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와 회중예배 (고전 14:1-19)
은사와 회중예배 (고전 14:1-19)
오늘부터는 은사론에 있어서 은사와 회중예배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성령의 각종 은사가 지금보다 더 폭넓게 활용되었습니다.
고전14:26을 보면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찬송시는 찬송입니다. 가르치는 말씀은 강론이나 설교입니다. 계시는 예언과 같은 것이고, 방언과 통역도 있었습니다. 육신의 병든 자를 위한 신유의 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현대교회도 그렇게 은혜롭고 신령하고 다양한 모임이 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럼 예배에 은사활용 시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유익의 원리로 해야 합니다.
1절 “사랑을 따라 구하라” 그랬습니다. 여기 “구하라”는 말은 ‘디오케테’ 즉 ‘박해하다’는 뜻입니다. 마치 사냥꾼이 짐승을 추격하듯 집요하게 따라가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예배에서 이 사랑을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모두에게 유익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좋은 것이 있어도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면 하고 유익이 없으면 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행20:20)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격식도 존중하지만 너무 격식에 매일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쳤다가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았는데 예수님은 유익을 구하셨지 격식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예언, 해야 하나 하지 않아야 하나? 신유기도, 해야 하나 하지 않아야 하나? 유익이 있으면 하고 유익이 없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만한 준비된 그 분야 사역자가 있을 때는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고 사단이 역사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처럼 모든 예배 순서는 유익의 원리로 해야 합니다.
2. 은혜의 원리로 해야 합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신령하다는 것은 은혜를 가리킵니다. 어떤 순서들이 은혜가 되면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좋은 것이 있어도 성도들에게 은혜가 되면 하고 은혜가 되지 않으면 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령 개인적으로 은혜 되는 것도 회중 앞에서는 은혜가 안 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로 개인에게는 은혜가 안 되도 회중 앞에서는 은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해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환자들 기도 어떻게? 예언은 어떻게? 기도는 어떻게? 찬송은 어떻게? 악기는 어떻게? 광고는 어떻게? 정답은 역시 회중에게 은혜가 되면 은혜가 되면 하고 은혜가 되지 않으면 빼고, 길게 해서 은혜가 되면 길게, 짧게 해서 은혜가 되면 짧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소 따라 시간 따라 회중 따라 다릅니다.
그러나 회중이 워낙 다양해서 어떤 이에게는 은혜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지만 최대한 그런 원리로 회중 예배를 이끌어야 합니다.
3. 이해의 원리로 해야 합니다.
1절 하 반절부터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보다 예언하라고 강조합니다. 왜 방언은 아니고 예언입니까? 회중 예배에 있어서 방언은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은혜를 끼칠 수가 없지만, 예언은 우리말로 들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가 듣고 은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철저히 이해의 원리로 해야 합니다.
중세기의 교회는 라틴어만을 고집하였습니다. 성경도 라틴어 성경, 강론도 라틴어로 했습니다.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하면 잡아가두고 화형을 시켰습니다. 라틴어 쓰는 민족이라면 모르지만 다른 언어를 쓰는 나라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이것이 기독교의 쇠퇴의 원인입니다.
고전 14장 1절부터 오늘 읽은 말씀이 길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면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는 은사와 용어로 하라는 내용입니다. 예언만 인정하고 방언을 부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회중예배 시간에 관한 교훈입니다.
방언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역하는 자가 있을 때 해야 모두에게 은혜가 되겠지요. 그렇다고 예배시간에 방언은 해서는 안 되는가? 합심기도 시에 할 수도 있습니다. 유익이 되고 은혜가 되면 할 수 있습니다. 은혜가 안 되면 개인기도할 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외는 있습니다. 예수님도 귀먹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시면서 ‘에바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용어는 아람어입니다. 성경 기자가 “열리라는 뜻이라‘고 번역까지 한 것을 보아 유대인들이 잘 모르는 말입니다. 회중이 모르는 용어일지라도 기적을 행하면서 방언이 필요하다면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형식 만들어내지 말고 유익이 되고 필요할 때는 예외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와 같은 예배의 회복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유익의 원리, 은혜의 원리, 이해의 원리 안에서 한 마음으로 참여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