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진목사
흰옷 입은 성도가 되자 (계7:9-17)
공 상희
2010. 9. 10. 17:10
흰옷 입은 성도가 되자 (계7:9-17) (요약) 주님이 입혀주시는 흰옷은 칭의와 성화의 옷이다. 이 옷을 입은 성도에게 주시는 특권은 심히 크다. 칭의의 옷을 입으면 구원이요, 성화의 옷을 입으면 천국의 풍성한 잔치를 누린다. 흰옷은 예수 믿고 성령 받음으로 성령의 인침 받아 입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사 경건한 신앙을 소유하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심령을 죽이는 죄악의 세력에서 우리를 신원해 주시기를 날마다 부르짖고 기도해야 한다. 행실의 두루마기를 빠는 성도가 진정 복이 있다. (강해) 이 시간에는 “흰옷 입은 성도가 되자”라는 제목입니다. 오늘은 옷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인류 최초의 옷 패션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무화과 잎을 엮어 만들 옷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옷도 많고 그 패션이 심히 다양합니다. 요즘 의상전문가들이 여는 패션쇼를 보면 얼마나 옷이 다양하고 신기한 옷들이 많습니까? 또 고급 상가에 가면 옷 한 벌에 집 한 채 값도 되는 옷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옷 로비 사건에서 잘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아무리 아름답고 값진 옷이 있을지라도 우리 주님이 입혀 주시는 옷보다는 못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입혀주시는 그 옷이란 바로 천사와 같이 빛나는 흰옷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결혼식 때 흰옷을 입음과 같이 찬란한 흰옷을 입고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흰옷을 입은 자가 받는 특권은 심히 큽니다. 본문의 말씀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 보좌 앞의 가장 복된 자리에 있을 것이고, 가장 거룩한 자리인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길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장막을 치셔서 특별히 보호해 주시고,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뿐입니까? 계3:4-5에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22:14-15에는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흰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의 풍성한 잔치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멀리 볼 필요도 없이 예수 믿으면서도 아직도 마음의 찬국 잔치를 누리지 못한다면 아직 씻지 못해서입니다. 흰옷을 입으면 지상에 살면서도 큰 은혜 속에 살게 됩니다. 그럼 이 흰옷은 무엇이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의 옷은 물론이고 성령으로 변화 받은 성화의 옷입니다. 그래서 흰옷에도 겉옷과 속옷이 있어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내 죄를 대신 진 것을 믿어 양심에서 용서를 누리는 사람은 칭의의 겉옷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머물지 않고 성령으로 죄성까지 씻고 내 주관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 순복하는 사람은 성화의 속옷까지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이 두 가지 옷까지 다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될까요? 1.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흰옷을 입게 됩니다. 4절에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했습니다. 앞의 4절에 14만 4천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이 누구냐? 여러 학설이 있지만 대체로 본문의 흰옷 입은 사람과 동일한 사람으로 봅니다. 즉 동일한 사람의 두 가지 양태입니다. 전자는 성령의 인으로 성화를 이루시는 하나님 편에서 본 것이고, 후자는 환난의 연단 속에서 참 믿음을 받아 흰옷을 입고 보좌 앞에 이른 사람 편에서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를 잘 믿게 되고 자기 죄를 깨끗이 씻게 됩니다. 고전6:9-11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딛3:5에도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다”고 했습니다. 성령 안에서 새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는 모든 것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후5:17). 스데반 집사가 그렇게 예수님을 쏙 빼닮도록 거룩하고 훌륭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만큼 성령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님을 우리 인격에서 나타내 주시기 때문에 귀합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레가 1738년 5월24일 아침 루터의 로마서 주석을 읽고 있었습니다. 아홉시 십오 분 경에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때 죄를 다 사하시며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일생에 처음으로 경험한 뜨거움이었습니다. 이 경험으로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의 마음속의 모든 정욕과 죄악이 물러가면서 주님만을 모시는 기쁨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웨슬리는 이 기쁨을 참을 수 없어서 밖으로 나가 증거하였고 그가 나가서 간증할 때에 사람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극적으로 임하는 수도 있지만 우리의 신앙의 수위 따라 정비례하며 서서히 임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님의 공로가 그대로 이루어져서 죄와 온갖 저주에서 벗어나 천상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상 교회에서는 자나 깨나 성령의 충만이 강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흰옷을 입으려면 환경 속에서 열심히 신앙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여기 또 하나의 사실은 흰옷 입은 무리들이 큰 환난을 거쳤다는 점입니다. 여기 큰 환난은 한문으로 대 환난입니다. 이들은 대환난에서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대환란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는 물리적 환난이 아무리 커도 그것을 크다고 하지 않고 그것이 신앙과 관련될 때만 크다고 합니다. 즉 사람의 눈에 크든 적든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주어지는 모든 연단의 손길이 바로 크고 중한 것을 이루어 주시는 큰 환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 환난이란 각인을 온전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요 사랑입니다. 마치 금이 용광로를 통해서 정금으로 나오듯이 어느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환난에서 나오지 않으면 흰옷을 입지 못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참 자녀라면 이 과정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도 아니고 교회 안 다닌다고 피해지는 것도 아니고 저 하늘이나 끝 바다 끝으로 도망간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경건 되게 섬김으로 말미암아 성령 받아 흰옷을 입음으로 비로소 피해지는 것입니다. 벧후2:20에 분명히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다고 했습니다. 안다는 것은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성령 충만입니다. 이 때 성령께서는 우리 인격을 변화시키셔서 우리의 행실을 거룩하게 해 주는데 이것이 곧 주님이 입혀주시는 성화의 흰옷입니다. 그러나 이 성령 충만이 그냥 옵니까? 지상에서는 성령 충만을 위한 수고 없이는 와지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삶 속에서 철저히 신앙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5:3-4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했습니다. 그리고 약1:2-4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대 환난은 외형상 크든 적든 하나님 보시기에 크고 의미 있는 것이므로 자기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그 때 처음 열리는 봄 무화과와 같이 죄악 많은 세상에서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께 드려져 최고의 기쁨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열망을 품고 부르짖고 기도해야 합니다. 계6:9-11에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영혼이 죄 때문에 얼마나 늘 죽임을 당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제단 아래서 날마다 신원하여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눅 18장의 억울한 일 만난 과부의 이야기도 전후 문맥을 볼 때 바로 이런 관점의 비유입니다. 계 3장에도 도적 같이 오시리라 하시면서 흰옷을 강조하고 계심도 바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택한 자들의 원한을 가지고 밤낮으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오실 때 바로 이런 믿음을 보십니다. 그래서 행실의 두루마기를 깨끗이 빨아 거룩한 성의 예비된 풍성한 은혜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상의 옷도 중요하지만 주님이 입혀주시는 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칭의의 옷도 좋지만 성화의 옷까지 입으시기 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신앙훈련 잘 받고 원한 가지고 부르짖어서 성령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