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화

기회에 대한 예화 모음

공 상희 2011. 7. 22. 14:31

기회에 대한 예화 모음

 

놓쳐버린 중국 대륙 선교의 기회
   롬 10:14-18; 고후 6:1,2; 행 16:6-10
 마르코 폴로는 1269년에 쿠빌라이  칸이 북경에서 어떤 방식으로 기독교신앙을 가진 100명의  현자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는가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황제는 이렇게 제안하였다.
 "그러면 나는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내가 세례를 받게 될 때 나의 모든 신하들과 귀족들도 세례를 받게 될 것이며, 그 다음에는 그들에게 속해 있는 자들이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의 지방에 있는그리스도인들보다도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곳에 있게 될 것이다."그런데 실제로는 어떠한  일이 발생하였는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는 두 명의  도미니쿠스회 수도승을 보내는 것으로 응하였다.
그 수도승들은 아르메니아까지 갔다가 더 이상 견뎌내띵 수가 없어서 집에 돌아와버린 자들이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큰 선교의 기회는 사라져 버렸다.

단 한번의 기회
어떤 노인이 열심히 노력하여 육십 세에 미화 백만 불을 모았습니다. 그가 백만 불을 모으자 친지들과 동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제는 그만 벌고 남은 인생을 재미 있게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적ㅇ도 앞으 로 이십 년은 더 살 것인데 그렇게 하자면 백만불로는 안심이 안돼. 나는 이,삼백 만 불이 더 있어야만 해."  그 노인은 조금도 쉬지 않고 기를 쓰며 일을 계속했습 니다. 그러다 그는 삼년이 지나기도 전에 병들어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무엇이든 긁어 모으고 소유만 하는 것이 참 삶은 아닙니다. 참된 삶은 많든 적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참으로 잘 누리는 것입니다.

  인생은 하나님께서 주신 단 한번의 기회입니다. 이 한번 주어진 삶을 단지 물질 만 많이 끌어 모아 소유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발버둥 치다가 뜬 구름같이 사라 져 버린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현재 가진 재산이 많거나 적거나 간에 가진 것을 누리며 자족하는 삶을 사는 것 이 현명한 삶입니다. 끝없이 소유하려고 할때 불평과 원망과 탄식이 생겨 만족과 행복을 얻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인생을 하나님께로부터 감사함으로 받아서 그 삶의 모든 과정을 진정으로 누리고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은 후회없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환경,가정,부부,친구,이웃 등과 깊은 사랑을 나 누고 즐기며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돈에 대한 격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세가지는 번민과 불화와 비어 있는 돈 지갑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큰 상처를 내는 것은 빈 돈지갑이다.
 몸이란 마음에 의존하게 마련이고,마음은 돈지갑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무릇 돈이란 상업에 이용되어야지 술을 마시는 데에 허비되어서는 안된다.
 돈은 악도 저주도 아니다. 돈은 인간을 축복해 주는 고마운 것이다.
 돈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선물을 살 수 있게  기회를 안겨 준다.
 돈을 차용해 준 사람에게는 화를 내지 말고 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유함은 견고한 요새이고 빈곤은 폐허와 같다.
 돈과 물건은 거저 주는 것보다는 빌려주는 편이 더 낫다.
 돈이나 물건을거저 얻으면 얻은 사람이 준 사람보다 아래의 입장이 되지만, 빌려주면 서로 동등한 입장에 서기  때문이다.


돈은 기회를 만들어 준다.
   유태인들은 돈을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으로 비평하지도 않는다.
   돈이 있으면 인생살이에 다양한 것을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갖게된다는 것이다.
   예를들면,이름을 얻게 된 것이 그것이다. 유태인들이 이름과 성을 갖게 된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이다.  그 이전에는 아무개의 아들 누구라든가 가수, 거울집, 꼬마등으로 사는 곳이나 직업 그리고 외견상 특징을 따서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이후부터 오스트리아의 요셉 2세에 이어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와 프러시아 정부가 잇달아 유태인을 통치하기 위해 유태인 등록장부를 만들면서 이들에게 성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고 마음대로 이름과 성을 가질 수는 없었다.
   이들을 지배한 지배국들은 유태인들을 약탈하기 위해 좋은 이름은 비싼 값에, 나쁜 이름은 싼 값으로  붙여 장미(로젠탈), 철(아이젠버그)와 같은 이름을 붙여 주었다. 반대로 싼값의  이름에는 늑대와 같은 동물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예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이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지방 궁둥이와 같은 천박한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지금은 모두 이름을 고쳐 이런 종류의 이름은 없다.
   이 세상 어느 나라이고 이름을 돈으로 사서 붙이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돈이 우리에게 보다 많은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인생기회
1.입으로 내뱉은 말,
2.날아간  화살,
3.지나 가버린 인생,
4.놓쳐버린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4가지를 유의하면 인생을 좀더 윤택하게 살 수 있다.

  등 불 을   끄 세 요
 낚시꾼을 가득 실은 배 한대가 그만 폭풍을 만나 바다 한가운데서 고장이 나고 말았습니다. 기관도 부서져 버리고 점점 날이  어두워지며 칠흙같은 밤이 다가오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쌓였습니다.
   그때 누군가 더 어두워지기 전에 등불을 켜자고 하여서  비상등불을 찾아 불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배를 움직이기 위해 노를 찾아냈습니다.사람들의 얼굴에는 이제 살 수 있을 것 이라는 희망에 넘쳤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알 수 없었습니다.어느쪽으로 가야 육지이고 바다
인지 알수가 없었습니다.다시사람들은 절망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한사람이 나서서 등불을 끄자고 하였습니다.사람들은 말도 안된다며,등불이라도 켜 놓아야 혹시 구조대가 발견할수 있을지도 모르고 방향을 찾지 않겠느냐고 반대하였습니다.
    등불을 끄자고 주장했던 사람이 등불을 스스로 꺼버렸습니다.
배 안에는 고요가 넘쳤고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한사람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불빛이 보인다! 육지의 불빛이 보인다! 우리는 살았다!"
...등불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육지의 반딧불같은 불빛이 주위가 어두워지자 보인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위기를 만났을때 그 위기를 우리는 어떻게 넘기는지...위기는 위험+기회 라는 말이 있습니다.
    잠,시,등,불,을,꺼,보,세,요.!


기회
    어느 여름 밤, 식구들이 함께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어린 손자와 할머니가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한참 맛있게 식사를 하다가 어린 손녀가 소리쳤다.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는 식사를 하다가 호들갑을 떠는 손자를 점잖게꾸짖었다. "얘야, 밥을 먹을 때는 조용해야지.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게 아니란다." "그래도 할머니 급한 일인데..." "참아라, 밥을 다 먹은 후에 말을 하렴.""그러 아닌데...?" 묵묵히 식사를 마친 후,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얘야, 아까급한 이야기라고 한 게 뭐냐? 이제 말해 보렴." 손자는 힘없이 대답했다. "이젠때가 늦었어요." "때가 늦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아까 할머니 국에 파리가 한마리 빠져 있었거든요. 그걸 말하려고 했는데, 지금 그 파리는 할머니 뱃속에 들어가 버린 걸요..." "뭐야?"


 명심할 것들
   후회할 것이 없는 7가지와 돌아오지 않는 4가지­
나이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
화가 났을 때 쓴 편지를 찢어버리는 일,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 먼저 사과하는 일,
남에게 상처를 주는 추문을 정지시 키는 일,
청소년들의 자아발견을 도와주는 일,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일,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일은 후회할 것이 없다.

입으로 내뱉은 말,
날아간  화살,
지나가버린 인생,
놓쳐버린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4가지를 유의하면 인생을 좀더 윤택하게 살 수 있다.


 묶지 않은 건초
    행 20:24-38; 딤후 2:23-26; 롬 10:1-4
 어느 목사가 하루는  시골길로 차를 몰고 가다가  건초를 가득 싣고 오는 마차와 마주치게 되엇다. 그런데 마차에 시린 건초가 얼마나 많은지 통로를 완전히 가로막을  지경이엇다. 그리하여 마차를 비켜 가느라고 애쓰다 하마터면 목사 차가 길 옆 도량에 굴러떨어질 뻔했다.
 이 우연한 일로 해서 그 목사는 설교에 관한 값진 교훈을 얻게 되었다.
만일 그 전초를 단으로 묶었더라면  같은 양의 건초라도 부피가 사분의 일정도로 줄었을 것이다. 많은 설교들의 경우도 이 건초더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건초더미와 마찬가지로 설교도  묶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설교의 길이와 관련해서는 다른  기회에도 설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열정의 문제에 있어서는  지금의 설교가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설교하라.


박쥐 신자
   요 8:12,31,32,47
  어느 날 짐승과 새들이 전쟁을  하였다.  간교한 박쥐는 짐승들이 이길 줄 알고는 짐승들 진중에 찾아가서 자기는 짐승이라고 하면서아첨을 하며 짐승축에 가입하였다.   가입되고 보니 새들 중에서 무서운 매와 독수리들이  날아와 사자와 호랑이 머리 위에 앉아서 그들의 눈을 모조리 빼 버리자 짐승들은 대패하게 되었다.   박쥐는 자기의 신변이 불리함을  깨닫고 새들의 진중에 가서 짐승들의 비밀을탐지하러 간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오늘날도 박쥐와  같은 신자들이 많다.   세상과 교회의 양편추세만을 보아 움직이는 박쥐 신자들이다.


밖에 나가 기다리시오"
   미국의 어느 장관이 개인적인 일로 해결해야할 문제가 생겨 한 변호사 사무실을 찾을 일이 있었다.  그가 찾아간 법률사무소는 후배가 하는  곳이었는데 그 장관이 문을 열고 들어가 비서실에 혼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젊은 서기에게 변호사를 보기를 청했을 때 젊은 사기는 장관에게  변호사님은 안계시니 "밖에 나가서 기다리시오"라고 하고는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장관은 밖으로 나왔다. 얼마후 사무실로 돌아오던 변호사는 자신의 사무실계단위에 앉아 있는 장관을 발견하고 대경실색을 했다.무례함을 저질렀던 젊은 서기는 더욱 놀랐다.
   우리도 세상적인 일에서 때와 기회를 놓쳤을 땐 뼈아프게 후회하곤 한다.그럼에도 영적생활의 기회는 무관심하게 거절하고 있는 경우가 많음을 볼수 있다.


방학은 '자율성 키우기' 최고기회 
   방학은 잘 이용하면 학교생활에 활력을 주는 [영양보충기간]이지만 갑자기 규칙적인 생활에서 벗어나면서 게을러지기 쉬운 기간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부모들은 자녀들이 스스로 통제하고 할 일을 찾아하는 자율성을 길러주라'고 충고한다. 끊임없이 잔소리를 퍼붓거나 공부하라고 재촉하면 반발심만 사게 되고 자율성이 부족한 아이가 되기 쉽다.
   차경재(62.고일초등 교장)씨는 "자녀가 스스로 생활계획표를 짜고 실천하도록 하며 과외와 학원으로 쉴 틈없이 묶어두기 보다 자유시간을 충분히 줄 것"을 권한다. 물론 자녀의 성격이나 생활능력에 따라 부모의 개입과 간섭은 피할수 없다. 차씨는 "부모가 스스로 일찍 일어나고 독서를 하는등 좋은 생활 모범을 보이는 것이 직접적인 통제보다 효과적" 이라고 말한다.
   방학생활지도는 먼저 생활계획표를 세우고 이를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 [청소년이 꼭 알아야 할 시간관리와 공부방법]을 펴낸 유성은(54.경기 화성군 수영 감리교회 목사)씨는 '생할계획표는 90%이상 실천할수 있게 현실적으로 세워야 한다. [복습]이나 [독서]로 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세우라'고 말한다.
   [체력단련]이라면 줄넘기 500번, 윗몸일으키기 50번등 구체적으로 정해야 한다는 것. 그는 또 '시간계획을 너무 타이트하게 세우면 방학의 즐거움을 잃게 되고 너무 느슨하게 짜면 생활 리듬이 깨지기 쉬우므로 적당한 긴장과 휴식을 갖도록 짤 것'을 권한다. 중간에 2박3일정도 시골친척집을 방문하거나 가족여행을 가는 등 [실컷 노는 기간]도 활력을 준다는 면에서 필요하다. 차경재씨는 '방학동안 자녀에게 친구사귀는 기회를 갖도록 할 것'을 권한다. 형제가 없는 [나홀로자녀]가 늘어나면서 친구의 역할이 더 크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부모나 선생의 잔소리보다 친구의 장점을 보고 더 많이 배우기도 한다. 그는 '부모의 허락하에 하룻밤정도 친구집에서 자게 하는 것'도 좋은 방학 보내기법으로 추천한다.
   계획을 세운 것 못지 않게 실천하고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다.
   [청소년이..]를 함께 쓴 유미현(28.백석중 교사)씨는 '하루 일과를 계획표에 따라 실천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침에 운동이나 학원수업, 독서실에서 친구와 만날 약속을 하는 등 의무감을 부여하도록 한다. 일기를 쓰거나 목표를 점검하는 등 매일 자신의 생활을 정리하는 습관도 필요하다. 또 주단위로 방학생활을 평가하게 해 자꾸 느슨해지는 것을 추스리도록 한다. 흥사단 청소년상담부 장근희연구원은 '자녀의 생활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상벌제도를 활용하면 효과적'이라고 조언한다. 밤에 늦게까지 비디오를 보거나 게임을 하고 다음날 늦게 일어나는 자녀에게는 밤에 일찍 자게하거나 비디오 게임을 금지하는 벌을 주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효과를 볼수 있다.
   또 부모와의 약속을 잘 지키거나 계획한 학습량을 달성했을 때는 보고싶어하는 공연을 보여주거나 놀이공원에 데려가는 등 상을 주도록 한다. 강근희씨는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가 정한 규칙과 상벌의 기준을 스스로 어기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보석 전문가가 되는 길
  신 17:19; 31:12; 시 119:7; 잠 30:3
 어떤 젊은이가 보석 전문가를 찾아 가서는 보석 기술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 전문가는 젊은이가 기술을 배울 만한 인내심이 없어 보여서 제자로 받아들이길 거절하였다.  그러나 한 번만 기회를 달라는 청년의 간청에 못이겨 승낙하였다.
 다음날 아침,  보석 전문가는 다시 찾아온  젊은이에게 비취 원석을 주면서 그대로 쥐고 있으라고  했다. 그로고는 자기 일자리로 가서는 묵묵히 보석을 깎고 다듬었다.  젊은이는 말없이 그대로 앉아 기다렸다.
 그 다음날 아침에도 보석  전문가는 전날과 똑같이 젊은이에게 비취 원석을 손에  쥐고 있게 했다. 셋째날,  넷째날 그리고 다섯째날에도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여섯째날에도  청년에게 비취 원석을 쥐고 있게 했다. 그러자 더 이상 참지 못한 청년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 언제쯤이야 저도 뭔가를  배우게 될까요?""때가 되면 배우게 될거야"
 이 말만 하고 선생은 계속 자기 일만 했다.
 그 후로도 여러 날이 지났고 젊은이의 불만도 커져 갔다.
 어느 날 아침 보석 전문가가 그에게 다가서며 손을 벌리라는 시늉을 했다. 이 때 그 청년은 이제는 더 이상 계속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보석 전문가는 젊은이의 손에다 돌멩이를 쥐어주었다. 그것을 받아 쥔 젊은이는 손을 펴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이것은 전의 그 비취 원서기 아니네요."
 그러자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자네도 드디어 배우기 시작했군."


사탄의 「덫」
 사탄은 인간을 파탄시킬 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작은 것」을 노린다.
이런 사탄의 일곱가지 「덫」. △누구나 하는 것인데 내가 했다고 큰 죄가될까 △아직 젊으니까 신앙을 갖는 것은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나 갖지 뭐△이건 아주 미미한 것으로 양심에 큰 가책이 되지 않는다 △이번이 딱 한번뿐이니까 괜찮겠지 △아무도 보지 않았으니까 문제 없겠지 △그동안 너무 힘들게 살았으니까 이 정도는 보상차원에서 괜찮겠지 △이것이 나에게 주어지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삶의 위기와 하나님의 기회
죤 프리벨, "Man's extremity is God' opportunity."
히스기야의 위기 극복 지혜를 배우자
1. 기도의 기회로 삼다.
2. 하나님의 구원 능력의 체험 기회로 삼다.
3.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의 전환 기회로 삼다.


 선용하는 지혜 (에디슨의 일화)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디슨은  그의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문을 특별하게 무겁게 해 놓고 산 일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에디슨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육중한 문을 열고 닫으면
  서 출입을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한번은 에디슨의 집에 자주 드나드는 방문객 한 사람이 문제의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이 문은 틀림없이 무거운 편인데 왜 발명왕인 에디슨씨가 수  리하든지 아니면 새 것으로 바꾸어 달지 않을까?"하고 의아심을 품게  되었습
  니다.

    그 사람은 에디슨과 만나서 대화를 하는 중에 적당한 기회를 보아서 문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는 에디슨에게 "이 댁의 문이 다른 집들의 문보다 좀 무거워서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쳐 주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디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님보고 자기를 따라 오라고 했습니다.

    에디슨은 그를 문 근처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장치된  설비를 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곳을 보니까 도르래와 줄들이 어지럽게  장치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모두 다 문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무엇일까 궁금해서 눈이 휘동그래져 있는 그 손님에게 에디슨은 설명했습니다.

    "어느 사람이든지 우리 집에 들어오는 사람은 다른 문보다 조금 무거운  문을 여닫고 들어오겠지만 그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펌프질을 해서 우리 집의 지붕에 있는 물 탱크에다  매번 출입할 때마다 1갤론의 물을 퍼부어  주
  는 것이지요."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모든 기회와 조건을 선용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
  각하십니까?

 

"세 가지 의문"

  줄거리는 한 임금이 인생에서 풀지 못한 세가지 의문의 답을 구하는 것이다.
첫째 의문은 모든 일에서 가장 적절한 시기는 언제일까? 
둘째 의문은 어떤 인물이 가장 중요한 존재일까?
세째 의문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왕은 국사를 행할때 항상 이 세가지 일로 결정을 내리는데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 과 신하들이 별의별 해답을 제시하였으나 임금의 마음을 흡족케 할 대답은 없었다.

  급기야 임금은 성인으로 잘알려진 산골의 은자를 찾아 갔다. 그러나 은자는 아무 대답없이 밭만 갈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숲속에서 한 청년이 피투성이의 몸으로 달려 나왔다. 임금은 자기의 옷을 찢어서 청년의 상처를 싸매주고 정성껏 간호를 해주었다. 알고보니 그 청년은 임금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젊은 신하였다. 비로소 그 청년은 임금의 간호에 감격하여 원한의 감정을 풀고 더 충성스런 신하가 되겠다 고 맹세했다.

  임금은 은자에게 세가지 의문에 대한 답을 구했다. 은자는 해답은 이미 나왔다고 대답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사람이 지배하고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지금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존재는 자신이 지금 대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지요.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일은 지금 대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여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세계의 명언 ( 기회 )
 윌터 크라이슬러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절대 출세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회가문을 두드
릴 때, 뒤뜰에 나가 네잎크로바를 찾기 때문이다.

 레기날드 맨셀
비관자는 자신의 기회에서 어려움을 만드는 자요,낙관자는자신의  어려움
속에서 기회를 만드는 자다.

 얼 나이팅게일
위험이 있는 곳에 기회가 있고, 기회있는 곳에 위험도 있다.
이 둘은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둘은 함께한다.

 프란시스 베이컨
사람은 기회를 발견해야 할 뿐만이 아니라 기회를만들기도 해야한다.

 아라비아 속담
네가지는 돌이킬 수 없다-뱉은 말, 쏜 화살,  과거생활,  그리고 게을리한
기회

 존 F.케네디
위기라는 말은 위험과 기회로 구성된 것이다.

 데모스테네스
드문 기회로 종종 위대한 일이 시작된다.

 무명
기회란 잘 잡으면 배가 된다. 그러나 그것에 태만하면 죽이게된다.

 알렉산더 그래햄 벧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우 리는 종종 닫힌문에  집
착한 나머지 우리를 위하 여 열려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


순교할 기회
    마 5:10-12
  이일언은 부모의 믿음을 본받아 돈독한 신앙생활을 하였다.1801년 천주교 박해 때 잡혀  옥에 갇혔다가 경상도로 귀양을 가서도 관리들에게 미움을 받았지만 그저 달게 여기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지냈다.  그의 유순하고도  화평한 태도에 그를 괴롭히던 관리들도 감동을 받아 나중에는 그를 자유로이 나가 살게 해주었다.
  1815년 그의 아내도 허락을 받아 전라도 임실군 태반으로 가서편히 지내려던 차에 1827년 다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는 아내에게 몸을 피하라고 권하였으나 듣지 않았는데 어느 날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가아내를 찾으러  산으로 갔더니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었다.
아내는 "전에는 순교할 기회를  잃고 귀양가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했는데, 이제는 이 같은 산골에 숨어 살며하나님께 생명을 바칠 기회가 없는 것이 슬퍼요"라고 말하였다.
  이 일이 있은지 사흘 후에 전주에서 포교들이 몰려와 두 내외를잡아갔다.  이일언은 몸이  작고 약해 보여 보잘것없었으나 믿음은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를 두고 형리들은 저희들끼리 말하기를"그 풍채와는 달리 딴판의 인물로 그야말로  천주학장이요.  저들의수두라"라고  감탄하였다.  두 내외는 같이 순교당했다.

 

시간을 잘 활용한 벤저민
  가난한 청교도 가정에서 출생.학교에 다닌 기간은  고작 1년.취미는 독서와 노동.어머니에게 배운 교훈은 성경 잠언 22장29절.소년은 장성해 미국철학회를 창설했고 초대 프랑스 대사에 임명됐다.그의 가장  큰  업적은 벼락의 피해를 예방하는 `피뢰침'을 발명한 것이었다.이 과학자의  이름은 벤저민 프랭클린.그는 인생을 가장 성공적으로 살다 간  인물로  평가되고있다.벤저민은 자신의 성공비결을 이렇게 설명했다.
  “내게는 `13대 덕목'이라는 귀한 자산이 있다.그것은 `절제 침묵  질서결단 절약 근면 진실 정의 중용 청결 침착  순결 겸손'이다.이것을 실천하 다보니 인생을 낭비할 수가 없었다”
  벤저민은 시간을 철저히 활용했다.또한 불필요한 일은 과감하게 끊는 결단력의 소유자였다.기회는 꽃잎 위에 앉아있는  나비와 같다.나비를 잡으려면 결단과 민첩한 행동이 필요하다.우유부단한 사람은 결코 나비를 잡을 수 없다.불성무물(不誠無物).성실함이 없으면 물질도 모이지 않는다.  /

 

시련은 기회다

1. 시련에 대한 부정적 태도
    1) 시련을 경솔히 여기지 말라
    2) 쉽게 낙심치 말라
    3) 악하게 생각지 말라
2. 시련에 대한 적극적 태도
    1) 시련은 인간을 연단시키고 교육을 받게 한다
    2) 시련은 삶을 격려한다
    3) 시련은 좋은 열매룰 맺게 한다
3. 시련의 결과
    1) 삶의 위험한 환상에서 돌이킴
    2) 삶의 깊은 차원을 보게 함
    3) 영적 힘을 공급해 줌


   실업, 위기인가? 기회인가? 
로버트 톰슨
              당신이 갑자기 직업을 잃게 되었을 때에는 당신이 누구이며  어디에 사는가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참담한 경험을 겪게 된다. 실직(失職) 즉시 당신은 신체적, 영적, 정서적 건강을 위협하는 온갖 종류의 감정과 문제들에 봉착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34세인 한 직장인이 그동안 근무해 오던 직장에서 어느 날 예산 삭감으로 인하여 다음 해에는 근무 계약이 갱신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저는 무척 놀랐고 충격을 받았죠. 처음에는 그저 얼떨떨했구요. 저희 집에 아이들이 있는데, 어떻게 생계를 꾸려 가야 할지 그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가정을 꾸려 나가는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그 직장인의 걱정은 장차 자신의 안정감을 위협하게 될 많은 문제들의 서막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는 실직당한 사람들이 당면하는 문제에는 경제적인 불확실성 외에도 또다른 많은 어려움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가 처음 다른 직장을 찾기 시작했을 때에는 다른 직업을 찾는 데 대해서 대단히 낙관적으로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면접을 거치고 고통스런 실패를 거듭한 후에는 패배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과연 어떤 직장에라도 들어갈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웠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 역시 직장을 잃었다는 그 자체는 오히려 그 후에 따라오는 일련의 충격 가운데 첫째 증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실직을 당한 사람은 최초의 충격과 더불어 항존(恒存)하는 경제적 불안에다가, 몇 주간이나 몇 개월이 지나면서부턴 점차 자신이 쓸모 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빠져 들기 쉽다. 더 이상 아침에 일어나야 할 이유조차 없어진다. 이제는 돈도 벌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이력서를  제출했던 회사들로부터는 다른 사람이 채용됐다는 소식을 계속 듣는다. 따라서 당신은 당신이 처한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는데서 오는 무력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모든 요인들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조차 신체적, 정서적, 영적 스트레스를 야기시킨다.

