13세때 벌써 본 궁정의 올갠이스트가 되었고 22세 때에는 비엔나로 옮겨 피아니스트로써 이제 막 유명해지려 할 무렵 27세 때인 1798년 부터 귀를 앓게 되어 전도가 막히게 되었다.
절망과 고독속에서 몸부림치던 그는 "죽음은 무한한 고통으로 부터 나를 해방 할것이다"라는 유언장을 써놓고 두번씩이나 자살을 하려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삶의 길을 발견한 것이다. 죽을 힘을 모아서 살기로 결심하였다.
불행은 분투함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아멘다 목사에게 상담을 하고는 다시 용기를 얻었다. 그는 말하기를 "저는 새로운 운명과 싸워야 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서 제가 제일 보잘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때로 기억합니다."
베토벤은 불굴의 의지와 믿음으로 불행을 극복하고 우뚝 선 그런 위대한 인물중의 한 사람이다.
때때로 고난은 우리의 각성제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말고 고난을 극복하자.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본문: 요한계시록 2;8∼11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계 2:9)
‘서머나’라는 단어는 ‘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수없는 핍박을 받아 왔고 핍박을 피해 다니느라 생업이 유지되지 않으니 자연적으로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서머나를 향해 말씀하시길 “내가 네 궁핍과 환난을 아노니”(계 2:9)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마 25:12) 하시면 큰일인데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왕하 20:5) 혹은 “내가 네 궁핍을 안다”고 하셨으니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또 주님은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전능자가 서머나 교회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마 1:23)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다시 들어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서머나 교회는 환난도 극심하고 궁핍도 심했지만 처음이요 나중이시며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을 온전히 바라봄으로써 고난을 이기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진정한 부자이고 누가 강자인가요? 주님 안에 있는 자입니다.‘주님 계시면 나는 이미 승리자다’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 승리자입니다.
중세에 성자이었던 토마스 아켐퍼스에게 꿈속에서 주님이 나타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내게 주님께서 계신데 무엇을 원하리요. 저는 주님으로 만족합니다”고 대답했습니다.
10동안 환난을 받을 것이라 했는데 로마제국은 이 시대 아주 조직적으로 기독교를 핍박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옥에 갇히고 잔인하게 순교했습니다.
서머나 교회 교인들 중 ‘죽도록 충성한’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80세에 화형으로 순교한 폴리캅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지도자이었던 그는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다는 회유에도 굽히지 않고 이렇게 담대히 말했습니다.“80년동안 주께서는 나를 한번도 부인한 적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내가 이제 와서 어떻게 주님을 부인하겠습니까”
* 기도: 주님, 고난 중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죽도록 충성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도 듣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예수님의 그 날의 고난 본받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축복과 행복의 개념은 고난과 어려움이 없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축복과 행복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하여 더욱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했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면 아름다운 고난이며 또 죄가 없이 당하는 고난과 선을 행하면서 당하는 고난도 아름답습니다. 지금은 사순 기간입니다. 이때 왜 주님의 고난이 아름다운 고난인가 살펴보는 것은 그 의미가 큽니다.
첫째, 우리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습니다.“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벧전 2:21)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우리 죄를 사해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신 아름다운 고난인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엡 2:3). 왜냐하면 우리는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죄(원죄)를 이어받았고 지금까지 지은 죄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을 영접하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둘째, 각자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도록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고 하시었습니다(벧전 2:21). 주님은 얼마든지 십자가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주님은 천사들을 동원하여 악한 영을 모두 멸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했습니다(마 26:53).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뜻이기에, 성경을 이루시기 위해,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셋째,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해지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입었나니”라고 말씀하셨듯 주님의 고난은 우리들을 복되게 살라고 모든 짊을 대신 짊어지신 아름다운 고난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저주(갈3:13)와 가난(고후8:9)과 질병과 죄짐을 대신 짊어지신 아름다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아름다운 고난을 믿을 뿐 아니라 낙심한 자들과 불신자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고,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도록 본을 보이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으며,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해지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기에 아름다운 고난인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 때문에 구원받고 영생을 얻은 것을 감사하며 더욱 열심으로 주님의 아름다운 고난을 널리 전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고난과 시험의 목적
고난과 시험의 목적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도록 우리를 훈련시키는 데 있다. 신실하게 순종함으로써 하나님나라의 통치 원리를 배우는 것이다. 약속을 기업으로 받을 승리자가 되는 기회를 맞이하는 것이다. 당신이 당하는 환난을 저울의 한 편에, 그리고 다른 한 편에는 영원한 영광을 올려놓아 보라. 그러면 한 쪽으로 "쿵"하고 기울어질 것이다. 깃털과 비교되는 금 덩어리의 무게처럼 말이다. 끈질기고 고통스러운 암으로 두 자녀를 잃은 가정이 있다. 지금 그 가정의 가장이 같은 암으로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른 채 고통을 당하며 여위어가고 있다. 이런 일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성도의 영원한 기쁨을 더하시는 것이다. 극도로 참기 어려운 현재를 위한 기쁨은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극복해야 할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고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평탄하고 안정감 있고 방해받지 않는 생활을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뜻을 갖고 계시다. 그분은 우리를 정화하고 시험하며 훈련시켜서 그분의 보좌에 앉은 그리스도 옆에 앉을 수 있는 흠 없는 교회로 우리가 헌신하기를 원하신다. 영국의 설교자 스펄전은 "안일함이라는 거목을 쓰러뜨림으로 하나님께 가는 길을 만들어주는 고통이라는 이름의 도끼는 얼마나 복된가?"라고 말했다. 환난을 이기고 그리스도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우리의 바람은 결코 자만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격 없는 자녀들에게 말할 수 없이 관대하신 하나님을 경배케 한다.
고난은 아름답습니다
고난은 아름답습니다. 이처럼 역설적으로 들리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혼란한 때에 지혜자가 나타 났고 문명의 꽃이 피었습니다. 앞서간 위인들은 그토록 기막힌 고난을 당하면서 문명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고난은 역사의 유모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며 또한 찬란한 결과를 약속하기에 "고난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난은 가장 아름다운 시보다도 더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시는 인생의 영혼을 정화하지만 고난은 그 시를 정화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시인들의 영혼으로부터 울려나온 시는 고난의 순간을 지나며 정제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들 중에는 고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들이 많습니다. 시인 롱펠로우는 그의 아름다운 시 '겨울의 숲'에서 고난의 감미로움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 그 풍성하던 여름의 자취는 모두 어디로 가고 말았는가? 지저귀던 새들은 모두 어디로 갔으며, 부드럽던 여름 바람은 어디로 가 버렸나, 그 푸르던 숲은 도대체 어디로 가 버렸는가! 그러나 여기에도 음악은 있다! 거칠고 사나운 겨울의 음악! 이 거칠고 사나운 겨울 바람에도 갈대는 고운 소리로 울고 있구나! ...
여기에서 시인이 노래하는 '고난의 감미로움'은 그저 형이상학이 아닙니다. 금광에서 금을 캐는 것보다 흙 속에서 진주를 캐는 것이 더 아름답고 값지게 보이는 것처럼 평안 속에서 행복의 조건을 발견하는 것보다 고난 속에서 행복의 조건을 발견하는 것이 훨씬 아름답게 보이는데 시인은 바로 그 점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고난은 아름답습니다. 고난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고난이 가져다주는 역사로 인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수적으로 다가오는 고난을 자꾸만 피하려 하지 말고 또한 극심한 고난을 맞이하여 한탄의 나날 속으로 빠져드는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여명 바로 직전이 가장 깊은 밤인 것처럼 고난의 밤이 깊을수록 찬란한 아침은 속히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육체를 위해서는 쾌락이 환영을 받겠지만 아름다운 영혼을 위해서는 고난이 환영을 받을 것입니다.
고난의 강을 잘 건너십시오
고난의 강을 잘 건너십시오 본문: 고후 1:3-9 요사이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 당하는 고난을 잘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조그마한 바람이 불어도 교회를 등지거나 떠나는 성도들도 있는데 안타깝습니다. 어떠한 어려움도 이기고 최후 승리를 얻는 것이 성도의 진정한 자세인 줄 믿습니다. 성도를 이길 세력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성도들이 유약해져서 흔들리는 모습을 볼 때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는 주님의 말씀이 다가옵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십자가입니다. 고난입니다. 어려움입니다. 밤하늘에 별빛이 빛나듯이 우리 성도들의 삶은 어려움이 있을수록 더욱 가치있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넓은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좁은 길이며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 다. 고난을 귀히 여기고, 고난이 있을 때 더 밝은 모습으로 신앙을 가지고 이겨내는 그 모습이 성도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 아무 걱정 없이, 아픔도 없이, 눈물도 없이, 시험도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엔 없는 삶입니다. 똑같은 시험을 당해도 어떤 분은 자살하려고 하지만 성도는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시험을 이깁니다. 세상 사람은 죽느냐 사느냐 해도 성도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성도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모든 어려운 문제와 예수 그리스도를 접목시키기 때문에 바울이 말한 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 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주님 때문입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함께 계시고 위로해 주시고 도와주시는 주님이 계심으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성경은 '왜 나만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라고 불평하며 낙심하지 말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 남이 잘 되는 것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시편 37편에 '악인을 인하여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파이낸스 사건에 관한 보도를 을 보았습니다. 하루에 몇 천만원씩 쓰던 그들이 한 순간에 망하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풍족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귀하게 들어 쓰시기 위해서 때로는 연약하고 부족하게도 하시며, 하나님을 중심하여 경건하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 풍족하게 하지 않으시기도 합니다. 오늘 이 시대의 문제점은 좁은 길로 안 가려고 하는 데에 있습니다. 고생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생활은 좁은 길입니다. 교회도 좁은 길로 가야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늘 훈련시키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늘 영적인 훈련, 경건의 훈련, 기도의 훈련, 말씀의 훈련, 믿음의 훈련을 시키는 곳입니다. 우리가 왜 계속하여 교회에 나옵니까? 왜 새벽을 깨워서 기도합니까? 갑자기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꾸준하게 훈련한 사람만이 좋은 경주자, 영적인 승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악이나 미술, 문학이나 어떤 분야에서도 고난을 겪은 사람들의 작품이 훌륭하고 깊이가 있습니다. 고난은 결국 우리를 주님께로 가까이 가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위로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에서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며, 그 분의 위로를 받은 우리도 고난 중에 처한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한국 땅에 가장 귀한 사람은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위로를 전하고, 그리스도의 긍휼을 베풀고, 우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 받은 새사람, 긍휼 입은 사람으로 인하여 다시 그리스도의 긍휼이 전달될 때 이 나라가 좋은 나라가 될 줄 믿습니다.
고난과 성숙
어린 소년이 연못가에서 손으로 만든 작은 종이배를 띄우며 놀고 있었는데 배가 손에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밀려나자 소년이 울기 시작했다. 이것을 본 소년의 형이 배가 나가는 방향에 돌을 던졌다. 그러나 어린 소년은 더 소리 내어 울었고, 그 울음은 형이 던지는 돌맹이가 배를 맞추어 가라앉게 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울었다. 던진 돌맹이가 수면 위에 떨어져 잔물결로 인해 배를 연못가로 움직이게 하여 자신의 앞으로 오게 해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울음이 그쳤다.
우리들 대부분도 어린 소년과 같이 고난의 물결을 일으키는 돌맹이가 앞에 떨어지면 당황하고 울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분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려 하시는 분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승리로 바꾸어 주시며 우리를 더욱 성장시켜 주신다.
주 이름으로 받는 고난을 기뻐하다
'인도 성자' 라 불리는 썬다싱이 25살 나던 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일름(Ilom)이라는 지역에 들어가 시장에서 전도를 했다. 그리고 그는 항상 그랬듯이 복음을 전하는 도중 붙잡혀 감옥에 들어가 갖은 고문을 다 받게 되었다. 그러나 썬다싱은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때문에 받는 고난을 기뻐하며 밤에는 날이 새도록 찬송을 불렀고, 낮에는 작은 창문을 통해 설교를 하였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재판장이 그를 끌어내도록 하고는 판자위에다 발과 손목을 묶고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시장바닥에 갖다 놓았다. 사람들이 몰려와 돌을 던지며 욕지거리를 했다. 그리고 승려들이 수십마리의 거머리를 썬다싱의 몸에 쏟아 부었다. 거머리는 썬다싱의 피를 빨아 살을 파기 시작했고 그의 몸은 보는 이로 하여금 진저리칠 정도로 비참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도 썬다싱은 찬송과 복음을 전하니 군중들을 놀라게 했다. 그가 정신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쓰레기더미에 던져버렸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썬다싱은 전도에 의해 믿게 된 지하 교인들에 의해 구조를 받게 되었다.
고난 속의 사치
불결한 환경과 이따금씩 찾아오는 구타와 나를 벽에 매단 쇠사슬들 속에서 나는 고통받는 욥과 더불어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 욥과 함께 나는 하나님께 외쳤다.
