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에 대한 예화 모음
긍휼히 여기는 자의 미소 어떤 대학생은 자기가 만나 본 사람들 가운데 그토록 행복의 참 모습을 지니고서 티 없이 밝은 웃음을 웃는 사람은 아직 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 학생이 인상깊게 만났던 미소의 주인공은 재물과 영화가 넘쳐 나는 사람과 너무도 먼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처음으로 이 학생은 인생의 참 행복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행복한 미소의 임자는 박 수산나 양, 경기도 시흥군에 있는 나환자들의 정착지인 나자렛 마을에서 3년 동안 무보수로 일하고 있는 27 살의 아름다운 아가씨다. 그녀가 이곳에 온것은 연세대학을 졸업한 직후였다. 여러 가지 계획도 있었고, 자신을 부르는 곳도 있었지만, 그 보다도 자신의 젊음을 불태우며 불우한 나병환자들의 슬픔과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는데 더 큰 보람이 있을 것 같아 곧장 와서 고락을 함께하고 있다 한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 본문 : 마태복음 5장 7 절
그동안 우리는 네 주일에 걸쳐서 산상 보훈에 기록된 팔복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지난 시간 에 나눈 말씀은 의에 주리고 목마름 같이 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라는 말씀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의 다음에 긍휼이 나오는 것은 뜻이 있습니다. 의만 부르짖고 긍휼 이 없으면 냉정하고 무자비한 의가 되기 쉽습니다. 반면에 의가 없이 긍휼만 있으면 무분별해서 죄를 용납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의와 긍휼은 나눌 수 없는 행복의 조건입니다. 중병으로 앓던 사람이 병이 나으면 좋은 식물을 많이 섭취하여 힘을 얻고 그 후에는 나아가서 남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첫째에서 넷째까지의 복은 자기 완성을 위한 노력이라고 한다면 그릇에 물을 부어 물이 그릇에 차면 그 후에는 흘러 사방으로 넘치는 것처럼 은혜가 만족하게 차면 나를 넘어 다른 이에게 흘러가는 법입니다. 차차 높은 산정을 향해 올라가는 등산처럼 차 차 더 높은 차원의 축복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오늘 생각하게 되는 긍휼히 여기는 사람에 대한 것은 비교적 지금까지 말씀 드린 축복 중에서 이해하기 쉬운 내용의 말씀입니다. 긍휼을 베풀 때 긍휼을 축복의 대가로 받는다는 것은 요사이 흔히 말하는 대로 주면 받는 (Give and Take)은 원리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별 거부 반응 없이 받아 드릴 수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주면 받는다는 원리가 어디서나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선으로 악을 갚고, 호의와 친절을 배은망덕으로 갚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은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주고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주기보다 받으려고 하 고 있습니다. 또 그런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소유하게 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긍휼이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긍휼은 자기를 희생시키는 사랑을 의미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소위 자기 완성에서 나오는 동정과는 다릅니다. 요한1서 4장 19절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함이라. 다시 말하면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증거입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셨습니다. 긍 휼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지속하는 방법입니다. 잠언 19장 17절에 보면,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 이라고 했습 니다. 우리가 매월 둘째 주일을 착한 사마리아인 주일로 지키면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는 일에 많은 분이 성의껏 참여하심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하 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더 큰 긍휼을 받을 보증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받고 그리 고 남에게 주는 것은 기독교 윤리의 대원칙이며 받고 주는 일이 잘되면 잘 될수록 우리 생활은 더욱 건전한 생활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대 문호 세익스피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긍휼은 억지로 하지 않고 하늘에서 오는 비처럼 이중의 복을 가지고 온다. 주는 자는 복을 주고받는 자에게 복을 주어 최강자 중에도 최 강자이며 보좌에 앉은 왕에게 있어서 긍휼은 왕관 이상 존귀한 것이다 고 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나이팅게일 여사에게 준 기념 훈장에는 헬라의 유메씨아스의 말이 적혀 있다 고 합니다. 긍휼을 행하는 길은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돈으로써만 아니라 말로도 할 수 있 다. 돈으로도 말로도 할 수 없을 때는 눈물로 할 수 있다. 의미있는 말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의 복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긍휼이란 다른 말로 자비, 인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반대의 뜻은 무자비, 잔인, 포악, 무정, 냉정, 무시, 천대 같은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긍휼은 사람 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특별히 불쌍한 환경에 있는 이들에 대하여 대하는 태도를 말합니 다. 더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런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이렇게 긍휼히 여겨야 우리 가 행복할 수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긍휼과 자비가 풍 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시편 103편 7절에 보 면,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하였고, 시편 108편 4절에도, 대저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광대하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나이다. 했습니다. 예 레미야 애가 3장 2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했습니다. 물론 이처럼 긍휼을 강조해서 말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만은 아닙니다. 가령 불교 같은 데서는 자비를 말합니다. 유교에서는 맹자 선생이 불인 인지심이라 하여 자비를 말합니다. 동서양을 막 론하고 여러 성현이나 도덕가들이 자비와 긍휼을 강조해서 가르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 진리는 하나의 자연 계시에 의한 것으로 사람의 양심을 통해서 이미 나타난 것이 사실입니 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특수한 것은 하나님의 이 긍휼하신 성품을 단순히 가르쳐 준 것만은 아 닙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아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말씀이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나타나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어떠하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생활 그 자체가 바로 긍휼의 생활이었습니다. 목자 잃은 양 같은 무리들을 보 실 때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병난 사람, 약한 사람, 주린 사람, 손 마 른 사람, 눈 먼 사람, 다리 저는 사람, 말 못하는 사람, 문둥병 든 사람,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살려 주시는 역사를 행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바리 새인이나 서기관은 비난하였지만 삭개오의 집에 가서 그 심령을 긍휼히 여겨 구원해 주셨습니 다. 눈물로 발을 씻는 죄 많은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자비하신 성품을 그대로 나타내신 긍휼의 역사입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까지 위해서 기도하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 님의 긍휼을 사람에게 그대로 보여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예수님은 우리 믿 는 사람을 향하여 이와 같은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긍휼히 여기는 생활을 해야 행복하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 긍휼이란 히브리어로 헤셀 이라고 하는데 단순히 다른 사람을 동정하는 것만을 의미하 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과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는 삶의 자세입니다. 아마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 처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사물을 관찰하며 그 사람의 마음에서 사건을 생각해 보는 노력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할 것이면 우리의 삶은 말할 것 없고 이 사회가 모든 방면에서 달라 지게 될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입장에서 아내가 남편의 입장에서, 부모가 자식의 입장에서 자식이 부모의 입 장에서, 시어머니가 며느리 입장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입장에서, 학생이 선생님 입장에서 선생님이 학생들 입장에서, 고용주가 고용인 입장에서 고용인이 고용주 입장에서, 국민이 정부 의 입장에서 정부가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지금 우리 생활 주변에서 생기고 있는 그 숱한 복잡한 문제들이 훨씬 줄어들고 행복은 더 많이 찾아 올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서로가 입 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고 노력이 있으면 있을수록 거기에는 보다 아름답고 훌륭한 공동체가 약 속될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입니다. 