생활 방식이 크게 변하게 되면 항상 새로운 문제들과 대단한 불안감이 따라온다. 실업으로 인한 생활의 변화도 예외가  아니다. 이 특정한 문제의 해결책은 물론 직업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직업을 얻을  때까지는 이와 같은 감정들과 불안감에 대처해야만 한다. 만약 이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 결과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심히 어려워지고, 당신 자신이나 가족들과  더불어 사는 것 역시 대단히 힘들게 될 것이며, 자기의 가치감마저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실업을 경험해 본 사람마다 각기 독특한 면이 있기 마련이지만 모든 실업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다함께 이런 감정과 그들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려고 전략을 개발했다. 그 결과 그들이  발견한 사실은 기독교 신앙이 실업상태에서 가장 큰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살아 역사 하는 믿음

거처가 보장되어 있고, 창고에 음식이  비축되어 있으며, 저축 통장이  손에 들려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관해 이야기하기가 쉽다. 그러나 역경 속에서 우리를 지탱해 주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사람들은 안정감을 잃어버릴 때에 믿음 역시 잃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일이 빈번히 발생하는 이유는, 믿음을 감정과 혼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은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정서적인 어떤 느낌도 아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히11:1)." 믿음은 곧 신뢰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보일 때 조차도 하나님이 항상 살아 계심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다. 일이 아무리 악화되더라도, 실직 상태가 아무리 오래 지속되더라도, 또한 아무리 마음이 상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시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할 것임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을 당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으로 이끌어 주실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물론 믿음은 모든 것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될 것임을 확신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과 함께 일하셔서 모든 것을 선하게 해 주심을 확신하는 것이다(롬8:28). 물론 하나님은 당신에게 고통이 임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당신이 실직하는 것도 원치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일하셔서 모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도록 도울 것이다. 당신이 어떤 고통을 느끼든지, 어떤 슬픔을 당하든지, 혹은 어 치명적 상처를 입든지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나누어 지신다. 믿음은, 어떤 상에서든지 우리의 신실한 동반자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지만 믿음은 단지 '신뢰'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믿음은 또한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狀:실제의 상황)"이다. 믿음은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인 희망이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행하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당신이 직업을 잃었을 때에는 여기저기 알아 보고 광고난 곳을 찾아가는 등 새로운 직장을 찾는 데 최대한으로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이 희망찬 믿음을 보여 주는 모습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내 친구의  아들이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다. 그런데 만약 내 친구 부부가 아들의 건강 문제를 그저 슬퍼하기만 하고 그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들이  그저 울적해진 채  "우리 아들이 낫길 희망한다네" 하고 말만 한다면 그들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희망은 과연 무엇인가? 그런 류의 희망은 너무 수동적이라서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한다. 그러나 내 친구 부부는 아들을 위해 최고의 치료법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치료에 힘썼다. 그 결과 감사하게도 그 아들은 많이 회복되었다. 그들의 희망은 능동적이었던 것이다. 능동적인 희망은 어떤 결과를 낳게 마련이다. 믿음은 바로 이런 능동적인 희망을 의미한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계심을 신뢰하라. 그리고 사태가 변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또 그 희망이 능동적인 것이 되도록 하라. 사랑의 순종을 택함으로써, 범사에 예수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순응하는 신실한 삶을 살라.

믿음을 통하여 똑바른 삶을 사는 것은 우리가  기적적으로, 혹은 하룻밤 사이에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그것은 순례의 길이며, 재충전과 휴식이 필요한 긴 여정이다. 그리고 기도가 바로 이런 필요들을 채워 준다. 신뢰와  희망과 순종을 통해 우리는 어려운 때에 도움을 청하러 하나님께 나아간다. 실직 당했을 때와 같은 경우엔 정서적 스트레스로 인해 그 어려움이 더 크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믿음을 통해 우리는, 아무도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고, 우리가 무력하게 느껴질 때에도 하나님의 강한 능력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아무도 나를 원치 않는가?

우리 모두는 누구에겐가로부터 거부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 가고 있다.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인간관계에는 거부당할 가능성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때에 따라  친구, 가족 혹은 동역자로부터 거부당하는 쓰라림을 겪게 된다. 고용주로부터 거부 당하는 것 역시 고통스런 경험이다. 판매 사원으로 일하다가 실직당한 한 직장인은 이렇게 말한다. "제 상관이 저를 불러다가 회사의 경제 사정으로 인해 저를 해고 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속이 메스꺼워지는 걸  느꼈습니다. 저는 제 상관이  마치 '당신 같은 사람은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없어' 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대부분의 실직자들은 이런 식으로 거부당하기 시작한다. 해고 통고에는 쓰라린 고통이 수반된다.

그러나 거부당할 위협은 당신의 고용주 이외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기도 한다. 해고 통고를 받은 이후 갑자기 온갖 걱정거리가 마음에 휘몰아친다. 가족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친구들은 뭐라고 말할까? 교회 사람들이나 공동체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이야기 하지?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근심은 거부가 연이어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모든 근심은 당신이 신문의 구인 광고를 뚫어지게 살피고, 이력서를 보내고 입사 원서를 써 내며, 수 많은 면접을 거침에 따라 더욱 심화되어 간다. 당신이 어떤 직장에 원서를 제출했는데도 응답이 없거나 거절 통지를 받을 때마다 거부당하는 느낌은 더 증대되기 마련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셈이지? 내가 할 수 있는 걸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인가?"

거부라는 독소에 대비할 수 있는 간단한 해독제는 없다. 거부는 오히려 감수해야만 하는 경험이다. 만약 당신이 경제적 불황으로 인하여 실직당했다면, 당신의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유익하다. 만약 당신이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실직당했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용서하시는 것 처럼 당신 역시 자신을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을 알라. 
그러나 당신이 거부당한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미 과거지사임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엎질러진 물, 엎질러진 물이다. 자칫하면 '만약 그때 내가 이러저러  했더라면…' 하는 식으로  '만약에 병'에 걸리기  십상이다. "만약 내가 그 일을 다르게 처리하기만 했다면 해고당하지는 않았을텐데"  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나간 과거를 되돌려 놓을 수 없다.

거부당하는 것에 대한  최선의 방책은  '당신을 염려하는 사람들에게로' 도망가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기회만 준다면  가족과 친구들, 교인들과 목사님은 당신을 도와 줄 것이다. 그들은 당신이  실직했다고 해서, 혹은 당신이 원하듯이 속히 직장을 구하지 못한다고 해서 당신을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야기하라. 당신의 심정과 두려워하는 바를 이야기하라. 이것이 치유에 이르는 첫 단계이다. 지금이야말로 과거 어느 때보다도 그 관계들로부터 오는 강한 유대감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시간이 흐르면  거부당한 상처는 아물 것이다. 당신을 염려해 주는 사람들에게 매달림으로써 당신은 그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치유의 손길을 맛보게 될 것이다.

난 무력감에 빠져 버렸어

거부당했다는 느낌이 실직 직후 우리의 자기 가치감을 위협하는 즉각적인 경험이라면, 무력감(無力感)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계속되는 적이다.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당신의 능력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다.

당신이 직업을 잃으면, 당신의 정서적 물직적 능력의 기반이 없어지고 만다. 즉 무엇인가를 할 힘을 잃는 것이다. 결국 아무리 적은 임금이라 할지라도 돈은 힘(구매력)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할 이유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힘(목적을 제공하는 힘)이고, 당신의 직업에 의존해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서도  힘(영향력)이다.

그러나, 당신은 이런 무력감을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것을 최소화할 수는 있다. 첫째 단계는, 이미 발생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실직은 생애 중에 일어나는 바,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여러 사건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어떤 일은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또 어떤 일은 우리가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도무지 어찌해 볼 수 없는 현실에 봉착했을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책은 그 문제에 우리 자신을 적응시키는 것이고 그 속에서 자유로이 행동하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당신이 로스앤젤레스발 시카고행  비행기를 타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당신은 시카고 도착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다 갖추었다. 표도 예매해서 구입했고 비행기에도 탑승했다. 그러나 당신이 탄 비행기가 착륙할 수 없다고 방송을 했다 하자. 당신은 그날 밤 시카고에서 해야 할 큰 계획이 있을 수도 있다. 이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당신의 통제를 넘어선 어떤 일이 벌어져 예기치 않았던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때는 발생한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비행기가 안착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머무는 도리밖에 더 있겠는가?

일단 당신이 그 상황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날 밤을 다른 곳에서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 당신의 계획은 변했지만, 당신은 로스앤젤레스에서 비행기에 탑승할 때와  똑같은 그 사람이다. 즉 당신이 조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당신이 그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 현명하다.

당신이 직업을 잃고 무력감을 경험할 때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처음 며칠, 몇 주 동안 어떻게 지낼  것인지 단기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 당신은 개인적인 능력을 재생시킬 수도 있다. 당신은 장래 계획을 세우기 위하여 장래가 어떻게 될지 반드시 알아야 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구직(求職) 전략을 상세히 세우기 시작할 수 있다. 이제 당신은 지금까지 시간이 없어서 못했던 일을 할 수도 있다
- 책을 지정해서 읽거나 쓰는 일, 지하실을 개조하는 일 등. 당신의 단기 계획이 어떻든 간에 자신에게 함몰되는 시간을 가급적 줄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당신은 상당한 정도로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다. 당신이 융통성있게 현실적으로 하면 당신에게 어떤 일을 해 낼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이 있음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고용주도 당신 위에 군림하여 궁극적인 권위를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오직 하나님께만 그 권리가 있다. 당신의 삶에 불가피한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테두리 속에서 당신은 상당한 개인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메뚜기 자화상

당신이 직업을 잃게 되면 마치 당신 앞에 거대한 장애물이 버티고 있어 장래를 암담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실직을 당하게 되면 지금까지 살아 오던 생활 방식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장애물이 또한 기회가 된다'는 진리를 항상 믿어 온 바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된 땅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때를 상기해 보라. 열 두명의 정탐꾼중 열 명은 약속된 땅에 들어가는 길목에서 엄청난 장애물에 직면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민13:27-28,33)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역시 장애물에 부닥치면 도무지 극복할 수 없게 보인 나머지 스스로 왜소함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거대한 장애물은 굉장한 기회가 가장(假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하나님을 신뢰했고 그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실직을 통해 당신은 자기 발견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실직은 당신의 오랜 친구, 바로 당신 자신과 다시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시간을 내어 하고 싶은 것을 하라. 당신이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라. 무료로 할 수 있는 것이나, 혹은 돈이  별로 들지 않는 것들을 즐기라(박물관  관람, 무료강좌, 외국문화원에서 상영하는 영화 등). 이와 동시에 실직은 가족을 재발견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주당 40시간  이상을 일할 때에는, 종종 피로에 지치거나 일에 몰두한 나머지 가족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직업이 없을 때 가정에서 가족간의 유대를 더 강화시킬 수 있지 않은가?

실직으로 말미암는 가장 큰 결과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자기 내면 속으로 파고 들어 자기 문제와 괴로움에만 눈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내성화(內省化) 경향은 삶과 믿음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런 때에 당신은 당신이 속한 공동체나 교회에서 주당 몇 시간씩 자원 봉사자로 일함으로써 이런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다 보면 당신 자신의 문제로부터 감정상 거리를 둘 수 있다. 또한 이뿐만 아니라 당신은 '자아 집착증'으로부터 해방되어, 임박한 문제를 초월하여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데 이르게 된다. 아울러 자원 봉사가 기회가 되어 직업을 알선받을 수도 있게 된다.

끝으로, 실직으로 인하여 우리는 귀중한  진리, 즉 궁극적으로 우리의 존재는 우리가 버는 돈이나 우리의 직업, 축적된 재산, 혹은 우리의 실적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직업을 잃게  될 때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진정한 소명인 것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에게 직업이 있든 없든 우리의 삶은 하나의 선물이다. 오직 이러한 깨달음이 있을 때에 수많은 장애물은 비로소 실질적인 유익으로 변화될 것이다.

전천후 보배

이처럼 실직은 우리에게 있어 그 자체가 하나의 큰 아픔과 위기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다. 당신은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똑바른  삶을 살고,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힘을 얻으며, 또한 제한된 자원과 과도기적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함으로써 장차 당신을 지탱시켜주고 고난을 극복케 할 귀한 교훈을 배우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당신은 믿음으로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물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헤아릴 수 없는 능력이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눌리지  않고 당황하는 일이 있어도 아주 실망하는 일이 없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순간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고후 4:7-8,16.18)

보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서로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닌가? 우리가 맺는 관계는 영원한 속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 철저히 매달리라. 이 관계들은 실로 어려운  때에 당신을 보살펴 줄 참 보배인 것이다.

실직을 당하여 그처럼 많은 불확실성과 스트레스, 그리고 긴장에 시달리는 것은 힘든 경험이다. 그래서 자기 가치감을 상실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직업이 없어도 당신을 사랑하신다. 그리고 당신의 친구들과 가족들 역시 직업의 유무를 막론하고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의 직업은 한 인격체로서의 당신의 가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의 일원으로서 하나의 인격체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명심하라.

※ 이 글은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에서 펴낸 소책자「실업, 위기인가? 기회인가?」를 승인을 얻어 발췌요약한 것입니다. 허락해 주신 IVP측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글의 전문(全文)을 읽기 원하시는 분은 전국 기독교서점에서 책자를 구하실 수 있습니다.

 

아이대신 줄서주는 부모님
지난 어린이날 모처럼 놀이동산에 갔다. 예상했던대로 많은 인파로 붐볐지만 아이들이 질서를 지켜가며 스스로 즐기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기이한 현상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 줄서주기다.
자신의 아이 가 한 놀이기구를 타는 동안 부모 중 한 사람이 다른 놀이기구 앞에서 가서 줄을 선다. 아이는 한 놀이기구를 탄 뒤 미리 줄서고 있던 부모의 자리에 들어가 오래 기다리지 않고 다음 놀이기구를 즐기는 것이다. 이 기발한 아이디어 덕분에 영리한(?) 부모를 둔 아이들은 복잡한 인파 속에서도 다른 아이들보다 더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부모의 약삭빠름으로 인해 혜택받는 아이들은 세상의 이치를 어떻게 생각하게 될 것인가. 부모가 대신 줄을 섰으면 떳떳하게 새치기해도 된다고 여길 것 아닌가. 부모와 함께 오지 못한 아이들이 받는 상대적 박탈감은 어찌해야 할까. 내 아이만 편하 게 즐기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결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

요즘 학교교육에 대한 국민들의 걱정이 많다. 그러나 학교에서 아무리 공공질서를 가르친들, 부모의 이런 참담한 요령주의가 그나마 쌓 아올린 학교교육의 성과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린다. 바른 교육은 열번 스무번 반복하고 여러 상황에서 훈련되고 내면화해 어른이 되기 전에 확실한 신념이 실생활에서 몸에 배어야 한다. 학교교육에 대한 걱정 못지않게 우리 가정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이스콘」이 생긴 유래
 1904년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 한 행상이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아이스크림은 접시에 담아 먹는 간식이었다. 아이스크림은 불티나게 팔렸고 얼마 안 있어 아이스크림은 있는데 접시가 동이 났다.
   상인은 쩔쩔 매다가 옆에서 파는 「페르시아 워플」(얇은과자)을 보고 그 과자에 아이스크림을 담아 팔았다.
   그날 「과자에 감긴 아이스크림」은일약 「대히트 상품」이 되었다. 이것이 요즘의 아이스콘의 시초다.
   위기는 기회다.


 아펜젤라
   1902년 아펜젤라는 목포 근해에서 선박충돌사고가  났을 때  이화학당 학
생 2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는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44세
라는 장래가 창창한 나이에 사랑의 제물이  되었다.
    배재학당훈인 "욕위대자 당위인역" (欲爲大者 堂爲人役) 은   아펜젤라가
만들고 조한규씨가 한역한 것인데 위대한 사람이 되려면  인간을 섬기는 사람
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암  표  교  인     
   암표를 가지고 영화 구경을 한 적이 있다.  암표가 성행한다는 말은 흔히 들어왔지만 막상 암표 신세를 지고보니 착잡한 생각이 교차되었다.   퍽 편리한 존재 같기도 하다.   수십명 수백명이 늘어선 그 길목에  섞여  초라한 내 꼴이 보이지 않아도 된다.   일에 바쁘고 시달리는 직업인들에겐 시간을 절감 시켜 주는 것이다.   
  "입장료 + 수수료 = 암표" 이렇게 구성되어 있는데 수수료의 정체가 문제다.   암표상이 부르는 값이 곧 정가가 된다.   대체로 값의 30% 내지  80% 영화에 따라서는 그 배 또는 배 반의 수수료를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대개 아낙네들이라 극장앞 뿐 아니라 명절이나 주말의 역전  버스정류장 주변에도 널려있다.    경찰,철도청 등은 이 암표상들을 쓸어  버리려고 무척 애를 태우지만 좀체로 사라지지 않는다.

  암표의 수요가 있으니까 공급자가 생기는 탓일까?

  나는 우리 사회가 바로 암표 사회가 아닌가 우려해 본다.   줄짓지  않고 옆치기로 들어가려는 백성들, 윗전 몇푼 예사로 여기는 낭비벽 환자들,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아는 황금 만능주의, 체면 때문에 민중들 틈에  낑기를 꺼리는 족속들, 계획없이 불쑥 나타나서 남이 차지할 자리를 마수해  버리는 기회주의자들, 교회안에는 이런 암표교인(교역자)은 없을까?
  예배에의 참여, 희생적인 봉사, 줄을 서서 기다리듯 꾸준한 기도의  제물없이 그 나라 구경하겠다고 나서는 교인은 없을까?      연보만 많이  내면 속죄가 된다고 생각하는 신도는 없을까?    극장구경은 가능할지는 몰라도 천국구경은 암표가지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을 영화광고를 볼 때마다 나의 경우를 놓고  곰곰히 생각해 본다.
              

약점이 기회로
    이탈리아의 유명한 오케스트라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어려서부터 가까운 거리에 있는 글씨를 전혀 볼 수가 없는 악성 원시안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토스카니니의 생각은 달랐다. 소경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데 자기는 볼 수 있느니 얼마나 감사한가 하는 마음을 늘 갖고 있었다. 그는 책을 보지 않고도  음악 공부를 하는 방법을 늘 생각햇다. 그러던 그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어머니에게 악보를 읽어 달라고 하고 자기는 그 악보를   모조리 외워버리면 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날부터 당장 실천에 옮겼다. 토스카니니는 모든 악보를 다 외워버렸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그는 드디어 오케스트라의  일원이 되었다.
    어느 날 대연주회가 있는데 지휘자가 독성감기로 인하여 그만 나올 수가 없게 되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휘자가 되려면 악보를 다 외워야만 하는데 악보를   다 외우고 있는 사람은 단원중에 코스카니니 한 사람뿐이었다.
    사람들의 권유로 토스카니니는 지휘자가 되어 지휘석에 섰다. 생각 외로 지휘가 잘 되엇고, 관중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 이후부터 그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활약을 했고 급기야는 세계적인 명 지휘자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영접의 기회
      모스크바의 한 출판사에 헙수룩한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의 원고를 책으로 내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출판사 주인은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런 원고는 얼마든지 굴러 다니고 있고 비록 그 사람이 출판비용을 다 부담한다해도 맡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그 헙수룩한 사람은 원고 뭉치를 품에 넣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대중이 나의 글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썼는데요."  이상스러운 말에 놀란 주인이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요"라고 묻자 그는,
  "내 이름은 톨스토이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에 기절할 듯이 의자에서 뛰어 일어난 주인은 급히 사과를 하며 원고를 부탁했으나 톨스토이는 그냥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위기극복
 저는 조그만 자동 지렛대가 8톤짜리 트럭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도 손으로 지렛대를 흔들때 마다 트럭일 위로 올라 갑니다. 여러분 내
힘으로는 안됩니다만 하나님의 힘을 빌리면 위기는 정복됩니다. 위기는 곧 
기회일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우리 앞에 있는  장애물을 능히
헤치고 넘어갑시다.


위기는 기회
 제2차 세계대전 중 있었던 이야기 하나.영국의 크레이턴 메이브램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됐다.부대원들이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져 절망하고 있을 때 장군은 『이제 우리가 전쟁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사방을 공격해 한꺼번에 적군을 섬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자,사방을 향해 나아가자』라고 외치며 진두지휘했다.그러자 부대원들이 용기를 얻고 전투에 임해 결국 승리할 수 있었다.위기가 사방에 있다는 것은 한
꺼번에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럴 땐 오히려
도망치고 싶을 때 -- 오히려 의연하게 그 자리를 지키는 것

화를 내고 싶을 때-- 오히려 조용히 숫자를 열까지 세어 보는것

곤란한 일을 당했을 때--오히려 얼굴에 미소를 짓는 것

미움이 싹틀 때-- 오히려 사랑의 씨앗을 마음에 뿌리는 것

기회에 숨어있는 문제가 보일 때--오히려 문제에 감춰져있는 기회를 보는것

실패했을 때--오히려 그것이 안되는 이치를 발견했다고 여기는 것

 

인생의 두 가지 유형
미국의 신문기자로서 20세기 후반 40년 동안 기자생활을 한 필립 옌씨라고 하는 분이 있다. 40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무려 8천여 명의 유명한 사람들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인터뮤 끝에 그가 깨달은 바가 있었다.이것을 뒷날 회고록에 쓰게 되는데, 그는 인생에 분명히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술회했다. 그 하나는 Star형이요, 또 하나는 Rervant형이다.
    스타형에 속하는 유형은 껍데기뿐이라고 한다. 기회만 있으면 그저 자기자랑만 한다. 자기 선전만 하며 저 잘났다는 사람이다. 그런 자기를 선전해 달라고 하는데 기자로서 볼때에 볼 것도 없더라고 했다. 쓸것도 못되는 사람들이 주로 이렇게 계속 자기자랑만 한다고 한다. 요새 사람들이 거의가 젊은 아이들까지 그저 스타가 되려고 기를 쓴다지 않는가? 병든 사회이다.
    두번째 종형은 인터뷰를 해보면 그저 어떻게든 섬기려는 자세를 보인다고 한다.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 기쁘게 하고, 다른 사람 이롭게 하고, 사과가 둘 있으면 큰 것은 남 먹도록 하고.... 어째든 기회만 있으면 섬기려는,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산다고 한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종의 유형인 사람은 대체로 보아서 소득은 적고, 그리고 오랜 시간 일을 해야 되고,그리고 박수갈채도 없었다고 한다. "Low Pay, Low Hours, Low Applause."라고 붙인 그 회고록 제목 그대로가 참다운 인생의 길이라고 그는 말한다.
    여러분의 인생은 어떤 유형인가?

자녀들의 질문
어느 교육가의 말에 따르면 아이들은 태어나서 15살이 될 때까지 약 50만번정도 부모에게 질문을 한다고 한다.
   "이것을 뭐죠?" "왜 그런가요?" 자꾸만 질문을 하는데 이이들을 교육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사람으로 키우는 기회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이다.
 "쓸데없는 것을 왜 묻니?" "귀찮으니 저리 가!" 이런 부모는 아닌가?


잠시 등불을 꺼보세요
   낚시꾼을 가득 실은 배 한대가 그만 폭풍을 만나 바다 한가운데서 고장이 나고 말았습니다. 기관도 부서져 버리고 점점 날이 어두워지며 칠흙같은 밤이 다가오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쌓였습니다.

   그때 누군가 더 어두워지기 전에 등불을 켜자고 하여서 비상등불을 찾아 불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배를 움직이기 위해 노를 찾아냈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이제 살 수 있을 것 이라는 희망에 넘쳤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알 수 없었습니다.어느쪽으로 가야 육지이고 바다 인지알수가 없었습니다.다시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나서서 등불을 끄자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말도 안된다며,등불이라도 켜 놓아야 혹시 구조대가 발견할수 있을지도 모르고 방향을 찾지 않겠느냐고 반대하였습니다.

    등불을 끄자고 주장했던 사람이 등불을 스스로 꺼버렸습니다. 배 안에는 고요가 넘쳤고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한사람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불빛이 보인다! 육지의 불빛이 보인다! 우리는 살았다!"

   등불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육지의 반딧불같은 불빛이 주위가 어두워지자 보인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위기를 만났을때 그 위기를 우리는 어떻게 넘기는지...위기는 위험+기회 라는 말이 있습니다. 잠시 등불을 꺼보세요!

 

"제2의 인생"설 기회·
 한국소니전자, 새 감원프로그램 '라이프 플랜'
마산 수출 자유지역내  한국소니전자<주>가 직원에게 자신을 재발견할 수 있는 교육을 통해  명예롭게 직장을  떠날 수 있도록 하는  '라이프 플랜 (Life Plan)'이란 새로운 감원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해 눈길을 끌고 있다.
라이프 플랜이란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과장급 이상을 대상으로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퇴직을 결정해, 제2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도록 하는 한국소니전 자 특유의 교육 프로그램. 따라서 라이프 플랜은 자신의 경력 능력 특성을 새 롭게 분석해, 이를 바탕으로 지금이 인생전환의 적기라는 점을  인식하도록 하 는 교육이 병해된다.  10일 한국소니전자는 올해부터 라이프 플랜  프로그램을 도입, 퇴직신청자에  한해서는 퇴직금외에 16개월분의 월급을 미리 지급하고 본인이 필요로 하는 새로운 사업정보도 제공해 주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소니 전자 관계자는 "라이프 플랜을 도입한 결과 직원들의 호응이 좋아 40명이 퇴직 했으며, 퇴직을 희망하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감원제도는 아니다"고 강조했다.

 죽음도 피해간 「지혜」
옛날 왕을 즐겁게 해주는  광대가 있었다.늘 왕의 총애를 받던 이광대가어느날  큰 실수를 저질러 처형
을 당하게 되었다.그동안의 「공적」을 인정한 왕은 『당장 처형해야 하나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
이 모래시계의 모래가  밑으로 다 떨어질  때까지  어떻게 죽고 싶은지금방법을 선택하라』고 말했다.모
래가 밑으로  다 떨어진 다음 왕은광대에게「죽음의  방법」을  물었다.그러자 광대는 이렇게 말해 죽음을
모면했다.
『미천한 저에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저는 늙어 죽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기회
"성공의 커다란 비결은, 당신의 기회가 도래한 때, 당신에게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줄을 풀어 놓으시오
우리 모두는 긴장을 풀고 쉬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는 긴 전도 여행에서 돌아와 지쳐 있는 열 두 제자들에게 시간을  따로 내서 쉬게 하신 우리 주님을 미루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여러 가지 시간을 절약하는 문명의 이기나 수단이 사람에게 쉴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좀처럼 시간을 따로 내어 쉬지를 못합니다.
 그리스에 전해 내려오는 얘기를 보면, 옛날 아테네에서 저 유명한 이솝 우화의 이솝 선생이 어린 아이들과 같이 유치한 장난을 하며 노는 것을 어떤 사람이 보았습니다. 
 이솝 선생의 점잖지 못한  거동을 그 사람은  비웃고 조롱을 했습니다. 
이솝 선생은 그사람의 건방진 태도에 대꾸하는 대신, 현악기를 연주할 때 쓰는 활을 집어 들고는 그 활줄을 느슨하게  풀어 땅 바닥에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비웃는 구경꾼에게 "자,이 수수께끼를 풀수 있으면 풀어 보시지. 이 느슨해진 활이 무엇을 뜻하는지?"라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그 활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솝 선생이 설명하여 말하기를, "계속 활줄을 팽팽하게 매어 놓으면 끝내 그 활은 부러지고야 만다네. 
그러나, 활줄을 늦추어 놓으면 다음번에 악기를 연주하려 할 때 더 잘 쓸 수 있을 것이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도 이와 같습니다. 
 휴식을 취할 시간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거기 있는 것입니다.
 삶의 팽팽한 활 같은  긴장을 늦추게끔 하나님께서도 "모은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습니다"(창2:3).
 우리도 하나님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매일 시간을 따로내어좀 쉬고, 원기를 새롭게 하도록  해 봅시다.
 잠시도 쉬지 않는다면, 주님을 위해 당신의 최선을 실행하기가  어렵습니다.  휴식은 다음의 일을 위한 에너지의 충전 기회입니다.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시 쉬어라 하시니..."(막6:30-31)


지금이 선교의 호기입니다
"인도네시아는 지금이야말로 선교하기 좋은 기회입니다. 물론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저는
호기라고 생각합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선교사들이 떠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때문입니다"

지난 15일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아태연맹총회 참석차 귀국한 백광현 선교사는 인도네시아 사태가 선교에 미친 영향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산업체 선교에 대한 밝은 비전을 제시했다.

