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부활절

"2011년 사순절 묵상집"

공 상희 2011. 3. 14. 13:47

3월9일 사순절 제1일 성회수요일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39

 

 

어느 선교사가 아프리카에 선교하기 위해 배를 타려고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는 노예 시장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흑인 모자가 경매에 붙여졌는데, 어린아이는 필요 없고, 어머니만 사겠다는 사람이 나서서 어머니만 팔리게 되어 두 모자는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 몫의 일을 하겠으니 어린 아들을 함께 데려가 달라고 새 주인에게 호 소했으나, 두 모자는 생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두 모자를 강제로 떼려하나 말을 듣지 않자, 주인이 칼을 들어 어린아이를 향해 내리 찔렀습니다. 그때 선교 사님이 자신의 손으로 그 칼을 막아 아이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 선교사님이 후한 값에 두 모자를 샀습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흑인 모자는 이곳에서는 언제 또다시 잡혀 노예가 될지 모르니 선교사님을 따 라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 선교사님께 은혜를 갚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함께 아프리카에 도착하여 선교사역을 감당했다고 합니다.

 

아들의 생명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자유를 주신 선교사님....

 

그 은혜 백골난망(白骨難忘)이라 흑인 모자는 선교사님의 손발이 되어 아프리카의 선교사역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흑인도 인간인지라 때로는 화도 내고,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을 때도 있었다. 그때 선교사님은 아무 말씀도 않고, 손을 내밀어 아이를 살리려 대신 칼을 맞았던 그 손의 흉터를 보여주면.... 그 흑인은 잘못했노라고 용 서를 빌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습니다. 흑인 노예를 구한 선교사님처럼 주님이 가진 돈으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피로 값 주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주님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심으로 우리의 생명을 사 신 것입니다.

 

갈보리 산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에서 두 손과 두 발에 못을 박히신 주님, 그 주님의 못자국 난 손을 바라보세요. 흑인 노예처럼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우리 성도들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소리칠 수밖 에 없는 세리와 같은 나입니다(눅18:13).

 

그 주님이 가시는 고난의 길을 너무도 생생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600여년 전에 일러주신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사순절 기간동안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의 모습을 살펴보며 날 대속(代贖)하신 주님의 은혜에 젖어 사순절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묵상할 것

 

1.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담당하셨습니까?

 

2. 사순절 기간은 무엇을 하는 절기입니까?

 

 

3월10일 사순절 제2일

 

예수님은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이사야53:1,2, 요한복음1:29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고난의 주, 수난의 메시아,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의 초라한 모습을 말해주고 있다. 연한 순 같이 나약한 모습이요, 메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충실하지 못하여 무력한 모습이요,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어 그의 외모에서는 위인다운 큰 사람의 모습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인간적인 매력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온 유대 백성들이 고대하는 메시아상으로는 영 아닌 모습입니다. 적어도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고, 해방의 기쁨을 주고, 메시아 왕국의 평화를 가져 다 줄 인물로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 참으로 흠모할 만한 인물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는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요1:29) 고난의 주님은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온 유대 백성들이 고 대하던 메시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참으로 무언가 해 낼만한 걸출 한 모습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라 불리워졌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그는 유대인에게 소망을 줄 수 없는 나사렛 사람이었습니다(요1:46). 적어도 유대인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서는 "베들레헴 사람"이어야 하는데.... 실로 그는 "베들레헴 사람"이건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그에게는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삼상 11:24절/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이스라엘의 최초 왕으로 추대된 사울의 모습입니다. 모든 백성 중에서 짝할 이가 없는 걸출한 모습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 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고 했습니다(삼상9:2). 이런 사울을 향해.... 유대 의 모든 백성들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불렀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를 향한 유대인들의 반응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로 대표할 수 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택하실 때.... 사람을 외 모로 취하지 아니 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현실이기도 합니 다. 「나는 예수보다 더 훌륭한 석가를 믿고 있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일깨우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사명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이들의 죄도 담당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 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하시던 주님(눅23:34)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저들에게 전하고 일깨워야 합니다.

 

 

묵상할 것

 

1.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2. 세상 속에서 성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3월11일 사순절 제3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에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사야53:3,눅23:35,막15:31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고난의 주, 수난의 메시아,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 그에게는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어서 "만세!"를 외쳐 부르며 사울을 왕으로 맞이하던 모습과는 달리 유대의 백성들이 그를 멸시했다.

 

그 멸시의 최절정이 십자가의 처형이다.

 

십자가의 처형은 그 당시에 가장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죄인에게 내리는 극형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십자가에 달린 자를 저주받은 자라고 했다(갈3:13). 물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 나무에 달리셨지만,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지 않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고 협박하여(요19:12)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님이십니다.』

 

한마디로 그는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메시아라는 그를 오히려 더 멸시했습니다(눅23:35). 십자가에 매달고 그를 조롱했습니다(막15:31).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 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그러하거늘,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느냐" 하고 예수를 배척하였습니다(막6:3).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면 지금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주님을 향해 침을 뱉으며 조롱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어 멸시를, 천대를, 조롱을 당하신 주님..그는 실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거늘,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3년간 함께 하며 주님의 사랑을 남달리 받았던 제자들.... 가룟 유다는 스 승을 팔아먹었습니다. 수제자라 자랑하던 베드로는 스승을 욕하고, 저주하며 모른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잡히시던 그 밤에 모두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어 멸시를, 천대를, 조롱을 당했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향해 침을 뱉는 자나, 스승을 팔아먹는 자나, 스승을 욕하고 저주하며 모른다고 하는 자나, "죽기까지 따르오리라" 약속하고서도 나 몰라라 도망친 자들이나.... 무엇이 다를까요 ? 아니 나는 그들과 무엇이 다른가요? 사순절 기간에스스로를 한번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주님을 멀리하고 조롱하고 도망가지 않았는지 돌아보고 십자가 가까이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묵상할 것

 

1.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의 멸시의 최절정은 무엇입니까?

 

2. 십자가 상에서 무엇을 당하셨습니까?

 

3. 내가 달라져야할 점은 무엇입니까?

 

 

3월12일 사순절 제4일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지셨습니다.

 

이사야53: 4-6,롬6:23,요일4:10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는 실로 지금까지의 고난의 주, 수난의 메시아,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의 초라한 모습과 멸시 천대는 그의 참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그의 진 정한 모습은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셨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그의 겉모습만 보았지, 그의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여기의 "질고(疾苦)"는.... [호리]란 단어로 "질병, 근심, 재난"을 뜻합니다. 그 리고 "슬픔"은.... [마크오-브]란 단어로 "슬픔, 고통, 괴로움"을 뜻합니다. 곧 질고로 인한 괴로움을 대신 우리 주님이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질고와 슬픔".... 그것은 죄로 인한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롬6:23). 이 사망이 죄인에게 이루어지는 과정이 "질고와 슬픔"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질고와 슬픔"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곧 죽음을 대표하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고 있다".... 그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 유대인들뿐만 아닙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오늘 본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롬5:8). 그러나, 실상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 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사53:5)」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 셨습니다(53:6절). 이것이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확증이라고 했습니다 (롬5:8).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지 못하는 자는 말합니다.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았다"고 합니다. 이들을 일깨워야 할 사명이 우리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고 일깨워 주어야 합 니다. 그는 실로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습니다(요1:29).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본문6절). 여호와께서 그로 질고를 당하게 하셨습니다(10). 그래서, 그는 실로 우리 무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11). 그는 실로.... 많은 사람의 죄를 지셨습니다(본문12절). 그 주님이 지신 죄 속에 "내 죄"도포함되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롬5:8).

 

그는 실로.... 우리 무리의 죄악을 지고, 곤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는 실로.... 괴로울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습니다(본문 7절). 실제로 우리 주님은 대제사장들과 장 로들의 고소에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이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마27:14).

 

히브리서 4: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를 가리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자"라고 했습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와 한가지로 질고를 지고 곤욕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서 주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 께서 그에게 우리의 죄악을 담당시키셨습니다.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의 확정으로 하나님은 그를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를 먼저 사랑하신 사랑입니다(요일4:10).

 

그로 인해 여호와의 뜻이 성취되어졌습니다(10절). 우리 무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 하시고(11),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 루셨습니다(히9:12). 이것이 바로 대속의 은총이요, 우리 주님이 당하신 고난이었습니 다. 그 주님의 고난을 되새겨 보는 사순절 기간입니다.

 

 

묵상할 것

 

1. 십자가에서 대신 지신 것은 무엇입니까?

 

2. 십자가 상에서 무엇을 흘리셨습니까?

 

 

3월13일 사순절 첫주일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는 죽음입니다.

 

히브리서 2:9

 

 

인생의 가장 큰 문제 궁극적인 문제는 ?죽음?입니다. 우선 이 문제부터 해결하고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인생은 본향을 찾아가는 나그네 생활입니다. 인생은 100년을 산다 해도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영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한 부자가 어리석은 하인을 데리고 있었는데, 너무나 바보 같아서 어느 날 지팡이를 하나 주면서 ?이 다음에 너보다 더 큰 바보를 만나면 이 지팡이를 주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에 그 주인이 죽어가면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먼길을 떠난다?고 해서 하인이 ?그럼, 먼길을 떠날 준비는 하셨습니까??고 물으니까 ?아무 준비도 못했다?고 하더랍니다. ?몇 일 동안 여행을 떠나도 준비를 하는 법인데, 돌아오지 못할 먼길을 떠나면서 아무준비도 안 했다니 그런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이 지팡이 도로 가져가십시오?하고 건네주었다고 합니다.

 

시성 괴테(Goethe von Johann Wolfgang)는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없는 자는 아무리 화려한 성공을 하였을지라도 처량한 나그네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무신론자 협회 회장이었던 프란시스 뉴포트(Francis Newport)는 그렇게 하나님도 없고, 내세도 없다던 사람이 임종시에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 분의 분노하신 면전에 있다. 지옥이 없다는 말은 할 필요가 없다. 이미 나는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소망이 있다는 쓸데없는 말은 집어 치우라. 나는 영원히 잃어버린 자 임을 안다?고 했습니다.

 

부흥사 빌리 선데이(Billy Sunday)씨는 말하기를 ?나는 그분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는데 그분을 만나보면 나는 그분 발 앞에 엎드려 나를 구원하시고 사용해 주심에 대해서 감사드리겠습니다?고 했고, 터툴리안(Tertullian)은 ?우리 기독교인은 이 땅에서는 순례자이며 우리의 확고한 지위는 천국에 있다?고 했고, 칼빈(Calvin)은 ?천국은 우리의 궁극적 소망이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 어디서 살든지 이 세상은 유랑의 장소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이 올 때마다 다시한번 나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나의 궁극적인 문제의 해답을 십자가의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 나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해결받아 죽음 넘어에 있는 영원한 천국의 지복을 확신하고 소망하는 사순절 기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묵상할 것

 

1. 인생의 중요한 궁극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2.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존재입니까?

 

 

3월14일 사순절 제5일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 25-26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래 지금까지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오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것은 사망의 원인이 되는 죄를 씻어 주기 위한 것이며 3일 만에 부활하여 승천하신 것도 우리의 죽음을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부활이 없고 내세가 없다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종교는 다 같은 줄 알지만,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예수님만이 죽음을 해결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예 부활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봄에 콩이나 옥수수를 땅에 심으면 죽어 없어집니까? 아니지요. 다시 살아서 수 십 배, 수 백 배 열매를 맺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어떤 꽃씨는 2,000년만에 다시 살아 꽃을 피웠습니다. 어떤 곡식은 3,000년 전의 미이라에서 발견하여 심었는데 다시 살아 열매 맺는 것을 봅니다. 바울은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고린도전서 15장 36-37절)이라고 했습니다. 즉 곡식을 심으면 그 알갱이가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곡식이 살아 올라오는 것처럼 이 몸이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썩지 않고 죽지 않고 병들지 않고 늙지 않는 영원한 몸,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기독교인이 죽으면 그 영혼은 낙원에서 주님과 함께 있게 되고, 그 몸은 무덤에 묻혔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부활한 몸과 영혼이 결합하여 후에 영원한 천국에서 복락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더 원하지만, 살아서 복음 전하는 것도 좋다?고 하시고 빌립보서 1장 21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삶과 죽음)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즉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죽음이 임박해 올 때, ?꼭 살아야 되겠다?고 발버둥칠 필요도 없고 ?빨리 죽어야겠다?고 자포자기하거나 원망해서도 안됩니다.

 

실로 사순절은 부활의 영광을 대망하는 하루 하루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죄사함을 입은 우리는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부활의 그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묵상할 것

 

1. 예수님은 무엇을 해결하셨습니까?

 

2. 우리가 부활할 때 우리 몸은 어떤 모양입니까?

 

 

3월15일 사순절 제6일

 

죽음의 문제의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레위기 17:11, 요한복음 3:16, 14: 1-3.

