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추절의 감사
맥추절의 감사
성경:출23:16-17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출애굽기 23:16) 교회는 대체로 일년에 두번씩에 걸쳐서 특별 감사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맥추감사 주일이며 또 다른 한 주일이 가을의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기에 한가지를 더하여서 애굽에서 구원받음을 기억하여 감사드리는 유월절 절기를 전 민족적으로 지켰습니다.
이스라엘이 사용한 맥추절의 용어는 맥추절 이외에 칠칠절 (34:22) 초실절 (출34:22) 오순절(행2:1) 이라고 불리워졌습니다. 칠칠절이란 의미는 유월절후 49일이 지나서 맥추절을 지키게 되므로 7*7이 49해 선 7.7절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오순절이란 50이 뜻으로 유월절 이후 50일에 지키는 절기라고 해서 오순절이며, 초실절이란 이스라엘이 농사를 지어서 처음으로 거두어 드린다는 뜻에서 초실절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맥추절을 지키라고 명하신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게 감사드리라는 것입니다. 농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농경시대에는 농사가 주요 산업이었기 때문에 농사 지은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지금은 산업사회화 되어 사회가 복잡하고 다양화함에 따라 어느 특정한 산업에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은혜 아닌 것이 없으므로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게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1. 감사의 근본은 구원에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게 감사할 이유는 너무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금년에 맥추를 하였더니 농사가 잘 되어서 감사할 것입니까? 물론 당연히 감사하여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할 가장 근본적이고도 기본이 되는 감사는 구원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자세는 구원을 주신 은혜에 감사한 마음에서 신앙생활을 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돌리는 생활도, 십계명을 지키며 주일을 성수하며 십일조를 드리는 생활도 왜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구원하여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실 때에 제일 먼저 말씀하신 말씀이 신5:6 나는 너를 애굽땅에서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신 말씀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를 애굽에서 구원하여 주었으니 십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신5:15에서도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여기에서도 계명을 지켜야 할 이유가 애굽에서 구원하여 주었으니 계명을 지키란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근본 이유가 애굽에서 구원하여 주신 것이라면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리엘 백성처럼 지옥에서 구원을 받은 것을 감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옥으로부터 천국 백성되게 하신 이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없습니다. 이 은혜보다 더 감사하여야 할 은혜도 없습니다. 구원의 은혜보다 비교해 볼만한 은혜가 없습니다. 구원의 은혜만 생각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없어도 기쁘고 감사한 것입니다
2. 적은 것에 대하여도 크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우리의 감사는 적은 것에도 크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적은 것에 진심으로 감가한 마음이 없는 사람은 큰 것에도 감사하지 못합니다. 혹시 이러한 생각을 가지신 성도가 있습니까? 나도 돈많은 사장이 되어서 고급 승용차를 타고 운전수를 두고 고급 승용차 뒷자석에 몸을 깊숙히 묻어 두고 다니다가 내릴 때 운전수가 차를 내리면 문을 닫는 운전수를 둔 생활을 해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성도 말입니다.
나는 분명히 믿습니다. 차 문하나도 내 손으로 열지 못해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어쩌면 참으로 불행스러운 것입니다. 내 몸이 건강하며 내가 손수 운전하고, 내가 건장하여 내 손으로 문을 열고 내리고 내 오를 수 있다면 이것이 가장 큰 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몸이 불편하여 자동차 문을 열어 주어야 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불행스러운 일입니까? 차 문을 열어 주지 않아도 내릴 수 있도록 건강하십시니까? 진정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큰 축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작은 생활 속에서 감사를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3. 감사하는 사람이어야 감사할 수 있는 일이 생기도록 하나님은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성도에게 더 감사하도록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정 감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받지 아니한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는 것이 너무나 적은 것같습니다.
