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기간에 나눌 말씀 5편"|
제목: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본문: 이사야 42:1-4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는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별스럽게도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그리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 사람이기에 특별나서 이 성경에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갈대를 가지고 지붕을 이거나 혹은 엮어서 울타리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한 갈대를 꺾어버리지 아니하고 지붕에 사용하는 사람 없고 또 꺾어버리지 아니하고 울타리로 썼다면 그 상한 것이 계속 상하면서 비도 세게 하고 그리고 또 꽁꽁 묶어서 울타리를 만들었을 적에 상한 갈대 하나 있으면 비 맞으면 곧 썩어서 그 묶음이 풀어지고 헐거워져서 울타리가 무너지는데, 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사람이 오늘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꺼져가는 등불, 그것을 가지고 먼 길 가겠다고 밤길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름이 다 되어 불이 꺼져가면 그 등을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꺼져가는 등불 가지고 어두운 밤길 몇 리나 더 가겠습니까? 끄고 새 불 바꾸어 가지고 나가는 것이 상식인데 오늘 성경에 소개되는 분은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이런 특별난 분이 누구시겠는가? 성경에 이런 일을 행하신 그의 일을 소개한 바가 있는데, 마태복음 25장 1절로 13절 사이에 그가 신랑으로 오면서 예상 외로 기름이 넉넉한 다섯 처녀를 데리고 잔치집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기름이 넉넉하지 못한 다섯 처녀를 데리고 들어갔고 잠시 후 기름을 가득 채워 가지고 온 다섯 처녀는 밖에 두고서 잔치집 안으로 들이지 아니했던 그 신랑이 오늘 바로 이 이사야서에 소개되고 있는 신랑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들어간 다섯 처녀는 기름을 충분하게 갖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들 합니다. 못 들어간 다섯 처녀는 미련하여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름이 없어서 못들어갔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로 그렇게 알도록 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잘 따져서 읽어보면 들어갔던 다섯 처녀는 들어가지 못한 다섯 처녀의 기름 도움 요청을 받았을 때에 우리의 남은 이 적은 기름을 너희에게 나누어 주면 너희가 우리의 쓰기에 다 부족할 것 같으니, 신랑 올 때에 정작 너희 등불도 우리 등불도 꺼질 것 같으니 줄 수 없노라 라고 했습니다.
신랑과 함께 잔치집에 들어갔던 이 다섯 처녀는 기름이 그야말로 신랑이 올 때에는 매우 부족했지만 그 신랑은 부족한 다섯 처녀를, 꺼져가는 등불을 가진 다섯 처녀를 아무 말 없이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못 들어간 다섯 처녀는 오히려 장사하는 사람에게 가서 기름을 가득 채워가지고 왔습니다.
물론 문은 닫혔지만 신랑이 멀리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가득 기름을 채워가지고 불을 밝히고 와서 신랑이여 우리가 불 밝히어 왔으니 우리를 입장시켜 주소서 주소서 했지만 기름을 가득 채워 왔던 이 다섯 처녀는 주님에게 그다지 반가웠던 사람들이 아닌지, 그 사람들은 밖에 두어도 밝은 등불과 함께 살 수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불러들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별난 사람을 소개하기 위하여 제가 읽고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는 사례 하나를 예로 말씀드려서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이 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말씀 드려볼까 합니다.
브라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브라질에 한 시골 마을에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딸이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병들어서 그나마 있는 재산 다 허비하고 아내와 딸만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딸이 어릴 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또 그 가정은 매우 가난하기 때문에 어머니는 딸 때문에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딸은 자라는 동안 어머니의 말씀을 잘 들었고 또 어머니는 그를 사랑하며 교육을 잘 시켜서 아주 행복스러워 보이던 그런 가정이었는데, 그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아'이고 그 딸의 이름은 '크리스티나'라고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가 십대가 되면서 학교 가서 친구들을 만납니다. 이 친구들을 만나면서 가끔 주말이 되면 이제 큰 도시에로 한 번 가고 싶어서 친구들과 함께 나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또 자고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던 어머니 마리아가 이 크리스티나에게 말하기를 "조심해야 한다. 도시에 가면 도둑놈도 많고 험한 사람 많으니 집에 있어야 한다. 나쁜 친구 사귀지 말아야 한다."라고 당부를 했지만 그 어머니가 일하고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왔더니 딸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가출해 버렸습니다. 그 못된 십대 친구들과 함께 이제 향락스러워 보이고 행복해 보이는 큰 도외지로 도망을 가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딸이 갔을 것이라고 예상한 리오데자네이로, 세계 유흥도시 향락도시 리오데자네이로로 갔습니다. 크리스티나가 가서 있을 곳이 뻔했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호텔, 나이트 클럽, 또 술집, 도박장 이런 곳을 찾아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찾아 나서기에 앞서서 자기 사진을 사진관에 가서 여러 장 복사를 했습니다. 좀 확대해서 복사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서 자기 딸이 갔을 만한 그 나쁜 지역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그 사진을 이제 부착했습니다. 화장실에도 붙이고 또 전화박스에도 붙이고 그리고 현상금 붙은 죄인 수배하는 그런 사진 옆에도 갖다 붙이고 온갖 나쁘게 된 사람들이 갈 만한 곳에다가 자기 사진을 많이 갖다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 뒤에는, 앞에도 쓰지 않고 그 뒤에다가 메모를 남겨두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했던지 지금 네가 어떤 형편에 있던지 나는 상관하지 않으니 돌아오렴!" 하고 메모를 남겨두었습니다. 그리고서 그 어머니는 지치고 돈도 떨어지고 해서 다시 시골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몇 주 후 그의 딸 크리스티나가 나이트 클럽에서 밤새도록 나쁜 사람들과 춤추고 그리고 호텔을 전전하면서 몸을 다 망친 후에 피곤하여 쓰러질 듯 쓰러질 듯 건물 층계를 한층 한층 내려오고 있었는데, 지친 자기의 눈에 약간 취한 자기의 눈에 언뜻 익숙한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가까이 가까이 가 보았더니 자기 어머니의 사진이었습니다. 얼른 그 사진을 떼였습니다. 그 동네에 사진이 붙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얼굴이 팔리기 때문에 사진을 뜯었습니다. 뜯고서 앞면 뒷면을 살펴보았더니 메모가 있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했던지 지금 어떤 형편에 있던지 나는 상관하지 않으니 돌아오렴!"이라고 써 두었습니다.
부끄러워서 옆에 누가 있나 없나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부끄러워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딸의 이름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어머니 얼굴만 팔린 것이지 자기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이름도 자기 얼굴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이 되었던 자기 딸을 남들이 알까바 외쳐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 찾는 소리가 거리에 들릴까바, 자기 딸의 허물이 거리에 들릴까바 서서 기다리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조용하게 자기 얼굴만을 사방에다 갖다 붙였던 것입니다.
범죄하고 떠나간 딸의 사진을 붙여야 할 것인데 어머니 자신의 사진을 붙여놓고 그리고 메모를 남겼지만, 혹 누가 그 메모를 보고 자기 딸이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그런 딸인 것으로 생각할까바, 들킬까바 자기 딸 죄인인 것이 남에게 들킬까바 딸의 이름도 기록하지 않았던 이 어머니, 그는 딸을 대신해서 죄지어 만신창이가 된 그 딸의 얼굴을 씻기 위해서 그 딸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서 평생을 선량하게 살아온 이 어머니가 온갖 우범지역에 자기 얼굴을 내어다 팔았던 것입니다.
자기 얼굴이 붙었던 그 지역의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은 그 지역에 얼굴이 붙으면 어디 학교에 동상을 보는 것 같이 여기지 않습니다. 큰 기념관 앞에 있는 자신으로 보지 않습니다. 침을 뱉으며 "저 다 늙은 여자도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얼굴이 저기 붙었지? 현상금 얼마짜리인가?" 이렇게 하면서 모두들 지나가는 그 현장에 자기를 있는 대로 복사해서 갖다 붙이고 딸을 찾았지만 그 동네에 이름이 들켜질까바 그 딸의 체면을 위하여 딸의 이름을 쓰지도 않고 그냥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주변에서는 집 나간 아이를 찾는다고 막 사진을 수만장 복사해 갖고 뿌립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사진을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짓 한 아이의 사진을 뿌립니다. 그리고 어떻게 어떻게 생겼다고 몽타쥬를 만들고 특색까지 씁니다. 턱이 나오고 눈이 크고 작고 자세히 알아볼 수 있도록 다 기록합니다. 더 많이 붙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게다가 "아무 아무개야 돌아오라.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 그렇게 합니다.
어찌 보면 참 훌륭한 아버지이고 훌륭한 어머니인 것 같습니다. 많은 큰 죄를 짓고 나갔지만 다 용서하겠다고 아무 아무개야 돌아 오라 했지만, 이 브라질 여인 마리아는 딸의 이름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용서해주겠다는 말은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은 곧 누구를 허물되게 하느냐? 허물된 자기 딸을 더욱 허물되게 소문을 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한 이년 전인가 기억됩니다마는 월남 엄마들이 한국 군인 아저씨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을 이끌고 한국에 와서 TV에 부끄러운 자기 얼굴을 비취고 태어난 아이 얼굴을 비취는 것을 보았습니다. 알고 보았더니 우리 한국 군인 아저씨들이 전쟁터에 파병되면서 총알만 뿌리고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씨앗까지 뿌리고들 와 가지고서 그런 일이 발생한 겁니다.
여인이 나타나서 이렇게들 했지요. "나는 어느 지역 몇 번지에 이층집에 있었습니다. 나와 동침한 남편 되는 사람이 거기 지냈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그 아이입니다." 하고서 신문에다가 어머니도 내고 아이의 얼굴도 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본 월남 갔던 씨뿌린 아저씨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타나지 않는 것이 상식이라서 나타나지 않는 사람을 두고서 비판한 적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오늘 소개되었던 이 브라질의 마리아라고 하는 여자는 딸의 수치 위에다가 자기의 얼굴로서 덮어버렸던 것입니다. 딸의 이름 위에다가 자기 이름으로 덮어버렸습니다. 딸의 이름이 자랑스러운 이름이 아닙니다. 딸의 얼굴이 자랑스러운 얼굴이 아닙니다. 그런 그의 얼굴 위에 어머니의 얼굴로서 덮었고, 그런 딸의 이름 위에 자기의 이름으로 그 딸의 부끄러움을 가리웠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구원하되 그 구원받는 자의 체면을 위해서 외치지 아니하며 거리에 들리게도 아니하면서 자신을 사방에 십자가 위에 걸어 세우고 우리를 소리없이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주인공은 상한 갈대면 꺾어버리면 그가 가진 갈대 단은 훌륭한 단인데 꺼져가는 등불 꺼뜨려버리고 새로 기름부은 새 등불을 들고 나가면 얼마든지 밤길을 갈 터인데, 그는 상한 갈대라 하여 꺾을 용기가 없고 용기가 없다기보다 진실한 사랑 때문에 꺾지를 못하고 꺼져가는 등불로써 자기가 헤매면 헤맬지라도 이 등불마저 아직도 명이 붙어있는데 꺼버려서야 되겠는가. 버려서야 되겠는가. 차라리 내가 다시 불을 지펴보리라 생각하면서 꺼져가는 등불의 사람을 찾을 적에 상한 갈대를 찾을 적에 소리내어 동네방네 다니면서 외치지 않았다는 겁니다.
"상한 갈대 아무개야 나오라. 꺼져가는 등불 아무개야 나타나라. 내가 여기 있다. 너를 구원하려 왔노라. 내가 너를 용서하겠다." 그런 말씀을 거리에 다니면서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외치지도 아니하고 거리에 혹 죄인의 이름이 들릴까바 외치지도 아니했다는 그분이 바로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나는 분인데,
그렇게 하자니 죄인이 가 있는 우범지역 스스로 찾아다니시면서 죄인 찾는 게시판에다가 누구의 얼굴과 누구의 이름을 오히려 내어야 그 죄인이 욕되지 않게 허물스럽지 않게 돌아설 수 있겠습니까? 마치 크리스티나를 부끄럽게 아니하려고 대신 어머니가 부끄러움을 당했듯이 죄로 말미암아 이 딸 크리스티나처럼 되었던 우리들,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 여기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참으로 부끄럽게 된 우리를 꺼져가던 우리 등불 그리고 반드시 꺾어버리고 추려내어야만 될 상한 갈대였던 우리를 위해 구원을 하시되 우리의 이름이 팔릴까바 우리의 잘못된 그 얼굴이 사람들에게 알려질까바 곳곳에 우리를 내세운 것이 아니라 그의 십자가를 사방에 걸었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하면,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야 합니까, 죄없는 주께서 달려야 합니까? 당연히 우리가 달려야 함에도 십자가 하면 우리도 그렇게 말하고 세상 사람도 말하기를 십자가에 하나님 아들 예수가 달렸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세워지면 세워질수록 걸리면 걸릴수록 예수님의 체면이 참 추하게 됩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큰 죄를 가졌어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는 곳이 없고 그 십자가 위에 주인공은 예수님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죄는 덮어져 버린 겁니다. 그러한 주님에게 우리는 조용히 찾아가면 되었습니다.
처음 신랑을 맞으려 나가는 열 처녀는 신랑이 더디 온다고는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오게 되어 있는 날 온다는 그 시간에 등불을 밝히고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읽어보면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 등불에 가득 채우고도 또 다른 병에 기름을 더 준비해 갔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랑이 금방 올 터인데 등불에 기름이 가득 찼으면 그만이지 또 다른 병에 기름을 더 담아갈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작 기름이 소비되는 곳은 신랑을 기다리는 길목이 아니라, 신랑이 입장한 후에 날이 샐 때까지 그 잔치의 집을 밝혀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등불에 기름을 가득 채우는 이유도 그리고 슬기로워서 다른 기름병에 기름을 더 준비한 이 처녀들도 기다리기 위해서 더 준비했던 것이 아니라, 당연히 신랑과 함께 들어가서 밤새도록 등불을 밝혀주어야 하는 일을 이 처녀들이 해야 되었기 때문에 등불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기름을 따로 또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신랑이 더디 오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등불에 담았던 기름이 다 소비되고 그리고 슬기로운 처녀들이 따로 준비했던 기름마저도 다시 부었는데 거의 다 소비될 쯤에 신랑이 그때서야 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이 다 떨어졌고 슬기롭다고 해서 기름을 더 가져갔던 그 처녀들도 이제는 마저 부었지만 신랑이 올 때까지도 버틸 만큼 기름이 안 될 만큼 나누어 쓸 수 없을 만큼 꺼져가는 등불을 가졌던 처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인공이 되었던 이 신랑은 기름이 모자라는 그 처녀들을 안으로 들어가자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삼십 분 후에도 한 시간 후에도 다섯 시간 후에도 기름이 떨어진 이유로 해서 처녀들이 쫓겨나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의 비유를 보면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 신랑 예수님과 함께 입장했던 처녀들은 기름을 많이 가졌던 것처럼 우리는 생각하고 있고, 오히려 들어가지 못했던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이 없었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한 것쯤으로 우리는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오해하게끔 만들었습니다. 왜입니까? 기름이 다 떨어져가는 처녀들이 들어갔지만 쫓겨나오지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불을 켜준 것으로 되어버렸습니다. 그 처녀들에게 기름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신랑되신 우리 주님께서는 꺼져가는 등불의 주인공에게 그의 기름을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꺼져가는 등불을 가진 처녀라고 알리려고 하지 않는 것이 신랑의 사랑이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기름 얼마 없는 처녀들을 불러들이어서 밤새도록 다음 해가 밝을 때까지 기름이 없었던 여자로 나타나지 않게끔 커버를 해 주신 신랑, 그가 참으로 우리의 구주십니다. 완벽하게 우리를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정작 멸시를 받아서 싫어 버린바 된 자가 누굽니까? 간고를 겪어야 할 자가 누굽니까? 죄로 말미암아 상한 갈대된 우리요, 꺼져가는 등불이었던 우리가 아닙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고난받게 했습니까? 허물스러운 상한 갈대로 만들었습니까? 꺼져가는 등불처럼 만들어 결국은 등불이 꺼지도록 만들었습니까? 왜 그가 그같은 간고를 겪었으며 그같은 질고를 당했어야만 했습니까?
여러분 아시지 않습니까?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 무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그의 죄가 있어서 징벌을 받아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이사야 53장 3절에 당시에나 지금에나 마찬가지로 생각들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마치 범죄한 딸 크리스티나의 허물을 덮기 위해서 허물없는 그 어머니가 자기 얼굴을 확대하고 복사를 해서 온갖 우범지역에 붙였습니다. 딸이 당할 모든 죄인 취급을 그 어머니가 죄인 취급받도록 자기 자신이 죄인 취급받으므로써 죄인 된 자기 딸을 덮어버렸던 그 허물을 면케 해 주었던 마리아처럼, 우리들이 죄짓는 현장마다 어디를 가든지 주님의 십자가를 보게 됩니다.
십자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든지 어느 골목 가든지 교회 종탑으로만 십자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방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누가 말하여 십자가 볼 수 있는 사람을 죄인이라 하겠습니까? 누가 말하여 십자가에 달린 자를 죄 없다 하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십자가를 주로 보는 입장에 계십니까, 아니면 달려서 십자가를 볼 수 없는 입장에 계십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기에 위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자기 영혼을 부탁할 뿐, 십자가가 과연 이렇게 저렇게 생겼구나 오히려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에 모든 방백들과 모든 관원들은 십자가에 달린 저 사람은 죄인이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사람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죄없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봅니다. 사방에서 봅니다. 사기꾼 되어 사기꾼과 함께 사기를 치고 있어도 며칠 안에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현상금 붙은 그래서 수배하는 강도의 옆에도 십자가는 있습니다. 심지어 술집에도 정상 영업시간을 어기고 불법으로 영업하는 심야에 영업하는 술집 계단 지하로 내려가서 문을 다 걸어 잠그고 그리고 은밀하게 술을 마십니다.
그곳에서 술 마시다가 나온 사람이 이런 말을 합디다. 사방 사방 돌아다녀도 그 계단 밑으로 내려가서 지하에서 앞 뒤문 다 걸어 잠그고 술집 술방에서 술 마실 때에는 십자가 안 뵐 줄 알았는데 거기도 십자가가 있더라는 겁니다."에이 어느 술집 주인이 술집에다 십자가를 걸어놓았겠어요?" "아이고 목사님 말도 마십시오. 벽에 걸어둔 것이 아니라 술 따라주는 여자 목에 걸려 있습디다." 그럽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하면 예수님 생각합니다. 십자가 하면 십자가 져야할 죄인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는 우리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주께서 오히려 우리의 위치에서 구경을 해야 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십자가를 보지 못하고 정작 십자가에 달렸어야 할 우리는 십자가를 봅니다.