"나는 선한 사람입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을 행하십니까? 공정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이러했다.
"꼭 공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니 너는 순종해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순종을 배우기 시작했다. 쇠사슬에 매인 사람의 사정을 바울처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그는 수도 없이 감방에서 그의 서신들을 썼다. 나는 고난 속에 깃 든 가치를 그를 통해 감지할 수 있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 1:12).
불행을 예술로 승화시킨 베토벤
어느 대학교수가 학생들에게 물었다.“남편은 알코올 중독자로 가구를 내다팔아 술을 마시고 술 마실 돈이 없으면 아내를 심하게 구타합니다.거기다가 아내는 폐결핵에 걸려 자신의 몸하나 가누기가 힘들 정도입니다.그런데 그 아내가 임신을 했습니다.여러분에게 묻겠는데 이 태아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학생 하나가 재빠르게 손을 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그 아이는 낙태시켜야 합니다” 그러자 교수가 말했다.“자네는 방금 베토벤을 죽였다네!” 그 임신된 생명은 바로 베토벤이었다.그를 낳은 어머니는 결국 그가 어렸을 때 지병인 폐결핵으로 사망했다.어머니를 여읜 베토벤은 11세 때부터 극장을 돌며 구걸예술을 시작했다.
베토벤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많은 불행의 터널을 통과한 사람이었다.그러나 그는 그 불행의 조건을 오히려 위대한 음악을 탄생시킬 수 있는 창조적 조건으로 승화시켰다.시편 기자도 고난의 긍정적인 면을 노래한다.“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
고난과 성공
한 신문기자가 구세군 집회현장을 취재하고 있었다. 기자는 어른과 소년이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소년은 급히 층계를 오른다. 그만 계단에서 넘어졌다. 그는 피가 흐르는 무릎을 만지며 엉엉 울었다. 그때 뒤따라오던 어른이 울고있는 소년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얘야, 어서 '할렐루야'라고 말하렴"
소년은 눈물을 닦으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계속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외치며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기자는 그때 비로소 구세군의 정신은 패배와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것임을 깨달았다.
시련이 닥칠 때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특권이다. 고난은 용기 있는 사람에게는 일시적 통증에 불과하다.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역경을 '매력적인 산'으로 여긴다. 고난과 성공은 항상 함께 다닌다. 고난 없는 성공은 없다.
고난이 주는 선물
하늘의 시인이라고 부르는 송명희 자매는 뇌성마비의 몸으로 태어나 이제 서른을 넘긴 나이인데 그가 예수님을 알고 나서 그분께 드리는 편지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 편지의 서두는 "고난의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녀가 고통을 안고 얼마나 몸부림쳤으면 예수님을 향해 고난의 선생님이라고 불렀을까요? 그가 쓴 편지 중에 한 대목을 읽어드립니다. "선생님을 좇은 후에도 고난은 저를 떠나주지 않았고 오히려 고난이 많아져 고통스러움은 더해만 갔었는데, 선생님이 제 옆에 계셔서 육신은 고달픔이 있으나 마음은 편안했고 감사함으로 고난의 길을 잘 밟을 수 있었지요. 의심과 두려움이 있을 때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슬프고 괴로울 때는 '얘야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제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했을 땐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선생님은 그렇게 수없이 말씀하시며 그 부드러운 손으로 안아주셨지요. 제가 선생님을 만난 후, 건강이 없어도, 지식이 없어도 많은 재물이 없어도. 선생님이 계시기에 감사할 수 있었지요 선생님. 감사의 성숙과 이해의 성숙은 고난이 아니면 얻어 지는 게 아닌가 봅니다."
얼마나 진한 감동을 주는 편지입니까? 고난을 이기려면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난의 축복
어떤 전도사가 개척지에서 매우 중한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슬픔이 더 하였던 것은 그녀에게 돈이 도착하지 않아서 자신이 먹고 싶은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날마다 오트밀과 깡통에 든 우유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 전도사는 점차 회복이 되었으며 꾸준히 30일 동안 오트밀 음식을 먹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송금한 돈을 받게 되었고, 다른 것들도 얻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휴가 때가 되자 그녀의 큰 시련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한 의사가 그녀의 병의 증상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는 심한 소화불량이 있었다는 말을 듣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돈이 빨리 도착했었더라면 당신은 오늘 나에게 여기서 말할 수 없었을 거요. 우리가 그 병을 위하여 항상 처방하는 음식이 바로 30일간의 오트밀 식사랍니다."
그녀의 고난이 바로 축복이었습니다. 고난과 역경은 축복을 싸고 있는 보자기입니다.
자랑스러운 고난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한 가지 이유로 남 모르게 고난을 당하는 형제 자매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남편으로부터 학대를 당하며 정신적인 고문을 당하는 아내들, 직장에서 술자리에 함께 앉지 않는 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고 나중에는 진급마저 잘 안돼서 만년 계장 노릇하는 가장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고난입니다. 나이가 차서 시집을 가야 되겠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결혼 할 수 없다는 고집, 그것을 꺾지 못해서 혼기를 놓친 채 아직도 결혼하지 못하고 있는 자매들, 그렇다고 해서 믿는 것 따지지 말고 아무하고라도 결혼하자니 신앙 양심이 허락지 않아, 부모들로부터 이 눈치 저 눈치 받아가면서 지금까지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는 아름다운 우리 딸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양들은 모두 다 십자가로 낙인 찍혀있다. 털에만 찍힌 것이 아니라 살 속에까지 깊이 찍혀 있다." 그 낙인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현재의 고난입니다. 우리만이 받는 자랑스러운 고난이며 피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가정에서 핍박을 당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형제 자매들이여, 한시도 잊지 마십시오.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고 있다는 것을.(옥한흠 목사)
기도: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신 주님, 이 땅의 구원을 위해 죽으신 그 뜻을 위해 나 또한 고난을 받을 때 감사하게 하소서. 복음을 위해서라면 나의 고집과 이익을 포기하며,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감당하려는 결단을 하기 원합니다.
고난이 주는 선물
한 청년이 고난을 당한 후 목회자를 찾아가 "왜 제게 이런 문제가 찾아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행복한 데 저만 고통을 당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목회자는 "1천만 명이 살고 있는 이 도시에 문제없이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고통을 당합니다."라고 말했다. "문제없는 곳은 없을까요? 저는 문제없는 곳에서 살기를 원합니다."라고 청년이 말하자 목회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거기는 바로 공동묘지입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왜 고난 중에도 기뻐해야 하며, 고난이 주는 선물이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첫째, 고난은 성도의 믿음을 성장시켜 주기 때문이다. 미국의 스미스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폴린 해밀턴 박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중국 선교사로 자원했다. 그러나 중국에는 많은 어려움이 해밀턴 박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려움들은 해밀턴 박사에게 고통과 좌절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만큼의 세월이 흐른 뒤 해밀턴 박사는 고난을 기회로 삼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다. 실제로 그녀는 다리 부상으로 병원에 누워 있었을 때가 자신의 중국 선교기간 중 가장 활기차게 사역을 감당했던 때라고 고백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는 고난도 유익할 수밖에 없다. 당신에게 고난이 찾아왔습니까? 감사하십시오. 그 고난을 통해 당신은 더욱 성숙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아프리카 어느 곳에는 묵직한 돌을 짊어지고 가야만 건널 수 있는 얕은 강이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강의 물결이 너무 세서 그냥 건너면 떠내려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생활도 너무 편하면 세속의 물결에 휩쓸려 파멸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묵직한 돌을 짊어지는 것 같은 시련과 고통을 주신다. 또 양들이 많은 곳에는 염소가 한 마리 꼭 있어야 한다고 한다. 양들은 염소와 싸움으로써 질 좋은 털을 가질 뿐 아니라 운동도 겸하게되어 잘 자란 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양은 영양과다로 병에 걸리게 된다고 한다. 하나님은 성도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원수라는 염소"를 두신다.
둘째, 고난은 인생을 아름답고 귀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영국의 조지 왕이 한 도자기 공장을 방문했을 때 두 개의 꽃병이 특별히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꽃병들은 같은 원료로 만들어졌고, 같은 스타일과 무늬로 만들어졌으나 하나는 윤기가 흐르고 생동감이 있는 예술품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또 하나는 흐릿한 빛을 낸 채 아주 볼품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이유에 대해 묻자 관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전하,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는 불에 구워졌고 또 하나는 구워지지 않았습니다. 시련은 인생을 윤기 있게 하고 생동감 있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특별히 전시한 것입니다." "고난의 불"은 성도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고 빛나게 한다. 또 인공진주 양식을 할 때 조개 속에 모래알을 집어넣게 되는데, 부드러운 조갯살 속에 깔깔한 모래가 들어가면 생명체인 조개는 큰 고통을 느끼나 그것을 이겨내려고 귀한 생명의 즙을 내어 그 모래알을 싸고 또 싸면 그 모래알은 점점 크면서 굳어져서 마지막에는 아름다운 진주로 변한다고 한다. 고난을 겪으므로 조개가 보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셋째, 고난은 위대한 사상과 위인을 만들어 주며, 예수님과 믿음의 선배들도 고난을 받았기 때문이다.(히5:8-9, 벧전5:9, 약5:10-11) 성경의 인물이나 신앙의 선진들은 대개 고난을 통해 더욱 커다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룬 사람들이다. 아벨은 형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며(창4:18),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바쳐야하는 고난을(창22:1-10), 요셉은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당했습니다.(창39:7-20) 의인 욥은 이유 없이 고난을 받았으며, 다니엘은 신앙을 지키려다 사자 굴에 갇혔으며(단6:10-18), 사도 바울도 많은 고난을 당하였다.(고전4:11) 한국에서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회자들이 순교를 당했고 6.25전쟁 때도 많은 교회들이 어려움을 당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박해와 고난이 있을 때 더 확장되었고 타협하지 않는 헌신된 소수를 통해 그 본질을 지킬 수 있었다.
넷째, 고난은 성공에 언제나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을 찾게 하고 또 그릇된 삶에서 돌이키게 해 준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다섯째, 고난은 삶의 활력소가 된다. 미국의 서해안에서 동해안으로 물고기를 큰 물통에 담아 운반하는 데, 수산기사가 옆에 따르고 물고기가 서식하는 모든 생활 환경을 다 갖추어서 2주일간 기차에 싣고 운반했지만 물고기가 다 죽어 버렸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들은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그 생존경쟁이 없음을 알았다. 너무 과잉 보호를 했던 것이다. 그 생각이 나서 그 안에 조류를 만들어 주기도 하고 그 다음엔 큰 낙지 한 마리를 집어넣었다. 이 낙지가 배가 고프자 긴 다리를 내밀면 물고기들은 나는 죽었구나 하며 피해 다니면서도 2주일동안 죽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때로는 실패와 고난을 겪게 되는데 이 실패와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 된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시119:71)
여섯째, 고난은 우리를 반성하게 하고 죄를 깨닫도록 해준다.(민21:7, 욥36:8-9)
일곱째, 고난과 시련은 도약의 기회가 된다. 한 신실한 목재소 직원이 있었다. 그는 40대 초반에 회사에서 청천벽력 같은 해고통보를 받았다. 극심한 불황으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게된 회사측에서 감량경영을 선언한 것이다. 갑자기 실직자가 된 이 중년 남성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 "해고에 담긴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는 건전한 사람들이 묵을 수 있는 여관을 시작하라는 음성을 듣고 전혀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람이 바로 세계적인 사업망을 거느린 호텔 '홀리데이 인'을 창업한 케몬스 윌슨이다. 그는 눈앞에 해고통고서를 놓고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았다. 시련을 도약의 기회로 삼았다. 만약 케몬스 윌슨에게 '해고통보'가 날아들지 않았다면 그는 목재소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
여덟째, 고난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도록 해준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수는 발칸산맥의 장미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생산업자들은 발칸산맥의 장미를 가장 춥고 어두운 시간인 자정에서 새벽2시에 딴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장미는 한밤중에 가장 향기로운 향을 뿜어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생의 향기도 가장 극심한 고통 중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절망과 고통의 밤에 비로소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한다. 베개에 눈물을 적셔 본 사람만이 별빛이 아름답다는 것을 안다. 사랑하는 이여, 영혼의 향기는 고난 중에 발산된다는 사실을 묵상하자. 서양속담에 "흐르는 시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시내는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돌들이 있기 때문에 시냇물은 흘러가며 노래를 창조하듯이, 그리스도인들도 고난의 아픔을 통해서 인격이 자라난다.(히5:8) 또 아라비아속담에는 "햇빛이 나는 것을 누구나 좋아하나, 해만 계속되면 사막이 된다"는 말이 있다. 정말 좋은 날씨만 계속되면 죽음의 땅이 된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야 식물이 잘 자라는 것 같이 인생의 괴로움과 고난은 우리를 망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채찍이며, 승리의 전주곡이다. 고난 그 자체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보다 풍성하게 하시려고 고난을 사용하시기도 한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했을 때 성도가 취할 자세(태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 (1) 믿음의 담력을 가져야 한다.(시16:8, 요16:33, 롬8:18) (2) 기도해야 한다. (시119:153, 약5:13) (3)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해야 한다.(시55:22, 시118:6) (4) 절망하지 말고 선용해야 한다.(
고난과 소망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고난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 땅에 계실 동안 사람으로 형언할 수 없는 많은 슬픔과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십자가에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난이 얼마나 컸던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처참한 고난을 당하셔야 했을까요? 그것은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걷는 우리를 구원하고 돌보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고난과 슬픔 가운데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고난과 슬픔을 다 아십니다. 아실 뿐 아니라 여러분을 은총의 길로 이끌어 주기 원하십니다. 요셉의 고난과 승리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엄청난 고난에 휩싸일 때가 많습니다. 그때 해답은 보이지 않고 고통만이 엄습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그 뒤에 나타난 부활을 바라보고 믿음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선으로 바꿔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요, 주를 믿는 사람들이 받아 누릴 특권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은 고난을 당할 때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해를 갖다준 사람에 대해 원한을 갖거나 분노하지 마십시오. 고난을 양식으로 삼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소망과 믿음을 갖고 "온 세상이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고난중에 있습니까? 병들었습니까? 타인으로 인해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습니까? 매우 궁핍한 중에 있습니까? 멸시를 받고 있습니까? 소외를 당했습니까? 가정에 위기를 당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해를 선으로 바꿔 주실 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영원토록 사랑해 주십니다.