 

 

예수님은 바로 이 궁극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큰 불안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재림)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장 1-3절)고 위로하셨습니다. 본문 히브리서 2장 9절에 ?..... 곧 죽음의 고난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죽음을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안 믿으면 지옥에 형벌을 받게 될까

 

요?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는데? 예수께서 죄 없는 피를 쏟아 우리 죄를 대속

 

해 주셨기 때문이며, 예수님만이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므로 피 흘림이 없이 죄 사함 받는 길이 없으므로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받습니다. 아무리 죄가 많아도 예수를 믿으면 용서받고 구원받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의의 옷을 입혀 주시고 천국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9절에 ?그러면 이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함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하셨고,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하셨습니다. 이 예수를 믿고 영접하면 죽음이 해결될 뿐 아니라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갑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죽기 몇 일 전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을 부르시더니 ?내가 죄 사함 받은 것과 천국에 갈 수 있는데 대해서 말씀 좀 해 주십시오? 부탁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 내 선행 때문도 아니고 교회에 헌금한 것 때문도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공로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죄값을 다 지불했으니 안심하십시오?하고 기도해 드렸더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준비되었습니다?(Thank you. I'm ready.)하고 소천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제 이렇게 기도합시다.?하나님, 이 죄인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합니다. 내 모든 죄를 예수님의 피로 씻어 주심을 믿습니다.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묵상할 것

 

1. 예수님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무엇을 하셨습니까?

 

2. 우리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3월16일 사순절 제7일

 

깨어있는 자만이 천국 갑니다.

 

성경 : 마태복음 25:1-13

 

 

사순절기간은 주님을 대망하는 기간입니다. 사순절기간은 지혜로운 다섯처녀처럼 되려는 기간입니다. 실로 열 처녀의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수록된 기사로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신부는 재림하실 예수를 기다리는 모든 성도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마25 :2)라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도들 중에서 일부는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영광에 참여하고 나머지는 그렇지 못하리라 는 암시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알곡과 가라지](마13:24- 30) [양과 염소](마25:31-46)를 성도들 중에서도 분명히 하시겠다라는 강한 의도를 우리는 성경의 많은 부분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나타나는 미련한 다섯 처녀의 실패한 삶을 거울로 삼아 우리의 신앙생활에 많은 교훈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다섯 처녀가 실패하게 된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들은 화려한 겉 모습에만 치중하고 있었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함께 등을 들고서 화려한 의복을 입고 신랑을 맞이 하기 위한 자신들의 완벽한 준비에 내심 흐뭇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가 지고 밤이 깊어졌을 때 [신랑이오니 나와 맞으라]는 소리에 비로소 자신의 등에 기름이 없음을 발견 하게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름은 성령을 비유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요일2:2 7).성경께서는 거듭난 성도들의 심령에 내주 하시며 성도들은 그 성령의 충만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어 능력있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 갈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고 권면합니다.

 

둘째,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기름을 믿었습니다.

 

신앙에는 대차제도가 없습니다. 즉 남의 것을 꾸어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각자 개인이 자신의 신앙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주님 앞에 서는 것인데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가지고 있는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졸랐으나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마25 :8-9). 성령은 어떤 물건처럼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 이들은 지나간 공적을 너무 믿었습니다.

 

남의 기름에 의존하려다가 실패한 다섯 처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듯 기름 가게를 찾아간 것입니다(마25:10). 이들은 기름을 사갖고 왔으나 예수님과 슬기로운 처녀들은 잔치자리로 들어가고 문이 닫힌 뒤였습니다. 그래서 미련한 처녀들은 마지막 자신들의 공로로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름을 사러 시장까지 갔다오느라 고생도 많이 했고 시간도 많이 걸렸으니 문 좀 열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공로가 있는데]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기다렸으나 예수님의 대답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마25 :1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과거의 공로를 가지고 오늘의 실패를 속량할 수 없다는 주님의 대답입니다.

 

결론적으로 △신앙의 겉모습에 치중하지 않고 믿음이 성장하는 내실 있는 성도가 돼야 하며 △다른 사람의 기름에 의존하지 않으려면 평상시에 준비하는 습성이 있어야 하고 △지나간 과거의 공적에 속하지 않으려면 미래를 바라보면서 현실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의 삶이 깨어있는 신앙이 되어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칭찬듣는 성도로, 또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신실한 증인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묵상할 것

 

1. 나는 어떤 처녀입니까?

 

2. 내가 천국가기 위하여 어떤 준비를 하여야 할 것입니까?

 

 

3월17일 사순절 제8일

 

주어진 기회를 선용하십시다.

 

시편32:6 마태복음 25:21

 

 

오스트리아의 유태계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그의 작품 가운데 門밖에서 일생 동안을 기다리다 죽은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 밖에서 일생 동안 서성거리다 죽기 전에야 자기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문지기에게 '나를 들여보내지 않고 지키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문지기는 " 이 문은 당신의 문입니다. 나는 당신을 돕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한번도 이 문을 열어달라고 나에게 요청한 일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그 사람은 용기도, 모험심도 없이 문 앞을 서성거리다가 죽어간 것입니다.

 

우리 앞에 기회의 문이 열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축복의 문이 열려 있는데도 한번도 열어보려고 하지 아니하고 시도도 해보지도 못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성공의 때를 놓치고 축복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일생 동안 삶을 허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달란트의 비유를 보시면 주인이 종들의 능력에 따라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각각 주고 먼길을 떠났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계산을 하는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열심히 일을 해서 받았던 돈의 갑절의 이윤을 남겨 주인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기뻐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리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25:21) 하며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인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었던 까닭에 그 돈을 활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땅속에 묻었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꺼내 놓았습니다. 주인은 그것을 보고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25:26-28) 하며 심히 책망을 했습니다. 결국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문 밖으로 쫓겨나 이를 갈며 통곡했다는 것이 이 비유의 줄거리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달란트의 많고 적음의 문제, 금전의 가치에 대한 문제 이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와 시간을 잘 활용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우리 신앙 생활은 기회와 시간과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말에는 시간이라는 단어가 한가지 뜻으로만 풀이되어 있지만, 헬라어에는 시간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 두 가지로 나뉘어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라는 말인데 이것은 '흐르는 시간' 을 의미합니다. 연대로 보는 시간 관념입니다. 또 하나는 '카이로스'라는 말인데,이것은 질적인 시간으로서,의미 있는 시간, 가치있는 시간, 보람있는 시간, 생동하는 시간,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맺는 영원한 시간, 감격의 순간들이 모두 이에 속합니다.

 

크리스챤의 삶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았느냐 하는 것보다도 시간 시간을 얼마나 값있고 질적으로 의미 있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 신앙생활을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꾸지 못했기 때문에 주인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사순절 기간에 카이로스로 전환된 길을 새롭게 출발하기를 바랍니다.

 

 

묵상할 것

 

1. 나는 어떤 달란트를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2.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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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8일 사순절 제9일

 

가장 작은 것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마태복음 25:14-30

 

 

사순절 기간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를 찾아 그 은사를 따라 새로운 삶을 설계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크든 적든 내게 주어진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은혜롭게 활용하는 사람에게 십자가의 그 크신 은총을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과소평가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 가증의 곤란한 것, 잘못된 것은 확대해 보면서 다른 가정의 모든 것을 좋게 생각하는 것은 미성숙한 삶의 태도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가정, 자기에게 주어진 자식, 자기에게 주어진 아내,남편, 직장 등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한 달란트 받았던 종과 같이 실패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불평과 원망과 구실만을 찾습니다. 우리 나라가, 우리 사회가, 우리 가정이 잘못됐기 때문에 내가 못산다고 하면서 모든 책임을 회피하고, 또한 자기에게 주어진 무한한 가능성과 달란트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여 실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농부가 오랫동안 좋은 농장을 가꾸면서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자기의 농장이 싫증이 나서 이것을 팔고 다른 환경의 새 농장을 사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부동산 중개소에 자기의 농장을 내놓았습니다. 부동산 중개소에서는 여러 곳에 광고를 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넓고 기름진 땅, 좋은 농가, 큰 곡식 창고, 이상적인 위치, 최신식 농기구를 갖춘 농장을 팝니다."

 

신문 광고를 보다가 이 농부는 "이 농장이 바로 내가 원하는 농장이구나"하고 생각하고서 위치를 자세히 보니까 바로 자기 농장을 광고한 것이었습니다. 그때야 농부는 자기 농장이 가장 이상적인 농장임을 깨닫고 매물로 내놓았던 것을 취소하고 그 농장을 잘 가꾸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얘기입니다.

 

남의 떡이 커 보입니다. 남의 과일이 크고 좋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부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달란트도 소중합니다. 비록 가진 것 없고 못났다 하더라도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내 자식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만 주어진 은사를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소중히 여길 때 그는 성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며, 가장 작은 것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정신을 이 사람이 고난의 길을 가신 사순절의 깊은 의미에 동참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묵상할 것

 

1.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가장 작은 것들을 열거해보시기 바랍니다.

 

2. 내게 주어진 은총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였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3월19일 사순절 제10일

 

심은 대로 거둡니다.

 

시편126:5,6 고린도전서15:42-44

 

 

1895년 미국의 아담스(Adams)라는 선교사가 대구에서 선교 생활을 하다가 안식년이 되어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안식년을 마치고 다시 대구에 돌아올 때에 아담스 선교사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과가 대구에 없는 것을 생각하고 사과씨 한 알을 주머니에 넣어 왔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는 집 마당에 사과씨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었는데, 그 사과씨가 대구의 기후와 토질에 맞았기 때문에 점점 자라서 꽃이피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사과 맛을 보니까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해에는 사과씨를 이웃에게도 조금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과씨 하나가 아담스라는 선교사에 의해 대구에 심어지고, 그로인해 오늘날 대구가 세계 제일의 사과 명산지가 된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한 알의 사과 씨앗이 떨어지게 될 때 기적을 일으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알의 사과씨, 이것을 과소평가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삶 속에 소중히 심어둘 때에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비유로 하신 약속의 말씀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이 달란트를 활용하지 못하고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며 땅에다 파묻었습니다. 이 사람은 모험심도, 용기도 없었기에 시도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일생 동안 자기의 달란트를 활용해보려고 시도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땅에 파묻어 버리고는 잃어버릴까 그 주위를 맴돌다가 일생을 탕진하고 마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활용하려고 시도할 때에 성공의 기회가 우리 앞에 활짝 열려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님이 부흥되지 못하는 2백 교회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 중의 한 교회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 교회가 부흥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은 "말도 마십시요 우리 교회에서는 헌금이 많이 걷히지 않아 선교비도 없어도. 그리고 교회에 인재다운 인제가 없어도. 그러니 이 교회가 부흥이 되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슐러 목사님은 "아닙니다. 이 교회는 돈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고 당신에게 아이디어(idea) 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모험심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라고 그 목사님에게 충고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어진 달란트를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속담에 "말로 배워서 되로 쓰는 사람이 있고, 되로 배워서 말로 쓰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받은 달란트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느냐를 가르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지금 새롭게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은 사순절 기간에 자신의 생 전체를 극대화시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 바쳤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고 오늘의 우리의 축복이 있게 된 것입니다.

 

 

묵상할 것

 

1. 내 인생에 성공할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까?

 

2. 오늘 모험심을 가지고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생각은 없습니까?

 

 

3월20일 사순절 둘째주일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시기 바랍니다.

 

민수기 12:7, 느헤미야9:1-31(8)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정년 퇴직할 때까지 우체부 생활을 하던 프리슬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은퇴할 때 매달 받을 얼마의 연봉과 은혜에 예금해 놓은 1,200달러가 그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은퇴한 우체부는 언제나 선한 마음을 가지고 동네 사람들에게 친절하게도 자기가 알고 있던 꽃을 가꾸는 방법이라는가 새를 키우는 방법등을 가르쳐 주면서 즐겁게 지냈습니다. 이웃 사람들도 은퇴한 이 우체부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어느날 프리슬리는 이웃들을 위해 도울 일이 없을까 생각하다 일리노이 주 사람들은 바다와 멀리 떨어져 생활하기 때문에 바다 구경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그래서 프리슬리는 그들에게 바다 구경을 시켜 주리라 결심하고 바다에 관한 책을 읽으며 사람들에게 설명해 줄 자료를 준비한 후 바다 관광을 할 사람들을 모집했습니다. 수백 명이 몰려왔습니다. 그 사람들을 버스에 싣고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 비치에 데리고 가서 구경을 시켰습니다. 바다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관광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음 번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바다 관광을 가겠다고 신청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사람들은 프리슬리에게 바다만 구경시켜 줄 것이 아니라 다른 관광 명소도 안내를 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제 프리슬리는 폴로리다 주뿐만 아니라 미국 전지역을 커버하는 관광 회사를 설립하고 많은 사람을 위해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은퇴한 후에 쭈그려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어떤 도움을 줄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노력한 결과 82살 난 프리슬리는 재산이 7백만 달러나 되는 거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내 지식과 내 노력을 착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남에게 나눠주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질적인 축복을 허락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 그것이 비록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충실히 활용하게 될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며 하나님께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축복을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때 이스라엘이 회고하며 노래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충성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에게 성실함으로 그 후순이 복을 받고 고토를 회복하는 은총을 입었다고 노래하고 있음을 볼 때 오늘날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사순절 기간에 새롭게 다짐하십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충성하겠다고 다짐합시다. 그 달란트를 이웃과 더물어 나누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합시다.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선한 기회로 활용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창조적인 생산적인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실 가장 귀한 은총의 주인공이 되시는 사순절기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묵상할 것

 

1. 내가 최선을 다하는 삶의 분야는 무엇입니까?