실제적인 이야기 하나를 해야 되겠습니다. 어느 방송국에서 출간하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국 청년 1백명을 대상으로 당신이 앞으로 결혼하여 살아갈 집을 설계하여 보라고 했더니 그 설계 속에는 오디오를 넣어서 음악을 감상하는 방이며, 주방이며 세탁실이며 화장실.휴계실 등이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백명중에 한 사람도 부모를 생각하여 부모님이 계실 방을 설계한 청년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이 시대의 당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일입니다만 자식을 둔 부모로서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조사 대상자 1백명중에 부모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말은 아닐 것이며 부모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뜻은 더욱 아닐 것입니다. 그들도 자랄 때는 부모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랐을 것이며, 그들을 길러주신 그들의 부모님은 온갖 수고 다하시고 모든 것을 그 자식 기르는 곳에 쏟아 바쳐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식들이 성장하여서는 늙은 부모 뒷방 한 칸도 주고 싶은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서는 점점 감사가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감사가 없는 인간의 마음은 쓰다가 버린 페품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4. 감사의 생활은 하나님게 영광이 돌아갑니다.
원망하는 삶은 하나님을 걱정스럽게 할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의 생활이 감사로 넘치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그 가운데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어느 집단 어느 사람 앞에서 예수 믿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여 보십시오. 어떤 역경이 닥쳐오더라도 감사의 생활을하여 보십시오. 주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감사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감사 속에 은혜가 충만하실 것입니다.
감사를 잃으면 축복도 잃는다
□누가복음17장11~1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으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과거에 대규모 데모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 가운데는 대우차 종업원들처럼 생존권 차원에서 했던 데모도 없지 않았으나, 의사나 약사나 항공기 조종사와 같이 먹고 살만하고, 또 월급도 많이 받는 이들의 데모도 있었다. 그들은 자기의 학벌이나 수준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우를 덜 받는다는 불만 때문에 일어난 데모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슴속에 불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가지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이 아니라, 더 가지지 못한 데 대한 상대적인 불만이다. 없어서 불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가지지 못해서 불만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주어진 조건들이 행복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더 행복한 조건이 주어지지 않아 불평한다. 내가 가진 건강이 못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건강을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불만을 가진다. 내게 주어진 삶의 상황이 나빠서가 아니라, 내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주어지지 않아 불만을 토로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역사가 토인비는 우리 역사의 종말에 <제4의 인간>이 출현하는데, 이 <제4의 인간>은 우리가 될 수 없는 나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 <제4의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는 불만과 불평이 가득한 사회이다. <제4의 인간>이 부지기수로 몰려 살고 있는 오늘날, 불평과 불만은 길가의 잡초처럼 많이 볼 수 있지만 감사와 은혜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얼마나 이기적이고, 계산적인지 모른다. 그는 자기만을 생각하지, 도통 우리를 생각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불편하거나 손해가 오면 다시는 안볼 것처럼 거부한다.
이같이 상대적인 불만과 이기적인 심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 읽은 예수님께서 열 문둥이를 고쳐 주신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1. 열 명의 문둥병자 이야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촌에 들어가시게 되었는데, 거기서 예수님은 열 명의 문둥병자를 만나게 되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소리질러 외쳤다. 여기서 선생님은 영어의 teacher가 아니라 master이다. 즉 인생의 주관자로서 예수님의 신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눅5:5). 이런 문둥이들의 절규를 들으신 예수님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레위기 14장 1-32절의 규례를 따른 것으로, 문둥병자가 치유되었을 경우 제사장에게 가서 병 나음을 확인하고 그에 따른 예물을 드려야 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일종의 위생 감독관(health inspector)으로서 환자들에게 질병의 치유를 확인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면서 가던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도중에 모두 깨끗함을 받게 되어 낫게 되었다. 그러자 그 중 하나는 자기의 병 나은 것을 보고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그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였다. 여기서 그가 돌아와 취한 행동은 그의 감사의 깊이를 더해준다. 그는 매우 겸손하게도 마치 종과 같이 주님의 발아래 엎드려 선생이신 주님께 감사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하고 탄식하시었다. 예수님께서 탄식하셨다는 것은 결국 모든 고침 받은 문둥병자들은 마땅히 돌아와 감사해야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열 명의 문둥병자 치유기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에 대하여 우리 인간은 반드시 사례해야함을 가리켜주고 있다. 열 명의 문둥병자는 모두 돌아와 주님께서 그들에게 베푼 은혜에 대하여 예수님께 사례, 즉 감사해야 마땅하였다(17-18절). 그러나 실제로는 열 명의 문둥병자 가운데 오직 한 사람, 그것도 이방 사마리아인만이 돌아와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돌아온 사람이 이방인이라고 한 것은 보면, 나머지 아홉 명은 유대인이었다. 그렇다면 고침 받은 후 유대인 병자들은 그냥 가버렸으나, 이방인 병자만이 돌아와 감사한 것이다