롬8:28) 고난은 우리를 겸손케 하며(대하33:12),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한다(신4:30). 그리고 고난 뒤에는 상급이 준비되어 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34:19)
고난과 성공
에드워드 쟈드슨 박사는 뉴욕시의 쟈드슨 기념교회의 헌당식에서 그 의 부친 애도니람 쟈드슨의 생애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난 과 성공은 동행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고난을 받지 않고 성공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이전 사람들이 고난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 다. 만일 여러분이 성공을 하지도 않고 고난을 받는다면 여러분의 후 손들에게 성공의 월계관이 안겨질 것입니다.
" 애통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저들은 저들의 고통과 고난이 새로운 피조물을 위한 산고요, 새로운 세계를 위한 산고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습 니다.
저들은 비록 고통을 받고 있을지라도 언젠가 주님과 함께 통치 할 것이라는 소망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저들의 허약을 기뻐할 수도 있고 눈물 중에서도 웃을 수 있으며 슬픔 가운데서도 노래할 수도 있 습니다.
고난의 귀한 시간
스코틀랜드의 죠지 마티슨(George Martheson)의 통찰력 있는 분석과 호소에 귀를 기울여 보도록 합시다.
"과거의 위인들에게 가장 잊지 못할 풍요의 자리가 어디였던가 물어보라.
그들의 대답은 `내가 엎드렸던 차가운 바닥'이라고 답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물어보라.
모리아의 번제단을 가리키리라.
요셉에게 물어보라. 차가운 감옥을 가리키리라.
모세에게 물어보라.
생사의 고비를 넘긴 나일강을 가리키리라.
룻에게 물어보라. 허리가 아프도록 이삭을 줍던 밭에
자기의 기념비를 세울 것이다.
다윗에게 물어보라.
그의 노래는 밤에 지어졌다고 할 것이다.
욥에게 물어보라. 하나님이 폭풍우 가운데서
응답하셨다고 할 것이다.
베드로에게 물어보라
그는 바다에서 순종을 배웠다고 하리라.
요한에게 물어보라.
그는 밧모섬에 승리의 면류관을 던지리라.
바울에게 물어보라.
그는 자기의 눈을 멀게 한 빛에서
영감을 보았다고 할 것이다.
한 사람 더 예수에게 물어보라. 그 분은 대답하리라.
겟세마네 동산 차가운 땅바닥에서 왕권을 받았노라고,
내 영혼아, 그대도 겟세마네에서 화환을 얻으라.
그 쓴 잔을 마심이 면류관이 되리라.
그대의 외로운 시간이 왕관으로 바뀌리라.
절망스런 날들이 기쁨이 될 것이요.
사막이 변하여 노래하며,
조용한 삼림의 나무들이 손뼉치리라."
뜻하지 않은 고난 때문에 낙심되십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지금의 이 고난은 황금알이 잉태되는 귀중한 시간임을! 지금의 이 고난은 우리 안에 있는 각종 아름다운 씨앗들이 알알이 영글기 위해 필요한 보석같이 귀한 시간임을 깨닫고 인내하며 기다립시다.
고난의 설비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능력과 방법에 의지했을 때인생에는 가시가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고통의 가시는 우리에게 [너는하나님의 신세를 정말 지지않고 살겠느냐?너는 네 능력과 방 법을 의지해서 살겠느냐?그러면 네 앞길에는 끝없는 가시가 생겨날 것이다]라고 말할것입니다. 이러므로 인생의 가시에 찔릴 때 [가시 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잘못된 것을 청산해야 합니다.
인생의 가시에 찔려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원망하고 불평하기 전에 고통의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고난에는 반드시 섭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참으로 값지고 아름다운 인생을 보낼 수 있습니다.
고난 주는 까닭
사람들이 타락한 성격,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자기 교만, 탐욕, 육신에 의지하는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도 파괴해 버리고 자기 스스로의 운명도 파괴해 버립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고난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저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기도해서 결혼하고 가정도 이루고 사업도 하고 일도 계획했는데 왜 중간에 와서 이렇게 혹독한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며 모든 일에 시련의 눈보라가 치고 사 막을 지나는 것같은 고통이 다가옵니까. 전진도 후퇴도 못할 정도로 죽게 되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렇게 대하십니까]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을 주셔서 그 것을영원히 누리게 하기 위해 먼저 타락한 인격의 찌꺼기를 제하시 는 것입니다. 어9 건축 공사장치고 기초도 다지지 않고 건물 먼저 세우는 것을 보았습니까. 어느 도로 공사장치고 지반을 파내지도 않고 바로 길을 닦는 것을 보았습니까.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업을 맡기고 큰 축복을 해주시기 전에 먼저 인격적인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
진주가 어떻게 생기는지 아는가? 조개속으로 모래알이 한개 들어간다. 그 부드
러운 조개의 살 속에 거칠은 모래알이 들어왔으니 조개는 얼마나 아프고 쓰리겠는
가?
고통스러운 조개는 몸의 진액을 짜내어 그 모래알을 싸고 견디며 고통을 참는다.
이렇게 한 해가 가고 또 가고 하는 중에 그 영롱하고 아름다운 진주가 생기는 것이
다.
당신에게 고난이 있는 것은 당신 인생의 참 진주를 형성하는 계기인 것이다.
참고 견디어 이기시라!
고난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당신이 괴로워할 때도 하나님은 계시는 걸까요? 그 질문의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당할 때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한가운데 계십니다. 질병과 비극과 재난과 기근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그 분은 그들의 고통을 함께 극복하기 위하여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가며 다가가십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 34:18,19). 고통의 와중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위로를 받아들여본 사람이라면 이 말씀이 진리임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나찌 독일의 악명 높은 수용소인 라벤스부르크에서 죄수로 지낸 바 있는, 유명한 코리 텐 붐 여사는 라벤스부르크의 악몽이 있은 이후 33년 동안 개인의 안식처를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85세의 고령이 되었을 무렵, 몇몇 친구들이 그녀를 위해 캘리포니아에 사랑스런 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그녀의 집에 머물면서 말했습니다. "코리, 너에게 이런 아름다운 처소를 주신 것을 보니 하나님은 선한 분이신가 봐?"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습니다. "내가 라벤스부르크에 있었을 때도 역시 하나님은 선한 분이셨어. "
고난의 골짜기
골짜기가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가 하는 우화가 있다. 처음에는 초원에 넓은 벌판만 있었고 골짜기는 없었다. 어느 날 창조주가 벌판의 잔디 위를 거닐다가 "너 푸른 초원아. 네게는 풀만 무성하고 꽃이 없구나! 왜 꽃을 피우지 않니?"하고 물었다. 초원은 "제게는 씨가 없습니다."고 대답했다. 그때 창조주는 새들에게 온갖 꽃씨를 물어다가 초원 곳곳에 뿌리라고 명했다.
푸른 초원에는 들장미, 미나리제비, 해바라기 등이 자라기 시작했다. 창조주는 다시 초원에 와보고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바이올렛, 아네모네, 고사리, 또 꽃피는 관목들이 없었다. 창조주는 다시 새들에게 초원에서 아직 볼 수 없는 수많은 꽃씨를 뿌리라고 명했다. 그러나 창조주가 다시 왔을 때에 그 꽃들은 한 송이도 없었다. 창조주는 "그 꽃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초원에게 물었다. 초원은 "주인이시여, 저는 그런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거친 바람이 맹렬하여 꽃씨들을 날리고 뜨거운 태양열 때문에 자라나던 꽃들마저 말라버리고 맙니다."고 대답했다. 그때 창조주는 번개와 우뢰와 태풍을 내려 초원의 중심을 때렸다. 초원은 가슴이 쪼개지고 갈라지면서 받는 엄청난 고통 때문에 신음에 신음을 거듭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난 후, 갈라진 초원의 골짜기에 강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새들이 꽃씨를 흩뿌렸을 때 R골짜기의 바위에는 이끼가 덮히고, 덩굴이 덮히고, 구석구석에 바이올렛과 아네모네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거대한 느룹나무가 하늘 높이 솟고, 봉숭아, 고사리도 자라났다. 이제 초원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경험했으나 물이 흐르는 골짜기가 있고 창조주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동산으로 바뀌었다. 거기에는 평화와 기쁨이 깃들었다. 성령의 열매들, 특히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오래 참음 등은 고난의 골짜기에서만 자랄 수 있다. 또 사랑과 기쁨과 평화들도 고난의 골짜기가 있어야만 향기가 생겨난다.
고난에 참가
미국의 서해안에서 동해안으로 물고기를 큰 물통에 담아 운반하는데, 수산 기사가 옆에 따르고 물고기가 서식하는 모든 생활 환경을 다 갖추어서 2주일간 기차에 싣고 운반했지만 물고기가 다 죽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들은 항상 생존 경쟁이라는 것이 있는데 물통 속의 물고기들은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그 생존 경쟁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너무 과잉 보호를 했던 것입니다. 그 생각이 나서 그 안에 조류를 만들어 주기도 하고 그 다음엔 큰 낙지 한 마리를 집어 넣었습니다. 이 낙지가 배가 고프자 긴 다리를 내밀면 물고기들은 나는 죽었구나 하며 피해 다니면서도 2주일 동안 죽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줄 압니다. 세계적으로 오래 사는 사람들은 "사람은 일하고 도전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 "고 말합니다. 인간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이 고통을 주었습니까? 왜 이런 시련을 주었습니까?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하고 까뮈는 고발했습니다. 사단을 하나님께서 이용을 합니다. 사단이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했습니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고후1:6)
고난 속에 잉태되는 부활의 생명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그 예수님의 고난 속에서 부활이라는 생명을 잉태시키고 계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 운행의 법칙이다. 우리는 그 고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쓰러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고난에 함께하시고 이 고난을 부활의 길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때 인간은, 역사는 성장하게 되어 있다. 아브라함 마슬로우는, “그 사람이 얼마나 위대하느냐는 그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이겨 왔느냐와 비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없이 위대한 사람을 생각하기 어렵다. 우리가 겪는 고난 속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부활의 진리가 숨어 있다. 그래서 신앙인은 자기 자신에게, 가정에, 교회에, 민족에게 어떤 시련이 와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하나의 깨어진 꿈은 모든 꿈의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의 부서진 희망은 모든 희망의 마지막이 아니다. 폭풍우와 비바람 저 너머로 별들은 빛나고 있으니 그대의 성곽이 무너져 버릴지라도 다시 성곽 짓기를 계획하라. 수많은 꿈들이 재난에 무너져내리며 고통과 상한 마음이 세월의 물결 속에서 그대를 넘어뜨릴지라도 그래도 신앙에 매어달리라. 그리고 그대의 흐르는 눈물 속에서 새로운 교훈을 배우기를 힘쓰라.
