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세 기

아브라함의 순종.

공 상희 2011. 3. 1. 16:26

아브라함의 순종.

-창22:3~14-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셨고, 아브라함은 온전한 순종으로 합격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에게 이제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고 하시며 약속하셨던 일들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시기 시작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순종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께 인정받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약1:21~22). 그리고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믿음을 순종을 통해서 확인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고백을 지키는 순종으로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 믿음을 온전케 한 아브라함의 순종이 어떤 순종이었는지를 살펴보고 우리의 순종의 본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1. 아브라함의 순종은 즉각적이고 계속적인 순종이었습니다.

  22:3절에 보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로 보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결단하는 데에는 하룻밤 정도가 걸린 것 같습니다. 그는 하룻밤 동안 혹독한 시험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는 평생 동안 해보지 않았던 번민을 했을 것이고, 그 하룻밤만에 그는 아마 폭삭 늙었을 것입니다. 그도 사람이기에 자기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일을 쉽게 결정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길게 번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단호한 결단을 내렸고, 이튿날 아침 일찌기 일어나 길을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준비를 하여 길을 떠난 아브라함은 4절에 보니 삼일만에 모리아 산 근처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즉 그는 삼일 동안 그가 결정한 사실에 대하여 번복하지 않고 결단을 지켰습니다. 그 삼일이라는 시간은 아브라함이 번복을 해도 아주 여러 번 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힘겨운 싸움을 하면서 계속적인 순종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위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해서 참으로 배울 것이 많습니다. 그 첫째는 번민은 짧게 하고 결단은 단호하게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지체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이요 불순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데에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번민을 짧게 하고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즉각적인 순종을 보이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래 끌면 끌수록 우리는 더 혹독한 시험을 받습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결단을 지연하게 하고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수법을 곧잘 쓰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약해지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가 지연전술을 펴지 못하도록, 그리고 마귀가 틈을 타 우리를 불순종으로 이끌 시간이 없도록 즉각적인 순종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적인 순종을 해야 합니다. 한 번 결단한 사실에 대해서는 번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위대한 결단을 했다가도 곧 번복을 하는 못된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단을 잘 해놓고도 [그때는 내가 흥분했었나 봐]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그 결단을 철회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아오느라고 제대로 결단을 지키지 못하여 우리가 쌓았던 믿음의 공든 탑을 쉽게 스스로 무너뜨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쌓았던 것을 스스로 무너뜨리지만 않았으면 우리는 대단히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약함을 알고 한 번 결단한 것은 죽어도 번복하지 않는 단호함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흔들리지 말고 결단을 지키기 위해 기도하고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인정받고, 쓰임도 받고 믿음을 통해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아브라함의 순종은 철저하고 비장한 순종이었습니다.

  3절에 보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행하기 시작을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배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순종을 합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할 때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내 나름대로의 순종을 하여서는 안됩니다. 사울왕처럼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는 진멸하라는 말씀을 액면 그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아각을 살려 두었고, 소와 약대 같은 가축들 중에서 좋은 것은 남겨두었습니다.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독자적으로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그는 이 일로 하나님께 큰 책망을 들었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우리의 생각대로, 우리의 수준에서 적당히 순종하는 태도를 가지면 안됩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순종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하는 흉내를 내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온전한 순종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되 온전히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3절에 보니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이 일어나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준비를 해서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모리아 산에 도착을 해서는 나무를 벌여 놓고 아들을 결박하여 그 위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잡으려고 칼을 들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얼굴을 저와 여러분이 본다면 그 얼굴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비장함입니다. 비장한 각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모습!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할 때 가져야 할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는 우리가 어려운 결단을 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을 위하겠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하겠는가를 결정해야 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위하자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위하지면 사람을 배반하는 참으로 난감한 일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비장한 각오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한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라고 고백했던 바울처럼 단호한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그 단호함, 그 비장함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일제시대에는 생명을 담보로 예수님을 믿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신사에 참배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으나 거절하면 죽을 수도 있었고 죽음 이상의 무서운 고문과 학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너졌는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목회자들이 모여 교단적으로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정을 하는 참담한 일들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의 절개를 꺾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듯이 몇몇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담보로 거절을 했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택하기 위해 하나 뿐인 생명을 버렸습니다. 엄청난 고문과 학대를 이겼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대한 순교자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얼굴에서 볼 수 있었던 빛이 바로 비장함이었습니다. 그 비장함! 그것이 그들을 위대하게 한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사 이 민족을 구원하시는 놀라운 축복을 이 땅에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매우 존경을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비장한 각오의 믿음과 순종을 보일 것을 요구하십니다.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계명을 목숨처럼 사랑하는 순종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비장한 각오로 순종하던 아브라함의 비장함, 일제의 핍박 앞에서 일사각오로 믿음을 지켰던 우리 선조들의 비장함을 우리도 가집시다. 생명을 걸고 죄를 끊고, 생명을 걸고 기도하고, 생명을 걸고 주님을 섬깁시다. 주님께 우리를 온전히 부탁을 드리고 아무 걱정도 말고 온전히 주님을 순종합시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우리를 사용하시며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주시되 넘치도록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립시다.

 

 

  3.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 의한 순종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네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많이 갈등했을 것입니다. 많은 의구심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선하신 인격의 하나님으로 알았는데, 사람을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을 하실 때 다른 잔악한 이방신과 다를 바 없는 신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시고자 하신다면 왜 이런 식으로 자신을 괴롭게 하는가 하는 회의도 품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통해서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알 같이 후손을 번성케 하시겠다고 약속해 놓고서 아들을 바치라는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앞뒤가 맞지 않는 하나님, 이랬다 저랬다 변덕을 부리시는 하나님으로 악평을 하고 불평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절대 해롭게 하실 분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은 이 시험을 통해서 모종의 복된 것을 그에게 주실 것이라는 신뢰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아들을 바쳐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을 믿었습니다. 사람이라면 안되지만 하나님이시라면 무슨 방법으로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면 다시 살려내셔서 당신이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창22:5, 8). 자신의 수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수준에서 생각하고 믿고 순종하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믿음의 승리를 얻었습니다.

 

  히11:19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것으로 믿고 번제를 드리려고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와 같은 자신들에게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 이삭을 번제로 받으시고도 아들을 살려내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란 이렇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제한하여 하나님이시라도 어떻게 하실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을 믿어야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섬기면서 늘 빠졌던 함정이 자신들의 생각대로 예수님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믿음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에게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오병이어 칠병이어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며 물위를 걷고 파도를 명하여 잔잔케 하는 등의 표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스스로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이 악한 자라고 말씀하셨고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진정 복된 자라고 하셨고, 그 말씀은 지금도 유효한 말씀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많은 표적을 행하십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이는 의심하는 자들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백성보다 더 참혹한 멸망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 말씀을 듣고 믿는 자, 성령 안에서 믿고 순종하는 자를 더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수준에서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고 하나님 수준에서 생각하고 믿고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보고 믿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기적이 일어나 후에 보고 믿지 말고 말씀대로 믿고 기적을 체험하는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의 수준이 대단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실만한 합니다. 이런 사실 앞에서 우리도 믿음의 수준을 높여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니 아브라함 같은 믿음과 순종의 수준을 가져야 되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우리의 후손에게 복의 조상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