우리가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훨씬 더 상대방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누 구나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알게 되면 오해는 풀리게 되고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동정할 수 있으며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가 있습니 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이해는 사랑의 별명이라 고 했습니다. 영어로 이해라는 말은 underst and라고 합니다.밑에 선다 는 뜻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그 사람의 입장이 돼 본다는 말입니다. 불란서 격언에는 모든 것을 아는 것이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왜 그런 일을 하게 되었을까 하는 것을 충분히 깨닫게 될 때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긍휼이 바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 위에 오셔서 인간과 꼭 같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셨습니다. 사람의 느낌 으로 느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긍휼의 사건을 통해서 인류는 축복을 받았고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긍휼이란 용서의 뜻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3절에 보면,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했습니다. 이 말은 남에게 용서를 베풀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뜻 이 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만일에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하면 나도 용서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시편 18편 25절에는,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2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 중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 말은 내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준 그 비율로 나의 죄를 용서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은, 너희가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이 내게 잘못한 것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이 기도를 드리면 내가 남의 죄 를 용서하지 못한 것처럼 내 죄도 용서하지 마옵소서 하는 기도를 드리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 다. 그 보다도 용서하지 못한 죄와 용서하지도 않으면서 용서한 것처럼 기도하는 거짓말의 죄까 지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세 시대의 유럽에서 성주(城主)와 성주 사이에 아주 사이가 나빠져서 기회만 있으면 죽이려 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차에 저쪽 성주가 이쪽 성을 통과해서 어디를 가게 되었다는 정보를 이 쪽 성주가 입수를 했습니다. 이쪽 성주는 내가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가 지나가게 되는 길목에다 복병을 시켜 놓고 그쪽 성주가 지나갈 때 쥐도 새도 모르게 감쪽 같이 없애기로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그 성안에 있는 신부님이 듣고 이래서는 안되는데 하는 생각을 가지고 성주를 찾아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성주님, 제가 바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쪽 성주가 이 성을 통과해서 여행을 하게 되었다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예, 그렇다고 하더군 요. 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거 외람된 말씀입니다마는 성주님께서 복병을 시켜 그 성주를 살 해할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말을 제가 어디서 얼핏 들었는데요. 그것도 사실인가요? 예, 제가 신부님한테 거짓말 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제가 복병을 시켰습니다. 예, 그러세요. 물론 성주님 의 생각이 어련하시겠습니까마는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원수 갚는 것은 바 른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시간을 끌지 마시고 어서 그 복병들을 철수시키십시오. 그 성주가 무슨 잘못을 범했다고 해도 성주님이 용서해 주셔야 합니다. 성주는 얼굴 색이 변하면서, 아니 요, 내가 다른 사람은 다 용서해 주어도 그 놈만은 용서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신부는 아무리 성주를 설득하려고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나중에는 하는 수가 없어서 성주님, 죄송합니다. 그저 제가 왔으니 잠깐 예배나 드리십시다. 예배요? 드리십시다. 신부님이 예배드리자고 하는데 그것 까지 마다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같이 앉아 예배를 드리는데 마지막으로 주기도를 드리게 되 었는데 신부는 성주님, 이제 우리가 주기도를 드리므로 예배를 끝마치겠습니다. 그런데 성주님 은 제가 하는 대로 따라 하십시오. 그러지요. 하고 따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 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 이 임하옵시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이렇게 따라 하는데 그저 눈을 감고 했었는데 기도 도중에 신 부님이 눈을 뜨고 성주를 보고 성주님, 잠깐만 저를 보세요. 이제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옵시고 하는 대목에 왔습니다. 어떻게 하시겠 습니까? 성주님이 저 성의 성주님을 용서해 주고 복병을 다 철수시키겠다면 우리가 이 기도를 계속 드리겠고요 그렇게 하실 수 없으시다면 기도는 이것으로 중단하고 말겠습니다. 우리가 거 짓말 기도야 드릴 수 없잖습니까? 성주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따라 하시겠습니까? 이것으로 중단하시겠습니까? 그랬더니 이 성주의 얼굴이 몇 번씩이나 변하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더니 신부님, 제가 모든 것을 다 취소하고 주기도를 따라 하겠습니다. 해서 주기도를 끝까지 따라 했 고 원수 갚으려고 준비했던 모든 것을 철수시키고 용서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주기도문을 얼마나 진실되게 드리고 있습니까? 주기도를 진실되 게 드릴만큼 이 용서의 기도를 주님께서는 말로만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를 용서해 주옵소서. 저들이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고 기도 드렸습니 다. 우리는 얼마나 큰 죄를 하나님께로부터 용서함 받아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구원받지 않았습니 까? 그런데 나에게 조그만 잘못을 저지른 것을 용서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용서하면 결국 축복 받고 승리합니다. 어떤 이가 싸움은 손해가 아닌 것이 없고 용서 는 이익 아닌 것이 없다 고 했는데 옳은 말입니다. 용서는 약한 것 같지만 강한 것입니다. 최후 의 승리는 용서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축복은 용서가 있는 곳에 언제나 임합니다. 용서가 없는 곳에는 보복과 피 흘림의 악순환이 계속 되지만 용서가 있는 곳에는 새로운 축복의 역사가 시작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용서할 수가 있습니까? 잊어버리기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 중에 망각의 은총이 있습니다. 만일 과거에 있었던 슬프고 억울했던 일들을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면 아마 머리가 아파서 살 수가 없을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모든 기억에서 사라져 가고 새 마음으로 새 인생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 다. 끝으로 긍휼은 사랑의 동의어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사랑을 받 을 것임이요 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누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까? 사랑을 주고받 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고 재산을 가지고 권세를 누리고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 으면 그것은 메마른 사막과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행한 생활입니다. 천국이 무엇입니까? 사랑을 주고받는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사랑은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사랑은 삶의 근원입니다. 사랑은 풍요한 인생과 축복 된 삶의 원천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사랑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신앙의 기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한 마디로 사랑의 새 질서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입 니다. 이런 사람만이 행복합니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 목마르지 않는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 다. 의미와 보람있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사랑은 행복의 샘터입니다. 사랑할 때 행복은 마르지 않고 샘처럼 솟아납니다. 우리에게 동정 과 용서와 사랑으로 살 수 있어 사람들은 비록 나의 긍휼에 긍휼로 응답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긍휼의 축복으로 응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긍휼을 얻은 하나의 백성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2:10) 베드로는 그의 서신을 읽을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썼을 것이며, 그 서신을 쓸 때 그는 열심이 대단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본받으면 당신의 삶에 새롭게 변화될 것이며, 또 그 렇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우리 속에 살아계셔서 당신에게 삶을 위한 진정한 열심이 필요할 때 그 열심을 아낌없이 주실 것이다. 당신께 축복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려라.