고난의 선물
미국인이 이렇게 말했다. “언제나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중국인들을 사랑하신다면 왜 중국인들이 고통을 당하도록 허락하실까요?” 그러자 중국인 신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언제나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국인들을 사랑하신다면 왜 미국인들이 고통당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실까요?” 팀과 조이스는 한 건축업자와 주택개조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건축 업자는 나쁜 사기꾼이었다. 팀과 조이스는 집 두 채에 대해 고스란히 손해를 보아야 했다. 어느 날 조이스의 아버지가 물었다. “얼마 나 힘드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버지. 이 일은 우리 결혼생활에 큰 힘을 가져다 주었어요. 그 어느 것과도 이 시간을 바꾸지 않을 거예요. 팀과 저는 지금처럼 서로를 가깝게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저희는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를 드린답니다. 전에는 없었던 일이지요. 저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답니 다.” 하나님께 당신의 고난 기간 중에 가르쳐 주시기로 의도하신 모든 교훈을 가르쳐달라고 기도하라. 그리고 그 길을 다시는 걷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고난은 우리를 더 나쁘게 하거나 더 낫게 할 것이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영광은 고난의 언덕 너머
이 세상에 영광을 싫어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영광이 고난의 언덕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에 영광은 모든 사람의 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절망의 자유와 희망의 자유, 이 두 가지 자유는 사람이면 누구나 향유하는 자유입니다. 긍정할 자유와 부정할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 자유와 그 선택 다음에 오는 결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절망과 부정의 자유는 전락이며, 희망과 긍정의 자유는 발전으로 통합니다. 그것은 신앙과 불신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구원과 죽음에로 통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는 밝은 곳도 있고, 어두운 곳도 있습니다. 어느 곳을 향하여, 어느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바람이 몹시 부는 어느 날 바다에 거센 풍랑이 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도 해녀는 바다에 뛰어들어 해물을 캐어내고 있었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물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바람이 거센 날도 바다에 들어갑니까?” 해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풍랑이 바다에 있지, 바다 속에도 있나요?” 이렇듯 신앙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면 삶의 껍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나 문제들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고난의 언덕 너머에 있을 영광을 믿고 바라는 사람들은 오늘의 풍랑과 시련을 견디어낼 수 있습니다. 절망만 보면 절망합니다 / 김기원
함께 하는 고난
우리 동네는 매우 조용하고 깨끗한 곳으로 중산층에 어울리는 좋은 집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 부근에 오래된 낡은 집이 하나 있는데, 방이 열 개나 되었습니다. 전에 살던 사람들이 이사를 간 후 최근에는 기독교 단체에서 임대하여 문제 청소년들을 위한 갱생원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 곳에 수용된 청소년들은 모두 자기 집에서는 살 수 없을 정도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마약 중독자가 있는가 하면, 전과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갱생원은 지역보호를 어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동네 주민들은 집값이하락하지나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동네 한가운데 문제의 수용소가 생기면 집값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딸을 가진 부모들은 더욱더 걱정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겁을 먹었고, 어떤 아주머니들은 과민한 반응을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정부에 진정서를 보냈습니다. 이들을 동네에서 쫓아내고 자신들의 재산과 딸들을 보호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동네 주민들은 거의 다 서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서명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자기 자식도 그런 암흑 속을 헤맬 수도 있음을 고려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온 탕자들이 다시 하나님 뜻에 따라 살 수 있는 곳을 마련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힘든 가시밭 길을 뚫고 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돌아온 탕자를 다시 쫓아내는 일에 서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도 비록 사소한 일이지만, 예수님과 함께하는 고난입니다.
고난이 있어야 강해진다
미국의 한 수산기사가 물고기를 물통에 담아 운반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물고기가 살 수 있는 환경을 다 갗춘뒤 2주일간 기차에 싣고 운반을 했지만 모두 죽어 버렸다고 합니다.
곰곰히 생각한 이 수산기사는 물고기의 세계에도 생존 경쟁이라는 것이 있는데 물통에 담긴 물고기에게는 그러한 생존 경쟁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인간으로 말하자면 지나친 과보호라고 할까요?
그래서 수산기사는 생각끝에 물통에 조류를 만들어 주기도 하고 커다란 낙지를 한 마리 집어 넣어서 물고기들이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도망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물고기 들을 죽지않은 상태에서 운반을 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이 듭니다. 고난이나 극한 상황이 없는 인생은 그러한 상황이 닥칠때 어떻게 될까요? 사단을 통해 욥을 시험하신 하나님을 이날 하루 기억하며 살았으면 합니다.
고난의 산물
어느 대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물었다. "사내는 알코올 중독자로 가구를 내다 팔아 술을 마시고, 술 마실 돈이 없으면 아내를 두들겨 팬다. 거기다가 그 아내는 폐결핵에 걸려 콜록거린다. 그들은 셋방살이 형편이다. 그런데 아내가 임신을 했다. 여러분에게 묻겠는데, 이 임신된 태아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학생 하나가 재빠르게 손을 들고 일어서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낙태시켜야 합니다." 대학 교수가 말했다. "자네는 금방 베토벤을 죽였네!" 베토벤을 낳은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지병인 폐결핵으로 죽었다. 그는 11살 때부터 극장을 돌며 구걸 예술을 해야만 했다. 거기다가 그는 서른 살 때 음악가의 생명인 귀를 잃었다. 그의 음악은 강한 주제를 지니고 있으며 대부분 끝부분에 가서는 환희를 노래한다. 고통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고백대로 그는 "괴로움을 뚫고 나가서 기쁨을 발견"한 것이다. 로망 롤랑이 쓴 베토벤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는 나이가 들고 성공할수록 깊은 신앙의 세계에 빠졌다. 신앙이 그를 모든 파괴적이고 체념적인 불행의 조건에서 구출하여 높은 경지로 인도한 것이다. 고난은 불행과 동의어가 아니다. 오히려 고난은 신앙과 만날 때 가치와 행복의 어머니가 된다.
고난이 지난 후
‘알프스의 명화’로 불리는 고산 식물 에델바이스는
눈 속에서 추위를 견디며 어렵게 생명을 이어갑니다.
차디찬 바람과 눈보라에 시달리며 겨울을 지내죠.
에델바이스는 이런 시련을 겪으면서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맺습니다.
그리고 눈이 녹을 무렵에는 신비로운 꽃을 피웁니다.
에델바이스의 잎과 줄기는 뽀얀 솜털로 덮여 있습니다.
꽃잎도 부드러운 솜털로 짠 것같이 눈부십니다.
에델바이스는 추위에 심하게 시달릴수록,
밤낮의 기온차가 클수록
더욱 신비한 빛깔을 띠게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더욱 신비한 빛깔이
생겨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파가니니와 외줄 바이올린(가치,고난의 승리)
유명한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연주가 파가니니에게 있어서 가장 훌륭했던 연주은 단 한 줄만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일이다.
그는 초라하게 연단에 나왔다. 기다리던 청중이 미소를 보냈다. 서먹서먹하며 활을 당기니 현 하나가 탁 끊어졌다. 청중은 속으로 웃었다.
또 한번 활을 그으니 또 한줄 의 현이 끊어져 나갔다. 연주장은 온통 왁 하는 웃음으로 덮였다.한번 더 활을 갖다 대었다.
한줄 밖에 안남았는데 단한 줄의 현과 파가니니만 남아 있었다. 그는 정중히 활을 들어 한 줄을 올렸다 굵고 깊은 선율이 흘러나왔다. 폭풍을 뚫고 올라가 창공을보듯 소리는 아름다왔다.
청중은 침묵속에 귀를 기울였다. 기쁨보다두려움이 감돌았다. 사람들의 고개가 하나하나 수그러졌다. 불만을 토하던 사람들 눈에서 감격의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쓸모없는 것이라도 누구 손에 있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달라진다.
고난이 곧 은혜라
영국 한림원(The Royal Society)에는 과학자들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잭 뉴턴이라든지 열역학의 복사법칙을
발견한 제임스 진수는 모두 영국이 배출한 석학들이다. 나는 진스의
고백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하나의 과학자에 불과하다 학문을 연구하면 할수록 창조주 하
나님의 위대함에 감복할 뿐이다. 제한된 지식을 알게된 피조물인 내
가 어떻게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알 수 있겠는가]
길지 않은 삶을 살아오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
었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고 느낄 때도 많았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많은 시련과 고난을 주셨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
에서는 고난이 곧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고난의 이유
어느날, 친구의 온실 안을 거닐다가 다른 여러개의 화분으로 완전히 덮여 있는 작은 화분을 보게 되었다. 그때 친구가 내게 말했다. “내가 왜 이 작은 화분 주위를 어둡게 해 놓았는지 자네는 알겠나? 그것은 말이야, 더 깊이 뿌리를 내리라고 그렇게 한 것이라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뿌리를 더 깊이 내리기 위해서는 그 주위를 어둡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고난을 통하여’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믿는 믿음안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하기 위하여 그 가 사용하실수 있는 모든것을 사용하신다. 그러한 그의 노력이 때로 우리가 보기에 이해가 안되고 견디기 어렵기도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처럼 결국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들도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것이 될것이다. 요셉의 삶이 그러했고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그러했다. 비록 지금 당신의 삶이 어렵고 고통스럽다 해도 그것이 당신의 믿음을 깊이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는것을 알면 당신이 그것을 이겨내는데 큰 힘이 될것이다.
고난 당하는 것이 유익
성경: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
영국 한림원(The Royal Society)에는 과학자들의 초상화가 걸려있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잭 뉴턴이라든지 열역학의 복사법칙을 발견한 제임스 진수는 모두 영국이 배출한 석학들입니다. 이 가운데 진스의 고백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의 과학자에 불과하다 학문을 연구하면 할 수록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함에 감복할 뿐이다. 제한된 지식을 알게된 피조물인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알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광대함을 이해하면 우리들의 잠시고난이라는 것도 능히 견딜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무한 하시고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승리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오늘도 이러한 승리의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난의 터널에서 부르는 노래
고난의 긴 터널을 지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며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탄식이 나옵니다. 우리의 옛 조상들은 그것을 '창극'형태로 발전시키기도 했고, 한(한)의 민족인 우리의 창극은 그래서 더욱 구슬프고 애절한 음색을 띱니다.
평소에 좋은 노래 하나 배워두면 고난이 닥쳐올 때 저절로 입에서 흘러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 어느 기독교 복음 가수가 부른 다음 노래를 한번 배워 보세요.
1. 반드시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 반드시 내가 너를 들어 쓰리라
천지는 변해도 나의 약속은 영원히 변치 않으리
두려워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 낙심하며 실망치 말라
낙심하며 실망치 말라 실망치 말라
2. 반드시 내가 너를 인도하리라 반드시 내가 너를 지켜 주리라
세상의 소망이 사라졌어도 온전히 나를 믿으라
두려워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 인내하며 부르짖으라
인내하며 부르짖으라 부르짖으라
3. 반드시 내가 너를 구원하리라 반드시 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여라 열심히 기도하여라
두려워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 간절하게 기도하여라
간절하게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
네 소원 이루는날 속히 오리니 내게 영광 돌리리 영광의 그 날이 속히 오리니 내게 찬양하여라.
고난을 이기게 하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고난도 주시나이까. 하나님만이 선하시고 완전하시다 하시기에 우리는 고난을 통해 시험과 교훈을 받아야만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나 보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대로는 그 나라에 못 가옵니다. 그 죄를 씻기 위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이미 고난을 당하셨으니 우리가 그와 함께하기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환난을 당할 때에만 아버지를 찾고 울부짖으며 때로는 하나님을 한없이 원망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포기도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고난을 통해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니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우리도 주님을 사랑해야 하옵니다. 행복과 불행, 선과 악이 얽힌 이 땅에서 강한 훈련을 하여 수준 높은 자녀 고르기가 바로 하나님의 섭리일지도 모르옵니다. 고난을 통해 비로소 그리스도를 만나니 우리가 유익하다 하셨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고 인내하면 소망을 이루게 되고 또 주님은 우리가 정금같이 아름답게 되리라 하셨나이다. 성령이시여 이 고난의 의미를 속히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고난을 승리로 이끄사 오히려 감사한 마음을 품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사랑에서 떠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비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도 비교할 수 없사옵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심부름꾼
남아프리카에서 오지로 장거리 여행을 떠난 남편을 둔 아내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남편은 몇 달 동안 우체국도 없는 먼 곳에서 보내야 합니다. 어느 날 그 아내는 크고 잔인한 카피르 족(남아프리카 공화 국 케이브 주의 카프카라리아에 거주하는 반투 어족 원주민) 한 사람이 자기 집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얼굴이 사납게 생겼고 창과 방패도 들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집안으로 달려가 문을 걸었습니다. 이내 그 원주민이 와서 문을 쾅쾅 두드렸습니다. 그는 날짜가 한참 지난 신문 한 장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한 달 동안이나 걸어서 남편의 기별을 갖고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더러운 신문지 속에는 잘 지내노라는 남편의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편지에 얼마나 기뻤겠 습니까? 그리고 다시 몇 주가 지났습니다. 그녀는 이제 그 흉하게 생 긴 심부름꾼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남편으로부터 온 심부름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여, 당신은 시련과 근심과 실망이, 비록 손에는 창을 들었고 사납고 험악한 인상을 가졌지만, 예수님께로부터 곧장 달려온 심부름꾼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까?
고난이 주는 유익
민 18∼20/막 7:1∼13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욥 5:17,18.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 이다”-시 119:6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7,18.
