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된 일군이 됩시다
충성된 일군이 됩시다
렘36:1-10
이 시간에 “충성된 일군이 됩시다”라는 제목입니다. 본문에는 한 명의 소중한 인물이 나옵니다. 그의 이름은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입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서기 역할을 했는데 예레미야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훌륭한 조력자였습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조력자를 바나바라고 한다면 구약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조력자는 바로 바룩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한마디로 그는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충성된 자는 여름 가물에 얼음냉수와 같아서 보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합니다. 얼마나 귀한 사람입니까? 그럼 충성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이 시간에는 바룩을 통해서 충성된 사람의 모습이란 어떤 것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충성된 사람이란 언제든지 부르면 달려오는 사람입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이에 예레미야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부르매" 그랬습니다.
우리에게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진 유명한 선지자가 예레미야입니다. 그런데 당시 예레미야는 직설적인 메시지 때문에 거의 외톨이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예레미야를 배척했습니다. 그래도 그에게는 부르면 달려와 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주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아멘 할 수 있습니까? 아멘 할 수 있어야 충성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사야의 충성을 어디서 봅니까? 우리 주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실 때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 했던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이해해 않고 온갖 비난이 예상되지만 주님이 부르실 때 아멘하는 사람이 충성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여호와께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할 때 아멘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혹은 네 모든 것을 다 드리라 할 때 드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피하고 도망치니까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데요. 새벽 1시에 불러도 주여 여기 있나이다 불평 없이 충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에도 내게 말씀하신 것이라면 아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충성된 사람은 소리 없이 행하는 사람입니다.
4절에 “예레미야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부르매 바룩이 예레미야의 구전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니라”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바룩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말로 전하니까 바룩은 충실하게 그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합니다. 아무 말이 없이 예레미야가 그에게 입으로 전한 모든 말씀을 다 받아 적습니다. 입으로 전한 말씀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오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오직 예레미야가 전하는 모든 말을 받아 적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충성된 사람은 소리 없이 묵묵히 행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소에 일하지 않던 사람이 한 번 일했다 하면 혼자 일하는 것 같이 우리 교인들 다 어디 갔느냐 불평하면서 일합니다. 그러나 진짜 충성하는 사람은 조용합니다. 진짜 일군은 큰 문제도 작은 문제로 만들어 조용하게 처리합니다. 그러나 불충한 사람은 작은 문제도 큰 문제로 만들어 엄청난 일을 저질은 양 소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 보세요. 마12:19에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예수님처럼 큰일을 하시면서도 조용하신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토록 악의 무리들이 예수님을 모함하고 괴롭혔지만 아무 일도 당하지 않은 것처럼 조용하셨습니다.
소리 없이 충성하라는 것을 3가지 말로 생각합니다. 먼저는 작은 일에도 충성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큰일에만 충성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에도 충성하는 사람을 크게 쓰십니다. 다음은 은밀하게 충성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충성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는 “목사님 목사님만 아세요.” 하면서 교회에 큰 일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내가 헌금했는데 목사님이 알고 계실까? 그러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받으셨으니 됐다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자랑하면 상을 하나님께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 충성된 사람은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5-6절 말씀을 보면 예레미야의 명령이 나옵니다. "예레미야가 바룩을 명하여 가로되 나는 감금당한지라 여호와의 집에 들어갈 수 없은즉 너는 들어가서 나의 구전대로 두루마리에 기록한 여호와의 말씀을 금식일에 여호와의 집에 있는 백성의 귀에 낭독하고 유다 모든 성에서 온 자들의 귀에도 낭독하라."
생각해 보세요. 예레미야가 전해서 두루마리에 기록한 말은 유다가 회개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금식일에 백성들 앞에서 낭독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룩도 예레미야와 똑같은 시련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바룩은 예레미야가 명한 대로 여호와의 집에서 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낭독합니다(8절). 어려움이 예상될지라도 "예"라고 할 줄 아는 사람이 충성된 사람입니다. 계산하면서 일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만주 사변 당시 일본 군대가 여순항을 포위하면서 철조망을 자르지 않으면 진군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300∼400명을 거느린 중대장이 그대로 전진하다가는 모두 죽지만 한 사람이 가서 철조망 한 줄을 자르고 죽고 또 다른 사람이 가서 한 줄만 자르고 죽는다면 10사람이 죽으면 철조망을 다 자를 것 같아 "여러분 가운데 10명을 회생시켜야 되겠습니다. 누가 천황을 위해서 가겠습니까?"라고 말하자 그 중대에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300명이 다 나섰습니다 그래서 중대장이 열 사람을 골라서 희생시킨 후에 그 철조망을 돌파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악의 전쟁이지만 천황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 충성했습니다. 2차대전 때도 가미자재라 하여 비행기를 타고 미국 전함에 함께 자폭했던 특공대 얼마나 유명합니까?
우리 주님을 위해서도 이렇게 목숨 바치려는 충성된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악한 싸움이 아니라 선한 싸움을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몸조심하느라 진리를 숨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학자들 가운데서도 내 신앙과 양심으로는 이건데도 그것이 옳은데도 그것을 말하면 이상하게 볼까봐 진리를 변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말 옳다면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목숨을 걸고서라도 주장해야 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전하다가 맞아도 전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2:10)
4. 충성된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꾸준한 사람입니다.
10절에 “바룩이 - 그 책에 있는 예레미야의 말을 낭독하여 모든 백성에게 들리니라” 했습니다.
예레미야로부터 바룩에게 처음 명령이 내려진 때는 여호야김 4년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백성 앞에서 낭독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여호야김 5년 9월에 바룩은 여호와의 집 앞에서 금식하는 백성들 앞에서 또 예레미야의 말을 낭독하여 들려주었습니다(10절).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그의 충성심을 보십시오. 어려움이 예상되어도 잠깐 충성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충성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호수아는 40년간 모세에게 변함없이 충성하였습니다. 출33:11에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아니하니라"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를 배반하고 모세에게 대항할 때도 그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갈렙도 나이 늙도록 변함이 없었습니다.
5. 충성된 사람은 굴하지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23절에 “여후디가 삼 편 사 편을 낭독하면 왕이 소도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 했습니다.
바룩이 기록한 두루마리 책을 여호야김 왕이 그 말을 읽는 대로 단검으로 베어 활활 타는 불에 던져 태웠습니다. 얼마나 낙심되는 일입니까? 그나마 사본도 없고 구전으로 받아 적은 것이어서 그대로 복원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예언이란 하나님의 도구로서 쓰일 뿐이지 내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언하고 나면 곧바로 잊어집니다.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다른 두루마리에 그 말을 다시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바룩은 다른 군말 없이 첫 번째 두루마리의 모든 말을 다시 기록했습니다. 아무리 실망스런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 바룩의 모습을 보십시오.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짜증내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을 봅니다. 짜증날 일이 많아도 군말 없이 기꺼이 일하는 것 이것이 바로 충성된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을 본 받으십시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하신 충성의 주님이셨습니다. 충성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사를 구하면 충성된 자가 됩니다. 그래서 맡은 자가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우리 모두 충성의 은사를 구하여 바룩과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군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