긍휼의 댓가 불란서 혁명 때의 일이다. 어느 무더운 날 여학생 셋이 길을 가고 있는데 한 모퉁이를 돌아서자 다리에 상처를 입은 젊은이들이 도움을 청했다. 그때 두 여학생은 못 들은 체하며 지나쳤으나 한 학생은 구급약을 구해와서는 정성껏 돌보아 주었다. 그러자 그 젊은이들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아가씨는 어디 사는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영국에서 온 학생으로 대학 기숙사 3호실에 있어요. 이름은 매리예요' 그 후 두 달이 지난 한밤중에 어떤 젊은이가 기숙사에 달려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데리고 어딘가로 달려갔는데 얼마 후 기숙사에 난동이 일어나 모든 학생들은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긍휼을 베풀며 살자 아버지의 집을 떠나 마음껏 인생의 향락을 즐기던 탕자는 결국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그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겁기만 합니다. 아버지께서 자기를 받아 주실 지, 내쫓지는 않으실 지 몹시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버지는 아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그를 위해 잔치까지 베풀어 주셨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데는 너무나 인색합니다. 그런 행동은 마치 100억을 빚진 사람이 그 빚을 탕감 받은 후, 자신에게 3만원 빚진 친구를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긍휼 없는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은 부모가 자녀를 불쌍히 여기듯 다른 사람의 아픔을 깊이 느끼고 이해하며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기억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경: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아침마다 새로운 주의 긍휼 본문: 애가3:1-66
두 생각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은 생각을 하면서 자기의 모습을 돌아본다. 그나마 상황이 좋을 때에야 별 생각 없이도 지낼 수 있지만 조금만 복잡해지면 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더 악화되어지고 직접 피부에 느껴지면 그 때에는 생각이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안으로 움츠러들어 벽안에 갇히어 끙끙대기가 일쑤이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의 체험을 고백하고 있다. 그는 자기의 '고초와 재난'을 쑥과 담즙으로 비유하고 있다. 살가죽이 쇠하고 뼈가 꺾이는 절망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얼마나 그것이 심했으면 그가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18절) 하였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의 마음에 또 다른 생각의 길을 터 주신다. 어두운 것을 기억할 때에는 낙심이 되지만 왠지 중심에 이것을 생각하니 소망이 피어오름을 그는 보게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의 무궁함'이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항상 진리인 것'을 기억하게 하셨다. 다른 것은 다 변해도 변치 않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생각하게 하신 것이다. 그 성품은 하나님 자신도 부인할 수 없고 저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북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시고 심판을 명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긍휼의 성품으로 인하여 끝내 이렇게 말씀하셨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 냐 내가 어찌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아무리 심판을 선포하셨어도 하나님 자신이 소유한 거부할 수 없는 긍휼의 성품이 하나님 안에서 불붙듯 하여 하나님을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도 부인할 수 없는 항상 진리된 것'을 예레미야에게 생각나게 하시고 그의 생각의 물꼬를 빛으로 터 주신 것이다. 그것을 안 예레미야의 얼굴에는 복받치는 울음 가운데 울먹이며 터쳐 나오는 환희의 선명함이 있었다. 하나님의 긍휼이 항상 진리이기에 그것은 아침마다 항상 새롭다. 지나간 세월들은 언제나 과거의 기억 속으로 나를 끌어당기지만 하나님의 성품은 나를 언제나 현재 속에서 새롭게 하신다. 새벽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새벽이 열리며 시작되는 하루는 이 땅에 어느 누구라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한 날이다. 마치 눈이 내린 길에 발자국이 하나도 나있지 않은 길이 앞에 펼쳐져 있는 것과도 같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그 길을 아직 걷지 않으신 그러한 새로움을 안겨 주는 것이 새벽이다. 하나님은 물론 모든 역사를 아시고 이끌어 가시지만 우리의 손을 잡고 가는 면에서는 아직 그분도 걸어보시지 않은 길이 바로 새벽으로 시작되는 하루의 삶이다. 그 하루는 누구라도 아직 절망의 발자국이나 낙심의 발자국을 내지 않았고 또 낼 수도 없다. 그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그 하루를 맞이하느냐가 그 하루의 지나온 발자국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안에 날마다 창조를 선물로 주신다. 오늘은 어제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하루의 창조인 것을 알려 주시면서 같이 걸어가자고 손을 내미신다.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마음 속의 긍휼을 아침마다 새롭게 열어 보이시며 나를 부르신다. 그렇다. 그러한 하나님을 알고 나면 이 땅의 어떤 것도 자기의 기업을 삼을 만한 가치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없다. 오직 여호와만이 나의 기업이며, 그래서 나는 저를 바라리라고 고백할 따름이다(24절). 그러할진대 잠잠한 기다림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의 본심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과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송사를 억울케 하는 것을 주님이 기쁘게 보시지 않으시는데 하물며 그 분이 의도적으로 우리를 고생케 하시고 근심케 하시겠는가.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다(33절). 그 분은 벌을 위한 벌을 내리지 않고 반드시 당신의 목적하신 바를 두시고 그것을 성취하는 분이시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주님이 메우신 멍에를 메고 잠잠할 것이다. 예레미야는 고백한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27절). 그렇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더 나약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로 젊은 때와 같은 힘을 주시고 멍에를 메우는 분이시다. 견딜만한 힘을 주시고 우리의 고난을 헤쳐가게 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이루실 목적이 있으시기에 그리하시는 것이라면 어찌 우리가 그것을 마다하겠는가. 결국 당신의 부인할 수 없는 긍휼의 성품대로 풍부히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실 주님께 인생을 맡기며, 때리는 자의 수욕을 참으며 티끌에 입을 대고 주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 아니겠는가. '주님께는 반드시 무슨 뜻이 있을거야... 그래, 주님이 언제 나를 실망시키신 적이 있었는가... 화,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결국 긍휼로 내게 답하실 주님을 바라자...' 하지만 유다 백성들은 자기들의 회개에 대한 급한 응답을 요구하고 있다(40-41절). 그러하기에 하나님에 대한 실망도 그만큼 커져 금새 불평을 쏟아내고 있다(42-47절). 용서받는 것이 무슨 마땅한 자기들의 권리인 양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목적이 이뤄지는 것은 아랑곳없고 현실을 벗어나려는 목적만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예레미야는 또 다시 시내처럼 흐르는 눈물을 훔쳐낸다(48절). 자기 한 사람의 고난으로 이 민족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는 기꺼이 그것을 감내하려 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우리 예수님의 외로운 고난을 생각나게 해 준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리며 묵묵히 주의 일을 행했던 주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는 자에게 가까이 하셔서 '두려워 말라'고 위로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린다(57절).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리라는 강한 약속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를 신원해 주시는 주님... 그 주님이 오늘을 사는 내게도 가까이 오셔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니 이것이 은혜요 이것이 인생들 가운데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긍휼히 여기는 사람의 복 본문 : 마태복음 5장 7 절
이미 말씀드린대로 산상보훈의 여덟가지 복은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먼저 마음이 가난한 자가 행복하고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를 주리고 목마름같이 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행복의 다섯째 조건으로는 긍휼히 여기는 사랍이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네 의 다음에 긍휼 이 나오는데 뜻이 있습니다. 의만 부르짖고 긍휼이 없으면 냉정하고 무자비한 의가 되기 쉽습니다. 반 면에 의가 없이 긍휼만 있으면 무분별 해서 죄를 용납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의와 궁휼은 나눌 수 없는 행복의 조건입니다. 중병으로 앓던 사람이 병이 나으면 좋은 식물을 많이 섭취하여 힘을 얻고 그 후에는 나아가서 힘있 게 일하는 것처럼 의에 배부른 사람은 나아가서 남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첫째에서 네째까지의 복은 자기 완성을 위한 노력이라고 하면 그릇에 물을 부어 물이 그릇에 차면 그 후에는 흘러 사방으로 넘치는 것처럼 은혜가 만족하게 차면 나를 넘어 다른이에게 흘러가는 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의 긍휼은 자기를 희생시키는 사랑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기 완성에서 나 오는 동정과는 다릅니다. 요한 1서 4 : 19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함이라 즉 긍휼을 행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증거입니다. 예수님도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십니다. 긍휼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지속하는 방법입니다. 잠언 19 : 17절에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다 고 하였습 니다. 우리가 봉사주일에 붕사금을 내는데 이것도 사실은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긍휼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더 큰 긍휼을 받을 보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 게 하나님께 받고 그리고 남에게 주고 하는 것은 기독교 윤리의 대원칙이며 받고 주는 일이 잘 되면 잘 될수록 우리 생활은 더욱 건전한 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영국의 대 문호 섹스피어가 긍휼은 억지로 하지 않고 하늘에서 오는 비처럼 이중의 복을 가지고 온 다. 주는 자는 복을 주고 받는 자에게 복을 주어 최강자 중에도 최강자이며 보좌에 앉은 왕에게 있어 서 긍휼은 왕관 이상 존귀하다 고 하였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나이팅게일 여사에게 준 기념 훈장에 는 헬라의 유메씨아스의 말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긍휼을 행하는 길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써만 아니라 말로도 할 수 있다. 돈으로도 말 로도 할 수 없을 때는 눈물로 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긍휼을 행하는 사람의 복스러운 모습을 보여주 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 행복의 다섯째 조건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 바 랍니다. 이 긍휼 이란 다른 말로 하면 자비, 인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반대의 뜻은 무자비, 잔인, 포악, 무정, 냉정, 무시, 천대 등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긍휼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특별히 불쌍한 환경에 있는 이들에 대하여 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더우기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런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이렇게 긍휼로 대해야 우리 가 행복할 수 있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 다. 긍휼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03 : 17에 보면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하였고 시편 108 : 4에도 대저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광대하시며 주 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나이다. 이와 같이 노래 불렀습니다. 구약 애가 3 : 22에도 여호와의 자비와 긍 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이 진리를 깨닫 고 디도서 3 : 5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이다 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처럼 긍휼을 강조해서 말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에서만은 아닙니다. 가령 불교같은 데서는 자 비를 말합니다. 유교에서도 맹자가 불인인지심이라 하여 자비를 말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러 성 현이나 도덕가들이 자비와 긍휼을 강조해서 가르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 진리는 하나의 자연 계시에 의하는 것으로 사람의 양심을 통해서 이미 나타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서 특수한 것은 하나님의 이 긍휼하신 성품을 단순히 가르쳐 준 것만은 아닙니 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아들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말씀이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나타 나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어떠하시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생활 그 자체가 바로 긍휼의 생활이었습니다. 