미국의 스미스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폴린 해밀턴 박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중국 선교사로 자원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는 많은 어려움들이 해밀턴 박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들은 해밀턴 박사에게 고통과 좌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만큼의 세월이 흐른 뒤 해밀턴 박사는 고난을 기회로 삼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다리 부상으로 병원에 누워 있었을 때가 자신의 중국 선교 기간 중 가장 활기차게 사역을 감당했던 때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자
녀가 된 사람들에게는 고난도 유익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에게 고난이 찾아왔습니까 ? 감사하십시오. 그 고난을 통해 당신은 더욱 성숙해질 것입니다.
“주님, 저희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고난도 유익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인생의 고난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음악 작품을 남긴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생애는 그의 작품처럼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를 키워 준 형이 있었지만, 그는 자기가 먹여 살려야만 되는 동생을 몹시 미워하였습니다. 그후 어른이 되어서도 생활은 마찬가지로 어려웠습니다. 결혼한 지 13년 되던 해 부인이 죽었습니다. 또다시 결혼하게 된 그는 스무 명의 자녀를 갖게 되었는데, 그 중 열 명은 어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다른 한 명은 스무 살 즈음 되어 죽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정신 박약아였습니다. 나이가 많아지자 이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뇌일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계속 작곡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찬양과 경배와 감사의 노래들.... 그야말로 불후의 명작들이었습니다. 도대체 이토록 비참하게 살았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독실한 루터교 신자로서 세계 역사상 교회 음악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입니다. 그가 이처럼 심오한 믿음과 찬양의 세계를 알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그가 인생의 고난을 어느 누구보다도 더 깊이 체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의 마지막 부분에 항상 S.D.G. 라는 글자를 적어 놓았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Soli Deo Gloria!)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의 첫 번째 글자들입니다. 올겐을 위한 합창 전주곡들은 '지극히 존귀하신 하나님께!'(The most High God!) 바치는 곡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올겐 연주만을 위한 작품들의 첫 부분에는 I.N.J. 즉 '예수 이름으로'(In Normine Jesus: In the name of Jesus)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바하는 물론 유명한 올겐 연주자였으며 훌륭한 작곡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의 근본 목적은 우리와 조금도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무시무시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만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일하는 것.... 이것이 바로 바하의 삶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독일의 한 남작이 자기 성곽의 두 탑 끝을 여러 가닥의 철사줄로 연결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 줄들에 바람이 부딪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거대한 바람 하프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대기가 잠잠하고 조용했으므로 그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 부드러운 미풍이 불기 시작하자 그는 한 가닥의 가냘픈 음악소리를 이 바람 하프로부터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화음이 울린 것은 겨울날 거센 폭풍이 그 줄들을 휘몰아칠 때였습니다. 그럴 때는 장엄한 음악이 탑 사이에서 쏟아져 나와 그 아래 골짜기를 가득 메우곤 하였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폭풍이 가장 거셀 때 울려 나왔습니다.
이와 같은 일을 우리는 실제 삶에서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고난과 역경의 폭풍이 혹심하게 몰아칠 때 우리는 흔히 가장 풍성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만일 이러한 고난이 우리들의 삶의 줄들을 부딪칠 때가 아니면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승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실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됩니다. 당신은 왜 불행한 일들이 당신에게 일어나야 했는지 이해해 보려고 애쓴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삶에 불어닥치는 폭풍에 시달려 지쳐 있습니까? 그렇다면 외로운 싸움을 멈추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을 닮도록 이끄시게 하십시오. 시련과 고난은 그 역경의 폭풍이 당신의 삶에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축복을 받게하여 마침내 당신께 풍성한 성취를 안겨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역경의 날에 즐거워하십시오. 당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십니다. 역경의 날에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은혜 내리시기 위해 당신을 잠시 아프게 하는 것뿐입니다. 역경의 날이 있어야만 자갈밭과 가시밭이 옥토로 변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 모든 일이 평탄해지고 잘되는 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에는 때로 불같은 시련이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의심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4:12-13)하였습니다.
성도의 고난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이겨나가는 것입니다. 로마에는 바울 사도가 사형을 당하기에 앞서 일주일간 있었던 감옥이 있습니다. 그 감옥에는 창이 하나 나있는데 참수터만 바라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 일주일간 어떤 생각을 하며 보냈을까요?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면서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주님에 대한 충성의 푯대를 향해 한 번도 흔들림 없이 달려온 그에게 참수형이 그 대가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옥생활 중에서도 다른 성도들을 오히려 염려하며 성령의 감동으로 놀라운 옥중서신을 기록한 바울 사도는 최후의 순간에도 감옥의 간수를 전도했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겸손케 하며(대하33:12),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합니다.(신4:30) 또한 고난 뒤에는 상급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 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
고난이란 학교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익혔다는 `실락원'은 52세에 실명한 존 밀턴이 천신만고 끝에 67세의 나이에 완성한 작품이다.
모든 사람이 장님이 된 그를 불쌍히 여길 때 그는 "소경이 된 자신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소경을 이겨내지 못하고 좌절하는 사람이 불쌍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꿈과 용기를 준 소설 `보물섬'의 저자 로버트 스티븐스는 14년이란 세월동안 앓아누운 상태에서 기록한 소설이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이 젊은 시절 군대에서 보초를 서다가 급한 용무가 생겨 친구에게 부탁하고 마을에 다녀와보니 그 친구가 적의 총탄에 맞아 죽어 있었다.
동료의 죽음에 대한 고통을 글로 표현하면서 극복했는데, 그것이 바로 `천로역정'이다.
고난이란 학교를 적극적인 자세로 졸업하고 나면 오히려 더 영광이 기다리는 것이다.
주기철 목사의 고난과 생애
주기철 목사는 1897년 11월25일 경남 창운군 웅천면 북부리 백일마을(현재 진해시 웅천1동)에서 태어났다. 웅천은 임진왜란 당시 세스페데스 신부가 소서행장이 이끈느 일본군대의 종군신부로 활동했던 바로 그 곳이다. 비록 전쟁중에 이루어진 그리스도교와의 만남인지라 결실을 맺을 수는 없었을지라도, 그리스도와의 첫 대면이 이루어진 이 땅 웅천에서 한국교회의 큰별 주기철 목사가 태어난 것이다.
주기철은 유년기와 청년기의 배움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다. 주기철은 어린 시절 웅천교회(1906년 설립, 현재 웅천교회 주보에는 설립연도가 1900년으로 표기되어 있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주기철은 웅천 지역의 선각자인 주기효가 설립한 개통학교 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주기효는 동학에 지니는 민족적 성격에 심취하였던 인물로서, 보호조약 체결(1905)에 충격을 받아 교육구국의 필요성을 느껴 이 학교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주기철이 개통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12년 말경에 춘원 이광수가 웅천에 들러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오산학교를 소개하는 강연을 하였다. 주기철은 이광수와의 해후를 계기로 정주 오산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어려서부터 부르던 기복이라는 이름을 기철로 바꾸었다.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철저히' 따른다는 의미에서 였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민족교육의 요람으로서, 이곳에서 숱한 민족지도자가 배출되었다. 주기철은 특별히 남강 이승훈, 다석 류영모등의 가르침을 통해서 구구의 의지를 불태웠다.
1916년 3월 오산학교를 졸업한 주기철은 곧 연회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한다. 경제입국의 원대한 꿈을 그리스도교의 정신으로 구현하고자 한 그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가 민족산업 중흥을 통한 민족구원의 꿈을 꾸게 된 데에는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주기철은 연회전문 수학을 중도에 그만두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앓았던 안질이 도져서 학업을 계속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인 웅천으로 돌아온 주기철은 한동안 좌절과 실의 속에서 지냈다. 그러나 주기철이 고향에서 할 일은 많았다. 주기철은 교남학교 교사로 부름받아 고향의 청년들을 가르치면서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한편 주기철은 1920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부흥회에 참석하여 일생의 전환을 체험하게 되었다. 당시의 강사는 저 유명한 김익두 목사였다. 김익두 목사는 "성신을 받으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다. 주기철은 이 때 강렬한 성령체험을 하게 되었으며, 복음사역을위해 투신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22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평양신학교 학생들은 출신도별로 나뉘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주기철은 학교측에 이러한 제도가 지니는 폐해를 설명하고 시정해주도록 건의하기도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한국교회에 이른바 지방색의 폐단인 현안문제가 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주기철 목사의 이러한 행동은 귀감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기철은 1925년 12월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주기철 목사의 첫 사역지는 부산 초량교회였다.(1926년 1월) 주 목사는 탁월한 설교자였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교회 행정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경남성경학원과 진주성경학교 등에서 후진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주 목사는 1931년에 마산문창교회로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는데, 당시 문창교회는 이른바 `박승명 목사 사건'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교인들은 오직 주기철 목사만이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품과 신앙을 지녔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주기철 목사는 이곳에서도 신앙의 정통을 수호하고 교회의 성결을 지키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였다. 주기철 목사는 무학산에 올라 장시간 기도하곤 하였는데, 그가 기도하던 장소는 지금도 `무학산 십자바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주기철 목사는 이즈음에 경남노회에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을 제출하여 가결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정점에 서기 시작하였다. 1935년 5월에는 전국의 장로교 목사들이 모인 금강산 수양집회에서 "예언자의 권위"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는데, 설교를 마치기도 전에 일본경찰에 의해 강단에서 끌어내려지기도 하였다.
주기철 목사는 1936년 여름에 사역지를 평양 산정현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산정현교회는 수많은 민족운동가와 신앙운동가를 배출한 중요한 교회였다. 주기철 목사가 산정현교회를 담임하게 된 것은 그에게 한국교회를 수호할 사명이 맡겨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주 목사는 이러한 사명을 묵묵히 그러나 단호하게 완수하였다.
그는 1938년부터 1944년까지 5차례에 걸쳐서 총 5년 4개월간의 투옥생활을 하면서 신사참배반대운동과 신앙수호운동의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일사각오'의 자세로 일제에 항거하였다. 이와 같은 항거 끝에 주기철 목사는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에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남기고서 감옥에서 소천하였다.
주기철목사는 말씀에 순하여 가르침을 지키고자 목숨을 바친 순교의 종이었다. 한국교회의 공적인 조직들이 하나같이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가결했던 순간에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하여 투쟁했던 주기철 목사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반대 투쟁의 의의에 대해서는 오늘날 논란이 벌어지기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이는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반대투쟁을 오로지 신앙운동의 차원에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주기철 목사의 투쟁대상은 다름아닌 일제였다는 점에서, 그의 투쟁은 민족운동의 자리에서도 의밍있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주기철 목사의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의 배움의 경험은 그의 신앙이 민족적인 경향을 지니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주기철 목사는 복음과 민족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한국교회의 큰 별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주기철 목사의 순교정신을 다시 한번 기려야 할 것이다. 주기철 목사의 순교의 영성이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아룰러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벌어진 장로회 총회에서 있었던 주기철 목사의 목사직 박탈 겨렁을 한국의 모든 장로교단들이 뜻을 하나로 모아 공식적으로 철회하고 그 직을 복권하여야 할 것이다.
고난
진주가 어떻게 생기는지 아는가? 조개속으로 모래알이 한개 들어간다. 그 부드
러운 조개의 살 속에 거칠은 모래알이 들어왔으니 조개는 얼마나 아프고 쓰리겠는
가?
고통스러운 조개는 몸의 진액을 짜내어 그 모래알을 싸고 견디며 고통을 참는다.
이렇게 한 해가 가고 또 가고 하는 중에 그 영롱하고 아름다운 진주가 생기는 것이
다.
당신에게 고난이 있는 것은 당신 인생의 참 진주를 형성하는 계기인 것이다.
참고 견디어 이기시라
고난을 당할 때
고난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하게 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은 우리를 온전케 합니다. 죄를 회개케 하여 정결하게 만듭니다. 저는 서른 살 한창 시절에는 결핵에 걸려서 고생했습니다. 결핵에 좋다고 해서 천호동 시장에서 소머리를 얼마나 많이 사다 먹었는지 모릅니다. 6개월마다 엑스레이 찍고, 저녁마다 주사 맞고, 좋다는 약은 다 먹어도 결핵은 점점 나빠졌습니다. 나중에는 위장병도 생기고 간도 나빠지고 병이란 병은 다 갖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모두들 쉽게 살아가는데 나 혼자만 어려움을 당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저는 한번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장애물이 가로막을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더 가까이하고 더 기도하고 붙잡았습니다.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나자 눈이 뜨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의 어려운 환경을 보는 눈을 뜨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형편을 보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주 어려웠을 때 제일 좋아했던 찬송이 465장입니다. "내 몸의 약함을 아시는 주 못 고칠 질병이 아주 없네 / 괴로운 날이나 기쁜 때나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네 /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에게는 못 고칠 질병이 없습니다. 가난하십니까?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부유하게 하실 창고의 열쇠를 쥐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자녀 문제입니까? 인류의 길을 인도하시는 주님께서 여러분의 자녀를 축복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꿈으로 보여진 고난
프란시스 자비어(France Xavier)라는 사람이 자신의 선교지를 동양으로 결정하고 출발하기 전날 밤 꿈을 꾸었다. 그 내용은 그가 앞으로 감당해 내야할 고난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건너야 할 강과 광야와 사막을 보았고, 추위와 배고픔, 더위와 갈증, 그리고 핍박을 보았다.자기를 숨어서 기다리는 원수까지도 합세하였다. 그러한 광경들이 하나씩 다
지난간 후 그는
잠에서 깨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그는 "오! 주님 어떠한 어려움이있더라도 오히려 나는 주님을 위해 기꺼히 견디겠나이다" 라고 소리쳤다.