인도네시아에서 기독교 선교사가 활동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올초까지 65개의 교회가 있었지만 이번 사태로 수많은 교회가 문을 내렸다. 인도네시아는 다섯 개의 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만 유독 기독교가 부흥하기만 하면 압력을 가하고 있다. 경제 위기의 여파가 교인들에게도 미쳐 많은 교인들이 실직을 당하자 교회는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강조하고 실직자들을 돕는 기금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일어난 일이지만 반정부운동을 실시하는 민중들이 반기독교 정서를 갖고 있어 지난 2년간 약 3백여 개의 교회를 불태우고 교인들을 핍박하고 있다. 97년 2월 핍박은 더욱 가중됐고, 한가족을 완전히 불태워버린 경우도 있다.
이와 관련,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혹시 교회가 현 수하르토 정권을 옹호하는 것 때문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백선교사는 “물론 현재 민중들의 요청과 같이 수하르토 대통령이 물러나고 강성 이슬람 지도자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기독교가 더욱 박해를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정치적인 문제보다는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부유한 층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백선교사는 선교활동의 어려움에 대해 우선 비자 유지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현재 인도네시아 정부의 정책이 외국인들을 밖으로 밀어내는 정책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선교사들 중 제일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기독교선교사들이 첫번째 추방대상이 되고 있다. 백선교사 역시 선교사가 아닌 학생비자로 활동 중에 있다.

백선교사는 여러 가지 어려움 중에서도 2천명 이상되는 기독교인들은 기도체인망을 형성해 꾸준히 기도하고 있으며, 교회가 불타는 바람에 공공회관을 빌려 10부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인도네시아 루피화가 많이 떨어져 선교사들이 땅을 구입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시기”라며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선교사들은 이번 기회에 땅을 구입해 교회를 개척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또한 경제위기로 실직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 마음에 평화를 되찾도록 돕고 있다고 말했다.

백선교사는 앞으로 산업체 선교에 주력할 계획이다. 현재 한국의 생산관리자들이 인도네시아에 많이 있고, 또한 한국인 회사에 수많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선교사는 바로 산업체에 있는 이들을 전도의 대상자로 삼고 선교를 펼칠 예정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백선교사의 전도로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백선교사가 담임하고 있는 믿음교회에는 매주일마다 70여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인도네시아 소요를 피해 떠나지만 끝가지 남아서 복음을 전파하겠다”은 백선교사는 “이 모든 어려움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있게 말했다. 백선교사는 인도네시아 사태로 인해 안식년을 한달만 사용키로 하고 내달 중순에 다시 돌아갈 예정이다.


교육기회균등에 위배
  공급자중심에서 소비자중심으로 바뀐 교육개혁안은 대체로 잘 정리돼  있다. [국민학교 입학연령 탄력적  운영]은 문제가 많다. 교육의 기본정신에 위배되며 5세 아동의 발달적 특징에도 맞지 않는다.
  능력검사와 면접에 의해  수학능력이 있다고 판정받으면 취학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은 곧 선별에  의한 취학으로 교육 기회균등의 원칙에 어긋난다.  학교 수용능력 범위내에서 취학이 가능하다는 부분도 형평성이 결여돼 있다.
  농어촌에서는 소정의  검사를 통과하면 모든 아동이  입학할 수 있는  반면, 학교 수용범위가 적은 도시지역은 일부 아동들에게만 입학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아동을 대상으로 능력검사가 부작용을 일으킬 소지가 많다는 점이다. 능력이란 단순히 공부를 따라갈 수 있는 실력을 뜻하지 않는다. 지적능력 외에도, 수학능력에는 다른 사람과 함께 더불어 생활하는 자세, 다른 사람의 아픈 점을 고려해주는 이해심, 정서적 안정 등이 포함된다. 이를 고려치 않은 능력검사는 과외를 부추길 뿐이다. 사립국교가 IQ시험을 보던 60년대처럼 유치원에서 다시 시험공부를 할것이다.
  이런 발상 대신 유치원의 공교육화를 확대해야 한다. 그리고 교개위는  빠른 시일내에 취학연령 하향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밝혀야 한다. 그래야 학부모들의 혼란을 막을 수 있다.
 

약속도 기회를 잃으면 …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여행중 한 시골집에 들렀는데 그 집에서 나이 어린 한 소녀를 만나게 됐다. 소녀는 그가 허리에 차고 있는 가죽가방이 부러워 칭얼대며 엄마에게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톨스토이는 다음날 다시 오겠노라며 그 집을 떠났다.
울며 보채는 소녀에게 자기의 가방을 선물하기 위해서였다.가방 속엔 문서와 각종 여행용품이 들어있기 때문에 당장 줄 수는 없었다. 다음날 톨스토이는 약속대로 빈 가방을 들고 그 집을 찾아갔다.하지만 그 소녀는 지난밤 세상을 떠난 뒤였다.결국 톨스토이는 그 소녀의 관 곁에 가방을 놓아둔 채 그 곳을 떠나야 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것이 크든 작든, 그리고 누구와의 약속이든 지켜야 한다. 작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큰 약속도 지키지 못한다. 또한 만사에는 기회가 있다.그 기회가 지나간 다음엔 약속된 행위도 별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공약의 남발이 춤추는 계절이 다가온다. 제발 이번에는 거짓말쟁이들의 무도회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기회를 놓치지 말라
본문: 갈6:10, *찬송:493장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믿음의 가정
들에게 할지니라'

스티븐 그렛은 프랑스 태생의 독실한 신앙인으로 1855년 미국의 한 마을에서 죽었다. 만일 그렛이 생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지 않았다면 세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명언을 남김으로써 오늘날까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 세상을 한 번만 지나가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선행, 혹은 그 어떤 친절도 미루지 않고 당장 실천하겠다. 왜냐하면 나는 다시는 이 길을 지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기회를 사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과거를 돌아보거나 미래의 꿈만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최대한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아무도 시간을 멈출 수 없고, 훗날을 위해 보관해 둘 수도 없으며 자기가 원하는 만큼 늘릴 수도 없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독수리 한 마리가 나이아가라 폭포쪽으로 떠내려가는 얼음덩이 위에 앉아 죽은 물고기를 건져 먹고 있었다. 얼음덩이가 폭포에 가까워 거의 떨어지려 할 때 독수리는 훌쩍 날으려고 했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 새 발이 얼음에 얼어붙은 것이다.
범사에 때가 있다고 했다.(전3:1) 기회가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자. 아직 복음이 전해지고 있고 전도자가 외치며 성령의 역사가 있을 이 때에 주님을 만나야 한다. 기회가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자. 젊음과 정열과 총명이 있고 건강이 있을 때에 주님 섬기는 것을 배우자. 기회가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복음을 향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열려 있을 때에 최선을 다해 그분을 전하자. 때가 악할수록 세월을 아끼고 더욱 기도해야 한다.(엡5:16)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눅12:40)

 

실패와 기회
본문: 시 119: 71 어떤 사람이 링컨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링컨은 "제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 은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야구왕 베이브 루스는 생전에 714개의 홈런을 날렸습니다. 1976년까지는 그가 최 고의 홈런 보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1,330개의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했습니다. 뼈아픈 일이 있은 후 영광도 오는 것입니다. 실패 없는 성공이란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불행한 일입니다. 참된 성공 은 실패로부터 얻어집니다. 실패를 맛본다는 것은 아픔을 맛본다는 것입니다. 우 리는 실패를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실패자라는 말을 가장 싫어합니다. 사실 실패 의 잔을 마셔본 사람은 압니다. 실패한 사람들은 실패의 잔이 얼마나 쓰다는 것을 압니다. 실패하면 단순히 물질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면 평소에 가까이 했던 사람들마저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외로움과 쓸쓸함이 찾아옵니 다. 나는 어린 시절에 아버님이 하시던 사업이 실패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실패 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배웠습니다. 잘될 때 찾아오던 친척들이 아버 님의 실패 후에는 발길을 끊었습니다. 실패한 후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무허가 집 으로 이주하던 날을 나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런 경험은 결코 나만의 경험은 아 닙니다. 우리는 가난과 고난을 통과한 민족입니다. 전쟁을 경험했고 혹독한 경제위기를 통과했습니다. 아직도 낙관할 수 없는 경제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 민족적인 위기를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심중에는 집단적인 두려움과 공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 내면의 불안 때문에 우리 민족은 어느 민족보다도 성공에 집착합니다. 교육 열이 세계 어느 민족보다 뛰어난 이유는 교육이 보통 사람이 성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통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사실 우리 내면의 심중에 들어가 보면 실패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도 두려워합 니다. 왜냐하면 성공한 후에 오히려 더 크게 몰락한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입니 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한편 세상에서는 실패했지만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된 성공이란 출세나 성취에 있 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성공이란 아름다운 성품에 있습니다. 인격적 성숙에 있 습니다. 성공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나눔의 기회로 삼을 줄 아는 청지기 의식에 있습니다. 실패를 많이 경험한 사람이 누리는 가장 큰 행복은 그 사람의 성품에 있습니다. 우리는 실력으로 성공합니다. 그러나 실패를 통해서도 성숙하게 됩니 다. 실패를 배우지 말고 실패로부터 배우십시오. 실패를 반복하지 마십시오. 실패를 성장과 성숙의 기회로 삼으세요. 아무 것도 실패하지 않은 것을 자랑치 말고 아무 것도 시도해 보지 않았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세요. 실패는 모험하는 인생에 찾 아오는 위대한 스승입니다. 실패는 고통을 주고 고통은 교훈을 좁니다. 실패했다 고 낙심치 마십시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립니다. 에이브러헴 링 컨을 보십시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을 지낸 아브라함 링컨은, 1831년에 사업에 실패하였고, 1832년에 주의원 선거에 낙선하였고, 1834년에 다시 사업에 실패하였 고, 1841년에 신경 쇠약증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1843년에 국회 의원 공천을 받지 못하여 낙심하였고, 1855년에 상원 의원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하였고, 1858년에 다시 상원 의원에 입후보했다가 또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 침내, 186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는 영광을 획득하였습니다. 그의 수많 은 실패가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실패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실패를 통해 더욱 당신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심을 결코 잊지 마십 시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폴란드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파데르브시키는 첫 레슨을 받고 나서 선생으로부터 "네 손은 조막손이니 아예 그만 두는 게 좋겠다"라 는 말을 들었습니다. 불후의 테너 가수 카루소도 처음 노래를 부르고 나서 "구멍뚫 린 문풍지에서 나는 목소리"란 혹평을 들었습니다. 디즈니가 처음 만화원고를 들고 신문사를 찾았을 때 "수준이하"라는 말을 들으며 거절당했습니다. 자동차왕 포드는 첫 자동차를 만든 후 후진기어를 안 달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인생을 망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좌절과 포기입니다. 위대한 발명가 챨스 케터링씨는 실패를 성공으로 전환시키는 데 필요한 다음과 같 은 충고를 했습니다. 첫째, 정직하게 실패를 인정하십시오. 둘째, 실패를 이용하십 시오. 절대로 실패를 낭비하지 마십시오. 실패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우십 시오. 셋째, 실패한 일로 '이제 아무 것도 하지 않겠노라'고 결심하는 계기로 삼지 마십시오. 실패는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실패를 반가운 손님을 맞듯 대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실패란 또 다른 형태의 성공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모든 일의 승리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 실패를 맞아 좌절의 늪에 빠져 계시지는 않는지요? 당신에게 힘과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도움을 얻으시기 바랍니다.(시28:6-8)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 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5)

 

기회
영국의 에드워드 7세는 식사 예법에 몹시 엄격한 왕이어서 왕자들이 식사 시간을
언제나 무서워하곤 하였습니다.
어느날 아침 식사를 하던 요크 왕자는 갑자기 말을 더듬거리며 에드워드 7세에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버럭 화를 내며 "식사중에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했지!" 하며 소
리를 쳤습니다. 요크 왕자는 놀라서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식사 후 에드워드 7세는 요크 왕자를 조용히 불러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느냐?"
"이제는 늦어버렸어요."
"늦어? 무슨 일이었는데?"
"그때 할아버지 음식에 벌레가 들어갔었어요."


삶의 위기는 새로운기회
1888년 한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다이나마이트를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이나마이트를 제조한 다음에 일약 당대에 명사가 되었고 수많은 돈을 벌고 사람들의 관심과 촉망을 받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언제나 하던 버릇처럼 신문을 펴서 기사를 읽기 시작하는데, 깜짝 놀랄 만한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그 서두에 자기가 죽었다는 기사가 씌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제가 만일 당신과 저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 기사를 읽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 신문 기사의 보도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 최초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유명한 알프렛트 노벨이 죽다.” 이 기사를 읽은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 자기 동생이 죽었는데, 기자들이 혼돈하여 자기가 죽은 것으로 보도를 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망 기사 앞에서 이 사람은 깊은 침묵과 말할 수 없는 도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폭탄을 만들어서 재물을 얻었고 명성을 얻었지만, 결국 내 인생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폭탄을 만든 제조업자가 드디어 죽다”라고 보도한 신문을 찢어 버리면서 그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는 인생의 허무 가운데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복음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자신을 바라보지 못합니다.삶의 위기에서 겸손히 자신을 볼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그리고 훗날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이 저 유명한 알프렛트 노벨의 노벨평화상이 시작된 이유임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어려움이 성공 기회인 줄 알라
세계 제 2차 대전 때 크레이턴 메이브렘 장군과 그가 인솔하는 부대는 모조리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이때 장군은 낙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용기백배하여 말하기를 (여러분, 이 전쟁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우리는 지금 사방을 공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하면서 용기있는 작전으로 결국 숭리하였다.
역사상에 문제를 오히려 기회를 잡아 성공한 사람이 많다.
카네기는 가난에서 성공의 기회를, 루즈벨트는 소아마비 속에서 성공, 귀가 먹었기 대문에 오히려 발명가가 될 수 있었다.

 

어려움이 성공 기회인 줄 알라
세계 제 2차 대전 때 크레이턴 메이브렘 장군과 그가 인솔하는 부대는 모조리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이때 장군은 낙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용기백배하여 말하기를 (여러분, 이 전쟁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우리는 지금 사방을 공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하면서 용기있는 작전으로 결국 숭리하였다.
역사상에 문제를 오히려 기회를 잡아 성공한 사람이 많다.
카네기는 가난에서 성공의 기회를, 루즈벨트는 소아마비 속에서 성공, 귀가 먹었기 대문에 오히려 발명가가 될 수 있었다.


삶의 위기를 기회로 만드세요
본문: 빌립보서 1장 12-18절

<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지는 삶의 지혜 >
앤드류 매튜스가 쓴 세계적 베스트셀러 행복해지는 법(Being happy)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크게 2가지 가치관, 즉 부정적인 가치관과 긍정적인 가치관이 있다고 합니다.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진 분은 어떤 일을 당해도 긍정적으로 보면서 행복을 찾습니다.
반면에 부정적인 가치관을 가진 분은 꼭 상황을 어둡게 보고 스스로 불행하게 됩니다.
그는 우리가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지기 위해 몇 가지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 중의 한 가지는 "자신을 소개할 때 항상 좋게 소개하는 훈련을 하라!"고 말합니다.
괴로운 일을 당하면 나 혼자 감당하고 남에게 지우지 않겠다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혼자 조금 참으면 되는데 "여기 아프다, 저기 아프다"고 하면 온 집안 식구가 힘들어집니다. 그처럼 사방에 "나 아프다!"고 말하면 사실상 아픔이 줄어들기보다는 아픔이 더해집니다.
그러므로 나를 나타낼 때는 언제나 밝은 얼굴로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은 위선이 아닙니다.
걱정이 많아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화평한 모습, 즐거운 모습, 행복한 모습을 해야 합니다.
그런 모습들을 하다 보면 그것들이 점점 쌓이면서 내 성격을 긍정적으로 만들게 됩니다.
계속해서 '기뻐하고 유쾌하게 사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살면 삶이 진짜 그렇게 변합니다.
노만 커즌의 병의 분석(Analysis of disease)이라는 유명한 책을 보면 위장과 관련된 질병 및 신경성 질병은 호탕하게 몇 번만 웃으면 대개 낫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모습에 낙심하지 말고 자기가 앞으로 되고 싶은 사람을 늘 생각하면서 희망을 가지고 기쁘게 살면 건강하게 되고, 삶 전체가 아주 긍정적으로 바뀐다고 합니다. 또한 긍정적으로 살려면 무엇인가 필요할 때 깨끗하게 그 필요를 알리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결혼기념일이나 자기 생일에 "남편이 알아주나!" 하고 노려보고 기다렸다가 그냥 넘어가면 그때부터 삐쳐서 일주일 동안 말을 안합니다. 그러면 삶이 피곤해집니다.
대개 남편들은 살아남기 위해 직장 상사에 관심을 가지고, 고객에 관심을 가지며 삽니다.
그런 남편의 정신적인 짐을 덜어주려고 남편에게 "이런 관심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 자기도 남편에게 관심을 표하는 것이 되고 진정한 정신적인 교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결혼기념일에 무엇인가를 바라면 "어디 두고 보자!"고 사랑을 시험하기보다 그냥 아침에 "오늘 우리 결혼기념일인데 조금 일찍 들어오세요"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것이 없이 자기 기준으로 '사랑의 증거'를 만들어 놓고 그 증거가 없는 것 같다고 "사람 잘못 봤어! 내가 결혼 잘못했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행으로 가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그는 긍정적으로 살려면 "내가 당한 일과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라!"고 합니다. 때로 사업이 망해도 사업이 망한 것이지 나 자신이 망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가 대학 시험을 치면 떨어질 수도 있고 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떨어지면 인생이 망하고, 가문이 망가진 것처럼 여기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대학 못 가면 저 대학을 가면 되고, 오늘 못 가면 내일 가면 됩니다.
'내가 당한 일'에 '나의 존재와 목숨'을 다 걸면 항상 초라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지만 '내가 당한 일'을 통해 오히려 자신을 더 격려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축복해주십니다.

< 고난을 당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
본문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감옥에 갇혔지만 그곳에서의 전도로 시위대를 중심으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결국 황제 주변에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까지 전도하게 되었습니다(빌 4:22).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당하지만 그때 그 일과 그 문제에 붙잡히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처럼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다는 고백을 하면 얼마나 멋있습니까?
사람의 행복과 불행은 "어떻게 위기를 잘 관리해서 기회로 만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최악의 위기를 기회로 만드셨습니다. 흑암이 가장 깊을 때 천지를 창조하셨고, 십자가의 위기를 구원의 기회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도 최악의 위기를 기회를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십니다.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 일을 그냥 일어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일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고난을 당해도 그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얻는 가장 큰 축복이 무엇입니까? 어려움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음으로 생기는 평안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우상 숭배하다가 예수님을 믿게 된 분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맘이 편하다는 말입니다. 우상 숭배하면 귀신이 언제 어떻게 노해서 어떤 점을 칠지 모르니까 항상 불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잘 믿으면 마음이 평안하고, 몸도 점점 건강해지고, 잠도 잘 오게 됩니다.
어떤 분은 어떤 일로 고민하다가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지옥이 다른 게 아니라 잠이 안 오는 게 지옥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괴로운지 자살 충동까지 든다고 합니다.
잠을 못 자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이 없습니다. 사실 잠을 잘 자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믿으면 잠도 잘 잡니다. "어려움은 진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가는 어려운 일을 당했지만 그것이 진보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내가 당한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복음의 진보'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해도 그 일을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만들 수 있어야 하고,
어려울 때마다 "이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내 믿음을 보일까?"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초라한 모습일 때 비참해지지 말고, 그때를 오히려 인생의 진보의 기회로 만드십시오.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이 바로 행복을 만드는 기술입니다.
지금 혹시 위기에 처해 있다면 그때를 더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기회로 만드십시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당했느냐?"보다 "내가 그 일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마음이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지고, 가는 길이 달라집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환경도 이기고, 그 가운데 복음의 진보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 성도의 고난은 결국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
대개 사람들은 외적으로 성공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외적인 성공은 수명이 짧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공이 수명이 오래 갑니다. 성 프랜시스는 거지처럼 살았지만 수백 년이 지나도록 위대한 성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프랜시스 당시 교황이 누구인지, 가장 큰 성당의 신부가 누구인지는 거의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외적으로 조금 초라한 모습이라도 결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믿음이 신실하다면 내 연약함도 하나님의 역사요, 내 고난도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가장 함께 하시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특히 복음을 전하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사실 전도하면서 어려움을 당해보지 않는 삶을 인생의 가장 큰 위기인 줄 알아야 합니다. 반면에 우리가 전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면 반드시 선한 열매가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이 감옥 안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고 활발하게 전도한다는 소식을 듣고 밖의 성도들은 더욱 용기를 얻고 더욱 주님의 역사를 신뢰하고 전도에 나섰다는 말입니다.
내가 전도하면 열매도 생기지만 나의 전도로 다른 사람도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처럼 우리는 내가 전도하므로 다른 사람에게 힘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담대히 전도에 나가면 귀한 신앙의 동료를 얻고 서로에게 큰 격려가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은 믿음이 넘치고 은혜가 넘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전도를 나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은혜가 없어도 순종하는 마음으로 전도하면 그토록 찾던 은혜가 거기에 있습니다. 어떤 분이 무디에게 말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해가 안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디가 말했습니다. "그때는 밖에 나가서 전도하세요. 전도하고 돌아오면 깨달아집니다." 진리의 돌은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주울 수 없습니다. 진리는 행동할 때 깨달아집니다.
"때가 되면 나오겠지!" 그것은 참으로 소극적인 생각입니다. 그 생각이 전도를 막습니다. 내가 한 영혼을 살리는 것은 결국 나 자신도 살리고, 우리 가정과 나라도 살리는 것입니다. 지금 전도가 참 어려운 시절입니다. 이단 때문에 사람들의 경계심은 심해졌고, 매스컴의 비판은 전도의 열정을 빼앗았고, 경제적 여유는 전도의 관심을 퇴조시켰습니다. 또한 성도의 잘못된 행동으로 사람들의 거부감이 많아져서 전도가 아주 어려워졌습니다.
그래도 힘써 전도하면 믿음도 커지고, 은혜도 받고, 하나님께서 더욱 기뻐하실 것입니다.