목자없는 양같은 무리들을 보실 때에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병난자, 약한자, 주린자, 손마른자, 눈먼자. 다리저는 자, 말 못하는 자, 문둥 이, 심지어 죽은 자까지 살려주시는 역사를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의 긍 휼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은 비난하였지만 삭개오의 집에 가셔서 그 심령을 긍휼히 여겨 구원해 주셨습니다. 눈물로 발을 씻는 죄인 여자의 죄를 예수님은 용서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간음하다가 현 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불쌍히 여겨서 용서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불쌍히 여겨서 용서해 주었습니다. 자비하신 성품을 그대로 나타내신 긍휼의 역사입니다. 자기를 십자 가에 못박은 원수까지 위해서 기도하신 예수요, 하나님의 긍휼을 사람에게 그대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도 우리 믿는 사람을 향하여 이와 같은 긍휼한 마음을 가져야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고 누가복음 6 : 36에 말씀하셨 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할 때 4 : 32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 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 서 어떻게 긍휼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1 . 불쌍한 사람을 돌봐주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돌봐줌으로써 긍휼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굶주리고 헐벗은 세계입니다. 미국의 농무장관이 세계인구의 1/3은 뚱뚱해지는 것을 걱정하고 있지만 2/3는 다음 끼니를 걱정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나라의 경우를 보아도 얼 마나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이 많습니까? 일는 이 가난한 사람들을 볼때 어떻게 할 것인가? 아 그거야 옛날부터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고 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여 줍니다.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소리를 듣 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잠언 21 : 13). 주라 !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누가복음 6 : 38). 비단 많은 물질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언제나 할 수 있는 사서한 친절이 얼마나 요구되는지 모릅 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에 말씀한 예수님의 비유를 기억합니다. 오른편에 있는 양은 어린 소자 하나에게 친 절을 베푼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세계의 돈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긍휼로 대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공산주의가 성하지 않았을 줄 압니다. 우리는 내게 도움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자들을 도와줍시다 !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에는 못자국이 있었습니다. 이 못자국은 모든 사람의 죄를 속량해 주시기 위해 친히 못박히신 못자국입니다. 우리가 다 이와 같은 일을 할 수가 없지만 타인을 어떻게 도와주기 위해서 죄 중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어려운 환경 중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우리의 손에 못자국이 있어야 될 줄 생 각합니다. 알버트 슈바이쳐의 손을 찍은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의 설명이 이 손은 신학자요, 철학자요, 음악가요, 의사의 손이다. 그는 젊어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하여 학위를 받 았고 바하 음악을 연구하여 음악 박사가 되었으며 파이프 오르간을 제작하면서 훌륭한 연주를 하는 손 이다. 그리고 이 손은 많은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는 긍휼의 손이다 고 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 게는 이런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손이 요구됩니다. 그 손 위에 행복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2 . 우리의 편견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긍휼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편견이란 심리를 하지 않고 판단을 내린다든가 사실을 모르면서 다른 사람을 평가한다든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편견이란 힘의 표시가 아니라 약점의 표시입니다. 그것은 철부지의 말은 될지언정 진정한 기독교인의 수단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 리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이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 매스 에드워드라는 분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 편견이 없는 사람은 없다. 우리들은 모두 환경의 노예다 고. 우리는 누구나 선입견과 편견이 있습니다. 챨스 라마이라는 분은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편견덩어리 로서 어떤 것에 대하여 사랑하든지 미워하는 어느 한쪽 감정에 지배된다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님은 우리 사람의 이 약점을 아시고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와 같은 편견을 어거하는 방법으로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 사회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비극이 편견으로 말미암 아 일어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 이와 같은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편견을 무엇으로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요? 교육을 가지고 해결할 수 있었다면 벌써 다 되었을 것입니다. 원자를 부수어버리는 힘을 가지고도 사람의 영 혼의 쓴 뿌리와 같은 편견을 뽑아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잇는 일입니다. 세 상에서 편견이 강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사울이 어떻게 그와 같은 긍휼과 자비의 사람이 되었습니 까? 다메섹 노상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할 때 이때까지 가지고 있던 편견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 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이 설교의 주제가 되고 생활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 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긍휼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 사로 드리라 이것이 바울의 설교의 정신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고 나서부터 바울은 긍 휼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긍휼하심이 풍성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으면서도 뻔뻔스럽게 이웃에게 편견을 가지고 대하지는 않습니까? 3 .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긍휼을 나타낼 수 있는 길입니다. 사실 영혼이 빈곤한 것은 물질적으로 빈곤한 것보다 더 불 행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신지 2천년이 되는 오늘날 아직도 세계의 반수 이상의 사람들이 그리스 도의 긍휼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음에 직면하고 있는 셰게에 그리스도의 긍휼을 알리기 위해 우리가 헌신할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잔파하라 고(마태복음 16 : 15)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니며 라고 하는 이 짧은 말 속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예수 앞에 모여 들었습니 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니라 고 명령하십니다. 역사 이래에 오늘날과 같이 인간 문명이 발달한 때가 일찌기 없었지만 오늘날만큼 인간의 정신이 야만화 되어가는 예도 일찌기 없었습니다. 지식이 최 고도로 발달했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요? 솔로몬만큼 지식과 지혜에 풍성한 사람이 어디 있었습니 까? 그러나 그의 지식이 그를 죄에서 건지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인류를 참 행복하게 하는 길은 인간 의 심령속에 복음을 넣어주는 일입니다. 이것이 없이 교육을 시킨다고 하면 마치 늑대를 깨끗이 목욕 시켜서 그 위에 양털을 입혀 어린양이 되게 하려는 생각과 같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복음의 능력이 아니고는 이 세 상을 행복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인간에게 인간의 상처를 가르쳐주고 나서 사랑을 줍니다. 인 간의 매인 것을 깨닫게 하고 나서 깨끗한 의복을 줍니다. 인간이 가난한 것을 알게 하고서 하늘의 재 물을 인간의 생명에 부어넣었습니다. 인간이 얼만 죄 많음을 깨닫게 하고서 구주를 가르쳐줍니다.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의 바로 가까운 곳에 복음이 필요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사람들 의 이름을 써서 하나님 앞에 내놓고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새로 남으로 행복한 사람되게 해달라고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들을 정복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가르침을 청하세요. 겆받 은 이 복음을 거저 나누어 줍시다 ! 우리 주님이 우리 위해 하신 일을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위해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웃에게 긍휼을 나타내는 길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또한 넘치는 행복을 얻는 길이 될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삶 긍휼 없는 죄는 긍휼 없는 형벌을 받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긍휼 때문에 살면서 긍휼을 베풀지 못하고 삽니다. 차머스라는 분이 쓴 「정오의 강풍」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대강 이런 얘기입니다. 건축 기사인 피어홈은 도처에 많은 다리와 터널을 건설했습니다. 이 때문에 큰 명성을 얻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는 질병과 실패로 부인과 어린 딸을 데리고 낙향하여 삽니다. 피어홈의 이웃에 한 몰인정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이 노인은 매우 사나운 개를 기르고 있어 피어홈은 늘 위협을 느꼈습니다. 피어홈은 개가 너무 사납다고 여러 번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오히려 번번이 피어홈은 모욕만 당했습니다. 그러던 중 불행은 갑자기 닥쳐왔습니다. 그 개가 피어홈의 어린 딸을 물어 죽인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일제히 개 주인인 이 노인을 비난했습니다. 파종기가 되었지만 그 노인에게 한 톨의 곡식 종자를 주거나 팔지 않았습니다. 그 노인은 맨 밭을 간 후에 씨를 달라고 애걸하였지만 그 노인이 거리에 나오면 사람들은 냉소하였습니다. 그런 노인의 모습을 본 피어홈은 다음날 아침 일찍 광에서 자신이 쓸 씨앗 반 되를 가지고 나와서 열심히 노인의 밭에 씨를 뿌려 주었습니다. 얼마쯤 지나자 노인의 밭은 파릇파릇한 반면 피어홈의 밭은 그 일부가 아직도 빈 땅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긍휼은 원수의 밭에 좋은 씨를 뿌리도록 요구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비록 우리 자신의 밭 일부가 맨 땅으로 남겨집니다.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베푼 후에 내가 손해보는 일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신 위대한 긍휼
학가다는 유대인의 민족 문학서 또는 민족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문서이다. 이 문서에는 유대인들의 최대 축제인 유월절에 대한 언급이 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노예로 잡혀 있다가 탈출하여 유대로 귀환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일로, 학가다는 유월절의 환희와 소중함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이집트에서 바로의 노예였다.” 세계 어느 민족사에서 이와 같이 굴욕적인 패배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예가 있을까? 더욱이 제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한 것이 아니라 “해방되었다”라고 수동형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해방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겸손한 태도, 곧 사람들의 힘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유대인들로 하여금 패배 속에서도 살아남게 한 비결이었다. 세상의 모든 문명은 다른 민족에게 정복되는 즉시 사라졌지만, 유대 문명은 이러한 태도 때문에 수천 년 전에 잃어버린 땅을 오늘날에 다시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고귀한 태생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구원은 바로 우리 자신이 처참한 죄인의 후예임을 자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의 복음은 자신이 이미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인간의 가장 큰 긍휼은 그가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죄에서 돌이킬 때 참된 해방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왜 우리는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가?
