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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굳게 서는 교회(신년설교)

공 상희 2011. 1. 2. 07:27
말씀에 굳게 서는 교회(신년설교)
박갑진 목사
[성경본문] 시 119:126-136

시편 119편은 성경 속에서 특이한 위치에 있습니다. 성경 중에서 가장 긴 장이요 가장 많은 절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말씀을 찬양하는 시이며 시문학의 형태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시작하여 22단락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매 단락의 첫 글자가 22자의 알파벳의 첫 자로 되었으며 매 단락마다 8절로 짜여 저서 176절이나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119편에는 말씀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오는 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가지 다른 말로 표현해 가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주의 법, 증거, 법도, 규례, 계명, 판단, 길, 약속 등으로 표현하여 말씀의 다양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이 땅 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온갖 기쁘고 즐겁고 괴롭고 고통스러움을 말씀에 비추어 교훈하며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편은 이스라엘의 종교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어떤 민족, 어떤 사회 어떤 시대의 공동체에도 유익한 말씀으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말씀을 대하는 성도의 태도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시19:8에 보면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합니다. 개혁자들의 종교개혁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었으며 개혁의 방법은 오직 믿음으로! 이였습니다. 종교개혁의 근거는 <오직 말씀으로>라는 주장으로 이 큰 대업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제도나 교육으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오, 인간적인 방법으로 심성이 개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하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을까 모두가 걱정을 합니다. 그래서 법도 만들고 제도를 개혁하고 사람을 물갈이를 해서 내년 4월에 있을 총선을 승리로 이끌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제도를 개혁하고 인적청산을 한다고 해도 인간의 근본 심성이 변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오직 말씀으로 심령에 변화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말씀만이 신학과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표준입니다. 왜냐하면 딤후3:16-17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신17:16-20에 왕이 되면 사람이 금해야 할 것이 세 가지라고 했습니다.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 은금을 쌓아 두지 말라,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꼭 해야할 것이 하나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신17:19-20에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고 했습니다.
히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니"라고 했습니다. .
2004년 표어를 본문 133절을 근거해서 <말씀에 굳게 서는 교회>로 정했습니다. 우리 모두 앞에 붙여둔 표어를 큰 소리로 읽어봅시다. <말씀에 굳게 서는 교회> ∼ !!
성구를 다같이 읽어봅시다.
"나의 행보를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아무 죄악이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1. 말씀이 항상 열려있는 한해.
본문 130절에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추어 깨닫게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열려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는데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었습니다. 한 힘있는 천사가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뗄 수 있는가 라고 했습니다. 이때 사도 요한이 아무리 봐도 하늘 위에도 땅 아래에도 이 책을 펼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너무 안타까워서 크게 울었습니다. 말씀이 열려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닫혀졌기에 만사가 풀려지지 않게 되는 비극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계시완성시대입니다. 각 나라 각국 방언으로 말씀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계시의 말씀이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누구나 읽고 말씀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Catholic에서는 사제에게만 말씀이 열려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말씀을 직접 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말씀이 열려있는데도 우리는 계시의 말씀을, 열린 말씀을 바로 대하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나 말씀이 닫혀 있는 시대는 비극입니다. 삼상3:1에는 엘리 시대를 가르쳐서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없으니 엘리 제사장의 영의 눈이 어두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었습니다.
역대하33:-34:을 보면 유대나라 므낫세 왕 55년간의 통치 기간에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온갖 우상과 범죄가 전국에 만연했습니다. 그러나 요시야 임금이 8살에 왕이 되어 성전을 수리하다가 묻혀진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이 말씀을 서기관 사반이 읽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왕이 자기의 옷을 찢으며 겸비했습니다. 말씀 때문에 뜨거워졌습니다. 마침내 전국적으로 말씀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말씀이 열려 있습니까? 아니면 말씀이 묻혀있습니까? 닫혀있습니까?
우리 성도들의 가정에는 말씀이 열려 있기를 원합니다.
찬송가 234장에 보면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진실한 찬송이기를 원합니다.
어떤 성도의 가방은 "성경감옥"과 같습니다. 어떤 이는 성경을 이불장 깊숙한 곳에 모셔(?)놓습니다. 그러시지 마시고 성경을 폅시다. 읽읍시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암8:11에 말한 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는 그 시대와 같은 것 같습니다.
말씀!! 말씀하면서 전혀 말씀을 읽지 않는 성도가 오늘의 크리스챤인 것 같습니다.
느8장-9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귀국하여 성전과 성곽을 중건한 후에 7월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서 모여서 말씀을 읽습니다. 새벽부터 오정까지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 남자 여자 앞에서 말씀을 읽었고 백성은 귀를 기울였습니다.
백성들은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자기의 죄와 열조들의 허물을 자복하면서 낮 사분의 일을 말씀 읽는데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본문에 말씀을 연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패다흐"는 성전의 출입구, 일반 가정의 대문,도시의 성문이 활짝 열리는 걸 의미합니다. 문이 열리면 우리가 그 집안이나 성안으로 들어가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면 우리는 말씀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오묘함과 아름다움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말씀의 문을 열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둔한 자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이 심령을 밝혀서 열어주며, 알려주며, 계시해준다는 겁니다. 그때 우리가 그 말씀의 의미와 신비를 깨닫고 그 아름다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말씀을 열어 읽을 때에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의 신비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될 줄 믿습니다.
말씀은 비추어 주는 힘이 있습니다. 우둔한 자라도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말씀이 닫혀 있고 봉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을 엽시다. 성경을 펼쳐 읽읍시다.
성도들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예배 장소에서 말씀을 펼쳐서 읽읍시다.