고난의 과정
한 형제가 해 준 이야기가 있다. 어린 소년이었을 때 아버지가 예쁜 강아지를 한 마리 사오셨다. 그는 아버지께 꼬리가 없으면 더 좋겠다고 했더니 주머니칼 하나를 주시며 강아지를 데리고 나가 칼로 꼬리를 잘라내라고 하셨다. 그러나 고통에 신음할 강아지가 불쌍해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래도 꼬리 없는 강아지를 가지고 싶었다. 곰곰히 생각을 하다 매일 조금씩 잘라내면 훨씬 마음 편하게 강아지 꼬리를 잘라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조금만 견디면 모든 과정이 완성되는데 그 고난을 인내로 받기를 거절한다. 결과적으로 더 늘여서 긴 고통의 과정을 선택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전한 임재 속에 사는 자녀가 되기까지 우리를 문제에서 구해주지 않으신다. 나에게도 실업자가 되어 일자리를 찾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좌절과 수치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하나님, 저에게 일자리가 필요함을 아시지 않습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찾아다녀야 합니까? 왜 좀 쉽게 빨리 일자리가 있는 곳으로 인도해주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취업을 위해서 내가 아직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지혜와 능력이라는 우상을 버리고 포기할 때까지 기다리셨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상황 속에 우리를 넣으시면서 자신을 의지하는 것을 온전히 포기하도록 이끄신다.
고난 속에서 자란 신앙
이준은 1904년 친일조직인 일진회에 대항하는 공진회를 만들어 친일파를 탄핵하다가 그들의 모략에 걸려들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이준은 1904년 12월24일 황주의 외딴섬 철도로 유배길을 떠나면서 성경도 함께 가지고 떠났다.연동교회를 출석하던 그였으나 신앙체험은 미약했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의 고독과 적막은 그로 하여금 성경을 탐독하게 했고 깊은 신앙을 체험하게 되었다.
고종의 특사로 한달 안에 방면된 그가 남긴 말은 “이번 유배를 통해 예수의 성스러운 희생정신인 십자가의 피의 의를 내것으로 해야 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나의 신앙적 깨달음은 불우한 귀양살이 섬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었다.
초대교회의 신앙은 박해와 고난속에서 자랐고 한국교회 역시 가시밭길을 걸으며 성숙했다.바다의 풍랑은 바닷속에 산소를 만들고 땅 위의 바람은 나무뿌리를 깊게 만든다.고난을 헤쳐나가는 용기,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는 것은 지혜로운 기독인의 삶이다
고난의 학교
기독교의 고난의 학교에는 4단계의 학급이 있는데, 첫 번째 학급은 "나는 고난을 견딜 수밖에 없다" 라는 말을 하는 법을 배우는 곳인데 고난에 대해 불평을 하면서도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필연적인 멍에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두 번째 학급은 "나는 참고 견딘다" 고 하면서, 무섭긴 하지만 고난을 자진하여 하나님 이름으로 떠맡는 사람들의 교실이다. 세 번째 학급은 "나는 고난을 견딜 수 있다" 라고 하는 학급으로, 여기서는 고난을 견디는 것이 훈련이 되어 있어서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강하며 빛을 발하는지를 알고 평강을 체험하는 곳이다. 네 번째 학급은 "나는 고난을 겪을 필요가 있다" 라고 말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고난이 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임이 나타나는 표적이 되고 시험을 당하면 오히려 기뻐하라는 말씀의 권면을 이해하게 된다.
고난은 인생을 가르치는 엄한 교사다
지난달 부산에서 열린 제81회 전국체육대회에서 관심을 모은 한 팀이 있었다.화제의 주인공은 전북 순창의 한 중고등
학교 여자 역도팀.이 대회에서 선수들은 무려 14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룩했다.이 어린 선수들이 이런 호
성적을 올릴 것으로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런데 이 선수들은 대부분 삶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다.역경을
피나는 훈련으로 이겨내며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섰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학교 관사에서 생활하고 있는 학생도 있다.그녀는 부모님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암으로 투병
중인 아버지와 조부모를 극진히 보살피는 효녀도 있다.15명의 선수 중 13명이 영세민이다.이들은 고난을 극복하는 과
정에서 오히려 놀라운 투혼을 발휘하고 있다. 가시없는 왕관은 없다.고난은 인생을 가르치는 엄한 교사이다.
고난은 일시적이다
고대 희랍의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솜씨 좋은 어느 조각가가 파르테 논 신전에 장치할 석상을 만들기 위해 커다란 대리석을 정으로 쪼고 있었 다.
열심히 대리석을 파 나가고 있던 조각가의 귀에 신음소리가 들렸다. 자 세히 들으니 그것은 대리석이 내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였다.
조각가가 "왜 신음소리를 내는가?" 하고 물으니 대리석은 "다신이 지금 나를 날카로운 정 으로 쪼고 있지 않습니까? 내 몸에 붙은 살점이 이렇게 쪼개져 나가 땅에 버려지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불평을 했다.
그러자 조각가는 크게 노한 소리로 꾸짓기를 "어리석은 대리석아 내가 너의 몸을 다듬어서 훌륭한 석상 으로 만들지 않는뭉뚝한 덩이가 무슨 재주로 파르테논과 같 은 거룩한 신전에 올려져 후에 사람들에게 존경과 찬양을 받을 수 있겠느냐 너의 고통은 일시적이다, 잠시만 참라" 고 말했다.
고난뒤의 새로움
영국의 시인 윌리암 워즈워드가 쓴 시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가 있습니다
황량하고 거친 산속에 살고 있는 새 한마리가 어느날 들에 나갔다가 폭풍을 만났
습니다. 그 새는 자기의 둥지를 떠나지 않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해서 그 산을
향해 날아가려고 발버둥쳤습니다. 자기가 태어나 살고 있는 산을 떠나면 죽을 것만
같아서 안간힘을 썼으나 그것은 허사였습니다. 폭풍을 이기고 날아갈 수가 없었습
니다.
하는 수 없이 그 새는 폭풍이 부는 대로 자기의 몸을 맡기고 그 방향으로 날기
시작했습니다. 강한 폭풍을 따라 한참 날아갔습니다. 드디어 폭풍도 약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새의 눈 앞에는 푸른 초장과 멋진 수풀의 아름다운 산이 나타나는 것이
었습니다. 과거에 자기가 살던 거친 수풀의 산과는 비교가 안되는 훌륭한 수풀과
산이었다는 것입니다.
고난
진주가 어떻게 생기는지 아는가? 조개속으로 모래알이 한개 들어간다. 그 부드
러운 조개의 살 속에 거칠은 모래알이 들어왔으니 조개는 얼마나 아프고 쓰리겠는
가?
고통스러운 조개는 몸의 진액을 짜내어 그 모래알을 싸고 견디며 고통을 참는다.
이렇게 한 해가 가고 또 가고 하는 중에 그 영롱하고 아름다운 진주가 생기는 것이
다.
당신에게 고난이 있는 것은 당신 인생의 참 진주를 형성하는 계기인 것이다
고난이 주는 유익
미국의 스미스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폴린 해밀턴 박사는 하나님의 인
도하심에 순종하여 중국 선교사로 자원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는 많은 어
려움들이 해밀턴 박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들은 해밀
턴 박사에게 고통과 좌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만큼의 세월이 흐른 뒤
해밀턴 박사는 고난을 기회로 삼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
녀는 다리 부상으로 병원에 누워 있었을 때가 자신의 중국 선교 기간 중 가
장 활기차게 사역을 감당했던 때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자
녀가 된 사람들에게는 고난도 유익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에게 고난이 찾아왔습니까 ? 감사하십시오. 그 고난을 통해 당신은 더
욱 성숙해질 것입니다.
“주님, 저희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고난도 유익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 당신에게 유익이었던 고난의 경험을 기록하십시오.
고난의 유한성
성경: 벧전5:9-10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 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 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정말 견딜 수 없는 어려움에 빠졌다"고 낙심했던 기억이 있으십니까? 막상 어려움을 당하면, 고통이 언제 끝날지 암담하게 느껴지고 낙심하고 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계속되는 고통이란 없습니다. 오늘 이 땅의 삶에서 아픔과 고통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약속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아픔은 지나갈 것이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혜는 영원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주께서 지금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고통스러운 과정은 오히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경험하는, 감사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고통에 유익이 있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온 시간이 더해가면 더해갈수록, 이전에 경험했던 고통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소중한 밑거름이 되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인생에서 가장 고통의 시기에 작성한 서신에서,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 앞으로 그들에게 있을 영광과 소망을 기억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리고 24절과 25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라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성경에 있는 대로 주님을 다시 이 땅에 보내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자녀가 영원히 그분을 만나볼 수 있게 하실 겁니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 말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아무리 고통 가운데 있다고 해도 견딜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다고 해서, 당장 그 고통의 고통스러움이 작아진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새로 태어날 아기를 소망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 역시, 그분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다는 소망에서 앞에 놓인 고통의 시간을 견딜 수 있습니다.
오늘도 현재의 고통에 속아 살지 말고 미래를 바라보며 승리하시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일 나에게 고난이 없었다면---
어떤 과학자가 나방이 어떻게 고치를 만들고 그 고치 속에서 어떻게 나비로 탈바꿈 하는 가를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학자는 고치속에서 밖으로 나오려고 바둥거리며 온 힘을 다하는 애벌레가 안쓰러워 칼을 가지고 고치 위쪽을 쭈~ 욱 찢어 주었습니다.그런데, 이상한 것은 밖으로 쉽게 빠져 나온 나방에게 고통은 중단되었으나 그 나비는 곧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놀란 과학자가 나비의 죽음을 연구해 본 결과는 이렇습니다. 나비는 고치를 뚫고 나오려고 버둥거릴때 날개에서 기름기가 흐르게되고 그 기름 때문에 고치에서 나와 햇볕을 받을때 날개가 마르지 않고 쫙~ 펴져서 하늘을 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방이 불쌍하다고 하여 인위적으로 고치를 뚫고 나올때의 고통을 제거해 버리면 나방이 쉽게 나오기는 하는데 결국은 기름기 없는 날개로 인하여 날지를 못하고 햇볕에 말라 죽는 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 당할때 그 고난이 없었으면 하기도 하고 누군가 빨리 고난을 제거 하여 주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은 과학자의 손에 의해 고통 없이 세상으로 빠져 나온 나방 같아서 날지 못하고 곧 죽을 지도(영성) 모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힘겨운 고통으로 바둥대고 있을 때도 도와 주시지 않는듯 멀리 계시는 겁니다. 이 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도 하지만 우리의 바둥거림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의 날개에는 성령의 기름이 흐르게 되고 그 바둥거림의 시간을 통하여 우리는 죽는 것이 아니라 살게 됩니다 뿐만아니라, 푸른 창공을 날아가는 나비처럼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힘차게 올라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고난이 어떤 것이든 하나님을 기다리며 참아 내십시요.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라면 절대로 고난 때문에 망하거나 죽지 않습니다.
(죽고 망하는 것은 회개하지 않은 죄때문임)
설령 죽어도 살고 망해도 다시 일어 서게 하십니다.
잠시 죽는 것처럼 보이며, 망하는 것처럼 보이며, 막히는 것처럼 보이며,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것 뿐입니다.
시골에서 제가 어릴적에 물이 넘치는 위험한 냇가를 건너려고 할때 어른들의 말씀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얘들아! 너희들은 가벼워서 혼자 건너면 물에 떠내려 갈 위험이 있으니 무거운 짐이나 가방을 어깨에 메고 건너 가거라 그러면 중심을 잡게 되고 물살에 떠내려 가지 않을수 있단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건너야 할 세상의 물결이 너무 세고 우리는 약하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가게 하십니다. 그것은 주님의 각별하신 배려 이며 최고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으면 죄악과 유혹의 물결 온갖 시험과 정욕에 물결에 떠내려 갈까봐 우리의 동의와 상관없이 견디기 어려운 이런 저런 짐들을 메우시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 짐이 나에게 없었다면 지금쯤 '나는 어디에 있을까?'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나의 영성은 어느 정도일까?'(예수나 제대로 믿고 있을까?)