예수님은 누가복음 10장에 나타나 있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에서 긍휼히 여김의 중요성을 설명하였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던 어느 유대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길을 가고 있을 때 바위뒤에서 웬 흉악한 자들이 뛰어 나왔다. 강도들은 그를 약탈하고 옷을 벗겼으며, 두들겨 패고는 거의 실신한 그를 길 한편 도랑에 버려 두었다. 곧 제사장이 그 길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그 부상당한 여행객은 그가 오는 것을 목격하고 드디어 행운이 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사장은 가던길을 늦추지도 않고 반대편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그냥 지나쳐 버렸다. 잠시후 또 다른 종교인이 걸어왔다. 레위인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상처입은 사람이 황당할 만큼 재빨리 지나쳤다. 그때 한 사마리아 인이 걸어왔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간에는 인종적인 갈등이 있었지만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희생자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가던길을 멈추고 도움을 줄 방법을 강구하였다. 상황을 판단한 후에 그 사람 옆에 무릎꿇고 앉아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바른후 붕대로 감싸 주었다. 그리고는 그 유대인을 자신의 당나귀에 태우고 여관으로 데려가 깨끗이 닦아주고 따뜻한 침대에 뉘어 주었다. 심지어 그는 여관 주인에게 돈을 건네주며 말했다.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시오. 부비가 더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겠소” 이 강도당하고 두들겨 맞은 유대인이 다음날 안락한 침상에서 온 몸에 붕대를 감은채 깨어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자신의 방값과 식사값을 지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머리속에 어떤 생각이 스쳤을까? 나는 가끔 궁금했다. 나는 그가 이렇게 물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누구였을까? 다른 사람들처럼 왜 외면하지 않았을까?” 하나님께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라고 하시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선행위는 다른 어떤 것도 열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이 마음을 열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친절행위 속에는 끌어당기는 엄청난 힘이 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3:34,35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너무 간단하다. 그러나 너무나 강력하다.
죽어 가는 민족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긍휼은 교육을 주는 것이다 "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 31 - 32)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유다 민족이 그들 역사의 최대 정신적 위기에 처하였을 때 크게 활약한 인물이다. 기원후 70년에 로마 사람들은 유다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공격을 하고 있었다. 그는 유다가 살아남기 위하여 로마에 항복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으나, 강경파들은 그의 주장을 무시하고 로마와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요하난은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모종의 문제를 로마의 장군과 상의 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러서 밤을 이용하여 예루살렘을 빠져나가 로마 장군의 앞에 다다른 요하난은 관에서 나와 그에게 황제의 예를 갖추어서 인사를 하였다. 장군은 그것이 황제 모독의 행위로 생각하고 그를 나무랐다. 그러자 요하난은 그것을 설명하였다. "당신은 다음 번 로마 황제가 될 사람입니다." 그 말을 이해한 로마의 장군은 "당신의 말을 알 것 같소. 도대체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요?"하고 말했다. 요하난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랍비가 열 명 정도 들어갈 학교를 세워 주시고, 그 학교만은 파괴하지 말아 주십시오." 요하난은 말한다. "죽어 가는 민족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교육이다. 교육이 살아 있는 한 그 민족은 죽지 않는다." 요즘은 온 세상이 교육의 열풍에 싸여 있다. 그러나 그 알맹이는 없고 외관만이 화려할 뿐이다. 교회의 교육도 이와 대동소이하다. 교육이 바로 서지 않는 한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가 우리의 학생들을 긍휼히 여긴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올바른 교육을 주어야 한다.
죽어 가는 민족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긍휼은 교육을 주는 것이다 "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 31 - 32)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유다 민족이 그들 역사의 최대 정신적 위기에 처하였을 때 크게 활약한 인물이다. 기원후 70년에 로마 사람들은 유다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공격을 하고 있었다. 그는 유다가 살아남기 위하여 로마에 항복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으나, 강경파들은 그의 주장을 무시하고 로마와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요하난은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모종의 문제를 로마의 장군과 상의 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러서 밤을 이용하여 예루살렘을 빠져나가 로마 장군의 앞에 다다른 요하난은 관에서 나와 그에게 황제의 예를 갖추어서 인사를 하였다. 장군은 그것이 황제 모독의 행위로 생각하고 그를 나무랐다. 그러자 요하난은 그것을 설명하였다. "당신은 다음 번 로마 황제가 될 사람입니다." 그 말을 이해한 로마의 장군은 "당신의 말을 알 것 같소. 도대체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요?"하고 말했다. 요하난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랍비가 열 명 정도 들어갈 학교를 세워 주시고, 그 학교만은 파괴하지 말아 주십시오." 요하난은 말한다. "죽어 가는 민족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교육이다. 교육이 살아 있는 한 그 민족은 죽지 않는다."
인류를 구원하신 위대한 긍휼 "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가복음 23:34) 학가다는 유대인의 민족 문학서 또는 민족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문서이다. 이 문서에는 유대인들이 최대 축제인 유월절에 대한 언급이 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노예로 잡혀 있다가 탈출하여 유대로 귀환한 때를 기념하는 출제일이다. 학가다에서 그 때의 해방의 환희와 소중함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이런 구절로 시작된다. "우리는 이집트에서 바로의 노예였다." 세계의 어느 민족사에서 이와 같이 굴욕적인 패배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예가 있을까? 더욱이 제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한 것이 아니라 "해방되었다"라고 수동형으로 기록하고 있다. 해방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겸손한 태도, 곧 사람들의 힘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유대인들로 하여금 패배 속에서도 살아남게 한 비결이었다. 세상의 모든 문명은 타민족에게 정복되는 즉시 사라졌지만 유대문명은 수천 년 전에 잃어버린 땅을 오늘날에 다시 되찾은 것이다.