2. 말씀을 사모하는 한해
본문 131절에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고 했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고 어린아이가 젖을 사모하듯이 말씀을 헐떡이며 사모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느 한 곳에 머물어 있지 못했습니다. 도망을 다녀야했고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오랫동안 말씀을 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읽고 싶었습니다. 듣고 싶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그의 사모하는 모습을 "입을 열고 헐떡였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타는 듯한 열기로 찌들리면서 한줄기 시원한 물을 갈망하는 사람과 같은 강한 열망을 가진다는 겁니다. 헐떡이는 사람은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입니다. 목마른 사람입니다. 주린 사람입니다. 갈급한 사람입니다.
95년 12월 28일 밤 서울 반포동에서 맨홀에 빠졌다가 9일 만인 새해 1월6일 새벽 1시에 119구조대에 의해서 구조된 52세가 된 조성철씨는 맨홀에 흐르는 냄새나는 물도 마셨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풍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잘 먹고 살기는 우리 한국이 세계에서도 손꼽히고 있습니다. 가정마다 식당마다 풍성합니다. 없는 것이 없고 입맛대로 다 있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것, 하나님의 말씀에는 주려 있습니다. 일년 내내 성경 한번 읽지를 않습니다. 읽지 않을 뿐 아니라 읽기만 하면 뭘 하느냐 하면서 빈정대기도 합니다.
겔3:1에 "인자야 너는 이 두루 마리를 먹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하라"고 했습니다.
계10:10에 보면 사도 요한이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고 했습니다.
눅10:39에 주님의 발아래 앉아서 말씀을 받는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다고 했습니다.
행16:14에 보면 루디아는 마음을 열고 말씀을 청종했습니다. 시19:10에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 보다 더 달도다"고 했습니다. .
시119:147-148에는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일주일에 겨우 한 번 예배에 참석하는 신앙생활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사모하여 새벽 전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말씀을 읽어 보셨습니까? 밤이 깊기 전에 일어나서 다른 식구들은 다 잠들었을 때에 말씀과 교제를 해 보신 경험이 있습니까? 말씀을 읽다가 감격해서 성경에 얼굴을 비비면서 말씀 때문에 울어보기도 하고 기뻐하는 한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말씀에 굳게 서는 한해
본문133절에 "나의 행보를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아무 죄악이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라고 했는데 이 말씀에는 다윗의 두 가지 간구가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 모두의 기도와 소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나의 행보를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말씀은 말씀에 굳게 서는 삶을 계속 유지케 해달라는 뜻입니다. 영혼의 모든 움직임이 말씀의 한계 안에 있게 하소서, 그 길을 걷게 하소서, 그 길로 인도하소서 라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을 떠나지 말고 다 지켜 행하라고 했습니다.
2) 아무 죄악이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는 내가 죄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소서, 죄가 나를 주관치 못하게 하소서 라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시기 때문에 내 행보를 말씀에 굳게 세울 때 그에게는 실패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움직임은 말씀에 규정된 한계를 지켜야 하며 그 한계를 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에 지시된 길을 걸어야 합니다.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말씀이 나를 지키며 날마다 이기게 하십니다.
이 한해 뿐 아니라 내 평생토록 말씀에 굳게 서서 나아갑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의 첫 주일입니다.
이 한해의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항상 말씀이 내 앞에 열려있어서 읽고 묵상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일정한 음식보다 말씀을 더 귀히 여깁시다. 욥23:12에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의 행보를 말씀에 굳게 세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