칼을 찬 병정도 재판관도 십자가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을 죄인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죄가 있건 없건 십자가에 달려있는 사람을 죄인이라 여깁니다. 이 세상 마귀도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을 죄인이라 여겨 공격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가 마땅히 죄로 말미암아 징벌을 받는구나 하고 외칠 뿐입니다. 그러나 그 위치가 바뀌어 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까?
이처럼 우리의 죄를 미리 덮어주신 예수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온갖 우범지역에 자기 얼굴을 십자가에 달린 채로 나타내 보이시는 예수님. 하나님께서는 그런 당신의 아들을 향하여 오늘 본문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푸나니 그는 나의 붙드는 종이요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이라. 내가 그에게 나의 신을 주었더니 그는 이방에게 나아가서 죄지은 자기 백성을 찾되 그 이름이 거리에 들리지 않게 하며 외치지 아니하며 꺾여야 될 상한 갈대를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자신이 꺾여버리고 자신이 꺼지면서 정작 죽어야 될 자기 백성들을 죄 없었던 것처럼, 죄 없는 것처럼, 앞으로도 그리 할 것처럼 드러내기를 기뻐하는 사람이라." 그러한 분이 오늘 성경 속에 소개되었습니다.
한 때 저에게 몇 분들이 말씀하기를 "세례식을 하고서 세례받는 사람들과 목사님이 같이 촬영을 하면 좋겠습니다." "그것도 좋겠습니다." 하고 저도 촬영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후 저는 함께 촬영하지 않겠다 했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례를 받았다는 것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세례받기 이전에는 마귀의 자식이요 사망의 자식이요 이제 세례받은 것은 비로소 거듭난 자라는 것을 증거하여 세례주는 것이니, 아무 날 아무 시에 세례받은 기념사진이라 하여 사진을 찍고 나면 세례 준 사람은 거룩해 보이지만 거기에 얼굴 같이 내밀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 날짜 이전에는 마귀의 자식들처럼 소문이 나지 않겠습니까?
큰 질병 중에 큰 슬픔 가운데 있다가 주로 말미암아 성령님의 역사로 나음을 입었거나 문제 해결을 받았던 사람 간증시키는 일을 저는 조심스럽게 하려고 합니다. 귀신들린 사람, 큰 죄 중에 있는 사람을 만 사람 앞에 불러내어 가지고서 귀신을 쫓으니 귀신이 소리지르며 그 사람에게서 떠나갑니다. 나둥그러집니다.
능력이 있으니 그렇게도 할 수 있어서 저도 한 때 그렇게도 해 보았지만, 미친듯이 거품을 흘리고 쓰러지고 온갖 희한한 소리를 하면서 그 사람 속에 들었던 귀신이 떠나가는 것을 보곤 할 때 떠나간 그 이후에 낫게된 것도 좋지만 그 이전에 그런 귀신과 함께 살았던 것을 드러내어버리는 효과도 동시에 있었던 것을 봅니다. 이것은 좋은 효과가 아니라 역효과였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병을 낫게 해 주시고 죽을 자를 살려주시되 그가 꺼져가는 등불이었다는 것을 알리지 않기 위하여 거리에 소리를 들리지 않게 하신 주님. 상한 갈대였던 것을 고쳐주어 버리고 전에 상한 갈대였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상한 갈대되어 그 허물 많은 사람 위에 덮어버리고 죽어 가는 사람 위에 덮여져서 욕을 보지 않아야 될 사람이 사방에 걸렸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봅니다. 죄의 현장에 와 있는 십자가를 보면서 성령으로 마음에 감동을 받으면 달리신 주님을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서 조용히 빠져 딸 크리스티나가 그 어머니 마리아의 시골집으로 갔던 것처럼 아무 소리 소문 내지 아니하고 주께로 찾아와 조용하게 회개합니다.
우리 대신 온갖 창피를 당하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허물스러운 이름으로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겠지요. 우리 얼굴을 펴라고 하겠지요. "내가 네 허물을 덮었는데, 내가 네 얼굴을 가리웠는데 왜 어깨가 처져 있는가? 왜 죄지은 사람 인상을 하고 있는가? 너는 의롭다 칭함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당당하고 담대하라. 큰 소리 쳐라.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도 떨지 말고 담대함으로 나아오라."
주께서는 그리 말씀하십니다마는 그래서 우리 그렇게 살아오기는 합니다마는 그러나 우리의 당당한 어깨와 담대함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대신하여 주신 오늘의 주인공 주 예수로 말미암아 된 것쯤은 알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일만달란트 탕감의 은혜를 베푸신 임금이 탕감받은 자에게 원하여 "다만 나아가서 네 이웃의 짐을 덜어주기를 원하노라. 내가 네 일만달란트의 빚을 탕감하였거늘 너는 나가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이웃이 또한 힘들지 않도록 짐을 덜어주어라."라는 부탁을 다만 하셨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 졌고 그리고 교회를 세웠나니 너희는 이제 죄인이 아니로다. 그러나 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남은 고난을 너희에게 잠깐 맡겨두었으니 내 십자가를 지고 오히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면서 날 따라오지 않겠느냐." 주님 말씀하셨건만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이웃을 정죄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집안에 걸어두고도 집안에서 자랑합니다. 십자가가 걸려있는 성전 안에서도 남보다 나타나기를 좋아합니다. 남보다 자랑스러워지기를 좋아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께서 "그래 너는 자랑스러워 해.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처럼 해. 똑똑해. 남보다 훌륭해. 그래 너 잘났어."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그리 하도록 허락하시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제 신앙의 아이가 아니라 좀 자랐으니 우리가 자랑하며 교만할 수 있는 것도 주님 때문에 되었던 것이니 이 사순절 기간 중에라도 그리 하신 주님, 온갖 우범지역에 얼굴을 팔아버리고 그 이름을 파신 주님을 생각하여 이웃에게 용서를 베풀어보시기 바랍니다. 교만을 버려보시기 바랍니다. 자랑을 뒤로 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이 시간 통성으로 기도할 때에 주여,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지 않게 하셨고 외치지 아니하신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의롭다 칭함을 받았으나 이렇게 되기 이전에 십자가에 달릴 죄인이었던 것을 내 이웃도 모릅니다. 세상 관원도 모릅니다. 우리 이웃 구역원들도 모릅니다.
어떻게 이렇게 모르고 우리가 구원의 현장에 와 있겠나이까? 주여, 오늘 저 브라질의 한 여인의 딸을 위하여 했던 것처럼 아니, 주님이 그 여인을 닮았겠나이까? 그 여인이 주님을 닮았던 것이지요. 주여, 주께서 그리하셨기에 우리의 죄인이었던 것이 소문나지 않아 아무도 우리가 죄인이었던 것을 모릅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큰 은혜를 받았으니 이웃을 사랑해 보렵니다. 이웃에게 자랑을 이제 그만 하렵니다. 교만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의 이 심정을 받으시옵고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통성으로 잠시 함께 기도 드리겠습니다.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그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한 독생자로서 죄인 된 우리 현장에 보내사 우리가 달렸어야 할 그 십자가에 우리보다 먼저 우리 집행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아들을 매달리우시고 우리로 그 십자가를 오히려 바라보는 위치에 있게 하신 그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지금도 여전하게 주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덮으신 그 십자가의 능력과 효력이 우리 앞에서 여전하게 하게 하사 우리로 죄없다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로서 칭함 받아 마귀로부터도 공격받지 않게 하고 천국길 가게 하시는 그 역사 하심이, 사순절을 맞아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여 감격하고 감동하는 모든 무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함께 있을지어다" - 아멘
제목: 나를 때리는 자에게 내 등을 돌리며
본문: 이사야 50:4-7
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성경은 오늘 상식으로는 가히 이해할 수 없는 한 아들과 그의 아버지를 우리로 하여금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타난 그 아들이란 사람은 가히 자신에게 죄도 없으면서 6절에 나타난 대로 소개해 드린다면 자기를 때리는 자들에게 자기의 등을 돌리기는커녕 되레 실컷 때리라고 맡기며, 자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저항을 하기는커녕 마음대로 하라고 자기 뺨을 통채로 갖다 맡기는가 하면, 수욕과 침 뱉음을 당할 때에 피하려고 자기 얼굴을 가리우는 것이 상식이고 또 얼굴에 침을 뱉으면 본능적으로 눈이 감기게 되어 있습니다마는 여기에 소개된 한 아들은 남이 침을 뱉어도 그리고 모욕을 그 얼굴에 퍼붓고 있어도 얼굴을 돌리거나 눈이 감기어지지 않는 그런 아들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니 이 멀쩡하던 사람이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어버렸는가 하는 그것입니다. 그 아들이 그렇게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된 데는 그의 아버지가 세뇌를 시켰기 때문임을 성경은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철저히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세뇌를 시켰던지 7절에 보면, 아들의 얼굴을 철판보다 더한 부싯돌같게 했으므로 수치를 당하여도 그 수치를 수치인 줄을 알지 아니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철판 두껍다고 그러지요. 그러나 철판과 철판을 이렇게 충돌시켜 가지고서는 불이 잘 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한 부싯돌은 서로 충돌시키면 불꽃이 튀어서 불쏘시개로 삼기도 합니다. 아들의 얼굴을 철판보다 더한 부싯돌로 만드신 이가 바로 그의 아버지셨습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가 어떠한 방법으로 이 아들을 이토록 만들 수 있었는가? 그의 세뇌시킨 방법이 과연 무엇인가? 4절부터 5절 사이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아비는 아들에게 학자의 혀를 주어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것을 깨우쳐주었고 그리고 매일 아침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사 보기 전에 세상의 지식과 접하기 전에 세상의 어떤 즐거움들을 만나기 전에 매일 아침 눈만 뜨면 그에게 말을 해 주었는데, 그 귀에다가 대고 진리의 말씀을 얼마나 계속적으로 말씀했던지 결국 그 아들이 그 아버지가 귀에다 대고 세상 물정도 알기도 전에 그냥 퍼붓듯 계속해서 말씀해주시는 그 말씀으로 귀가 열려버렸는데 아들의 귀가 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아비 여호와께서 아들의 귀를 열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겠지만 영어를 하려고 하면 영어를 우선 많이 들어야 합니다. 또 한국말을 하는 우리 아이들이 일단은 많이 듣습니다. 듣다가 보면 어느 날 갑자기 혀가 돌아가고 입이 터집니다. 그래서 영어를 하게 됩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나이 들어도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들음으로써 자꾸 들음으로써 결국 그 혀는 들은 대로를 그대로 표현하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 나타난 아들은 그 아버지가 세상도 보기 전에 아침마다 그 귀에다 대고 그 아버지가 무슨 말씀인지 모르지만 말씀을 계속 해 주었는데 그 내용은,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것을 늘 가르쳤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 아들의 귀가 어느 날 갑자기 열리기 시작했는데 누구로 말미암아 열려졌느냐?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5절에 그랬지요?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그에 의하여 내 귀가 열렸더니 그가 말하는 대로 기계처럼 로봇처럼 그저 명령을 따를 뿐 거역할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는 이런 내가 되어 버렸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이 희한한 아버지가 4절에도 5절에도 '여호와'라고 그 성호가 소개되었으니 하나님과 그의 아들과의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이 세상 물정 알기 전에, 세상에 그 무엇을 접하기 전에 계속해서 그 귀에다가 진리의 말씀을 말해주었습니다.
그 내용은 무엇이냐? 죄인된 사람 죽어가는 사람 곤핍한 자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말로 거듭나게 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그 다음에 그들을 위하여 네가 어떻게 어떻게 하는 것이 네게 생명이 되는 것이다 라고 계속적으로 주입을 시키고, 그 외에 다른 말은 한 마디 들을 수 없었으므로 그 아들이 성장하여 막상 말을 하게 될 때에는 그 말이 아버지의 말이었고 그의 행동은 아버지의 뜻대로 기계처럼 움직인 것이니 내가 거역하거나 뒤로 돌아서거나 할 수 없는 이런 이상한 청년이 되고 말았다 라고 고백한 고백을 요한복음 12장 50절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찾아보실까요. 요한복음 12장 50절에 보면 이제 그 아들이그 아버지로부터 세뇌를 받아 가지고 자기의 행할 수 있었던, 다 성장한 후에 자기 행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50절 봅니다. "나는 그의 명령이(아버지의 명령입니다)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이 삼십이 넘으시고 이제 그 백성들을 위하여 일을 하시면서 그가 하시는 모든 행동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대하여 그는 해명을 했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이 말은 원래부터 내가 생각하여 내가 하는 말이 아니요 내 아버지께서 내 귀에다가 담아주었고 계속해서 담겼던 내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말을 그대로 했을 뿐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무엇을 하든지 이것은 내 아버지의 명령이니 내가 죽든지 살든지 나는 아버지의 명령대로 따라가는 것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 외에는 내가 아는 것이 없도다."라고 주께서 고백하신 이 고백을 보아서도 그 아버지는 그 아들을 이처럼 철저하게 세뇌시켜서 우리에게 내어보내셨던 것을 짐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리하셨으며, 왜 그 아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그 모양으로 만드셨는가? 오늘 본문 있는 조금 앞에 이사야서 50장 1절로 3절이 설명을 잘 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세상 사람이 본다면 어쩌면 비정상적인 그런 아들로 세뇌를 시켜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50장 1절로 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보냄을 입었느니라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찜이뇨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은즉 바다가 마르며 하수가 광야가 될 것이며 거기 물이 없어졌으므로 어족이 갈하여 죽어 악취를 발하게 되느니라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이 말씀은 어떠한 말씀입니까?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과 그 모양대로 지은 자기 백성을 좋은 세상에 살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자기 백성에게 다 맡겨 주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잠시 다른 곳에 가셨다가 찾아오셨습니다. 에덴 동산에 아담을 찾듯이 찾아왔습니다. 얼굴이 보여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찾아도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언제 너희 어미에게 이혼증서를 주어서 나를 떠나서 너는 자유 하라고 했느냐? 보기 싫으니 함께 살기 싫다고 했느냐? 나는 네 어미에게 이혼증서를 써준 적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를 어느 채주에게 팔았더란 말이냐? 너희를 팔고서 내가 받은 돈이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지은 죄로 너희는 주인을 바꾸어 버렸도다. 너희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죄값을 받으려고 하는 마귀에게 너희는 종이 되고 말았도다.
너희 어미는 어떤 형편이냐? 내가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나가라고 한 적이 없느니라. 내가 싫어서 쫓아낸 적이 없느니라. 너희 어미는 왜 나를 떠났느냐? 왜 내가 만날 수 없게 되었느냐? 너희의 허물을 인함이니 어미된 자로서 너희가 죄를 지어 다른 채주에게 종이 되어 그 마귀의 종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어미는 어쩔 수 없이 따라 나갔느니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아담이 어쩔 수 없이 에덴을 두고 떠나감같이 너희 어미는 내가 쫓아내어서 이혼증서를 가지고 간 것이 아니라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 현장을 떠나서 너희와 함께 그곳에 내어 보냄을 입히게 되었느니라. 그런데 내가 너희를 당장 데리고 오려면 손이 짧으냐? 능력이 없느냐? 내가 바다를 꾸짖은즉 바다가 말라버리고, 강을 명한즉 강물이 말라서 그곳에 있던 어족이 다 죽어 악취가 온 세상에 가득하지 않았더냐? 내가 능력이 없어서 다른 채주에게 가 있는 너희를 내가 당장 찾아오지 못하겠느냐?
나는 흑암으로 하늘을 두른 자니라. 베로서 이 땅을 감쌀 수 있는 하나님이니라. 내게 능력이 없겠느냐? 너희를 찾을 힘이 없겠느냐마는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여 너희를 당장 찾아온다고 하면 너희가 지은 너희의 죄값은 언제 물겠느냐? 죄인으로서 내 나라에 온다면 너희가 편하겠느냐?
죄지은 사람은 또 죄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은 차라리 죄악 세상에 사는 것이 편하지, 죄지은 사람이 그 죄를 해결 받지 못하고 죄인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간다면 그것은 지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죄인으로서는 살 수 없는 곳입니다. 빛의 나라에서는 어두움을 가지고는 살 수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 그 맡겨준 세상 땅에 찾아오셨더니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찾아도 없습니다. 그 어미마저 없어졌습니다. 어미는 죄지을 사람이 아닌데 없어졌습니다. 알고 보니 자식들이 죄를 지어 다른 채주의 종이 되었고, 그 어미는 자식들을 인하여 아담이 하와 때문에 에덴 동산을 버리고 함께 쫓겨난 것처럼 내어보냄을 입혀서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으니 당장 그 채주로부터, 그 마귀로부터 자기 백성과 그 어미를 불러 나왔으면 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죄를 해결하지 못하고 나온 내 백성이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겠는가? 내 나라에 오면 더 불행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사야서 53장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아들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가 죽어 그 영혼을 죄인들 대신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 씨를 되찾아, 죄인의 씨앗이 아니라 의롭게 된 자의 씨앗을 되찾아 그들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하기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놓아 죽게 하였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어느 카펫 깔아주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남의 집에 가서 일을 맡았습니다. 카펫을 깔고 있었는데 한참 깔다가 힘도 들고 해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싶어서 밑 포켓에 넣어 두었던 담배를 꺼내려고 찾아보니 담배가 없었습니다.
"담배를 내가 어디 두었지? 일하다가 어디 빠뜨렸나?" 하고서 두리번두리번 하다보니 카펫트 저 한 쪽 편이 불룩했습니다. "아이구머니나. 담배가 어떻게 저기 들어갔지?" 그래서 가서 담배이리라 생각하고 발로 자근자근 밟아보니까 역시 말랑말랑했습니다. 담배였습니다.
카펫을 뜯어가지고 담배를 꺼내 한 대 피우고 싶지만 강력 접착제로 다 붙여 놓았고 그리고 전부 무늬를 맞추어 놓았는데 이것을 다시 뜯어낸다면 아주 복잡하게 생겼습니다. 차라리 내가 담배를 피우지 말고 말지 하고서 이렇게 막 밟아도 불룩하고 좀 뜹니다. "이것 안되겠네."해 가지고서 몽둥이를 하나 갖고 와서 얼마나 거기를 두들겨 팼던지 납작하게 두들겨 팼습니다.
일을 끝내고 그 주인 아주머니에게 "아주머니, 끝났습니다. 이제 저 돌아갑니다." 하고서 장비를 다 챙겨 가지고서 자기 차에 갖다 실었습니다. 차에 실으려고 짐을 싣는데 자기가 앉았던 운전석에 보니까 담배갑이 거기 있다 그겁니다. "아이구머니나.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까 나는 카펫 밑에 있는 것이 담배갑인줄 알고 자근자근 밟다가 그것도 안 되어 가지고서 몽둥이로서 납작하게 만들어버렸는데 이것 어떻게 된 일인가? 그게 뭐던가?" 좀 궁금합니다.