< 복음 전파의 사명감을 가지십시오 >
그런데 오늘 본문 15절에는 언뜻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 나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착한 뜻으로 예수님을 전파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투기와 분쟁으로 예수님을 전파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당시에 바울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바울을 음해합니다.
그래도 바울은 전도의 열매가 많았고, 바울이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바울의 공로가 아님을 증명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대단한 인물이 아님을 증명할 기회가 왔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러자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기회에 더욱 열심히 예수님을 전파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전도의 열매가 많으면 바울의 공로가 크지 않음을 증명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이 생기면 바울의 마음을 괴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전도하는데 그래도 바울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이 전파되는 것이니까 기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내 체면을 구기고, 내게 상처를 주어도 복음이 전해지니 좋다는 모습을 보십시오.
자기의 체면과 상처는 가볍게 보고, 복음전파를 크게 보는 이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어떤 분은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다고 여기고 여기저기 다니며 교회 비판에 열을 올립니다.
"교회가 썩었어! 이것도 썩고, 저것도 썩고..." 그 모습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상처받아도 복음은 상처를 받지 말게 하고, 교회는 상처를 받지 말게 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아무리 상처가 되어도 예수님만 전해지면 좋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사명감에 투철한 사도입니까? 우리 교회와 교인들에게는 이런 사명감이 있습니까? 아쉽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고기잡이배가 되기보다는 뱃놀이하는 유람선 같습니다.
고기잡이배가 고기를 잡으면 행복을 얻지만 뱃놀이를 하면 오히려 행복을 잃게 됩니다. 전도는 쉽지 않은 것이지만 신앙인에게 전도는 행복의 초석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항상 기뻐하며 복음 중심적 가치관을 가지십시오 >
바울은 어려움과 상처가 있어도 전도가 된다면 행복해했습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사도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찾았고, 특히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라면 내가 무너져도 좋고, 내가 다쳐도 좋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처럼 우리는 안목이 넓어야 하고, 스케일이 큰 사람, 통이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정신과 의사의 말에 의하면 겸손할수록 스트레스가 없다고 합니다. 겸손할수록 기쁨의 크기가 커지고, 즐거운 시간과 범사에 감사하는 시간이 많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겸손에 대해서 생각할 때 높은 자리에서 낮아지는 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겸손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의 자리는 낮은 자리입니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겸손하겠다고 낮아지고 뭐고 할 것이 없습니다.
며칠 전에 폐암으로 별세한 이주일 씨는 담배는 폈지만 평소에 건강관리를 잘했습니다. 폐암 진단을 받기 3개월 전에도 종합검진을 했는데 아무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암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 사실은 인간의 연약함을 잘 말해줍니다.
우리는 어떠하든지 스스로를 높이지 말고 자기 자리를 힘써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가끔 보면 "제가 겸손하게 기도해주세요."라고 어색한 기도제목을 내놓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치 내가 높은 사람인데 내 힘으로는 낮아지기 힘들어 하나님의 힘이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그 마음부터 고쳐야 합니다. 우리는 높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 그냥 있으면 됩니다. 높다고 생각하니까 낮아지기가 그렇게 힘들어서 하나님의 힘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닙니까? 우리는 나 자신을 높이지 말고 주님만 높이고, 주님만 전파하기에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 제자입니까? >
우리는 전 인류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조금 어려워도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그 꿈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해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고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꿈을 꾸지 마십시오. 자신의 삶에 너무 함몰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께로 오게 할 책임에 눈을 뜨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축복은 원하지만 변화는 거부합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축복 이전에 내가 변화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중심주의를 버리고, 진정한 다른 사람들의 축복을 빌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중심주의는 참 집요합니다. 심지어는 가정 내에서도, 부자 관계에서도 종종 발견됩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내가 너희들만을 위해서 살아왔다."
정말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결혼할 때 보니까 혼수 문제로 본전 다 뽑으려고 합니다.
내가 얼마나 밑천 들여서 키운 자식인데.... 그러면서 부모가 결혼을 깨는 경우도 봅니다.
주려면 끝까지 주어야지 이제 와서 무엇을 찾겠다고 하니 얼마나 이기적인 모습입니까?
충성하려면 끝까지 충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에 평강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환경에 따라, 대접받는 것에 따라 마음이 흔들린다면 성숙한 모습이 아닙니다.
이제 나 자신의 형편과 처지만 살피기보다 남을 생각하고 살피는 성숙한 성도가 되십시오.
서울에 있는 한 교회의 구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해에 공교롭게도 그 구역에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이 세 명 있었습니다. 온 구역원이 그 세 명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둘은 합격하고, 한 명은 떨어졌습니다.
그때부터 합격한 자녀들의 어머니들은 말을 못했고, 나머지 구역원들도 그저 침묵했습니다.
이제 대학 문제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떨어진 아들 어머니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그분은 모든 구역원들을 초청해 큰 합격 잔치를 벌여주었습니다.
자기 아들은 떨어졌지만 우리 구역에서 두 명이나 합격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했습니다. 구역원들이 다 안도하고 좋아하며 그분을 칭송했습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모습을 하늘에서 보시고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결국 하나님이 그 가정을 축복하셨고 다음 해에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생기면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창피해서 못 살겠다! 남들은 다 합격했는데 너만 왜 그 모양이냐?" 한숨을 푹푹 내쉽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습니다. 그런 모습은 현재뿐만 아니라 내일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후퇴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는 믿음을 보시고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요즘 치열한 경쟁시대입니다. 그래서 다니던 직장으로부터 퇴직 당할 수도 있습니다. 슬픈 일이지만 그래도 "오래 몸담은 직장이 잘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디 두고 보자!" 라고 하면 그 두고 보는 사람보다 내가 저주받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은퇴를 맞아 기뻐하며 은퇴하고, 물러설 상황에서 기뻐하며 물러설 때 본인도 행복하고, 하나님께서도 축복하시고, 그런 분들에게 내일의 축복을 풍성하게 준비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모습이 서글퍼도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믿음의 권속들이 되어야 합니다.
심지어는 세상을 떠나면서도 기뻐하며 떠날 때 하늘의 영광은 더욱 크게 될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임종할 때 마음에 기쁨이 넘쳐서 크게 찬송하니까 한 수도사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지금 창밖에 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 시간이 엄숙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프랜시스가 말합니다. "주책을 떨어 미안하네. 주님 만날 생각을 하니 너무 기뻐서 그랬네."
세상을 떠나면서도 이렇게 기뻐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모든 삶에 행복이 넘칠 것입니다.
항상 '내가 당한 어려운 일'로 더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기뻐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기회
우리에게 주신 기회 본문 : 사무엘상 10;6∼8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삼상 10:7) 영국의 유명한 오르간 연주자이자 심포니 지휘자였던 스토코프스키는 오케스트라의 마술사라고 불릴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난히 부드럽고 긴 열 개의 하얀 손가락이 건반 위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자아내는 선율은 청중을 황홀경으로 몰아넣곤 했습니다. 스토코프스키의 연주회에는 언제나 많은 청중이 몰리는데 그 날도 연주회장은 빈 자리 하나 없이 꽉 들어찼습니다.스토코프스키는 짧은 인사와 함께 간단한 유머로 청중을 웃긴 뒤 곧 연주에 들어갔습니다. 감미롭고 현란한 음악이 마치 한폭의 수채화처럼 흘러서 장내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습니다.모두 눈을 지그시 감고 아름다운 선율에 몰입했던 청중은 갑자기 깜짝 놀라 눈을 떴습니다. 연주가 중단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앞 좌석에서 한창 소곤거리고 있던 두 부인도 장내가 갑자기 조용해진 것을 깨닫고 잡담을 중단하고 지휘자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죄송합니다.부인들께서 하도 긴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요. 혹시 제가 방해가 될까 봐 잠시 연주를 중단했습니다. 이제 다 끝나셨습니까? 그러면 다시 연주를 계속하겠습니다” 스토코프스키는 멈추었던 손을 다시 움직여 연주를 계속했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두 부인은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얼마전 중국 기원의 발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둑 대국 중 휴대전화 소음에 대해 규제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휴대전화벨이 울릴 경우 주의 조치하고 벌점을 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생활하면서도 직·간접적으로 다른 사람에 의해 피해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예절이나 매너조차도 갖지 못하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월드컵으로 한층 문화시민으로서의 예절과 자긍심이 고조된 상태라 여기저기서 이 분위기를 이어가자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우리의 결집된 나라 사랑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이 나라와 사회 전반의 발전에 골고루 전파되었으면 합니다. 이를 위해 깨어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위기 때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여러 위기와 난관들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극복해나가길 기도합시다. 오늘 본문의 사울처럼 주께서 기름부은 자를 이 역사에 세우시고 기회를 허락하심을 기대합시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로 내가 쓰임받을 수 있도록 오늘 하루도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삶이 되도록 합시다. * 기도: 날마다 더욱 성숙해지는 삶의 태도와 믿음을 갖게 하소서. 내 안의 거룩함을 잃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위기는 기회”
제2차 세계대전 중 있었던 이야기 하나.영국의 크레이턴 메이브램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됐다.
부대원들이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져 절망하고 있을 때 장군은 「이제 우리가 전쟁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사방을 공격해 한꺼번에 적군을 섬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자,사방을 향해 나아가자」라고 외치며 진두지 휘했다.
그러자 부대원들이 용기를 얻고 전투에 임해 결국 승리할 수 있었다.
위기가 사방에 있다는 것은 한꺼번에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제2의 기회
인생은 연습이 없고 두 번 걸어갈 수 없습니다. 이 길은 모험과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미지의 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선지자 요나 역시 모험과 실패가 두려워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사명을 외면한 채 자기 생각대로 안전한 길을 찾아 도망갔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열매맺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는 점점 내려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지옥의 문턱까지 내려갔던 요나를 고기 뱃속에서 건져 주시고 제2의 기회를 주시며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베푸신 제2의 기회는 단순히 숫자적인 의미만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불순종과 어리석음으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실패와 좌절의 자리로 내려갈 수밖에 없는 연약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보잘것 없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는 넓게 용서하시며 새롭게 받아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풍성한 삶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단지 하나님을 지적으로 알고 있는 데서 그치지 말고 믿음이 생활로 연결돼야 합니다. 단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된 삶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없으면 도망친 요나와 같은 삶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삶은 진정으로 제2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요나와 같은 돌이킴의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요나가 만약 하나님이 첫번째 말씀하셨을 때 곧장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서 40일이 지나면 성이 멸망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외쳤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요나의 사역은 실패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사역은 그다지 능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지옥의 문턱까지 내려가본 사람이 만난 생생한 하나님을 우리는 만나야 합니다. 그 결과 회개의 큰 성과가 있었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구체적인 만남이 없다면 힘있는 기독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부모님이 믿어왔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가 직접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다분히 의식적인 신앙에 불과할 뿐 삶속의 신앙으로 연결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계속해서 제2의 기회를 우리에게 주시는 걸까요? 하나님은 수많은 방법을 가지고 계시고 피조물을 임의대로 쓰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와 우리가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에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제2의 기회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고 하나님께 헌신할 기회입니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절호의 찬스입니다.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고귀한 인생을 누구를 위해 살기 원하십니까? 항상 신앙은 강요가 아니라 선택입니다.

 

역경에서 기회포착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 (시편 119 : 71)
1664년 영국 런던에 가공할 만한 페스트가 발생했다. 수백 명의 런던시민이 삽시간에 목숨을 잃었다. 페스트는 맹렬한 기세로 여러 도시에 전염됐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니던 한 청년은 전염병을 피해 울즈도르프라는 시골로 내려갔다.
이곳은 그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작은 시골이었다. 청년은 학문연구에 정신없이 몰입했던 삶에서 벗어나 모처럼 여유를 즐겼다. 청년은 넓은 뜰을 거닐면서 사색에 잠겼다. 한번은 청년에 뜨락에 앉아있는데 사과나무에서 사과 하나가 뚝 떨어졌다.
그는 이것에 의문을 품었다. "사과가 왜 옆이나 위로 떨어지지 않고 밑으로만 떨어지는 것일까. 땅에 사과를 잡아당기는 힘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이 청년의 이름은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뉴튼이었다. 이날 청년이 발견한 것은 그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이었다. 역경을 만날 때 오히려 여유를 갖고 신중하게 탐색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기회가 온다. 페스트라는 전염병이 뉴튼을 세계적인 과학자로 만드는데 기여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우리에게 주신 기회
본문 : 사무엘상 10;6∼8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삼상 10:7)

영국의 유명한 오르간 연주자이자 심포니 지휘자였던 스토코프스키는 오케스트라의 마술사라고 불릴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난히 부드럽고 긴 열 개의 하얀 손가락이 건반 위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자아내는 선율은 청중을 황홀경으로 몰아넣곤 했습니다.
스토코프스키의 연주회에는 언제나 많은 청중이 몰리는데 그 날도 연주회장은 빈 자리 하나 없이 꽉 들어찼습니다.스토코프스키는 짧은 인사와 함께 간단한 유머로 청중을 웃긴 뒤 곧 연주에 들어갔습니다. 감미롭고 현란한 음악이 마치 한폭의 수채화처럼 흘러서 장내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습니다.모두 눈을 지그시 감고 아름다운 선율에 몰입했던 청중은 갑자기 깜짝 놀라 눈을 떴습니다. 연주가 중단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앞 좌석에서 한창 소곤거리고 있던 두 부인도 장내가 갑자기 조용해진 것을 깨닫고 잡담을 중단하고 지휘자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죄송합니다.부인들께서 하도 긴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요. 혹시 제가 방해가 될까 봐 잠시 연주를 중단했습니다. 이제 다 끝나셨습니까? 그러면 다시 연주를 계속하겠습니다” 스토코프스키는 멈추었던 손을 다시 움직여 연주를 계속했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두 부인은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얼마전 중국 기원의 발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둑 대국 중 휴대전화 소음에 대해 규제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휴대전화벨이 울릴 경우 주의 조치하고 벌점을 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생활하면서도 직·간접적으로 다른 사람에 의해 피해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예절이나 매너조차도 갖지 못하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월드컵으로 한층 문화시민으로서의 예절과 자긍심이 고조된 상태라 여기저기서 이 분위기를 이어가자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우리의 결집된 나라 사랑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이 나라와 사회 전반의 발전에 골고루 전파되었으면 합니다. 이를 위해 깨어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위기 때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여러 위기와 난관들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극복해나가길 기도합시다. 오늘 본문의 사울처럼 주께서 기름부은 자를 이 역사에 세우시고 기회를 허락하심을 기대합시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로 내가 쓰임받을 수 있도록 오늘 하루도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삶이 되도록 합시다.
* 기도: 날마다 더욱 성숙해지는 삶의 태도와 믿음을 갖게 하소서. 내 안의 거룩함을 잃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께 기회를 드립시다.
며칠전 신문을 보니 한 고등학생이 도둑질을 하다가 그만 잡혀서 구치소에 수감되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학생의 아버지는 "너를 믿었는데 네가 그럴수가 있느냐!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런 짓을 했느냐. 도대체 문제가 뭐냐"며 한시간 동안이나 잔소리를 쉬지도 않고 퍼부어 댔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있던 아들이 마지막에 한마디했습니다.
"아버지, 혼자만 말씀하지 마시고 제발 제 말을 한마디만이라도 들어주셨다면 오늘 제가 이곳에 오지 않았을 거예요. 문제는 아버지가 제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부모는 자식들의 의견을 많이 들어줍시다.
자식들은 부모의 말을 경청합시다
남편은 아내에게 이야기 할 기회를 줍시다.
아내는 남편에게 말할 기회를 줍시다.
선생님은 학생들의 말에 귀를 기울입시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지루해하지 맙시다.
목사님은 성도들의 말에 귀를 세웁시다.
성도들은 목사님의 말에 순종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얼마든지 끝까지 들어주십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도록 기회를 드립시다.

 

시간, 기회, 준비
0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25:13)
0 그대가 낭비한 시간이란 던져 내버린 인생의 한 부분이다.
0 시계는 없어도 시간은 있다.
0 시간의 절약은 생명의 연장이다.(스페인 격언)
0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인생은 시간이 쌓인 것이니까.
0 오늘은 오직 한 번뿐 또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0 짧은 두레박줄로는 깊은 우물을 푸지 못한다.
0 오늘이란 날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하루를 짧다고 헛되이 보내지 말라. 허송세월은 그대의 생명을 짧게 하는 것이다.
0 세상에는 지나치게 많이 쓰면 안되는 것 셋이 있다. 그것은 빵의 누룩, 소금, 망설임이다.
0 현재 내가 하는 일에 전력투구를 하는 것이 시간을 잘 활용하는 길이다.
0 늦장은 위험을 낳는다.
0 청춘은 일생에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0 오늘은 결코 다시 오지 않는다.
0 내일의 닭보다 오늘의 달걀이 낫다.
0 당신의 일생은 무한한 시간의 아주 짧고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조심해서 그 짧은 인생에 전력을 기울여 자기 자신에게 가능한 모든 일을 하라(사이드 벤 하메드)
0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들이여, 지금 곧 삶과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살도록 하라. 당신에게 남겨진 시간을 뜻밖의 선물과 같이 생각하며 살아 보라.(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0 만일 네가 좋은 일을 할 수 있거든, 기회는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되돌아 오지 않으므로 지금 당장 그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동양의 금언)
0 무엇보다도 준비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헨리포드)
0 참으로 위대한 일은 모두 느릿느릿한 눈에 띄지 않는 성장에 의해서 이뤄진다.(류시 말로리)
0 그대가 낭비한 시간이란 던져 내버린 인생의 한 부분이다.
0 얻기 어려운 것은 시기(때)요, 놓치기 쉬운 것은 기회이다.
0 기회가 없는 능력은 아무 쓸모가 없다.
0 스스로 돕지 않는 자에게는 기회도 힘을 빌려주지 않는다.
0 얻기 어려운 것은 시기(때)요, 놓치기 쉬운 것은 기회이다.
0 스스로 돕지 않는 자에게는 기회도 힘을 빌려주지 않는다.
0 오늘이란 날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하루를 짧다고 헛되이 보내지 말라. 허송세월은 그대의 생명을 짧게 하는 것이다.
0 세상에는 지나치게 많이 쓰면 안 되는 것 셋이 있다. 그것은 빵의 누룩, 소금, 망설임이다.
0 현재 내가 하는 일에 전력투구를 하는 것이 시간을 잘 활용하는 길이다.
0 늦장은 위험을 낳는다.
0 청춘은 일생에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0 오늘은 결코 다시 오지 않는다.
0 내일의 닭보다 오늘의 달걀이 낫다.
0 당신의 일생은 무한한 시간의 아주 짧고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조심해서 그 짧은 인생에 전력을 기울여 자기 자신에게 가능한 모든 일을 하라(사이드 벤 하메드)
0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들이여, 지금 곧 삶과 헤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살도록 하라. 당신에게 남겨진 시간을 뜻밖의 선물과 같이 생각하며 살아 보라.(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0 만일 네가 좋은 일을 할 수 있거든, 기회는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되돌아 오지 않으므로 지금 당장 그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동양의 금언)
0 무엇보다도 준비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헨리포드)
0 아무리 뛰어난 천재의 능력도 기회가 없이는 소용이 없다.(나폴레옹)
0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받았다. 당신이 나의 생명을 6개월만, 아니 6일만이라도 연장시킨다고 하면 나의 가진 보화의 반을 드리겠소. 나는 그 두려운 지옥으로 갑니다.' 무신론자 볼테에르의 죽음 앞에서의 마직 탄식이었다. 구원의 기회는 많지 않다. 기회는 모든 사람을 찾아 오지만 그것을 잘 이용하는 자는 소수일 뿐이다.(리튼)
0 기회의 앞에는 머리털이 있으나 뒤에는 머리털이 없다.(루터)
0 때는 얻기는 어렵고 잃기는 쉽다.(사마천)
0 현명한 자는 기회를 행운으로 바꾼다.(G. 산타야나)
0 스스로 돕지 않는 자에게는 기회도 힘을 빌려주지 않는다.(소포클레스)
0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큰 죄는 없다(영국 격언)
0 시간은 그 사용 방법에 따라 금도 되고 납덩이도 된다.(푸레이부이)
0 시간을 얻는 자는 일체를 얻는다.(벤자민 디스레일리)
0 날은 짧고 할 일은 많다.(B. 사라)
0 사람들은 돈을 시간보다도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그 때문에 잃어버린 시간은 돈으로는 살 수 없다.(탈무드)
0 성인(聖人)은 큰 보석 보다 촌음을 더 귀하게 여긴다.
0 시간은 가장 위대한 개혁자이다.(프란시스 베이컨)
0 시간은 모든 것을 폭로한다.(에라스무스)
0 시간은 모든 병을 고치는 명약이다.(벤자민 프랭클린)
0 시간은 세상의 혼이다.(피타고라스)
0 시간은 인간을 업고 가는 천사이다(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폰 쉴러)
0 시간은 인간이 소비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디오게네스)
0 시간은 젊음을 부수는 기수이다.(조지 허버트)
0 시간은 지나가 버린 바로 그 그림자이다.(경외서)
0 시간을 갖는 사람이 인생을 갖는다.(j. 플로리오)
0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이것저것 노력하라. 헛수고하며 보내지 말라.
0 시간을 선택하는 것이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다.(베이컨)
0 영원을 사랑하거든 시간을 사랑하라.(프란시스 칼스)
0 시간이 적으면 적을수록 사람은 그것을 충분히 활용한다.(빌링스)
0 시간이 있는 동안에 속히 타라. 왜냐하면 시간은 속히 달아나기 때문이
다.(영국 격언)
0 시간처럼 귀중한 것은 없다(라블레)
0 시간의 가치는 모든 사람의 입 속에 간직하고 있으나 실천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필립 체스터필드 경)
0 시간이나 호수의 물을 붙들어 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로버트 번즈)
0 우물쭈물하는 것은 시간을 도둑맞는 일이다.
0 이럭저럭 하는 사이에 시간은 날아간다. 날아가서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0 자기의 시간을 잘못 이용하는 사람이 대개 시간의 짧음을 불평한다.(라 부뤼엘)
0 제일 현명한 것은 시간이다. 시간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느니라.(탈레스)
0 시간이 슬픔을 치료한다.
0 시간만큼 귀하고 소중한 것이 없다(프랑스 격언)
0 시간이란 말은 내리막 언덕을 마구 달려 내려가고 있다.(갈리엔느)
0 시간은 금이다
0 시간이 모든 것을 정복한다.
0 시간이 자나면 좋은 방법을 알게 된다.(나이들면 철난다)
0 좋은 것은 시간이 좀 걸린다.(독일 속담)
0 빨리 익으면 빨리 떨어진다.(독일 속담)
0 참으로 위대한 일은 모두 느릿느릿한 눈에 띄지 않는 성장에 의해서 이뤄 진다.(류시 말로리)
0 시간에의 충실. 그것이 행복이다.(에머슨)

 

기회를 놓치지 말라 (사단의 전략회의)
원수 마귀 사탄은 성도들이 기회를 놓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사단과 그의 졸개들이 성도들의 신앙생활 방해 공작을 위한 전략회의를 열었습니다. 젊은 엘리트 출신의 마귀가 크리스챤을 죽이고자 할 때에 늙은 마귀가 순교는 교회의 씨가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때리면 매 한 대에 예수가 열도 더 생긴다고 경고를 했습니다.
감옥에 가두자는 제안도 있었습니다. 가두면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의 역사를 크게 일으키므로 손해라고 했습니다. 그 보다 더 좋은 전략이 없을까 하고 고심하고 있을 때에 늙고 지혜로운 마귀가 지혜를 짜내었습니다. "열심히 전도도 하고 사랑도 하자. 그러나 내일부터 하자"고 속삭이자는 전략이었습니다. 이 전략이 마귀의 최대 성공전략이었습니다.

히말라야 산 속에를 가면 야맹조라고 하는 새가 있다고 합니다. 이 새는 낮이면 신나게 즐기다가 밤이 되면 잘 둥지가 없어서 다른 새의 둥지에 가서 거하며 밤새 구박을 받는 답니다. 그는 서러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내일이면 집지으리","내일이면 집지으리"하고 구슬프게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맹조는 자기의 일생이 다가도록 집을 짓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단은 다음에 하지, 내일하지 하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유혹합니다. 그러나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바로 오늘, 지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

 

준비된 자와 기회
세계적인 명지휘자 토스카니니(1869∼1957)는 원래 첼로 연주자였다. 불행하게도 그는 아주 심한 근시여서 잘 보지 못했다.토스카니니는 관현악단의 일원으로 연주할 때마다 앞에 놓인 악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늘 미리 외워서 연주회에 나가곤 했다.
그런데 한번은 연주회 직전에 지휘자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그 많은 오케스트라의 단원 중에 곡을 전부 암기하여 외우고 있던 사람은 오직 토스카니니뿐이었다.그래서 그가 임시 지휘자로 발탁되어 지휘대 위에 서게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19세였고 세계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번 2002년 월드컵을 통해서 수많은 새로운 축구스타들이 탄생하고 있다. 독일의 클로제,포르투갈의 파울레타,한국의 안정환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준비된 자에게 늘 새로운 기회는 온다. 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것이다. 더 아름다운 미래를 위하여 오늘을 투자하지 않겠는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을 거두리로다”(시 126:5)

 

부자가 될 기회를 놓친 마크 트웨인
마크 트웨인은 몇 번이나 쓸모 없는 발명품에 투자했다가 돈을 몽땅 날려버린 경험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웬 낯선 사람이 찾아와서는 이상하게 생긴 물건을 자기가 발명한 것이라고 보여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행운을 사라고 강요하지는 않겠소. 하지만 당신이 5달러만 낸다면 그만한 몫을 얻을 수 있을 거요."
그러나 마크 트웨인은 싫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 발명품도 쓸모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그의 집을 떠났다.

 

하나의 기회(절망도)
어떤 상황도 하나의 기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메리 리드는 선교사로 인도에서 문둥병 환자의 불쌍한 운명을 잊을 수가 없어서 비참한 생각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문둥병 환자를 구제하는 방도는 무엇하나 실시되고 있지 않았다. 마침내 리드 자신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리게 되었다. 고원 주둔소의 병원에서 치료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나 여전히 병명을 알지 못하였다.
손가락 하나가 감각을 잃고 얼굴에 반점 하나가 생겼을 때에 그의 병명은 밝혀졌다. 그 자신이 문둥병에 걸려 있었던 것. 이 사실이 본인에게 알려졌다. 리드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을 문둥병 환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 때문에 마음을 아프게 하여 왔던 문둥병 환자들과 이제야말로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녀는 인도로
다시 돌아와 건강과 희망을 주는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삶의 위기는 새로운기회
1888년 한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다이나마이트를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이나마이트를 제조한 다음에 일약 당대에 명사가 되었고 수많은 돈을 벌고 사람들의 관심과 촉망을 받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언제나 하던 버릇처럼 신문을 펴서 기사를 읽기 시작하는데, 깜짝 놀랄 만한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그 서두에 자기가 죽었다는 기사가 씌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제가 만일 당신과 저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 기사를 읽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 신문 기사의 보도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 최초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유명한 알프렛트 노벨이 죽다.” 이 기사를 읽은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 자기 동생이 죽었는데, 기자들이 혼돈하여 자기가 죽은 것으로 보도를 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망 기사 앞에서 이 사람은 깊은 침묵과 말할 수 없는 도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폭탄을 만들어서 재물을 얻었고 명성을 얻었지만, 결국 내 인생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폭탄을 만든 제조업자가 드디어 죽다”라고 보도한 신문을 찢어 버리면서 그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는 인생의 허무 가운데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복음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자신을 바라보지 못합니다.삶의 위기에서 겸손히 자신을 볼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그리고 훗날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이 저 유명한 알프렛트 노벨의 노벨평화상이 시작된 이유임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기회와 능력의 달란트
달란트의 비유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쓰이는 것으로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천부적 재능 또는 성령께서 부여하시는 영적 능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에 대해 다른 한 가지의 해석을 제시할 수 있다. 즉 달란트는 우리가 그를 섬기도록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 기회들을 각각 그 재능에 따라 선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능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아 주님을 섬기는 일에 적합한 자질이 합당한 것과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안에서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능력을 포괄한다. 달란트는 우리가 처한 곳에서 채울 수 있고 또 기회를 선용하는 재능의 범위 안에 있는 기회들을 가리킨다.
이제 "밤이 다 가고 낮이 가까우므로" 오늘날의 이 시점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최선을 다해 선용하도록 하자. 기회를 어떻게 잡아서 어떻게 선용할 것인가는 사도행전에 잘 나타나 있다.