 

2. 내가 하는 일에 충실을 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3월21일 사순절 제11일

 

오른편입니까? 왼편입니까?

 

마태복음 25:31-46,로마서14:11-14

 

 

사순절 기간은 다시오실 예수님을 대망하는 기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셨고 그 길에서 우리가 구원받기를 바라셨습니다. 오늘을 살면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의 길을 가셨으나 마침내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심판주로 재림하실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이땅에서의 부귀영화나 안일 보다는 주님게서 재림하실 그날을 기다리며 사모하며 살아갑니다. 비록 이땅에서 슬픈 일이 있어도 , 눈물겨운 일이 있어도 그날을 생각하면서 참고 견디면서 인내를 합니다. 어떤 이는 감격과 설레임 속에서 기다리고, 또 어떤 이는 두렵고 떨림 속에서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그날을 사모하며 기다립니다,

 

오늘의 말씀을 흔히 심판의 복음이라고 합니다.마태복음에는 심판에 관한 많은 교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마 3:10, 7:24, 13:30,47,50) 특히 오늘의 말씀은 대심판날에 있을 마지막 심판의 진행과정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른편에는 양을 왼편에는 염소를 세움니다.(32, 33) 본문 32절 말씀의 의미는 목양의 전문가인 목자가 틀림이 없이 양과 염소를 분별하듯이 인류의 대 목자장이신 주님은 모든 민족의 창조주시여 심판주가 되시기 때문에 그의 심판은 절대 정확하다는 말씀임니다, 그리고 33절의 오른편은 보호를 받는 안전한곳, 즉 천국을 말씀하며, 왼편은 지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른편과 왼편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

 

1) 오른편에는 복을 받으나 왼편에는 저주를 받습니다.

 

2) 오른편에는 하나님과 연합하나 왼편에는 마귀와 연합하게 됩니다.

 

3) 오른편에 있는자를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위해 창세로 부터 예비된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그러나 왼편에 있는 자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서야할 곳은 어느 곳입니까 ? 반드시 오른 편이 되어야 하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금년 사순절 기간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길을 잘 가고 믿음의 열매를 잘 맺어 예수님이 오시는 그날 그곳에서 오른편으로 구분되어 영생에 이르는 은총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새롭게 자신을 무장하는 기간이 되어야 하리라 믿습니다.

 

 

묵상할 것

 

1. 심판의 날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2. 심판의 날에 나는 어느 편에 속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3월22일 사순절 제12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집시다.

 

이사야 50:4-9, 빌립보2:5-11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가는 절기입니다. 어떤 마음입니까?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자기를 비우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은 곧 비우는 마음입니다. 자기를 비우는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가 비운 것은 하나님의 본체입니다. 주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분인데 스스로 다 비워버렸습니다.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렸습니다. 권리와 지식과 경험과 능력 등 자신의 모든 것을 스스로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의 자기를 비우는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비우는 마음이 있습니까?

 

둘째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자기를 낮추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또한 품어야 할 마음은 자기를 낮추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자기를 낮췄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비웠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낮췄습니다. 여기 낮췄다는 말은 자기를 철저히 비하시켰다는 뜻으로 진정한 의미의 겸손을 가리킵니다. 이 겸손은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된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종의 형체를 가졌습니다. 원래 자기의 신분과는 도저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낮고 천한 신분으로 사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바로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자신을 낮추는 마음이 있습니까? 아직도 헛된 자만심 때문에 남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참된 주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했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는 바로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우리가 반드시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여기서 죽기까지 복종했다는 것은 무조건 복종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과연 그 말씀처럼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지 않았습니까? 십자가는 결코 낭만이 아닙니다.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그 십자가는 수치이고 고통이며 또한 모순이자 부조리입니다. 사실 역사상 우리 주님이 달린 십자가처럼 억울한 것은 또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달릴 그 어떤 잘못도 없는 분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복종했습니다. 그렇게 죽는 것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죽기까지 복종했던 것입니다. 과연 오늘 우리도 그렇게 주님의 뜻에 복종할 수 있습니까?

 

 

묵상할 내용

 

1.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2.나는 나의 삶의 현장에서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실천하기 위하여

 

무엇을 합니까?

 

 

3월23일 사순절 제13일

 

예수님은 죽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

 

누가복음 19:28-40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활동하신 장소는 크게 두 곳으로 나타납니다. 한 곳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또 대부분의 시간 동안 활동하신 갈릴리이고, 다른 한 곳은 시간적으로는 짧지만 그 비중과 의미에 있어서는 갈릴리 못지 않게 중요한 예루살렘입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등 구원의 역사를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펼치십니다. 물론 때로는 사람들에게 예수님 자신에 대하여 비밀로 하라고 당부하시기도 하시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고, 또 적대자도 있었지만 추종자의 기세에 눌려 별다른 반발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역의 전성기를 보내고 계셨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제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하셨습니다. 누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가서 환영받을 곳도 아닌 예루살렘으로, 있다면 예수님을 반대하던 자의 본거지가 있고, 기다리고 있다면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고난을 받고 죽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실 리 없는 예수님이 왜 그런 무모한 길을 떠나셨을까요? 갈릴리에 그냥 있으면 더 많은 구원사역을 더 오랫동안 하실 수 있을텐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유대인 남자라면 일 년에 한 번 예루살렘에 가야 했지만, 지난번처럼 그냥 조용히 들어가서 할 일만 하시고 조용히 나오실 수도 있었을텐데, 종려주일엔 왜 마치 왕이 행진하듯이 요란한 환영 가운데, 마치 제왕이 즉위하듯이 그렇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까요?

 

가장 단순한 대답은 죽기 위해서라는 것일 겁니다. 누가복음 8:31~33에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자신이 죽게 될 것을 아시면서,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선지자들이 이미 기록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예수님께 맡긴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뜻에 순종해서,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고 그 일이 즐겁고 편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신 장면들을 보면, 비장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도 죽음은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예수님은 모든 두려움과 고통을 감수한 채 말없이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묵상할 것

 

1. 예수님이 주로 활동한 곳은 어디입니까?

 

2.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까?

 

 

3월24일 사순절 제14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가신 길입니다.

 

마가복음11:1-11

 

 

하나님은 왜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 십자가를 지기를 요구하셨을까요? 그건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게 되어 있는 우리를 대신해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해 그 아들 예수가 예루살렘에 가신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려고, 죽음의 장소, 예루살렘에 가신 것입니다.

 

정말로 예루살렘은 죽음의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부와 권력을 독점하던 성전 체제의 본거지요, 정점이 바로 예루살렘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율법을 독점하여 그것으로 사람들을 기만하고 억압하고 착취하던 곳, 그뿐만 아니라 이방인이요 침략자인 로마와 결탁하여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훼손하던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었던 것입니다. 생명의 이름은 있지만 죽음이 지배하던 곳, 예루살렘으로 예수는 죽기 위해 가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죽음의 장소 한복판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는 바로 그 곳,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곳, 예루살렘에서부터 온 세계에 부활의 복음이 선포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퍼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가시고기라는 물고기의 전설이 있습니다. 이 물고기는 크기가 작아서 큰 물고기들의 먹이가 되곤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시고기는 온 몸이 날카로운 가시로 되어 있어서 자기를 잡아먹은 물고기 배를 가르고 나와 오히려 큰 물고기를 죽게 한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그 죽음의 세력은 예루살렘을 찾아 온 예수를 죽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무덤 속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시어 오히려 그 죽음을 정복하고 말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갈릴리에서 많은 사람의 환영과 추종에 안주하지 않고, 죽음을 위하여, 그리고 그 죽음을 극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대한 순종 하나만 가지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세상이 혹시 예루살렘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예루살렘처럼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려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전 체제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구속하고, 억압하고,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을 오히려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아직도 갈릴리에서 떠나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교인이 늘었다고 해서 교회에만 파묻혀 사회를 외면하고 역사를 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순종하라고 하실까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 있는,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을 향해 고난을 받더라도, 그러다가 혹시 죽게 되더라도 예루살렘을 향하여떠나라고 하십니다. 거기에는 새로운 생명, 부활의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기간은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길이 되어야 합니다.

 

 

묵상할 것

 

1. 하나님은 왜 아들이신 예수님을 예루살렘에 가게 하셨을까요?

 

2.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3월25일 사순절 제15일

 

나는 십자가를 지고 싶습니다.

 

출4:10-17, 누가복음 23:26-3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 승천하신 지 약 30여 년이 지난 후 베드로는 로마로 갔습니다. 거기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나타나자 시몬의 마술이 전혀 엉터리라는 것이 폭로되고 말았습니다. 로마에는 마술사 시몬의 추종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여러 가지로 불리한 형편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세례 요한이 헤롯의 불륜을 지적했다가 목베임을 당했듯이 당시 황제의 총애를 받던 알비누스 부인의 순결문제를 지적했기 때문에 황제와 알비누스 부인은 대노하여 베드로를 죽여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당시 교회는 베드로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하여 생명을 보전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야 어려움에 처한 교회와 성도들을 계속 지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권유를 이기지 못한 베드로가 마침내 로마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로마를 떠나 도망을 가는데 우리 주님께서 로마로 들어가시는 모습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로마로 간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주여,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시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는 "그렇다, 베드로야. 나는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비로소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기 대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로마로 가시는데 자기는 로마로부터 달아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로마로 되돌아갔습니다. 베드로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내가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순교하였습니다. 드디어 베드로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신은 결코 주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힐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하면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히겠다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습니다.

 

막15:21에 보면 구레네 시몬에게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진해서, 그것도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혔으나 구레네 시몬은 전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징발 당하다시피 하여 억지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크신 뜻은 비록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사람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신다고 하는 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사순절에 나도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묵상할 것

 

1. 나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2. 나는 그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지고 있습니까?

 

 

3월26일 사순절 제16일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2:1-5

 

 

사순절은 십자가로 나아가는 절기입니다. 십자가를 묵상하십시다.

 

(1) 십자가는 당시 극악한 죄인을 죽이는 사형 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거기서 죽으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는 새로운 의미의 사형 틀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옛 사람이 죽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정과 욕심을 거기 못 박아야 하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2) 십자가는 순교를 가르칩니다.

 

교회의 역사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교부의 말처럼 그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사실은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3) 십자가는 우리가 신앙 때문에 당하는 모든 고난을 말합니다.

 

우리 찬송가에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할 때 마침내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도 주십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는 말이 생겼습니다.

 

(4) 십자가는 우리 주님의 대속을 말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의 값을 지불하셨으므로 나는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늘나라 영광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를 구원해 주신 우리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단지 내 몫에 태인 십자가만을 지고 따를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기간에 주님이 달리신 이와같은 십자가를 묵상하시고 십자가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나의 삶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나 위하여 달리신 십자가 그 고통의 자리, 희생의 자리, 그 구원의 자리에서 나 위하여 피흘리시는 주님을 만나는 나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묵상할 것

 

1.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를 다 말씀해보시기 바랍니다.

 

2. 십자가가 내가 자랑입니까? 수치입니까?

 

 

3월27일 사순절 셋째주일

 

나는 구레네 시몬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9:23,14:27

 

 

그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진 사람입니다.

 

(1) 비록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간 구레네 시몬이야말로 역사상 최초로 주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실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것도 맨 처음 십자가를 지고 따른 사람이 바로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그렇게 큰 소리치던 다른 제자들은 어디가고 주님의 그 무거운 십자가를 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 지게 되었겠습니까? 어쩌면 그날 이 구레네 시몬은 몹시 언짢았을 것입니다. 매우 불행한 하루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해서 억지로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지게 된 것이 그와 그 가정에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주님이 맡겨 주신 사역을 위하여 즐겨 십자가를 지면 더 큰복이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억지로라도 지고 가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것이 당신에게 큰복이 되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2) 구레네 시몬은 그 십자가를 지고 따라갔기 때문에 그 은총의 현장을 친히 목격하고 체험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피와 땀을 흘리시면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우리 주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 누구입니까?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묵묵히 모든 고난을 다 받으시면서 오히려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그 거룩한 모습을 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회개한 강도에게는 천국을 약속해 주시고, 울고 서 있는 어머니를 위하여는 요한에게 그 장래를 부탁하는 그 모습을 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씀과 함께 운명하시는 모습을 지켜 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그는 이 놀라운 은총의 현장을 목격하고 체험하고 "아! 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 구주로구나!"라는 확신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온 가족들에 그 놀라운 말씀을 증거하고 모두 함께 믿기로 작정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롬16:13에 보면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루포가 누구입니까? 구레네 시몬의 아들로서 그와 그 어머니가 함께 초대 교회의 기둥과 중심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주님을 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놀라운 복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억지로라도 주님이 주시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위하여 예비하신 은혜와 복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사순절 기간에 나도 구레네시몬이 되어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길을 감으로 큰 은혜가 넘치시길 바랍니다.