긍휼의 씨앗
차머즈라는 사람은 그의 책 “정오의 강풍”에서 유명한 건축 기사 피어홈의 긍휼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기사 피어홈은 세계 도처에 많은 다리와 터널들을 건설하여 큰 명성을 얻었으나. 뒤에 질병과 실패로 인해 부인과 어린 딸을 데리고 낙향하였다. 그 이웃에 한 몰인정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너무 사나운 개를 길러 위험하므로 피어홈은 자꾸 경고를 했지만 오히려 번번히 모욕만 당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불행은 갑자기 닥쳐 왔는데 그 개가 하필이면 피어홈의 어린 딸을 물어 죽이고 만 것이다. 사람들은 일제히 개의 주인을 비난하고 파종기가 되었어도 그 노인에게 한 톨의 곡식 종자를 주거나 팔지 않았다. 노인이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은 그를 냉소했다. 맨 밭을 간 후에 씨를 달라고 애걸하는 노인의 모습을 피어홈은 보았다. 그는 그날 아침 일찍 일어나 광에 가서 자신이 쓸 씨앗 반 되를 꺼냈다. 피어홈은 열심히 노인의 밭에 씨를 뿌려 주었다. 이웃 노인의 밭은 파릇파릇한 반면. 피어홈의 밭은 그 일부가 아직도 빈 땅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긍휼은 우리들이 원수의 밭에 좋은 씨를 뿌리도록 요구한다. 그로 말미암아 비록 우리 자신의 밭 일부가 맨 땅으로 남겨진다고 하더라도..
긍휼 여러분, 노력도 좋고 부지런함도 좋습니다. 기술 개발도 좋고 생산 증대도 좋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 있는 죄를 살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회개하고 악에서 떠날 때에 하늘에게 보시고 하늘에게 들으시고 하늘에서 죄를 사하여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18잘 21절 이하에서도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지난날의 죄가 많지만 이제 회개하면 그 지은 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오늘 행한 이 의로 인하여 살리라 - 이렇게 간절히 촉구하십니다. 과거와는 상관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문제의 원인은 죄에 있고, 불행은 교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겸비하고 자세를 낮추고, 그리고 회개하십시다. 진정으로 회개하십시다. 그가 그 인격을 치유하실 것이요, 그 가정을 치유하실 것이요, 그 땅을 회복케 하시며 고쳐주실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저, 불쌍해서요.. 내가 아는 어느 장로님에게 아들딸 8남매가 있었다. 그 아들들이 다 훌륭하게 자라났는데 특별히 셋은 줄줄이 서울대학교를 나왔다. 대학원을 나오고 박사가 되고 했다. 자랑스러웠다. 그 장로님은 늘 "저는 아이들 때문에 걱정해 본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한번도 우리 아이들은 병원에 가는 일도 없어요. 병원하고 우리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가만히 보니까 사실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이 하나 있었다. 그 부인은 국민학교도 못나왔다. 겨우 한글이나 깨우칠 정도의 수준이다. 그런데 아이들을 그렇듯 잘 키웠다. 또 아이들이 어머니의 말이라면 꼼짝을 못한다. 하도 신통해서 몇번 물어보았다. "어떨게 그렇듯 아이들을 잘 가르쳤습니까?" "가르치기는요. 제가 뭘 알아야 가르치지요. 가르치는 게 없습니다. 다만 아이들이 한창 졸리는 나이에 잠과 씨름하면서 공부하느라 애쓰고, 잘 먹이지도 못하고 입히지도 못했는데 밤새워가면서 공부하는 걸 보니 불쌍해서, 불쌍해서 내가 어떻게 잠을 자겠어요? 그래서 그 옆에 앉아 저는 책도 못보고 할 일없으니까 그냥 뜨게질만 떴다 풀었다, 떴다 풀었다 했었지요." 아이들이 공부할 때에 언제나 곁에 앉아 있어주었다는 것이다. 훌륭한 어머니다. 생각해보라. 요새 소위 잘났다는 어머니들, "너 못하는 건 네 책임이다. 학비를 안줬냐, 밥을 안먹었냐, 옷을 안줬냐? 에이, 멍청한 것"하는 어머니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네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사랑이 아니다. "미안하다, 공부하라고 해놓고 나는 놀러 나갔고, 델레비전만 보았고... 네가 어미 잘못 만나서 이 꼴이 되었구나"할 수 있는 마음이 긍휼이다. 남편이 밖으로 돈다면 그거 남편 책임이라고만 생각하는가? '어쩌다가 상냥하지 못하고 말 한마디 정답게 할 줄 모르는 여자 만나가지고 밖으로 도느라 무척 고생하시는구만' 이렇게 주제 파악을 제대로 해보라.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어쨌든 긍휼이라는 것은 모든 잘못이 당사자에게 있다는 것이 아닌가. 내게 있다는 것이다. 내가 책임을 진다. 이게 긍휼이다. 동시에 아주 미래지향적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는 절대 실망이란 없다. 나, 당신에게 실망했다 - 이런 소리는 하지 못한다. 긍휼과 함께, 긍휼을 통해서 먼 미래를, 밝은 미래를 바라본다. 동시에 이것은 행동적이다. 이 행동에는 낙심이 없다. 그것이 긍휼이다.
긍휼을 베푼 김홍섭 김홍섭 판사는 긍휼의 마음을 가진 법관이었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피고인들에게 형을 선고한 후 조용히 감방으로 면회하고 사랑으로 가족들을 돌보았습니다. 그의 인간애를 담은 재판에 감동되어 사형 선고를 받은 피고인까지 울게 만들었습니다. 어느날 저녁 식사를 하다가 숟가락을 놓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낮에 법정에 나와 앉아 있던 가난한 피곤인들과 가족들이 지금 추운 방에서 떨고있을 것을 생각하니 법이 넘어가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51세에 죽었습니다. 병명은 간경화증이었으나 사실은 영향실조였습니다.
긍휼의 뜻 1 (서론)몇해 전의 일이다. 나이가 좀 많이 들어서 뒤늦게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회에 나온 분이 있었다. 한 일 년 동안 교회에 열심히 나오면서 그는 '늦게 시작했으니까 먼저 믿은 사람들을 좀 급하게 따라 잡아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본인 말대로 열심히 성경공부를 했다. 과외수업도 하고, 개인 교습도 받고 하면서 어쨌든 빨리 성경과 교리를 익혀야겠다 해서 공부를 하는데, 성경이 고어로 된 성경이라서 뜻이 잘 통하지 않으므로 영어성경, 독일서성경을 대조하면서 읽었다고 한다. 여러가지 주석서도 참고했다. 그렇게 하면서 열심히 성경공부를 해나가다가 내게 와서 물었다. "목사님, 성경에 보니까 긍휼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긍휼이라는 단어가 참 중요한 것 같지만 뜻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영어성경으로 돌아가 읽어보았더니 영어성경에는 'Love'라고 되어 있는 겁니다. 'I wont your love.'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렇다면 '사랑'이라고 번역했으면 간단하겠는데 그걸 왜 긍휼이라고 해서 헛갈리게 합니까? 왜 '사랑'이 아니고 '긍휼'입니까?" 그래서 내가 대답을 해 드렸다. "똑같은 사랑이요 단어도 같지만 그 개념은 서로 다릅니다.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이 있고,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이 같지 않아요. 또 젊은 사람들끼리 남녀 간에 사랑하는 것, 이런 것은 수평적 사랑이에요. 그런데 '긍휼'이라고 하게 되면 이는 아주 높은 위치에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했더니 "아하, 그렇군요. 참 귀한 뜻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긍휼의 뜻 2 - 라함 - 자궁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긍휼'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엘레오스'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구약의 호세아 1장 6절을 인용하신다. "내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인애라는 말이나 자비라는 말이 다 같은 뜻으로 사용되지만 히브리어로는 유명한 '헤세드'라는 말이다. 헤세드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구약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구약에서 많이 사용되는 말은 자비와 긍휼인데 그 히브리 원문은 '라함'이라는 단어이다. 복수로 말할 때에는 '라하밈'이다. 히브리말을 굳이 인용하는 것은 그 어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히브리말에 '레헴'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 '레헴'이라는 말에서 '라함'이라는 말이 나왔다. '레헴'이란 바로 여인의 자궁을 의미한다. 얼마나 신비로운 말인가? 여인의 자궁 -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고향이다. 자궁과 같은, 그런 사랑을 '긍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이것을 이런 말이라고도 한다. 새가 모이를 주워 먹고 돌아와서 새끼에게 그것을 토해내서 먹이는 것을 본다. 그럴 때에 보면 막 몸을 비비 꼬면서 토해 먹인다. 꽤 큰 새끼는 아예 주둥이를 어미의 목구멍 속에 집어 넣어가지고 꺼내 먹는다. 이렇게 해가면서 새끼를 키우는 어미새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사랑을 '긍휼'이라고 한다는 해석이다. 이렇게 그 어원과 배경을 생각하고 보면 너무도 신비롭고 무궁무진한 진리가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적 사랑이다. 자궁 속에서 생명이 출생한다. 생명이 거기서 나오는 것이다. 그 사랑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사랑은 절대적으로 주도적이다. 자궁이 생명체를 보호한다. 모든 필요한 것을 다 공급해 준다. 그 체온과 영양과 그 사랑까지도 공급한다. 태모 교육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공급해 주어서 그 생명이 존재한다. 또한 신비로운 교육적 의미가 있다. 아시는대로 자궁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지 않는가? 자라서 아기가 되어 나오는 것이다. 오래오래 기다려서 아주 작은 생명체로 커서 하나의 갖추어진 생명이 되어 나온다. 자궁으로부터이다. 다시 한번 크게 눈을 뜨고 우주를 바라보라. 이 우주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궁이다. 그 하나님의 품 속에서, 그 속에서 우리가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을 받아서 생명으로 살아간다. 생명의 은혜로 생명을 산다. 그 긍휼 속에서 우리가 무럭무럭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얼마나 신비로운 말인가? 하나님의 긍휼, 생명력과 놀라운, 신비로운 사랑이 크게 작용한다. 이것을 통칭 "긍휼"이라고 말한다.