기회의 진실
 고대 희랍 올림포스 신전에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Chronos)의 신상이 있었습니다.
이 신상은 벌거숭이 젊은이가 달리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발에는 날개가 달려있고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칼이 들려있으며 이마에는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늘어뜨려져 있지만
뒷머리와 목덜미는 민숭민숭한 모습이었습니다.
이 신상을 본 시인 포세이디프(Poseidipp)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간은 쉼없이 달려야 하니 발에 날개가 있고 시간은 창끝보다 날카롭기에 오른손에 칼을 잡았고
시간은 만나는 사람이 잡을 수 있도록 앞이마에 머리칼이 있으나 시간은, 그러나, 지난 후에는 누구도 잡을 수 없도록 뒷머리가 없다.
시간은 곧 기회입니다. 한 번 놓친 기회는 다시는 그 앞이마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실패와 기회
어떤 사람이 링컨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링컨은 "제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야구왕 베이브 루스는 생전에 714개의 홈런을 날렸습니다. 1976년까지는 그가 최고의 홈런 보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1,330개의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했습니다.
뼈아픈 일이 있은 후 영광도 오는 것입니다.
실패 없는 성공이란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불행한 일입니다. 참된 성공은 실패로부터 얻어집니다. 실패를 맛본다는 것은 아픔을 맛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를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실패자라는 말을 가장 싫어합니다. 사실 실패
의 잔을 마셔본 사람은 압니다. 실패한 사람들은 실패의 잔이 얼마나 쓰다는 것을 압니다. 실패하면 단순히 물질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면 평소에 가까이 했던 사람들마저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외로움과 쓸쓸함이 찾아옵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아버님이 하시던 사업이 실패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실패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배웠습니다. 잘될 때 찾아오던 친척들이 아버님의 실패 후에는 발길을 끊었습니다. 실패한 후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무허가 집
으로 이주하던 날을 나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런 경험은 결코 나만의 경험은 아닙니다.


 기회
 영국의 에드워드 7세는 식사 예법에 몹시 엄격한 왕이어서 왕자들이 식사 시간을 언제나 무서워하곤 하였습니다.
 어느날 아침 식사를 하던 요크 왕자는 갑자기 말을 더듬거리며 에드워드 7세에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버럭 화를 내며 "식사중에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했지!" 하며 소리를 쳤습니다. 요크 왕자는 놀라서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식사 후 에드워드 7세는 요크 왕자를 조용히 불러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느냐?"
 "이제는 늦어버렸어요."
 "늦어? 무슨 일이었는데?"
 "그때 할아버지 음식에 벌레가 들어갔었어요."

기회는 스스로 만드는 것
 대학을 졸업한 후 친구와 함께 백화점에 취직한 젊은이가 있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두 젊은이는 경영부서에 배치될 줄 알았다.
 그러나 두 젊은이가 배치받은 곳은 엘리베이터 안내였다. 그러자 한 젊은이는 크게 실망하여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다른 젊은이는 고객들의 구매상황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로 알고 감사하며 성실하게 일했다.
그후 그는 회사에서 인정을 받아 곧 부서 책임자가 되었고 후에 최고경영자가 되었다. 이 젊은이가 바로 세계적인 백화점왕 J.C.페니다.


 기회란 흔하지 않다
 모스크바의 한 출판사에 헙수룩한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의 원고를 책으로 내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출판사 주인은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런 원고는 얼마든지 굴러 다니고 있고 비록 그 사람이 출판비용을 다 부담한다해도 맡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그 헙수룩한 사람은 원고 뭉치를 품에 넣 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대중이 나의 글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썼는데요."  이상스러운 말에 놀란 주인이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요"라고 묻자 그는, "내 이름은 톨스토이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에 기절할듯이 의자에서 뛰어 일어난 주인은 급히 사과를 하며 원고를 부탁했으나 톨스토이는 그냥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5분간의 여유
로버트 잉거솔 (Robert Ingersoll: 1833-1899, 미국의 유명한 무신론자,법률가)이 한 연설을 마친 후에,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불경한 사람을 곧 죽음으로 벌하신다고 합니다. 이제 저는 그를 모욕할 것이고, 그가 내게 죽음을 내릴지 또한, 내 영혼을 저주할 지를 시험해 보겠읍니다. 5분간의 시간 여유를 하나님에게 주도록 하죠."
1분이 지날 때까지, 모든 사람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2분이 지나자, 사람들은 불안해 하기 시작했다. 3분이 되자, 한 여인이 졸도하였다. 4분이 되자, 잉거솔은 입을 삐쭉거렸다. 마침내 5분, 그는 그의 시계를 닫아 주머니에 도로 넣고 말했다. "여러분 보셨지요? 하나님이란 존재하지 않읍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이미 제 목숨을 앗아갔을 테니까요."
후에 이 이야기가 조셉 파커(Joseph Parker)목사에게도 전해지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그 미국 신사 양반께서는 하나님께서 겨우 5분도 인내하시지 못할거라고 생각하였단 말인가?"
하나님의 참으심을 비웃지 말라. 곧 "칼이 저희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 하실 때가 오리라.


가장 큰 무기
 대학생활은 일생중 가장 아름답고 순수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단 한번밖에 없으며 젊음도 한때일 뿐이다.장미가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5분정도라고 한다. 가장 아름다운 그 시간이 지나면 장미는 곧 시들기 시작한다.인생도 마찬가지다. 가장 아름답게 보내야할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나면 엄청난 후회가 따른다.폭력은 젊은이들의 아름다움과 순수성을 한꺼번에 앗아가는 주범이다. 이제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되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거듭난 부자
   인생은 기회의 연속이다.기회 중에는 남을 도울 수 있는 기회도 있다.그러나 베푸며 사는 기회를 놓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평소 인색하기로 소문이 난 한 부자가 어느날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유서를 썼다. 자신이 죽은 후에 재산을 구제단체에 기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이게 아니지. 죽은 후 베풀면 무슨 소용이 있나. 살아있을 때 해야지』라고 외친 후 유서를 찢고 그날로 베푸면서 살았다.


 구원을 세 번 거절
  홍수가 창일 하여  옥상으로 피신한 사람에게 구조선이 와서, '고지대에 옮겨 주겠으니 배에 타라'고 하니, '나는 주님을  믿으니,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사양했다.
  물이 뿌려 허리에까지 올라 왔을 때, 동력선이 와서 '고지대에 옮겨 주겠다'고 하니 또 전과같이 사양했다.
  마침내는 물이 목에까지 잠기게 되였을 때, 헬리콥터가 와서 밧줄을 내려
주면서 '잡으라'고 하니,  '고맙기는 하지만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거절을 했다.
  드디어 '꼬륵'하게 되어 주님 앞에 갔다.
  "주님 어찌 홍수에서 구원하여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셨다.
  "구조선을 세 번 보냈으나, 네가 거절하였느니라."


 기    회
1. 옆에서 좀 기다려 주시요(기회)
 자료원 : 생명의 삶

  뉴욕을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오고 있던 여객선 센트랄 아메리카호가 바다 한 가운데서 고장을 당해 뱃속으로 물이 새어 들어오게 되었다. 마침 부근을 지나던 다른 배가 구조요청의 신호를 보고 달려와서 사람들을 모두 자신들의 배에 옮겨  싣도록 했다. 그러자 고장난  배에서는 다음과 같은 답변이 오는 것이었다.

  "옆에서 좀 기다려 주시요. 지금 캄캄한 밤에 사람들을 옮겨 싣자면 큰 혼란이 올 것이니 우리가  어떻게 고장을 고쳐보도록 하고 안되면 밝은 아침에 옮겨 싣도록 합시다." 지나가던  배는 다시 한번 옮겨 실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전달했으나 답변은 여전히  좀 근처에서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구조해 주려고 온 배는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약 한 시간이 지나자 건너편 배의 등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승객들을 그대로 태운  센트랄 아메리카호는 바다 밑으로 침몰해 버린 것이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에게 임할 때에 잠깐 기다려 달라는 핑계를 하지 마시라. 사정이 복잡하여 어두운 밤 같을 수록 당신에게는 그리스도가 더욱 절실히 필요한  것을 깨달으시라. 어리석은 선장처럼 온 가족을 다 이끌고 침몰하지 마시라.


2. 기회 격언 모음(기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며 기회는 달아나기 쉽고 실험은 정확하지 않으며 판단하기 곤란하다(히포크라테스)
자 현명한 자는 기회를 행복으로 바꾼다.
자 새가 날아간 후에 꼬리를 잡으려고 해도 무리한 노릇이다.
자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찾아 오지만 그것을 잘 활용하는 자는 소수이다(A. 리튼)
영국의 에드워드 7세는 식사 예법에 몹시 엄격한 왕이어서 왕자들이 식사 시간을 언제나 무서워하곤 하였습니다.기회
  어느날 아침 식사를 하던 요크 왕자는 갑자기 말을 더듬거리며 에드워드 7세에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버럭 화를 내며 "식사중에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했지!" 하며 소 리를 쳤습니다. 요크 왕자는 놀라서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식사 후 에드워드 7세는 요크 왕자를 조용히 불러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느냐?"
  "이제는 늦어버렸어요."
  "늦어?  무슨 일이었는데?"
  "그때 할아버지 음식에 벌레가 들어갔었어요."


기회 격언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며 기회는 달아나기 쉽고 실험은 정확하지 않으며
판단하기 곤란하다(히포크라테스)
ㅇ 현명한 자는 기회를 행복으로 바꾼다.
ㅇ 새가 날아간 후에 꼬리를 잡으려고 해도 무리한 노릇이다.
ㅇ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찾아 오지만 그것을 잘 활용하는 자는 소수이다(A.
리튼)


세계의 명언 ( 기회 )
 윌터 크라이슬러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절대 출세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회가문을 두드
릴 때, 뒤뜰에 나가 네잎크로바를 찾기 때문이다.

 레기날드 맨셀
  비관자는 자신의 기회에서 어려움을 만드는 자요,낙관자는자신의  어려움
속에서 기회를 만드는 자다.

 얼 나이팅게일
  위험이 있는 곳에 기회가 있고, 기회있는 곳에 위험도 있다.
  이 둘은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둘은 함께한다.

 프란시스 베이컨
  사람은 기회를 발견해야 할 뿐만이 아니라 기회를만들기도 해야한다.

 아라비아 속담
  네가지는 돌이킬 수 없다-뱉은 말, 쏜 화살,  과거생활,  그리고게을리한
기회

 존 F.케네디
  위기라는 말은 위험과 기회로 구성된 것이다.

 데모스테네스
  드문 기회로 종종 위대한 일이 시작된다.

 무명
  기회란 잘 잡으면 배가 된다. 그러나 그것에 태만하면 죽이게된다.

 알렉산더 그래햄 벧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우 리는 종종 닫힌문에  집
착한 나머지 우리를 위하 여 열려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


기회는 낙심될 때 온다
  토머스 칼라일은 런던의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나 1837년 「프랑스혁명
사」를 집필,세계적인  역사학자가  되었다.본래 이 원고는 칼라일이 수년
의  각고끝에 1834년에 썼는데 그가  잠시 외출한 사이 하녀가 못쓰는  원
고인줄 알고 난로에  집어넣어 잿더미로 만들고 말았다.

  며칠동안 음식을 못먹고  낙심하던  칼라일은 문득 『더 좋은 원고를 쓰
라는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다시 용기를 내어 집필,불후의명저를 내
놓게 된 것이다.『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히브리
서 2:10)


기회에 대한 탁월한 비유            
  희랍의 시라큐스 거리에 기회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동상 하나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동상은 날개가 발에 달려 있고 앞 머리는 무성하고, 뒷머리는 대머리인 동상입니다. 그 동상 아래에 이런 글귀가 새셔져 있습니다.
    누가 그대를 만들었는가?
  리스퍼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왜 그대의 날개는 발에 달려 있는가?
  걸어가기보다 더 잽싸게 빨리 날아다니기 위해서.
  왜 그대의 앞 머리는 그렇게 무성한가?
  내가 올 때 사람들이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왜 그대의 뒷 머리는 대머리인가?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붙들 수 없기 때문에....
  기회란 그런 것입니다.
  내가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 주님의 은혜를 사모할 수 있는 기회,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 그러한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난 세상에 쓸모 없는 놈이예요"
 제가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펜촉이 하나 있습니다. 그저 평범함, 흔히 보는 [천자펜촉]에 지나지 않지만 저의 작업대 가장 가까이에 언제나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이 펜촉을 제가 사용한지 족히 5년은 넘었을 것 같습니다. 벌써 은퇴(?)했었어도 오래전에 했었을 이 펜촉은 그 연륜에 걸맞게 닳을 대로 닳아 끝이 뭉툭하여 천하에 쓸모없는 펜촉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있어선 이 펜촉은 너무나 소중한 도구입니다. 끝이 자연적으로 뭉툭하여 진 탓에 이 펜촉은 굵은 글씨를 쓰기엔 더 없이 좋은 두고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 글의 첫 제목도 이 펜촉으로 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사용하시는 찬송악보집 [찬미예수 300, 400, 500]의 모든 악보에 있어 높은음자리표 다음에 오는  조(調) 표시 기호 샤아프(#)의 가로 굵은 획은 100% 이 펜촉이 기여한 것입니다. 쓰레기 통으로 들어가도 5년전에 들어갔을 20원짜리(당시) 이 펜촉은 지금도 제게 있어 너무나 긴요하고 소중한 동역자입니다. 제가 그의 가치를 그만큼 인정하고 알아주기 때문입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제게 편지를 보내와 "전 뭘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어요. 전 세상에 쓸모없는 놈이예요. 죽고 싶어요"하며 탄식합니다. 여러분은 저의 닳아빠진 20원짜리 녹슨 펜촉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누구손에 잡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인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가치와 쓸모'를 가장 잘 아는 주인의 손에 우리가 잡히기만 하면 마치  저의 그 고물 녹슨 펜촉처럼- 다른 이에게  있었더라면 벌써 5년전에 쓰레기통에 들어 갔을  터인데 오
히려 지난 5년동안 수백곡의 찬송악보를 그리는 일에, 그리고 수백 수천 페이지의 각종  중요한 책자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도구로 쓰임을 받은 그 펜촉처럼-  세상에서 아무 쓸모없는 쓰레기와 같은 존재라고 탄식했던 우리 인생이 참으로  소중한 일들에 귀하에 쓰임받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우리 인생의 참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애 전체를 맡길  만한 유일한 참 주인이십니다. 그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인류역사를  통해 수없는 사람들이 전들의 생애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주인)님으로 모셔들인 이후 이웃을 위해 놀라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수는 완전한 장님이었으며,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장애자였으며, 걷지 못하고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하는 이들이었으며, 남들에  비해 누가 보더라도 '충분히(?)' 열등한 부분이 많았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예전의 그들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만으로 우리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쓸모 없는 존재에서 참으로 소중한 도구로 주님의 손에 의해 쓰임받기 위해선 우리 인생에 대한 주권(主權)을 예수 그리스도께 내어 드려야만 합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행위가 "전  천하에 쓸모 없는 인간이예요. 전 구제불능이예요."라고 탄식하던 입을  다무는 것입니다. 도구의 가치는 도구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구를 사용하는 주인이 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쓸모 있는지 없는지를 여러분이 결정하지 마십시오. 그 결정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스스로가 평가하는 것만큼  '건방진'일은 없습니다. "아니예요. 나는 내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요.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예요" 제가 십대 때 바로 그랬습니다. 저는 [사내자식]이 허구헌날 책상앞에 앉아 그림이나 그리고 문집이나 만들고, 영어 수학에는 깡통이었으며, 체육은 늘 [미]나 [양]인... 천하에 쓸모없는 [사내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제 생애의 주도권을 넘겨 드린 이후 저는 비록 볼품없어 뵈긴 하나 평생을 투자해 헌실할 만큼 가치있는  일에 열심으로 쓰임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무서운 적은 실제적인 우리의 무능력이 아니라 "아냐. 난 소용없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어"라는, 스스로에 대한 탄식과 그릇된  평가입니다. 남들보다 부족함이 많음-  신체적 결함, 지능의 열등, 학력. 환경의 열등-  이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무용지물(無用之物)임을 의미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거니와 저의 5년된 20원짜리 고물펜촉을 기억하십시오. 남들에게는 쓰레기이나 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도구요 동역자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께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이런  엉터리 같아 보이는 제 자신도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을 터인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께서 모른체 하실 것 같으십니까? †

 ⊙ 머리 나쁜 죄입니다 : 저와 아내가 사고 있는 1층에는 모두 네 군대의 수도시설이 있는데 수도꼭지는 여덟개나 됩니다. 저희 전용 욕실(안방에 붙어있는 조그만)에는 세면기와 샤워기가 있는데 냉.온수 꼭지가 따로 있지 않고 한 꼭지로 조절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늘 욕실에 들어서면 헷갈리게 됩니다. 같은 회사 제품인데도 한 군데(세면기인지 샤워기인지)는 손잡이를 올리면 물이 나오고, 다른 곳에선 손잡이를 내려야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의  아이.큐로선 이 정도의 상황만으로도 족히 엄청난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조건입니다. 집을 수리해서 입주한지 벌써 8개월째인데 아직까지도 솔직히 세면기가 위로 올리면 물이 나오는지 샤워기가 그런지 외우지 못하고  지금도 열심히 헷갈려서 낑낑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비극은 이런 수도꼭지가 1층에만 여덟개나 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머리가 돌 지경입니다.
 그런데 저를 더욱 '환장'하게 만든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어떤 수도 꼭지는 달려있는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따뜻한 물이 나오는데 그 옆에 있는 수도꼭지는 왼쪽으로 돌려야 따뜻한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왜 머리카락이 이렇게 많이 둘러빠졌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이건 약과입니다. 1층 현관쪽에 있는 사무실 화장실인지 어디 다른 곳인지 모르겠는데 아니 거기는  공사하시는 분이 실수로(실수가 아니라 고의라면 이는 필시 저의 정신착란을 노린 사탄의 계략일 것입니다) 냉.온수 관을 반대로 수도꼭지에  연결한 탓에 곡 같은 샤워기라도 다른 데는 왼쪽으로 돌려서 내리면  온수가 나오는데 이곳에선 반대로  오른쪽으로 돌려야 온수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샤워기=아래=왼쪽 이라고 반년동안이나 겨우 외운 공식도 아무 쓸모가 없게 됩니다. 오 주님!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까?
 저는 외우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렇찮아도 머리가 나빠서 고생이 심한데 화장실에 들어가 손 하나 씻으면서도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다니! 닥치는 대로 아무렇게나 눌러 보고 돌려보다가 물이 나오면 그걸로 감사해야지 그렇지 않고 일일이 외워서 하려했다간 일주일도 못되어 정신분열증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샤워라도 하려고 따뜻한 물이 나오게 하려면 아마 저는 두통약을 스무개는 먹고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오! 그때가 좋았습니다. 찬미 사무실 한쪽 방을 꾸며 신혼생활을 하던 그때 말입니다. 그땐 그저 수도꼭지를 틀면 차가운 물이고, 큰 양동이에 그걸 받아서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데우면 그게 온수였습니다. 그땐 적어도 수도꼭지 때문에 두통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편리하게 만든다고 연구해 놓은 쇳조각들이 왜 도리어 저로 '환장'이니, '정신분열'이니, '머리가 돌 지경'이라느니 하는 용어를 쓰게끔 만드는 것입니까?
 제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오늘, 이 문제 때문에 수박밭에 앉아 곰곰히 묵상해 본 결과 두가지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첫째는, 수도꼭지로 인한 이 모든 [고난]은 제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지 수도꼭지는 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예수마을에 십여명이 살지만 수도꼭지 때문에 '환장'하는 사람은 최용덕이밖에 없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다들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더우기 같은 1층에 사는 아내조차도 말입니다.
 우리의 생애에  일어나는 많은 '고난' 가운데 대부분은 사실 우리 자신이 잘못해서 자초한 것들이라는 점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공부를 안해서 낙제를 해놓고 하나님께 원망을 하는 건 당치도 않습니다.
최고 제한속도가 시속 100Km인 고속도로에서 시속 120, 130Km로 달리다가 차가 뒤집어졌는데 중환자실에 누워 '오, 하나님.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억울합니다'라고 끅끅대는 건 한대 더 맞을 짓입니다.  방만하고 무계획적인 경영으로 부도를 맞아 사업이 망했다면 그건 우리 책임이지 하나님 책임이 아닙니다. 온갖 부정직하고 약삭빠른 세상적 방법으로 사업을 해 놓고는 쫄딱 망한 이후 '하나님께서 내 사업을 막으셨다. 신학교에 가라고!' 한다면 그건 코메디입니다. 길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자빠져서 뒤통수가 깨진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 탄식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길을 잘 살피지 않고 간 탓밖에 다른이유가 없습니다.
 가족들 식사도 챙겨주지 않고 교회일이라며 돌아도니다가 남편에게 얻어 터져 눈두덩이가 앞산만해 진 걸 가지고 신앙적 핍박이니 순교니 사탄의 방해니 하는 것도 옳은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매사를 주님의 뜻과 연결시키는 태도는 좋은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에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가 무의미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어떤 쪽으로 하나님의 뜻을 적용시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길을 정신없이 뛰어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자빠져서 코가 깨졌을 때, 우리는 쌍심지를 돋구고 "하나님! 제 발앞에 왜 돌이 있게 하셔서 저를 이렇게 고생시키십니 까?"하고 원망하는 것으로 [시비거시는 하나님]의 심술로 그 뜻을 해석할 수도 있고,그와는 달리  "아이고 주님! 제게  멀쩡한 눈과 충분한 판단력과 육체적인 기능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조심하지 않아서 이렇게 주님께서 허락하신 귀한 몸을 상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며 주님의 뜻을 생각하는 길도 있습니다.
 잘못은 우리가 해 놓고, 그리고 정작 손해보신 이는 하나님이신데, 우리는 뻑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이렇게 해서 내가 이와같은 시련을 겪고 있다. 오... 그렇지만 억지로라도 감사해야지. 하나님께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으니까"라며 간증하고 떠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대단한 아량을 보이는 셈이 됩니다. "이번엔 제가 하나님 봐 드리지요"하는 꼴 아닌가요?
 대학 4학년 2학기 때 공부는 안하고 [크리스챤 문화공간]을 운영한다며 친구와 함께 방세 다 뽑아서, 게다가 힘에 겹게 빌려서 대학교 앞에 50평짜리 홀을 꾸며 놓고는 발버둥치다가 저희는 쫄딱 망했습니다. 돈 다 날리고 졸지에 우스겟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때는 100일 작정 회개기도를 해야합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잘못했다고, 분수에 넘치는 무모한 계획과 운영으로 오히려 주님 마음 아프게 해 드리고 주님 이름 욕되게 했다고, 살려 달라고 주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희는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바보들 같으니라구는!)
 어느 한 형제가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주님께서 전기대 입시에 낙방케 하셨습니다. 주님의 특별하신 뜻이 있는가 봅니다. 왜 저를 떨어지게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주일 성수도 잘하고 기도도 많이 했는데 막상 대학에 떨어지고 보니 너무 억울하고... 하나님이 밉기도 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녔는데 그만 대학입시에 떨어졌기 때문에 교회다니는 걸 때려 치웠다는 사람들을 보면 참  답답합니다. 그걸 가지고 주님께 대한 신앙까지 들먹이는 걸 보면 "아이고 이 사람아!" 싶을 때도 있습니다.
 대학입시에 떨어진 것에 대한 주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하나는, 성적이 합격선에 못 미쳤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그만큼 안했든지, 저처럼 머리가 안돌아가든지 말입니다. 성적이 안 되어서 대학에 떨어진 것이지 주님께서 답안지를 조작하신 게 아닙니다. 공부를 안해서 성적이 잘 안 나왔든, 머리가 안 돌아가서 죽도록 했는데도 성적이  잘 안 나왔든 어쨌든 말입니다. 그걸 가지고 왜 하나님께 시비거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건 순전히 [우리]선에서 책임져야 할 문제입니다.  오히려 우리 능력은 학력고사 220점 수준인데 실제 학력고사에서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290점을 얻게 되었다면 그건 '감사헌금'대상 1순위 제목이 아니라 무서워서 벌벌 떨어야  할 일이거나 하나님께 '항의'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뜻이 있는데 그것은 대학  학력고사 성적은 그 사람의 능력과 노력만큼 나온다는 것입니다.
 백일 작정 새벽기도까지 했는데 자기 아들이 대학에 떨어졌다고 예수욕을 고래고래 내지르며 돌아다니는 엉터리 기독교인들을 봅니다. 그런 신앙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모욕입니다. 흔히 입시철이 되면 교회마다  '입시생을 위한 OO일 특별 기도회'를 여는데 평소보다 몇 배는 되는 학부모 교인들이 나온다고 합니다. 만약 그 기도회에 나와서 "우리 동팔이 대학에 꼭 붙게 해 주시고,  우리 춘심이 고등학교에 꼭 붙게 해 주십시오. 비나이다. 비나이다"라는 기도를 날이면 날마다 하고 있다면 그건 하나님을 3류 잡신으로 대접하는 꼴입니다. 우리 자녀들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겨우 대학입시합격 여부 하나로 평가하고  신앙한단 말입니까? 이럴 땐 그저 하나님은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우리를 애처롭게  바라보시며 침묵하실 수 밖에 없으신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3학년때에도 주일 예배와 성가대만큼은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떤  이들은(교회 장로님들도 계셨는데) "야  이놈아! 고3이 집에서 공부나 하지 왜 교회에 얼쩡거리냐?"고 책망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에 대한 신앙을 내팽개쳐 가면서까지 학력고사(당시는 예비고사) 점수를 한 두점 더 얻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공부 한답시고 교회 주일예배에 한 두번 빠지다 보면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급격하게 쇠락해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흔희 "이번 1년만 교회를 쉬고 대학들어가서..."하는 고3치고 나중에 대학생이 된 후 제대로 주님을  섬기며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이들이 무척 드문 것은 이미 그 1년동안 그들의 영적인 건강이 중환자실에까지 갔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무서울 정도로 지키고(이 말이 무엇을 뜻하지요?) 성가대까지 해도 평소의 모의고사 점수는 그런대로 잘 나온 셈이었고 그 정도면 국립 B대학 건축과는 합격할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실제로 치른  학력고사(당시 예비고사) 점수는 평소보다 20여점이나 깍여 버렸습니다. 덕분에 저는 2류인지 3류인지 어쨌든 지방 Y대학 건축과를 지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눈꼽만치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었습니다. 원망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평소 실력만큼도 점수가  안 나온건 제가  시험을 잘 못치룬 때문이지 하나님의  '장난'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가  주일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성가대까지 한 건 주님께 대한 사랑과 제 자신의 영적 건강을 유지 위하여 때문이었지 나중 학력고사에서  하나님의 비상한 간섭으로 플러스 알파의 점수를 더 얻기 위함이거나, 제가 주의 일에 대해 헌신한 댓가로 일류대학 입학 합격장을 받아 내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나타난 결과에 대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원망을 한단 말입니까?
 제가 깨달은 두번째 사실은, 이렇게 한심한 사람까지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며, 또 적절하게 쓰신다는 것입니다.
 수도꼭지때문에 머리카락 다 둘러 빠진다는 저의 고백을 듣고 적어도 70%의 사람들은 "아이고 이 인간아!  인간아! 왜 사니?"라며 저를 측은히 여기셨을 것입니다. 참 제가 생각해도 한심한 제 자신입니다.
 그뿐입니까? 저의 머리가 상당히 돌이라는 사실 외에도 저는 정말 '심각한' 건망증 환자입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제가  스스로에게 붙인 별명이 [금붕어]입니다. 왜 하필 금붕어냐구요? 그건 금붕어의 기억력 유지시간이 0.2초밖에 되지 않는다는 '과학적 근거'에 의해서 말입니다.
 책상에 앉아 있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일어나 방문을 나섰는데 주방까지 와서는 "내가 왜 여기 왔지?"하는 정도는 늘 있는 일입니다. 아내나 삼도봉 예수마을 식구들, 찬미식구들은 이미 저의 기억력에 대해 포기한지가 오래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렸던가요? 하도 잘 잊어 먹어서 꼬박꼬박 수첩에 메모를 해 두었는데 문제는 그 수첩을 갖고 다니는걸 영낙없이 잊어 먹는다든가, 아니면 수첩이 옆에 있어도 그 메모를 보는 일 자체를 까마득히 잊어 버린다는 '전설' 말입니다.
 기껏 한 두번 밖에 만난 적이나 전화통화를 나눈 적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저에게 "아...저.. 누구누구입니다. 왜  그때 거기서 뵈었지요?"하고 정색을 하고 반갑다고 손을 내미시는 분들은 저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 분들입니다. 설령 제가 "아 예예! 아- 이거 반갑습니다!"하고 반가와하는 척 하더라도 그 대부분은 상대방이 상처입을까봐 하는 저의 '쇼'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이런 멍텅구리 기억력은 대인관계, 사회생활에서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아!- 슬픈 이야기입니다. 최용덕이란 사람은 동정을 충분히 받을 만한 사람 아닙니까?
 그러나, 이런 사람도 하나님께는 [금이야 옥이야]라는 사실을 또한 아십니까? 여전히 저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여전히 저는 하늘나라를 이룰 백성이며, 여전히 저는 주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받으며 사는 주님의 소유입니다. 제가 아무리 멍청하고 똥고집이고 한심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보다 더욱 확실하고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이런 저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며,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하셨다는 점입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영원히 나와 함게 하겠다고 하셨는데 제가 무엇때문에 기가 죽는단 말입니까? 오히려 배짱을  튕기며 히히덕거리며 살 만 하지 않습니까? 까짓거, 수도꼭지... 그런거 때문에 제가 혀를 빼물고 삶의 회의를 느낀다는 게 말이 됩니까?