 

 

묵상할 것

 

1. 누가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이입니까?

 

2. 십자가의 현장은 어떤 이가 체험합니까?

 

 

3월28일 사순절 17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겠나이다.

 

마태복음16:24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우십니까?

 

구레네 시몬이 처음에 십자가의 뜻을 제대로 알았다면 왜 억지로 졌겠습니까? 오히려 십자가가 자기에게 돌아왔다고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숨겨진 엄청난 은혜와 복을 보는 눈이 열리기 전까지 그것은 원망거리요 불평거리였습니다.

 

옛날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애굽에 가서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바로를 향하여 "내 백성을 보내라"고 요구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바로의 심기만 자극하여 몇 배나 더 심한 노역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아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를 원망하면서 돌로 쳐죽이려고 까지 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내가 이 백성을 낳기라도 했습니까?" 하고 불평을 쏟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십자가를 통하여 모세를 능하게 쓰셨고, 마침내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해방이라고 하는 놀라운 드라마를 연출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십자가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요나는 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가당치도 않게 여겨져서 다시스로 도망을 갔습니다. 다시스는 성공을 향한 길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온갖 좋은 조건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풍랑이 일어서 요나는 바다에 던져 집니다.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더 이상 생각할 수도 없는 한계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돌아간 십자가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다시스행을 막으셨습니까? 왜 순탄한 길을 보장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거기에 멸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아버지께서 어찌 그 길을 보고만 계시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억지로라도 지워주시는 십자가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 십자가를 피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즐겨 지고 주님을 따르십시오. 그렇지 못하다면 억지로라도 지고 따르십시오. 거기에 주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은총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 찬송가 가사에서처럼 "내 몫에 태인 십자가"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십자가가 있고, 가정적인 십자가도 있습니다. 그리고 민족적인 십자가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부간에도 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십자가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 때문에 직장을 선택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가정적인 십자가입니다. 오늘 이 민족은 아직도 남과 북이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분단국가로 남아 있습니다. 민족적인 십자가입니다. 이 모든 십자가에 내 역할이 있습니다. 내가 지고 가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일수도 있고, 그것이 전도일수도 있고, 충성일 수도 있고, 또 그것이 가난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내가 지고 가야할 몫은 내가 지고 따라가야 합니다.

 

오늘 십자가를 찬양하기는 좋아하고, 바라보기는 좋아하고, 목에 걸고 다니기는 좋아하지만 그것을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는 즐겨지면 더 큰 축복이요, 억지로라도 지고 가면 거기 놀라운 은총과 복이 있다는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묵상할 것

 

1. 십자가의 맛을 말해보십시오.

 

2. 십자가를 진 결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3월29일 사순절 제18일

 

십자가의 고통은 우리에게 은총입니다.

 

막15:33-37, 갈라디아 3:1

 

 

예수 그리스도의 33년 일생은 베들레헴 말구유에서부터 아리마대 부자 요셉의 새 무덤까지 어느 하나 사랑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도 갈보리 산상 십자가에 못 박혀 거룩한 몸이 높이 달려 계시는 주님의 형상을 바라볼 때마다 새삼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 앞에 감격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가신 믿음의 선진들은 다 하나같이 이 십자가의 감격 속에 살아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외에는 다른 것은 일체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했고, 십자가의 예수님만 자랑했고, 십자가의 신앙만 말했고, 십자가의 진리만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는 우리 구원의 빙거요 인류 역사의 중심이요, 기점이며 성도의 생활 표준이요,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자기 서재 안에 ?십자가는 우주의 중심이요 인류의 생명이니라?고 쓰고 십자가를 늘 묵상하였으며, 성 프랜체스코는 자기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나는 제군들에게 전해 줄 만한 책자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나는 제군들에게 전할 만한 설교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내가 제군들에게 전해 줄 유일한 것은 바로 이것밖에 없습니다?고 하며 십자가 지팡이를 들어 보여 주었답니다.

 

한국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는 ?학생이 배우는 길은 학교로 가야 되고 어부의 고기 잡는 길은 물로 가야 되고 인간의 활로는 십자가로 가야 한다?며 평양 감옥에서 일본 경찰의 박해 중에 ?영문 밖의 길?이라는 십자가를 명상하는 가사를 짓고 친히 십자가 제단에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옛 성도들은 이처럼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이 시간 우리 같은 흉악한 죄인을 위하여 내가 죽는 대신 그 거룩하신 몸이 상하시고 죽어 보배로운 피로 나를 구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앙망합시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미련한 갈라디아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형상이 ?밝히 보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도 육신의 눈을 감고 신령한 마음의 눈을 열어 저 갈보리 산상의 십자가 위에 두 손, 두 발이 못 박혀 붉은 피를 흘리며 달려 계시는 주님의 형상을 주목합시다.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채 달린 형상이 보입니까? 거룩하신 주님의 성체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선지 핏자국이, 그 머리 위에 씌워진 끔찍스러운 가시 면류관이 보입니까? 가시로 상한 머리에서 점점이 떨어지는 붉은 피로 얼룩진 예수님의 얼굴이, 악인들의 무자비한 단련으로 피곤해서 움푹 들어 가 버린 주님의 눈, 창상으로 그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핏자국이 보입니까? 불법한 빌라도 채찍에 맞아 터지고 멍든 그 몸의 상처, 지금 우리 주님의 전신에서 예리하게 흘러내리는 보배로운 피를 다시 한 번 쳐다봅시다.우리 주님의 고통의 그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인간의 적은 두뇌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 주님의 고통을 우리 한 번 생각하시는 사순절 기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묵상할 것

 

1. 믿음의 조상들이 십자가의 감격 안에 산 이유가 무엇입니까?

 

2. 성 프랜체스코는 제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엿습니까?

 

3. 우리가 쳐다보아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3월30일 사순절 제19일

 

주님은 신성에,영혼에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마태복음27:11-56

 

 

예수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만물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며,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시며, 지존 지성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분에게 모욕을 가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영광의 면류관 대신 가시관을 씌웠고, 왕의 홀 대신에 갈대를 그 손에 들리어 주었고, 황금 옷 대신에 낡아 떨어진 홍포를 입혔고, 화려한 궁전 대신에 감옥에 가두었고, 의장병 대신에 포악한 로마병정을 부쳤고, 호산나 만세 대신에 십자가에 못박으라 아우성 쳤고, 최대의 존경대신에 모독적 언사로 농락했고, 예물 대신에 침뱉고 뺨을 쳤으며, 최대의 경례 대신에 불법한 태장으로 쳤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배 대신에 십자가에 못박아 무참히도 살해했습니다. 이 얼마나 큰 고통이요 큰 모욕이며 큰 희생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그 본체의 형상이시고 그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이처럼 모욕과 고통을 주었습니다.

 

본래 주님은 이 세상에 도성인신하여 들어오실 때에 우리 인류의 죄를 대속하려고 자원해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전 인류의 죄를 자기 자신의 한 몸에 인수하시고 이것을 담당하려고 하실 때 너무나 많은 죄에 놀라셨습니다. 그 수많은 죄를 하나 하나 바라보시니 그만 놀랍고 민망하여 탄식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여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내게서 이 잔을 떠나가게 하소서? 부르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도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의 죄가 아니라, 만국, 만민, 만세, 만대, 억조 창생의 죄짐을 바라보니 그 슬픔, 그 고통, 그 답답함, 그 민망함 가히 형언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그래서 성경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매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기도하시는 주님의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핏방울같이 되었습니다.

 

인간들의 끝없는 무거운 죄짐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렸을 때는 주님도 너무도 답답하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쳤습니다. 육신의 형제들, 친척들, 제자들 그 누구도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율법사, 제사장, 장로들 모두 예수님을 쉴새없이 괴롭혔습니다. 제자가 배신하고(막 14:10), 다른 제자들은 도망했습니다(막 14:50). 벌거벗음과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옆에 못 박힌 강도까지 십자가에 계신 주님을 회롱했습니다. 주님의 이 큰 고통을 누가 감히 헤아릴 수 있습니까? 성부 하나님 마저 예수 그리스도 그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주님이 영적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묵상할 것

 

1. 예수님이 당하신 신성모독을 열거하십시오.

 

2. 에수님은 고통가운데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3월31일 사순절 제20일

 

주님은 육체에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마태복음8:20,누가복음 9:22

 

 

 

우리 주님이 하늘 영광 보좌를 내놓고 낮은 세상에 내려오신 것부터가 고생이셨습니다. 식민지 나라에서(눅 2:1), 말구유에서 나시고(눅 2:7), 가난하고(눅 2:24; 레 12:8), 천대받는 목수의 가정에서 자라나셨으며(마 13:55), 집 없이(눅 9:58), 산에서 기도로 지내시고(요 8:1), 행로에 곤하셨으며(요 4:6),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막 6:31), 죄인(마 9:11), 병자(요 5:6), 귀신들린 자(막 5:6), 슬픔당한 자(눅 7:11) 들을 돌보셨고, 곳곳에서 전도하시느라(막 1:38) 고생이셨습니다.

 

십자가는 페니키아 인들이 생각해낸 심히 악한 죄인들, 특히 노예들을 못박아 죽이던 형틀이었습니다. 온몸은 줄어들고, 손발의 피는 마르며 머리와 장부에는 피가 몰려 두통, 창상열, 파상풍을 일으킵니다. 온 몸에 채찍에 맞으시고, 몸에는 멍들어 있고, 그 몸 군데군데는 터지고 미어져 핏빛이었고, 그 무릎은 칠전팔기하시며, 터지고 깨졌고, 그 말은 돌 뿌리에 채어서 붉은 피로 물들고 그 얼굴은 로마 병정들에게 맞아 멍들어 부풀어올라 분간할 수 없이 되었습니다. 겨우 겨우 갈보리 산상에 올라오니 악당들은 주님의 입은 옷을 다 발가벗기고 십자가 위에 눕힌 채 사지를 결박하고 양손 양발에 모진 무쇠 못으로 못박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하셨겠습니까? 가시관을 쓰시고 고통을 덜어주는 쓸 개탄 포도주도 안 받으시고,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리셔서 몸부림치시고 목마르셨습니다. 옆구리에 창을 받아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버림을 당하고 심지어 유일한 피난처이신 하나님 아버지에게 마저 버림당하는 슬픔을 맛보셨습니다. 관리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헤롯왕은 예수님을 미친 사람 취급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참람하다고 정죄하였고,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면서도 채찍질하며 사형언도를 했습니다. 민중들도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삼사일 전에만 해도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 호산나?하며 종려가지를 손에 들고 환영하던 그들이 돌변하여 피에 굶주린 사자 떼 같이 ?그를 죽이소서, 그를 죽이소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소서? 하며 아우성을 쳤습니다.3년 동안 예수님을 모시던 제자들은 어디 갔습니까? 병고침 받은 사람은 다 어디 갔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산 나사로는, 순교를 각오했던 베드로는 어디 갔습니까? 모두 다 예수님을 버린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고독하게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셨습니다. 해조차 빛을 잃어 천지가 캄캄해지고, 땅은 지진으로 진동하고, 바위는 터져 잠자던 성인의 무덤이 열리고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나며, 성전 휘장은 위에서 밑에까지 사람이 손대지 않고 갈라졌습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 형상을 밝히 바라봅시다. 주님의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새 출발합시다.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 그 고통이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과 영생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아래서 내 재산, 내 시간, 내 생명 다 바쳐 헌신합시다. 그러면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도 잘되고 강건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을 믿습니다.

 

 

묵상할 것

 

1. 예수님이 고생하신 것을 열거하십시오.

 

2.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실 때 일어난 사건을 열거하십시오.

 

 

4월1일 사순절 제21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왕이십니다.

 

마태복음 27:32-44

 

 

마태복음 27:32-44

 

 

왕이라는 사람은 모든 백성을 자기 노예처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권세를 가졌습니다. 나라의 모든 재산, 땅이 왕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왕은 대궐(궁궐)에서 삽니다. 이렇듯 모든 것을 누리고 사는 것이 왕입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 우주를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저주받은 자가 받는 사형틀입니다. 시세로(106-43 B.C.)는 십자가를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형틀이라 했습니다. 십자가는 본래 페르샤의 사형틀이었으나 칼타고를 거쳐 로마로 전수되었던 것인데, 너무 잔인하고 추하여 노예를 죽이는 데만 사용하고 로마인에게는 사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박히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십자가가 있었는데,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신 21:22-23)고 생각하여 십자가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게 되었었는데, 유대인을 증오하는 로마인이었던 그는 알렉산더(행 19:33)와 루포(롬 16:13)의 아버지로 예수님을 만난 후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 가족은 앞서가는 교인이 되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구약의 예언을 6가지로 성취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로 쓸개 탄 포도주를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예수님에게 마시게 하였다는 것(34절-시69:21), 둘째로 군인들이 그 옷을 제비뽑아 나눠가졌다는 것은 모두 이미 예언이 되었던 것(35절-시22:18)들입니다. 셋째로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쓰여진 죄패(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의 명패)를 붙인 것(37절)과 넷째로 두 강도가 함께 못박혔다는 것(38, 44절-사53:12) 역시 예언된 말씀들입니다. 다섯 번째로 지나가는 자들로부터 모욕을 받았다는 것(39, 40절-시22:7)과 마지막으로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 조롱하였다는 것(41, 42절-시22:8)이 예언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서 세워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위해 세워졌습니다.