그런데 여주인이 "아저씨!" "왜요?" "혹 일하다가 우리 앵무새 못봤어요?" 몽둥이로 한없이 두들겨 팬 그것이 담배갑이 아니라 앵무새였습니다. 그래서 납작하게 이제 본 살처럼 되고 말았는데, 아저씨는 망설였습니다. 자기가 두들겨 패서 납작하게 만들었던 그것이 앵무새였구나 하고 이실직고 하려고 하다가 멈칫 하다가 모른척했습니다.
집주인은 그저 앵무새가 바깥으로 날아갔거니 생각하고 이제 일한 노임도 주고 그리고 "아저씨 오늘밤에 오세요. 우리가 집수리를 깨끗이 했으므로 동네 지인들을 불러서 우리 파티를 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저녁에 오십시오." 해서 그날 저녁에 파티에 참석했더니, 그저 수고했다가 카펫트 잘 깔아주셨다고 술도 한 잔 주고 마시고 전부 춤을 추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저 카펫을 잘 깔았다라고만 알고 편편한 카펫 위에 춤을 추고 자기는 그 현장을 지나갈 때마다 발을 조금 조금 이렇게 건너뜁니다. 자기는 알고서도 춤을 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카펫 작업을 하는 이 아저씨는 처음에는 이 불룩했던 것이 자기의 담배갑인줄 알았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에 나타난 대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난을 받는 것은 그의 죄 때문에 그가 당연히 받을 벌을 받는 줄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카펫 깔은 사람은 나중에는 그 죽은 것이 자기의 담배갑이 아니라 앵무새였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제 우리는 마음 아파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가 죽였도다."라고 우리는 회개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마는 어쩔 수 없어 살아갑니다. 돈을 받아야 가족이 살겠고 그리고 그 파티에 춤을 추어야만 하겠기에 그가 죽은 사실을, 그 새를 자기가 두들겨 패서 죽였다는 사실을 말을 못하고 있습니다마는 마음속으로는 항상 이것이 걸렸습니다.
이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다른 새면 모르겠거니와 말한다고 해서 앵무새인데 그냥 내가 두들겨 팰 때 "앵무, 앵무" 하지 왜 아무 말 안하고 그냥 죽는단 말인가? 저는 앵무새는 원래 "앵무, 앵무" 하는 줄 알았더니 "앵무, 앵무" 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면 "아프다." 하고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말하는 앵무새인데 이 앵무새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자기는 편리하게 일을 다 마쳐버렸고 그 위에 춤을 추고 그 일 했다고 돈을 받아서 잘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와 같습니까? 이 카펫 작업을 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뭐 있습니까? 우리는 교회 와서 즐거워합니다. 십자가 밑에서 교회라는 반석 위에서 춤을 춥니다. 우리는 우리를 가리켜 우리의 옆 사람을 가리켜 죄인이라 하지 않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이미 의롭게 된 사람들,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들이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죄인이며 결국은 주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면 지옥으로 갈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구별하고 있습니다. 바깥 사람들은 죄인이요 사망의 구렁텅이로 빠질 것이나, 우리는 죄인이 아니요 그래서 천국에 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 말하는 이 바닥이 어디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깨어진, 그리스도가 반석이 되어 세우신 이 바닥인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엇 밑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 밑에서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뽑아버린다면 저 바깥 사람이나 믿는다고 하는 우리나 무엇이 다를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죄인 아닌 것처럼 되고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채주가 다른, 그래서 마귀가 채주가 되어 있는 그 현장으로 끝내 갈 것이라고 우리는 말하면서 우리는 언제 그런 신분을 가졌던가 하는 생각을 벌써 갖고 있습니다마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앵무새가 깔려 죽은 그 카펫 평평한 그 바닥 위에서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형편이 바로 그런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입이 있었으나 말없이 자기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습니다.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수염을 잡아 뽑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찐한 모욕을 주는 겁니다. 차라리 재판정에서 몇 년 징역을 받고 있지 수염을 뽑힌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수염을 뽑으면서 얼굴에다가 침을 뱉으면서 온갖 모욕을 퍼붓는데도 그 얼굴 하나 변하지 아니하고, 침을 뱉어도 본능적으로 눈이 감길 것인데 눈도 감지 아니하고 자기의 수염을 뽑는 사람들에게 얼굴을 노다지 갖다 맡기며 "마음대로 뽑아라. 더 뽑아라. 다 뽑아라." 그렇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에게 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그가 등을 맞고 있었으며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그의 수염이 뽑히고 있었던 것을 카펫 공사한 사람처럼 우리는 압니다.
남의 죄를 지고도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알지 못합니다. 수치를 수치로 알지 못합니다. 그 아들이 그렇게 된 것을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그 아버지가 그렇게 만들었으니 그 아버지는 우리를 찾아왔으되 찾지 못하고 우리의 이름을 불렀으되 대답하는 자가 없어 살펴보았더니 모두들 자기 죄로 말미암아 채주를 바꾸어 버렸더라 그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어야 될 사람들이 마귀를 주인으로 삼고 마귀는 자기의 백성이 되었다고 그 권리를 주장하고 있더라 그것입니다.
어미를 내어보내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여기에 나타난 어미는 누굽니까? 그는 죄를 짓지 아니했어도 죄짓고 떠나간 백성을 위하여 자식들을 위하여 내어보냄을 입었느니라고 말했으니, 오늘 우리가 믿고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죄가 없었어도 내어보냄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내어보낼 때에 내어보내기 전에 오랜 세월동안 귀에다 대고 진리만을 말해 주었습니다. 아침 눈을 뜨면 해질 때까지 진리만을 그 속에 넣어주었습니다.
사람은 들은 대로 합니다. 본 대로 합니다. 가끔 공부를 잘해서 점수가 좋고 퀴즈대회 같은 데서 아주 높은 점수를 따는 학생들을 보니까 아버지 어머니가 같이 선생님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역시 선생님들은 공부를 잘하고(옛날에 다 공부 잘하면 선생님 했으니까요) 공부를 잘하니까 공부 잘하는 부모 밑에서 난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는가 보다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제게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분이 아주 그럴듯한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 좀 연구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자식이 꼭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머니가 아이를 배고서도 어쩔 수 없이 매일 교단에 나가서 가르치기 때문에 배속에 있는 아이가 가르치는 어머니 때문에 다른 아이들보다 가르치는 얘기를 훨씬 많이 듣기 때문입니다. 태교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린 아이일 적부터 무슨 말인지 잘 알아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는 그때부터도 그 어머니가 마음먹은 대로 말하는 대로 그 집안의 분위기대로 그 아이가 나서 그대로 나타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에게 진리 외에는 들리게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을 구원하는 일 외에는 보이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아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사 자기 뺨을 때리는 자에게 뺨을 돌리지 아니하며, 수염을 뽑는 자에게 자기 뺨을 오히려 갖다 들이대며. 그리고 자기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등을 다 맡겨 버리는 이런 일을 했습니다.
누가 이처럼 하도록 만들어 주었는가? 그 아버지께서 그토록 하도록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맞아야 한다. 맞아야 한다. 맞는 것이 사는 것이다. 수욕을 당하는 것이 내 백성이 수욕을 당하지 않고 죄짐을 벗고 빠져 나오는 길이야. 다른 사람이 할 사람이 없어. 네가 해야돼. 네가 해야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그렇게 만들어 우리 가운데 보내셨으니, 그가 끌려갈 때에도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털 깎는 자 앞에 앉은 양처럼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끌려가서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으면 맞는 대로 죽이면 죽이는 대로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화도 내자 않았습니다. 부끄러워한 흔적을 볼 수가 없습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다 라고 했습니까? 그 아버지가 그 아들을 세뇌하여 우리 인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얼굴을 철판보다 더한 부싯돌같이 만들었기 때문에, 수치와 곤욕을 당하여도 그를 수치로 알지 못하였노라고 주님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산군의 부왕되는 성종은 여러 여자들을 후궁으로 삼았고 많은 자식을 낳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그 중에 엄 귀인과 정 귀인이 역사에 잘 나타나 있지요. 이들은 연산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연산군 자기 생모를 어렵게 했다 라고 해서 죽입니다. 이 두 여인에게 자루를 뒤집어 씌워버립니다.
자루를 뒤집어 씌운 후에 이 여인들의 아들들을 불러와 가지고서 다 왕자들인데 이 왕자들을 그 자루 뒤집어쓴 어머니 옆에다 세우고서 "이 속에 있는 이 사람들은 대역죄인이니라." 너희 어머니라고 하지 않았어요. 연산군이 말하기를 "대역죄인이니라. 이 대역죄인을 나는 나의 동기가 되고 형제가 되는 너희들의 손으로 때려죽이기를 원하노라. 너희가 만약에 이 대역죄인을 몽둥이로 때려죽이지 못하면 단칼에 너희를 베겠노라." 이렇게 했습니다.
자루 하나 뒤집어썼으니 귀가 막힌 것도 아니고 이 여인들은 자루 속에서 다 들었습니다. 끌려온 자식들이 자기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연산군이 미쳐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는데 지금 이 아들들이 자기를 두들겨 패서 죽이지 아니하면 칼을 뽑아서 그 아들들을 죽임으로써 다른 왕자를 없애서 자기의 왕위를 보존하려는 아마 그런 뜻이 있는 것으로 여인들은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겠지요.
연산군이 너무나 무섭게 채근하니 몽둥이를 들고서 그 여인들을 두들겨 팹니다. 두들겨 맞는 여자들이 누굽니까? 자기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그 맞아 다 죽어가는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이 두 여인은 "이놈아 네가 왜 나를 때리느냐. 나는 네 어미다."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왜입니까?
아들들이 오기 전에는 그렇게 살려고 연산군에게까지 대어들면서 또 인수대비에게 그렇게 생명을 부탁하고 하던 이 여인들인데 막상 자기 아들들이 자기를 두들겨 팰 때에는 어미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아들을 살리려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니 내가 이 속에서 "이놈아, 나는 네 어미다."라고 말하면 저 아들이 어떻게 나를 죽일 수 있을까. 아들이 끝내 나를 죽이지 못하면 저 연산군이 당장 내 아들들을 칼로 벨 것이다.
그래서 여인들은 죽고 아들은 겨우 살아남았던 사실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바라보는데, 앵무새 주인은 모르기라도 했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성종의 후궁들처럼 알고도 오히려 그 아들을 죽이는 자들을 살리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알고도 능력이 있으면서 조처를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건져낼 수 있는데 그 아들을 건져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그 아들이 세상에 보냄을 받아서 하고 있습니다. 끌려갑니다. 쓰러지고 또 쓰러집니다. 침 뱉음을 받습니다. 뻘건 베옷을 감고서는 침을 뱉고 그 병정들이 뺨을 때립니다. 수염을 뽑습니다. 모욕을 가합니다.
그렇게 하는데도 부끄러움도 타지 아니하고 자기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돌려대며, 자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며, 침을 뱉으며 뺨을 치는 자들에게 "아버지여, 저들이 몰라서 저리하오니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하는데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어쩔 수 없어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세상에 사람 치고 상식적인 사람 치고, 자기의 죄도 아니고 남의 죄를 위하여 죽어주면서 이렇게 진실할 수가 있더란 말인가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 난 사람 치고 그렇게 된 사람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누구의 실력이 그를 그토록 되게 했습니까?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실력이었습니다.
당신께서 교육을 시켜서 때리는 자에게 자기 등을 돌려대게 하였고 자기 수염을 뽑는 자에게 자기 뺨을 맡기는 것을 하나님이 친히 직접 봅니다. 그 아들이 십자가에 올라가서 막 모욕하고 목마르다 라고 하는데 그저 쓸개탄 포도주를 자기 입에다 문지르는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들이 몰라서 저리하오니 저들에게 감정을 갖지 마시옵소서. 저들을 용서하시옵소서."
아들의 부르짖음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빈 말이 아니었습니다. 체면상 하는 말이 이었습니다. 진심었습니다. 진심할 수 없는 자리에서 진심을 내어놓는 그 아들을 보는 아버지, 그 아들이 그렇게 당하는 것은 아들 탓이 아니라 아비 탓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그 아들이 자기의 시킨 대로 기계처럼 끌려가서 그렇게 죽는 것을 바라다보면서 진심까지 다 드러내었는데 "나 죽이는 저들을 용서하소서." 라고 하면서 그 영혼이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되도록 가르쳤던 하나님께서 얼마나 하늘에서 몸서리를 쳤던지 예수 운명하는 순간에 하늘이 흔들리고 땅이 흔들리고 태양이 빛을 잃고, 얼마나 흔들어대었던지 주님이 운명하는 순간에 많은 무덤들의 돌문이 다 굴러 떨어져버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상식적인 지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누구의 육체가 갈라진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육체가 갈라졌으니 하나님의 마음이 쪼개진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하셨지만, 그처럼 당신의 가슴이 찢기어졌어도 하나님은 그 아들 죽인 자들을 찾지 않았습니다.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잘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을 그처럼 모욕하고 그토록 험하게 죽였던 사람들을 그 천사들로 찾아 나서지 않았습니다. 단 한사람도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그 아들을 그렇게 희생시키므로써 수많은 잃었던 우리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어 아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될 줄 몰라서 그렇게 내어놓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불러도 대답이 없고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도다. 너희가 갑자기 어디에 갔느냐? 너희 위에 있는 그 주인은 누구냐? 너희의 채주가 마귀로구나. 언제 그렇게 되었는가. 너희가 죄를 지었구나. 너희가 죄를 지었구나.
죄지은 너희를 내가 어떻게 찾아내랴? 내가 힘이 있어서 손을 쓰면 바로 데리고 오겠지만, 죄를 갚지 아니하고 그대로 데리고 온다면 너희는 지옥에서 사는 것보다 천국에서는 더 힘들 것이야. 방법이 따로 없으니 내 아들을 너희 대신 너희 당할 수치를 당하게 하고 너희 뽑힐 수염을 뽑히게 하고 너희 맞을 등을 맞게 하고 너희 죽을 죽음을 죽게 하여 내 아들을 희생시키고 너희를 찾겠노라.
그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하나님께서는 죽는 아들만을 쳐다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되찾을 수 있는 우리을 찾으셨던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하여지는 것을 보고 그는 억울하지 않았습니다. 손해보지 않았습니다.
내 아들 하나를 희생시켰고, 충분하게 내 백성을 찾아내었으니 그가 속건 제물로 그 영혼을 드리기에 이르면 나의 많은 씨를 되찾게 될 것이라 하시던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를 찾게 되었으니 그가 억울해 한다면 우리를 찾을 기쁨이 없었겠지요. 우리를 찾은 기쁨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내 아들 하나를 죽이고 모든 내 백성을 찾았도다 하고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닮았던 그 아들께서도 죽기 전에도 자기를 죽이는 자들에게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소서." 하고 그리고 자기의 뺨을 치는 자에게 수염을 뽑는 자에게 자기의 뺨을 맡기고, 자기를 죄인이라고 여겨서 두들겨 패는 자에게 자기의 등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등을 내어 맡기던 그 분이 부활하신 후에 어찌하였습니까?
저는 부활하자마자 주님이 빌라도에게 갈 줄 알았습니다. 헤롯에게 갈 줄 알았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놓게 만들었던 대제사장들에게 갈 줄 알았습니다. 사십일 동안 여러 곳에 다니셨지만, 제자들과 함께는 저 호숫가에도 가고 저 산에도 가고 또 방에도 가서 여러 차례 만나주시고 식사도 같이 했지만 자기를 죽인 사람들에게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올라갈 날이 가까운데도 단 한 번도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나를 죽였지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이렇게 살았도다. 이놈들아!" 하고 찾아갈 만한데 전혀 가지 않았습니다. 왜 안 가냐고 물어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만족이었습니까? 죽인 자들에게 가서 "나의 죽음의 값을 내어놓아라. 나의 죽음을 보상하라." 한다면 주께서 보상을 받는다면 우리는 무엇이 됩니까? 그로 말미암아 삶을 입은 우리는 무엇이 됩니까?
주께서 자기를 죽인 자들에게 찾아가서 보복하지 아니한 것은 자기의 죽음에 대하여 보상을 요구하지 아니한 것은 그 보상으로 저와 여러분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구원했기 때문에 오히려 찾아가서 말하다가 "나 당신의 생명을 보상해주겠소. 그러나 당신의 백성은 도로 찾아오겠소." 할까바 주님께서는 우리를 찾은 것으로 만족하시고 하늘로 오르셨던 것으로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하신 하나님, 이처럼 하신 예수님, 이 하나님과 그 아들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가 벌써 의인되어, 죄인이었던 시절마저 잊어버리고 천국 시민의 길을 가고 있으면서 기뻐하고 즐거워 춤을 추며 사는 저희가 된 줄로 믿습니다.
참으로 이 사순절을 기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앵무새의 여주인처럼 모르고 그 아들을 희생시킨 것이 아니라 알고서 보고서 그리하였고, 그 아들이 그처럼 희생되도록 미리부터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 만들어주셨으니 다시 한 번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우리에게 만나게 해 주신 이 아버지와 이 아들을 한 번 더 만나보십시다.
이사야서 50장 1절 이하를 봅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보냄을 입었느니라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찜이뇨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은즉 바다가 마르며 하수가 광야가 될 것이며 거기 물이 없어졌으므로 어족이 갈하여 죽어 악취를 발하게 되느니라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이것은 이제 아들의 입장에서 쓰는 말입니다)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길을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학자처럼 말씀하시고 학자같은 귀를 주시고 학자같은 혀를 만들어 버렸으니, 들은즉 말하게 되니 아들의 입에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온 말 외에는 더이상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자기가 자기의 귀를 열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라났기 때문에 열린 것이 아닙니다)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수치를 당치 아니한다 라고 하니까 수치 당할 일이 없었다는 겁니까? 온갖 수치에도 수치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는 것입니다. 누가 그리하였습니까? 그의 아버지가 그리 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아들을 하나밖에 없는데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그의 아들이 죽었어도 죽인 자를 보복하지 않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도 자기 죽인 자를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왜 입니까? 억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입니까?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 만족했습니까? 저와 여러분으로 만족한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416장 찬송합시다.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감화하시고 감동하시고 인도하심이, 진실로 이 사순절을 기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베푸신 그 크신 사랑과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우리를 구원하신, 그래서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갖다 맡기며 죄도 없으면서도 자기를 죄인처럼 두들겨 패는 자들에게 자기의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맡겨 버렸던 주님을 생각하는, 그래서 감사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모든 성도께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 아멘 -
제목: 성찬을 받은 후 찬미한 제자를 보며
본문: 요한복음 6:48-58
인용: 마태복음 26:26-30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사순절 시리즈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은 종려주일로서 성찬식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겠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우리와 똑같은 성찬을 받고도 어쩌면 우리보다 더 해야 될텐데도 숙연해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성찬에 참여하는 분위기와 성경 속에 나타난 제자들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하는 그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0절에 소개된 바를 살펴보면 이들은 성찬에 참여하고 끝이 나자마자 찬미하면서 감람산으로 올라갔었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 그들의 성찬에 대한 이해가 오늘 우리들의 성찬에 대한 견해와 차이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주께서 베푸시는 이 성찬을 수찬하기에 앞서서 이 떡과 이 잔에 담겨진 주님의 말씀을 살펴가면서 과연 그때 제자들이 성찬 후에 취했던 태도를 우리가 취해야 될 것인가, 아니면 그때 제자들이 우리같지 못했던 것이 사뭇 아쉬웠던 일인가 이것을 한 번 살펴보는 밤이 되었으면 합니다.