그러면 왜 아홉 명의 유대인 문둥병자들은 돌아와 감사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들은 외국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인과는 달리 아브라함의 자손인 자신들의 병 나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의 혈통을 중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책망하셨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유대인 문둥병자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그저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였기에 돌아와 감사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 모두의 일반적 태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은연중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모든 일은 그저 모두 당연한 것이기에 사례나 감사할 필요가 없고,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행한 일은 당연한 일이 아닌, 어떤 특별하고 예외적인 일이기에 반드시 보상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만일 우리가 이제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신 모든 일은 전부가 지극히 당연한 것이어서 감사나 사례의 필요가 없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행한 일은 매우 특별한 일들이기에 반드시 사례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왔다면, 우리들은 오늘부터 반드시 회개하고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고 허락하신 것들은 가장 근본적으로 믿음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선물(gift)이다(약 1:17). 선물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다. 기대 밖의, 뜻밖의 일이다. 그것은 받는 대상의 자격이나 가치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방적으로 베풀어주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상(償)이 되고 말 것이다.
2. 감사를 잃으면 축복도 잃는다(19절)
열 명 중 유일하게 돌아와 감사하였던 사마리아인 문둥병자는, 19절 말씀에 의하면, 영혼의 구원을 얻는 진정한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여기서 '구원하였다'는 말은 현재완료형이다. 그렇다면 사마리아 병자가 치유 받은 후 돌아오기로 작정했을 때부터 이미 그에게는 그 영혼이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낳는 축복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그러나, 병 고침 받았으나 돌아와 감사치 않은 아홉 명의 문둥병자가 전혀 믿음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문둥병으로부터 고침 받을 만한 믿음은 애당초 있었을 것이다. 그런 믿음으로 그들은 육신의 질병을 고쳤으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감사가 없었던 아홉 명의 문둥병자는 비록 육적으로는 고침 받아 이 땅에서 잠시 동안은 더 살 수 있었을는지 모르나,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으로 말미암아 마침내는 영원한 고통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즉 감사가 없을 때 영혼 구원의 축복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감사하지 않는 믿음은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불완전한 믿음으로는 일시적인 육신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으나, 영원한 영혼의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다. 그러나 완전한 믿음은 육신과 영혼의 필요를 채워주는 완전한 회복을 가져다준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감사가 없으면 축복도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한 예를 우리는 고린도전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0-11). 광야의 유랑 생활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하며 살면서도 감사가 없이 불평만 일삼자 그들에게 돌아간 것은 결국 멸망이었다는 사실을 바울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깨우치고 있다. 이처럼 감사가 없을 때 축복도 없다.
3. 감사하는 사람이 신앙의 사람이다
크리스천은 감사를 신앙으로 고백하는 사람이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의 편지 가운데 감사라는 말을 46번이나 했다.
미국의 카네기라는 사람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세계에서 제일 큰 강철왕이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이 사람에게 3가지 중요한 성품이 있었다. 첫째는 인내력이고 둘째는 동정심이며 세번째로는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가 맺히듯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나무에 감사의 선한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이다. ‘감사하지 않은 사람은 죄를 짖는 것이다’.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도둑질하는 것이고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기심에 쌓인 사람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지금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의 문둥병자처럼 감사의 조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하나님의 더 크신 은혜를 스스로 배척하고 있지나 않은가 돌아보아야 한다. 나에게 주신 상황에 불만하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아야 한다.