 

인간 편에서 십자가를 봤을 때, 그것이 세워진 이유는, 유대인이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저주하였기 때문이고, 로마인에게는 예수님을 정치적인 반란꾼으로 몰았기 때문이며, 가롯 유다의 배신 때문이었습니다. 또 가롯 유다의 탐욕과 대제사장의 시기, 빌라도의 비겁함이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본 십자가는, 첫째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여 화해케 하시려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구속, 용서, 구원하시려고 죽으셨고(negative), 중생, 영생, 화평케 하시려고 죽으신 것입니다(positive). 셋째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죄는 원자탄 미사일의 암세포보다 무섭습니다. 그러한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해방시키려고 죽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새 언약의 백성으로 삼으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고전 11:23)

 

 

묵상할 것

 

1. 저주받는 자가 받을 형틀은 무엇입니까?

 

2. 십자가는 무엇의 성취입니까?

 

 

 

4월2일 사순절 제22일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씻어 살려줍니다.

 

레위기 16:10,베드로전서2:24

 

 

구약시대에는 1년에 한 번씩 속죄의 절기가 있었습니다. 속죄일이 되면 제사장은 두마리의 염소를 준비하여 하나는 여호와를 위하여 속죄제사를 드립니다. 속죄제사는 죄지은 사람이 용서받기 위해서는 짐승을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짐승이 희생되었던 것입니다. 희생제물을 드려서 그 짐승이 불에 탐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가 불살라 없어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또하나는 아사셀을 위하여 모든 백성들 앞에서 수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어 백성들의 죄를 염소에게 지운 다음 광야로 쫓아 버립니다(레16:10). 염소는 광야에서 맹수의 먹이가 됩니다. 이로써 백성들의 죄가 사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구약의 종교행위 모습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에 인간의 역사는 죄악의 역사였습니다.

 

죄는 사망을 낳습니다. 사망은 곧 인간을 지옥으로 이끄는 멸망입니다. 이처럼 죄로 말미암아 지옥으로 가게 된 온 인류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악을 등에 질머지시고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은 동물이나 사람의 희생과는 다르기 때문에 거룩한 희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어린양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들의 무거운 죄악의 짐을 벗겨 주었습니다. 광야에 장대위에 달린 구리뱀을 바라본 자가 죽음에서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못박힌 주님의 십자가를 우리가 바라 볼 때에 죽음에서 벗어나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지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살과 피를 희생하심으로 우리의 영혼을 살리신 것입니다. 북미 일대에서 사는 고기 가운데 King Salmon이라는 연어가 있습니다. 연어는 매년 2월을 전후해서 알을 낳고 분화하게 됩니다. 새끼가 부화하게 되면 어미 연어는 곧 죽어버립니다. 그 이유는 어린새끼가 어미의 살을 먹고 자라 나게 하기 위해서 어미는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어디에선가 어미 거미의 잔등에 달라붙어서 어미의 살을 파먹고 있는 수십마리의 새끼 거미를 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미물이지만 새끼를 위한 어미의 지극한 사랑의 발로로서 거룩한 희생입니다.

 

우리 인간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영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어린양,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보혈로써 죄를 깨끗하게 씻을 수 있었고, 그분의 살의 찢음을 인하여 우리는 마치 연어가 제 어미의 살을 먹듯이, 거미가 제어미의 살을 파먹듯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서 영혼이 살찌고 자라고 사는 것입니다. 벧전2:24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느니라"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떼어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는 너희를 위한 내 살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잔에 포도주를 잔에 나눠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나와 당신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살이 찢기셨고, 피를 흘리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나와 여러분의 영을 살리셨고, 지금도 생명으로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십자가를 보는 사람은 오늘도 그분의 피를 마시고 살을 먹고 생명이 구원받습니다.

 

 

묵상할 것

 

1. 예수님은 아사셀 염소입니다. 아사셀 염소를 설명하십시오.

 

2.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에게 어떠한 은총을 주십니까?

 

 

4월3일 사순절 넷째주일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18

 

 

일본의 삼포능자라고 하는 여류 소설가의 '양치는 언덕'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그 소설에는 나오미라고 하는 목사 딸이 나옵니다. 나오미는 료오이찌라고 하는 남자에게 반해 부모를 버리고 도망 합니다. 그러나 그 료오이찌라고 하는 사람은 술꾼이요 바람둥이이었기 때문에 원만한 결혼생활을 할 수가 없어서 결국 얼마 후 친정으로 돌아오고 맙니다. 그때 료오이찌라고 하는 사람이 폐병에 걸려 나오미에게로 옵니다.

 

나오미는 그 사람을 받아 들이기가 싫었지만 목사인 아버지가 그를 받아들입니다. 처가집에서 요양생활을 하는 동안 료오이찌는 처가집 식구들의 믿음에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요양 생활을 하면서 료오이찌는 다락방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아무도 보지 못하게 흰 천으로 그림을 덮어 놓곤 합니다. 그리고 부인에게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선물로 그림을 완성하여 주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고 그림도 다 완성 되었을 때 전에 사귀던 좋지 못한 여자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할 수 없어서 나가 만납니다.술을 권하지만 마시지 않습니다. 하룻 밤 자고 가라고 유혹하지만 그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몰래 술에 수면제를 탑니다. 그리고 이 한잔만 마시면 보내 주겠다고 속입니다. 술에 수면제가 들어 있는 줄도 모르고 그 술을 받아 마신 료오이찌는 그곳에서 잠들지 않으려고 길을 나섰다가 길에서 잠이 들어 그만 동사하고 맙니다. 소설의 클라이막스는 료오이찌를 장사하고 그가 다락방에서 그렸던 그림의 천을 벗기는 것입니다. 힌 천을 벗기자 거기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발아래 한 청년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손등위에 예수님의 피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료오이찌 자신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피가 자신의 죄를 씻어주심을 그는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와 같은 마음과 믿음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면 그가 과거에 어떠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든지 간에 상관없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없이 받아 들일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능력이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게 된 우리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그 십자가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는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묵상할 것

 

1. 료이오찌는 무엇을 깨닫고 확신하였습니까?

 

2. 십자가에는 어떤 능력이 있습니까?

 

 

4월4일 사순절 제23일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다리가 되셨습니다.

 

이사야53:6,마가복음 5:38,히브리서 10:20

 

 

예수님을 "중보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중보자란 중매장이란 말과 같습니다. 처녀, 총각을 중매하여 연결맺어 주는 중매장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매 맺으신 분이시기에 중보자라고 합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더라면 우리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맺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바로 우리와 하나님을 관계맺어 주셨습니다.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인간은 양처럼 어리석습니다. 방향감각도 없습니다. 방어무기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산다고 목자를 떠나서 제길로 갔습니다. 제길로 갔다는 것은 목자를 따라가지 않고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타락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교만이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모르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떠나 독립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인간의 정복하고 지배하여 자기 왕국을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바벨탑 사건입니다. 인간이 교만의 바벨탑을 쌓습니다. 그렇게 자기 멋대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고집만을 주장하고 자기 생각대로 주장하는 인간, 하나님이 보실 때 희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거기서 죄인의 구원을 완성시켜 놓으셨습니다.

 

십자가상에 예수님은 선포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인간의 구원을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값을 십자가의 보혈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 때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막15: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중보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다리가 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의 몸을 밟고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며 다리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예수님 자신이 선언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묵상할 것

 

1.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무엇이 되신 분이십니까?

 

2. 십자가는 무슨 역할을 한 것임니까?

 

4월5일 사순절 24일

 

십자가로 승리하시다

 

요한복음 16: 골로새서 2:8-15

 

 

아프리카 우간다 어느 교회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당시의 우간다는 독재자 이디아민이라고 하는 악명이 높은 그러한 대통령이 통치하고 있는 때였습니다. 케파쎔팡기 라고 하는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는 7000명이 넘는 큰 교회로 영적 지도자로서 귀한 역사를 담당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부득불 정부를 비판하는 설교를 종종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 독재자에게 억압을 당하고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는 그런 설교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정부에 알려졌습니다. 부활절 아침입니다. 다섯명의 비밀경찰이 찾아왔습니다. 모두는 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예배 후에 그들은 사무실에 총을 가지고 겨누며 들어와서 "반국가 사범을 처단하라는 명령을 받고 처단하기 위해 왔소"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이미 각오했던 것처럼 태연스럽게, 온유하게 대답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 아침 입니다. 나는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내게 2분간의 시간만 주시면 기도하고 나의 생을, 내 목회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그랬습니다. 그러라고 허락을 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또박또박 큰소리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간다 통치 자 이디아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 명령을 원치 않으면서도 받아들여야 하는 불행한 이 다섯 사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우간다 국민에게 자유를 주시옵소서. 내 사랑하는 조국이 사랑의 땅, 의의 땅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나의 죽음으로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아멘." 기도하는 목사님의 눈에서는 한없이 눈물이 솟았 습니다. 비밀경찰도 울었습니다. 마침내 그 대장되는 사람이 그렇게 말합니다. "엄청난 실수를 범했습니다. 못본 것, 못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하고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갔습 니다.

 

여러분, '가장 강한 것이 무엇이냐?'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장 강한 것은 돌이다. 그러나 돌을 깨뜨리는 것은 쇠다. 쇠를 녹이는 것은 불이다. 불을 끄는 것은 물이다. 물은 구름에 흡수되어 버린다. 구름은 바람 에 날려간다. 바람은 사람을 어찌하지 못한다. 사람은 죽음을 향해서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런고로 죽음이 가장 강하다. 죽음보다 강한 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죽음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사실상 십자가는 아주 처참한 죄인에 대한 처형법입니다. 아주 부끄러운 죽음입니다. 저주스러운 죽음입니다. 인류역사상의 가장 비참한, 가장 부끄럽고,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합니다. 십자가 안에 무궁무진한 비밀이 숨겨있습니다. 그 속에 미스테리가 있습니다. 엄청난 생명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바로 몇 시간 후에 십자가를 지실 것인데 제자들 앞에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말씀하시고 십자가를 집니다.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신 게 아니라 승리하시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승리로 십자가 를 졌습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안에 나타난 신비입니다.

 

오! 주여! 금년 사순절에 내가 져야할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게 하옵소서.

 

 

묵상할 것

 

1.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무엇입니까?

 

2. 십자가 안의 신비는 무엇입니까?

 

 

4월6일 사순절 제25일

 

십자가는 의의 계시입니다.

 

누가복음23:34

 

 

십자가는 의의 계시입니다. 의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에요. 죄란 그저 흐지부지 용서할 수가 없는 거예요. 죄 값은 사망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엄연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야 했던 것이에요. 죽지 않고는 절대로 살리지 못하니까요.

 

어느 마을이 아주 Puritan 마을인데 깨끗하게 정결하게 술집도 창녀도 없는 것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한 수도사가 있었는데 그는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요 또 그런가 하면 마을 사람들의 궂은 일은 온 마을의 궂은 일은 그 수도사가 하는 거예요. 이런 수도사 한사람이 그 마을에 있었는데 이 처녀가 임신을 했는데 그 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대지 못하면 이것은 간음죄로 추방을 당하게 되고 잘못하면 맞아죽게 됩니다. 그런데 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말을 안해요. 그래서 지금 추방당하게 되었는데 직전에 하는 말이 "저 수도사"라고 했어요. 수도사는 그대로 끌려가서 많은 몰매를 맞고 고역을 당하고 감옥에 처넣어졌어요. 시름시름 앓다가 감옥에서 죽었어요. 죽은 다음에 시신을 염하면서 보니까 이게 남자가 아니고 여자예요. 남장 여인이었다고요. 모든 사람은 숙연해졌습니다. 이 여자는, 이 수도사는 왜 '그것이 내 아이가 아니라'는 말을 왜 안했을까?

 

저 처녀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했어요. 내가 죽어야만 그 누군가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십자가는 의의 승리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먼 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거기서 완전히 충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충족원리라고 합니다. 충족돼요. 그리고 죄인이 의인처럼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긍휼의 승리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거예요. 율법과 은혜? 은혜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이것만이 이 십자가만이 이 긍휼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음을 확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 십자가는 죽음의 승리입니다. 죽음을 넘어섭니다.죽음을 초월합니다. 십자가는 생의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세계의 시작입니다. 그것을 믿고 죽음의 세계를 훌쩍 넘어서는 것이 십자가의 말씀이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기에 사순절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신 주님의 큰 사람 때문에 구원받은 나이기 때문입니다.

 

 

 

묵상할 것

 

1. 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2.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4월7일 사순절 제26일

 

하나님은 친히 임재하십니다.