성경은 또한 고린도전서 11장 27절 이하에 보면 "이 잔을 먹고 마시기 전에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분별하고서 받을지니,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신다면 그것이 오히려 죄가 되어 너희 중에 병든 자가 많고 약한 자가 많고 쓰러지는 자가 많은 것이 이 성찬을 제대로 분변하지 못하고 참여했기 때문이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오늘 우리들의 성찬에 대한 분위기와 제자들의 분위기가 사뭇 달랐던 일에 대해서 주께서 베푸신 성찬의 참 의미를 찾아가 보는 이런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6장 48절로 50절에 "너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곧 나 너희에게 주는 이 생명의 떡은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간단히 읽으면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마는 잘 살펴서 읽어본다면 간단치가 않습니다. 의문을 가질만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사람들이 오늘 성경에 나타나 있는 그대로처럼 죽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만나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언제까지 살았습니까? 근 40년 동안을 이 만나 때문에 살았습니다. 그들의 수한이 다하여 죽었을 뿐이지 만나가 저들에게 효험이 없어서 또 영양이 없어서 죽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어 성경이 말하는 대로 그러면 주께서 주시는 성찬을 먹은 사람은 죽지 아니했습니까? 당시 제자들도 성찬에 참여했지만 죽었고, 우리들의 믿음의 선조들도 다 성찬에 참여했으나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조금 전에 소개드렸던 "너희 조상들은 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내가 너희에게 주는 내 살 곧 이 생명의 양식의 떡은 사람이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라는 이 말씀을 쉽게 그저 읽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잘 살펴서 헤아려 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이 떡에 대하여 이 잔에 대하여 계속 말씀하시다가 이 말씀 끝에 쯤 가서 6장 63절에 말씀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문장으로 볼 것 같으면 이 문장은 완전한 문장이 아니고 앞에 주어가 생략된 그런 문장이 되겠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이 성찬에 관한 여러 말씀을 하시던 끝에 결론적으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생략된 주어를 찾아본다면 계속 말씀하시던 주님께서는 "이 떡은, 이 떡은" 하며 떡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을 되살려서 함께 말씀을 드려본다면 "이 떡이 살리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주는 이 떡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이 떡으로서 육에는 유익함이 없느니라"
다시 말씀드려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이 먹었던 그 만나는 영혼에게는 유익이 없었으나 육에게 유익을 주었고, 지금 내가 너희에게 주고자 하는 이 떡은 육에는 무익하나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지만 이 만나는 사십년 동안 자기의 수한이 찰 때까지 육신을 살리는 데 육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베푸시는 그때의 그 성찬이나 오늘 우리가 받게될 이 성찬의 떡은 무엇을 살리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만나는 육에 유익하여 육을 사는 날 동안 살렸으나 영은 무익하여 영이 사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아니하였고, 주님의 몸인 이 떡은 육에는 그다지 유익하지 않으나 영에는 유익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생명을 갖게 되고 그리고 그 마지막 날에 다시 살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이르시되 본문 6장 53절로 55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 이런 말씀으로 계속하여 이 성찬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만나가 육신에 유익해서 사는 날 동안에 양식이 되었다면, 주께서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몸인 이 떡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이 육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그의 생명을 넣어 두었다가 우리 육신의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게 되는 생명의 능력이 오늘 저희에게 베푸신 이 떡에 담겨있음을 헤아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의 성찬에 참여하면서 이 떡에 대하여 이 잔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하여 열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 비중을 더 두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떡을 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는 강한 인상을 받지 아니하였고, 주님의 하시는 말씀들 가운데서 우리와는 달리 생명에 관하여 큰 인상을 받았었더라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육신이 끝나는 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려 주심에 따라서 우리가 이대로 나이 들어 혹은 병들어 사고로 죽을 것 같으나 죽는 것으로서 끝나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의 시작은 바로 그때부터로구나 하신 이 주님의 말씀에 더 관심을 두었더라 그것입니다.
이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죽음에 관하여 강한 집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제자들이 성찬이 끝난 다음 숙연해 있지 아니하고 슬퍼하고만 있지 아니하고 엄숙해지기 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의 말씀과 함께 성찬에 참여한 다음에는 흔쾌하여 산으로 오르면서 그것도 어느 산이냐? 승천하실 주님의 감람산으로 오르면서 찬미를 하면서 갔다 라고 소개되어 있는 것을 저희가 보면서,
참으로 우리는 성찬에 담겨있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하여 강했다면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성찬에 담겨있는 죽음의 의미보다는 삶에 더 강하지 않았는가? 생명과 영생에 더 강하지 않았는가? 이 두 가지 부분이 다 의미가 있습니다마는 제자들은 찬미했고 우리는 숙연해진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강했고 우리 죄사함 받는 일에 강했고 이 제자들은 생명에 강했기에 찬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는 결론을 충분히 얻어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이 받으실 이 떡과 잔, 성경에 소개된 바 제자들이 받았던 그 떡과 잔이 과연 그리스도 예수의 몸일 수가 있는가? 피 일수가 있겠는가? 주님께서는 분명히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시라 그리하면 그 안에 생명이 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시라 했는데 과연 주께서 그 살을 주실 수 있었으며 그 피를 주실 수 있었겠느냐 그것입니다. 주신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또한 먹을 수가 있었겠느냐 그겁니다.
아주 의문스러운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뿐 아니라 당시에 유대인들도 주님의 이 말씀에 대하여 상당히 논란이 많았음을 오늘 본문 6장 52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하였고 또한 이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아니한, 그래도 주님을 따른다 라고 하는 제자의 무리에 속했던 사람들도 60절에 보니 제자 중 여러 사람도 거의 대부분 "이 말씀은 어렵도다" 하면서 주님의 곁을 떠나고 말았던 사실을 성경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린바 있는 성찬 후 저들은 주께로부터 어떤 인상을 받았기에 또 그 성찬의 의미가 무엇인줄로 알았기에 찬미하면서 감람산으로 올라갔던가? 그때 감람산으로 올라가며 찬미했다 라고 하는데 그 현장의 그 모습을 더 생생하게 확인하기 위해서 성경 마태복음 26장으로 한번 찾아가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6절 이하를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6절 이하 30절까지 봉독합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찬미할 수 있었던 바로 그 직전까지의 성만찬의 분위기는 어떠했느냐? 주께서 물론 유월절 절기에 준비된 많은 음식들이 놓여있는 상에 둘러앉았습니다. 제자들도 같이 둘러앉았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 상 위에 놓여진 모든 떡에 축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잔에 대하여 축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모든 떡이 주님의 살이 될 수 있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잔이 주님의 피가 될 수 있다 라고 하지 아니하셨다 그것입니다.
26절에 나타난 대로 "저희가 먹을 때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먹으려고 하던 때도 아니고, 그리고 먹기 전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라고 했으니 이것은 다른 말로 풀이해서 말씀드린다면 "식사 도중에"라는 뜻입니다. 보통 식사 기도를 할 때에는 먹으려고 할 때에 라고 하겠지요. 또 먹기 전에 기도했다 라고 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즉 식사 중에 떡을 하나 가지셨습니다. 떡을 가지고 그 떡에 대하여 축사하십니다. 많은 떡들 가운데 떡 하나를 주님께서 취하시더니 그 떡에 대하여 축사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라" 또 잔 하나를 취하시더니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붓는 새 언약의 내 피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신 다음 "이것을 먹으라"라고 하면서 그 축사된 떡을 떼어준 것이지 축사되지 아니한 아무 것이나 오늘 저녁 음식은 다 내 살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먹으라" 이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축사된 이것을 먹으라, 축사된 이 잔을 마시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희가 모여서 음식을 먹을 때에, 즉 식사하는 도중에 주님께서 "잠깐, 잠깐" 하시더니 떡을 하나 가지사 "이 떡은" "이 떡들은"이 아닙니다. 이 상 위에 있는 모든 음식 그런 것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가지시고 "이 떡은(분명히 지적했습니다) 너희를 위하는 내 몸,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붓는 내 피"라고 말씀하시더니, 그 다음에 "드시오 드시오, 먹으시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떡을 떼어준 것입니다. "이 떡을 너희 안에 들게 하라. 이 잔을 마셔서 너희 안에 이 잔이 들게 하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주께서 많은 떡 중에 떡을 하나 가지사 축사하시고 이 떡을 굳이 먹으라고 하면서 그 떡을 떼어서 나누어준 것이지 아무 떡이나 같이 먹으라고 하신 것이 아닐진데, 과연 주께서 축사하신 바 그 축사된 떡은 어떤 효력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안에 생명이 있으려면, 그 누구의 생명입니까? 예수 당신의 생명입니다. 너희 안에 내 생명이 있으려면 내 살을 먹으라 라고 했습니다. 내 피를 마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어찌 자기 살을 우리에게 줄 수 있으며, 주신들 우리가 어떻게 먹고 마시겠느냐?" 이런 의문이 그때도 있었고 우리에게도 있었지만,
주께서 이 일에 대하여 한 떡을 가지사 축사할 때에 "이 떡은 내 몸, 이 잔은 내 피"라고 말씀을 그 떡과 잔에다가 부여하시고 그리고서 이 떡을 떼어주시면서 "이것을 먹으라" 다른 여러 가지가 있지만 말고 "이것을 먹으라. 이것은 내 생명이니라"라고 말씀하셨으나 과연 축사하게 되면 떡이 다음 순간 어떻게 변하는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가?
고린도전서 10장으로 가셔서 참고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6절 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혹 여러분께서 성경을 읽으시다가, 이 본문같은 본문을 읽으시다가 이쯤 읽었는데 전화가 따르릉 온다든지 아니면 또 대문에서 벨이 울린다든지 아니면 갑자기 아이가 무엇을 깨뜨리는 소리가 난다든지 해 가지고 여기까지만 읽다가 그쳐버리면 무슨 뜻이냐?
다시 읽어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이 잔은" 지금 우리가 축사하고 축복하여 여러분에게 드릴텐데 이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라고 했으니 아닌 줄로 알기 쉽습니다마는 이 문장은 끝까지 읽어야 됩니다. 아니며 또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문장의 배열상 부정을 부정하면 무엇이 되지요? 긍정이 되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축복하여 축사받아 먹는 이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그 축사된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라고 했으니 축사된 떡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뜻이지요. 이해가 되시면 아멘 합시다.
또 축사된 잔은 그리스도의 피라는 뜻이지요. 아닌 것이 아니라 기라는 뜻이지요. 이것이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고 하니까 어떤 분들은 쉽게 생각하기를 편하게 사시는 분들이 있어요. "아 그러면 긍정의 긍정은 부정이겠네요" 이렇게 합니다. 긍정의 긍정은 강한 긍정입니다. 그러나 부정의 부정은 긍정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고린도전서 10장 16절의 말씀을 보면, 주의 이름으로 축사하고 축복된 그 떡은 먹게 되면 바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되는 것이요 또 축사하여 축복한 그 잔을 마시게 되면 우리의 그리스도의 잔에 참예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고 무엇이뇨. 누가 가르친 것입니까? 사도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내가 주께 받은 성찬은 이런 것이니" 하고 가르쳐주신 그 내용 중에 들어있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어떤 물질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한다 하더라도 그 부여된 의미가 중요한 것이지 그 본래의 물질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모세를 하나님께서 부르실 적에 "네 손에 무엇이 있느냐?" "예. 마른 막대기 하나밖에 없나이다" "그러냐. 그러면 내가 지금부터 내가 지금부터 네 그 막대기에 내가 함께 있어서 나의 행할 바 모든 능력을 그 막대기로서 나타나게 하겠느니, 그 지팡이는 네가 지금 이전까지 들고 다니던 그런 막대기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너를 인도하는바 지팡이가 될 것이니 그 지팡이를 들고 홍해에서 치켜들면 홍해가 갈라질 것이요 반석을 치면 거기에서 물이 나게 될 것이다." 하시더니 그야말로 그 지팡이는 보통 지팡이가 아니라 홍해를 갈랐으니 전에 모세가 가졌던 그 나무 막대기가 가른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 지팡이에 부여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했던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했던 것이지요. 말씀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제는 그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라고 하는 그 말씀이 부여됨으로 말미암아 보통 지팡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이 그 지팡이에 있었으니 중요한 것은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저 마라라고 하는 쓴 물의 샘을 이스라엘이 만났을 적에 하나님께서는 또한 모세를 통하여 한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그 쓴 샘에다가 던져 넣으라 라고 해서 던져 넣었더니 모든 쓴 기운이 없어지고 나무가 감당하고 단물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 마셨던 것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때 모세가 꺾어 넣었던 나무 종류가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신풍나무 입니까? 아카시아나무 입니까? 소나무 입니까? 어떤 나무겠습니까?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무의 종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그 나무를 찾아 가지고 지금도 찾아서 무슨 소독하는데 사용하면 참 좋겠지요.
그러나 그때 주님께서 꺾으라고 해서 꺾은 그 나뭇가지 그 나뭇가지가 어떤 일을 할 것이라고 했던 그의 그 부여된 말씀이 그 나무 그 일 할 때까지만 역사 했던 것이지 그것이 끝난 후에도 그 나뭇가지 꺾어다가 아무 데나 사용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무 종류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나뭇가지에 부여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곧 생명으로서 역사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서, 주께서 한 떡을 취하사 이 떡은 너희를 위하여 떼어주는 내 몸이라고 말씀했으면 이제는 떡이 중요합니까, 그리스도의 몸 된 것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의 효력이 그 말씀과 함께 얹혀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잔을 드시고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붓는 내 피니라"고 했으면 그 잔에 맹물이 들면 어떻습니까? 포도주가 들면 어떻습니까? 아니면 다른 또 술이 들었으면 어떻습니까? 술의 종류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포도주 몇도짜리냐, 포도즙이냐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게 다 중요한 줄 알고 포도즙을 먹어야 된다고 하는데 성경에는 포도주라고 썼는데 또 어떤 분들은 사람이 술을 먹어서 되느냐?
그래서 포도즙이라고 일부러 글자까지 바꾸어가면서 읽으면서 '즙'이 중요하냐 '주'가 중요하냐 이런 얘기들을 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것 위에 얹혀진 주의 말씀에 생명이 있는 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 그 안에 있는 뜻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지, 눈으로 보여지는 것 입으로 씹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라는 바로 그것이지요.
따라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한 번 따라합시다.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성찬을 베푸시면서 하신 말씀, 그리고 그 성찬의 의미와 큰 목적은 어디 있었느냐?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이 제자들은 압니다. 주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서부터 죽음의 길을 따라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죽고 살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가지 마소서 죽지 마소서 그리 마소서 막 매달렸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자는 작정된 대로 간다 라고 하면서 주님은 가시는 길로 갔습니다.
이 성만찬을 베푸시고 하시는 말씀이 "이것이야말로 만찬이로다. 오늘밤 이 만찬이 끝나면 다시금 나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실 수 없을 것이니라. 이 세상 땅에서 나온 곡식으로서 나는 음식을 먹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죽고 너희는 살 것이로되" 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성찬을 베푸셨으니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제자들은 주께서 이 식사 같이 하고 나면 죽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살 방법이 달리 없다는 것을 이제 다 알았습니다. 분위기가 그쯤 갔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 "이 떡은 내 몸이니 네가 네 속에 먹어 있게 하라. 이 떡에 내 생명이 있느니라."
그러면 예수님의 생명이 떡에 부여되었다면 떡이 가 있는 곳에 주님의 생명이 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참 뜻은 무엇이냐? 당신의 몸을, 당신의 몸을 이 떡에 부여해서 축사하신 후에 이 떡을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의 몸 속에 넣어두기를 원했다 그것입니다.
"너희가 먹게되면 내가 너희 안에 있게 되느니라. 내가 너희 안에 들어가 있게 되면 너희는 결국 또 내 안에 있게 되는 이런 관계가 되느니라." 주님의 이 말씀은 아주 심각합니다. 왜 심각합니까? "나는 조금 있으면 죽게 돼. 내가 죽게 되더라도 내 육신이 죽을 뿐 내 생명은 죽을 수가 없으니 나를 따르는 진리 아는 너희들, 나를 믿는 너희 속에 내 생명을 저축해 놓고 싶구나. 보관시켜두고 싶구나. 너희가 받겠느냐?"
그러시면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또한 요한복음 3장 14절에 말씀하셨던 그대로 "내가 십자가에 들리는 것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던 것같이 내가 들리는 것이지 다른 강도들이 죽는 것과 같지 않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들었던 뱀은 무엇입니까? 불뱀입니다. 굉장히 능력 있는 불뱀입니다. 사람들을 불고 쏘면 당장 죽게되는 그런 불뱀입니다. 이런 불뱀을 잡아다가 장대 끝에 올렸는데 모세가 올릴 때에 불뱀을 올렸습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의 보기에는 불뱀입니다. 그러나 불뱀이 아니라 놋으로 만든 놋뱀 불뱀이었던 것을 인정하시길 바랍니다.
놋뱀을 올렸으니 놋뱀 속에 불뱀의 생명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생명은 불뱀 안에 있습니다. 모세가 장대 끝에 매달았던 그 바로 불뱀은 생명을 가진 뱀이 아니라 놋으로 만든 껍데기요 육체적인 모양만 있었지 생명은 거기 있지 않았다 그것입니다. 생명은 십자가에 올라가지 않았다 그겁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를 위하여 죽었던 것이지 그의 생명은 죽은 적이 없었던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의 생명이 어디에 들어가 있었느냐? 몸이 죽기 전에 "이것은 내 살이라. 내 생명이 너희 안에 있도다" 이렇게 된 것은 어떤 관계가 되느냐? "내가 너희 안에 있게 되었느니라"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떡과 포도주가 들어온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축사된 주의 말씀 속에 있는 주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다면 주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어야 할 줄 믿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또한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지만 그러나 죽지 아니하고 산 것은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저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 위에 올라갔지만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하나님이 쥐고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의 생명을 가지고 계신 한은 그 몸이 죽었어도 하나님이 살리고자 하는 날에 다시 살린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어서 내가 죽었지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 것인것처럼,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게 되면 너희는 나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요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제 내일 모래면 너희 눈앞에 나의 죽는 모습이 십자가에 달릴 것이나, 생명이 죽은 것이 아니라 내 몸이 죽게 되는 것이니라.