 오늘 하루 동안에도 제 자신의 '한심한 꼬락서니'를 백가지는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를 기대하시며 오늘도 주님 섬기는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살려  두시는데 제가 왜 죽는단 말입니까? 오히려 열심히 살겠습니다. 열심히 말입니다.

 사실은 얼마전, 아침에 안방 화장실에 들어섰다가 이마를 윗 문턱에 힘껏 들이 받았는데 손을 씻고 돌아서서 나오다가 더블로 또 다시 이마를 들이 받았습니다. 저녁에 머리 감으러 들어 가다가 또 다시 이마를 들이 받고 뒤로 나자빠졌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날 뇌세포가 400개는 죽는 바람에 머리가 더 돌이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이큐가 80은 넘을 겁니다. 기억력 유지시간이 0.2초인 금붕어도 열심히 사는데 제가 열심히 못 살 이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하루에 세번씩이나 이마를 문턱에 들이 받던 날 밤... 솔직히 '아파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눈을 뜨니 제가 여전히 살아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할렐루야!
 또 다시 '하루'의 삶의 기회를 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거듭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열심히 주어진 생애를 살겠다는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아내가 들어와 "여보!  전번에 김천나갔을 때 예수마을 물건사면서 제 지갑에서 빌려갔잖아요.  2만원! 주세요"라며 천연덕스럽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래? 그랬어? 그럼 줘야지"하며 일어나 은경이한테 돈타러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저의 뒤에서 끌어 안으며 깔깔댔습니다.
 "아 아녜요. 거짓말예요. 아유 재밌어! 아니, 정말 그렇게도 모르시겠어요?
그렇게도 생각이 안 나신단 말예요? 신기해!" "....."
 그렇게 상대방에서 진지하게 나오면 백이면 백 속을 수 밖에 없는게 저의 한계입니다. 그래도 저는 이런 멍청한  제 자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때문에. †

 * 물론 때로  주님께선 우리의 삶에 급격한 전환점을 만드시기 위해 상식과 일반적인 법칙을 뛰어넘어  개입하시기도 한다는 점을 덧붙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허락하시는 고난과 어려움, 실패도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때문에 크리스챤에겐 의미없는 실패, 의미없는 고난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자초한 고난이라면 우리 자신을 겸허하게 만드는 보약일 것이요,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주어지는 고난이라면 우리를 성숙되게 인도하는 멋진 훈련과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남에게도 같은 비판의 기회를 주라
   마 7:1-5; 롬 2:1-5; 신 16:19
 베토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잘못을 범한다.  그러나 각자가 다른 잘못을 범한다."
사무엘 존슨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늙으면 관대해진다. 다른  사람이 저지르는 어떤 잘못을 나자신 또한 저지를 수 있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죽어 땅에 묻히기까지는  심판을 보류하신다. 그런데 어째서 나나 당신은 남을 심판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의견을 의견대로 표현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당신의 개성을 큰소리로 드러내라! 그러나 당신의 친구에게고 같은 특권을 주고, 그를 비판하려 하지 말라. 나도  그와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 때 우리는 남을 판단함에 신중할 수가 있는 것이다.


 內助의 힘
   직장에서 해고당한 사람이 있었다.절망하며 집에 돌아가 아내에게 이야기했을 때 아내는 반색을 하며 말했다.『드디어 당신이 문학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군요.해고당한 일이 얼마나 좋은 기회가 되었다는 것을 알기나 하세요』아내는 남편을 격려한 뒤 돈을 꺼내 놓았다.『이럴 줄 알고 당신봉급에서 따로 마련해둔 돈이예요.당신이 명작을 쓸 동안 이 돈으로 살아요』 나타니엘 호손의 명작 「주홍글씨」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시련은 도약의 기회
한 신실한 목재소 직원이 있었다.
그는 40대 초반에 회사에서 청천벽력같은 해고통보를 받았다.극심한 불황으로 더이
상 버틸 힘이 없게된 회사측에서 감량경영을 선언한 것이다.
갑자기 실직자가 된 이 중년 남성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해고에 담긴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는 건전한 사람들이 묵을 수 있는 여관을 시작하라는 음성을 듣고 전혀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람이 바로 세계적인 사업망을 거느린 호텔 `홀리데이 인'을 창업한 케몬스 윌슨이다.그는 눈앞에 해고통지서를 놓고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았다.
시련을 도약의 기회로 삼았다.만약 케몬스 윌슨에게 `해고통보'가 날아들지 않았다면 그는 목재소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약속도 기회를 잃으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여행중 한 시골집에 들렀는데 그 집에서 나이 어린 한 소녀를 만나게 됐다.소녀는 그가 허리에 차고 있는 가죽가방이 부러워 칭얼대며 엄마에게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톨스토이는 다음 날 다시 오겠노라며 그 집을 떠났다.
울며 보채는 소녀에게 자기의 가방을 선물하기 위해서였다.가방 속엔 문서와 각종 여행용품이 들어있기 때문에 당장 줄 수는 없었다.다음날 톨스토이는 약속대로 빈 가방을 들고 그 집을 찾아갔다.하지만 그 소녀는 지난밤 세상을 떠난 뒤였다. 결국 톨스토이는 그 소녀의 관 곁에 가방을 놓아둔 채 그 곳을 떠나야 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그것이 크든 작든,그리고 누구와의 약속이든 지켜야 한다.작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큰 약속도 지키지 못한다.또한 만사에는 기회가 있다.그 기회가 지나간 다음엔 약속된 행위도 별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공약의 남발이 춤추는 계절이 다가온다.제발 이번에는 거짓말쟁이들의 무도회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기회를 놓치지 말라
기회를 놓치지 말라 (사단의 전략회의)
원수 마귀 사탄은 성도들이 기회를 놓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사단과 그의 졸개들이 성도들의 신앙생활 방해 공작을 위한 전략회의를 열었습니다. 젊은 엘리트 출신의 마귀가 크리스챤을 죽이고자 할 때에 늙은 마귀가 순교는 교회의 씨가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때리면 매 한 대에 예수가 열도 더 생긴다고 경고를 했습니다.
감옥에 가두자는 제안도 있었습니다. 가두면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의 역사를 크게 일으키므로 손해라고 했습니다. 그 보다 더 좋은 전략이 없을까 하고 고심하고 있을 때에 늙고 지혜로운 마귀가 지혜를 짜내었습니다. "열심히 전도도 하고 사랑도 하자. 그러나 내일부터 하자"고 속삭이자는 전략이었습니다. 이 전략이 마귀의 최대 성공전략이었습니다.
히말라야 산 속에를 가면 야맹조라고 하는 새가 있다고 합니다. 이 새는 낮이면 신나게 즐기다가 밤이 되면 잘 둥지가 없어서 다른 새의 둥지에 가서 거하며 밤새 구박을 받는 답니다. 그는 서러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내일이면 집지으리","내일이면 집지으리"하고 구슬프게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맹조는 자기의 일생이 다가도록 집을 짓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단은 다음에 하지, 내일하지 하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유혹합니다. 그러나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바로 오늘, 지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

기회의 진실
고대 희랍 올림포스 신전에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Chronos)의 신상이 있었습니다.
이 신상은 벌거숭이 젊은이가 달리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발에는 날개가 달려있고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칼이 들려있으며 이마에는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늘어뜨려져 있지만 뒷머리와 목덜미는 민숭민숭한 모습이었습니다.
이 신상을 본 시인 포세이디프(Poseidipp)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간은 쉼없이 달려야 하니 발에 날개가 있고 시간은 창끝보다 날카롭기에 오른손에 칼을 잡았고 시간은 만나는 사람이 잡을 수 있도록 앞이마에 머리칼이 있으나 시간은, 그러나, 지난 후에는 누구도 잡을 수 없도록 뒷머리가 없다.
시간은 곧 기회입니다. 한 번 놓친 기회는 다시는 그 앞이마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언제나 좋은 기회가 올 수 있다
파리에서 실존주의 여성으로 명성을 얻은 뮤즈 주리엣 쿠레코는 너무 가난한 탓에 미장원에 가지 못하고 긴 머리를 그대로 기르고 남자용 바지를 입고 다녔다. 그의 옷차림을 보고 흉내내는 젊은이들 덕분에 그는 실존주의자로 이름을 내게 되었다. 1940년 초반에 아버지를 여읜 그녀는 어머니,언니와 함께 어렵게 살았다. 지하철을 탈 돈이 없어 빈손으로 나갔다가 우연히 바닥에 떨어진,사용하지 않은 차표 한 장을 주워가지고 어머니의 친구인 연극인 아도레스를 찾아갔다. 아도 레스는 그를 유명한 듀상느 부인에게 소개해주었고 부인은 그의 연기를 보고 30명이 파도의 시늉을 내는 연기에 출연시켰다.
1944년 파리의 다부란 곳에 미국인들이 자주 드나든다는 소식을 듣고 갔다가 쿠레코는 우연히 사르트르를 만나게 되었고, 마침 미국의 유명한 잡지 라이프(LIFE)가 전후의 상황을 쿠레코의 얘기를 중심으로 소개했다. 그는 삽시간에 실존주의의 여왕으로 불렸다. 사람에게는 언제나 좋은 기회가 그렇게 올 수 있다.


준비된 자와 기회
세계적인 명지휘자 토스카니니(1869∼1957)는 원래 첼로 연주자였다.불행하게도 그는 아주 심한 근시여서 잘 보지 못했다.토스카니니는 관현악단의 일원으로 연주할 때마다 앞에 놓인 악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늘 미리 외워서 연주회에 나가곤 했다.
그런데 한번은 연주회 직전에 지휘자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그 많은 오케스트라의 단원 중에 곡을 전부 암기하여 외우고 있던 사람은 오직 토스카니니뿐이었다.그래서 그가 임시 지휘자로 발탁되어 지휘대 위에 서게 되었다.그때 그의 나이 19세였고 세계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번 2002년 월드컵을 통해서 수많은 새로운 축구스타들이 탄생하고 있다.독일의 클로제,포르투갈의 파울레타,한국의 안정환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준비된 자에게 늘 새로운 기회는 온다.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것이다.더 아름다운 미래를 위하여 오늘을 투자하지 않겠는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을 거두리로다”(시 126:5)

기회
로마의 핍박 때 12명의 성도들을 체포해서 마지막에 죽이는데, 추운 겨울날 얼음 구멍을 12개 뚫어 놓고 각각 목 위에 머리만 남기고는 얼음속에 집어 넣어 얼려서 죽였다.
그때 그 옆에는 박해자들이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이제라도 예수만 배반하면 살려 준다고 꾀였다.
그러나 모볕관| 나를 위해 피로 사서 영생을 허락하신 예수님을 배반할 수는 없다고 일편
단심 절개를 지켰다.
그때 하늘에서는 12천사가 12개의 면류관을 가지고 그들에게 씌워주려고 내려왔다. 그러나 웬일인가 12명중 한 사람은 너무나 몸이 얼려오니 견디지 못하고 나 예수 버리겠으니 살려 달라고 했다.
물론 그는 얼음 구멍에서 나와 살았다.
그때 박해자들 중 한 사람이 하늘을 쳐다보니 12개의 면류관을 갖고 내려오다가 한 천사는 섭섭하다는 듯이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올라갔다.
그때 그는 `나 예수를 위해서 죽겠오`하면서 얼읊| 구멍 속으로 뛰어들어가니 다시 천사가 면류관을 갖고 내려와 씌워 주었다 한다.

 

부자가 될 기회를 놓친 마크 트웨인
마크 트웨인은 몇 번이나 쓸모 없는 발명품에 투자했다가 돈을 몽땅 날려버린 경험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웬 낯선 사람이 찾아와서는 이상하게 생긴 물건을 자기가 발명한 것이라고 보여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행운을 사라고 강요하지는 않겠소. 하지만 당신이 5달러만 낸다면 그만한 몫을 얻을 수 있을 거요."
그러나 마크 트웨인은 싫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 발명품도 쓸모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그의 집을 떠났다.

 

고통은 새로운 기회이다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태어난 비버리 스미스는 특수한 병을 가진 소녀이다.
머리를 다쳐 피가 흘러도, 뜨거운 물에 손이 데어서 화상을 입어도 울지를 않는다. 잘 참아서가 아니라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중추신경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데, 아직 치료방법은 없다고 한다.
이 소녀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울지 않을 뿐 아니라 위험한 것을 자각하지도 못한다. 이런 것을 보면 사람이 아픔을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혜택인지 모른다. 사람에게 아픔의 자각은 꼭 필요하다.
데이비드 브린클리라는 사람은 "신은 가끔 빵 대신 벽돌을 던져주시는데, 어떤 사람은 원망하면서 그 벽돌을 차다가 발가락 하나가 더 부러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벽돌을 주춧돌로 삼아 기막힌 집을 짓기도 한다"는 명언을 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인 귀족 세 가족이 가장 안전한 곳을 연구한 결과 오키나와 섬으로 결정짓고 그리로 피신을 했다. 그러나 그곳이 가장 위험한 격전지가 되고 말았다.
어둠이나 아픔이나 고통을 피해 다니기만 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대부분 도리어 그것에 삼킴을 당하고 만다. 서양 속담에 "고난은 맞서서 이기고 죄는 피해서 이기라"는 말이 있다.

 

 

기회와 능력의 달란트
달란트의 비유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쓰이는 것으로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천부적 재능 또는 성령께서 부여하시는 영적 능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에 대해 다른 한 가지의 해석을 제시할 수 있다. 즉 달란트는 우리가 그를 섬기도록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 기회들을 각각 그 재능에 따라 선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능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아 주님을 섬기는 일에 적합한 자질이 합당한 것과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안에서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능력을 포괄한다. 달란트는 우리가 처한 곳에서 채울 수 있고 또 기회를 선용하는 재능의 범위 안에 있는 기회들을 가리킨다.
이제 "밤이 다 가고 낮이 가까우므로" 오늘날의 이 시점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최선을 다해 선용하도록 하자. 기회를 어떻게 잡아서 어떻게 선용할 것인가는 사도행전에 잘 나타나 있다.

 

두 번째 주시는 기회 (1)
요나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아주 귀한 기회를 주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요나에게 큰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순종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와는 반대 방향인 서쪽으로 발을 돌려 욥바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니느웨 사람에게 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에 선가를 내고 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도망하려는 방향으로 가는 배가 때마침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일에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하려고 하면 마귀는 언제나 우리를 위하여 도망갈 수 있는 배를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피하여 도망가는 사람의 길이 처음에는 아주 순조롭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는 요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잘했지. 물론 내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야. 그러나 어떻게 그대로 할 수 있나? 그렇게 하느라고 고생하는 사람들이 못났지. 아, 나처럼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지만 내 마음에 안들면 안하면 되고, 그대로 있기가 거북하면 이렇게 도망하면 될 것 아니야. 사실 나는 내가 하기 싫은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누가 말한다고 해도 하지 않을 거야. 자, 이것 봐. 나 같은 사람이 타고 가는 배인데도 이거 얼마나 잘 가는가 말이야.' 이렇게 속으로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꾸만 떠올라서 아예 잊어버리고 싶어서 배 밑창으로 내려가 구석진 곳에서 잠이 들었었습니다.
지난 주간 어느 집사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요나가 배 밑창에 내려가 잠을 잘 수 있었을까요? 잠자는 것은 마음이 편해야 되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가는 신세에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편했을까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요나가 깊이 잠이 들었다고 했거든요? 풍랑이 일어난 것도 전혀 모르고 선원과 선객들이 제각기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찾으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있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잠이 깊이 들었거든요." 그래요. 잠잘 수 없는 사람, 잠자서는 안될 사람이 잠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명을 잊어버리면 양심이 마비되니까 이런 꼴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사람 삼손도 나실 사람으로 구별되게 자랐고, 구별되게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의 신분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더구나 이스라엘 민족의 원수인 블레셋 여인과는 절대로 가까이할 수 없고,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의 신분을 망각하고 원수 나라의 간첩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깊이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종래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요나는 자기 생각에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시편기자의 말대로,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할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할 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가 순조롭게 가는 것 같더니 얼마 가지 아니해서 강한 바람이 불며 풍랑이 일어 배를 까불기 시작했습니다. 이것 보세요. 하나님을 떠난 사람에게 영원한 행복, 영원한 평화, 영원한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요나가 타고 있는 배의 선원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배는 파선 직전에 이르러 더 이상 항해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선적을 가볍게 하려고 배에 싣고 가던 모든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선객들은 당황해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르고 자기가 믿는 신들을 부르며 야단법석이었습니다. 그런 난리 통에 잠자던 요나는 배 밑창에서 선장에게 발견되어 야단을 맞고 자기가 하나님의 사람이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하는 길이라고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글쎄,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풍랑 만난 이유를 알게 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둘러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이때 요나는 말했습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세요. 이런 어려움을 당하게 된 것이 나 때문입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그것이 범죄로 인한 것이라면 그 죄를 청산하기 전에는 아무리 다른 방법으로 인간의 최선을 다 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에서 요단강을 기적으로 건너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순종했더니 여리고성을 손가락 하나 대지 아니하고 몰락시키는 감격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성에서는 비참할 정도로 패배의 쓴 잔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 패배의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성경은 그 원인이 한 사람의 범죄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여리고 성의 전투에서 거둔 전리품 가운데서 외투와 은과 금을 훔친 사람의 범죄가 아이성과의 전투에서 패전한 결정적인 원인이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 7장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여리고 성을 점령하면 그 성안에 있는 물건이나 돈에 손을 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물건이 탐이 나서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 40년을 아무 것도 없이 지냈는데 이제 여리고 성에서 좋은 물건보고 돈을 보면 자연히 욕심이 생길 것인데, 거기에 마음을 쓰다 보면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데 차질이 생길 것이니까 미리 막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간이란 사람이 욕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바쳐진, 손대지 말아야 할 물건과 돈을 누구도 모르게 훔쳤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엄청났습니다. 아간 한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 전체에게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습니까? 만일 아간이 자기의 행동이 이스라엘 자손 전체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생각을 했었다면 그 결과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한 사람이 행한 일이 우리 민족에게 미칠 영향이 어떨까 하는 것을 생각했다면 우리의 행동이 얼마나 달라질까요?
'나 한사람쯤이야' 하는 사고방식으로 혼자 은밀히 취한 행동은 나 혼자만의 행동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아간을 아골 골짜기에서 처치하고 나서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하셨고, 다시 기회를 주셔서 아이 성을 점령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치 아니하고 피하여 도망하는 일이 이렇게까지 엄청난 사건이 될 줄을 요나는 미처 생각지 못 했었을는지 모릅니다.
제비가 자기에게 뽑힐 때 그는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이 당한 이 어려움은 나 때문입니다. 나를 바다에 던지세요" 우리는 어려움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 난국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야당 지도자 때문이라 하고, 야당 지도자는 대통령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하니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요나의 잘못은 큽니다. 그러나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책임진 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선원들은 결국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해 두셨다가 요나를 삼켰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특별한 사건을 위해서 마련한 물고기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볼 수가 있습니다. 범죄한 인간이지만,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어려움을 안겨준 사람이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때 하나님은 그를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요나서 2장은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한 장면입니다.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불순종한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변화되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기도를 배웠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요나서 2장 10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요나는 뛰쳐나왔습니다. 이 날은 요나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날이었습니다. 그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요나서 3장 1절을 보세요.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 중요한 세 단어를 발견합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1장에서도 우리는 이 세 가지 명령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요나는 다시 두 번째 명령을 받습니다. 이때 요나가 어떻게 응답합니까? 1장에서는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2장에서는 요나가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달려옵니다. 2장 4절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하면서 달려옵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교제를 회복했습니다. 요나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과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중에 가장 중요한 말씀은 3절입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 길이라."
2장에서는 요나의 시선이 하나님께로 향했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했던 요나가 3장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하나님과 함께 일합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한 요나에게 한 번 더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다시 주시는 은총의 기회였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만 말씀하시고 그것으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으로 모든 것을 끝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세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십니다. 이 은총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시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3절에 보니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했습니다. 요나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났습니다.
4절 이하의 말씀을 보니까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4-6절) 했습니다. 요나의 사역이 드디어 니느웨 왕을 회개하도록 만들었습니다.(계속)


기회를 놓치지 말라(3)
기회를 놓치지 말라(3) 본문: 엡5:16, *찬송:329장, 370장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뉴욕을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오고 있던 여객선 센트랄 아메리카 호가 바다 한 가운데서 고장을 당해 배 안으로 물이 새어 들어오게 되어 구조요청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마침 부근을 지나던 다른 배가 이 구조 요청의 신호를 보고 달려와서 사람들을 모두 자기들의 배에 옮겨 싣도록 했다. 그러자 고장난 배에서는 다음과 같은 답변이 오는 것이었다. "옆에서 좀 기다려 주시오 지금 캄캄한 밤에 사람들을 옮겨 싣자면 큰 혼란이 올 것이니 우리가 어떻게 고장을 고쳐 보도록 하고 안되면 밝은 아침에 옮겨 싣도록 합시다." 지나가던 배는 다시 한 번 옮겨 실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전달했으나 답변은 여전히 좀 근처에서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구조해 주려고 온 배는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약 한 시간이 지나자 건너편 배의 등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승객들을 그대로 태운 센트랄 아메리카 호는 바다 밑으로 침몰해 버린 것이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에게 임할 때에 잠깐 기다려 달라는 핑계를 하지 마시라. 사정이 복잡하여 어두운 밤 같을수록 당신에게는 그리스도가 더욱 절실히 필요한 것을 깨달으시라. 어리석은 선장처럼 온 가족을 다 이끌고 함께 침몰하지 마시라. 미구에 추수할 때가 이른다.(렘51:33)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히9:27) 그 누구도 심판을 면할 수 없다.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후회하게 된다. 쇠가 뜨거울 때 두드려라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삼상10:7)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1-12) 기도: 사랑의 주님,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지켜 주시고 기회있을 때 죄를 회개하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지혜로운 우리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실패와 기회
 어떤 사람이 링컨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링컨은 "제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야구왕 베이브 루스는 생전에 714개의 홈런을 날렸습니다. 1976년까지는 그가 최고의 홈런 보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1,330개의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했습니다.
뼈아픈 일이 있은 후 영광도 오는 것입니다.
실패 없는 성공이란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불행한 일입니다. 참된 성공은 실패로부터 얻어집니다. 실패를 맛본다는 것은 아픔을 맛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를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실패자라는 말을 가장 싫어합니다. 사실 실패
의 잔을 마셔본 사람은 압니다. 실패한 사람들은 실패의 잔이 얼마나 쓰다는 것을 압니다. 실패하면 단순히 물질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면 평소에 가까이 했던 사람들마저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외로움과 쓸쓸함이 찾아옵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아버님이 하시던 사업이 실패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실패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배웠습니다. 잘될 때 찾아오던 친척들이 아버님의 실패 후에는 발길을 끊었습니다. 실패한 후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무허가 집으로 이주하던 날을 나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런 경험은 결코 나만의 경험은 아닙니다.