 

창 28:16, 출3:1-12, 시편23:1-6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여 '감추어진 하나님'(deus absconditus)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신다고 하여 '드러내신 하나님'(deus revelatus)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비로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성경은 '여호와'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이란 하나님의 보통명사가 함께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라고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자존자, 영원한 자란 뜻입니다. 반면에 엘로힘은 전능자, 위엄을 가진 자란 뜻입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신이 유일하신 야훼 하나님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절대자이며 다른 신이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 아덴 사람들은 신을 많이 믿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신이 많은지 이름 없는 신까지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단히 신앙적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그들을 미신적이라고 합니다. 일본도 신을 많이 섬기고 있습니다. 8백만의 신이 있다고 합니다. 신이 많은 것은 신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하나님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는 거룩한 땅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자리는 그 어디나 거룩한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거룩한 자리인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님의 눈을 피하여 삼촌의 집으로 도망을 갑니다. 도망가던 날 밤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복을 약속하고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 이것이 벧엘의 체험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자리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장소가 하나님의 집입니다. 거룩한 곳입니다.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면 얼마나 달라질까요?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면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롯이 살던 소돔에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있던 불풀무 속에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베드로가 갇혀 있던 감옥 속에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임재하셔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지시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이 삶의 자리에도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사순절기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묵상할 것

 

1.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십니까?

 

2.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자리를 우리는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4월8일 사순절 제27일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요한복음 10:14, 빌립보 3:14

 

 

모세는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난 불꽃을 보려고 나아갑니다. 그 불꽃을 보려고 나아오는 모세를 하나님은 보십니다. "보려고"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라아입니다. 이 말은 '관찰하다', '깊은 주의를 기울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관찰하는 자세로 깊은 주의를 기울이며 하나님께 나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라아라는 말을 명사로 사용하면 독수리라는 뜻이 됩니다. 독수리는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수리가 먹이를 향해 내려올 때보면 먹이에만 집중하는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의 눈이 독수리의 눈이었습니다. 지도자의 요건 가운데 하나는 세심한 통찰력과 집중력입니다. 지도자는 어느 하나도 적당히 보거나 흘리지 말고 세심히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동작을 통하여 지도자의 자질을 주시하고 계십니다. 미국의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유명한 포수 가운데 요기 베라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그 분이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관심을 가지게 되면 눈을 통하여 수많은 것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보려고 오는 것을 하나님도 보셨습니다. "보신지라"란 말은 모세가 보려고 오는 것같이 하나님도 보셨다는 뜻입니다. 두 말은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과 모세가 서로 응시하며 집중적 관찰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하나님이 모세를 두 번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다급하심과 관심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사무엘을 부르실 때도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부르십니다. 괜히 부르신 것이 아니라 소명을 주시기 위한 초대였습니다. 소명을 수행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소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4)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부르신 것은 일을 위한 초대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친밀하게 아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아직 하나님의 실체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친밀하게 아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이름도 아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 10:14)라고 말씀합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이름으로 아십니다. 친밀하게 아십니다. 우리의 과거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도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자신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나 아내나 남편이 나를 아는 것 보다 하나님이 나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아신 자이십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롬 8:29)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롬 11:2)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지만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고 합니다. 미리 아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를 때에 모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의 겸양으로 하나님께 응답하였습니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위대한 선교 업적을 이룩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한 선교단체에서 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도울 선교사를 파견할 예정입니다.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쉬운 길이 있으면 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리빙스턴은 이 편지를 받고 이렇게 회신하였습니다. "당신들이 쉬운 길로 오려는 선교사들을 파송하려면 나는 그들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전혀 길이 없어도 오려는 사람들을 원합니다." 전혀 길이 없어도 오는 사람이 참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전혀 길이 없어도 올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 사람을 부르시고 찾으십니다.

 

 

묵상할 것

 

1. 하나님은 모세를 어디에서 부르셨습니까?

 

2.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4월9일 사순절 제28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여호수아 5:15, 에베소서 4:22-24

 

 

하나님은 모세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하지 말고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죄악된 인간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범죄한 이후 인간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벌어졌습니다. 볼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동산에서 쫓아내시고 화염검으로 둘려쳐 접근을 금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전에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둘이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구별된 곳입니다. 모세는 아직 하나님의 자리에 가까이 갈 만큼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19:12에도 하나님은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왜 신을 벗어야 합니까? 경외와 존경의 표시로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어야 합니다. 성경은 신을 벗어야 하는 경우를 여러번 말씀합니다. 여호수아 5:15에는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신을 벗으라 하신 명령을 듣습니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발의 신이란 세속에 살면서 더러워진 인간성을 의미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워진 인간성을 다 벗어야 합니다. 신명기 25:9에는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신명기에서 신은 지위와 권리를 표시합니다. 신을 벗기웠다는 것은 지위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룻기 4:7-8에는 "옛적 이스라엘 중에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 신을 벗어 그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의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 신을 벗는지라"라고 합니다.

 

신을 벗었다는 것은 권리를 양보하거나 권리를 이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었습니다. 세속에 살면서 더러워진 인간성을 벗었습니다. 자신의 지위를 포기하였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이양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애굽의 왕자로서, 양치기로서 모든 지위와 권리를 다 포기하고 이양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신은 신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벗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슬람교도들이 그들이 회당인 모스크에 들어갈 때는 신을 벗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 올라갈 때에 신을 벗습니다. 인도인들은 간디의 무덤에서 신을 벗습니다. 그들의 경외와 존경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엡 4:22)라고 합니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골 3:9)라고 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히 12:1)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벗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더러워진 우리의 것들을 하나님 앞에서 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더러워진 신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놓기조차 부끄러운 것입니다. 벗어 던져야 합니다.

 

 

묵상할 것

 

1. 하나님께서 신을 벗으라고 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성경에서 신을 벗은 인물들을 열거하십시오.

 

2. 우리가 “벗어버려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4월10일 사순절 다섯째주일

 

예수님은 유월절의 희생양이십니다.

 

출애굽기12:6-7,요한복음1:29

 

 

유월절은 어떤 절기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에서 기원한 절기이며(출 12장), 유대력으로 니산월(대양력 3, 4월) 14일에 시작하여 한 주간동안 계속되는 유대의 최대 절기입니다. 니산월 14일 해진 후부터(15일) 아무 때나 유월절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란 니산월 13일(수요일)로 믿어집니다. 유월절에 잡은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습니다(출 12:6-7). 그 피를 볼 때에 애굽을 치던 천사들이 넘어가 죽음의 재앙에서 멸하지 않게 하셨습니다(출 12:13).

 

이제 예수님께서 희생양이 되시어(요 1:29)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의 칼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유월절 희생양이 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이를 위해 팔리우리라 하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유월절과 무교절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력으로 니산월 15일 하루 동안 지냈고,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15일부터 21일까지 한 주간 동안 먹었고,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는 의미에서 무교절이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예수님은 유월절 희생양이 되신 것입니다.

 

이 예고된 자신의 속죄의 죽음을 네번째 예고하신 것입니다(16:21-28, 17:22-23, 20:17-19).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복음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의 사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요, 예수님의 모든 교훈은 십자가에 죽으심과 연관되어있어 예수님의 가르

 

침도 중요하지만 그의 죽으심이야말로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방법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요, 죽음의 의미는 우리의 속죄에 있습니다. 이같이 유월절 희생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의 규례를 보면

 

① 유월절 양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출 12:5, 벧전 1:18-19). 예수님의 순결(무죄)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죄로 그를 더럽히려고 수없이 공격하였으나 헛수고였습니다. 빌라도까지 예수님의 무죄성을 증명하였습니다(요 18:38, 19:6).

 

② 일년된 수컷이어야 합니다(출 12:5). 1년된 양이면 양으로서 가장 왕성한 청년기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은 청년기에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③ 양을 회중 앞에서 잡아 희생을 치렀습니다(출 12:6). 예수님을 은밀히 처형하려 하였으나 민중이 보는 앞에서 재판하고 공개 처형하였습니다.

 

왜 유월절 절기를 지키라고 명하셨습니까?(출 12: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로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출 12:14).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모세시대 출애굽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죄악에서 벗어나야 함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속히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로 옛 생활을 청산하여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 한 가족이 구원받을 때 진정한 유월절이 이루어집니다. 가족 식구대로 식양에 따라 계산하여 양을 잡으라 하였습니다(출 12:4). 진정한 가족 구원 없이는 유월절 절기를 기념하면서 대대로 이어지기란 어렵습니다. 전 가족이 죄악에서 떠나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이 날로 새 연대 새 역사가 시작됩니다(출 12:2).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출 12:2). 이제부터 우리는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입니다(엡 2:19). 예수 안에 들어오므로 새 사람의 새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키는 사순절은 유월절의 어린양 예수님을 향하여 가는 행진입니다.

 

 

묵상할 것

 

1. 유월절은 어떤 절기입니까?

 

2. 예수님은 유월절의 무엇입니까?

 

 

4월11일 사순절 제29일

 

예수님의 살해를 모의한 유대 지도자들의

 

죄악을 되풀이하지 맙시다.

 

마태복음 24:3-5.요18:31

 

 

우리는 여기서 두개의 팽팽한 평행선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번 유월절에 공개적으로 우리 죄를 구속하시려 죽으려고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예루살렘 산헤드린공회에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흉계를 꾸며 비밀리에 죽이되 ?유월절은 피하여 죽이자? 하여 죽이는 방법을 모의합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3). 여기서 ?그 때?는 나사로가 살아난 직후 대제사장 가야바가 공회를 개최하여 예수를 사형에 처하기로 결의한 후 다시 모여 재차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한 때를 말합니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이는 유대 최고 재판소 노릇을 한 산헤드린(Sanhedrin)을 말합니다. 이들은 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각 24인씩 72명이었습니다. 본래는 대제사장에게 사형권이 있었으나 로마 총독아래 있게 되자 사형집행권은 총독의 인준을 받게 되었습니다(요 18:31). 공회 의장은 대제사장이 됩니다.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은 안나스의 사위로 주후

 

18-36년 사이에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원래는 대제사장은 종신직이며 세습제이었으나 로마 정부가 개입하면서 임명제요 종신직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장인의 덕에 로마 정부로부터 대제사장이 될 때는 당대 최대의 성공자였으나 역사상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는 최대의 주범이 되었습니다. 실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아문에 모여?-여기 ?아문?은 관저입니다. 관저에서 산헤드린공회가 모인 것 같습니다. 아문은 대제사장의 안뜰이라 공식회의가 아니거나 불법회의인 것 같습니다. 공식회의는 남쪽 뜰 돌로 된 공회당에서 모이게 됩니다.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4). 나사로가 살아난 후 예수의 인기는 절정이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하였으나(요 11:47-53) 그들의 계획은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①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체포하려 하였으나 관원들이 예수께 많은 감명을 받고 믿는 자가 많아졌기에 잡아들이지 못했습니다(요 12:42).

 

② 지금까지 논객들을 동원해서 세금문제, 부활의 문제로 질문하여 예수를 곤경에 처하려 하였으나 스스로 곤경에 빠지고 백성들에게 자신들이 모욕을 당했습니다.

 

③ 이제는 궤계(흉계)를 써서 예수를 비밀리에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 방법이외는 예수를 제거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한 종교인들이 취할 방법은 아닙니다. 이는 당시 외형적으로는 모세 이후

 

최고 절정에 달했지만, 타락한 종교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 행해져야 합니다. 종교법정이 세상 법정과 같거나 더 타락한다면 존재의미가 없습니다. 역사 이래 가야바의 아문의 재판은 늘 있어왔습니다. 이 시대에 이런 일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된다면 외형적으로는 성공은 인정하나 그는 망한 자요, 역사에 죄인이 되며,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 없어 영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말하기를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5).

 

 

묵상할 것

 

1. 어떤 이들이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하였습니까? 그 대표는 누구입니까?

 

2. 가야바의 아문의 재판을 자행하는 이들의 결말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4월12일 사순절 제30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구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마태복음27:45-56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때 당시 유월절에 모인 무리는 250만이요, 바쳐진 제물은 256,500마리의 양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호산나 만세!?를 부르며 영접하였습니다 (마21:9-11). 이때 예수를 처형하면 민란이 일어날까 염려되어 명절 때에는 말자 하였다. 당시 군중이 모인 곳에는 어떤 일이 계기만 되면 소요사건이 일어났습니다(행 20:1, 21:34). 로마 정부가 소요사건을 제일 엄하게 다스렸습니다. 그러므로 소요의 염려가 있는 명절(유월절)에는 말자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공연하게 처형되는 십자가형으로 죽을 것을 예언하셨으나, 죽일 사람들은 은밀히 하수인을 시켜 저격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예수님이 네차례나 예고하신대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대로 십자가에서 구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세가지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① 예수님은 사람의 손에 죽으셨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② 악인은 저를 죽였고 그 결과로 멸망을 받지만, 십자가로 하나님의 뜻은 성취되었고 우리

 

는 그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③ 하나님의 뜻은 선악간에 인간을 통하여 오늘도 성취됩니다.