'이것만 없었으면 행복 할텐데'
'이 문제만 해결되면 더 열심히 믿을터인데' '
이 사람만 없었으면 날마다 감사할터인데'
이러한 고통과 짐들속에는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시나리오와 섭리가 숨겨 있는 것을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지요.
하나님의 섭리란 현재는 모르지만 나중에 해석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짐이 나중에는 힘이 되어 간증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몫에 태인 십자가를 오히려 감사 하십시요.
모르고 감사하다 보면 '아~ 그래서 그러셨구나?'
알고 감사 하게 될날이 오거든요.
내 어깨를 짖누르는 고난으로 인하여 오히려 기뻐 하십시요. 지나고 나면 '그 고난이 없었으면 큰일 날뻔 했구나'
찬양 할날 오게 됩니다.
얼마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나신 일본의 여류작가인 미우라 아야꼬를 기억 하시는지요?
사실 미우라 아야꼬는 평생동안 질병의 고통이 몸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처녀시절에는 결핵성 척추병으로 8 년 동안을 요양소에서 보냈고 그후 파킨스 병과 여러 종류의 피부질환으로 고통 당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말년에는 암으로 오랜시간을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미우라 아야고는 뼈르 깍는 고통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시 한편을 소개 하려 합니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믿지 못할 기적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 하지 못할 성소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 뵙지 못할 그 분이 계시다.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수 조차 없다.
고통과 불행의 조건들을 제거하여 주심도
하나님의 기적이며 큰 은혜이지만
이보더 더 크고 값진 은혜는
고통과 최악의 상황속에서도 낙망치 않고 감사하며
주님을 동일하게 신뢰하는 것입니다.
고난 자체가 축복은 아닙니다.
고난을 통하여 만나는 은혜가 있기에
고난은 유익이며 축복입니다.
'나에게 지금의 고난이 없었다면--'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그러기에, 고난 있음에 그렇게 감사하고 행복 할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고난을 통하여 만난 하나님의 거절할수 없는 은혜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23:10)
J.F 오벨랑(1740∼1826)은 프랑스의 유명한 목사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고통을 당한 사람을 찾아가 두 개의 보석을 보여 주었습니다.
『어떻게 보입니까?』 『똑같이 보이는데요』
『얼른 보기에 크기나 색깔이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하나는 좀 흐릿하고 하나는 눈부신 빛을 뿜고 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흐릿해 보이는 보석은 8번 깎았지만 광채나는 보석은 80번 깎았기 때문입니다. 시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깎으시는 과정이지요. 많이 깎인 신앙인은 빛을 발한답니다』 고난은 연단을 이루기 때문에 고난 중에도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오늘도 고난 중에도 주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난이 감사인가 고난인가?
밀알의 집에 함께 살고 있는 J씨의 이야기입니다. J씨는 뺑소니 차에 머리를 다쳐서 정신분열증과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J씨를 처음 공동체로 데려 왔을 때 그는 힘이 넘쳐나서 옷장을 부서뜨리고, 문고리를 당겨서 망가뜨려 놓고, 사람들을 발로 차며, 자신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주먹으로 때리는가 하면 양치질 할 땐 칫솔을 질근질근 씹어먹고, 세숫대야를 걷어차고......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J씨의 증세가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모습과 거의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4개월이 지난 어느 날 J씨를 데리고 정신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신경 안정제를 받아왔습니다. 신경 안정제를 먹으면 난폭한 행동이 수정될 것을 기대하면서......
그런데 약을 3일 동안 먹었는데 어찌 된일인지 그는 지금까지 했던 행동보다 더 난폭해지고 눈빛이 충혈되고 얼굴에는 분노와 증오심으로 가득한 것이었습니다.
4일 째 되던 날 저는 더 이상 그의 난폭함을 약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힘으로, 약의 힘으로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람, 그렇다고 연로하신 부모님들께 황소처럼 힘을 쓰는 그를 다시 돌려보낼 수도 없고, 데리고 잇을 수도 없고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J씨가 왜 그렇게 주기적으로 난폭해질까? 여러 가지를 임상적으로 주시하는 동안 아주 재미있고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공동체 식구들이 한달에 한 두 번 고기를 먹는다거나 기름진 음식물을 섭취하거나 영양가가 있는 음식물을 먹을 때면 예외없이 J씨의 행동이 난폭하게 바뀌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 칼로리 음식, 저 지방 음식을 계속적으로 주면 아주 얌전해졌습니다. 얌전해진 J씨, 힘이 없는 J씨가 안타까워 밥을 많이 주거나 기름진 음식을 먹일 경우 그날은 어김없이 그의 난폭한 행동들이 나타났습니다. 서울의 모 대학병원에서 J씨는 뇌의 혈관이 막혀서 피의 순환이 잘 안되면 정신질환 증세가 중해진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간사님에게 욕하고, 세숫대야를 걷어차고, 눈에 핏발까지 세우며 모든 사람들을 미워하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어떤 것도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다가 음식을 줄이거나 기름진 음식을 며칠 동안 주지 않으면 또 말이 없고 순한 양처럼 수긍하고 감사하는 J씨를 보면서 우리 인생들의 역사, 우리 개인의 삶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J씨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고난만 벗어나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순종을 다짐하고는 고난에서 벗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불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힘이 없어 고기를 주어 먹게 하면 그 고기의 힘 때문에 사람을 괴롭히고, 교만함으로 인하여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과 아픔을 주는 그래서 하나님이 징계하면 그 징계가 가혹하다고 하나님은 불공평하다고 말해 버리는......
잘되고 건강한 때일수록 형통한 때일수록 사람들은 왜 겸손해지지 못하는 걸까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노라” (시 119편 71절)
주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십니다.고난 없이 주의 율례를 알 수 없고 그분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그러나 고난 없이는 진실의 가장자리에 머물며 진리의 깊이에 접근하지 못합니다.고난 가운데 진주가 만들어지듯 고난 가운데 주의 율례의 참뜻이 영롱하게 밝혀집니다.아,고난은 인생의 소중한 교사입니다.
▧ 기도: 마음의 생각과 동기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늘 저의 마음과 생각이 경건하며, 매사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소서. 악한 자들의 혼란스러운 유혹의 말이나 위세에 마음 상하지 않게 도우시고, 담대한 신앙을 허락하소서.
▣ 고난의 가치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주여 , 너무도 힘듭니다! 주여 너무 힘듭니다!" 이렇게 말할 정도 였습니다.
어느 날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 주셨습니다. 자매는 꿈속에서 세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결 가볍고 편안한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뒤에 오던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의 자기 십자가는 이미 손아래 들어올 정도로 너무 작았습니다. 자매는 너무 서러운 나머지 강가에 턱썩 주저 앉아 엉엉 울며 예수님을 찾았지만 이미 소용은 없었습니다. 그 때 그 자매가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쫓아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지니라" 그 자매는 이에" 아멘! 아멘! "소리쳤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고난은 필수적입니까? 불행히도 그것은 "예"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몸소 그것의 본을 세우셨습니다. 고난은 축복의 기회라는 애기도 있습니다. 고난이 힘들어 십자가를 잘라달라고 했던 자매의 모습, 하지만 이 역시 우리에게 남의 일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 삶은 달걀의 의미
「유월절」이라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큰 축제입니다. 이 날은 일찍이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노예로 잡혀있다가 해방되어 이스라엘로 돌아온 것을 기념하는 경축일입니다. 이 날에는 몇 종류의 상징적인 음식을 먹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고엽, 즉 쓴 나물을 씹음으로써 과거 이집트에 패배했던 쓰라린 기억을 되새기려 하는 것입니다. 또 이집트에 잡혀가 노예 생활을 할 때 먹었던 「무교병」이라는 거친 빵을 먹기도 합니다. 그리고 식탁에는 딱딱하게 삶은 달걀도 나오는데, 이 달걀은 매우 상징적인 것입니다. 일반 음식물은 삶으면 삶을수록 부드러워지지만, 이 달걀은 삶으면 삶을수록 단단해집니다. 유대 민족은 난관에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그리고 패하면 패할수록 그 신념과 결의가 단단해집니다. 삶은 달걀은 그런 의미가 담긴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어렵고 힘든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견디기 어렵고 참기 힘든 일, 그것도 예고 없이 별안간에 닥쳐올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땐 유대인의 식탁에 놓인 삶은 달걀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고난과 고통이 닥쳐와도, 삶으면 삶을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달걀처럼 더욱 단련되어 시련을 이겨내는 힘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비가 온 뒤에 땅은 더욱 굳어지는 법입니다.
▣ 당나귀의 디딤돌
당나귀가 빈 우물에 빠졌습니다. 농부는 슬프게 울부짖는 당나귀를 구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마침 당나귀도 늙었고 쓸모없는 우물도 파묻으려고 했던 터라 농부는 당나귀를 단념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우물을 파묻기 위해 제각기 삽을 가져와서는 흙을 파 우물을 메워갔습니다. 당나귀는 더욱 더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웬일인지 당나귀가 잠잠해졌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궁금해서 우물 속을 들여다보다가 놀라고 말았습니다. 당나귀는 위에서 떨어지는 흙더미를 털고 털어서 바닥에 떨어뜨리며 발 밑으로 흙이 쌓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흙더미를 타고 점점 높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당나귀는 자기를 묻으려는 흙을 이용해서 무사히 그 우물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당나귀처럼 곤경의 우물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때로는 환경이 흙더미로 나를 덮어 오지만 오히려 지혜로움과 인내로 용기를 가지면 자신이 더 성장하고 높아질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최병남 목사(대전 중앙교회)
▣ 고난 속에 핀 꽃
요셉은 고난의 사람이었다. 욥도 다윗도 모두 고난의 사람이었다. 성경 속의 위대한 인물들은 이렇게 고난 속에서 인생을 꽃피운 사람이었다. 인생의 성패를 순경 속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인생의 성패는 순경 속에 있지 않다. 오히려 고난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러면 고난 극복의 힘은 무엇일까. 용기다. 용기야말로 고난의 벽을 뛰어넘게 하는 삶의 동력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용기 때문이다. 용기는 고난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극복의 대상으로 보게 한다. 그리하여 고난과 당당히 맞서 싸우게 한다. 문제는 이 용기가 믿음에서 온다는 데 있다. 그렇다! 삶의 용기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에서 우러나온다. 과연 믿음은 삶의 용기를 주고 용기는 삶에 변화를 준다. 그리하여 고난의 바다를 기쁘고 당당하게 항해하도록 삶에 힘을 준다.
/길자연 목사(왕성교회)
▣ 어두움이 필요한 나무
어느 날, 친구의 온실 안을 거닐다가 다른 여러 개의 화분으로 완전히 덮여 있는 작은 화분을 보게 되었다. 그때 친구가 내게 말했다. “내가 왜 이 작은 화분 주위를 어둡게 해 놓았는지 자네는 알겠나? 그것은 말이야, 더 깊이 뿌리를 내리라고 그렇게 한 것이라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뿌리를 더 깊이 내리기 위해서는 그 주위를 어둡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신다.
▣ 고난을 극복한 죤 번연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문학가요 목사인 죤 번연의 인생길은 험하였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신앙 생활을 잘했습니다. 그의 직업은 땜장이지만 틈틈이 익힌 문장력과 지식으로 여러 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리하여 번연의 실력은 인정이 되었고 그가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님도 번연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번연의 가정에 슬픈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사랑하던 아내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위하여 최선을 다했으나 아내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큰 딸 메리는 장님이었고 두 아들은 어렸습니다. 이 무렵 교회 목사님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후임으로 버튼이란 분이 오셨으나 그는 몸이 약했습니다. 버튼 목사님은 자신이 설교자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번연을 후임 설교자로 세우도록 교회 회의에 내어 놓았습니다. 교회 회의에서는 번연을 설교자로 세우도록 결정하였습니다. 버튼 목사님도 세상을 떠나고 번연이 목사로 추천되어 교회 일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열살 된 큰 딸은 장님이고 두 아들은 어려서 가정 문제가 큰 일이었습니다. 그는 가정의 어려운 문제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셔서 자녀를 위해 결혼을 하게 하셨습니다. 죤 번연은 고난 중에서도 말씀에 근거해서 열심으로 주님을 따랐습니다.
▣ 세르반테스의 고난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24세 때에는 레판트 해전에서 팔을다쳐 불구자가 되었으며, 28세 때에는 적국의 포로가 되어5년이나 감옥생활을 했다. 38세 때에 작품을 쓰기 시작했으나 팔리지 않아 생활고로 세금징수원이 되었으나 영수증을잘못 발행한 죄로 옥에 갇혔다. 그러나 그는 옥중에서도 고난에 굴하지 않고 작품을 써 명작 <돈키호테>를 완성하였다.
▣ 무릎 꿇고 있는 나무
로키산맥 해발 3천 미터 높이에 수목 한계선인 지대가 있습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 때문에 곧게 다리지 못하고 하나같이 무릎을 꿇고 잇는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나무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생존하기 위해 무서운 인내력을 발휘하지요.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명품 바이올린도 바로 이 ' 무릎 꿇고 있는 나무' 로 만든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인생의 절묘한 선율을 내는 사람은 아무런 고난 없이 편안한 조건에서 지내온 사람이 아니라 온갖 역경과 아픔을 겪어온 사람입니다.