긍휼의 뜻 3 긍휼이란 무엇이겠는가? 긍휼이란 내가 불쌍히 여기는 자의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지는 것이다. 그리고 저들은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주님께서 하신 첫말씀이 "아버지여, 저희를 사여주옵소서. 저희의 한느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이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 이게 중요한 것이다. 알고보면 다 몰라서 그런다. 큰소리 쳐봐도 모르기 때문이다. 저 잘났다고 하는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요새 마약을 하는 젊은이들, 모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비참한가? 그런고로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저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하는 그 마음, 그것이 바로 긍휼이라는 말이다. 우리 인간들이 다 부족하고 흠이 많고 잘못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생각하신다. 저들이 유치하고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 안다고 하지마는 모르기 때문이다, 하고. 참으로 불쌍한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주도적인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혀 책임을 묻지 않는다. 오히려 그 책임을 내가 진다.
긍휼의 씨앗
차머즈라는 사람은 그의 책 “정오의 강풍”에서 유명한 건축 기사 피어홈의 긍휼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기사 피어홈은 세계 도처에 많은 다리와 터널들을 건설하여 큰 명성을 얻었으나. 뒤에 질병과 실패로 인해 부인과 어린 딸을 데리고 낙향하였다. 그 이웃에 한 몰인정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너무 사나운 개를 길러 위험하므로 피어홈은 자꾸 경고를 했지만 오히려 번번히 모욕만 당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불행은 갑자기 닥쳐 왔는데 그 개가 하필이면 피어홈의 어린 딸을 물어 죽이고 만 것이다. 사람들은 일제히 개의 주인을 비난하고 파종기가 되었어도 그 노인에게 한 톨의 곡식 종자를 주거나 팔지 않았다. 노인이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은 그를 냉소했다. 맨 밭을 간 후에 씨를 달라고 애걸하는 노인의 모습을 피어홈은 보았다. 그는 그날 아침 일찍 일어나 광에 가서 자신이 쓸 씨앗 반 되를 꺼냈다. 피어홈은 열심히 노인의 밭에 씨를 뿌려 주었다. 이웃 노인의 밭은 파릇파릇한 반면. 피어홈의 밭은 그 일부가 아직도 빈땅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긍휼은 우리들이 원수의 밭에 좋은 씨를 뿌리도록 요구한다. 그로 말미암아 비록 우리 자신의 밭 일부가 맨 땅으로 남겨진다고 하더라도..
긍휼의 열매 일제 시대 때 황해도 운률에 이찬영 장로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이 분은 큰 부자로 일년 농사를 지으면,특별히 마련한 십일조를 창고에 가득 넣어 두고 교회 살림을 하며 또 학교를 도와주는 등 좋은 일을 많이 하신 분입니다. 집안에 잔칫날이 되면 먼저 큰 잔치를 베푸는데,그 잔치는 황해도 거지들을 다 초청하여 여는 잔치였다고 합니다. 황해도 뿐 아니라 평안도, 함경도 거지들까지 몰려와 잔치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 장로님은 "가난한 장사꾼의 물건값은 절대로 깎지 말라."고 자녀들에게 항상 당부할 만큼 선한 분이었습니다.
그곳에 공산당이 들어오면서 토지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이 장로님의 과수원도 토지개혁으로 공산당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은 내일이면 과수원이 공산당에게 넘어가는 그 전날에도 하루 종일 과수원에 나가 김을 매고 거름을 주며 수고를 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사람이 "내일이면 남의 과수원이 될텐데 무엇하러 그렇게 수고하 십니까?"하고 물으니까, 이찬영 장로님은 "누구인들 이 과실들을 먹을게 아니요? 나는 오늘 이 과수들을 가꾸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6.25 동란이 터졌습니다. 공산당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이 장로님이 오고 갈데가 없어졌을때 그에게 긍휼을 입은 거지들이 몰려와서 이 장로님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긍휼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내가 있는 처소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베푸십시다. 그 자비의 열매는 언젠가 여러분이 풍요한 축복을 얻게 할 것입니다.
긍휼의 의미 시편기자가 하나님을 긍휼하심ㄴ이 풍성하신 분이라고 찬양하는 것은 놀라운 이 아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태(womb)'라는 명사와 연결되어 아기에 대한어머니의 사랑을 나타낸다. 에베소서 2장 4,5절에서 사도바울이 "긍휼이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라고 말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석성때문이었다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열변한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너의 쓴 잔을 너의 쓴 잔을 내가 마시었고/ 나는 너에게 단잔을 주었노라 너는 나에게로 오라/ 너의 쓴 잔을 받아든 나의 사랑을 거절하지말고 너에게 주는/ 나의 단잔을 받아 마시라 너의 근심을 내가 당하였고/ 나는 너에게 평안을 끼치노라 너는 나에게로 오라/ 너의 근심을 가져간 나의 은혜를 뿌리치지 말고 너에게 끼친/ 나의 평안을 받아 누리라
너의 죽음을 내가 맛보았고/ 나는 너에게 생명을 베푸노라 너의 죽음을 담당한 나의 희생을/ 물리치지 말고 너에게 베푼 나의 생명을 받아 살아라
묵상
● 사랑 수도사 마카리오스(Makarios: 300∼391년) 원장에게 어느날 한 사람이 좋은 포도송이 하나를 가지고 와서 정중하게 드렸다. 마카리오스 원장은 그 사람에게 축복하고나서 "이것을 내 옆방의 나이 많으신 수도사에게 갖다 드리십시오"하고 말했다. 그가 나이많은 수도사에게 그 포도송이를 가져갔더니 "지금 나자리오 수도사가 병중에 있으니 그분께 갖다 드려 주세요"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나자리오 수도사에게 가지고 갔다. 나자리오 수도사는 또 다른 분에게 갖다 드려 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리하여 포도 한 송이는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돌고 돌아서 다시 원장에게로 돌아왔다. 마카리오스 원장은 이 수도사들의 사랑과 희생정신에 감동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 위대한 사랑의 물결이 바로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 긍휼 뉴욕 역대시장중 가장 명시장으로 알려진 사람은 라과디아(Laguardia)였다. 그가 뉴욕시의 즉결 재판부 판사로 있을 때 하루는 가게에서 빵을 도둑질 하다가 붙잡혀온 노인이 기소되었다. 노인은 "너무 배가 고파 빵에 손을 댔다"고 고백했다. 라과디아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행위는 10불의 벌금형에 해당됩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자기 지갑에서 10불을 꺼냈다. "그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내가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은 벌금으로 내는 것입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그 유명한 넓은 중절모자를 재판부 서기인 베일리프씨에게 내주며 말했다. "이 재판정에 계신분들도 나처럼 너무 잘 먹은데 대한 벌금을 내시고 싶으면 이 모자에 넣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가난한 노인은 오히려 47불을 손에 넣고 눈물을 흘리며 재판정을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위의 두 이야기가 지금 나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마카리오가 그 포도송이를 혼자 먹었을 경우와 위의 경우와는 그 결과가 어떻게 다르겠습니까? 오늘 우리 가정은? 우리 교회는? 우리 직장은? - 좋은 것을 서로 남에게 주려고 애씁니까? 아니면 내가 차지하려고 발버둥칩니까? 2. 조금만 제대로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다면... 그렇게 남을 정죄하는 일에 용감하진 못할텐데... †
베토벤은 아주 가난하고 여려웠다.