마치 광야에서 모세가 놋뱀을 불뱀처럼 매달았던 것처럼, 생명 없는 놋만 매달았던 것처럼 내 몸은 너희를 위하여 죽게 되나 생명은 믿음을 가진 너희 안에서 살겠느니라. 내 생명을 너희가 갖고 있어서 너희가 전도하게 되면 너희의 전도를 받는 사람이 너희의 생명을 받아서 전도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는 내 생명이 그에게 옮겨져가서 거듭나게 되는 것을 믿을지니라 이것이 주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요한복음 6장 56절로 57절 말씀하시더니 또 이어서 58절에는 "이 축사된 떡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이 축사된 떡은 하늘로서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주신 그런 떡이니 먹고도 죽은 만나와 같지 아니하여 너희는 마지막 날에 영원히 살리라. 이에 제자들은" 그랬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찬미하며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감람산으로 찬미하면서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찬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만찬이 끝나면 주님께서 죽으시는데 주님께서 어쩔 수 없어 죽이는 자들에 의해서 죽을지라도 광야에 불뱀이 아닌 놋뱀같이 죽게될 것이며 주님의 생명은 그의 피와 함께 그의 몸과 함께 주님 죽기 전에 내 몸에 들게 해 주셨으니 내 안에 보호하겠노라. 내가 믿음으로 내 안에 보호한 주의 생명이 주님이 필요한 때에 다시 부활하실 수 있도록 주의 생명이 내 안에 드시겠다 하시니 주여 오시옵소서."
받은 후에는 "주여 염려 마시옵소서 죽으실 지라도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믿음 안에 있나이다. 주님의 생명이 내 속에 있나이다. 난 분명히 먹었고 내가 영접하였나이다. 그리고 이 생명 이 피를 놓치지 않겠사오니 주여 염려 마시옵소서. 살아계신 주여 죽으시지만 주님은 우리 안에서 사셨나이다. 그리고 영원히 사실 것이니이다."
이렇게 하여 제자들은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올라갔다 하였으니, 그들의 그 태도가 수찬자로서의 잘못된 태도냐? 아니요. 그들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죽음에 비중을 두었던 것이 아니라 삶에 비중을 두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그 일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 안에 생명 있을 적에 들어와서 그 생명으로 계시며 내가 예수를 모셨으므로 예수님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고 살 것이며 그리고 예수를 모시면 우리의 마지막 날에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 같이 살리실 것이라는 여기에 더 비중을 두었었던 것이니,
그리스도의 성찬을 맞을 때마다 숙연해지고 엄숙해지고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는 그런 일도 그 성찬에 의미가 있으니 옳은 일이라고도 하겠습니다마는, 그러나 제자들이 성찬 후에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주여, 내일 이후 죽으시지만 주님은 진정 죽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주님이 살아계셔서 들어와 계시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가 없습니다 주여" 하고서 감람산으로 갔던 것처럼 제자들은 생명에 관심을 더 두었고 영생에 관심을 더 두었을 그 차이었던 것을 인정하시고, 오늘 성찬은 제자들과 같은 감격을 하면서 받아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이후에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하여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죽하면 고린도전서 11장 26절에는 "너희가 이 떡을 먹고 마시는 일을 내가 다시 오는 날까지 할 것인데 너희가 이 떡을 먹고 마실 때에 주의 죽으심을 주 오실 때까지 기념하는 것이라"라고 바울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가르쳐주니까 이 구절만 받고서 "아하 우리가 성찬을 받을 때에는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구나." 그래서 우리는 좀 심각해야 되고 그날은 밝은 옷도 입어서는 안 되고 그리고 아주 엄숙해야 되지 내가 엄숙한 마음이 생기지 아니하면 "아이고 남이 보면 어떻게 할까?" 이렇게 신경을 쓸 만큼 된 것 같은데 여러분, 바울이 이 말한 참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라 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 여쭈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만큼 그 죽은 것을 기억하기 힘든 경우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 라는 것을 특별히 날 만들어서 특별한 행위를 하면서 일부러 기억을 시키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할 방법이 없습니다.
왜 입니까? 다른 이는 한 번 죽으면 다시 안 돌아오기 때문에 다시 안 나타나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살아 계셔서 옛날 그때처럼 죽은 자를 살리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성령 안에서 살아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을 경험했으면 아멘 합시다.
그러기에 살아있는 분을 보고 죽었다는 것을 어떻게 기억하겠습니까? 다른 이는 죽었다면 흔적을 남깁니다. 유골이라고 남지요. 예수님은 유골은커녕 머리카락 하나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때 당시에 있었던 사람들은 죽었었노라 라고는 하겠지만 10년 20년 지난 사람이 어떻게 주님의 죽으심을 인정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죽으심은 아무도 믿기가 곤란할 정도로 흔적도 없었으니 그러나 너희를 위하여 죽었던 것은 사실이니 이 사실을 기념하라 했습니다. 기념은 어떤 경우에 하는 겁니까?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라서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사모하라, 추모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잊어버릴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기념을 하라는 겁니다. 성찬할 때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일부러 기념하지 않고서는 잊어버릴 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었던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잠시 후에 여러분께서는 그때 당시에 주께서 축사하신 축사를 이 떡이 받게 되고 이 잔이 받게 되면, 그 축사하고 축복된 떡과 잔을 여러분이 받게 될 것인데 떡도 중요하고 포도주도 중요합니다마는 더 중요한 것은 축사된 주의 말씀 안에 있는 그의 생명이 여러분 속에 들어와서 좌정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생명이 들어오고 예수의 생명이 들어왔더니 내가 죽는 날 다시 살게될 것이고 예수님은 죽으나 사나 내 안에서 지금도 살아 계시고 영원히 살아 계시게 되는 이 놀라운 일을 오늘 우리가 하게 되며, 전에 죽으셨던 것을 우리는 오히려 전파하면서 그러나 지금은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수찬에 이 성찬에 참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찬송을 부르시겠습니다. 468장 찬송 1절, 2절 부르시는 동안에 분병 분잔 위원들은 위치에 자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임하여 교통하시며 역사 하심이, 주의 성찬을 받으며 그때 그 제자들처럼 주의 말씀 깨닫고 그 제자같은 심정으로 이 성찬에 참여한 모든 성도께 이제로부터 주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의 육신이 다하고 다시 살리심을 입은 그 순간까지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 아멘 -
제목: 줄기에서 나온 싹 나사렛 예수
본문: 이사야 11:1-5
인용: 요한복음 1:45-51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오늘 사순절 시리즈로 네 번째가 되고 오늘 부활주일 메시지로서「줄기에서 나온 싹 나사렛 예수」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인용된 성경은 요한복음1장 45절로 51절에 있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이는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하고 요한복음 1장 45절에서 대화를 시작합니다. 이에 빌립의 말을 들었던 나다나엘은 46절에서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나사렛은 거룩한 예루살렘도 아니요 또한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탄생하기로 예언되어 있었던 베들레헴도 아닌, 그야말로 상업의 도시요 환락의 도시요 죄가 많고 허물 많기로 유명해서 종교적으로 특히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나타낼 만한 자랑할 만한 도시가 아니고 오히려 부끄러운 그런 저질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의 대답이 나사렛같은 곳에서는 의로운 자가 나실 수가 없다 라는 뜻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라고 했던 겁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살펴보면 여러 선지자의 글을 빌립도 나다나엘도 읽기는 많이 읽었던 모양이지만, 오늘 본문으로 채택된 이사야서 11장 1절 이하에 있는 글에 대하여서는 읽기는 읽었어도 참뜻은 아마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가지가 나서 결실할 자라 라고 1절에 설명하고 있고, 그 2절부터는 그러한 자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설명했는데 그러한 자는 곧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 바쁘게 그저 읽어가시면 무심코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마는 글은 글대로 읽을 수 있으나 이 글은 현실에 맞지 않습니다. 나무에 맞지 않다 그것입니다. 싹이 씨앗이나 뿌리에서 나와야지 줄기에서 싹 나오는 것 봤습니까? 그런 꽃나무도 없고 그런 어떤 과일 나무도 없습니다. 싹은 그 씨앗이나 혹은 뿌리에서 처음 싹이 나오는 것이지 다 자란 나무, 줄기에서 싹이 바로 나는 법은 없는 것이지요.
또 가지라면 줄기에서 나무 둥치에서 가지가 나와야지 어찌 뿌리에서 가지가 바로 나오는 그런 나무가 있습니까? 뿌리에서 땅을 뚫고 나오는 것을 혹은 새싹, 혹은 새순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 가지가 바로 나올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러한 세상의 창조된 여러 수목 가운데서 이런 일은 결코 없는데 그러나 선지자들의 글로 이러한 자가 탄생할 것이니 그는 곧 하나님의 아들일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글을 그냥 읽으면서 대강 넘어가 버렸으면 모를 것이로되 이 상식적이지 아니한, 다시 말씀드려서 줄기에서 싹이 나며 그리고 뿌리에서 바로 가지가 나버릴 사람, 그와 같이 나타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 예언을 따지지 않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 혹은 깨닫지 못하고 넘어갔기 때문에 나다나엘이 말하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지금 나사렛에 오셔서 소개되는 이 분은 이미 나이 삼십이 되셔서 나타났습니다. 이 때에 등장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싹으로 난 것도 아니고 가지로 바로 나오게 된 것이지요.
이 상식적이지 않는 이 특별난 사람은 오늘 본문의 이사야서 11장 2절로 5절 사이에 살펴보면 그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모든 지혜와 총명의 신이 그에게 임하였고 공의로 판단하시는 그야말로 우리의 주님인 것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여러 선지자들이 말한 사람이지요.
나다나엘이 이 이사야의 글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나이 삼십 되어 불쑥 나타난 이 사람이 바로 그이인 줄 알았어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로서 나타나지 아니하고 출생으로 나타나지 아니하고 삼십 되어 나타난 이 사람이 바로 그인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 줄기에서 날 수 있다 라고 하는 싹, 줄기에서 싹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줄기에서 혹은 순은 나올 수 있겠습니다마는 줄기에서 싹 나려고 한다면 그 줄기는 어떤 상태여야 합니까? 깨끗한 줄기는 싹을 낼 수가 없습니다. 상처가 나고 그리고 썩어야지만 씨가 발아하게 되고 그리고 싹이 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줄기라고 하는 바로 그 대상은 즉 이 새싹을 발아시킬 수 있는 이 줄기라고 하는 이것은, 비록 산 나무에 붙어있는 한 부분이기는 하더라도 싹을 낼 수 있는 줄기였다면 썩고 그리고 상처 나고 이러한 상태가 아니면 가능치 않았으므로,
이 빌립이나 나다나엘이 이 이사야의 글을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오히려 나사렛같은 데서 싹이신 예수님이 나타나야 되는 것이다 라는 것을 바로 알았을 것이고 "그렇도다. 이곳이 나사렛이기 때문에 허물 많고 죄 많은 도시이기 때문에 바로 이런 곳에 주 예수의 싹이 움틀 수가 있었다." 이렇게 했어야 되는 것이지요.
참고적으로 신학적인 내용 하나 말씀을 드리면 신약시대 제자들이나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구약을 많이 인용을 했습니다. 그 때 구약이 창세기 출애굽기 혹은 몇 장 몇 절이 표시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냥 말씀하시기를 "시편에" 또 "선지자의 글에" 이런 식으로 하시면서 그 신약에서 구약 때의 글을 많이 인용한 것이 있습니다.
그 인용된 것은 우리 신약을 읽어가다 보면 난을 한 단 내려 가지고 쓴 것은 다 구약에 이미 기록이 되어 있는 선지자의 글을 사용했다 라는 뜻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 사용된 제자들이 인용을 했거나 예수님께서 시편에 혹은 선지자의 글에 라고 하면서 구약에 있었던 그 글 내용을 인용한 경우는 반드시 다 있습니다. 구약에 없는 게 없습니다. 반드시 있어야지만 신구약이 맞아떨어집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장 23절에 보면 예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함이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억되시면 아멘 합시다. 그렇습니다. 예수가 애굽으로 피신하였다가 헤롯이 죽은 후에 나사렛 동네에 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이미 구약에 이런 말씀이 있다는 겁니다.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함이러라"라고 했는데 구약 전체를 찾아보아도 이 글만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글만은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모든 신약에 인용된 것을 다 찾아서 구약에 찾았지만 이것이 나오지 않아서 제가 글을 잘못 읽거나 정독을 못해서 그런가 보다 해서 제가 신학교에서 강의하면서 여러 신학생들에게 숙제를 주었습니다. 이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이 말씀을 구약에서 찾아내면 몇 장 몇 절이라는 것만 찾아내면 그냥 무조건 이 학기는 패스시켜준다 해서 아마 여러분 중에서도 그런 숙제를 받아 보신 분이 계실텐데 아무도 이 말만은 찾아오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참 선지자들이 분명히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라고 했는데 왜 없을까 고민 고민하던 중에 제가 이스라엘에 갔을 적에 참 힘들게 갔지만 그 동네에 가서 나사렛 동네를 방문하면서 이것이 구약 어디에 있다 라는 것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그냥 경비도 들고 고생도 스러웠지만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나사렛이라는 의미가 어떤 의미이냐 하면 "줄기에서 난 싹"이 나사렛이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나사렛 동네는 이사야 11장 1절의 말씀이 이루어진 이름이 동네 이름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도 좀 뜻으로 이름을 짓습니다마는 저쪽 지방으로 가면 이런 이름이 있지요. 영화 제목으로도 기억하실겁니다마는 "늑대와 춤을", 저는 늑대와 춤을 해서 늑대와 춤을 추는 것인 줄 알았더니 사람 이름이 "늑대와 춤을" 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사람 이름이 늑대와 춤을 인가 했더니, 늑대와 춤을 잠시 춘 그런 사람이라서 그것을 쳐다보았기 때문에 늑대와 춤 춘 사람이라고 해서 이름을 그냥 "늑대와 춤을" 이렇게 지은 것이지요. 그런 식으로 이름을 짓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이 나사렛이란 이 단어는 어떤 뜻을 가졌느냐? 줄기에서 나온 싹, 그러니까 정상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줄기에서 나온 싹, 뿌리에서 나온 가지, 바로 이 뜻으로 나사렛이라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라고 본다면 신약에서 사용한 모든 말씀들이 구약에 다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저는 그때 참 만족스러웠던 그런 일이 있습니다. 저희와 같이 동행했던 분도 있습니다마는 그때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모릅니다.
이 나사렛 사람 예수는 그 나사렛이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대로 부활의 새 싹이 되셨으며, 뿌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줄기에서 나오셨다는 겁니다. 나사렛 동네에서 출생한 것이 아니라 딴 데서 출생해서 어른이 다 되어 바로 능력이 나타날 때 능력의 꽃으로 그냥 나타났다 그겁니다. 그러면 능력의 꽃으로 나타나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 나타나야 할 곳이 썩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나타나야 하셨던 곳은 능력이 필요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이 생각했던 것처럼 나사렛이란 동네는 의로운 자가 태어나거나 의로운 자가 여기에 거할 수 없는 곳이라고 자기는 생각했지만, 성경은 미리 말하기를 의로운 자는 어디에서 나타나느냐? 의롭지 못한 곳에 싹으로 나타나서 의롭지 못한 곳을 의롭게 만들기 위해서 구원을 위하여 나타나신다고 예언되어 있었다 그것입니다. 이 나다나엘은 그 사실을 잘 몰랐던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야말로 나이 한 살로 무균상태인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나오신 게 아닙니다. 어머니 태에서부터 출생한 것은 저 베들레헴이었고 지금 나사렛은 삼십이 되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줄기에서 싹이 나오는 것처럼 나와 버렸고 뿌리에서 순이 아니라 바로 가지가 나오듯 예수님이 이 나사렛에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고 부활의 싹이 되어 나타나신 그 현장은 어떠했느냐? 무균질의 어머니의 태와 같지도 아니했고 한 살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어디에서 부활하셨느냐? 썩어 냄새나는 무덤에서 부활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의 죄악이 극에 도달했고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마저도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이런 굉장한 어둡고 두렵고 슬프고 정말 외롭고 그리고 절망이 가득찬 그러한 곳, 어떠한 곳이냐? 바로 냄새나는 나다나엘이 생각하는 것처럼 더러운 곳 허물 많은 곳 그래서 이러한 곳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날 수가 없다 라고 했지만 성경은 미리 말씀하시기를 그러한 곳이기에 찾아가서 싹으로 나타나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난 것입니다. 아니 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나사렛이었기 때문에 의로우신 이가 그곳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 썩은 곳에 새싹으로 나셨던 것입니다. 그 썩은 곳이 새싹을 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국에 이민을 간 어느 목사님 가정의 얘긴데 오늘 칼럼 난에도 실었습니다마는 이사를 가 보니까 뒤뜰 한 쪽에는 라일락꽃이 피어있고 아마 지금쯤 되는 모양입니다. 라일락꽃이 피어 있는데 그 반대켠에는 무엇을 하던 다음에 그렇게 버려두었는지는 모르지만 땅이 거무스레하고 오물 모아두었던 곳처럼 생겨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이사를 대략 마치고서 그 거무스레한 그곳에다가 부서진 의자같은 것을 오히려 갖다 놓았던 것 같습니다.
이제 피곤한 사람들이 새 이삿집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그 뒤뜰 라일락 향기가 집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그 뒤뜰로 나가보았더니, 라일락은 참 좋은데 거무스레한 곳에다가 부셔진 의자 조각도 몇 개 던져 놓았더니 이웃에 사는 사람이 새벽 일찍부터 자기 집에 있는 쓰레기를 잔뜩 갖다가 그 거무스레한 뒤뜰에다 쌓아두었습니다.