현대인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질병은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다. 부모에게, 스승에게, 사회에 대해, 이웃에게, 선배에게 감사할 줄 모른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은 어느 환경 속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감사하는 사람은 능력의 원천을 가진 사람이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이 항상 함께 있다. 절망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사도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옥중에 갇혔을 때에 절망하고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찬송했다. 감사했다. 여기에 기적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고 쇠고랑이 풀렸다. 그렇다! 감사는 또 다른 축복을 낳고, 감사는 새로운 기적을 일으킨다.
성도 여러분! 어떤 환경가운데서도 불만,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주실 것이다. 축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내 입맛은 그냥 있지 않은가
신앙이 좋으신 할아버지 한 분이 있었는데 언제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다니니 ‘감사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한번은 거리에 나가서 고기 한 근을 사 가지고 돌아오다가 돌에 걸려 넘어져서 고기를 손에서 놓쳐 버렸습니다. 때마침 개 한 마리가 곁을 지나다가 고기를 물고 달아납니다. 할아버지는 물끄러미 보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개는 사라졌습니다. 이때 할아버지는 “감사합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마침 어떤 젊은이가 지나가다가 묻기를 무슨 감사한 일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 때 할아버지 하는 밀이 ”아 이 사람아, 고기는 잃어버렸으나 내 입의 입맛은 그냥 있잖은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고기가 아무리 많아도 입맛이 없으면 별로 감사한 일이 못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캄캄한 밤에도 별을 보고 감사합니다.
검은 구름 위의 무지개를 보고 감사합니다.
슬픔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보고 감사합니다.
크다고 힘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책을 보니까
넌센스 퀴즈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졸릴 때 내려오는 눈꺼풀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힘쎈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머리를 뚫고 올라오는 머리카락입니다.
감사/ 다시 기도합시다
경남 의령 지방 교회에서 목회하는 전도사 가정에 잘 아는 목사님이 들렀다. 1940년대의 농촌교회는 말할 수 없이 가난하고 끼니조차 이어가기 어려운 처지였다.
식사대가 되어 목사님이 들렀으니 대접을 해야 했다. 얼마 후 전도사 아내가 소반을 들고 왔는데 멀건 국물이 담긴 그릇과 김치 깍두기였다. 국밥을 끓여온 것으로 짐작한 목사님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전도사지만 목사인 자기보다 큰 교회를 시무하고 있고 무엇으로 보나 자기보다 낫고 끼니 걱정은 하지 않는 줄 알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대접이냐 싶었다.
목사님은 속으로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기도는 해야 그것이나마 시장끼를 때울 수 있었다.
“기도합시다”하고 목사님은 간단하게 몇 마디 기도하고 언짢은 마음으로 숟가락을 들어 국을 저었다. 그런데 숟가락을 통해 전해지는 감각이 이상했다. 숟가락을 다시 깊이 넣어 떠보니 안에 고기만두가 들어 있었다. 만두 한 개를 떠서 먹어보니 맛이 일품이었다. 갑자기 목사님의 얼굴이 화창한 여름날 아침에 핀 장미꽃처럼 피어나더니 소리쳤다.
“전도사님, 기도 다시 합시다.”
그리고는 열렬하게 축복의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저희가 저희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여 그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시 78:18)
돈을 떼어 먹은 대통령(불평)
이집트의 한 가난한 농민이 알라 신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의 내용은 돈 200파운드만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편지를 본 우체국에서는 수신자가 알라 신이므로 어디로 전해 줘야 할지 몰라서 계장에게 주었고 계장은 과장에게, 과장은 국장에게, 국장은 체신부 장관에게 전달하였다. 이를 받은 체신부 장관은 그것을 대통령에게로 보냈다.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던 낫세르는 그 편지를 뜯어보고는 농부의 사정을 매우 딱하고 불쌍하게 여겨 대통령 이름으로 100파운드를 우송해 주었다. 그러나 농부는 100파운드를 받고 기뻐하거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발대발했다.
“알라 신은 분명히 내가 요구한 200파운드를 보내 주셨을 거야. 그런데 대통령이 중간에서 100파운드를 떼어먹고 나머지 100파운드만 내게 보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