먹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가난할 때가 있었는데, 그의 동생은 요새처럼 토지 투기를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었지만, 횡재를 해서 부자가 되었다, 이거다. 그것을 알고 형이 동생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지금 생활이 어려우니 좀 도와주게' - 그랬는데 동생이 '형님, 가난하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형님 책임입니다. 당신의 가난은 당신의 몫입니다' 하고 회답하는 것이었다.
형은 이 편지를 받고 섭섭해서 다시 회답을 하는데 '네 재물도 필요업고 네 설교도 필요없다'했다. 여러분, 가난한 자의 책임이 그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가? 못사는 자의 책심이 그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가? 부정한 자의 책임이 그 자신에게 있는가? 그것은 긍휼이 없는 것이다. 그건 그 사람의 책임이 아니다. 어쩌면 다 내 책임이다. 이렇게 아는 것이 긍휼이다.
병든 아이의 부모 심정 시 103:13; 잠 13:24; 신 5:16; 골 3:20
어떤 심한 병에 걸려 있는 한 어린 아이의 아버지는 비록 그 아이가 한마디도 전혀 말할 수 없을지라도 그 아이를 도와 줄 준비가 되어있다. 아이가 말할 수 있다 하여도 고통에 시달리기 때문에 마땅히요청해야 할 것들을 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어머니란 사람은 그 어떤 표시를 보고 의미를 추측할 수있어서 마치 아이가 매우 유창하게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비록 아이가 뜻하고자 하는 바와 다른 말을 했을지라도 그녀는 그뜻하는 바를 알아서 따라 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긍휼의 정을 가지고 계시는 주 하나님도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신다.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하시는
밤이나 낮이 없네.
감사를 받아 주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는
밤이나 장소도 없네.
하나님께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니 알지 못하시는
밤이나 낮이 없네.
사랑을 받아 주의 긍휼를 간구하지 못하는
밤이나 장소도 없네.
진정한 용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비와 평화를 의지할 때 「증오의 사슬」에서 자유할수 있다.영국의 저술가인 브라운박사(1605∼1682)는 말했다.『원수를 하나님께서 벌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용서하는 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해 원수를 일말의 여지도 없이 전적으로 용서하십시오. 그들을 무조건 다 용서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도록 기도하면 진정한 평화를 얻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천사처럼 죽을 권리 - 테레사 수녀 노벨상을 받은 테레사 수녀가 한평생 불쌍한 사라들을 위해서 일하는데 어떤 기자가 물어보았다. "수고라는 것은 그래도 가망이 있는 사람을 위해 하는 것 아닙니까? 재활의 능력이 갖춘 사람을 위해 수고해야 수고한 가치가 있는 것이지, 아무 소망도 없는, 아무 가치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당신은 왜 당신의 전부를 바치고 수고하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대답했다. "이들은 평생 개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내가 돕는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아무도 그들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단 한 사람이라도 그들을 원한다고 한느 것이 그들에게는 소망이다."
그리고 참 귀한 말씀을 했다. "그들도 천사처럼 죽어갈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저들을 도와서 저들이 마음을 바로잡고, 개화하고 문명화하고 한다는 게 아니다. 그런 굉장한 일을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저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빙그레 웃으면서 천사처럼 죽어갈 권리가 있는 게 아니냐고, 그래서 봉사한다고 한다.
여러분 우리는 긍휼히 여긴다고 할 때에 굉장한 기대를 건다. 뭐 도울만한 가치가 있다 없다 따위의 얘기를 하고 있다. 그게 아니다. 그대로 긍휼히 여길 뿐이다. 거기에 진정한 긍휼이 있다.
토마스 모어의 유언 유명한 토마스 모어가 좀 일이 잘 못돼서 무고하게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때에 그가 재판장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유명한 이야기로 전해진다. "재판장님이시여, 내가 당신을 이 시간 친구라고 부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바로 말하기를 "친구여, 당신과 나는 이 관계가 성경에 나오는 바울과 스데반의 관계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뒤에 바울은 예수를 믿습니다. 한 평생 예수를 믿고, 복음을 위해 일하고, 그리고 순교했습니다. 내가 믿긴느 하늘나라에서 그 둘이 서로 만났을 때에 서로가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얼마나 감격하는 만남이 있었겠습니까? 당신이 지금은 나를 죽이지마는 장차 하늘나라에서 당신과 나는 스데반과 바울처럼 친구로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엄청난 이야기를 할 때에 재판장은 말했다. "나는 당신에 대하여 사형선고를 했는데 당신은 어째서 나를 친구라고 하시오?" 이에 모어는 유명한 대답을 했다. "주께서 나에게 먼저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시기에 내가 또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것이다.
토마스 무어 (긍휼) 영국에 꿈 많고 신사적이며 존경받던 그리스도인 가운데 토마스 무어(Themas More)경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 죄도 없이 무고하게 잡혀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느 자기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있는 재판관을 향해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재판관이시여,내가 당신을 친구라고 부르도록 허락해 주십시요. 친구여 나는 당신과 나의 관계가 바울과 스데반의 관계가 되기를 원하오. 바울이 스데반을 죽였지만 지금쯤 하늘 나라에서 이 두 사람은 가장 좋은 친구가 도;어 있을 것이요. 그대가 나에게 죽음을 선고했지만 우리는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구원을 함께 누리는 친구가 되기를 바라오. 재판관은 이 토마스 무어경의 감격스러운 선언을 듣고서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그대에게 사형을 언도했는데 그대가 나를 선대하는 이유는 무엇이요?" 토마스 무어는 대답하기를 "주께서 먼저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지옥에? 어떤 목사님의 지옥에 관한 설교를 듣고 있던 한 부인이, 목사님에게 자녀가 있느냐고 물었읍니다. 목사님이 있다고 대답하자, 그 부인은 "그렇다면 질문할 것이 있는데요. 자녀가 고통 가운데 빠져 있어도 구해주지 않는 아버지가 있다면 그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할까요?"하고 물었읍니다. "그야 물론 그런 아버지는 폭군이나 무자비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목사님 대답에 부인은 "목사님께서는 지금 하나님을 그런 하나님으로 취급하고 있읍니다. 하나님은 그런 권능을 가지시고 그 자녀들을 구원치 않고 지옥에 떨어뜨린다면 폭군일 수 밖에 없지 않읍니까?"고 비판했읍니다. 이때 목사님은 대답해 주었읍니다. "하지만 부인, 부인께서는 한가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읍니다. 하나님은 지옥에 있는 자녀들은 한 사람도 가지고 있지 않읍니다. 지옥에 있는 자녀들은 모두 마귀의 자녀 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국에 있거나 천국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을 위한 집을 따로 가지고 있고, 마귀는 그 자녀들의 집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거듭난 자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아버지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변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용하고 있읍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우리 하고 싶은대로 살아가자. 하나님은 선하셔서 벌을 내리실 분이 아니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어느 날엔가 냉혹한 현실을 깨달을 때가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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