아주 기분이 좀 나빴습니다. 그래서 "이것 참 왜 이런가" 했더니 그 뒷날에도 또한 쓰레기를 거기다 갖다놓습니다. 자기집 쓰레기도 아닌데 이웃 사람들이 이사온 자기집 뒤뜰에다 갖다버리니 "이것 정말 내가 소수 민족으로서 이사를 왔기 때문에 이 백인들이 나를 무시하는가"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것을 본 그 목사님의 아들이 그 아들은 영어도 잘하고 그랬던 모양인데 "내가 좀 따져야 되겠다. 미국에서는 이럴 수가 없다."라고 하면서 그 옆집으로 가서 막 따지려고 성을 내어 가지고 이제 뛰쳐나가려고 하는데 그 사모님이 지혜로운 제안을 했습니다.
"아들아, 오늘 당장 가서 따지지 말고 내일 아침에는 이렇게 해 보렴. 뒤뜰에 일찍 나가서 옆집 사람이 쓰레기를 가져오기 전에 옆에 있는 라일락을 꺾어다가 그 쓰레기 위에다가, 그 사람이 갖다 놓은 쓰레기 위에다가 갖다 놓아보렴." 이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어머니의 말씀이 뜻이 있다 싶어서 이 깨끗한 라일락을 갖다 놓지 하고서 꺾어 가지고 이제 그 쓰레기 무더기 위에다가 갖다 놓았습니다. 다음날 나가보았더니 옆집에서 라일락이고 뭐고 그 위에 상관없이 또 오물을 갖다 쌓아 두었습니다. 그래서 또 따지려 가겠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하는 말이,
"라일락의 향기가 아직 부족했던 모양이구나. 오늘은 또 더 싱싱한 라일락 향이 발하는 라일락을 갖다가 놓아두어 보렴." 해서 이틀 삼일 계속해서 라일락을 갖다 놓았더니, 그 옆집에서 쓰레기를 갖고 오던 사람이 자기도 그저 미안했던지 꽃 위에 쓰레기를 자꾸 덮을 수가 없고 또 갖다 덮으면 또 그 위에 꽃이 있고 꽃이 있고 하니까 그 사람이 그 깨끗한 꽃을 더 이상 덮을 수가 없어서 그저 그 뒤부터는 갖고 오지 않았다 라는 이런 얘기를 우리가 듣고 있습니다.
어쩌면 참 가슴 뭉클하게 하는 그런 말씀인데, 우리는 그동안 사순절 메시지를 통해서 연한 순으로 오셨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 이사온 이민 목사의 옆집 아주머니처럼 피해를 주어도 연한 순이신 주님께서는 따지지 않았습니다.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거리에 들리게도 하지 않았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어야 되는데 꺾지 않으시려고 꺼져가는 등불을 꺼버리고 새 등을 준비해야 되는데 그 불을 끄지 않으시려고, 참으로 우범지역에 가 있는 딸을 찾아내기 위해서 딸 대신 자기의 사진을 곳곳에 갖다 걸어서 모든 창피를 딸 대신 자기가 감당했던 이 브라질의 한 여인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의로운 성스러운 도시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런 분은 이런 곳에 오실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나사렛같은 동네에 나타나서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어머니의 태에서 바로 부활해 나오신 것도 아니고 깨끗한 어떤 병원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무덤과 절망과 죄악이 활개를 치는 그런 곳에서 부활해 나와 주셨습니다. 어리게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 줄기에서 싹이 나왔습니다. 어떤 줄기에서 나왔느냐? 가장 험하고 허물 많고 죄스러운 그런 줄기였기 때문에 싹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나사렛을 보고 이런 내 동네에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하고 나다나엘같은 생각을 하십니까? 이제 생각을 바꾸십시오. 여러분의 몸을 보니 나사렛 같습니까? 여러분의 경제적 구조를 보니 나사렛 같습니까? 여러분 주위의 모든 환경을 보니 나사렛 같습니까?
자녀가 나사렛 같습니까? 남편이 나사렛 같습니까? 아내가 나사렛 같습니까? 썩어가고 있습니까? 무너져가고 있습니까? 거룩하다 일컬어지는 예루살렘이기는커녕 미리부터 예언되었던 베들레헴이기는커녕 나다나엘이 생각했던 것처럼 이렇게 추한 곳에 의로운 이가 난다니 그 말이 되느냐 했던 것처럼 여러분의 현장이 나사렛 같습니까?
전에는 믿음이 좋았으나 지금 여러분의 줄기 가운데 토막은 오히려 시험에 들고 있습니까 유혹을 받아 있습니까? 전에는 충성하였으나 지금은 충성하지 못하고 전에는 겸손하였으나 지금은 교만하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의 지금 그 마디가 여러분의 그 줄기가 처음에는 좋았으나 지금은 바로 나사렛처럼 되어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나사렛처럼 되어 있는 그 동네를 여러분이 발견하면서 "무슨 선한 것이 이 내 동네에 나겠느냐?" 그리하지 마시옵소서. 오히려 여러분의 현장이 나사렛처럼 되어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현장에 나사렛이 있다면 그러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 나사렛이라는 현장이었기에 생명으로 싹이 되어 여러분의 그 현장에 발을 붙이고 피어나게 된 줄로 믿습니다.
나다나엘은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빌립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줄기에서 싹이 나며 뿌리에서 바로 가지가 난다 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 칭할 것이라는 그대로 나사렛이란 험하고 영적으로 희망없는 도시에서 나타나 주었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의 나사렛같은 이 현장에 부활의 주님께서 갑자기 가지가 되어 나타나고 썩어 있는 우리의 현장에 갑자기 한 싹이 되어 나타나 우리들의 위에 한 송이 백합화처럼,
그래서 오늘 저는 이 라일락을 바쳤는데 저 뒤에서 보니까 라일락만 있는 것 같아서 "이 라일락 중에서 백합화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제가 얘기하면서 제 사무실에 백합화가 있기에 "이것 좀 강대상에 놓아두었으면 좋겠다."라고 했더니 와서 가까이 보니까 이 라일락 사이에 백합이 다 피어 있습니다. 여러 꽃들 가운데 여러 백합이 피어있는데 저와 여러분 수많은 성도님들의 현장에 나사렛같은 형편이 있다면 오늘 이 이천년 부활의 생명의 새싹이 여러분의 나사렛에 피어나게 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피어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썩은 줄기에 싹이 나면 싹이 얼마 있다가 줄기가 썩었으니 그만 되겠지 여러분 생각하지만, 여러분 오물 위에다가 꽃을 갖다 두면 그리고 그 꽃이 계속 피게 된다면 어떻게 되느냐? 오물은 더이상 오물이 아닙니다. 꽃이 없으면 오물이지만 꽃을 피우는 오물은 오물이 아니라 거름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꽃을 위하여 꼭 필요한 거름이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줄기에서 난 싹, 줄기가 썩었으니 싹이 났다 하더라도 잠깐 났다가 쓰러지지 않겠는가 여러분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이사야서 11장 뒤에 10절에 가서 보면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그랬습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1절에는 줄기에서 한 싹이 나왔는데 줄기에서 싹이 나왔지만 그저 없어질 날아가버릴 그런 줄기에서 나온 싹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싹이 줄기에서 나서 피는 동안에 바로 그 날에 그 싹이 제 뿌리를 내린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새 싹이 되어 나사렛같은 여러분의 현장에 오늘 나타나셨다면 영접하고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후로는 썩어있는 여러분의 줄기가 아니라 그 예수의 새 싹의 새 뿌리가 뿌리를 여러분에게 내리게 된다면, 여러분의 나사렛 현장은 이제는 나사렛이 아니라 거룩한 예루살렘성과 같이 될 줄로 믿는 것입니다.
이천 이 부활절을 맞아 여러분을 축복하고자 합니다. 백성들로부터 죄인이라 취급받아서 백성 앞에 제대로 나서지도 못하던 세리장 삭개오, 그는 물질은 많이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그런 대상에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새싹 되신 주께서 "삭개오야 뽕나무에서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서 유하여야 하겠다." 하며 주님이 그 욕먹고 있는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서 한 송이 백합처럼 꽃으로 심기어지니 그 집이 얼마나 기쁨이 넘쳤던지 많은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오히려 그 집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데 "진정 아브라함의 자손은 여기 있도다." 말씀했으니,
여러분에게 물질이 혹 있을지라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 취급받고 인정을 받지 못하는 그런 분들이 계셨다면 이 이천년에 나타난 백합처럼 피어나신 주님의 이 새 싹을 여러분의 그 정말 험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그 줄기에 심어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된 순간에 어제의 삭개오가 아니라 오늘의 참으로 기쁘고 즐거운 영광스러운 삭개오가 되었던 것처럼 "예수님 오늘 부활의 새싹 되어 여러분의 그 현장에 있어서, 삭개오의 집처럼 삭개오의 즐거움처럼 그리고 삭개오의 그 권위가 위상이 높아졌던 것처럼 오늘 이후 주 예수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밤새워 그물을 던졌으나 잡은 것이 없는 제자, 그래서 빈 그물만을 씻고 있었는데 주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시며 그들 앞에서 지시하시니 나가서 다시 그물을 던지매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가 들었으나 찢어지지 아니하고 옆에 있는 동무의 배까지 불러서 그 고기를 담을 정도가 되었다는 말씀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낮이고 밤이고 남편뿐만 아니라 부인까지도 열심히 나가서 일을 하고 사업하고 또 여러 가지 이 재산을 키워보겠다고 하다가 큰 실패를 하고 제자처럼 빈 그물만 털고 씻고 있는 여러분의 형편이 되어 있습니까? 경제가 그렇게 어려움에 빠져있는 여러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그런 경제상황은 예루살렘도 아니요 베들레헴도 아니요 나사렛입니다. 썩어갑니다. 죽어갑니다. 내어놓을 수 없이 부끄럽습니다. 주님은 그런 현장에 싹으로 나타나신다는 겁니다. 그런 썩어가는 줄기에 싹으로 나타나신다는 겁니다.
오늘 부활의 주님을 여러분의 그런 썩어가는 그런 망해가는 현장에 한 송이 꽃이 되어 피도록 하시고 아멘으로 받아드려 붙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현장은 더이상 망해가는 현장이 아니라 새로워지는 놀라운 복이 이 이천 부활절에 여러분의 생업의 현장에 부요로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병들어 죽고 나흘이나 지나서 썩어 냄새나던 나사로 그 누이들이 실망하고 웁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나사로는 이미 무덤 속에 들어가서 냄새를 밖으로 풍겨냈습니다. 그 돌의 문을 열 수도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마는 갑자기 나타나신 주님, 뿌리에 가지처럼 나타나신 주님, 능력 있는 자가 되어 바로 나타나신 주님, 그가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시니 나사로는 순종하여 걸어나옵니다. 수족을 쌌던 것을 풀어 걸어다니게 하라 하여 그는 건강한 사람이 되어 걷습니다. 그 누이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육신이 병들고 쓰러져가고 있습니까? 전에는 팔팔하게 힘을 썼으나 힘을 쓰지 못하는 지체를 가졌습니까? 아니 피가 통하지 않아서 손발이 저리고 그리고 어쩌면 곪아들어가고 썩어들어가고 눈만 감으면 바로 냄새나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입장에 계신 분이 계십니까? 아니 계시겠지요. 계시기에 오늘 부활의 주님이 오늘 싹으로 소개되고 있지 않겠습니까.
나다나엘과 빌립은 이러한 곳에는 거룩하신 분이 안 오신다고 했지만 성경은 이미 말하기를 그러한 곳이기에 싹이 피어날 수 있다 라고 했으니, 병들어 죽고 나흘 지나 썩어 냄새가 나던 나사로의 집에 주님이 그 무덤 앞에 서시니 큰 기쁨이 그 집에 가득찼던 것처럼 여러분을 위하여 축복합니다.
오늘 부활하신 싹이 되신 주님의 그 부활의 생명으로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그 나사렛같은 현장에 오늘 주님이 서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 주님이 서신 것처럼 여러분의 그 썩어져가는 여러 환경 앞에 오늘 주님이 말씀과 함께 소개되어 섰습니다. 서신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주님이 섰다면 이제는 그 주님이 싹으로 나시더니 바로 11장 10절에 나타난 대로 그 날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그분이 떠나가지 아니하고 여러분이 붙들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면, 여러분의 땅은 오물이 아니라 쓰레기가 아니라 거무스레하던 여러분의 그 땅은 그를 꽃피우면 그를 피워낼 수 있는 거름밭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슬픈 자가 아니요 부활의 생명의 그 기쁨과 함께 그 기쁨이 오늘 우리 가운데 주의 말씀과 함께 소개되었으니 여러분의 나사렛 현장에 모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산업과 또 여러분의 앞날에 그리고 영원한 날에 있게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51 장 찬송합시다.
부활하신 주님의 새 싹이 여러분의 나사렛 현장 잘 나가다가 중간에 썩어져버리는 어쩌면 꺾여버릴 장래가 없어져버릴 그런 썩은 줄기에 새 싹이 났는데 그 싹을 찬양하며 거룩한 순서들로 믿음을 가지고 붙드시는 여러분, 여러분의 환영을 받으며 여러분에게 거하시게 되는 주님께서 그 날에 그의 뿌리를 내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의 뿌리가 내려지면 우리는 그의 나무에 속한 자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부활 축하를 위하여 헌금한 예물을 주께 봉헌하고 축복하는 순서를 갖겠습니다. 기도합시다.
기도
"이천년 어김없이 부활의 싹 된 소식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의 종을 통하여 성경에 많은 사건들과 말씀들을 통한 주님의 여러 모습 가운데, 오늘 썩어서야 만이 나올 수 있는 갑자기 줄기에서 나온 싹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에게 성령으로 소개케 해 주셨으니 그 주님이 우리의 현장에 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현장은 그야말로 나다나엘의 표현처럼 나사렛입니다. 장래의 소망도 끊어져 절망하고 육신의 건강도 쇠하여져가고 믿음도 약하여가고 충성도 덜하여져가고 경제적인 좋은 환경들이 옆에는 있는 것 같은데 우리의 것은 아닌 경우도 많아서 어쩌면 보기는 좋은 나무 같으나 썩어져가는 줄기의 마디가 아니었는지, 이런 중에 부활의 싹으로 나사렛 예수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으니 오늘 저희의 드리는 축하 예배의 순서들을 받으시옵소서. 드린 이 예물을 받으시옵소서. 예배 전에는 주의 전 안이 컴컴하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언제 종소리가 날까 뭔가 답답하고 시간이 지루한 것 같고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렸으나, 오늘 첫 우리 귀에 들려온 우리 성전 안에서의 소리는 주 부활하셨네 라고 하는 찬양의 음성이었습니다. 그 때 천사의 음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나이까. 주님의 그 무덤에서 나오셨고 천사들이 밝은 그 안에서 메시지를 전해 주었던 것처럼 저희 눈에 비춰진 또한 첫 순서는 천사들의 복장을 한 우리 여성들의 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순서 이처럼한 주님 앞에 예물을 갖고 왔더니 주께서 오늘 썩어져가는 나사렛같은 우리의 현장에 그러기에 내가 너희의 거기에 싹이 되어 지금 피었노라고 말씀해 주셨으니 너무도 감사합니다. 이어 여러 찬양으로 이렇게 피신 주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이 모든 순서들을 이 예물과 함께 주께서 받아 열납하시옵시고 정말 우리가 주께 드려 이 예물이 열납되기 원하오니 주여 받아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 가운데 항상 피어나 주시옵소서. 더이상 나사렛이 아니라 주님의 꽃동산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부요의 동산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봉헌하옵고 축복하옵고 축복하여서 기도올렸사옵나이다."
축도
"이제는 부활의 산 소망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화감동 충만하심이, 이천년 부활절을 맞이하는 성도들의 가정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무궁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 아멘 -
제목: 연한 순은 연한 가지에 접붙여진다
본문: 이사야 53:1-12
인용: 누가복음 23:39-43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동안 사순절 시리즈로 계속 말씀을 드려왔습니다. 오늘 그 다섯 번째로 이천년 사순절 시리즈의 내용을 마감하는 날로써「연한 순은 연한 가지에 접붙여진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대체로 창문이 많은 그런 집을 가지고 살던 사람에게 어느 날 그 창문을 통해서 도둑이 들어왔습니다. 그 도둑이 들어와서 약간의 물건을 훔쳐간 것 같은데 그 도둑이 유리창으로 또 들어올까바 그 주인이 바로 그 뒷날 기술자를 불러서 그 깨어지기 쉬운 유리창문마다 벽돌로다 굳게굳게 막아버렸다면, 또 뜯을 수도 없도록 깨지도 못하도록 그렇게 털어 막았다면 과연 그 집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창문을 벽돌로 막았으니 도둑은 들어오지 않겠습니다마는 또 아울러서 공기도 들어오지 않고 햇빛도 들어오지 않을 테니 환기도 되지 아니하고 빛도 그 집안으로 전혀 들어오지 않으니 집안에 있는 화초도 죽을 것이고 어항에 있는 고기도 죽을 것이고, 그러니 튼튼하게 방어한 그 벽체의 집안에서도 사람인들 어찌 살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 번 해 보게 됩니다.
누가복음 19장 9절에 보면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하는 말씀을 주님께서 하셨는데 그 집이 누구 집이었겠습니까? 삭개오의 집 아니겠습니까? 이 삭개오는 만 사람이 다 그를 비난하여 죄인이라 했습니다. 과연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아도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라고 하는 것 보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있는 자를 살렸다, 또 이제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 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주님이 그 집에 들어가기 이전까지는 그는 그야말로 잘 사는 부자요 또 권세 있는 세리장이었지만 그러나 영적으로 큰 죄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처럼 죄인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그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를 불러내렸고 그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지요. 만약에 이 삭개오가 아무런 죄가 없었다면, 의인 중에 의인같이 살고 있었다면 주님이 그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들어가셨더라도 구원을 했느니 용서를 했느니 혹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제 되었느니 이런 말씀은 안 할 겁니다.
여기에서 제가 이 사순절 시리즈를 마감하면서 우리 성도님들께 한 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병은 자랑해야 한다 라고 하듯이 우리 각 인에게는 각각 연약한 부분이 있겠습니다. 허물스러운 부분도 있고 죄도 있겠는데 이러한 것에 대하여 감추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겁니다. 죄짓지 않고 평생 주의 뜻대로 잘 사는 것 물론 좋습니다마는 그러나 죄짓고 약하여지고 허물이 있다는 것 자체도 크게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 삭개오의 경우를 보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또 특히 예수님에게는 자기의 죄스러운 부분을 들키게 하지 아니하기 위해서 그 많은 여리고의 에워싼 사람들 한 복판쯤 들어가서 키도 작고 하니 그 사람들 사이에 따라서 돌아다녔다면 예수님이 그 사람을 특별히 찾아낼 이유가 없겠습니다.
