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진목사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히13:7-8)
공 상희
2010. 9. 10. 17:09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히13:7-8) (요약)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변하나 변치 않으신 분은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이 불변의 예수님이 참 신앙의 본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큰 것은 우리 성도들 역시 변하지 않는 신앙이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즉 비천할 때나 존귀할 때나 신앙이 변치 않아야 한다(빌4:11-13). 환난의 때나 영화로운 때나 신앙이 변치 않아야 한다(욥1:20-22). 가난할 때와 부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잠30:8-9). 그리고 병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에도 신앙이 변치 않아야 한다(눅17:11-19). (설교)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젊음도 변하고, 인심도 변하고, 권세도 변합니다. 심지어 강산도 변합니다. 그래서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십년이 아니고도 몇 년만 지나면 길을 찾지 못할만큼 급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처럼 변화무상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러나 영원히 변치 않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도 변치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의 신앙입니다. 본문 7절에도 일군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고 참 일군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불변성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우리들도 그렇게 변치 않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불변의 속성과도 같이 변하지 않고 예수님을 본 받아 섬기는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꼭 본받아야 할 성품은 영원토록 변치 않는 불변의 성품입니다. 성경에 보면 불변한 사람에 주시는 복이 큽니다. 계2:10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약1:12에도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사26:3에도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데 변하지 않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영생의 복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변하지 않아야 하겠습니까? 1. 비천할 때와 존귀할 때의 신앙이 동일해야 합니다. 빌4:11-13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했습니다. 사람이 비천할 때는 자기 자신의 초라함을 알기에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형편과 상황이 바뀌어 존귀한 위치에 놓이게 되면 거만해지기 쉬운 것이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도 처음에는 성실하고 겸손했습니다. 그 모습을 귀하게 보신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안타깝게도 왕이 된 후 그만 사람이 변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교만과 독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서 하나님의 은총은 떠나고 악신이 그를 괴롭히며 왕위마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경외했고 그 겸손이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양을 칠 때나 전쟁에서 공을 세워 명장이 되었을 때나 왕이 되어 강력한 나라를 이룬 후에도 그 신앙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주위의 권면에 귀를 기울이는 겸손함을 일평생 유지하며 살아갔습니다. 시86:11을 보면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했습니다. 이 얼마나 겸손한 기도입니까? 이러한 다윗의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더 없이 만족해하시면서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2)하셨습니다. 이렇게 불변의 삶을 살았던 다윗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비천에 처하든 풍부에 처하든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환난 때와 영화로운 때의 신앙이 동일해야 합니다. 욥1:20-22에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하였습니다. 욥은 7남 3여를 두고 많은 재산을 가진 당대의 최대 거부였습니다. 그러한 거부였지만 욥은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욥1:1을 보면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했습니다. 이러한 욥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강풍이 몰아쳐 집이 무너져 사랑하는 열 자녀를 모두를 잃고 설상가상으로 그 많던 재산도 외적들에 의해 다 빼앗기는 시험이 닥쳐왔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욥의 몸은 심한 악창으로 썩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욥의 신앙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2)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얼마나 보기 흉했으면 그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변함없는 욥에게 갑절의 복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또 창세기에 요셉도 열일곱 살 어린 나이에 이복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아 먼 타국 이집트 노예로 팔려가 온갖 서러움과 고초를 다 겪었습니다. 그는 노예로 일함도 모자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요셉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시험의 때가 끝나고 바로왕의 인정을 받아 애굽의 총리가 되는 영광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온 나라가 그에게 복종하며 그를 우러러 보았습니다. 영광이 극에 달했습니다.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마저 그를 존중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요셉의 신앙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영화로울 때나 환난의 때나 변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3. 가난할 때와 부할 때의 신앙도 동일해야 합니다. 잠30:8-9에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 기도는 야게의 아들 아굴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잘못 섬기는 일이 없길 사모하는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물질과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맞아요. 사람의 됨됨이 혹은 신앙의 참됨을 알려면 물질 주어보면 알아요. 아무리 신앙 좋다고 큰 소리쳐도 물질생활 바로 못한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물질 까닭에 양심도, 도덕도, 체면도, 은혜도, 믿음도 헌 신짝처럼 내버립니까?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가 아닙니까? 그토록 주님의 인격과 말씀과 능력을 수없이 경험하고도 돈 때문에 스승을 팔았습니다. 그 잘난 돈 때문입니다. 제발 돈에 메이지 말고 물질 맡은 청지기 사명 잘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수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병들었을 때와 건강할 때의 신앙이 동일해야 합니다. 눅17:11-19에 열 문둥병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나가시는 예수님 앞에 문둥병자 열명이 나아와 긍휼히 여겨달라고 외쳤습니다. 불쌍히 보신 예수님께서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고침을 받은 후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사례한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아홉은 어디 있느냐”하시며 서운해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얄팍한 인간의 단면을 보게 됩니다. 건강해 지니 사람의 마음이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필요할 때만 찾는 하나님이어서는 안 됩니다. 혹은 어떤 사람은 건강할 때에는 하나님을 섬기고 병들면 하나님을 저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늙어져 갈수록 하나님을 더 붙들어야 할 텐데 어렵다고 하나님을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의 육신의 사정이 지금보다 날마다 더 못해 갈텐데 주님을 더 붙들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믿음은 건강보다 생명보다 더 소중합니다. 우리는 잠시 잠깐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져버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이탈리아 밀라노 대성당에 들어가는 문은 세 겹으로 되어 있습니다. 각 문은 아름다운 아치형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첫째 문 위에는 아름다운 장미의 화환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즐겁게 해주는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다음 문 위에는 십자가가 조각되어 있고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을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는 글이 역시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중앙 예배실로 통하는 큰 입구에는 “영원한 것만이 중요하다”라는 글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상의 상황보다 영원한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후4:16-18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신부들입니다. 결혼식 때 신랑과 신부가 검은 머리 팟뿌리가 되도록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서로 변치 않고 사랑하겠다고 서약함과 같이 우리도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귀와 영화, 부귀와 건강은 장미꽃처럼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괴로움을 주는 비천함과 환난, 가난함과 질병의 십자가 또한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은 영원한 곳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그리스도를 본받아 변함없는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