 

거기에는 유다도 대제사장도 마리아도 아리마대 요셉도 니고데모도 모두 등장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등장한 인물입니다. 어떤 이는 천국을 향하여 가고 있고, 어떤 이는 멸망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오늘 나는 어느 길을 걷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성취되어가고 있습니다. 너무도 아쉽고 서운한 것은, 하나님을 대행하며 그 섭리를 추진해가는 사람들이(요 1:51-52) 하나님의 섭리를 가장 악하게 추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 아집과 독선에 빠지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으니 우리 모두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받으므로 이런 극심한 죄악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늘 조심합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구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은 바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입니다. 그러므로 사순절 기간은 구속의 은총을 기리는 기간입니다.

 

 

묵상할 것

 

1. 왜 유월절에는 예수님을 죽이지 말자고 하였습니까?

 

2.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적인 죽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4월13일 사순절 제31일

 

가룟 유다는 흉악한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6:14-16,누가복음 22:1-6

 

 

가롯 유다는 범죄 집단과 접촉하였습니다. 사도(신자)가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한 자들과 접촉하게 되었을 때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① 그 계획을 즉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을 분쇄할까?

 

②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을 지연시킬까?

 

③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을을 가속화시킬까?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유다가 그 범죄단에 개입하자 범죄계획을 분쇄시키거나 최소한 지연시키지 못하고 가속화시킨 것은(16) 돈 때문이었습니다(15).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지옥으로 향하는 가롯유다가 탄 차는 평지를 달리기보다는 언덕의 내리막길을 달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 집단의 비극적 모의는 쏜살같이 달려가 명절 후의 거사계획은 명절 때로 단축되었습니다. 왜 유다가 보편적이요 상식 밖의 일을 하였으며, 인류역사상 가장 큰 죄인이요 가장 불명예스런 파렴치한 인간이 되었을까요? 그렇게 가롯유다가 처음부터 부도덕한 인간이었을까요?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던 것같습니다.

 

?그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14). 여기서 ?그 때?는 예수를 흉계로 죽이되 명절에는 말라고 가야바 아문에서 모여 모의한 후입니다. 이런 범죄 집단에 사도인 제자가 가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반역을 미리 아시고(요 6:70) 그를 택하시고 끝까지 포용하셨다는데 더욱 뜻이 깊습니다. 또 사람의 원수가 집안 식구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3년 동안 합숙훈련 받은 식구들이었습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주거늘?(15).?은 30?은 노예의 값이요(출 21:32), 이는 성경의 예언 성취입니다(슥 11:12).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평민의 값으로 어렵고 힘든 인생의 길을 걸으시면서 죄인된 우리를 대속하셨습니다.

 

?저가 그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16). 예수님을 넘겨주어도 무리가 없을 기회를 찾으면서 예수 처형을 가속화시켜 명절 후를 앞당겨 명절 때에 시행케 하였으니 기가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묵상할 것

 

1. 가롯 유다가 접촉한 범죄 집단의 괴수는 누구입니까?

 

2. 예수님이 팔린 값이 주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4월14일 사순절32일

 

오늘 우리에게도 유다적 요소가 있습니다.

 

누가복음22:3

 

 

가롯 유다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원인을 분석해보고 우리에게도 유다적 요소가 있다면 위험하니 이런 것들을 제거하는 성도들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1) 유다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주제파악을 하지 못하고 실망하였습니다

 

유다는 다른 제자보다 민족적 메시아관이 강하였고 애국심도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메시아에 대한 가르침이 자신의 믿음과 달랐음을 머리 좋은 가롯 유다는 제일 먼저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앙적으로는 사실 이 때가 가장 좋은 기회였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며 메시아를 한 나라의 왕이나 통치자로서가 아니라 세계 인류의 구주로 알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또 자기도 일국의 통치자의 그늘에서 성공하기보다는 세계적 구원의 비밀을 알고 그것을 알리는 제자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나, 본래의 고집 때문에 여기서 더욱 깊은 구렁으로 떨어졌습니다. 끝까지 믿지 못한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자기의 계획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조급하였습니다

 

때는 유월절이어서 군중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어 예수님이 세우시는 나라를 위한 거사를 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였습니다. 제자들은 이 때에 예수님이 거사를 하여주기를 바랬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도 그렇게 생각하고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이것을 부탁하였습니다(20:21-28). 그런데 정 반대의 일이 일어났습니다(6-13). 한 여자가 그 귀한 향품을 허비하여도 예수님은 그것을 막지 아니하였습니다.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란 이유로 칭찬까지 하신 것을 듣고 유다는 광분하였습니다.

 

(3) 유다가 이렇게 된 결정적 이유는 사단이 그에게 들어감입니다(눅 22:3)

 

왜 이런 일을 하였습니까?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왜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을까요? 그는 돈(세상)을 너무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은 돈을 훔쳐감이라(요 12:6). 사람이 돈을 사랑하면 그렇게 됩니다. 돈이 왜 필요한가를 모르고 그저 돈만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느니라“(요일 2:15). 신자가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면 마귀가 그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돈도 소화시키지 못하고 돈 때문에 영육이 죽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27:3-10). 욕심을 기점으로 마귀는 들어간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순절 기간동안에 재물을 사랑하기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자신을 채찍질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묵상할 것

 

1. 가룻 유다가 주제 파악을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2. 가롯 유다 안에 들어간 것은 무엇입니까?

 

 

4월15일 사순절 제33일

 

가롯 유다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3-10

 

 

가롯 유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①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너무도 강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의 말씀에 무너짐이 없이 자기의 구원관과 메시아관이 너무도 강하여, 진짜 메시아를 보고도 그 앞에서조차 가짜를 고집하였던 것입니다.

 

② 심령개조가 없었습니다. 유다는 신앙인이라기보다는 사상적 인물이었습니다. 유다에게 재능, 열심은 충분하다 하여도 심령의 개조, 즉 부스러진 심령의 개조가 없었습니다. 사상가는 자기 발전을 위해 살지만 신앙인은 자기를 죽이는 것이요, 그것이 새로운 삶입니다(고후 5:13-17).

 

③ 최후의 기회를 놓쳤습니다(27:3-10). 그는 자기 죄를 뉘우칠 만한 인간이었고, 또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잘못은 예수님께 하였으니 예수님께 나가야 할 것인데, 성전의 제사장과 장로들에게로 갔습니다. 십자가 앞에 갔더라면 될 것을 그 기회를 놓치고 결국 자기 혼자 자포자기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롯 유다를 뛰어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① 우리 예수님! 우리를 구속하는 일을 수행하시는 일에는 그 어떤 장애와 난관도 극복하시고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수행하시므로 오늘 우리가 구원의 영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뒤를 따라 주어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 나가면 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② 유대 백성의 지도자들의 사명은 메시아를 영접하고 백성에게 증거하는 일이었으나, 그것을 위하여 일하다가 얻은 세상적인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부인할 이유도 이론도 없으면서 이를 거부하고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들은 자신과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끝까지 믿고 사명을 다하면 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③ 유다는 사도로서 유대인들의 잘못을 지적해주고 고쳐주어야 했으나, 오히려 예수님의 죽음을 가속화시켰고 돈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그것을 아무런 소득도 없이 오히려 후회하다가 절망하다가 영벌에 들어가는 자가 되었습니다(27:3-10). 그러므로 우리는 시각을 달리하고 삶의 가치관을 달리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세상적인 탐욕을 멀리하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우리가 세상적인 탐욕에서 주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이 될 때 가롯 유다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기간은 가롯유다적인 요소를 극복하고 진정으로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기리는 하루 하루가 될 때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묵상할 것

 

1. 가롯 유다는 어떤 사람입니까?

 

2. 우리가 어떻게 가롯 유다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4월16일 사순절 제34일

 

십자가를 볼 때마다 동정이 아니라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누가복음 23:26-28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따라오면서 우는 여자들을 보고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8-3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가슴을 치고 슬피 우는 여자의 무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여자들이 누구인지 말하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제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의 어머니 그리고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이 함께 하였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이 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슬피 울면서 십자가를 따랐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을 보시며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이렇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 나의 죄 때문이 아니라 너희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 죄값을 짊어지고 형벌을 당하는 것이니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너희들이 울며 회개하고 자녀들까지도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는 마지막 권면이었습니다. 동정의 눈물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얼마나 아프셨나…" 찬송하면서 동정의 눈물만 흘려서는 안됩니다. 그 십자가는 바로 멸망 받을 나를 위하여 대신 지신 십자가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울되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11:17) 하였습니다. 불신자는 십자가를 보고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는 나의 죄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애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울되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사실 때문에 불신의 내 가족과 이웃 사람의 영혼을 위해 기도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쉽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강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바닥같이 마음이 굳어져 있는 예루살렘 성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읽고 성전이 있고 그 성전에서 거룩하게 예배 드리고 있었지만 구원의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을 보고 통곡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에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종교적인 판단이나 지식의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통곡하였습니다.

 

 

묵상할 것

 

1. 십자가를 바라보며 어떤 눈물을 흘려야 합니까?

 

2. 우리가 흘려야할 눈물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4월17일 종려주일

 

예수님은 왕으로 예루살렘성에 입성 하셨습니다.

 

마태복음21:1-11,마가복음11:1-10

 

 

예수님이 사신 33년은 역사의 중심이며 전환점이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더 중요한 기간은 공생애 3년 3개월이었을 것이고 다시 이 기간 중에 더욱 중요한 기간을 말한다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1주일간의 기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간에 해당하는 종려주일(Palm Sunday)로부터 부활주일(Easter day)의 한 주간을 특별히 거룩한 주간(Holy Week) 혹은 고난주간(Passion Week)으로 지키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를 회개하는 자세로 되새겨 보는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오늘은 세계적으로 모든 교회가 뜻있게 지키는 종려 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생애 중에 제일 즐겁고 화려한 날의 한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 제자를 보내어 나귀를 몰고 오게하여 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고 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기분이 좋아서 어쩔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옷을 벗어 안장을 만들고 남은 것을 길가에 깔아 카페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슥 9:9에 예언한대로 나귀새끼를 타고 지금 입성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수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길가에 펴고 나무가지를 꺾어서 손을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왕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는 이 날을 종려 주일로 기념하여 지킵니다. 이 날은 승리적인 입성의 날(The triumphal entry)임에 틀림없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네 왕이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리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그리스도는 왕입니다. 그러나 그의 왕국은 지상에서의 그의 선교기간동안 사람들에게 잘못 이해되어 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세상의 왕으로 군림할 자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그러한 왕이 되기를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왕으로서의 상징의 의미는 인간 영혼의 깊은 요구에 응답하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나귀와 예수와 나무가지의 관계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귀새끼(An ass's Colt)를 탔습니다. 여기 나귀새끼의 의미를 스가랴 9:9에서 찾아보면 나귀새끼는 '겸손의 상징'(Marksof his humiliation)이며 그리스도인의 승리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사용한 나무는 두가지 대조적 의미를 가진 나무였음이 주목됩니다. 종려나무는 기쁨의 상징(레 23:40)이며 의에 대한 전망(시 92:12)으로 결혼식에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버드나무는 슬픔과 포로와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장례식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이 두가지 나무를 함께 사용했겠습니까? 그 이유는 이것이 바로 '고난의 신비'(The Mystery of Suffering)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가지를 연결시켜 보면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이 깊은 슬픔의 심연 속에서 인내함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욥 2:10, 13:15).

 

예수님의 승리적인 입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나귀새끼를 통해서 겸손을 보여주며, 예수님께서 하신 입성의 결단을 통해서 충성을 보여 줍니다. 또한 나무가지의 의미에서 인내를 보여 줍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폈다고 하는 것은 최고의 존경과 최고의 존귀를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가 기뻐하시는 일, 그를 존귀케 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희생도 각오하고 드릴 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오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 이것은 곧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라고 어떤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만왕의 왕, 심판주로 나의 구주가 되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예수님의 지배만 받으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묵상할 것

 

1. 종려주일에 일어난 일을 설명하십시오.

 

2. 우리는 어떻게 재림의 주를 맞을 준비를 하여야 합니까?

 

 

4월18일 사순절 제35일

 

하나님의 집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차시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21:12-16

 

 

사순절기간, 고난주간은 나의 정결을 회복하는 기간이면서 내가 속한 교회가 주님 앞에 순결한 신부로 단장하는 기간이라고 믿습니다. 성전청결 바로 그것이 바로 고난 당하신 주님의 바램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성전에 들어 가셨을때 그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담한 모습을 보시고 분노하셔서 하나님의 집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살아 가면서 타성에 젖어서 하나님의 집의 참뜻을 잊어 버리고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지 말아야 할 것이 있고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그런 상황이 벌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6:15)“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 “교회는 그의 몸이니”(엡1:23) 라고 말씀 하십니다.그러니 이 말씀을 다시 살펴보면 나의 삶과 교회를 깨끗하게 되어짓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셨을때 우리의 삶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닐때 우리 교회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하지 않을때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집에 있지 말아야할 것이 있을 때는 과감히 내어 버리고 있어야할 것이 없을 때에는 채워 넣는 그런 결단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럴려면

 

교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것은 가슴 가운데 뜨거운 열정이 있어서입니다. 우리 신체는 머리와 가슴까지는 한 30㎝정도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받고서 살아가면서 머리로는 깨닫지만 가슴이 뜨거워지지 못하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는 아닙니다.