또 자기의 허물을 감추기 위해서, 특히 예수님에게 자기의 허물스러운 면이 들키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저 사람들 맨 뒤에 예수님과 가장 먼 곳에 위치해 가지고서 혹 따라가거나 자기 집에 있었더라면 정말 이 삭개오같은 즐거움은 없었을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그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이 삭개오의 경우 자기가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에게 혹 그것이 알려져서 자존심 상하기는 했지만 자존심보다는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한 번 만나봐야 되겠다, 주님을 한 번 내가 가까이에서 뵈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 더 앞섰기 때문에 그가 관중 속으로 뛰어들어가서도 자기가 표가 나지 아니하고 관중들 앞에 가서도 자꾸만 뒤로 밀쳐지고 그렇게 되니 뽕나무 위에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허물스러운 자기의 그 육신을 뽕나무 위에 올려 놓으므로써, 즉 감추지 아니하므로써 자기의 그 약점을 깨어질 수밖에 없는 유리창같은 자기의 그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므로써 주님을 만날 수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연한 순으로 오신 주께서는 어떤 자를 만나주시느냐? 강하고 죄 없고 의원이 필요없는 그런 자에게 찾아가기를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죄 많고 허물 많고 병들고 죽어가는 그런 자를 찾으시고 그런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던 연한 순이신 주님이시기에 이런 주님을 자주 만났던 바울같은 이는 고린도후서 12장 9절 말씀에 보면,
"나는 혹 내 개인의 자랑을 했을지라도 그것은 너희의 유익을 위해서 했을 뿐이지 나는 자랑할 것이 없노라. 자랑하지 않노라. 그러나 내가 다만 자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나의 연약함 그 자체로다. 나는 나의 연약한 것을 자랑하노니 나의 이 연약한 데서 나의 이 약한 데서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나서 나의 약함 때문에 나를 온전하게 했느니라. 만약 내가 강해서 내 자신이 밀고 나갔다면 어느 정도 갔다가 쓰러졌겠지만 내가 마냥 약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약한 나에게 마냥 크신 능력으로 함께 해 주셔서 오히려 능력 주시는 그 분을 통해서 내가 완전하여졌느니라." 이런 말씀을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이 땅에 연한 순으로 오셨습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고, 상상해 보십시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라면 무슨 통통하겠습니까? 형편없지요. 또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습니다. 이사야서 53장에 소개된 대로 보면 아무도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았고 싫어 버린바 된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는 가능하였지만 아버지 하나님께 강력한 가시나무로 태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강력한 단단한 나무이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그는 강력한 자기 되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혹 내가 강력할 때가 있다면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다만 강력할 뿐이지 나는 내 자신이 강한 자가 되기를 구치 않노라 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나타난 대로 내가 혹 강력해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고 큰 이적을 행한다면 그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어서 내게서 나타나는 그의 능력으로 이것이 가능한 것이지 내 자신이 능력자가 되지 않겠다 했습니다. 그는 생애 끝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2절에 보면 강도가 그를 향하여 말합니다. 또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십자가에 달려 하염없이 하염없이 연한 순으로 꺾여져 가고 있는, 그래서 막 생명의 불이 꺼져가는 그를 향하여 침을 ?으며 손가락질하면서 말하기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어찌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가?" 이렇게 비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아주 연한 모습으로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이 오셨지만, 참으로 약하게 나타나셨지만, 하나님께서 그 약한 예수님과 강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많은 역사를 해서 남을 구원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큰 이적을 베풀었고 그리고 바람과 파도도 잔잔하게 하는 놀라운 역사를 했습니다마는, 마지막 예수님 자신이 죽게 되었을 때 붙들리게 되었을 때 지금까지 했던 어떤 기도보다도 강한 기도를 했습니다. 땀이 피가 되어 쏟아질 만큼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여 웬만하시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 이 고난을 면케 하소서. 죽지 않게 하소서." 그렇게 기도했지만 그동안 능력 주시던 자가 아무 말씀 아니하시니, 네 기도를 내가 들어준다 말씀 아니하시니 그는 참으로 어이없이 약한 자였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대단한 능력자인 줄로 아는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에 연한 순으로 오셔서 꺾일 때에도 연한 순으로 꺾이셨던 겁니다.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이 아니시면 아무 것도 자기를 위해서는 할 수 없었던 분이십니다. 일생이 그러하였습니다.
연한 순은 이처럼 꺾이기도 잘 합니다마는 새 순이 나려면 역시 그 꺾인 연한 데서 잘 나옵니다. 또 그 가지가 연할 때에 순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접목을 할 때 접붙이기를 할 때에도 연한 순을 꺾어서 연한 가지에다 접을 붙이는 것이지, 연한 순을 꺾어 가지고 딱딱한 나무 둥치에다 접붙이지 않습니다. 붙여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 접붙이는 기간도 언제든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물이 올라서 연할 그때에 그 연한 가지를 꺾어서 연한 부위에다가 접붙이는 것이지요.
지금 막 연하신 순이 꺾이고 계신 십자가 위에 예수 그리스도 그 연한 순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때리면 맞고 십자가를 지고 가라면 지고 가고 쓰러지고 또 일어서고 못 박으면 못 박히고 옆구리를 찌르면 찔리고 옷을 벗기면 벗기우고 침 뱉음을 받으면 받고, 이렇게 참 어이없이 연약한 모습 그대로 오셨다가 연약한 모습 그대로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그 양 옆에 두 강도가 달렸습니다.
오늘 읽었던 누가복음 23장 39절로 43절 사이에 보면 그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 강도는 자기의 연약한 그 창을 통해서 자기가 강도였음을 순순히 시인합니다. 강도가 강도짓 할 때에는 굉장히 강하였지만 그 강한 자기의 강함은 역시 하나님 앞에서 볼 때에는 생명을 지키는 문제 앞에서 볼 때에는 아주 연약한 깨어지는 창이었습니다.
이 깨어지는 창을 통하여 자기 자신이 강도였던 것을 당연히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시인하면서 자기가 강도였음을 오히려 자랑합니다. 내가 지은 죄는 마땅히 이처럼 죽어야 된다 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순순히 꺾여들어가고 있는 강도가 주님 옆에 있었고, 또 다른 한 편의 강도는 어떠했느냐? 자기의 약점은 드러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대하여 합당한 보응을 받으니 우리가 이처럼 죽어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 편 강도는 말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향하여 "너도 살아보고 나도 살려보라. 네가 다른 사람을 많이 구했으니 혹 너는 내려가지 못하더라도 나를 한 번 내려가게 해 달라." 하면서 불평을 합니다.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죽어가면서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연한 순은 꺾였습니다. 연한 순 옆에 있는 두 강도의 모습은 하나는 연하여 스스로 자기를 드러냅니다. 죄인임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주님께 차라리 영혼을 부탁합니다. 그러나 한 편 강도는 강하여 지금 이 육신을 살려내라고 화를 냅니다. 죄인인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자꾸 감추려고 합니다. 살아나기만 하면 얼른 내려가서 뛰어서 그저 죄인 아닌 것처럼 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연하게 꺾이신 가운데 섰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새순은 어느 강도의 순에서 접붙여져 났습니까? 그날 밤 낙원에 예수님 혼자 가 있지 않았습니다. 옆에 있던 한 강도와 같이 갔습니다. 두 강도 다 같이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강도와 같이 갔습니까? 자기의 연약을 드러내고 자기의 연약을 감추지 아니한 그 강도와 함께 낙원에 가서 부활의 새 순으로 생명의 새 순으로 다시 새순을 내었던 이런 장면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주님을 만나서 주로 말미암아 주의 꺾이신 후에 주께서 다시 돋아나게 하는 그 주님의 새순을 나의 상한 줄기의 현장에다가 접붙이고 거기에서 그 순이 새로이 뿌리를 내리게 되고 싹을 내게 만들려고 한다면 내가 어떠해야 되겠는가? 연약한 나를 감추어야 되겠는가, 아니면 연약한 내 자신을 인정해야 되겠는가?
삭개오가 자기의 죄인된 허물된 모습을 감추었으면 그 주님을 만날 수없었습니다. 이처럼 큰 구원의 복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삭개오는 오히려 자기의 허물을 주님 앞에서 차라리 드러낼 때에 큰 복을 받았던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주로 정죄를 받고 계십니까? 이웃으로부터 비난을 주로 받고 사는 그런 형편에 계십니까? 그래서 이웃으로부터 나의 잘못에 대한 비판을 받을 때 속이 많이 상하시지는 않습니까?
부부간에 싸움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 가지고서 이웃에 있는 집사가 말해오면 남의 사생활을 침범한다고 하면서 기분이 나쁘고, 또 내가 십일조 안 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저 집사는 십일조도 안 한다고 할 때 십일조 안 하는 것은 사실인데 안 한다 라고 하니까 굉장히 기분 나쁘고,
내 자식이 잘할 때도 많지만 자식이 동네 나가서 싸우고 남의 물건을 훔친 것도 사실인데 그것을 또 어떻게 알았는지 아무개 집 자식은 도둑질했단다 이렇게 하니까 사실은 사실이지만 굉장히 속이 상해가지고서 "아이고 집사 꼴 보기 싫어서 교회도 안 갈란다." 하면서 교회를 원망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그 십자가 위에서 그 연한 순이 찢어지고 깨어지고 죽으시므로 세우신 교회이니 오늘 교회는 그의 몸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교회를 비난받는 일 때문에 정죄 받는 일 때문에 이웃이 내게 대하여 욕을 하는 일 때문에 교회를 원망하게 된다면 주님 십자가 옆에 있는 두 강도 가운데 누구와 같겠습니까?
자기에게 약점이 있는 것은 사실인데 자기 약점을 지적하면서 당신과 나는 약점이 있으니 이와 같이 보응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고 말할 때에 그만 기분이 상해가지고서 옆에 있는 예수를 오히려 비방하고 예수께 막 불평을 토로했던 그 한 편 강도와 다른 바가 조금도 없지 않겠습니까?
다른 한 편 강도는 "여보시오, 건너편에 있는 강도여, 당신과 나는 당신과 내가 행한 일에 합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오늘 읽었던 누가복음 23장 41절에) 이와 같이 만 사람 앞에 매달리고 창피를 당하고 끝내 죽는 것이 우리의 행한 일에 비하면 당연한 것 아니냐." 그랬습니다. 당연한 것 아니냐.
꺾이신 주님의 새순과 함께 낙원에 올라갔던 이 한 편 강도는 어떤 자세였느냐? 이보다 더 큰 비난을 받을지라도 내게 지은 죄가 있으니 죄값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내가 어떻게 죄를 지었는데 아무에게도 욕을 듣지 않겠다고 내 연약의 창을 벽돌로 쌓아버려서야 되겠는가.
깨어진 유리창 안으로 도둑도 들어오지만,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강하고 강한 심령 속에는 죄도 안 들어오지만 예수님도 못 들어갑니다. 바리새인들은 법을 잘 지키고 율법에 대해서 얼마나 강력했던지 자기 자신을 죄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율법으로부터 어김없이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자기의 연약을 벽돌로 전부 커버를 해서 단단하게 쌓아버렸더니 마귀에게 시험들지는 않고 죄는 안 지었지만 구원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위로를 가지고 찾아가시는 예수님도 필요가 없더라 그겁니다.
오늘 사순절 기간 동안에 연한 순으로 오신 주님을 생각해 보면 어떤 자에게 가서 함께 싹을 내어주셨는가? 어떤 줄기에 순을 내어주셨는가? 양편 강도 중에 한 사람 "어떤 비난을 받을지라도 내가 저지른 죄에 비하면 이렇게 받아서 당연하지 않는가. 왜 불평하느냐. 불평을 할 수가 없지 않느냐." 바로 이렇게 자기의 약점을 인정하고 비난을 받을 때에 당연하다고 주장하였던 그 사람은 그가 비록 예수님과 함께 꺾였지만 그날 밤에 낙원에서 영원한 생명의 순으로 함께 살아났던 것입니다.
주님 만나시기를 원하십니까? 주로 말미암아 위로 받고 주로 말미암아 내 허물을 씻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나의 연약과 나의 허물을 남들 앞에서 감추려고만 하지 마시고 오히려 드러내 보실 수는 없겠습니까?
주로 정죄를 받고 있는 형편에 있었다면 그 나무로부터 정죄를 받을 때에 비판을 받을 때에 기분이 나빠서 원망을 했다면 주님의 옆에 있는 이 강한 강도와 같았고, 혹 여러분께서 비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주여 감사합니다. 내가 이 비난을 받기에 합당한 죄를 이미 지었으니 혹 이 비난을 받는 것으로 내가 창피를 당하는 것으로 나의 죄 일부라도 사하여질 수 있는 것인지요? 당연합니다. 내가 지은 죄는 죽기까지도 합당한 죄였으니 내 평생 사는 동안에 평생 손가락질을 받을지라도 이에 당연합니다." 이런 연약의 창을 여는 사람이라면 그 연약의 창을 통하여 새 순이신 위로의 주께서, 용서의 주께서 함께 손을 잡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받는 입장이 아니고 정죄를 받거나 비난을 받는 입장이 아니고 반대로 비난하는 남을 비판하는 정죄하는 그런 편에서 주로 사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더러 있는 줄로 압니다. 참 신기하게도 그 능력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옆에서 보지 않았는데도 참 비난 잘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을 비난하기 위해서 공짜 전화도 아닌데 전화까지 해가면서 막 아무개 아무개가 이런 잘못이 있다고 열심으로 전하는 분이 있어요. 하루 여러 차례 그것도, 참 열심입니다. 아주 그런 분들이 많지는 않지만 더러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이제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그런 편에 살고 계신 분이겠지요.
잘도 압니다. 관심이 많으니까 들려지고 보여지는지 모르지만 어떻게 알았을까 싶을 정도로, 비밀이 하나도 없구나 싶을 정도로 우리 성도들 간에 그저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이런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면 그런 분은 마치 누구와 같으냐? 간음한 여인을 치기 위해서 돌 들고 모여든 바리새인들과 같지 않겠습니까?
"이 여인은 간음하였으니 우리의 돌을 맞아 죽어야 합니다. 치리이까, 말리이까?" 그러나 그 치리이까 말리이까 하고 돌을 들었던 그 수많은 사람 중에 자기 자신에게 죄가 하나도 없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 하였습니다. 아무도 칠 수 없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없는 척 할 뿐이지요. 연약한 죄가 다 있습니다. 허물이 다 있습니다. 깨어진 창이 있습니다. 그 창을 통하여 도둑이 들어오듯이 시험이 들어왔습니다. 유혹이 왔고 그 유혹을 따라 산 적이 있습니다. 이런 죄가 다 있습니다.
이런 죄가 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삭개오처럼 그 죄를 뽕나무 위에 내어놓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벽돌로 쌓아 버렸습니다. 죄를 속에 둔 채로 벽돌로 튼튼하게 쌓고서 오히려 죄 없음같이 보이려고 죄 없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주님의 뜻대로 다 산 것처럼 보이려고 주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을 찾아내어 돌을 들고 치려고 합니다.
그러면 객관적으로 사람들이 보면 돌 맞게 되어 있는 사람은 죄인이고 돌로서 던지는 사람들은 죄 없는 것처럼 이 세상 사람들은 보겠지만 주님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죄 지은 자도 죄인이지만 죄를 속에 감추어 둔 채로 철저히 덮어버리고 드러내지 아니하고, 남에게 욕 먹지 아니하고 속으로 죄를 악독하게 갖고 있으면서 남을 쳐 죽이려고 돌까지 들었도다. 너희는 더 악한 죄인이라." 이렇게 한 것을 보게 됩니다.
주로 남을 비판하는 그런 형편에 있다면 '이 바리새인들과 내가 무엇이 다를까. 꼭 같구나' 하는 생각을 이 기간을 통해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도들이 당당하신 것을 보고 목사로서 참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편 생각해 보면 어떻게 저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때로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들어와서 주님을 구세주로 모시면서 주로 말미암아서 만이 내가 천당갈 수 있다 라고 한 분들은 다 전과가 있는데 다 죄인이었었기에 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 라고 말하는데, 자기의 전과를 생각하면 저렇게 어깨가 당당하고 저렇게 얼굴 빳빳하게 들고 다닐 형편이 아닌데 어째 저렇게 당당할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과연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이 강하구나. 그리스도의 사유하심이 확실하구나. 주께서 용서해 주시는 용서가 얼마나 철저했으면 전과가 있었던 것도 생각못할 정도로 저렇게 의인인 것처럼 살꼬."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일만 죄가 있었을지라도 일만 달란트를 다 탕감받은 줄로 믿습니다. 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는 일만 달란트의 빚도 한꺼번에 그저 아무 것도 없는 빚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줄을 믿습니다.
그러나,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에게 탕감해 주신 하나님께서 바라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네가 다 갚을 수 없기에 내가 갚아주었느니라. 다 탕감해 주었느니라. 그러나 내가 네게 해 준 것처럼 네 이웃에게 그리하라."
이 일만 달란트 탕감받았던 사람은 받기 직전에는 큰 죄인이어서 하나님 앞에서도 엎드려서 어쩔줄을 모르고 이웃 사람들에게도 그저 죄인인 것처럼 도망을 다녔는데, 탕감을 받고 나가면서 얼마나 어깨가 당당해졌던지 "나는 이제 아무 빚이 없는 사람이야." 하면서 나가다 보니 겨우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향하여 큰 소리 치면서 내 돈을 내어놓으라고 합니다.
자기 죄를 다 사함 받았으니 큰 소리 칠만도 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내가 네 죄를 다 사해주었으니 너의 일만 죄가 다 사함 받았느니라. 그러나 사함받은 사실은 기억하기를 바라네. 사함받았다는 사실은 기억하기를 바라네. 네가 지금 죄 없다고 하여서 네가 날 때부터 죄 없는 자가 아니라 주 예수로 말미암아 죄 없이 된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라네. 그렇다면 네 이웃에게 대하여도 내가 네게 베푼 것처럼 네 이웃에게도 네가 그렇게 베풀어야 될 것이 아니냐?"
주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여러분, 비판을 주로 하는 쪽에 계시다면 남을 정죄하고 남의 목을 조이는 그런 형편에 계시면서 그런 쪽에서 살아오셨다면, 탕감을 다 받았기 때문에도 그리하지 마시고 탕감을 못 받아서도 그리 하지 마시고 이 경우든지 저 경우든지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은 주께는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비판을 받을 때에는 당연하다 여기고 감사하고 비판을 해야 될 어떤 형편이 될 때에는 내가 전에 누구였는데 생각해서 비판하지 못하는 자가 된다면, 이천년 사순절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나신 꺾이신 연한 순 예수께서 여러분의 그 약하신 비판할 거리를 보고도 비판하지 못하는 그 연약의 허물의 그 고장난 줄기에 주님의 싹이 날 줄로 믿는 것입니다.
