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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와 회중예배 2 (고전 14:20-25)

공 상희 2010. 9. 10. 18:00

은사와 회중예배 2 (고전 14:20-25)


계속하여 은사와 회중예배와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회중 앞에서 은사를 행할 때는 개인과는 달리 참고해야 할 사항이 많습니다. 모두에게 유익이 되어야 하고, 은혜가 되어야 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4. 말씀과 지혜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20-21절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여기 지혜가 나오고 가라사대의 말씀이 나옵니다. 모든 은사는 개인적이든 공적이든 말씀과 지혜의 은사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은사라 해서 아무도 간섭치 못할 성역이 아닙니다. 성령은 너무도 거룩해서 남도 나도 간섭 못하고 오직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대로만 해야 한다는 생각을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했습니다. 악령은 사람을 노예로 만들어 끌고 다니지만 하나님은 자유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성령의 은사도 적절한 지식 가운데 통제되고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얼마든지 악령이 틈탈 수 있고 성령일지라도 또 다른 은사의 간섭을 받아야 합니다. 눈으로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지만 냄새 맡아보니 독약이라 한다면 코의 지시를 받아야 실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말씀과 지혜와 지식의 은사의 지시를 받아서 하면 실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한 것입니다.


5. 무식자도 불신자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23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고린도는 국제도시로서 외국인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언어에 무식한 사람은 의사소통에 어려운 점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까지 예배를 방언으로 드린다면 얼마나 답답한 일이겠습니까? 외국어보다 더 이상한 말을 하므로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보다 방언을 많이 말하는 자였지만 교회에서 공적 예배만큼은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 다섯 마디의 예언이 더 낫다고 한 것입니다.


23절 말씀에 불신자들의 반응이 나오는데 불신자들도 은혜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 죄인을 모아 천국으로 데려가는 천국역이기 때문에 불신자들을 위한 곳도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불신자도 영광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24-25절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했습니다.


이처럼 예언은 신자만이 아니고 불신자들도 들으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든가 무언가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회중 예배에서 예언을 강조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꼭 예언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언을 한 예로 들면서 예배에서 예언과 같이 모든 사람들이 듣고 깨닫고 은혜를 받고 불신자들까지도 돌이키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원래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주시는 은사입니다. 방언은 통역도 가능하지만 방언은 알아듣지 못하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나와 남의 죄라든지 그런 비밀을 기도하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언은 알아듣도록 주신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모든 순서가 이 예언과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6. 참 은사를 나타내야 합니다.


다시 24-25절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참 예언은 죄를 깨닫게 하여 회개케 하는데 있습니다. 예언은 미래를 말하는 것 같지만 항상 현재를 향하고 있습니다. 재림이라든지 이런 것은 미래적 예언이지만 대부분 은사로 주어지는 예언은 이렇게 될 것이라는 미래적 예언이 아닙니다. 미래 알아맞히기 식의 예언은 예언이 아니라 점치는 점쟁이입니다. 미래를 담고 있으면서도 현재를 직시하고 있습니다.


참 예언자 요나를 보세요. 요나는 니느웨가 회개하지 않으면 사십일 후에 망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현재의 회개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의 회개를 강조하고 있고 회개하면 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기독교 예언은 틀리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고 하는 예언이라고 악평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다가 실재 멸망합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멸망하고, 소돔 고모라가 멸망하고,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폼베이가 멸망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 예언은 현재 회개의 초점을 맞추어 회개시키는데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을 회개시켜 참 신앙 안으로 인도하는 그런 참 은사가 예배 중에 행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사를 받는 일도 중요하지만 은사를 활용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모든 것은 말씀과 지혜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은사 충만한 하나님의 일군 되어 모든 것을 은혜 있고 질서 있고 참 은사로 행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