 

아버지 집에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그 열정은 아버지를 예배하기 위하여 지어놓은 성전이 그 본래의 의도와는 벗어난체로 있었을 때 하나님은 분노 하셨습니다.우리의 삶에서도 거룩한 분노가 있어야 합니다.내가 아끼지 아니하고 내가 사랑하지 아니하고 내가 돌보지 아니한다면 교회의 부흥은 기대하지 못합니다. 가슴속에 뜨거움이 없는 자를 주님은 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게서는 가슴에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는 자를 쓰십니다.

 

왕상19:10절에 엘리야는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하나님에 일에 대하여 다른 사람보다 열심이 특심하였을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러서 쓰셨습니다. 이방 선지자와 싸워 이기게 하셨고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않게도 하고 비가 오게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무너진 제단을 만민이 보는 앞에서 다시 쌓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첫번재 성전에 오셔서 성전에서 일하셨을때에도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요2:17)한 그 말씀으로 일을 이루셨습니다.

 

사울도 행22:3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더욱 열심이 있었다고 말합니다”계시록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열심내지 못한 것을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 (사59:17)가슴속에 뜨거운 열정을 가지시는 고난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묵상할 것

 

1. 사순절 기간은 나를 주님 앞에 어떻게 해야할 기간입니까?

 

2. 고난주간 동안에 내가 입어야할 복장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4월19일 사순절 제36일

 

예수님이 세우신 성찬에 참여하십시다.

 

마태복음 26:26-30

 

 

한 신학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데 정원 한 모퉁이에서 개미들이 저들의 양식을 나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들 앞에 큰 산맥이 가로막혀서 도저히 저들의 그 양식을 옮기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신학자가 보기에는 전혀 무시해도 될 그런 흙이 약간 높게 싸여져 있는 것이었는데 개미들에게는 난공불락의 성과 같았습니다.이 광경을 보고있던 그 신학자는 개미들이 측은하고 불쌍해서 허리를 굽혀서 개미들의 양식을 그 산맥너머로 옮겨주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뭐 이상한 물체가 닥아오더니 자기들이 그렇게 힘들여 옮기고 있는 그 먹이꺼리를 들어 옮기고 말았습니다. 놀란 개미들은 혼비백산 하였습니다. 다 뿔뿔이 흩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도와주려던 것이 개미들에게는 더 큰 재앙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던 신학자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개미를 진정 도와주기를 원한다면 내가 개미가 되어서 저들과 함께 동거동락을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겠구나" 생각하고, 더불어 그 신학자는 이런 상황속에서 왜 예수님께서 굳이 인간의 몸으로 이땅에 오시고, 인간들과 더불어 생활을 하시고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끝에 운명하셨는가를 일부나마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셔서 친히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성찬은 바로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26-29)

 

지금은 고난주간입니다. 금년 고난주간에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살과 피를 아낌없이 주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새로운 도전을 통하여 진솔한 믿음의 길을 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다.

 

 

묵상할 것

 

1.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무엇이 되셨습니까?

 

2.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세우신 것은 무엇입니까?

 

 

4월20일 사순절 제37일

 

내 삶의 옥합을 깨트립시다.

 

마태복음 26:6-13

 

 

고난주간 동안에 예수님의 장사를 위하여 옥합을 깨트린 사실은 우리들의 믿음에 항상 새로운 헌신의 귀감이 됩니다. 옥합을 깨트린 마리아의 갑작스런 행동에 대하여, 제자들은 귀하고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깨뜨린다하여 책망을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주의 복음이 온 천하 어디든지 전파되는 곳에 이 여인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게 될 것이라고 오히려 여인을 칭찬하였습니다.

 

요12:5에 의하면 이 향유 한 옥합의 가격은 3백 데나리온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3백데나리온은 그 당시 일반 노동자 한 사람의 일년치 품삯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첫째,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의 표시입니다.

 

마리아는 요12:1에 나타난 나사로의 누이였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했던 언니 마르다보다 더 사모했던 여인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 넘치는 여인인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마리아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향유를 깨트리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방향과 목적이 과연 무엇을 위해 꾸려나가는지, 극진한 사랑을 예수님께 드리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둘째 마리아의 행동은 전적인 헌신의 표시입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리자 제자들은 불만을 표시했고, 오히려 그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은 구제하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습니다.

 

어찌보면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할 때 제자들의 행동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신이 갖고 있는 가장 귀한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 향한 전적인 헌신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신다는 것을, 평상시 잘 귀담아 들었기에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깨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지 못하고, 은혜받지 못한 사람은 흉내내기도 힘듭니다. 오히려 제자들과 같이 오류를 범하기 십상입니다.

 

전적인 헌신은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것이며, 이것은 단순한 허비가 아닌 상급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한 마라나타의 소망이 없이는 헌신과 희생은 어렵습니다. 물질과 시간을 드리는 것과 몸바쳐 봉사하는 것이 아깝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그 크신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봉사하려는 사람들은 비방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중단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감사함으로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아무리 재능이 많고, 물질이 많아도, 혹은 믿음이 좋아도 주를 위해 깨트려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깨트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억하시고 기쁘게 받아 주신 다는 것을 기억하는 고난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묵상할 것

 

1. 마리아가 깨트린 것은 무엇입니까?

 

2. 나의 옥합은 무엇이며 주님을 위하여 깨트릴 용기가 있습니까?

 

 

4월21일 사순절 제38일

 

십자가 위에서의 일곱 말씀은 구원 성취의 선포였습니다.

 

누가복음 23:34,43-46, 로마서9:3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깊은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마지막 기도로 십자가를 짊어지실 준비를 하였습니다. 가룟 유다가 앞장서서 인도해 온 유대 관원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였습니다. 끌려간 예수님은 대제사장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와 로마 병정들로부터 조롱을 당하시고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채찍을 맞았습니다. 온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요일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오후 3시까지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운명하십니다. 그 때의 고통을 시편 22편에 예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22:6) 하였습니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하였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과 같이 찢기시고 상하셔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구원 성취의 선포였습니다.

 

①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용서의 말씀입니다.

 

②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천국의 말씀입니다.

 

③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또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효도의 말씀입니다.

 

④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고난을 책임지신 말씀입니다.

 

⑤ "내가 목마르다"(요19:28) 생수의 근원의 말씀입니다.

 

⑥ "다 이루었다"(요19:30) 구원 완성의 말씀입니다.

 

⑦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복귀의 말씀입니다.

 

죽어 장사 지낸바 되었지만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로마서 8장 34절에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하였습니다. 이 십자가 위에서의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누구를 위한 십자가입니까? 예수님 자신을 위한 십자가였습니까? 아닙니다. 나와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누구를 위한 고통이었습니까?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나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져야 할 저주의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대신 지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묵상할 것

 

1. 가상칠언은 무엇을 위한 선포입니까?

 

2. 가상칠언을 열거하시고 묵상하십시오.

 

 

4월22일 사순절 제39일

 

골고다에 세 십자가가 서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3:32-43

 

 

기독교인에게 일년 중 가장 중요한 한 주간은 고난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에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고,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 죽은지 3일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비장한 각오로 입성하실 때 많은 무리들이 종려나무(Palm tree)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기 때문에 ?종려주일?이라고 하고 오는 금요일을 ?성 금요일?이라고 하며, 오는 주일은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부활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갈보리 언덕에 세 십자가가 서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양옆에 두 행악자 즉 두 강도가 함께 처형당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사야서와 시편에 예언된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이사야 53장, 시편 22편 6-8절, 시편 22편 18절). 세 십자가가 서있는 이 언덕을 ?갈보리?(Calvary)라고도 하고, ?골고다?(Golgotha)라고도 하는데, 갈보리는 라틴어이고 골고다는 ?아람어? 말입니다. 그 말의 뜻은 ?해골 곳?(The place of skull)이란 뜻인데 헬라어로는 ?크라니온?(Kranion)이라고 하는데 왜 ?해골 곳?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 언덕을 멀리서 바라볼 때 해골처럼 생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골고다 언덕에 세 십자가가 서있었습니다.

 

1. 자기 죄 값으로 멸망한 강도(?행악자?malefactor)의 십자가(멸망의 십자가)

 

2. 죄를 회개하고 은혜로 구원받은 자의 십자가 (회개의 십자가)

 

3. 남의 죄를 위하여 죽은 구원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골고다 언덕의 세 십자가 중에 가운데 우뚝 세워진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자기의 죄가 아니라 남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임을 당하신 십자가입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구원의 십자가이며 기독교의 영원한 표상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13절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와 암 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며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라고 하셨습니다.

 

속죄 제물로,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야만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고난주간에 주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의 죄를 고백하고 나의 영혼을 부탁하는 자리에 있어야할 것입니다.

 

 

묵상할 것

 

1. 갈보리 언덕의 세 십자가는 누가 달린 것입니까?

 

2. 주님의 십자가는 어떤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까?

 

 

4월23일 사순절 제40일

 

고난당하신 메시아를 깊이 생각하십시다.

 

히브리서12:1-3, 이사야 53:4-6

 

 

주경 학자들은 이사야 40장~66장을 구약 속의 신약(New Testament book of Old Testament)이라 부릅니다. 이유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자로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시게 될 사건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장은 그 중의 한 장으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겪으실 고난과 승리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온갖 멸시와 천대, 굴욕과 고통을 다 겪으셨고 결국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심자가의 참상과 깊이를 헤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주님은 우리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4~5절을 보면 "우리"라는 말이 일곱 번이나 반복됩니다.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그 어떤 잘못도 없습니다. 실정법을 위반한 일도 없고, 도덕률을 깬 일도 없고, 파렴치한 일을 저지른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십자가에 죽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 4~5절은 "우리" 때문이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주님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4절을 보면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했다"고 했고, 5절을 보면 "찔렸고 징계를 받았고 채찍에 맞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7절을 보면"곤욕을 당했다"고 했고, 8절을 보면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다"고 했습니다.

 

죄가 있어 고통을 겪고, 창에 찔리고, 매를 맞고,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잘못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온갖 수모와 멸시와 천대와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3. 고난 당하신 주님을 깊이 생각하고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그러므로 우리는먼저, 날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고백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왜 죽으셨는가, 왜 고통을 받으셨는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크신 사랑을 감사해야 합니다. 둘째로, 주님의 사랑을 말해야 합니다. 나는 주님때문에 죄 사함 받고 구원받았노라고, 주님은 나를 살리시기 위해 죽으셨노라고, 입을 열어 다른 사람에게 말해야 합니다. 셋째로, 나도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랑의 빚을 갚을 의무가 있습니다. 내가 받은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고난 당하사 무덤에 계신 주님의 이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고, 그 사랑을 감사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묵상할 것

 

1.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어떤 일을 겪으셨습니까?

 

2. 예수님은 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4월24일 부활주일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증거하십시다.

 

요한복음 20:1-18

 

 

부활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요 소망입니다. 부활의 역사성과 우리의 소망을 살펴보십시다.

 

1. 빈 무덤을 찾아간 믿음 없는 제자들의 모습이 안타갑습니다.(1-10)

 

구약성경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하였고(사 53:5, 시 16:10)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마 16:21, 17:23, 20:19).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기억하지도 않고 믿지 못했습니다. 말씀대로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무덤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인간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의 믿음과 관계없이 역사적 사건입니다. 다른 사람은 믿지 못하나 우리는 믿고 그 구원의 역사에 참여한 것을 감사드리십시다.

 

2.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난 영광을 차지한 마리아의 신앙을 본받읍시다.(11-16)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을 보고 믿음 없이 집으로 갔으나 마리아는 자리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이때 두 천사를 발견하였습니다(12). 천사가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하였습니다. 빈 무덤은 슬픈 일이 아니요 기쁜 일입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시신을 찾고자 하였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16). 그러므로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동행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기쁜 일을 슬프게 보고 있지 않는지 자신과 주변을 살펴보십시다. 실로 부활의 약속과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기쁨도 감소될 것입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증거한 마리아의 열성을 본받읍시다.(17-18)

 

예수님과의 영적 교제는 깊은 사색에 잠기게 하거나 세상을 멀리하게 하지 않고 즉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실증적인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무덤에 달려갔다고 끝까지 주님을 그리워한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부활의 증인으로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믿음 그대로를 증거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여 우리의 이웃을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에 이르게 하십시다. 이 일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십시다.(딤후 4:27).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또 우리들의 부활의 예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세력은 그 힘을 잃고, 사망 권세는 정복되고 생명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이루어져 영생의 사실이 현실화되었으니 세상이 당장 끝이 난다고 하여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날 우리는 부활하여 영생의 자리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묵상할 것

 

1. 무덤에 달려간 제자들이 만난 것은 무엇입니까?

 

2. 부활을 최초로 목격한 마리아의 무엇을 본받아야할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