 

기회의 값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려는 기회는 절대로 소리 없이 오지는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연인의 기호에 영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따르도록 유혹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
은 당신의 기회에 설탕을 바른 것을 우리 앞에서 흔들어대며 유혹하지도 않습니다. 그 분을 위한 기회 목록에는 모두 가격이 붙어 있읍니다. 그 값은 `희생`입니다. 그 기회는 자
기의 주의 주장과는 담을 쌓은 사람에게만 유효한 것입니다. 언젠가 선교사가 되려고 한다는 분이 제게 와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읍니다. `앞으로 공산화가 되지 않을 지역으로
저를 보내도록 힘써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는 자기의 개인적인 안전이 보장된 환경에서 제한된 시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갖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 에게 그런 곳을 주선해 준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가격은 깍을 수 없다는 것과, 그가 부도가 나더라도 하나님은 그 기회에 구입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배워야만 할 것입니다.

 

위기는 또 한번의 기회
두 번씩이나 아카데미 남주연상을 받았던 명배우 게리 쿠퍼는 본래 대학 졸업 후 만화를 그리다 실패, 무대 뒤에서 주연배우의 대사를 읽어주는 프롬 프터에 불과했다. 어느 날 그가 대사를 잘못 전하는 바람에 공연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실패가 그에게 기회가 되었다. "감봉처분"을 내린 감독은 견습생이었던 그가 주급조차 없다는 보고를 받고 "그러면 그를 엑스트라로 쓰면서 당장 급료를 주게. 그리고 감봉하라구"라고 다시 지시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게리 쿠퍼는 빛나기 시작했다.


옆에서 좀 기다려 주시요(기회)
뉴욕을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오고 있던 여객선 센트랄 아메리카호가 바다한 가운데서 고장을 당해 뱃속으로 물이 새어 들어오게 되었다. 마침 부근을 지나던 다른 배가 구조요청의 신호를 보고 달려와서 사람들을 모두 자신들의 배에 옮겨 싣도록 했다. 그러자 고장난 배에서는 다음과 같은 답변이 오는 것이었다.
"옆에서 좀 기다려 주시요. 지금 캄캄한 밤에 사람들을 옮겨 싣자면 큰 혼란이 올 것이니 우리가 어떻게 고장을 고쳐보도록 하고 안되면 밝은 아침에 옮겨 싣도록 합시다." 지나가던 배는 다시 한번 옮겨 실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전달했으나 답변은 여전히 좀 근처에서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구조해 주려고 온 배는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약 한 시간이 지나자 건너편 배의 등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승객들을 그대로 태운 센트랄 아메리카호는 바다 밑으로 침몰해 버린 것이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에게 임할 때에 잠깐 기다려 달라는 핑계를 하지 마시라. 사정이 복잡하여 어두운 밤 같을 수록 당신에게는 그리스도가 더욱 절실히 필요한 것을 깨달으시라. 어리석은 선장처럼 온 가족을 다 이끌고 침몰하지 마시라.

 

두번째 주시는 기회(2)
아마 세계 선교 역사상 이만큼 놀랍고 성공적인 선교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니느웨 12만 온 시민이 회개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왕이 회개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심지어 짐승들까지 이 거국적인 회개운동에 참여시켰습니다. 이렇게 전 민족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날 때 니느웨시는 새로운 도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쳤습니다. 니느웨시에 내리려 했던 하나님의 진노 재앙이 내리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요나는 니느웨시에서 하나님의 심판만 선포했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요나가 니느웨 시민에게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요나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온 시민이 회개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심판 날에 니느웨 사람이 일어나 이 세대를 심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니느웨 시민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의 복음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회개했습니다. 이상한 것은 오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의 복음을 듣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회개하기를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범한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진리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멀리 피하려 했던 요나를 들어서 구약 성경 가운데 나타나는 인물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고 가장 위대한 전도자로 부각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셨습니다. 만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실패하고 아무리 죄를 범했다고 해도, 그런 가운데 잘못을 깨닫고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하시고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캐묻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수제자였던 베드로를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들에게 잡혀가시게 되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그때는 너희가 다 나를 버리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선생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만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내 생명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나만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면서 맹세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원수들에게 잡히게 되고 대제사장 앞에 끌려가시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멀리서 예수님이 심문 받으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아주 험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는 혼자서 원수들 사이에 끼어 불을 쪼이고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이렇게 되니까 베드로는 은근히 겁이 나고 무서운 생각마저 들게 되고 마음이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이때 어느 비자가 하는 말이 "당신도 역시 갈릴리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세요?"라고 하는데, 이 말을 듣는 순간 베드로는 겁이 나서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지도 못합니다" 하며 말을 더듬었습니다. 한 번만 아니고 두 번, 세 번 맹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때에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네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모른다 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 뛰어나가서 바깥 어두운 곳에서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이때부터 베드로는 매우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주님을 만나 뵙기는 했지만 용기를 얻지 못했었습니다. 베드로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는지 사실 막연했습니다. 그래서 전에 하던 고기잡이나 다시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디베랴 바다에 가서 3년 동안 놓았던 그물을 다시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물에 고기가 걸리지 않았습니다. 밤새 애썼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날이 새어 가는데 예수님이 바닷가에 서 계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 뵙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제자들은 별 생각 없이 그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베드로가 아무 생각 없이 예수님 말씀 그대로 하였더니 고기가 많아 들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베드로에게 귓속말로 "형님, 주님이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깜짝 놀란 베드로는 벗고 있던 몸에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려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이 미리 준비해 놓으신 조반을 흥분 속에 먹었습니다. 그리고 조반 먹은 후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만일 그때 주님께서 시몬에게 "네가 나를 배반하지 않겠다던 것이 어떻게 되었느냐?"라고 물으셨다면 베드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기 때문에, 자신을 살펴본즉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만은 사실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떨리는 마음으로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에게 주님의 양을 치는 위대한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예수를 부인한 큰 죄를 범한 베드로이지만 회개할 때 다시 기회를 주어서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한 번의 실수나 과오 때문에 우리를 완전히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실패의 경험에서 오히려 값진 교훈을 배워 주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실패하고 잘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시인하고 잘못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시 일어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한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달리는 선수라야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좌절하거나 포기할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야 마지막에 성공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약해져서 시험에 들고, 유혹에 빠져서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실패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역사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다윗 왕도 하나님과 사람에게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나단의 충고를 듣고 자기의 죄를 깨닫고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고,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패했을 때 낙심하지 맙시다. 다시 일어나면 소망이 있습니다. 회개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회개한 사람에게는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탕자가 아무리 아버지를 배신하고 멀리 떠나 허랑 방탕하였지만, 잘못을 깨닫고 돌아올 때 아버지는 그를 환영하여 아들의 권리를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아마 이 세상에서 아브라함 링컨만큼 실패를 많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듭되는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더 큰 시도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실패할 때 마귀는 찾아와서 '이제는 끝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게 찾아와서 '더 큰 일에 도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귀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더구나 회개한 다음에는 지난날의 일을 돌아보지 맙시다. 요나가 잘못한 일에 사로잡혀 있었으면 니느웨 성의 큰 역사가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합니다. 죄를 범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 되었으면 회개하고 용서받고, 두 번째 주시는 기회에 전력을 기울여 일해서 놀라운 역사가 우리 하나 하나를 통해 일어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품을 때 역경을 기회로 만든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T.S.앨리어트의 시 ‘바람 주는 밤의 랩소디’에 이런 대목이 있다.열두시/거리의 끝에서 끝으로/달빛의 종합된 주문이 나의 기억을 흔드네/세시 반 가로등은 침을 뱉고/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고민하는 사람을 묘사하면서 자신과의 싸움을 이기도록 이끄는 내용이다.민족시인 윤동주는 그의 서시에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생을 살기위해 처절하게 고뇌했다.동양고전에서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삶의 최고의 낙으로 치기도 한다.공자의 제자중에 자하라는 사람이 있다.그는 초년에 무척 수척했으나 만년에 튼튼해서 잔병이 하나없이 지냈다고 한다.어떤이가 그에게 비결을 물었다.그는 “나는 나와 싸워 이겼기 때문이요”라고 답했다고 한다.성경은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치고 있다.사람은 저마다 외로움과 고민은 있기 마련이다.다만 그것들을 이겨내는 자신이 필요하다.범사에 감사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품을 때 역경을 기회로 만들고,고난을 즐거움으로 변화시키며,원수를 목전에서 패퇴시키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좌절은 기회의 또 다른 얼굴
"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
(시편 32 : 6)
은행원에서 프로 골퍼로 변신. 김정남(45)씨는 은행원으로 근무하다 지난해 10월 명예 퇴직했다.
그는 배명고 시절 봉황기 대회를 우승으로 이끌며 최우수선수에 선정되기도 했던 야구투수였다. 상업은행에 스카우트 돼 10년을 선수와 코치로 지냈다. 그러다 투수에게 가장 치명적인 허리디스크가 왔다. 디스크가 점점 심해지더니 운동을 하기조차 불가능했다. 그때 주위에서 골프를 하면 허리근육이 강화돼 치료효과가 크다며 권유했다.
그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운동을 시작했다. 골프에는 <왕초보>였지만 운동신경이 있어 곧 <탄력>이 붙었다. 강습비가 모자랄 땐 아르바이트로 조달했다. 허리드스크는 점점 나아져갔다. 주위에선 지점장도 안하는 골프를 행원이 한다며 핀잔이 대단했고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친김에 93년 프로에 입문했고 나이 때문에 <티칭프로>를 선택했다. <전화위복>이란 말 그대고 새 인생을 사는 그는 "어떠한 난간이 있더라도 의지만 있다면 더 나은 미래가 열린다."고 말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보여주듯이 완전한 실패나 완전한 좌절이란 있을 수 없다. 어떤 일에 실패한 것처럼 보이고 자신이 처음에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다고 인생을 포기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단지 마음을 바꾸어 얼마든지 자신이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보고 개발하면 더 넓고 다른 세상이 자신의 인생을 기다린다. 한 가지 자신이 계획했던 일이 실패했다고 좌절하는 것은 그 사람의 시야가 좁은 것이며 생각이 경직된 것이다. 따라서 우린 오히려 자신이 계획한 것이나 생각한 것이 잘 안 되었을 때는 인생의 경험과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기회로 삼고, 감사하면서 열심히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 한다.


역경에서 기회포착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
(시편 119 : 71)
1664년 영국 런던에 가공할 만한 페스트가 발생했다. 수백 명의 런던시민이 삽시간에 목숨을 잃었다. 페스트는 맹렬한 기세로 여러 도시에 전염됐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니던 한 청년은 전염병을 피해 울즈도르프라는 시골로 내려갔다. 이곳은 그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작은 시골이었다.
청년은 학문연구에 정신없이 몰입했던 삶에서 벗어나 모처럼 여유를 즐겼다. 청년은 넓은 뜰을 거닐면서 사색에 잠겼다. 한번은 청년에 뜨락에 앉아있는데 사과나무에서 사과 하나가 뚝 떨어졌다. 그는 이것에 의문을 품었다. "사과가 왜 옆이나 위로 떨어지지 않고 밑으로만 떨어지는 것일까. 땅에 사과를 잡아당기는 힘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이 청년의 이름은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뉴튼이었다. 이날 청년이 발견한 것은 그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이었다. 역경을 만날 때 오히려 여유를 갖고 신중하게 탐색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기회가 온다. 페스트라는 전염병이 뉴튼을 세계적인 과학자로 만드는데 기여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우리의 인생은 많은 역경과 시련이 있게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역경 때문에 쉽게 좌절하여 일어서지 못하기도 하는데 역경을 만날 때 여유를 갖고 그 역경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똑같은 역경과 시련의 순간을 맞이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역경으로 인해 고생만 진탕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역경을 통해 많은 교훈을 얻고, 역경을 기회로 삼는 사람이 있다. 역경의 때에 지금 당장 자기 뜻대로 안되고, 자기 인생이 끝난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후일 자기 인생 전체를 살펴본다면 그 역경이 생산적인 순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루하루를 충실하되 쉽게 좌절하지 말고 모든 순간을 창조적이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역경의 순간이라고 인생을 포기하여 대충 살아버리지 말고 오히려 역경의 순간에 마음의 여유를 갖고 그날 그날을 진지하게 살 때, 그에게 역경을 통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약속도 기회를 잃으면 …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여행중 한 시골집에 들렀는데 그 집에서 나이 어린 한 소녀를 만나게 됐다. 소녀는 그가 허리에 차고 있는 가죽가방이 부러워 칭얼대며 엄마에게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톨스토이는 다음날 다시 오겠노라며 그 집을 떠났다.
울며 보채는 소녀에게 자기의 가방을 선물하기 위해서였다.가방 속엔 문서와 각종 여행용품이 들어있기 때문에 당장 줄 수는 없었다. 다음날 톨스토이는 약속대로 빈 가방을 들고 그 집을 찾아갔다.하지만 그 소녀는 지난밤 세상을 떠난 뒤였다.결국 톨스토이는 그 소녀의 관 곁에 가방을 놓아둔 채 그 곳을 떠나야 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것이 크든 작든, 그리고 누구와의 약속이든 지켜야 한다. 작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큰 약속도 지키지 못한다. 또한 만사에는 기회가 있다.그 기회가 지나간 다음엔 약속된 행위도 별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공약의 남발이 춤추는 계절이 다가온다. 제발 이번에는 거짓말쟁이들의 무도회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기회를 놓치지 말라
본문: 갈6:10, *찬송:493장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믿음의 가정
들에게 할지니라'

스티븐 그렛은 프랑스 태생의 독실한 신앙인으로 1855년 미국의 한 마을에서 죽었다. 만일 그렛이 생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지 않았다면 세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명언을 남김으로써 오늘날까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 세상을 한 번만 지나가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선행, 혹은 그 어떤 친절도 미루지 않고 당장 실천하겠다. 왜냐하면 나는 다시는 이 길을 지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기회를 사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과거를 돌아보거나 미래의 꿈만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최대한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아무도 시간을 멈출 수 없고, 훗날을 위해 보관해 둘 수도 없으며 자기가 원하는 만큼 늘릴 수도 없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독수리 한 마리가 나이아가라 폭포쪽으로 떠내려가는 얼음덩이 위에 앉아 죽은 물고기를 건져 먹고 있었다. 얼음덩이가 폭포에 가까워 거의 떨어지려 할 때 독수리는 훌쩍 날으려고 했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 새 발이 얼음에 얼어붙은 것이다.
범사에 때가 있다고 했다.(전3:1) 기회가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자. 아직 복음이 전해지고 있고 전도자가 외치며 성령의 역사가 있을 이 때에 주님을 만나야 한다. 기회가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자. 젊음과 정열과 총명이 있고 건강이 있을 때에 주님 섬기는 것을 배우자. 기회가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복음을 향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열려 있을 때에 최선을 다해 그분을 전하자. 때가 악할수록 세월을 아끼고 더욱 기도해야 한다.(엡5:16)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눅12:40)

기도: 주님의 온전한 뜻을 행하도록 항상 준비하고, 오늘도 성실하게 살게하시고 내 생의 남은 시간을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실패와 기회
본문: 시 119: 71 어떤 사람이 링컨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링컨은 "제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 은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야구왕 베이브 루스는 생전에 714개의 홈런을 날렸습니다. 1976년까지는 그가 최 고의 홈런 보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1,330개의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했습니다. 뼈아픈 일이 있은 후 영광도 오는 것입니다. 실패 없는 성공이란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불행한 일입니다. 참된 성공 은 실패로부터 얻어집니다. 실패를 맛본다는 것은 아픔을 맛본다는 것입니다. 우 리는 실패를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실패자라는 말을 가장 싫어합니다. 사실 실패 의 잔을 마셔본 사람은 압니다. 실패한 사람들은 실패의 잔이 얼마나 쓰다는 것을 압니다. 실패하면 단순히 물질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면 평소에 가까이 했던 사람들마저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외로움과 쓸쓸함이 찾아옵니 다. 나는 어린 시절에 아버님이 하시던 사업이 실패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실패 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배웠습니다. 잘될 때 찾아오던 친척들이 아버 님의 실패 후에는 발길을 끊었습니다. 실패한 후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무허가 집 으로 이주하던 날을 나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런 경험은 결코 나만의 경험은 아 닙니다. 우리는 가난과 고난을 통과한 민족입니다. 전쟁을 경험했고 혹독한 경제위기를 통과했습니다. 아직도 낙관할 수 없는 경제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 민족적인 위기를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심중에는 집단적인 두려움과 공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 내면의 불안 때문에 우리 민족은 어느 민족보다도 성공에 집착합니다. 교육 열이 세계 어느 민족보다 뛰어난 이유는 교육이 보통 사람이 성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통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사실 우리 내면의 심중에 들어가 보면 실패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도 두려워합 니다. 왜냐하면 성공한 후에 오히려 더 크게 몰락한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입니 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한편 세상에서는 실패했지만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된 성공이란 출세나 성취에 있 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성공이란 아름다운 성품에 있습니다. 인격적 성숙에 있 습니다. 성공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나눔의 기회로 삼을 줄 아는 청지기 의식에 있습니다. 실패를 많이 경험한 사람이 누리는 가장 큰 행복은 그 사람의 성품에 있습니다. 우리는 실력으로 성공합니다. 그러나 실패를 통해서도 성숙하게 됩니 다. 실패를 배우지 말고 실패로부터 배우십시오. 실패를 반복하지 마십시오. 실패를 성장과 성숙의 기회로 삼으세요. 아무 것도 실패하지 않은 것을 자랑치 말고 아무 것도 시도해 보지 않았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세요. 실패는 모험하는 인생에 찾 아오는 위대한 스승입니다. 실패는 고통을 주고 고통은 교훈을 좁니다. 실패했다 고 낙심치 마십시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립니다. 에이브러헴 링 컨을 보십시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을 지낸 아브라함 링컨은, 1831년에 사업에 실패하였고, 1832년에 주의원 선거에 낙선하였고, 1834년에 다시 사업에 실패하였 고, 1841년에 신경 쇠약증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1843년에 국회 의원 공천을 받지 못하여 낙심하였고, 1855년에 상원 의원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하였고, 1858년에 다시 상원 의원에 입후보했다가 또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 침내, 186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는 영광을 획득하였습니다. 그의 수많 은 실패가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실패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실패를 통해 더욱 당신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심을 결코 잊지 마십 시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폴란드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파데르브시키는 첫 레슨을 받고 나서 선생으로부터 "네 손은 조막손이니 아예 그만 두는 게 좋겠다"라 는 말을 들었습니다. 불후의 테너 가수 카루소도 처음 노래를 부르고 나서 "구멍뚫 린 문풍지에서 나는 목소리"란 혹평을 들었습니다. 디즈니가 처음 만화원고를 들고 신문사를 찾았을 때 "수준이하"라는 말을 들으며 거절당했습니다. 자동차왕 포드는 첫 자동차를 만든 후 후진기어를 안 달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인생을 망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좌절과 포기입니다. 위대한 발명가 챨스 케터링씨는 실패를 성공으로 전환시키는 데 필요한 다음과 같 은 충고를 했습니다. 첫째, 정직하게 실패를 인정하십시오. 둘째, 실패를 이용하십 시오. 절대로 실패를 낭비하지 마십시오. 실패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우십 시오. 셋째, 실패한 일로 '이제 아무 것도 하지 않겠노라'고 결심하는 계기로 삼지 마십시오. 실패는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실패를 반가운 손님을 맞듯 대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실패란 또 다른 형태의 성공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모든 일의 승리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 실패를 맞아 좌절의 늪에 빠져 계시지는 않는지요? 당신에게 힘과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도움을 얻으시기 바랍니다.(시28:6-8)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5)


기회
영국의 에드워드 7세는 식사 예법에 몹시 엄격한 왕이어서 왕자들이 식사시간을 언제나 무서워하곤 하였습니다.
어느날 아침 식사를 하던 요크 왕자는 갑자기 말을 더듬거리며 에드워드 7세에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버럭 화를 내며 "식사중에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했지!" 하며 소
리를 쳤습니다. 요크 왕자는 놀라서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식사 후 에드워드 7세는 요크 왕자를 조용히 불러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느냐?"
"이제는 늦어버렸어요."
"늦어? 무슨 일이었는데?"
"그때 할아버지 음식에 벌레가 들어갔었어요

 

삶의 위기는 새로운기회
1888년 한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다이나마이트를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이나마이트를 제조한 다음에 일약 당대에 명사가 되었고 수많은 돈을 벌고 사람들의 관심과 촉망을 받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언제나 하던 버릇처럼 신문을 펴서 기사를 읽기 시작하는데, 깜짝 놀랄 만한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그 서두에 자기가 죽었다는 기사가 씌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제가 만일 당신과 저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 기사를 읽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 신문 기사의 보도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 최초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유명한 알프렛트 노벨이 죽다.” 이 기사를 읽은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 자기 동생이 죽었는데, 기자들이 혼돈하여 자기가 죽은 것으로 보도를 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망 기사 앞에서 이 사람은 깊은 침묵과 말할 수 없는 도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폭탄을 만들어서 재물을 얻었고 명성을 얻었지만, 결국 내 인생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폭탄을 만든 제조업자가 드디어 죽다”라고 보도한 신문을 찢어 버리면서 그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는 인생의 허무 가운데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복음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자신을 바라보지 못합니다.삶의 위기에서 겸손히 자신을 볼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그리고 훗날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이 저 유명한 알프렛트 노벨의 노벨평화상이 시작된 이유임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어려움이 성공 기회인 줄 알라
세계 제 2차 대전 때 크레이턴 메이브렘 장군과 그가 인솔하는 부대는 모조리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이때 장군은 낙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용기백배하여 말하기를 (여러분, 이 전쟁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우리는 지금 사방을 공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하면서 용기있는 작전으로 결국 숭리하였다.
역사상에 문제를 오히려 기회를 잡아 성공한 사람이 많다.
카네기는 가난에서 성공의 기회를, 루즈벨트는 소아마비 속에서 성공, 귀가 먹었기 대문에 오히려 발명가가 될 수 있었다.

 

새로운 축복기회를 잡으세요
본문: 로마서 8장 18-25절

< 사방에 탄식소리로 가득합니다 >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공존하며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평화는 깨지고 인간은 다른 피조물을 종처럼 무자비하게 다루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곳곳에 피조물의 탄식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1968년, 최초의 우주인으로서 달을 밟은 암스트롱이 우주에서 보낸 첫 주일 아침에 지상으로 보낸 첫 메시지가 시편 8편 1절 말씀이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그는 달에서 지구를 바라보니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아폴로 호가 달에서 찍어 보내온 사진을 보면 지구의 색깔은 청록색이었는데 30여 년이 지난 지금 지구의 모습은 회색 빛을 띈 죽은 별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대기오염으로 산성비가 오고, 오존층이 파괴되어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고 있습니다. 삼림은 급속히 줄고 있고, 지구 전체 물의 1%밖에 안되는 강물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피조물의 탄식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땅을 정복하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하신 것은 자연을 파괴하라는 말이 아니라 "자연을 문화인답게 경작하라(cultivate)"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 말씀을 오해하고 자연을 맘대로 훼손해 환경의 탄식은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처럼 환경의 탄식소리뿐만 아니라 우리 이웃의 탄식소리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일전에 가난에 지친 19세 소녀가장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침에 신문배달하고, 낮에 약국 점원으로 일하면서 6식구를 부양하던 소녀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탄식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 탄식을 들을 때 우리는 "에바다!(열려라!)" 하신 주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왜 이 19세 소녀가 자살이라는 가장 절망적인 길을 택해야 했을까요?
단순히 "가난하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자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자기의 탄식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자살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격려와 도움이 있었다면 이런 소녀의 자살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을 살펴 더욱 서로의 격려자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하고, 항상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의 세미한 탄식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 주위의 탄식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
사도 바울이 깊은 영성을 가졌던 이유는 그 탄식소리를 듣는 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지금 자연도 탄식하고, 믿는 사람들도 탄식합니다. 계속해서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믿는 사람도 겉으로 보면 안 그런 것 같지만 속으로는 탄식할 일이 많다는 말입니다.
어느 날, 미국의 어떤 목사님에게 한 젊은 여자 분이 와서 남편 자랑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의 남편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 빼고는 정말 나무랄 데 없이 좋아요."
그 말을 분석해보니까 남편이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것에 대한 탄식이 배여 있어서 목사님이 슬쩍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자매님! 실제로는 마음이 힘들죠."
그러자 그분이 곧 울먹이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정말 힘들 때가 많아요."
거듭 난 사람과 거듭 나지 않은 사람은 사는 세계가 다른데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성격이 다르고, 의견이 다르면 함께 고쳐 가면 되지만 신앙이 다르면 참 힘듭니다. 신앙이 달라도 마음의 고통이 없다면 내 신앙의 진실성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보면 믿는 사람들에게도 곳곳에서 탄식소리가 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탄식소리를 듣고 같이 기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탄식소리를 들을 귀를 예비할 때 신기하게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오게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지 않고 삽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정신적 여백이 없이 너무 바삐 살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 소음은 얼마나 큽니까? 그 소음 때문에 정작 들어야 할 소리를 못 듣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루의 얼마 시간만이라도 내 귀를 소음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합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심장 소리라도 들으려 하다 보면 하나님 음성도 듣게 될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들었거든 이제 침묵을 끝내고 세상에 사랑과 위로를 전하려고 해야 합니다.
어느 날 꾀꼬리가 풀이 죽어 있어 현자가 "너 왜 요새 노래가 없지?"하고 물었습니다. 꾀꼬리가 불평하며 "개구리 소리가 하도 커서 제 소리가 소용없잖아요?"라고 하니까 현자가 말했다고 합니다. "네가 조용히 있으니까 개구리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거야."
세상이 악하다고 침묵만 하는 것도 안되고, 불평만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가장 소중한 일은 탄식소리가 나는 곳에 가서 내가 희망찬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떠하든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성도란 겨울과 같은 상황에서도 봄을 노래하면서 봄을 준비하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때로 큰 것에 길들여진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작아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작아 보여도 그 은혜가 세상의 탄식을 잠재우게 될 것입니다. 그런 꿈을 꾸십시오. 그리고 헌신하십시오. 길거리에 떨어진 종이라도 주우십시오. 꿈은 꿈꾸는 자들의 헌신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작은 몸짓의 중요성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작은 몸짓으로라도 꾸준히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리고 그런 노력들이 하나의 흐름이 되어 탄식은 곧 생명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
그런데 주변의 탄식소리들을 잘 들어보십시오. 그 속에서 어떤 음성을 듣게 됩니까? "예수님이 필요합니다"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본문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 즉 우주만물들이 지금 무엇을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들, 즉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는 것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이 피조물의 기다림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자연과 사람이 한 형제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자연과 우리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사실상 하나라고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강물에 죽은 고기떼가 보이면 그 강이 죽은 것이고, 결국 우리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죽은 강을 안타깝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자연이 힘들면 하나님의 아들들, 참된 믿음의 사람들을 애타게 기다리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졌다는 징표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쓰레기를 슬쩍 버리지 않고 자연을 최대한 존중할 것입니다. 또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고대한다는 말은 모두 주님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주만물이 다 주님을 필요로 합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에도 주님이 필요합니다.
미국에서 여자 3명이 모이면 이런 이야기를 한답니다. "얘, 너 아직도 그 사람과 사니?" 그 정도로 많은 가정들이 신음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세상에 누가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필요하고, 또한 가정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필요합니다. 가정도 사람 사는 곳이기에 부부관계, 부자관계에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는 절대 이런 문제는 없을 거야!"라고 하는 미신을 믿으면 불행해집니다. 문제는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가정에 과연 예수님이 계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있고, 예수님을 소망하며 살면 우리의 삶은 빛깔이 나게 됩니다.
"음식을 만들 때도, 화장을 할 때도 남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아주 틀렸다"고 하는 한 이혼녀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아마 거의 모든 이혼녀가 비슷한 고백을 할 것입니다.
옷을 입을 때도, 어디를 갈 때도, 차 사고가 났을 때도 남편이 있으면 확실히 틀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예수님이 있다"는 이 한가지 사실이 얼마나 의미가 큰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있기에 때로 현재의 모습이 참담해도 소망을 가지고 넉넉하게 살 수 있습니다.