전에 주께서 베푸시는 성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의 살을 통하여 그의 피를 통하여 축사된 그의 포도주와 떡은 몸과 살로서 우리 안에 그 말씀과 함께 들어왔으니,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를 원하셨고 우리는 그의 생명을 성찬을 받으므로써 모셨습니다.
지금까지 그 사실을 인정하면 아멘 합시다. 그렇습니다. 그의 연한 순을 낼 수 있는 씨앗이 우리 안에 우리 심령 속에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평생에 그 씨가 우리 안에만 있으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 몸에서 그의 가지를 내어야 될 줄을 믿습니다. 그의 열매를 맺게 되어야 될 줄로 믿는 것입니다.
씨앗이 아무리 좋아도 그 씨앗을 뿌려놓은 밭이 어떠해야 싹이 납니까? 좋은 씨앗을 뿌렸으니 깨끗한 씨앗을 뿌렸으니 흙이 깨끗해야 싹이 납니까? 깨끗한 흙에서는 싹이 나지 않습니다. 물이 깨끗해야 고기가 사는 줄 아시지만 윗물부터 아랫물까지 다 깨끗하면 살 고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고기가 산란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밭도 마찬가집니다 땅도 마찬가집니다. 땅이 어떤 땅이 좋은 겁니까? 아무 박테리아도 없고 깨끗하고 수분도 하나 없고 썩은 것 하나도 없이 그저 펄펄 날리면 균이 하나도 없는 그런 무균의 그리고 아무 습기가 없는 그리고 거름기가 썩은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런 땅에 씨앗을 두면 일년이 가도 싹 나지 않고 이년이 가도 싹 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언제 싹이 나기 시작합니까? 거기에 물이 떨어지고 거름이 떨어지고 썩어지고 하면서 이제 그 땅이 썩어서 열을 내면서 그 싹이 이제 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주의 성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 안에 모셨습니다. 우리 영혼에 모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 팔과 다리 여러분의 온 몸에 허물이 생겼을 때 상처가 났을 때 혹은 시험을 받았을 때 도둑이 들어온 깨어진 창처럼 되었을 때 그것을 주님 앞에 드러내어 놓고 "여기에 열이 납니다. 썩어들어 갑니다. 당신 속에 있는 그 씨앗의 싹을 나의 이 곳에 드러내시옵소서" 이렇게 되어야 할텐데 벽돌로 덮어버립니다. 철저히 커버해버립니다.
저는 많은 성도님들 보면서 참으로 귀하다 다행스럽다 싶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집집마다 참 행복한 것 같아요. 애 먹이는 자녀들도 없는 것 같아요. 사업도 다 잘되는 것 같아요 부부간에도 아주 좋은 것 같아요. 뭘 보고 제가 이렇게 말합니까? 항상 저를 보면 생긋 생긋 웃고 만족스러운 것 같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가정에서 자기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던 얘기 거의 하지 않습니다. 부부간에 틀림없이 싸움질도 많이 했을 텐데 제가 몇 년을 보면서 싸웠단 말 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모두가 다. 그리고 교회 들어올 때 보면 둘이서 다정스럽게 들어오고 책도 서로 내어주고 헌금도 주고 이렇게 옆에 앉기도 하고.
해서 "야 참 저 집은 권태기도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잘 지내구나 하면서 마치고 제 사무실에 올라가서 성도님들 나가실 때 어떻게 하는가 차량들 하고 복잡해서 어떻게 나가시는가 하고 이제 살펴보면, 아까 목사 앞에 들어올 때에는 그저 옆에서 아주 처음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다가는 그냥 나갈 때에는 그냥 이십 미터 삼십 미터 갈수록 거리가 떨어지고 고개를 따로 해 가지고서 만나지도 않아요. 심지어 차도 한 차로 와 가지고서 나갈 때에는 그냥 따로 타고 가버려요.
이런 것을 보니까 분명히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아닌데 왜 저럴까. 그것 뭡니까? 전부 덮어버렸지요. 우리 성도님들 참 많으신데 모든 자녀들이 나쁜 짓 한 아이도 안 한 것 같아요. 전부 부모님들 보면 자식 자랑만 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것도 좋고 덮어주는 것도 좋지만 허물이 있다면 연한 순을 가지고 꺾이러 오신 우리 주님에게는 그 꺾인 것이 우리의 연한 곳에 접붙여져서 새 순을 내고 그 새 순이 내리는 뿌리가 나의 뿌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차라리 드러내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예수의 씨앗을 우리 속에 품었으니 우리 안에서 예수의 씨가 발아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도 아시겠습니다마는 영국에서 전해오는 얘깁니다. 두 사람이 도둑질을 했는데 영국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도둑질, 양을 도둑질했던 것 같습니다. 양을 상당히 많이 훔쳐 가지고서 이제 잡혀 들어왔는데 재판장이 이 죄수들을 감옥에 보내고서 이 죄인들을 감옥에 보낸 것으로만 만족하지 아니하고 형을 살리면서 이 죄인에게 어떤 형벌을 더 내렸는고 하면 이 죄수들의 이마에다 죄인이라고 하는 영어로 'Sinner'라고 하는 그 약자 'S'자를 각인을 시켜라 그랬습니다. 이마에다 'S'자를 도장 찍듯이 찍어라 그랬습니다.
평생에 씻지 못하도록 그것을 없애지 못하도록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 두 죄인에게 이마에 'S'자를 붙였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평생 저 사람들을 보는 자마다 죄인인 줄을 알아서 도둑놈인 줄 알아서 조심도 하고 저 사람이 평생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아야 한 다고 해서 이제 'S'자를 콱콱 찍었는데 이 두 사람이 다 형을 마치고 감옥에서 나옵니다.
감옥에서 나오는데 한 사람은 자기의 얼굴에 아무리 씻어도 아무리 긁어도 떠나가지 아니하는 'S'자 때문에 이 죄인이라는 'S'자 표시 때문에 굉장히 기분이 나쁘고 내가 형을 살만큼 살았는데 이 'S'자는 웬 'S'자냐 하면서 내가 동네 사람들 부끄러워서 살 수 없다 해서 저 어디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숨어살아 버렸고.
또 다른 한 죄수는 그 안에 있으면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전도하는 자에 의해서 주님을 영접하고 내가 주님같이 살아야 되겠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남은 삶을 바쳐야 되겠다 해서 사죄의 뜻으로 그때부터 이 'S'자를 오히려 볕을 가리기 위해서 모자를 쓸 때가 있어도 오히려 쓰지 아니하고,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조심하십시오. 내가 언제 또 죄를 저지를지 모르니 여러분이 조심하면 내가 오히려 죄를 안 지을 수가 있습니다." 하면서 내어놓고 돌아다니면서 동네에 가서 쓰레기도 치우고 이삿짐 나르는 집이 있으면 이삿짐도 옮겨주고 또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있으면 부축도 해 드리고 업어도 드리고 이것을 하는데 하루 이틀 한 것이 아닙니다. 몇 년 동안을 그렇게 했어요.
그래서 처음에 많은 동네 사람들은 'S'자 붙인 이 'Sinner'라는 이 죄인 때문에 경계를 하고 조심을 했는데 이 사람이 진심한 마음으로 자꾸만 꽃을 핍니다. 그 'S'자라는 죄인의 표시에서 자꾸만 예수님 같은 생활을 나타냅니다. 이웃을 돕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한 해 지내고 두 해 지내고 보니 어른들이 어떤 생각들을 하게 되었는고 하니 '아이고 전에는 저놈이 우리의 신세를 진 놈인데 우리의 것을 도둑질하고 저놈이 산 놈인데 이제는 우리가 저 죄인의 빚을 더 많이 졌지 않는가. 우리가 뺏겼던 양보다도 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봉사한 것이 다 많으니 우리가 저 죄인에게 오히려 빛을 졌도다' 그렇게 생각하고서 이제 미안해 합니다. 그 사람이 와서 일하는 것을 오히려 이제 사양하려고 합니다.
어느 날 초등학교 손자가 찾아와서 "할아버지 저 착한 사람 이마에 왜 'S'자가 있습니까? 저 'S'자가 무슨 뜻입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대답하기 곤란하지요. 이 어린아이가 착한 아저씨를 보고 저 'S'자의 의미를 묻는데 멈칫하다가 "아마 내가 알기로는 저 사람의 이마에 있는 것은 저 사람이 그동안 우리들 보는 앞에서 행한 행실 그대로 아마 'Saint'라고 하는 거룩한 사람이다 성자다 하는 뜻에서 'S'자를 표시했을 것이야."라고 설명을 해 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 손자가 "할아버지 과연 그렇군요." 하면서 그 'S'자 아저씨에게 가서 "성자씨여, 성자씨여" 하면서 따라다녔다는 겁니다. 그는 그 'S'자가 죄수요 양을 도둑질한 죄인이었지만 그러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내어놓고 자기의 역점을 드러내어 놓고 그 약점 가진 사람처럼 'S'자 가진 사람처럼 하지 아니하고 자기에 꺾여 들어오신 자기 영혼 속에 들어오신 예수님의 순을 내었더라 그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서 과연 예수님의 순을 남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 사는지. 아니면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내 안에 몇 년이 계시던지 싹 내지 말고 가만 계시도록 해 놓고 나의 약점을 덮어버리면서 의로운 사람처럼 사는지….
가출한 딸의 얼굴을 자기 얼굴로 가리우고 그 상한 딸의 갈대를 꺾지 않으려고 그의 이름을 거리에 나가서 들리게 부르지 아니하고 그 우범지역에 자기의 사진을 갖다 걸고 딸의 이름이 크리스티나지만 그 이름도 기록하지 아니하고 그저 돌아오라고만 말하였던 그 브라질의 마리아라고 하는 그 여인을 제가 이번 기간동안 소개한 바가 있는데,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많은 어머니들이 그 예화를 들 때에 많은 어머니들이 '아. 아' 탄성을 자아내면서 귀한 어머니였구나 하는 것을 보고 저는 또 한 번 놀랬습니다.
어머니면 당연히 다 그렇게 하고 계신 줄 알았더니 그렇게 하지 못했구나, 자식을 사랑한다지만 이 소개된 여인같이 못했구나 생각하면서 또 한 번 제가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습니다. 그렇다. 이 세상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서도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사랑해도 이 여인같이 할 수 없었는데 특별난 이런 특별난 케이스가 있으니 이것이 온 세계에 소개된 것 아니겠는가.
그러면 이 특별한 여인은 누구와 같았는가? 예수님의 보통 사건과 같았다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생활은 그것이 보통 생활이었던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여인으로 소개되었던 예수님, 그 예수님의 그 여인같은 순을 여러분의 그 썩어가는 줄기에서 돋아나오게 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허물을 감추지만 마시고 깨어진 창을 다시는 깨어지지 않겠다고 벽돌로 막아버리지만 마시고 시험 들어온 마음이지만 마음이 흔들리고 여릴 때에 성령도 그 심령을 따라 들어오시는 겁니다. 시험 들어오는 길 다르고 예수님 들어오는 길 다르고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너무 마음이 굳건해서 마귀도 닫아 버리고 예수도 닫아버리고 하지 마시고, 혹 여러분이 시험에 들었다면 그 약점을 감추려고만 하지 마시고 오히려 드러내어 이처럼 연한 순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여러분의 그 썩어가는 마디에서 새 순으로 새 싹으로 나게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카펫 기술자가 물론 자기가 그 사실을 모르고 앵무새를 짖이기고 그것도 안되니까 납작하게 만들어버리고서 그 죽여버린 앵무새 탓에 돈도 벌고 초대되어 칭찬도 듣고 그리고 술도 마시며 춤도 추었다는 얘기를 함께 우리가 나누어보았습니다마는 우린들 그 카펫 기술자와 뭐가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그 카펫 기술자가 모르고 앵무새를 죽였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서 고난받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알고서 십자가에 올라가도록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구원받고 사망으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영원한 천국으로 갈 수 있게 되어서 귀한 천국 복음을 듣게 되어서 어떻게 되어서 이것이 가능했던가 생각해보니,
그때는 몰랐지만 이 카펫 기술자가 앵무새를 짖이기고 밟고 때리고 평평하게 만들어서 돈도 벌고 칭찬도 듣고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이처럼 돈도 벌고 영혼도 천국 길을 행하고 당당하게 살수 있는 것이 다른 이유 전혀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죽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를 짓밟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죽음 위에서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삭개오 그 집에 예수님 들어오시니 하나님의 아들처럼 존경받던 예수님은 순식간에 삭개오 집에 들어감으로써 그 따르던 모든 사람들에게서 얼마나 욕을 많이 먹었는지 모릅니다. "저러고도 하나님의 아들인가. 저러고도 어떻게 죄인과 함께 있으면서도 천국 복음이고 어쩌고 하느냐. 삭개오 같은 사람과 한 집에서 유하게 되었으니 죄인과 함께 있으니 죄인이 아닌가."
예수님은 많은 욕을 먹었습니다마는 예수님이 욕을 바가지로 먹는 동안에 삭개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내가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사오며 나의 이 많은 재산 절반을 정리해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여러분, 많은 재산 처리를 해서 가난한 자들에게 반이나 떼어주고 토색한 것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다고 이렇게 설치고 나온다면 그사람 기분 알 만하지 않겠습니까.
누구를 욕먹이고 삭개오가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욕먹이고 삭개오는 그렇게 기분이 좋은 겁니다. 그렇다 라고 해서 그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그리하지 말 수도 없는 것이 저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처럼 살게 된 것이지요.
지난 사순절 만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곧 그의 생명과 그의 성품의 그 인자가 우리들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성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 안에 모셨는데 그때 이후로 예수의 새순을 얼마나 다른 사람 앞에 보여지게 했습니까?
그때 이후로도 내가 여전하게 자랑만 하고 있습니까? 교만만 하고 있습니까? 남에게 합당한 이 정죄를 받고도 합당한 비난을 받고도 남이 내게 대하여 어떤 말을 하면 그렇게 듣기 싫었습니까? 그렇다면 전에와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전과 똑같지만 여러분 속에 있는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하게 남을 비판하고 있습니까? 남을 정죄하고 있습니까? 남의 약점을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죄를 갖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죄를 커버하기 위해서 돌을 들었던 바리새인과 같든지, 아니면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아무 죄가 털끝 눈끝만큼도 죄가 없다 라고 여겨서 죄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남을 비판하십니까?
이 경우든지 저 경우든지 비판하지 마십시오. 우리 속에 들어있는 예수님은 비판받을 사람의 이름을 거리에 들리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려고 자신을 사방에다가 십자가 위에 내어다 걸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십자가 선 곳을 말하여 저 은밀한 계곡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케년(canyon)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갈보리산 위에 골고다 언덕이라고 합니다. 만 사람이 볼 수 있는데 자기의 가장 부끄러움을 내어다 걸었습니다. 그래도 그림을 보면 몸에다 홍포인지 수건인지 허리춤에 조금은 걸쳐는 놓았습니다마는도 걸쳐졌던지 안 걸쳐졌던지 사실 따지고 보면 더 이상 부끄러울 수 없는 그 부끄러움을 숨겨놓지 아니하고 맨 위에 드러내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하여 찢어주신 살과 그렇게 하여 흘려주신 피를 우리 속에 들게 해 주셨고 그 생명과 함께 우리 안에 오시었으니 그 씨앗이 여러 해 동안 그냥 있게 마시고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옛 모습으로 살지 마시고 우리에게서 예수의 이파리가 피어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열매가 맺히도록 이 해를 살아보시기를 부탁합니다.
104 장 찬송합시다.
주님의 연한 순이 십자가 위에서 꺾여집니다. 꺾여진 순이 땅속으로 들어가 흙으로 돌아가버리고 말지 않습니다. 꺾여지면 곧 생명으로 새 순을 내려합니다. 새 싹을 내려합니다. 우리는 그의 십자가로서 새운 그의 교회 앞에 왔습니다.
어느 편 쪽의 강도입니까? 우리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고 이같은 어려움을 당해 마땅하다고 여깁니까? 아니면 죄는 그같은 비난을 받아 마땅할 만큼 짓고서도 비난하는 것이 싫어서, 억울해서 교회가 싫다면 바로 주님이 싫은 것인데 그같이 주님을 비방하던 강도와 같습니까?
간음한 여인을 향하여 돌을 든 바리새인과 같습니까? 나도 따지고 보면 죄가 있으면서 남들 보기에 죄가 보이지 않도록 철저히 덮어버리고 몇 년 동안을 죄짓지 않고 산 사람처럼 주의 뜻대로 다 하고 산 사람처럼 그래서 다른 사람 죄인을 향하여 돌을 들어 던지면 남보기에 나는 의로운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런 분이라도 주께 맞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아니면 우리의 모든 죄를 주로 말미암아 다 용서받았기 때문에 일만 달란트 일만 죄를 완전히 용서받은 이유 때문에 아무 죄 없게된 이같은 축복 때문에 이제는 죄짓는 사람을 보고서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 경우도 주께는 맞지 않다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이처럼 사는 것은 삭개오처럼 예수님 욕 먹이고 우리는 즐거움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삭개오의 이같은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그 허물을 군중 속에다 감추지 않았습니다. 군중 뒤에 따라가면서 주님에게 안 들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에게 자기의 약점을 보여보려고 온갖 비난받는 자기를 주님에게 보여보려고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드러내었습니다.
여러분의 그 연약한 부분을 그 욕먹는 부분을 욕먹어 마땅해서 먹지만 그 욕먹는 부분을 싫어만 말고 감추려고만 하지 말고 차라리 핍박받고 비난받고 간음한 여인처럼 그 돌들 앞에 엎어져 보십시오. 혈루증 열두 해 여인처럼 엎어져보십시오. 거기에 연한 순으로 오셔서 꺾이셨던 주님이 새 싹으로 곧 나타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예수의 그 연한 순은 탄생할 때부터 죽으실 때까지 스스로 강하려고 하지 않고 끝까지 약하셨습니다. 약함 가지고 오셨고 약함 가지고 가셨는데 그 약함 가진 자에게 능력 주시는 자인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 하시니, 예수 안에서 하늘 나라의 힘을 얻어서 하늘 이파리를 펼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기도합시다.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임하여 교통하시며 역사 하시며 위로하시며 인도하심이, 진실로 연약한 이 모든 것을 주께와 이웃 성도들에게 감추는 것을 능사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나의 연약한 것을 삭개오처럼 드러내어 주님 앞에 보이고 이 연약한 내 줄기에 내 안에 드신 연한 순의 주님이 새 싹을 내고 순을 내고 가지를 내고 열매를 맺고 나의 이 썩은 줄기에서 주님의 뿌리를 내시옵소서 라고 고백하고 그처럼 주로 말미암아 살기를 원하는 모든 성도께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실지어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