/여운학 (이슬비성경암송학교 교장)
▣ 인생의 광맥
보화는 길거리에서 쉽게 발견되지 않고 깊은 광맥을 찾아가야 얻을 수 있다. 인생의 보화도 깊은 곳에 있는데 그 깊은 곳이 바로 '고난' 이다. 역사의 진리와 교훈이 발견된 때도 민족이 고난을 당한 때였다. 영국의 저술가 C.S.루이스는 말했다.
"평안할 때 인간은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해 속삭이시는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보내시는 것이다. 고난은 '인간의 잠든 감각'을 깨우시는 하나님의 '큰소리' 이다"
▣ 고난 중에도 즐거워하라
성경: 벧전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한 시골 청년이 캔사스 시티에 들어왔습니다. 출판사와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자기가 그린 만화를 실어달라고 부탁하였으나 한군데도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마침 주일이 되어 아무 교회나 길거리에 보이는 교회로 들어갔지만 예배내용은 머리에 들어올리 없고 눈물만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청년을 보고 사정을 들은 후 교회 창고에서라도 자겠으면 일을 구할 때까지 묵으면서 교회 일을 해달라고 말씀하시며, "용기를 잃지 말게. 하나님이 자네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게"하고 겪려 했습니다. 이 교회 창고는 낮밤을 가리지 않고 쥐가 많이 나다녔습니다. 먹을 것을 조금씩 주자 쥐들은 도망가지 않게 되었고 쥐를 관찰하는 중 세계를 사로잡은 미키 마우스의 아이디어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 먹을 것도, 잘 곳도 없던 청년이 월터 디즈니였습니다. 고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승리하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카프만 누에고치
카프만 부인의 [광야의 샘]이란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나는 누에고치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마침 여러 마리의 누에고치가 나비로 탈바꿈을 하는 중이었다. 너무도 작은 구멍을 통해 나오려고 애쓰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불가능 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마리,두 마리, 그토록 작은 구멍을 통해 천신만고 애쓰더니 결국은 빠져 나와서 공중으로 훨훨 날아 올랐다. 나는 마침 또 나오려고 애쓰는 고치를 발견하고 가위로 그 구멍을 넓게 잘라 주었다. 그러면서 내가 하나님보다 더욱 사랑과 자비가 많다고 자족하면서 혼자 웃었다. 내가 넓게 열어준 구멍으로 나비는 쉽게 나왔으나 문제가 생겼다. 공중으로솟아 오르려고 몇 번 시도하면서도 결국 오르지 못하고 땅바닥에서만맴돌 뿐이었다. 앗차!! 나는 깨달았다. 작은 구멍에서 고통하며 힘쓰면서 나와야 그 몸의 영양분을 날개 끝까지 공급하게 되고, 날개가 나올 심하게 마찰되면서 날아 오를 만큼 강건해 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던가? "고난당한 것이 내게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아멘"
▣ 상어의 고난이 주는 교훈
영국 사람들이 한창 싱싱한 청어를 좋아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살아 있는 청어는 굉장히 비싼 값에 거래됐습니다. 고기잡이 선원들은 청어를 산 채로 육지까지 가져오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청어는 워낙 성질이 급해서 육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던 중 한 지혜로운 선원이 청어 수족관 안에 상어를 한두 마리 넣어보았습니다. 순간 상어가 청어 몇 마리를 잡아먹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청어가 상어에게 먹히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도망 다녔습니다. 그러는 동안 배는 육지에 도착했고 청어는 모두 살아 있었습니다. 지금도 청어잡이 어부들은 이 방법을 통해 청어를 산 채로 가지고 온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고난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상어와 같은 고난이 모순처럼 다가와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해주십니다. 우리도 고난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더 웃고 승리하며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소강석 목사(분당새에덴교회)
▣ 닭과 독수리
닭과 독수리는 위험 앞에서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폭풍이 몰려오면 닭은 몸을 날개에 묻은 채 숨을 곳을 찾는다. 그러나 독수리는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편다. 그리고 태풍에 몸을 싣고 유유히 날아올라 안전지대로 향한다.
인생의 폭풍을 만날 때 사람도 두 유형으로 나뉜다. 고통스러운 일, 억울한 일, 괴로운 일이 닥치면 몸을 숨기는 ‘닭형 인간’과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담대하게 대처하는 ‘독수리형 인간’이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항상 ‘독수리형 인간’이다. 시련을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식의 인생여정에는 고난의 가시밭길이 그치질 않는다.
인류의 역사는 담대하게 고통을 극복한 사람들에 의해 다시 쓰여진다. 서양 속담에 ‘북풍이 바이킹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사나운 바람으로 인해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전했다. 모진 바람과 추위를 이겨내며 자란 나무는 좋은 목재가 된다. 믿음은 우리를 나약한 닭에서 강한 독수리로 바꾸어놓는다.
▣ 고난의 유익
성경: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어느 몹시 추운 겨울에 미국 뉴욕에서 석탄운반을 하는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하여 뉴욕시에는 석탄이 들어오지 않아 불을 피울 수가 없어서 각 학교는 거의 보름간이나 임시 휴교를 하게 되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기 전까지는 교실에서 편하게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그들의 생활이 석탄 나르는 노동자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느 철학자가 "가장 감미로운 음악은 언제나 슬픔에서 생겨나는 것이다"고 한 것처럼, 만약 이 학생들이 이런 아픔의 고통을 모르고 자란다면 그들은 영혼의 섬세한 감정을 모르는 잔인하면서도 둔감한 인간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듯이 모든 고통으로 인해 우리가 성숙해 질 수 있다면, 고통에 있어 우리는 겸손하여 지고 타인에 대해 동정적이 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해 보려는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풍파를 만날 때
영국의 유명한 찰스 웨슬리는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에’라는 찬송을 지었습니다. 그 찬송을 짓게 된 동기는, 어느 날 서재의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쉬고 있으려니까 어디선가 작은 새 한 마리가 매에 쫓겨 살 길을 찾아 그의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새는 공포에 싸여 방안을 몇 바퀴 돌더니 푸드득거리며, 조용히 앉아 있는 그의 옷자락 속에 깃들였습니다. 찰스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새가 하는 대로 맡겨 두었습니다. 할딱거리던 새는 잠시 후 평안해진 듯 보였습니다. 그는 어린 새를 쓰다듬어 창 밖으로 놓아보내고 일어나 불현듯 그 마음에 떠오르는 노래를 읊게 되었는데, 그 노래가 곧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에’라는 찬송입니다. 그가 이 노래를 짓게 된 동기가 또 하나 있습니다. 아메리카에 가서 전도하려고 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귀국하는 도중 풍랑을 만나서 처참한 곤경을 넘긴 일이 있는데, 그때 위기 중에서 전심을 주께 맡기고 고난을 돌파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 노래는 황야 같은 세상을 사는 인생들이 참 생명의 주를 신뢰하도록 하는 데 큰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풍랑을 만날 때는 주님께 나아갈 때입니다. 질병, 고통, 전쟁, 가정적 풍파, 개인적 풍파, 교회와 사회와 국가적 풍파는 주님께 나아가도록 하는 채찍입니다.
/ 김기현
* 기도: 오, 주님!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풍랑과 같은 환난과 시험 가운데서도 의연한 믿음을 가지게 하소서. “두려워말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지나친 두려움과 염려로 인해 나의 믿음을 잃지 않게 도와주소서.
가위를 드신 하나님
꽃의 수명을 연장하려면 꽃줄기를 일직선이 아니라 대각선으로 잘라야 한다. 그러면 물을 흡수하는 면적이 훨씬 넓어져서 싱싱한 꽃을 오랫동안 볼 수 있다. 병에 약한 꽃나무는 줄기를 대각선으로 자르고 그 자리를 불로 태운다. 불로 태우면 물을 흡수하는 힘이 강해지고 나무의 부패도 막아 주기 때문이다. 병든 꽃에 가위를 대지 않으면 그 꽃은 곧 시들어 버리고 주변의 꽃들에게도 병을 옮기게 된다. 그래서 노련한 정원사는 꽃나무에 가위질을 해야 할 때를 안다. 하나님이 사람을 훈련하는 방법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한 인간을 성숙한 인격체로 만들기 위해 줄기를 자르는 아픔을 주신다. 그것이 부족할 경우에는 불에 태우는 따끔한 고난도 주신다.
역경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역경 없는 인생은 건조하다. 바다에 적당한 파도가 있어야 윈드 서핑을 즐길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고난은 필요한 아픔일 뿐이다. 고난이 두려워 피하려는 사람에게 역경은 거대한 파도처럼 두렵게만 느껴지는 법이다.
/ 임한창
▣ 고난에 관한 성경 말씀
0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0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0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2:18)
0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5:13)
0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
0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0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6)
너희는 믿음을 굳게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5:9)
▣ 고난에 관한 금언
0 고난을 당하여 쓰러진다면 네 힘은 아직도 약하다는 것이다.
0 자기의 고난은 참아야 하고 남의 고난은 돌보아 주어야 한다.
0 불은 쇠를 시험하고 역경은 강자를 시험한다.
0 역경을 당했을 때 비로소 참다운 벗을 안다.
0 사랑하는 곳에 고생은 없다. 만일 고생이 있다고 한다면 그 고생이야말로 즐거움이다.
0 고생 끝에 낙이 있다.
0 편히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0 큰배는 깊은 물이 있어야 한다.
0 큰 나무는 많은 바람을 맞는다. ( Tall trees catch much wind )
0 괴로움을 피하지 말라. 괴로움은 인생의 본질중의 하나다. 인생에 괴로움이 없다면 만족감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깊은 골짜기가 있을 때 산은 높은 법이다.(도스토예프스키)
0 우리는 매일 먹고 또 잠을 자지만 지치지 않는다. 주림과 수면이 새로 오기 때문이다. 만일 평화와 행복만이 계속된다면 우리의 정신은 금방 지쳐버리고 말 것이다. 고통은 정신의 양식이다. 사람에게 고통이 없다면 극히 무능력한 상태가 오고 말 것이다.(파스칼)
0 밤의 어둠이 하늘의 빛을 나타내듯이 고뇌만이 인생의 모든 의미를 계시한다. 고통을 통해서 인생은 참다운 빛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톨스토이)
0 초인이란 필요한 일을 견뎌 나갈 뿐 아니라, 그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이다.(니체)
0 이 세상에 고통이 많은 것은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이다.(칼빈)
0 고난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채찍이며, 고난은 승리의 전주곡이다.
0 낮에도 별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저것 볼 수 있을 때에는 별을 보지 못합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캄캄한 밤에야 비로소 영롱한 별빛을 볼 수 있습니다.
0 나무는 뿌리에 물만 있다면 햇빛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사람도 고난 속에서 강해지고 고난 속에서 지혜로워지고 고난속에서 성장한다. 뿌리가 생수의 공급 없이는 아무리 좋은 햇빛을 받아도 메말라 죽듯이, 귀한 고생과 역경에도 말씀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말씀 없이 당하는 고난은 비참하여 마침내 자살로 연결되고 만다. 말씀의 생수만 얻을 수 있다면 고난은 있을수록 좋고 햇빛은 강할수록 좋다.
0 성공하기를 바라거든 곤고를 견디어야 한다.(메난드로스)
0 남몰래 뿌리는 눈물 맛이 달다는 것을 맛보지 못했다면 아직은 사람이 덜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인생의 학교에는 고난이라는 과목이 필수 인 것을...
0 공부할 때 고통은 잠깐이지만 못 배운 고통은 평생이다.
0 고난은 축복을 갖다 주는 지름길이다.” ( M. 루터)
0 하나님 앞에 진실 되게 살려고 하는 이는 고통을 보석으로 삼는다.( 하천풍언)
0 고난은 성공의 축대를 쌓는 것과 같다.(M.NL. 영안)
0 고생보다 더 중요한 교육은 없다.(지스레지)
0 고난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없다.(도미트아스)
0 고난이 크면 클수록 그 영광도 크다.(M. T. 시세로 )
0 초년 고생은 말년 낙의 근본이라. 네가 자라면 오복이 구비하고 남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되리라.(이광수)
0 대부분의 생의 고난은 우리 자신이 햇빛에 서 있기 때문에 생긴다.(에머슨)
0 고난은 하나님의 심부름이다. 어려움이 우리에게 찾아 왔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로써 하나님의 신임의 증거라고 간주해야 한다.( 비쳐. H.W. Beecher)
0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고 할 때, 반드시 먼저 그 심지(心志)를 괴롭히고 그 근골(筋骨)을 고생시키고,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 육체를 궁핍케 하고, 그의 하는 일을 다 어지럽게끔 한다.(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