< 장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선언합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먼저 "생각건대."라고 말합니다. 이제 좀 생각하면서 믿으라는 말 아닐까요?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을 비판할 때 주로 '말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비판합니다. 우리는 말을 줄이고 침묵을 통해서 항상 말씀과 진리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처럼 사도 바울은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결론을 얻고 말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는 침착하기 어렵습니다. 정말 내 고난이 크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한 차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해 현재의 고난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돈과 명예보다 굳건한 내일의 소망입니다. 이웃과 다른 비교는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한 가지 비교할 믿음의 비교가 있습니다. 믿음의 비교란 '현재의 고난'과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비교해보는 것입니다. "현재 내가 고난 중에 있다"라고 느끼면 분명히 그 고난은 작은 것이 아닐 것이지만 고난 중에서도 동시에 재빠르게 장래의 영광을 생각해보는 민첩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비교하며 살면 소망도 없고 삶이 참 불안해집니다. 그러나 미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며 살면 죽음 같은 고난 중에도 여유가 생깁니다.
캘빈은 죽을 때 이 18절 말씀을 25번이나 외우면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정말 크다면 오히려 현재의 고난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기독교의 생명은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 믿는 사람답게 사는 것에 있지 않습니까? 캄캄한 밤에 별이 더욱 빛나듯이 성도들의 신앙도 어려움 속에서 더욱 빛이 납니다. 잘 믿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어려움을 잘 이겨내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어려움을 잘 이겨낼수록 우리의 믿음은 소중해지고, 내일의 영광은 찬란해집니다. 서울에서 새벽기도로 유명한 큰 교회를 담임하시는 K 목사님의 경험담입니다. 그분은 청년 때부터 목회를 했는데 어느 날 아이가 첫돌 지나면서 병들게 되었습니다.
그때 진찰비가 70원이었는데 70원이 없어서 아이를 1년 동안 병원에 못 데려갔습니다. 어떤 분은 "그 70원 어디서 빌리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돈 때문에 사람에게 구차한 손을 벌리는 것처럼 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돈 빌리는 것이 자존심 상하고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주의 종 되더니..."라고 하면서
예수님 부끄럽게 하는 말을 할 수도 있는데 목사가 어찌 그런 말을 듣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없어도 있는 척, 굶어도 먹은 척'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세미한 탄식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도 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목회자는 좀 낫습니다. 선교지에 있는 선교사님의 아픔은 3배는 더할 것입니다. 선교지에서 꼭 필요한 것이 있지만 마치 구걸하는 것 같아 후원요청도 제대로 못합니다. 저도 몽고에서 김재호 선교사님이 3개의 교회와 신학교를 돌보는데 차가 없어서 아주 고생한다는 것을 선교사님 본인이 아닌 다른 목사님을 통해서 자세히 알았습니다. 꼭 필요하지만 제대로 후원요청도 못할 때 우리는 그 내밀한 탄식을 얼마나 듣습니까? 이제 축복의 말씀에만 열린 귀를 구하지 말고 이웃의 탄식에도 열린 귀를 구해야 합니다. 며칠 전 김재호 선교사님이 두 달 전에 몽고에서 당했던 일을 지금에야 공개했습니다. 몽고의 수도 울란 바타르 시내 버스 안에서 술 취한 두 몽고 사람에게 발길질을 당해 선교사님은 가슴을 맞고 입술이 터져 두 달간 앓았고, 사모님은 어금니 두 개를 빼고서
몽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열매맺기도 전에 고향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사연입니다. 저는 그 소식을 접하고 그 동안 모은 차량헌금을 하루라도 빨리 전달하기 위해 온누리 교회 선교협력 목사로 계신 김사무엘 목사님을 통해 선교사님에게 전달했습니다. 우리는 영적 싸움의 최전방에서 수고하는 선교사님의 탄식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선교사님의 탄식이 바로 병원비 70원이 없어 애끓던 K목사님의 탄식 아니겠습니까?
<선교사님 후원하실 분 연락주세요. 국민은행 284-21-0264-873 이한규(요삼일육선교회)>
그때 K목사님도 걱정은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데려 가실까?" 하는 마음으로 있다가 1년이 지난 후에 아이가 너무 아파해서 할 수 없이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말했습니다.
"정말 미련합니다. 아이가 이런데 1년만에 병원에 데려오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말을 듣고 "당신은 내 사정을 너무 모른다!"고 한 마디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차비가 없어 아이를 자전거에 싣고 올 정도였는데 어찌 병원에 갈 엄두가 나겠습니까? 결국 아이는 죽었고, 죽은 후에 아이 시신을 찾는 것도 돈이 없어 힘들었다고 합니다. 너무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그 아픔이 더욱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때로 우리에게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찾아오지만 주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너무 억울해서 "주님! 억울합니다"라고 하면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억울하니? 나는 죄가 없이 인류 죄를 다 덮어써도 한 마디 하지 않았단다." 우리가 "너무 힘듭니다" 하면 주님은 "나도 십자가에서 힘들었단다"고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움이 있다고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때 믿음을 나타내야 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에게 어려움은 기득권의 상실이지만 믿는 사람에게 어려움은 산고의 진통입니다.
산고의 진통은 극심한 고통이지만 사실상 고통으로 여겨지지 않는 기쁜 고통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주어진 고난의 체험은 오히려 '희망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보다 실천을 앞세워야 합니다. 작은 실천을 통한 '희망의 체험'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달라고 한 달 수입의 30분의 1을 따로 떼어 보냅니다.
그 돈은 큰 금액은 아니어도 남을 위해 내 것을 도려내는 그러한 작은 실천을 통해서 우리가 체험하는 희망의 체험은 곧 하나님의 축복을 예비하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
그처럼 고통이 축복의 통로라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24-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인간에게 소망은 산소 같이 중요하지만 소망의 근거는 눈에 보이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이기에 항상 참고 기다리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가끔 우리는 이런 말을 듣습니다. "저 사람은 싹수가 노래. 저 사람은 가망이 없어."
그러나 우리는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자녀에게도 해서는 안됩니다. 그 말은 내가 짜증이 많고, 조급하고, 정서 불안이라는 또 다른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원래 죄인이었기에 어느 누구도 싹수가 노랗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파란 싹이 돋게 된 존재들입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눈에 보이는 것이 조금 실망스럽다고 정말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보이는 것에 소망을 두거나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면 얼마나 잘못이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 아내가 교회가 나오지 못하게 하는 사람에게 "왜 못 나오게 하느냐?"고 물으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들끼리 너무 어울려 다녀서 걱정스럽다는 것입니다. 정말 걱정도 팔자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어울려 무슨 나쁜 행동을 하겠습니까? 조금 주책없는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애교로 충분히 봐 줄 수 있는 행동입니다. 때로 한참 남편 헐뜯다가도 "그래도 내 남편! 잘해줘야지!" 하는 소리밖에 더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아내가 옛 동창들만 만나도 전혀 다른 소리를 듣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소리 하나 하나 들으면 곧 가정 깨지는 일이 날 정도의 말들도 서슴없이 주고받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아내가 집안에만 있으면 안심이 된다는 남편은 정말 한참 모릅니다. 요새는 집안에서 더 큰 일이 일어나는 것도 모르는가 봅니다. 너무 안이한 생각입니다. 집안에서 컴퓨터만 켜도 금방 채팅으로 들어가 훨씬 더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많은 것을 마치 혼자만 모르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교회 열심히 나가는 것이 훨씬 더 낫지요. 그래서 "나는 안 나가도 당신만이라도 교회에 나가주세요"라고 하소연해야 할 시대인데 아직도 아내를 집에 꼼짝 못하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으니 얼마나 불행한 생각입니까? 이제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그것만 붙들며 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생각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소망이 확대됩니다.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우리가 가져야 할 꼭 필요한 자세가 바로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요새 사람들이 불행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무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새 사람들은 인터넷이 조금만 늦게 나와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가끔 의식적으로라도 삶의 속도를 늦추려고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이 중요하고, 주일 예배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욕망을 절제하고 삶의 속도를 가끔 늦춰야 살아있음의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고 그러한 고요함 중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웃음 띈 얼굴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낙심하지 말고 더욱 분발하십시오 >
믿음의 길이란 삼각형의 꼭지점을 향해 가듯 올라가는 길이기에 올라갈수록 힘듭니다. 그래도 올라가야 합니다. 쉽고 편한 길로 들어서려고 하면 영혼은 내리막길이 됩니다. 그러므로 좋은 뜻을 품고 주님의 일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했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런 어려움도 겪으면서 기뻐할 때 우리의 삶은 생동감이 넘치고 영혼이 소생합니다. 시련은 나약한 사람에게는 절망의 조건이지만, 믿음의 사람에게는 생명샘터가 됩니다. 믿음생활을 볼 때마다 가장 안타까운 모습은 선한 결심을 했다가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을 행하려면 지속적인 열정을 가지고 꾸준히 선을 결심해야 합니다.
한 두 번 해보고 그만 두면 선한 열매는 결코 맺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두 번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분은 가끔 아내 설거지를 재밌게 도와줍니다. 그러나 계속 하라면 다 도망갑니다.
아기 잠깐 안아주는 것은 기쁘지만 종일 안아주라고 하면 대개 다 도망가 버립니다. 지속적인 열정이 없는 선한 일은 거품입니다. 순간적인 열정은 오히려 문제만 만듭니다.
사과나무도 네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야 비로소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인내와 기다림이 있어야 비로소 탐스런 열매를 얻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깐의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본문 바로 뒤 28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면 실패는 있어도 실망은 없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가 실패해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좋은 계획은 절대 실패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는 일어나 하나님께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입니다. 그 발걸음만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새로운 축복의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때로 어려움이 있어도 장래의 영광을 생각하며 더욱 '믿음의 분발'이 있기를 바랍니다.

 

어려움이 성공 기회인 줄 알라
세계 제 2차 대전 때 크레이턴 메이브렘 장군과 그가 인솔하는 부대는 모조리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이때 장군은 낙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용기백배하여 말하기를 (여러분, 이 전쟁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우리는 지금 사방을 공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하면서 용기있는 작전으로 결국 숭리하였다.
역사상에 문제를 오히려 기회를 잡아 성공한 사람이 많다.
카네기는 가난에서 성공의 기회를, 루즈벨트는 소아마비 속에서 성공, 귀가 먹었기 대문에 오히려 발명가가 될 수 있었다.


삶의 위기를 기회로 만드세요
본문: 빌립보서 1장 12-18절 

<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지는 삶의지혜>
앤드류 매튜스가 쓴 세계적 베스트셀러 행복해지는 법(Being happy)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크게 2가지 가치관, 즉 부정적인 가치관과 긍정적인 가치관이 있다고 합니다.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진 분은 어떤 일을 당해도 긍정적으로 보면서 행복을 찾습니다.
반면에 부정적인 가치관을 가진 분은 꼭 상황을 어둡게 보고 스스로 불행하게 됩니다.
그는 우리가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지기 위해 몇 가지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 중의 한 가지는 "자신을 소개할 때 항상 좋게 소개하는 훈련을 하라!"고 말합니다.
괴로운 일을 당하면 나 혼자 감당하고 남에게 지우지 않겠다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혼자 조금 참으면 되는데 "여기 아프다, 저기 아프다"고 하면 온 집안 식구가 힘들어집니다. 그처럼 사방에 "나 아프다!"고 말하면 사실상 아픔이 줄어들기보다는 아픔이 더해집니다.
그러므로 나를 나타낼 때는 언제나 밝은 얼굴로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은 위선이 아닙니다.
걱정이 많아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화평한 모습, 즐거운 모습, 행복한 모습을 해야 합니다.
그런 모습들을 하다 보면 그것들이 점점 쌓이면서 내 성격을 긍정적으로 만들게 됩니다.
계속해서 '기뻐하고 유쾌하게 사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살면 삶이 진짜 그렇게 변합니다.
노만 커즌의 병의 분석(Analysis of disease)이라는 유명한 책을 보면 위장과 관련된 질병 및 신경성 질병은 호탕하게 몇 번만 웃으면 대개 낫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모습에 낙심하지 말고 자기가 앞으로 되고 싶은 사람을 늘 생각하면서 희망을 가지고 기쁘게 살면 건강하게 되고, 삶 전체가 아주 긍정적으로 바뀐다고 합니다. 또한 긍정적으로 살려면 무엇인가 필요할 때 깨끗하게 그 필요를 알리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결혼기념일이나 자기 생일에 "남편이 알아주나!" 하고 노려보고 기다렸다가 그냥 넘어가면 그때부터 삐쳐서 일주일 동안 말을 안합니다. 그러면 삶이 피곤해집니다.
대개 남편들은 살아남기 위해 직장 상사에 관심을 가지고, 고객에 관심을 가지며 삽니다.
그런 남편의 정신적인 짐을 덜어주려고 남편에게 "이런 관심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 자기도 남편에게 관심을 표하는 것이 되고 진정한 정신적인 교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결혼기념일에 무엇인가를 바라면 "어디 두고 보자!"고 사랑을 시험하기보다 그냥 아침에 "오늘 우리 결혼기념일인데 조금 일찍 들어오세요"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것이 없이 자기 기준으로 '사랑의 증거'를 만들어 놓고 그 증거가 없는 것 같다고 "사람 잘못 봤어! 내가 결혼 잘못했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행으로 가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그는 긍정적으로 살려면 "내가 당한 일과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라!"고 합니다. 때로 사업이 망해도 사업이 망한 것이지 나 자신이 망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가 대학 시험을 치면 떨어질 수도 있고 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떨어지면 인생이 망하고, 가문이 망가진 것처럼 여기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대학 못 가면 저 대학을 가면 되고, 오늘 못 가면 내일 가면 됩니다.
'내가 당한 일'에 '나의 존재와 목숨'을 다 걸면 항상 초라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지만 '내가 당한 일'을 통해 오히려 자신을 더 격려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축복해주십니다.

< 고난을 당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
본문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감옥에 갇혔지만 그곳에서의 전도로 시위대를 중심으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결국 황제 주변에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까지 전도하게 되었습니다(빌 4:22).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당하지만 그때 그 일과 그 문제에 붙잡히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처럼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다는 고백을 하면 얼마나 멋있습니까?
사람의 행복과 불행은 "어떻게 위기를 잘 관리해서 기회로 만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최악의 위기를 기회로 만드셨습니다. 흑암이 가장 깊을 때 천지를 창조하셨고, 십자가의 위기를 구원의 기회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도 최악의 위기를 기회를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십니다.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 일을 그냥 일어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일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고난을 당해도 그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얻는 가장 큰 축복이 무엇입니까? 어려움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음으로 생기는 평안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우상 숭배하다가 예수님을 믿게 된 분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맘이 편하다는 말입니다. 우상 숭배하면 귀신이 언제 어떻게 노해서 어떤 점을 칠지 모르니까 항상 불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잘 믿으면 마음이 평안하고, 몸도 점점 건강해지고, 잠도 잘 오게 됩니다.
어떤 분은 어떤 일로 고민하다가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지옥이 다른 게 아니라 잠이 안 오는 게 지옥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괴로운지 자살 충동까지 든다고 합니다.
잠을 못 자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이 없습니다. 사실 잠을 잘 자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믿으면 잠도 잘 잡니다. "어려움은 진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가는 어려운 일을 당했지만 그것이 진보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내가 당한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복음의 진보'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해도 그 일을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만들 수 있어야 하고,
어려울 때마다 "이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내 믿음을 보일까?"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초라한 모습일 때 비참해지지 말고, 그때를 오히려 인생의 진보의 기회로 만드십시오.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이 바로 행복을 만드는 기술입니다.
지금 혹시 위기에 처해 있다면 그때를 더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기회로 만드십시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당했느냐?"보다 "내가 그 일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마음이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지고, 가는 길이 달라집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환경도 이기고, 그 가운데 복음의 진보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 성도의 고난은 결국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
대개 사람들은 외적으로 성공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외적인 성공은 수명이 짧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공이 수명이 오래 갑니다. 성 프랜시스는 거지처럼 살았지만 수백 년이 지나도록 위대한 성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프랜시스 당시 교황이 누구인지, 가장 큰 성당의 신부가 누구인지는 거의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외적으로 조금 초라한 모습이라도 결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믿음이 신실하다면 내 연약함도 하나님의 역사요, 내 고난도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가장 함께 하시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특히 복음을 전하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사실 전도하면서 어려움을 당해보지 않는 삶을 인생의 가장 큰 위기인 줄 알아야 합니다. 반면에 우리가 전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면 반드시 선한 열매가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이 감옥 안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고 활발하게 전도한다는 소식을 듣고 밖의 성도들은 더욱 용기를 얻고 더욱 주님의 역사를 신뢰하고 전도에 나섰다는 말입니다.
내가 전도하면 열매도 생기지만 나의 전도로 다른 사람도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처럼 우리는 내가 전도하므로 다른 사람에게 힘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담대히 전도에 나가면 귀한 신앙의 동료를 얻고 서로에게 큰 격려가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은 믿음이 넘치고 은혜가 넘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전도를 나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은혜가 없어도 순종하는 마음으로 전도하면 그토록 찾던 은혜가 거기에 있습니다. 어떤 분이 무디에게 말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해가 안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디가 말했습니다. "그때는 밖에 나가서 전도하세요. 전도하고 돌아오면 깨달아집니다." 진리의 돌은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주울 수 없습니다. 진리는 행동할 때 깨달아집니다.
"때가 되면 나오겠지!" 그것은 참으로 소극적인 생각입니다. 그 생각이 전도를 막습니다. 내가 한 영혼을 살리는 것은 결국 나 자신도 살리고, 우리 가정과 나라도 살리는 것입니다. 지금 전도가 참 어려운 시절입니다. 이단 때문에 사람들의 경계심은 심해졌고, 매스컴의 비판은 전도의 열정을 빼앗았고, 경제적 여유는 전도의 관심을 퇴조시켰습니다. 또한 성도의 잘못된 행동으로 사람들의 거부감이 많아져서 전도가 아주 어려워졌습니다.
그래도 힘써 전도하면 믿음도 커지고, 은혜도 받고, 하나님께서 더욱 기뻐하실 것입니다.

< 복음 전파의 사명감을 가지십시오 >
그런데 오늘 본문 15절에는 언뜻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 나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착한 뜻으로 예수님을 전파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투기와 분쟁으로 예수님을 전파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당시에 바울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바울을 음해합니다.
그래도 바울은 전도의 열매가 많았고, 바울이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바울의 공로가 아님을 증명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대단한 인물이 아님을 증명할 기회가 왔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러자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기회에 더욱 열심히 예수님을 전파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전도의 열매가 많으면 바울의 공로가 크지 않음을 증명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이 생기면 바울의 마음을 괴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전도하는데 그래도 바울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이 전파되는 것이니까 기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내 체면을 구기고, 내게 상처를 주어도 복음이 전해지니 좋다는 모습을 보십시오.
자기의 체면과 상처는 가볍게 보고, 복음전파를 크게 보는 이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어떤 분은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다고 여기고 여기저기 다니며 교회 비판에 열을 올립니다.
"교회가 썩었어! 이것도 썩고, 저것도 썩고..." 그 모습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상처받아도 복음은 상처를 받지 말게 하고, 교회는 상처를 받지 말게 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아무리 상처가 되어도 예수님만 전해지면 좋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사명감에 투철한 사도입니까? 우리 교회와 교인들에게는 이런 사명감이 있습니까? 아쉽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고기잡이배가 되기보다는 뱃놀이하는 유람선 같습니다.
고기잡이배가 고기를 잡으면 행복을 얻지만 뱃놀이를 하면 오히려 행복을 잃게 됩니다. 전도는 쉽지 않은 것이지만 신앙인에게 전도는 행복의 초석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항상 기뻐하며 복음 중심적 가치관을 가지십시오 >
바울은 어려움과 상처가 있어도 전도가 된다면 행복해했습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사도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찾았고, 특히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라면 내가 무너져도 좋고, 내가 다쳐도 좋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처럼 우리는 안목이 넓어야 하고, 스케일이 큰 사람, 통이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정신과 의사의 말에 의하면 겸손할수록 스트레스가 없다고 합니다. 겸손할수록 기쁨의 크기가 커지고, 즐거운 시간과 범사에 감사하는 시간이 많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겸손에 대해서 생각할 때 높은 자리에서 낮아지는 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겸손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의 자리는 낮은 자리입니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겸손하겠다고 낮아지고 뭐고 할 것이 없습니다.
며칠 전에 폐암으로 별세한 이주일 씨는 담배는 폈지만 평소에 건강관리를 잘했습니다. 폐암 진단을 받기 3개월 전에도 종합검진을 했는데 아무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암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 사실은 인간의 연약함을 잘 말해줍니다.
우리는 어떠하든지 스스로를 높이지 말고 자기 자리를 힘써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가끔 보면 "제가 겸손하게 기도해주세요."라고 어색한 기도제목을 내놓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치 내가 높은 사람인데 내 힘으로는 낮아지기 힘들어 하나님의 힘이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그 마음부터 고쳐야 합니다. 우리는 높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 그냥 있으면 됩니다. 높다고 생각하니까 낮아지기가 그렇게 힘들어서 하나님의 힘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닙니까? 우리는 나 자신을 높이지 말고 주님만 높이고, 주님만 전파하기에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 제자입니까? >
우리는 전 인류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조금 어려워도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그 꿈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해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고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꿈을 꾸지 마십시오. 자신의 삶에 너무 함몰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께로 오게 할 책임에 눈을 뜨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축복은 원하지만 변화는 거부합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축복 이전에 내가 변화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중심주의를 버리고, 진정한 다른 사람들의 축복을 빌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중심주의는 참 집요합니다. 심지어는 가정 내에서도, 부자 관계에서도 종종 발견됩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내가 너희들만을 위해서 살아왔다."
정말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결혼할 때 보니까 혼수 문제로 본전 다 뽑으려고 합니다.
내가 얼마나 밑천 들여서 키운 자식인데.... 그러면서 부모가 결혼을 깨는 경우도 봅니다.
주려면 끝까지 주어야지 이제 와서 무엇을 찾겠다고 하니 얼마나 이기적인 모습입니까?
충성하려면 끝까지 충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에 평강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환경에 따라, 대접받는 것에 따라 마음이 흔들린다면 성숙한 모습이 아닙니다.
이제 나 자신의 형편과 처지만 살피기보다 남을 생각하고 살피는 성숙한 성도가 되십시오.
서울에 있는 한 교회의 구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해에 공교롭게도 그 구역에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이 세 명 있었습니다. 온 구역원이 그 세 명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둘은 합격하고, 한 명은 떨어졌습니다.
그때부터 합격한 자녀들의 어머니들은 말을 못했고, 나머지 구역원들도 그저 침묵했습니다.
이제 대학 문제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떨어진 아들 어머니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그분은 모든 구역원들을 초청해 큰 합격 잔치를 벌여주었습니다.
자기 아들은 떨어졌지만 우리 구역에서 두 명이나 합격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했습니다. 구역원들이 다 안도하고 좋아하며 그분을 칭송했습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모습을 하늘에서 보시고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결국 하나님이 그 가정을 축복하셨고 다음 해에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생기면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창피해서 못 살겠다! 남들은 다 합격했는데 너만 왜 그 모양이냐?" 한숨을 푹푹 내쉽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습니다. 그런 모습은 현재뿐만 아니라 내일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후퇴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는 믿음을 보시고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요즘 치열한 경쟁시대입니다. 그래서 다니던 직장으로부터 퇴직 당할 수도 있습니다. 슬픈 일이지만 그래도 "오래 몸담은 직장이 잘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디 두고 보자!" 라고 하면 그 두고 보는 사람보다 내가 저주받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은퇴를 맞아 기뻐하며 은퇴하고, 물러설 상황에서 기뻐하며 물러설 때 본인도 행복하고, 하나님께서도 축복하시고, 그런 분들에게 내일의 축복을 풍성하게 준비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모습이 서글퍼도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믿음의 권속들이 되어야 합니다.
심지어는 세상을 떠나면서도 기뻐하며 떠날 때 하늘의 영광은 더욱 크게 될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임종할 때 마음에 기쁨이 넘쳐서 크게 찬송하니까 한 수도사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지금 창밖에 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 시간이 엄숙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프랜시스가 말합니다. "주책을 떨어 미안하네. 주님 만날 생각을 하니 너무 기뻐서 그랬네."
세상을 떠나면서도 이렇게 기뻐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모든 삶에 행복이 넘칠 것입니다.
항상 '내가 당한 어려운 일'로 더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기뻐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